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든 B. 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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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제36대 대통령

본명

린든 베인스 존슨(Lyndon Baines Johnson)

출생

1908년 8월 27일, 미국 텍사스 스톤웰

사망

1973년 1월 22일 (64세), 미국 텍사스 스톤웰

국적

미국 파일:미국 국기.png

학력

사우스웨스트 텍사스 티처스 대학교

직업

정치인

배우자

레이디 버드 존슨

신체

192cm

종교

개신교

정당

민주당

경력

샘 휴스턴 고등학교 교사
텍사스 민주당 하원의원(1937 ~ 1949)
텍사스 민주당 상원의원(1949 ~ 1961)
1962년 대통령 선거 민주당 부통령 후보
제37대 미국 부통령(1961 ~ 1963)
1964년 미국 대통령 선거 민주당 후보
제36대 미국 대통령(1963 ~ 1969)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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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4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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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그럴듯했으나..

1963 - 마틴 루터 킹

린든 B. 존슨

1965 - 윌리엄 웨스트모얼랜드

< 1967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 >

파일:attachment/time_1967.jpg
...끝은 이렇게 처참했다.

1966 - 25세 이하 세대

린든 B. 존슨

1968 - 아폴로 8호의 우주인들


1. 개요2. 대통령이 되기 전3. 케네디 암살과 대통령 취임4. 베트남 전쟁의 수렁에 빠지다5. 성공적인 국내정치6. 비판7. 재선 불출마와 퇴임 후 및 사후의 평가8. 인물됨과 일화9. 매체에서

1. 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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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til justice is blind to color, until education is unaware of race, until opportunity is unconcerned with the color of men's skins, emancipation will be a proclamation but not a fact."
"정의가 흑백을 구분하지 못하고, 교육이 인종을 신경 쓰지 않으며, 기회가 인간의 피부 색에 흥미를 느끼지 않을 때까진 노예 해방이 선언은 될지라도 사실은 되지 못한다." - 린든 B. 존슨

미국 제36대 대통령. 풀네임은 린든 베인스 존슨으로 이를 줄여서 LBJ라고 부르기도 한다. 시어도어 루즈벨트(TR), 프랭클린 루즈벨트(FDR), 존 F.케네디(JFK)와 더불어 이니셜 약칭이 익숙한 인물.

국내 정책 추진에 있어 매우 성공적이었고 특히 의회와의 협력 정치로 모범적인 정치를 펼쳤지만, 베트남 전쟁에 말려든 것이 그의 평가를 떨어뜨리는 주원인이 되고 있으며, 또한 과도한 사회 보장 복지 정책 추진이 후대 정부의 재정에 악영향을 미친 점 또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역대 미국 대통령 중 도널드 트럼프와 함께 에이브러햄 링컨의 뒤를 이어 2번째의 장신(192cm). 1960년 대선에 존 F. 케네디의 러닝메이트로 출마하여 당선되어 제37대 부통령으로 재직하다 케네디 대통령이 임기도 다 못 마치고 암살당해 승계로 대통령이 되었다.

2. 대통령이 되기 전[편집]

텍사스 중부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텍사스 농촌 스타일의 소박한 인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 그의 집안은 지역 유지이고 재산도 많았다고 한다. 그의 고향 근처의 존슨시티라는 도시는 그의 집안의 이름을 딴 것이다. 외가도 꽤 알려진 집안으로 외증조부는 저명한 침례교 목사이자 교수로 베일러 대학교 총장을 지냈고, 외조부인 조지프 윌슨 베인스는 텍사스 주무부 장관과 주의회 의원을 지낸 정치인이었다. 그의 미들네임 베인스는 외가의 성씨를 따온 것. 아버지 새뮤얼 일리 존슨도 주의회 의원을 지낸 정치인이었고, 샘 레이번 하원의장 등 텍사스 출신 유명 정치인과도 줄이 닿는 사람이었다. 그 덕분에 젊은 학교 교사였던 존슨은 민주당에 들어간 후 승승장구하며 거물로 성장하게 된다.

린든 존슨은 처음에 샌마르코스에 있는 사우스웨스트 주립 사범대(현 텍사스 주립대학교)를 졸업하고 교사 자격증을 얻었다. 이에 따라 텍사스 남부 시골마을에서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했었다. 미국 대통령 중에서는 특이하게 정계 입문 전 직업이 교사였던 이색적인 경우. 이 때 가난한 학생들의 열악한 환경을 목격했고, 당시의 경험으로 후에 공립학교에 대한 대대적 재정지원 정책의 필요성을 느꼈다.

결국 짧은 교사 생활을 뒤로하고 아버지를 따라 민주당에 들어가 우선 1930년 하원의원 출마자의 선거운동을 하며 정치를 익히기 시작했다. 1936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선거운동을 하며 텍사스 민주당 청년조직을 이끌었다. 또한 텍사스 출신인 존 낸스 가너 부통령을 도왔고, 당시 전국구급으로 떠오른 텍사스 출신 하원의원 샘 레이번도 도왔다. 1936년 선거에서 루스벨트와 가너는 재선에 성공했고, 샘 레이번은 하원 민주당 원내대표가 되어 집권 여당 대표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1937년, 텍사스 연방하원의원 10번 선거구 의원이 사망하면서 열린 보궐선거의 민주당 후보로 존슨이 공천되었다. 주도 오스틴이 포함된 비중있는 선거구였다. 존슨은 만 30세도 되기 전인 젊은 나이에 연방 하원의원이 되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뉴딜 정책 문제로 알력이 있던 텍사스 출신의 가너 부통령을 견제하는데 텍사스 출신의 젊은 의원인 존슨을 적합한 인물로 보아 존슨의 든든한 지원자 역할을 했다. 1940년, 그의 정치적 스승인 샘 레이번이 권력서열 3위인 하원의장 자리에 오르면서 존슨은 레이번의 측근으로도 승승장구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미합중국 해군 장교로 복무, 소령으로 전역했다.

1948년에는 치열한 접전을 벌인 끝에, 텍사스를 대표하는 연방 상원의원에 겨우 수백여 표 차로 당선되었다. 이때 낙선자 쪽 진영에서는 비아냥거리는 의미로 '압도적 승리자 린든(Landslide Lyndon)'이란 별명을 붙여줬다고 한다;; 어쨌든 존슨은 상원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전국적으로 이름을 떨치는 거물 정치인이 되었다. 1955년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가 되어, 야당 대표 자격으로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협력했다. 당시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로서 린든 존슨이 보여준 리더십과 정치기술, 협상력과 타협술은 미국 의회 역사에서도 손꼽힐 정도였다고 하니... 또한 남부 출신이면서도 흑백 인종분리에 반대했고 민권법안이 통과되는데 기여하였으며, 미국의 정교분리를 명확히한 수정헌법의 발의 및 통과를 주도했다.[1]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1960년 대통령 선거의 유력한 민주당 후보로 떠올랐다. 경선에서는 존 F. 케네디이전투구를 벌였고, 결국 케네디가 후보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케네디는 대승적 차원에서 존슨을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선택했고,[2] 존슨은 앙금을 풀고 케네디를 적극적으로 보좌하며 선거운동을 해 이들은 11월 8일 선거에서 닉슨에게 가까스로 승리하여 그 다음해 초 대통령-부통령에 취임한다. 존슨은 텍사스 출신으로는 존 낸스 가너에 이어 2번째로 부통령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3]

3. 케네디 암살과 대통령 취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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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 안에서 이루어진 존슨의 대통령 취임식[4]

1963년 11월 22일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될 때 존슨도 자리에 있었다. 당시 존슨의 출신주인 텍사스 주지사와 상원의원 간의 불화를 해소하고 텍사스 민주당의 단결을 도모하기 위해 대통령과 부통령은 텍사스 주를 방문했다. 이들은 텍사스 주요 도시를 순회하고, 마지막에 존슨의 텍사스 목장에서 휴식을 취할 예정이었다. 댈러스의 거리에서 차량 행진을 할 때, 케네디 대통령은 텍사스 주지사와, 존슨 부통령은 상원의원과 함께 차를 타고 있었다. 그러다가 케네디 대통령이 탄 차량에 저격이 가해지면서 케네디 대통령이 사망하여 세계를 충격과 공포에 빠지게 하였다. 모든 일정이 중단되고 케네디 대통령의 유해를 실은 에어 포스 원 공군기가 워싱턴 D.C.로 향하는 가운데, 존슨은 이 비행기 안에서 제36대 대통령 취임 선서를 했다.

4. 베트남 전쟁의 수렁에 빠지다[편집]

통킹만 사건을 빌미로 케네디 시절부터 개입해오던 베트남전의 확전을 결정, 의회의 지지를 얻어내고 연이은 64년 대선에서 61.4%라는 압도적 득표로 승리한다. 64년 대선에서 중요한 쟁점 중 하나가 시민권법(Civil Rights Act)였는데, 당시 공화당 후보 배리 골드워터는 인종차별에는 반대하지만 연방정부가 주정부의 일에 지나치게 관여해서는 안된다는 이유로 시민권법에 반대표를 던졌고, 이걸 가지고 존슨은 골드워터는 흑인의 인권신장에 반대하는 정치인이라고 밀어붙인 게 골드워터에게는 큰 타격으로 작용했다. 덕분에 남부 주 5개(사우스 캐롤라이나, 조지아, 미시시피, 알라배마, 루이지애나)와 자신의 홈 스테이트인 애리조나에서만 얻을 수 있었다.[5] 또한 그를 광속탈락 시킬 때 쓴 TV광고(데이지 걸)는 TV 선거광고의 대명사가 되었다.

하지만 대승에 뒤이은 현실은 헬게이트 그 자체였다.

베트남전의 수렁에 빠진데다가 정적인 로버트 F. 케네디의 견제로 인해 존슨은 재임 기간 내내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원래 법적으로는 대통령직 승계 기간이 2년이 안되어서 다시 대선에 출마할 수 있었지만, 결국 스트레스 + 노환으로 악화된 건강과 베트남전으로 바닥을 치는 지지도를 인정하고 출마를 포기하였다. 재선 가능성도 높지 않았지만, 이 결정으로 미국 역사상 8년 이상을 재임한 대통령은 계속 프랭클린 루스벨트 하나 밖에 없게 되었다. 만약 재선에 성공했다면 10년 가까이 재임하게 될뻔했다. 물러난 후에도 우리는 베트남전 계속 해야 합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가 죽기 전인 1973년 전만 해도 전쟁은 나날이 미군이 불리해져갔고, 미국 내에서도 회의론이 벌어졌기에 존슨 본인도 이 주장이 개소리가 되었음을 속절없이 보고 죽었다....

다만 존슨의 베트남전 지지가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험프리의 패배를 야기했다는 것은 상당히 부당한 주장이다. 험프리의 패배는 남부 미국독립당(딕시크랫)의 독자출마를 막지 못한 민주당 주류파의 선거전략 미비 탓이 크며 실제 닉슨과 험프리의 득표율 차는 겨우 0.42%에 불과했다. 다만 선거인단에선 301 : 191 : 46으로, 딕시크랫 없는 간발의 승리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당시 결과에서 민주당에 딕시크랫을 더했으면 험프리가 압승하긴 한다.) 돈과 선거 전략에서도 절치부심한 닉슨에 비해 험프리가 여러모로 밀렸다. 좀더 자세한 내용은 # 여기리처드 닉슨 항목 참조.

5. 성공적인 국내정치[편집]

내치에 있어서는 매우 업적이 많다. 국내정책에 있어서는 미국 역사상 최고의 대통령 중 하나!라 해도 좋다. 베트남 전쟁만 없었더라면 미국의 위대한 대통령 반열에 들었을 것이다.

"오늘 이 자리에서 이 행정부는 미국의 빈곤에 대해 무조건의 선전포고를 하겠습니다."

ㅡ 1965년 3월 15일, 재선에 성공하게 만든 존슨의 연설. # 연설영상 # 연설문

현재 미국의 의료보험 시스템의 근간이 되는 메디케어(Medicare; 65세 이상의 미국인에게 제공되는 의료보험)와 메디케이드(Medicaid; 특정 조건을 만족하는 사람들에게 제공되는 의료보험, 예를들어 극빈층[6])가 모두 존슨의 행정부에서 시작되었으며[7][8], 그의 '위대한 사회(the Great Society)' 정책과 '가난과의 전쟁(War on Poverty)'는 미국사회에 큰 긍정적 영향을 끼쳤다. 연방정부의 공립학교(초, 중학교)에 대한 대대적 재정지원 정책[9]과 미국의 환경보호정책의 기틀을 만든 것도 이 사람.

Tax-cut bill of 1964에서 존슨은 경제 성장 촉진 및 기업 투자 증가를 성공적으로 이루어냈으며 Economic Opportunity Act of of 1964로 직업 프로그램 지원, VISTA 자원봉사 프로그램, Head Start Project 등을 시작했다.

흑인에 대한 법적인 평등이 보장된것도 그의 손에 의한 것 이었으며, Civil Rights Act 1964는 그의 최대의 업적 중 하나.

또한 인간의 달 착륙을 성공시킨 아폴로 계획도 실질적으로 실현시켰다. 60년대가 끝나기 전에 인간을 달에 보내겠다는 케네디 대통령의 다소 무모한 선언은 케네디 암살 이후 동력을 잃고 흔들릴 뻔했으나, 린든 대통령은 아폴로 계획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계속했다.[10] 덕분에 케네디 재임기간에는 상당히 불확실해 보이는 무모한 계획에 불과했던 아폴로 계획이 존슨의 재임기간 동안 구체화되었다. 그덕분에 우주개발 경쟁에서 소련에 계속 뒤처졌던 미국은 존슨 재임기 중반에 실시된 제미니 계획을 통해 비로서 소련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존슨 대통령은 아폴로 11호가 성공하기 반년전에 임기가 끝났기 때문에 닐 암스트롱에게 축하해준 대통령은 후임인 닉슨이었다.

특히 버락 오바마 대통령 당선 후 린든 존슨은 상당한 재조명을 받고 있다. 하지만 닉슨은 그런 정책을 상당부분 뒤집었으니, 베트남전은 몰라도, 닉슨의 당선으로 미국은 다른 의미의 헬게이트를 열게 된 것이다.

그 밖에도 Immigration Act of 1965는 비유럽인들이 미국에 더 잘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왔다.

6. 비판[편집]

다만 국내정책에 대해서 무작정 호평하기도 어려운 것이, 미국의 본격적 복지프로그램이었던 위대한 사회(the Great Society)의 재정투입 대비 효과에 대해 비판이 빗발쳤으며, 이로 인해 정책학(Policy Science)이라는 학문이 등장하였다. 실제로 정책의 결정과 집행에 있어 사려깊지 못한 접근으로 투입되는 재정에 비해 그 효과가 극히 빈약했다는 연구 결과가 많이 등장했다. 그로 인해 70년대에 들어서면 정책집행과 정책평가 분야가 크게 각광받게 되었으나, 이것이 다시 정치적으로 피드백을 받지는 못했다는 한계를 보이기도 했다고.

더불어 국제금융제도로서의 금태환제/고정환율제와 미국의 기축통화국으로서의 지위가 맞물려, 재정투입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을 미국이 아닌 서유럽이 뒤집어쓰는 꼴이 되자 열받은 샤를 드 골이 미국을 대놓고 디스하기도 했다. 애초에 존슨이 유럽과 사이가 안 좋기도 했지만 결국 이런 재정정책은 비대한 정부를 비판하는 신자유주의의 등장과 득세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다만 여기에는 당시 민주당 정부가 적극적으로 추진한 감세안의 영향도 있으며, 80년대 미국 재정적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평가도 있다.

또한 거물 정치인인만큼 정경유착 혐의도 있다. 조지 W. 부시의 부통령 딕 체니에 이르기까지 정경유착으로 악명높은 핼리버튼이 급성장한 시기가 이 때. 핼리버튼의 건설엔지니어링 분야 자회사인 ‘브라운 앤드 루트(Brown & Root)’는 1962년 핼리버튼에 합병되었는데, 이 브라운 앤 루트가 존슨의 정치 캠페인을 전적으로 밀어주는 대가로 독점적인 관급공사 계약, 즉 베트남전 동안 미군이 발주한 인프라 공사의 85%를 차지했다. 이는 당시 참여한 4대 컨소시엄 가운데 압도적인 몫으로 반전 시위자들의 조롱감이 되었으며 참전 군인들도 브라운 앤 루트를 '번 앤드 루트(Burn & Loot)', 그러니까 방화하고 노략질하는 기업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7. 재선 불출마와 퇴임 후 및 사후의 평가[편집]

베트남전도 그의 입장으로는 최대한 개입을 억제하려했으나, 남베트남 정부의 막장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끌려들어간 면이 많이 있다. 결국 베트남전이라는 외교적 실수 하나로 인해 국내에서 이루어낸 업적이 묻혔던 대통령. 하지만 현재는 다시 재평가 받는 중이다.[11][12]

이러한 논란으로 그는 전격적으로 1968년 선거 불출마를 선언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4선 이후, 헌법이 개정되어 대통령은 2기 집권만 가능했지만, 전임자의 임기를 승계하며, 전임자의 남은 임기가 2년 미만인 경우는 전임자의 임기를 빼고 2기 집권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는 1968년 선거에도 출마 자격이 있었던 것. 하지만 뉴햄프셔 주 경선에서 OME한 성적표를 받아들고 경선을 포기했고,[13] 민주당은 내분과 로버트 케네디의 암살 등으로 선거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면서 리처드 닉슨에게 정권을 내주게 된다. 존슨이 재출마하여 당선되어 임기를 마쳤다면 프랭클린 루스벨트 이후 가장 장기간 집권한 대통령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그것도 장기 집권하고 사망 결국 존슨은 5년 약간 넘게 집권하여 1969년 1월 20일 닉슨에게 대통령직을 인계하고 텍사스로 낙향하여 여생을 보낸다.

존슨은 젊은 시절부터 엄청나게 담배를 피워댄 골초였고, 이로 인하여 이미 여러 차례 심장에 문제를 일으킨 바 있다. 건강을 위해 한때 금연하고, 백악관까지 처음으로 금연구역으로 만들기도 했으나, 대통령 재임 중 많은 스트레스로 담배를 다시 찾았고, 이로 인하여 건강이 더욱 악화되었다. 존슨은 텍사스 고향 농장에서 은둔하다시피 하며 지냈으나, 그의 몸은 더욱 비대해지면서 동시에 쇠약해졌다. 1972년 12월 28일, 해리 트루먼 전 대통령의 영결식에 참석했고, 이것이 존슨의 거의 마지막 대외 활동이 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1달도 채 못된 후였던 1973년 1월 22일, 농장에 있던 중 신체의 이상을 느꼈는지 경비업체에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다.

"마이크(Mike)를 당장 보내!(Send Mike Immediately!)"

그리고 그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 되었다. 헬리콥터로 가장 가까운 대도시인 샌안토니오의 병원으로 옮길 준비는 다 되어 있었다. 하지만 연락을 받은 경비업체 직원이 그의 집에 가니 존슨은 수화기를 붙잡은 채로 이미 숨져 있었다고 한다. 손을 쓸 시간도 없었던 것. 사인은 동맥경화로 인한 심장마비. 그가 퇴임한 지 불과 5년 만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향년 64세. 유해는 워싱턴의 국회의사당에 옮겨져 조문객을 받았고, 미국은 트루먼 대통령 추모 열기가 식기도 전에 다시 대통령의 장례식을 치르게 되었다. 국장이 치러진 후,[14] 유해는 텍사스 농장으로 다시 옮겨져 묻혔다.

대부분의 미국 역사학자들은 "미국 역대 대통령들 중 가장 모순덩어리"라고 평가하곤 한다. 위대한 사회라는 그의 국내정치는 상당히 진보적이고 훌륭한 지향을 가진 정책이었지만, 베트남 전쟁의 실책이 함께하며, 훌륭하고 노회한 정치가의 모습을 보여줬지만, 직설적이고 짓궂고 어딘가 나사 빠진 모습 또한 많이 보여 줘서 인물상을 정확히 파악하기가 어렵기 때문.

일부는 "이 양반은 유능한 정치가야? 아니면 그냥 생각 없는 텍사스 카우보이야?" 라고도 했다고. 하지만 21세기 초에 집권하신 그 분이 생각 없는 텍사스 카우보이 소리를 들으면서 이 말은 묻히게 된다.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훌륭한 정리는 당시 공보담당 비서관을 지낸 조지 리디의 1982년 존슨 회고록에서 나왔다.

"그는 개자식(son of a bitch)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너무나 훌륭한 개자식이다." 왠지 예전에 비슷한 말이 있었던 것 같은걸?

8. 인물됨과 일화[편집]


위 광고는 1964년 린든 존슨이 재선에 도전할 당시 방영된 TV광고로, 세계 역사상 가장 임팩트가 강한 정치광고라고 평가받는다.

데이지 꽃을 세는 평화로운 소녀와 핵폭탄 폭발 카운트다운을 세는 장면을 매치시켜 상대 후보인 골드워터 후보(공화당)가 당선이 되면 핵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경고를 담은 광고이다.

게다가 골드워터 후보는 states' rights를 주장하면서 Civil Rights Act of 1964를 반대했고, 린든 존슨은 이걸 이용해서 '모든 국민들에게 동등한 권리를 주기 싫어하는 인종차별주의자'라고 공격하였다. 덕분에 표심이 많이 기울어 린든 존슨이 대의원 수 486 대 52, 득표율 61.1%[15] 압승한다. 저 61.1% 득표율은 린든 존슨 이후의 민주당 대선 후보 어느 누구도 얻지 못한 엄청난 득표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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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견 '유키(Yuki)'와 함께. 그는 이렇게 개 울음소리를 흉내내는 장난을 많이 쳤다고 한다.

베트남 전쟁 참전 결정을 내려준 한국의 박정희 정권과는 밀월관계를 유지했다. 역사상 가장 한미관계가 좋았던 시절로 평가된다.

"박정희와 미국 대통령 존슨의 관계는 너무나 화기애애해 음담패설까지 주고받을 정도였다. 존슨이 외무장관 이동원을 칭찬하자 박정희는 이동원이 "낮의 외교도 잘하지만 밤의 외교는 더욱 능숙"(...)하다고 받았다. 애무를 잘하는 애무장관 존슨의 눈이 둥그래지자 박정희는 "난 마누라(;;)한테 꽉 잡혀 있는데 이 장관은 밤만 되면 무법자지요"라고 한마디 더 거들었다.
결국 이야기는 기생파티로 빠졌다. 붙임성 좋은 이동원이 기생파티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하자 존슨은 그거 좋다고 찬성했다. 그래서 방한 마지막 날 숙소에서 가까운 워커힐 별채에서 기생파티를 존슨에게 열어주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그날 밤 눈치를 챈 존슨의 아내 버드가 존슨이 곁을 떠나지 않고 지키는 바람에 영 여의치 않았다. 몸이 단 존슨이 이동원 핑계를 대고 잠깐 나가서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자, 버드는 자신이 옆방에 가 있을테니 여기서 이야기하라고 고집을 부렸다. 결국 존슨의 기생파티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동원 <대통령을 그리며>(고려원 1992, 155~156쪽)에서;;

이 시절 개발된 부대찌개의 일종인 존슨탕은 이 양반의 이름을 붙여서 만들었다는 설이 있으며,[16] 방한 당시 국내에 흔하지 않았던 위스키커티샥을 찾는 바람에 전국을 뒤져 공수한 적도 있다고 한다.

또, 방한 당시 우리나라 국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는데, 가뜩이나 베트남 문제로 국내에서 난타당하고 필리핀에서 오만방자하게 구는 마르코스에게 수모를 당하고 기분 잡쳤던 존슨은 열광적으로 환영하는 한국 시민들을 보고 감동의 도가니탕이 되었단 후문이 있다. 누구랑 비슷하다 물론, 대미관계를 개선하고 이익을 얻어내고자 했던 박정희 정권이 국민들을 총동원한것이다. 관용차가 지나가는 길에도 개선장군을 맞이하듯 모든 시민들이 꽃다발을 들고 열렬히 환영했다. 이 때문에 이에 갓을 쓴 노인장을 헬기에 태우고 수원 상공을 도는 서비스를 해주었으며, 이에 어르신들은 존슨에게 새신랑이 입는 사모관대를 입히고 마침 방문 중인 마을 촌장과 사진 촬영을 하는 퍼포먼스를 선사하였다.[17] 그리고 이런 "서비스성 이벤트"로 그치지 않고 마침 설립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던 과학기술대학(KAIST)을 미국 주립대와 비슷한 시설, 조건을 갖출 수 있도록 협조해주었다.[18]

음모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전임 대통령 케네디의 암살 배후에 존슨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케네디의 암살로 제일 이익을 본 인물이고 당내 경선에서 케네디에게 패해 이에 대한 반감이 있었다는 것, 고향 텍사스의 군수재벌, 석유재벌들의 협력으로 정계에 입문한 인물이었으며 그 당시 케네디와 존슨이 갈등을 겪고 있었다는 점 등이 주된 이유로 꼽힌다.

심심찮게 제기되는 주장이지만 그렇다고 명확히 밝혀진 것은 없기 때문에 섣부른 주장은 금물. 존슨 본인은 케네디의 암살 배후를 쿠바피델 카스트로로 지목했다. 닉슨 항목에서 보듯 닉슨 배후설도 만만찮다.

또다른 여담으로 천하의 윈스턴 처칠이 바로 존슨의 재임기간 때 사망해서 조문사절을 보내야 했는데, 부통령, 장관, 전직 대통령, 심지어는 진짜 유명인사도 아닌 사람을 미국 대표로 보내서 국내외로 비난을 받았는데 이때 되도 않는 개드립을 시전해서 더 큰 욕을 먹은 적이 있다. 이때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전 대통령이 개인 자격으로 장례식에 참석을 했기에 그에게 사절단을 맡겼으면 해결 될 문제였지만 그렇게 안했다가 더 욕먹었다(...) 윈스턴 처칠 항목 참조. 그래서인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이래 엘리자베스 2세를 만나지 않은 유일한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 역시 처칠 항목 참조.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검프에게 명예훈장을 수여하면서 "미국은 자네에게 큰 빚을 졌네"라고 말한다. 검프가 베트남 전쟁에서 엉덩이에 상처를 입었다는 걸 듣고 "나도 한 번 그 상처를 보고 싶군."이라고 농담을 던진다. 물론 검프는 진담으로 알아듣고 대통령 앞에서 엉덩이를 까고 상처를 보여준다. 좌중은 웅성웅성대는데 존슨은 웃고 "농담도 못 하겠군"이라고 너스레를 떨며 걸어나간다. 짧은 일화지만 농담을 즐긴 존슨의 스타일을 잘 묘사한 장면. # 영상

미국의 시사주간지인 TIME지에서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최고의 욕쟁이로 뽑은 인물이다.(...) 몇가지 예를 들어보자면.....

  • 1965년 그리스키프로스 침공 때 주미 그리스 대사를 백악관으로 불렀는데, 그리스 대사가 앉자마자 "당신네 나라(그리스)는 벼룩이야. 미국은 코끼리고. 코끼리가 벼룩 한 마리 밟아뭉개는 건 식은 죽 먹기라구."라는 폭언을 내뱉었다. 그리스 대사가 헌법을 거론하며(...) 그리스의 침공을 변명하려 하자 존슨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당신네 의회랑 헌법 따위 X까라 그러지. 미국은 코끼리야. 키프로스는 벼룩이지. (근데,) 그리스도 벼룩이야. 만약 벼룩 둘이 계속 코끼리를 가렵게 한다면, 한 방 제대로 쳐맞을 거요."[19]

    이 폭언에 뒤이은 경고도 걸작이다.

    "우리는 그리스인들에게 많은 달러를 제공하고 있소, 대사. 만약 당신네 총리가 나한테 민주주의, 의회하고 헌법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당신네 총리, 의회와 헌법은 아마 오래가지 못할거요."[20]

    이 살벌한 경고에 식은땀만 실컷 빼고 온 그리스 대사는 본국에 급전을 쳤고 미국의 확고한 의지를 알아챈 그리스 정부는 키프로스에서 철군 명령을 내렸다. 파파도풀로스 독재정권은 키프로스 철군 직후 붕괴했다.

  • 존 에드거 후버FBI 국장 자리에서 경질하려다가 없던 걸로 하면서는 "후버가 텐트 밖에서 안으로 오줌 싸는 것보다야 안에서 밖으로 싸게 하는 게 낫겠지[21]."라고 말했다고. 음모론의 최종 보스인 후버를 능가하는 자. 오오.

  • 후에 미국 최초의 흑인 연방대법관이 되는 서굿 마셜(Thurgood Marshall)[22]이라는 인물에게 법무부 차관직을 제의했는데, 정작 마셜 본인은 존슨의 제안에 선뜻 답을 않고 차일피일 묵묵부답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흑인이었기 때문. 뒤늦게 이를 간파한 존슨은 마셜을 집무실로 불러 "내가 원하는게 뭔지 아시오? 법무차관 자리에 깜둥이가 앉아있는 걸 사람들이 보면 뭔 낯짝을 하게 될지 궁금하단 말이오!"라고 질러 버렸다.(...) 즉 흑백 차별 철폐의 일환으로 법무차관에 흑인인 마셜을 앉혀서 인종차별주의 성향을 지닌 백인들의 속을 뒤집어버리려는 의도였던 것.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법무차관 자리에 오르지는 못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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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6월 13일 백악관에서. 좌측이 마셜이다.

  • 사실 마셜과 존슨은 사적으로도 매우 친한 사이였고 마셜 이 양반도 존슨 못지 않게 한 성격해서 둘이 개인적으로 만나는 자리에서는 여지없이 불타는 대화가 오갔다고. 어느 정도였냐하면 만날 때마다 평소 좋지 않게 여기던 사람들 뒷담화를 "그 X새끼, X해버릴 새끼."하면서 수다떨었다고. 참고로 대법관으로도 역시 존슨 때 임명됐다. 서굿 마셜을 대법관으로 임명하기 위해서 한 일이 걸작인데, 당시 대법관으로 있던 탐 클라크를 (강제)은퇴시키려고 그의 아들인 램지 클라크를 법무차관에 앉혀버렸다. 존슨의 예상대로 이해관계를 이유로 들면서 탐 클라크 대법관이 은퇴를 선언했고, 존슨은 바로 마셜을 지명했다.

  • 이니셜 LBJ를 자칭, 타칭으로 많이 쓴 대통령의 하나이다. 이에 따라 JFK, FDR과 함께 이니셜로 많이 불리는 대통령의 하나이다. 부인 클로디아 앨타 테일러는 원래 애칭이 레이디 버드(Lady Bird)인데, 아예 이 애칭을 정식 이름처럼 내세웠고, 이니셜까지 LBJ가 되었다. 그리고 두 딸의 이름도 린다 버드, 루시 베인스로 지어 딸들의 이니셜까지 LBJ로 맞췄다. LBJ 가족

  • 흔히 텍사스 부자(富者) 대통령으로 조지 부시 부자(父子)를 들고, 존슨은 텍사스 농촌 스타일의 서민 이미지를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존슨은 부시 부자보다 재산이 훨씬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그는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재산순위 상위권에 든다. 2004년 포브스에서는 당시 물가 기준으로 조지 워싱턴, 존 F. 케네디, 앤드루 잭슨 다음으로 부자였다고 했으며#, 2010년 타임 조사에서는 당시 물가 기준으로 7번째로 재산이 많았던 대통령이라고 했다. 인플레이션을 반영할 경우 부시 부자의 재산을 합친 것보다 많은 것. 그의 집안은 텍사스 곳곳에 여러 사업에 투자하며 한때 어려운 상황에 처하기도 했고, 그도 젊은 시절 학비를 아껴가며 대학에 다닌 적도 있기는 하나, 이후 다시 사업이 번창하여 많은 재산을 모았고, 부인도 사업에 재능을 보였다. 조지 W. 부시가 대통령 재임 중 텍사스의 크고 아름다운 농장 때문에 자주 까였지만, 사실 존슨의 텍사스 농장 역시 그에 못지 않게 컸고, 존슨도 틈만 나면 백악관을 떠나 농장에 머물고는 했다. 린든 존슨의 텍사스 농장에는 그의 묘지가 있으며, 가족들은 국가에 토지를 일부분 기증하여 국립 역사 유적지로 등록되어 있다.

  • 수륙양용 자동차를 갖고 있었는데, 텍사스 존슨 시티에 있는 자기 집에 온 손님을 차에 태우고 드라이빙을 즐기다가 언덕길을 내려가며 갑자기 브레이크가 고장난 척 하고 비명을 지르며 호수에 그대로 들어가버리는 취미가 있었다고 한다(...).

  •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유일하게 껌 씹는 것과 방귀끼는 것을 동시에 못하는 사람이지." - 제럴드 포드 대통령에 대해. 요는 "포드, 참 덜 떨어진 친구야"라는 뜻이다. 노골적으로 내뱉는 걸 좋아한 존슨의 농담 치고는 신사적인 표현.


하지만 꽤 유머감각이 뛰어나서 빵 터뜨리는 말들을 내뱉기도 했는데, 은근히 자뻑이 심했던 모양.

  • 미국을 방문한 독일의 에르하르트 총리가 "대통령께서는 통나무집에서 태어나셨다지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존슨은 "저랑 에이브러햄 링컨을 혼동하셨군요. 저는 예수처럼 말구유에서 태어났습니다."라고 받아쳤다고.

  • 대통령 퇴임 후 교통 속도 위반으로 경찰에 적발된 적이 있었는데, 경찰이 전직 대통령임을 알아보고 놀라서 "Oh, my god!"이라고 외치자 존슨은 바로, "내가 신인 걸 잊지 마시오."라고 받아넘겼다.

과연 꿈은 이루어졌는지, 원시부족의 섬에서 신격화되고 왕노릇을 해달라고 요청받기도 했다. orz. 화물 신앙 항목 참조.

  • 자기의 성기에 '점보(Jumbo)'(...)라는 애칭을 붙이고 매우 귀여워했다(...). 하루는 어느 외국 대사가 그를 몹시 귀찮게 굴자, '점보'를 당장 집무실 책상 위에 떡하니 올려 놓고서(…) "이거 보이시오? 훌륭한 텍사스산 거시기라구. 이거 괴롭히지 마시오."(…)라는 굉장한 말을 뱉었다. 그가 192cm의 장신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존슨의 훌륭한 존슨

  • 그는 상기한 '점보'를 자랑스러워 했는데 일화로 그는 백악관 화장실을 사용할 때 항상 문을 열어 놓고 볼 일을 봤다고 한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비서관에게 보고를 받기도 했다고.

  • 빌 클린턴과 대권을 두고 경쟁했던 공화당 상원의원 로버트 밥 돌은 존슨을 "텍사스 허풍의 대가"라고 평가했다.

  • 쉬지 않고 하루에 18~20시간씩이나 일하는 지독한 일 중독자였다고 한다.

  • 소위 The Johnson treatment로 유명했다. 이게 뭐냐면, 자신이 원하는 법을 빨리 통과시키기 위해서 상원의원들을 설득(이라 쓰고 협박이라 읽는다 (...))시키는 방식이었다. 현직 상원의원들의 인생기록을 다 가지고 있었으며,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이용해서 말빨, 그리고 큰 덩치와 직위에서 나오는 위엄을 이용해서 겁을 주는 걸 적절히 합쳐서 협박설득을 함으로서 상원의원들이 도저히 버틸 수가 없게 만들어 버리는 방식이다. 큰 키를 이용한 위협과 사실을 이용해서 "내가 너한테 이렇게 뒤 좀 봐줬잖아. 난 니가 어떤 야망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다. 난 너의 두려움도 알고 있다. 그러니까 내 편 들어주면 니 부탁 하나 들어주겠음. 안 들어주면 네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날테니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반협박을 하면, 말빨에 밀리고 겁을 먹은 상원의원은 쫄고 기는 식. ㅎㄷㄷ 이건 상원 다수리더였던 시절 때부터 자주 써먹었던 방식이다. 밑의 사진은 Johnson Treatment를 당하고 있는 시어도어 그린 상원의원이다.

파일:ZBZ9Egz.jpg

9. 매체에서[편집]

  •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 등장한다. 검프에게 총상을 보고 싶다고 농담하자 검프는 즉각 엉덩이를 까서 존슨에게 보여준다. 찰지구나 엉덩짝, 엉덩짝을 보자

  • 영화 올 더 웨이는 JFK암살사건 이후 대통령이 된 미국 대통령 린든 존슨이 인종차별을 금지한 1964년 공민권법에 서명하기까지의 과정을 다루었다. 브라이언 크랜스톤은 이 역으로 2014년 토니상을 수상하기도 했으며, TV영화에도 린든 존슨 대통령역으로 출연.

[1] 실제 내용은 면세혜택을 받는 교회등 비영리단체의 정치활동 참여및 정치적 발언을 금하고, 만약 위반시 면세혜택을 박탈하는 것. 이는 교회의 정치참여를 제한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는 게 전문가들의 일반적인 견해다. 오히려 국가, 혹은 정치의 교회 개입을 막고자 함이었다는 것이다.[2] 케네디의 비서 이블린 링컨은 93년 인터뷰에서 존슨이 후버로부터 얻은 케네디의 여자관계 증거물을 가지고 자신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도록 협박했다고 얘기했다.[3] 3번째는 조지 H. W. 부시. 조지 H. W. 부시에게 텍사스는 나고 자란 실제 고향은 아니지만, 20대 때 텍사스로 건너온 이후 줄곧 텍사스를 기반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텍사스가 정치적 고향인 텍사스 출신 부통령이 된다.[4] 존슨의 오른쪽에 위치한 망연자실한 표정의 여인은 다름아닌 피살당한 존 F 케네디의 영부인 재클린 여사. 재클린의 핑크색 정장에는 피격당한 남편의 핏자국이 묻어있는 상태였다.[5] 텍사스도 남부이지만 텍사스는 존슨의 홈그라운드 이점이 작용하였다.[6] 정확히는 정부로부터 제정 지원을 받고 있는 극빈층[7] 다만 이 메디케어와 메디케이드는 미 정부의 재정지출의 30%가 넘는 비중을 차지하며 미 정부 재정적자의 가장 큰 원인이 되고 있다. 미국 의료비가 원체 비싸지다보니... 게다가 의료비가 너무 올라서 재정 부담이 크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즉 정부에게나 개개인에게나 모두 부담이 큰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수혜자를 줄이기도 어렵다.[8] 다만 이렇게 된것은 미국의 의료체계가 영리병원과 대기업 보험회사 위주로 되어있는 것이 가장 크다. 사기업의 특성상 최대한 많은 이윤을 짜내야 하기 때문이다. 베트남 전쟁 당시의 재정지출을 이기지 못하고 닉슨이 의료보험을 민영화시킨 악영향이 4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실제 OECD국가들의 의료비 지출은 GDP대비 평균 9%, 대한민국은 7% 수준인데 비해 미국은 무려 15%! 보험회사와 영리병원의 엄청난 로비 때문에 규제도 쉽지 않다. 클린턴, 오바마 모두 의료보험 대개혁을 부르짖으면서 당선됐지만, 결국 실패했다. [9] 여담으로 특수학교에도 더 큰 투자를 하도록 하였다[10] 케네디의 발언은 나사 직원들한테 용기를 줬으나, 기본적으로 공밀레였다. 닉슨이 "그냥 하지 맙시다." 한마디만 하면 끝... 1968년 유인우주선이 달을 순회하는데 성공하자 “여러분들은…… 우리 모두를, 전세계 인류를, 새로운 시대로 안내했습니다."라고 말을 못 잇기도 했다고. 하지만 최초의 달 착륙의 영광은 다음 대인 닉슨 때로 넘어간다.[11] 여기에 대해선 존슨 자신도 크게 후회를 해서, 자서전에선 "나는 훌륭한 아내(국내 정책)를 길거리 창녀(베트남전 참전)에게 잃은 꼴이다"라고 썼다.[12] 그리고 닉슨도 자유세계 보호라는 면에서는 닉슨의 남베트남 "방치"도 까일 소지는 분명히 있다. 물론 남베트남은 툭하면 쿠데타로 정권이 바뀌는 군부독재에, 미국의 원조물자가 바로 베트콩한테 넘어가는 부정부패로 베트남인들의 지지를 전혀 받지 못했다. 1년에 3번씩 쿠데타가 일어나는 나라를 무슨 수로 지키는가... 물론 닉슨은 또 할말이 없느냐 하면, 그 사람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했기 때문이라며 포드 탓을 했다;; - 남베트남이 멸망한건 제럴드 포드 집권기이다.[13] 대통력직에 있는 경선 후보가 경선을 포기한 최초의 사례이다.[14] 트루먼 대통령의 장례식은 가족들의 뜻에 따라 국장으로 거행되지 않았다.[15] 골드워터는 인종차별철폐에 반대했던 Deep South (사우스캐롤리이나, 조지아, 알라배마, 미시시피, 루이지애나) 다섯 주와 자신의 고향인 애리조나 주를 제외하고 모조리 다 패배했다. 텍사스는 린든 존슨의 고향이어서 존슨에게 갔다.[16] 부대찌개 항목 참고 바람[17] 땔사 큰 존슨이 새신랑마냥 관모 쓰고 얌전히 있는 모습이 정말 볼만했다고 한다![18] 사실 카이스트에 대한 지원은 베트남전 참전 대가로 보는게 정설이다. 당시 한국 정부는 베트남전 참전 대가로 한국군 현대화 사업과 카이스트 등 여러가지를 얻어냈다.[19] Fuck your parliament and your constitution. America is an elephant. Cyprus is a flea. Greece is a flea. If these two fleas continue itching the elephant, they may just get whacked good.[20] We pay a lot of good American dollars to the Greeks, Mr. Ambassador. If your Prime Minister gives me talk about democracy, parliament and constitution, he, his parliament and his constitution may not last long.[21] It's probably better to have him inside the tent pissing out, than outside the tent pissing in[22] 이 사람은 첫번째 흑인 법학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