명량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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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전투 목록

영등포 해전
(1594년 10월 1일)

명량 해전
(1597년 9월 16일)

절이도 해전
(1598년 7월 19일)

명량해전
鳴梁海戰

시기

선조 30년 정유년 9월 16일[1]
그레고리력 1597년 10월 26일

장소

조선 전라도 해남진도 사이 명량 수도
(세칭 울돌목)

원인

일본의 수륙병진에 대한 충무공의 결사 항전

교전국

조선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25px-Flag_of_the_King_of_Joseon_%28Fringeless%29.svg.png

일본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20px-Goshichi_no_kiri_inverted.svg.png

지휘관

이순신
김응함
조계종
우수
안위
정응두
김억추
배흥립
민정붕
소계남
송여종
나대용

도도 다카토라
구루시마 미치후사
와키자카 야스하루
하타 노부토키†
간 마사카게
모리 다카마사
이하 미상

병력

800명 ~ 900 명[2]
판옥선 12척 ~ 13 척[3]
초탐선(협선) 32 척
징발 어선 100여 척

병력 규모 불명
전선 133척 ~ 333척

피해

사망자 2 명
부상자 3 명
그 외 불명[4]

전선 31척 침몰
공격군 궤멸[5]

결과

조선 수군의 대승

영향

조선 수군의 제해권 탈환[6]


1. 개요2. 배경
2.1.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사옵니다2.2.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3. 전개
3.1. 전투의 시작3.2. 군법에 죽고 싶으냐3.3. 기적 같은 승리
4. 전과
4.1. 조선 수군 규모4.2. 일본 수군 규모
5. 결과
5.1. 조선 수군의 후퇴5.2. 반전된 전황
6. 분석
6.1. 군율과 신뢰의 리더십6.2. 함선, 화기, 지리의 압도적 상승효과6.3. 피해를 받지 않는 일방적인 상황6.4. 일본군의 호승심과 촉박한 시간6.5. 울돌목의 좁은 지형과 물살
7. 널리 알려진 가설들
7.1. 명량 철쇄설7.2. 거북선의 등장?
8. 결론9. 미디어 창작물
9.1. 1900년대9.2. 2000년대
10. 기타11. 관련 단체

1. 개요[편집]

必生則死 必死則生 필생즉사 필사즉생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


─ 이순신, 『정유일기』 9월 15일


임진년부터 5년, 6년 간 적이 감히 호서호남으로 직공하지 못한 것은 수군이 그 길을 누르고 있어서입니다. 지금 신에게 아직 전선 열두 척이 있사오니(尙有十二 상유십이) 죽을 힘을 내어 막아 싸우면 이길 수 있습니다. 지금 만약 수군을 모두 폐한다면 이는 적들이 다행으로 여기는 바로서, 말미암아 호서를 거쳐 한강에 다다를 것이니 소신이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전선이 비록 적으나, 미천한 신이 아직 죽지 않았으니(微臣不死 미신불사) 적들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 『이충무공전서』, 이분, 「행록」

세계 전쟁사에 다시 없을 희대의 대역전극.
이긴 쪽에서도 왜 이겼는지 이해가 안 가는 전투[7]

짧게 요약하면, 세계 해전 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가장 극적인 반전 드라마. 너무나도 기적과 같은 승리였기에, 역사가들이 '정면에서 박살냈다'고 말하는데도 대중들이 이를 믿지 못하고 왜곡된 가설들을 믿고 있는 전투이기도 하다.[8][9] 일본군은 이 전투에서 패배하여 정유재란 내내 한양을 점령하고 삼남을 정벌하겠다는 기존 전략이 아예 어긋나게 되었다.

막대한 패전 이후 남은 배는 단 12척, 방어군이 극도로 열세였다는 점에서 테르모필레 전투와 비슷하지만, 테르모필레 전투는 프로파간다로 써먹기에나 적절했지 방어에 실패하고 결사대는 전멸한.[10] 그리고 전황에 끼친 실질적인 영향은 미미한 양측의 병력과 피해를 보면 그저 평범하게 실패한 방어전에 불과하다. 반면 명량 해전은 배를 한 척도 희생시키지 않고 적군을 막아냈으며, 결과적으로 전쟁의 흐름 자체를 뒤집었다는 점에서 전략적인 의의가 높다.[11]

생각보다 잘못 쓰는 사람이 많은데, 명량(梁) 해전이 올바른 표기다. 명랑(朗) 해전이 아니다. 애초에 앞의 '명'자도 '밝을 명'(明)이 아니라 '울다 명'(鳴)이다. 이는 엄연히 잘못된 명칭이므로 잘 알아두자. 명량의 순 우리말이 널리 알려진 울돌목인데, 명량은 우리말 지명의 뜻을 한문으로 옮겨 적은 것에 불과하다. 울 명자에 들보 량자를 썼다. 梁은 제방 등 좁은 수로를 표현하는 데에도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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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 해전도[12][13]

2. 배경[편집]

2.1.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사옵니다[편집]

18일 정미, 맑다.
새벽에 이덕필과 변홍달이 와서 전하길 "16일 새벽에 수군이 대패했습니다. 통제사 원균과 전라 우수사 이억기와 충청 수사 최호와 뭇 장수들이 다수 살해당했습니다."라고 하였다. 통곡을 이기지 못했다. 잠시 있으니 도원수가 와서 이르길 "사태가 이에 다다랐으니, 어찌할 수가 없소이다."라 하였는데, 대화가 사시(巳時)에 이르러도 대책을 정할 수가 없었다. 내가 아뢰어 내가 해안으로 가서 보고 듣고서 정하겠다고 하니 도원수가 기뻐하였다. 내가 송대립, 유황, 윤선각, 방응원, 현응진, 임영립, 이원룡, 이희남, 홍우공과 함께 길을 떠나 삼가현에 다다르니, 수령이 새로 부임하여 나아와 기다렸다. 한치겸도 왔다.
─ 이순신, 『정유일기』 7월 18일.


칠천량에서의 처참한 대패로 조선 수군은 궤멸되었다. 이 참담한 소식을 접한 선조는 어쩔 수 없이 도원수 권율의 휘하에서 백의종군하고 있던 이순신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시켰지만,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정작 돌아온 이순신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휘하에 전함 한 척 없는 이름만 제독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순신은 절망하거나 좌절해 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삼도 수군 통제사로 임명한다는 교서가 내려오기도 전에 행동을 개시했다. 수군이 궤멸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그날로 이순신은 백의종군하며 머무르고 있던 초계를 박차고 나와 각지를 돌아다니며 흩어진 장병들을 모으고 군량과 무기들을 입수했다. 다행히 칠천량 해전 이후 곧바로 밀려들 것만 같았던 일본 수군이 남해안 장악 등에 신경쓰다가 8월에는 해상 작전에서 철수한 덕분에 시간도 어느 정도 생긴 상황이었다. 그야말로 하늘이 도운 셈이었으니, 이때 이순신의 행적은 난중일기를 통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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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8일
칠천량 전투의 소식을 듣다. 도원수 권율과 대책을 의논하고 초계를 출발하여 삼가에 도착.

7월 19일
단성에서 숙박.

7월 20일
진주 굴동에서 이희만의 집에 숙박.

7월 21일
곤양을 지나 노량에 도착, 거제 현령 안위 등 패잔병을 수습. 거제현 소속 배 위에서 숙박.

7월 22일
경상 수사 배설이 합류. 곤양에서 숙박.

7월 23일
진주 굴동으로 돌아와 이희만의 집에 숙박. 배흥립이 합류.

7월 24일
이홍훈의 집에 숙박. 배경남이 합류.

7월 27일
손경례의 집에 숙박.

이후로도 한동안 진주 굴동에 머무르고 있던 이순신은 8월 3일 아침에 비로소 자신을 전라 좌수사 겸 삼도 수군 통제사로 임명한다는 선조의 교서를 받든다. 조정에서 22일에야 칠천량 패전의 소식을 접하고 내린 교서가 비로소 도착한 것이었다. 선조 실록에는 단지 이순신을 전라 좌도 수군 절도사 겸 경상·전라·충청 삼도 통제사로, 권준을 충청도 수군 절도사로 삼았다는 짤막한 기록만이 남아 있을 뿐이지만, 이충무공전서에 실린 삼도 통제사 복직 교서의 내용은 이러하다.

왕은 이른다. 오호라! 국가가 의지하여 방패로 삼는 것은 오직 수군이거늘, 하늘이 재앙을 거두지 않으사 흉악한 칼날이 다시 번뜩여 마침내 삼도의 대군이 한 번 싸움에서 다하고 말았도다. 이후로 바다 가까운 성읍은 누가 지키겠는가? 이미 한산을 잃었으니 적이 무엇을 꺼리겠는가? …… 지난번에 경의 직책을 빼앗고 그대로 하여금 죄를 짊어지도록 한 것은 역시 과인의 모책이 미덥지 못함에서 나온 것이었으니, 무슨 말을 하리오. 무슨 말을 하리오(尙何言哉 尙何言哉 상하언재 상하언재)...... 그대는 충의로운 마음을 굳건히 하여 우리의 나라 건지길 바라는 소망에 부합하라. 고로 이 교지를 내리니 그대는 헤아려 알라.
─ 『이충무공전서』, 「상중에 다시 삼도 수군 통제사를 제수하는 교서(起復授三道統制使敎書)」(전체 원문과 번역 링크)


조선처럼 강력한 중앙 집권이 실현된 국가에서 왕이 신하한테 이런 표현을 사용함 자체가 파격적이다. "내가 모자라 네 관직을 빼앗고 너에게 벌을 줬다. 미안함에 할 말이 없다." 라고 한 것이다.잘 아네 조선 역사를 통틀어 임금이 신하에게 이렇게 자신의 잘못을 용서해달라 한 사례는 없다.[14] 선조와 이순신 모두 그만큼 사직의 존망이 위태롭다는 것을 알았기에, '수군 없는 수군 절도사 겸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복직은 일사천리로 이뤄졌다.[15]

8월 3일
새벽에 복직 교서가 도착. 권관 등 10여 명을 거느리고 진주 굴동에서 이홍훈의 집을 출발하여 종일 움직인 끝에 구례에 도착.

8월 4일
곡성에서 숙박.

8월 5일
옥과에 도착.

8월 6일
옥과에서 숙박. 송대립 등이 일본군을 정탐.

8월 7일
순천으로 가던 중 패잔병으로부터 말 3필과 약간의 활과 화살을 탈취(!). 곡성 강정에서 숙박.

8월 8일
순천에 들어가 달아나려는 수령들을 잡고 방치된 군기를 처리. 순천에서 숙박.

8월 9일
낙안을 거쳐 보성 조양창에 도착, 이 과정에서 순천 부사 우치적이 합류. 김안도의 집에 숙박.

8월 11일
임란 초부터 보좌해왔던 송희립이 최대성과 함께 합류.

8월 13일
패전 직후 가족을 데리고 달아났던 경상우후 이몽구가 합류, 본영의 군기를 가지고 오지 않았으므로 곤장을 침.

8월 14일
장계 일곱 통을 송부. 보성에 도착, 열선루에서 숙박.

8월 15일
교지가 도착. 보성의 군기를 처리.

8월 16일
보성 군수와 군관 등을 보내 피난했던 관리들을 데려옴, 궁장인 지이와 태귀상 등이 들어왔고 김희방과 김붕만 등도 합류.

8월 18일
회령포에서 배설이 끌고 도망쳤던 전선 10척을 입수하여 그나마 수군의 구색을 갖춤.

그러나 여기에서 그나마 구색을 갖추었다는 표현은 과장이 아니다. 선조 실록에 이때의 군함 수가 나오는데...

근래 또 배신(陪臣) 겸 삼도 수군 통제사 이순신이 보낸 장계에 의하면, "한산도가 무너진 이후 전선과 무기가 흩어지고 사라져 거의 다하였습니다. 신은 전라 우도 수군 절도사 김억추 등과 더불어 전선 13척, 초탐선 32척을 수습하여 해남현의 바닷길에서 요충지를 지키고 있었는데……"
─ 『선조 실록』 권94, 30년 11월 정유(10일) 5번째 기사


현재로 따지면 모두 합쳐도 호위함 13척에 고속정 32척이 전부였고, 이는 명량 해전 당시에 동원했던 전선만 최소 133척에 이르던 일본군과 비교하면 대단히 적은 숫자였다. 이순신이 거느린 수군이나 조정 내에서 당장이라도 수백 척의 배가 들이닥칠 거라는 공포가 만연해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당시의 조선 수군은 싸움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조정 일각에서는 '배도 없는데 수군을 없애고 육군으로 합치자'라는 의견이 나왔다. 선조 또한 이순신을 육전으로 돌리려고 했다. 이러한 언급은 선조 실록과 난중일기가 아닌 행록에만 등장하지만, 이토록 전력비가 기울어져 있으니 전략을 수정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물론 이건 사실상 국가를 버리는 엄청나게 멍청한 짓이었다. 조선은 육상 도로망이 발달하지 않아서 강을 길로 삼아서 물자와 인원을 유통시켰고, 실제로도 행주 대첩에서 적절한 순간에 한강을 통한 보급이 들어와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당연히 육상전은 일본군이 바라는 일이었다. 만약에 이순신이 육전에 임했다면 일본 수군을 이끌던 도도 다카도라, 가메이 고레노리, 구루시마 미치후사, 구키 요시다가,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의 적장들이 배를 타고 한양으로 진격하여 선조를 잡고, 전쟁의 판도를 뒤엎을 수도 있었다.

심지어 수군 폐지령은 13척의 배를 보존하고 육군의 전력이라도 향상시키려는 의도조차 아니었다. 병력이란 적절한 지휘 체제가 있어야 의미를 가지는 법인데, 선조의 대변인 노릇을 했던 윤두수는 칠천량 해전 직후에 있던 어전 회의에서, "통제사를 임명하지 말고 각지의 수사들이 고을 단위로 방어하게 하자!"는 정신나간 주장을 했다. 이것은 까놓고 말해서 이순신을 다시 삼도 수군 통제사로 재수임하기 싫으니, 단일 지휘관을 임관 시키기를 포기하고 병력을 분산시켜서 왜군에게 차례차례 각개격파 당하자는 개소리나 다름없었다.

다만 이것을 단순히 윤두수가 이순신의 통제사 재임용을 반대해서 이러한 주장을 폈다고만 보기는 어렵다. 정확한 이유는 불명이지만 임진왜란에서 이후 병자호란에 이르는 기간 동안, 조선군이 병력을 이리 저리 분산 배치하는 것은 만성적인 경향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의외로 많은 경우에 찾아볼 수 있는, 위험할수록 군인들의 일탈을 경계하는 현상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야 당장 이순신 장군의 엄청난 충성심과 임진왜란의 결과를 알고 있기 때문에 한심하다고 까지만, 왕조 교체어떨 때, 어떤 사람들 중심으로 일어났는지 생각해보자. 당장 조선부터 임진왜란 이후 몇십 년도 안지나서 이괄김자점 때문에 큰 위기를 겪었고, 그 후유증이 병자호란의 졸전에 직접적인 이유가 되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의심 자체는 타당한 것이다. 그 의심이 도를 지나친 게 문제였지. 거기에 문제 원인이 저 인간이란 점에서 더더욱 까이고 말이다. 이일 문제라면 수뇌부 전체가 욕 먹는 쪽이라면 원균 비호에 가장 가까이 있던 터에 이런 말까지 하여 대표적인 비난 사례이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도 다시 반론을 제시할 수 있다. 위 문단은 '선조가 이순신을 삼도 수군 통제사로 임명하지 않은 이유는 쿠데타가 가능한 세력의 성장을 조기에 차단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다'라는 것을 지적한다. 이것은 선조의 의중에 대한 올바른 해석일 수 있고 위 주석의 긍정적인 기능이다. 그러나 이런 독해는 여전히 선조의 견해와 판단이 지나친 단견이라는 점을 간과하게 만든다.
현 시점에서 선조의 정치적 목표는 두 가지이다. 첫째, 일본군을 몰아낼 것. 둘째, 역성 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을 차단할 것.

이를 결과론적으로 보면 이순신을 삼도 수군 통제사에 임명하기를 주저하는 것은 역성 혁명의 가능성 때문에 일본군에게 한반도를 넘겨줄지 말지 고민하는 것이다. 작전상의 문제를 논할 필요가 있으나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의 입장미드웨이 해전의 결과만 참고하기로 하고 역사적인 사례를 보자.
들은 코 앞에 있는 적을 격퇴하는 것을 제1의 목표로 삼았고, 적을 격퇴한 후에야 토사구팽 작업을 실시한 사례는 무수히 많다. 한 마디로, 이순신 등 전쟁 영웅들의 숙청은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해야 하는 일이다. 대표적인 예로 한고제도 선조처럼 한신이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초한 대전의 마지막이었던 해하 전투가 끝나고 최종 승자가 된 후 한신을 제거했다.[16] 이 정도 생각도 못하고 일본군 칼에 죽는 카드를 만지작거린 선조의 기가 막히는 어리석음은 정말이지 가관이다. 이거에 비유 할만한 상황은 제갈량이 북벌 중인데, 제갈량이 모반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결정적인 순간에 제갈량을 회군 시킨 촉한 후주 유선에 비견해야 할 정도의 멍청함이다.[17][18] 하지만 또 다른 것은 전쟁 영웅으로 유명해진 이순신을 전쟁이 끝나고 나서 정리해버리는 것도 굉장히 위험하다. 비슷하게 위에 글처럼 해하 전투 직후에 한고제가 당시 초왕이던 한신을 반란 혐의만으로 잡아들인 뒤에 군사력을 대동할수 있는 초왕 자리에서 내쫏고 회음후에 봉한 것도 비슷하게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려고 하는 것 일수도 있다. 물론 선조 본인만 알 이야기겠지만

自壬辰至于 五六年間 賊不敢直突於兩湖者 以舟師之拒其路也 今臣戰船 尙有十二 出死力拒戰則猶可爲也 今若全廢舟師 是賊所以爲幸而由 湖右達於漢水 此臣之所恐也 戰船雖寡 微臣不死 則不敢侮我矣


임진년부터 5·6년 간 적이 감히 호서호남으로 직공하지 못한 것은 수군이 그 길을 누르고 있어서입니다. 지금 신에게 아직 열두 척의 전선이 있사오니 죽을 힘을 내어 막아 싸우면 이길 수 있습니다. 지금 만약 수군을 모두 폐한다면 이는 적들이 다행으로 여기는 바로서, 말미암아 호서를 거쳐 한강에 다다를 것이니 소신이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전선이 비록 적으나, 미천한 신이 아직 죽지 않았으니, 적들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 『이충무공전서』, 이분, 「행록」


어쨌든 조정 일각의 이러한 여론의 동요를, 이순신은 위와 같이 아직 열두 척의 전선이 있다는 패기가 흘러넘치는 명언으로 장계를 올리며 잠재웠다. 이순신은 힘들더라도 제해권을 되찾아야만 반격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순신의 이런 뚝심은 정유재란의 흐름을 바꾸게 되었다.

2.2.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편집]

사흘 동안 회령포에 머무르면서 가까스로 수군과 전선을 수습한 이순신은 8월 20일에 그보다 조금 더 큰 이진포로 진을 옮겼다. 하지만 여전히 수군의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칠천량에서 겪은 패배로 장졸[19]들의 사기는 바닥을 치고, 일본군의 대함대가 임박했다는 공포가 군사들을 짓누르고 있었다. 이순신의 묘사에 따르면, 경상 우수사 배설이 교서에 절하길 거부하는 등 공공연히 조정과 전쟁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고 있었으며[20], 전라 우수사 김억추는 사람됨이 미덥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이순신도 21일부터 토사곽란으로 사흘 내내 몸져누워 있었다.[21] 그런 와중에도 다음날에는 어란진으로 이동했고, 이곳에서 적이 왔다는 헛소문을 퍼트린 이들을 처형해서 군율이 건재함을 보여주었다.

27일 을유, 맑다.
배설이 와서 만났는데, 많이 두려워하는 기색이었다. 나는 "수사는 어찌 피하려고만 하시오!"라고 하였다.
─ 이순신, 『정유일기』 8월 27일.


이처럼 터질 듯한 긴장감이 가득한 가운데 8월 28일, 드디어 일본군이 나타났다.

28일 병술, 맑다.
적선 8척이 생각지도 못하게 들어왔다. 뭇 배들이 두려워 겁을 먹고, 경상 수사는 피하여 물러나고자 하였다. 나는 동요하지 않고 호각을 불고 깃발을 휘두르며 몰아내도록 명하였다. 적선이 퇴각하자 추격하여 갈두(葛頭)에 이르렀다가 돌아왔다. 저녁에 진을 장도(獐島)로 옮겼다.
─ 이순신, 『정유일기』 8월 28일.


28일에 어란진에 나타난 일본군은 고작 8척의 수색대였지만 이미 겁을 잔뜩 집어먹은 조선 수군은 무기력한 모습만을 보여준다. 수색대를 물리친후 [22] 이순신은 29일에 다시 벽파진으로 이동하여 진을 치고 결전을 준비했다. 그러나 9월 2일에는 마침내 고위 지휘관인 경상 우수사 배설이 도주해버리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순신은 이전부터 그를 탐탁치 않게 보았으므로 단지 '배설이 달아났다'고만 담담하게 적었다.[23] 이렇게 이순신이 싸울 준비를 하는 동안, 일본 수군은 전라도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서해를 거쳐 한양을 공격하자는 구상을 하게 된다. 그들은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을 궤멸시킨 자신감으로, 이번 기회에 이순신을 무찌르고 전쟁의 승기를 잡자는 생각이었다. 사실 객관적으로 봐도 12척으로 300여 척 이상을 갖춘 함대를 막아낸다는 것은, 항우가 살아 돌아와도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24] 당사자인 조선 수군, 조선 조정, 일본 수군조차도 같은 생각이었다.

일본 수군은 9월이 되자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고, 9월 7일에 어란진으로 들어와서 벽파진의 이순신과 대치하는 구도를 만들었다. 난중일기에 따르면, 일본군 수뇌부는 이미 이순신에게 배가 13척밖에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고, 이를 조롱하듯 처음 13척의 배만을 보내서 벽파진에 주둔한 조선 수군에게 시비를 걸기도 했다(...). 칠천량 해전 이전까지 조선 수군의 판옥선이 한 번도 격침된 적이 없지만 수전에서 이토록 일본군이 유리한 상황에서 전투를 시작한 것이 거의 최초임을 감안하면 일본군은 한 척의 대장선을 상대로는 이 정도면 충분할 것이라 낙관한 것으로 보인다.[25] 참고로 배설이 도주한 이후의 난중일기 기록을 보면...

9월 3일 신묘, 비오다.

9월 4일 임진, 북풍이 세게 불다.

9월 5일 계사, 북풍이 세게 불다.

9월 6일 갑오, 바람은 잠시 잠잠하나 파도가 가라앉지 않다.

9월 7일 을미, 바람이 비로소 그쳤다.
탐망 군관 임준영이 적선 55척 가운데 13척이 이미 어란진에 들어왔다고 보고. 미리 경계하고 있다가 신시(申時)에 적선 13척이 접근하자 구축, 이후로도 야습을 경계하다가 이경(二更)에 적선이 야습하자 뭇 배들이 겁을 집어먹고 있는 것 같아 다시 엄명을 내리고 대장선이 직접 선두에 나서서 적선을 구축.

9월 8일 병신, 맑다.
적선이 오지 않다. 장수들과 함께 계책을 논의.

9월 9일 정유, 맑다.
적선 두 척이 아군을 정탐. 영등포 만호 조계종이 추격하나 놓침.

9월 10일 무술, 맑다.
적선들이 멀리 달아남.

9월 11일 기해, 흐리고 비오다.

9월 12일 경자, 비가 내리다.

9월 13일 신축, 맑다. 북풍이 세게 불다.

맑은 날엔 계속해서 일본 수군이 시비를 걸고 있었다. 이어지는 14일에는 임준영의 보고가 들어왔는데, 일본군 200여 척 가운데 55척이 어란진에 입항했고, 일본군에게서 탈출한 포로가 전한 바에 따르면 일본군은 단숨에 이순신 함대를 격멸시킨 다음 서해를 따라 한강을 타고 올라가려는 대담한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다. 만약 이게 실현되었다면 정유재란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다음날인 9월 15일, 전투가 임박했음을 안 이순신은 전투 준비를 서둘렀다. 오익창의 사호집에 의하면 이순신은 사대부들의 솜이불 백여 채를 걷어다가 물에 담가 적신 뒤 12척 배에 걸었는데, 왜군의 조총 탄환이 이것을 뚫지 못했다고 한다. 또한 장기전을 예상해서인지 동아 (박과 비슷한 식물)를 배에 가득 싣고 군사들이 목마를 때마다 먹였더니 갈증이 해소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렇게 조선 수군은 오랫동안 상대의 화력을 견디며 싸울 준비를 했고, 적은 수의 함선으로 울돌목을 등지고 싸울 수는 없다고 판단한 이순신은 진영을 울돌목 너머 해남의 전라 우수영으로 옮긴 뒤 장수들을 불러 모아 다음과 같이 다짐했다.

병법에 이르기를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고 했으며, 또한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一夫當逕 足懼千夫)고 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그대들 뭇 장수들은 살려는 마음을 가지지 말라. 조금이라도 군령을 어긴다면 즉각 군법으로 다스리리라!
─ 이순신, 『정유일기』 9월 15일[26]


이날 밤에는 이순신의 꿈에 신인이 나타나 이기는 방법과 지는 길을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KBS에서 방송했던 한국사전에서는 밤에 이상한 징조도 많았다고 언급했다. 정말로 판타지 같은 일이 일어났다기보다는, 이순신도 꿈속에서까지 승리를 바랄 정도로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는 상황으로 볼 수 있겠다.

3. 전개[편집]

파일:Myeongnyang_battle_map.jpg
명량 해전의 전개도.

3.1. 전투의 시작[편집]

운명의 음력 9월 16일[27] 아침, 날씨는 맑았다. 이윽고 초병으로부터 수없이 많은 왜선들이 접근해 온다는 보고가 들어오고, 이에 이순신은 대장선 포함 13척의 함선을 이끌고 울돌목으로 나섰다. 이순신이 탄 배에서는 일기 기록에서 "전투원인 병사들이 왜군 규모를 봐서 그것에 겁을 먹어서 얼굴빛이 많이 질렸다고 하였고 나는 그들에게 조심스레 부드럽게 타일렀다."고 하였다.

9월 16일, 맑다.
이른 아침에 별망(別望)이 나아와 보고하길, "수없이 많은 적선들이 곧장 우리 배를 향해 옵니다."라 하였다. 바로 뭇 전선에 명하여 닻을 들고 바다로 나아가니, 적선 130여 척이 아군의 뭇 전선을 에워쌌다.
─ 이순신, 『정유일기』 9월 16일

울돌목 앞바다에서 참으로 보잘것없는 조선 수군의 잔존 전력과 조우한 왜군 함대는 곧장 절대적 숫적우위를 자신하듯이 포위진을 짜고 돌격해들어오기 시작했고, 그러자 조선 군선들 중 이순신의 기함이 홀로 전속력으로 적을 향해 전진하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천천히 후퇴하면서 거리를 확보하며 공격하거나 물길이 좁아지는 곳으로 가서 현 위치를 사수하며 공격한게 아니라 전속력으로 돌격하며 포탄과 화살을 날린 것이다. 명량 해전은 이렇게 누가봐도 완전히 미친 짓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기세 등등한 왜선 백여척에 대한 판옥선 1척의 개돌로 시작되었다.

3.2. 군법에 죽고 싶으냐[편집]

모든 것이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지만, 이순신이 탄 대장선은 일단 앞으로 전진하며 접근해오는 왜선들을 족족 격퇴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누가 보더라도 중과부적인 상황이었다. 심지어 명량 해협이 한눈에 보이는 망금산에서는 백성들이 대장선이 포위망을 좁히며 몰려오는 왜선들을 홀로 상대하는 모습을 보고 통곡을 할 정도였다. 그런 와중에도 적선의 숫자와 해협의 거센 역방향 물살에 압도당한 부하 장수들은 여차하면 도망갈 생각을 품은 채로 후방에서 밍기적대고 있었으며, 정신없이 전투를 치르던 이순신은 문득 자신의 부하들을 돌아보고 개탄을 금치 못했다.

뭇 장선(將船)들을 돌아보니, 물러나 먼 바다에서 관망하며 나아가지 않고 배를 돌리려 하고 있었다.
─ 이순신, 『정유일기』 9월 16일


전라 우수사 김억추는 수 마장 뒤로 물러나서 아예 전투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었으며,[28][29] 거제 현령 안위, 녹도 만호 송여종, 조방장 배흥립, 해남 현감 류형, 가리포 첨사 이응표 등의 장수들까지 후방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맞붙어 봐야 전멸이 뻔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심지어 조류마저도 왜군에게 유리하게 흐르고 있었는데, 이민서가 쓴 명량대첩비문에서는 "... 명량은 육지 사이가 좁은데다가 때마침 밀물이 세차게 몰려와 파도가 매우 급했다. 적은 상류로부터 조수를 타고 몰려 내려오는데 그 세력이 마치 산이 내려누르는 듯하였다. ..."[30] 라고 서술하는데, 이순신이 묘사한 역류는 과학적으로도 증명되었다. 링크 다시 말해 충무공은 그의 대장선 홀로 울돌목의 거센 물살에 정면으로 뚫고 전진하면서, 압도적인 숫자의 적선들을 일방적으로 물리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이순신은 호각을 불며 초요기[31]를 걸어 중군장과 여러 전선들을 소집했다. 물론 평소라면 군령에 불복한 제장들의 목을 바로 베어버렸겠지만, 이 전투에서는 이야기가 달랐다. 애초에 이순신이 아니면 누가 봐도 개죽음이 분명했기에 무조건 비난할 수가 없었던데다[32] 도망간 아군 배를 잡으러 간다면 적선이 더 전진함을 우려했다.[33] 결국 초요기를 올려 부하들을 부르자, 그제야 장수들이 슬금슬금 하나둘씩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중에 거제 현령 안위가 탄 배가 대장선 근처에 가장 먼저 도착했고, 이순신은 그를 향해 외쳤다.

安衛、欲死軍法乎?汝欲死軍法乎?逃生何所耶?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달아난다고 살 수 있을 것 같으냐![34]
─ 이순신, 『정유일기』 9월 16일


이에 안위가 황급히 전장에 뛰어들었고, 이순신은 뒤이어 도착한 중군장 김응함에게도 비슷하게 아래와 같이 호통을 쳤다. 특히 김응함은 중군장으로서 대장선의 호위와 지휘 명령을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해야 했으나, 그마저도 방기하고 후방에 물러나 있던 상황이었다. 심지어 특별한 함대 편제상 직책이 없는 것으로 보이는 안위보다도 늦게 대장선과 합류했으므로, 그에 대한 이순신의 분노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35][36]

汝爲中軍而遠避不救大將、罪安可逃!欲爲行刑、則賊勢又急姑令立功。


너는 중군이 되어서 멀리 피하고만 있고 대장을 구하지 않았으니, 죄를 어찌 면하겠느냐! 당장이라도 처형하고 싶지만 적의 기세가 또한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하겠다!
─ 이순신, 『정유일기』 9월 16일


안위와 김응함이 전장에 뛰어들고, 밀물이 차츰 잦아들기 시작하자 명량 해전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이순신이 지휘하는 대장선조선판 우주방어의 위세에 기가 질려있던 왜수군은, 좀 더 상식적인 적을 상대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다른 판옥선들이 전투에 끼어들자 옳다꾸나 하고 그쪽으로 돌격해들어가기 시작했다. 안위는 비록 용맹하기는 했지만 이순신만큼 함선의 지휘를 능란하게 해내지 못했다. 결국 왜선 3척에게 포위당해 발이 묶이고 접선을 당했으며, 왜수군의 장기인 백병전 공격을 받고 사상자까지 나오는 상황에 처했다. 이렇게 전투가 치열한 상황에서 만약 조선 수군이 여기서 함선을 1척이라도 잃는다는 것은, 단순히 함대가 손실을 겪는 수준으로 끝나지 않는 일이었다. 그런 상황은 왜수군에게 판옥선을 내줘 전고와 화력의 이점을 잃는 것을 의미했고, 동시에 왜수군의 사기가 올라 박빙으로 진행되던 전황이 당장이라도 일방적으로 뒤집힐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 사실을 정확하게 인지한 이순신은 즉시 전진하던 대장선을 변침, 선회시켜 안위의 함선에 접선한 왜선 3척을 순식간에 영거리포격으로 격침시키면서 안위를 구해냈다. 이 때가 명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에게 가장 위험했던 순간이었으며, 그 와중에 산이 찍어누르는 듯한 기세의 물살은 점차 가라앉기 시작했다.

3.3. 기적 같은 승리[편집]

이윽고 정오가 되어 물살의 방향이 바뀌자, 아군의 처절한 분투를 지켜보고있던 녹도 만호 송여종과 평산포 대장 정응두를 필두로 다른 전선들도 일제히 합세하여 왜군 함대를 공격하였고, 비로소 조선수군이 승기를 잡게 되었다. 난중일기를 근거로 한 포스팅

비록 왜군 함대가 여전히 숫적으로는 절대적으로 우위였으나, 여태껏 이순신의 판옥선 한 척도 제대로 상대를 못한데다 물살이 역방향으로 바뀌어버렸으므로 기세좋게 전진하려던 후열의 함선들조차 좁은 해협에 밀집된 채로 거의 멈춰버렸다. 여기서 갑자기 판옥선 여러척이 얼씨구나 하고 한꺼번에 나와서 포격을 가하니 왜군의 함선들은 속수무책으로 조선수군의 화포공격을 맞고 파괴되었다. 그리하여 포격을 맞고 가라앉는 함선들과 중파되거나 전투원이 몰살당해서 뒤로 후퇴하려는 함선들과 그래도 앞으로 전진해보려는 함선들이 서로 뒤엉켜, 왜군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바다 위에 생지옥이 펼쳐진 형국이었다. 이 아비규환 중에 한 두척씩 발악적으로 판옥선에 달려드는 세키부네 쯤은 조선 수군에게 전혀 위협이 되지 못하고 간단히 격퇴당했다. 왜군: 죽고자 하면 산다고 해서 죽으러 갔더니 죽음.

오후 1시 경이 되자, 완전히 조수가 바뀌어 물살이 역으로 빨라지면서 왜군 함대는 전장에서의 공세능력을 모조리 상실하고 패닉에 빠져 지휘통제체계가 완전히 무너졌다. 판옥선이 강한 물살을 타며 포격을 계속하자, 그나마 멀쩡하던 일본 수군의 함선들도 우왕좌왕하다가 순식간에 격파되기 시작했다. 조선 수군의 공격이 얼마나 깊숙히 닿았는지 후방에 있던 함대 사령관 구루지마 미치후사의 대장선이 격파되고 구루지마 또한 사망했을 뿐만 아니라 수군 총사령관 도도 다카토라가 화살에 맞고 중상을 입었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직접 조선 수군의 패배를 확인하라고 파견한 중앙감찰관 모리 다카마사는 물에 빠져죽을 뻔했다가 구조되는 촌극을 빚었다.

왜 수군은 이 과정에서 추가로 격침된 전함만 11척에 달했으며, 결국 5시 경 왜 수군의 잔여 함선들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도주함에 따라 전투는 종료되었다. 조선 수군 또한 전장을 수습한 뒤 당사도로 후퇴하였다.

적선 30척을 깨부수자 적선들이 물러나 도망치니, 다시는 아군에게 접근하지 못했다. 이는 실로 천행[37]이었다.(此實天幸)
─ 이순신, 『정유일기』 9월 16일

4. 전과[편집]

내 배에서는 순천 감목관 김탁과 본영의 종 계생이 총알에 맞아 죽었다. 박영남, 봉학과 강진 현감 이극신도 총알에 맞았으나 중상을 입지는 않았다.
─ 이순신, 『정유일기』 9월 18일


놀랍게도 난중일기에 조선 수군의 피해는 대장선에서 사망자 2명, 부상자 3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만 이것이 전체 피해자인지, 아니면 대장선의 피해자만을 기록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대장선만의 피해로 보더라도 대단한 전과로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그냥 왜군들이 대장선한테 일방적으로 학살당한 거라고 믿을 전과다. 허나 실제로는 전투 중반까지 대장선 혼자서 밀려드는 적선 수십척을 상대로 두세 시간을 싸웠음을 감안하면 상식적으로는 절대 나올 수 있을만한 전과가 아니다. 이 외에도 실제로 접전이 벌어진 안위의 배에서는 사상자가 다수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 난중일기에는 거제 전선의 격군 5명 ~ 6명이 물에 뛰어들었다고 하는데, 울돌목의 거센 물살로 보아 사실상 사망.(...)

이순신은 난중일기에서 이 날 적선 30척을 부수었다고 하였고, 조정에 올린 장계에서는 전투 전반부에 20척, 후반부에 11척을 각각 격침시켰다고 썼다. 일반적으로는 일본 수군의 피해는 이렇게 단순히 31척으로 알려져 있다. 실록에도 '적선 31척을 격침하고 수급 8개를 취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이순신이 눈앞에서 확인한 전과만 적은 것이고, 다른 사료들을 종합해보면 실제 전과는 더 크다. 조경남의 난중잡록에서는 '패배하여 도망치는 적병의 뒤를 쫒아 목을 베어 죽인 것이 수백여 급이며, 무사히 탈출한 적선이 겨우 10여척 뿐이었고, 아군의 배는 모두 무사하였다'고 적고 있다. 연려실기술에서도 '적의 배는 겨우 10여척이 도망쳤을 뿐이고 우리 배는 모두 무탈하였다'라고 기록했다. 10여척만이 도망친 것은 다소 과장의 여지가 있을 수는 있으나 그만큼 일본측의 피해가 컸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결정적으로 이는 당시 일본 수군의 피해 상황에 대하여, 일본 군에게 사로잡혀 명량 해전까지 종군한 조선인 포로의 증언에서도 잘 드러난다.

진해(鎭海)에 사는 정병(正兵) 전풍상(全風上)이 왜적의 진중에서 도망해 와서 아뢰었다. 저는 지난 임진년 8월 산골로 피란했다가 왜적에게 잡혔는데 왜장 산도(山道)의 진중에 소속되어 안골포(安骨浦)에 한달 남짓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산도를 따라 바다를 건너 일본의 국도(國都)에서 동쪽으로 하룻길인 진역군리(鎭域軍里)에 도착했는데 진역군리는 바로 산도가 다스리는 고을이었습니다. 또 산도에게 딸린 부장(副將) 우다능기(尤多凌其)의 종이 되어 복역하면서 이따금 문서(文書)를 선소(船所)에 송달하기도 했는데 대체로 우다능기는 바로 산도가 관할하는 전선(戰船)의 장수였습니다. 선척의 숫자는 1백 20여 척으로 지난해 6월 산도가 재차 자기 소속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부산포(釜山浦)에 정박하였고, 7월 사이에는 한산도(閑山島)에서 접전한 뒤에 하동(河東) 앞 포구에서 하륙(下陸)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구례(求禮) 지방을 거쳐 남원(南原)을 함락시키고 전주(全州)에 도착했다가 즉시 하동으로 돌아왔는데 대개 갔다가 돌아온 기간이 20여 일이었습니다. 또 하동에서 열흘 간 머문 뒤에 산도(山道)가 선척을 다 거느리고 수로(水路)를 따라 순천(順天)·흥양(興陽)을 거쳐 우수영(右水營) 앞 바다에 도착했는데, 거기서 통제사(統制使)와 접전을 하여 왜적의 반이 죽거나 부상당했습니다. 그리하여 무안(務安) 지방으로 후퇴하여 정박하면서 날마다 분탕질을 한 뒤에 다시 순천으로 들어와서 왜교(倭橋)에다 성을 쌓고 주난궁(走難宮)에게 지키도록 한 다음 산도는 즉시 일본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우다능기를 따라 광양(光陽) 지방의 장도(獐島)에 옮겨 정박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또 우다능기가 일본으로 다시 들어간다는 기별을 듣고 고향 생각을 이기지 못하여 밤을 타서 도망와 현감(縣監)에게 자수(自首)해 온 것입니다.”
ㅡ 『선조 실록』 97권. 선조 31년. 명 만력 26년 (1598년) 2월 11일 -


선조 실록 선조 31년 2월 11일의 기사에는 정유년에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이듬해 탈출한 전풍상의 증언이 실려 있다. 이 증언에 의하면 전풍상은 산도라는 일본 무장의 부장인 우다능기의 종으로 생활했는데, 산도는 정유년 6월 적선 120여척을 이끌고 부산에 상륙하여 칠천량 해전과 남원성 전투에 참전했고, 9월에는 휘하 전선들을 이끌고 명량해전에 참가했다. 여기서 전풍상은 '거기서 통제사와 접전을 하여 왜적의 반이 죽거나 부상당했습니다'라고 말한다.

여기에서의 반이 산도라는 무장의 부하 중 반인지, 전체 일본군의 반인지는 불확실하다. 산도의 배가 120여척이라고 해도 이것은 전투선만이 아니라 사후선을 포함한 비전투선을 합한 수치일 수도 있다. 산도가 누구를 의미하는지는 실록의 해당 기사만으로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명량에서 죽지는 않았으니 구루지마 미치후사일 리는 없고, 일본의 한 지방을 다스리는 영주로서 120척의 함대를 이끌었으니 구루지마 미치후사 휘하의 장수일 리도 없다.

강항의 간양록에도 칠천량 해전과 명량 해전을 직접 목격한 조선인 포로의 기록이 나온다. 그 포로가 증언하기를, '왜장 여럿이 서해를 따라 올라가 우수영으로 향했는데, 이순신이 전선 10여척을 이끌고 용맹하게 싸워 승리했다. 왜장 내도수(구루지마 미치후사)가 죽고, 민부대부는 바다에 떨어져 간신히 목숨을 구했으며, 그 나머지 휘하 장수들도 죽은 사람이 여럿이었다'라고 했다. 강항은 정유년에 쳐들어온 왜장들의 명단을 보면 진도까지 왔다가 배에서 사망한 자가 있다고 했으니, 그의 증언으로도 구루지마 휘하 병력 이외에도 일본군이 상당한 피해를 입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일본군 총 대장인 도도 다카도라의 기록인 고산공실록을 살펴보자.

선수의 배들은 적선에 노 젓는 사공이 너무 많다. 그 중에 구루지마 장군도 앉은 채로 전사해 있다. 그밖에 선수(船手)[38] 가로(家老)[39]의 과반수가 사망했다. 모리 장군은 세키부네(関船)에서 경비선으로 옮겨 탔다. (적은) 경비선에 열십자의 낫을 걸고 활과 철포를 마구 쏘아대며 먼 바다로 몰았다. 위험한 상황에서 두명의 도도 장군이 이끄는 배로 적선을 쫒아내고 목숨을 구했다. ...(생략)... 도도 장군도 손에 두 군데 부상당했다.
ㅡ 『고산공실록(高山公實錄)』


일본군 총대장인 도도 다카도라의 기록인 고산공실록도 명량 당시의 상황에 대하여 선수와 가로의 과반수가 사망했다고 적고 있다. 참고로 히데요시를 대리하는 군감인 모리 다카마사까지 물에 빠졌다가 구출되었다는 것을 보면 후방에서 보호받아야 할 인물들까지 위험에 빠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리고동문서(毛利高棟文書)와 고산공실록(高山公實錄)의 전투 보고서에는 모리 다카마사와 도도 다카도라 휘하의 함선이 직접 적을 공격했다가 함선이 좌초, 모리 다카마사 본인은 도도 수군의 배가 구원하여 살아났다고 서술한 점을 들어 이들도 교전 당사자 중 하나로 보는 관점이 있는데, 이는 반만 맞다고 할수 있다. 공을 세운만큼 명성과 보수가 돌아오는 일본 전국 시대의 특성상 군감일지라도 수군을 감독하지만 않고 휘하 부대가 직접 전투에 참여했을 가능성은 높다. 하지만 논공 행상에 참여할 다이묘에 대한 철저한 보호라는 일본 전국 시대의 또다른 특성[40]을 감안하면, '(다이묘를 보좌할) 선수와 가로의 과반수가 사망'했다는 말이나 '(군감인) 모리 다카마사가 물에 빠졌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 조선 수군의 공격이 철저히 보호되는 일본 수군의 최후방까지 덮쳤다고 보는게 맞다.

따라서 격침을 확실하게 확인한 적선의 수만 31척이고, 명량 해전의 패배로 인한 일본군의 전체적인 손실은 그 이상으로 컸다. 완침은 면했다고 하더라도 승선 인원이 몰살 당하거나 큰 부상을 당하여 전투 불능에 빠지거나, 함선의 손상이 너무 커서 고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거나 수리 자체가 불가능해서 폐기 처분해야 할 선박은 더욱 많았을 것이다. 명량 이후로도 조선 수군이 전력을 재건하는 동안, 일본 수군이 정면에서는 수효가 한참 부족했던 조선 수군에게 대응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따져보면 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이 격침 31척이란 전과 자체만으로도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결과이기도 하다. 이는 임진년 때 조선 수군이 기습 공격과 신 무기(거북선)의 투입을 통한 일방적인 우위를 차지한 상태에서 교전을 벌인 옥포 해전, 합포 해전/적진포 해전, 사천 해전 당시의 전과와 맞먹는 결과이다. 게다가 전투의 상당 부분을 대장선 1척만으로 치룬 점을 감안하면 이는 더더욱 놀라운 결과이다. 일본 함대의 피해 비율로도 그러한데, 최소 육전으로 치면 최소 20%대의 전사피해를 입힌 셈이다. 통념과는 달리 실제 군사학에서 총 전투원 중 부상자를 포함하여 10%가 전투불능이 될 경우는 병력재편을 받기위해 후퇴해야하고, 총 전투원 중 전투불능에 빠진 비율이 20%가 되면 나머지 전투원 개개인의 육체적 건강여부를 떠나서 편제 자체가 붕괴되어 부대가 전멸한 것으로 본다. 헌데 명량해전은 왜군의 확실한 '전사자'만 총원 중 20%라는 것이며, 보통 전사자보다 부상자가 훨씬 많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명량해전에서 왜군이 입은 피해는 사실상 전멸 이상인 셈이다. 도주해서 살아남았다 해도 다시는 전투에 참가하지 못할 정도로 엄청난 육체적, 정신적 충격에 빠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좋은 예시로 지금까지 잘 싸우다 칠천량 해전에서 멘탈이 터져 명량 직전에 탈주해 버린 배설이 있다

근래 또 삼도 수군 통제사 이순신이 치계하길, "한산도에서 패배한 이래로 병선과 무기가 흩어져서 거의 사라졌는데, 신이 전라 우도 수군 절도사 김억추 등과 전선 13척, 초탐선 32척을 수습하여 해남현의 바닷길에서 길목을 지키고 있자니 전선 130여 척이 이진포 앞바다로 들어왔습니다. 신이 수사 김억추, 조방장 배흥립, 거제 현령 안위 등을 거느리고 각기 병선을 정돈하여 진도 벽파정 앞바다에서 적과 교전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힘껏 싸웠는데, 대포로 적선 20여 척을 깨부수고 쏘아 죽인 것이 매우 많아 적들이 바닷속으로 가라앉았고 머리를 벤 것도 8급이었습니다. 적선 가운데 큰 배 1척이 있어서 우보(羽葆)와 홍기(紅旗)를 세우고 푸른 비단 장막을 둘렀으며, 적들을 지휘하여 아군 전선을 에워싸므로 녹도 만호 송여종과 영등포 만호 정응두가 잇따라 와서 힘껏 싸워 또 적선 11척을 격파하자 적이 크게 꺾이어 남은 적들이 멀리 물러났습니다. 진중의 항왜가 홍기를 단 적선을 가리켜 안골포의 적장 마다시라고 하였습니다. 획득한 적의 물건은 화문의(畫文衣), 금의(錦衣), 칠함(漆函), 칠목기(漆木器), 장창(長槍) 두 자루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 '''소방(小邦)의 수군이 다행히 작은 승리를 거두어서 적의 예봉을 조금 꺾었으니, 이로 말미암아 적선이 서해에는 진입하지 못할 것입니다.
ㅡ 『선조 실록』 94권, 30년 11월 10일 5번째 기사


선조가 명나라 측에 명량 해전의 소식을 알릴 때의 기사이다. 선조의 작태가 잘 드러난다. 분명히 명량 해전을 두고 '작은 승리'를 거두어서 적의 예봉이 '조금' 꺾였다고 하면서도, 뒤이어서는 적선이 서해에 진입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실히 말하는, 앞뒤가 안 맞는 언행을 보여준다. 뭐, 이 발언 자체는 꼴에 예의 차린다고 겸양하는 걸로도 볼 수 있지만, 이 시기 선조는 명의 장수들을 찾아다니며 이순신의 명량 해전의 전과를 폄하하고 다니기 바빴다. 오히려 명의 경리 양호[41]가 선조를 타이르고 이순신은 뛰어난 장수라고 이야기 하며, 선조에게 명량 해전 이듬해까지 이순신의 품계를 올려주라고 끈질기게 압박하여, 이전의 정2품 정헌대부의 품계를 되찾게 도와주기도 한다. 지금으로 치면 주한 미군 사령관, 혹은 한국 전쟁 당시 UN군 사령관이 한국 대통령을 압박하여 해군 참모 총장의 대장 계급을 되찾아준 꼴이다.[42]

4.1. 조선 수군 규모[편집]

기본적으로 선조 실록과 충무공의 일기, 그리고 행장에 근거한다.

  • 삼도 수군 통제영

    • 삼도 수군 통제사 이순신(李舜臣) - 전선 1척 (일기 / 선조 실록)

  • 전라 좌도 수영

    • 삼도 수군 통제사 이순신(李純信) (전라 좌도 수군절도사 겸임)

    • 조방장 배흥립(裵興立) - 전선 1척 (실록)

    • 회령포 만호 민정붕 - 전선 1척 (일기)

    • 발포 만호 소계남(蘇季男) - 전선 1척 (일기)

    • 녹도 만호 송여종(宋汝悰) - 전선 1척 (선조 실록)

  • 경상 우도 수영

    • 경상 우도 수군 절도사 배설은 회전 직전 도주.

    • 미조항 첨사 중군장 김응함(金應諴) - 전선 1척 (일기)

    • 영등포 만호 척후장 조계종(趙繼宗) - 전선 1척 (일기 / 선조 실록[43])

    • 안골포 만호 우수(禹壽) - 전선 1척 (일기)

    • 거제 현령 안위(安衛) - 전선 1척 (일기 / 선조 실록)

    • 평산포 대장 정응두(丁應斗) - 전선 1척 (일기 / 선조 실록[44])

  • 전라 우도 수영

    • 전라 우도 수군 절도사 김억추(金億秋) - 전선 1척 (일기 / 선조 실록)

    • 가리포 첨사 이응표(李應彪) - 전선 1척 (선조 실록)

    • 해남 현감 류형(柳珩) - 전선 1척 (일기 / 행장)


장수 및 일반 병졸 총합 900여명 가량. 노를 젓는 격군 및 사후선 및 탐망선의 인원을 포함하면 대략 2000여명 가량. 함선은 판옥선 기준 총 13척.
이순신의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라는 장계의 내용 때문에 오해를 할 수가 있는데, 이순신이 저 장계를 쓸 상황에는 배설로부터 인수한 판옥선 12척이었다. 장계를 보낸 이후 전라 우수사 김억추의 판옥선 1척이 더 추가된 것. 그래서 명량 해전 개시 기준으로는 13척이다.

4.2. 일본 수군 규모[편집]

조선역진법표에 기재된 일본 수군의 규모에 따른다. 구키 요시타카, 와키자카 야스하루, 간 미치나가는 참전이 불확실하다. 다만 간 미치나가의 아들 간 마사카게가 이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보아, 간 미치나가 본인의 참전 여부와는 별개로 그 군대는 참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 이요 국
    이요 국 우와지마 번 8만 3천 석 다이묘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 - 2800명
    이요 국 마쓰마에 번 10만 석 다이묘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 2400명
    이요 국 무라카미 씨 1만 4천 석 당주 구루지마 미치후사(来島通総) - 600명
    이요 국 무라카미 씨 소속 하타 노부토키(波多信時)

  • 아와지 국
    아와지 국 스모토 번 3만 3천 석 다이묘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 1200명
    아와지 국 이와야지 번 1만 석 다이묘 간 헤이에몬 미치나가(菅平右衛門達長) - 250명
    아와지 국 이와야지 번 소속 간 마타시로 마사카게(菅又四郞正陰)

  • 메츠케
    분고 국 사이키 번 다이묘 모리 다카마사(毛利高政)

총합 전선 133척 ~ 200여 척, 수군 3650명 ~ 7250여 명


전투에 참가한 일본군의 전선 수는 조선 왕조 실록에 130여 척, 징비록에 200여 척, 이분의 행록에 333척으로 각각 다르다.

일단 이순신의 난중일기 초판본에는 전투 초반에 적선 133척이 아군을 에워쌌다고 되어 있어 최소한 전체 수와는 별개로 전투에 직접적으로 참여한 함선은 133척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도도 다카토라의 고산공실록(高山公實錄)에는 명량에 돌입한 배들이 세키부네나 고바야로 구성된 것으로 확인되며, 일본 수군의 명량 해전 보고서 격인 모리고동문서(毛利高棟文書)의 수군 주진장에 따르면 포구에 대선을 남겨둔 채 작은 관선들로 이루어진 함대로 출격했다고 하니 공격의 주체가 아타케부네와 같은 큰 배는 아닌 것은 분명하다.

강항의 간양록에 따르면 배로 무안에 간 자(舟至務安)로 명량해전 이후 수군을 이끌고 전라도 해안에 나타난 다이묘를 게시하고 있는데, 수군인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빠져있고 하치스카 이에마사와 나카가와 히데나리는 육군인데도 언급이 되있는 것을 보아 육군이 명량 해전에 참전했다고 보는 이야기도 있지만, 정작 하치스카와 나카가와는 하루 뒤에 전라도의 정읍 회의에 참석하는 것을 보아 참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결론적으로 최소한 군감의 보고서에 기재된 수군 선봉행들의 병력은 최소 7200명이며 이 이상의 다른 병력이 동원되었다하더라도 8000명 정도가 적정선이라 볼수 있을 것이나, 이 경우 격군의 숫자를 같이 추산한 것인지가 확실치 않아 전체 규모는 이보다 많았을 수 있다. 즉, 불명이라 보는게 옳다.

일단 처음 이순신을 만나 교전을 개시한 함선의 숫자는 이순신이 직접 쓴 난중일기의 133척이 거의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5. 결과[편집]

5.1. 조선 수군의 후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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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승리를 거두기는 했으나, 조선 수군도 육상전력의 열세 때문에 잠시 북쪽으로 물러나야만 했다. 아무리 수군이 강해도 수군 기지는 항구에 있고 왜군이 육지쪽에서 공격해오면 수군으로 막을 수가 없었으니까. 조선 수군은 지속적으로 후퇴하여 9월 21일에는 고군산도(선유도)에 도착했고, 이곳에서 명량 해전의 승첩을 알리는 장계를 써서 27일 조정으로 올려보냈다. 이에 따라 왜군도 서해로 북상하여 이 과정에서 간양록을 남긴 강항이 왜군에게 잡혔고, 일부 왜장이 배로 전북 부안까지 다다랐음을 기록에 남겼다.[45] 즉 엄밀히 말해 일본군이 서해로 진입하는 데 아예 실패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궁극적 목표를 놓고 보았을 때 왜 수군은 서해안으로 세력을 확장하거나 서해안에 상륙하여 육군과의 공동 전선을 구축하는 데 실패했다. 육상전력이 우세해도 해로를 통한 보급을 받지 못하면 그저 잠시동안일 뿐이다. 당초 왜군의 목표였던 이순신과 조선 수군은 왜 수군을 격퇴하는 위업을 이루면서 멀쩡하게 남아 있었고, 게다가 칠천량 해전 이후 숨어 있던 장수들이 줄지어 함대를 이끌고 합류하면서 이번에는 진짜 제대로 붙어도 이긴다는 보장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46] 게다가 이순신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군의 사기가 바닥에 떨어져 왜군은 결국 서해안으로의 실질적인 진출 기대를 접어야만 했다. 이때 왜군 사이에선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고 앞으로 진짜 희망이 없다며 체념하는 분위기가 흘렀다. 반대로 조선군 사이에선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가 흘렀다.

왜 수군이 육군과의 공동 작전을 펴기 위해서는 최소한 수군이 독립적으로 금강 하구, 가능하다면 한강 하구까지 진출해서 보급거점을 만들었어야하지만 이것은 실패하였으므로 결과적으로 왜 수군은 서해안 확보에 실패했으며 결국 정유재란의 흐름 자체를 이순신 혼자서 돌려버린 것이다.

"이때 한산도의 여러 장수들은 각자 도망쳐서 본도의 피란민 등과 함께 여러 섬으로 들어갔으므로, 공이 날마다 편비(褊裨)를 보내어 여러 섬에 통유(通諭)하여 흩어진 군졸들을 불러모으게 해서, 전함을 수리하고 기계를 준비하며 소금을 구워 판매하게 하니, 2개월 이내에 수만여 석의 곡식을 얻게 되었다. 그러자 장사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서 군성(軍聲)이 크게 떨치었다."
─ 이항복, <백사집> 고 통제사 이공 유사(遺事)

또한, 이때의 전투 결과로 숨어있던 수군 장수들이 병력을 이끌고 다시 이순신과 합류하여 칠천량 때의 3분의 2가 조금 안되는 수준의 전력을 회복하게 된다. 조선 수군의 부활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임진년의 침공이 한산도 대첩으로 막힌 것과 마찬가지로, 정유년의 왜군도 명량 해전으로 인해서 수륙병진 작전에 발목이 잡혔다.

5.2. 반전된 전황[편집]

일본 일각에서는 명량 해전이 전쟁의 전체적인 국면에 영향을 주지 못한 국지적인 전투라고 주장한다. 일본 수군이 서해에 진입했고 이순신이 이를 피해 북쪽으로 퇴각했으므로 명량 해전은 전술적인 작은 패배에 지나지 않으며, 또한 9월부터 시작되는 일본군의 후퇴 이유도 단순히 월동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위의 항목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일본군은 한양까지 치고 올라가겠다는 당초의 작전계획을 이 패배로 전면 수정해야만 했다. 또한 일본군이 물러난 것도 한겨울에 계속 밀려가는 양상이었음이 조선과 일본 양측의 개인 기록들에서 확인된다. 즉, 일본이 2차 침략을 하면서 세웠던 전략이 명량에서의 전투 한방에 뒤집힌 것이다.

실제로 조선은 왜군이 직산[47]까지 다다랐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한강을 방어선으로 삼을 계획이었다. 한양의 주민들도 모조리 피난을 떠난 상황이었다. 일본 측의 종군승이던 케이넨의 일기에도 "한양을 치기 위한 회의를 했다", "한양으로 가는 길이 즐겁다"는 말이 나온다. 일본군은 한양을 재점령할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9월 10일 안성을 거쳐 죽산까지 북상했던 일본군은 명량 해전 직전에 돌연 남쪽으로 철수하는데, 케이넨의 일기에 의하면 이는 '항구'로 가기 위한 것이었다. 즉 당시 일본군의 후퇴에는 해상으로의 보급이라는 이유가 있었고, 보급만 잘 된다면 한양을 점령하기 위한 준비가 갖춰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한양은 커녕 삼남을 노리기 위한 보급마저도 명량 해전 때문에 틀어졌다.[48] 왜 수군이 금강에 진입해 공주, 좀 더 상류까지 거슬러 올라와 청주 쯤[49]에 보급거점을 확보했으면 왜군이 구태여 점령지 다 포기하고 오로지 월동만을 위해 경상도까지 철수할 이유가 전혀 없으며, 그렇게 보급을 받으며 충청도 일대에서 버티고 앉아있는 왜군을 조명연합군이 밀어내기 위해서는 더 큰 희생이 필요했을 것이다. 전라도 방어선이 박살나 호남평야가 왜군의 직접적인 보급처가 되는 것은 것은 두 말 할 것도 없다.

이런 걸 보면 명량 해전의 전략적 의미는 왜군의 한양 점령을 막았다는 것 보다는, 아예 일본군이 삼남을 지배하겠다는 기본 전략 자체를 무산시켜버린 점이 더 근원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상황에서 일본군이 단순히 월동 차원에서 철수할 정도로 여유로운 입장이었다면, 굳이 한겨울에 고생해가면서 남해안 일대에 왜성을 쌓을 이유가 없다. 게다가 국지적인 전투라기에는 일본 수군의 피해 규모가 상당히 큰 것도 사실이다.[50] 전투는 전황에 일정한 영향을 끼칠 때 비로소 전략적 목표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인데, 일본 수군의 작전이 전황에 끼친 영향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애초에, 명량 해전에서 이순신과 조선 수군을 끝장내고 거점을 만들었다면 임진왜란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현실적으로 조선 전체를 점령하는 것이 불가능하더라도, 최소한 명나라와의 교섭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는 있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순신을 처치하지도 못하고, 조선 수군을 격파하지도 못하고, 서해안에 확고한 거점을 만들지도 못했으므로, 명량 해전은 전술과 전략에서 완벽하게 일본의 원정 실패로 이어지는 첫 걸음이 되어버린 것이다.

6. 분석[편집]

흔히들 기적적인 승리라는 말을 쓰는 전투이지만 면면을 따지고 보면 당시 이순신은 이렇게 불리한 상황에서도 승산이 있는 패를 찾았고 또 그걸 놓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1. 군율과 신뢰의 리더십[편집]

조금이라도 군령을 어긴다면 즉각 군법으로 다스리리라!(小有違令 卽當軍律)
─ 명량 해전을 앞두고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방비를 서둘러 온 시간... 전란이 터지고 적진으로 진격하여 함께 싸워 온 시간.. 그 시간이 심어준 믿음과 또한 희망 때문입니다.


불멸의 이순신 77화 中 권준

그야말로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는 말을 그대로 실천한 전투이며, 이순신이 무엇 때문에 엄격한 군율을 강조했는지 보여주는 전투였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받는 신뢰였다. 다른 전투는 몰라도 이 전투에서 이순신이 이긴 원인은 군법 때문이 아니었다. 군법을 강조하긴 했지만 정작 전투 상황에서 이순신은 군법을 적극적으로 적용하지 않았다.[51] 딱히 부하들에게 돌격하라고 강요하지도 않았다. 단지 상선만 이끌고 전방에 나갔을 뿐인데 오히려 부하들이 자발적으로 따른 것이다.

12척의 전함을 이끌던 장수들은 이순신의 기함을 버려두고 후방으로 물러나 있었다. 이들이 나중에 갑작스럽게 돌격하면서 전황이 확 바뀌었던 것도 일본 수군이 큰 피해를 입은 원인이었다. 나름대로 용사라고 할만했던 안위와 김응함조차도 처음에는 공포에 질려서 움직이지 않았던 것을 보면, 당시의 상황은 훈련받은 군인들의 눈으로 보기에는 개죽음처럼 보였던 것이 분명하다. 이래서는 사형이 기다린들 말을 들을 턱이 없다. 차라리 같은 병력이라도 공성전이면 성에서 버티기라도 할 것이고 지상전은 매복을 하건 뭘 하건 대책이 있겠지만, 해전은 그냥 갖고 있는 펀치로 정면 격돌하는 전투다. 그런데도 이순신이 한 마디 하자 곧바로 합류한 것은 그래도 이순신이니까 분명 이기고 자기들까지도 살릴 방법이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엄격한 군율은 언제까지나 전장의 주도권을 잡고 군의 통제력이 유지될 때만 유효하다. 즉 군율은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까지는 탈영을 막는 효과가 있었지만, 해전이 벌어진 직후에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도망칠 수도 있었다. 즉 엄정하게 군율을 지키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이순신에 대한 신뢰 때문에 합류한 것이다. 이순신 본인도 그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때와는 달리 명량 해전 당시 머뭇거린 장수와 군졸들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았던 것. 만약 이순신이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장졸들의 책임을 물어 그들을 군법으로 다스렸다면 이순신 본인이 프래깅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당시 조선 수군의 상황은 누가 봐도 패배가 분명했다. 심지어 이순신 본인조차도 기적(천행)이라고 인정했을 정도. 조정에서는 어차피 개죽음 당할 바에 '수군 폐지령'을 제안하던 상황이었으며, 칠천량에서 패배했던 장수들 중에는 이순신 함대에 합류하지 않고 숨어버린 경우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0배가 넘는 적에게 돌격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경우, 부하들은 도망치더라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가능성이 높고, 설사 상관을 버렸다고 해도 조정의 처벌은 관대하거나 없을 공산이 크다. 아무리 군법이 엄하다지만 누가 봐도 개죽음이 뻔한 상황에서 후일을 기약하려고 전장을 이탈하는 군인에게 책임을 물을 정도는 아니다. 이순신도 이런 상황을 고려하여 비전투선들을 도주 방지용으로 세워놓긴 했지만, 이순신이 죽을 때까지 구경만 하다가 도망치는 선택지도 충분히 나올만한 상황이다. 이런 결정적인 순간에, 직전까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던 부장 두 명이 이순신을 따라서 돌격하여 분위기를 반전 시켰고, 뒤이어 9척이 한꺼번에 반격에 나섰다는 기록은 군율 이상으로 의미가 남다른 결과라고 보아야 한다.

이순신이 평소 권위를 이용해서 사익을 챙기거나, 승리를 위해 희생을 강요하거나, 부하들을 도구로 여기거나, 편의에 따라 원칙을 곡해하는 상관이었다면 이처럼 무모한 승부수를 띄웠을 때 부하들이 따를 리가 없다. 아니 원칙을 제대로 지키는 상관이었다 해도 능력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부하들은 그를 외면한 뒤 상선이 날아가고 나서 죄송하다고 말했으면 했지, 합류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합류한 걸 보면 엄격한 군율 때문만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칠천량에서 겨우 살아남은 장수들이 훨씬 위험한 명량 해전까지도 이순신 함대에 잔류했던 것은 군율이나 체면 이외에도 이순신의 지휘력이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나 부하들이 적극적으로 싸우지는 않을지언정 도망치지는 않았던 기록을 보면, 공포심을 초월한 복종이라기 보다는 마지못해서 지켜보던 인간적인(?) 상황에 가까워보인다.

오히려 초요기 한방에 바로 두명이 소환된 것에 비추어, 안위 등 지휘관들은 원래 도망갈 생각이 없었음에도 격군을 비롯한 부하들이공포에 질려서 이를 통제하는 데 애를 먹어 합류가 늦어진 것이라는 설도 있다. 즉, 전진하라고 닦달하는 지휘관과 못 가겠다고 뻗대는 부하들이 실랑이를 벌이다가, 대장선이 초인적인 전투력으로 적들을 갈아대고 초요기까지 올릴 정도가 되자 그제서야 통제력을 회복하고 합류가 가능했다는 것이다. 도망을 간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라서 배설과 함께 갈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고 남는 쪽을 택했고, 이순신이 전투 후에 안위나 배흥립, 송여종, 정응두 등을 추켜세워준 것을 보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다. 주로 김경진과 이를 지지하는 밀덕후/역덕후들이 이 설을 주장하고 있다. 김경진이 쓴 소설인 격류임진왜란(김경진)에서도 이 설을 차용해서 묘사하였다.

고위 지휘관이 탈영할 정도로 사기가 바닥을 친 조선 수군을 단결시키고, 마침내 그들을 승전으로 이끈 이순신의 리더십을 단지 엄격한 군율만으로 보는 것은 분명한 오독이다. 유명한 한신의 배수진도 그저 아군을 사지에 몰아넣은 것이 아니라, 동시에 아군의 별동대가 적의 배후에서 적의 본진을 빈집털이할 것이라는 복안[52]과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승리였던 것처럼 말이다. 후퇴를 좀 더 주저하게 만든 측면은 있지만 결국 이길 거라는 확신 없이는 배수진도 칠 수 없었다. 이렇게 마음은 필사(必死)에, 몸은 필생(必生)에 둔다는 것은 용병의 기본이며, 이순신은 그가 치렀던 모든 전투에서 그 누구보다도 이 전훈을 뚜렷이 실천한 전략가였다.

위와 같이 이순신의 리더십을 찬양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실제 상황을 냉정하게 보면 명량 해전은 적의 예봉이 꺾일 때까지 대장선 한 척만 싸웠고 적의 기세가 꺾이고 승기가 조금이라도 보이고 서야 겨우 두 척이 합류한 것이다. 위 서술에서는 보통이면 탈영할 상황에서 위치 사수라도 했으니 대단한 신뢰를 얻고 있었다고 하지만 이는 리더로서의 이순신을 공경한 지나친 찬양에 가깝다. 그 신뢰의 대상이 죽을 각오로 싸우고 있는 상황에서 전황을 관망만 하는 것이 진정한 신뢰라 할 수 있는가. 이순신이 두루 사랑받고 존경받던 인물인 것은 확실하나 그런 인물조차 완벽한 통제에 실패할 정도로 당시 상황이 절망적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6.2. 함선, 화기, 지리의 압도적 상승효과[편집]

워낙 사기적인 승리라서 다양한 설이 많지만, 그냥 조선 수군의 우위가 환상적이었다고 요약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53]

<고산공실록>에 따르면, 일본군이 전투에 투입한 함선은 대부분 세키부네 (80명 탑승)였는데, 이에 반해 조선의 주력함이었던 판옥선(130명 탑승)은 해상의 성이라 불리던 아타케부네(290명 탑승)와 비슷한 크기였으니, 조선군이 가뜩이나 격류인 울돌목에서 질적 우위를 담보하고 전투를 펼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판옥선의 구조 자체가 철저하게 한 가지 기능, 즉 연안에서 화포를 쏘기 위한 포대 겸 장벽으로 사용하려는 목적만을 위해서 설계된 구조였다. 애당초 물목에서 통행세를 걷기 위해 치고 빠지는 전략을 목적으로 설계된 일본군의 세키부네보다 몇 배는 더 튼튼할 수밖에 없다. 즉 일본군이 자신들의 함선보다 월등히 큰 조선의 판옥선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격렬한 해류 위에서 난데없이 공성전을 치러야만 했던 것이다.

더불어서 조선군은 강력한 화포들을 다량으로 적재할 수 있었다. 천자총통[54]과 현자 총통은 백여 개의 조란환, 혹은 대장군전을 쏴서 정면이든 원거리에서든 함선끼리의 싸움에서 엄청난 위력을 보여주었다. 당시부터 이미 저평가되고 있던 승자총통마저도 장대에 달아서 조란환을 쏘는 구조 덕분에 방어전에서 상당한 성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이러한 화포들은 접현이 이루어진 초 근접전에서는 그 활용이 제약되었을 것이라는 예측도 있다.[55] 오히려 그렇기에 정상적인 교전이 벌어지는 50미터 ~ 200 미터 정도의 거리에서는 사신과도 같았다.

결정적으로, 울돌목은 해류가 바뀔 때 갈매기도 가라앉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물살이 거센 곳이었다.[56] 이곳에 세키부네를 100여척이나 몰아넣으면, 갑작스럽게 해류가 바뀌었을 때 대처하기가 어렵다. 이들은 튼튼한 판옥선의 무게에 밀려서 박살나거나, 혹은 조선군 화포의 좋은 표적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판옥선에 접현하더라도, 머리 위에서 빗발치듯 쏟아붓는 화살이나 장병기가 쏟아졌다. 그럼에도 안위의 배에 일본 전함이 세 척이나 달라붙어서는 뱃전을 아득바득 개미 떼처럼 기어올라서 백병전을 치렀다는 사실을 보면 근성 하나만큼은 대단했으니... 문제라면, 전투 후반에는 화포와 함께 강력한 해류의 변화로 일순간에 역습을 당했다는 것.

참고로, 크기 면에서 판옥선의 대항마라고 할 만한 아타케부네는 편성되지 못했다. 안택선은 주로 다이묘 계급의 상징이었기에, 전력상으로 의미를 가질만큼 수효가 충분하지는 않았으며, 다카야마공 실록에는 좁은 해협을 보고 아예 편성하지 않은 것으로 나온다. 다만 이순신이 장계에서 붉은 깃발과 푸른 휘장을 두른 대선을 격파했다고 하고, 총대장인 도도 다카도라가 화살에 맞은 것으로 보아서는, 전투 후반에 판옥선들이 후방의 대장선에 당도하여 교전에 휘말리는 상황이 벌어졌을 수는 있다. 이 경우에는 운신이 어려운 좁은 지형에서 한두 척만 커다란 덩치를 자랑하고 있으니 대함 미사일 격인 대장군전의 효용성을 검증하기 좋은 표적이었을 것이다.[57]

6.3. 피해를 받지 않는 일방적인 상황[편집]

명량 해전의 전황을 상세히 기록한 오익창의 사호집(沙湖集)이 있다.[58] 여기에 의하면, 이순신이 왜군과 싸울 때 사대부들의 솜이불 백여 채를 걷어다가 물에 담가 적신 뒤 12척 배에 걸었더니 왜군의 조총이 그것을 뚫지 못했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 개발되는 면제배갑이 떠오르는 장면이긴 한데, 솜이불을 뱃전에 걸어봐야 어차피 조총에서 발사되는 탄환은 두꺼운 소나무 판재로 제작되는 판옥선 선체에 전혀 타격을 주지 못한다.[59] 따라서 3층 상갑판에서 아래로 이불을 걸었을 리는 만무하고, 실용적으로 써먹자니 3층 상갑판 위로 걸쳐서 방패판 대용으로 써야 승선 인원을 보호하는 구실로라도 써먹을 만 할텐데, 이불을 3층 상갑판 위에 주렁주렁 건 상태에서 시야 확보 및 난중일기에서 묘사되는 치열한 근접전을 어떻게 치렀는지가 문제고, 게다가 현장 지휘관인 이순신의 기록에는 이러한 기록이 전혀 없어서 의구심을 갖게 한다.[60]

또한 장기전을 예상해서인지 동아(박의 일종)를 배에 가득 싣고 군사들이 목마를 때마다 먹였더니 갈증이 해소됐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건 또 이순신의 어릴 적 일화가 떠오르는 장면.(...) 즉 조선 수군은 오랫동안 상대의 화력을 견디며 싸울 준비를 끝낸 상황이었다.

행장이나 야사가 아니라 조금 더 설득력 있는 가설을 제기해보자면, 두꺼운 소나무 판재로 제작되는 판옥선 선체와 울둘목의 빠른 격류가 왜군의 화포 무기를 거의 무력화시켰을 가능성을 점쳐 볼 수 있다.

조선 수군이 사용하는 대형 총통들의 운용 기록을 보면 지상보다 사거리가 매우 짧은 편이었다. 거꾸로 생각해보면 일본군의 사격 무기도 해상에서는 본래 스펙보다 훨씬 약해졌을 가능성이 크다. 애초에 육지의 화포와 달리 해상의 화포는 이라는 안정적이지 못한 유동체 위에서 흔들거리며 쏴야 하는 판국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사람이 들고 쏘는 조총은 그나마 유효 사거리가 줄어드는 편이지만, 일본 수군의 얼마 안되었던 화포는 당연히... 게다가, 조선은 고려 말기에 이미 왜구에게 호되게 당해서, 배 자체를 박살내는 화포 전술이 많이 발달한 편이었다. 즉 최근의 연구로는 현대인의 생각보다 거리비가 축소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긴 했는데, 일본군이 바다 위에서도 화포 때문에 고생했던 것은 사실이라고 추측되고 있다.

더군다나 울돌목의 해류는 앞서 언급했듯 동아시아 최고로 점쳐질 만큼 빠른 곳이었고, 이런 곳에서 갑자기 짓쳐드는 대장선을 향해 화포를 정확히 맞히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400년쯤 후대인 2차 세계 대전 당시에도 단단한 땅에서 고정된 목표를 향해 현대의 기술로 만들어진 화포를 발사하는 전차도 사격 통제 장치의 미비로 기동중에는 명중률을 보장하기 어려웠던 만큼, 16세기의 화포 역시도 그러했다면 대장선에 이렇다할 피해를 주지 못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16세기 후반의 화포는 현대의 화포와 달리 폭발하는 탄환을 쏘지도 않았으니 더더욱 판옥선을 격파하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다.

위 기술과 별개의 가설로 보통 동서양의 해전에서 모두 해전에 돌입하기 전에 배에다 물을 끼얹는다. 화공에 의해 배가 불에 타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조선의 주력은 각종 화포와 사정거리에 들었을 때의 불화살(발화탄)이므로 이를 운용하는 조선 수군도 뱃전에 물을 미리 끼얹어 두었을 가능성은 매우 크며, 더욱이 왜선의 경우에도 조선 수군이 아니더라도 해전의 상식이 방화 관리인데다, 조선 수군에 그렇게 많이 당한 경험이 있으므로 당연히 배에다 미리 물을 부어 불이 잘 붙지 않게 적셔놓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수군은 왜선을 화력으로 태워버렸던 거고. 솜이불을 적셔 널어 놓았다는 것은 실제 그렇게 했다면 물을 적셔 방화 관리 면에서 걸어두었을 가능성이 크다. 방탄도 된다니 일석이조이긴 하겠지만.

또, 대개 해전에서 방화 관리 때문에 전쟁 바로 직전에는 돛은 내려두는게 상식이다. 돛은 적시기도 힘들고 불은 매우 붙기 쉬우며, 또 다른 곳에 옮겨 붙지않고 운좋게 돛만 불에 타 없어졌다해도 이후 기동력에 문제가 생긴다. 조선 수군은 어차피 그자리에서 버티는 상황이니 돛을 올리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왜선의 경우도 어차피 가는 방향으로 물살이 가고 있으니 돛은 내려두고 돌격했다고 보는게 맞을 듯하다.

그리고 난중일기에 치열한 근접전은 없었다. 조선 수군의 탄막과 불화살(발화탄)을 겨우 뚫고 들이닥친 돌격선 몇척이 배에 기어오르는 것을 정리했을 뿐이다. 조선 수군의 주요 전술은 뛰어난 화포와 활을 이용한 적선의 원거리 요격이며 그 요격을 뚫고 나오느라 만신창이가 되어 달라붙는 소수의 배들을 정리하는 정도이다. 물론 명량은 적의 수가 워낙 많아 달라붙는 배도 평소보다 많았겠지만,[61] 요는 조선의 주요 전술은 포격과 사격이며 이는 난중일기 내내 이순신이 주력하고 고민했던 부분이기도 하다. 왜선은 가라앉거나, 혹은 항행 불능 상태로 만드는 데 집중하고, 항행 불능이 된 왜선이나, 물에 빠진 일본군 등은 명량의 빠른 물살에 휩쓸려 조선 수군 뒤까지 흘러가서 조선의 작은 배들에게 아작났을 가능성이 크다.

6.4. 일본군의 호승심과 촉박한 시간[편집]

일본 수군은 칠천량 해전에서의 황당한 승리, 그리고 조선 함대의 초라한 모습을 보고 자신감이 엄청났다. 정유재란(2차 침략)으로 일본에서 새로운 병력들까지 가세했으므로, 이러한 자신감은 더욱 확고해져서 조선을 최대한 가뿐하게 밟아주겠다는 호승심에 취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인터넷에서 가끔 돌아다니는 '진도 우회 떡밥'도 여기에서 나온다. 어째서 일본군이 진도 남쪽으로 우회하지 않고 명량이란 좁은 통로로 왜 굳이 들어왔냐는 떡밥인데, 당시 일본 수군의 입장에선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간단히 비유해서, 약골 13명이 길을 막고 있다고 조폭 300명이 길을 돌아서 갈 것인가? 게다가 바로 전날에 자신들이 한번 박살냈던 상대였다.

또한 일본 수군으로선 울돌목에서의 전면전을 피하려 해도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미 날짜는 양력으로 10월 말, 곧 겨울로 향하고 있었고 한양을 노리던 육군은 직산 전투에서 격퇴당해서 물러난 상태였다. 이 상황에서 수군이 더 이상 지체하면 육군은 보급 문제로 인해 한양 공격을 포기해야 했다. 따라서 빠른 시간 내에 서해로 진입해서 육군을 지원하는 것이 일본 수군의 가장 큰 목표였다. 아무리 상대가 그 무서웠던 이순신이라지만 고작 판옥선 13척을 정면으로 싸울 자신이 없어서 진도를 돌아 가거나 시간을 두고 지속적으로 기습 공격을 가해서 전력을 약화시키는 등의 방법을 써가며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진도 외해로 돌아가는 길 또한 결코 편한 길이 아니다. 진도 외해의 바닷길인 장죽수도, 맹골수도 역시 울돌목 만큼이나 험한 물목이고 곳곳에 암초와 섬들이 널려 있다.[62] 게다가 이 섬들 사이에서 숨어있을 지도 모르는 조선 수군의 기습도 고려해야 했다.
즉, 어차피 진도 외해를 돌아간다 해도 그대로 서해로 북상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다시 시간을 들여 벽파진이든 우수영이든 어딘가에 있는 이순신 함대를 정리한 후에야 북상을 할 수 있으니 진도 외해 루트는 그냥 시간낭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따라서 정면으로 밀고 나가서 최단 거리인 울돌목을 빠르게 돌파하는 정공법이 당시 일본 수군에게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정공법은 압도적인 전력차로 인해 실패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겨우 1 척의 판옥선이 물목으로 들어오는 족족 왜선들을 전부 때려잡는 상식 밖의 상황은 수적 우위에 대한 의심을 만들기에 충분했다.덕분에 일본군은 조선 수군의 통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시점, 자신들에게 유리했던 해류가 끝날 때까지도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축차투입만 하면서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지 못한 채, 어..? 어...? 하면서 시간을 낭비해 버렸다. 축차 투입을 일본군의 만용으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전장인 울돌목의 특성상 전 병력을 일시에 투입할 시 전선들의 병목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즉, 축차 투입은 충무공이 일본군에게 강요한 것이다. 일본군으로선 알면서도 당한 셈. 교전에서 일방적인 패배로 수적우위에 대한 의심이 생기고 확신으로 변하는 찰나 해류가 바뀌면서 판옥선 12척이 한꺼번에 돌진하자, 갑작스럽게 전황이 바뀌면서 오는 당혹감에 더해서 판옥선과 울돌목의 강력한 해류를 거스르지 못하고 진영이 붕괴되어 버린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 수군을 조금 변호해자주면, 상식적으로 전방에만 100척이 넘고 후방에는 200척이 대기하고 있던 데다 조류까지 일본의 편이었던 전투 초반, 배 한척을 제압하지 못할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나. 적군은 직전의 전투에서 궤멸했고, 도망쳐서 살아남은 오합지졸들로 겨우겨우 소규모 군세를 갖춘데다가, 그나마도 지휘관을 버려두고 도망가려 할 정도로 사기마저 바닥을 기는데, 날고 기는 명장도 이런건 뒤집을 수 없다. 이런걸 뒤집으려면,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능력을 갖춘, 하늘이 내린 성웅이라도 나타나야 할 것이다.[63] 일본 수군의 불행이라면, 하필 상대가 바로 그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능력을 갖춘 하늘이 내린 성웅"이라는 것이었다. 이순신: 너희가 약한게 아니야. 내가 너무 강한 거지.

6.5. 울돌목의 좁은 지형과 물살[편집]

사실 이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다른 무엇도 아닌 지형에 있다. 울돌목은 폭이 약 300m 정도로 매우 좁아서 이순신 휘하의 십수척의 판옥선으로도 일자진을 펼치면 완전히 틀어막는게 가능할 정도다. 이런 식으로 틀어막아서 병력 수의 불리함을 가능한 줄이고 들어오는 왜선을 오는 족족 박살내자는게 기본 전략이었다.

물론 말처럼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지역의 조류는 매우 빠르기 때문에 기존의 판옥선의 선회 능력을 사용해서 한번 쏘고 반댓면에서 한번 더 쏘는 식으로 포의 발포 시간을 최대한 줄여서 강한 화망을 형성하는 전략이 먹혔을지가 의문이다. 제대로 연사해 보기도 전에 왜선이 달라붙어서 판옥선에 올라타려 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휘하 장수들이 뒤로 배를 빼려한 이유가 겁을 먹어서라기 보다는 포를 연달아 쏠 수 있는 안전거리를 본능적으로 확보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64]. 상상 이상으로 왜선의 접근 속도는 빨랐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휘하 장수들의 행동에도 문제가 있는것이, 만약에 뒤로 물러나서 왜선이 좁은 울돌목을 돌파해버리면, 가뜩이나 조류의 흐름이 불리한 상황에서 함대의 진형을 회복할 수 없고 그대로 각개격파당해서 무너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순신은 이 점을 잘 알고 근접전의 위험을 감수하고 제자리에서 왜선을 맞아서 싸운듯 하다. 하지만 뒤로 물러나는 휘하 장수들의 행동을 막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초요기를 세워서 불러들이는 식으로 휘하 전선들을 제자리에서 진형을 유지하게 하려 했었고, 이에 안위와 김응함을 필두로 휘하 장수들이 다시 원위치로 돌아와 근접전까지 감수하면서 무너지지 않고 반격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조류가 바뀌면서, 조선 수군의 공세로 인해 과하게 밀집되어있던 왜선들은 포격과 당파에 밀려나게된다.

결국 명량 해전의 기적을 일으킨 핵심 요소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왜군의 방심이나 혼란도 아니고 기적도 아닌 지형적인 이점을 잘 파악하고 거기에 맞는 진형을 필사적으로 유지하면서 유리한 때를 기다린 이순신의 전략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전투 후반의 양상은 다이묘와 군감이 타고 있는 기함까지 전투에 휘말려 수병의 절반이 전사한 수준에 빠진 것을 보면, 그냥 12개의 암초가 있는 소용돌이 속에 빨려들어간 일본 함대로 축약해볼 수 있다. 전천후 함선인 판옥선은 맷집을 바탕으로 사방 팔방에 포격을 가하고 있는데, 일본의 함대는 전반부의 골든 타임을 날려먹고 방향이 틀어진 물살을 정면에서 맞으며 전혀 통제가 되지 않는 상태로, 아군 함선들끼리 마구 부딪치며 판옥선이 열심히 쏘고 있는 포탄을 두들겨 맞고 있으니 버틸 수가 없는 것이 당연하다.

후반부의 전투 양상은 (육전이지만) 칸나이 전투와 놀랍도록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데, 칸나이 전투에서 로마군이 당한, "상대의 약점을 정확히 판단하여" 질량을 바탕으로 진형을 파괴하다가, "그걸 전부 파악한 한니발 바르카 덕분에" 전 병력이 떡저버리고, 병력의 정상적인 통제가 불가능한 상태에서 포위까지 당해 마구잡이로 학살당하는 장면과 울돌목에서 마구잡이로 떡저서 이리저리 충돌 사고를 내며 포탄 세례를 받는 일본 함대의 모습은 그다지 다를 것이 없다.

그렇지만 위의 우위들을 모두 다 쌈싸먹는 조선군 최고의 우위는, 다름아닌 성웅 이순신이었다.

7. 널리 알려진 가설들[편집]

7.1. 명량 철쇄설[편집]

명량 철쇄설이란 조선 수군이 울돌목에 쇠사슬(철쇄)를 깔아서, 울돌목의 급류에 밀려 쇠사슬에 걸린 일본의 전선들이 대파되었다고 하는 설이다. 1971년에 상영된 영화 '성웅 이순신'에서 이미 철쇄를 사용한 것으로 그려졌으며, 1999년에 방영된 KBS 역사스페셜 방송을 통해 본격적으로 조명되었다. 2005년에 방영된 불멸의 이순신에서도 철쇄로 일본군의 진격을 막으면서 조류가 바뀔 때까지 시간을 끈 것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아무리 드라마여도 납득이 안 되는 것이, 분명히 굉장히 무거울 사슬에 매우 빠르고 거친 해류에 휩쓸리고 일본 함선 수 척이 걸린 상황인데 그 사슬을 당겨서 버티는 것은 오로지 몇 명의 인력 뿐이다. 인력 하나 하나가 아까웠던 그 상황에 이렇게 인력을 낭비하는 건 매우 억지스럽다고 할 수 있다[65]. 최소한 말이라도 쓰지.

그러나 여러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2000년대 이래로 철쇄로 적선을 부수었다는 설 자체는 많이 수그러들었고, 대신 철쇄를 전투에 보조하는 형태로 사용하여 전투의 효율을 끌어올렸다는 주장이 많이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이순신의 승전 장계, 선조 실록, 난중일기, 징비록 등 당대 1차 사료에는 철쇄가 일절 등장하지 않는다. 심지어 이것저것 마구잡이로 적어놔서 찌라시 취급도 종종 받는 조경남의 난중잡록[66]에도 철쇄에 대한 말은 없다. 이 글에 명량 철쇄설 주장 및 그에 대한 의문이 잘 나타나 있다.

  • 기록된 근거는?

    • 김억추의 행적이 기록된 호남절의록(1799년)과 현무공실기(1914년)에 '충무공께서 공에게 철쇄를 설치하게 하셨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이때 철쇄를 설치하고 관리해야 하는 관할 실무자는 전라 우수사인 김억추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부분은 여전히 문제가 되는 호남절의록과 현무공실기의 과장된 묘사[67]와 함께 김억추의 이런 중요한 공적을 이순신이 기록하지 않은 점에서 의문을 사고 있다. 오히려 김억추는 명량 해전 당시 가장 후방에서 꽁무니를 빼고 있었다고 이순신이 난중일기에 친히 적어주셨다.. 무엇보다 현무공실기는 1900년 물건으로 당대에서 한참 뒤의 시기에 쓰인 것이므로 신빙성이 없다.

  •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되었으므로 적어도 1795년 이전에 작성되었을 '해남현지'를 보면 '공이 철쇄로 물속을 가로질러 막았는데, 양변 바위 위에 철삭을 박은 자국이 지금도 완연하다. 사람들은 모두 그곳을 이충무공께서 철삭을 쳐서 왜군을 죽인 곳(李忠武設索殺倭處)이라 부른다'고 되어 있다. 일단 해남 현지 자체는 당시 국가 관청에 의한 실사 확인 기록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여전히 구전에 의거한 것이며, 철쇄가 아니라 철삭(鐵索)이라 하고 있어 철쇄설을 방증하는 다른 자료들과 상충된다. 또한 당시의 1차 사료에는 어디에도 명량 해전의 철쇄와 관련된 언급이 등장하지 않는다.

  • 1751년에 편찬된 택리지에도 '이순신이 쇠사슬을 뻗쳐놓고 기다리니 왜선 5백 척이 걸리고 물살에 휩쓸려 모두 가라앉았다'는 기록이 있다. 다만 이미 해전으로부터 150년이 지난 뒤의 사료인 것과, 왜선이 5백 척이라는 표현 등 정확도가 떨어져서 그대로 신빙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 어떻게 만들 수 있었을까?

    • 이전부터 조선 수군이 철쇄를 설치하여 항구를 봉쇄했던 사례가 왕왕 발견된다. 중종 실록 5년 5월 24일 4번째 기사를 보면 삼포왜란 이후 왜구의 습격을 막기 위해 '큰 나무를 박아 세우고 쇠사슬로 차례차례 연결하는데, 칡동아줄로 무거운 돌을 나무에 달아 그 나무를 물밑으로 한 자쯤 잠기게 하여 적선이 걸려 넘어오지 못하고 찍어서 끊지도 못하게 하며, 중간에 쇠갈고리를 설치하여 잠그기도 하고 풀기도 하는' 방법이 제시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이에 합치되는 나무들이 진해와 통영 등지에서 발굴되고는 하며, 이순신 또한 난중일기에 임진왜란에 앞서 철쇄 공사를 한 기록들을 남겼다.[68] 이러한 노하우가 명량 해전의 철쇄 제작에 반영되었다는 것이다.

  • 하지만 항구를 봉쇄하는 철쇄와 명량을 가로지르는 철쇄는 의미가 다르다는 반론이 제기된다. 전자는 섬 사이를 가로막아 배의 진입을 일차적으로 저지하는 단순한 방어시설이었고, 그것도 전함이 정박할 소포 인근에 간략히 설치된 임시 구조물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명량에 설치되어야 할 철쇄는 시속 14㎞에 달하는 급류에 말려든 수십 척의 배를 저지해야 하는 것이라는 것. 이는 아래에서 후술한다.

  • 판옥선은 흘수선이 낮고 바닥이 평평해 일정한 높이의 쇠사슬 위를 지나갈 수 있지만, 일본의 군선은 흘수선이 깊고 바닥이 뾰족해서 높은 확률로 쇠사슬에 걸릴 수 있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위에서 익히 살펴보았듯 일본의 군선인 세키부네가 고속정이라면 판옥선은 구축함이다. 그것도 배에 화포와 포탄을 최대한 싣고 있었을테니 과연 흘수선이 세키부네보다 낮았을지는 각자의 상상에 맡긴다(...). 게다가 그 험한 환경에서 설치 중에 이것까지 계산하고 있었다면... 가히 세계 공병사에 길이 남을 업적.

  • 최소 4톤에 달하는 철을 어디에서 공수해와서 누가 어떻게 가공하였는지도 문제로 제기된다. 6천 근에 달하는 쇠를 입수했다면 분명 난중일기에 기록을 남겼을 것이거니와,[69] 이순신은 전투 하루 전까지도 명량에서 적을 막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음이 난중일기로 확인된다. 따라서 그전까지 명량에 미리 철쇄를 설치해 놓겠다는 생각 자체를 할 수가 없는 것인데, 그렇다면 하루도 아니고 한나절만에 6천 근에 달하는 쇠를 그만한 강도의 쇠사슬로 가공해냈다는 말이 된다.

  • 준비된 철쇄는 튼튼한가?

    • 사실 쇠사슬을 걸어서 배를 부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며, 현대의 제작 기술로도 그만한 강도를 가진 쇠사슬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현대에도 불가능에 가까운데 당대에는 오죽하랴. 일각에서는 '부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걸어 멈추게 해서' 서로 충돌하게 하는 의도라고도 말하는데 그렇다 해도 마찬가지다. 목선이라고 해도 사람 수십 명이 타는 이상 무게가 톤 단위는 될 것이고, 수적인 면에서도 한번에 열 척에서 스무 척 정도는 달려들었을 것이다. 울돌목의 조류를 타고 있으므로 왜선들의 접근 속도까지 빨랐을 것은 당연지사. 설사 백보 양보해서 철쇄가 튼튼하다 해도 그 조류 속도를 타고 차곡차곡 쌓여오는 세키부네들의 중첩중량을 과연 철쇄 한 줄로 모두 감당할 수 있었을까? 비유하자면 굴러내려오는 돌들을 치실로 막는 꼴이다. 최근에도 현대그룹에서 만든 1350톤짜리 구조물이 떠내려 간 해류가 흐르는 곳이 여기다.

  • 적을 막는 데 철쇄를 이용했다가 실패한 사례로 오나라가 있다. 오나라의 건평 태수 오언이 장강을 가로지르는 쇠사슬을 쳐서 뱃길을 막아 두었는데, 왕준이 배를 타고 내려오면서 기름 먹인 큰 뗏목 수십 개를 떠내려보낸 뒤 여기에 불을 놓아서 쇠사슬을 녹여버렸다는 것이다. 쇠는 온도가 500도 가량에서 강도가 절반가량 떨어지므로 화염의 역할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기본적으로 화염은 보조적인 역할을 하고 실제로는 뗏목의 중량을 버티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 적을 막는 데 철쇄를 이용했다가 성공한 사례로 동로마 제국이 있다. 수도를 지키기 위해 금각만을 가로질러서 친 쇠사슬은 효과적이었는데, 실상 금각만의 반대 방향으로 흐르는 해류[70]와 세키부네만큼이나 빈약한 오스만 제국 함선의 규모에 힘입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메흐메트 2세는 배를 끌고 산을 넘어서 금각만에 진입해야만 했다.

  • 해남 현지의 기록에 따라 당시의 철쇄는 쇠사슬이 아니라 철삭, 즉 철사를 꼬아 만든 와이어로프라는 주장도 있다. 이 경우 외부의 힘에 의해 끊어질 위험이 현저하게 줄어드는데다 무게 또한 줄어든다. 다만 난중일기나 실록 등에서 당시 항구를 봉쇄하는 데 쓰이던 도구는 일관되게 철삭이 아닌 철쇄로 표기되고 있으므로 철삭을 사용했다는 주장에는 근거 자체가 부족하다. 그리고 이런 구조물의 강도라도 그 정도로는 함선을 정면에서 가로막기에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 철쇄 없이는 이길 수 없었나?

    • 고려 시대 여몽 연합군이 진도에 웅거한 삼별초를 공격했는데, 고려사 김방경 열전을 보면 이 당시 진도 주위를 지키던 삼별초 수군의 배가 날아다니듯 움직였다고 적혀 있다. 삼별초 군은 이 물살을 이용해 고려군을 지휘하던 김방경의 기함을 해류가 거센 곳으로 몰아서 포위함으로써 거의 죽기 직전까지 몰아넣은 적도 있었다. 물론 김방경은 분전 끝에 무사히 빠져나오긴 했지만 조류를 이용하면 글자 그대로 공격 측을 관광보낼 수 있을 정도로 물살이 강했던 곳이 바로 울돌목이다.

  • 기본적으로 난중일기를 보면, 명량 해전의 첫 단계부터 적선이 아군 선단을 둘러쌌음을 명시하고 있다. 만약 철쇄가 설치되어 제대로 효용을 발휘하고 있었다면 처음부터 이러한 상황이 벌어질 수가 없다. 그리고 상황이 철쇄설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그렇게 여유롭지 않았음은 이미 위에서 서술하고 있는 바와 같다.

  • 전투가 시작되던 시점에 일본군은 울돌목의 빠른 해류를 타고 있었는데, 이것이 오히려 일본군에게 불리하게 작용했을 수도 있다. 숫자가 적은 조선 수군은 별 지장 없이 전진과 후퇴가 가능하지만[71] 좁은 지형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수의 일본 수군으로서는 자연스럽게 축차투입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고 이 상황에서 빠른 물살은 말 그대로 '조선 수군을 밟고 가려'했던 일본 수군에게 쥐약이었던 것. 조선 수군으로서는 그저 쓸려내려가지 않기 위해서 애를 썼지만, 일본 수군은 깔대기 흐름에 사로잡혀 배의 속력을 컨트롤하지 못하고 그저 다닥다닥 붙어서 쓸려 내려오기만 했던 것이다. 물살에 밀려 한 뭉텅이씩 우르르 내려오는 일본의 세키부네들은 조선 수군에게 그저 밥이었던 것. 애초에 그러려고 선택한 명량 아니었던가.

  • 하지만 말이 쉬울 뿐, 이렇게 싸운다고 해도 대장선(과 호위 선단) 하나로는 몇 척의 전선도 상대하기 힘들었을 것이며, 혼자서 그것을 상대한다는 암담함을 난중일기에서 둘러싸였다고 묘사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지만 전투 중에 초요기를 올려 다른 전선들을 부르거나 다른 배에 있는 안위나 김응함에게 문책을 하는 묘사가 나오는 것으로 볼 때, 상황이 약간의 여유마저 없을 정도로 난감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일본 수군의 투입과 투입 사이에 간격이 있었을 것이고, 상선이 적들을 상대하려고 한 마장이나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은 첨저형 전선의 구조상 단숨에 완벽하게 기동하여 대장선을 포위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기동을 방해할 뭔가가 있었다거나.

  • 이렇게 보면 아무리 좁다 하더라도 수백 미터가 넘는 명량 해역에서 판옥선 혼자 적선을 상대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아울러 초장에 재빠르게 울돌목을 빠져나온 수 척의 일본군 전선을 시작으로 일본 수군들이 조선의 대장선에 걸려서 하나씩 개피를 본 셈이 된다. [72]

7.2. 거북선의 등장?[편집]

철쇄설에 비해 빈도는 적지만 가끔 등장하는 떡밥으로, 명량 해전 당시 거북선이 있었는가에 대한 논란이 있다. 거북선은 일반인들에게는 조선 수군의 결전병기 수준으로 유명하기 때문에, 명량 해전이라는 최악의 위기 상황에 거북선이 등장했다는 것은 대단히 드라마틱한 설정이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철쇄설과 마찬가지로 해전 당시 거북선이 존재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고 있다. 거북선 자체가 판옥선을 보조하는 함선으로 중요성이 낮은데다,[73] 이전부터 건조한 거북선들은 모두 칠천량 해전 당시 손실하였고, 명량 해전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난중일기 및 실록의 보고서 등에는 거북선을 동원했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거북선이 있었다고 해도 문제인데, 이순신 장군의 전술상 거북선은 원거리 지원 세력이 든든하게 뒷받치는 가정하에 맨 앞에서 날뛰는 돌격선 용도이기 때문에, 기껏해야 20척도 안되는 전 병력에서 거북선 전술을 사용하는 것은 무리였다. 게다가 어영담, 정운 같은 뛰어난 돌격장이 없는 이상 거북선은 있다 해도 사용 불능이다. 단, 명량의 좁은 해협을 생각해보면, 거북선이 있었다면 대단히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세키부네는 거북선을 제대로 공격할 수단이 전무했고, 거북선은 적들이 압도적인 화력을 갖추지 않은한 적진을 휘저으면서 화포를 쏘고 충각도 가할 수 있는 위협적인 돌격선이었기 때문이다.

명량 해전 당시 거북선이 존재했다는 기록 중 그나마 가장 가능성이 있는 내용은 이순신의 행적을 조카 이분이 기록한 '이충무공 행록'에 등장하는 부분이다. 이 기록에선 회령포에서 이순신이 잔여 함대를 인수한 뒤, 장수들에게 전투선을 거북선 모양으로 꾸미도록 명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에 대해선 실제로 판옥선 중 1척 ~ 2척을 거북선으로 개조했다는 설과 해당 내용 자체가 후대에 가필[74]되었다는 설 등이 있다. 그 외에 명량 해전에 대한 일본의 기록 중엔 조선 수군의 전선이 모두 거북선이라서 졌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는 문헌 비교에서부터 전형적인 아군 추태 가리기 식의 적 전력 과대 평가라는 것을 입증할 근거가 충분하기에 신빙성이 없다. '대쥬신제국사'로 유명한 유사 역사학자 김산호는 '대제독 이순신'을 비롯한 자신의 저서에서 이 두 기록을 근거로 이순신이 명량에서 사용한 판옥선은 일반 판옥선과 거북선의 중간 형태의 개량형이라는 주장을 하였으나, 근거는 전혀 없다.

8. 결론[편집]

지휘관의 뛰어난 능력 하에 해전에서 기술적 우위의 중요성이 입증된 전투.

당시 조선 수군이 명량 해전에서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장 압도적인 화포와 난공불락의 판옥선을 대량으로 보유했으면서도 참패한 칠천량 해전의 선례가 있다.

패잔병들로 이루어진 12척의 배. 싸워봐야 이제는 정말 죽을 뿐이라며 절망하던 부하 장수들. 물자 부족에 시달리는 함대. 모함을 당해 건강을 해치고 모친상까지 당했으며[75], 임금으로부터는 노골적인 박대를 받는 총지휘관. 한 척의 배도 보내주지 않는 조정. 대승을 거둬 사기가 하늘을 찌르며 수백 척의 배를 끌고 오는 왜군등등 이렇게 이길 수 없는 이유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럼에도 승리를 거둔 것은 조선군의 기술적 우위를 믿은 이순신의 역량과 그를 신뢰한 부하들 덕분이었다. 막강한 판옥선도 강력한 화력도 결국 제대로 된 지휘관이 있었기에 위력을 발휘한 것이고, 부족한 물자를 긁어모으면서 싸울 준비를 갖춘 것도 이순신이며, 울돌목을 싸움터로 정하고 조류의 흐름을 이용해서 전황을 유리하게 이끈 것도 이순신이고, 겁먹은 부하들을 다그치면서 전선을 유지하며 끝까지 싸운 것도 이순신이었다.

결국 승리의 요인은 이순신 그 자체로 요약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자 한 마리가 지휘하는 염소 무리가, 염소 한 마리가 지휘하는 사자 무리보다 강하다'고 하는 비유의 가장 극적인 사례.

게다가 이 전투는 단지 수적 열세로 적을 크게 물리쳤을 뿐만 아니라 훗날 일본군의 전략과 계획 자체를 완전히 파탄냈다는 점에서 대첩이라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본 문서는 명량대첩으로도 들어올 수 있다.

9. 미디어 창작물[편집]

임진왜란의 전투 중에서도 대단히 극적인 장면을 연출한 혈전이었으나 이 전투만을 소재로 한 창작물은 많지 않은 편이다. 창작하는 사람들로서도 도대체 어떻게 이긴 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전투라서 오류도 많다. 사실 이순신 본인도 기적이라고 했을 정도. 당장 명량 해전 이후 이순신이 맨 먼저 한 일은 승리를 자축하는 것도, 재공격에 대비하는 것도 아니고 당장 흩어진 판옥선과 수군 병력을 다시 모으는 것이었다.

9.1. 1900년대[편집]

  • 1970년대 나온 김진규 주연, 감독의 성웅 이순신에서는 강강수월래로 적을 교란하고 철쇄로 엎어뜨리는 식으로 승리를 설명한다. 말 그대로 90도 롤링하는 왜선의 압박이 심한 작품.

  • 1980년대 조선왕조 오백년 임진왜란 편에서는 48화에서 묘사하고 있는데, 아예 시작 전에 나레이션으로 거북선이 없었다라고 시작한다. 백병전 대신에 포격전과 울돌목의 조류를 이용한 승리로 묘사하는데 유명한 "안위야. 네가 군령에 죽고 싶으냐"라는 대사가 나온다. 다만 <불멸의 이순신>의 그 찌질한 모습과는 달리 우렁찬 구령으로 답례를 하는 나름 박력있는 모습을 보였다. 이 드라마의 일본군 수장들이 다 그렇듯 자막 표기도 안 되어 있는 일본군 수장이 등장하는데, 임진년에 나왔던 일본군 수장과는 다른 인물인 만큼 구루시마 미치후사로 추정되며 초반에 "겁내지 마라! 조선 수군은 겨우 12척 뿐이다." 라면서 자신있게 나섰다가 울돌목의 조류에 걸려 결국 당황하면서 갑자기 날아온 조선군의 포격을 받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제대로 보여주지 않고 그냥 퇴장한다.[76] 다만 전투 초반에 조선군이 조총에 맞는 모습을 너무 많이 비췄기에 조선군의 사상자가 극히 적었던 이 전투의 통쾌함이 너무 희석된 면이 있다. 원균 명장설이 슬슬 물들어가고 있었음을 보이는 영상 자료로 칠 수 있다. 여기서 볼 수 있다.

  • 1992년에 제작된 다큐멘터리 역사에의 초대 임진왜란에선 도표와 파워 포인트 등 그 당시의 기술력을 총동원해서 설명했다. 컴퓨터 그래픽 지도까지 동원해서 이순신 함대와 왜군 함대의 그림까지 그려가며 상세히 묘사했다. 조선 수군은 왜군을 물살이 엄청나게 쎈 울돌목에 몰아넣었는데 왜군은 쪽수만 믿고 방심하다가 그 울돌목의 거센 물살에 문자 그대로 깡그리 씻겨(...) 나갔다. 그렇게 이순신은 대승을 거두었다.

9.2. 2000년대[편집]

  • 2001년에 출간된 김경진, 안병도 공저의 역사 전쟁 소설 '격류'에서 명량 해전의 전말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지만 절판된 지 오래고, 대신 그 내용은 김경진, 안병도 공저의 '임진왜란'에 그대로 들어가 있다. 명량 해전에 시마즈 요시히로가 등장하는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묘사가 고증에 합치된다.


명량 해전(1597년 9월)
불패의 신화가 부활한다
물살 우는 울둘목으로
오라, 나의 적이여.
내몸에 포개진 칼날
다시 빛나는 승리를.


불멸의 이순신 명량 해전 예고1, KBS


다시 돌아온 바다
물의 칼들이 일어섰다.
일휘소탕(一揮消蕩)
한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혈염산하(血染山河)
피가 강산을 물들이도다.


불멸의 이순신 명량 해전 예고2, KBS

  • 2005년에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95회와 96회에 나왔으며 96회 전체를 명량 해전을 묘사하는 데 할애하였다. 다른 전투들은 한 회에 여럿 다루어지거나 조선 육군이나 조선 조정 등 전혀 관계없는 장면들과 함께 나온 데 비해 한 회가 온전히 전투 묘사에 바쳐진 것은 96회가 유일하다.

다만 고증 오류가 여럿 되는데, 먼저 당시 조선 함대는 이순신의 대장선을 제외하면 모두 도망갈 생각에 전전긍긍했지만 본작에서는 권준, 이영남, 우치적 등이 이순신의 행동에 동조하여 적극적으로 나서서 싸우는 것으로 묘사되었고 철쇄설을 답습한 한편 이순신이 직접 백병전을. 그것도 '일휘소탕 혈염산하(一揮掃蕩 血染山河)' 문구가 새겨진 칼을 들고 벌였다. 이 검은 실제 길이가 2m가 넘는 의장용인데다 당시 이순신은 모진 고문을 당하고 백의종군을 한 후유증이 아직 남아 있는 상태였음에도, 작품 내에서는 적장 구루지마 미치후사를 포함하여 33명의 적을 베었다. 또한 안위가 겁에 잔뜩 질린 모습은 그럭저럭 잘 고증되었지만, 문제는 그 부분만 잘 되었다는 것[77]. 그 밖에 권준은 해전 당시 수도를 지키는 것이 주 임무인 충청 수사였으므로,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다.

이렇듯 문제가 적지 않기는 하지만, 이순신 이하 조선 수군의 처절한 전투 신은 상당히 훌륭하다. 병사들이 창이나 칼을 놓친 상황에서 허리춤에 가지고 있던 조선낫을 뽑아들고 달려드는 적들을 한 번도 아니고 두세 번 반복해서 찔러 죽이고 얼굴에 피가 튀는 장면들을 보고 있으면 잔인함보다는 처절함이 느껴진다. 특히 일본 무사에게 어깨를 한 번 베여 쓰러지고 다시 칼 맞아 죽기 직전 성한 팔로 무사의 발을 잡아 넘어트린 다음 낫을 뽑아들어 악 받친 비명을 지르며 무사를 마구 찔러 죽이는 조선 수군 졸병의 모습은 극에 달한 처절함을 잘 연출하고 있는데, 졸병이니만큼 단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장수들만큼 훌륭한 장면을 연출했다. 또한 처절함 이후 시작되는 조선 수군의 역관광 세리머니에서는 절로 희열을 느낄 수 있으며, 일본 수군 무장들이 그와 대조적으로 집단 멘붕하는 모습도 감상 포인트. 특히나 와키자카(김명수 분)가 주저앉은 채 "어찌, 어찌 이~ 이런.. 이일이..." 라며 한탄하는 것과 "퇴각해..... 퇴각하↘란↗말이야아아아아아!!!" 라며 퇴각 명령을 내리는 것, 도도(최동준 분)가 나자빠진 채 ''이럴 수는 없다, 이럴 수는 없따아-!! 어헣헣헣헣-!!" 하며 절규하는 장면[78] 등은 당시 일본군이 맛봤을 절망을 조금이나마 간접 체험하게 해 준다.

와키자카(김명수 분)가 고양이를. 그것도 터키시 앙고라를 던지면서 '미시(未詩 : 13시 ~ 15시)야, 미시...!!!' 라고 소리 지르는 장면이 논란이 되기도 했는데, 함선에 고양이를 데리고 탄 것은 눈의 동공을 보면 시각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장면은 일본 수군에게 물살이 유리한 시각이 끝났다고 한탄하는 장면인 것. 한편 조선군은 앙부일구를 보며 시각을 확인하는 장면이 나오며, 자막으로도 오후 1시라고 나온다.

그 밖에 출전 직전,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이순신이 조선 수군들에게 대장선이 선봉이 될 것을 선언하며 전투 의지를 북돋는 장면도 이순신의 지휘관으로서의 위엄과 휘하 병사들의 충성심을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명장면이다. 해당 영상

명량 해전.
이것은 단 13척의 배
적선 333척을 물리친 실로 기적적인 승리였다.
이날 분멸한 적선의 수는 모두 31척,
분멸, 격침되진 않았으나, 전투선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적선의 수는 92척에 달했으며,
물리친 적의 수는 모두 18466명에 이른다.
당시 일본군은 이순신의 파직원균패전으로 인해
한산에서 여수까지 제해권을 확대하고,
수륙병진(水陸竝進)을 통한 도성 장악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명량 대첩은 바로 그 일본군의 전략을 모조리 무산시킨 일전(一戰)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순신과 휘하 장수들, 이름없는 군사들과 백성들. 그들의 강인한 투지와 저력이 이루어 낸 쾌거였다.
또한 이후, 정유년에서 무술년으로 이어질 수군 재건과,
23전 23승 이순신의 빛나는 전승 신화.
그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불멸의 이순신 명량 해전 편 내레이션.

  • 2005년 영화 '천군'은 이순신 장군이 무과에 급제하기 4년 전에 대해서 다룬 영화인데, 에필로그엔 이순신 장군이 성공적으로 급제한 뒤 명량 해전 직전 상황을 비춰준다. 4년 전 한심하던 모습에서 벗어나, 이순신이 역사 속의 멋진 모습으로 병사들을 격려하면서 칼을 뽑는 간지나는 장면이 연출된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올 때 나오는 음악은 그야말로 장관.

  • 다나카 요시키의 소설 '은하영웅전설'에 등장하는 회랑의 전투마르 아데타 성역 회전이 명량 해전과 다소 흡사하다는 주장이 있다. 조류와 기타 장애물로 인해 함대 기동이 어려운 전장에서, 해당 함대가 진영의 마지막 전력이라는 점 등이 논거로 제시된다. 그러나 이 전투들은 명량 해전과는 달리 방어 측에게 별다른 전술적 우위[79]가 없는 상황에서 전술적 우위가 아닌 전략적 행동을 통해 벌어졌으며, 명량의 경우와는 반대로 패전한 점 등이 너무 다르다. 이는 오히려 테르모필레 전투를 참고했다고 보아야 할 듯.

  • 2014년 7월 30일 명량 해전을 다룬 영화 명량이 개봉하였다. 기존 국내 박스 오피스 기록을 아주 압도적으로 갈아치운 영화. 감독은 최종병기 활김한민이 맡았고, 최민식이 이순신, 류승룡이 구루지마 미치후사를 연기한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 참조. 참고로 위 이미지에서 중앙이 이순신, 좌측은 나대용, 우측이 송희립이다. 다만 이것도 고증 오류가 꽤 있는데 이는 명량/고증관련 문서 참조.

  • 징비록에서는 49회에서 짧게 나레이션으로 처리되었다. 애초 명량 해전을 다룰 의도 자체가 없던 작품인 만큼 명량 해전 대신 이순신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 해전에 모든걸 쏟아부었다.

  • 무한도전 위대한 유산에서 하하송민호가 부른 곡 <쏘아>는 바로 이순신과 명량 해전을 주제로 만들어진 곡이다. 당시 무대 위에 올라선 사람도 명량 해전 직전 판옥선 수를 따라 12명이었으며, 가사에 이순신이 해전 직전에 올린 장계의 구절인 상유십이 미신불사가 숨어 있다. 또한 이뿐만 아니라 2017년 무렵의 시국빗대는 내용도 들어 있다. 마침 이게 방영된 2017년 역시 명량 해전이 벌어진 1597년과 마찬가지로 간지정유년이라는 것도 소소한 포인트.

10. 기타[편집]

  • 2005년부터 (재)명량대첩기념사업회, 전남 진도-해남군은 명랑대첩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명랑대첩축제'를 매년 개최중이다.


파일:attachment/GunofMyeongryang.jpg

  • 2012년 11월 29일에 울돌목 부근 해저에서 명량 해전 당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소소 승자 총통 3점과 대연자 탄환이 발굴되었다. 소소 승자 총통은 구리로 만들어졌으며, 길이 57.8㎝에 무게 2㎏이다. 3점에 모두 "만력 무자년 4월에 전라 좌수영에서 만든 소소 승자 총통. 무게는 세 근 아홉 냥. 장인 윤덕영."이라는 동일한 문구가 새겨져 있는데, 만력 무자년은 1588년으로 명량 해전에서 사용되었다는 추측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첫 발견은 도굴꾼이 했지만, 현재는 국립 해양 연구소가 후속 발굴 중이라 기대해 볼 만하다.

  • 숙종 14년(1688년)에는 이 해전을 기념하는 명량 대첩비가 전라 우수영 근처에 건립되었다. 위치는 현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일제강점기인 1942년에 철거되어 이후 행방이 묘연하다가, 광복 후 경복궁 근정전 근처에서 발견되어 1950년 해남으로 복원했다. 다만 이 복원이 완전하지는 않았는데, 원래 자리인 우수영 일대에 건물들이 들어서서 비석을 세우기가 곤란하자 근처의 충무사에 비석을 세운 것. 그러다 2011년에 다시 본래의 위치인 우수영 마을로 이전했다. # 이민서가 쓴 명량 대첩비의 전문은 이충무공전서에도 수록되어 확인할 수 있다. #

  • 명량 해전이 있던 정유년 9월 16일의 난중일기는 이순신이 쓴 모든 일기 중에서 가장 길고 상세하게 쓴 일기다. 아마 이순신 장군 본인이 느끼기에도 이 하루가 평생 가장 긴박하고, 가장 길었던 시간이었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 명량 해전의 패배로 제대로 분노한 일본군은 이를 보복하기 위해 이순신의 생가인 아산을 습격했다. 이때 이순신의 셋째 아들 이면은 이에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 이순신은 이를 상당히 애통해했다.[80]

  • Europa Universalis 시리즈에서도 임진왜란이 구현되어 있어 전투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Europa Universalis 3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있었던 수전 중 유일하게 기록되어 있고 13척 대 133척 설을 채용하고 있으며, Europa Universalis 4에서는 13척 대 333척 설을 채용하고 있다. 당연히 플레이어가 조종하면 역사대로의 결과는 절대로 안 나온다.

  • 중국의 전함 모에화 게임 벽람항로의 국내 1서버 명이 이 해전인 명량이다.

  • 영어판 위키피디아나, 여러 글에 구루지마가 임진왜란 중 전사한 유일한 다이묘라고 나오는데 사실이 아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조선에서 매 사냥 도중 조선군의 습격으로 전사했다고 알려진 나카가와 히데마사가 존재한다.

11. 관련 단체[편집]

  • 명랑대첩기념사업회

[1] 당시 조선이 사용한 중국 연호로는 만력(萬曆) 25년, 일본은 게이초(慶長) 2년이었다.[2] 비 전투 인원 및 사후선 포함시 약 2,200 명으로 추정.[3] 전투 전 작성된 기록에 기반한 기록들에선 12척, 전투 후 자료에 기반한 기록들에선 13척으로, 전투 개시 전에 1척이 추가되었다. 자세한 사항은 본문으로.[4] 사망 및 부상자 수는 난중일기에 근거한 수치이나, 이것이 전체 피해자인지, 아니면 대장선만의 피해자만을 기록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5] 왜군의 인적 피해와 관련한 교전 참가자들의 증언이 전체 병력에 대한 것인지, 자신이 목격한 것만 말한 것인지는 불명확하지만 상당한 피해가 있었음을 합리적으로 추론할 수 있다.[6] 승전 이후 조선 수군은 화포를 재장전하고 다음 전투를 위해 일시적으로 고군산도로 후퇴한 뒤, 군세를 정비하고 다시 남해로 내려와 남해의 제해권을 완벽하게 장악한다.[7] 물론 명량해전 승리의 원인은 분석되어있지만, 그 점을 생각해보더라도 전선 12척에 민간용 어선까지 간신히 끌어모아 100여척을 겨우 만든 상황에서 전선만 130여척이 넘는 상대를 일방적으로 양학한 것은 그야말로 기적에 가까운 결과다.[8] 영화 명량에서 대장선이 왜선들을 상대로 무쌍난무를 펼치는 역사 속의 장면이 재현되는데, 처절함을 강조하기 위하여 대장선이 실제 역사보다 더 힘겹게 싸우는 쪽으로 살짝 왜곡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에게는 주인공이 너무 먼치킨이라며 까였다(...) 그에 반면, 역덕들은 주인공이 너프됐다고 깠다. '일본군이 생각보다 강하게 그려졌는데?' 최근의 연구로 추정한 전투 양상을 보면, 전력차가 심한 기병끼리 싸운 전투처럼 보이기도 한다. 즉, 조선 수군이 이순신이라는 용맹한 장수(+화포, 함선)에게 의지하여 돌격했더니, 일본군은 전방의 대장선까지 돌파당하여 대응하지 못하고 해류에 다 쓸려갔다. 끝(...) 이렇게 쓰니 못믿겠다. 중세의 동아시아 해상 전투가 사실상 전차들의 싸움에 가까웠다는 점을 이해하면, 조선군이 강력한 해류를 타고 한꺼번에 돌격했던 이 전투의 과정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9] 연구에서 당시 조류를 계산한 바에 의하면 전투 개시 후 오전 내내 대장선 1척(중군장 김응함이 쌩까고 안위도 멀찍이서 주저하고 있었던, 심지어 김억추는 배 한척을 빼서 끝까지 이 전투를 관람하던 때이며 이순신이 초요기를 올려 아군에게 싸우러 오라고 난리를 치고 있을 당시 시점이다)이 울돌목의 거센 역류를 다 받으면서(오후되어서 조류가 바뀌어 조선 수군에게 유리해진 것이다) 왜군 선단과 싸우며 막고 있었음이 밝혀젔다. 당연히 왜선과 판옥의 크기 차이는 있지만, 역류에 맞서는 동시에 엄청난 수의 적선을 뿌리치며 도선을 허용치 않았음 그 자체가 불가사의에 가깝다.(그래서 각종 추측과 헛발질이 난무하고, 이런 역사적 사실을 알려주면 오히려 헛소리로 치부되는 실정이다.) 조류빨 잘타서 확 밀어서 이긴 전투가 절대 아니란 거다.[10] 현대 사가들은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7만 ~ 30만 정도의 페르시아 군이 동원되었다고 추정하며, 테르모필레의 그리스 군이 몇 명인지는 애매하지만 대체로 최소 5천명 이상, 2만까지도 바라보고 있다. 병력이야 어쨌든 명량의 일본군이나 테르모필레의 크세르크세스나 패배할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은 동일하다.[11] 이러한 전략적 의의를 감안하면 테르모필레 전투보다 미드웨이 해전이나 과달카날 해전에 비유하는게 더 낫다.[12] 위 그림의 출처는 알 수 없으나 당대에 그려진 그림은 확실히 아니라고 한다. 실제로 명량해협의 폭은 484 m로, 절대 판옥선 한 척으로 틀어막을 정도로 좁지 않다. 물론 정유재란 당시 암초 등의 이유로 폭이 더 좁았을 가능성은 있으나, 폭이 최소 3백여 미터만 되더라도 판옥선은 물론 일본 수군의 안택선 여러 척도 무리 없이 드나들 수 있다. 명량 해협이 망망 대해보다야 좁음은 당연하지만, 저 그림은 그런 지형적 특성을 심히 과장했다.[13] 위 그림에서 근대 일본에서 peninsula라는 뜻으로 만든 반도(半島)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화원반도(花原半島)라는 지명을 한자로 적었다. 반도라는 일본발 한자어가 들어온 이후에 그림이 그려졌다는 뜻이니, 아무리 일러도 일제 시대 쯤에 그려졌을 것이다. 게다가 가로로 글자를 쓸 때에도 현대 글 쓰기처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적었으니 더욱 확실하다.[14] 더군다나 이순신은 모친상으로 인해 3년상 중이었다. 3년상 중에는 관직에 나오라고 하지 않음이 관례다. 물론 조선 왕조에서는 여러 임금들이 그런거 무시하고 총애하는 신하에게 막 관직을 제수하긴 했지만 3년상을 이유로 신하가 거부하는 경우도 많았고 이럴 경우 딱히 관직을 강요할 방법이 없다. 이순신이 3년상을 이유로 관직을 사양함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기에 조정은 그만큼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15] 하지만 선조는 이 와중에도 엿을 하나 선물하는데, 품계를 제대로 돌려주지 않은 것이다. 파직 당하기 전 이순신 장군의 품계는 정2품 상계인 정헌대부였으나 이 때 돌려준 품계는 정3품 절충 장군으로 일반 수사와 품계가 같다. 현대 해군으로 가정하면 해군참모총장함대사령관이 계급이 같은 상황이다(...).[16] 물론 한신과 이순신은 다른 입장이다. 한신은 자신을 왕에 임명해달라는 등 스스로 어그로를 끌어 미움을 받았다면, 이순신은 선조가 스스로 위협을 느껴 제거하려 한 것이다.[17] 게다가 그 소문 자체는 적군의 사령관인 사마의의 책략으로 퍼진 거였다! 다만 유비는 죽을 때 제갈량 보고 "내 아들이 무식하니 이상한 짓만 골라서 하면 그대가 황제 하슈."라고 말을 했기에 핑계만 찾으면 엄연히 유선을 끌어내릴 수 있는 명분이 있긴 하다. 물론 떠본 말일테고 제갈량을 그만큼 믿고 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아버지가 자식이 답이 없다고 느낄 정도면 유선의 어리석음은... 유비는 유선 보고 제갈량을 아버지처럼 따르고 위하라고 하였는데 어찌 보면 대업을 그르치게 한거니 불효를 저지른 것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유선은 제갈량의 후계자인 강유가 북벌을 감행할 때도 똑같이 이 무식한 짓거리를 한다.[18] 심지어 이순신 장군은 이미 그 이전의 백의종군과 고초를 김응서의 적에게 속아 올린 장계 때문에 겪은 상태였다.[19] 장졸이라고 하나 패잔병과 노병이 대부분이었다. 임진왜란 초부터 이순신을 따르던 정예 수군들은 이순신이 재부임했을 당시 대다수가 전사하거나 뿔뿔이 흩어졌다.[20] 배설의 행동을 봤을 때 PTSD라는 주장도 있으며, 배설의 이후 수상한 행적과 연관하여 이때부터 배설이 다른 뜻을 품고 있었을 것이라는 해석도 존재한다.[21] 특히 이순신은 만성 위염을 가지고 있었다.[22] 이때 교전을 어란포 해전이라고 부르며 백의종군 후 이순신의 첫번째 승전이었다.[23] 배설은 결국 1599년에 선산에서 잡혀 효수되었다. 별 다른 말 없이 한 줄 쓰여져있어서 평소 이순신은 배설을 준수하게 평가했고 도망간 데에도 어떤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경우도 있으나, 실제로는 그 전부터 배설에 대해 이순신이 안 좋게 봤던 기록이 많이 남아있다. 명량 해전 직전 거의 유일한 전력인 전선을 인계해주는 것도 미적거려서 이순신이 괘씸하다고 생각했다고 쓴 것이 난중일기에 남아있다.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에도 이 묘사가 나온다.[24] 다르게 비유하자면, 항우가 사면초가에 처한 상황에서 포위망을 펼치던 한나라 군대를 깡그리 작살냈다는 것과 같은 레벨을 뛰어넘는 기적이란 뜻이다.[25] 조선 수군의 기본 전함인 판옥선은 일본 수군의 기함인 아타케부네(안택선)와 비슷한 크기였는데, 일본 수군에서는 아타케부네를 해상의 성(海上之城)이라고 부를 정도로 안택선이 거대한 전함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주 전투함인 세키부네는 아타케부네의 반 정도 크기였다. 배수량이 같다면 자잘한 여러 대로 구성하는 것보다 큰 한 대로 배수량을 채우는 걸로 정설화 된 오늘날로 말하자면 고속정 13척이 이지스 구축함 13척에게 시비를 건 셈(...). 다만 칠천량의 전훈이 있으니 13척이 꼭 오만이라 단언할 수는 없는 셈.[26] 이순신이 병법에서 인용한 말은 모두 오자병법에 나오는 말이지만, 오자에 나오는 경구과 이순신의 인용문은 차이가 있다. 오자병법의 원문은 치병(治兵)편의 '죽고자 하면 살고, 살기를 바라면 죽는다(必死則生 幸生則死)'와 여사(勵士)편의 '한 사람이 목숨을 걸면 천 사람도 두렵게 할 수 있다(一人投命 足懼千夫)'이다. 당연히 병법을 공부한 이순신 장군은 오자병법의 원문을 보고 다시 우리 말로 옮겨 말했을 것인데, 이것을 또 다시 받아 기록하는 과정에서 오자병법과는 다른 한자 표현이 된 것이다. 같은 한자문화권이라 할지라도 다른 국가나 지역별로 문법과 용법이 다를 수 있고 심지어 같은 언어라 할지라도 같은 말을 다르게 쓰거나 기록할 수 있으므로...[27] 양력 10월 26일.[28] 이상한 것은 김억추는 이후 전황이 반전되어 조선 수군이 완벽하게 승리를 거두어 가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전투에 끼어들지 않고 버텼다는 것이다. 이후에 김억추가 육군으로 보직 변경을 신청하여 옮겨간 걸 보면, 해전에 익숙하지 않아서 소극적으로 굴다가 전투가 끝날 때까지 쫄아서 못 움직였을 가능성이 가장 큰 것으로 보고 있다.[29] 선조 실록에 따르면 명량 해전 당시 우리 수군의 배는 칠천량 패전 후 수습한 12척에 김억추가 가져온 배1척을 합하여 13척의 군선인 것으로 보고 있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김억추가 가져온 배는 규모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고 지적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군선이라고 보기 애매했거나 병장기가 제대로 준비되어 있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준비가 된 판옥선은 모두 전투에 투입됐기 때문이다.[30] 원문은 이렇다. 地迫陿潮方盛水益急賊從上流乘潮揜之勢若山壓[31] 조선시대 군영에서 대장이 장수를 부를 때 사용되던 깃발 #[32] 이때 주저하던 장수들 중 수군에 남아 후일 또다시 비슷한 짓을 한 장수는 한 명도 없다. 즉 죽음이 무서운 게 아니라 개죽음이 분명해서 여기서 싸우지 않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는 말이다. 이들은 이미 원균 밑에서 하극상을 감수하고서라도 독자적인 판단으로 수군의 절반이나마 빼낸 적도 있었다.[33] 게다가 이렇게까지 몰아세운다면 오히려 프래깅의 위험성도 없지 않을 수 있다.[34] 이전 문서에서는 첫 문장을 '싸우다 죽고 싶으냐?'라고 썼지만 기록을 보면 '군법에 죽고 싶으냐'란 말을 두 번 한 것이다.[35] 당시 안위는 수군에 편제되어 있지도 않은 일개 고을 수령에 지나지 않았기에 이순신 입장에서도 이해할 만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가장 먼저 이순신의 명을 받아 전장에 뛰어들었으며, 그 공으로 종5품인 현령에서 이순신의 추천을 받아 정3품인 전라 우수사(삼도 수군 통제사 이순신의 직속 부하)로 파격 승진한다. 현대로 치면 고속정장의 위치에 있던 사람이 순식간에 함대 사령관으로 파격 승진한 격이다. 국군의 계급 체계로 따지면 대위에서 소장으로 파격 승진한 격. 김응함은 중군장의 위치로 합류가 더 늦었으므로 원래는 처벌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적전 도주를 하지는 않은 점. 그리고 애초에 개죽음이 뻔하다는 걸 아무도 부정 못하던 명량 해전의 특성을 감안하여 군법을 엄히 적용하는 건 무리라고 판단, 미조항 첨사에 그대로 머무르게 하는 것 외에 더 이상의 책임은 묻지 않았다. 물론 그 뒤 전쟁 말까지 또 다시 이순신 앞에서 머뭇거리는 장수는 하나도 없었다.[36] 여기에서도 자신의 전공을 내세우지 않는 이순신의 면모를 알 수 있다. 명량 해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순신 본인의 힘이 가장 컸으나, 그 전과를 안위에게 돌려 그가 파격 승진할 수 있게 도와준다.[37] 하늘이 도왔다고 이해하면 적절하다.[38] 주사, 즉 수군을 말한다. 이 수군이 격군을 포함한 것인지, 아니면 갑판의 아시가루와 무사 등의 전투원만을 일컫는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선조 실록에 실린, 일본 수군에게 잡혀 명량 해전에 참전한 조선인 포로의 "거기(명량 해협)서 통제사와 접전을 하여, 왜적의 반이 죽거나 부상당했습니다"는 증언과 어느 정도 맞아 떨어진다는 것은 확실하다.[39] 일본에서는 봉건 체제에서 다이묘소묘의 중신(중요한 관직에 있는 신하)을 가로라 칭한다.[40] 근대까지의 해상전에서는 시야 확보와 가장 좋은 설계를 적용한 기함이 지닌 우수한 전투력을 활용하기 위해 기함이 함대 대열의 선두에 서서 싸우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전국 시대 일본 수군만은 기함이 최후방에 배치되었다.[41] 이 사람은 명량 해전 이후 이순신에게 백금과 붉은 비단을 보내어 표창하며 "배에다 괘홍(붉은 비단을 내걸어 축하한다는 뜻)하는 예식을 올리고 싶으나 길이 멀어 가지 못한다" 며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42] 그나마도 가장 높을 때보다 한등급 아래다.[43] 실록에는 정응두로 오기[44] 실록에는 영등포 만호로 오기[45] 쵸소카베 모토치카의 부하인 노부시치로라고 적었는데, 누구인지 명확하게 확인되지는 않는다.[46] 상기했듯이, 왜군은 이순신의 기함 판옥선 한 척조차도 격파하지도 못 하고 쩔쩔매기만 했는데, 칠천량 이후로 흩어져 숨어있던 일부 해군과 백성들이 합류해 조선 수군이 어느 정도 다시 재건되었다. 싸우러 나섰다간 격파는 커녕 도리어 자신들이 격파 당하게 생긴 상황이 된 것이다.[47] 현재의 천안시.[48] 육지는 일본이 다 점령했는데 왜 육로로 보급하지 않느냐는 의문이 있을 수 있어 답하자면, 당시 조선은 수레를 운용할 수 없을만큼 도로 상황이 나빴기 때문이다. 190여년 후에 집필된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조선이 빈곤한 원인 중 하나가 '유통망이 미흡해 수레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적혀있다. 게다가 일본군이 다 접수했어도 의병들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49] 전근대 금강 수운은 부강까지 올라왔다.[50] 물질적인 피해 뿐 아니라 정신적인 피해도 엄청났을 것이다. 최소 10배 이상의 전력에 내노라 하는 수군 장수들과 정예병들이 총출동했는데 고작 13척의 적선에 장수들 다수가 전사하고 대부분이 간신히 목숨만 건져서 도망쳤으니. 게다가 명량해전이 끝나고 얼마 가지도 않아서 원균이 말아먹은 전력에서 반은 복구가 됐다니까.사기는 바닥을 치고 일본 병사들이 이순신과 싸우고 싶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을 것이다.[51] 칠천량에서의 대패로 인해 이미 병사들의 사기가 땅에 떨어진 상황에서 엄격하게 군법을 적용한답시고 병사들에게 엄격한 징계를 했다가는오히려 너도나도 탈영할 가능성이 높다.[52] 퇴로 차단이라고 무조건 배수진이 아니다.[53] 유일하게 준비된 우위인 화력과 제독빨도 환상적이었고, 대자연의 위력이라는 우위를 말아먹은 적의 뻘짓도 환상적이었고, 그 우위를 대신 점유하게 된 조선 수군의 우위도 환상적이었다. 여하간 그야말로, "적을 공격할 최소한의 능력"만을 갖추고 갔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조선 수군의 편이었다. 물론 이런 우위를 모두 가질 수 있는, 즉 이길 수 있는 전장을 선택한 이순신이라는 우위가 가장 환상적이였다.[54] 다만 위 난중일기 기록에서도 나오듯 실제 명량 해전에서는 지자 총통과 현자 총통이 사용되었다. 천자 총통은 너무 크고 화약을 많이 잡아먹는다는 지적이 나왔기 때문이다. 난중일기 등에서는 1593년 이래로 천자 총통에 대한 기록이 사라진다.[55] 일본 함선들의 높이가 조선 함선(판옥선)보다 현저하게 낮으므로 접현시 지자 총통과 같은 대형 화포는 하향 사격을 해야 하는데, 이때 대포에 장전한 발사체가 흘러내릴 개연성이 높다. 유럽에서는 하향 사격(Depressed Fire)을 할 때 이중 격목을 사용해서 포탄 등 발사체를 흘러내리지 않게 했지만, 현존하는 조선 시대 화약 무기 관련 문헌에서 이중 격목을 사용한 직접적 증거는 확인되지 않는다. 더구나 현재 학계의 연구처럼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이 사용한 포가의 형태가 동차라고 간주한다면 초단거리 하향 사격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포가의 앞부분이 높고, 뒷부분이 낮아 17도 이하의 사각을 선택하는 것이 구조상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시즈 탱크가 시즈 모드 상태에서는 근접전이 안되는 이유랑 비슷하다.[56] 울돌목 문서를 참조하면 울돌목의 미친듯한 물살을 확인할 수 있다. 귀찮은 이들을 위해 이곳에 적자면 현재 울돌목의 사리 때의 유속은 약 11.5노트(21km / h)로 동양 최대급 유속 중 하나다. 그런데 이것도 진도 대교를 건설하면서 해협의 돌들을 치워서 많이 줄어든 것이라고...[57] 게다가 첨저형 선박은 구조상 제자리 회전이 불가능하다. 거센 물살로 주위에 소선들이 어지러이 밀집된 상황에서 이런 선박이 기동하기란 아군을 짓밟는 팀킬을 하지 않고는 불가능할 것이다.[58] 오익창은 명랑 해전 직전 피난민들과 사대부들에게 공문을 돌려 이순신에 대한 지원을 호소한 문신이다. 오익창은 물자를 이순신 함대에 지원하고, 자신의 호소에 응답한 사람들을 모아서 군량과 무기를 운송하면서, 피난용 어선들로 적 교란용 위장선 병력을 만들어 후방에서 지원하였다. 이 전적을 인정받아 전후 공조 정랑에 임명되었다.[59] 구경을 늘린 오오즈츠, 즉 대조총을 동원해도, 판옥선 선체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기엔 역부족이며 판옥선의 3층의 사부들을 보호하는 참나무 방패에 기별이라도 줘 볼 만 한 것이 당시 현실이다. 그리고 이점은 영화 명량에 충실히 반영되어, 이 영화에서 조총은 방패 틈 사이로 날아든 탄환 말고는 노 젓는 격군조차 못 죽이는 위엄을 달성한다. 오죽하면 영화 내에서 총 맞아 죽은 사람은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60] 전형적인 개인 행장록 특유의 '공훈을 과장하는'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이 외에도 여러 선비들의 행장에 임란 당시 '장군님께 이러저러한 계책을 상신했다'느니, '활을 들고 함께 적을 섬멸했다'느니 하는 식의 글이 기록된 경우가 많다. 특히 행장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이 그를 찬양하고 기리기 위해 쓰는 글이니만큼 이런 식의 과장된 기록이 남는 건 당연한 일이다.[61] 안위의 배가 특히 고생 좀 했다고 난중일기에 쓰여 있다.[62] 여기는 현대에도 일년에 평균 4회 ~ 5회 선박 조난 사고가 일어나는 험한 곳으로 세월호도 바로 진도 외해 맹골수도에서 침몰했다...[63] 그 맹장 관우나 여포조차도 위 상황과 비슷한 상황에서 전세를 뒤집지 못하고 잡혀 죽은걸 생각해보자. 심지어 저 둘은 성에서 버틸수 있기라도 했지. 해상 전투는 숨어서 버틸 곳이 전혀 없는 전투이다.[64] 다만 위의 항목에서 언급했듯이 적에게 압도된 것은 맞는듯.[65] 그래도 변호를 하자면, 앞뒤 정황상 여기에 투입된 사람들은 조선 수군이 아니라 황세득의 가솔들이나 노비들이었다는 것. 수군이 제 구실을 하려면 육군 이상으로 훈련을 많이 받아야 하고 드라마에서도 훈련을 받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오는 만큼, 해전 경험이 전무한 사람들이 동원되었다고 한다면 '매우 억지' 수준까지는 아니다.[66] 그렇다고 난중잡록의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고, 세심한 교차검증이 필요한 1차 사료 정도로 보는게 옳다. 조경남은 난중잡록을 쓰면서 전쟁 때 자신이 알고 있던 온갖 사실과 풍문을 최대한 빼먹지 않고 기록하려 했기 때문이다.[67] 김억추가 검풍을 휘날리자 왜선 수백여 척이 침몰하였다던가, 화살 한 발로 적장을 잡고 세 발로 전열을 무너뜨렸다던가, 막내 동생 김응추가 10여 장을 뛰어올라 20여 급을 베었다던가.[68] 1592년 1월 17일의 철쇄공석(鐵鎖孔石), 2월 2일의 철쇄횡설(鐵鎖橫設), 2월 9일의 철쇄관장목(鐵鎖貫長木), 3월 27일의 철쇄횡설.[69] 실제로 임진년 2월 13일에 이억기에게 쇠 50근을 보냈다는 기록을 난중일기에 남겼다.[70] 파일:external/www.afcan.org/vts8-gb.jpg 가장 아래에 표시된 역류(빨간색 화살표)가 그것이다.[71] 그래서 겁먹은 장수들이 죄다 달아날 뻔 했지만(...).[72] 그러나 난중일기 부분을 보면 중반부 이후에 안위와 김응함의 배 또한 적선을 향해 뛰어드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만약 축차투입으로 인한 각개격파가 맞는다면 초반은 둘째치고라도 후반부에 다른 전선들이 적선 무리로 뛰어드는 모습은 나오기 힘들 것이란 의문도 있다.[73] 실제로 거북선 선장보다 판옥선 선장의 품계가 더 높다.[74] 근거로 행록의 판본 중 거북선에 대한 기록이 없는 판본도 있음을 내세운다. 번동아제의 포스팅[75] 당시 조선은 유교 사회였으므로, 모친상은 통제사 제수를 간단히 거부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명분을 지니고 있었다. 만약 이순신이 이것을 거부하더라도 아무도 이순신을 욕하거나 책임을 지울 수 없었다.[76] 그런데 이 당시 기술력의 부족으로 일본 특촬팀이 지원하는 중이었다.[77] 실제 인물 안위는 상당히 용맹한 인물이었으며, 상술되었듯이 이순신의 대열에 가장 먼저 합류한 인물도 그다. 당장 제작진들이 검증은 제대로 안 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난독증이 심각하다는 뜻.[78] 참고로 이 장면은 대본에서는 망연자실하게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고 대사는 없다. 즉 배우의 애드리브였던 셈.[79] 판옥선과 세키부네의 체급 차이, 일본 측 화기가 거의 무력화된 상황, 그런 상황에서 발휘된 조선 화포의 뛰어난 화력과 같은 것.[80]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어질지 못하는가?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것 같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한데,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어쩌다 이처럼 이치에 어긋났는가? 천지가 깜깜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 난중일기, 1597년 10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