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널드 레이건

최근 수정 시각:

파일:나무위키+유도.png   2003년에 취항한 미국의 항공모함 '로널드 레이건함(CVN-76)'에 대한 내용은 니미츠급 항공모함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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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조지 워싱턴

존 애덤스

토머스 제퍼슨

제임스 매디슨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제임스 먼로

존 퀸시 애덤스

앤드루 잭슨

마틴 밴 뷰런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윌리엄 해리슨

존 타일러

제임스 포크

재커리 테일러

제13대

제14대

제15대

제16대

밀러드 필모어

프랭클린 피어스

제임스 뷰캐넌

에이브러햄 링컨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앤드루 존슨

율리시스 S. 그랜트

러더퍼드 B. 헤이스

제임스 가필드

제21대

제22대

제23대

제24대

체스터 A. 아서

그로버 클리블랜드

벤저민 해리슨

그로버 클리블랜드

제25대

제26대

제27대

제28대

윌리엄 매킨리

시어도어 루스벨트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우드로 윌슨

제29대

제30대

제31대

제32대

워런 G. 하딩

캘빈 쿨리지

허버트 후버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제33대

제34대

제35대

제36대

해리 S. 트루먼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존 F. 케네디

린든 B. 존슨

제37대

제38대

제39대

제40대

리처드 닉슨

제럴드 포드

지미 카터

로널드 레이건

제41대

제42대

제43대

제44대

조지 H. W. 부시

빌 클린턴

조지 W. 부시

버락 오바마

제45대

도널드 트럼프

※ 22.24대 미합중국 대통령인 그로버 클리블랜드는 한차례 건너뛰고 연임한 사례의 대통령이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주요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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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Seal_of_the_39th_Governor_of_California.png 미국 캘리포니아 주지사

32대

38대

39대

팻 브라운

로널드 윌슨 레이건

제리 브라운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주요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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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스미소니언 재단의 잡지, 스미소니언 매거진이 “미국사 가장 중요한 100인의 인물”을 선정했다.
미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들을 뽑았기 때문에 미국인이 아닌 사람들도 많다.
미국 역사를 총망라해서 뽑았기 때문에 부정적인 인물들도 있다.

개척자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헨리 허드슨

아메리고 베스푸치

존 스미스

조반니 다 베라차노

존 뮤어

메리 웨더 루이스
윌리엄 클라크

새커거위아

키트 카슨

존 웨슬리 파월

닐 암스트롱

혁명가 & 저항가들

마틴 루터 킹

로버트 E. 리

토마스 페인

존 브라운

프레드릭 더글러스

수전 B. 앤서니

W. E. B. 두 보이스

테쿰세

타탕카 이오타케

엘리자베스 케이디 스탠턴

말콤 엑스

대통령들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율리시스 S. 그랜트

우드로 윌슨

에이브러햄 링컨

제임스 매디슨

앤드루 잭슨

시어도어 루스벨트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로널드 레이건

조지 W. 부시

첫 여성들

포카혼타스

안나 엘리너 루스벨트

힐러리 클린턴

마사 워싱턴

오프라 윈프리

헬렌 켈러

소저너 트루스

제인 애덤스

이디스 워튼

베티 데이비스

사라 페일린

범법자들

베네딕트 아놀드

제시 제임스

존 윌크스 부스

알 카포네

빌리 더 키드

윌리엄 M. 트위드

찰스 맨슨

와일드 빌 히콕

리 하비 오즈월드

러키 루치아노

존 딜린저

예술가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앤디 워홀

프레데릭 로 옴스테드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

잭슨 폴록

존 제임스 오듀본

조지아 오키프

토머스 에이킨스

토마스 내스트

알프레드 스티글리츠

안셀 애덤스

종교인들

조셉 스미스 주니어

윌리엄 펜

브리검 영

로저 윌리엄스

앤 허치슨

조너선 에드워즈

L. 론 허버드

엘런 화이트

코튼 매더

매리 베이커 에디

빌리 그레이엄

팝 아이콘들

마크 트웨인

엘비스 프레슬리

마돈나

밥 딜런

마이클 잭슨

찰리 채플린

지미 헨드릭스

마릴린 먼로

프랭크 시나트라

루이 암스트롱

메리 픽포드

제국-건설자들

앤드루 카네기

헨리 포드

존 데이비슨 록펠러

존 피어폰트 모건

월트 디즈니

토머스 에디슨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

하워드 휴즈

빌 게이츠

코르넬리우스 밴더빌트

스티브 잡스

운동선수들

베이브 루스

무하마드 알리

재키 로빈슨

제임스 네이스미스

아놀드 슈워제네거

타이 콥

마이클 조던

헐크 호건

짐 도프

세크리테어리엇

빌리 진 킹

출처

Congressional Gold Medal
의회 명예 황금 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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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6년

1777년

1779년

1781년

조지 워싱턴

소장 호레이쇼 게이츠

소장 앤서니 웨인

사령관 헨리 리 3세

준장 대니얼 모건

1781년

1787년

1800년

1805년

1813년

소장 너새니얼 그린

존 폴 존스

대령 토마스 트럭스턴

준장 에드워드 프레블

대령 아이작 헐
대령 스티븐 디케이터
대령 제이콥 존스

1813년

1814년

대령 윌리엄 베인브리지

대령 올리버 해저드 페리
대령 제시 엘리엇

대위 윌리엄 워드 버로우즈 2세
대위 에드워드 맥콜

대령 제임스 로렌스

대령 토머스 맥도너
대령 로버트 헨리
대위 스티븐 카신

1814년

1814년, 1848년

1814년

대령 루이스 워링턴

대령 존스톤 블레이클리

소장 제이컵 브라운

소장 윈필드 스콧

소장 피터 부엘 포터
준장 엘리저 윌락 리플리
대령 제임스 밀러

1814년

1815년

1816년

소장 에드먼드 P. 게인즈

소장 알렉산더 마콤

소장 앤드루 잭슨

대령 찰스 스튜어트

대령 제임스 비들

1818년

1835년

1846, 1847년, 1848년

1847년

1854년

소장 윌리엄 해리슨
주지사 아이작 셸비

대령 조지 크로간

소장 재커리 테일러

소머스 호의 장교 및 승무원 구출

중령 던컨 잉그함

1858년

1863년

1864년

1866년

1867년

프레데릭 로즈

소장 율리시스 S. 그랜트

코닐리어스 밴더빌트

로버트 크레이튼
에드윈 J. 로우
조지 C. 스투퍼

사이러스 웨스트 필드

1867년

1871년

1873년

1874년, 1904년

1883년

조지 피바디

조지 F. 로빈슨

대령 자레드 크랜달 그 외

존 혼 주니어

존 폭스 슬레이터

1888년

1890년

1900년

1902년

1909년

조셉 프란시스

수석 엔지니어 조지 W. 멜빌 그 외

중위 프랭크 H. 뉴콤

중위 데이빗 H. 자비스
소위 엘스워스 P. 버트홀프
사무엘 J. 콜 박사

라이트 형제

1912년

1914년

1915년

1928년

대령 아서 로스트론

폴 H. 크라이봄 그 외

로물로 세바스티안 나온
에두아르도 수아레즈 무히카

찰스 린드버그

로알 아문센
움베르토 노빌

1928년

1929년

1930년

1936년

토머스 에디슨

최초로 성공한 대서양 횡단 비행사들

소령 월터 리드

준장 리처드 에벌린 버드

링컨 엘스워스

1936년

1938년

1939년

1940년

조지 코한

리처드 올드 리치 부인
안나 불리니

하워드 휴즈

목사 프란시스 퀸

윌리엄 시노트

1942년

1945년

1946년

롤랜드 바우처

1939-1941년 미국 남극 탐험대 멤버들

미합중국 육군 원수 조지 C. 마셜
미합중국 해군 원수 어니스트 킹

미합중국 육군 원수 존 조지프 퍼싱

준장 빌리 미첼

1949년

1954년

1955년

1956년

1958년

앨번 W. 바클리

어빙 벌린

조너스 소크 박사

남북 전쟁의 참전 용사들

준장 하이먼 리코버

1959년

1960년

1961년

1962년

로버트 고다드

로버트 프로스트

토마스 안소니 둘리 3세

밥 호프

샘 레이번

1962년

1968년

1969년

1973년

1977년

미합중국 육군 원수 더글러스 맥아더

월트 디즈니

윈스턴 처칠

로베르토 클레멘테

매리언 앤더슨

1978년

1979년

중장 아이라 C. 이커

로버트 F. 케네디

존 웨인

벤 아브러조
맥시 앤더슨
래리 뉴먼

휴버트 호레이쇼 험프리

1979년

1980년

1982년

미국 적십자

케네스 테일러

1980 미국 하계 올림픽

베아트릭스 여왕

대장 하이먼 리코버

1982년

1983년

프레드 워링

조 루이스

루이스 라머

레오 라이언

대니 토마스

1984년

1985년

해리 S. 트루먼

레이디 버드 존슨

엘리 비젤

로이 윌킨스

조지 거슈윈
아이라 거슈윈

1986년

1987년

1988년

나탄 샤란스키
에비탈 샤란스키

해리 차핀

에런 코플런드

메리 래스커

제시 오언스

1988년

1990년

1991년

앤드루 와이어스

로렌스 록펠러

대장 매튜 B. 리지웨이

대장 노먼 슈워츠코프

대장 콜린 파월

1994년

1996년

1997년

랍비 메나헴 멘델 쉬니어슨

루스 그레이엄
빌리 그레이엄

프랭크 시나트라

마더 테레사

바르톨로메오스 1세

1998년

1999년

넬슨 만델라

리틀록 9인

제럴드 포드
베티 포드

로자 파크스

테오도르 헤스버그

2000년

존 오코너

찰스 먼로 슐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로널드 레이건
낸시 레이건

나바호 족 코드 토커

2002년

2003년

대장 휴 쉘튼

토니 블레어

재키 로빈슨

도로시 하이트 박사

조셉 디레인 [br[ 해리 & 엘리자 브릭스
레비 피어슨

2004년

2006년

마틴 루터 킹
코레타 스콧 킹

터스키기 에어맨

14대 달라이 라마

바이런 넬슨

노먼 볼로그 박사

2007년

2008년

마이클 데바키 박사

아웅산수지

콘스탄티노 브루미디

에드워드 브룩

아메리카 원주민 코드 토커

2009년

2010년

여성 공군 서비스 조종사

닐 암스트롱
버즈 올드린
존 글렌

아널드 파머

무함마드 유누스

100연대 보병 대대
442 연대 전투단
군사 정보국

2011년

2012년

2013년

몬트포드 포인트 해병대

2001년 9월 11일 미국에 대한 테러 공격으로 사망한 남녀들

라울 발렌베리

애디 매 콜린스
데니스 맥네어
캐롤 로버트슨
신시아 웨슬리

제1 특수임무단

2014년

둘리틀 특공대 멤버들

미국의 공군 에이스들

제2차 세계 대전 민간 항공 초계 부대 멤버들

시몬 페레스

모뉴먼츠 맨

2014년

2015년

2016년

제65 보병연대

잭 니클라우스

셀마 몽고메리 행진

제2차 세계 대전 필리핀인 참전 용사들

OSS

2017년

밥 돌

파일:external/images.huffingtonpost.com/2016-07-06-1467846954-9119239-reagan.jpg

미국의 제40대 대통령

본명

로널드 윌슨 레이건 (Ronald Wilson Reagan)

출생

1911년 2월 6일, 미국 일리노이주 탬피코

사망

2004년 6월 5일 (향년 93년 120일), 미국 캘리포니아 주 벨에어

국적

미국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US_flag_48_stars.svg.png

직업

배우정치인

학력

유레카대학교 경제학 학사

배우자

제인 와이먼[1], 낸시 데이비스 레이건

자녀

모린, 마이클, 크리스틴[2], 패티, 론

종교

개신교 (장로회)[3]

신체

185cm

정당

공화당

주요
경력

미국노동총연맹 산하 영화배우협회 회장 (1959년~1969년)
제33대 캘리포니아 주 주지사 (1967년~1975년)
미국 제40대 대통령 (1981년 1월 20일 ~ 1989년 1월 20일)

서명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17px-Ronald_Reagan_Signature2.svg.png


1. 개요2. 생애3. 정책과 성향4. 은퇴 이후5. 평가
5.1. 긍정적인 평가
5.1.1. 미국에 활기를 불어넣다5.1.2. 공산주의를 세상에서 제거하다
5.2. 부정적인 평가
5.2.1. 인권5.2.2. 부패 사건들
5.3. 논란이 되는 평가
5.3.1. 정치적 분야
5.3.1.1. 긍정적 평가5.3.1.2. 부정적 평가
5.3.2. 군사, 외교적 분야
5.3.2.1. 긍정적 평가5.3.2.2. 부정적 평가
5.3.3. 경제적 분야
5.3.3.1. 긍정적 평가5.3.3.2. 부정적 평가
6. 대한민국일본과의 관계7. 말, 말, 말8. 마거릿 대처와의 비교9. 여담10. 대중매체에서의 모습11. 둘러보기

1. 개요[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Official_Portrait_of_President_Reagan_1981.jpg

The Great Communicator (위대한 소통가)[4]

로널드 윌슨 레이건. 전직 유명 영화배우로 미국의 40대 대통령에 최고령의 나이로 올랐지만 옛 미국이 숭상했던 전통적인 가치에 뿌리를 둔 젊은 낙관주의로 가득찼던 인물. 그가 어제 이 세상을 떠났다.

- 2004년 6월 6일, 그의 서거 소식을 전한 뉴욕타임스 기사.

미국 제40대 대통령. 공화당이 배출한 대통령 가운데 많은 인기를 누리는 대통령 중 한 사람으로, 에이브러햄 링컨, 시어도어 루스벨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와 함께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현재까지도 공화당과 그 지지자들의 정신적 지주에 근접한, 보수의 화신같은 존재이다.[5] 영화배우 출신 미국 대통령이기도 하며 알츠하이머 병에 걸려 서거한 지도자로 기억된다.

2. 생애[편집]

파일:external/coolaggregator.files.wordpress.com/reagan-1.jpg

배우시절 독일 국방군 육군 보병 을 연기한 모습.

일리노이주의 작은 도시인 딕슨에서 아일랜드계 구두방 외판원의 아들로 태어났고 그곳에서 자라났다. 어린 시절 가족 및 지인들은 그를 꼬마 네덜란드인 같다고 해서 "Dutch"라고 불렀다. 당시에는 잘 먹지 않던 내장을 정육점에서 개먹이라고 속이고 얻어다가 먹는게 일상이었을 정도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의 아버지는 자주 외지로 나가 구두 영업을 했는데 추운 겨울날 여관에서 잘 돈도 아까워서 차 안에서 떨면서 자다가 몸이 상해서 늙으막에 잦은 심장발작에 시달렸을 정도였다.

십대 때부터 왕성한 활동을 했는데, 강가에서 아르바이트로 안전 요원 일을 한 것부터 시작해 고등학교에서는 학생회 회장, 학교연감 편집장, 수영부 주장, 미식축구팀 주전, 육상부 주전, 농구부 응원단 멤버를 동시에 맡았다. 또한 일리노이의 드넓은 평원에서 말 타기를 즐겼다.

역시 일리노이의 작은 대학교 유레카 대학교에 입학해서도 미식축구팀 주전, 수영부 주전[6], 육상부 주전, 학생회 멤버 겸 학생회장, 연극부 멤버, 농구부 응원단장 등을 맡았다.

대학교 졸업 후[7] 라디오 아나운서로 스포츠 중계를 하다가 그를 눈여겨 본 어느 기획사에 의해 영화배우가 되어 여러 영화에 출연했다. 그러나 사실 그가 출연한 영화에서 레이건 본인은 비중이 없는 편이 많다. 유일한 예외라면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B급 영화 《전쟁 포로》. 헌데, 이건 딱 반공물 수준이다(...).[8] 허나 3류 배우라는 이미지가 강하다보니 오해가 있는데, 레이건은 탑급 스타가 아니었을 뿐 대중적 인지도가 이때부터 있던 배우였다. 당장 우리도 활동이 왕성한 조연급 배우의 이름과 얼굴 정도는 많이 알듯이 말이다. 특히 그 배우가 미남에 훤칠하다면 더더욱. 실제로 레이건만한 미남은 할리우드에서도 흔치않아서 비록 레이건 본인이 탑급 스타는 아니었지만 탑급 여배우들에게는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명작영화 《카사블랑카》에서 험프리 보가트 대신 캐스팅 될 뻔도 했었다. 허나 캐스팅되었더라면 대통령 레이건은 없었을 것이라는 게 중론.

오히려 그 시절 레이건은 영화 배우 협회 회장을 지내는 등 정치활동에 집중했고 영화계 내 반공 운동의 선도주자를 달려 배우들의 사상을 FBI에게 일일이 보고할 정도였다. 의회에 증인으로 적극적으로 나서기도. 그래서 성향도 점점 보수적으로 변해 민주당에서 탈당하여 공화당에 입당하였다. 원래는 해리 트루먼을 지지하는 등 민주당 성향이였으나 그의 아내 낸시를 만난 후 점점 보수적인 정치 성향을 띄게 되어 아이젠하워닉슨을 지지하였다. 후에 그의 정치적 변화를 그는 "나는 민주당을 떠나지 않았다. 민주당이 날 떠났다"라고 여러번 설명하기도 했다. 그리고 대통령 재임 시절 야당인 민주당을 불황의 이유로 들며 비판하자, 기자가 "대통령께서도 책임이 있으신 것 아닙니까?"라고 질문을 하니, "네, 저도 오랫동안 민주당원이었으니까요"('Yes, For Many Years I Was a Democrat')라고 응수하기도 했다.

또한 메디케어가 1961년에 시작되자 이는 미국의 자유를 위협하는 법으로 사회주의에 가깝다며 비판을 하기도 했다.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나섰던 베리 골드워터를 지지하는 연설을 하는데 그 연설로 좋은 반응을 얻으면서 전국의 관심을 받았다. 이 연설 하나로 골드워터 진영이 받은 후원금이 백만 달러에 육박했을 정도니 말 다했다.

참고로, 이 연설은 본인이 쓴 것이었다. 애초에 레이건이 골드워터의 지지연설을 하는 유일한 조건으로 붙인 것이 "연설문에 간섭하지 마시오"였다고 한다. 한마디로 자신이 하고 싶은 말 다 하겠다고 한 것. 레이건의 연설은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으나, 골드워터는 대선 때 낙선했다. 하지만 레이건은 공화당 유권자들에게 큰 인상을 남길 수 있었다.

그 후에 캘리포니아 주지사 자리에 도전하면서 두가지 공약을 내세우는데, 첫번째는 '복지 혜택을 받는 백수들을 다시 일하게 만들겠다'와 두번째는 당시 반전운동의 중심지였던 '버클리 대학교에서의 사태를 청소하겠다' 였다. 레이건은 당시 두번 주지사를 지낸 민주당 정치인 팻 브라운을 꺾고 당선되었다. [9] 레이건은 캘리포니아 주지사로써 세금을 올려 재정흑자를 만들었고[10] 버클리 대학교에서의 반전운동을 주방위군을 불러서 맞서기도 하였다. 이때의 강경대응으로 사망자도 발생했고 레이건이 농성을 벌이던 학생들에 동조하는 교수대표단과 험악하게 비난을 주고받는 장면이 생중계로 전파를 탔다.

이 시기 그의 모습은 '전통적인 미국을 지키는 투사'의 이미지였다. 항상 화나있고 상대방을 언변으로 압살하는 인상이었는데, 이런 결기서린 모습이 공화당 유권자들에게는 무너져가는 미국을 지킬 수 있는 보수의 아이콘으로 비춰졌다.

그 당시 미국에서는 베트남전의 장기화에서 비롯된 히피문화와 사회주의, 마약남용 등 전통적인 미국에 반하는 움직임이 들불처럼 번져나가고 있었고, 그렇게 사회적 분열과 국력의 소모를 감내한 보람도 없이 월남의 공산화로 베트남전이 끝을 맺으면서 미국은 패배주의와 자국혐오의 늪에 빠져들고 말았다. 또한 '로 대 웨이드(Roe v. Wade)'라는 역사에 남을 연방대법원 판결이 선고되어 낙태가 헌법적으로 허용되거나 기독교의 영향력이 크게 줄어드는 등 미국은 근본적인 가치관의 변화를 겪고 있었다. 워터게이트로 정국 주도권을 완전히 헌납한 보수주의자들은 이를 무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중에게 친근한 언어와 강단있는 어조로 전통적인 미국을 회복하자고 부르짖는 레이건은 당연히 보수층에서 인기를 끌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레이건의 주 지지층의 입장에서 이랬다는 것이고, 진보진영에서는 레이건을 시대정신에 무관심한 상류층 셀럽 출신의 기득권자로 비판했으며 우리나라에서 쓰는 속된말로 '폴리테이너'라고 봤다. 보수층 중에도 레이건을 생각없이 말만 앞서는 위험한 인물로 경계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또한 정치 스펙트럼으로 보면 레이건은 정신나간 호전광이라고 욕들어먹으며 낙선한 배리 골드워터의 보수주의를 이어받은 강경파 계보에 속했고 당대의 미국은 그런 지도자를 맞을 준비가 안되어있었다. 데이지 걸 참고. 이런 요인때문에 레이건은 대선경선 재수생이었고, 비록 주목을 끌기 시작한 대권 잠룡이기는 했으나 혜성처럼 등장해서 대통령이 된 인물은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캘리포니아 주지사 임기 이후 당시 인기가 별로 없던 현역 대통령 제럴드 포드에게 도전하여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될려고 했다. 현역 대통령이 당 경선에서 떨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11] 포드의 당선이 거의 확실시 되는것 처럼 보였으나 공화당의 보수표를 결집시키며 남쪽과 서쪽에서 승을 거두며 보수 온건 성향을 띄는 포드를 거의 이길뻔 했으나 간만의 차이로 패배했다. 포드는 지미 카터에게 패배하게 된다. 4년후 그는 다시 대통령의 자리에 도전했으며 공화당 경선에서 조지 H. W. 부시를 쉽게 꺾고 공화당 후보로 선출되었다. 결국 포드 - 카터로 이어지는 시기동안 미국이 대내외적으로 거의 그로기 상태에 빠지자 레이건은 인기를 잃은 지미 카터를 쉽게 누르고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당선 당시 만 69세로 당시 대통령 가운데 최고령자이자 이혼 경력이 있던 최초이자 당시에는 유일했던 대통령. 그리고 이 기록 모두를 도널드 트럼프가 깼다.

배우였던 시절에 유일한 히트작이《폭풍우의 청춘》이라는 영화였는데, 레이건 재임시절 이 영화를 반복시청하는 것이 레이건에 대한 충성심의 증표라는 우스개가 있다. 어느 정치인은 무려 60번을 봤다고 유머러스하게 주장했다. 그의 첫번째 아내인 제인 와이먼[12]은 이혼 사유를 묻자 "《폭풍우의 청춘》은 이제 질리도록 봤으니까"라고 했다고 한다. 물론 이건 그냥 하는 말이고 실제 이혼 사유는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얼마못가 병으로 죽게된게 계기였다. 이후 방황하던 와이먼이 동료배우와 바람을 피우며 이혼을 요구해와 레이건은 무척 힘들어했다고한다. 이런 뒷사정이 있어 이혼전력이 레이건에겐 치명상이 아니었던 측면이 있다.

그래선지 레이건은 평생 첫번째 아내에 관한 얘기를 하지 않았다. 간혹 이혼이나 전처가 화젯거리가 되면 정색을 하는 탓에 분위기가 얼어붙었다고. 이혼 후엔 모두가 알다시피 동료 배우인 낸시 데이비스와 속도위반하며 재혼해서 해로하게 된다. 사실 이혼 경력이 있고 속도위반을 한 사람이라 민주당 후보로 나왔으면 보수적인 미국 사회에서 좋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이고 공화당에게 사생활로 공격받았을 거다.

청년시절 딕슨의 로웰 파크에서 인명구조대로 일한 바 있다. 6년간 총 77명의 사람을 구했는데, 말년에 알츠하이머로 기억이 희미해졌을 때도 자신이 당시 사람들을 구조한 기억은 자랑스럽게 회고했다고 한다.

군생활을 1937년 아이오와 주방위군 육군 제332기병연대 예비역 이병으로 시작, 같은 해에 예비역 육군 기병소위가 되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육군 항공대로 전속되어 1945년 12월 9일에 전역했다. 최종 계급은 육군 소령이다.

복무 중 실제 전투에 참여하거나 파병된 적은 없고 주로 국방부 선전 영화를 만드는데 참여했다. 엣지 오브 투모로우의 주인공인 케이지 소령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3. 정책과 성향[편집]

대통령이 된 후 그가 펼친 정책은 미국과 적대하는 국가들에 대한 강경한 대외 정책과[13] 대표적으로는 통화긴축과 감세를 통한 경제 안정화, 그리고 무시무시한 슈퍼무기 개발이 그 주요 골자이다. 레이건은 소련에 대해서 강경한 정책을 펼쳤고 그 결과물이 바로 스타워즈라고도 불리는 우주에서의 전쟁과 지금도 미국이 러시아 등을 견제하는 주요 수단인 미사일 디펜스이다.

레이건의 이러한 성향은 리버테리안 경향이 강한 미국인들의 성격에 가장 걸맞는 대통령이였다. 베트남전 이후로 패배감에 사로잡혀있던 미국인들에게 미국에 대한 자신감과 그에 기반한 패권주의, 낙관주의를 불러일으켰다.

경제 정책의 경우 그 유명한 레이거노믹스. 감세, 규제철폐, 작은 정부라는 3개의 핵심 가치를 내걸었다. 또한 큰 정부에 대해 기본적으로 불신하는 신자유주의자였다. 그러나 레이건은 군비지출로 재정적자를 늘렸고, 약속했던 만큼 정부 규모를 줄이지도 못했으며 감세 정책도 그 자체만으로는 생각보다는 큰 효과를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정부지출로 경기를 부양시켰다는 해석을 하는 입장에서는 레이건을 케인지언, '군사적' 케인지언이라고 본다.

사실 어디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서 갈리는데, 지출만 놓고보면 레이건은 케인지언이 맞다. 그러나 가령 폴 볼커의 정책만 보더라도 케인지언들이 싫어하는 통화주의에 기반한 개념이었다. 레이건이 인플레이션을 잡는데 주력한거나 큰 비중을 둔 공급위주정책도 엄밀히 말하면 케인지언적인 접근은 아니었다.

어찌됐건 그가 케인지언이건 아니건 간에 중요한 것은 말라죽어가던 미국의 경제를 살렸다는 것. 오죽하면 '레이건이 실제로 정책적으로 한건 없지만 낙관주의와 자신감을 불러일으키는 레토릭 측면에서 큰 일을 했다'고 보는 이들도 있을 정도.

또한 레이건은 배우 출신답게[14] 위트있는 말을 매우 잘해서 국민들에게 공감을 얻어내는 능력이 대단한 인간미로 승부할 줄 아는 정치인이었다. 대통령 임기 이전인 1976년 뉴욕 타임스의 러셀 베이커는 그에게 위대한 소통가라는 수식어를 붙인 바 있다. 대통령 임기가 시작된 이후에도 자신의 장점을 잘 살려 토요일 대통령이 직접 자신의 생각을 밝힌 라디오 국정연설[15]을 생방송으로 진행해왔으며 특히 취임 후 첫해 무려 7회에 달하는 TV 국정연설을 해왔다. 이러한 매스미디어를 적극 앞세워, 자신의 장기인 위트넘치는 화술으로 재선 당시 압도적 지지율로 임기를 연장시키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1984년 대선 당시 경쟁 후보였던 민주당의 월터 먼데일[16]을 상대로 무려 49개주에서 승리를 거두는 압승을 기록했다. 승리를 거두지 못한 곳은 먼데일의 고향미네소타와 골수 민주당인 워싱턴 D.C(먼데일이 85%(!) 득표). 선거인단 수로 따지면 525 대 13이다. 먼데일은 최초의 여성부통령 후보인 제럴딘 페라로까지 앞세워 진보적 가치를 증명하려고 했지만, 오히려 중도층의 반감을 사서 역사적인 패배를 당했다. 이후로도 상상을 초월한 압도적인 패배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고 한다.

참고로 먼데일과 레이건의 2차 대선토론은 미국 대선토론 역사상 명장면 중 하나이자 레이건의 입담을 나타내는 예시로 꼽힌다. 사회자가 레이건보고 너무 고령이라 직무수행에 차질이 있지 않겠느냐는 질문을 하자 "전 나이를 가지고 문제를 삼지 않을 것을 이 자리에서 약속드립니다. 상대 후보가 너무 젊고 경험이 부족하다는걸 절대 정치적으로 공격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재치있게 받아친 것.[17]

좌중은 웃음바다가 됐고 먼데일도 웃을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이 순간 자신이 선거에서 졌다는 걸 예감했다고 한다. 그래서 토론끝나고 자기 부인에게 가서 "여보, 아무래도 선거 끝난거 같아"라고 했다고.

그나마 레이건이 60% 득표를 넘기지 못한 데에는 1982년에 발발한 포클랜드 전쟁 당시 레이건이 너무 노골적으로 영국편을 들자 이에 반발한 히스패닉 탓이 좀 있다. 먼데일은 미네소타에서 간신히 4천표 차(0.18%)로 이겼는데 히스패닉이 없었다면 뒤집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레이건은 미국 50개 주에서 모두 이길 뻔 했다(...) 당시엔 공화당을 파란색으로 표시하는 경우가 많아서, 레이건은 "수영장 대통령"이란 별명을 얻었다.

이런 그의 높은 인기에 힘입어 1986년에는 레이건의 3선을 노리고 대통령 출마 3번 이상을 금한 미국 수정 헌법 22조를 폐지하자는 주장이 공화당 의원들에 의해 미국하원에 제출되었다. 물론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없었고 레이건 본인도 개헌에는 찬성하지만 자신은 그 혜택에서 제외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어서 유야무야되었지만.

그러나 레이건 집권기는 고위공직자들의 만연한 부패, 범죄가 판치는 길거리로 얼룩져있기도 하였으며, 심각한 재정적자와 양극화, 러스트 벨트의 형성이 시작되는 등 결코 낭만적이지만은 않은 시기이기도 했다. 잘 알려지지 않았던 매사추세츠의 젊은 마이클 듀카키스가 현직 부통령 조지 H.W 부시에 맞서 나름의 선방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였다.

4. 은퇴 이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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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공식석상에서 찍힌 마지막 사진.

1996년 7월 당시 모습.

2001년 2월 90세 생일 당시 아내와 함께.

이후 레이건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각종 재단을 세워 후원활동을 하며 인생의 대부분을 보냈는데, 1994년에 찾아온 알츠하이머 병은 그의 인격 자체를 붕괴시켰다. 여느 치매 환자와 같았다. 워낙 고령에 정신적 문제를 수반하는 건강문제가 평소에도 있었던 탓에 무려 현대 미국 보수주의 진영과 공화당의 정신적 지주인데도 생각보다 퇴임 후 활동은 적었다.

레이건이 알츠하이머 투병을 하며 가장 슬퍼했던 때는 더 이상 을 탈 수 없다는 의사의 진단을 들었을 때라고 한다. 생애 단락에서 나왔듯 그는 유년기를 일리노이 주의 드넓은 평원에서 말타면서 보냈고, 이후에도 틈틈히 말타기를 즐겼는데, 더 이상 못하게 되었으니... 결국 눈물까지 흘렸다고 한다.

막판에 가서는 거의 어린아이 수준의 인지능력으로까지 떨어져서 본인미국 대통령이었던 것도 떠올리지 못하였고, 그렇게나 아꼈던 부인 낸시 레이건도 못 알아볼 정도였다고 한다. 특히 2003년 겨울 이후로는 걷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고, 깨어있는 때도 드문 상태일 정도로 병세도 심하게 악화되었다고도 한다. 그래도 임종 직전에는 낸시와 눈을 마주치며 교감한 후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이후 2004년 여름, 자택에서 만 93세 4개월을 일기로 사망하였다. 사망 당시 기준으로는 역대 대통령 중 최장수였다.[18]

그의 알츠하이머 치료를 위해 이제껏 낙태를 결사 반대해 온 레이건 측이 냉큼 태아를 연구재료로 이용하는 것에 찬성했다. 마이클 무어가 이것을 비꼰 바 있다[19]. 다만, 당시 대통령으로 재임 중이던 조지 워커 부시 측은 이를 반대했는데, 이로 인해 낸시 레이건과 두고두고 서먹한 관계가 되었다는 비화가 있다. 낸시 레이건은 레이건의 치매 간병을 그가 눈을 감을 때까지 손수 도맡은 것으로 유명했다.

미국의 최고령 전직 영부인이었던 낸시 레이건도 장수하였다. 2016년 3월 6일, 94세를 일기로 울혈성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5. 평가[편집]

5.1. 긍정적인 평가[편집]

5.1.1. 미국에 활기를 불어넣다[편집]

"많은 미국인들은 6,70년대의 혼란상과 불어만 가는 정부규모가 통제범위를 넘어섰다고 느꼈습니다. 레이건은 그 사람들이 원하던 것을 잘 짚어냈어요. 언제부턴가 미국에서 사라졌던 투명성과 낙관주의, 역동성과 기업가정신을 그들은 원했던거죠."
- 버락 오바마


워터게이트와 베트남 전쟁, 카터의 무능으로 혼란에 빠진 미국을 안정시켰으며 미국의 국력을 다시금 전세계에 과시했다.

"이봐 LBJ, 오늘은 몇명의 젊은이를 죽였나"라는 구호가 유행하고, 현직 대통령이 사임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고, 레임덕에 빠진 대통령이 자기 국민들에게 "지금 경제가 어려운건 너희들의 의식이 썩어서 그렇다"고 호통치는 혼란하고 절망적인 6,70년대를 레이건은 토마스 페인의 말마따나 "우리(미국인)가 세상을 다시 만들 수 있다"라는 낙관주의로 극복해내며 80년대를 열었다.

5.1.2. 공산주의를 세상에서 제거하다[편집]

레이건 독트린으로 인해 당대 공산-사회주의 나라들을 억압하여 자본-민주주의로 변화시켰다.

5.2. 부정적인 평가[편집]

5.2.1. 인권[편집]

니카라과에서 테러와 학살을 자행하던 우익 민병대 '콘트라'를 몰래 지원한 이란 콘트라 사건이 대표적이지만 임기 초에도 엘 살바도르 군을 지원해 800여 명의 시민이 학살당하는 걸 그대로 방조하거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백인 정권을 지원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남아프리카의 인종주의 정권에 대한 제재 법안이 상하원을 통과하자 거부권을 행사하기도 했다. 물론 미 의회는 다시 투표해서 통과시켰다.

자국민의 인권도 후퇴시킨 측면이 있는데, 안보를 이유로 미국인에 대한 도감청을 늘린 점이나 마약과의 전쟁을 하면서 흑인 사회를 게토화시켰다는 비판을 받는 점이 그것이다. 정작 CIA가 비행기로 코카인을 실어와 흑인 사회를 현재의 마약소굴로 타락시켜버린 것도 레이건이라 앞뒤가 안맞기에 더 욕을 먹는다.

또한 감옥을 민영화해버렸다. 정부 지출을 줄인다는 명목으로 한 건데 재정 측면으로는 효과가 어느정도 있었던건 사실이나 문제는 감옥의 주목적인 '교정'은 완전히 실패해버렸다. 사기업이 감옥을 운영하다보니 열악한 수감환경이 큰 문제가 되었고, 무엇보다도 수용자가 없어서 감옥이 망하면 안되니까 경범죄를 저질러도 감옥으로 집어넣는 풍조가 생겨났다. 또한 마약과의 전쟁과 맞물려서 마약 관련 사범들의 수용률이 대폭 증가했다. 물론 그 주요 대상자는 만만한 흑인이나 히스패닉. 이는 당연히 재범율 증가로 이어져 오늘날까지 미국 사회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마약관련 초범자가 중형을 살고 나와서 완전히 인생이 망가져 손도 못쓰는 마약중독자로 추락하거나 경범죄 저질렀다가 감옥가서 흉악범이 되서 나온다거나 등등... 거기에 80년대까지만 해도 일선 경찰력이 많이 썩어있던 상황이라 소위 dirty cop들이 비백인 인구를 대상으로 온갖 구실을 잡아 체포하거나 증거를 조작하는 일도 꽤 있었다. 지금의 무법천지인 흑인, 히스패닉 사회와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미국의 교도소의 막장 상황은 레이건 정부때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이렇게 감옥에 간 수감자들이 생산하는 재소자 생산품들은 미국산업을 이끄는 큰 노동력이 되가고 있는데(prisons for profits / 영리목적 교도소) 이는 로널드 레이건이 그토록 부르짖고 이용해먹은 '미국의 자유주의 신념'과 완전히 상반되는 행태이다.

당장 굉장히 저렴한 노동임금으로 생산되기 때문에 멀쩡한 자유 미국인들의 노동력이 경쟁에서 도태되어 더 낮은 임금에 혹사되는 결과를 낳게 되는데다 이런식의 노동력 활용은 그렇게 비난하던 소련 공산권의 수인부대와 다를바 없기 때문이다. 뭣보다 자유시장경제체제의 옹호를 부르짖으면서 자유시장경제를 왜곡하는 것 부터가 언어도단이다.

또한 낙태에 대한 반대입장을 견지한 결과 소위 '뒷골목 낙태'[20]를 늘렸다. 미국은 낙태가 합법적인 국가이다.

당시 유행하던 에이즈에 대한 대응은 방치에 가까웠다. 정권 말기에 가서야 잠깐이나마 관심을 보였고 그때까지는 공식석상에서 단 한번도 언급한 적이 없다. 이런 행태는 기독교 복음주의 보수들의 공통점인데, 에이즈를 통상적인 질병이 아니라 '사회적 질병'으로 보는 희한한 관점 때문이다. 이들은 에이즈를 문란한 생활로 인한 신의 징벌이라고 여기며 바늘 소독 등 에이즈를 막을 수 있는 예방 조치들조차도 모두 신의 섭리에 거스른다며 거부한다. 한마디로 '혼인한 부부끼리 아이를 가질 목적으로만 관계하면 되는데 그렇게 안하고 요상한 짓을 하니까 하나님이 벌주시는거다라'는 입장. 참고로 역시 기독교 우파를 텃밭으로 삼고 정치를 하고 있는 마이크 펜스도 인디애나 주지사 시절 이런 행태를 보여 비판받았다.

5.2.2. 부패 사건들[편집]

레이건 정권의 모든 범죄자들을 모아놓고 찍은 사진을 보기 전까지는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한 장소에 모여있는걸 보지 못했어! 그래, 지금까지 225명이나 되지. 225명의 레이건 정권 사람들이 사임했거나, 잘렸거나, 체포됐거나, 기소됐거나, 유죄평결을 받았거나, 법이나 공직자 윤리규정을 어겼더군!


H.U.D.(주택도시개발부)의 장관을 비롯한 공화당 인사들이 빈민주택공공사업을 자기들 배채우는 목적으로 이용한 사건이 대표적이다. 공공 주택사업을 자기들과 친한 사업가들에게 용역주는 대가로 돈을 받아먹은 것. 역대 최대의 H.U.D. 스캔들로 불렸다. 이 일로 H.U.D. 장관은 기소위기를 맞고, 내무부 장관은 무려 24건의 중범죄로 실제로 기소되었다.

이 밖에도 EPA(환경보호청), 미 국방부 등에서 고위공직자들이 자금을 유용하거나 기밀을 빼돌리는 등으로 사익을 취했다. 물론 레이건 본인은 이란 콘트라 사건때와 같이 '난 모르는 일'이라고 죄다 선을 그었다. 이런 레이건의 태도를 비꼬는 당시의 SNL 스킷도 있다. '레이건:흑막'이 제목으로, 겉으로는 헐헐거리는 인자한 나이든 대통령을 연기하지만 사실은 뒤에서 모든 스캔들을 배후조종하는 흑막이라는게 그 내용. 당시에 나름 큰 반향을 일으켰다.



물론 레이건 본인이 사리사욕을 채웠다는 것은 아니고 많은 이들은 레이건의 '무관심함'이 정권 내의 부패가 창궐하는걸 방치했다고 본다. 레이건은 오랜 시간을 두고 형성된 자신의 정치적 소신과 국민에게 그것을 전달할 수 있는 소통능력이 있었을 뿐이었지 구체적인 철학이나 정책적인 전문성이 없었다. 거기에 고령에 건강도 좋지 않았고 정권 말기로 갈수록 치매의 전조도 나타나 의사소통을 잘 못하거나 국정을 파악하지 못하는 일도 잦았다. 평소 독서도 거의 안했고 재임중에도 자주 휴가를 가거나[21] 회의시간에 조는건 예사였다.

그 공백을 틈타 낸시 레이건이 점술가 등 자신의 친구들을 끼고 국정에 영향을 끼치기도 하고 레이건의 측근들이 적당히 해먹기다가 걸리기도 했던 것이다.

5.3. 논란이 되는 평가[편집]

5.3.1. 정치적 분야[편집]

5.3.1.1. 긍정적 평가[편집]

당장 현대 공화당은 레이건의 정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선 경선 토론때마다 대부분의 후보들이 "내가 바로 진정한 레이건의 후계자"라고 서로 누가누가 더 레이건을 존경하는지 경쟁을 벌인다. 그만큼 레이건이 제시한 보수주의의 방향;"미국은 신이 점지한 특별한 국가다"라는 패권주의, "우리는 뭐든 해낼 수 있다"는 낙관주의, "큰 정부를 믿지말라"는 신자유주의는 레이건 정부이래 30여년 동안의 미국 보수주의의 진로를 결정지었으며, 앞으로도 상당 기간동안 결정지을 것이다.

또한 낙태 반대를 거듭 천명하고 전통적 사회가치를 수호하겠다는 입장을 강경하게 하면서 기독교세를 보수우파 쪽으로 대거 전향시켰다. 그 덕에 현재 미국의 바이블벨트는 죄다 공화당 강세 지역. 이렇듯 레이건이 규정해놓은 새로운 보수주의는 세계적인 뉴라이트 운동의 시발점이 된다.

당장 45대 미국 대통령이자 공화당 주류와는 거리가 멀었던 도널드 J 트럼프만 해도 레이건 신드롬의 수혜자라고 볼수 있을 정도인데, 트럼프 캠프의 상징인 "다시 미국을 위대하게"는 로널드 레이건이 사용한 슬로건을 그대로 다시 차용한 것이었다. [22]

5.3.1.2. 부정적 평가[편집]

"레이건과 부시 행정부는 공적 의무보다 사적 이익을, 공공선보다 정경유착을, 노동과 가족보다 부와 명성을 중시했습니다. 80년대는 탐욕과 이기심, 무책임과 무절제, 방기의 전성기였습니다."
- 1991년 빌 클린턴


미국은 수정헌법 1조를 통해 신정분리 원칙을 확고히 하고 있는 나라이나 레이건은 기독교 복음주의 진영을 정치화시켜서 선거에 이용했다. 또한 수정헌법 개정을 통한 낙태 금지, 학교에서의 기도 부활 등을 공개적으로 발언하는 등 정책적으로도 이를 위협했다. 종교와 정치를 섞는 순간 골아픈 일이 일어나는데, 더이상 정치가 토론이나 타협의 영역이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미국은 딴 나라들처럼 종교로 치고박고 하지 말자는게 토마스 제퍼슨이 수정헌법 1조를 쓴 이유다. 레이건 시기에 일어난 미국 정치의 극단화 현상은 도널드 트럼프 집권과 함께 현대 미국의 양대 진영 분단을 깊어지게 한 원흉으로 지목받고 있다.

네오콘, 신자유주의자들을 키워주고 미국의 점잖은 보수의 씨를 말렸다는 비판도 있다. 민주당 만큼은 아니어도 복지에 신경쓰고 환경에 신경쓰던게 공화당의 주류였는데, 그 대표주자였던 닉슨이 시원하게 몰락하고[23] 민주당은 눈치볼 것 없게 되고 하다보니 레이건과 같은 강경보수가 그 틈을 타 전면에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또한 역시 정치의 양극단화라는 맥락으로 비판받는다. 현대 공화당은 90년대 중반의 의정 운동, 2000년대 후반의 티파티 운동 등 여러번의 자체 검열을 통해 레이건이 설파했던 이념을 따르는 무리들이 차지하게 된 것이 현실이다.

노동정책 경시와 제조업 아웃소싱, 불법 이민자 대사면[24] 등의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미국 제조업의 고용불안과 러스트 벨트 형성에 기여하여 전통적인 중산층이 몰락하는 단초를 제공했다. 그간 미국의 뼈대였던 제조업 종사+저학력+백인 중산층의 몰락으로 미시건, 오하이오 등이 궤멸적 타격을 입고 거의 공동화 되었는데, 2천년대 후반 들어 이 주들의 백인 슬럼가들을 중심으로 아편과 신종마약들이 유행하여 큰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그 외에는 언행이 너무 교양없고 무식하다는 지적도 받았다. 대통령이 되어서도 퀴클리라는 점성술사의 조언에 따라 공식일정을 바꾸고 자신이 본 영화의 내용과 현실을 착각하거나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진지하게 여러번해서 측근들을 당황하게 만드는게 예사였다. 가령 그는 ICBM은 발사 뒤에 취소할 수 있는 기능이 있다고 주장하거나 화성인의 침공에 맞서 소련과 미국이 힘을 합쳐야 할거라고 걸핏하면 이야기하는 통에 콜린 파월을 아연실색하게 하다못해 "또 저러시네"라는 반응이 나올 정도로 만들어버렸다. 다시 강조하지만 농담이 아니라 진지하게 말한 것. 그 때문에 레이건의 전기작가가 "대통령의 측근들조차도 대통령의 판단 능력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평할 정도였다.

그의 대국민 소통정책은 우리말로 '쇼통'이라고도 비판받았는데 그도 그럴게 레이건 정권의 백악관 공보실이 제작해 배포한 영상은 무려 이전 정권 다섯 개 분량을 다 합친 것보다 많았으며, 레이건 본인 또한 이 영상들을 제작하고 그걸 찍기 위해 연기하는데에 상당한 시간을 들였다고 한다.

여담으로 현대 미국을 좀먹고 있는 주범으로 여겨지는 양대 전쟁인 마약과의 전쟁, 테러와의 전쟁을 시작한 장본인이다.

5.3.2. 군사, 외교적 분야[편집]

5.3.2.1. 긍정적 평가[편집]

레이건의 군비 강화 정책은 소련과의 군비 경쟁을 불러일으켜 안 그래도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침체되어가던 소련의 경제를 더욱 악화시키게 해 결국 동구권 붕괴를 불러왔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있다. 이런 평가는 특히 동유럽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지난 2011년 레이건 탄생 100주년 기념 당시 미국에서는 조촐한 행사로 차분하게 기념한 반면 동유럽에서는 수도에 동상을 세우거나 그의 이름을 딴 거리를 만드는등 대대적인 행사를 벌였다.

2005년에 공개된 기밀문서들에 의하면, 레이건은 잘 알려진 고르바초프와의 관계 외에도 그의 전임자들인 브레즈네프, 안드로포프, 그리고 체르넨코와의 개인적인 대화에 매우 신경을 많이 썼다. 이를 바탕으로 단순한 '냉전 전사'(Cold Warrior)가 아닌, 대화로 냉전을 풀어가려는 레이건의 모습을 재탐구하는 책들이 씌여졌다. 관심이 있다면 자세한것은 제임스 그레이엄 윌슨(James Graham Wilson)이 지은 《즉흥적인 대화의 승리》(The Triumph of Improvisation)와 제임스 맨(James Mann)이 지은 《로널드 레이건의 반란》(The Rebellion of Ronald Reagan)을 참조해보자. 해당 문서들은 National Security Archive에 온라인에 공개되어있다.

그리고 이 양반, 아이슬란드 레익캬빅에서 하마터면 소련고르바초프와 함께 모든 핵무기들을 영구폐기시킬뻔했다.[25][26] 다만 레이건이 우주에서 대륙탄도미사일에 레이저빔(...)쏘는 SDI(Strategic Defense Initiative) 기술 개발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고르바쵸프도 쉽사리 핵무기를 내려놓지 못했다.[27] 당시 대화내용을 보면 레이건이 관련 기술들을 소련에게 넘겨주겠다고 제안했으나, 고르비로서는 믿을수가 있나.

재밌게도 소련 망국의 마지막 지도자인 고르바초프는 노벨 평화상을 받았으나 소련을 무릎꿇려서 냉전을 끝내고 핵전쟁 공포를 종결시키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레이건은 끝내 받지 못하였다. 레이건은 힘에 기초한 평화를 자신의 평생 안보 독트린으로 삼았던 인물인데, 레이건 시대에 앞서서 비슷한 기조를 추진해서 제2차 세계대전을 종결시켰던 윈스턴 처칠 역시도 노벨 평화상을 받지 못하고 노벨 문학상을 받았었다. 대선 후보 시절 '전쟁광'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소련에 대한 강경파에 속했으며, 소련-아프간 전쟁을 지원하고 이란 콘트라 사건에 책임이 있는 등의 행보가 원인이 됐지 않았나 짐작될 뿐이다. 한국과의 관련해서는 김대중이 사형 집행 당하는 것을 막고 6월 항쟁 시기에는 전두환 정부의 군 병력 출동을 막았다.

5.3.2.2. 부정적 평가[편집]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였던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미국의 스타워즈 계획을 뚫기 위해 들어가는 비용은 미국의 스타워즈(SDI) 계획에 들어가는 비용의 단 10분의 1이면 충분하다는 결론을 얻었을 정도로 미군의 군비 지출은 낭비적인 측면이 컸다. 미국내에서는 이를 영화배우를 대통령으로 뽑은 결과라는 자조적인 평가도 나온다. 한마디로 쇼에 능했지 디테일에 충실하진 않았다는 것.

그리고 확실히 소련은 군비경쟁 때문에 무너진게 아니라 공산주의의 모순으로 무너진 것이라는 견해가 인류사학적으로 합당한 평가를 받고있다. 다만 이것 말고도 냉전사학계에서 냉전의 붕괴의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소수의견들이 뜨겁게 오가기 때문에 본인 스스로 연구를 해보는걸 추천한다. 레이건 시대의 군비 확장은 이미 지미 카터 때부터 시작되어 왔던 것으로 군비 예산 증가율은 두 대통령의 재임기간 거의 비슷했다. 다만 레이건은 카터때보다 실속이 없었다는 평가를 받지만 말이다. 이렇게 치솟던 군비 지출은 후임인 조지 H.W.부시대에 이르러 정리되기 시작한다.[28]

그리고 임기 초반에 커크 패트릭 독트린이라고 해서[29] 인권외교를 타파한다며 독재정권이라도 반공노선을 걸으면 지원해주는 노선으로 휘귀했는데 미국의 이익에 부합되면 독재정권도 OK!라는 노선을 걸었기 때문에 당연히 많은 욕을 들어먹었다. 물론 브라질,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과테말라 등 중남미 전역이 민주화의 길로 접어들고, 고르바초프가 집권하자, 이 같은 노선은 효율성을 잃게 되면서 노선을 수정하기는 했다만 그럼에도 엘살바도르나 니카라과에서의 우익단체에 대한 지원을 끊은것도 아니었다.

또한 니카라과콘트라 반군 지원과 이 과정에서 이란과 커넥션이 있었다는 게 밝혀진 이른바 이란-콘트라 사건으로 외교 정책에서 지나치게 강경하고 비인도적이다라는 욕을 먹었다. 이게 언뜻 보기보다 심각한 이유는 의회가 '콘트라 지원하지 말라'고 법을 통과시켰는데도 이걸 무시하고 행정부가 폭주를 했기 때문. 거기에 레이건은 '이란과 인질을 대가로 무기를 거래한 적이 없다'고 TV 담화를 했는데, 이게 완전한 거짓말이었던 것이 불과 몇 달만에 탄로가 난 것이다.

"몇 달전에 저는 여러분들에게 인질과 무기를 교환한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제 마음과 선의는 여전히 그것이 진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만, 사실과 증거들은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결국 몇 달만에 이런 궁색한 말로 간접적이나마 자신의 책임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사건으로 미국은 국제형사재판소에서 제소까지 당해 패하는 굴욕을 겪었다. 다만 대통령이 직접 지시를 내렸다는 증거는 나오지 않았고 사건의 주범인 올리버 노스 중령이 청문회에 임하는 자세가 대중의 동정을 사는 등 국민 여론이 "탄핵까지 갈 사안은 아니다" 쪽으로 쏠려서 여차저차 마무리되었다.

또한 그 외 성과를 거둔 정부 정책(소련과의 군축 합의라든가)도 결국 카터 시절에 만들어진 거 레이건이 받아먹은 거 아니냐는 비판이 있다. 비슷하게 이란이 억류하고 있던 미 대사관 직원들이 레이건이 취임하자마자 풀려나서 '레이건은 나약한 카터와는 다르다'라는 국민들의 인식을 공고히 해줬는데, 사실 카터 행정부가 자기들이 퇴임하기 직전까지 끈질기게 협상한 결과물을 레이건이 받아먹은게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카터 시대의 인권, 도덕 운운하는 외교 기조를 유약하다며 비판하며 집권한 것이 레이건과 그와 함께 득세한 네오콘들이었다. 그러나 이렇듯 세세하게 들어가보면 오히려 카터 때의 정책을 리브랜딩만 해서 받아먹은 측면이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레이건의 측근들이 질색하던 카터표 인권 외교도 집권 중후반부터는 슬그머니 꺼내들기 시작했는데, 그때까지 지원해주던 칠레의 피노체트를 옥죄서 퇴진시킨건 카터가 한국의 박정희 정권을 끝낸 것과 거의 판박이였다. [30]

이슬람 반군들에 대한 지원을 시작하면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씨앗을 뿌린 것 역시 퇴임 1년 여 전의 카터 행정부였지만, 레이건은 이 공작을 대폭 확대해서 중동, 아프리카 지역의 (공산) 세속주의 정부들을 속속 무너뜨리고 흔들어댔다. 무자헤딘 지도자들을 백악관으로 불러 "이들은 우리의 건국의 아버지들과 도덕적으로 대등하다"고 치하한 것이 레이건이고, 오사마 빈 라덴에 대한 미국의 최초 지원의혹이 있는 시점도 레이건 시절. 물론 곰덫(Bear Trap)은 효과적으로 작동해서 소련을 빈사상태로 만들고 침몰시키지만 레이건 퇴임 후 10여년 뒤에 미국도 그 덫에 걸리고 만다.

1982년에 벌어진 포클랜드 전쟁에서 어느 쪽을 도와주든 그것까지는 뭐라 할 수 없다 치더라도 지나치게 아르헨티나를 악의 축으로만 매도하고 마가렛 대처항문을 빠는 행보를 보이는 바람에 이러한 행보와 후술할 교도소 민영화로 인해 히스패닉들에게는 완전히 불구대천이 되고 말았다. 참고로 미국이 있는 그 대륙에는 과반수가 히스패닉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레이건의 이런 행보는 반쯤 자충수인 셈이다.

1985년 4월에 2차대전 유럽 전선 종결 40주년을 맞이해 서독을 순방하던 중 나치친위대 전사자들이 묻혀 있던 비트부르크의 묘지를 방문해 조의를 표한 것 때문에 엄청나게 까였다. 레이건은 '그들은 나치의 끄나풀이기는 했지만, 복잡한 정세 속에서 상황 판단을 못한 희생자에 속한다고 생각한다'고 변론하고 일정 중 베르겐-벨젠 강제수용소 방문을 추가하는 것으로 반발을 무마하려고 했지만, 미국 내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은 물론이고 라몬즈프랭크 자파 같은 뮤지션들에게도 각각 'My Brain is Hanging Upside Down (Bonzo Goes to Bitburg)', 'Reagan at Bitburg'같은 노래들로 대놓고 디스당했을 정도.

5.3.3. 경제적 분야[편집]

5.3.3.1. 긍정적 평가[편집]

레이건이 집권을 시작한 시기는 2차 오일 쇼크의 여파로 미국 경제가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였다. 또한 2차 세계 대전 이후, 매년 큰 경기변동 없이 안정적인 성장을 이루었지만 70년대 들어서 세계 대전으로 인한 유효수요가 바닥이 난 상황에서 성장률마저 떨어지게 되었다.

당시 미국 경제는 인플레이션과 경기 침체가 동시에 발생하는 초유의 스태그플레이션을 겪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레이건은 카터 시절 임명된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 폴 볼커의 경제 정책을 끝까지 지지했다. 볼커는 인플레이션 억제를 최우선 목표로 삼고 고금리정책을 유지했다. 문제는 볼커의 이러한 고금리 정책이 단기적으로 엄청난 불황을 초래했다는 점이다[31]. 실업률이 무려 10%를 넘었다.

레이건은 온갖 공격과 위협을 받던 볼커에 대한 신임을 유지하였다. 당시 연준(FRB)은 금리를 21% 까지 끌어올렸는데[32], 이로 인해 단기적으로 경기불황과 자산가치 저하로 많은 기업과 부동산들이 헐값에 매각되었고(당시 엄청난 버블경제를 구가하던 일본이 많이 매수했다), 당연히 레이건 정부에 대한 분노와 볼커에 대한 원망이 하늘을 찌르듯 했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친 끝에 1982년경 인플레이션을 잡는데 성공했고 미국 경제는 안정기로 접어들었다. 레이건 취임 당시 15%였던 인플레이션이 1983년 3%로 급감한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미국은 버블을 방지하고 경제를 구조조정할 수 있었다. 1985년 플라자 합의 전후로 일본에 대해서도 공세적 입장을 유지하며, 이를 바탕으로 클린턴 대통령 시대에 이르러선 역대 최고의 경제호황을 누리게 된다.

5.3.3.2. 부정적 평가[편집]

부두교 경제학(voodoo economics)

- 1980년 대선에서 공화당 대선후보를 놓고 경쟁하던 H.W 부시가 정부규모를 크게 줄이지 않고 감세만으로도 재정흑자가 가능하다는 레이건의 경제정책을 두고 한 말이다.

"노숙인들은 그들의 선택으로 노숙인이 된 것이다."

- 1984년 인터뷰에서 레이건의 발언. '경제적 소외계층'과 양극화에 대한 레이건의 인식을 잘 보여주는 발언이다. [33]


오늘날 미국의 심각한 부채 및 양극화의 후유증의 원인을 기여한 것도 레이거노믹스에 있다는 평가가 있다. 레이건이 비판을 받은 분야중 하나로 안 그래도 많이 들어가는 군비 지출은 당시 감세 정책을 펼치던 미국 정부의 재정에 크나큰 악화를 불러왔다. 레이건 행정부 아래에서 정부 예산은 1년에 2.5%씩 증가했으며, GDP 기준 국가부채 비율은 26%에서 41%로 늘어났다. 또한 지니계수는 0.36에서 0.39로 크게 악화하면서 미국의 급격한 양극화의 시작점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른바 미국 정부의 악명높은 "쌍둥이 적자"(무역 수지와 재정 수지 동시 적자)는 그의 정책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폴 볼커가 시행한 미국 경제의 구조조정은 위에 나왔듯 단기적인 불황을 초래했는데 이때 사라진 일자리 중 대부분이 제조업 분야였고, 이 일자리들은 경제가 회복된 뒤에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고금리로 인해 실업율이 10%를 돌파하고 미국의 농산, 제조업, 자영업 분야가 심대한 타격을 입었으며 투자도 줄어들었다. 또한 달러화의 절상효과가 나타나 일제 상품들의 가격경쟁력이 증가함으로써 제조업 분야에 이중고를 안겼다. 고금리 정책이 끝난 이후 레이건 행정부는 플라자 합의로 이를 해결하려 하지만 미국의 제조업 블루칼라 일자리는 회복되지 않았다.

이후 빌 클린턴 정부에서 NAFTA를 체결하면서 그나마 남아있던 일자리도 멕시코에 빼앗기며 많이 사라져버렸다. 이 NAFTA 또한 레이건 행정부가 협상한 것.

정부 지출은 늘리면서 소득세 최고세율은 70%에서 무려 28%까지 떨어뜨렸는데 이는 당연히 재정적자를 불러 왔고 레이건조차 감세법안 통과 다음 해인 1982년, 그리고 84년에 이러한 감세 정책을 일부 철회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부두교 경제학이라고 논란이 많은 래퍼 곡선을 엄밀히 실증하지도 않고 정책을 밀어 붙였다는 것이 문제였는데 현재 최고소득세율이 70%이니, 최적세율보다 오른쪽에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 속에 엄청난 감세 정책을 추진한 것이다. 그러나 경제 부흥으로 기대되던 세수는 예상과 달리 턱없이 부족했고 결국 재정 균형을 실패하고 만 것이다.

이후 행정부들이 증세를 단행하고[34] 특히 빌 클린턴이 레이건-부시 시절 부풀려진 군비를 긴축하면서 재정흑자를 이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레이건의 열화카피인 조지 W. 부시가 취임 1년만에 감세법안을 통과시키고 이후 9/11 사태와 이라크, 아프간 전쟁으로 군비 지출이 폭발하면서 미국은 지금까지 만성 재정적자 시대를 겪는 중.

금융규제를 풀어 훗날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 기여한 측면도 전임자 카터와 함께 비판받는다. 이는 큰 대가를 치룬 폴 볼커의 구조조정의 의미를 퇴색시키게 되었다.

6. 대한민국일본과의 관계[편집]

전두환박정희의 핵무장 프로그램과 미사일 개발을 중단시키면서 레이건의 대통령 취임 후 최초로 백악관을 방문한 외국 정상이 되었고, 이후로도 여러차례 미국을 방문한 바 있다. 레이건 역시 1983년 미국 대통령으로서 재임시절 방한하는등[35] 찰떡같은 한미공조를 이뤄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전두환의 뒤를 무조건 봐준 것은 아니라서 김대중이 전두환 정권에 의해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하자 전두환 정권에게 압박을 가해 김대중이 사형당하려는 걸 막고 미국으로 망명을 가게끔 도와주었으며(이건 카터의 부탁도 있었다), 결정적으로 6월 항쟁 때에도 전두환 정권에게 압박을 가해 군대가 투입되는 사태가 벌어지지 않게 하면서(일명 레이건 친서 사건), 유혈사태가 일어나는 걸 방지하여 한국이 민주화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최근에 공개된 외교문서를 보면, 전두환 측에서 대한민국 제5공화국 헌법에 대한 공개 지지를 표명해달라고 했지만, 내정간섭을 우려해 거절했다.#

하지만 한국인 최초의 미 국무성 통역가 통 김(Tong Kim, 한국명 김동현)씨의 증언에 따르면 퇴임 이후 알츠하이머 때문에 서서히 기억력이 떨어지고 있었던 레이건은 전두환과 만나는 4번째 회담임에도 불구하고 회담을 30분 남겨둔 브리핑 자리에서 전두환을 기억해내지 못했다. 그러자 다급해진 참모들이 레이건에게 전두환을 "서울에 방문했을 때 (서울에 있는) 학생들을 매우 부정적으로 말하던 사람"이라 설명했다. 레이건은 그때야 비로소 "아, '학생들은 죄다 공산당(빨갱이)'이라고 했던 그 친구!"(...)라며 기억해냈다.

그리고 일본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와 절친했다. 오죽하면 그들이 서로를 불렀던 호칭인 론-야스라는 말이 미일정상간의 우애를 상징하는 관용어로 자리잡았을 정도. 조지 워커 부시고이즈미 준이치로가 그런 관계로 평가받는다.[36]

여담으로 나카소네 총리가 레이건에게 지난 미국 총선 결과가 잘 나왔느냐고 안부를 묻자 레이건이 잠시 굳은 표정을 짓다가 곧 껄껄 웃으며 "아직까지는 문제없다"고 응수했다고 한다. 알고보니 나카소네의 일본식 영어 발음이 L을 R로 소리내는 바람에 레이건은 선거(Election)를 발기(Erection)라고 알아들었던 것.

물론 영어권 사람들이 으레 그러듯, 레이건도 부정확한 영어 발음을 문맥에 맞게 잘 알아들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단지 나카소네 총리의 발음을 가지고 농담을 던졌던 것일 뿐. 다시 말하면 그 정도로 두 정상이 가까웠다는 상징적인 에피소드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두 정상 간의 친밀함에도 불구하고 플라자 합의 등 미국의 대일 통상 압박은 어느 때보다 강했다.

7. 말, 말, 말[편집]

"I now begin the journey that will lead me into the sunset of my life. I know that for America there will always be a bright dawn ahead."
저는 이제 인생의 황혼을 향한 여정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저는 미국이 언제나 빛나는 아침을 맞을 것이라 믿습니다.


자신이 알츠하이머로 투병중인 사실을 국민에게 알리는 편지에서, 레이건이 왜 위대한 소통가라는 별명으로 불리는지 알 수 있는 좋은 예시.

"Mr. Gorbachev, open this gate! Mr. Gorbachev, Tear down this wall!"
미스터 고르바초프, 이 을 여시오! 미스터 고르바초프, 이 장벽을 허무시오!


1987년 6월, 베를린에서 한 유명한 연설. 이 말은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물론 동유럽 공산권의 '철의 장막' 붕괴를 상징하는 말로 잘 알려져 있다. [37]

Trust, but verify
상대를 믿되 반드시 검증하라


원래는 소련의 속담이었는데 레이건이 가져와서 잘 써먹었다. 소련과의 군축협상을 임하는 자세를 설명하는데에 썼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Ronald Reagan? The actor? Then who's the vice president? Jerry Lewis? I suppose Jane Wyman is the First Lady!'
로널드 레이건? 배우? 그러면 부통령은 누구야, 제리 루이스? 그러면 영부인은 제인 와이먼이겠군!


백 투 더 퓨처 中 마티가 과거의 브라운 박사에게 1985년 미국 대통령이 로널드 레이건이라고 하자 브라운 박사가 비웃으면서 한 말[38]

'No wonder your president has to be an actor. He's gotta look good on television.'
왜 대통령이 영화배우여야 됐는지 알겠구나. 텔레비전에서 호감으로 보여야 할테니 말이다.


백 투 더 퓨쳐, 위 대화 이후, 마티가 카메라로 녹음된 방송을 티비로 보여주자 브라운 박사가 감탄하며 하는 말

"여러 분들이 공화당원이기를."


1981년, 존 힝클리 주니어의 암살 시도 후 병원으로 실려가던 도중 응급처치사에게[39]

만약 그들이 빛을 보지 못한다면 그 열기를 느끼게 하라


자신의 감세정책을 지원하기 위해 한 말. 의원들이 감세정책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면 국민 여러분들이 적극적으로 그들에게 압력을 가하라는 뜻이다. 후에는 낙수효과를 뜻하는 상징적인 말로도 받아들여졌다.

  • "불경기란 당신의 이웃이 실직할 때를 말합니다. 불황이란 당신이 실직할 때를 말합니다. 경기회복이란 지미 카터가 실직할 때를 말합니다."[40]

  • "공산주의자는 마르크스와 레닌을 읽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반공주의자는 마르크스와 레닌을 이해한 사람입니다."

  • "자유가 말살되는 데에는 단 한 세대도 걸리지 않습니다. 자유는 우리 후손들에게 혈통을 통해서 유전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유는 쟁취해야하며 지켜야 되고 후손들도 그런 자유를 누리라고 물려주는 것입니다."

  • "급한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날 깨워도 좋소이다. 국무회의 중이라도 얼른 나를 깨워주시오" - 레이건은 국무회의 중에 자주 졸았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본인이 자학개그를 한 것.[41]

  • "경제학자란 현실에서 발생하는 뭔가를 보고 그게 이론적으로 성립할지 여부를 궁금해 하는 사람이다."

  • "제가 보청기를 착용한다는 건 비밀이 아닙니다. 그런데 바로 며칠 전에 갑자기 작동이 잘 안 됐습니다. 알고 보니 KGB가 제 보청기에 도청장치를 했더라고요."

  • 언젠가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남아프리카 공화국데즈먼드 투투 주교의 방문을 받았는데, 투투 주교는 레이건의 면전에서 미국과 레이건의 강경정책을 비판했다. 투투 주교가 돌아간 후 누군가가 "투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묻자, 투투라는 이름의 운율(TuTu)에 맞춰 "So-So(그저 그랬어요)"라고 말해서 좌중이 뒤집어졌다고. 이 일화는 레이건의 장례식날 한 번 더 언급되었는데, 이 때도 폭소가 터졌다. 마지막 가는 날까지 사람들을 웃긴 셈.(...)뼛속까지 개그맨

  • 대통령 후보 시절 카터와 TV토론을 벌였는데, 토론이 끝난 후 참모들이 "처음 토론에 나선 것 치고는 꽤 훌륭하셨습니다."라고 말하자 덤덤하게 "무슨 소리! 나는 존 웨인과 같이 촬영한 적이 있는데!"라고 받아쳤다고 한다. 무명배우인 자신이 존 웨인 같은 대배우와 같이 촬영 할때도 안 떨었는데 카터와 맞서서 덜덜 떨 까닭이 있겠느냐는 농담. 역시 자신이 무명배우였다는 걸 강조한 자학개그이자, 동시에 당시 현직 대통령이었던 지미 카터가 사실 존 웨인보다 못한 인물이라는 식으로 상대를 돌려 깐 것이기도 하다.

  • 카터와의 TV토론 때 카터가 자신을 비판할 때 씨익 웃으면서 "There you go again(또 시작이네요)"라고 받아넘기는 행동이 유명세를 탔다. 당시의 실제 동영상은 여기서 볼 수 있다. 레이건의 이 행동은 토론에서 상당히 초조하고 불안정해 보이는 카터에 비해서 레이건은 상당히 여유있고 위트 있는 사람으로 보이게 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레이건의 뛰어난 이미지 활용을 보여주는 사례.

  • 뉴햄프셔 주에서의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상대방 후보 조지 H. W. 부시의 연설이 끝난후 상대방 후보를 지지하는 탤래그래프 지의 편집장인 진행자 존 브린이 음향 담당자에게 "레이건씨의 마이크를 꺼버려."라고 하자 "미스터 그린, 이 마이크를 쓰는 비용은 내가 내고 있소."라고 일갈했다. 비용 얘기가 나온 이유는 저 경선토론회를 여는데 들어간 비용을 전적으로 레이건 선거본부에서 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본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말그대로 폭풍간지. 브린을 그린이라고 부른 것은 한마디로 이름도 헷갈릴 정도로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사람이 토론에 감놔라 배놔라 한다는 뜻.

  • ABC뉴스의 샘 도널드슨의 최근 지속 경기침체에 대해 연준의 실수와 국회탓을 하는데 자신의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내가 꽤 오랫동안 민주당원이었기 때문임이라고 받아쳤다(...).[42] 원본

  • 여담으로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최고령에 당선된 대통령이다. 최고령이라 그런지 임기 초부터 건강이 좋지 않아 피부암, 대장 용종 등을 제거하기 위해 심심찮게 수술대를 오르내리며 부통령이 몇시간 단위로 권한대행을 반복했다. 1기 임기부터 KGB의 도청장치 보청기를 끼고 다녔는데 그 보청기가 초대박을 터뜨렸다고. 그리고 알츠하이머 진단은 1994년에 받았지만 아들 로널드 레이건 주니어의 주장처럼 퇴임 이전부터 점점 인지능력 저하의 징조가 보였다는 증언도 있다. 그리고 2016년.....

  • 재선에 도전 중이던 1984년 8월 11일에는 대국민 주례연설 직전 국민 여러분. 저는 방금 소련을 멸망시킬 명령을 승인했습니다. 5분 후에 우리 군의 폭격이 시작될 것입니다라는 흠좀무한 멘트를 남겼다. 사실은 방송 직전에 입을 풀기 위한 조크였고, 실제 방송에도 나오지 않았지만 소련군에서 이 내용을 인지하고 약 30분간 긴급대기 태세에 돌입했다는 후문. 원본

  • 이 위트 있는 레이건도 멕시코에서 어리버리를 탄 적이 있는데, 멕시코 국민들을 상대로 연설을 했는데 그들의 반응은 무덤덤했다. 레이건이 연설을 마친 후 한 멕시코 고위관리가 일어나 스페인어로 연단에서 연설을 했는데 그의 연설에 멕시코 국민들은 박장대소했으며 연설이 끝나자 열화와 같은 박수 갈채를 받았다. 머쓱했지만 당황한 기색을 감추기 위해 레이건도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는데 옆에 있던 멕시코 주재 미국 대사가 이렇게 귀띔했다. "저 사람은 각하의 연설을 통역한 것 뿐입니다."(...) 멕시코인들의 반응이 무덤덤한 이유는 영어를 몰랐기 때문인가

8. 마거릿 대처와의 비교[편집]

신자유주의의 서막을 여는 지도자로서 로널드 레이건과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는 서로 많이 비교된다.

비슷한 시기 영국의 마가렛 대처가 호감도와 평가가 지역 간, 계층 간, 세대 간, 성향 간, 좌우파 간 평가가 너무 극명하고 극단적으로 갈리는데 비하면 레이건에 대한 평가는 갈리긴 하면서도 호감도와 인기는 전반적으로 아주 높은 편이다. 민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레이건에 대해서 호감을 보이는 이들이 적지 않다.

영국은 상원 선거를 따로 치르지 않고, 하원의 권한이 막강하다 보니 마가렛 대처가 별다른 견제를 받지 않고 업무를 수행했던 데 반해서 당시 레이건 정권 당시에 상원은 공화당이 장악했긴 했지만(1986년 중간 선거에선 뒤집혀짐) 하원은 민주당이 우세였기에 정책 수행에 있어서 일정 수준의 견제를 받아서 마가렛 대처보다 온건했다. 실제로 레이건은 당시 민주당 출신 팁 오닐 하원의장과 수시로 전화 통화 및 대화를 하였고 야당인 민주당을 상대로 적극적으로 설득하고 대화하는 자세를 보였다. 뿐만 아니라, 재치있는 언변과 훌륭한 연설을 통해서 국민들에게 정책을 알기 쉽게 설명하고, 능숙한 대화와 소통의 자세를 보였다. 또한 챌린저호 폭발사고 당시에 당일에 챌린저호 폭발사고로 충격을 받은 미국 국민들에게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감동적인 명연설을 하여 큰 지지를 받기도 했다.

한편으로 대처는 집권당의 노선과 맞지 않는다고 지방자치단체들을 박살내고 정적들을 무력화하기 위해 법을 개정했으며, 아파르트헤이트를 공공연하게 두둔하고 남아공에 대한 UN의 경제제재에 상임이사국으로써 반대표를 던지고 넬슨 만델라를 테러리스트라고 비난하였으며 피노체트가 지배하는 칠레에 무기를 판매하고 실각 후 체포된 피노체트의 석방을 강경하게 주장한 데다 북아일랜드에서는 영장도 필요 없이 IRA 소속이라는 추측만으로 바로 사살할 수 있는 shoot-to-kill 정책을 시행하는 등 '선거로 당선된 것 뿐이지, 악명 높은 독재자들과 다를 바 없다'는 악평까지 듣는 심각한 약점들이 다수 있다. 레이건 역시 이란-콘트라 사건의 사례 등에서 외교 정책이 지나치게 강경하고 비인도적이었다거나, 비트부르크 묘지 참배, 대처와 비슷한 남아공 인종주의 정권 비호, 중남미 독재정권 묵인 등 논란거리가 있다.

다만 한국 입장에서 레이건은 김대중의 사형을 막고 미국으로의 망명을 후원하고 6월 항쟁 당시 전두환 정권에 압력을 행사하여 군사력 투입을 막는 등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측면이 있다. 전임자인 지미 카터가 인권 외교를 내세웠지만 1980년 5.18 광주민주화항쟁 당시 희생자를 초래한 것과 대조적이다.

근본적으로는 1980년대 미국 경제가 당시 영국 경제에 비해 분위기가 좋았던 탓도 크다. 일단 미국도 레이거노믹스 초기에는 실업률이 10%를 넘어갔으나, 영국과 달리 1983년을 기점으로 하락하기 시작하였다. 영국은 별의 별 것이 다 국영화되고 국가 보조금으로 연명하고 있었던 탓에 구조조정이 무척 힘들었던 반면 미국은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이 보다 더 뿌리깊은 차이일 것이다. 앞에 써있듯 대처가 독재자 소리를 들을 정도로 워낙 말뿐만 아니라 행동도 강경하기도 했고 레이건같이 유쾌하고 푸근한 미노년 느낌을 주지도 않아서...

레이건의 1981-82 불황이 그의 재임기간 내내 갔었더라면 레이건도 절대 좋은 소리는 못들었을 것이다.

아무튼 레이건의 평가가 보다 긍정적인 것은 전임자인 지미 카터가 사실상 대처 수준의 독설을 미국 국민들에게 퍼부어서 질리게 만들었던 것도 있고 역시 카터가 임명한 폴 볼커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을 유임시켜서 고금리정책을 집행해서 실업률이 초기에 상승하긴 했지만, 부실기업들을 구조조정을 해서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국가경제의 경쟁력을 높였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영국은 경제는 계속 성장하였으나 1987년까지 실업률은 두 자릿수였다. 80년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이 낙관적인 것은 이런 당시의 경제 붐과 무관하지 않다.

9. 여담[편집]

배우 출신답게 인간미로 승부한 정치인이다.


1980년 대선 유세 중 그의 반대자들이 야유를 부리는 통에 연설 진행을 못하자 일갈하는 장면. "Oh, Shut up."

대선당시 TV토론의 수혜를 입었다는 평가가 있다. 당시 레이건은 카터의 공격에 "또 시작이군요." 라는 식으로 여유있게 웃으며 받아쳤고, 이러한 자신있어 보이는 레이건과 뭔가 짜증나 보이는 카터의 모습이 대조적인 이미지로 TV 시청자들에게 어필하여 결과적으로 대선 승리로 이어졌다는 분석이다. 또한 TV연설에서 카터는 "지금 미국의 문제는 국민 너희들이 잘 못해서 그렇다." 라는 '불쾌한 연설(malaise speech)'를 한 데 비해, 레이건은 국민들을 꾸짖는 대신 '미국을 다시 발전시키겠다.' 라며 자신이 희망의 등대가 될 것을 어필해서 큰 효과를 봤다. 난데없이 연설을 보다 야단맞는 것보다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는 이미지 메이킹에 성공한 셈이다. 사실 TV에 멋있게 나오는 것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 배우이니... [43]



테쿰세의 저주를 처음으로 깬 대통령이다. 근데 하필 이 혜택을 본 사람이... 재임 중인 1981년 3월 30일, 정신병자 존 힝클리 주니어가 쏜 총에 맞았지만 탄환이 폐를 살짝 건드린 정도라 큰 부상없이 겨우 살았다. 사실 범인의 총알은 단 한 발도 레이건을 맞추지 못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방탄차에 튕긴 총알을 맞았다.

총격이 발생하자 레이건이 방탄차 안으로 무사히 대피할 수 있도록 '팀 매카시'라는 비밀경호국 경호원이 레이건을 가리고 선 채 힝클리 쪽으로 상체를 펼쳐 총알을 몸으로 받아내는데[44], 이는 전세계에서도 몇 안되는 근접 경호사례로 남아있다. 대통령 경호원들은 보통 인간이 가지고 있는 생존본능을 억제하고 경호대상을 지키도록 훈련받지반 아무리 그래도 인간인 이상 급작스러운 상황에서는 몸이 먼저 움직여 반사적으로 피하기 마련이다. 실제로 영상을 보면 총성이 울린 직후 힝클리가 레이건을 마음놓고 저격할 수 있을 만큼이나 전방의 경호 인력들이 다 비켜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저런 상황에서도 생존본능을 억누르며 임무에 충실한 것은 초인이 아닌 이상 힘들다. 다행히 저 경호원은 2018년 현재까지 잘 생존하고 있다.

하지만 레이건과 달리 백악관 대변인인 제임스 브래디(James Brady)는 이마에 직격을 맞고 뇌가 파열되어 하반신 마비와 정신착란 증상으로 평생을 훨체어 신세로 살다가 2014년 8월 4일 74살 생일을 얼마 안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45] 참고로 이 사람의 이름을 딴 총기 규제법안이 빌 클린턴 정권에서 통과되는데, 통칭 '브래디 법'이라고 부른다.

압권인 것은 생사를 다투는 상황에서도 꽤 위트있는 농담을 했다는 건데, 들것에 실려나갈 때는 자신의 상처 부위에 응급처치를 하던 간호사들에게 "내 아내 낸시에게 허락은 받고 만지는 건가?"라는 말을 했고, 수술실에 도착했을 때는 의사들에게 "여러 분들이 제발 공화당 지지자이기를..."이라는 말을 했단 거다.[46] 그리고 그 때문인지, 살았다. 병원에서 의식을 회복하자마자 아내 낸시 레이건에게 "여보, 수그려야 하는데 총을 피한다는 것을 깜빡했어(Honey, I forgot to duck). 내가 아직 영화배우였으면 피했을텐데"라고 너스레를 떨었다고. 이 말은 뎀프시롤로 알려진 미국의 유명한 복서 잭 뎀프시가 1926년 진 터니에게 패한 후 자신의 아내에게 한 유머로 유명한데 적절하게 리바이벌한 것.

병원으로 이송된 레이건 전 대통령은 사건 발생 몇 주 후 일기에 "총을 맞는 것은 아프다." 살살 맞으면 안 아프다 며 "나를 쏜 젊은이에 대해 증오심을 느꼈으나 그의 영혼을 위해 기도를 시작했다"고 썼다. 그는 또 "나는 낸시가 그곳에 있는지 찾으려고 눈을 떴다. 그녀가 그곳에 없는 날을 맞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다"며 낸시 여사에 대한 각별한 애정도 드러냈다.

하지만 이렇게 담대한 모습을 보였던 것과는 달리, 고령인 몸에 중상을 입고 가까스로 살아난 탓에 이 사건 이후에 급격히 쇠약해졌다고 한다. 한동안 산소통을 백악관에 상비할 정도였고 집무 중에 피를 토한 적도 있다. 고령에 마취를 동반한 수술이 뇌손상을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렇게 큰 충격과 후유증을 남긴 암살미수를 일으킨 존 힝클리 주니어의 암살 동기는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대통령을 저격하면 자신이 동경한 영화배우 조디 포스터가 자기에게 고백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희대의 과대망상이자 관심종자. 조디 포스터가 미성년자 매춘부로 나온 영화 택시 드라이버[스포일러]의 영향을 받은 듯.

퇴임 후인 1992년에 연설 중에 반핵주의자의 습격을 받기도 했다.

그가 대통령이던 시절에 그의 부통령이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였다.

배우 출신답게 말을 굉장히 비유, 묘사적이면서도 맛깔나게 했다. 실제 인기 비결 중 하나는 재치있는 언변과 깔끔하고 위트있는 어투였다는 말이 있을 정도. 실제로 기자에게 했던 명대사들을 들어보면 그가 다른 대통령들과는 많이 다름을 알수 있다. 조지 부시가 저 말투를 어설프게 배운 것은 중요치 않다[48]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입성자

파일:할리우드 명예의 거리.png

이름

로널드 레이건
RONALD REAGAN

분야

텔레비전

입성날짜

1960년 2월 8일

위치

6374 Hollywood Blvd.


미국 국민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제법 좋은 편이지만 정치학자나 역사학자 같은 전문가들의 평가는 조금 미묘하다. 혹평하는 쪽에서는 부도덕한 스캔들교양 없는 면모, 지나친 군비 확장, 사회보장제도의 축소, 그에 따른 기독교 근본주의 확산 등으로 비판하고, 높이 평가하는 쪽에서는 냉전 종식의 주역이라는 것과 오늘날의 강력한 미국을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으며, 훌륭한 소통능력을 보여준 대통령으로 옹호하는 의견도 존재한다. 미국 대중들 사이에선 근대 미국 대통령 중에서 최고로 사랑받는 대통령이다. 적어도 2차 대전 이후 집권한 대통령 인기 조사에서는 거의 1등, 못해도 2등은 따놓은 당상이라 할 정도. 존 F. 케네디 역시도 인기 있는 대통령이긴 하나 대외적으로는 레이건의 인기가 더 압도적이다. 역시나 가장 큰 이유는 냉전을 종식시키고 소련을 이겼다는 것과 레이건에게서 풍기는 긍정적인 분위기와 그의 재치있는 연설, 뛰어난 언변 능력 때문이다.

전화 인터뷰를 통해 진행된 모 갤럽 인기투표에서는 에이브러햄 링컨, 국부 워싱턴, 케네디를 바르고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 [49] 다만 대중적인 인기에 비해 실제 미국 대통령 지지도 조사에서는 평가가 미묘하다. 케네디가 오히려 더 높게 평가받으며 중상위권은 지키고 있지만 10위권 안에 들어간 것도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매우 적다. 이는 앞서 말했듯이 전문가들에게는 혹평받을 때가 더 많고 워싱턴, 링컨 등 흔히 미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역사속의 대통령들에 비해 레이건은 특유의 패권주의적 색채로 인해 정치 성향에 따라 호불호가 상당히 갈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적인 인기만큼은 못지않게 높은 대통령임은 확실하다. 특히 공화당 성향 미국인들에게 가장 압도적으로 지지를 받으며, 당내에서는 근대 미국 공화당을 상징하는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50] 그리고 민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레이건에 대해서 호감을 표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기 때문에 대중적인 지지를 받는 편이기도 하다.

위에 링크된 카터와 레이건의 토론 동영상의 리플들을 요약하면 대략 이렇다.

레이건 때처럼 세금 감면하면 경제가 활성화됨 → 빚만 늘었거든연? 그래서 뭔 꼴이 났는진 부시 보면 모름? → 레이건 때 예산 법안은 민주당이 통과시킨겁니다만?[51] 현 정부는 잘하는게 있긴함? → 그래서 중동에 무기 팔아먹고 깽판쳐놔서 미국 욕먹임? → 카터같이 무능한 대통령보단 낫습니다만? → 수꼴 티내지 말고 공부나 더 하시젼 → 님 난 이 토론 직접 갔었음 깝 ㄴㄴ

이런 식(...)어디서 많이 본거같지만 그냥 넘어가자

임상심리학이나 정신의학을 공부하다 보면 거의 반드시 언급되는 대통령. 이유는 다름 아닌 알츠하이머의 대표적인 예로 소개된다. 2011년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딸이 타임지에 기고한 수기엔 그의 말년의 생활상이 상세하게 묘사되어있다. 주위 사람들이 대통령임을 알아보고 인사를 해도 딸에게 '저 사람이 어떻게 날 아냐?'라고 물어봤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의 차남 로널드 주니어는 자신의 부친이 재임기간에 알츠하이머 조짐이 보였다는 회고록을 출판했고 그로 인해 다른 남매들에게 사실 왜곡이라고 까였다. 참고로 로널드 주니어는 아버지와 달리 이라크전을 반대하고 버락 오바마를 지지하는 등 진보주의자이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Ronald_Reagan_in_Cowboy_From_Brooklyn_trailer.jpg

그를 시작으로 이후에 당선된 모든 대통령들은 키가 180cm를 넘었다고 한다.

2011년에는 두 번째 결혼 전에 잠깐 데이트했던 배우 파이퍼 로리(Piper Laurie)가 회고록을 썼는데, 레이건은 잠자리에서 별로 신통치 않았다고 한다. 로리는 18세였고, 레이건은 39세였으며 둘은 영화에서 부녀사이(!)로 출연하다가 눈이 맞았다고. 40분이 넘게 거칠게만 힘을 쓰는 레이건에게 불평했더니 "너 무슨 문제가 있는 거야. 이쯤했으면 오르가슴을 여러 번 느꼈어야지. 넌 병원에 가봐야해('There's something wrong with you. You should have had many orgasms by now—after all this time. You've got to see a doctor.')"라고 했다고 한다. 자신감은 넘치셨던 모양. #

뱀발로 축구선수 호날두의 이름도 이 대통령에서 유래하였다.

아르센 벵거와 미묘하게 닮았다.

생전에는 장로회 신자였지만 장례식은 미국 워싱턴 국립 성공회 성당에서 치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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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에 젤리빈 덕후로 유명하다. 백악관 회의 때 각료들에게 돌리거나 외국 정상들에게도 백악관 로고가 붙은 젤리빈을 선물할 정도였으며, 레이건 사후 유족들은 그의 빈소에도 젤리빈 한통을 놓아 고인을 기렸다.

일리노이 출신의 백인답게 시카고 컵스의 팬이었다고 하지만 그가 살아있던 시기에는 단 한번도 컵스가 우승하지 못해 재임 기간 중에는 남의 팀을 백악관으로 초대해야 했다. 시카고 컵스는 그가 태어나기 3년 전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한 이후 단 한 번도 우승을 하지 못했고(...)[52] 그가 죽고 난 후 12년이 지나고 나서야 월드 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껴안았다. 근데 레이건은 단순한 팬을 넘어서 라디오 아나운서 시절에 시카고 컵스의 전속 중계 아나운서를 했었다.

레이건 부부는 점술가의 조언을 국정에 반영했던 걸로도 유명하다. 응?? 영부인 낸시 레이건은 조앤 퀴글리라는 점술가와 친했는데, 로날드 레이건 암살미수사건 이후 퀴글리의 말에 자꾸 의존하다가 아예 퀴클리가 비선실세로서 국정에 관여한 것이다.

모든 국정 중대사들을 퀴글리에게 먼저 물어본 뒤, 그녀가 행성의 운행을 분석하는 점을 쳐서 안전하다고 판명난 것만 실행했다는데, 오죽하면 퀴글리 본인도 점술가가 국정을 이렇게나 휘두를 수 있었던건 로마 시대 이래 처음 아니었을까라고 자기 자서전에다 썼을 정도였다. 1988년, 레이건의 백악관 비서실장이 사퇴함과 동시에 폭로해서 세상에 드러났다.

이 부분은 2017년 6월 4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다루었다.

10. 대중매체에서의 모습[편집]

백 투 더 퓨처 1편에서 마티가 1950년대로 가서 브라운 박사를 만났을 때, 박사는 마티에게 네가 사는 시대의 대통령은 누구냐고 묻는다. 마티가 레이건이 대통령이 되었다고 하자 "뭐? 그 영화배우? 그럼 부통령은 제리 루이스(코미디 배우)냐?"라는 반응을 보였다.[53]

왠지 SCP 재단에선 취급이 좋질 않다. 암살 미수 사건 등 그의 정치 여정을 소재로 한 만화시리즈(SCP-095)가 SCP로 등록되어있지 않나, 심지어 자기 연설을 완전히 고인드립 수준으로 능욕한 고어 괴영상(SCP-1981)이 나오질 않나... 덤으로 세계도 한 번 멸망시킬뻔 했다.(SCP-1984)

카이저라이히: 대전의 유산에서는 무명 배우가 아니라 그럭저럭 유명한 배우로 성공하지만 미국 내전 통에 의문사당한다. 지못미... 근데 태평양 정부(켈리포니아 공화국)의 장관으로 등장한다. 어라?

데이터 이스트사에서 개발한 드래곤닌자라는 격투게임에서는 악의 닌자단에 의해 납치당한 레이건 대통령을 구출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막상 구출된 레이건 대통령은 포상이랍시고 겨우 햄버거 1개만 준다.

스티븐 킹11/22/63에서는 케네디 암살 미수 사건[54] 이후 망해가는 미국에서 험프리 다음으로 취임한다. 취임시 이란 대사관 인질 사건이 더 큰 스케일로 벌어지고 이란에 군사적 개입을 하는 바람에[55] 인질 전원이 참수되는 것으로 마무리. 다만 호메이니 치하 이란은 사형은 자주 해도 참수는 안했으니 실제로 인질들이 처형됐다면 참수보단 자기들 전매특허인 기중기 교수형이나 총살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버틀러-대통령의 집사라는 영화에서 알란 릭맨이 레이건으로 나오는데 상당히 인간적인 미를 선보인다. 주인공 세실 게인즈 부부를 만찬에 초대하기도 하였고 백악관 내 흑인과 백인 직원의 임금, 승진 기회를 평등하게 했다. 세실이 은퇴하자 역대 대통령을 대표해 감사를 표한다. 하지만 세실이 은퇴 후 주미 남아공 대사관에서의 항의 시위[56]에 참가한 것을 보면 그가 남아공의 경제제재를 반대한 것이 주인공의 신념을 흔든 계기 중 하나로 보인다. 비록 미국 내의 인종차별은 아니지만 작중에서 인종 차별에 반대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 유일한 대통령으로 아이젠하워 이래 세실이 갖고 있던 '대통령이 우리를 위해 해주고 있다'는 생각을 흔든 것으로 보인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에선 영화판과 소설판 모두 등장한다. 영화판에선 레이건이 백악관 정원에서 일하는 인부에게 벽을 무너뜨리지 말라고 말했는데, 백악관에 도청장치를 달아놓고 레이건의 말을 도청하고 있던 고르바초프가 베를린 장벽에 대한 말인줄 알고 "레이건놈이 벽을 무너뜨리지 말라면 우리는 무너뜨려야지!" 라며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라고 지시해버린다.

테디 루스벨트 전기로 유명한 에드 모리스의 레이건 전기가 꽤 유명하다. 가상의 사람들을 통한 레이건의 이미지 구현으로 논란이 심했는데 의외로 객관적이라는게 중평.

마블코믹스 데드풀에서 악령으로 부활한 역대 미국 대통령들 중 한명으로 나오며, 데드풀이 배를 가르자 젤리빈이 쏟아져 나왔다.

DC 코믹스 배트맨 가족의 죽음에서 조커가 레이건 때문에 돈이 없다는 듯이 그를 깟다.

앨런 무어의 그래픽노블 왓치맨에도 역시 레이건이 배우 출신 대통령이였던 것을 개그소재로 삼는 장면이 나온다. 마지막 부분에서 로어셰크의 메모장이 배달되기 전, 삼류 일간지 신문사 편집자들이 기사에 넣을 소재가 떨어졌다고 고민하다 한 사람이 로널드 레이건이 대선 후보로 나올거라는 얘기를 하자 하는 말, "뭐? 말도 안돼, 누가 카우보이를 백악관에 놓길 원한단 말이야?"

2006년에 나온 공포영화 "The tripper" 에서는 80년대 당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복지예산 감축으로 몇몇 정신병원이 돈을 아끼려 몇몇 정신병자들을 퇴원시켰는데 그중엔 싸이코패스 환자도 있었고, 이 환자가 자기가 어떻게 퇴원되었는지를 알게 된 뒤 레이건 대통령을 존경하다 못해 신인것 처럼 찬양하며 아예 레이건 대통령 가면을 쓰고 사람을 죽이고 다닌다. 희생자 대부분은 히피고 공화당 지지자도 죽인다.

의외로 홍콩 영화에도 출연했는데,최가박당 3편 막판에 주인공 킹콩 일행에게 임무를 맡기러 홍콩까지 찾아온다.


윗 부분에 나온 대로 펑크 록 밴드 라몬즈의 노래 중에 Bonzo goes to Bitburg라는 것이 있다. 이는 1985년 레이건이 독일 비트부르크의 국립묘지를 방문하여 헌화한 "비트부르크 논란"에 관한 곡인데, 문제는 이 국립묘지에 무장친위대 전사자들이 묻혀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한국으로 치면 현역 대통령이 야스쿠니를 방문한 격. 보컬 조이 라몬 부터가 유대계 미국인이어서 더욱 분노가 컸다. 정치적인 곡을 거의 발표하지 않은 라몬즈의 유일한 정치적인 곡. 참고로 노래 제목은 레이건 대통령의 1951년 출연작 Bedtime for Bonzo의 후속작 Bonzo goes to collage를 패러디 한 것이다. 이 영화들은 본조라는 침팬지가 인간들과 함께 살면서 겪는 해프닝을 다룬 코메디물인데, 쉽게 말해 라몬즈는 레이건을 원숭이 취급을 했다(...). 게다가 더 웃긴 지점은 정작 노래 제목의 기원이 된 후속작에는 출연진이 싹 다 교체되는 바람에 레이건이 아예 안 나온다(...). 라몬즈의 딜량이 쩐다

11. 둘러보기[편집]

[1] 이혼[2] 전 부인 사이에서 낳은 자녀들이다.[3] 장로회로 교파를 바꾸기 전까지는 어머니 따라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다녔었다.[4] 참고로 둠(코믹스)에서 둠가이전기톱을 보고 외친 "훌륭한 대화수단"의 원문이 이것이다(...) 레이건 대통령에게 붙은 이 별명은, 명료하고 유창한 언변과 연설로 국민들과의 소통에 적극적이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가 의회를 상대로 적극적으로 대화하려고 했던 자세에 힘 입은 바이기도 하다. # [5] 현대 민주당에서의 비슷한 포지션은 프랭클린 D. 루스벨트존 F 케네디[6] 수영을 너무 잘해서 들어간지 얼마 안되어 코치로 올라갔다.[7] 경제학, 사회학 복수전공이였는데 학점 평균이 C였다고 한다.[8] 영화 《백 투 더 퓨처》에서 과거로 간 마티 맥플라이가 브라운 박사에게 자기가 살고 있는 미래 세계의 대통령이 레이건이라고 말해자 박사가 '그 듣보잡 3류 영화배우가 대통령이 됐다고? 구라 좀 작작 쳐라'라고 말했을 정도. 듣보잡 배우 이름도 외워주는 상냥한 박사님? 그런데 듣보잡 배우 이름을 외울 수 있었던 것이 그의 영화가 그 시골마을(힐 밸리)에서 막 상영 중이였기 때문이다. 상영 중인 영화는 이것.[9] 팻 브라운의 아들인 제리 브라운은 로널드 레이건의 두번의 주지사 임기가 끝난뒤에 캘리포니아 주지사로 재임했다. 그 후 다른 일을 하다가 2010년대에 다시 캘리포니아 주지사로 당선되어 2015년 현재 캘리포니아 주지사로 있다[10] 세금만 올린게 아니라 주정부 규모를 줄이고 복지 개혁을 한 결과다.[11] 현역 대통령에게 경선 도전한다는 것 자체가 매우 드물다[12] 이 사람은 평생 공화당원이다. 오히려 이 당시 레이건은 민주당원. [13] 그의 강경한 대외정책 성향을 살펴볼 수 있는 연설문#[14] 단순한 배우가 아니라 영화배우 노조 협회장을 지냈다. 배우 시절의 레이건을 단순히 삼류배우로만 치부할 수 없는 이유. 동료 영화인들을 휘어잡을만한 정치력과 언변이 됐다는 소리다.[15] 이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루즈벨트의 노변정담식 라디오 연설에서 그 아이디어를 가져왔다.[16] 카터의 부통령 출신.[17] 레이건은 1차 토론에서 심하게 횡설수설하는 모습을 보여 국민들을 불안하게 했던 상황이었다. 괜히 사회자가 대놓고 나이 문제를 건드린게 아니었다. 이 상황을 조크 한방으로 반전시켰다는게 대단할 뿐.[18] 이후 최장수는 간발의 차이로 2006년 겨울에 93세 5개월로 사망한 제럴드 포드에게 넘어갔다가 아버지 부시가 2017년, 이 기록을 넘겼다. 곧 카터에게도 밀려서 4위로 내려갈 듯.[19] 무어 曰 "태아고 나발이고가 문제냐? 기퍼(레이건의 별명)가 죽게 생겼는데!"[20] 음성적으로 행하는 낙태시술. 위생이나 준비, 전문성 측면에서 떨어져 간혹 여성이 시술을 받고 죽거나 영구 불임되는 경우도 나타났다.[21] 어느 정도였냐면 8년의 재임기간 중 거의 1년을 캘리포니아에 있는 자기 별장에서 보냈다![22] 트럼프 본인은 이걸 인정하지 않는다. 분명 자기가 떠올렸는데 나중에야 레이건도 옛날에 그 문구를 썼다는걸 알았다고... 믿거나 말거나.[23] 닉슨 행정부는 뉴딜 이래 가장 많은 규제를 신설한 정권이었고 부자과세와 서민감세, 사회보장제도를 강화했다. 그러면서도 당시 인권운동, 반전운동과 함께 거세지던 민주당의 사민주의에 가까운 주장들을 잘 봉합했다. 사실 닉슨은 본인의 부도덕성과 성격적 결함만 아니었다면 현대사의 가장 성공한 대통령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다는게 중론.[24] 1982년 이전에 입국한 불법 이민자 3백만명에게 영주권을 주고 사면.[25] 기록에 따르면 대화가 대략 이렇게 오갔다. "핵무기 50% 감축 어때요?" "아니 그거 그냥 100% 해버리죠?" "오 좋아요!"[26] 에릭 홉스봄은 "양대 강국이 서로를 핵전쟁으로 절멸시킬 의도도 이유도 없음을 서로에게 납득시킨 이 순간, 냉전은 사실상 끝이 났었다."라고 단언했다. "다만 사람들이 그 사실(냉전의 종식)을 받아들인 것은 역시나 소련 멸망 이후였다."라는 추가설명과 함께.[27] 미국이 그런 기술을 갖게된다면 소련의 핵무기는 무용지물이 되어버린다. Mutually Assured Destruction은 한 쪽이 선공을 하면 반대쪽이 반격을 하며 상호파괴가 확신된다는 점에서 전쟁억제력이 있는데, 만약 한쪽이 반격을 못하게 된다면? 전쟁억제력은 없어지는것이다. 하지만 당시 미국은 우리가 오늘날 은하 반대편으로 워프 포탈을 만들 가능성만큼 그 기술에 닿지 못하였다. 고르바쵸프는 물론 이 사실을 몰랐다.[28] 특히 더이상 필요가 없게 된 급속전략타격자산들을 중심으로 육군이 많이 잘려나갔다. 해군은 처음부터 실현 가능성이 낮았던 프로젝트 몇 개 날아간 것 빼고는 타격이 없었다.[29] 원래는 민주당 지지자였지만 카터에게 실망해서 공화당 성향으로 돌아섰고, 이른바 레오콘의 대모가 된다. 이후로 레이건에게 기용되면서 이 같은 노선을 주장하게 된 것 헌데 미국의 가치를 전파해야 한다며 독재도 OK라는 노선을 주창했으니 당연히 욕을 먹을수밖에 없을것이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인도네시아 수하르토나 한국의 이승만 박정희. 대만의 장개석, 칠레의 피노체트 등 반공주의를 자처하기하면 독재정권이라도 얼마든지 지원해주는 짓은 허다했으나 커크 페트릭은 이를 대놓고 주장한것이 차이점이기는 했다.[30] 참고로 레이건 정부는 피노체트에게 망명제안을 하는 등 끝까지 비교적 유화적이었다. 주한 미대사가 앞장서서 박정희를 흔들다가 KCIA 부장에게 죽음을 맞도록 한 카터 때와는 다르긴 하다.[31] 물론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고질적인 불경기와 카터 시기 일어난 1979년의 제2차 석유파동(오일쇼크)이다. 볼커가 정말로 배짱이 있다고 평가되는 부분은, 제2차 석유파동에 따른 엄청난 고물가+경기침체의 상황에서 더욱 더 심한 경기침체를 감수하고 물가안정에 올인하였고, 결국 인플레를 잡았다는 데 있다.[32] 참고로 이때 베네수엘라와 멕시코,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도 엄청 피를 봤다. 안 그래도 원자재 값이 한창 떨어지는 바람에 재정에 여유가 없어진 상태에서 고금리까지 겹치니 도저히 버틸수가 없어지게 된 것이다. 거기에다가 그 이후의 신자유주의 정책까지 펼쳐지면서 결국 21세기들어 중남미 정권이 대거 좌파로 넘어가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물론 이러한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파산 자체야 당시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 대다수가 기초 체력이 나빠서 나자빠진 점도 있지만 그 이후의 처방과정이...[33] 실제로 소외계층에 대한 주택지원 등 일부 복지예산이 삭감되어 나가기도 했다. [34] 자기 입을 보라면서 절대 증세안하겠다고 하던 H.W 부시는 그 탓에 거짓말쟁이로 몰려 단임 대통령이 되고 만다.[35] 특히 방한 한 달 전 발생한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로 인해 취소 혹은 연기되는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있었으나 예정대로 방문했다[36] 도널드 트럼프아베 신조를 상당히 많이 물먹였고 대접도 문재인보다 훨씬 박하다.[37] 원래는 참모들이 존 F. 케네디의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처럼 독일어로 번역해서 원고를 준비했다. 그런데 레이건이 "난 미국 대통령인데 왜 독일어를 해야하냐"고 해서 다시 영어로 되돌렸다고. 레이건의 패권주의적 사고관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일화다.[38] 마티가 과거로 날아갔던 시절 레이건은 실제로 배우였다.[39] 의사는 그 말을 듣고 또 바로 '지금은 우리 모두가 공화당원입니다'라고 답한다. 의사도 간지 폭발, 그 대통령에 그 의사답다.[40] 80년 선거전 당시로, 카터의 경우 재선 도전이었다. 그리고 결국 카터는 실직했다. 다만 이 말은 레이건의 오리지널은 아니고 원래는 33대 대통령인 트루먼이 한 말이다. 그 뒤에 카터를 까는 표현을 추가한 것.[41] 알려지다시피 치매의 전조증상 중 하나가 낮에 꾸벅꾸벅 조는 것이다.[42] 자기가 민주당원이었다는 사실만이 잘못이라는 뜻[43] 물론 이 당시 이미 레이건이 지지율에서 꾸준히 앞서고 있었기 때문에 TV가 결정적인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는 지적도 있다. 카터의 인기가 워낙 바닥을 기기도 했고.[44] 위 영상에서 회색 정장을 입고 있다가 총맞고 그 충격으로 튕겨져나갔다가 바닥에 쓰러져 부들거리는 남성이다. 참고로 영상을 유심히 보면 바닥에 쓰러진 이후 다른 경호원들이 매카시를 한동안 버려두다시피하고 오히려 범인인 힝클리를 에워싸는데, 그 이유는 힝클리가 제 2의 건맨에게 입막음용으로 살해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저 때는 힝클리가 소련의 사주를 받은 청부업자인지, 그냥 망상병을 앓는 정신병자인지 모르는 상태이므로.[45] 그러나 총알이 브래디의 이마를 맞고 뒤통수로 뚫고 지나갔는데도 불구하고 생존한거다! 이것만 해도 기적에 가까운 일[46]드립에 수석 의사가 "지금 이 순간은 저희들 모두가 공화당원입니다, 대통령님."이라고 받아쳐줬다고 한다.[스포일러] 주인공 트래비스 비클(로버트 드 니로 분)은 미성년자 매춘부 아이리스(조디 포스터 분)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편, 사회에 대한 분노와 상류층에 대한 열폭, 그리고 자기가 좋아하던 여인 베시가 자기를 차버린 것에 대한 원망 등의 이유로 베시가 지지하던 대통령 후보 팰런타인을 저격하려다 실패한다. 보면 알겠지만 대통령 후보를 죽이려고 한 거랑 조디 포스터랑 딱히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이후 트래비스는 아이리스가 있는 매춘굴에 쳐들어가 갱단들을 죽이고 아이리스를 구출해 본의아니게 영웅이 되긴 하지만, 정작 아이리스는 매춘부 생활에 나름대로 만족하며 살고 있었고 트래비스를 사랑한다는 암시는 영화 어디에도 없다. 조디 포스터 얼굴만 보고 영화는 제대로 안 봤나보다[48] 실제로 허버트 부시는 CIA 국장을 지내기도 한 인물이라 스마트하고 머리 잘쓰는 인상, 나쁘게 말하면 좀 어렵고 엘리트스러운 인상이 강했는데, 그의 아들은 레이건처럼 2프로 부족하지만 친근하고 털털한 이미지를 내세웠다. 그래선지 허버트 부시의 업적이 큼에도 불구하고 단임에 인기가 그저 그런 반면 조지 부시는 업적 하나 꼽기가 난감함에도 재선에 '그래도 사람은 좋았지...'라는 평가를 받는다.[49] 단 케네디와 레이건은 각각 민주당, 공화당 성향의 투표자들에게 몰표를 받았으며 정치 성향에 따라서 지지도가 극적으로 갈렸다. 워싱턴, 루즈벨트, 특히 링컨의 경우는 지지도에선 밀렸지만 정치 성향은 물론 세대 차이에도 영향을 받지않고 모든 계층에서 고르게 고평가를 받았다.[50] 흔히 공화당 위원들이 공화당을 지칭할때 "위대한 레이건의 공화당"이라고 지칭할 때가 많으며 도널드 트럼프는 레이건의 선거 구호를 자신의 것으로 쓰기도 했고, 취임식 당일 레이건과 링컨의 성경을 사용해서 선서하였는데 이 두 인물들이 공화당 소속 대통령 중에서 가장 인기가 높기 때문이었다.[51] 이란 콘트라 사건 등의 악재까지 겹쳤지만, 원래 1930년대 이래 민주당은 거의 항상 하원 다수당이었다. (해리 트루먼 시대 일부 빼고) 대표적인 인물이 팁 오닐(Tip O'Neill, 본명은 토머스 오닐 주니어) 하원 의장으로 1977년 카터 정권교체기부터 1987년 까지 의장직을 수행했다. 임기말인 1987년부터는 상원도 민주당이 장악했다. (Robert Byrd 상원 민주당 대표)[52] 시카고 컵스2016년 월드 시리즈 진출 이전까지 마지막으로 나갔던 1945년 월드 시리즈 당시에 레이건은 군인이었다. 고로 살아 가면서 민간인 신분으로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응원팀이 월드 시리즈에 올라가는 모습을 못 보고 죽은 셈. 그런데 사실 시카고에 이런 분들이 한 두 명이 아니긴 하다.[53] 당시 영화 제작진들은 '괜히 이 장면을 넣었다가 큰 일 나는 거 아닌가...'하고 벌벌 떨었지만, 정작 레이건 대통령은 이 대사가 나오는 부분을 계속 돌려봤을 정도로 아주 좋아했었다고 한다.[54] 그러니까 리 하비 오즈월드댈러스에서 저격했던 사건을 주인공이 타임슬립해서 막았던 사건.[55] 다만 이때의 레이건을 변명하자면 군 병력 증원없이 돈만 퍼부었던 베트남이 케네디 2기 정권 시절에 망했고(...) 하노이에 핵을 투하한 터라 핵을 동원한 위협은 소용이 없어서 군사개입을 했었다.[56] 흑인 인권 운동을 벌이던 아들이 주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