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리앙 튀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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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리앙 튀랑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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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파트리크 비에이라
(2006~2008)

릴리앙 튀랑
(2008)

티에리 앙리
(2008~2010)


릴리앙 튀랑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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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 FIFA 월드컵

골든 볼
호나우두

실버 볼
다보르 슈케르

브론즈 볼
릴리앙 튀랑


파일:external/yallascore.com/Lilian-Thuram.jpg

이름

뤼디 릴리앙 튀람윌리앵[1]
(Ruddy Lilian Thuram-Ulien)

생년월일

1972년 1월 1일

국적

파일:프랑스 국기.png 프랑스

출신지

과들루프

신장/체중

185cm/80kg/A형

포지션

센터 백, 라이트 백

소속 클럽

AS 모나코 FC (1991~1996)
AC 파르마 (1996~2001)
유벤투스 FC (2001~2006)
FC 바르셀로나 (2006~2008)

국가 대표
(1994-2008)

142경기[2] 2골[3]

가족

아들 마르쿠스 튀랑


1. 개요2. 플레이 스타일3. 클럽4. 국가대표5. 은퇴 이후6. 튀랑에 대한 말말말7. 여담

1. 개요[편집]

무결점의 짐승

의 일원

2. 플레이 스타일[편집]

떡대와 체격이 좋은 커맨더+파이터형 수비수였다.

철저한 수비를 자랑하듯 압박 수비와 대인 수비가 일품이였고 태클 능력도 뛰어났으며 점프력도 뛰어나 공중 장악 능력도 좋았다. 그야말로 '무결점'

젊은 시절에는 스피드도 엄청 빨라서 우측면 풀백으로 뛰며 오른쪽을 씹어먹었다. 너무 포스가 엄청나서 당시 라이트백으로 뛸 때 비견되던 선수가 카푸였으며 역시 엄청난 실력자인 국대 후배인 윌리 사뇰이 튀랑 때문에 2006년에야 국대 주전 라이트백을 소화할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한테 라이트백으로 뇌리에 남지만, 정작 본인은 센터백을 더 좋아했고 클럽에서는 센터백으로 상당히 많이 뛰었다. 라이트백으로 인식되는 건 프랑스 대표팀의 전성기를 라이트백으로 뛰면서 보냈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자신이 바라는 포지션에서 뛰지 못한다고 징징거리기도 했을 정도였다. 물론 그냥 징징거리기만 한 것이 아니라 센터백으로도 절륜한 실력을 보였다.[4] 그야말로 만능 수비수.

3. 클럽[편집]

프랑스 아트사커를 든든히 받쳐주어 개인으로서도 팀으로서도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카리브해에 있는 과달루프섬에서 태어난 그는 성직자의 길을 걷는 대신 축구선수가 되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가정부로 일하시는 어머니의 손에 자랐다. 니스에서 입단 테스트를 받고 모나코에서 축구를 시작한 그는 1부 리그 입성의 문턱까지 갔지만 심각한 부상을 입고 축구인생을 접어야 할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중앙수비수로 다시 뛰게 된 그를 아르센 벵거 감독은 신뢰했고, 모나코 관중들의 야유를 받던 그를 중용하였다. 그리고 그의 실력이 성장함에 따라 입지도 점점 탄탄해져 갔다.

1996년까지는 거의 후보로 지냈다. 그러나 96년 AC 파르마로 이적한 그는 파비오 칸나바로를 팀 동료로서 만나게 되고 칸나바로-튀랑 라인은 공격수들을 씹어먹으며 파르마를 리그 2위로 올려놓는다. 이후의 몇년간 소위 '세리에 7공주 시대'에 파르마는 7공주의 멤버중 하나로 유벤투스, AC밀란, 인터밀란, AS로마, 라치오, 피오렌티나와 어깨를 겨루게 되는데 이럴수 있었던 배경엔 이 칸나바로-튀랑 라인과 최고의 골키퍼 부폰이 버티고 있던 덕이 컸다.

2001년 유벤투스로 이적하면서 2,200만 파운드의 수비수 이적료 기록을 세운다.[5][6] 그리고 튀랑과 더불어 네드베드 등의 활약으로 유벤투스는 리그 우승을 하였고, 이것은 그의 첫 리그 우승이다.

2002년 유벤투스의 리그 2연패를 기록하는데 공헌하였다. 2005년 유벤투스는 칸나바로를 영입하여 칸나바로-튀랑 라인에 골키퍼 부폰(...)이라는 ㅎㄷㄷ한 수비진을 구축해[7] 팀 실점이 절반으로 줄고 리그를 또 한번 우승하고 만다. 그리고 06년 월드컵에서 프랑스의 준우승에 기여하며 제 2의 전성기를 가진다.

이후 그 유명한 칼치오폴리 사건으로 유벤투스가 2부로 강등당해면서 튀랑은 유벤투스를 떠나 FC 바르셀로나로 이적한다. 하지만 많은 나이로 인한 노쇠화와 더불어 점점 안습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주로 백업 출장에만 머물렀으며 2008년 계약 만료로 방출되자 고국의 파리 생제르맹으로 이적하게 된다.

그러나 메디컬 테스트 도중 심장 이상이 발견되어 계약이 전면 취소되었고, 튀랑은 은퇴를 선언하게 된다.[8]

4. 국가대표[편집]

파일:attachment/624429_w2.jpg

1994년 프랑스 국가대표로 데뷔한 그는 96년까지는 거의 후보로 지냈다. 근데 그 경쟁상대가 우연히도 동향 선배인 조슬랭 앙글로마였다. 그러나 파르마 이적 이후 실력이 일취월장하여 1997년 프랑스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며 국가대표 주전으로 점점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대망의 1998년, 비셴테 리사라수 - 마르셀 드사이 - 로랑 블랑 - 릴리앙 튀랑의 일명 철의 4백의 수비라인이 형성된다. 그리고 이 라인은 1998년 프랑스를 월드컵 우승으로 올려놓게 된다.
또한 이 월드컵에서 튀랑은 인생경기를 펼친다. 바로 4강전 크로아티아와의 경기. 이 월드컵 득점왕을 차지했던 괴물 공격수 다보르 슈케르[9]를 상대로 맞이한 튀랑은 수비에서 실책을 범했고,[10]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슈케르는 바로 프랑스 골문을 뒤흔든다. 1-0으로 뒤지게 된 프랑스는 공격에 힘을 더 싣게 되는데, 선제골의 빌미를 제공했던 튀랑이 오버래핑을 과감하게 하는가 싶더니, 상대편 페널티박스 근처에서 공을 빼앗아 실점한지 1분만에 동점골을 넣는다. 이때까지 그는 국가대표로서 단 한 골도 넣어본 적이 없던 선수였다. 그런데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그는 경기종료 20분 전 역전골까지 넣었다. 당연히 그는 프랑스의 영웅이 되었다.[11] 그리고 프랑스는 2-1로 승리하여 결승전에 진출하고, 월드컵 첫 우승을 차지한다. 여담으로 그의 국가대표 기록은 142경기 2골이다. 그야말로 인생에 있어 단 한 경기. 월드컵 내의 활약을 인정받아 브론즈 볼도 수상한다.

그의 프랑스는 2000년 유로 대회에서도 우승하였으나 이후 2002년 월드컵에서는 프랑스가 조별 예선 탈락하며 흑역사를 남겼다. 하지만 앙리의 결승전 골든골을 어시스트하며 03년 컨페더레이션스컵 우승 등의 기록을 남긴다.

이후 유로 2004에도 출전했지만 프랑스는 8강에서 그리스에게 패해 탈락하였고, 대회 종료 이후 튀랑은 지네딘 지단, 클로드 마켈렐레와 함께 국가대표에서 은퇴를 결정했다. 그러나 프랑스가 월드컵 예선에서 어려움을 겪자 1년 만에 지단, 마켈렐레와 함께 국가대표 복귀를 선언, 월드컵에 진출하게 된다. 2006년 월드컵에서는 베테랑들의 역량을 모두 끌어모아 팀의 중심인 지단 등과 함께 프랑스를 준우승으로 이끌었다.

월드컵 이후, 지단은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튀랑은 도메네크 감독의 요청으로 국가대표 생활을 더 이어가게 된다. 유로 2008에도 출전했지만 전성기를 지난 프랑스는 대회 최고의 공격력을 보여준 네덜란드의 기세에 맥없이 무너지면서 1-3 완패를 당했고 조별리그 탈락의 수모를 맛보았다. 튀랑은 대회 이후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했고 얼마 뒤 현역에서 은퇴하였다.

튀랑은 A매치 총 142경기에 출장하여 현재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최다 출장 1위를 기록 중이다.

5. 은퇴 이후[편집]

박물관 큐레이터로 일하고 있다. 과거 제국주의 국가들에서 자행된 식민지의 유색인종을 납치해 본국 박물관에 전시했던 행태를 알게 되어 크게 충격을 받고, 이러한 '인간 전시'의 야만적 역사를 폭로하는 박람회를 열었던 것. 깨어 있는 축구선수다. [12]

실제로 이것으로 2011년 9월 KBS 역사스페셜에 출연한 적도 있었다.

6. 튀랑에 대한 말말말[편집]

"네스타는 대단한 수비수이다. 그러나 튀랑은 우주에서 온 수비수이다."
- 파비오 칸나바로

"그는 제가 상대한 수비수 중 가장 까다로운 수비수였으며 무쇠처럼 단단해서 부딪히게 되면 아픈건 저뿐이였습니다."
- 셰도르프

"파르마와의 경기는 항상 긴장된다. 세계 최고의 수비수들을 상대하는 경기이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검은 흑인 선수가 제일 무섭다. 그는 마치 사나운 날짐승 같다."
- 호나우두

"짐승이 파르마에 온 이후로 나는 그 팀과 상대하는 것이 매우 즐겁다. 저번 홈경기에서 나의 완벽한 헤딩을 그가 시저스 킥으로 걷어내는 것을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그는 지칠 줄 모르는 것 같다."
-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유벤투스가 튀랑을 내준다면 나는 튀랑을 얻기 위해 긱스를 내줄수도 있다."
- 알렉스 퍼거슨

7. 여담[편집]

음치이다(...) 경기 시작전 라 마르세예즈를 제창할때 자세히 보면 박자도 안맞고 음도 안맞는다. 그런데 노래는 무지하게 크게 불러서 눈치채기 쉽다.

미셸 플라티니는 "그는 정말로 공부를 좋아하는 축구선수다."라고 평가했다. 실제로 인권에 관심이 많다. 책도 몇 권 펴냈는데, 인권과 관련한 책[13][14]도 썼다.

아들인 마르쿠스 튀랑 역시 포텐이 충만하다고 평가받는 축구선수다. 단, 아버지가 레전드급 수비수인 반면, 아들은 공격수(...)반대의 케이스도 있다 이 아들은 세리에 A를 떠나 리그앙 PSG에 새 둥지를 튼 잔루이지 부폰과 유니폼을 교환하는 명장면을 찍었다. 아버지가 유베에서 뛰던 갓난아기 시절부터 부폰이랑 자주 보던 사이였는데 어느새 아빠 친구랑 유니폼 교환하는 나이가 되었다!

[1] 본인이 스스로 [li.ljɑ̃ ty.ʁam]이라고 발음하기 때문에 '튀랑'은 틀렸고 '튀람'이 옳다.[2]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최다 출전자[3] 이 2골이 1998 FIFA 월드컵 4강전 크로아티아전에서 0:1로 지고있던 프랑스를 극적으로 결승으로 이끈 2골이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의 내용들 참고[4] 당장 튀랑이 유럽 전체에 명성을 얻게 된 계기가 파르마에서 칸나바로와 센터백을 이루며 파르마의 성공을 이끌었기 때문이다.[5] 종전 기록은 1,800만 파운드의 리오 퍼디난드.[6] 이때 파르마의 팀 동료였던 부폰도 함께 유벤투스로 왔으며 라치오의 네드베드도 유벤투스로 왔다. 지네딘 지단의 레알 마드리드 이적료 수입으로 이 세명을 산 것.[7] 위에서 언급했듯이 이 칸나바로-튀랑 / 부폰 라인은 앞서 파르마에서 먼저 구축된적이 있다. 물론 그때도 이들은 ㅎㄷㄷ한 활약을 했다. 파르마와 유벤투스의 나머지 팀동료들의 실력차를 생각해보면 파르마때 활약이 더 대단하다고 볼 수도 있다. 참고로 이들 셋은 파르마에서 활약했던 시기도 거의 비슷하고(대략 1995/1996~2001/2002정도) 셋다 나중에 유벤투스에서 재회했다.(참고로 부폰/튀랑은 파르마에서 곧바로 유벤투스로 갔지만 칸나바로는 인터밀란을 거쳐서 유벤투스로 갔다.) 2011/2012시즌 에이스였던 지오빈코(물론 유벤투스가 원래 고향팀이긴 했지만)도 유벤투스에게 내줬으니 파르마 팬들은 유벤투스에 대한 감정이 복잡미묘할 듯.[8] 튀랑의 가족들도 심장 이상으로 사망했던 가족력이 있었다. 그나마 말년에 발견된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튀랑은 36세까지 뛰었고 이룬 것도 많았으니 미련없이 은퇴했을 것이다.[9] 여담이지만 튀랑과 슈케르는 둘다 1월 1일생으로 생일이 같다.[10] 실책이라기보단 오프사이드 트랩을 제대로 하지 못한것.공을 뺏겼거나 그런건 아니다.[11] 만약 이 경기 직후 대통령 선거를 했다면 튀랑이 대통령으로 뽑혔을 것이란 이야기도 있다(...)[12] 파리서 ‘인간 동물원’ 반성 전시회 참고로, 튀랑의 98 월드컵 대표팀 동료이자 낭트, 삼프도리아, 레알 마드리드에서 선수생활을 한 미드필더 크리스티앙 카랑뵈의 조상도 누벨칼레도니에서 프랑스로 납치되어 인간 전시되었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카랑뵈는 레블뢰에서 유일하게 라 마르세예즈를 제창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13] Pour L'Egalite (For the Equality, 우리말로는 '평등에 대하여') 이외에도 몇 권 있다. 다만 번역본은 없는 듯.[14] 아동용 도서인 Tous Superheros- 우리는 슈퍼 히어로즈, 차별 없는 세상의 주인공(8세 이상) 은 정발 2017.07.20 번역본이 정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