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앙투아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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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앙투아네트. 풀네임은 마리 앙투아네트 조제프 도트리슈-로렌(Marie Antoinette Josephe Jeanne d'Autriche-Lorraine).

1755년 11월 2일 ~ 1793년 10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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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자녀4. 평가
4.1. 정치적 측면4.2. 성격4.3. 능력4.4. 사치4.5. 문화4.6. 최후4.7. 케이크 루머
4.7.1. 루머에 대한 분석
4.8. 최후로 남긴 서신
5. 여담6. 대중문화에서

1. 개요[편집]

"하느님, 우리가 잘못을 저질렀다면, 분명 우리는 그것에 대해 속죄했습니다. - 1790년 10월의 일기


화려해서 더욱 외로웠던, 베르사유의 마지막 장미. 살아 생전엔 수많은 미움과 증오, 원망을 받았고 죽은 후엔 왕정 시대의 왕비로선 나쁠게 없던 여인으로 재평가받은 인물.

프랑스루이 16세의 왕비.

오스트리아식(독일어) 이름은 마리아 안토니아 요제파 요하나 폰 외스터라이히-로트링겐(Maria Antonia Josepha Johanna von Österreich-Lothringen). 또는 성을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von Habsburg-Lothringen)으로 쓰기도 한다.

마리 앙뚜아네뜨, 마리 앙뚜아네트, 마리 앙투와네트 등으로 많이 쓰이나, 외래어 표기법에 근거하여 표기하면 마리 앙투아네트다.[1]

2. 생애[편집]

1755년 11월 2일에 오스트리아마리아 테레지아프란츠 슈테판11녀비엔나에 위치한 호프부르크 궁전에서 태어났다. 14세 때 오스트리아프랑스의 우호를 증진시키기 위해 루이 15세의 손자 루이 16세에게 시집와서 왕세자비가 되었다. 얼마 후 시할아버지 루이 15세천연두로 세상을 떠나고 남편이 왕위에 올라, 마리 앙투아네트는 고작 10대의 나이로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다. 응?!

루이 16세와의 사이에서 2남 2녀가 있었다.

3. 자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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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초상화는 당대의 유명 여성화가이자 '앙투와네트의 화가'라 불린 엘리자베스 루이즈 비제 르브룅의 작품으로,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처형되기 2년 전의 작품이다. 당시 연속된 사건으로 인해 왕비의 표정은 수심으로 가득차 있다. 배경의 요람은 차녀 소피아 알렌 베아트리스의 것으로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 죽었기 때문에 검은 천이 둘러져있다.)

  • 장녀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
    1778년 ~ 1851년. 마담 루아얄이라는 칭호가 있었다. 여담으로 프랑스 왕실은 왕비의 출산 시에 아무나 공공연하게 입회하도록 하는 관행(...)이 있었는데,[2] 이 때 너무 많은 구경꾼이 몰려들어 마리 앙투아네트는 거의 질식해서 죽을 뻔 했다고 한다. 루이 16세는 안전을 고려하여 이후의 출산은 허가받은 소수만 참관할 수 있도록 관행을 바꾸었다. 의사가 산후처리를 잘못하는 바람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많은 출혈을 했고, 그래서 딸을 낳은 후 기절했다. 그 후에는 출산으로 인한 치질로 고통스러워했다고 한다. 마리 테레즈를 낳은 지 1년 후에 임신을 하나, 유산한다.

  • 차녀 소피 엘렌 베아트리스
    1786년 ~ 1787년. 어린 나이에 죽는다.


하지만 불행한 삶을 산 맏딸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를 제외하면 모두 어린 나이에 죽었다.

프랑스 혁명단두대에서 처형당했으며 남편을 비롯한 가족 대부분이 혁명으로 인해 처형당하거나 몰락하게 된다.

비교적 오래 산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 역시 자녀를 낳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에,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와네트의 직계는 단절되었다.

그 외에 남편과 함께 아이를 4명 입양했다. 이 아이들은 입양된 순서대로 아르망(Armand) 혹은 자크(Jacques)라 불린 고아 프랑수아 미셸 가녜(Francois-Michel Gagné)(1776년 입양)[3], 세네갈인 장 아밀카르(Jean Amilcar)(1787년 입양)[4], 궁전 하녀의 딸 에르네스틴 랑브리케(Ernestine Lambriquet)(1788년 입양)[6], 엄마를 잃은 시종의 딸 조이(Zoe)(1790년 입양)[7]

4. 평가[편집]

프랑스 혁명 당시에는 극도로 이미지가 안 좋았지만,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당대 여론에 퍼져 있던 대부분의 평판은 부정되고 있는 편이다. 왕정 시대의 프랑스왕비로서는 특별히 부적절한 행동이 없었다는 평가. 하지만 시대가 원한 것은 왕정 시대의 왕비가 아니었다는 것이 그녀에게는 비극이었다.

그녀의 발언 중 유명한 "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된다."는 그녀가 무개념이었음을 증명하는 발언처럼 여겨졌지만, 정작 그녀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또 허영심이 가득한 것처럼 묘사되고 있으나, 실지 그녀가 재위 중 사용한 예산은 공식적으로 책정된 왕실예산 중 1/10에 불과했다. 다만 시기가 워낙 시기였던지라.[8]

후대의 연구자인 안토니아 프레이저는 "그녀의 결점들이 명백하긴 하지만, 그 불행과 저울질해볼 때 하찮은 것에 불과했다"라고 평했다. 다만 프레이저 여사가 역사학자가 아닌 전기작가이며, 영화 <앙투아네트>를 두고 "아름답다! 아름답다!"를 연발할 정도로 앙투아네트에 대해 호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주지해야 할 것이다.

절대왕정 시대의 왕족으로서 교육받았고 그에 따라 행동했으나, 이미 유럽사회는 시민혁명의 물결로 젖어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프랑스의 왕비라는 지위[9]에 있었으나, 그녀에게는 프랑스의 변화를 통제할 어떠한 힘도 주어지지 않았다. 결국 정략결혼으로 시집온 곳의 상황이 너무나 안 좋았기에, 주어진 사료만으로 보면 그 시대의 왕비로서 하자가 있던 것도 아니었고 성격적으로도 모난 곳이 없었지만 프랑스인들에게 증오만을 받고 처형당한 비극적인 운명을 살아간 사람이다.

4.1. 정치적 측면[편집]

일단 그녀의 정치성을 논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사실로 그녀가 오스트리아 황족 출신이라는 것을 들 수 있다. 비록 프랑스의 왕비이긴 하지만 그녀가 가진 합스부르크 왕가의 피는 언제까지고 그녀의 주위를 맴돌았고, 그 특수한 배경을 제외하고는 그녀를 이해할 수 없다.

당시 독일 지방에서는 프로이센이 강국으로 부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는 이를 견제할 필요를 느꼈고, 그 동맹의 증표로 맺어진 것이 1770년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딸인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15세의 손자인 루이 오귀스트의 혼인이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오스트리아-프랑스의 우호관계를 상징하는 마스코트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10]

하지만 오스트리아프랑스 사이의 관계는 그리 좋지 않았다. 새롭게 나타난 공동의 적을 맞아 손잡긴 했으나 수 백년 동안 계속되어 온 갈등의 골은 그 정도로 메워질 깊이가 아니었다. 때문에 그녀에 대한 국민들의 여론은 그다지 우호적이지 못했다. 이 여론은 신혼초에 후사를 보지 못하고 오귀스트와의 관계가 소원하다는 소문이 나돌며 그대로 굳어졌고, 그 후의 마리는 악의적 루머의 희생양이 되게 된다.

결국 평생 오스트리아 스파이나 오스트리아년이라는 빈정거림을 들었고 루이 16세를 조종하여 프랑스보다는 오스트리아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게 하고 있다는 음모론까지 돌았다. 그러나 이는 반대에 가까웠는데, 마리 앙투아네트는 계속해서 프랑스 정치에 개입하려고 했던 큰오빠 요제프 2세의 요구를 거절했다.

사실 집안내력을 따져보자면 마리 앙투아네트의 모친인 마리아 테레지아는 남편이 황제라곤 하나 사실상 데릴사위이자 허수아비였고, 앙투아네트의 언니들도 남편에게 그다지 순종했던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정작 프랑스에서 남편을 잡고 휘두른다는 이미지였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집안에서 거의 유일하게도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친정어머니의 가르침을 실제로 따르는 편이었다. 혁명 전의 치세에서 루이 16세는 아내의 정치 개입을 철저히 막았고, 마리 앙투아네트 또한 정치에 무관심했다. 애초에 당대 왕비들은 정치 참여가 거의 불가능하긴 했지만, 어머니나 언니들이 하나같이 예외사례들이었기 때문에 마리 앙투아네트가 유별나 보이긴 한다.

하지만 1789년 7월 혁명이 발발하고 루이가 권력을 잃으면서 아내에게 의지하기 시작하자, 점차 정계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짧은 기간이었기 때문에 평가를 내리기에 곤란한 감도 없지 않으나 최소한 왕당파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것은 확실하다. 그녀는 영웅적이라기보단 다른 사람들과 비슷한 평범한 인물이었지만, 당시 왕당파들에겐 거의 성녀와도 같은 완전무결한 여성으로 여겨졌다. 왕당파였던 미라보와 손을 잡고 신권과의 타협을 모색했으며 친정인 오스트리아와 연계하여 군사행동을 유발함으로써 은근히 혁명정부에 압력을 넣기도 했다. 20세기의 소설기인 슈테판 츠바이크는 혁명전에 순수했던 이미지가 혁명을 겪고서 강건해졌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루이 16세는 신체적·정신적 한계가 뚜렷한 바, 차라리 그녀가 혁명 전에 이렇게 성장했다면 더 나았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그러한 그녀가 돌이킬 수 없는 실책을 저지른 것이 있는데, 바로 국왕을 데리고 국외로 도주하려다 적발된 것이다. 이를 일명 바렌느 사건이라고 한다. 1791년 6월 당시 국왕 일가는 파리에 거의 억류되다시피 한 상태였는데, 혁명파와의 의견차를 좁히는데 실패하고 유일한 협력자라고도 할 수 있는 미라보마저 사망하면서 정치적으로 위기에 빠지게 된다. 또한 미라보 사후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를 우두머리로 한 자코뱅당이 득세하게 되자 그녀는 정부를 등질 생각을 하게 된다.[11]

거기에 당시 아르투아 백작이 장인 사르데냐 국왕을 등에 업고 군대를 동원하려 했고, 국왕의 숙모 두명이 프랑스 밖으로 탈출했기 때문에 왕실에 대한 국민의 분노가 격앙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루이 16세가 중병을 앓아 사경을 헤매게 되자, 국민의회는 섭정으로 루이 16세의 가장 큰 반대자인 프로방스 백작을 선출했다. 이 상황에서는 왕세자 루이 샤를의 왕위 계승마저도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미사에 참례하러 떠나는 왕의 마차를 성난 군중들이 둘러싸는 사태가 발생했고, 국왕 호위대조차 혁명 세력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물론, 국왕 부부가 영웅적인 용기를 지녔다면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지도 몰랐으나, 그들은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결국 빠리를 탈출하여 국경으로 향했으나 신속하게 이동하지 못한 탓에 바렌느라는 마을에서 붙잡여 파리로 압송되었다. 최종 목적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국민들에게는 오스트리아 영내로 들어가거나 국경지역에서 오스트리아군과 조우할 계획으로 여겨졌다. 다만 당시 오스트리아의 레오폴트 2세는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12] 정확히 마리 앙투아네트는 알자스를 통해 스위스로 들어가, 왕실에 우호적인[13] 로렌 지방의 지지를 얻으려 했다.

당시의 프랑스 국민들은 엄청난 패닉에 빠졌다. 왕이 자신들을 버렸다는 것만으로도 충격적인 일이었는데다가 루이가 오스트리아에서 군대를 불러들일 경우 그들의 총구가 어디로 향할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미라보의 사망 이전까지 급진파는 소수에 불과했고 다수의 중도파를 왕당파가 포섭해 나가는 형국이었으나, 미라보 사후 세를 불려나가던 자코뱅당이 이 사건을 통해 본격적으로 득세하게 되었다. 왕가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그야말로 땅에 떨어져 결국 루이 16세의 몰락의 단초가 되었고 왕 본인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또 한 가지 문제는 이 사건이 왕비의 주도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안 그래도 그녀는 프랑스의 원수인 오스트리아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온 국민의 증오를 받고 있었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그도 그럴 것이 외국 출신 왕비가 왕을 친정으로 빼돌리고 친정의 군대로 자신들을 공격하려 했다면 국민들이 어떤 심정을 느낄까? 결국 왕실에 대한 동정 여론과 영국식 입헌군주제 논의가 백지화되며 종극에는 왕가와 그녀 자신의 목숨마저 잃는 계기가 된다. 그래도 루이에 대한 여론은 왕비보다는 훨씬 나았는데, 마리에게 무비판적인 민중의 반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의 기준으로 보자면야 국가를 배신한 짓이겠으나 마리는 봉건제 사회의 왕족이었고 그 가치관에 따라 행동했다. 그녀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왕과 왕가였고, 이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지켜야 할 것이었다. 국민이 자신들의 권리를 내세워 이를 위협한다면 외세를 끌어들여서라도 그들을 제압하여 왕실을 복권하는 것이 그녀의 정의였을 것이다. 실제로 그 이전의 시대엔 그렇게 행동했던 왕족들이 간혹 존재했다. 하지만 그녀가 원했던 구체제의 정의는 국민들이 원하는 새로운 정의와 공존할 수 없었고 시대의 흐름 역시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는 1793년 1월 혁명파에 의해 남편이 죽고 나서 유폐되어 있다가, 재판을 받고 10월에 근친상간의 죄목으로 단두대에 올라 처형되었다. 집행자는 18세기의 유명한 망나니인 '샤를 앙리 상송'으로, 젊은 시절 뒤바리 부인과 만난 적도 있으나 나중에 뒤바리 부인을 처형한다. 그 후 루이 16세도 처형한다.

4.2. 성격[편집]

근래까지는 사악하고 사치스러운 이미지로 알려져있었으나 실제로는 프랑스 왕비치고는 오히려 검소한 편이었으며 선량하고 동정심 많은 성격이었다. 사교적이었고 만나는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사근사근했으며,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편견없이 사람을 대했다. 루이 16세가 사냥중에 농민을 다치게 하자 직접 달려가서 간호해주고 모든 손해를 물어주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평생 소식을 했기 때문에 뚱뚱한 다른 왕족들과는 달리 호리호리한 몸매를 가졌다. 식사 시간에 루이 16세가 음식을 깨끗하게 비우는 동안, 마리 앙투아네트는 음식을 거의 먹지 않았다고 한다.

얼굴은 빼어난 미녀는 아니지만 '예쁘장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일단 처녀 때 절세가인으로 전 유럽에 이름을 날렸던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의 용모를 조금 물려 받기도 했고, 무엇보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피부는 아주 뽀얗고 예뻤다고 한다. 천연두로 인한 곰보 + 화장품과 향신료 가득한 음식이 불러일으킨 트러블로 피부가 시궁창(...)이었던 당시 귀족들에게 마리 앙투아네트의 흠 없는 피부[14] 는 칭송의 대상일 수 밖에 없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유럽에서도 피부 미인은 좋은 대접을 받았다.

좀 과장이 덧붙여졌겠지만 그녀의 매력은 외모보다는 타고난 우아함과 예술성에 있었다고 한다. 나긋나긋한 몸동작과 기품은 그녀를 만나는 사람들의 호감을 샀고, 목소리는 노래하는 것처럼 우아했고 뛰어난 화술을 가지고 있었다. 패션 센스도 자연스러우면서 우아하여 프랑스 궁정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고 평가된다.

감자가 아직 "악마의 음식"이라는 오명을 얻으며 보편화 되지 못했을 때 감자 꽃을 모자에 꽃으면서까지 백성들의 감자에 대한 호감을 얻으려 한 적도 있었다. 프랑스 왕비로선 이례적으로 빈민구제에도 관심을 가졌고 취미 중엔 프랑스식 농사 짓기[15]도 있었다.

감자에 대해 좀 더 이야기 하자면, 파르망티에라는 사람이 감자를 보급하여 국민을 먹여살리기 위해 왕과 왕비에게 호소했다. 이에 왕과 왕비는 제빵학교를 열어 서민들이 값싼 감자빵을 배불리 먹을 수 있게 하기위해 그것을 허락했다. 문제는 입이 고급이기로 유명한 프랑스 민중이 "감자빵 말고 밀가루빵을 달라!"라며 폭등하는 밀 시세에도 불구하고 밀가루빵만을 원하였다. 즉, 앙투아네트는 아예 빵집학교를 열어 서민의 식량을 지원하였다. 비싼 밀가루빵이 없으면 값싼 감자빵을 먹으면 되지

맏딸인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 공주가 아직 어렸을때 값비싼 크리스마스 선물을 달라고 떼를 쓰자 '궁전 밖에는 많은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들이 있으니 따뜻한 잠자리와 음식이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가르쳤을 정도. 지금까지도 인구에 회자되는, 나라를 말아먹은 사치스러운 악녀의 이미지와는 정반대의 성품이었다.

혁명 이전의 마리 앙투아네트는 비정치적이며 자선적인 삶을 견지했고, 이는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상적인 입헌 군주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그야말로 시대를 잘못 타고난 비운의 왕비.

4.3. 능력[편집]

14세 때 프랑스로 시집와 왕세자비가 되었기 때문에 모국에서 지적인 교육을 받을 시간이 부족했다. 모친 마리아 테레지아는 16명이나 되는 아이를 낳은데다가 정치로 격무에 시달리고 있었기에 아이들에게 충분히 신경을 써주지 못했다. 11녀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한창 유아기일 때 모친은 7년전쟁을 치르느라 특히 더 바빴다. 따라서 아이들의 교육은 교육담당에게 맡겨두기만 했다.

게다가 마리아 테레지아가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관심이 있었다 한들 제대로 양육했을지는 의문인 것이, 그녀는 자식들을 심하게 편애하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사이가 좋은 자식들도 있었지만, 거의 일평생 사이가 매우 나빴던 자식들도 적지 않았다.[16] 아버지 프란츠 슈테판은 그저 자식들의 응석을 받아주기만하는 성격이었다.

그러나 마리 앙투아네트의 능력에 대해서는 그녀를 가르친 이들 모두가 탄복을 마지않았다. 빈에서의 가정교사는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으나 열의가 부족하다"고 탄식했고, 이후 교육을 맡게 된 대주교는 "모친과 같은 놀라운 지성과 이해력을 가지고 있다"고 평했다. 하지만 집중력도 낮았고 공부에 대한 열의가 별로 없어서, 유년기의 교육은 큰 성과가 없었다.

따라서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는 이를 걱정하여 앙투아네트가 떠나기 전에 수 일간 단둘이 지내면서 많은 것을 가르쳤고[17] 이후에도 측근인 메르시 백작을 통해 마리 앙투아네트의 하루하루를 전해 듣고, 자주 편지를 보내어 위로하고 교육하려 했다. 참고로 마리 앙투아네트가 마리아 테레지아의 말과, 시고모(루이 15세의 세 딸)들의 말을 듣고 뒤바리 부인을 무시하는 상황에서 마리아 테레지아가 어쩔 수 없이 딸을 설득했던 일화가 유명하다. 뒤바리 부인 항목을 참고.

그녀의 남편인 루이는 호인이어서 마리의 부탁을 거의 다 들어 주었는데, 이에 우쭐해진 마리가 남편을 '어리석은 사람' '바보' 등으로 부른다는 말을 마리아 테레지아가 전해 듣고는 이를 엄히 꾸짖었던 일도 있다. 즉 '왕비가 존경하지 않는 왕이 과연 백성들에게서 존경을 받을 수 있겠느냐, 너의 행동부터 고쳐라.'의 논조로 딸을 꾸짖은 것이다. 이렇듯 마리아 테레지아는 시집보낸 마리의 일거수 일투족에 대해 신경을 썼기 때문에 마리는 어머니를 사랑하고 그리워하면서도 매우 두려워했다.

이로부터 4년 뒤에 루이 15세가 승하해, 10대에 즉위하였기 때문에 왕비로서 성숙할 만한 시간을 가지지 못했다.

4.4. 사치[편집]

왕비가 되고 사치도박, 유흥으로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이 있었다. 도박을 좋아했지만 잘 하지는 못하는 전형적인 호구라서 빚을 많이 지기도 했다. 밤새도록 연극을 보거나 무도회를 즐기는 방탕한 생활도 했다. 이 때의 앙투아네트는 확실히 요즘으로 치면 헐리우드패리스 힐튼 같이 왕창 노는 삶을 사는 파티 걸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지만, 딱히 그녀가 방탕한 성격이라기보다는 귀족 사교계 전체에 이런 분위기가 만연했다.

오랫동안 아이를 낳지 못해서 비난을 받기도 했다. 사실 이건 루이 16세가 부부관계를 기피하였기 때문으로, 그에게 일종의 성기능 장애가 약간 있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이 문제로 루이 15세가 특별히 의사를 불러 루이를 진찰하게 했고, 나중엔 친정오빠 요제프 2세가 매제인 루이를 만나러 프랑스에 오기도 했다. 결혼한 지 한참 뒤이기는 하지만, 다행히 마리는 아이들을 연달아 낳게 된다. 또 신혼 시절에 아이를 가지지 못했던 것이 마리 앙투아네트가 유흥에 빠진 원인이라는 설도 있다.

현대인의 기준으로는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봉건군주가 후사를 얻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꽤 심각한 문제였다. 전제군주정에서 왕의 후사가 없다는 것은 곧 국가적 혼란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왕과 왕비의 사이가 소원하고 왕비가 무도회장을 누비며 밤을 보낸다는 것은 호사가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여론은 루이의 성적 능력에 대한 의심과 앙투아네트의 퇴폐적인 사교생활에 대한 관심으로 들끓었고, 이때 형성된 여론은 두고두고 족쇄처럼 그녀를 따라다니게 된다. 보다못한 마리아 테레지아가 서신을 통해 왕비로서의 몸가짐을 갖출 것을 타이를 정도로, 당시 앙투아네트를 둘러싼 여론은 좋지 않았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고 아이를 낳고 나서는 철이 들어서 유흥도 그만두었고, 왕비로서의 위치를 자각하여 왕실에 대한 지지를 회복하려는 노력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여론과 달리 마리 앙투아네트의 소비는 그녀 이전 역대 프랑스 왕비들보다 적었으며, 전체 프랑스 재정상황에 비추어 보면 발톱의 때 만큼도 되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왕족들이 마리 앙투아네트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사치와 도박에 때려박았다. 왕의 동생이었던 프로방스 백작만 해도 궁전을 개축하는 데 100만 리브르가 훨씬 넘는 돈을 썼다.

반면 마리 앙투아네트는 정원을 개축하는 데 엄청난 돈을 썼다고 비난받았으나 실제로는 약 20만 리브르 가량 썼을 뿐이고, 심지어는 뒤바리 부인이 예전에 썼던 가구들을 가져다 썼다고 한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소박한 이미지인 루이 16세보다도 지출이 적었다. 결국 사치는 역대 왕비들과 비교해서는 오히려 수수한 편이었다. 당시 프랑스 전체 예산 중 대략 3%가 왕실 관련 예산이었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 할당된 예산 중 자신이 쓸 수 있는 금액 한도 안에서만 돈을 썼으며, 그 중에서도 10%도 쓰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당시 프랑스의 재정상태가 최악이었다는 것이었다. 프랑스의 재정악화는 태양왕으로 유명한 루이 14세낭트 칙령 폐지 이후 국내 상공업자들의 대부분이 외국으로 도피하면서 국가경제에 큰 구멍이 생기게 된 것, 그에 더해 전 세대의 왕들이 줄기차게 벌인 전쟁들, 특히 미국 독립전쟁에서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을 지원한 막대한 재정지출이 결정적인 계기였다. 더해서 일찍이 명예혁명을 겪어 정치적 안정과 사적소유권을 보장하면서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여 날로 성장하던 영국과의 격차가 국내적인 정치적, 경제적 불안정으로 드러나고 있었던 시기인 셈이다.[18]

애초에 프랑스의 조세 징수권은 예전에 징세청부업자들에게 다 넘어가 있었고, 영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미국 독립전쟁을 지원하는 등으로 재정 압박이 극도로 치달았다. 그 상황에서 기근까지 들자 프랑스 경제가 최악이 되었다. 하지만 이런 근본적 배경은 예나 지금이나 민중들에겐 알 바가 아니었고, 당장 화려한 왕실로 분노가 집중되었다. 그런데 루이 16세의 경우는 사치는커녕 품위 유지도 아슬아슬한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왕비에게 집중포화가 몰릴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사실 소박한 이미지와는 달리 루이 16세의 지출은 앙투아네트보다도 컸다. 돈을 당대로서는 고가인 기계 제작이나 대장장이 일(...) 같은 취미생활에 쏟아부었기 때문. 만약에 둘다 1세기만 앞서 이 땅에 왔더라면 명군/명비로 칭송받을 수도 있었겠지만 현실은 그저 안습. 역대 최저의 사치를 부린 검소한 왕과 왕비였지만, 재정 상태는 그마저도 용납하기 힘들었다는 게 문제였다. 왕족, 귀족 관념에 사로잡힌 이들에게 그 이하의 지출을 바라는 것 자체가 무리한 일이었지만, 프랑스 국민들의 삶은 그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시궁창이었다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이렇듯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비롯한 왕실의 소박한 생활에도 불구하고,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왕실의 사치와 부도덕의 책임에 대한 비난이 끊이지 않은 근본적인 이유로 루이 16세의 소박하고 심심한 성격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선왕인 루이 15세까지만 하더라도 왕에게는 정식 아내인 왕비 말고도 공식 애인인 총희가 있기 마련이었다. 왕비가 공적인 자리에서 왕실의 품위를 지키는 자리라면, 총희는 사교계에서 왕을 보좌하는 자리였다. 때문에 왕이 주관하는 연회의 준비는 왕비보다는 총희의 책임이었고, 사교계의 이목도 왕비보다는 총희에게 집중되었다.

총희는 왕실의 일원이 아니라, 귀족 중에 수완이 뛰어나고 용모가 화려한 여성이 꼽히곤 했다. 즉, 일개 귀족이었다. 때문에 베르사유의 사치와 향략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이 왕가와 왕족보다는 일개 귀족인 총희에게 돌려지곤 했다. 그런데, 루이 16세는 여색에 별 관심이 없어 총희를 두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왕이 주관하는 연회의 준비를 총희가 아닌 왕비가 직접 하게 되는 결과를 불러왔다. 지엄한 왕가의 왕비가 직접 연회를 준비하는 모습이 서민들에게는 왕가가 사치를 하는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고, 그 책임이 연회를 준비하는 왕비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연회를 하지 않으면 왕실이 사치를 부린다는 누명도 쓰지 않고 국가의 재정도 아낄 수 있겠지만, 당시 귀족들에게 베르사유에서 열리는 연회는 정치의 장이기도 했다. 서민들 입장에서야 높으신 분들의 향략으로 보였겠지만, 나라의 유력자들이 모여 비공식적인 회담이 오가는 정치공간이었던 것이기에 그만 두기도 불가능했다.

4.5. 문화[편집]

항상 유행의 최첨단에 섰던 패션 스타였다. 로즈 베르탕이라는 평민 출신 드레스 디자이너와 개인 헤어 스타일리스트를 두었으며, 그녀가 입은 옷 스타일이나 색은 패션 잡지에 찍혀 유럽 곳곳으로 퍼졌다.

젊었을 때엔 머리를 벌집처럼 높이 틀어올리는 푸프(pouf)와 화려한 드레스를 유행시켰고, 나이가 들면서는 18세기 상류계급 여성의 복장으로 자리잡게 되는 스타일인 수수하고 편안한 무슬린 드레스를 처음 유행시켰다.

음악에 관심이 많아[19][20] 궁정에 스스로 최신 오페라를 도입했고, 자신이 배우가 되기도 하였다. 또 예술적 안목이 상당해서 베르사유 궁의 인테리어를 새단장하기도 했고, 그녀가 설계한 프티 트리아농[21]은 섬세하고 우아한 로코코 문화의 극치로 평가된다.

그 식견처럼 재능 있는 화가를 보는 능력도 뛰어나, 당대 높은 인기를 구가하던 동갑내기 여류 화가 엘리자베스 루이즈 비제 르브룅을 궁정화가로 발탁해 수많은 초상화를 그리게 한다. 여성의 사회진출에 대한 벽이 높았던 당시 상황을 고려해 보면 그야말로 파격적인 발탁이었다. 르브룅은 이후 아카데미 회원 자격도 얻게 되는데, 이를 두고 앙투아네트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비판도 있었다. 그러나 후세가 인정하듯 르브룅은 당대의 일류 화가였다. 만약 그녀가 아카데미 회원 자격을 얻게 앙투아네트가 손을 썼다고 해도, 그것은 비난받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앙투아네트 왕비의 뛰어난 식견을 대변하는 조치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문화적인 측면에 있어서의 평가는 로코코의 여왕. 그러나 마리 앙투아네트 시기 절정에 오른 로코코 문화는 뒤이은 프랑스 혁명으로 갑작스레 종말을 고했다.

4.6. 최후[편집]

그녀의 사형을 결정한 재판에서 마리 앙투아네트에게는 온갖 혐의가 걸렸다. 그녀는 재정 낭비, 정부의 부패, 오스트리아와의 결탁, 루이 16세를 타락시킨 혐의, 백성에 대한 기만, 프랑스를 멸망시키려는 시도, 전쟁 유발으로 기소당했다. 그러나 어떤 혐의로도 마리 앙투아네트를 사형시키기는 어려웠다.

우선 부패 혐의는 당시 정부에 워낙 만연하던 것이라 이걸로 사형을 걸면 사형당하지 않을 관료가 별로 없었고, 왕비로써 다소 사치를 했다고 하여 재정 낭비를 범죄로 몰아갈 수는 없었다. 소위 매국행위 및 간첩 혐의는 루이 16세에 대해서는 유죄가 인정됐지만 마리 앙투아네트는 개입하지 않았다는 것이 결론이었다.[22]. 백성에 대한 기만의 경우 그 유명한 다이아몬드 사건이 있었으나 조사 결과는 아무 관련도 없다였다. 즉 모든 혐의에 대해 재판 끝에 무죄가 선고됐다.

이렇게 되자 무죄방면 외에 길이 없어진 혁명정부 측에서는 마지막으로 아들과의 근친상간이라는 혐의를 내세웠다.[23] 물론 혁명정부도 이게 유죄가 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고 그냥 아무거나 들이댄 듯 싶다. 당장 근친상간의 혐의를 고발자였던 에베르가 묻자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대답하지 않은 것은, 어머니에 대한 그런 비난에 대답하는 것을 자연이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모든 어머니들에게 묻고자 합니다.


이 때 재판장에 있던 모든 여성들이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동조했고, 고발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물러갔다. 이를 전해들은 로베스피에르"에베르라는 바보는 그녀에게 또 한 번 승리를 안겨주고 말았다"고 평했다.[24][25]

하지만 결국은 혐의에 대해 주변 사람들에게 세뇌당한 어린 아들 루이 17세어머니에게 겁탈당했다는 증언을 하고 말았다. 물론 배심원들이 진심으로 이 말을 믿을 정도의 바보는 아니었겠지만, 결국 근친상간을 유죄로 인정하여 사형이 선고되었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이 사건에 대해서 좀 길게 서술했는데, 왕실의 억압된 삶에서 벗어나 새롭고 낯선 감옥 환경에서 사람들과 사귀는 학대를 받고 장난기 어린 나이의 병약한 아이가 어른들이 이야기하는 말을 믿고 재밌게 반복한다는 장난기 어린 증언으로 평가한다. 단 개초딩이 심심풀이로 한 짓이 결국 엄마를 죽였다라는 식으로는 절대로 해석하지 말 것. 이 때 즈음 루이 17세는 양육을 맡았던 앙투앙 시몬에게 굉장한 학대[26]를 받고 있었던 데다가 마약[27]까지 동원된 정신개조라 쓰고 정신붕괴라 읽는 처분을 당한 상태였기에 말 그대로 제정신이 아니었다.[28] 자기가 뭔 소리를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한 말이 모친이 살해당하는데 단단히 일조했으니 비극이라고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다. 사형시키기로 작정하고 벌인 날림 재판이기에 이게 증거가 된 것이고, 마리 앙투아네트가 워낙 프랑스 내에서 인망이 없었기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녀는 단두대 앞에 설 때까지 품위와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근친상간으로 처형 될 당시[29] 유언은, 사형 집행자의 발을 밟고서 남긴 '실례합니다, 무슈.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이렇게 의연할 수 있었던 건 그녀가 이 사형에 대해 정치적인 사형이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30] 실제로 사형 전에 그녀가 남긴 글에는 "부끄러워 할 것 없어요, 나는 죄를 지어서 죽는 게 아니니까요."라고 적혀 있었다.

물론 앙투아네트가 정말로 아들과 근친상간을 벌였을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되고, 이 판결은 그녀와 아들의 명예를 크게 손상시키는 것인 데다 맛이 간 어린애 하나의 증언 말고 증거도 전무했기에 나중에 무효화된다.[31] 하지만 그녀 또한 완전무결하고 고결한 여성은 아니었다. 그녀에게도 젊었을 때의 유흥 행각과 바렌느 도주사건 같은 명백한 실책들이 있었다. 그러나 사형당할 죄는 절대 아니었다. 그래서 후대의 역사가들은 지은 죄에 비해 너무나도 큰 벌을 받은 여성으로 평가하였다.

격한 감정을 일으키지 않으면서 그녀의 삶이라는 특이한 여정을 살펴볼 때, 그녀의 결점들이 명백하기는 하지만 그녀의 불행과 저울질해볼 때 하찮은 것이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 안토니아 프레이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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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8세 때 조성된 무덤(왼쪽)과 기념물(오른쪽)

그리고 지금 마리 앙투아네트의 유해는 빠리생 드니 대성당남편, 그리고 아들의 심장과 함께 안치되어 있다.

일설에 따르면 프랑스 국민들이 그녀를 어찌나 증오했던지 단두대에 엎드리게 하지 않고 바로 눕혀서[32] 사형을 집행했다는 설도 있다.[33][34] 하지만 당시 사형 장면을 묘사한 그림에 그런 장면은 나와 있지 않고 무엇보다 단두대의 구조상 사람을 바로 눕히기가 쉽지 않다.

4.7. 케이크 루머[편집]

그녀가 죽게 만든 가장 큰 이유라 일컬어지는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라는 망언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본인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원래 장 자크 루소의 '참회록'에 등장하는 말인데, 오스트리아 출신의 왕비라며 그녀를 까내리던 사람들이 여기서 따와 나쁜 소문을 터뜨렸고, 이것이 다시 혁명단에 의해 덧붙여지면서 '말도 안 되는 헛소리만 일삼는 멍청이'로 폄하된 것이다.(…)[35][36] 문제는 아직도 저 말을 진짜로 마리 앙투아네트가 했다라고 믿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이다.심지어 웬만한 선생님들도 그렇다 심지어 교수 중에도 있다.

물론 마리 앙투아네트보다 1500여년 전 사람이자 "이 없으면 고기죽을 먹으면 되지 않은가?"라고 했던 서진의 2대 황제 혜제 사마충의 발언은 실제로 한 거 맞다. 다만 백치였던 관계로 온전한 정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를 감안해야 한다.

사실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으로는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기사건이 있다. 라 모트 백작 부인이 앙투아네트를 사칭해 거액의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편취한 이 사건에 앙투아네트가 관여된 것은 아니었지만[37], 대중들은 진범은 앙투아네트고 라 모트 백작부인은 이용당했을 뿐이라고만 믿었다. 라 모트 백작 부인이 유죄 선고를 받자 일반 민중들의 여론은 더욱 격앙되었다고 한다. 다만 나중에 혁명재판에서 확인해본 결과 무고가 맞았다. 아니었으면 이걸 갖고 사형을 시키면 그만이지, 굳이 근친상간이라는 무리수를 둬서 혁명의 정당성까지 날려먹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당대 프랑스인들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성적인 모욕을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다 갖다 붙였다. 동성애, 근친상간, 하루에 수십 명을 상대한다든가 하는 등등등. 주로 18세기 중반부터 널리 퍼지기 시작한 야설에 귀족, 특히 왕과 왕비를 많이 갖다 붙였는데, 당연히 주적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수많은 악성 창작자들의 펜 끝에 능욕당했다.(…)

당대에는 동성애자라는 소문이 퍼져 있었지만 이는 루머에 불과하며, 연구에 의하면 본인은 동성애자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무튼 동성애자였다는 비난을 많이 받았던 관계로, 예전에는 동성애자들에게 고귀한 희생자로 추앙받기도 했다.

4.7.1. 루머에 대한 분석[편집]

그녀가 이렇게 심한 루머에 시달렸던 이유에 대해서는 몇 가지 분석이 있다.

첫 번째로 그녀는 프랑스와 사이가 나빴던 오스트리아 사람이었다. 그리고 당시 프랑스인들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오스트리아의 첩자라고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프랑스 혁명 시기에 베르사유 궁전, 특히 마리 앙투아네트의 방은 모조리 뒤집어 엎어졌고, 그 중에는 당연히 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나 오빠 요제프 2세, 레오폴트 2세, 그리고 자매들 및 친족들과 교환한 편지도 있었다.[38]

2번째로 왕비를 그저 애 낳는 기계 정도로만 취급하여 뒷방에 처박아놓고는 공식적으로 정부를 임명하여 궁정의 꽃으로 삼았던 루이 14세, 루이 15세와는 달리 루이 16세앙리 4세 이래 전통적으로 호색한이었던(...) 부르봉 왕가의 왕임에도 불구하고 여색을 별로 밝히지 않고 마리 앙투아네트 이외의 여자에게 시선을 기울이지 않았다. 현대 기준으로는 '왕비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였던 국왕' 정도의 취급이었겠지만, 당대의 기준에서 이런 행동은 어이없게도 루이 16세에게 성적으로 무능하다는 이미지를 심어주었고, 반대로 마리 앙투아네트는 "남편 기를 죽이는 몹쓸 여자" 같은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다.[39]

3번째로 당시까지 프랑스 여론은 도덕적으로 타락한 왕의 정부(情婦)를 씹어대는 것이 취미였고, 스트레스 풀이용 범 국민 스포츠였다. 그런데 루이 16세에게는 정부가 없었으므로 이런 이유로는 비난할 수가 없었는데(…) 그러자 프랑스 국민들은 없는 정부 대신 왕비를 씹어댔다. (…) 정부가 없으면 왕비를 씹으면 되지!

4번째로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전까지의 프랑스 왕비들과 비교하면 매우 활동적이었고, 궁정의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다.[40] 이것은 "전통적인 프랑스 왕비상"에 어긋나는 모습이 되어 궁정의 보수파들에게 눈총을 받는 요인이 되었다. 또한 그녀는 근엄한 고위 귀족들을 고리타분한 인물들이라고 여겨 가까이 하지 않은 대신, 자신의 나이 또래의 인물들과 주로 어울렸기 때문에 베르사유의 고위 귀족들에게도 좋지 못한 평가를 받았다.

5번째로, 마리 앙투아네트와 친밀했던 대표적인 인물들은 랑발 대공비[41][42]와 욜랑드 드 폴리냐크 백작부인이 있었는데, 이 중 랑발 대공비는 정숙한 귀부인이었으나 마리 앙투아네트의 가장 절친한 친구였다는 사실이 독으로 작용하여 베르사유 습격 당시 납치되어 사지가 찢어지는 잔혹한 처분을 당하고 그 머리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방 창문에 던져지는 신세가 되었다. 그 뒤를 이어 왕비의 총애를 받은 폴리냐크 백작부인은 원래 작위밖에 없는 가난한 여성이었으나 비슷한 나이의 왕비와 곧 친구 사이가 되어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의 가정교사로 임명되었다. 고위 귀족이 맡는 것이 관례였던 왕손의 가정교사 자리에 '겨우' 백작부인을 임명하는 파격적인 처분을 내린 것은 귀족들에게 또 한 번 큰 반감을 사는 요인이 되었다.

6번째로, 위에서 언급한 폴리냐크 백작부인에게 푹 빠져서 처음에는 연간 50만 프랑의 연금을 지급하더니 나중에는 연금액이 100만 프랑까지 올라갔다. 사욕이 없었던 랑발 대공비에 비해서 폴리냐크 백작부인은 매우 약삭빠른 여자여서 연금과 대저택, 각종 선물 따위를 가능한 한 우려내려 들었기 때문. 먼저의 조치로 고위 귀족들에게 반감을 산 데 이어 이러한 처분은 대중들의 평판을 나쁘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43]

마지막으로 결정타를 먹인 포르노 산업. 당시 프랑스인들은 언론의 힘을 깨달아가고 있었는데, 그 발전 과정에 있어 초기 상태였던 지라 언론의 힘은 긍정적인 측면보다는 부정적인 측면의 파괴력에서 더욱 강력했다. 이미 루이 15세 때부터 프랑스의 부르주아지들은 정적을 제거하는 방법으로 포르노와 비방 서적을 출판해 댔고,[44] 이 와중에 짭짤한 수입도 챙길 수 있었다. 이 포르노 서적은 기본적으로 인격모욕이 주 목적이기 때문에 수간, 윤간, 혼음, 강간은 기본으로 묘사되는 그야말로 막장물이었고, 여기서 여주인공으로 당첨된 것이 주는 것 없이 미운 마리 앙투아네트. 남주인공은 로앙 추기경[45]이나 훗날 부르봉 왕조 마지막 왕이 되는 아르투아 백작(샤를 10세), 그리고 그 외 수많은 남자들이 있었다. 다만 루이 16세는 한 때 고자 소문이 돌 정도로 이쪽과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제외되고, 주로 네토라레 당하는 역할(...)로만 나왔다.[46]

4.8. 최후로 남긴 서신[편집]

아래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처형 전날 밤 시누이인 마담 엘리자베트[47]에게 쓴 마지막 편지이다. 하지만 이 편지는 마담 엘리자베트에게는 전해지지 못했고, 마리 앙투아네트 사후 반세기가 넘어서야 공개되었다.

사랑하는 아가씨, 이것이 당신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입니다. 나는 지금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범죄자들에게 가하는 치욕적인 죽음의 선고가 아니라 당신의 오빠를 다시 만나볼 수 있는 선고입니다. 그분은 결백합니다. 나도 최후의 순간에 그분과 마찬가지로 처신하기를 바라고 있어요. 양심에 거리낄 것이 없는 사람은 모두 그렇겠지만, 나는 극히 평온합니다. 불쌍한 아이들을 남기고 가는 것이 정말이지 마음에 걸리는군요.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아이들만을 위해서 살아왔습니다. 심지가 곧고 마음씨가 좋은 아가씨, 당신을 위해서도 나는 살아왔습니다. 우리와 함께 지내려는 다정한 마음씨로 모든 것을 희생해온 당신을 남겨두고 떠나게 되다니! 재판의 변론을 통해서 나는 내 딸이 당신과 떨어져 있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습니다. 아, 불쌍한 어린 것! 그 아이한테는 편지를 쓰지 않으려고 합니다. 쓰더라도 전해주지 않을 테니까요. 이 편지가 당신에게 전해질지조차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아이들에게 나의 이 편지에 의한 축복을 전해주세요. 아이들이 자란 뒤에 당신을 만나 당신의 착한 마음씨를 접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자기 주장을 지키고 의무를 다하는 것이야말로 삶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것, 곧은 심지를 가지고 신뢰하고 화합하면 행복해지리라는 것을 가르쳐주세요. 딸은 연상이므로 누나로서 풍부한 경험과 아름다운 마음씨로 동생에게 충고를 해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들은 누나에게 우정에서 우러나오는 염려와 봉사의 태도를 보여주기를 바랍니다. 두 아이가 어떤 처지에 놓이더라도 서로 도우면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음을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이들이 우리를 본보기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괴로움 가운데에도 우리들의 우정은 얼마나 많은 위로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행복이란 친구와 함께 그것을 나누어 가질 때 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가족 말고 어디에서 아름답고 내적인 친구를 구할 수 있겠습니까? 아들의 아버지의 마지막 말을 절대로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48] 훗날을 경계하기 위해서 되풀이하면, 우리들의 죽음에 복수할 생각은 절대로 하지 말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나의 마음을 크게 아프게 하는 것을 당신에게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되겠군요. 나는 아이가 당신을 괴롭게 했음을 압니다. 그를 용서해주세요. 그 아이는 아직 어리니까요. 그리고 아이들을 강압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니까요. 언젠가 그 아이가 당신의 사랑과 부드러운 마음씨의 가치를 받아들여 서로를 이해하게 되기를 나는 기도합니다(재판 당시 루이 17세의 증언에 대한 언급).

당신에게 이제 나의 최후의 생각을 털어놓아야겠습니다. 재판이 시작될 때부터 편지를 쓰고 싶었지만 쓸 수도 없었거니와 재판이 너무나도 빨리 진행되는 통에 그럴 만한 시간도 없었습니다.

나는 가톨릭의 사도적인 신앙을 품고 죽습니다. 그것은 내가 성장해 왔고 내가 잘 아는 조상들의 신앙입니다. 이곳에서는 어떤 종교적인 위안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이곳에 내 종교의 사제가 계실지조차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런 분이 내가 있는 이 장소에 오신다는 것은 극히 위험한 일이지요. 나는 살아오면서 내가 범한 죄악에 대해서 하느님께 용서받고 싶습니다. 하느님께서 옛날부터 그래오신 것처럼 나의 마지막 기도를 들어주시고 동정과 사랑으로 나의 영혼을 받아들여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49]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내가 주었던 모든 괴로움을 용서해주기를 나는 모든 사람, 특히 사랑하는 아가씨, 당신께 기도합니다. 나는 내게 고통을 주었던 나의 모든 적들의 죄악을 모두 용서합니다. 나는 이제 형제, 자매에게 안녕을 고하려고 합니다. 내게는 벗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과 영원히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과 그들의 고통에 대한 생각이야말로 내가 지금 죽으면서도 떨쳐버릴 수 없는 가장 큰 괴로움입니다. 내가 최후의 순간까지도 그들을 생각했었다는 것만이라도 그들이 알아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안녕, 다정한 아가씨. 이 편지를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를 잊지 마세요. 불쌍한 아이들과 당신을 온 마음을 다해서 포옹합니다. 당신과 아이들과 영원히 헤어져야 하는 일은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안녕히, 안녕히! 이제는 신앙적인 의무만이 남아 있습니다. 나는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자유로운 사람이 아니므로 아마 사제 한 사람을 임의로 데려오겠지요. 그러나 나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고 전혀 낯선 사람처럼 행동할 것입니다."


여기서 편지는 중간에 끊겼다. 형리가 그녀를 데리러 왔기 때문이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식들과 엘리자베트가 살아남길 바랐지만, 안타깝게도 아들인 루이 17세는 어린 나이에 폐결핵으로 사망했으며 딸인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는 평생 프랑스 혁명의 고통을 안고 살아가야 했다. 마담 엘리자베트 또한 이 편지를 받지 못하고 단두대에 올랐다.

5. 여담[편집]

콩시에르쥬리로 이송된 이후에 그녀를 탈출시키기 위해 레니에 드 자르제 백작이 방문했는데, 베르사유의 장미에서 오스칼 프랑소와 드 자르제의 아버지로 등장한다. 하지만 이 장군은 너무 겁이 많아서 결국 탈출 계획을 실행시키지 못하고 국외로 도주했다. 픽션과 논픽션의 차이

독립 직후의 미국에서는 미국 독립전쟁 중에 프랑스루이 16세가 지원을 많이 해준 것 때문에 친불감정과[50] 애인으로는 스웨덴의 귀족이었던 한스 악셀 폰 페르센이 있었다. 육체관계가 있었는지는 모호했으나 적어도 서로간의 플라토닉한 관계가 있었음은 여러가지 증거가 남아 있다고 한다. 그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처형 이후 혼자 남은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를 도와주기도 했었다.

오스트리아의 소설가이자 전기작가인 슈테판 츠바이크(1881~1942)가 1932년에 《마리 앙투아네트 - 어느 평범한 여자의 초상》이라는 평전을 발표했다. 이 책은 철저한 연구를 통해 기존의 전기들에 실려 있던 위조된 편지나 후대에 센세이션을 노려 만들어진 조잡한 에피소드 등을 배제하고, 정치적 희생물로서의 마리 앙투아네트라는 인간을 묘사하는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작품이다. 이 평전 이후에 1934년 마담 뒤바리를 시작으로, 1938년에 헐리우드에서 마리 앙투아네트 영화를 만들었으며, 이케다 리요코도 이 평전을 보고 만화 베르사유의 장미를 만들었다.

저주받은 다이아몬드 4개를 모두 소유했던 인물로 유명하다.

단두대에 오르기 전날밤 머리가 하얗게 세었다고 하며, 이런 현상(증상)을 마리 앙투아네트 증후군이라 부른다.

6. 대중문화에서[편집]

아르센 뤼팽 시리즈 중 1909년에 나온 기암성에서 한 번 등장. 감옥에 갇혀서야 기암성의 비밀을 알았지만 이미 손쓸 방법이 없어서 후회했다는 내용.

영화에서는 1934년 작 마담 뒤바리에서는 아니타 루이즈가, 1938년에 헐리우드에서 나온 영화 마리 앙투아네트에서는 노마 시어러가 맡았다. 그리고 1956년에 나온 Marie-Antoinette reine de France에서는 미셸 모건이, 1957년 The Story of Mankind에서는 마리 윌슨이 마리 앙투아네트를 맡았다.
1989년에 영화 La Révolution française에서는 제인 세이모어가, 1990년 영화 L'autrichienne에서는 우테 렘퍼가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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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비일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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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일 때[51]

베르사유의 장미의 작가 이케다 리요코가 엄청난 양의 자료 연구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우는 우에다 미유키. 국내 방영시 KBS판의 성우는 권희덕, 비디오 더빙판의 성우는 문지현, EBS판의 성우는 윤성혜가 맡아서 연기했다.

다카라즈카 가극단의 뮤지컬 버전 베르사이유의 장미에서는 원작과 다르게 마리 앙투아네트 그녀의 생애보다는 페르젠 백작과의 사랑을 좀더 강조했고, 남역 위주인 다카라즈카 답게 비중도 조금 밀린다.


엔도 슈사쿠는 앙투아네트와 가상의 인물 마그리드 아르노[52]의 대립과 프랑스 혁명을 다룬 소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를 썼다. 국내에서는 90년대 왜색 논란으로 인해 민예사에서 '앙드레 까스뗄로'라는 정체불명의 작가가 쓴 '소설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그런데 이게 아무리 봐도 해적판으로 출간한 듯 보인다.[53]

2001년에 영화 어페어 오브 더 넥클리스에서는 조엘리 리차드슨이 맡았다.

소피아 코폴라가 2006년에 그녀의 이름을 딴 영화의 감독을 맡았고, 커스틴 던스트가 마리 앙투아네트 역할을 맡았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2006년 엘리자벳, 레베카의 제작진 명 콤비 실베스터 르로이와 미하엘 쿤체가 위의 소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를 원작으로 일본에서 제작한 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가 2014년 말에 우리나라에 들어와 상영했으며솔직히 말하면 많이 각색해서 창작 뮤지컬에 가깝다(,,,), 2016년에 재연할 예정이다. 옥주현, 김소현이 마리 앙투아네트 역을 맡았다.

2006년에 영화 Marie-Antoinette, la véritable histoire에서는 카린 바나스가 맡았다.

2012년 프랑스, 벨기에 합작 영화 페어웰, 마이퀸에서는 마리 앙투아네트와 폴리냐크가 동성애 관계로 그려진다. 담당 배우는 카핑 베토벤에서 안나 홀츠역을 맡았던 다이앤 크루거. 레아 세두는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책을 읽어주는 시녀 시도니로 나왔다.

만화 이노센트에서는 주인공이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부부의 목을 날린 사람이기 때문에 출연이 불가피하니 등장했다. 주로 주인공 샤를 앙리 상송의 여동생인 마리 조셉 상송과 마리 앙투아네트의 대비 연출로 등장한다. 여성이기를 거부하고 상송 가의 운명을 짊어지기를 기꺼이 원하는 마리와, 지극히 여성스럽게 자라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서로 대비되어 등장한다.

Fate/Grand Order에서 라이더로 참전했다 마리 앙투아네트(Fate 시리즈) 항목 참조.

오토메 게임 장미에 숨겨진 베리테에서는 주인공 리제가 신비한 약을 마시고 마리 앙투아네트 행세를 한다. 진짜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유로운 영혼이라 외출 중(...)

에빌리오스 시리즈의 등장인물 릴리안느 루시펜 도트리슈의 모티브가 된 인물이다. 그래서인지 릴리안느의 풀 네임에 도트리슈가 들어 있다. 여담으로 소설판 삽화를 그린 이치카는 마리 앙투아네트 인형의 드레스를 생각하며 릴리안느의 드레스를 디자인했다고 한다.

라 세느의 별의 주인공인 시몬느의 배다른 언니로 나온다. 오해로 인해 시몬느를 죽일 뻔했지만 결국 살려준다. 이후 시몬느가 처형 직전에 자신의 자식들을 구해 빼돌려 망명하자 그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하며 사망한다.

[1] 프랑스어의 t 발음은 기식이 약하여 'ㄸ'에 가깝게 들리나, 무성음의 기식의 유무로 뜻을 구별하는 언어가 아닌 이상 파열음에 된소리를 쓰지 않는다는 원칙 때문에 저렇게 표기하는 것이다.[2] 이는 아이를 바꿔치기 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이기도 했다.[3] 이 인연으로 그의 형제자매들도 경제적인 지원과 교육 기회를 얻어, 형 드니는 궁정 첼리스트가 되며 누이 2명도 꽤 많은 돈을 얻었다[4] 세네갈 총독 슈발리에 드 부플레르(Chevalier de Boufflers)[5]에 의해 국왕 부부에게 비쳐져 세례성사를 받아 이름을 얻었다. 궁전에서 도망친 국왕 부부에 의해 생 클로드의 고아원에 맡겨져 거기서 경제적 지원을 얻었지만, 더 이상 돈을 보낼 수 없게 되자 시설에서 내보내졌으며 이후 죽은 것으로 추정.[5] 참고로 성씨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스페인 왕위 전쟁 당시 클로드 루이 엑토르 드 빌라르와 방돔의 선배 장군인 루이 드 부플레르 장군(1644-1711)과 같은 가문이다. 여담이지만 이 장군은 빌라르와 방돔에 가려진 능력자로 릴 공성전에서 패했지만 동맹군의 피해를 최대화해서 오죽하면 동맹군 앞에서 항복 조건을 직접 말했고 말플라케에서는 65세의 고령에도 자기보다 어린 빌라르에게 지휘권을 넘기고 빌라르의 부상 이후 기병대를 지휘했다.[6] 자세한 건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 항목 참조[7] 본명은 잔느 루이즈 빅투아르. 위로는 수녀원에 입회한 두 언니가 있었고, 본인도 혁명 중에 수녀원에 입회하여 수도자로 살다가 사망한다.[8] 비난 여론 뿐만이 아니라 당시 프랑스의 경제상황은 상당히 좋지 않았다. 그 이유는 미국이 독립 전쟁을 일으키면서 프랑스가 뭐든 가리지 않고 지원해줬기 때문. 자세한 것은 미국 독립전쟁 참조. [9] 비록 장식품이긴 했지만.[10] 마리 앙투아네트의 형제 자매 대부분은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에 의해 대부분이 부르봉 가문과 (정략)결혼했다. 그러나 형제 자매들의 결혼상대자는 대부분 부르봉 방계와 결혼했기에, 직접 프랑스로 시집(장가)간 건 마리 앙투아네트가 유일했다. 게다가 루이 오귀스트는 프랑스의 왕위 계승자였으니 가히 마스코트라 할 만하다.[11] 루이 16세 왕실 가족이 군주제 존치를 지지한 미라보의 급작스러운 사망으로 인하여 정치적, 물리적 위협을 느낀 것이 사실이고 이에 같은 위기감이 바렌느 배신 사건으로 이어진 것도 맞지만 자코뱅 당이 득세를 하게 된 것은 미라보의 사망 훨씬 후이므로 본문의 설명은 잘못되었다. 자코뱅 당은 파리 코뮌에 의해 국민의회가 국민공회로 대체되고 정권을 주도하게 된 산악파(좌파)의 한 계파로서 1793년 5월 지롱드파(우파)를 실질적으로 실각시키고 같은 해 7월 마라가 암살 당한 후 실질적으로 득세하게 되었다. 자코뱅 당의 득세는 루이 16세의 처형 이후이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피동적으로 이들에 의해 처형 당했을 뿐 그녀가 정부를 등지고 할 입장이 아니었다.[12] 편지를 통해 마리에게 조언을 주긴 했다. 제네바 지방을 탐내는 사르데냐 국왕의 지지를 얻으라든가, 스페인에게 나바르 지방의 이권을 양보하고 지원을 받으라든가. 그런데 막상 자기 자신은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13] 마리 앙투아네트는 로렌 공작의 딸이기도 했기에.[14] 다만 완전히 결점 없는 피부는 아니었고, 뺨에 아주 희미한 곰보 자국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시대에서 이 정도의 흠은 흠이라고 하기에는 굉장히 양호한 편이었다.[15] 진짜 하는 건 아니고 흉내만[16] 이는 결국 마리아 테레지아 사후 남매간 관계가 뒤틀리는 결과를 낳는다.[17] 마리아 테레지아는 이전까지 막내딸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던 점과, 정략결혼으로 딸들을 희생시킨 것에 큰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를 떠나보내는 날에는 결국 바닥에 쓰러지며 통곡했다.[18] 당시 프랑스의 재정상황은 프랑스 혁명이나 루이 16세에 더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19] 직접 작곡하지는 않았으나, 마리 앙투아네트가 작곡한 것으로 추정되는 소품이 하나 있긴 하다. 음악은 오스트리아에 있던 시절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루크에게 배웠다. 그 덕택에 글루크는 프랑스에서 활동할 때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후원을 받았다.[20] 어린 시절 오스트리아 궁정에서 연주여행을 다니던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를 직접 만난 적이 있다. 7살의 모차르트가 어른이 되면 동년배인 마리와 결혼하겠다고 다짐했단다. 어린애가 한 얘기라서 왕실 사람들은 모두 웃어 넘겼다고.[21] 시할아버지 루이 15세가 지은 사냥용 주택을 개조하고, 정원과 연못, 나무, 돌 등 주변 사물까지도 하나하나 배치하였다. 가장 인위적으로 자연스러운 예술품이라는 별명이 있다.[22] 사실 당시 여성은 정치에 대한 불개입이 미덕이었기에, 왕이 아예 지적장애나 중증 정신병을 갖고 있지 않으면 나설 수 없었다. 그나마도 이런 경우 왕자나 형제에게 물려주고 말지, 여성의 개입을 허락하는 일은 드물었다.[23] 당대 동성애나 근친상간은 기본이 사형이었다. 지금도 후자는 근친 강간 피해자가 아닌 이상 100% 사회에서 매장된다.[24] 그런데 로베스피에르는 에베르를 싫어했기에 이런 말을 할 만했다. 에베르도 마찬가지로 로베스피에르와 갈등이 컸는데 상뀔로뜨(빈민) 출신으로 산전수전 끝에 언론인이 되었고 로베스피에르는 변호사 출신 집안에 태어나 은근히 귀족같이 자신을 여긴 게 있었기에 글로 로베스피에르는 미치광이로 피바람을 몰아올 것이라고 비난했는데 정확하게 맞췄다.[25] 그 에베르도 결국 1794년 3월 로베스피에르를 비난하며 재봉기를 부르짖다가 잡혀서 참수되었고, 그 시체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묻힌 곳에 버려졌다. 하지만 샹뀔로뜨들에겐 에베르가 인기가 많았기 때문에 결국 로베스피에르 자신도 파멸하는 요인이 되고 만다. 한편 버려진 에베르의 시체는 빈민들이 몰래 묻어주었다고 한다.[26] 하지만 학대가 없었다는 주장도 있다. 시몬 부부는 나름 최선을 다해 돌봤다는 것. 시몬 부인이 그를 자주 씻기고 깨끗한 옷을 입히려 했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그의 형인 노르망디 공작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태생 건강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고, 시몬 부부는 과학적 육아 따위에는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덧붙여 혁명정부는 앙투아네트 처형 이후 아이의 '뇌를 청소'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시몬 부부와 떼어놓고 의미를 알 수 없는 재교육을 시행한다. 결정적으로 루이 17세를 검시한 검시관이 질병에 영양실조로 뼈만 앙상하고 매맞은 상처에 채찍자국까지 낭자한 시신 상태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학대 주체가 누구이든 루이 17세가 비인간적인 학대를 받았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27] 하지만 당시는 마약 자체는 불법이 아니었다. 영국에서는 아동 수면제로 아편을 쓰기도 했다[28] 실제로 이 때 이미 몸과 마음이 모두 망가져 있던 루이 17세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죽은 지 불과 2년 뒤에 사망했다.[29] 국고낭비는 증거가 없었고 국가반역죄는 정치적인 이유로 공표할 수 없었기 때문에[30] 그런데 어째 세간에는 이 유언마저 '좀 있으면 죽을 마당에 그런 사소한 일이나 신경쓰는 천치 인증'이란 식으로 퍼져 있다. 관점의 차이란 실로 위대하다[31] 루이 16세의 간첩 혐의는 이후에도 그대로 인정됐다.[32] 그러니까 단두대의 칼날과, 그것이 내려오는 모습이 보이도록.[33] 휴거를 다룬 모 불쏘시개 영화에서 이 장면이 재현된다.[34] 정약용의 셋째 형이자 성 정하상 바오로의 숙부인 복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도 이런 방식으로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단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는 자원해서 이런 최후를 맞았다고.[35] 국내의 모 학습만화에선 "베르사이유의 장미에 나오는 착한 앙투아네트는 구라임"이라고 역으로 구라를 쳐버렸다. 뭐 임마?[36] 이 대사는 루이 14세의 왕비였던 에스파냐의 마리아 테레사가 했다는 설이 있다. 그것도 세상 물정을 몰라서 한 말이라기보다는 굶주린 백성들을 동정해서 '빵이 없다고? 그럼 어디서 케이크라도 구할 수 없을까?'라는 식으로 대책을 논의하는 말투였다고 한다. 마리아 테레사 역시 바보에 가까울 정도로 선량한 왕비였다는 의견이 사학계에서는 대세이다. 또는 루이 14세의 딸이 한 말이라고 주장하는 쪽도 있다.[37] 정작 앙투아네트는 "다이아몬드 갖고 싶으면 사주겠다"는 루이 16세의 말에, "지금 우리 왕국은 다이아몬드보다 군함 한 척이 더 필요하다"고 개념 넘치는 답변을 했다[38] 다만 친정이 오스트리아라는 점을 고려하면, 가족과 편지를 교환했다는 이유로 스파이라고 보기는 좀….[39] 사실 비슷한 시기 조선도 남자가 이 없으면 애처가 이미지가 아닌 공처가 이미지가 붙어버렸기 때문에, 양반 부인들은 적당한 여자를 첩으로 골라주어야 했다. 자기 손으로 남편에게 첩질을 시켜주는 꼴인데 기분이 좋았을 리는 없지만, 일단 좁게는 남편과 자신의 명예가 걸린 문제고, 넓게 보면 자신의 친정까지도 가정교육의 부실함(?)을 빌미로 삼아 얼마든지 공격당할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40] 사실 이건 어찌보면 당연한 게, 바로 직전의 왕비였던 마리 레슈친스카는 폴란드 공주 출신이라 부르봉 왕가의 종가인 프랑스 왕비로는 다소 처지는 가문 출신이었고, 그 전 왕비였던 마리 테레즈는 근친결혼의 영향으로 인해 지능에 다소 문제가 있었다.[41] 루이 필리프 1세의 외삼촌이었던 루이 알렉상드르(20세에 죽음)의 아내. 즉 외숙모다. 참고로 랑발 공작가는 이 사람과 당주인 루이 드 부르봉이 죽어 1793년 남계가 단절되고 나머지 재산은 1821년 루이 필리프에게 간다. 이후 루이 필리프의 아들인 샤를 도를레앙이 랑발 공-팡티에브르 공작 작위를 받지만 8살의 나이로 죽는다.[42] 그런데 이 사람은 사보이 왕가 직계인데 부르봉 가문 서자 출신인 랑발 공에게 시집왔다. 아이러니하게도 루이 필리프의 어머니는 이 사람과 반대로 부르봉 적자 가문인 오를레앙 왕가에 시집갔는데(이 가문이 상당히 유산이 많아 오를레앙 쪽에서 이를 노렸다) 남편인 오를레앙 공 루이 필리프 2세에게 좋은 대접은 받지 못했다. 뭐, 이 사람의 성욕도 한 몫 했고. 오죽하면 루이 15세까지 이 결혼에 대해 저놈은 방탕한 놈이야. 그 결혼 다시 고려해봐.라고 루이 필리프 1세의 외조부에게(랑발 대공비의 시아버지)에게 충고했다고.[43] 폴리냐크 백작부인은 프랑스 혁명 당시 마리 앙투아네트의 도움으로 국외로 피신하였으나 마리 앙투아네트가 사형당한 후 곧 암으로 사망했다.[44] 심지어 이 때 볼테르잔 다르크를 대상으로 그런 작품을 쓴 적도 있다. 당연히 금서가 되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대중들이 몰래 구입해서 봐서 베스트셀러였다고 한다.[45] 근데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 사람을 좋게 보지 않았다. 라모트 백작부인 항목의 1.2 참고[46] 사실 당대의 포르노 산업에서 절대군주와 그 가족들은 거의 예외는 희생양이 되었다. 푸가초프 반란을 잔인하게 진압한 예카테리나 2세가 가루가 되도록 까이는 이유도 비슷한 것, 유명한 예카테리나는 말과 함께 검열삭제하다가 줄이 끊어져 깔려죽었다(…)는 서술 역시 마리 앙투아네트 근친상간 설과 같은 맥락에서 나왔다.[47] 루이 16세의 막내동생으로, 혁명이 일어나자마자 재산을 챙겨 도망간 프로방스 백작(루이 18세)과 아르투아 백작(샤를 9세)과는 달리 국왕 부부의 곁에 남았다.[48] '짐은 그대들을 용서한다. 이후로 아무도 피를 흘리지 않았으면 한다.' 또는 '짐의 피가 프랑스 국민의 행복을 강화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였다고도 한다.[49] 당시 혁명 정부에 충성을 서약하지 않은 사제는 활동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혁명 정부에 충성하는 신부를 인정하지 않았다.[50] 물론 꼭 그렇지 않은게 부르봉 왕가에 대한 동정심이 강했으며, 마리 앙투아네트와 그 가족의 망명을 요청해서 그들이 살 집까지 마련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프랑스 대혁명 기간중 친불정권이 들어선건 나폴레옹 집권 이후이다.[51] 최종화에서의 장면이다.[52] 이니셜이 M.A.로 동일하다.[53] 비슷한 경우로 만화 베르사유의 장미는 마리 스테반드바이트라는 정체불명의 여류 작가의 이름으로 출판되었고, 유리가면도 넬 베르디라는 국적 불명의 작가가 쓴 소설로 마개조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