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교동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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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
2.1. 민주당계 정당 내 동교동계
2.1.1. 더불어민주당 내 동교동계2.1.2. 민주평화당 내 동교동계
2.2. 보수정당 내 동교동계
2.2.1. 자유한국당 내 동교동계2.2.2. 바른미래당 내 동교동계
3. 주요 인물4.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민주당계 정당의 거대한 뿌리.

김대중 전 대통령의 직계 정치세력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김대중이 정치인 생활을 하면서 대부분 동교동에서 살았기에[1] 동교동계라는 이름이 붙었다. 1991년에 김대중의 신민주연합당과 이기택의 민주당이 합당했을 때는 잠깐 동안 신민계로 불렸다. 2003년 1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앞으로 어떤 일이 있더라도 '동교동계'라는 말이 나와서도 안 되고, 모임이 있어서도 안 되며,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해서도 안 된다."며 동교동계의 해체를 지시하였다.기사 그럼에도 미디어에서 현재까지도 김대중과 조금의 연관이 있는 이들을 가리켜 동교동계라고 부른다.

2. 상세[편집]

김영삼이 이끄는 상도동계 및 재야민주화운동세력과 연대해서 박정희/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에 맞서서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그러나 1987년 6월 항쟁 이후 13대 대선을 앞두고 양김 대선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면서 상도동계와는 갈라서고 독자적으로 평화민주당을 창당하였다.

결국 양김 분열의 결과로 노태우가 어부지리로 당선되었고, 김영삼과 상도동계가 1990년 삼당합당에 참여하자 양 세력은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이 된다. 김영삼이 이끄는 상도동계가 부산, 경남 이른바 PK를 지지기반으로 했다면, 김대중이 이끄는 동교동계는 지역을 기반으로 하였다. 결국 김영삼에 이어 1997년외환위기의 여파속에 DJP연합으로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을 이루어냈다.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에는 정권재창출을 위해서 각개약진하였다. 권노갑을 비롯한 상당수 동교동계 주류들은 이인제를 지원하였고, 동교동계의 또다른 실력자 한화갑은 스스로 대선후보 경선에 출마했다.[2] 하지만 양쪽 다 노사모를 앞세운 노무현 바람에 나가 떨어졌다.[3]

당권을 쥔 동교동계는 민주당내 비주류였던 노무현이 대선후보 경선에서 승리한 이후에도 끊임없이 갈등하였다. 03시계 파동과 2002년 지방선거 참패로 노무현의 지지율이 급하락하자, 동교동계 일부는 아예 후단협에 가담해서 대선후보 교체를 주장[4][5]하였고 동교동계의 원로들도 이들의 행동을 방관하면서 당내분이 가속화되었다. 결국 갈등을 임시로 봉합하고 대선에 나섰지만 동교동계는 선거운동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고, 대선은 노무현 후보 캠프와 개혁당/노사모 위주로 치루게 된다.

그리고 이런 갈등은 노무현의 기적적인 대선승리 직후부터 다시 불거지기 시작해서, 참여정부 출범이후 2003년 정치개혁을 둘러싼 논의에서 대폭발한다. 천정배/신기남/정동영/이해찬 등이 주도하는 범노무현계가 신당창당 수준의 과감한 정치개혁을 주장하자, 당내 기득권을 쥐고 있던 동교동계가 강력반발하였고, 여기에 불법 대북송금 사건 특검 문제로[6]기존의 전통적인 민주당 지지층과 호남민심이 악화되자 동교동계와 범노무현계는 완전히 갈라서게 된다. 친노세력이 2003년 11월에 한나라당 개혁파들을 끌어모으고 열린우리당으로 분당해나가자, 동교동계가 주도하던 민주당은 한나라당, 자민련과 손잡고 노무현 대통령 탄핵을 주도했다가 엄청난 역풍을 맞고 17대 총선에서 대몰락하였다. 열린우리당이 152석을 얻는 동안에 새천년민주당은 겨우 9석을 얻었다.

17대 총선 이후 권노갑 등 동교동계 1세대들은 정치일선에서 은퇴하였다. 하지만 한화갑 등은 여전히 민주당을 지키다가[7] 열린우리당의 급속한 몰락으로[8] 2007년 17대 대선과 2008년 18대 총선 과정에서 친노세력과 다시 손을 잡았지만, 감정의 앙금은 여전했다. 결국 계속 당내에서 충돌하다가 20대 총선을 앞두고 동교동계 중 상당수가 국민의당에 합류했다. 일부는 17대 대선과 18대 대선을 앞두고는 순차적으로 이명박, 박근혜 지지를 선언하면서 한나라당(새누리당)으로 입당하였다.[9]

이러한 박근혜 정부까지의 정치적 상황의 변화를 통해 대략 김대중 대통령의 퇴임과 17대 총선의 대몰락 이후로 사실상 단일한 정치세력으로서의 동교동계는 사라졌다고 볼 수 있다. 워낙 오래전부터 활동하던 사람들이라 동교동계의 핵심인사들 대다수는 고령으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상태이고, 현직으로 활동하는 사람들도 각자의 입장에 따라서 뿔뿔히 흩어졌지만, 그들도 대부분 고령의 나이. 일례로 미디어에서 동교동계의 막내로 분류하는 설훈 의원이 이미 60대 초반이다. 주로 1970~80년대 김대중을 따라서 민주화운동에 나섰던 인사들이 18대 총선 이후로 미디어를 통해 동교동계로 분류되고 있다. 한편 70~80년대 민주화운동에 나섰던 인사들외에도 국민의 정부 시기에 김대중 대통령을 따라 정치에 입문한 인사들도 상당히 많지만, 그들 스스로 '동교동계'로 칭하지는 않는다. 대표적으로 6회 지선당시 당선되었던 더불어민주당 소속의 고양시장 최성이 그 예.

박근혜 정부이후엔 동교동계 인사들은 전보다 각 당으로 흩어지는 양상을 심하게 드러내었다.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의 당선을 도운 일부 동교동계 인사들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이후에도 보수정당이며 새누리당을 계승한 자유한국당에 잔류하였다. 한편 새정치민주연합 분당이후 동교동계가 가장 많이 있었던 국민의당에서는 2017년 말엽, 안철수 대표가 추진한 국민의당-바른정당 합당과 관련해 심한 이견차를 보였고, 결국 국민의당에 속했던 대부분의 동교동계는 통합반대를 표명하며 민주평화당으로 떨어져나갔다. 박주선 국회 부의장, 이동섭 의원을 포함한 일부 동교동계 인사들만이 안철수 대표와 궤를 같이 하며 통합 찬성측에 붙어 신설합당과정을 통해 바른미래당 창당과정에 참여했다.

2010년대의 이러한 정치격변의 결과로 현직에 활동하는 동교동계 정치인들은 주로 더불어민주당과 민주평화당에 분포되어 있는데, 더불어민주당에는 문희상, 설훈, 김한정[10], 이훈 등이, 민주평화당에는 박지원(1942), 박준영, 최경환(1959)등이 있다. 일반인의 관점에선 두 정당의 이념이 비슷해보여 두 정당의 동교동계 인사들간의 이념 차이가 없어보이나 엄연히 차이가 존재한다.[11] 더불어민주당 內 동교동계는 노무현 前 대통령에 대해서 어느정도 인정하거나 친노성향을 가진 동교동계이고, 민주평화당 內 동교동계는 비노, 비문 성향을 가진 동교동계이다.

2.1. 민주당계 정당 내 동교동계[편집]

애초에 동교동계가 김대중 전 대통령 중심의 계파였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민주당계의 거물이다보니 대부분의 동교동계는 민주당계 정당에 있다. 인지도가 있는 대부분의 동교동계는 민주평화당에 있지만, 일반적으로 인지도가 없는 상당수의 동교동계는 더불어민주당에 오히려 많은 편이다.

2.1.1. 더불어민주당 내 동교동계[편집]

더불어민주당에는 새정치민주연합 분당이후 잔류한 동교동계 인물들이 속하는데, 원로 정치인 그룹으로는 이용희 전 의원[12], 현역급 정치인으로는 문희상 의원, 설훈 의원[13], 이강래 전 의원, 이해찬 의원[14], 김한정 의원, 이훈 의원, 윤호중 의원 등이 있다.[15] 현역 국회의원은 아니지만 김대중의 막내아들인 김홍걸 씨가 더불어민주당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국토교통부에서 정책전문위원을 역임하는 김우철 위원도[16] 더불어민주당에서 활동하고 있다.

2.1.2. 민주평화당 내 동교동계[편집]

민주평화당새정치민주연합 분당, 국민의당-바른정당 합당이후 새정치민주연합,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에서 나온 비노, 비문, 비안계 동교동계 정치인들이 속해있는 정당이다. 당 내의 동교동계 인사들은 원로 정치인 그룹에서는 동교동계의 맏형 노릇을 했던 권노갑을 비롯해 정대철, 김옥두, 이훈평, 박양수, 윤철상, 송석찬 전 의원, 현역 정치인 중에서는 김대중 정부 시절 비서실장과 장관까지 했던 박지원 의원, 박준영 전 전라남도지사, 최경환(1959) 의원 등이 대표적이다.

2.2. 보수정당 내 동교동계[편집]

동교동계는 민주당계 정당의 주축이었기에 전체계파가 민주당계열에 있었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의 계파 해체선언,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등으로 동교동계는 각자의 입장과 이익에 따라 흩어지는 현상이 가속화되었다. 그래서 동교동계 인물들이 보수정당에 가는 경우가 특히, 박근혜 정부이후 두드러졌다.

2.2.1. 자유한국당 내 동교동계[편집]

한화갑, 한광옥, 김경재, 김원길, 안동선, 이윤수 전 의원이 있다. 이들은 모두 친 DJ 인사였으나 김대중 대통령이 퇴임하고 노무현의 대선승리 직후, 민주당계 정당의 주도권을 잃었다. 일부는 친노가 중심이 된 민주통합당에 반발하여 정통민주당을 만들기도 했으나 실패했다. 이 6명의 원로는 모두 2012년 18대 대선에서 당시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후보를 지지했었으며[17] 김경재, 한광옥 전 의원은 아예 새누리당에 입당했다. 이 중 한광옥 전 의원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실장으로 일했다. 다만 한화갑은 새누리당에 입당하지는 않았다.

2.2.2. 바른미래당 내 동교동계[편집]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가 2017년 말엽 추진한 국민의당-바른정당 합당으로 당내 상당수의 동교동계가 탈당하였다. 그 후 당시 현직에 있던 박주선 국회 부의장과 친안으로도 분류되는 이동섭 의원을 필두로 한 잔류 동교동계는 통합파에 합류했고, 국민의당 통합파는 바른정당과 합당, 바른미래당이라는 신생정당을 창당한다. 지난날 국민의당에 입당을 거부당했던[18] 전력이 있는 장성민 전 의원은 신당 창당 이후 안철수의 인재영입을 통해 합류, 당 내 동교동계 인사인 박주선 국회 부의장 겸 공동대표, 이동섭 의원에 이어 바른미래당에 소속된 동교동계가 되었다.

3. 주요 인물[편집]

4. 둘러보기[편집]

[1] 평생의 라이벌 김영삼 전 대통령이 상도동에서만 살았던 것과 달리 김대중은 동교동을 떠난 적이 있다. 1995년, 정계 은퇴를 번복하고 귀국하는 과정에서 동교동 자택을 장남 김홍일 전 의원에게 넘기고 자택을 고양시 정발산동으로 옮겨 거주하기도 했다. 그러나 2003년 퇴임 이후 동교동으로 돌아왔고, 동교동 자택에서 생의 마지막을 보냈다.[2] 애초에 야당시절부터 권노갑과 한화갑 소위 양갑 사이의 갈등은 유명했다. 다만 그떄까지는 김대중이 직접 당과 동교동계를 통제하면서 큰 문제가 불거지지 않았을 뿐. 하지만 대통령 임기말이 되자 정계은퇴를 앞둔 김대중이 "이제 알아서들 하라"면서 손을 놔버리자 동교동계가 양갑을 따라서 바로 쪼개져 버린 것이다.[3] 권노갑이 김근태에게 뇌물을 준 것이 결정타였다.[4] 동교동계뿐만 아니라, DJP연합과 국민의 정부 출범과정에서 유입된 구 정권 시절의 관료들, 기업인, 군 출신들 같은 당내 보수파들이 후단협으로 결집하였다. 당시 김대중 정부와 민주당은 대선 승리와 안정적인 국정운영을 위해서 이념, 노선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있는 대로 끌어모았기 때문에 한나라당보다 더 보수적인 인사부터, 재야 출신의 급진개혁파들까지 스펙트럼이 엄청나게 넓었다.[5] 이 때를 계기로 이인제, 안동선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해서 자민련으로 갔고, 원유철, 전용학, 강성구는 한나라당으로 갔다.[6] 이때 양갑과는 별개의 라인이었던 박지원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구속된다. 수감생활 도중에 녹내장이 악화되어 실명위기에 처했었으나, 구속집행정지 신청이 받아들여져서 치료 받을 수 있게 되었다.[7] 김홍일과 한화갑은 2006년말에 구속되었고 의원직을 상실했다.[8] 김홍업이 이 과정에서 통합신당으로 들어갔다. 다만 박상천은 이인제와 같이 대선을 완주하고 구 민주계의 주주가 되어 통합신당으로 들어간다.[9] 대표적인 사람들이 한광옥김경재. 한광옥박근혜 전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실장으로 근무했고 김경재는 친박 관제 데모를 일삼았던 보수단체 한국자유총연맹의 회장이 됐다.[10] 이 사람은 DJ의 비서진 출신인지라 동교동 라인이라고만 보기는 어렵다.[11] 이 차이는 새정치민주연합 분당을 통해 극명하게 드러났다.[12] 김상현 당 상임고문은 2018년 4월에 세상을 떠났다. 특이하게도 김상현은 동교동계였음에도 김대중과의 사이가 원만치는 않았다.[13] 여담으로 설훈 의원은 이와 동시에 민평련 소속이다.[14] 이해찬 의원의 경우에는 출신은 동교동계이긴 하지만, 정치적 입장에서는 동교동계로 규정되긴 어렵다. 되려 정통 친노, 친문으로 분류된다.[15] 문희상, 이해찬은 친노계로 유입되었고, 설훈은 민평련에 걸쳐있다.[16] 설훈, 김한정 국회위원 두 사람과 함께 김홍걸 교수의 더민주 행을 제안한 3인방으로 꼽힌다.[17] 친박으로 바뀌었다기 보다는 반노 성향이 진해져 민주당계 정당과 멀어진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18] 19대 대선에서 국민의당 대선후보 경선에 참여하려 입당을 신청했으나 5.18 북한개입설 보도사건의 당사자로 지목받고 입당을 거부받은 후 국민대통합당을 직접 창당, 대선에 출마했지만 9위로 낙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