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력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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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의 역대 황제

13대 목종 융경제 주재후

14대 신종 만력제 주익균

15대 광종 태창제 주상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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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호

신종(神宗)

시호

범천합도철숙돈간광문장무안인지효현황제
(範天合道哲肅敦簡光文章武安仁止孝顯皇帝)

연호

만력(萬曆)

주(朱)

익균(翊鈞).

생몰기간

1563년 9월 4일 ~ 1620년 8월 18일(58세)

재위기간

1572년 7월 19일 ~ 1620년 8월 18일(48년 30일)


1. 개요2. 만력중흥(萬曆中興)3. 48년 막장 로드와 제위 계승 논쟁(쟁국본, 爭國本)4. 막장행각의 결과5. 막대한 낭비
5.1. 만력삼대정5.2. 고려천자5.3. 그외의 낭비
6. 말년7. 말말말8. 기타9. 대중매체에서의 등장10. 가족 관계

1. 개요[편집]

명나라의 14대 황제로, 융경제의 3남. 휘는 익균.

명 4대 암군 중에서도 단연 원탑으로, 누구나 인정하는 명나라 멸망의 근본 원인. 심지어 청나라 때 쓰여진 정통사서인 명사에서조차 명나라를 멸망시킨 장본인으로 인정받고 있다. 명사에는 "명나라가 망한 것은 숭정제 때가 아니라 만력제 때였다"고 써있을 정도. 한마디로 황제 한 명이 나라를 어떻게 말아먹는가를 몸소 보여준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래서 붙은 별명은 파업(태업) 황제.

게다가 그런 주제에 명나라 황제들 중 재위기간이 가장 길었다. 총 48년. 그런데 그 중 30년 간의 업무 거부라는 사상초유의 일을 벌였다.[1] 업무 거부에 대한 해석도 꾀병, 병, 정치에 대한 환멸 등등으로 가지각색이다. 덤으로 초반 10년은 장거정의 섭정기간이기도 했으니, 사실상 임진왜란 7년 동안만 일한 셈.

임진왜란 당시 명군의 조선 출병에 적극적인 입장이었는데, 그래서 별명이 고려천자였다.[2] 그 덕에 중국에서도 안 올리던 제삿상을 한국에서, 그것도 사후 400년 뒤인 20세기 초까지 받았다. 즉 조선 입장에서는 수호천자.

2. 만력중흥(萬曆中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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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황제가 처음부터 암군인 건 아니었다. 10살의 어린 나이에 황제의 자리에 즉위한 만력제는, 즉위 초 10여 년 간 자성황태후 이씨[3]의 후원을 받는 대학사 장거정, 환관 풍보(馮保)의 도움을 받으며 통치에 대단한 관심을 보이고 명군의 자질을 드러냈던 시절도 있었다. 당시 조선의 사신으로 갔던 조헌이 당시의 만력제를 보고 '이번 황제는 훌륭한 군주의 자질이 보인다'면서 사행기에 칭찬을 써 놓기도 했다. 또한 만력제는 서예에 관심이 많아서 겨우 10세에 1척(尺) 이상이나 되는 큰 글씨를 쓸 수 있을 정도로 재능이 있었다. 하지만, 후일의 만력제를 생각하면 참으로 아이러니한 평가. 조선 입장에선 훌륭한 군주

명나라 왕조의 통치 체계는 환관 조직과 관료 조직의 대립으로 나타나는데, 풍보와 장거정은 드물게도 장기간에 걸친 연립 내각을 구축해 국정을 장악하고 개혁을 추진했다. 장거정은 내치에서는 기강 확립, 태만한 관료의 정리 작업, 황하 하류의 치수 사업, 무엇보다 토지·세제 개혁인 일조편법(一條鞭法) 등의 업적을 남겼다. 또 외치로는 척계광·이성량(李成梁)을 요동몽골에 파견하여 북로(北虜)를 막고, 또 절강·복건·광동의 해안 방어에도 주력하여 남왜(南倭)의 움직임도 봉쇄했다. 풍보 또한 환관 조직을 통제하여 조정을 장악하고 장거정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하지만 만력 10년(1582)에 장거정이 죽고 2년 후, 만력제는 돌변하여 "언관을 억제하고, 황제의 총명을 막았으며, 정권을 농단하고, 황상의 은혜를 저버렸으며, 불충을 도모했다"는 조칙을 내려 그를 부관참시하고 작위를 박탈한 후 가산을 몰수해 버렸으며, 장거정의 장남을 고문 받다가 자결하게 만들어 버렸고, 유족들이 굶어 죽기까지 했는데도[4] 눈도 깜박하지 않았다. 풍보 또한 조정에서 쫓겨나 버린다. 그리고 이것이 만력제가 어긋나는 출발점이기도 했다.

이에 대한 해석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일단 장거정과 풍보가 둘 다 표리부동한 인물이었던 것이 계기가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가 있다. 장거정은 어린 만력제에게 무척이나 엄격한 스승이었다. 황제의 스승이었던 장거정은 직접 교과서까지 만들어가면서 어린 만력제를 열성적으로, 또는 학대에 가까울 정도로 가르쳤다. 장거정은 만력제에게 어제 학습한 경서나 역사에 관한 내용을 외우도록 시켰는데, 외운 내용이 물 흐르듯이 나오면 칭찬을 했으나, 더듬거리거나 잘못 이야기하면 분노하여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심하게 갈궜다. 특히 재물 축재나 유흥에 극도로 엄격한 모습을 보였는데, 그림 그리는 것조차도 "심취하다가는 송휘종처럼 나라를 말아먹을 수 있다"며 "황제가 그림에만 지나치게 빠지면 조정을 올바로 다스리지 못하고 심지어는 망국의 참화를 불러온다"며 자제를 요구할 정도였다. 그림 안 그리고도 나라를 말아먹었다는 건 함정

이런 장거정에 대한 어린 만력제의 두려움과 존경심은 대단했는데, 장거정이 집을 신축한다고 하자 자신의 용돈에서 1천 냥이나 뽑아서 스승께 드렸을 정도였다. 하지만 나중에 장거정 개인 계좌에서만 1만 냥이나 되는 돈을 인출해서 저택을 지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엄청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반대파가 비난했듯이, 장거정은 신하로서는 도가 지나칠 정도로 처신이 지나치게 오만하고 불손해서, 그의 행동은 거의 횡포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게다가 황제이자 제자인 만력제에 대해서도 "설마 나보고 그 풋내기(만력제)가 정말로 천하 대사를 다스릴 수 있다고 믿으라는 것은 아니겠지?" 라며 대놓고 빈정댔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건 예언 아닌가

사후 정적들의 발고로 인해 장거정의 자산 조사를 명령하니, 청렴한 이미지와는 정반대로, 전국 곳곳에 그의 이름으로 건립된 대저택들이 즐비했다거나 장거정의 재산이 황제를 능가한다는 소문이 돌았다거나 할 정도였다.[5] 결정적으로 장거정이 귀향 길에 척계광이 보내준 관군으로 자신의 가마를 호위하게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군대를 사적(私的)으로 이용하고, 장거정과 함께 반란을 모의했다"는 이유로 척계광에게 면직 처분을 내렸고[6], 제대로 장거정의 일족을 죽이는 명분으로 삼았다.

전근대에 황제의 권위나 권력에 대등하게 보이는 행위를 하는 것은, 부정부패와는 달리 구족을 멸할 대죄 중의 대죄다. 반대파는 "장거정이 반역을 했다"고 고발했지만, 만력제도 이는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7]

또한 장거정은 자신의 개혁 정치를 수행하기 위해 측근을 기용하고 무리하게 정책을 밀어붙임으로써 사람들의 불만이 컸는데, 그가 예상치 못하게 사망하자 반대파가 일거에 터졌고, 이들의 모함성 떡밥을 만력제가 물었다는 얘기도 있다. 장거정은 집권 중 그의 아버지가 사망하자 황제에게 탈정[8]을 명 받고 계속 현직에 머물렀는데, 이는 당시의 성리학 세계에서 매우 큰 반발을 사야 했다.[9] 장거정의 일파였던 사람조차도 "탈정을 취소해야 된다"고 주장하다 탄핵을 받고 물러나야 했을 정도였는데, 탈정 중에 치러진 만력제의 국혼에 화려한 예복을 입고 참석하면서 '사람으로서의 기본이 되지 않은 불효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스승으로서 숨통이 막히게 만력제를 다스렸던 장거정에 대한 반발심 때문이란 견해도 있다. 아버지 융경제가 태자의 사부로 붙여준 장거정과 황제의 측근 환관이었던 풍보는 만력제의 사생활을 엄격하게 통제했으며, 9세의 나이로 황제가 된 후에도 매달 3·6·9가 들어가는 날 오전에만 신하들의 상주를 받고 나머지 날은 공부를 시켰다. 거기다 이들은 자성황태후의 후원을 받았기에 만력제는 황제가 된 이후에도 이들에게 기를 펴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실제로 만력제가 놀자판을 벌일라 치면 옆에 붙은 환관들이 풍보에게 이를 알리고, 풍보가 다시 이를 장거정이나 자성황태후에게 고해서 만력제로 하여금 '죄기조(罪己詔)'라는 제목의 반성문을 여러 번 쓰게 한 적이 있을 정도. 심지어 자성황태후가 심하게 화났을 때는 "노왕(潞王)[10]을 황제 시킬 걸 그랬다"면서 조상들에게 석고대죄를 하여 만력제로 하여금 싹싹 빌도록 하게 만들기도 했다. 결국 이 시기 만력제는 어찌 보면 황제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셈이고, 이후 이어지는 만력제의 탈선은 이러한 상황이 빚어낸 결과일지도 모른다. 아주 단순히 말하면 장거정이 죽고 나서야 만력제는 사춘기를 맞이한 것이다.

풍보 또한 마찬가지로 사적으론 상당히 부패하여 사적 이익을 많이 챙겼고, <풍보전>에 의하면 '풍보가 싫어하는 자는 모조리 쫓아냈다'고 할 정도로 권력을 탐하는 모습을 보여 적이 상당히 많았다. 때문에 장거정 사후 강서도 어사 이식, 절강도 감찰어사 왕국칙에 의해 탄핵당하고 남경으로 유배 가게 된다.

어쨌든 이 사건은 만력제 개인에게 큰 영향을 끼쳤는데,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신하들의 능력과 도덕성에 대해 강한 불신감을 가지게 되었으며, 정치에 대한 환멸을 느꼈기에 이후의 업무 방기가 이루어졌다는 해석이다.

핑계가 아니라 진짜 아파서 그랬다는 의견도 있다. 그가 누군가의 부축을 받지 않고는 혼자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비만이었고, 등과 다리가 굽은 신병(身病)을 앓아 움직이기를 싫어하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한마디로 비만이나 척추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인데 실제로 유해를 조사한 결과 등이 심하게 굽어 있었던 것은 사실로 확인되었다. 한편으론 아편에 중독되어 무기력증에 걸렸다는 의견이 제시되기도 한다. 또는 어려서 총명함을 보였던 그가 장거정이 죽은 뒤에 급격히 정무를 게을리 한 사실을 두고, 자신이 믿고 의지하던 인물을 잃음으로써 심각한 우울증을 앓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다만 만력제가 언제부터 그런 상태였는지 확인할 수가 없고, 문화대혁명홍위병에 의해 유해가 훼손되는 크리티컬을 맞아 이쪽으로는 더 이상의 연구가 불가능하게 됐다.

3. 48년 막장 로드와 제위 계승 논쟁(쟁국본, 爭國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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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간 만력제는 이후 병을 이유로 30여 년 간 사실 상 직무 수행을 거부한다.[11] 핑계라는 설과 아니라는 설이 있고 논란이 많다.

만력제와 관료들의 충돌은 특히 후계 문제에서 절정에 달한다. 그는 활달한 성격의 후궁 정 귀비를 총애했는데, 이 때문에 정 귀비 소생인 셋째 주상순(朱常洵)을 태자로 책봉하려고 했지만 신료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대신 맏아들인 주상락의 황태자 책봉을 늦추면서 기회를 노렸다. 그렇게 무려 19년이나 미루고, 주상락이 성인이 되자 어쩔 수 없이 태자에 책봉하니 그것이 1601년, 임진왜란이 끝난 후의 일이다.

만력제의 어머니인 자성황태후조차 "너 왜 태자 책봉을 안 하니?" 라고 물었는데, 만력제는 "애 엄마가 궁녀 출신이라서요. 신분이 천하잖아요." 라고 대답했다. 문제는 자성황태후도 융경제의 승은을 입은 궁녀 출신이었다는 것. 그래서 만력제의 어머니는 "이 색휘가 어디서 패드립 너 또한 일개 궁녀의 아들이었다는 것을 잊지 말라"며 싸웠다고 한다.

참고로 이 사건은 동쪽 조선에도 영향을 미치니, 광해군의 세자 책봉 승인도 늦어지게 된 원인이 바로 장자 지지 신하들의 견제 때문이다. 이것은 광해군의 지위를 위태롭게 하는 원인이 되고, 크게 보면 광해군의 성격이 삐뚤어지는데도 영향을 제법 미친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임해군이 보통 평범한 인격을 갖기만 했어도 광해군을 제치고 임금이 되었을 것이다. 문제는 임해군이 워낙 문제가 있는지라 임해군이 왕으로 즉위할 경우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었다. 거기에다, 나중에 선조가 뒤늦게 맞이한 계비 인목왕후영창대군을 낳으면서, 더 문제가 꼬여버렸다.

여튼 이 사건을 국본의 쟁, 쟁국본(爭國本)이라고 한다.

이 사태를 해결할 방법은 사실상 2가지 뿐이었는데, 첫째 황제가 신하들에게 굴복하거나, 둘째 황제가 유혈사태를 일으켜 반대파를 숙청하고, 자기 세력을 구축하거나 둘 중 하나 뿐이었다. 문제는 만력제가 둘 다 할 생각이 없었던 것. 만력제는 신하들에 대한 신뢰를 포기했고, 자기 세력을 구축하려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중국사상 가장 강력한 황제권을 보유했다고 평해지는 명나라의 황제인만큼, 자기 세력을 구축하려면 못할 것도 없었겠지만 아예 인간 불신에 빠져버린 건지 그 대신 선택한 것이 황제로서의 업무에 대한 파업이었다.

만약 만력제가 스스로 강한 의지를 가지고 밀어붙였다면 어떤 식으로든 결판이 났겠으나, 애초에 그런 의지를 보여주질 못했다는 게 문제다. 좀 심하게 말해서, 진짜 태자 책봉을 마음대로 하려 했다면, 어떤 사건에서든 둘 중 하나를 걸어서 날려 버리는 방법도 있다. 실제로 만력제가 파업한 30년 동안, 민란도 많고 혐의를 걸 만한 사건도 많았다. 그러나 딱히 그런 모습을 보여준 적은 없다. 만력제 자신도 9살때부터 황궁에서 성리학 교육을 받으며 커온 인물이었기에 성리학 바깥쪽에서 해결책을 찾는다는 생각은 해보지 못한 모양이다.

그렇다고 해서 관료층과 타협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성리학 사회에서 장자계승의 원칙을 저버린다는 것은 사회의 근본질서 자체를 부정해 버리는 것. 그렇다면 만력제가 자신의 고집을 꺾으면 되는 일이였지만, 진짜 인간 불신에 빠져버린 건진 몰라도 만력제는 30년 동안이나 그러질 않았다. 명나라 말기의 학자인 하윤이(夏允彛)는 "귀비가 총애를 얻은 때로부터, 황상은 점차 만사를 귀찮아 했고, 조회에 임하는 것이 드물어졌다"고 하였다.

어쨌거나 이 같은 어처구니 없는 사태가 조기에 해결되지 못하고 30년을 끌게 되는데, 장거정 사후 이를 조정의 공론을 이끌어갈 뚜렷한 리더 또한 존재하지 않아서 이 사태를 해결할 만한 사람도 없었다. 마찬가지로 임금이 별로 일을 하지 않는 삼국시대 촉한의 경우 뛰어난 재상(제갈량, 장완, 비의, 동윤)이 조정을 이끌었다. 아무리 명나라의 '내각대학사'가 이전의 재상과 동등한 권위는 가질 수 없었다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재상에 해당하는 위치였다.

장거정 이후 실권을 잡은 사람은 대학사 신시행이라는 인물로 온건파였는데, 대체로 신하들과 황제 사이에서 온건하고 중립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결국 이 태자 책봉사건에서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다가 "겉과 속이 다르다"는 신하들의 탄핵을 받고 물러나야 했고, 그 이후로는 그야말로 권력의 공백.

어쨌든 이후에도 태자의 지위는 확고하지 못했던 모양. 주상순은 복왕(福王)에 봉해졌지만 임지인 낙양으로 떠나지 않고 황궁에 남았고, 정쟁은 계속되었다. 결국 정 귀비 쪽에서 손을 썼는지, 주상락이 머리를 썼는지는 알 수 없으나[12], 1615년 '정격안'이라는 태자에 대한 테러 미수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방보, 오성 두 환관과 장차가 죽었다. 참고로 당시 복왕 주상순은 바로 전 해인 만력 42년(1614)에야 낙양으로 이동한다.

처형 시에 만력제는 '장자를 세우는 건 고금의 법도. 태자를 모해하려는 이는 용서치 않겠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태업의 이유로는 그 외에도 여러가지 있을 수 있겠으나 어떤 이유에서든 만인지상이자 지존인 천자의 위에 오른 인물이 업무를 내팽겨쳤다는 것이 실제 역사이며, 예나 지금이나 이는 그의 사후 제국의 멸망에 중대한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지목된다.

그렇게 만력제는 나라에 아무리 위급한 일이 생겨도 동전 한 개조차 내놓지 않는 지독한 구두쇠가 되어 버렸다. 반면에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라도 닥치지 않고서 했다. 이런 막장적인 수전노 정책으로 인해 황제의 재산은 날이 갈수록 그의 몸집처럼 불어만 갔으나, 국고는 점점 바닥나고 있었다. 그렇게 황제가 돈만 밝혀대니 고관과 환관들은 매관매직을 일삼는 간신배들이 되어갔고 정치에 관심이 없었던 만력제는 아부하는 자나 재상에 앉혀 놓고 오로지 자기 재산 증식에만 열성을 보였다.

만력제는 정사를 돌보지 않는 대신 무덤 공사 하는 것과 보물을 감상하는 것을 즐겼고, 거기다 여자까지 밝혀서 막장이 따로 없었다. 이 낙천적이며 놀기 좋아하는 황제는 자금성의 구중궁궐 깊숙한 곳에서 고립된 채 무려 10만명의 궁녀와 환관의 시중을 받으며 상상조차 힘든 차원 속에서 살고 있었다. 만력제는 후궁들과 목욕을 하거나 각종 연회를 즐겼으며, 나비 놀이와 반딧불 놀이를 즐겼다. 연못에 배를 띄우고 배에 부채를 든 궁녀들을 태우고서 자신이 연못 한 가운데서 나비를 풀어 그 나비가 부채 위에 앉으면 그 궁녀와 그날 밤을 같이 보냈다고 한다.

게다가 그는 여자를 좋아했기 때문에, 정력에 좋다는 것은 무엇이든지 먹었다. 잉어를 죽지 않을 정도로 때리면 눈물을 흘리는데 이 눈물을 받아 먹었으며, 주둥이가 긴 병 속에 고기를 넣고 여우에게 주면 먹지는 못하고 침만 흘리는데 그 여우의 침을 먹었다고 한다.[13] 그리고 정력에 좋다며 산딸기복분자를 밤마다 거의 매일 한 움큼씩 먹었다고 한다.

그런데 만력제는 단순히 노는 것만 좋아했을 뿐만 아니라, 궁녀들과 내시들을 가죽채찍으로 쳐서 패 죽이는 사이코패스의 기질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또 취미는 사람을 몽둥이로 때려죽이는 것이라, 모든 환관들과 궁녀들이 벌벌 떨었다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환관이나 궁녀들을 불러서 몽둥이로 또는 사람을 패 죽이는 것을 즐기며 즐거워했다. 신하들이 만력제 즉위년부터 1592년까지 대신들이 죽은 후궁의 숫자를 계산해 본 결과, 제위 20년 동안 약 1,000여명의 내시, 궁녀들이 만력제의 가죽채찍과 몽둥이에 맞아서 죽었는데, 이는 만력제가 1주일에 1명 꼴로 궁녀환관을 죽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4. 막장행각의 결과[편집]

기강이 해이해지고, 군신이 통하지 않으며, 이익을 쫓는 소인배가 분주히 돌아다니며 서로 다퉜다. 명나라는 실로 만력제 때 망한 것이나 다름없다.

- 명사(明史)


여하간 30년이나 파업을 한 덕분에 많은 관리들, 심지어 재상도 황제의 얼굴을 까먹을 정도였고, 중급 이하의 관리 중 황제를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는 조정 관리가 없을 지경이었다.

심지어 1607년(만력 34)에 임용된 재상 이정기는 재상직을 때려쳤다. 그도 그럴게 당시 중앙 부처 9부의 관직 31개 가운데 24자리가 비어 있었고, 호부와 통정사를 제외하고는 책임자가 없었으며, 독찰원과 대리사는 도장마저 없었다. 재상이 다 땜빵해야 했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동림당에서의 견제가 장난이 아니었다.

문제는 만력제가 사직서를 처리해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이정기는 자기 집은 복건성으로 다시 이사해 두고 에 묵으면서 5년간 152건의 사직서를 보냈지만, 황제는 또 묵묵부답. 동림당에선 "짜고 치는 고스톱이다"라는 반응까지 나오면서 더욱 모함이 심해졌고, 결국 참지 못한 이정기는 황제를 씹고 스스로 낙향해서 4년 만에 사망한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황제를 능멸한 사형감이었으나, 만력제는 시크하게 그에게 바로 문절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끝냈다.

이처럼 정부 기구에 구멍이 숭숭 뚫린 경우는 중국사를 통틀어서도 매우 드물다. 그러나 조정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만력제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심지어 장엄한 국가제사행의식도 생략했고, 비슷한 귀찮은 일들은 모두 관리들이 대행하게 하였다. 제국의 정치기구가 공전되자, 문관들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최상부로 승진할 희망이 없어졌지만 황제는 이런 생활이 이미 습관이 된 듯했다. 만력제는 아무 생각이 없었고, 이런 복잡한 국면을 해결할 의지나 생각도 없었다.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닦아놓은 시스템은 모든 결과를 오직 황제가 승인해야 처리할 수 있었는데, 그래서 만력제의 재위기간은 특이하게도 현재까지도 사형을 시키고 있는 중국 대륙에서 사형이 사라졌던 시기였다. 만력제의 성품이 어질어서가 아니라, 죄를 짓고 감옥에 들어가면 황제가 사형 승인을 해야 사형을 집행하는데, 그 황제가 놀고 먹느라 문서는 쳐다보지도 않으니 사형을 집행할 수가 있나. 그래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 할 중범죄자들이 감빵에 들어갔다가 재판을 받지를 못해서 그냥 20년 넘게 복역하다가 풀려났다.[14] 게다가 황제의 허락 없이는 재판을 열 수 없게 되어 있어, 옥 안에 갇혀 있는 죄수들 대다수가 재판도 못 받고 죽어갔다.주원장: 내가 이러려고 법을 제정했나...

그냥 때려쳤다면 모르겠는데 그리고 사후에 무덤 건설 비용으로 재정을 또 다시 무지막지하게 까먹었다. 그의 송덕비에는…

짐의 공덕이 너무 크므로 세상 말로 표현할 수 없도다. 표현이 불가능 하기는 하다.


이러한 양식은 무자송덕비라고 해서, 황제에 대한 칭송과 역설적인 겸손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어, 동양에서는 아예 전례가 없는 양식은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측천무후의 경우에도 이러한 비를 세웠다. 무자송덕비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는데, 명 인종 홍희제의 무덤 이후부터는 능에 비석을 세우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연히 비문도 없다. 이후 가정제가 자신의 능을 건설하면서 비석을 세웠는데, 신하들의 상소로 역대 황제들의 비를 전부 세우게 되었다. 당시 황제의 비문을 지을 수 있는 건 후대 황제뿐이었는데, 가정제가 귀찮아서 스킵. 덕분에 가정제 이전 전대 황제 7명의 비석은 모두 글자가 없는 무자비가 되었다. 후대 황제들 중에서도 가정제의 선례를 따라 무자비를 택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만력제의 무자송덕비도 이런 전통을 따른 것이라는 견해다.

게다가 조정의 크고 작은 일들은 최종적으로 결재할 사람 없이 산더미처럼 밀려 신하들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행해져야 했으므로, 간신히 현상유지만 될 정도로 제국 내부는 점점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그나마 황제가 지적장애라도 있거나 정신병을 앓고 있었으면 그걸 핑계삼아 뒷방에 가둬놓고 일을 처리하겠는데, 유감스럽게도 옥좌에 앉은 게으름뱅이는 명백한 정상인이었으니 그것도 불가. 말년에는 사르후 전투 등의 대삽질로 제국 동북방의 군사적 요충지인 요동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때 상실한 요동 지역은 명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되찾지 못했다.

어쨌든 이렇게 태업하는 동안 명 제국이 겉으로는 그럭저럭 굴러갔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그 30년동안 어떠한 제도 개선이나 사회개혁이 일어나지 못했다는 것. 이 시기 동안 장거정의 개혁정치, 동림당의 등장, 양명학의 발흥 등 부분적인 개혁운동이 발생하긴 하였으나, 이것도 황제가 받아들여 정치에 포함시킬 때 의미가 있는 것이지 황제 스스로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니 그저 민간차원의 운동으로 흐지부지 끝나버려야만 했다.

일반적으로 군주들이 사치나 음란, 잔인성 때문에 나라를 멸망시킨 것과 달리 아무 것도 안 해서 나라를 멸망시켰다는 것이 색다른 점이다. 본인도 자기가 아무짓도 안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어서 말년에는 스스로 "짐은 무위의 도로 나라를 다스리고 있다."고 말하기도. 무위지치는 도교와 도가에서 이상적으로 보는 통치 방식이기는 하다(요, 순처럼). 하지만 만력제는 위에서 보시다시피... 이 정도면 청나라 황실인 아이신기오로 씨 입장에서는, 자손만대 만력제에게 제사를 지내 줘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

5. 막대한 낭비[편집]

5.1. 만력삼대정[편집]

임진왜란 이외에 지방의 이민족들을 억누르기 위해 군사를 많이 움직였는데, 이 중 큰 3가지를 '만력삼대정(萬曆三大征)'이라 한다.

  • 임진왜란정유재란을 묶어 만력동정(萬曆東征)으로 부르는데, 이 기간에 다른 두 정벌도 연달아 일어났다.

  •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에는 오르도스(鄂爾多斯)의 보바이가 반기를 들었고,

  • 정유재란이 일어난 1597년에는 귀주(貴州)·파주(播州, 명대 사천성 지금의 귀주성)의 세습 된 선위사(宣慰使) 양응룡(楊應龍)이 반란을 일으켜 1600년에 진압당했다.


만력 20년(1592년)에 영하 지역의 몽골 무관인 보바이가 영하의 난을 일으켰다. 흉노족의 항장이었던 보바이는 만력 19년(1591) 조주에 일어난 반란을 기병 3천으로 평정하였는데, 그를 시기한 명나라 관헌들은 보바이군한테 보급도 제대로 해주지 않고 오히려 사사건건 방해하였고, 결국 피꺼솟한 보바이는 반란을 일으켜, 명나라는 이 반란을 진압하느라 200여만냥을 소진했다.

또한 중국 남부에서는 양응룡의 난이 일어나는데, 이 반란 또한 진압하는데 수백만냥을 지출해야 했다. 황제라는 사람이 이렇게 만력삼대정(萬曆三大征)(영하의 난+임진왜란+정유재란+양응룡의 반란) 진압에 들어간 돈은 은자 1,200만냥이 넘어가는데, 이는 1년 전체 국가 예산인 은자 600만냥의 2배가 넘는 양이였다. 이러한 만력삼대정뿐만 아니라 활동이 거세진 여진족들을 막기 위해서 매년마다 전체 예산의 3분의 2정도를 국방비에 퍼부을 수밖에 없었고, 이로써 장거정이 땜빵해 놓은 북로남왜는 부활해버렸다. 망했어요

5.2. 고려천자[편집]

전쟁을 한동안 하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모든 왜군은 돛을 올려 모두 돌아갔으며, 조선의 난리 또한 평정되었다. 그러나 관백이 조선(東國)을 침범한 이후, 전후(前後)로 7년, 잃은 병사가 수십 만, 수백 만 석의 군량이 소진되었다. 명나라와 조선은 승산 없는 싸움을 했다.
- 명사(明史)


전통적인 견해로 30년 휴무만큼이나 문제로 지적되는 것이 그의 낭비벽. 물론 세금을 많이 거두기도 했다. 낭비가 그냥 낭비도 아닌 것이, 전비 지출에다 무덤 공사에 자녀들 결혼 비용까지 추가되었다. 그 중에 가장 잘 알려진 것이 임진왜란.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명나라의 영토가 아직 공격 받지 않은 시점에서 조선까지 병력을 보내서 도움을 주는 것은 강렬한 조선 보호 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만력제가 조선을 적극적으로 도운 이유는 전근대시대, 당대 정치구도를 통해 알 수 있다. 당시 만력제는 쟁국본과 태업으로 신료들과 유례없는 대립을 벌이고 있었다. 자기 뜻대로 하려면 황제의 권위를 세워야 하는데 때마침 조선에서 전쟁이 터졌다. 대국의 천자로서 위기에 빠진 번국, 그것도 번국 중 으뜸인 조선을 구하고, 천자의 권위에 도전한 오랑캐를 물리쳐 천하의 질서를 바로잡는다! 만력제의 입장에서는 아주 매력적인 권위획득 수단이다. 게다가 실무는 일선의 장수와 관료들의 몫이니, 힘들여 일하지 않아도 된다. 이렇게 보면 유독 적극적이었던 것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터무니없는 망상을 감안하면 그 판단은 의외로 옳았다. 그러니까 만력제는 황실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 조선 출병을 강행했지만, 왜군의 전투력을 봤을 때는 조선에서 싸운 것이 오히려 명나라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왜군오닌의 난 이후에 150여 년간 지속된 센코쿠 시대 때문에, 대규모 회전에서는 동아시아에서 유례없는 실전경험을 가지고 있었다.[15]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원정 직전에 실시한 간토 원정(호조 우지마사 정벌)에 30만을 동원할 수 있었는데, 이런 것이 가능했던 나라는 세계에서 명나라오스만국 정도 밖에 없었다.[16] 어차피 히데요시의 망상은 명나라 정복이었으므로, 명나라가 돕지 않아 조선이 정복되었다면, 왜군은 병참기지를 확보하고, 산해관을 넘을 필요도 없이 수군을 동원해 황해를 건너 중국 서해안에 상륙할 수 있기 때문에, 중국 내에서 전쟁은 불가피했다. 물론 일본이 명나라를 정복하는 것은 당시 일본의 국력으로서는 불가능에 가깝지만, 자국 영토가 전쟁터가 되어봤자 승리해도 본전도 못 건지기 때문에, 조선에서 싸우는 게 확실히 명나라에 유리한 것은 사실.

명군 참전에 따른 세력 균형은 일본이 전쟁에 주저하게 되는 큰 원인이 되었다. 명군은 보급문제와 외교왜군을 물리치겠다던 심유경의 농간 때문에 1593년 이후로는 잠시 남진을 거부하는 등 소극적이었지만,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다시 20만의 대군을 파견해 왜군을 막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사로병진 작전 참고)

또한, 병력만 파병한 것이 아니다. 조선 백성들이 "왜적" 때문에 수확을 못해 굶주린다는 소식을 들은 만력제는 명나라의 재정을 털어 곡창 산둥 성을 백만 석을 매입해 조선 백성을 위해 원조했다. 말이 100만 석이지, 1석이 89kg이므로 100만 석이면 약 9만 톤이다. 9만 톤을 전근대적 수단으로 황해를 건너 옮긴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지는 명약관화다. 이러한 지원이 없었다면 경신대기근급 참사가 찾아왔을 가능성이 높다.

지난해에 왜적의 변란 때문에 때맞추어 수확을 못하였고 겨울이 깊어서 왜적이 물러간 다음에야 비로소 추수를 했는데, 지금 파종기에 미쳐 모 한 포기 없으니 사람이 모두 절망하였다. 벼의 종자 값이 백미와 같았다. 민간이 궁하고 곤란하여 기아가 날로 심했다. 계사·갑오년에는 공가와 사가에 아직도 창고에 간직한 것이 있어 매매할 길도 있었으나, 오늘은 사변이 난 지 3년이 되어 곡식을 거두어들일 사람이 없고, 분탕은 너무 심하여 황폐한 땅이 천리인 데다, 더욱 길가의 곡식은 전부 왜적이 거두어 가니, 인민이 죽음에 임박하여 하늘을 우러러 한탄하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하늘과 같은 황은(皇恩)을 힘입어 산동성의 소미 백여만 석을 우리나라에 운송하여 각처에 나누어 구제하게 되니, 전라의 고금도·전주·남원 같은 데는 각 역참에 온 쌀이 수천여 석이라 굶주린 백성이 많이 의지하여 생명을 연장하였다. 다음 가을에 대미(大米)로써 갖추어 바친 까닭에 이름을 환대미(換大米)라 하였다.
- 조경남, 난중잡록(亂中雜錄)


이 때문에 관련 야사가 꽤 많다. 조선 입장에서는 좋은 사람이기는 하지만, 정작 명나라 국내 내치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도 없이 수십 년 동안 놀고 자빠졌던 황제였기에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만들어져 나온 것. 조선 후기의 군담소설 임진록에서는 "조선 사신의 정성에 감동했다"고 하기도 하고, 꿈에서 삼국지관우가 나와서 "선조가 장비의 환생이고 만력제가 유비의 환생"이라고 한 바람에 "나는 유비, 선조는 장비"유비랑 장비가 들으면 무덤에서 통곡할 일이다라고 철석 같이 믿었고 군사를 보냈다고 한다. 임진왜란 이후에 중국의 관우 신앙이 조선으로 전래되었는데 그것의 영향으로 보인다.

다른 야사는 명나라에 파견된 사신을 수행하던 조선의 역관 홍순언에 얽힌 설이다. 그가 명나라 관원들의 접대를 받아 연경의 초호화 기방에 갔는데, 거기 접대하러 나온 기녀가 누명을 쓰고 몰락한 명문가 딸인 것을 알고 가진 돈을 털어 건네 주고 그냥 나왔다고 한다. 그 기녀는 그 돈으로 기방에서 몸을 빼내 부모의 장례를 치르고, 나중에 병부상서였던 석성(石星)의 애첩이 되었다(!). 그때 받은 고마움을 갚기 위해 석성에게 계속 조선에 출병해 달라고 졸랐고, 석성은 애첩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다른 관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하게 파병을 주장했다는 야사.

전술했다시피, 자국 내에서 고려천자(高麗天子) 또는 조선황제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 한마디로 '너 대체 어느 나라 황제냐?'고 비꼰 것이다.

그 덕에 나중에 청나라 만주족의 지배를 받는 중국인(한족)들로부터는 미움을 받는데 정작 조선에서는 만동묘까지 만들어다 떠받드는 위치로 격상되었다. 조선에서는 당파를 막론하고 상당한 추종자들이 생겨났고, 그의 공덕을 기리는 만동묘와 대보단[17]숙종 대에 조선 땅에서 세워지게 되어 영조, 정조대에도 신나게 왕의 참배와 제삿밥을 먹게 된다[18]

나중에는 삼정승 위에 만동묘지기라는 말이 나올 만큼 세도를 부리게 되는데, 결국 흥선대원군서원 철폐 때 시범타로 철폐된다. 곧 복구되기는 하지만. 심지어 일제강점기에도 만력제에 대한 제사는 계속 행해졌고, 중일전쟁이 발발한 직후까지인 1937년까지 계속되었다는 기록이 있다.[19]

이렇게 본토인 명나라에서는 개밥 취급임에도 조선으로서는 만력제에 대한 입장이 다를 수 밖에 없는 것이, 만력제가 정부 재정만 턴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비인 내탕금까지 털어 조선 백성을 구제했다는 것이 기록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정작 이여송의 귀한 명나라 군마 1만 2천~1만 5천은 보급을 못 해줘서 굶겨죽였다.(#한 견해)[20] 조선에서 이 양반의 제사를 계속한 것을 사대주의의 극치로 비웃기는 하지만, 사료를 살펴보면 (제정신으로 했든 미쳐서 했든) 만력제의 강한 의지에 의해 조선이 도움을 받은 면도 있는게 명백한 사실이다. 그래서 당시 우리 조상이 재조지은이라며 그가 죽은 다음 수백 년 간 제사를 계속한 것에 대해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도 많다. 자기네 집 기둥 뿌리를 뽑아다가 남의 집 받쳐준 셈이니, 도움받은 조선의 입장에서는 눈물나도록 고마운 것은 당연지사. 그 열정으로 자기 나라도 관리 좀 할 것이지

그리고 그 계보를 장제스저우언라이가 이어받았다.

생각해보면 미국 독립전쟁을 지원해준 프랑스 왕국과 비슷하다. 프랑스영국 골탕먹이려고 이 짓을 하다가 나라 말아먹고 프랑스 혁명이… 물론 미국에서는 자기네 돈 날아간 게 아니니 아무래도 좋았지만.

5.3. 그외의 낭비[편집]

만력삼정 진압에 든 비용만큼이나 만력제의 무덤 건설 비용[21]은 엄청났다. 진시황? 깊이 67m, 총 면적 1,200m2나 되었으니.

자녀에겐 더 후했다. 아들인 복왕 주상순을 장가 보내는데 은자 2,400만 냥을 쓴 적도 있다는 기록도 있다. 그것도 임진왜란 직후이자 양응룡의 난이 진압되지도 않은 1599년에. 이쯤 되면 만력삼정 쯤은 핑계로 보인다.

이러한 낭비가 본질적인 것은 아니라는 반론도 있는데, 만력제 말기의 명나라의 재정은 수년간 흑자를 기록했다는 것이 그 이유. 뒤에 보면 태창제가 그 넘치는 자금을 써먹기도 하고.

하지만 그 풍부한 재정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세금 증액 때문일 뿐이었고, 은광에 부여된 '광세(鑛稅)의 화'로 그 결과 소주(蘇州)와 산동의 임청(臨淸) 등지에서 민란이 잇달아 일어났다는 점에서 낭비도 큰 문제가 맞다. 물론 황제의 태업으로 이 낭비를 막기 위해 어떤 정치적 노력도 없었다.[22]

심지어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를 대비하기 위한 군비가 모자라 황제 개인계좌인 내탕금에서 이를 충당하자는 신하들의 의견[23]까지도 거부. 한마디로 낭비한 게 맞다.

6. 말년[편집]

야사 한토막. 만력 41년(1613년) 9월의 어느 아침에, 튼튼한 말을 탄 한 이민족 여인이 만력제의 시야에 들어왔다.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 광경에 황제는 질식할 것 같았다고 하며, 말발굽 소리는 그의 신경을 밟는 것 같아서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느끼게 하였다고 한다. 말이 뛰어오자 먼지가 일었는데 먼지가 마치 구름처럼 말의 사방을 에워쌌으며 말은 멀리서 가까이 다가오다가 순식간에 만력제 앞에 나타나서 만력제 말에 타 있는 기수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하기도 전에 그녀가 눈앞에 나타나서, 손에는 긴 창을 들고 만력제를 향해서 돌격해왔다. 만력제는 큰 소리를 지르고 나서야, 자신이 용상에 누워 있으며 이마에는 식은 땀이 엄청나게 흐르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한마디로 꿈이었던 것이다.

만력제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지만, 말년에 들어서 허약해진 몸은 아파오고 있었다. 곁에 있는 환관은 그를 위하여 이마의 땀방울을 닦아 주었고, 그는 환관에게 명령하여 대신들을 불러오라고 했다. 대신들은 이렇게 황제를 대면하는 것이 사실인지를 의심할 정도로, 황제와 만나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신하들은 줄줄이 들어와서 처음 보는 만력제의 용상 아래에서 무릎을 꿇었다. 황제는 그들에게 자기가 꾼 기괴한 꿈을 이야기하자, 사관은 황제의 말에 따라서 적었는데, 만력제는 신하들에게 꿈을 이야기해주고 이 꿈의 뜻을 풀이해 주라고 신하들에게 이야기했다.

그대들은 피휘를 할 필요가 없다. 기탄없이 말해 달라.


그러자 관리들은 금방 답을 내놓았는데, 그 해석은 이러했다. 꿈 속의 이민족 여자가 말을 타고 창을 들고 있다는 것은, 대명제국의 강산을 빼앗겠다는 뜻이라고.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만력제는 그 해몽을 믿었는지 아닌지는 몰라도 그 말을 듣고도 계속 놀아제꼈다. 그러다가 만력 44년(1616년)에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가 허투하라에서 칸자리에 올랐을 때, 만력제가 3년 전의 꿈을 기억해 냈을지는 참 궁금한 사실이다. 자신의 꿈에 나왔던 누르하치가 중국의 동북부에서 나타났지만, 만력제의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이미 발생한 사실에 대하여 황제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신중해서가 아니라 어리석어서였다. 변방의 분란도 그의 식어버린 열정을 되살리지 못했고, 이는 명나라의 파멸로 이어졌다.

만력 47년(1619년) 9월, 이부상서 조환의 호소에 의해, 조정백관은 문화전 앞에 줄줄이 무릎을 꿇고, 황제가 친히 조회에 참석하여 정사를 논의할 것을 부탁했다. 관료들이 이런 최후의 방식으로 황제에게 항의를 표시한 것이다. 관리들은 모두 모였으나, 오로지 황제만 빠진 상태였다. 황제는 자신이 참석하지 않는 것으로 그의 존재를 드러냈고, 침묵으로 권위를 나타냈다. 하루 종일 동안 황상은 아무런 명령도 내리지 않아서, 항의하던 관리들도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졌다. 그들은 스스로 일어나서 항의를 끝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계속할 수도 없었던 상황이 된 것이다. 게다가 나이들고 약한 관리들은 하루 종일 무릎 꿇고 있으니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는 상태가 되었다. 황제와의 힘겨루기에서 관리들이 우위를 점할 수는 없었고, 결국 사태는 수습이 곤란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자 황제는 대충 때가 된 것을 파악하고는 환관을 보내서 문화문에서 자신의 뜻을 낭독하게 하는데, 그 내용은 황당하기 짝이 없다. "모든 관리들은 집으로 돌아가라." 그리고 조회에 참석하는 문제에 대하여는 그저 두 글자로 답했다 "면담(免談)=말을 꺼내지 마라." 대면보고가 꼭 필요하세요? 호호호

그러자 어이가 안드로메다로 날아갈 뻔한 조환은, 어이를 붙잡고서 황제에게 글을 올려서 이렇게 물었다.

만일 어느 날 계문(북경서쪽)이 유린당하고, 철기가 경교(京郊)를 짓밟을 때도, 폐하께서는 여전히 깊은 궁궐에서 아무 걱정 없이 베개를 높이 베고서, 병을 핑계로 해서 물리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고집이 더럽게 센 만력제는, 관료들의 압력에도 전혀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이와는 반대로 그는 오히려 자신을 위해주는 관리들을 더욱 미워했다. 그렇게 신나게 나라를 말아먹은 만력제는, 그가 황제의 자리에 있은 지 48년이 지난 만력 48년(1620년), 국가에는 재앙을 남기고 아주 평안하게 세상을 떠난다. 그는 자신이 친히 설계에 참여한 정릉(定陵)에 묻혔다. 그의 관은 효단황후와 효정황후, 즉 공비 왕씨 사이에 놓였다.

7. 말말말[편집]

숭정제에게 망국의 군주라고 무지막지하게 비난해서는 안 된다. 그 책임은 만력·태창·천계에게 돌아가야 한다. 이들에게는 제사도 지내지 말아야 한다. 만력제: 조선 가서 얻어먹으면 태창제는 왜[24]


강희제

神宗 萬曆帝

8. 기타[편집]

  • 만력제의 묘인 정릉(定陵)[26]은 1956년 발굴된다. 당시 발굴을 주도한 사람은 베이징 부시장 우한(吳晗)이다.[27]

  • 당시 정릉에서 발굴된 부장품의 일부와 만력제, 효정현황후 왕씨, 후비들(공각황귀비 정씨, 공순황귀비 이씨)의 유골은 문화대혁명 때 봉건의 잔재로 규정되어 홍위병들에 의해 바위로 찍혀 부숴지고 불태워진다.[28] 원래 발굴 의도는, 정말 만력제가 아파서 30년간 정사에 나오지 않았는지를 검증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이때 그가 한쪽 다리가 짧다는 사실과 아편 중독자였다는 사실은 밝혀졌지만, 구체적인 질환에 대한 연구가 한창 진행되던 중에 유골과 부장품이 모두 불타버리면서 정확한 진상은 오늘날에도 알 수 없게 되었다. 이제는 신뢰성 있고 자세한 기록이 발굴되지 않는 이상, 진상은 영원히 미궁 속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만력제의 유골은 오늘날 전혀 남아 있지 않다.[29] 참고자료당시 파헤쳐진 만력제의 유골 혐짤 주의만력제 유골1만력제 유골2만력제의 옷 그러나 발굴이 제대로 진행되었어도 아마 심각한 훼손을 면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당시 중국은 정릉과 같은 대형 무덤을 발굴하여 조사할 만한 기술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능 안에 있던 유물들은 놀랍게도 거의 원형으로 보존되어 있었지만, 명 황실의 비단은 탈수보존할 수 있는 기술이 없었으며 냉동실 하나 없어서, 많은 유물들이 복원 불가능한 상태로 훼손되고 말았다. 그래서 정릉은 지금까지 발굴보고서가 단 한 부도 나오지 않았다. 발굴에 참여한 연구원들도 상당수가 문화대혁명 때 박해를 받고 죽거나 감금당해서, 간략한 논문조차 나오지 못했다.그렇게 많은 돈을 들여 조성한 무덤이 이런 비참한 꼴이 된 것을 보면, 천벌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 복왕의 아들 주유숭명나라 멸망 후 남명 정권의 초대 황제인 홍광제가 되면서 복왕도 황제로 추존되었다. 결국 만력제가 은근히 바라던 대로 사랑하던 아들이 황제가 됐으니 소원성취는 했는데 문제는 나라가 무너지고 북경이 황폐화 되고 결국 홍광제도 무능한 관계로 겨우 1년 만에 청군에 붙잡혀서 처형되었다.

  • 신종 만력제의 재위 기간은 조선 선조(재위 1567∼1608)와 광해군(재위 1608~1623)의 재위 기간과 겹친다.

  • 만력 44년인 1616년 중국 최초의 천주교 박해사건인 남경교안이 일어난다. 흔히 교안(敎案) 하면 청나라 말기 서구세력의 유입 이후의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시기부터 시작한다. 생각보다 꽤 이른 시기임에도 중국 역사상 최초의 그리스도교 박해는 아닌데, 이미 당대의 불교 박해 때 경교(네스토리우스파(이단)가 꼽사리 끼어 박해 당했기 때문이다.

9. 대중매체에서의 등장[편집]

  • 베르나르 베르베르 3권 말미에서 호랑이국의 황제와 그 제국이 묘사되는데 자세히 보면 진시황과 만력제를 섞어 놓았음을 알 수 있다. 특히나 기계로 된 황제를 세워뒀는데도 국가가 시스템에 맞게 잘돌아간다며 거대한 구심력[31]에 의해 국가가 활력을 잃고 경직화 되어가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했다.

  • 김성한 작가의 소설 7년전쟁에서 특유의 찌질하고 무능한 군주로 등장한다.

  • 2015년KBS 대하드라마 징비록에서도 출연했는데, 대신 중 한 명이 "조선일본과 손잡고 쳐들어올 지도 모른다"는 경고하는 와중에도, 자기가 궁녀들과 함께 갖고 놀던 사슴벌레를 보내 목을 물어뜯게 하겠다고 할 정도로 현실 감각이 없다. 거기에 후궁들과 내기를 하면서 은을 퍼다주기까지… 그야말로 암군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허나 따져보면 이마저도 만력제를 미화한 것이라 볼 수도 있다. 얼마나 막장이었으면 저게 미화한 거냐? 최소한 징비록의 만력제는 석성같은 신하들을 만나주고 일을 하며 그 말을 충실히 따르고 있으니… 기묘하게도 하는 말 중에 틀린 말이 별로 없다(!) 여담으로 만력제를 연기하는 배우 장태성이 전작 정도전(드라마)에선 천민 황천복을 연기했는지라, "비참한 삶을 살아간 천복이가 대국의 황제로 환생했다"는 드립도 있었다.

  • 임진왜란 1592에서도 잠깐 잠깐 등장. 첫 화가 방영되었을 때 대신들과 탁상에 겸상하고 차담회를 하는 모습으로 묘사되었기 때문에 CCTV판 방송을 본 후 중국 웹에서는 "엥? 만력제가 일을 하다니?"라는 충공깽스러운 반응이 나왔다.[32] 그리고 다음 화부터는 본래대로 천하에 둘도 없는 게으름뱅이로 묘사되지만, 임진왜란 정세에 대해서는 신경쓰는 모습을 보인다. 그런데 만력제 역을 맡은 배우가 후덕하지 않고 아주 멀쩡한 체형이라 고증 오류


이처럼 미디어에는 그래도 일은 하는(?) 황제로 나오지만, 실제로 고증을 따지자면 신하들은 빈 용상(…)을 두고 일을 하는 상황이 나와야 한다. 아무래도 묘사상의 애로사항이나 독자와 시청자들의 혼란을 막기 위해서인 듯. 물론 만력제 집권기가 임진왜란 시기만 나온다면 그나마 이해는 된다.

10. 가족 관계[편집]

  • 아버지 : 12대 목종 융경제 주재후

  • 어머니 : 효정장황후 이씨(孝定莊皇后 李氏)


파일:external/www.zwbk.org/20110413045607375_9233.jpg

  • 황후(아내) : 효단현황후 왕씨(孝端顯皇后 王氏) - 만력제와의 사이에 자식이 없었다.

  • 아들
    총 8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빨리 죽은 아들들이 많다.

    • 광종 태창제 주상락 : 만력제의 장남. 효정현황후 왕씨 소생, 명나라 14대 황제가 된다.

    • 복충왕 주상순 : 만력제의 3남. 공각황귀비 정씨 소생, 남명의 황제 주유숭의 아버지로, 나중에 공종으로 추존된다.

    • 계단왕 주상영(桂端王 朱常瀛) : 만력제의 7남. 공순황귀비 이씨 소생, 남명의 황제 주유랑의 아버지로, 나중에 예종으로 추존된다.


  • 장녀와 차녀를 제외하고는 모두 일찍 사망했다.

[1] 재위기간 2위는 바로 가정제 주후총. 무능한 인간 2명이 명나라 280년 중에서 93년 271일을 해먹었다. 나라가 안 망할 수가 엄써 [2] 외국에선 고려가 망한 뒤에도 조선을 고려라 부르기도 했는데, 당나라가 망한 뒤에도 일본이 한동안 중국당나라라 부른 것이랑 비슷한 이치. 그때 일본까지 갈 것도 없이, 지금 우리나라 노인들 중에도 러시아소련이라 부르는 사람이 꽤 있다.[3] 밑에서도 언급되는 만력제의 생모로, 궁녀 출신이었다.[4] 황제가 구속 영장(?)을 발부하기도 전에 환관들이 이를 귀신같이 알아채고 저택에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들어가지 못하게 봉쇄하는 바람에, 십 수 명이나 굶어 죽었다.[5] 이 해석에 따르면, 장거정 일파의 한 축이었던 명장 척계광 또한, 군사적 업적은 대단하나 사생활에서는 뇌물 취득, 공금 횡령, 축첩 등으로 부패한 관료였다고.[6] 사표도 받아주지 않고 바로 파직한다. 근데 이 때는 몽골과의 전쟁이 한창이라서 장수 하나가 아쉬운 마당이었다. 그리고 몽골군한테 명군이 깨지는 걸 보다 못한 하남도 어사 부광택이 "척계광 좀 다시 불러 달라"고 애원하자, 쓸데없이 부광택의 2달치 월급을 빼앗는 병크까지 터뜨렸다.[7] 단, 장거정은 평소에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이윤·곽광과 같은 명신에 비유해 아부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하는데, 이들은 확실히 명신이었지만 자신의 주군이 정치를 게을리한다는 이유로 주군을 그 자리에서 내쫓은 신하들이다. 군주인 만력제가 이런 비유를 듣고 그러려니 했을 리가 만무하다. 물론 장거정은 아부를 좋아했을 뿐이고 실제 만력제를 내쫓을 생각은 없었을 것 같긴 한데, 차라리 내쫓았다면 명나라의 수명은 길어지지 않았을까(…)?[8] 군주가 신하의 3년 상을 제하고 벼슬을 계속하게 하는 것[9] 대부분의 신하들은 탈정 명령을 씹고 고향에 물러나 3년 상을 지냈다. 당연히 탈정이 순수한 만력제 본인의 뜻이라고 보는 사람은, 당시나 지금이나 아무도 없다.[10] 자성황태후의 차남이며 만력제의 동복 동생인 주익류(朱翊鏐)를 말한다.[11] 신하들이 모여 땡볕에서 직무 복귀 데모를 벌이고 픽픽 쓰러져 나가는 이까지 속출했기에 환관들이 물과 얼음, 얼린 오이라도 주려고 했으나, 황제는 쿨하게 "물은 셀프"라며 방치했고, 결국 신하들은 나가떨어졌다. 한편 만력제는 매일 수천 건씩 쏟아져 올라오는 상소를 방치하고, 그 위에 엎어져 잤다고 한다.[12] 하도 어이없는 사건인데다가 태자가 최대 수혜자였기에 동림당과 태자 측의 자작극이라는 설 역시 존재한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방종철의 대처 역시 어이없긴 마찬가지.[13] 그런데 여우의 침은 호연법(狐涎法)이라 해서 고독의 재료였다. 여우의 군침은 동양에서 상당히 불길하게 여기는 것이었는데 이것을 정력을 위해 먹었다는 것은…[14] 명나라 형법상 죄가 정해지지 않고 20년이 지나면 무죄 방면하게 되는 시스템이었다.[15] 임진왜란 300년전인 1270~1280년의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왜군은, 몽골군이나 고려군에 상대도 안 될 정도로 군사적으로 후진국이었다. 당시에도 일본은 무가(사무라이)가 지배하는 상태이기는 했지만, 기껏해야 씨족이 거느린 사병으로 수백~수천 명 규모의 전투 수준에서 고립되어 외부의 적과 전혀 싸운 적이 없는 섬나라 육군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냈다. 그러나 계속되는 난세의 도래와 신무기 조총의 도입으로 군소영주가 몰락하고 대영주만 살아남으면서 수만 명 규모의 전투가 벌어지기 시작했고, 이렇게 육전의 실력이 향상된 것이다.[16] 절대왕정이 확립되지 않은 유럽 국가들도 이정도 동원은 불가능했다. 임진왜란보다 조금 후에 벌어진 유럽30년 전쟁 (1618-1648)에서 가장 많이 병력을 투입한 합스부르크군(스페인+오스트리아)이 30만을 동원 할 수 있었고, 그 뒤를 이어 스웨덴군프랑스군이 각각 15만정도를 동원했다.[17] 만동묘는 송시열의 제자들이, 대보단은 국가에서 세운 것이다. 즉 당시 민간, 정부 할 것 없이 숭명사상과 만력제의 공덕을 기리는 풍조가 있었다는 것.[18] 이 양반에 대한 은혜를 갚는답시고 재조지은이니 해서 병자호란을 불러온 간접적인 원인이 되긴 해도, 그건 청나라를 지나치게 자극한 조심스럽지 못한 외교와 함께 이괄의 난 때문에 조선의 방위군이 무너진 결과지, 이 양반의 문제는 아니다. 더구나 이런 만력제 숭배는, 일부 현실주의적 대신을 제외하고는 당파를 막론한 현상이었다. 특정 당파나 특정 임금의 문제가 아니었다.[19] 충청북도 괴산군 화양동서원에 있는 만동묘가 바로 만력제를 모신 사당인데, 흥선대원군의 서원 정리 사업 때 폐지되었다가 대원군 실각 후인 1874년에 복구되었다.[20] 다만 이 군마는 풍토병 때문에 죽었다고 볼 수도 있다. 여하튼 북군의 핵심은 기마병이었으니.[21] 800여만 냥, 2년간 전국 토지세 총 수입에 맞먹는다고.[22] 심지어는 이 생산되지 않는 지방에도 광세가 물려졌다. 그러나 1602년(만력 30) 만력제가 지병으로 죽을 지경까지 가자, 무슨 생각이었는지 갑자기 "광세를 모두 폐지하고 쫓겨난 이를 모두 복권시킨다"는 어명을 내리면서 풀리나 싶었는데, 바로 그 다음날 쾌차해서 그 계획을 뒤집어 엎는다. 심지어 황제를 도와 광세를 물리던 환관들도 반발했으나, 거기에 더해 자금성에 건청궁과 곤녕궁을 확대 중건하라는 명을 내린다. 이런 개판인 상황이니 난이 일어나지 않는 게 이상하겠지.[23] 황제 개인이 가난했으면, 신하들이 이런 의견을 내지도 않는다. 만력제 개인 재산이 명나라 국가예산을 웃돌았다는 사실을 신하들이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의견이 나오는 것이 가능했다.[24] 재위 기간이 심하게 짧아서 그렇지 암군은 아니었다. 쇠퇴기의 임금이었다는 이유로 나머지 둘과 같이 책임을 추궁받자니 태창제는 아무래도 억울한 감이 있다.[25] 사실 복왕 주상순은 탐학질이 심했기에, 이자성이 그를 생포해서 백성들 앞에 "이놈을 어떻게 처리할까??"라고 묻자 백성들이 하나같이 씹어먹을 기세로 "죽이라"는 말만 했다. 주상순이 끔살되자 백성들은 매우 기뻐했을 정도이니 얼마나 탐학질이 심했나를 짐작할수 있다.[26] 명 13릉에 가면 흔히 지하궁전이라는 곳을 가는데, 그 지하궁전이 바로 정릉이다.[27] 후일 그가 쓴 희곡이 바로 해서파관. 그리고 이 희곡은 문화대혁명 기간 중에 마오쩌둥가정제로 비하한 내용이라 해서 공격받고, 우한 자신도 죽게 된다.[28] 그날 폭우가 쏟아졌기 때문에, 그나마 남아있던 재도 사라졌다.[29] 머리카락의 일부만 남아 있다.[30] 왜구네이터편에서 나대용이 거북선을 만든 그 나대용임이 밝혀졌다. 일단 시기상 임진왜란 직전.[31] 다만 책에서 의미하는 구심력 - 원심력의 관계와 실제의 관계는 전혀 다르다. 자세한건 구심력 항목 참고. 베르나르 베르베르도 구심력 항목에 적혀있는 원심력↔구심력의 오류를 범한 것으로 추측된다.[32] 상술한 바와 같이 만력제는 신료들이 그 얼굴을 까먹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