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성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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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호

태조(太祖)[1] / 시조(始祖)[2]

시호

동명성왕(東明聖王) / 추모성왕(鄒牟聖王) /
동명왕(東明王) / 추모왕(鄒牟王) / 중모왕(中牟王)

성씨

고(高)/ 해(解)[3]

추모(鄒牟) / 추몽(鄒蒙) / 주몽(朱蒙) /
중모(中牟) / 도모(都牟) / 도모(都慕) /
중해(衆解) / 상해(象解)

왕후

부인 예씨(禮氏), 소서노(召西奴), 월군녀(越郡女)

왕태자

고유류(高儒留)

왕자

고비류(高沸流), 부여온조(扶餘溫祚)

부왕

해모수왕(解慕漱王)

모후

유화부인(柳花夫人)

출신지

부여(扶餘)

묘지

고구려 용산(龍山)[4], 홀본 동쪽(忽本 東)[5]

생몰년도(남한)

음력

기원전 58년 ~ 기원전 19년 음력 9월 (38-39세)[6]

생몰년도(북한)

음력

기원전 298년 ~ 기원전 259년 음력 9월

재위 기간(남한)

음력

기원전 37년 ~ 기원전 19년 음력 9월 (18년)

재위 기간(북한)

음력

기원전 277년 ~ 기원전 259년 음력 9월 (18년)

1. 개요
1.1. 이름
2. 생애
2.1. 탄생 설화2.2. 건국2.3. 비류국 병합2.4. 소국 토벌2.5. 태자 책봉2.6. 죽음? 승천?
3. 숭배4. 광개토대왕과의 관계5. 정체에 대한 논란
5.1. 부여 시조 동명왕과의 관계5.2. 해씨? 고씨?5.3. 백제의 태조?
6. 삼국사기 기록7. 구삼국사 기록8. 훗날 매체에서의 동명성왕9. 관련 인물10. 관련 항목

1. 개요[편집]

"나는 황천(皇天)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딸이신 추모 임금이다. 날 위해 갈대를 엮고 자라를 띄워라!"
我是 皇天之子 母 河伯女郎 鄒牟王. 爲我 連葭 浮龜!


자신의 신분을 밝히는 임금의 언령. 광개토대왕릉비 중 발췌.


고구려를 건국한 초대 임금. 묘호와 시호는《삼국사기》 본기에는 시조 동명성왕이라 표기되어 있으나, 《삼국사기문무왕 본기에는 태조 중모왕이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태조라는 묘호를 썼을 확률도 있다. 문제는 그렇게 되면 태조대왕의 시호는 뭐냐는 의문이 생기게 된다.

여담으로 많은 사람들이 국사와 세계사를 따로 배우기 때문에 동명성왕이 마치 신화속 인물쯤 오래된 인물로 생각하지만, 위의 연도를 보면[7] 고대 로마 제국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와 거의 비슷한 연배다.[8]

1.1. 이름[편집]

는 추모(鄒牟), 추몽(鄒蒙), 주몽(朱蒙), 중모(中牟), 중해(衆解), 도모(都慕)등 다양한 기록이 있다. 이는 모두 같은 순 우리말 이름을 한자로 음차해놓은 것이다. 잘 알려져 있는 주몽이라는 이름은 고유어를 한자로 음차할 때 일부러 "朱蒙" 자[9]를 붙인 이름이다.

표기

현대 한국어 발음

등장 사료

비고

鄒牟

추모

삼국사기, 광개토왕릉비, 모두루 묘지명, 신찬성씨록

고구려 공식 표기

朱蒙

주몽

삼국사기, 삼국유사, 동국통감, 동사강목

朱背

주배

신찬성씨록

中牟

중모

삼국사기

삼국사기 문무왕 본기에만 등장.

仲牟

중모

일본서기

衆解

중해

삼국사기

都慕

도모[10]

신찬성씨록[11]

鄒蒙

추몽

삼국유사

삼국유사 왕력편에서만 등장.

象解

상해

삼국사기

고구려인의 기록인 『모두루 묘지명』에는 추모성왕(鄒牟聖王)으로 기록되어 있고, 『광개토왕릉비』엔 추모왕(鄒牟王)으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선 "동명성왕의 이름은 주몽(朱蒙)이고 혹은 추모(鄒牟)라고 불린다."라고 적혀있다. 《삼국유사》에선 추몽(鄒蒙), 주몽(朱蒙)이라는 휘를 전하고 임금의 시호가 동명제(東明帝) 혹은 동명성제(東明聖帝)라고 서술 하고있다. 이 시호는 민간 뿐만 아니라 고려, 조선 정부에서도 각각 《고려사》, 《조선왕조실록》에서 언급한다.

생부인지 계부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동명성왕은 일단 백제의 시조 온조왕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인물이다. 이 때문에 일본의 《신찬성씨록》에도 몇몇 고구려백제계열 성씨의 조상으로 나타나며, 여기에 도모(都慕)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하는 각 사료들의 원문이다.

생각건대, 옛날 시조(始祖) 추모왕(鄒牟王)이 이 땅에 (나라를) 세웠으니...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광개토왕릉비』 제 1면


하박(河泊)[12]의 손자요, 해와 달의 아들이신 추모성왕(鄒牟聖王)께서 북부여(北夫餘)에서 태어나셨다. 천하 사방이 이 나라, 이 고을이 가장 성스러움을 알지니…
河泊之孫日月之子鄒牟聖王元出北夫餘天下四方知此國郡最聖...


『모두루 묘지명』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은 성이 고씨이고, 이름이 주몽(朱蒙)추모(鄒牟) 또는 중해(衆解)라고도 한다.】이다....
始祖東明聖王 姓高氏 諱朱蒙【一云鄒牟 一云衆解】...


삼국사기》 제13권 고구려 본기 제1 시조 동명성왕


백제의 시조는 온조왕(溫祚王)이다. 그의 아버지는 추모(鄒牟) 혹은 주몽(朱蒙)이라고 한다.

百濟始祖溫祚王 其父 鄒牟 或云朱蒙


《삼국사기》 제23권 백제 본기 제1 시조 온조왕


(문무왕이) 사찬 수미산(須彌山)을 보내 안승을 고구려 왕으로 봉하였다. 그 책문(冊文)은 다음과 같다....(생략)...그대의 태조 중모왕(中牟王)은 북쪽 산에 덕을 쌓고 남쪽 바다에 공을 세워...
遣沙飡須彌山 封安勝爲高句麗王 其冊曰...(생략)...公太祖中牟王 積德北山 立功南海...


《삼국사기》 제6권 신라 본기 제6 문무왕


시조 동명성제(東明聖帝)의 성은 고씨(高氏)이고 이름은 주몽(朱蒙)이다....
始祖東明聖帝 姓高氏 諱朱蒙...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 동명왕


신작(神雀) 4년 계해년[13] 여름 4월에 주몽(朱蒙)을 낳았는데...


구삼국사》 동명왕 본기[14]


무릇 백제의 태조(太祖) 도모 대왕(都慕大王)은 태양신이 몸에 내려온 분으로 부여에 머물러 나라를 세웠다. 천제(天帝)가 녹(籙)을 내려 모든 한(韓)을 통솔하고 왕을 칭하게 하였다


《속일본기》 간무 덴노기 연력 9년


덕좌왕(德佐王)은 도모 대왕(都慕大王)의 손자[15]다.


《신찬성씨록》 좌경제번(左京諸蕃)편

2. 생애[편집]

2.1. 탄생 설화[편집]

파일:50_주몽신화.png

1854년 우타가와 사다히데(橋本貞秀)의 회본조선정벌기(絵本朝鮮征伐記). 고주몽이 부여에서 달아나 강물을 건너는 모습을 묘사했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고구려 건국 신화에 의하면 동명성왕의 아버지는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이며, 어머니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라 전하고 있다.[16][17]

어느날 해모수가 동생들과 함께 놀고 있던 유화를 보고는 꾀어내서 함께 하룻밤을 지냈으나 다음날에 혼자서 승천해 버렸다고 한다. 유화부인은 중매도 없이 다른 남자와 잤다는 이유로 하백에게서 쫓겨나 떠돌다가 태백산 우발수까지 밀려났다가 동부여의 왕이었던 금와왕과 만나게 되었는데, 유화의 사연을 알게 된 금와가 유화를 거두어서는 궁 안으로 데려와 방안에 두었다.

이후에 햇빛이 방안으로 들어와 유화의 몸을 내리 쬐었는데, 유화가 아무리 이를 피하려 해도 햇빛은 계속 유화의 몸을 비추었다. 그 이후에 유화는 덜컥 임신을 하게 되었는데, 괴상하게도 을 낳았다. 금와왕이 알을 돼지나 짐승에게 주거나 들판에 내버려도 짐승들이 알을 해치지 않고 보호하려고 하였고, 껍질이 단단해서 깨뜨릴 수가 없어 결국 도로 유화에게 돌려주었다. 그리고 이윽고 알에서 아기가 태어났는데 그가 바로 동명성왕, 즉 주몽 이었다.

동국이상국집 동명왕 편에 따르면, 태어난 지 한 달도 안되어 걸으며 말을 깨우쳤고 자라서는 힘도 굉장했는데, 어느날 왕자들과 사냥을 나갔다가 다른 왕자들이 하나도 못 잡아 쩔쩔매고 있을 때 혼자 노루를 무더기로 잡고 있었다. 이에 샘이 난 왕자들이 노루를 모두 빼앗고 주몽을 나무에다 묶어놓고 돌아가버렸다. 그런데 다음 날 주몽이 나무를 뿌리째 뽑아서는(...) 묶여서 나무를 등에 진 채 그대로 걸어 궁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하지만 그를 시기한 대소[18]를 비롯한 동부여의 왕자들의 간계로 피살당할 뻔 했고, 부인 예씨와 모친 유화, 그리고 예씨의 뱃속의 아이 유리를 남긴 채[19] 오이, 마리, 협보 등의 친구들과 자신을 따르는 여러 무리를 이끌고 자신이 하늘의 자식임을 이용해 자라와 물고기로 다리를 만들어 큰 강을 건너 동부여를 탈출하였다.

이후에 동명성왕의 일행은 졸본 땅에 도착하였고, 훗날 이곳을 도읍으로 하여 고구려를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 구삼국사》를 보고 쓴 이규보의 동명왕편에도 거의 동일한 설화가 기록 되어 있다. 다만 세세한 부분에서는 차이가 존재한다. 이규보의 동명왕편.

  • 광개토왕릉비』에도 해당 설화가 나와있다. 다만 광개토왕릉비는 왕의 권위와 그의 신성함에 대해서만 적혀있을 뿐 시련에 대한 언급은 없다.

2.2. 건국[편집]

나라 이름을 고구려(高句麗)라 하고, 이로 인하여 고(高)를 성씨로 삼았다.
國號高句麗 因以高爲氏


삼국사기》 제13권 고구려본기 제1(三國史記 卷第十三 高句麗本紀 第一) 시조 동명성왕(始祖 東明聖王)


기원전 37년, 12세 되던 해에 주몽은 고구려를 건국한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졸본 땅은 말갈에게 자주 약탈을 당하고 있었는데, 주몽은 말갈족을 물리쳐서 그들이 다시는 졸본을 넘보지 못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이 때 두 번째 부인 소서노[20]를 맞이했으며, 조선 시대에 편찬된 《동국통감》에선 주몽이 졸본 부여에 오자 그곳의 왕이 그를 큰 인물이라 여겨 자신의 둘째 딸을 주어 결혼하게 했다고 한다.

2.3. 비류국 병합[편집]

왕위에 오른지 4년째 되던 날에 궁실과 성을 쌓았고 근처에 있던 비류국왕 송양을 굴복시킨 후, 비류국을 다물도로 삼았다.

二年, 夏六月, 松讓以國來降, 以其地爲多勿都, 封松讓爲主. 麗語謂復舊土爲'多勿', 故以名焉.
2년 여름 6월, 송양이 나라를 바치며 항복했다. 그곳을 다물도로 개칭하고, 송양을 그곳의 군주로 봉했다. 고구려 말로 옛 땅을 회복한 것을 '다물'이라 하기 때문에 그곳의 명칭으로 삼은 것이다.


삼국사기》 제13권 고구려본기 제1 시조 동명성왕


참고로 이때 비류국왕인 송양과의 일화가 《구삼국사》에 전해져 내려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비류국 송양이 "너네 나라보다 우리 나라가 더 오래됐거든? 만든지 얼마 안된 너네 나라가 우리 나라 밑으로 들어오는게 맞는거 같은데."라고 하자 동명성왕 "나는 하늘의 자손인데 너같은 애송이가 깝치는 꼴이 우습구나."라고 반박한다. 이에 송양이 활쏘기 대결을 청하는데, 송양은 사슴 그림을 100보 밖에다 두고 활시위를 당겼으나 힘겨워 했다고 한다. 근자감의 최후 반면 그 모습을 본 동명성왕이 사람을 시켜 옥가락지를 들고 오게 하고 100보 밖에 매달아 놓게 했는데 활을 쏘자 마자 옥가락지가 박살이 나버렸다. 그걸 본 송양은 깜짝 놀랬다고.

  • 송양이 떠나고, 동명성왕은 신하들에게 "저새끼가 날 무시하는 건 우리 나라에 간지나는 뿔피리가 없어서 그래.[21]"라고 말하자 부분노가 "제가 비류국의 북을 훔쳐 가져오겠습니다."라고 한다. 그 말에 동명성왕은 "걔들이 꽁꽁 숨겨놓았을 물건인데 어떻게 가져오려고?"라고 하자 "왕께서는 천제의 아들이기에 각종 고난을 이겨내고 오셨습니다. 천제가 우리를 돌봐주는 한, 가져올 수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가져온다(...) 한편 자신의 북이 사라진 걸 알게 된 비류국에서 고구려에 따지기 위해 사신을 보냈는데 동명성왕은 북에다 시커멓게 칠을 해 오래된 것처럼 위장했다고 한다. 결국 그 모습을 본 비류국 사신은 데꿀멍해버렸고 그 소식을 들은 송양도 반박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 송양이 "고구려와 비류국, 어느 나라의 수도가 먼저 세워졌는지 확인해서, 더 일찍 세워진 나라 쪽을 섬기도록 하자!"고 주장했는데 이 소식을 들은 동명성왕은 궁궐지으면서 썩은 나무로 기둥을 세워(...) 마치 천년도 넘는 듯한 모습을 하도록 했다. 그리고 그걸 본 송양은 데꿀멍.

2.4. 소국 토벌[편집]

한편 동명성왕은 비류국 이후 행인국북옥저를 병합한다.

冬十月 王命烏伊 扶芬奴 伐太白山東南荇人國 取其地 爲城邑

겨울 10월, 임금이 오이부분노(扶芬奴)에게 명하여 태백산 동남쪽의 행인국(荇人國)을 정벌하게 하고, 그 땅을 빼앗아서 성읍으로 삼았다.


十年 秋九 鸞集於王臺 冬十一月 王命扶尉猒伐北沃沮 滅之 以其地爲城邑
겨울 11월, 왕이 부위염(扶尉猒)에게 명하여 북옥저(北沃沮)를 정벌하여 멸하게 하고, 그 땅을 성읍으로 삼았다.

2.5. 태자 책봉[편집]

재위 19년 되던 해 부여에서 아들 유리가 도망쳐 오자 태자로 삼았고, 동명성왕 사후 유리가 왕이 되자 소서노와 그 두 아들 비류, 온조는 남하하여 백제를 건국하게 된다.

2.6. 죽음? 승천?[편집]

삼국사기》에는 기원전 19년 9월 40살 때 승하하여 용산(龍山)에 임금의 무덤을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동국이상국집》에 실린 《구삼국사》의 동명왕 편과 『광개토대왕릉비』에선 왕은 홀본 동쪽에서 황룡을 타고 승천했다고 한다.

(추모왕이) 그러다 세위(世位)를 즐기지 않게 되자, (하늘이) 황룡(黃龍)을 내려보내 왕을 맞이하였다. 왕은 홀본 동쪽에서 용의 머리를 밟고 승천(昇天)하셨다(不樂世位因遣黃龍來下迎王王於忽本東履龍頁昇天)


광개토왕비


가을 9월에 왕이 하늘에 오르고 내려오지 않으니 이때 나이 40이었다. 태자(太子)가 왕이 남긴 옥채찍을 대신 용산(龍山)에 장사하였다 한다.


동국이상국집》 전집 권3, 「고율시」 동명왕편.


제왕운기》에선 특이하게도 동명성왕이 재위 중에 하늘로 올라가 하늘의 정치[22]를 배워 내려왔고, 재위 19년 9월 하늘에서 더이상 내려오지 않아 거룩한 아들 유리(聖子 類利)가 보위를 이어 남은 옥 채찍을 무덤에 묻었고 그것이 지금 용산(龍山)의 무덤[23]이라고 한다.[24]

이후 온조왕이 기원전 19년에, 대무신왕이 서기 20년에 각자 동명왕을 기리는 사당을 세운다. 고구려 시조에 대한 숭배는 고려, 조선 때에도 이어졌는데 고려는 고려사에 따르면 평양에 동명성제 사당이 있어서 고려 국왕들이 가끔 가서 참배한듯 하다.[25] 조선은 세종 대왕 대 평양에 단군 왕검, 고구려 시조, 기자 이 세 사람의 사당을 세우는데 고심한 기사가 많다. 실록에는 단군과 고구려 시조의 신위판(위패)를 어떻게 적을 것인지 말이 많았는데 결국 단군은 "조선 단군", 고구려 시조는 "고구려 시조지위"로 쓰기로 결정하였다.

昨過永明寺(작 과 영 명 사) 어제 영명사를 지나다가
暫登浮碧樓(잠 등 부 벽 루) 잠시 부벽루에 올랐는데
城空月一片(성 공 월 일 편) 성벽 하늘엔 달 한 조각 떠 있고
石老雲千秋(석 로 운 천 추) 오래된 조천석 위엔 천년 세월의 구름이 흐르네.
麟馬去不返(인 마 거 불 반) 기린마는 떠나서 돌아오지 않았으니
天孫何處遊(천 손 하 처 유) 천손은 어디에서 노니시는가?
長嘯依風岉(장 소 의 풍 등) 돌계단에 기대어 길게 휘파람 부니
山靑江自流(산 청 강 자 류) 산은 푸르고 강물은 절로 흐르더라.


이색(李穡), 부벽루(浮碧樓)


그가 승천했다는 설화들이 굉장히 많은데 어느날 도성에 구름이 잔뜩 끼더니 왕이 옥채찍 하나만 남기고 사라져서 채찍을 모셔서 묘를 썼다고 전해진다. 참고로 이 옥 채찍은 송양을 굴복시킬때 사용한 홍수를 없앨 때 사용한 물건이라는 설도 있다.

다른 설화로는 기린을 길들였으며 기린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26]는 설화가 있다. 평양에는 동명성왕이 기린을 길들였다는 '기린굴'이 남아 있었으며, 고려 말엽에는 민간에서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졌던 것 같다. 또한 동명성왕이 밟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조천석이라는 유물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기록상으로 동명성왕은 평양에 와봤을 리가 없는데 왜 평양에 유물이 이렇게 많을까?라는 의문을 가질수 있는데 기린굴은 몰라도, 조천석 정도는 평양에 있다 해도 딱히 이상할 게 없다. 동명성왕은 살아 생전에 요동성에 가본 적이 없었는데도 그 성의 사당에서는 동명성왕의 갑주와 창을 모셔두고 있었다. 후대의 여러 기록들을 종합해봤을 때, 고구려가 평양을 도읍으로 삼은 뒤 시조 신으로 동명성왕을 모시고, 이후 고려가 고구려에 대한 계승 의식을 가지고 평양을 중시하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유물일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창이나 칼도 아니고, 국조가 밟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어마어마한 성물을 옛 수도라고는 해도 수도가 아니게 된 곳에 계속 두는 것이 더 이상하다. 한편《고려비기》라는 책에서 조천석은 연개소문이 초청해서 중국에서 불러온 도사들이 깨버렸다고 써져 있는데,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멀쩡히 평양에 남아 있다는 말도 있다. 통일이 돼야 확인해볼 수 있을 듯.

평양에는 동명성왕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동명왕릉이 있다. 북한 당국이 1974년에 발굴 조사를 하였으며 1994년에는 크게 개건을 하였다. 단군릉 수준의 막장은 아니지만 상당히 큰 규모로 만든 편.

3. 숭배[편집]

삼국사기》에 고구려의 요동성이 에게 공격을 받는 기록에서, 요동성에는 그의 창과 갑옷을 모시는 사당이 있고, 무녀가 있었다는 언급이 남아 있다. 그리고 무녀의 예언을 듣고 처녀를 제물로 바치자, 무녀가 "주몽이 기뻐하시니 요동성은 함락되지 않을 것이다."는 말을 했지만 결국 함락됐다.[27]

중국의 역사서 북사에도 주몽 숭배 관련 기록이 있는데, "신묘가 두 군데 있는데, 하나는 부여신이라 하여 나무를 조각해 부인상을 만들었고, 하나는 고등신이라 하여 그들의 시조이며 부여신의 아들이라고 한다. 모두 관사를 설치해 놓고 사람을 보내 수호하는데 대체로 하백의 딸과 주몽이라고 한다"라고 쓰고 있다.

동명성왕의 유물에 관련된 기록이 남은건 저 정도 뿐이지만, 나라의 시조신인 만큼 요동성에만 이런 사당이 있었을 리는 없고, 아마 주요 도시마다 사당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28] 무녀가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제사 의식에는 무속 적인 요소가 강하게 있었던 듯 하며, 왕건의 상으로 추측하여 초상이나 상(象)을 만들어서 모신 것으로 보는 설도 있다.[29]

그 이름에 걸맞게 신궁(神弓)이라고 불리었으며, 물레 위의 파리를 쏘아 잡았다거나 송양과 나라를 두고 재주를 겨룰 때 1백보 바깥의 옥가락지를 깨었다는 등 관련 설화가 전해진다. 오늘날 한국에서도 양궁 선수들을 가리켜 '주몽의 후예'라는 표현을 언론에서 쓸 정도로 현대 한국에서도 명궁의 대명사로 통한다.

조선 시대에는 평양에서 단군, 기자와 함께 평양의 삼성(三聖)으로 모셔지고 있었다.[30] 드물지만, 현재에도 동명신(東明神)을 모시는 무속인들이 있다. 2006년 방영했던 드라마의 영향이 큰 듯하다.

4. 광개토대왕과의 관계[편집]

지안현의 광개토대왕릉비를 보면 광개토대왕이 추모왕으로부터 17대손이라는 기록이 나온다.

옛적 始祖 鄒牟王이나라를 세웠는데 (王은) 北夫餘에서 태어났으며, 天帝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河伯(水神)의 따님이었다. ...(이하 중략)... 遺命을 이어받은 世子 儒留王은 道로서 나라를 잘 다스렸고, 大朱留王은 王業을 계승하여 발전시키었다. 17世孫에 이르러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 18세에 왕위에 올라 칭호를 永樂大王이라 하였다.'''


광개토대왕릉비

하지만 현재 남아있는 김부식의 《삼국사기》나 일연의 《삼국유사》에 의하면 광개토대왕은 주몽왕의 13세손이 된다. 그래서 신채호는 차대왕과 신대왕을 태조왕의 서자로 보았다. 그렇게 되면 다음과 같이 된다.


이렇게 하면 1세대가 늘어나고, 진수의 삼국지의 설을 채택하여 신대왕을 차대왕의 아들로 본다 해도 2세대가 늘어난다. 신채호는 조선 상고사에서 다른 사서를 참고하지 않고, 연대계산을 다시 해서 태조왕을 유리왕의 손자가 아니라 대무신왕의 손자라는 가설도 세웠다. 그렇게 보더라도 광개토왕이 주몽의 자손인 것은 맞지만, 그렇게 보더라도 다소 앞뒤가 맞지 않는다.

여기에 신대왕을 차대왕의 아들로 보는 설을 채택해도 광개토대왕은 주몽의 16세손이 된다. 삼국지의 위서 동이전에는 주몽의 뒤를 여달이 잇고 여달의 뒤는 여율이 잇고 여율의 뒤를 막래가 이었다고 하는데 막래는 모본의 오타로도 추정된다. 그런데 여달을 유리명왕으로 보고, 위서 동이전에 막래가 부여를 쳤다는 기록을 근거로 막래를 모본왕이 아니라 대무신왕으로 본다면, 유리명왕과 대무신왕 사이에 한 사람이 더 있었다고 본다면 어떻게든 세대가 맞게는 된다.

5. 정체에 대한 논란[편집]

5.1. 부여 시조 동명왕과의 관계[편집]

삼국사기》에서는 동명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대엔 광개토대왕릉비의 기록을 존중해 동명왕보다 추모왕이라는 칭호가 주목을 받고 있다. 이 영향인지 동명왕과 추모왕이 별개의 인물이라는 설이 생겨났다.

참고로 동명왕 전설은 《논형(論衡)》 길험편에 나오는 부여 건국 설화와 상당 부분 일치하며, 백제의 왕족들의 성씨를 보면 주몽은 일단 부여계라는 게 거의 정설이다. 즉, 고구려의 건국왕인 주몽을 신격화하는 과정에서 부여의 건국설화인 동명왕 전설을 차용했다는 것이다. 고리국부여, 부여고구려로 이동하는 부분도 그렇고 설화 자체가 거의 똑같아 상당부분 동명왕 전설을 차용했다는 이야기는 신빙성이 있는 이야기로 평가받는다.

KBS 역사스페셜에서 고구려와 부여 설화 차용과 관련된 내용을 방영한 적이 있다.# 동명성왕의 건국 설화, 즉 하늘 신이나 하늘 신의 아들이 강의 신의 딸과 정을 통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들이 주변의 사악한 왕의 미움을 받다가 도망쳐서 왕국을 세운다는 내용의 설화는 중앙 유라시아의 건국 설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야기다. 벡위드 교수는 스키타이, 흉노, 몽골, 투르크를 비롯한 유목 국가 뿐만이 아니라, 고대 로마나 중국의 주나라 등 중앙 유라시아에 영향을 받은 많은 정주 국가들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건국 설화로 삼고 있다고 한다.

5.2. 해씨? 고씨?[편집]

성은 해씨에서 고씨로 고쳤다 하나, 아들유리명왕 대부터는 다시 해(解)씨[31]로 나오기 때문에, 고구려 초기 왕계에 의구심을 갖게 한다. 그런데 동명왕만이 아니라 이후 고구려 왕족의 계보도에서 여러 문제가 발견되기 때문에 해씨 고구려설이 존재한다. 이에 따르면 아마 주몽의 원래 성씨는 고씨가 아닌 해씨였을 터인데 6대왕인 태조대왕 때부터 고씨를 차용하게 되면서 건국 왕의 성을 조작했을 것이라고 한다.

혹은, 해씨를 쓴 게 맞으나 원래는 방계였던 태조 대왕계가 고씨라는 성을 쓰기 시작하면서 추모왕계에 대한 신성화의 과정에서 동명왕이 고씨임을 유난히 강조했다는 의견이 있다. 이러면 유리명왕, 대무신왕 등도 자연히 고씨가 되기 때문에 해씨를 성으로 썼던 역사가 묻힌 거라는 것이다. 고구려 뿐만 아니라, 백제, 신라도 초기 왕족보에서 사실이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을 정도의 오류들을 범하고 있다. 우리나라 역사가 삼국 시대 중기에 가서야 정립되기 시작한 걸로 생각되기 때문인 듯. 또한 중기부터 왕위를 확립한 왕족들이 자신들의 정통성을 공고히 하기 위해 왕계에 조작을 가했을 가능성도 농후하다. 그러기에 고구려 시조 주몽에 대해선 논란이 클 수 밖에 없다.

후한서에 나오는 '고구려후(侯) 추'와 동일한 인물이라는 설이 제기되기도 한다. 《삼국사기》에선 이 '추'라는 인물은 우리 측(고구려) 장수 연비(延丕)라고 적혀있다. 유리명왕 본기에 자료가 존재한다.

성씨에 대한 논쟁에서 고려해야 할 것은 중국식의 성씨 자체는 고구려에서 이후에 쓰였으며 조상들에게는 추숭의 의미로 없던 성을 붙였을 가능성이 높다. 즉 주몽은 그냥 주몽으로 불렸지 살아있을때 해주몽이든 고주몽이든 불렸을 리가 없다.

5.3. 백제의 태조?[편집]

일본의 사서 《속일본기》나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백제의 왕족, 귀족들은 백제 태조 도모대왕, 주몽의 다른 이름 혹은 일본식 발음인 도모를 백제의 태조라고 기록하였다.

황태후의 선조는 백제 무령왕의 아들인 순타태자(純陀太子)에서 나왔다. 황태후는 용모가 덕스럽고 정숙하여 일찍이 명성이 뛰어났다. 코닌 덴노가 아직 즉위하지 않았을 때 혼인해서 맞아들여 지금의 덴노와 한량친왕(旱良親王)과 능등내친왕(能登內親王)을 낳았다. 보귀(寶龜)라는 연호를 사용하던 기간[32] 중에 성(姓)을 (야마토에서) 고야조신(高野朝臣, 타카노 니가사[33])으로 고쳤다. 지금의 천황이 즉위하여 황태부인(皇太夫人)이라 하였는데, 연력 9년에 추존(追尊)하여 황태후라 하였다.

그 백제의 원조(遠祖)인 도모왕(都慕王)은 하백의 딸이 해의 정기에 감응하여 태어났는데, 황태후는 곧 그의 후손이다.


《속일본기》 연력 8년


백제인들은 온조가 아니라 온조의 아버지 주몽을 시조로 보고 태조라는 묘호를 올렸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정작 고구려인들은 주몽이 아니라 6대 왕을 태조대왕이라 칭했다는 점이 특이사항.

다만 《삼국사기》에 보장왕의 아들이라 추정되는 안승의 조상이 태조 중모왕이라 나오는데 중모는 주몽의 다른 음차로 여겨지며 이럴 경우 고구려의 태조동명성왕이 되지만 태조왕과의 기록과 모순이 생긴다.

6. 삼국사기 기록[편집]

《삼국사기》 시조 동명성왕 본기
一年 동명성왕이 고구려를 건국하다.
二年夏六月 비류국이 고구려에 항복하다.
三年春三月 황룡이 나타나다.
三年秋七月 경사스런 구름이 나타나다.
四年夏四月 짙은 구름과 안개가 끼다.
四年秋七月 성곽과 궁실을 짓다.
六年秋八月 신기한 참새가 궁전에 모이다.
六年冬十月 행인국을 정복하다.
十年秋九月 난새가 왕대에 모이다.
十年冬十一月 북옥저를 멸망시키고 성읍으로 삼다.
十四年秋八月 동명성왕의 어머니 유화 부인이 동부여에서 죽다.
十四年冬十月 부여에 토산물을 주다.
十九年夏四月 왕자 유리가 부여에서 도망해오다.
十九年秋九月 동명성왕이 죽다.

7. 구삼국사 기록[편집]

《동국이상국전집》 제3권 고율시 동명왕편
구삼국사는 유실되었으나 이규보의 동이이상국전집에 남아있는 동명왕 본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참고로 이규보가 남긴 기록에는 년도가 정확히 언급되지 않는다. 원본에는 남아있을지도?

一年 왕이 고구려를 건국하다.
?? 비류국왕 송양과 활쏘기를 하였다.
?? 비류국에서 을 훔쳤다.
?? 六月 비류국이 고구려에 항복하다.
?? 七月 검은 구름이 끼었고 일주일후 궁궐이 완성되었다.
??[34] 四月 부여에서 도망쳐온 유리를 태자로 삼다.
?? 九月 왕이 하늘로 승천하고 내려오지 않았다.

8. 훗날 매체에서의 동명성왕[편집]

  • 고려 중후기 여러 문인들. 이규보, 이색 등에 의해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 점프 시즌 1 첫 에피소드에서 주몽이 등장하였다. 이 때는 설화에서의 주몽 이야기를 그대로 참조하였다. 후에 시즌 2 소서노 편에서도 조연으로 등장하였는데 이 때는 드라마 주몽을 어느 정도 방영되었다.

  • KBS 사극 근초고왕 1화에 백제의 기원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주몽이 등장했다. 이덕화가 연기한 이 주몽은 활은 하나도 안 쏘고 칼질만 보여준다. 오히려 명사수 액션을 보여준 건 정애리가 연기한 소서노다.

  • 게임 바람의나라에서는 거의 주인공급 인물이다. 천명부터 시작해서 바람연대기, 영웅용전, 격전지 모두 등장한다. 바람연대기의 경우 진짜 주인공이다. 바람연대기가 생길 즈음 외형이 새로 바꼈다.

  • 북한 조선4.26만화영화촬영소에서 2016년에 새롭게 동명성왕과 고구려 건국 과정을 담은 3D 에니메이션인 '고주몽'이 만들어졌다. 현재까지 10부작이 나왔는데, 1부 ~ 10부의 내용은 프롤로그 격인 해모수의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주몽의 탄생과 성장 과정, 그리고 주몽이 부여 왕궁을 탈출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 <만인보> 1권에서 그를 다룬 시가 있다. 제목은 사람 이름과 같은 '고주몽'.

    가라
    가서 네 나라를 세워라

    한밤중 어머니는 아들을 보냈다
    이 아들을 붙들지 않는 어머니는 벼랑이었다

    졸본땅 비류수 기슭에 나라가 태어났다

    이 땅의 아들이거든
    아들이여
    가서 네 나라의 말로 말하라
    아버지를 버려라
    아버지를 버려라
    아버지의 성을 버리고 네 성을 칭하라

9. 관련 인물[편집]

10. 관련 항목[편집]


[1] 한국의 사서인 《삼국사기》에선 고구려 후손 안승의 조상 "태조 중모왕"으로, 일본의 사서인 《신찬성씨록》에선 백제 임금 온조의 부황 "태조 도모대왕" 으로 나와 있다.[2]삼국사기》의 기록. 당연하지만 중국에서도 묘호는 일반적인 것이 아니었기에 태조라는 묘호가 붙은건 먼 훗날의 일이다.[3] 동사강목에 따르면 부여에서 거주할 때의 성은 해씨이며 고씨는 고구려를 건국할 때 바꾼거라고 한다.[4] 삼국사기 기록.[5] 광개토왕릉비 기록. 같은 지역 일 수도 있다.[6] 위키의 나이기준은 만나이다.[7] 이는 물론 확인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다.[8] 둘이 비슷한 연배지만 한쪽은 명확하게 존재하는 인물로 확인되고, 다른 한명은 그 존재의 진위가 논란이 되는 것을 보면 역사 기록과 그 보존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다만 한국의 고대사 기록이 아쉬운건 사실이나, 기록 덕후였던 로마와 그리스를 제외하면 중국과 한반도 만큼 고대 기록이 남은 곳도 드물다. 애초에 역사서를 기록으로 남기자는 생각을 가진 곳도 드문데다 전쟁통 속에 사라지거나, 책이 오래되어 부식되버리는 경우들도 있기 때문.[9] 일부에서는 고주몽이라는 이름에서 '주'는 "난쟁이 주(侏)"이며 '몽'은 어리석음을 뜻하는 "우매할 몽(蒙)"을 쓰기에 중국 쪽이 추모왕을 비하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름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상식적으로 중국 측 기록에서 이민족의 우두머리를 좋게 표현할 이유도 없고.[10] 일본어 음독은 とも. 출처 : http://ja.wikipedia.org/wiki/%E6%B8%A9%E7%A5%9A%E7%8E%8B[11] 일본 나라 시대에 만들어진 성씨에 관한 책[12] 하백을 의미.[13] 기원전 58년.[14] 동국이상국집에 실린 동명왕 편의 일부이기도 하다.[15] 후손을 뜻할 수도 있다.[16] 아마도 국가의 정통성을 부여받기 위한 일종의 장치로 추정된다. 나라의 시조를 하늘의 자손이라고 하는 일은 고대 국가에서 상당히 흔했기 때문. 또한 해모수의 '하늘'과 유화의 '물'이라는 상징으로 볼 때, 고구려의 뿌리는 농경 사회라는 설이 있다.[17] 삼국유사 왕력 동명왕 부분에서는 주몽이 '단군(壇君)의 아들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단군은 단군왕검과는 한자가 다르다.[18] 후의 대소왕.[19] 이때 뱃속의 아이를 위해 자신의 아들임을 증명할 부러진 칼조각을 남기는데, 관련된 내용이 그리스테세우스에 대한 설화와 거의 같다. 위에 소나무(기둥)가 있는 칠각형 돌(주춧돌) 아래에 부러진 칼의 일부를 묻어뒀으니 찾을 나이가 되거든 그 칼 조각을 가지고 오라는 것.[20] 기록에 의하면, 그녀는 재물이 많아 주몽의 건국에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21] “국가의 기업이 새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고각(鼓角)의 위의(威儀)가 없어서 비류(沸流)의 사자가 왕래함에 내가 왕의 예로 맞고 보내지 못하니 그 까닭으로 나를 가볍게 여기는 것이다.” 여기서 고각은 뿔피리를 말하며, 위의는 위엄있는 몸가짐이나 차림새를 말한다.[22] 올바른 정치.[23]삼국사기》의 무덤을 의미하는듯 하다.[24] '《제왕운기》 하권 고구려기' 중 인용했다.[25] 고려 성종, 숙종 등 임금들의 기사에 나옴.[26] 다른 곳에서는 용을 타고 올라갔다는 내용의 전설이 전해진다.[27] 작가 최인호의 소설 잃어버린 왕국에서는 이 전설을 차용해서 요동성에 창과 과 갑옷이 있는 사당이 있었고 요동성은 이것만 믿다가 털린 후(...) 사당과 유물이 통째로 불에 타는 걸로 서술한다. 그런데 작중에서 활은 공간 이동을 해서 안시성으로 날라간후에 이세민을 저격하여 최종적으로 눈을 멀게하고 산산히 부서진다.[28] 요동성은 크고 중요한 성이긴 했지만 최외곽 지역의 성이자 비교적 후기에 편입되었던 곳으로 고구려의 전통적인 영토는 아니었다. 따라서 고구려의 내지에는 더 상징성이 큰 시설들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29] 고려도경의 내용에 의하면 고려 중기에도 고구려시대와 비슷한 방식의 초상, 상 숭배가 내려오고 있었던 걸로 추정된다.[30] 위만은 찬탈자로 취급돼서 제외되었다.[31]삼국유사·왕력》[32] 770년 ∼ 780년.[33] たかの の にいがさ[34] 홍가 4년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기원전 17년이다.[35] 다만 고증은 엉망이다. 단순히 역사적인 인과관계만이 아니라 일반 상식으로 봐도 인과관계가 어긋날 정도. 그나마 중국이 동북공정 드립이 한창 주목받던 시기였기 때문에, '고구려가 부여와 연합해서 한을 무찌른다'는 말도 안 되는 결론으로 났음에도 시청률은 대박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