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콘키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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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계기: 우마이야 왕조의 이베리아 정복3. 레콘키스타의 시작4. 후우마이야 왕조와 전선의 교착
4.1. 알 만수르의 반격
5. 타이파 분열기와 기독교 국가들의 성장
5.1. 톨레도 함락 (1085년)
6. 무라비트 왕조의 반격7. 십자군 열기와 기독교 국가들의 남진
7.1. 사라고사 함락7.2. 리스본 함락
8. 무와히드 왕조의 반격9. 기독교 국가들의 대공세10. 최후의 노력 : 마린 왕조11. 공수의 역전 : 세우타 함락 (1415년)12. 대항해시대와 그라나다의 연명13. 1492년 : 알함브라를 떠나는 무어인들14. 결과
14.1. 문화적 교류
15. 이후16. 기타1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레콘키스타(Reconquista)는 재정복(Reconquest)을 뜻하는 스페인어[1]로,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톨릭 왕국들이 이슬람 세력을 축출하기 위해 벌인 활동을 의미한다. 포르투갈어로는 헤콩키스타(reconquista)라고 한다.

서고트 왕국 멸망 후에 세워진 가톨릭 왕국들[2]은 팽창하는 이슬람 세력에 밀려서 이베리아 반도 북쪽 작은 영토만 남기고 축소되었다. 이슬람 세력의 전성기에도 근근히 버티다가, 내전과 정권싸움으로 약해진 이슬람 세력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몰아내는 수백년 동안의 과정을 총칭하는 단어. 그래서 국토 회복 운동이라고도 한다. 711년에 시작하여 포르투갈에선 1249년 알가르브 함락, 스페인에선 1492년 그라나다 왕국 함락까지 계속되었다. 물론 백년전쟁처럼 실제 그 기간 동안 전쟁이 계속된 것은 아니다.

2. 계기: 우마이야 왕조의 이베리아 정복[편집]

이베리아 전역을 지배하던 서고트 왕국은 내분을 틈탄 무어의 침공을 받아 무너진다. 당시 서고트 왕국은 서고트 왕국 문서에 자세히 서술되어있는 복잡한 정치체계 때분에 내분이 잦았고, 많은 외적과 싸우느라 힘이 소모된 상태였다. 게다가 내전으로 인해 무어의 편을 든 배신자 귀족들이 있었고, 기병이 너무 적었고, 해군이 전무해서 북아프리카의 무슬림들에게 철저하게 털리며 끝내 이베리아 반도에서 완전히 내몰릴 지경으로 간다.

무어의 본거지였던 북아프리카는 로마 이전 시절부터 이름높은 말의 산지였다. 반면 이베리아는 국토 대부분이 고원지대라 기병을 키우기에는 영...

대부분의 상황에서 해군의 육성은 안정적으로 국경을 방어할 규모의 육군이 갖춰진 다음에야 이루어진다. 당시 여러 외적과의 전쟁과 내전으로 육군의 소모가 심했던 서고트는 해군까지 육성할 여력이 없었다. 반면 무어는 해군, 정확히는 해적이 강했는데, 로마 제국 시절 곡창지대였던 북아프리카를 점령한 베르베르인들과 아랍인들은 관개수로를 잘 사용하지 못해 농업 기반을 박살내 버렸고,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바다로 나가야만 했기 때문이다. 첨언하자면 가까이 있던 스페인 동남부 해안에 대한 해적질도 그 중 하나로, 이러한 해적 행위 자체가 이후 국가 기간 산업 중 하나로 발전하기까지 한다. 한편 이베리아이슬람 제국이 점령한 이후 이 동남부 해안에 대한 해적질은 금지되는데, 이는 동남부의 영주들인 아랍인들과 해적질을 하던 베르베르인들간의 갈등의 또다른 원인이 된다. 이 해적질이 바르바리 해적의 기원이 된다. 무슬림들은 바르바리 해적을 이베리아를 빼앗은 스페인에 대한 투쟁이니 뭐니 하지만 이미 그 이전부터 시작되어온 유서 깊은 전통이다(...). 그러니까 왜구 비슷한 것.

3. 레콘키스타의 시작[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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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722년 피레네 산맥 기슭 아스투리아스 지방에서 300명의 비스고트 전사들이 2,000명 가량의 아랍 군대의 침공을 막아낸 코바동가 전투(Battle of Covadonga)의 승전으로[3] 서고트 왕국의 피난민들은 명맥을 존속할 수 있었고, 이후 이 아스투리아스 지방의 살아남은 고트족들이 모여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건립하여 이베리아 북서부에 대한 확장을 시도하게 된다.

당시 아스투리아스 왕국[4][5]의 규모나 군사적 위상은 이베리아를 장악하던 이슬람 왕국에 비하면 형편없는 수준이었지만, 이슬람 왕국들은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했는데, 첫째 이유는 카탈루냐 일대를 두고 전쟁을 벌이던 프랑크 왕국 때문이고, 둘째 이유는 이슬람 왕국 내부에서의 분열, 특히 기독교인들과 베르베르인들의 반란 때문이었다.

이베리아를 점령한 이슬람 왕국들은 기독교인들에게 불완전한 종교의 자유를 보장했다. 성당들을 파괴하거나 모스크로 바꾸어[6][7] 기독교도들이 예배를 하기 힘들게 했고, 개종했는데도 종교세를 내라고 하거나[8], 반발하는 기독교도들에 대한 공개처형 및 직위와 재산을 몰수하는 등의 박해를 가했고, 유대인들은 이를 거들었다.[9] 이는 기독교인들이 이슬람교도들과 유대인에 대한 증오를 가지게 되었고 813년의 코르도바 반란이나 912년의 팜필로나 반란 등의 크고 작은 반란으로 이어지게 된다. 하지만 당시 기독교인들은 무기를 통제당해 무장은 제한되어 있었고, 이슬람 왕조들은 쉬이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다.

하지만 베르베르인들의 반란은 달랐다. 우마이야 왕조는 아랍 계열 왕조였고, 사회 지도층이나 엘리트들도 다들 아랍인들이었으나, 일부 호족이나 대부분의 군인들은 베르베르인이었다. 그리고 아랍인들은 베르베르인들을 야만인이라면서 극도로 무시했다.[10] 베르베르인들은 아랍인들이 안전한 후방에서 성이나 지키는 동안 기독교인들과의 최전선에 나가서 피를 흘려야 했고, 그러면서도 보상은 아랍인들에 비해 적었으며[11], 심지어 종교세이놈의 종교세는 안 빠지는 데가 없다도 강요받아야 했다.[12]

이러한 차별에 분노한 베르베르인들은 739년, '귀족 전쟁'이라 불리우는 내분을 이베리아 반도 각지와 마그레브 지역에서 전개한다. (베르베르 대항거) 이러한 내전은 743년까지 이어졌고, 우미이야 왕조의 쇠퇴를 촉진시켰다. 아랍 군대들은 베르베르 반군들을 스페인에서 몰아내는데는 성공하지만 마그레브 지방은 위낙 넓은데다가 베르베르의 홈그라운드니만큼 대부분의 땅을 빼앗기고 만다. 그 와중에, 스페인의 베르베르 귀족들이 귀족 전쟁에 참여하느라 군대를 움직인 틈을 타서 아스투리아스 왕국은 횡재다!를 외치며 텅 빈 갈리시아[13] 지방을 접수하고 레온 왕국과 포르투갈 백작령으로 진화발전한다. 이밖에도 아라곤 왕국, 나바라 왕국들도 베르베르 귀족들의 영토였던 북부 이베리아를 점령하며 뻗어나갔다.

4. 후우마이야 왕조와 전선의 교착[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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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4년의 이베리아 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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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0년의 이베리아 반도[14]


하지만 756년 아바스 왕조의 추격을 피해 알안달루스로 피난 온 우마이야 왕조의 왕자인 아브드 알 라흐만이 혼란스러운 알안달루스를 안정화시키고 후우마이야 왕조를 세우면서 한동안 기독교 세력의 남진은 정지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이슬람과 기독교 세력은 도루(Douro)[15] 강을 사이에 두고 수백년 간 대치하였고 10세기 경부터 후우마이야 왕조가 비틀거리기 시작하자 기독교 세력은 다시 남진을 시작하였으나 이 때 후우마이야 왕조에 알 하지브 알 만수르라는 걸출한 재상이 등장하였다. 알만수르는 후우마이야 왕조 최후의 별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로 비틀거리는 후우마이야 왕조를 일시적이나마 다시 안정화시키고 레온과 나바라, 아라곤에 대한 여러 차례의 지하드를 개시하였다. 기독교 왕국들은 알만수르의 공격에 속수무책이었다. 마치 8세기경 자신들의 조상들이 이교도들에게 이베리아를 내어주는 상황의 데자뷰같은 모습이었다.

4.1. 알 만수르의 반격[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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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1000년의 이베리아 반도

알만수르가 이끄는 이슬람군은 985년 바르셀로나를 불태우고, 988년 레온 왕국의 수도 레온을 불태웠다. 997년에는 이베리아 기독교의 최대 성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공격해 도시를 불태우고 유명한 대성당은 문과 종을 떼어내 코르도바의 모스크[16]를 장식하거나 녹여서 촛대로 만드는 등 기독교 세력에게 제대로 굴욕을 주었다.[17]

하지만 1002년 알만수르가 죽고 쇠락해가는 왕조를 지탱해줄 사람이 없는 상황 속에서 후우마이야 왕조는 1031년 멸망하게 되고 이후 알안달루스는 타이파(طائفة)라는 소규모 왕국들로 분할되어 기독교 세력에 각개격파되기 시작했다. 이후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에서 축출되는 1492년까지의 역사는 위의 반복이라고 볼 수 있다.

5. 타이파 분열기와 기독교 국가들의 성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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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0년의 이베리아 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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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7년의 이베리아 반도 : 카스티야 & 아라곤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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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톨레도 함락 (1085년)[편집]

레콘키스타 성공 여부의 분수령이 되었다. 톨레도는 로마 시절부터 톨레툼이란 이름으로, 서고트 왕국의 수도였던 유서 깊은 도시였으며 천혜의 자연 요새로 인해 이베리아 중부 고원 메세타의 최고 핵심 전략 거점이었기 때문에 이 도시가 카스티야에게 넘어간 건 기독교 세력의 진출에 있어분수령이 되었다. 사상적으로 또한 톨레도 함락과 함께 거의 같은 시기 십자군 전쟁이 선포 되면서 11세기는 레콘키스타라는 하나의 국가적, 역사적 이데올로기의 형성에 있어서 분수령이 된 시대였다. 이전 시대만 하더라도 기독교 국가들의 연속체로서 서고트 왕국->아스투리아스 왕국->레온-카스티야 연합 왕국으로 이어지는 중부 이베리아 반도의 카톨릭 왕조 국가로서 계승성을 표명한 사료는 9세기의 알베다 수도원 연대기 (Crónica Albedense) 밖에 없었고, 다른 사료들은 딱히 이슬람 세력에 대하여 기독교의 이베리아 반도 '수복'이란 의식을 딱히 드러내지 않는다. 반면 실제 정치판에서 이 시대는 바로 다름아닌 엘 시드의 시대. 당장 권력과 이익만 맞아 떨어지면 반도 북부의 기독교 소국들과 분열해가는 알 안달루스의 타이파 세력들이 종교고 나발이고 신경 안쓰고 지극히 실리적인 현실정치 (realpolitik)을 따르던 시대다.

그러나 톨레도가 함락되고 교황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종사하는 건 레반트 성지로 가는것과 마찬가지라 하며 이베리아 반도의 세력 다툼에 종교적의미를 본격적으로 부여하자 레콩키스타는 기독교 왕국들이 하나의 초월적, 역사적 사명이자 성전으로 인식하는 이데올로기로 구체화 되기 시작한다. 톨레도 함락 이후 약 반세기 뒤 쓰여진 알폰소 7세 시절 쓰여진 황제 알폰소 연대기 (Chronica Adefonsi imperatoris)를 기점으로 이 이후 연대기와 사료들은 강렬한 종교적, 지정학적 성격을 띄게 되며 무엇보다 레온-카스티야 연합 왕국을 중심으로 국체의 기원을 아스투리아스 넘어 서고트 왕국에서 찾으며 단순한 종교적, 정치적 투쟁이 아니라 한때 기독교 세계에 속했던 고토의 회복 의식을 강하게 드러내기 시작한다. 흔히 불가분의 관계로 말하는 스페인 국가적 민족주의와 전투적 카톨릭 신앙의 일치화가 이데올로기적으로 뿌리를 잡게 된 것이다.

6. 무라비트 왕조의 반격[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00px-Almoravid-empire-en.svg.png

7. 십자군 열기와 기독교 국가들의 남진[편집]

7.1. 사라고사 함락[편집]

7.2. 리스본 함락[편집]

2차 십자군의 도움

8. 무와히드 왕조의 반격[편집]

9. 기독교 국가들의 대공세[편집]

파일:alandaluz1160.jpg

9.1.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 (1212년)[편집]

파일:506-Castile_1210.png
1210년의 이베리아 반도

9.2. 코르도바 함락[편집]

10. 최후의 노력 : 마린 왕조[편집]

11. 공수의 역전 : 세우타 함락 (1415년)[편집]

12. 대항해시대와 그라나다의 연명[편집]

13. 1492년 : 알함브라를 떠나는 무어인들[편집]

14. 결과[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La_Rendici%C3%B3n_de_Granada_-_Pradilla.jpg

결국 무어인들은 베르베르인에게 남쪽에서 털리고 북쪽에서 기독교도들에게 털리는 양상의 반복 끝에 축출되고 말았는데, 무어인들은 기독교 왕국의 위협에 대항하여 무라비트 왕조, 무와히드 왕조 등을 세운 베르베르인들에게 같은 이슬람 형제들을 도와달라고 요청했으나 오히려 베르베르인에게 뒤통수를 맞고 말았다. 알안달루스의 무어인에 비해 종교적으로 엄격했던 베르베르인들은 무어인들이 이룩한 문화재를 훼손하였으며, (알안달루스 문화에는 다행히도)무와히드 왕조가 기독교 왕국에게 참패하면서 이러한 경향은 중단되었으나 레콘키스타를 저지하는 것 역시 불가능해졌다. 게다가 인구에서도 여전히 기독교 왕국한테 열세였다. 결국 알안달루스의 이슬람 왕국들은 차례차례 기독교도 왕국들에 정복당했고 1492년 1월 2일에 그라나다의 무함마드 12세가 이사벨 1세(카스티야), 페르난도 5세(아라곤)에게 항복하여 나스르 왕조가 멸망하면서 레콘키스타가 마무리되었다. 위의 그림은 그라나다를 떠나 모로코로 망명하는 무함마드 12세와 그 휘하의 이슬람 교도들을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5세가 불러세워서 함께 살아갈 것을 권유하는 장면이다. 무함마드 12세는 이를 거부하고 아프리카로 물러났다.[18][19]

레콘키스타는 현대에는 일반적으로 십자군 전쟁에 포함시키지 않지만, 당시에는 십자군의 일부로 인식되었으며 실제로 2차 십자군이 '지나가던 길에' 이슬람 세력의 거점이었던 리스본을 함락시키고 가기도 했다.

14.1. 문화적 교류[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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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스를 두는 그리스도교와 무슬림. 레콘키스타와 십자군 전쟁기에 이슬람 권에서 유럽으로 전래된 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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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 인 학도를 가르치는 이븐 루시드

학문적으로 발달하였던 안달루스는 스페인, 더 나아가 서유럽에 큰 영향을 주었다.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네 학당에 등장하는 유일한 무슬림이자 아리스토텔레스를 깊히 연구한 대학자 이븐 루시드의 문서를 보자. 아무리 적이라도 700년 넘게 공존하면 상호 영향이 없을 수 없다.

15. 이후[편집]

한때 인구의 거의 전부가 이슬람으로 개종하였다는 사실[20] 역시 스페인인들의 자존심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비록 어쩔 수 없이 개종하였고, 레콩키스타 이후 기독교로 돌아가기는 했지만, 카스티야와 아라곤 왕국이 기독교의 수호자로서의 정통성을 강조하였다는 사실을 고려해보면 이는 스페인의 정통성과도 직결되는 문제였다. 그래서 스페인은 더욱더 철저한 원리주의적 가톨릭이 되는 수밖에 없었다.

각지의 유대인이나 무어인는 철저하게 추방하려고 하였다. 무어인이야 말할 것도 없고, 유대인은 이슬람 지배기간 동안 기독교도들에 비해 훨씬 많은 자유를 부여받으며 무슬림들의 앞잡이 노릇을 해 왔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심지어 가톨릭으로 개종한 유대인들과 무어인들도 감시받았으며, 17세기 초에는 펠리페 3세에 의해 약 27만 명의 모리스코(가톨릭으로 개종한 무어인)들이 추방되었다. 금융, 의료, 상업, 공업 등 소위 전문직에 종사하던 유대인들과 무어인들의 대거 추방으로 인해 스페인은 종교적 열망과 국가 이데올로기적 정체성은 충만하게 채웠을지 몰라도 실제 경제와 사회 구조는 작살났다. 당장 알함브라 칙령 이후에도 지역 농민 인구의 과반수 가까이가 개종한 무어인, 즉 모리스코였던 발렌시아무르시아 같은 지방은 노동 인구부터 박살났고, 이렇게 경제적 활동도 종교에 따라 분화 되어있던 이베리아 반도에서 전문직들이 다 추방당하자 스페인 고유의 상업적 경쟁력은 기반부터 무너졌다.

이 이후 스페인은 신대륙 개척의 첨병에 나서 엄청난 양의 아메리카의 귀금속과, 이에 맞추어 부상한 카스티야의 양모, 안달루시아의 농작물 등 산업의 부흥에도 불구하고 이를 제대로 유통하고 관리할 금융, 상업 계층의 부재로 이를 전부 제노바 공화국에 아웃소싱할 수 밖에 없었다. 당 필요한 자금줄과 상업 행위에서 제노바 상인들과의 동맹은 큰 도움이 되었지만, 대신 제노바 상인들은 카스티야 내부 많은 지방의 조세권 부터 시작해 왕실 소유였던 시칠리아, 나폴리 왕국의 경제적 이권 등을 철저하게 챙기며, 장기적으로는 현지 민중, 토착 엘리트와 스페인 왕실 사이가 점차적으로 틀어지게 되는 영향력을 발휘했다. 스페인 제국은 그 이전 중세의 종교적 공존, 즉 콘비벤시아 (Convivencia)를 박멸하며 전성기에 오르기 시작했지만 결국 그 몰락의 장기적인 원인 중 많은 부분은 이러한 공존에 기반한 사회경제적 기반의 상실이란 점은 시사하는 바가 많은 고찰 대상이다. 물론 현실적인 이유로 한계도 있었는데, 이는 무어인 추방을 참고.

지금이야 그라나다 함락을 레콘키스타의 끝으로 인식하고는 있지만[21], 당시에는 이베리아의 완전한 통일로마의 영토였던 마우레타니아, 즉 모로코+북알제리+서튀니지까지의 영토 수복이 완료되지 않는 한 진정한 레콩키스타의 완료가 아니라는 생각이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이사벨과 페르난도 부부왕과 포르투갈 왕은 스페인의 첫째 공주 이사벨[22]을 포르투갈 왕가의 계승자 알폰소에 시집보내, 포르투갈+카스티야+아라곤의 모든 왕위 계승권을 가진 진정한 스페인의 왕을 만들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실제로 둘은 정략결혼임에도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알폰소는 병으로 객사해 버렸으며, 이사벨은 슬픔에 빠져 재혼을 거부했지만 이베리아의 재통합이라는 원대한 이상을 품은 두 왕가는 알폰소의 동생 미겔과의 재혼을 추진했다. 하지만 알폰소의 동생인 미겔과 재혼한 이사벨마저 남자아이를 출산하다 죽어 버렸다(...). 다행히도 아이는 살아남아 미겔[23]이라는 이름을 받고, 진정한 스페인의 왕이자 평화를 가져올 자로써 추앙받아 평화왕이라는 이름을 받았으나 그라나다에서 어렸을 때 병에 걸려 요절하고 말았다(...).

살아남은 다른 공주들은 이미 옛날옛적에 다른 왕가에 시집보낸지 오래였고, 부부왕의 아들인 후안도 요절하면서 이베리아의 재통합, 진정한 스페인이라는 원대한 꿈은 산산히 흩어지고 만다. 그리고 합스부르크로 시집간 부부왕의 둘째딸 후아나를 통해 왕위계승권을 받은 합스부르크 왕가는 알제나 튀니스 등을 놓고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벌이는 한편 북아프리카의 몇몇 항구도시들을 지배하에 두는 등 북아프리카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움직임도 보였지만, 프랑스가 신성로마제국과 스페인을 함께 다스리는 합스부르크 황가의 세력을 경계하여 계속해서 덤벼드는 바람에[24] 국력 대부분을 프랑스와의 전쟁에 쏟아부었고, 영토면에서나 경제면에서나 아무 소득 없이 스페인의 국력을 소진시키고 만다.

그나마 1580년 포르투갈의 아비스 왕가의 대가 끊기고[25] 마누엘 1세의 외손자였던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가 포르투갈 왕위에 오르면서[26] 이베리아의 재통합이 다시한번 이루어지는 듯 했으나 동군연합을 주도한 스페인 측의 학정이 이어지면서 결국 스페인의 지배에 질려버린 포르투갈 국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포르투갈 왕정복고전쟁이 발발, 카타리나의 손자였던 브라간사 공작 주앙이 포르투갈 국왕 주앙 4세로 즉위하여 포르투갈에 브라간사 왕조가 들어서면서 이베리아의 재통합은 완전히 물거품이 되고 만다.

이런 이유로 스페인포르투갈에서는 과거 이루어질 수도 있었던 진정한 통합[27]과 평화왕을 그리워하며, (지브롤터의 탈환과 함께) 이베리아 반도를 한 나라로 통일하지 않는 이상 레콘키스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실제로 스페인 왕정복고 당시 포르투갈 총리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도 스페인 내에서 있었다. 물론 이런 낭만주의적 역사관이 있고, 스페인과 포르투갈인들의 자국사 인식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거지, 그렇다고 해서 실제 이베리아 반도의 현실적인 정치, 사회, 종교적 인식에서 요즘 와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통합하고 다시 북아프리카로 처들어가야 한다고 진지하게 주장하면 그건 나름대로 신박하게 미친X 취급 받을 것이다(...). 큰 의미에서 과거사 인식이 그렇다는 거다.

어느 정도 눈썰미 있는 위키러는 알아챘겠지만 콩키스타도르와 레콘키스타는 단어적으로도 실제 역사적으로도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있다. 두 단어의 어원 자체는 스페인어로 정복하다를 뜻하는 conquistar(콩키스타르)에서 같이 유래한 것이기에 그렇다. 그리고 레콘키스타가 끝나면서부터 대항해시대가 열리고 콩키스타도르가 나타난 것도. 단적으로 레콘키스타 당시 기독교 국가들, 특히 레온-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수호 성인이자 주된 숭배 대상이었던, 피십자가가 새겨진 백색 망토를 두르고 무어인을 짓밣는 기사로 표현 된 성 야고보(산 티아고)의 형상, 즉 무어인 살해자 성 야고보(Santiago Mataomoros)의 신앙을 신대륙으로 건너가 콩키스타도르들 사이 똑같은 기믹에 대상만 바뀐 인디오 살해자 성 야고보(Santiago Mataindios)란 형상으로 숭배 받았다.

16. 기타[편집]

과거에 멕시코 영토였다가 미국-멕시코 전쟁으로 미국이 강탈한 텍사스, 캘리포니아, 뉴멕시코, 애리조나 등의 영토에서 히스패닉계가 갈수록 급증하는 것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레콘키스타라고 부르기도 한다.

미국-스페인 전쟁 이후 새로운 식민지를 물색하던 스페인의 제국주의 파벌(Africanist)들이 모로코 식민지화의 명분으로 삼기도 했다.

17. 관련 문서[편집]

[1] 어두의 r은 전동음이다.[2] 균등 상속제로 인해 행여나 왕위가 합쳐져도 다시 분할되기 일쑤였다.[3] 넓은 의미에서의 레콘키스타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위에서 레콘키스타의 시작년도라고 언급된 711년은 우마이야 왕조의 이베리아 정복이 시작된 해이다. 718년 경 우마이야 왕조는 정복 작업을 거의 끝마쳤다.[4] 이후 레온 왕국으로 국명이 바뀌며 분할상속된 나라중 하나가 카스티야로 발전하게 된다[5] 서고트의 멸망에서 배운게 없는 건지, 초기 레콘키스타 국가들은 게르만의 분할상속제를 버리지 못했다. 이 때문에 아스투리아스는 아스투리아스, 갈리시아, 레온, 나바라, 카스티야 등으로 왕자들에게 분할상속되었다가 합쳐졌다가를 반복했다가 결국 카스티야로 수렴된다.[6] 이슬람 역사가들은 술탄이 기독교도들로부터 코르도바 대성당을 구입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이슬람교도들은 여러 종교시설들을 부수거나 강제로 모스크로 바꾸는 것에 별로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고 오히려 지하드라고 장려를 했다. 그것은 오스만왕조가 하기야 소피야를 모스크로 강제로 바꾸어 버린 데서도 알 수 있다. 따라서 구매 안하고 그냥 강제로 바꾸었으면 강제로 바꾸었다고 기록했을 것이라고 추측 가능하다.[7] 참고로, 서고트의 도시지역(톨레도, 코르도바) 내에 있던 교회들은 이슬람 지배기간 동안 모두 사라졌다. 살아남은 교회들은 전부 시골에 있던 규모가 작은 것이였고, 그나마도 10개도 되지 않는다. 이런 현상은 나중에 레콩키스타 후의 스페인에서 다시 일어나게 된다. 모스크들이 전부 파괴당하거나 성당으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런 모스크의 변화현상은 스페인뿐만 아니라 다른 기독교국가에서도 발생했다.[8] 1300년대엔 스페인의 무슬림들이 90%에 이르렀다. 지도자들로써는 중요한 수입원인 종교세가 줄어드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이슬람교로 개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종교세-지즈야-를 거두는 것은 스페인의 이슬람 왕조만 했던 일이 아니고 전 세계의 아주 많은 이슬람 왕조들에게서 보이는 공통점이다. 스페인에서도 마찬가지로 개종한 기독교도들한테만이 아니라 후술하듯이 이슬람교 확장 초창기때부터 개종했던 베르베르인들에게도 이런일들이 벌어졌다.[9] 물론 유대교도들이나 후술하듯이 종교세 문제 관련해서 이슬람교도들인 베르베르인들도 아랍인들에 반대하면 얄짤없었다. 그러나 베르베르인들은 워낙에 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어 유대교도들이나 기독교도들보다는 사정이 훨씬 나았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아랍인들의 기독교 박해를 거든 것은 서고트 왕국 시절 기독교인들의 유대인 박해 때문이다. 서고트 왕국 항목 참고.[10] 기독교가 같은 종교 믿어도 민족 다르면 야만인으로 멸시하듯이 이슬람도 다를거 없다.[11] 아랍인 귀족들은 풍요로운 스페인 중남부의 영토를, 베르베르 귀족들은 상대적으로 습하고 험한데다가 기독교들과의 최전선인 갈리시아 등의 북부 지방의 영토를 받았다.[12] 말할 필요도 없이, 이 때 베르베르인들은 무슬림들이었다.[13] Galicia. 이베리아 반도 서북쪽의 지역. 우크라이나 서부의 갈리치아(Galicia) 지방과는 다르다. 영어 스펠링이 같으니 이베리아와 동유럽 모두의 역사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헷갈리지 말 길 바란다.[14] 후우마이야 왕조의 영토는 줄었지만 이슬람 전체의 영토는 오히려 늘어났다.[15] '도루'는 포르투갈어로 스페인어로는 '두에로(Duero)'라고 한다.[16] 1236년 코르도바를 점령한 카스티야는 모스크를 허물지 않고 성당으로 고쳐 사용하였는데 이 성당이 바로 오늘날 메스키타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코르도바 성모 마리아 성당이다. 카스티야는 (원래 자신들의 것이었던) 모스크의 문과 종을 가져가 톨레도 대성당을 장식하였다.[17] 이 때 성당에 남아있던 성 야고보의 묘 및 기타 성유물들은 기독교인들의 신앙심을 잘 알고 있던 알만수르가 부하들에게 훼손하지 말도록 엄히 명하여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18] 나중에 스페인 내 비기독교인들이 어떤 취급을 받는지 생각하면 이게 옳은 결정이었다. 무함마드 12세는 스페인을 떠나기 전 페르난도 & 이사벨 부부와 조약을 맺어 그라나다를 내어주는 조건으로 그라나다의 무슬림의 스페인 잔류 및 종교의 자유를 인정받아 그라나다의 무슬림들에게 마지막 보호막을 세워주고 떠났으나 몇 년 안 가 이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조약은 무효화되고 반란 진압 이후 그라나다의 무슬림들은 전부 가톨릭으로 개종해야 했다.[19] 그나마 그라나다가 마지막 무어인 왕조였기에 멸망 후 잠시나마 대접을 받은 것이지 그라나다 이전에 정복당한 무슬림들은 얄짤없이 강제 개종 아님 추방 작업을 거쳐야했다. 당장 이사벨과 페르난도 또한 가톨릭 원리주의자로 레콘키스타 완료 직후 악명높은 종교재판을 처음 시작한 자들이니.[20] 전체 인구 중 약 90%가 독실한 신자였든 나일롱이었든 아무튼 이슬람을 믿었다고 한다.[21] 성전의 이베리아 3번 트랙 '침략하는 자, 당하는 자' 도입부에 레콘키스타 직전까지의 역사를 읊는데, 그 마지막 문장이 그라나다 함락이다.[22] 어머니와 구분하기 위해 아스투리아스의 이사벨이라고 부른다. 아스투리아스는 위에서도 설명했다시피 스페인의 뿌리가 되는 최초의 왕국이며, 스페인의 정당한 왕위 계승자에게 주어지는 영지이자 작위명이다. 영국의 왕세자가 '프린스 오브 웨일스'(웨일즈공)라고 불리는 것과 비슷하다. [23] 미겔 데 라 파스. 데 라 파스(de la Paz)는 '평화의' 라는 의미로 아래에서 나오는대로 평화왕 미겔이라는 의미이다.[24] 실제로 프랑스와 스페인은 1521년부터 1559년까지 다섯 번 전쟁과 강화를 되풀이하는데, 이 다섯 번 모두 프랑스가 스페인에 선전포고했다.[25] 1578년 포르투갈 왕 세바스티앙이 24살의 어린 나이에 모로코와의 전쟁 도중 전사하면서 세바스티앙의 종조부 엔히크가 왕위에 올랐으나 이 사람은 본래 추기경의 신분이었는지라 결혼해 자식이 있을 리가 없었고 즉위했을 때 이미 노인이었기 때문에 즉위 2년 만에 사망하였다.[26] 펠리페가 포르투갈 왕위에 오르긴 했으나 그 과정은 절대 평화롭지 않았는데 원래 포르투갈 왕위를 주장한 사람은 펠리페를 포함해서 총 3명이 있었고(펠리페 2세, 브라간사 공작부인 카타리나, 크라투 수도원장 앙토니우, 3명 모두 마누엘 1세의 손자녀였다) 이 중 가장 많은 지지를 받은 인물은 앙토니우였으나 펠리페는 막강한 스페인의 국력을 이용해 포르투갈을 침공, 앙토니우를 쫓아내고 자신의 포르투갈 왕 즉위를 강제로 인정하게 만들었다.[27] 펠리페 2세시도했던 바와 같이 스페인이 포르투갈을 흡수하는 것이 아닌, 부부왕에 의한 아라곤과 카스티야의 경우처럼 동등한 위치에서의 통합.[28] 위의 이사벨라 1세의 삶을 다루는 스페인 사극. 레콘키스타는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중요한 내용이다.[29] 노래 자체의 배경이 레콘키스타를 다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