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트비히 요제프 요한 비트겐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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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
루트비히 요제프 요한 비트겐슈타인

출생

1889년 4월 26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사망

1951년 4월 29일 (62세), 영국 케임브리지

국적

오스트리아 파일:오스트리아 국기.png영국 파일:영국 국기.png

학력

린츠 국립실업고등학교
맨체스터 빅토리아 대학교 공학 박사
케임브리지 대학교 철학 박사

직업

철학자

경력

케임브리지 대학교 철학 교수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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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천재들 중에서 아마도 가장 완전히 전통적 천재관에 부합되는, 열정적이고 심오하며 강렬하고 지배적인 천재의 예


버트런드 러셀

흔히 모든 철학은 플라톤에 대한 주석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1] 하지만 이 말에는 '비트겐슈타인 이전까지'라는 단서를 덧붙여야 한다.


― 와스피 히잡, 비트겐슈타인의 제자


1. 개요2. 생애
2.1. 형제들
2.1.1. 형제의 자살
2.2. 아동·청소년기2.3. 성인기2.4. 중년기2.5. 노년기2.6. 히틀러와의 인연2.7. 비트겐슈타인 가문의 수치
3. 비트겐슈타인의 철학
3.1. 전기 철학
3.1.1. 「논리철학논고」
3.1.1.1. 구성3.1.1.2. 그림 이론3.1.1.3. 유아론적 경향3.1.1.4. 논리학에 대한 견해3.1.1.5. 수학에 대한 견해3.1.1.6. 역설
3.2. 후기 철학
3.2.1. 「철학적 탐구」
3.2.1.1. 「철학적 탐구」의 구성3.2.1.2. 게임이론3.2.1.3. 가족적 유사성3.2.1.4. 유아론에 대한 비판3.2.1.5. 논리학에 대한 견해3.2.1.6. 수학에 대한 견해
3.2.2. 「심리철학적 소견들」
3.2.2.1. 체화이론3.2.2.2. 유아론에 대한 비판
3.2.3. 「확실성에 관하여」
3.3. 문화와 가치에 대한 견해
3.3.1. 과학과 문명의 진보3.3.2. 음악3.3.3. 문학
4. 그 외
4.1. 관련 영화4.2. 관련 음악4.3. 관련 그림4.4. 관련 소설

1. 개요[편집]

20세기의 위대한 철학자.[2]

오스트리아 태생의 철학자. 현대 영미분석철학의 선구자 중 한 사람으로 꼽히며, 일상언어학파의 창시자 격이다. 일반성을 갈망해 점점 일그러져 가는 지성계에 언어사용의 다양성과 차이를 강조하였다.[3] 또한 듀이, 하이데거와 함께 체계 철학에 대비되는 3대 교화 철학자 중 한 사람으로 꼽히기도 한다.[4]

"표현은 삶의 흐름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다"고 그 스스로가 말한 것과 같이, 그의 삶을 그의 철학과 분리시켜 고찰하기는 어렵다. 그 누구보다 완전한 사람이 되기를 바랐지만[5], 동시에 가장 인간답기를 바랐던[6] 인간.

2. 생애[편집]

1889년 4월 26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 빈에서 카를(1847~1913)과 레오폴디네(1850~1926) 비트겐슈타인의 여덟 자녀 중 막내[7]로 태어났다. 아버지 카를은 오스트리아에서 철강산업을 이끌던 대단히 부유한 사람 중 하나[8]로 유태인이었으나 후에 개신교로 개종하였다. 어머니 레오폴디네는 유대인과 오스트리아계의 혼혈로 가톨릭 교도로 성장했으며 여덟 자녀 모두 가톨릭 세례를 받게 하였다.[9] 비트겐슈타인 가족은 대단히 큰 저택에서 살았고 레오폴디네의 음악에 대한 열정적인 관심 덕택에 당대의 유명한 음악가들은 그 집에 초대받아 연주를 할 수 있었다. 그중에는 클래식에 문외한인 사람이라도 한 번쯤 이름을 들어봤을 브람스말러도 있었다.

2.1. 형제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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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 아기 시절(1891년경)


첫째 누나 헤르미네(1874~1950): 루트비히와 자주 편지를 주고 받으며 그의 고민을 함께하였다그다지 도움이 되지는 않은 것 같지만. 재능있는 화가로 아버지 카를과 함께 클림트, 로댕의 그림을 수집하였다. 루트비히의 철학적 진로에 항상 관심을 가졌으며, 나중에 버트런드 러셀이 루트비히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을 때 가장 기뻐했던 것도 그녀였다.

살아있었다면 둘째 누나가 됐을 도라(1876): 태어난 해에 사망하였다.

둘째 누나 헬레네(1879~1956): 어린 루트비히와 함께 "어리석은 장난"을 많이 쳤다. 나치 독일 시대 때와 루트비히가 암에 걸렸을 때 편지를 주고 받았다. 그 외에 별다른 기록은 없다.

셋째 누나 마르가레테(1882~1958): 구스타프 클림트가 그녀의 초상화를 그렸다. 프로이트의 친한 친구로 그가 나치 독일을 탈출할 때 도와주었다. 루트비히의 어린 시절, 그에게 가장 큰 지적인 영향을 끼쳤다. 루트비히에게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의 세계」를 소개했다. 루트비히는 그녀를 위해 자그마치[10]을 지어주었다. 정작 그녀는 그 집이 "나같이 보잘 것 없는 인간보다 신들을 위한 숙소처럼 보였다."며 "그 집을 보고 아주 감탄하긴 했지만, 한시도 거기서 살고 싶지도 않고 또 살 수도 없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 집은 현재 빈의 불가리아 대사관의 문화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넷째 형 파울(1887~1961): 피아니스트. 1차 대전 중에 오른팔을 잃었다. 볼레로로 유명한 라벨(1875~1937)이 그를 위해 1931년 「왼손을 위한 협주곡」을 작곡했다. 하지만 이 곡의 일부분을 파울은 고쳐 연주하기를 원했고 라벨은 이에 분노했다.[11]

다섯 형제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은 다음과 같았다: "……<루트비히는 헤르미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 오형제는 서로에게 다정한 형제들이라고 보기는 어려워. 누나는 나나 그레틀 누나하고는 대화가 되지만 우리 셋이 다함께 대화하는 건 힘들지. 파울 형과 그레틀 누나가 서로 대화하는 건 더욱 어려운 일이고. 헬레네 누나는 누구하고도 잘 맞지만 헤르미네 누나하고는 절대로 맞지 않고, 나와는 같이 잘 어울려. 우리 모두는 딱딱하고 날카로운 블록처럼 서로 편안하게 맞기 어려운 사이 같아……. 친구들이 우리의 삭막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려줄 때에야 그나마 서로에게 조금 싹싹하게 대하지."[12]

2.1.1. 형제의 자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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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 형제의 사진(1890년)[13]


첫째 형 한스(1877~1902): 어려서부터 음악에 소질이 있었으나 아버지 카를은 한스가 가업을 물려받길 원했고, 한스는 강압에 못 이겨 예전에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미국으로 홀연히 떠난다.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는 없으나 1902년 체사피크 만의 보트 위에서 실종되었고 자살로 결론이 났다.

둘째 형 쿠르트(1878~1918): 1차 세계 대전 말기에 자신이 지휘하던 부대의 병사들이 자신의 명령에 따르지 않자 비관하여 총으로 자살하였다. 그의 자살과 아버지의 바람 사이에 연결고리는 없다. 쿠르트와 아버지 카를 사이에 한스의 것과 같은 장래 문제에 관한 마찰은 없었다.

셋째 형 루돌프(1881~1904): 배우로서 살기를 희망하였으나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혀 집에서 나와 베를린에서 살고 있었다. 1904년, 베를린의 한 술집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신청한 뒤 그것을 들으며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하였다.

좋아하던 그 음악은 Thomas Koschat의 노래 「나는 버림받았네Verlassen, Verlassen, Verlassen bin ich」라고 한다.[14] 가사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나는 버림받고, 버림받고 버림받았네!
거리에 놓인 돌멩이와도 같이, 날 사랑하는 처녀가 아무도 없으니!
나는 교회에 가리, 멀리 떨어진 교회에,
그곳에서 무릎을 꿇고 가슴이 터지도록 울어버리리!

숲속의 작은 언덕에는 꽃들이 만발한데,
내 가련한 처녀는 그곳에 잠이 들어,
그 어떤 사랑도 그녀를 소생시키지 못하리,
저기 저쪽에 나의 순례가, 저기 저쪽에 나의 욕망이,
그곳에서 나는 절절하게 느끼리, 내가 얼마나 버림받았는지.[15]


유서에는 '친구의 죽음'과 '자신의 타락한 성격'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한다고 적혀 있다. 동성연애자 해방 운동을 하던 단체에 가 도움을 청한 것으로 보아 동성애자인 자신의 성적 성향을 비관하여 자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자신의 타락한 성격'은 그것과 연관지어서 해석할 수 있고, 따라서 루돌프도 아버지의 강압에 적잖이 힘들어 했음에 분명하나 그것이 직접적인 자살의 이유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형제들의 자살에 대한 루트비히의 생각은 다음과 같았다.

"……바이닝거 본인조차 자살 직전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자살은 용기의 표시가 아니라 비겁함의 표시다. 비겁한 행동 가운데 가장 덜 비겁하다 할지라도.' 루트비히는 때때로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은 걸 부끄러워 했지만, 그와 파울이 결코 그런 방식을 택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이런 형태의 비겁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언제나 비열한 짓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스스로의 파멸을 의지할 수 없으며, 실제로 그와 관계된 것을 상상한 사람이라면 자살이란 언제나 성급한 자기 방어임을 알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상황이 얼마나 끔찍했으면 불시에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었을까.'"[16]

2.2. 아동·청소년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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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 아동기(1898년경)


비트겐슈타인이 태어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 빈은 '거대한 정신의 요람'[17]이자 '세계 파괴의 실험실'[18]이었다. 한쪽에서는 빈의 부르주아 계층이 향락적이고 퇴폐적인 생활을 즐겼으며, 다른 한쪽에서는 궁핍한 노동자들이 열악한 노동 조건하에서 고된 일을 하고 있었다.[19] 빈의 예술가들은 그런 세상을 도피하듯이 탐미주의에 빠졌고, 프로이트는 역설적인 도시 빈에서 신경증을 진단하였다. 비평가 카를 크라우스는 거의 종말을 예견하는 예언자처럼 빈을 절망적으로 바라보았으며 대대적인 수술이 시급함을 역설하였다. 그곳은 말 그대로 '세기말'이었다.[20]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도시 상황과 분리시켜 고찰해서는 안 된다. 이런 '병적일 정도의 아름다운 공간'에서 비트겐슈타인은 탄생의 제비뽑기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었고, 경제적인 것에 국한될지라도 비교적 안락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아홉살, "거짓말을 하는 것이 이로울 때에도 사람들은 진실을 말해야 할까?" 첫 철학적 사유라는 것을 한다상당히 귀여운 생각 주변의 아홉살배기들 중에서 이런 생각을 하는 애들이 있는지 찾아보자. 만족스러운 해답을 얻지 못한 채 결국 그런 경우에는 거짓말을 말해도 잘못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다. 아무래도 '천재'라는 말이 따라붙다 보니 비트겐슈타인도 모차르트처럼 어렸을 적부터 탁월한 재능을 보였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이따금 실 짜는 기계를 만들거나 종교 과목에서 A를 받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과목에서는 평균점을 기록하였고 심지어 화학에서는 낙제를 받기도 했다.[21]

1903년 비트겐슈타인은 다른 부르주아 계층의 자녀들과는 달리 김나지움(문법학교)에 가지 않고 린츠의 실업학교에 진학하게 된다. 이는 사업을 물려받기를 원했던 아버지의 바람이 가미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린츠의 실업학교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다른 학우들과 가정환경의 극명한 차이 때문에 적응하기 힘들었는데, 실제로 비트겐슈타인 자신도 그 시절의 자신을 "불행했다"고 회상한다.[22] 이 시절 아돌프 히틀러와의 인연은 유명하지만(2.6 히틀러와의 인연 참고) 1904~1905년까지 같은 학교에 다녔다는 것 외에 실제로 둘이 접촉했다는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23] 히틀러는 성적 불량이었고 루트비히와 나이가 같았으나 2학년 아래였으며 후에 린츠의 실업학교에서 쫓겨났다.

1903년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오토 바이닝거(1880~1903)가 「성과 성격」을 출판하고 그해 베토벤이 죽은 집에서 권총으로 자신의 심장을 쏴 자살하였다. "천재가 아니면 죽음을!"[24]이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라이프치히 대학의 교수인 파울 율리우스 뫼비우스가 바이닝거의 주저 「성과 성격」을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이의를 제기한 것과 자신의 동성애적 성향에 비관하여 자살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바이닝거의 책을 탐독했으며 그의 장례식에 참여하여 시신이 운구될 때 그 뒤를 따라갔고 평생 그의 추종자로 남았다.[25] 「성과 성격」의 내용은 비장하리만치 과장된 여성의 결함에 대한 강도 높은 비난과 금욕을 통한 인류의 멸종(...)의 주장이다.[26] 여담이지만 바이닝거는 법실증주의를 만든 한스 켈젠의 친구이기도 했다.[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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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 청소년기(1905년경)


1906년 과학철학에 흥미를 느낀 비트겐슈타인은 린츠의 실업학교를 떠나 루트비히 볼츠만에게 물리학을 배우기 위해 빈 대학으로 가려고 했지만 그해 9월에 볼츠만이 두이노에서 자신이 과학계에서 중요하게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없음에 절망하여 자살하는 바람에 무산됐다.[28] 결국 이론과학을 공부하고 싶은 자신의 바람과는 무관하게 아버지의 강요로 베를린의 샤를로텐부르크에 있는 기능 대학으로 기계공학을 공부하러 가게 된다. 그곳에서 1908년 학위를 취득하고 항공학을 더 공부하기 위해 맨체스터로 가게 된다. 1906년~1908년 사이 별다른 기록은 없다.

"……큰누나 헤르미네는 이렇게 말했다. '루트비히는 급우들이 보기에는 마치 낯선 나라에서 갑자기 찾아온 것 같았겠지요. 루트비히는 그들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았어요. 예를 들면 급우에 대하여 Sie(경칭, 당신이라는 의미)라고 말을 건 것만으로도 장애가 되었지요. 아마 그들보다 몇 살 위인데다가, 그들보다 성숙해서였을 거에요. 특히 그 아이는 정신적으로 이상하리만큼 감수성이 강했어요.'(「남동생 루트비히」)
루트비히 자신도 다른 급우들과 자신이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처럼 느끼고, 익숙해지지 못하는 학교 생활을 점점 게을리하게 되었다. 그 모습은 아버지 카를이 어머니 레오폴디네 앞으로 쓴 편지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루키(루트비히를 말함)가 방종한 생활을 반드시 그만들 수 있도록 빈으로 바로 데려와야 하오. 루키가 집에서 공부를 하겠다고 해도 괜찮소. 그 아이가 다음 달에라도 어딘가 일을 하러 간다면 한 번쯤 해둘 필요가 있는 일이니 그것도 괜찮소. ……그 아이는 방종한 생활을 그만두고, 자고, 먹고, 땀 흘리고, 극장에 가야 하오. 루키가 내 지도를 오해하지 않기만을 바라오.'
그러나 이처럼 아버지 카를의 염려에도 불구하고 루드비히는 린츠에 머무르다 1906년 졸업했다. 성적은 두드러지지 않았고 매우 평범했다."[29]

2.3. 성인기[편집]

1908년 맨체스터 대학에서 연을 만들어 대기를 관측하고, 비행기 엔진을 설계하는 등의 일을 하다가 버트런드 러셀의 「수학 원리」를 읽게 된다. 「수학 원리」에서 유형론의 난점을 발견한 비트겐슈타인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몰두했고 수리철학과 기계공학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30] 그러나 1911년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까지 그는 항공학 연구를 멈추지 않았고, 그해 8월 '항공 기계에 응용할 수 있는 프로펠러의 개선'에 대한 임시 설계명세서를 제출하며 그 특허가 받아들여지기까지 그의 공학도로서의 경력은 계속됐다.

1911년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책을 쓰기 위해 예나 대학에 있는 프레게를 찾아가게 된다. 프레게는 시의적절하게도 비트겐슈타인에게 케임브리지에 있는 러셀에게 가 배우라고 권유한다. 비트겐슈타인에게는 선생이 필요했고, 러셀에게는 제자가 필요했다. 그해 10월 18일, 비트겐슈타인은 트리니티 칼리지의 러셀의 방에 갑자기 나타나서 불쑥 자신을 소개한다. 그 뒤 러셀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그의 강의에 참석하며 그를 괴롭힌다. 나중에 가서는 급기야 러셀의 방에 코뿔소가 없다는 것이 확실한지에 관해서 논쟁하게 되는데, 비트겐슈타인은 러셀의 방에 코뿔소가 없다는 것이 확실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31] 11월, 이제 그는 더 이상 맨체스터 대학의 공학도가 아니었다.

11월 말이 되자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철학적 재능을 확신해주기를 러셀에게 원했고, 러셀은 겨울 방학 동안 철학과 관련된 글을 비트겐슈타인더러 쓰게끔 해 1912년 1월 글을 받아보게 된다. 러셀은 그 글을 보고 비트겐슈타인에게 철학적 재능이 있음을 확신하게 되고 그를 격려해주게 된다. 비트겐슈타인에게 러셀의 격려는 '구원과 같았다'.[3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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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 성인기 초기(1910년경)


1912년 2월, 비트겐슈타인은 트리니티 칼리지의 학생이 된다. 이 시기의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을 좋아하는 사람은 철학을 할 것이고,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며 그것이 전부"라고 말하며 철학에 대한 과도한 평가에 조심스러워하는 모습을 내비쳤다. 1912년 여름, 비트겐슈타인은 러셀이 주최하는 스쿼시 모임에서 나중에 「논고」를 헌정하게 될 데이비드 핀센트와 사귀게 된다. 그는 수학과 2학년 생으로 총명하였으나 두드러진 재능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34]. 비트겐슈타인은 핀센트와 같이 아이슬란드 여행을 갈 만큼 돈독한 사이가 된다. 여행 경비를 모두 비트겐슈타인이 부담할 만큼 핀센트에게 친절히 대하려고 애썼다워낙 과민한 성격 탓에 서로 언쟁하는 일이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10월, 비트겐슈타인은 스스로 엘리트임을 자처하는 사도 클럽의 회원으로 선출된다. 그러나 이 기록은 보통 비트겐슈타인의 전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리 중요한 기록이 아닌데, 몇 달 지나지 않아 비트겐슈타인이 다른 사도 회원들과의 마찰 때문에 클럽을 탈퇴했기 때문이다.

1913년 1월 20일,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아버지 카를이 사망했는데 편안한 모습으로 임종을 맞았기에 비트겐슈타인은 슬퍼하는 모습을 내비치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주 기뻤다"고 말하면서 그의 죽음을 애도하기보다는 축하하려고 했다. 부자였던 아버지의 유산의 1/3은 1914년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데 쓰이게 된다.[35]

1913년 비트겐슈타인은 러셀과 논리학 연구를 계속하지만 결국 스스로의 과민한 성격 탓에 대학의 어수선한 분위기를 참지 못하고 그해 10월, 노르웨이에서 몇 년간 혼자서 논리학 연구를 하겠다는 폭탄 선언을 하게 된다. 이에 대해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에게 "미쳤다"고 말하고 비트겐슈타인은 "신이 자신을 정상인이 못 되도록 막고 있다"며 대꾸한다. 러셀은 "신은 확실히 그럴 것이다."라고 받아치면서 어련하시겠냐는듯 마지못해 비트겐슈타인의 돌발 선언을 받아들여준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의 모든 말들을 기록으로 남기는 데에 착수한다. 겨울, 비트겐슈타인은 노르웨이의 스키올덴에 있는 농장에 거처를 잡고 그곳에서 1914년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36] 노르웨이에서의 생활은 비교적 안정되었고(비록 정신적인 면에서는 그렇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주민들도 그와의 관계에서 이렇다 할 커다란 문제는 없었다.[37]

"……나는 지식론에 대해 많은 것을 썼다는 것을 기억하시오? 비트겐슈타인은 그것을 더할 수 없이 혹독하게 비판했소. 비록 당신은 그때 알지 못했겠지만, 그의 비판은 내 인생에서 일등급의 중요성을 지닌 사건으로서, 그 후로 내가 하는 모든 일에 영향을 주었소. 나는 그가 옳았다는 것을 알았으며, 나는 이제 다시는 철학의 기초 작업을 못하리라는 것을 깨달았소. 방파제로 밀려와 부서지는 파도와 같이 나의 충동은 산산조각나버렸소. ……철학의 기초 작업은 모두 논리학이라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확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형이상학적 주제를 택했소. 내가 그렇게 한 이유는 비트겐슈타인이 나를 설득하여 논리학에 필요한 작업이 내게는 너무 어렵다고 믿게 만들었기 때문이오. ……토요일(1916년)"[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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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 스키올덴의 별장(미상)[39]


1914년 7월, 예술가들에게 돈을 배분하는 문제와 휴가 문제로 비트겐슈타인은 잠시 오스트리아에 머무르게 되는데 이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에게 선전포고를 하게 되고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된다. 비트겐슈타인은 탈장 때문에 징집에서 면제 되었으나, '강렬하게 다른 사람이 되고 싶은 소망'(...)에 의해 지원병으로 복무하게 된다.

8월 7일, 비트겐슈타인은 동부전선에 있는 크라코프 주둔 제1사단 포병연대에 배치되어 비스툴라 강가에 있는 고플라나 호에서 탐조등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 그가 처음 적군을 보고 생각한 것은 '공포'가 아니었다. "이제 나에게 훌륭한 인간이 될 기회가 왔다. 왜냐하면 나는 죽음과 마주 보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는 적는다. 비트겐슈타인은 전쟁터에서 톨스토이의 「요약 복음서」에 특히 매료되었는데 그것을 항상 들고 다니며 동료들에게 읽기를 권유했다고 한다. 그는 몇 년 전 연극 「십자가 원판」을 보면서 떠올렸던 생각 즉, "'외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아무것도 그에게는, 그의 가장 내적인 존재에게는 일어날 수 없다는 생각"을 고수하였다. 그는 전쟁기간 동안 신앙인(그것도 기독교적인 의미에서의 신앙인)에 가장 가까워졌다.[40][41]

9월, 비트겐슈타인은 한 잡지에서 파리에서 일어난 자동차 사고에 관한 재판 기사를 읽게 된다. 이것은 그의 전기 사상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2.1.1.2 그림이론 참고). 그는 전쟁 기간 중 오히려 더 격렬하게 사유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12월, 그는 수학 교육을 받은 경력을 인정받아 포병작업소로 이동하게 된다. 그곳에서 준장교로 승진했고 차량의 목록을 작성하거나 용광로를 관장하는 등의 일을 했다. 그러나 이곳에서 동료들과 부하, 상급자들과 잦은 마찰이 있었고 이는 비트겐슈타인을 지치게 했다. 결국 그는 전선으로 가기를 바랐고, 1916년 3월, 루마니아 국경 근처에 있는 동부전선 최남단 지점 오스트리아 제7군 소속 포병연대에 배치되게 된다.

최전방에서 가장 위험한 곳인 관측소에 배치되도록 비트겐슈타인은 요청했다. 그곳은 포격대상이 될 것이 뻔한 위치였는데 그는 이곳에서 「논고」의 중후반을 차지하는 함수와 명제의 본성에 관한 문제와 마지막 부분을 차지하는 윤리학과 미학 그리고 세계의 본성(삶과 죽음 등에 관한 문제도 간헐적으로 적었다)에 관한 질문에 관해서 쓴다.

1916년 7월, 비트겐슈타인은 드디어 계속되는 사격에 의해 '공포'를 호소하게 된다. 그는 오직 살기 위한 본능으로 점철된 자기를 바라보게 되고 동물적인 감각에 사로잡혀 온갖 윤리적 가치들이 사라지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그는 후퇴하라는 명령에도 불구하고 진지를 고수하였고 곧 훈장 수여 대상자에 추천되게 된다. 그는 상사로 진급했으며 얼마가지 않아 곧바로 또다시 소위로 승진됐다. 8월, 그는 장교 훈련을 받기 위해 모리비아에 있는 올뮈츠의 연대 사령부로 보내진다.[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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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 오스트리아-헝가리군(1918년경)

"신이여 나를 깨닫게 하소서, 신이여 나를 깨닫게 하소서, 신이여 나를 깨닫게 하소서, 신이여 나의 영혼을 깨닫게 하소서!"
-최전방 부대에 배치되면서 비트겐슈타인이 적었던 일기의 부분


1917년 1월, 비트겐슈타인은 카르파티아 산맥 북쪽에 위치한 제3군 소속 포병 장교로 배치된다. 이때 러시아는 혁명 전야에 있었기 때문에 전선은 비교적 조용했다. 그러나 혁명을 수습한 러시아는 7월, 공격을 재개했고 비트겐슈타인은 르드지아니 지방을 수비한 공로를 인정받아 은성무공훈장을 수여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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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 군인 신분증(1918년경)


1918년 2월 1일 비트겐슈타인은 소위에서 중위로 승급했고 3월,볼셰비키 정부가 동맹국과 조약을 체결함에 따라 이탈리아 전선에 위치한 산악포병연대에 재배치되게 된다.

6월 6일, 데이비드 핀센트의 어머니가 비트겐슈타인에게 아들의 사망 소식을 전하다. 핀센트는 5월 8일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는데 이 때문에 비트겐슈타인은 자살을 생각하게 된다. 핀센트는 비트겐슈타인에게 '최초이자 유일한' 친구였다. (평전, 232)

6월 15일, 연합군을 공격하는 주요한 포대의 관측을 맡아 공로를 인정 금성무공훈장의 후보로 추천되지만 군봉사 메달을 받게 된다.

7월, 오스트리아 군은 퇴각을 결정하다. 8월, 「논리철학논문」을 완성하다(후에 1922년 조지 무어의 권유에 따라 「논리철학논고」로 바꿨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책을 데이비드 핀센트에게 헌정했다.

10월 30일, 연합국은 승리하고 비트겐슈타인의 합스부르크는 체코,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등의 민족국가로 분리된다. 비트겐슈타인은 코모에 있는 포로수용소에 갇히게 되고(후에 카시노에 있는 수용소로 옮겨지게 된다), 친척의 도움으로 포로수용소에서 나올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의사가 가짜로 그의 건강에 이상이 있다고 진단을 내릴 예정이었다) 완고하게 건강에 이상이 없다고 주장하며 거부했다. 포로 기간 중 비트겐슈타인은 「논고」를 프레게, 엥겔만, 러셀에게 보내지만 세 사람 모두 논고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했다.

1919년 8월 21일, 석방

1919년 10월, 빈의 프라터 거리에서 동성애로 인해 곤경에 빠지다. "생명을 끊는 것을 계속 생각", 그는 "내려갈 수 있는 가장 마지막 지점까지 가라앉았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 "……매주 며칠 동안 그는 방을 빠져나와 빠른 걸음으로 프라터 공원에 갔다. 친구에게 말한 대로 거의 통제할 수 없는 악마에 홀린 채 말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도심 부근의 바에 드나드는 세련된 외모의 청년들보다 프라터 공원의 산책길과 골목을 어슬렁거리는 거칠고 솔직한 타입의 동성애 청년을 선호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이 빈에 사는 동안이나 빈을 방문했을 때마다 서둘러 찾아간 곳은 바로 이 특별한 장소였다. ……나중에 영국에서도 이와 비슷하게 그는 때때로 그의 처분에 자신들을 맡길 준비가 된 멋지고 지적인 청년들보다는 런던 술집의 거친 젊은이들을 선호했다."[43] 이 시기 젊은 이성애자인 자동차 기계공 아르비트 셰그렌과 가까운 친구가 되어 그의 집에서 하숙하게 되지만 셰그렌의 어머니가 비트겐슈타인을 사랑하게 되어 아침 드라마 1920년 4월, 그 집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비트겐슈타인은 동성애에 빠진 이 기간을 일컬어 "쓸모없는 에피소드들"로 가득찬 "내 삶을 무너뜨리"는 기간이라고 하지만 이 기간이야말로 그가 오토 바이닝거와 같은 삶을 살지 않을 수 있었던 해방구가 아니었나 바틀리는 조심스럽게 추측한다.[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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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 성인기 중기(1920년경)


전쟁에서 돌아온 뒤에 그는 몇 년간 군복을 입고 다녔을 정도로 회복되지 못했다.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돌아가길 원치 않았으며 초등학교에서 선생님이 되기를 원해 사범학교에 다녔다. 전쟁 전 아버지가 전 재산을 미국으로 이전시킨 바람에 (예술가에게 나눠준 것 외에도) 비트겐슈타인에게는 막대한 재산이 있었는데 이를 모두 가족들에게 나눠주게 된다. 그전까지 비트겐슈타인은 유럽에서 제일 가는 부자 중 한 사람이었다. 「논고」의 출판은 번번이 거절당했으며 사범학교에서의 피로 따위가 겹쳐져 비트겐슈타인은 자살을 생각하게 된다. 결국 러셀이 비트겐슈타인에게 「논고」를 영국에서 출판할 수 있도록 도와줘도 되겠냐고 묻고, 비트겐슈타인은 원하는 대로 하라며 답하게 된다. 비트겐슈타인은 교사가 되는 훈련을 마치고, 1920년 여름, 수도원에서 잠시 정원사로 일하다가 그해 가을 트라텐바흐라는 오스트리아의 작은 시골 마을 교사로 부임하게 된다.

1920년 가을, 트라텐바흐에서의 비트겐슈타인의 교육은 지나치게 엄격했다. 그가 자주 아이들 뺨을 때린다거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는 기록은 이제는 새로울 것도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말도 안 되게 어려운 질문을 했다거나 단지 잔인하기만 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는 단지 지나치게 열정적이었고, 그 시절 어린 소녀가 대수를 하지 못하는 것쯤은 아무도 상관하지 않았지만 그 자신은 그것을 용납하지 못했다고 봐야 한다. 그는 재능있는 아이들이 집안 사정으로 배우기를 그만두는 것을 원치 않았고 다방면으로 배우기를 계속하도록 지원해주었다. 어떤 아이는 첫째 누나 헤르미네의 집에 보내 기숙 생활을 하게끔 하려고 했다. 그 밖에 어린이를 위한 사전을 편찬하기도 하는 등 그의 교사 생활에 누는 적지 않았으나 결코 미달은 아니었다. 비트겐슈타인이 교사 생활 시기 아이를 때린 것은 현대 한국 사회에서 막대기로, 다리로, 주먹으로 때리는 것과 동급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비트겐슈타인이 단지 '잔인한 교사'가 아니었다는 점은 다음 기록에서 드러난다.

"……상점 주인인 요한 샤이벤바우어는 1920년에서 1922년 사이에 그의 학생이었던 것이다. 그는 내가 방금 바나나를 산 것이 기묘하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독일 오스트리아가 굶주렸던 그 황량한 전후 기간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그에게 처음으로 바나나를 -그리고 처음으로 오렌지를- 주었기 때문이다. 제자들을 먹이기 위해 비트겐슈타인은 과일 다발이 든 커다란 배낭을 짊어지고 몇 킬로미터 산길을 오르내렸다. 그 시절에는 트라텐바흐와 오테르탈 사이에 대중교통이 없었다. 오테르탈에 가려는 사람들은 글로그니츠의 기차역에서부터 20킬로미터 숲을 지나 언덕을 하이킹했다. 바로 비트겐슈타인이 그랬듯이."[45]


1921년, 독일 「자연철학연보」에 「논고」가 엉망진창으로 게재되다. 이는 저자와의 최소한의 상의도 없이 게재됐기 때문에 해적판으로 여겨지게 된다. 「자연철학연보」의 「논고」는 후에 1922년, 프랭크 램지와 찰스 오그던에 의해 영어판으로 개정되어 재출판되게 된다.

비트겐슈타인의 교사 생활은 평탄치 못했다. 비록 비트겐슈타인은 고장난 기계를 고쳐주거나 하는 호의를 보여주기도 했지만 마을 사람들은 비트겐슈타인을 '이상한 귀족'이나 '약간은 미쳐버린 사람'으로 보았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도 마찬가지로 그들을 인간이 아니라고 표현함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들과의 관계를 좀처럼 끊지 못했다. 그 스스로가 교사 생활이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가르치는 일을 떠난다면 노동을 할 생각이었다. 가끔씩 옛 사람들과 편지를 주고 받고(러셀과는 직접 만나기도 했다[46]) 램지와 만나 그의 「논고」에 대한 설명을 하기도 했지만 이 시기 비트겐슈타인에게 철학의 문제는 「논고」에 의해 모두 해결된 것으로 보였다.[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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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과 학생들(1923년경)


1922년 11월 트라텐바흐의 초등학교에서 푸흐베르크의 초등학교로 새로 부임하게 되다.

1923년 9월 17일 프랭크 램지가 푸흐베르크에 있는 비트겐슈타인을 방문

1924년 9월 푸흐베르크의 초등학교에서 오테르탈의 초등학교로 다시 부임하게 된다.

1926년 4월 하우트바우어 사건이 터졌다. 나중에 14살에 백혈병으로 죽게 될 요제프 하우트바우어(이때 당시 11세)라는 남자 아이가 비트겐슈타인에게 맞아 실신하게 된다. 자랑할 얘기는 물론 아니겠지만 이전에도 비트겐슈타인은 여러 번 다른 아이들을 때렸고 하우트바우어라는 아이는 그에 비하면 표현이 좀 그렇지만 때린 것조차도 아니었다. 하우트바우어의 어머니는 피리바우어라는 농부의 집에서 가정부로 일했는데 이 소식을 듣고 피리바우어는 곧장 학교로 향했고 길에서 비트겐슈타인을 만나 온갖 욕설을 하게 된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을 체포하기 위해 파출소로 가는데, 때마침 파출소에 경찰이 있지 않았고 다음 날 비트겐슈타인을 찾았을 때 비트겐슈타인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1926년 4월 28일, 비트겐슈타인은 사직서를 제출했다. 이 일로 재판이 일어나게 됐지만 비트겐슈타인은 무죄로 판결받는다. 교사직을 그만두고 비트겐슈타인은 휘텔도르프에 있는 정원의 헛간에서 3개월 동안 야영을 하며 수도 애호사들과 정원사 일을 한다.

1926년 6월 3일, 레오폴디네 비트겐슈타인이 사망하다.

1925년부터 1928년까지 셋째 누나 그레틀의 집을 만들어 주었다. 그는 주로 천장의 높이, 창문, 문, 자물쇠, 라디에이터, 벽의 디자인 등을 맡았다. 건축가 파울 엥겔만과 같이 만들었다. 이 시기 비트겐슈타인은 마르그리트 레스핑거라는 여성과 만나 1931년까지 사귄다. 그러나 둘은 성격 차이가 있었고 어울리지 않았다. 다음의 기록에서 비트겐슈타인이 엄밀히 말해 게이가 아니라 양성애자였다는 점이 드러난다: "……지난밤에 자위를 했다. 양심의 가책. 그러나 또한 난 너무 약해서 그 충동과 유혹에 저항할 수 없다는 확신. 만일 그 충동과 유혹, 그리고 그것들을 수반하는 이미지들이, 내가 다른 것에서 피난처를 마련할 수 없을 때, 내게 주어진다면 말이다. 그러나 겨우 어제 저녁 나는 깨끗한 인생을 살아갈 필요에 대해서 숙고했다(마르그리트와 프랜시스를 생각하고 있었다). [1937년 12월 2일]" (평전, 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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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과 파울 엥겔만이 공동제작한 집.

비트겐슈타인이 제작한 청동 흉상[48]

"마르그리트는 이제 나를 특별히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런데 매우 이상하다. 어떤 목소리는 내게 말한다. 그렇다면 다 끝났다고, 너는 가슴 아플 수밖에 없다고. 하지만 다른 목소리는 이렇게 말한다. 낙심해서는 안 된다고. 너는 그것을 예상했어야 하며, 비록 열렬히 소망했다 하더라도 네 인생이 어떤 특정한 사건의 발생에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고. 바로 이것이 옳은 목소리다. …신이 그녀와 함께하기를 빈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것을 마침내 신의 손에 맡기지 못하고, 자기 수중에서 계속 만지작거리는 사람은 결국 그 사랑을 할 자격이 없다. 왜냐하면 시련 또한 사랑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일기 1930-32, 1936-37』 79쪽, 1931.3.1."[49]


1927년 2월, 「논고」에 영향을 받은 빈 학파의 모리츠 슐리크가 비트겐슈타인을 찾아오다. 이후 여름 동안 빈 학파의 루돌프 카르납, 헤르베르트 파이글, 프리드리히 바이스만 같은 논리실증주의자들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정작 비트겐슈타인은 그들에게 실증주의자의 명민함보다는 타고르의 시를 읽어주는 등의 모습을 보인다.

빈 학파와의 접촉이 계기가 되어 1928년 3월, 직관주의 수학자 브라우어를 만나게 되고, 브라우어는 러셀을 비판하면서 수학이 논리학에 기반을 둘 수 없고, 일관성이 수학에 본질적이지 않다고 주장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수학자가 탐험가가 아니라 발명가라는 것, 사실들의 체계가 아니라 인간 정신이 구현해낸 것이 수학이라는 것에 동의했고 「논고」 비판의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비록 그의 주장에 모두 동의한 것은 아니지만.

1929년 1월 28일, 비트겐슈타인은 램지와 함께 철학을 다시하기 위해 케임브리지로 돌아오게 된다.

2.4. 중년기[편집]

1929년 6월 18일, 비트겐슈타인은 박사학위 취득을 위한 구두 시험을 치른다. 평가관은 버트런드 러셀과 조지 무어였다. 러셀은 이를 두고 '내 평생 이런 말도 안 되는 경우는 처음이다'라고 말하며 시험을 진행했다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구두 시험을 마치고 비트겐슈타인은 평가관들의 어깨를 가볍게 치면서 "걱정하지 마십시오, 나는 당신들이 그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하리란 것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시험장을 나갔다(...)

1929년 크리스마스 휴가, 비트겐슈타인은 빈 학파에게 자신의 「논고」가 잘못되었음을 설명하였다. 그는 「논고」에서 원자명제들은 논리적으로 서로 독립적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러한 견해를 폐기하고 내적 연결 관계를 고려해야한다고 말한다.[50] 이 시기의 비트겐슈타인은 '검증주의적 단계'로 불리며 「논고」를 비판하기는 했으나 완전히 논리실증주의에서 발을 돌리지는 않았다. 빈 학파는 이 시기의 비트겐슈타인의 전환의 움직임을 그리 중요치 않게 생각했고 오히려 그의 검증주의적 단계를 도그마처럼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에 대해 비트겐슈타인은 그것이 한 가지 유용한 방법이기는하지만 전부를 설명하려고 한 것은 아니라면서 일축하기도 한다.

"한 마을에 경찰관이 있는데, 각 국민으로부터 가령 연령, 출생지, 직업 등의 정보를 알아보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가정해보자. 이 정보들은 기록되고 그 기록은 어떤 식으로건 이용된다. 때로 그 경찰이 한 주민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경찰은 이 사실을 기록한다. 왜냐하면 이것 역시 그 사람에 대한 쓸모있는 정보이기 때문이다."
-1930년대 초 검증주의에 대해 말하면서


1930년 1월 19일, 프랭크 램지가 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나이 26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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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 중년기(1930년경)


1930년부터 1931년까지 도덕학 강의를 맡았다. 그의 강의는 완전히 형식에서 벗어나 노트 없이 수업을 하거나 혼자 중얼거리면서 격렬한 탄성을 내기도 했다. 수강자들은 접이식 의자에 앉아(오직 무어만이 예외로 안락의자에 앉았다) 그의 얘기를 들었다. 이 시기 버트런드 러셀의 대중 강연과 사회 비평서를 혹독히 비난했다. 그는 지금 우리 시대에도 유행이 되는 「행복의 정복」을 구역질이 난다고 말하고 「결혼과 도덕」에 대해서는 러셀을 사기꾼과 서슴없이 비교하였다.

1932년부터 1933년, 순수수학의 지위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돈키호테적 공격이 시작되다. 이 시기 수학자 고드프리 하디가 수학을 일컬어 우리 마음의 창조물이 아니고 우리의 인식과 독립적이라고 말한 것에 대해 격노하면서 "수학자들의 말은 그들이 수학을 할 때 엉뚱한 말이 된다."고 말했다.[51] 이때 비트겐슈타인의 강의를 듣던 프랜시스 스키너와 친밀한 관계를 맺는다.

1933년부터 1934년, 자신의 강의에 학생들이 너무 몰리자 실망한다. 대신 몇 명의 학생들로하여금 자신의 구술을 기술하게 해 그것을 배포하는데 나중에 그것이 「청색책」으로 불리게 된다. 이 책은 후기 철학의 초기 형태를 보여주며 '가족유사성' 개념이 처음 등장하기도 한다. 이 시기 비트겐슈타인은 소련 작가(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등)에 심취하여 소련에서 살 계획을 세운다. 그는 1930년대 중반의 정치적 혼란기에 노동자 계급과 실업자들에 공감하였고, 넓게 말해 그가 좌파에 속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평전, 490)

1934년부터 1935년,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프랜시스 스키너와 앨리스 앰브로즈로 하여금 자신의 말을 기록하게 했다. 이것이 나중에 「갈색책」으로 불린다. 독자에게 읽히기 위한 글이 아니므로 읽기가 버겁다고 한다. 언어게임을 다양한 방법으로 여러가지 예시를 들어 설명했다. 1935년 여름, 소련에서 살 계획을 세운다.

1935년 9월 12일, 레닌그라드에 도착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소련에서 집단 농장의 노동자가 되기를 원했지만 당국은 허락하지 않았고 대신 카잔 대학의 철학 과장직과 모스크바 대학의 철학 강사직을 제의한다. 결국 자신의 바람이 들어지지 않자 케임브리지로 돌아오게 된다. 소련에 대한 인상은 "군대에서 사병으로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했다.

1936년부터 1937년, 스키올덴의 별장에 머물다. 프랜시스 스키너와의 연애기간편지로만. 둘은 1939년까지 사귀다 그 이후 서먹해지더니 이내 연락이 뜸해졌다. 프랜시스 스키너는 비트겐슈타인의 권고에 따라 대학을 그만두고 공장에서 일을 했는데 나중에 불평하기는 했지만 본인도 나름대로 만족했다고 한다.

1938년 2월,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머물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때 정신과 의사가 되려는 생각을 해 의사 훈련 과정에 있는 친구 모리스 드루어리에게 병원의 가장 심각한 정신병 환자를 만날 수 있도록 부탁하였다. 이 방문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정신과 환자의 비정상적인 측면보다 정상적인 측면을,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서는 정상적인 측면보다는 비정상적인 측면을 보려고 하였다.

3월,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침공하려 한다는 소식에 '말도 안 되는 루머'라며 일축한다. 그 말을 한 다음 날 히틀러는 진짜로 오스트리아를 침공했고 오스트리아는 독일에 합병된다.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자매에 대해 걱정하는 드루어리에게 '그들은 매우 존경받고 있기 때문에' 무사할 것이라며 여전히 사태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심각하게 걱정하고 빈으로 돌아가려는 계획을 세운다. 이에 대한 생각을 듣기 위해 피에로 스라파에게 편지를 쓰고 스라파는 비트겐슈타인에게 '어떠한 경우에도 당분간은 빈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고 충고한다. 스라파는 대신 넌지시 영국 국적을 얻을 것을 제시하고, 비트겐슈타인은 케인즈의 도움을 얻어 4월,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강사직과 함께 1939년 6월 영국 국적을 취득하게 된다. 비트겐슈타인의 자매들은 이후 긴 협상을 통해 그들이 가진 외화를 건네주는 대가로 1939년 8월, '독일 혈통임을 입증'받음과 함께 1940년 2월, '유대 혼혈임에도 불구하고 혼혈 유대인 정책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각서를 받고 비교적 전쟁 기간 동안 안전하게 살 수 있었다.

1939년 2월 11일, 1월에 미국을 방문하기 위해 케임브리지를 떠나야 했던 무어를 대신해 철학 교수로 선출되다. 비트겐슈타인은 강의에서 본격적으로 수학의 순수성을 공격한다.

"수학이기 때문에…… 그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이고 그 때문에 더 매력적이 됩니다. 만일 우리가 그 표현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을 설명한다면, 그것이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 방식으로 표현된다면 그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매력을 잃게 될 것이며 확실히 내게는 매력적이지 않게 될 것입니다. ……나는 이 천국[52]으로부터 어느 누구를 몰아내려는 꿈도 꾸지 않겠습니다. ……나는 아주 다른 일을 할 것입니다. 나는 그것이 천국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려 시도하겠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을 자발적으로 떠날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당신은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그저 당신 주위를 보라.'" (평전, 598, 599)


비트겐슈타인에게 수학의 순수성이라는 '신화'와 과학의 우상숭배는 우리 문화가 부패했다는 가장 중요한 증상이며, 또한 그 부패 중 가장 유력한 원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되던 것이었다. 이때의 강의에 참석한 유명한 인물로는 앨런 튜링이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지속적으로 '수학적 발견'이란 말은 온당치 않으며, 수학의 비경험성은 그것의 문법에 있지 확실한 지식에 의거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에 맞서 튜링은 고전적인 견해를 방어했다. 나중에 결정적으로 비트겐슈타인이 모순율을 공격하기에 이르렀을 때 튜링은 모순이 수학적 체계의 치명적 결함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이상 그들 사이에 공통된 기반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강의에 참석하지 않게 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은 튜링의 지식이 아니라 동기를 공격했고, 이는 튜링에게 있어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강의가 끝나면 비트겐슈타인은 극장에서 영화를 보았고 이는 그에게 '샤워를 하는 것과 같은 경험'을 주었다. 그가 좋아했던 배우 중 하나는 베티 허튼이었는데, 그녀의 익살스런 연기는 비트겐슈타인의 사뭇 엄정한 성격과는 대조적이다. 베티 허튼은 영화에서 유쾌한 인물로 그려질 때가 많았다. 가령, 상사가 뒤에 있는데 그것을 모르고 상사의 욕을 흥겹게 노래로 부르다가 곤혹스런 상황에 처한다든지, 무대 위에서 비 맞은 사람 연기를 하려다 정말로 저체온증에 걸려 실려간다든지 하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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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티 허튼 주연의 영화 「The Perils of Pauline(1947)」의 한 장면[53]


1939년 9월 3일,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 비트겐슈타인은 전쟁 초기, 병원에서 약국의 배달부로 일을 했다. 그 후 1944년 2월 16일까지 피부과에서 쓸 연고를 조제하는 일부터 쇼크에 대한 연구, 호흡과 맥박 사이의 관계를 보여줄 수 있는 기계를 고안해 만들어내는 등의 일을 했다. 이 기계는 종래의 것보다 혁신적이어서 비트겐슈타인과 함께 쇼크를 연구한 그랜트 박사는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자가 아니라 차라리 생리학자가 되었으면 더 좋았을 법했다고 말했다.

1944년, 케임브리지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1944년 여름까지 휴직을 신청하고 웨일스의 스완지로 가 「철학적 탐구」를 완성하기 위해 힘을 쓴다. 스완지에 있을 때 비트겐슈타인의 이웃에는 클레멘트 가족이 살고 있었는데 특히 그는 클레멘트 부인과 그녀의 딸들을 사랑했다. 나중에 비트겐슈타인은 그 가족의 집에서 살게 되었는데, 여기에 몇 가지 재밌는 일화가 있다.

"'그녀는 천사가 아닌가요?'라고 비트겐슈타인은 어느 일요일 점심 식사 시간에 그녀의 남편에게 물었다. '그런가요?'하고 클레멘트 씨는 되물었다. '제기랄, 물론 그렇습니다.'라고 비트겐슈타인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평전, 664)

"……클레멘트 부부는 두 명의 딸, 11세인 조앤과 9세 바버라를 두었는데, 비트겐슈타인은 그들의 집에 머무는 동안 거의 한 가족처럼 대우를 받았다. '비트겐슈타인'이란 이름이 약간 발음하기 힘들 정도로 길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를 '비키'라고 불렀다. 비록 그렇게 하도록 허락받은 사람들은 그들이 유일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했지만 말이다. 클레멘트가와 함께 사는 동안 비트겐슈타인은 보통 그들 가족과 함께 식사를 했다. 그는 또한 다른 가족 생활에도 참여했다. 특히 그는 소녀들과 루도(주사위 놀이의 일종)와 뱀과 사다리 놀이(주사위를 던져 말을 나아가게 하는 놀이)를 즐겼는데, 한번은 뱀과 사다리 놀이에 푹 빠져서 놀이가 두 시간 넘게 계속되자 소녀들은 그가 원하지 않았음에도 그 놀이를 중간에서 그만두자고 간청해야 했다. 그는 또한 두 소녀의 교육에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큰딸인 조앤은 그때 그 지역에 있는 중학교의 장학생 선발 시험을 치르고 있었다. 결과가 발표되던 날 비트겐슈타인은 집에서 그녀가 울고 있는 것을 보았다. 떨어졌다고 연락을 받았던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그럴 리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제기랄!'하고 그는 말했다. '한번 알아봐야겠다!' 조앤과 그녀의 어머니가 근심스럽게 따라오는 가운데 비트겐슈타인은 조앤의 학교로 들어가서 그녀가 떨어졌다고 말해주었던 선생을 만났다. '조앤이 떨어졌다고 말했다니 깜짝 놀랐습니다. 내가 장담하건대 합격했음이 틀림없습니다'라고 그는 선생에게 말했다. 약간 위협을 받은 그 선생은 기록을 검토한 후, 모두에게 아주 다행스럽게도 거기에 정말로 실수가 있었고 조앤은 그 시험에 합격하기에 충분한 점수를 받았음을 발견했다. 그 선생은 비트겐슈타인에 의해서 '무능한 멍청이'로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비록 그의 판단이 정당했고 조앤의 능력이 입증되었지만, 클레멘트 여사는 부끄러워서 학교에 다시 찾아갈 수 없었다." (평전, 664~665)


나중에 비트겐슈타인의 유고 관리자 중 한 사람이 되는 엘리자베스 앤스콤이 비트겐슈타인의 강의에 참석하게 된다. 그녀는 비트겐슈타인이 다정하게 '친구old man'라고 부르는 사람 중 하나가 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은 어느 강의에서 다른 학생들이 참가하지 않은 가운데 앤스콤 혼자만 참가한 것을 보고 "여자들이 사라져서 아주 다행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의도치 않은 보쿠소녀? 이 외에 비트겐슈타인의 강의에 참가한 적이 있는 여성으로는 작가 아이리스 머독이 있다. 그녀는 비트겐슈타인의 강의가 사람들의 기를 꺾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를 "……항상 한 인격으로서 외경심과 놀라운 마음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54]

1944년 10월, 케임브리지로 복귀. 그는 「철학적 탐구」를 완성하지 못한 것에 낙담했고, 강의를 하는 책임을 다시 맡아야하는 것에 대해 열정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러셀과의 관계가 서먹해진 것이 극명하게 나타난 때.

1945년 7월, 영국 선거에서 노동당에 투표하고, 친구들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권유. 비트겐슈타인은 처칠을 제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의 비관주의는 곧바로 다음과 같은 말을 하게끔 한다. "이 전쟁을 '일으킨 자들'을 완전히 박멸하면 -물론 미래의 전쟁은 오로지 이들만이 일으킬 것이라는 이유로- 이 세계는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될 것처럼 가장하는 것은 말도 안 되게 더러운 짓이다. 실제로는 비참한 미래를 불러올 뿐이다." (평전, 685). 이 시기, 비트겐슈타인의 현대 문명에 대한 혐오는 극에 달했고, 케임브리지에 대한 혐오감 역시 그 끝에 다다르고 있었다.

1946년, 벤 리처즈와 사랑에 빠지다. 물론 그도 남자다. 이 글을 부녀자가 좋아합니다

1946년 10월 26일, 전설의 탄생. 칼 포퍼와의 도덕학 클럽에서의 패싸움 논쟁. 논쟁 전, 비트겐슈타인은 포퍼가 누군지 모르는 상태[55]였고, 더군다나 벤 리처즈와의 관계로 사랑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반면, 포퍼는 10년을 기다린 만남이었다. 논쟁의 시작은 포퍼가 비트겐슈타인이 제안한 몇 가지 연설 규칙에 대해 비웃은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규칙은 초청장에 명시되어 있었는데, "짧은 발표문, 서론은 간단하게, 몇 개의 철학적 수수께끼를 제시할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에 비트겐슈타인은 그 초청장은 자신이 비서(와스피 히잡)에게 시킨 일이며 비서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변호했다.

포퍼는 비트겐슈타인의 (일종의) 철학적 허무주의에 대해 비난을 가했고, 비트겐슈타인은 "순수 수학이나 사회학에서 다루어질 문제 외에 문제는 없다."고 응수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때 예를 들기 위해 부지깽이를 들어 허공을 콕콕 찔렀고 특유의 과장된 몸짓으로 말을 했다. 그 모습을 본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에게 "비트겐슈타인, 부지깽이를 내려놓으시오."라고 말하게 된다. 간간이 비트겐슈타인의 제자들은 소리를 지르고, 성난 목소리들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비트겐슈타인은 부지깽이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러셀도 따라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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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깽이 사건을 다룬 풍자화

비트겐슈타인: "러셀 선생, 당신은 날 항상 오해하죠."

러셀: "비트겐슈타인, 자넨 뒤죽박죽으로 얘기하는군. 자넨 항상 뒤죽박죽으로 얘기하지."


비트겐슈타인은 이후 자리를 떠났고, 그가 나가면서 '쾅'하는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비트겐슈타인이 나간 후 리차드 브레이스웨이트는 도덕 원칙의 사례를 하나만 들어달라고 포퍼에게 요청했고, 포퍼는 "초청 연사를 부지깽이로 위협하지 말 것."이라고 비꼬았다. 나중에 포퍼는 이 사건을 그의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는데,

"……바로 그때 비트겐슈타인이 -그는 그때까지 난로 가까이 앉아서 신경질적으로 부지깽이를 만지작거리고 있었으며, 간혹 자기 주장을 강조할 때마다 마치 그것이 지휘자의 지휘봉이라도 되는 것처럼 흔들어 댔다- 내게 항의했다. '도덕률의 예를 들어 보십시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초청 강사를 부지깽이로 위협하지 않는 것.' 이 말에 비트겐슈타인은 벌컥 화를 내면서 부지깽이를 집어던진 뒤, 방에서 뛰쳐나가며, 문을 쾅 닫았다."[56]


그러나 이것은 칼 포퍼의 주장이고 비트겐슈타인과 포퍼의 기막힌 십분에서는 도덕원칙을 제시하라고 말한 이가 비트겐슈타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포퍼에게 도덕 원칙을 제시해보라고 말한 사람이 비트겐슈타인이었을 가능성은 그다지 크지 않다. 피터 기치 뿐 아니라 폴란드 태생의 철학적 논리학의 전문가 카시미르 레위 역시 포퍼를 거짓말쟁이라고 주장했다. ……처음에 그 질문이 비트겐슈타인에게서 나왔다고 확언한 비닐롯 경 같은 사람들도 나중에는 기억이 확실치 않다며 뒤로 물러섰다."[57]


비트겐슈타인은 이 논쟁에 관해 자신의 옛 제자이자 친구인 러시 리스에게 쪽지를 보내는데, 여기서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형편없는 발표였다네. 런던에서 포퍼 박사라는 고집불통이 와서 오랫동안 들어보지 못한 감상적이고 쓰레기 같은 말들을 늘어놓았고, 나는 늘 그렇듯이 말을 많이 했지……." [58]

2.5. 노년기[편집]

파일:attachment/루트비히 요제프 요한 비트겐슈타인/photo2.jpg

비트겐슈타인의 노년기(1950년경)


1947년, 여름 학기 중 비트겐슈타인은 가르치는 것을 그만두기로 결심한다. 그는 게오르크 폰 리히트에게 교수직을 사임할 것이고 그가 계승하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교수직을 사직한 후 아일랜드의 더블린으로 가 「철학적 탐구」를 완성하기 위해 노력한다.

1948년, 비트겐슈타인은 정신적 위기를 겪는다. 산책을 하던 중 시적인 감정에 빠지기도 하고 우울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집 안에서 혼자 누군가와 대화를 하다가 그 모습을 본 사람이 "누가 있는 줄 알았다"고 말하자, "맞습니다. 나는 아주 친한 친구, 나 자신과 말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기도 한다. 이는 자칫 심각해지면 분열정동장애로 의심될 수 있는 상황이다. 실제로 비트겐슈타인을 정신분열증의 사례로 소개하는 심리학 교과서가 있기도 하다. [59] 이 시기, 노먼 맬컴이 미국에서 보내주는 스트리트앤스미스 출판사의 하드보일드 탐정 소설을 즐겨 읽었다.

1948년 9월, 병에 걸린 맏누나 헤르미네를 보기 위해 오스트리아 빈에 머물다.

1949년 4월, 자신이 「철학적 탐구」를 완성하지 못할 것이라 직감.

1949년 7월, 미국에 사는 노먼 맬컴의 가족을 방문. 이 시기 맬컴이 교수로 있던 코넬 대학의 모임에 참석한다.

"모임이 시작되기 바로 전에 맬컴이 복도 끝에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의 팔에는 윈드 재킷과 낡은 군복 바지를 입은 가냘픈 노인이 기대어 있었다. 만일 지성으로 빛나는 얼굴이 아니었더라면, 사람들은 그를 맬컴이 추위를 피하게 해주려고 데려온 거리의 부랑자로 간주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개스에게 속삭였다. '저 사람이 비트겐슈타인이다.' 개스는 내가 농담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농담하지 말라'라는 식의 말을 했다. 그 후 맬컴과 비트겐슈타인이 입장했다. 블라토스가 소개되었고 그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 모임의 사회를 보던 블랙이 일어서서 그의 오른편을 향했다. 이제 분명해졌다. 모든 사람이 놀랍게도 ……맬컴이 모임에 데리고 온 그 야윈 노인에게 블랙이 말을 하려고 한다는 것이. 그리고 그 충격적인 말이 들렸다. '비트겐슈타인 교수님, 한 말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하고 블랙이 말했다. 블랙이 '비트겐슈타인'이라고 말하자마자 그 자리에 모인 학생들이 숨을 크게 멈추는 소리가 났다. 당신은 이 점을 기억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1949년의 철학 세계에선, 특히 코넬에선 신비스럽고 두려운 이름이었다. 그 숨이 멎는 소리는 블랙이 '플라톤, 한 말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라고 말했을 경우에 생겼을 것과 같은 것이었다." (평전, 796~797)


1949년 10월, 비트겐슈타인은 아파서 쓰러지게 된다. 그는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지 못할까봐 걱정한다. "나는 미국에서 죽고싶지 않아. 나는 유럽인이야. 유럽에서 죽고 싶어…… 바보처럼 여기에 오다니." 그러나 병세는 곧 회복되었고, 10월 말, 런던에 도착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때 받은 건강진단의 결과가 11월 25일 나오고, 비트겐슈타인에게 전립선암 진단과 함께 시한부 인생이 선고된다.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소식에는 전혀 놀라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잘만 치료받으면 6년 정도를 더 살 수 있다는 말에 놀란다. "내 인생이 그렇게 연장된다니 유감이다. 이런 반쯤의 생활에는 여섯 달도 너무 길다."고 말한다. 시한부 선고 이후, 비트겐슈타인은 헬레네에게 편지를 보내어 빈에서 머물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1949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를 가족과 보내기 위해 비행기를 타 빈으로 출발한다.

1950년 2월 11일 헤르미네 사망.

이 시기, 후에 과학자들에게는 악마와도 같은 존재가 될 철학자 파울 파이어아벤트가 비트겐슈타인을 방문하게 된다. 처음에 비트겐슈타인은 집사를 대신 보내어 학단 모임에 초대하고 싶다는 파이어아벤트의 초청에 거절할 뜻을 밝혔으나, 파이어아벤트가 정중하게 편지를 보내 다시 부탁하자 그 편지의 내용이 마음에 들어 초대에 응하게 된다. 모임이 있던 날, 파이어아벤트는 감기에 걸려 아팠지만 항생제를 다량 복용하고 모임에 참석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약속된 시간보다 1시간 늦게 도착했고, 파이어아벤트는 비트겐슈타인의 얼굴을 꼭 '말린 사과'같다고 생각했다. 모임의 분위기는 호전적이었고 비트겐슈타인에게 무례한 질문과 방해가 쏟아졌지만 파이어아벤트는 오히려 아부 보다는 차라리 그런 건방진 상황이 더 나았을 것이라며 그 상황을 호의적이게 보았다. 실제로 비트겐슈타인도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고 파이어아벤트는 전해 들었다고 한다.[60] 파이어아벤트는 후에 「이성이여 안녕」, 「방법에의 도전」 등을 저술하며 '인식론적 무정부주의'를 주장하고, 과학의 우상화를 신랄하게 비판하게 된다. 이는 비트겐슈타인이 가졌던 현대 문명에 대한 비관적 흐름과 커다란 맥을 같이한다.

3월 23일, 빈을 떠나 런던으로 돌아간다. 러시 리스 부인의 집에 머물다.

4월 4일, 케임브리지에 있는 폰 리히트의 집으로 간다.

1951년 2월, 비트겐슈타인은 여러 번 노르웨이의 스키올덴 별장이나 수도원에 가려는 생각을 하나 건강 때문에 실행이 불가능하게 된다. 결국 케임브리지에 있는 자신의 주치의인 베번 박사의 집에서 머물기로 한다.

4월 26일, 비트겐슈타인의 예순 두 번째 생일이자, 마지막 생일. 4월 28일, 베번 박사가 이제 며칠밖에 살 수 없음을 이야기. 비트겐슈타인은 "아주 좋습니다!"라고 대답. 베번 여사는 그의 입종을 지키면서 4월 29일 친구들이 도착할 것을 전함. 비트겐슈타인이 '멋진 삶을 살았다'고 친구들에게 대신 전달해줄 것을 부탁. 4월 29일, 벤 리처즈, 엘리자베스 앤스콤, 요릭 스마이시스 그리고 모리스 드루어리가 비트겐슈타인의 임종을 보기 위해 베번의 집에 모였다. 비트겐슈타인의 친구들은 그에게 가톨릭 의식을 치뤄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다 스마이시스가 언젠가 비트겐슈타인이 가톨릭 친구들이 자신에게 기도해주기를 바랐다고 얘기하자 그를 위해 기도한다. 기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베번 박사는 그가 임종했음을 말했다.

4월 30일, 케임브리지에 있는 성 자일스 교회에서 가톨릭장으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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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 죽음(1951년)

"신이 인간을 어떤 방법으로 재판하는지, 우리에게는 상상이 안 된다. 신이 그때 유혹의 강도와 인간의 약점을 헤아린다면 도대체 누가 지옥에 떨어지겠는가. 만일 신이 그 두 가지를 헤아리지 않는다면, 바로 그 두 힘이 티격태격한 결과가 인간에게 예정된 목표가 된다. 결국 인간이라는 피조물은 두 힘이 티격태격하는 싸움을 통하여 이기느냐 지느냐 어느 한쪽으로 정하게 되어 있다. 이것은 종교적 사상같은 것도 아니고 도리어 과학적 가설인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의 영역에 머무르고 싶으면 싸우는 도리밖에 없다."[61]

2.6. 히틀러와의 인연[편집]

비트겐슈타인과 아돌프 히틀러가 같은 학교에 다녔던 것 때문에 히틀러와 나치의 반유태주의가 비트겐슈타인에게서 느낀 열등감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으나 비트겐슈타인은 그시절에는 학교에서 중간 정도의 성적을 내는 학생이였던 데다 학교에서 그 둘이 서로를 알고 지냈다는 근거는 없다. 다만, 히틀러가 학교에서 "이상한 유대인"을 만났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만약 그 "이상한 유대인"이 비트겐슈타인이 맞는다면 히틀러한테까지 이상하다는 소리를 들었으니 실제로 아주 적응하기 힘든 사람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이것이 비트겐슈타인이 아닐까 추측해볼 수는 있다. 아마도 세계 최고의 지성 중 한 사람과 세계 최악의 독재자가 같은 학교 출신이라는 것 때문에 사실 별 것도 아닌 것임에도 이러한 음모론이 도는 듯하다. 물론 둘 다 사회성이 조금 낮은 편인[62] 사람들이었으며, 고집이 아주아주 세다는 점에서 닮은 점이 있기는 하다.

아돌프 히틀러와 비트겐슈타인 간의 이야기를 좀 더 하자면 그들이 다닌 학교는 중하층 계급의 자식들이 다니던 곳이다. 문제는 히틀러나 비트겐슈타인이나 상류층, 혹은 부유층 자식이었다는 점.[63] 비트겐슈타인은 독일어의 2인칭 존칭 대명사 Sie라는 말을 사용[64]하여 많은 학생들의 눈총을 샀다[65]. 그리고 그가 유태인이라는 점, 엄청난 거부의 자식이라는 점, Sie라는 말을 쓰는 등 귀족적인 티를 냈다는 점은 학내에서도 유명한 사실이었고 이는 히틀러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증명할 만한 어떠한 자료도 없다. 다만, 비트겐슈타인과 히틀러가 같이 찍은 사진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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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과 히틀러가 같이 찍혔다고 추정되는 사진(1901년경)[66]

2.7. 비트겐슈타인 가문의 수치[편집]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회고에 따르면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조카 파울 비트겐슈타인(2세)[67]과 같이 비트겐슈타인 가문의 수치였다고 한다. 다음의 일화 참조.

"……그는 수십 년 전 자신의 삼촌 루트비히가 그랬던 것처럼 가족에게서 떨어져 나왔으며, 그와 삼촌을 있을 수 있게 해 준 모든 것을 버렸고, 예전에 삼촌 루트비히가 그랬던 것처럼 가족들에게 파렴치한 인물로 낙인찍혔다. 루트비히는 파렴치한 철학자의 길로 나섰고, 파울은 파렴치한 미치광이의 길로 나섰다. ……파울은 삼촌인 루트비히가 비트겐슈타인 가족들의 공격을 받을 때, 그리고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으로서 평생 비트겐슈타인 집안의 수치 덩어리였던 삼촌이 친척들 사이에서 조롱거리가 될 때 적극 나서서 그를 옹호했다는 것이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파울 비트겐슈타인과 마찬가지로 그들에게는 바보천치일 뿐이었다. 그런 바보천치를, 괴상한 소리만 들으면 대단한 것인 줄 알고 귀가 솔깃해지는 외국인들이 유명하게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들은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이 집안의 천치 한 명에게 전 세계가 홀라당 속아 넘어갔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이 어느 날 난데없이 영국에서 유명해지더니 위대한 사상가로 돌변해 버리는군, 하고 웃기는 현상으로 치부해 버렸다. 비트겐슈타인 집안 사람들은 지극히 교만했으므로 자기 가문의 철학자를 무시할 뿐 눈곱만 한 존경심도 갖지 않았다. 존경심은커녕 오늘날까지도 경멸이라는 벌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눈에는 파울과 마찬가지로 루트비히도 오직 배신자일 뿐이었다. 그들은 파울에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루트비히도 집안에서 잘라내 버렸다. 그들은 파울이 살아 있는 내내 파울의 존재를 수치스러워했듯이, 오늘날까지도 루트비히의 존재를 수치스러워하고 있다. 이것이 진실이다."[68]

3. 비트겐슈타인의 철학[편집]

유명한 말로는 전기 철학시절을 대표하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69]가 있다. 후기 철학 때는 "낱말의 의미란 언어 안에서의 그 사용이다."[70]가 있다. 흔히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러셀의 제자로 있던 시기부터 1차 세계대전 이후 시골에서 교사생활을 하기까지를 전기 철학으로(대표되는 책 「논리철학논고」), 시골에서 교사생활을 끝마치고 다시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돌아온 후 사망할 때까지를 후기 철학으로 구분한다(대표되는 책 「철학적 탐구」).[71]

3.1. 전기 철학[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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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 - 철학 논고 초판(1922)


「논리철학논고」로 대표되는 "언어의 한계가 곧 세계의 한계"[72]라고 밝힌 시기이다. 그의 전기 철학에 의하면 윤리와 아름다움은 하나이며 인간이 말을 통해 표현할 수 없는 것으로 스스로 드러난다.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대답은 말로써 물을 수 없으며, 따라서 물음이란 던져진 이상 그 물음에 대한 대답도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윤리 명제는 있을 수 없다."[73] 철학에 대한 정의는 "다양한 과학들이 증명 없이 참으로 가정하는 모든 원초적 명제"이다.

3.1.1. 「논리철학논고」[편집]

1921년 독일 「자연철학연보」에 먼저 게재되고 후에 프랭크 램지와 찰스 오그던이 영어로 번역하여 1922년 보완·재출간된다.

3.1.1.1. 구성[편집]

러셀의 서문[74], 모토[75], 머리글[76], 본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성경처럼 각 단락에 번호를 매겨놓고, 그 단락에 대한 상세 설명을 소수점 이하의 숫자로 구분하여 표기했다. 예를들어 1, 1.1, 1.11…… 이런 식으로. 1~7번까지 있다. 체계적으로 보이는 비트겐슈타인의 서술방식에 대해 일본의 철학자 아사다 아키라는 「구조주의와 포스트 구조주의」에서 "준엄하기 짝이 없다"며 볼멘소리를 한 적이 있다[77].

글록의 분류에 의하면 「논고」의 각 번호는 다음과 같이 분류될 수 있다.
1~2.063: 존재론
2.1~3.5: 그림이론
4~4.2: 철학론
4.21~5.641, 6.1~6.13: 논리론
6.3~6.372: 과학론
6.373.~6.522: 신비주의
6.53~7: 철학 방법론과 「논고」의 지위[78]

나 E.-M 랑게[79]의 분류[80]
1~2.063 : 존재론
2.1~3 : 사실의 그림들
3~3.41 : 사고
3.41~4.0031 : 사고로부터 언어로
4~4.06 : 그림으로서의 명제
4~4.22 : 명제로부터 요소 명제로; 철학
4.22~4.28 : 요소 명제와 고유명사
4.3~4.44 : 진리 조건들의 표현으로서의 명제
4.44~4.53 : 일반적 명제 형식
4.53~5.14 : 추론
5.1, 5.14~ 5.24 : 확률; 연산
5.24~5.41 : 연산과 진리 연산
5.4~5.47 : 몇몇 논리적 상수들로서의 일반적 명제 형식
5.47~5.55 : 연산 N, 일반성, 동일성, 외연성, 그리고 요소 명제들의 형식
5.55~6 : 언어의 한계와 유아주의
6~6.21 : 논리학과 수학
6.21~6.32 : 방정식들, 과학 법칙의 형식들, 과학적 방법의 근본 원칙들
6.32~6.4 : 법칙들과 과학적 세계 기술의 그물
6.4~6.5 : 윤리학과 미학
6.5~7 : 철학과 철학의 형식

3.1.1.2. 그림 이론[편집]

진리란 세계에 대한 정확한 묘사에 의해서 가능해진다는 이론이다. 모사설이라고도 불린다. 마치 그림을 그리듯이 세계를 말로 옮긴다는 얘기다. 1차 세계대전 기간 중 잡지에서 교통사고에 관한 재판 기사를 읽게 되었는데 거기서 인형과 모형으로 상황 설명을 하는 것을 보고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논고」에서는 이에 대해 2.1~2.225에서 중점적으로 얘기한다.

전환기 하이데거는 명백히 이와 같은 사조를 인식하고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며 대응론 내지는 모사설을 비판한다:

"ᆢ명제의 비진리(올바르지 못함)는 진술과 사태의 불합치다. 사태의 비진리(진정하지 못함)는 존재자와 그것의 본질의 불일치를 의미한다. 어떤 경우라도 비진리는 '꼭 들어맞지 않음'으로 개념 파악된다. '꼭 들어맞지 않음'은 진리의 본질로부터 밖으로 벗어난 것이다.ᆢ진리는 하나의 진술과 하나의 사태의 합치인 것이다. [그러나]ᆢ진술이 올바름의 성격을 갖는 까닭은 태도의 열린 자세 덕분이다. 왜냐하면 단지 이러한 열린 자세를 통해서만 여하튼 '드러나 있는 것'은 표-상적 동화를 위한 기준척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열린 자세의 태도는 이러한 척도에 스스로를 맞추어야 한다. 즉 열린 자세의 태도는 모든 표상활동을 위한 기준척도를 앞서 내어주는 역할을 떠맡아야 한다. 이러한 역할이 태도의 열린 자세에 속한다. 그런데 단지 태도의 이러한 열린 자세를 통해서만 진술의 올바름(진리)이 가능하다면, 올바름을 비로소 가능하게 하는 그것이야말로 더 근원적으로 적법하게 진리의 본질로서 간주되어야 한다. 이로써 진리를 그것의 유일한 본질장소로 간주되던 진술에만 할당하던 재래의 배타적인 관례는 붕괴한다. 진리는 근원적으로 명제 안에 거주하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기준척도를 앞서 내어주는 열린 자세의 태도의 내적 가능성의 근거에 관한 물음이 제기된다. 단지 이러한 가능성으로 인해, 명제의 올바름은 여하튼 진리의 본질을 충족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외모를 지니게 된 것이다.ᆢ진술의 올바름으로서 이해된 진리의 본질은 자유이다."[81]


이와 같은 하이데거의 존재 물음 방식에 대한 논리실증주의자의 답변은 다음과 같다:

"ᆢ하이데거는 구문론적 형식을 물상화(명사화)했다. 이 때문에 그는 틀렸다. 카르납 자신이 시사하는 것처럼 이런 물상화는 하이데거식 철학적 언설의 핵심에 위치하고 있다. 예를 들어, 주지하다시피 하이데거의 철학은 '존재'에 대한 고찰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카르납의 해석에 따르면, 이것은 '존재'를 명사(사고대상=명제변수)로서 다룬다는 것을 의미한다.ᆢ하지만 카르납에 따르면, '존재'를 사고대상으로 삼는 것은 정의상 불가능하다. '존재'라는 자연언어의 기능(무언가가 존재하는 것을 보여주는)은 논리적으로 구문론적 형식, 기호로서는 존재양화사∃로 번역된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것은 문장을 뒷받침하는 형식이지 문장의 내용이 되지 않는다. '존재'를 대상으로 하는 자연언어문("존재란 P다")에 대응하는 명제함수 P(∃)는 +나 -를 변수에 대입한 수식같이(예를 들어, 2++=5라고 하는 것처럼) 완전히 부조리한 것이다. 하이데거와 카르납, 즉 존재론과 논리실증주의는 여기에서 '존재'의 이해를 둘러싸고 대립하고 있다. (후략)"[82]


비트겐슈타인의 하이데거에 대한 생각은 다음과 같다:

"ᆢ비트겐슈타인은 하이데거의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가 출판된 직후 그런 기도가 '전부 아프리오리하게 그저 무의미'한 것을 지적하면서도, 그 심정에 공감을 표명했다고 전해진다."[83]

3.1.1.3. 유아론적 경향[편집]

보통 철학계에서 유아론이라 함은 조지 버클리의 극단적 경험주의를 일컫는 말로 정의되고는 한다.

"우리의 사상도 우리의 정욕도 그리고 상상에 의해 형성된 우리의 관념도 정신의 외부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각자는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감각이나 감관에 각인된 관념들은, ……그것들을 지각하는 정신 이외에 그 어디에도 존재할 수는 없다는 것이 그만큼 더 분명하게 보인다. …… 나는 내가 받치고 글을 쓰고 있는 책상이 존재한다고 말하며, 이것은 내가 그것을 보고 느낀다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내가 서재 바깥에 있었다면 나는 그것이 존재했다고 말해야 하는데…… 거기에 냄새가 있었다는 것은 냄새가 맡아졌다는 것이고, 소리가 있었다는 것은 들렸다는 것이며, 색깔이나 모양은 시각이나 촉각을 통해서 지각되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지각됨과는 어떠한 관계도 없는, 사유하지 않는 사물들의 절대적 현존에 대해서 언급되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이해하기 어렵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의 존재지각되는 것이다. 사물들은 바로 사물들을 지각하는 마음들 또는 사유하는 것들 외부에 어떤 현존을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어떤 사물을, 그것을 실제로 감각하지 않고도 보거나 느끼는 것은 나에게는 불가능하며, 마찬가지로 감성적 어떤 사물이나 대상을 감각이나 지각작용과 분리시켜서 나의 사유 속에서 생각하는 것도 나에게는 불가능하다. ……앞서 언급된 것의 결과는, [신령한] 정신 또는 지각하는 것 이외에 그 어떤 다른 실체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84]


그러나 버클리의 유아론은 제대로 독해되지 않고 흔히 (오해된) 유아론으로 다음과 같이 잘못 이해되고는 한다:

"그럴싸한가? 상식적인 주장처럼 들리는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당신은 지금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당신이 사용하는 컴퓨터 속에는 마더보드, CPU, 랜카드 등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은 컴퓨터 모니터 화면뿐이다. 당신은 지금 마더보드를 보고 있지 않다. 버클리는 '보이는 것만 있으며, 보이지 않는 것은 없다.'고 했다. 이런 말을 받아들이자. 그럼 당신 앞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모니터뿐이다. 당신의 컴퓨터 속 마더보드, CPU, 랜카드 등은 없다. 이상하지 않은가? 더 이상한 이야기도 할 수 있다. 나른한 오후다. 바로 일을 시작해야 하는데, 너무 잠이 쏟아진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당신 바로 앞자리에 고약한 부장이 앉아 있다. ……눈을 감으면 앞에 있는 고약한 부장은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그 상태로 편하게 잠들면 된다."[85]


루이스 캐럴은 위와 같은 (오해된) 유아론적 사조를 불후의 고전적 로작 「앨리스」 시리즈에서 다음과 같이 좀 더 쉽게 이야기 형식으로 풀어 썼다:

"그는 지금 꿈을 꾸고 있어. 그가 무슨 꿈을 꾸는 것 같니?"
트위들덤이 물었다.
"그걸 누가 알겠어."
앨리스가 대꾸했다.
"이런, 바로 너에 대한 꿈이야!"
트위들덤이 의기양양하게 손뼉을 치며 말했다.
"왕이 너에 대한 꿈을 다 꾸고 나면, 네가 어디에 있을 것 같니?"
"그야 물론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이지."
앨리스가 말했다.
"틀렸어!"
트위들디가 거만하게 말했다.
"너는 어디에도 없을 거야. 너는 그의 꿈에 나오는 존재에 불과하니까!"
"왕이 잠에서 깨어나면."
트위들디도 거들었다.
"너는 사라질 거야. 휙! 촛불처럼 꺼져버리는 거지!"[86]


그러나 버클리는 이러한 오해를 이미 반박하고 있었으며

"위의 원리에서 제기되는 네 번째의 이의는, 사물들은 매 순간마다 소멸되고 새롭게 창조된다고 하는 것이다. 감각기관의 대상들은 지각될 때에만 존재한다. 그러므로 나무와 의자는 누군가가 그것을 지각하는 것보다 더 오랫동안 정원이나 거실에 있는 게 아니다. 내가 눈을 감아 버리면 방안에 있는 모든 가구는 무(無)로 돌아가 버리며, 눈을 뜸과 더불어 그것은 다시 창조된다. 이 모든 것의 대답으로 독자들은 3절과 4절을 보기바라며, 나는 독자들이 실제로 현존하는 관념으로서 이해하는 것이 그 관념을 지각하는 것과 다른 것인지 어떤지를 숙고해 보기를 바란다.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자 한다. 즉, 물질주의자들에 따르면 물질과 물질의 각 부분은 무한하고 형체가 없으며, 정신은 가시적 세계를 형성하는 다양한 모든 물체를 형성하고, 그 가운데 어떤 물체는 지각되는 것보다 더 오랫동안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그것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제기된 이의가 우리가 위에서 제기한 원리에 대해서는 올바른 것이 아니라는 점, 그래서 어쨌든 우리의 생각에 대한 이의로서는 결코 타당할 수 없다는 점이 나타날 것이다. 왜냐하면 비록 우리가 실제로 감각기관의 대상들을 지각되지 않은 채로는 존재 할 수가 없는 관념으로만 간주한다고 할지라도, 이로부터 우리는 그 대상들은 우리들에 의해서 지각되는 동안에만 현존한다고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되기 때문이며, 비록 우리가 실행하지는 못할지라도 그 대상들을 지각하는 다른 정신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87]


개개인의 주관적 정신이 아니라 버클리는 '하느님의 눈'[88]으로, 비트겐슈타인은 '영원의 관점에서'(논고, 6.45) 생각하려고 한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의 버클리에 대한 평가는 다음과 같다:

"버클리와 칸트는 매우 깊은 사상가라고 생각합니다."[89]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에 다음과 같이 적는다:

5.61 ……사고할 수 없는 것을 사고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사고할 수 없는 것을 말할 수도 없다.
5.62 이런 견해가 유아론은 어디까지 진리인가 하는 물음에 해결의 열쇠를 제공한다.
즉 유아론이 말하려는 바가 전적으로 옳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스스로를 드러낼 뿐 말로 표현될 수 없다.
세계가 나의 세계라는 것은 언어(내가 이해하는 유일한 언어)의 한계가 내 세계의 한계를 의미하는 데서 드러난다.
5.621 세계와 삶은 하나이다.
5.63 나는 나의 세계이다. (소우주)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후기에 이르러 장년이 된 비트겐슈타인에 의해서 통렬하게 반박된다. 셀프디스의 본좌

3.1.1.4. 논리학에 대한 견해[편집]

전기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철학 자체가 일상적인 언어를 사용할 때 빈번히 일어나는 혼동으로 가득하고, 이런 오류를 피하기 위해 다른 상징에 같은 기호가 사용되거나 표현 방법이 다른 기호가 겉으로 보기에 같은 방식으로 사용되는 일이 없는, 오류를 배제한 기호언어, 즉 논리적 문법-논리적 구문론-을 충실히 반영한 기호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프레게와 러셀의 개념기호법은 모든 결함을 배제하고 있다고 할 수 없지만 이런 언어의 하나이다.)(3.323, 3.324). 따라서 「논고」에서는 기본적으로 기호논리학을 사용한다. 사용되는 기호는 다음과 같다.[90]

기호

p, q, r

명제(특히 요소 명제)를 나타내는 기호들.

p∨q

p와 q의 선언. "p이거나 q이다."

p.q

p와 q의 연언. "p이고 q이다."

p⊃q

p가 q를 함축. "p이면 q이다."

p≡q

p와 q의 동치. "p이면 q이고, q이면 p이다."

p│q

p와 q의 동시 부정. "p도 아니고 q도 아니다."

프레게의 판단(또는 주장) 기호. 예컨대 "├ p"는 "나는 p가 참이라고 주장한다."

T

F

거짓

(TFFT)(p,q)

진리표의 생략적 표현. (TFFT)(p,q)는 따라서 p≡q이다.

진리표

p

q

p⊃p.q⊃q

~(p.q)

q⊃p

p⊃q

p∨q

~q

~p

(p.~q)∨(q.~p)

p≡q

(p│q)

(p.~q)

(q.~p)

(q.p)

(p.~p.q.~q)

T

T

T

F

T

T

T

F

F

F

T

F

F

F

T

F

F

T

T

T

F

T

T

F

T

T

F

F

F

T

F

F

T

F

T

T

T

F

T

T

F

T

F

F

T

F

F

F

F

F

T

T

T

T

F

T

T

F

T

T

F

F

F

F

Kn

n개 사태의 존립과 비존립 가능성의 수. 2^n. 예: p와 q, 2개의 사태는 4가지(TT)(FT)(TF)(FF). p와 q와 r, 3개의 사태는 8가지(TTT)(TTF)(TFT)(TFF)(FTT)(FTF)(FFT)(FFF)

Ln

어떤 한 명제와 n개 요소 명제의 진리 가능성들과의 일치 및 불일치에 관한 가능성의 수. 2^(2^n).

Tr

명제 "r"의 진리 근거들의 수. 명제 r이 p⊃q이면 Tr은 3이다.

Trs

명제 "r"의 진리 근거들이면서 동시에 명제 "s"의 진리 근거들이기도 한 것들의 수.

a, b, c……

대상들의 이름.

x, y, z……

대상들의 변항. 또는 가변적 이름.

f, g, Φ, ψ

함수를 나타내는 기호들.

fa, ga

대상a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요소 명제들.

fx, Φ(x,y)

가변적 이름(들)의 함수. 요소 명제의 또 다른 표기 방법.

F(fx)

함수 fx의 함수.

(x)

보편 양화사. 예컨대 "(x).fx"는 "모든 것이 f이다."

(∃x)

존재 양화사. 예컨대 "(∃x).fx"는 "f인 어떤 것이 존재한다."

aRb

a가 b에 대해 R의 관계에 있음.

ξ

명제 변항. 진위가 확정되지 않은 명제.


세계는 성립되어 있는 사항들의 총체(1)이며, 세계는 사물들의 총체가 아니라 사실들의 총체(1.1)이다. 사실은 성립될 수 있는 사태(2)를 뜻한다. 원자적 사실을 주장하는 (참 또는 거짓인) 명제는 요소명제라고 불리며 이것은 이름(혹은 대상)으로 구성된다-그리고 이 이름(혹은 대상)은 보일 수 있는 것으로 말할 수 없다(4.1212). 요소명제는 가장 단순한 명제로 다른 요소명제를 함축하거나 모순되지 않는다(독립적이다)[91]. 요소명제는 논리적 조작이 포함되어 있다(5.47).[92] 요소명제는 다른 요소명제와 관계하여 분자명제가 된다. 이러한 명제들은 사태의 성립과 불성립을 묘사하고(4.1), 참인 명제의 총체가 자연과학 전체(혹은 여러 과학의 총체)이다(4.11). 논리학의 명제는 항진명제(6.1)이고 따라서 아무것도 말하는 것이 없고(5.142) 무의미하다(4.461). 논리는 선험적(6.13)이며(마치 빨간색 공과 파란색 공이 들어있는 상자 안에서 하나의 공을 꺼낸 것이 빨간색 또는 파란색 공인 것이 항상 참이며 빨간색 그리고 파란색 공인 것은 항상 거짓임이듯이) 명백히 뜻을 지닌 귀납법칙은 어떠한 경우에도 논리학의 법칙이 될 수 없고 선천적인 법칙이 될 수 없다(6.31). 미래의 사건들은 현재의 사건들로부터 추론할 수 없고, 인과 연쇄에 대한 믿음은 미신이다.(5.1361) 세계의 의의는 세계 밖에 있어야 하며, 비우연적으로 일어나고 존재하도록 하는 것은 세계 속에 있을 수 없다. 만약 있다면 그것은 다시 우연적일 테니, 그것은 세계의 밖에 있어야 한다. 이렇게 논리가 세계를 가득 채우고 있고, 세계의 한계가 그어진다.

비트겐슈타인은 독특한 다이어그램을 그린다. (「논고」 6.1203)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50px-Tractatus-p161-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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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q)의 다이어그램

p⊃q의 다이어그램

ξ.η의 다이어그램


러셀은 수를 논리적 개념들만을 써서 정의하던 중 자기 자신의 원소가 아닌 그런 모든 집합들로만 이루어진 집합이 어떤 경우이든 모순에 도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는 흔히 이발사의 역설로 불리우는데 대강 "자기 머리를 깎지 못하는 마을 사람의 머리만을 깎아주는 이발사가 있다면 이발사 스스로 머리를 깎는 경우는 어떠한가?"라는 질문으로 얘기될 수 있다. 이발사가 스스로 머리를 깎으면 자기자신의 머리를 깎으니 깎을 수 없고, 스스로 머리를 깎지 못하면 자기 머리를 깎지 못하는 사람이 되니 깎아야 한다.뱅글뱅글 비트겐슈타인은 「논고」 3.332에서

"어떤 명제도 자기 자신에 관해 무엇인가를 진술할 수 없다. 왜냐하면 명제 기호는 자기 자신 속에 포함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유형이론'의 전부이다.)"


라고 말한 뒤 3.333에서

"……요컨대 함수 F(fx)가 자기자신의 독립변수가 될 수 있을 거라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F(F(fx))'라는 명제가 주어질 것이다. 그리고 이 명제에서 외부 함수 F와 내부 함수 F는 상이한 의미를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그 내부 함수는 Φ(fx)의 형식을 지니고, 외부 함수는 Ψ(Φ(fx))의 형식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 두 함수에는 단지 'F'라는 문자만이 공통적인데, 그러나 그 문자는 그 자체로 아무것도 지칭하지 않는다……."


고 말한다.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유형 이론은 말할 수 없는(오직 보여질 수만 있는) 것을 말하려 했고, 올바른 표기법에서 러셀의 역설은 아예 생길 수 없으며 따라서 유형 이론은 불필요하다고 한다.[93] 분명 이발사 비유에서 "이발사는 마을사람이다." 그러나 언표 내에서의 주체 '이발사'는 언표행위의 주체로서의 '이발사'와 다르다. 살아 움직이는 마을 사람 '이발사'는 오직 보여질 수만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둘은 표기만 같을 뿐 언표 내에서의 '이발사'는 실은 아무것도 지칭하지는 않는다. 이를 통해 거짓말쟁이 역설도 풀릴 수 있는데 내가 거짓말쟁이인지 아닌지는 오로지 보여질 수 있는 것으로 '거짓말쟁이인 나'와 '거짓말쟁이가 아닌 나' 두 개가 있을 뿐 "나는 거짓말쟁이다"는 실상 무의미한 말이 된다. 키클롭스는 오디세우스를 실상 끓는 물에 삶든, 불에 굽든 아무런 모순에 빠지지 않아도 됐다. 확인바람

'='에 대해 러셀은 차이를 식별할 수 없는 두 존재자는 동일하다는 정의를 내린다. 이에 대해 비트겐슈타인은 "5.5303 두 사물에 대해 그 둘이 동일하다는 말은 난센스이며, 하나의 사물에 대해 그것이 자기 자신과 동일하다는 말은 아무것도 말하는 바가 없다"고 반박한다. 그래서 그는 러셀이 'a=a'나 'p는 명제이다'를 일부러 기호화하여 'p⊃p'로 쓰는 것을 거부하고 비판한다. 비트겐슈타인은 'f(a,b).a=b'라고 쓰지 않고 'f(a,a)' 또는 'f(b,b)'라고 쓰며, '(∃x,y).f(x,y).~x=y'라고 쓰지 않고 '(∃x,y).f(x,y)'라고 쓴다. 이러한 입장은 제거주의적으로 오컴의 면도날과 닮아 있는 부분이 있다. 실제로 비트겐슈타인은 "사용되지 않는 기호는 의미가 없다."며 이것이 "오컴의 격언이 말하는 바이다."라고 한다(3.328)

3.1.1.5. 수학에 대한 견해[편집]

19세기 말 유럽수학계의 주요 떡밥이었던 '집합론은 과연 수학의 토대로 적절한가?'라는 물음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은 부정적이었다. 「논고」에서도 '수학에서 집합론은 전혀 쓸데없다.[94] '라는 말이 나온다! 집합론을 옹호한 스승 러셀과 또 다시 대비되는 부분. 그가 집합론이 가장 앞에 나오는 오늘날의 수학교과서들을 본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3.1.1.6. 역설[편집]

「논고」를 읽다보면 비트겐슈타인이 윤리와 아름다움에 대한 명제는 무의미하다고 주장하는데도 불구하고 그 자신이 이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동료 학자들이나 주변 사람들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가령, 시인 줄리언 벨은 이러한 비트겐슈타인의 아이러니컬한 태도를 풍자하며 시를 지었다.

그는 넌센스한 말을 하고, 수많은 말들을 하기 때문에
언제나 침묵하라는 자신의 맹세를 깬다.
윤리학, 미학에 대해 밤이나 낮이나 얘기하고,
이것저것을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옳다거나 그르다고 한다.
……어떤 문제에 관해서건 한 번이라도 보았는가?
루트비히가 법칙을 세우는 일을 피했던 것을.
사람들과 있을 때마다 우리들을 소리쳐 막고,
우리 말을 멈추게 한다. 그 자신은 더듬거리면서.
논쟁은 끝이 없다. 몰아붙이듯이, 열이 나서, 큰 소리로.
그런 잘못은 흔하며, 부분적으로 우리 모두 그렇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이 예술에 대해서 거만을 떠는 모습이란.[95]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논고」 6.54에서 "내가 말하려는 바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먼저 내 명제를 통하여-그 위에 서서-그것을 뛰어넘을 때 결국 그것이 난센스임을 깨닫는다. 이렇게 내 명제는 해명된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자는 그 사다리를 던져버려야 한다.> 그는 내 명제를 극복해야 한다. 그때 비로소 그는 세계를 올바로 볼 것이다."라고 말하며 이에 대해 해명하였고, 또 줄리언 벨이 시를 지었을 당시는 이미 후기 철학으로 급진적인 변화를 했을 때였기 때문에 그의 풍자는 적절치 못했다고 할 수 있다. 당연히 비트겐슈타인도 이에 대해 경멸적으로 "줄리언 벨"(독창성이 없는 무리들)이라고 서슴없이 말하며 혐오감을 표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고 6.54는 여러 가지 해석을 낳으며 분란을 만들어 왔다.[96] 로저 화이트는 논고 6.54의 해석에 다음과 같이 크게 다섯 가지의 노선이 있다고 설명한다[97]:

1. 귀류 논증 해석: 논고의 결론이 논고의 주장을 부정하므로 논고 자체 아무것도 새로운 것을 주장하는 바 없는 소극적인 비판문이라는 해석이다. 즉, 논고란 논고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은 사고를 저지하는 데 목적이 있을 뿐이라는 해석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해석은 "직접 보아야만 알 수 있고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있다는 비트겐슈타인의 강한 주장의 배후에는 비트겐슈타인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생각들이 뒷받침되고 있으며 어떠한 피상적인 반론도 무시할 수 없는 심오한 철학적 통찰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2. 상위 언어로 올라가는 해석: 러셀의 해석이다. 언어의 말할 수 없는 구조를 대신하여 새로운 구조를 갖고 있는 다른 언어로 향해야 한다는 해석이다. 즉, 기존의 명제가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 다른 명제가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비트겐슈타인의 말하기 방식을 언어에 관하여 명료하게 말하는 방식으로 대치시켜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단지 요점을 놓친 채 얼버무려 넘기는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첫 번째 언어로 말할 수 없다 주장되는 것은 두 번째 언어로도 말할 수 없는 것으로 그대로 반영될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러셀의 이 해석에 대해 "수박 겉핥기식 이야기와 오해뿐" 영원히 고통 받는 러셀 이라며 비난했다.

3. 논고 6.54를 무시하는 해석: 램지의 해석이다. 6.54를 수사학적 장식 문장으로 간주하고 논고에서 의도적으로 추방시키는 해석이다. 명제 6에서 멈추는 1916년 판 논고를 진본으로 삼는다. 그러나 이는 6.5 이하의 문단들이 비트겐슈타인이 논고 전체에 걸쳐 주장했던 핵심 입장의 마지막 결론이자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는 점을 애써 무시하는 것 외에는 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진다.

4. 치료적 해석: 논고는 독자를 속여서 그 책의 내용이 마치 언어와 세계의 관계에 관한 이론인 것처럼 믿게 만든다. 그러나 마지막에 이르러 독자는 그러한 이론은 제 자신을 파괴한다는 것을 깨닫고, 그래서 독자가 심사숙고해온 명제들은 스스로를 헛소리라고 비난하게 된다. 이 일을 통해서 독자는 그러한 이론을 구성하려는 충동이 어리석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이는 명제와 논리학의 본성을 명료하게 해결하려고 고심하는 비트겐슈타인의 강렬한 열정과 부합되지 않는다. 비트겐슈타인이 단지 기묘한 치료 활동이란 이름을 빌어 그 모든 것을 내버리기 위한 초대를 했다는 점은 온전히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또 치료되었으면 당연히 내버려야 했을 그런 종류의 탐구를 1929년에 철학에 다시 돌아오자마자 계속했다는 점에서 그 치료 활동이 매우 하찮은 것으로 보일 여지가 있다는 점도 확실하다.

5. 전통적 해석: 귀류 논증 해석과 달리 헛소리 문장의 사용을 통해서 '우리가 직접 보아야만 알 수 있는 것'과 '왜 직접 보아야만 알 수 있는 것은 말로 표현될 수 없는가'를 둘 다 깨닫도록 도와주려고 노력했다는 해석이다. 이 해석의 난점은 추가되는 사실을 만들지 않으면서, 보여지기만 하는 사실들 속의 유형에 관해 끊임없이 생각해야 한다는 점이다. 결국 이 해석은 러셀이 썼던 것과 같은 '신비주의에 대한 불만'을 야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3.2. 후기 철학[편집]

시골에서 초등학교 선생님을 하면서 비트겐슈타인은 그 자신이 사람이 아니라고 표현한 마을 주민들과 같이 생활하게 되었는데, 그때의 경험 때문인지 비트겐슈타인은 후에 케임브리지에 돌아와 자신의 사상을 획기적으로 전환시키게 된다. 이 전환은 후에 '일상언어학파'라고 불리는 사상을 태동하게 하는 데 크게 기여한다. 그는 러셀과 청년 시절의 자신의 사상인 '이상언어'에 대한 갈망을 거부하고 "일상언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하기에 이른다. 철학에 대한 정의는 "사소한 것들의 종합"이다.

비록 비트겐슈타인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내용이지만, 좀더 쉽게 이해하고 싶은 이들을 위해 '사소함'의 의미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

……아무튼 신지의 이러한 모습 속에서 그가 얼마나 작은 '사소함'으로 에바를 조종하고 있는지를 확인하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화두 하나가 우리를 반긴다. 말할 수 없이 비천한 그 '사소함'! 사실 우리가 언제나 거창한 구호와 표어로 포장하고 치장하여도 변질되거나 뒤바뀌어지지 않는 절절한 진실 하나! 그것은 바로 이러한 가벼움과 사소함이 우리의 역사를 움직이는 가장 기본적인 동기 중의 하나라고 하는 사실이다. 바로 이 점에서 에바의 제작진은 인간사의 모습을 낱낱이 잘 묘사하고 있다.
대충 우리는 알고 있다. 그처럼 거대한 메카닉을 조종하는 이들은 그에 맞은 표어를 몸에 휘감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그래서 때로는 우주의 평화를 위해서 그는 그곳에 있어야 하고, 혹은 인류와 후손의 무한한 평화와 행복을 위해 자신을 헌신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추앙되고 존경받고, 때론 영웅이 된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신지는 그런 것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은 채 에바의 조종석에 앉아있다. 그리고 나지막이 읊조리고 있다.

'젠장, 아빠도 없는데… 이놈을 몰았다고 친구한테 얻어터지기나 했는데… 뭣 때문에 난 다시 이 괴물 같은 놈을 타야 하지?'

그래도 신지는 에바를 조종하게 되고, 결국 사도를 물리치고 다시 지구와 인류를 구한다. 그러나 여전히 그에게는 '사소함'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리고 여전히 풀리지 않는 질문 하나가 그의 그림자를 따르고 있다.

'무엇 때문에 난 이 일을 하는 것이지?'

누가 이 14세 소년에게 달려가, '인마! 네가 하는 일은 우리 인류와 전 후손의 장래가 달려있는 살 떨리는 위대한 일이야! 네가 하는 일에 자긍심을 가지고 또 책임 있는 발언과 행동을 하란 말이야!'라고 강요할 수 있겠는가? 때로는 사람들은 거창한 구호를 강요하지만 실상 인간사라는 것이 그렇게만 꾸며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위대함 뒤편에 쪼그려 숨죽이고 있는 '소소함'과 '사소함'이 역사를 움직이는 보다 본질적인 원동력이 될 수도 있다. 오늘 우리는 신지의 모습은 그러한 소소함의 역사성을 극명하게 웅변하고 있다.
사람들은 말할 수 없이 다양한 이념으로 인간이라 하는 생명체의 '위대함'을 선전한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하찮은 생명체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숭고함을 지니고 있고, 뛰어난 이성으로 문자를 만들고, 과학을 발전시키고, 예술을 진보시키고 또 미래를 예측한다고 설쳐댄다. 그러나 내 눈에 인류가 다른 유기체와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뛰어난 것은 고작 '요리'를 할 수 있다는 것 정도뿐이다. 그 외의 것들은 사실 우리가 뒤에 세련되게 치장한 요란함일 뿐. 우리는 극히 치졸하고 무반성적인 사소함을 무기 삼아 역사를 '창출'한다. 그리하여 그 찬란한 사소함은 야사野史가 되어 역사의 뒤꼍으로 내팽겨치게 되고, 포장된 위대함은 정사正史가 되어 도서관에서 찬연한 빛을 발한다. ……아, 이 커다란 소소함이 자그마한 사소함을 뭉개버리는 현장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선생의 정사는 계속 이어지는데도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모여 그들의 말할 수 없이 가벼운 사소함을 확인하는데 여념이 없다. 이 얼마나 멋진 은유인가! 이처럼 미련하지 않은 보통 사람들은 철저히 자신의 사소함에 충실하고 있으니! 그리고 앵무새처럼 조아려대는 '책임 있는' 이들의 '책임 없는' 언사를 한방에 뭉개버리고 있으니! 따라서 우리는 소박한 진실 하나를 건져 올리게 된다. '우리가 지금 여기에 이렇게 무언가를 하고 있는 것은 바로 우리의 무한정 가벼운 사소함,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그 가벼운 사소함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생生! 그것 외에 아무것도 없다! 살아있음, 그리고 살아감, 나의 생명의 연장. 우리를 그처럼 질리도록 사소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그것뿐이다. 바로 그러한 사소함이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지켜내는 가장 위대한 힘이다.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신지 역시 결국 죽음 앞에서는 삶의 의지를 강하게 드러낸 것을 이미 2화에서 확인하지 않았는가. 도대체 우리가 이처럼 살아있다는 것보다 더 큰 의미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살아있음 그 자체가 하나의 의미인 것이다. 자꾸 살아있음에 다른 가치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 인류의 그 어떤 위대함과 숭고함도 이 '살아있음'을 배제해서는 제대로 설 수가 없다. 따라서 에바의 제작진이 신지에게 인류 공영의 무거운 짐을 지워지지 않았다 하여 불평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나름대로 충실한 역사의 해석에 매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이 꺼림칙한 얼굴은 그가 4번째 사도의 공격으로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이제 망가질 수밖에 없는 카메라 때문이다.
바로 이 사소함, 죽음의 공포마저도 이겨버리는 이 소소함. 바로 그것이 지금 우리를 이곳에서 무언가를 하게 만든다는 사실. 우리는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바로 살아감生. 바로 그것뿐이다. 나의 반복적인 생활 속의 삶! 그러한 사소함만이 죽음을 이기게 한다![98]

3.2.1. 「철학적 탐구」[편집]

비트겐슈타인이 죽은 지 2년 후 앨리자베스 앤스콤[99]과 러시 리스가 공동 발행하고 앤스콤이 번역하여 2개 국어 판으로 출판되었다. 총 2부로 이루어졌는데, 1부의 순서는 비트겐슈타인이 정리한 것 그대로이며, 2부의 순서는 앤스콤과 리스가 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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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탐구 2부에 등장하는 조세프 야스트로우Joseph Jastrow의 '토끼-오리' 그림

3.2.1.1. 「철학적 탐구」의 구성[편집]

모토[100], 머리글[101], 본문으로 제1부와 제2부 이렇게 구성되어 있다. 각 단락은 「논고」 때처럼 번호가 매겨져 있으나 소수점 이하의 숫자로 표기된 상세한 설명은 없다.

3.2.1.2. 게임이론[편집]

전기 철학과는 달리 세계에 대한 정확한 기술이 아니라 "물!", "저쪽!", "와!", "도와줘!" 같은 언어표현을 부각시킨다. 이러한 표현은 사용맥락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는데, 이와 관련하여 비트겐슈타인은 "낱말의 의미란 언어 안에서의 그 사용이다"라고 설명한다. 전기의 진리대응설을 비판하고 언어의 화용론적 측면을 부각시킨다고 볼 수 있다.[102] 체스에서의 '왕'과 '기사'는 현실이나 이데아의 '왕' 또는 '기사'와 일치하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체스게임 내에서의 이러저러한 규칙에 따라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이러한 말의 움직임은 현실과 유사하지만 결코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3.2.1.3. 가족적 유사성[편집]

한 낱말의 개념범주의 구성요소들을 모두 관통하는 하나의 공통된 성질은 있지 않아도 된다. 마치 어머니와 아들은 코가 닮고, 아들과 딸은 이마가 닮고, 딸과 아버지는 입이 닮았지만 가족 모두 공통적으로 닮은 외모의 어떤 부분이 있지 않아도 '가족'으로 불리듯이 한 낱말의 개념 범주에 들어가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어떤 요소가 필연적으로 존재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3.2.1.4. 유아론에 대한 비판[편집]

그러나 나는 내 주위에 있는 인간이 오토맨(자동 기계)이며, 비록 그 행동 방식이 항상 같다고 해도 의식은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가? 만약에 내가 지금-혼자 자신의 방에서-그와 같이 상상하고 있다면 나는 사람들이 경직된 눈초리로 (황홀 상태에 있는 것처럼) 자신들의 일에 종사하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인데-이 생각은 아마도 약간 으스스한 것이다. 그러나 한 번이라도 예를 들어, 가두에서의 보통의 교제 가운데서 이 생각을 고집하려고 시도해 보라! '저기에 있는 아이들은 단지 오토맨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그들의 생생한 모습은 모두 기계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자신에게 말해보라. 그러면 이러한 말이 당신에게는 전혀 아무 것도 말하고 있지 않는 것이 되거나, 또는 당신 자신 안에 일종의 으스스한 감정 내지는 그와 비슷한 것이 생기게 될 것이다. 살아 있는 인간을 오토맨이라고 본다는 것은 그 어떤 형상을 다른 형상의 극한 상태 내지는 변종으로 본다는 것, 예를 들어 창의 십자 격자를 갈고리 십자로 보는 것과 유사하다. [103]

나는 남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알 수는 있지만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알 수는 없다. '나는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만, '나는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철학의 모든 구름 덩어리가 한 방울의 언어 이론으로 응축된다.)[104]


비트겐슈타인 교화 철학의 정수. 어떤 철학자는 비트겐슈타인이 "사적인 존재자와 그를 향한 특권적인 접근"이라는 사밀성(사적인 비밀)과 직접성에 적의를 품게 되었다고 까지 생각했다.[105]

3.2.1.5. 논리학에 대한 견해[편집]

후기 철학에 이르러 비트겐슈타인은 '모순'에 대해 관대한 태도를 비춘다.[106] 이러한 태도는 애플의 로고로 유명한 컴퓨터의 아버지 앨런 튜링과 <잘못 건설된 다리>에 관한 논쟁으로 번지게 된다. 튜링은 모순이 있다는 것은 곧 무너질 다리를 짓는 것과 같다고 주장했으며, 비트겐슈타인은 이에 대해 다리가 무너지는 것은 물리적인 문제이며, 모순은 아무것도, 심지어 그 어떤 거짓된 것도 만들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3.2.1.6. 수학에 대한 견해[편집]

후기 철학에 이르러 비트겐슈타인은 수학이 철학에 기초(토대)를 부여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렸다. 그 역도 마찬가지다.[107] 그는 "그 어떤 수학적 발견도 철학을 전진시킬 수가 없"으며, "모순을 수학적·논리수학적인 발견으로 해결한다는 것은 철학이 할 일이 아니"라고 얘기한다.

3.2.2. 「심리철학적 소견들」[편집]

비트겐슈타인 사후에 세 사람의 유고관리자 엘리자베스 앤스콤, 러시 리스, 게오르크 헨릭 폰 리히트와 편집자 헤이키 니만이 정리하여 출간하였다.

3.2.2.1. 체화이론[편집]

"인간의 행동/행위는 단순히 내적 과정 주도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그게 아니면 외적 자극에 대한 기계적 반응이 아니다. 대신 그것은 심신통합, 안/밖의 연속성, 인간-환경 및 삶의 역사의 유기적 통합작용이자, 언어적 측면과 전언어적/비언어적 측면, 본성과 양육의 측면 모두가 혼재되어 진행되는 과정이다. 인간의 정신적 능력 및 활동의 이해를 위해서는 인간내면에 대한 단순한 관심을 넘어 인간 삶의 역사 및 상황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그에게 심적 과정은 두뇌로부터 나오는 상향의 방향만이 아니라 문화적 현실로부터 형성되는 하향의 방향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는다. 그는 사고과정이 두뇌로부터 나오는 충동시스템과 관련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다만 사고과정이 필연적으로 두뇌과정의 결과냐 그래서 심리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두뇌과정을 필히 살펴야 하느냐에 대해서는 회의적 태도를 취한다."[108]

3.2.2.2. 유아론에 대한 비판[편집]

……누군가가 "나는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다고 믿는다"라고 말한다; 그는 이후 실제로 곧장 깨어나 꿈속에서의 그 표현을 기억하고는 "그런 식으로 나는 옳았다!"라고 말한다-이 얘기는 단지 다음과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일 수 있다: 누군가가 자신이 꿈을 꾸었다고 말하는 꿈을 꾸었다.[109]

의식이 없는 어떤 사람이 (가령 마취된 상태에서) "나는 의식이 있다"라고 말했다고 생각해보라-우리는 "그 사람은 그것을 알고 있음에 틀림없다"라고 말할 것인가? 그리고 누군가가 잠을 자면서 "나는 잠을 자고 있다"라고 말한다면,-우리는 "그는 완전히 옳다"라고 말할 것인가? "나는 의식상태에 있지 않다"라고 내게 말하는 사람은 반쪽의 진리를 말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가 의식 없이 그렇게 말할 때, 그는 진리를 말하고 있는가? 그리고 앵무새가 "나는 어떤 단어도 이해를 못해요"라고 말할 때, 혹은 축음기가 "나는 단순히 하나의 기계입니다"라고 말할 때는 어떠한가?)[110]

3.2.3. 「확실성에 관하여」[111][편집]

이 책은 비트겐슈타인이 죽기 대략 일 년 반 전부터 죽기 직전까지 몰두했던 특정한 주제, 즉 앎과 확실성의 문법과 관련된 고찰들로 이루어져 있다.

무어는 <외적 세계의 증명>이라는 논문에서 관념주의와 회의주의에 대항하여 주장하기를, 자기는 외부 사물들의 존재를 수많은 다른 방식으로 증명할 수 있다고 한 바 있다. 예를 들면, 자신의 두 손을 들어올려 오른손으로 어떤 제스처를 하면서 "여기에 한 손이 있다"고 말하고, 왼손으로 어떤 제스처를 하면서 "여기에 또 한 손이 있다"고 덧붙임으로써, 두 손이 존재하며, 따라서 외부사물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무어는 <상식의 옹호>라는 논문에서는 "나의 몸은 과거 어느 시간에 태어났고, 그 후 계속해서 존재해왔다.", "나는 지구표면에서 멀리 떨어져본 적이 없다", "나는 인간이다"와 같이 너무 명백하고 진부한 것들이어서 진술할 만한 가치가 없어보이는 명제들에 대해 그것들이 참임을 확실하게 안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상식적인 명제들에 대해 나는 안다고 하는 무어의 주장을 가리켜 "무어의 명제들"이라고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일단 두 가지 면에서 무어를 비판한다.

우선 '안다'는 말은 (정상적 상황에서는) 어떤 조건들 하에서만 사용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안다'고 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실수나 무지, 의심, 확인 등의 가능성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또 어떻게 그것을 알았는지를 (원리상) 말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럴듯한 근거들을 제시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무어의 명제들은 이런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며, 뜻이 없거나 극히 불명료한 말들이다.

또한 "나는 안다"는 무어의 단언들은 그가 이러저러한 것을 안다고 확신한다는 것을 보여줄 뿐, 그가 그것을 안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완전한 확신과 모든 의심의 부재를 특징으로 하는 주관적 확실성은 물론, 오류가 더 이상 생각될 수 없거나 오류의 가능성이 논리적으로 배제되었다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객관적 확실성조차도 앎을 보장하지 않는다. 확실성과 앎은 범주가 다르다.

다음으로, 비트겐슈타인은 무어가 안다고 주장한 명제들에 주목하였다. 그것들은 경험 명제이거나, 적어도 경험 명제의 형식을 띤 명제들이다. 그러나 동시에 "왜 사람이 그 반대를 믿어야 할지 상상하기 어려운" 명제들이고, "먼 옛날부터 우리의 모든 고찰들의 골격에 속해 온" 확고한 것들이며, "그것을 확고하다고 간주하는 것은 우리의 의심과 탐구의 방법에 속한다." 그것들은 말하자면 우리의 "물음들과 의심들의 운동 축", "모든 판단의 기초", "언어놀이들의 흔들리지 않는 기초", "행위와 사고의 기초", "그 위에서 참과 거짓을 구분하는 전승된 배경"으로, "우리의 경험 명제들의 체계 내에서 독특한 논리적 역할을 하는" 이른바 '축 명제'들이다.

그런데 이런 축 명제들의 확고한 규범적 지위는 그것들 자체가 선천적으로 지니는 본성이 아니다. 그것은 나머지 경험 명제들과의 관계에서 상대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역학 관계를 비트겐슈타인은 집 전체에 의해 떠받쳐지는 기초벽이나, 강물의 흐름을 떠받치면서 그 흐름의 영향을 받아 위치를 옮기는 강바닥에 비유하고 있다. 그러므로 축 명제들은 그것들을 떠받치는 주위의 모든 것이 변하면 그 확고한 지위를 잃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회의주의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축 명제들은 모든 판단의 확고한 기초이기 때문에, 그것들보다 더 확실한 어떤 것에 대해 정당화될 수는 없다. 동시에 그것들은 또한 의심가능하지도 않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의심하는 놀이의 토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앎과 마찬가지로 의심은 언어놀이를 떠나서, 혹은 언어놀이 이전에 성립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의심은 언어놀이가 성립하기 위한 조건들을 전제로 한다. (이 점을 회의주의자, 관념주의자, 그리고 무어는 똑같이 간과하였다.) 축 명제들은 언어놀이들의 흔들리지 않는 기초를 이루므로, 의심의 놀이는 축 명제들이 지니는 확실성을 토대로 해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그렇다면 축 명제들까지 포함하여 "모든 것을 의심하는 의심은 아무런 의심도 아닐 것이다."(450절) 정당화와 마찬가지로 의심에는 끝이 있으며, 그 한계를 넘어가려는 회의주의는 무의미해질 뿐이다.

3.3. 문화와 가치에 대한 견해[편집]

3.3.1. 과학과 문명의 진보[편집]

"……구역질 나는 비눗물 같은 과학……." (평전, 691)

"케임브리지 근처를 어슬렁거리다가 한 서점을 지나쳤다. 창문에는 러셀, 프로이트, 아인슈타인의 초상화가 있었다. 조금 더 떨어진 음악 상점에서는 베토벤, 슈베르트, 쇼팽의 초상화를 보았다. 이 초상화들을 비교하면서 나는 불과 100년이란 기간에 걸친 인간 정신의 무서운 타락을 강렬하게 느꼈다." (평전, 429) 의문의 러셀 1패

"원자폭탄에 대하여 세상은 지금 발작적인 불안감을 드러내고 있으나 그것은 「실제로 드디어 여기 유효한 것이 발명되었다」는 신호와 같다."

비트겐슈타인 자신이 과학과 친밀한 공학도 출신이고, 게다가 2차 세계대전 당시 상당히 훌륭한 의학 연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과학과 진보에 대해 환멸을 느끼고 심지어 역겨워까지 했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사항이다. 그의 비관주의는 너무 신랄해 일면 유머러스하게까지 느껴지기도 한다.

3.3.2. 음악[편집]

음악에 관해서는 보수적인 면모를 넘어 반동적인 모습을 보였다. 비트겐슈타인은 베토벤, 모차르트, 슈베르트와 같은 고전 음악가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음악가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특히, 쇤베르크나 리하르트 스트라우스, 바그너 같은 현대 음악가를 선호하지 않았다-유일한 예외가 있다면 맹인 음악가 요제프 라보가 있다. 말년에 가서는 비트겐슈타인 저택에 자주 들러 음악을 들려주던 브람스의 음악 마저도 "기계음이 난다."며 싫어하는 모습을 내비쳤다.

● 바그너의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 전주곡에 대해 "얄팍한 천재는 재주가 투명하게 보인다."며 혹평했다.

구스타프 말러의 음악에 대해서는 아예 "무가치"하며, 심지어 "나쁘다"고 평했다.[112]

3.3.3. 문학[편집]

제자 엘리자베스 앤스콤이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추천해주자 그것을 읽고는 "이 자는 자신의 곤경에 관해 쓰지 않으려다 오히려 자신을 곤경에 빠뜨린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오토 바이닝거의 「성과 성격」을 앤스콤에게 역으로 추천해주었다. "바이닝거는 그의 단점이 무엇이든지 간에 정말로 그 자신의 곤경에 관해 썼던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여성인 앤스콤에게 당대 여성혐오주의 사상가의 대표격으로 여겨졌던 바이닝거의 책을 추천한 점은 의미심장하다.

스트리트앤스미스 출판사가 발행하는 탐정잡지를 좋아했다. 비트겐슈타인은 당대의 유명한 철학 잡지 「마인드」에 대해 혹평하면서 "왜 사람들이 탐정잡지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데도 굳이 「마인드」를 보는지 알 수 없다."는 투의 말을 한 적이 있다.

요한 루트비히 울란트의 「에버하르트 백작의 산사나무」라는 시를 좋아했다. 파울 엥겔만이 1차 세계대전 기간 중 보내어 알게 된다. 시의 내용은 십자군 원정에 참가한 에버하르트 백작이 팔레스타인에서 산사나무 가지를 꺾어 오는데, 그것을 땅에 심자 커다란 나무가 자라났고 그 아래에서 백작이 휴식을 취했다는 얘기다.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바스락거리는 수염의 에버하르트 백작은
뷔르템베르크의 영지로부터
신성한 부름을 받고 떠났네
저 팔레스티나 지역으로.

천천히 말을 타고서
숲 속에 난 길을 따라가다가
백작은 산사나무 덤불에서
작고 생생한 초록색 가지를 꺾었네.

그러고는 자신의 쇠 투구에
그 작은 가지를 꽂았네
산사나무 가지를 지닌 채로 전쟁터를 누비고
드넓은 불모지를 건너기도 했지.

그리고 마침내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그 가지를 땅에 꽂았네
거기서 작은 잎들과 싹들이
부드러운 봄의 부름을 받아 돋아났네.

백작은 해마다 그곳을 찾았네
그는 너무나 용감하고 진실했네
그리고 아주 기뻐하며 가지가 자라는 걸 보았네.

백작은 나이 들어 지쳤고,
그 가지는 이제 나무가 되었네
그 나무 아래서 노인은 종종
앉은 채로 꿈꾸곤 했네.

높은 나뭇가지는 아치를 이루고
저 메마른 휘파람 소리는
백작의 과거를 떠오르게 하네
저 팔레스티나 지역을.[113]


비트겐슈타인은 울란트의 시에 대해 이렇게 평한다. "울란트의 시는 정말로 대단하다. 다음과 같은 식으로 말이다. 만일 당신이 말해질 수 없는 것을 말하려고 시도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잃지 않는다. 그러나 그 말해질 수 없는 것은 -말해질 수 없이- 말해진 것에 포함되어 있다!"[114]

라빈드라나스 타고르의 「암실의 왕」을 재미있게 읽다. 요릭 스마이시스와 함께 영어로 번역하였다. 또한 레프 톨스토이의 「크로이체르 소나타」에 대해 극찬을 한 적이 있다.

4. 그 외[편집]

2012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언어 영역 비문학독해에서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를 다룬 인문 지문이 출제되었다.

서울시 교육청이 주관한 2018학년도 3월 전국연합학력평가 국어 영역 비문학독해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전기철학과 후기철학을 비교하는 인문 지문이 출제되었다.

로지코믹스에서 러셀의 제자로 등장한다. 문을 열고 얼굴을 빼꼼히 내민 채 러셀 교수를 찾는 모습이라든지, 러셀 앞에서 발광(...)하는 모습이나 휘파람을 부는 모습도 그렇고 평소 표정이 다소 귀엽다. 그리고 노르웨이로 가기 전 남긴 엽서를 보면 알겠지만 엄청난 악필인듯

천하의 진중권집사로 전직시킨(...) 고양이 루비도 트비히 트겐슈타인에서 따온 이름.

4.1. 관련 영화[편집]

영국의 게이 영화 감독 데릭 저먼이 만든 영화 《비트겐슈타인》을 추천한다. 주인공으로 나오는 칼 존슨이 비트겐슈타인과 싱크로 일치. 그의 철학보다는 성 정체성과 나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이 주를 차지한다.

4.2. 관련 음악[편집]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에서 다른 사람의 몸의 아픔과 관련하여서 신생아의 이에 관한 비유가 나온다.[115] 이에 영감을 받아 미국의 일렉트로닉 음악 그룹 Matmos가 「Roses and Teeth for Ludwig Wittgenstein」라는 제목의 음악으로 만들었다. 노래의 분위기는 굉장히 음산하고 기괴하다. 이 밖에도 독일의 가수 Tilman Rossmy는 철학에 푹 빠져 자신의 사랑을 몰라주는 여성에 대한 노래를 「Wittgenstein sagt」로, 노르웨이의 헤비메탈 밴드 Endolith는 「Ludwig Wittgenstein on Ethics」 라는 제목의 락음악을 만들었다. 신해철은 2000년 Wittgenstein이라는 밴드명으로 활동했다. 넥스트 해체 이후 영국 유학을 다녀온 신해철의 최종적인 프로젝트였다. 밴드명을 비트겐슈타인으로 지은 동기는 '~슈타인'이라는 이름을 쓰고 싶었는데 그중 가장 적합한 이름이 비트겐슈타인이었다고......

4.3. 관련 그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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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두아르도 파울로치Eduardo Paolozzi 「뉴욕의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 in New York」

4.4. 관련 소설[편집]

데이비드 마크슨David Markson은 「비트겐슈타인의 정부Wittgenstein’s Mistress」라는 책에서 지상에 마지막 남은 인간으로 어떤 한 여성을 묘사한다. 그녀는 끝까지 독백으로 일관하는데 이러한 모습은 비트겐슈타인의 전기 철학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토마스 베른하르트Thomas Bernhard는 「비트겐슈타인의 조카Wittgenstein's Nephew」에서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조카와의 개인적인 인연을 소재로 픽션을 가미하여 소설을 썼다.

[1] 과정철학자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의 유명한 격언[2] Considered by some to be the greatest philosopher of the 20th century by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3] 그 자신이 젊은 시절에 그 누구보다 '일반성'을 갈망했다는 것은 함정. 비록 비트겐슈타인 본인은 부정하지만 그가 젊은 시절 일반성을 갈망했다는 것이 통설이다. "……심지어 그 자신조차 「논고」에서 수행했던 것 중의 하나는 명제의 일반 형식에 대한 연구라는 점(철학적 탐구 65)에서, 모두 '일반성에 대한 갈망'에 빠져있다." 홍진기. (연세대학교, 2011) 니힐리즘의 철학적 극복 : 비트겐슈타인, 하이데거, 니체의 형태학적 이해, 167.[4] 리차드 로티, 박지수 옮김. (까치글방, 1998) 철학 그리고 자연의 거울, 395.[5] "대체 왜 그럽니까? 당신은 완전한 사람이 되고 싶은 겁니까?" 그러자 비트겐슈타인은 벽력같이 외쳤다. "물론이야! 나는 완전하게 되기를 원해!". 레이 몽크, 남기창 옮김. (필로소픽, 2012) 비트겐슈타인 평전, 527. 이하 평전[6] "우리를 인간답게 존재하도록 하시옵소서."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김양순 옮김. (동서문화사, 2008) 논리철학논고/철학탐구/반철학적 단장, 497.[7] 비트겐슈타인의 형제는 다음과 같다: (태어난 순서로) 큰누나 헤르미네, 큰형 한스, 둘째 형 쿠르트, 둘째 누나 헬레네, 셋째 형 루돌프, 셋째 누나 마르가레테, 넷째 형 파울, 그리고 루트비히이다[8] 오스트리아의 로스차일드가로 부를 수 있을만큼 부자였다. 이렇게 말하면 카를이 아버지의 재산을 손쉽게 물려받은 재벌 2세쯤으로 여겨질지도 모르나 무일푼으로 바이올린만 들고 뉴욕에 가거나, 웨이터, 바텐더 일을 하는 등 그 자신 스스로의 삶의 주인이 되려고 하였다[9] 따라서 루트비히가 유대 민족 문화 속에서 그것과 친숙한 가운데 자라났을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다. 요하임 슐테, 김현정 옮김. (인물과사상사, 2007) 비트겐슈타인, 17. "비트겐슈타인 집안에서는 유대교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10] 파울 엥겔만이라는 건축가와 같이 지었다[11] 알렉산더 워, 서민아 옮김. (필로소픽, 2014) 비트겐슈타인 가문, 293, 294. "……식사를 하면서 파울은 마르그리트 롱에게 이 작품에 약간 수정을 가했다고 말하자, 그녀는 작곡가를 염려하며 연주 전에 라벨에게 미리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했다. ……연주가 진행되는 동안 라벨의 얼굴은 분노로 어두어졌다. '연주자는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파울은 이렇게 주장했고, 이에 대해 라벨은 '연주자는 노예이다'라고 대꾸했다." 하지만 후에 공식적으로 화해했고 (같은 책, 296) "……언론에는 두 사람이 관계를 회복한 것으로 공식적인 기사를 내보냈다. '라벨과의 오랜 다툼이 해결되었습니다.'" 따라서 라벨과의 불화가 특별히 관계가 뒤틀어진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여전히 "……파울이 자신의 악보를 수정한 것이 여전히 불만스러웠……"(같은 책, 297)긴 했지만 말이다.[12] 같은 책, 208.[13] 왼쪽부터 헬레네, 루돌프, 헤르미네, 루트비히, 마르가레테, 파울, 한스, 쿠르트.[14] 여기에서 들을 수 있다.[15] 같은책, 41.[16] 같은 책, 62.[17] 다수의 학자와 예술가가 배출돼서 이러한 별명이 붙었다. 이 시기 빈 출신의 유명한 사람들로는 지그문트 프로이트, 오스카 코코슈카, 아르투어 슈니츨러, 구스타프 말러 등이 있다[18] 비평가 카를 크라우스가 붙인 별명이다[19] 그러나 다른 도시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나은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특히 식생활 조건이 우수했는데 다른 곳에서라면 명절 때나 먹었을 말고기 따위를 즐겨 먹을 수 있었다- 이는 빈에서 노동조합이 발전할 수 있는 중요한 기반이 된다. 그래봤자 아동노동착취가 횡행했고 나아 봤자 거기서 거기였지만[20] 앨런 재닉·스티븐 툴민, 석기용 옮김. (이제이북스, 2005) 빈, 비트겐슈타인, 그 세기말의 풍경[21] 그러나 그에게 따라붙는 '최고의 지성'이란 수식어는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학문적 업적'(물론 학문적인 업적도 있었지만)보다는 '예술적 독창성'과 친밀하다. 비트겐슈타인 스스로 자신을 "씨앗을 뿌리기보다, 씨앗을 뿌릴 토양을 만들려고 한다"고 말한 것과 같이 기존의 학문적 도식에서 벗어나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을 그 자체로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 다음의 루돌프 카르납의 말을 참고: "그의 관점과 태도는 과학자의 것이라기보다는 창조적인 예술가에 훨씬 더 가까웠다. 거의 종교적인 예언자나 선각자의 태도와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 그는 마치 신적인 영감을 통해 통찰하는 것 같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어떤 온당하고 합리적인 논평이나 분석도 신성 모독처럼 느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이윤 옮김. (필로소픽, 2015) 비트겐슈타인의 인생 노트, 부록.[22] 페피라는 소년과 사귀기도 했지만 그 우정이 오래가지 못했는지 린츠의 실업학교의 졸업 이후의 기록은 없다[23] 비트겐슈타인과 히틀러가 같이 찍혔다는 단체사진에 대해서도 어린 히틀러는 분명하나 옆에 있는 아이가 어린 비트겐슈타인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24] 바이닝거는 1902년 그의 나이 22세에 「에로스와 프시케, 생물학적-심리학적 연구」라는 묘한 제목의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자신 18세에 그리스어, 라틴어, 불어, 영어에 능통하고 나중에 스페인어와 이탈리아어를 구사할 만큼 충분한 천재였는데도 말이다. 답이 안 나온다[25] 오토 바이닝거, 임우영 옮김. (지식을만드는지식, 2012) 성과 성격, 836. 임우영 해설. "비트겐슈타인은 바이닝거의 장례식 때 마츨라인스도르프 공동묘지까지 따라가기도 했는데, 평생 그의 추종자로 머물렀다."[26] 후에 아돌프 히틀러는 어느 날 저녁에 친구인 디트리히 에카르트가 자기에게 확신하기를 "유대인은 다른 민족들이 해체되는 것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을 알고 자살한 오토 바이닝거 말고는, 인정할 만한 유대인이 없다"고 말했다고 술회했다.[27] 한스 켈젠, 심현섭 옮김. (법문사, 2010) 켈젠의 자기증언, 49. "...나는 얼마 후 곧 대부분의 강의 듣는 것을 포기하고 철학저서를 읽기로 했다. 이런 방향전환은 나보다 두 살 위의 친구인 오토 바이닝어에 의해 힘얻게 되었다. 이 친구는 당시 자신의 박사학위테마를 연구했고, (중략) 바이닝어의 인격과 그가 남긴 저작의 큰 성공은 학문하겠다는 나의 결심에 본질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바이닝거의 몇 장 없는 사진 중 하나인 벤치에 앉아 주먹 쥔 사진은 그가 켈젠에게 "활기 있는 휴식을 위해" 선사한 것이라 한다. (같은 책, 146).[28] 앨런 재닉·스티븐 툴민, 석기용 옮김. (이제이북스, 2005) 빈, 비트겐슈타인, 그 세기말의 풍경, 288~289.[29]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김양순 옮김. (동서문화사, 2008) 논리철학논고/철학탐구/반철학적 단장, 593~594.[30] 이 시기에 종종 러셀의 친구인 수학자 필립 저데인에게 자신이 해결한 방법을 보내기도 했다[31] 비트겐슈타인은 문제는 형이상학적인 것이며 사물이 아니라 사실을 부각시키려고 했다[32] 이때의 일화에 대한 러셀의 육성을 유튜브를 통해 들을 수 있다. #[33] 그는 기묘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생각은 특이해 보였어요. 학기 내내 나는 그가 천재인지 아니면 단순한 괴짜인지 판단하지 못했어요. 그는 케임브리지에서 지낸 첫 학기가 끝나갈 때쯤 내게 와서 이렇게 말하더군요. "내가 단순한 멍청이인지 아닌지를 말해주실래요? 내가 단순한 멍청이라면 그냥 비행사나 되렵니다. 그게 아니라면 철학자가 될 거고요." 나는 그에게 어떤 철학적 주제에 관해서 방학 중에 뭔가를 써와보라고 얘기했습니다. 써오면 그가 단순한 멍청이인가 아닌가를 말해주겠다고 하면서요. 다음 학기가 시작되자마자 그는 내가 제시했던 것을 완성시켜서 가져왔더군요. 나는 딱 한 줄만 읽고 바로 그에게 말했습니다. "안 돼, 자네는 절대로 비행사가 되어서는 안되네." 그리고 그는 비행사가 되지 않았지요.[34] 그 때문에 사도회에 선출되지는 못했다[35] 이 때 수혜자로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 오스카 코코슈카, 아돌프 로스, 헤르만 바그너, 카를 달라고, 테오도어 해커 등이 있다.[36] 그러나 케임브리지의 사람들과 완전히 연을 끊은 것은 아닌데 논리학 연구를 하며 러셀, 무어 등과 계속해서 편지를 주고 받았다[37] 노먼 맬컴, 이윤 옮김. (필로소픽, 2013) 비트겐슈타인의 추억, 14~15.[38] 버트런드 러셀, 송은경 옮김. (사회평론, 2003) 러셀 자서전 - 상, 481~482.[39] 1913년부터 1914년 6월경까지 비트겐슈타인은 노르웨이 스키올덴 지방의 우체국장 집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디자인한 별장은 완성된 직후 전쟁이 발발하는 바람에 사용되지 않다가 1936년부터 1937년까지 「철학적 탐구」의 앞부분을 차지하는 내용을 작성하기 위해 사용된다. 이 별장은 1957년 허물고 다시 지어졌으며 현재는 장소 자체가 많이 훼손된 상태다.[40] 비록 그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것 같지만.[41] 재미있는 점은 이 기간 동안 그는 역설적이게도 가장 반기독교적이라 할 수 있는 니체의 저서도 읽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반그리스도」를 읽었는데, 니체의 적대감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은 것은 맞지만 근본적인 신앙심에는 변함이 없던 것으로 보여진다. (평전, 229)[42] 이 기간 중 프레게와 논리학에 관한 편지를 주고 받는다[43] 윌리엄 바틀리 3세, 이윤 옮김. (필로소픽, 2014) 비트겐슈타인 침묵의 시절 1919~1929, 42, 43.[44] 같은 책, 47.[45] 같은 책, 19, 20.[46] 버트런드 러셀, 송은경 옮김. (사회평론, 2003) 러셀 자서전 - 상, 565~566. "……위대한 사람들이 그러하듯 그에게도 약점이 있었다. 1922년, 신비주의에 한창 열을 올리던 그가 내게 똑똑한 것보다는 착한 것이 낫다고 아주 진지하게 호언장담하던 시절, 나는 그가 말벌을 무서워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스부르크(오스트리아 서부의 도시)에서 나와 함께 숙박 시설에 묵을 때도 벌레들이 무서워 한 곳에서 이틀을 자지 못했다. 나는 그때 러시아와 중국을 여행한 후여서 그 정도 사소한 문제에는 단련이 되어 있었으나, 세상에 어떤 것을 준다 해도 벌레를 진득하니 참고 살 수는 없다고 하는 그의 확신에는 도무지 단련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한 작은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는 분명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벌레 공포증이라……?[47] 그러나 바틀리는 "이 시기에 그가 철학을 포기했다가 갑자기 -예컨대 네덜란드의 수학자 브라우어의 1928년 3월의 강의에 참석한 후- 다시 철학에 복귀했다고 가정하는 사람들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라고 주장하며 이를 부인한다. 윌리엄 바틀리 3세, 이윤 옮김. (필로소픽, 2014) 비트겐슈타인 침묵의 시절 1919~1929, 81.[48] "……마르그리트는 비트겐슈타인이 그 당시 조각했던 흉상의 모델이 되었다. ……스튜디오에서 제작된 흉상은 엄밀히 마르그리트의 초상화는 아니다. 왜냐하면 비트겐슈타인의 관심이 주로 태도와 얼굴의 표정에 있다 하더라도, 그가 포착하려고 했던 것은 그녀의 실제 표정이 아니라 그 자신 창조하고 싶었던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완성된 흉상은 그레틀에게 선사되어 쿤트만가세의 저택에 (중략) 전시되었다." (평전, 350, 351).[49]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이윤 옮김. (필로소픽, 2015) 비트겐슈타인의 인생 노트, 184.[50] '이것은 빨갛다'는 주장은 단순히 독립적인 게 아니라 '이것은 파랗지 않다'를 함축한다는 얘기.[51] 재밌는 점은 일본 영화 「박사가 사랑한 수식」(감독 코이즈미 타카시)에서 한 학생이 "수학도 인간이 만든 것 아닌가요?"라고 묻자 작중 화자로 등장하는 선생이 "아닙니다. 수학은 인간이 있기 전부터 있었습니다."라고 하디와 비슷하게 말한다는 점이다.[52] 수학자인 힐베르트가 "아무도 우리를 칸토어가 창조했던 천국으로부터 쫓아내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 말을 두고 한 말[53] 전체 영화는 http://www.youtube.com/watch?v=DdmOmirM_SU 이곳에서 볼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이 정확히 베티 허튼의 어떤 영화를 보았는지는 알 수는 없으나 그의 생전에 촬영된 필름 중 하나이다. 시기상 베티 허튼의 단편 영화나 「The Fleet's In(1942)」, 「Star Spangled Rhythm(1942)」 등을 보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 중 「Star Spangled Rhythm(1942)」은 유튜브에서 볼 수 있다.[54] 여담이지만 나중에 아이리스 머독은 치매로 고생을 겪는데 그 일화가 영화 「아이리스(2001)」로 나온다.[55] "……포퍼라고?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사람이군." 데이비드 에드먼즈, 존 에이디노, 김태환 옮김. (옥당, 2012) 비트겐슈타인과 포퍼의 기막힌 10분, 345.[56] 칼 포퍼, 박중서 옮김. (갈라파고스, 2008) 끝없는 탐구, 203.[57] 데이비드 에드먼즈, 존 에이디노, 김태환 옮김. (옥당, 2012) 비트겐슈타인과 포퍼의 기막힌 10분, 360.[58] 같은 책, 377.[59] 권석만. (학지사, 2013) 현대 이상심리학, 372.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위대한 창조적 업적을 남긴 천재 중에는 정신분열증적 증상을 지녔던 사람들이 많다. 대표적 학자로는 Issac Newton, Ludwig Wittgenstein, John Forbes Nash 등이 있으며……."[60] 파울 파이어아벤트, 정병훈 옮김. (한겨레출판사, 2009) 킬링 타임, 143~145.[61]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김양순 옮김. (동서문화사, 2008) 논리철학논고/철학탐구/반철학적 단장, 579.[62] 히틀러는 군복무를 했을 때도 전우들과 안 어울리곤 했다. 단지 당시는 그냥 군복무가 아니라, 전쟁 중이라 갑자기 전투를 할 때도 있고, 전투에서 누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열악한 환경이라 집단에 못 낀다고 왕따 같은 걸 당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고, 히틀러가 시키는 건 잘한다는 이미지와 오스트리아 출신인데 프로이센을 위해 자원했다는 고평가가 섞여 있어서 부사관들이 항상 좋게 쳐줬었다. 그래서 사병들 사이에서도 히틀러의 사회성에 비해 고문관처럼 군생활을 못한다고 평가하는 이미지나 무시하는 분위기도 없었기에 내무반 내 문제는 없었다. 의외로 '조용하고 내성적인데, 군인으로 할 건 하는 애'라는 이미지였다. 게다가 히틀러는 그래도 중학교는 나온 사람이라 지금으로 치면 사병 중에서 대학생 출신 사병정도의 대우였다[63] 한국으로 치면 비트겐슈타인은 재벌2세, 히틀러는 고위 공무원(세무서장) 아들이었다. 물론 히틀러는 귀족이나 전통 부잣집이 아니니 중상류층 정도로 볼 수도 있으나, 아버지가 귀족여자랑 결혼했다가 사별했기에 집이 귀족들 사는 저택이었고 아빠가 뇌물을 자주 받은 건지 경제적으로 상당히 부유했다. 히틀러의 청춘기 행적 중에는 가난한 사람들을 깔보거나, 아니면 동정하여 동전이나 음식을 동냥해줬던 흔적들이 꽤 있다. 자신을 상류층이나 부유층으로 생각하고 살았던 것.[64] 재밌는 점은 히틀러도 비트겐슈타인처럼 다른 학생들에게 존칭 표현을 썼다는 것이다. 다음의 책을 참고. 요하임 페스트, 안인희 옮김. (푸른숲, 2009) 히틀러 평전1, 62. "어쨌든 그는 실업학교에서 '친구도 동료도 없이' 지냈고, 같은 나이 또래의 친구들과 함께 임시로 하숙하고 있던 늙고 못생긴 제키라 부인 집에서도 그는 무뚝뚝하고 조용하게 홀로 지냈다. 당시 그와 함께 지냈던 사람 중 한 명은 이렇게 회상하였다. '하숙생 다섯 명 중에서 누구도 그에게 가까이 접근하지 않았다. 우리들 사범학생들끼리는 당연히 서로 '너'라고 불렀지만 그는 우리에게 '당신'이라는 말을 썼다. 그리고 그 점이 이상하게 여겨지지도 않았다."[65] 독일어의 존댓말과 우리말의 존댓말, 독일 포함 유럽과 한국의 사제지간 문화(중등교육 기준)는 느낌이 좀 다르긴 하지만, 일단 당신이 중고딩이었을 때 같은 반 아이 중에 애들에게 전부 존댓말을 쓰고 다니는 아이가 있었다면 어떤 느낌이었을지 상상해 보자. 솔직히 이건 동양이랑 아예 다른 문화라 동급비교는 곤란하다 혼다 토오루?,프리저? 존댓말항목에서 보듯, 동양문화권에서도 어느정도 면식이 있고 동등한 관계에서 존댓말을 쓰는 것을 화자가 나와 거리를 두려는 의도로 생각하기도 한다. 근데 이것도 성인사회 기준이고, 미성년자의 경우 다른 학교 학생만 아니면 동급생끼리는 거리가 먼 친구에게도 반말을 한다. 참고로 독일어의 존댓말은 우리말의 존댓말처럼 상대방을 높여 주고 자기를 낮춘다는 느낌보다는 상대방과 격식을 차리기 위해 거리를 떨어뜨려 둔다는 느낌이 강하다. 사실 위에서 나온 한국고등학교의 예보다 정확한 예를 현대 한국에서 찾자면 중고교가 아니라 딱, 대학생인데 만학도인 것도 아니고 고졸 후 입학해 나이, 학번, 전공이 모두 같고 자주 보는 학교친구들에게 계속 존대말을 하는 정도의 느낌이다. 이건 한국에도 나름 소수는 있으니 지금도 유럽은 중고등학생 중에 그런 학생들이 실존하니까 가장 유사한 사례다 유럽에서는 프랑스건 독일이건 영국이건 과거부터 학교문화에서 고등학생만(1800년대까지는 초등학교만 졸업해도 사회인 취급하기도 했다) 되어도 성인대우하는 문화(즉 현대 한국으로 치면 대학생 대우하는 문화가) 지금까지 이어져 있어서, 잘 안 지켜질 때도 있으나 대부분 선생님들도 (안 친한, 처음 본) 학생한테는 기초존대하는 게 기본문화고 한국대학에서 교수가 처음 본 학생한테 존대말 쓰는 게 기본인 문화와 같다. 면식과 친분이 생겨야 반말하는데, 좀 거만한 교수들은 처음 본 학생한테 야야 거리면서 보자마자 막 반말 찍찍하다가 뒤에서 학생들한테 욕쳐먹는 식... 유럽 고등학교(중등교육 후기 과정)도 이와 똑같은 문화라 딱 이느낌이다., 학생들도 선택 수업을 하므로 처음보는 애가 있으면 존대하는 것에 대해 이상한 걸로 생각하는 경우가 없다. 이것도 한국대학에서 대학생들끼리 문화와 같다 대신 존대말의 정도 자체가 동양보다 매우 약하다. 존댓말이라는 개념이 아니라 공적 접대용 언어 개념 유럽은 유급문화도 흔하니까 뭐... 단지 면식이 생기고도 그걸 너무 오래 이어가면 문제가 되는 정도일 뿐. 한국처럼 같은 중고등학생까지 성인이 아닌 것으로 보는 학교문화라, 같은 학년 학생임이 확인되면 처음봐도 반말을 안 하는 게 더 이상한 학교문화와는 토대가 다르다. 유럽 고등학교도 담임선생님 개념은 있으나, 어디까지나 대학에서 전공학생을 나눠 학교 생활을 돕는 교수 정도의 포지션이라, 기본적 상담이나 기타 행정적인 것을 위해 존재하는 담임 개념이고, 애초에 1반 2반 담임 이런 개념이 아니라, 특정수의 정해진 학생들의 교내 생활일부를 담당지도하는 선생이다 조례 종례 청소 등을 시키지 않으며, 그 외 한국 고등학교의 담임선생님이 하는 분야들은 다른 담당 선생님들이 각자 따로 맡고 있어서 대신 담임에게 필요한 걸 말하면 담임이 그 담당선생을 소개하는 역할 정도는 한다 한국의 담임선생님과 다르다. 물론 초중학교 정도는 한국과 비슷한 경우도 많다[66] 우측 상단의 아이가 히틀러인 것임은 분명하나 좌측 하단의 아이가 비트겐슈타인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67] 루트비히의 넷째 형의 아들로 광인으로 여겨졌다[68] 토마스 베른하르트, 배수아 옮김. (필로소픽, 2014) 비트겐슈타인의 조카, 89, 91. 강조는 원문. 장르가 자전 소설이기 때문에 픽션인지 실제 있었던 일화인지 확인할 수는 없다.[69]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김양순 옮김. (동서문화사, 2008) 논리철학논고/철학탐구/반철학적 단장, 114.[70] 같은 책, 150.[71] 만약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전기와 후기로 구분하는 것에 회의할 수 있다면 그가 "나의 기본적인 생각은 어릴 때부터 쭉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는 점이다. 만약 실제로 그의 기본적인 생각이 일관적이었다면 전기와 후기의 차이점이 아니라 공통점을 찾아야할지도 모르는 일이다.[72]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김양순 옮김. (동서문화사, 2008) 논리철학논고/철학탐구/반철학적 단장, 94.[73] 아주 대강 말하자면 당위는 사실 한 종류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명제가 사실만을 표현한다고 가정하면 당위는 명제를 통해 표현될 수 없다.[74] 「논고」는 난해한 내용 때문에 출판사가 출판하기를 꺼렸는데, 당대의 유명한 철학자 러셀의 명성에 힘 입어 그의 서문으로 가까스로 출판될 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비트겐슈타인은 러셀의 이 서문이 마음에 들지 않아(그는 러셀이 오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출판을 진지하게 보류할 생각을 했는데, 그런 가운데에도 비트겐슈타인은 자비로 출판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고 한다. 러셀은 서문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신비주의에 대해서 불만을 표시했다. 러셀은 비트겐슈타인 사후 "……비트겐슈타인과 그의 모든 추종자들이 나의 해설을 싫어했다는 것, 출판업자들이 나의 해설이 들어가야만 「논고」를 출판하겠다고 하자 비트겐슈타인이 마지못해 동의했다는 사실을 고려"해 이 서문을 「논고」에서 뺄 작정이었으나 알프레드 에이어가 서문이 「논고」를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하며 "……비트겐슈타인이 생전에, 다른 사람이 자신에 관해 글을 쓰면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고 늘 불평했기 때문에 그의 추종자들도 그의 말을 흉내내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해 그대로 두게 된다. <버트런드 러셀, 송은경 옮김. (사회평론, 2003) 러셀 자서전 - 하, 405, 406.> 그러나 저자 본인이 서문에 불만을 표시했는데 후대의 편집자들이 이를 더 중요하게 고려하지 않고 그대로 놔둔 점은 조금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75] "……그리고 웅성대거나 시끌시끌한 소리 말고는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은 세 단어로 말할 수 있다."라는 퀴른베르거의 말을 「논고」의 모토로 삼았다. 거추장스러운 형이상학적 사변들을 제거하겠다는 의지로 팽창주의적 진리론 보다는 축소주의적 진리론을 지향한다고 볼 수 있다.[76] 모토에 이어서 비트겐슈타인은 머리글에서 "사고에 한계를 그으려 한다."고 천명하고, 그 한계는 오직 언어에서만 그어질 수 있으며, 그 한계 건너편에 있는 것은 그저 난센스라고 밝힌다.[77] 아사다 아키라, 이정우 옮김. (새길, 1995) 구조주의와 포스트 구조주의, 184. "ᆢ준엄하기 짝이 없는 체계를 구축해 보인 비트겐슈타인ᆢ" 아사다 아키라는 이 책에서 데리다의 해체주의나 논리실증주의나 모두 상품화되어 자본주의의 소비 회로에 갇혀버린다며 '유희의 시대'의 무차별적ᆞ무자비한 소비구조의 강력한 파괴력을 역설했다.[78]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이영철 옮김. (책세상, 2009) 논리-철학 논고, 141. 부록 참고.[79] E. -M. Lange, Ludwig Wittgenstein[80] Ludwig Wittgenstein: 'Logisch-philosophische Abhandlung' , UTB-Schöning, Paderborn, 1996 참고.[81] 마르틴 하이데거, 이선일 옮김. (한길사, 2005) 이정표2, 99, 103, 104. 강조는 원문 및 나무위키 편집자.[82] 아즈마 히로키, 조영일 옮김. (도서출판 b, 2015) 존재론적 우편적, 271~272. 강조는 원문. 젊은 시절의 아즈마 히로키는 둘 중 하이데거 편에 기울어져 있다.[83] 같은 책, 278.[84] 조지 버클리, 문성화 옮김. (계명대학교 출판부, 2010) 인간 지식의 원리론, 69~71, 75.[85] 박일호. (네이버 캐스트, 2010) 존재하는 것은 지각된 것이다.[86] 루이스 캐럴, 마틴 가드너 주석, 최인자 옮김. (북플리오, 2010) Alice, 269. 러셀은 루이스 캐럴의 이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평한다: "철학적인 견해로 보면 대단히 교훈적인 논쟁이기는 하지만, 만약 웃기게 쓰이지 않았더라면 사실 읽기 무척 괴로웠을 것이다."[87] 조지 버클리, 문성화 옮김. (계명대학교 출판부, 2010) 인간 지식의 원리론, 135~141.[88] 같은 책, 325. "……전능한 정신의 편재와 성스러움 그리고 정의의 철저한 감각에 의해 관통되고 계몽된 영혼이 자기 법칙의 무자비한 훼손을 고집한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 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눈이 도처에서 선과 악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하느님이 우리가 가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 하고 우리를 보호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에게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준다는 것에 대해서, 하느님은 우리에게 현재하고 우리의 가장 내적인 사상을 알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가장 절대적이고 가장 직접적으로 하느님에 의존해 있다는 것에 대해서, 이러한 중요한 점들에 대해서 완전하고 의심할 바 없는 확신에 도달하기 위하여, 우리는 진지하고도 끈기 있게 심사숙고해야만 한다."[89]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김양순 옮김. (동서문화사, 2008) 논리철학논고/철학탐구/반철학적 단장, 674.[90]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이영철 옮김. (책세상, 2009) 논리-철학 논고, 144~145. 부록 참고.[91] 이와 같은 생각은 과도기(「청색책·갈색책」으로 대표되는 시기)에 부정된다[92] 이에 대해서 박정일 씨는 "사실상, p라는 요소 명제는 p ∨ p, p & (~p ∨ p), p ∨ (p ⊃ p) 등과 동치이므로, 그 요소 명제에는 ~, ∨, & 등과 같은 논리적 상항들이 포함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고 말하며, 김양순 씨는 "요소명제-부정 '~', 논리합 '∨', 논리곱 '·' 또는 '(x)'나 '(∃x)'등의 논리기호를 모두 포함하지 않는 형태로, 이름의 배열로서 나타낼 수 있는 명령을 '요소명제'라고 부른다. 요소명제를 부정하거나 논리정항에서 접속함으로써 복합적인 명제가 만들어진다."고 말한다.[93]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이영철 옮김. (책세상, 2009) 논리-철학 논고, 36. 옮긴이 주.[94]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김양순 옮김. (동서문화사, 2008) 논리철학논고/철학탐구/반철학적 단장, 97.[95] (평전, 372~373). 원문은 다음의 주소에서 볼 수 있다. http://philosophy.uchicago.edu/resources/files/Julian%20Bell%20-%20An%20Epistle.pdf 마지막에 줄리언 벨은 이 풍자가 비트겐슈타인 개인을 공격하기 위해 지어진 것이 아니며,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와 철학적 업적을 공격하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저 비트겐슈타인의 도덕과 예술에 대한 관점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96] 썩은 사다리는 밟고 올라갈 수 없다.[97] 로저 화이트, 곽강제 옮김. (서광사, 2011)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론》 이렇게 읽어야 한다, 268~291.[98] 이길용. (책밭, 2014) 에바 오디세이, 106~112.[99] G. E. M. 앤스콤. 비트겐슈타인의 제자로서도 유명하지만 본인 스스로도 분석철학계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철학자로서, 특히 행위, 의도, 1인칭 등에 대한 논의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100] "무릇 진보라는 것에는 실제보다도 훨씬 더 위대하게 보이는 일면이 있다."라는 네스트로이의 말을 인용했다. 그의 현대 문명에 대한 비관적인 자세로 볼 때 자신의 전기 사상과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 대한 총평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다[101] 프랭크 램지와 피에로 스라파에 대해 감사의 말이 적혀 있다. 언젠가 피에로 스라파와의 대화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전기의 사상인 그림이론을 주창하면서 명제는 명제가 기술하려는 것과 동일한 논리적 형식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스라파는 턱을 손가락 끝으로 쓰다듬으며 "그러한 논리적인 형식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었고 이는 비트겐슈타인으로 하여금 새로운 관점으로 사물을 보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는 머리글에서 자신의 글에 불만족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인다.[102] 그러나 가라타니 고진은 이러한 일반적 해석에 반기를 들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라타니 고진, 김재희 옮김. (한나래, 2002) 은유로서의 건축, 214~215. "……비트겐슈타인의 유명한 정의, '한 단어의 의미는 언어에서의 그 사용이다'라는 말은 의미의 거부로 이해되어서도 안 되고, 또 의미를 화용론적으로 보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도 안 된다. 오히려 그것이 제시하는 바는, 우리가 말의 쓰임새나 규칙을 아는 것은 실천을 통해서지 이론을 통해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비록 내가 어떤 외국어의 규칙들을 안다고 믿어도 타자가 그것을 인정해주기 전까진, 나는 내가 그것을 실제로 실천적으로 알고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 그리고 내가 비록 규칙에 맞게 우리말을 하지만 내가 그 규칙을 명백하게 아는 건 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 규칙을 따르는 것이다. 결국, 비트겐슈타인이 그토록 집요하게 하고자 했던 것은, 타자와의 관계에 본래부터 달라붙어 있던 비대칭성을 실증해 보이는 것이었으며, 그와 동시에 그 비대칭성을 무시하는 사고 방식에 대해서 비판을 가하는 것이었다."[103]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김양순 옮김. (동서문화사, 2008) 논리철학논고/철학탐구/반철학적 단장, 294.[104] 같은 책, 429.[105] 리차드 로티, 박지수 옮김. (까치글방, 1998) 철학 그리고 자연의 거울, 125. "비트겐슈타인이 두 종류의 '적의' -하나는 사밀성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직접성에 대한 것이다- 를 분명히 가지고 있었다는 점은 스트로슨이 강조한 바 있다. 내 생각에 후자의 적의는 결정적으로 중요하지만, 전자의 적의는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인식론적 통찰은 그러한 적의에 사로잡히지 않고도 가능하다……."[106]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코라 다이아몬드 엮음, 박정일 옮김. (사피엔스21, 2010) 비트겐슈타인의 수학의 기초에 관한 강의, 209~210. "우리는 어떤 한 체계에서 모순을 발견할 수 있나? ……혹자는 '어떤 체계에서 모순을 발견하는 것은, 사정이 다르다면 건강했을 신체에서 어떤 세균을 발견하는 것과 같이, 전체 체계나 신체가 병들었음을 보여준다.'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전혀 그렇지 않다. 모순은 어떤 것도 심지어 거짓되게 만들지 않는다. 그것이 거짓말하게 놔두라. 거기에 가지 말라."[107] 이승종. (문학과지성사, 2002) 비트겐슈타인이 살아 있다면 - 논리철학적 탐구, 329.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은 철학이 수학에 근거를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역도 마찬가지이고요."[108]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이기흥 옮김. (아카넷, 2013) 심리철학적 소견들2, 옮긴이 해제.[109] 같은 책, 350.[110] 같은 책, 350~351.[111] 이 절의 내용은 이영철 교수의 『확실성에 관하여』 옮긴이의 말에서 발췌한 것이다.[112] Duncan Richter. (Continuum, 2004) Wittgenstein at His Word, 147. "……Among his favourite composers were J.S. Bach, Beethoven, Brahms, Bruckner, Haydn, Labor, Mendelssohn, Mozart, Schubert and Wagner. If his sounds too much like a list simply of famous composers, it might be helpful to add that he did not like the 'worthless' and 'bad' music of Mahler. See Culture and Value p. 67e (from 1948)."[113] 윌리엄 바틀리 3세, 이윤 옮김. (필로소픽, 2014) 비트겐슈타인 침묵의 시절 1919~1929, 77~78.[114] 같은 책, 42, 78.[115]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김양순 옮김. (동서문화사, 2008) 논리철학논고/철학탐구/반철학적 단장, 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