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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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종교처럼 숭앙하고 내 목숨을 걸어서라도 지키려고 하는 것은 국가가 아니야. 애국 이런 것이 아니야. 진실이야!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사상의 은사


李泳禧
1929년 12월 2일 ~ 2010 년 12월 5일

1. 개요2. 평가3. 비판 및 반박
3.1. 문화대혁명 미화 문제
3.1.1. 반박 13.1.2. 반박에 대한 반박
3.2. 카다피에 대한 옹호
3.2.1. 반박 2
3.3. 남북 군사력에 대한 주장 논란
3.3.1. 반박3
3.4. 대한민국은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가 아니다?
3.4.1. 반박 4
3.5. 기타
4. 조선일보와의 관계5. 저서6. 편역서

1. 개요[편집]

1929년 12월 2일 ~ 2010년 12월 5일


대한민국의 주체주의적 언론인, 언론학자, 사회운동가이다.

본관은 평창이다. 평안북도 운산군 출신이다. 평북 영림서 공무원 리근국의 아들로 태어났다. 신의주사범학교와 경성공립공업학교(현 서울공업고등학교) 중 후자를 택하게 되어 경성에서 고학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1950년에 국가에서 학비와 숙식비를 전액 부담하는 국립해양대학(현 한국해양대학교)를 졸업하였다. 항해 실습을 하다가 여순사건을 목격한 적이 있다고 한다. 진압군 병력을 수송하는 선박에서 항해 실습을 하다가 여수항까지 가게 되었다고.

항해학을 전공했으나 수업은 영 재미가 없었고, 영문학 작품에 심취하여 다수의 책들을 섭렵했다고 자술했다. 이후 경북 안동에서 영어교사로 근무 중에 6.25 전쟁이 발발해 그 해 군에 자진 입대한 뒤 전방에서 3년 반, 전후 후방에서 3년 반 총 7년간 복무했다. 국군 장교로 임관해 통역 업무를 맡았다고 한다. 하지만 전시에 미군 고위 장교들은 사적으로 통역관들을 데리고 있었기 때문에 미군 고문관들과의 사이는 데면데면했다고. 오히려 여자들을 부대로 들여보내 재미 좀 보려는 고문관들의 태도와 한국인을 무시하는 모습에 격분해 권총결투를 신청한 적도 있다 한다. 그리고 이 때 목격한 민간인 학살(11사단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과 국민방위군 사건 각종 제1공화국의 악행과 각종 부패상을 체험한 것은 그가 훗날 진보성향을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고 회상하였다.
포병이나 공병, 보병과는 달리 의무나 통역같은 특수보직은 인원이 적었기 때문에 장기복무를 해야만 했다고 한다. 후방에서는 미군 의료FM을 번역하거나 국군인쇄창에서 보병장교신분으로 재직했으며, 전훈을 인정받아 은성무공훈장을 수여받았으나 인사기록 부실로 누락이 되었고, 소령으로 제대 후에는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57년부터 1964년까지 합동통신 외신부 기자를 지냈다. 5명 뽑는데 200명넘는 지원자가 몰렸는데, 그 중 앞의 4명은 전부 서울대 정치학과 대학원 출신이고 자기가 5등으로 들어왔다 한다. 1960년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교 언론대학원을 연수했다. 1964년 조선일보 외신부 기자를 거쳐 1965년부터 1968년 7월까지 조선일보와 합동통신 외신부장을 각각 연임했다.[1] 그러나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대하는 내용의 사설들을 여러차례 기고한것이 문제되어 중앙정보부로부터 반공법위반으로 구속되어버리고, 이후 68년 7월 조선일보를 퇴사.(말이 '퇴사'지 실상은 강제해직이었다) 1971년까지 합동통신 부장만을 지냈으며 위수령 등에 항의해 ‘64인 지식인 성명’참가로 강제 해직되었다.

1980년 저서 《전환시대의 논리》로 반공법 2년형을 살고 출소하였다.

1972년부터 한양대 문리대학교 교수 겸 중국문제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하던 중 박정희 정권에 의해 1976년 해직되어 반공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지내고 1980년 3월 복직됐으나, 그해 5월 전두환 정권에 의해 다시 해직되었다. 1984년에 복직했으나 1985년 일본 도쿄대 사회과학연구소, 독일 연방 교회사회과학연구소에서 연구하고 1987년 미국 버클리대학교의 정식 부교수로 초빙되어 '평화와 갈등' 특별강좌를 강의하는 등 전두환 정권 내내 해외에 있어야 했다. 이후 귀국했으며 1988년 한겨레신문사 이사 겸 논설고문에 취임했다. 1995년 한양대학교 교수직에서 정년퇴임했다.

2000년대 후반부터 간경변으로 투병하다 2010년 12월 5일 81세를 일기로 서울특별시 중랑구 녹색병원에서 타계. 묘지는 광주광역시의 5·18 민주묘지(5.18 묘역)에 있다. [2]

2. 평가[편집]

나의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되고 그것에서 그친다. 진실은 한 사람의 소유물일 수 없고 이웃과 나눠져야 할 생명인 까닭에 그것을 알리기 위해서는 글을 써야 했다. 그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이다. 그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고통을 무릅써야 했다. 지금까지도 그렇고 영원히 그러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괴로움 없이 인간의 해방과 발전, 사회의 진보는 있을 수 없다.


리영희, 『우상과 이성』


리영희는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남겼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기존의 권위주의 독재 정권 시절, 정권의 논점을 조목조목 반박. 한국 현대사에서 왜곡된 국제적 사실들을 밝히는 데 공적을 남겼다. 단적인 예를 들어 베트남 전쟁에 대해 그는 한국에서 '베트남 전쟁은 이념대립이 아닌 반제국주의 성향이 짙다.'고 최초로 정의내린 인물이었다. 후에도 베트남 전쟁 때의 대한민국 국군의 과오에 대해 사죄를 요구하기도 했으며 보수정부들에 대해서 전반적으로 비판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밖에도 단순한 반공논리만이 주입될 뿐 외부 정보가 거의 차단되었던 1970년대에 세계의 객관적 시각들과 알려지지 않은 정보를 소개하여 사람들에게 새로운 사실을 알릴 수 있었다. 그리고 매카시즘을 조장하는 기존 방송이나 언론 등의 문제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중국일본과의 외교문제나 미국의 동북아 전략 등이 국가의 통제를 넘어 제대로 소개되면서 사람들에게 충격을 가하였던 것.

이 때문에 그의 저서 《전환시대의 논리》(1974년작)는 당시 많은 젊은이들에게 중요한 책으로 간주되었는데, 문재인이 가장 좋아한 책으로 꼽기도 했다. 2005년 KBS 1TV의 《TV 책을 말하다》에 출연했을 때 문화평론가 진중권이 같이 출연하여 과거의 자신에게 끼친 리영희 저작의 영향에 대해 강조하기도 했다. 이른바 유신시대와 5공 시대 운동권 대학생들의 '사상의 은사'였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활동 때문에 보수쪽 이들에게는 당연히 눈 밖에 나버리게 되었고, 이들은 그를 '빨갱이'라는등 인신공격을 맹렬히 퍼부었다. 다만 리영희 자신은 북한 정권에 대해서도 서슴없이 비판을 가했다. 단적인 예로 1998년에 방북해 고위직 인사들과 회담을 나눈적이 있었다. 리영희는 북한의 경직된 체제와 우상화를 조목조목 비판하면서 북의 고위직 인사들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다. 비전향 장기수(비전향 장기수중에는 6.25 전쟁때 학살범들도 많다)에 대한 비인간적 처우와 문제에 대해서 '북한 당국의 잘못이 매우 크다'고 책임을 강하게 묻기도 했었다. 그러나 반공법으로 잡혀들어갔을 때 도저히 그를 공산주의자로 매도할 수가 없었던 것이, 이북 출신이긴 하지만 가족 모두가 한국 전쟁 이전에 남한으로 이주했고 한국 전쟁에 통역장교로 임관하여 전후까지 합쳐 7년 동안이나 직위에 있었던 예비역 소령인데다가, 비록 인사체계의 부실로 인해 없어졌지만 은성무공훈장까지 수여받은 터라 잡아낼 건덕지가 없었다. 결국 재판에서 11심까지 갔으나 1심에서 이미 당시의 정권으로부터 2년형을 때리라고 밀서가 온 터라 감옥에 부당하게 갇히게 되었다.

김삼웅 독립운동관장이 아직 대상자가 살아있던 시기(2010년 4월 19일)부터 쓰던 평전이 있다. 다만 호평이 어느 정도 강한 것은 감안할 것. # 그는 리영희를 "한국의 소크라테스"로 평했다.

3. 비판 및 반박[편집]

그러나, 일부 보수인사들은 냉전기에 사상의 은사인 그의 역할은 인정하나, 과오도 상당히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과거 마오이스트를 자처했다가 뉴라이트로 전향한 안병직 교수 등이 그를 적극적으로 비판하며 시장주의를 강력히 옹호하였다. 그리고, 반박 항목들을 보면, 단편적인 정보를 바탕으로 어떤진단을 내려서인지 뭔가 성급하고 미래에 대한 혜안이 좀 부족해 보인다는 느낌 역시 지울 수 없다는 입장이 있고 현대에 있어 리영희가 비판받는 가장 큰 이유가 미래 예측이나 사안에 대한 전반적인 분석의 부정확함 때문인 것은 분명하다.

다만, 해당 시대와 그 시대 한국 사회의 한계 때문에 정확한 판단이 어려웠던 점을 참작할 필요는 있다. 예를 들어, 리영희의 가장 큰 과오로 지적되는 '문화대혁명 옹호'의 경우, 문화대혁명의 전모와 실체가 거의 드러난 21세기 이후에 이를 비판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하지만 리영희의 《8억인과의 대화》가 쓰여진 것은 1977년이다. 그렇다면, 30년간의 시차를 감안하지 않고 두 입장을 동등하게 비교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또한, 리영희와 동등하게 비교될 수 있는 위치에 있던 70년대 후반~80년대 초반의 다른 한국 학자들은 문화대혁명에 대해 어떤 의미있는 분석을 내놓았던가? 이는 결국 '대상에 대한 충분한 자료와 객관성을 가지고 내릴 수 있는 후세의 평가'와 '정보도 불충분하고 객관성도 확보하기 힘들지만 대상과 강하게 상호작용할 수 있고, 후세의 평가의 기초가 될 수 있는 당대의 평가'는 서로 다른 영역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는 문제이다.

그런데 이런 고려는 리영희 자신이 비판해마지 않던 친일파 지식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다. "친일파 지식인들이 당시의 제한된 정보를 기반으로 차라리 일본 정부에 협력하여 동등한 시민자격을 획득하자는 판단을 하는 것을 "수십년의 시차"를 감안하지 않고 비교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리영희 자신이 자신과 생각이 다르거나 자신이 비판하는 인물들에게 가차없었던 만큼(친일파, 선우휘, 김대중 주필 등...) 그 본인에게도 엄격한 잣대가 매겨져야 할 텐데, 문화대혁명의 수십만에서, 대약진운동의 수백만 단위의 희생자(보수적으로 잡아도 사망자가 2천만명 이상임)가 발생했던 사건을 찬양했던 것을 '정보도 불충분하고 객관성도 확보하기 힘들지만 대상과 강하게 상호작용할 수 있고, 후세의 평가의 기초가 될 수 있는 당대의 평가'로 미화할 수 있다면, 5.18에 대한 "북한군 침투" 주장 역시 동일한 관점에서 평가받아야 하는 것인지 의문이다.

3.1. 문화대혁명 미화 문제[편집]

리영희 교수는 마오쩌둥중국문화대혁명을 자신의 저서에서 지나치게 미화하였다.

대표작 《8억 인과의 대화》(약칭 대화, 1977년 작)[3]에서 리영희는 문화대혁명을 '이 때까지의 자본과 물질 중심의 세계에서 인간의 본성을 들여다보려는 세계관으로의 전환'이라고 하거나 '물질주의에서 정신적 실존적 인간의 본연을 고민하는 단계로 세계가 변화한다'는 식으로 표현했다. 또한 마오이즘을 일종의 인민주의로 묘사하기도 했다. 이는 유물론적 서구 세계관이 일상 생활이나 정신적인 부분은 개혁이 시도되지 않았음을 들어 이야기 한 것이다.

무엇보다 독재정권에 맞서 진실을 파헤치겠다던 소위 '지식인'이라는 사람이, 중국에서 대학살이 벌어지고 있던 시절 중국 독재정권의 문화대혁명 미화 선전을 아무 의심 없이 그대로 믿어 버리고 잘못된 정보를 대중에게 전파한 것은 분명 비판 받을 만한 부분이다. 불과 3년 뒤인 1980년, 같은 조선일보 출신인 조갑제 기자가 5.18 당시 목숨 걸고 광주로 들어가 당시 전두환 신군부가 주장한 북한군 침투설이 사실이 아니라고 밝혀낸 것과 심히 비교되는 일이다.

3.1.1. 반박 1[편집]

이런 진단이 가능했던 이유는 문화대혁명기간 중 홍위병에 의한 구습 타파이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문화대혁명 당시엔 중국이 국제사회에서 고립된 덕분에 그 실상이 바깥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4]

게다가 같은 시기에 표면적으로 비슷한 성격이긴 한 68혁명이 프랑스에서 벌어지고 있었으며, 68혁명의 당사자들 역시 문화대혁명을 자신들과 동급으로 여기는 큰 오류를 저지르고 있었다. 세계사적 맥락의 오류 [5]

문재인은 자신의 책 《운명》에서 이 문화대혁명에 대해 리영희에게 물어보았고, 리영희는 그의 질문에 솔직하게 자신의 착오를 인정하였다. 그는 그 당시에 중국에 대한 정보가 크게 부족하였다고 첨언하였다. 그의 책 대담집인 《리영희의 대화》(약칭 '대화')에서도 과거 문화대혁명 오판에 대한 자기고백을 했다.

물론 세계를 여행했던 지식인이 문화대혁명의 실체를 모른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다는 반박도 있으나 지식인도 사람이지 신이 아니다. 모택동 시절의 중국은 현재의 북한과 마찬가지로 폐쇄적인 국가였으며 일개 지식인에 불과한 리영희가 자세한 사정까지 안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위의 반박 중에 '그럼 친일파도 동일한 명분으로 옹호할 수 있지 않은가?'하는 얼치기 양비론이 있는데, 다분히 억지스러운 논리적 절대주의적 관점에서 벗어나 두 역사적 사건에 대한 당대 기준 정보의 접근성의 측면에서 비교해보자. 초기 부터 조선 인민에 대한 수탈과 이 뒤에 있는 냉소적인 조선인에 대한 경멸과 지배욕이 아예 눈이 먼 수준으로 자기 세뇌와 합리화에 성공한 골수 친일파가 아닌 최소한의 교육과 사회적 의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각할 수 있었던 일제의 착취와 지배욕구와 달리, 한중 수교 이전 중국을 비롯한 공산권에 대한 정보는 한창 날라다니던 서방의 정보 기관에서도 공식 행사에서 줄 맞추어 선 순서 따위로 억측이나 할 만큼 제한되어 있었다. 내부자로서 그 역사적 폭력에 대한 정보와 현실을 일찍부터 선명하게 절감할 수 있었던 일제 치하의 현실과 외부인으로서 진짜 명확한 정보를 얻기 굉장히 힘들었던 냉전기 중국에 대한 해석은 결코 동일선상에서 간단하게 비교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니다.

3.1.2. 반박에 대한 반박[편집]

전환시대의 논리의 속편이라 칭할 만한 우상과 이성이란 책의 3장을 보면 중국에 관해 저술했는데, 중국이란 어떤 나라인가라는 항목을 보면 숙청홍위병에 대한 본인의 견해가 적혀저있다. 헌데, 숙청에 대하여 중견 간부들이 하방 조치에 대해서만 판단하여 매우 긍정적으로 서술했다. 이 책이 1970~80년대에 발간했으면 또 모르겠지만, 우상과 이성은 2006년에 발간한 저작집이다. 30년 정도 지난 시점에서 이를 고치지 않고 그대로 적은 것은 분명 문제가 있는 점이다. 또 홍위병에 대해서 최소한 마오이즘에 사로잡혔다는 사실도 적지 않고 자발적으로 행동한 청년들이라 서술하며 문화대혁명에서의 문화재의 소실 및 파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때문에 최소한 우성과 이성은 2006년에 출간한 저작집이기에 이를 첨삭하지 않고 그때의 내용과 견해를 전부 적었다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는 내용이다.

3.2. 카다피에 대한 옹호[편집]

2005년에 출간된 대담집인 '대화'에서 리비아의 독재자 무아마르 알 카다피를 옹호하기도 했는데, 그 때 시점에서도 카다피는 35년째 독재 중이었다[6]. 과연 '반(反) 시장제국주의적 활동'이라는 이름만으로 이러한 독재를 용인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렇게 극찬한 카다피는 2011년 들어 민주화를 주장하는 자국민을 전투기로 폭격하고 용병까지 동원해서 학살하는 악질적인 본성을 드러내다 결국 사살당했고, 해당 내용은 갈 곳을 잃게 되었다. 이건 70년대도 아니고 21세기의 오류다.

굳이 변호를 하자면 초창기의 카다피는 '젊은 혈기의 혁명가'로서 '아프리카의 체게바라'로까지 불리며 진심으로 리비아 시민들을 위한 정치를 폈던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그를 권좌에서 끌어내린 것은 그보다 못했으면 못했지 나을 게 없는 왕당파와 반동 보수주의자들이었다. 그러나 오랜 장기 집권으로 부패하여 독재로 리비아 국민들을 힘들게 하고 민주화 운동을 잔인하게 진압한 것은 결코 옹호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3.2.1. 반박 2[편집]

해당 대담집에서의 발언은 카다피 집권 당시의 유전 국유화 등의 조치를 보고 그 때 당시 자신이 느낀 반가움을 이야기 한 것이다. 물론 카다피에 대한 반응으로는 부적절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거에 자신이 느꼈던 감정에 대해 거짓말하는 것 역시 부적절한 태도일 것이다. 애초에 해당 대담집 자체가 전체적으로 일관성을 가진 학술서적이라기보다는 단편적인 대담 모음집이며 카다피에 대한 언급 자체도 70년대 당시 자신이 느낀 감정에 대한 것뿐이므로, 이걸 굳이 카다피에 대한 총체적 옹호라고 읽는 것 자체가 무리한 해석이다.

무엇보다도 리영희가 살아서 카다피 정권의 무자비한 실상을 정확히 알고 난 뒤에도 카다피를 계속해서 옹호해줬을까를 생각해보자. 그가 그렇게 비상식적인 인물이었다면 이 항목이 만들어질 일도 없었을 것이다.

3.3. 남북 군사력에 대한 주장 논란[편집]

보수논객들은 리영희가 북한의 군사력은 '생각했던 것보다 강하지 않다.'고 정의내린 것에 대해 율곡사업(1974~)의 가장 큰 성과인 한국형 전차가 배치된 1987년(6월 항쟁으로 민주화가 이루어진 해)까지 국군의 전력은 북한군에 비해 실제로 열세였으니 그의 판단은 오판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3.3.1. 반박3[편집]

리영희는 자신의 견해를 1990년에 간행한 반세기의 신화에서 기존의 남-북한 군사력 비교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함으로서 상세하게 밝힌 적이 있었다. 리영희의 문제제기에 대해 군 당국은 외부의 대응은 삼가고 대외비 문서를 배포하여 리영희의 주장에 대해 반박하는 형식으로 대응하였다.[7]

3.4. 대한민국은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가 아니다?[편집]

"80년대 한국사회에서 모든 지식인과 교수, 정책수립가, 정당 관계자들은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의 법리를 뒷받침하는 소위 유엔총회 결의 '대한민국은 한반도 유일 합법정부'라는 이 법률이 얼마나 사실과 다르며 허위이고, 해석을 견강부회했던 집권자들의 자위적인 해석인지, 또 완전히 거짓에 의한, 우상에 의한 미신인지를 밝혀나갈 때 무척이나 고통받았다"
오마이뉴스, "부시 재집권, 이제 반동의 시대 열린다" 2004년 11월 4일


리영희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대한민국 정부가 UN에게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형식상 총선거가 실시된 38선 이남 지역에서의 유일 합법정부인 것이지, 한반도 전체의 주권을 가졌다고 보는 것은 확대해석이란 것.

이에 대한 비판은 다음과 같다.

역사교과서 집필시안 세 가지 쟁점
<포럼>歪曲 국사 교과서 修正 거부해선 안돼
'한반도 유일 합법정부'는 누가 뭐래도 대한민국뿐이다

3.4.1. 반박 4[편집]

대한민국 정부를 인정한 UN 결의문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Declares that there has been established a lawful government (the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having effective control and jurisdiction over that part of Korea where the Temporary Commission was able to observe and consult and in which the great majority of the people of all Korea reside; that this Government is based on elevations which were a called expression of the free will of the electorate of that part of Korea and which were observed by the Temporary Commission; and that this is the only such Government in Korea;
출처


여기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마지막의 'that part of Korea and which were observed by the Temporary Commission; and that this is the only such Government in Korea'이다. 이 문장에서 UN은 UN감시단의 감시 아래 총선거를 정상적으로 실시한 지역에서 대한민국 정부의 주권을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당시 총선거는 소련과 김일성 세력의 방해로 인해서 38선 이남 지역에서만 진행할 수 있었다. 따라서 UN은 우선 38선 이남 지역으로 한정해서 대한민국 정부의 정통성, 합법성을 인정한 것. 물론 한반도 전체에서 총선거를 실시하지 못하게 된 책임은 앞서 말한 소련과 김일성 세력에게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한민국 정부가 한반도 전체의 주권을 대표할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당시 시점으로 보았을 때 UN 입장에선 소련을 어떻게든 설득해서 38선 이북 지역에도 총선거를 마저 실시하여 정부의 합법성을 확보하도록 하는게 중요했고 그게 절차상으로도 정상이었다. 총선거가 실시되지 않았는데도 38선 이북 지역에까지 대한민국 정부의 주권을 미치게 한다면 오히려 그게 비정상이다. 그러니까, 리영희의 주장이 옳다.

한편 UN은 이 총선거를 통해서 38선 이남 지역으로 한정하긴 했지만 어쨋든 대한민국 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하였지, 38선 이북 지역에서 현 북한 정권의 정통성을 인정하지는 않았다. 리영희도 마찬가지로 현 북한 정권에게 정통성이 있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1991년 9월 17일[8] 이후부터는 어차피 따질 필요조차 없는 문제가 돼버렸다.

3.5. 기타[편집]

2000년 남북정상회담6.15 선언 이후 남북관계가 긍정적으로 보였을 때에 북한이 변하는 만큼 남한이 변해야 한다고 주장을 했다. 남한이 우익세력이 강한 것은 40년 전과 다를 것이 없는데 북한은 남한과 대화를 하면서 변해왔으니 남한은 최소한 그만큼, 가능하면 그 이상 변해야 한다고 말했다. 관련 기사.

그러나 현실은...

그 외에 군사정권 시절의 인권 탄압에 대해서는 철저히 비판하면서도 북한 주민들의 인권 문제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비판의 강도가 덜하다고 지적되는 경우도 있다. 다만 당시까지 북한 인권 문제 이전의 목전의 문제가 다급했고, 지금과 달리 북한의 실상도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더불어 상술되었듯이 북한 정권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그리고 북한 인민도 아니고 대한민국 사는 한국 국민인데 우리 문제보다 북한 문제를 먼저 까야하냐

그를 호의적으로 평가하는 측에서도 그의 관점이 "상식"적이긴 했으나 반드시 일관된 것은 아니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실제로 70년대 그가 쓴 일부 논평들은 관점이 오가는 것이 많다.

4. 조선일보와의 관계[편집]

리영희는 조선일보, 특히 반공주의적인 논객 선우휘와의 관계가 별로 좋지 못하였는데, 이는 선우휘가 조선일보에서 편집국장이던 1968년 박정희 정부의 외압으로 사임하게 한 탓도 있었다. 애초에 리영희가 선우휘의 사상을 혐오한 것도 있었다.[9]

또한 리영희는 후에 주필이 되는 신참기자인 김대중을 좋게 보지 않았는데, 김대중이 후에 다른 기자들이 다 잘리고(...) 높은 자리로 올라갔다면서 의아해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김대중 주필은 후에 반민주적이고 특정 정치 정당을 대변하는 논조나 해외 논설의 왜곡 번역 문제 등으로 선우휘에 가까운 비판을 받았다.

5. 저서[편집]

6. 편역서[편집]


[1] 이 때만 해도 조선일보의 성향은 지금보다 훨씬 진보적이었다.[2] 당시 5월 17일 ‘광주소요 배후조종자’로 구속돼 해직되어 민주화 관련 공이 있음을 인정받았다.[3] 중국의 당시 인구를 말한 것으로 일종의. 편역서이다. 후에 1983년에는 《10억인의 나라》라는 책을 다시 냈다. 인구가 그새 늘었다.[4] 당시엔 크렘린이나 천안문에서 지난 번에 봤던 그 특정인이 보이지 않으면 숙청되었다고 추측하던 시절이기도 했다.[5] 그 덕분에 유럽의 좌파중에도 문화대혁명이나 심지어 캄보디아폴 포트를 관료적 공산주의를 개혁하려는 새로운 시도로 받아들이고 높게 평가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놈 촘스키도 그랬다.[6] "신생 독립국가인 리비아에서 쿠데타로 서구제국주의의 괴뢰왕조를 전복한 카다피 육군중령은 즉시 시장제국주의 자본이 소유했던 유전의 국유화를 단행했어요. 이것은 아랍세계 인민이 결정적으로 서방 자본주의의 착취를 거부하는 몸부림이었어……국내 현실로 말미암은 질식과 절망의 상태에서 해방되는 것과 같은 기쁨을 느꼇어."[7] 리영희의 옛 집이었던 화양동 자택에 누군가가 그 대외비 문건을 던져주고 간 일이 있었다.[8] 남한과 북한이 각각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란 자격으로 UN에 동시 가입한 날이다.[9] 선우휘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반공주의적 성향으로 더욱 굳건하게 변화하여 그 당시(80년대) 운동권의 비판순위 제 1대상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