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유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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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반적인 의미2. 부족한 대우 3. 독립유공자 대우의 현실4. 누가 독립 유공자인가5. 또 다른 독립유공자들

1. 일반적인 의미[편집]

지금 우리가 보는 이 문서를 한글로 읽을 수 있도록 해주시고, 자랑스러운 우리말로 대화를 나눌 수 있으며, 일본 이름이 아닌 우리 이름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대한민국을 수호하신 분들

獨立有功者. 국가의 독립을 위해 노력한 자. 독립운동을 한 자.
대한민국에서는 일제강점기 때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운 사람을 뜻한다. 대한민국 국가보훈처에서는 그 대상을 아래와 같이 지정하고 있다(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 제4조 각 호).

순국선열:
일제의 국권침탈(1895년)전후로부터 1945년8월14일까지 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하기 위하여 항거하다가 그 항거로 인하여 순국한 자로서 그 공로로 건국훈장·건국포장 또는 대통령표창을 받은 자

애국지사: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로부터 1945년 8월14일까지 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하기 위하여 항거한 사실이 있는 자로서 그 공로로 건국훈장·건국포장 또는 대통령표창을 받은 자


한 마디로 나라를 위해 목숨을 초개같이 여긴 훌륭한 분들. 일제의 독립운동가에 대한 탄압을 보면 이들의 용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독립유공자들은 혈통이 조선 왕조를 받들던 큰 세력의 선비,양반들의 가문이 많다.그들은 일제강점기때에는 신분제가 철폐되어 가계를 지탱하던 사노비들이 자유민들이 되고 급격히 가난해지는 수탈도겪었으며 조선 왕조를 되살린다는 각오로 처절한 독립운동을 벌였다.

2. 부족한 대우 [편집]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이 국가의 예우를 받기까지는 해방이 되고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한다는 뒤집힌 현실은 여전하다.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겪고 있는 가난의 서러움, 교육받지 못한 억울함, 그 부끄럽고 죄송스런 현실을 그대로 두고 나라다운 나라라고 할 수 없다."#
-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 문재인


독립유공자의 자녀 및 손자/녀[1]에게는 대학 등록금 면제 혜택이 주어진다고는 하지만, 사실 후손들에 대한 대우는 썩 좋지 못하다. 한국 정부가 일제 통치시기 행정의 거의 대부분을 일제강점기에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던 친일파들이나 반강제적으로 일본에 협력한 사람들을 관료로 쓴 반면 독립운동가들은 독립을 위해 집도 절도 고향도 다 버리고 외국(특히 국부군)에 나가 투쟁하는 경우가 다반사인데다 호적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경우도 상당하였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다시 한 번 하지는 욕 먹어야...

거기에 한국전쟁으로 나라 꼴이 개판이 되고 온 나라 분위기가 "빨갱이를 죽입시다 빨갱이는 나의 원수"가 되어 버린 시점에서 오히려 독립운동을 했어도 좌익쪽에서 했으면 목이 성한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2][3] 거기다가 독립유공자 후손에게 주던 공무원시험 가산점 10%가 위헌 판결을 받아 반토막(5%)이 된 일도 있다.

현재 독립유공자의 후손은 손자녀까지 일부 혜택을 받을 수 있지만, 독립운동 여부를 증명하는 것자체가 쉬운 일이 아닐뿐더러[4], 독립 후 70년이란 세월이 지나며 현재 혜택을 받을 수 있는 후손의 수는 그다지 많지 않다. 예를 들어 일제강점기 초기에 활동한 독립운동가의 경우 그 후손이 고손자 혹은 6대손까지 내려온 경우도 있다고 한다. 또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가 인정받은 것도 비교적 최근의 일이라서, 설사 독립유공자로 힘들게 인정받았어도 그 후손이 조상의 행적에 대한 보상을 받은 일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이에 대해 유족의 범위를 증손까지 확대하고, 유공자로 지정될 당시 손자녀도 생존해 있지 않다면 그 후손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하는 개정안이 국회에서 발의되었으나 재정적 문제와 다른 국가유공자들과의 형평성 문제[5]로 3년이 넘도록 계류 중이다.

박정희는 독립운동가들을 해방 후 나라 망신시킨 자들이자 사회혼란의 주범으로 매도하였다.#[6]

그래서 당시에 비교적 대우를 받지 못한 분들의 후손 되시는 분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차라리 친일파가 낫다고 하거나, 독립 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라고 말씀하시기도 한다.[7]그래도 완전히 무시하고 대우를 안해주는 것은 아니라서 대학교에서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이런 분들의 자손되는 독립유공자 전형[8]으로 온 친구들을 간혹 볼 수 있으니 먹을 거라도 잘 사주자. (물론 가짜 독립운동가에 대한 서훈이 논란이 되긴 한다.)

그래도 세상이 완전히 무정한 것은 아닌지라 3대가 망한다는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면서 성공한 사람들이 있기는 하다. 초대 국무총리국방장관이범석 장군, 손정도 목사의 아들이자 초대 해군참모총장, 5대 국방장관을 지낸 손원일 제독과 그의 동생, 대한민국 공군의 아버지이자 초대 국방차관, 2대 공군참모총장을 지낸 최용덕 장군, 6대 공군참모총장 이었던 김신 장군을 비롯한 김구 선생의 후손들, 안창호 선생의 아들 안필립 선생[9], 안중근 의사의 사촌이자 초대 육군사관학교 교장인 안춘생 장군, 우당 이회영선생의 손자이자 더불어민주당의 원내대표였던 이종걸 의원, 조홍희 등. 뭐 없진 않다. 그런데 이 사람들 성공한 건 그냥 자기가 잘 해서 성공한거라 국가의 보훈 정책과는 1g도 관계 없고, 그마저도 독립운동가 후손의 비율 중에서는 소수다. [10]

2016년 현재의 한국엔 친일파 후손들이 다 해먹고 독립유공자들은 높은 위치에 못 올라갔다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독립유공자들과 그들의 후손 거의 다수가 빈곤계층으로 살고 있는 건 사실이나, 한국은 전쟁 이후 수없이 많은 격변을 거친 나라이기 때문에[11] 그 예전의 엘리트가 지금의 엘리트일 가능성은 낮다. 사실 지금의 엘리트들은 대부분 일제부역자 세대가 아니라 그들의 한 단계 후 세대이다. 즉 아버지 세대에서 이뤄놓은 걸로 묻어가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자수성가 타입이라는 뜻. 정치계도 군사정권이 끝나면서 대부분 민주화운동에 힘쓴 인사들로 교체되었다. 심지어 보수정당이라 칭하고 노태우 세력 등과 결집한 3당 합당의 후계자 한나라당(지금의 새누리당)마저도 1980년대 쯤의 민주화 투사인 소위 '386' 세대 다수가 포진해 있다. 애초에 3당합당 후 김영삼이 정권을 잡으며 독재정권 인물들을 쫓아버리고 잡아들이는 식으로 물갈이가 되며, 현재 새누리당은 김영삼을 따라 민주화 운동에 투신한 상도동계의 색을 띈지 오래다.

3. 독립유공자 대우의 현실[편집]

친일파의 후손들이 슈퍼 엘리트로서 한국 사회를 좌지우지하고 있냐면 그건 현실과는 다른데 우선 위에서 언급한 뉴스타파의 조사에 따르면 친일파의 후손중에 엘리트가 많은 건 사실이나 사회에 강한 영향력을 지닌, 즉 슈퍼 엘리트급의 존재는 생각만큼 많지가 않다. 또한 현대 대한민국 사회는 친일파에 대한 반감이 강하다. 대놓고 과거 친일 행각에 대해 미화하거나 합리화가 쉽지만은 않다.[12] 실제 친일 행적이 드러난 선친이나 조부 때문에 사회적인 인지도를 말아먹은 이들도 한 둘이 아니다. 요컨대 그들은 현재 시점에선 그냥 돈 많은 집 2세~3세라고 볼 수 있다. 결론만 이야기하자면 "친일파의 후손은 잘 살고 독립유공자들의 후손들은 힘들다"라는 통념이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그러나 친일파 후손이 대놓고 이 사회를 흔들고 있냐면 그건 그렇지 않다는 쪽에 가깝다. 실제 논란이 된 친일파 후손들만 해도 자기 조상이 애국적이었다느니, 시대의 비극적인 희생양이었다느니 되먹지 않은 변명을 내놓았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13]

독립운동가 후손의 75%가 월소득 200만원 미만이고 심지어 100만원 미만이 30%였다는 한국일보의 통계자료가 있다.#그 이유를 정부 수립 초기의 형편 없는 대우로 꼽고 있으며, 개선된 이후에도 자손들에게는 부모의 가난이 대물림된 것으로 보인다. 정부 수립 초기에는 일부 권력형 친일 의혹이 있던 사람이 아니면 대부분 운이 좋은 사람들이 득세했지, 그 외에는 전부 가난 속에 살았다. 특히 전쟁 후에는 더더욱.
또한 친일 인명사전에 등록된 1000여명의 자손들을 조사한 결과 그들 대부분이 엘리트로서 부유한 삶을 살고 있다 한다. # 기사 중간에 언급관련영상

이와 같이 기본적으로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하고 매국하면 3대가 흥한다"는 자조적 편견은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그러나 물론 예외도 있다. 독립운동가들도 웬만한 사람이 아는 유명인들의 경우 못산다와는 거리가 멀다. 심지어 친일파 집안들 다수가 해방 전후로 독립운동가나 그 가문들과 인맥으로 연결된 경우도 흔하다. 예를 들면. 홍사익 중장이 지청천의 일가의 생계를 살펴줬다는 이야기 라던지, 김구 선생 또한 해방 후에 최창학이라는 친일 광산 재벌의 정치지원을 받았다.[14] 손원일제독의 아버지인 손정도 목사는 윤치호 집안과 사돈을 맺었다.

김구 선생 집안의 경우도, 국내 재벌가와 연계되어 있을 정도로 빵빵하다.[15][16] 윤봉길 의사의 손자 윤주경은 독립기념관장이다. 안중근 의사의 집안 또한, 김구 선생의 집안과 연결되어 있으며,[17] 조카인 안진생은 박정희 정부 하에서 외교관, 안춘생은 군 장성을 거쳐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실제 네임드 급 독립운동가 후손은 형편이나 사정이 어려우면 나라에서 여러 모로 도움을 준다.

대한민국 정부가 보훈대상자에 대해서 신경 쓸 정도로 경제 기반을 이루어 낸 것이 1990년대부터였다. 개뿔도 없던 1960년대에는 국가 유공자라는 명패 하나 달랑 주고 끝냈다는 서글픈 이야기가 전해진다. 다만 60~70년대에는 자식이나 후손의 등록금 지원과 같은 최소한의 지원은 해줬다. 혜택을 받지 못한 정도는 아니다.

일단 그 대우가 적절한 수준이냐는 것과는 별개로 유공자들에 대한 대우는 나아지고는 있긴 하다. 2015년 6월에는 금전적인 지원도 6배까지 늘리고, 해외에 있는 독립유공자 후손이 귀국해서 정착하는데 최대 7천만원의 지원을 해주기로 결정했다. 제대로 증명만 되면 누구든 혜택을 받는다. 그러니까 이 글을 보는 위키러들 중에 집안에 조부께서 유명한 독립운동가 모씨와 교류한 편지가 있다거나, 독립군자금 얼마를 주어 고맙네 하는 답신이 있으면 곧바로 보훈처에 연락하도록 하자.

그리고 일반 유공자도 마찬가지지만 독립유공자로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제대로 검증이 되어야 하는 게 현실이다. 이 때문에 안중근이나 윤봉길 급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별 문제 없이 혜택을 받지만, 임정에서 군자금운송하고, 연락책 노릇을 했던 고만고만한 분들의 후손들은 제대로 검증받기 힘들다. 독립운동의 특성상 보안이 남다를 수 밖에 없으니. 그나마 잡혀서 처벌받고 투옥된 기록이 있으면 낫지만, 007급의 활약으로 깔끔하게 해방을 맞이하신 분들은 안습이 될 수 밖에 없다. 당연히 후손들 입장에서도 조상님의 업적을 밝히기 몹시 골룸해진다. 일을 너무 잘해도 문제

안타깝지만 검증을 제대로 해야 하는 이유가 '가짜'가 혜택을 받아선 곤란하기 때문이다. 실제 독립운동가라고 서훈을 받았다가 나중에 친일로 전향한 게 밝혀져 서훈이 취소된 사례[18]도 존재한다. 더구나 엄청난 후폭풍을 일어날 수도 있다.

또한 친일파 후손들 만큼이나 독립운동가 후손들도 조상에 대해서 말하는 경우가 적다.[19] 조부의 애국심 때문에 3대가 망했네... 한탄해서 뻥긋 안 하는 부류도 있지만, "조부는 그 정도인데, 너는 왜 그것 밖에 못하냐?", "조부만큼 해야 하지 않느냐?"...라는 소리를 들어서 압박과 스트레스를 받는 일도 많기 때문이다.[20] 뿐만 아니라 혜택을 받아도 "조상 덕에 잘나가는 놈"이라고 비아냥 거리는 부류들 때문에 피곤한 게 현실이다.
정말 그런 놈들이 있는지 일반인들은 체감하지 못하겠지만, 실제 유공자들의 후손들이 이 문제 때문에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입으로는 나라를 위해 애쓴 분들 챙겨주자고 하지만, 정작 눈앞에서 조상 잘 둬서 혜택 받고 꿀 빠는 케이스를 보면 냉소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
물론 대놓고 욕은 안 하지만, 대학 등록금 면제나 군복무 몇 달 방위/공익 등으로 간단히 해결 받는 것[21]을 아니꼽게 여기고 당사자를 아싸로 만들거나 뒷담화하는 경우가 흔하다. 아예 당사자 앞에서 '니 할아버지(or 아버지)가 잘난 거지 니가 잘난 거냐?'며 디스하는 부류들도 있다.

실제로 윤봉길 의사 장손녀인 윤주경씨는 할아버지 팔아먹는 것 처럼 보일까봐 자기 입으로 자랑한 적은 없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실제로 해방되고 다들 어렵게 지내던 시절에 윤 의사의 미망인이 쥐꼬리만큼의 도움을 받은 것조차도 남편 뼈를 팔아 먹고 산다고 수근거린 인간들이 있다고. 거기다 독립유공자 후손들을 공짜나 바라며 사는 사람들 취급하는 인간들도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며 토로하기도 했다.## 가장 잘 알려진 독립유공자라 할 수 있는 윤봉길 의사 후손들이 이런 일을 겪었을 정도니, 후방지원이나 좌파계열 같이 여러가지 이유로 잘 알려지지 못한 독립유공자 후손들은 어땠을지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가장 가관인 것은 독립유공자 후손들의 대우를 잘해주자고 하면서도 자신들과 정치적 이해관계나 행보가 틀리다 싶으면 가차없이 좋지않개 취급을 하는 점이다. 김구 손자들처럼 뇌물을 받았다가 쇠고랑을 찬 것이라면 모를까.

위의 일련의 일로 고통을 받지 않았더라도 조상 후광 안 보고 열심히 사는 게 옳다고 보고 조상이야기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사실 대다수 독립운동가들이 무언가 댓가를 바라고 활동한 것이 아닌, 순수한 신념에서 활동한 것이기 때문.[22] 이에 후손들 역시 자수성가 하거나 그냥 말없이 평범하게 살고들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오히려 이런 분들은 보상문제가 언급되면 "금전 따위로 선조의 업적을 평가하려 들지 마라"며 불쾌하게 여기기도 한다. 괜히 윤주경씨가 친일파 후손 돈 뺏어서 독립운동가 후손들 도와주자는 일각의 주장에 회의적인 게 아니다.

그리고 친일파, 그것도 비교적 젊은 층들이 해방 이후 기용될 수 있었던 것은 서둘러 정부를 수립하고 나라의 기틀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입각한 독립운동가들의 선택 때문이었다.# 건군 초기 국군에서 만주군이나 일본군 출신 친일파들이 입대할 수 있었던 것도 이범석 장군이 "젊은 놈들은 늙은 것들에 비해 일제에 물들지 않았을 것이다" 라는 판단에 기용된 것이다. 김석원이 경력이 새파란 채병덕 같은 부류와 알력을 벌였던 것도 다 그 때문.

조만식 선생도 만주군이나 관동군 출신의 청년들을 데리고 다녔다. 대표적인 인물이 백선엽이다. 이승만은 기회주의적인 면도 매우 강했지만, 다른 독립운동가들 역시 극심한 좌우 대립 속에서 사회주의냐/민족주의냐에 따라 자신의 위치를 잡은 후 친일 경력이 있는 이들을 어찌되었든 나랏일에 끌어들였다. 독립운동가들은 절대 이상에만 빠진 이상주의자나 신념에만 빠져 현실을 못 보는 사람들이 아니었고, 국가 기틀잡기나 국제정세의 쓴맛을 아주 깊이 맛본 사람들이었다.[23]

4. 누가 독립 유공자인가[편집]

독립유공자에 선정될려면 일제강점기 당시 형벌을 받았다는 기록이 필요하다. 세상이 좋아져서 그런 기록들은 국가기록원의 독립운동가 판결문 목록#에서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그리고 조상이 독립운동가인데 아무도 몰라준다면 공훈전자사료관에서 신청을 받아준다. 여기도 독립운동가에 대한 자료가 가득하다.#

허나 기록을 찾기 수월해졌어도 여전히 누구를 독립유공자로 선정하냐는 아주 곤란한 문제다. 독립유공자 중에서는 항일 투쟁을 했으나 후에 친일파로 변절한 사람이나 애초부터 친일파였던 사람이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경우가 심심치 않게 있기 때문. 해결해야 할 사항. 계간 역사비평 초기에 이 관련 문제로 논문이 올라왔는데 양 진영에서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동명이인인데 버젓히 올라와 있어서 한쪽은 취소해야 하는데 말이 많아지자 두 사람 다 그대로 두기도 했다. 같이 옥살이 했는데 연장자인 사람과 연소자인 사람이 유공자 등급 차이가 나기도 하며, 안중근, 유관순이승만의 측근인 임병직이 동급인 이상한 등급 책정도 문제. 또한 기간에 따른 등급 책정으로 인한 문제도 있다. 1945년에 있었던 대구 집단 탈영 사건의 경우, 방조죄로 주변에서 도와준 여자도 중형을 내렸고 중간에 조선인 출신의 일본군 장교 몇명이 중재하지 않았으면 사형 직전까지도 갈 만한 사건이었다. 그런데 중형을 받고 3개월뒤 해방이 되는 바람에 등급이 낮다.

그리고 선반일, 후친일의 같은 변절자에 대한 문제도 있다. 뭐 처음에 반일한거 인정해 주는게 맞지 않겠냐는 말도 있고 그런 공이 실제로 있음은 인정해야겠지만, 동학농민운동 때 우금치에서 일본군에게 부상당한 이용구도 독립유공자겠네?[24]또 반대로 선친일, 후항일도 문제가 된다.만약이란건 없지만,이완용이 만약 죽기 직전에 항일운동을 했다면 이완용의 후손이 독립유공자의 후손인가?

거기다가 한국에선 소외되어 외국에 있거나, 외국에 있어 한국에선 그리 유명하지 않은 유공자도 있다. 무관심 속에 잊혀진 이런 독립운동가들과 그 후손들에겐 사회적인 관심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겠다. 사실 독립운동가들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거의 없었기도 했고. (중국군에서 복무한 사람들은 많았다)

심지어는 안창호 선생은 21세기가 될 때까지 한국 국적을 못 받았다. 일제강점기 당시의 호구조사를 기준으로 국적을 따지다 보니 한국인 독립투사가 한국인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어이없는 사태까지 벌어졌던 것.

사실 조선의 독립과는 전혀 관계없는 행동을 했는데도 독립유공자가 된 사례가 있다.[25] 독립운동가한테 유죄 판결을 내린 건 친일반민족 행위가 된다는 판결이 나왔다! 거기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않다.

다만 북한 정권에 참여한 사람들은 대한민국이 선정한 독립운동가에서 제외된다. 그리하여 북한지도부는 그렇다 치더라도, 후에 숙청된 김원봉이나 북한의 부총리를 맡았던 임꺽정의 저자 홍명희는 독립운동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음에도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지 못하고 있다. 6.25전쟁 당시 북한에서 주요 관직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냉전시기에는 좌파 독립운동가 전부를 독립유공자에서 배제했으나, 김영삼 정부 이후 북한정권에 참여하지 않았으면 대한민국에서는 독립유공자로 포상하고 있다. 예를 들어 김산이나 이동휘 등등.

5. 또 다른 독립유공자들[편집]

가끔, 태평양 전쟁 당시 막장스러운 지휘로 일본군을 패전으로 몰고가서 결과적으로 조선 독립에 기여한 지휘관에 대해서 비아냥거리는 호칭으로 쓰기도 한다. 삼대오물의 대표격으로 불리는 무타구치 렌야가 대표적이다. 가끔씩 츠지 마사노부같은 인간들도 그렇게 불리기는 하는데 작전 짜는 능력도 병신이었지만 식인, 학살 행위도 거리낌없이 저지른 사람이라 독립유공자라고 부르기에는 적당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그래도 부하는 안 버렸던 스기야마 하지메나 선을 지켰던 도미나가 교지는 독립유공자가 맞을수도

서프라이즈같은 가쉽거리 음모론 나오는 곳에서 주로 다뤄서 그렇지 의외로 무쏠리니 자체가 일종에, 간부나 혁명가로 위장혹은 포섭한 연합국(정확힌 처칠의 직속) 스파이라는 설도 나온다...

하지만 그들과는 전혀 다른, 진정한 의미로 독립유공자인 일본인있다. 민족문제연구소로부터 독립유공자 추서 신청이 된 일본인 2명이 있다. 참고로 2009년 2월 기준 외국인 독립유공자는 총 45명이라고 한다. 특히 일본인 독립유공자는 자기 나라 정부로부터 핍박받으면서까지 조선인을 도와줬다. 그러나 독립유공자로는 추서되지 않았지만 조선의 문화를 보존시키기 위해 조선 민속 박물관을 세우고 한국의 미를 연구, 발표하고, 일본의 광화문 철거를 반대한 야나기 무네요시와 극우세력의 일본인들에게 살인협박까지 받으면서도 조선의 도자기와 민간공예품을 수집, 조사한 아사카와 다쿠미도 결국에는 조선의 독립에 공헌한 독립유공자다.[26] 어찌 보면 남의 일일 수도 있는데도 한국을 도와준 고마운 분들이다.

가장 잘 알려진 인물로는 제암리 학살사건을 전 세계에 알린 것으로 유명한 석호필 선생이 있다.

[1] 일반 국가 유공자는 자녀까지.[2] 과거 항일투쟁가였던 김원봉은 친일매국노였던 노덕술에게 잡혀 뺨을 맞는 등 심한 모욕을 받았다. 그리고 당시 대통령은 이 XX를 반공투사라며 극찬을 했다. 당시에는 경찰이 극우테러를 비호하고, 공산주의계열이나 좌파에 대한 탄압이 심했다.[3]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사살당한 최능진의 경우에는 2015년 64년만에 무죄를 선도받기도 했다.기사[4] 후술되었지만 독립운동 자체가 비밀적으로 이뤄지다 보니 굵직한 독립운동가가 아니고서는 명백한 증거가 남아있지 않거나, 시간이 지나며 증거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사라진 경우도 수두룩하다.[5] 현재 다른 국가유공자의 경우 혜택이 돌아가는 유족의 범위는 자녀까지이며 독립유공자만 3대까지 인정한다.[6] 쿠데타하고 제일 먼저 한 일이 독립유공자 표창이었다. 독립유공자 대우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셈.[7] 다만 이 말도 어폐가 있는게 친일파였지만 생계 곤란으로 친일파가 된 이효석의 후손들은 엄청나게 빈곤하게 산다. 지금의 언론에서 친일파 후손의 재산분쟁 짓거리때문에 이 분들은 가난해도 숨죽이고 살아야했다. 이 같은 경우는 극히 일부일 뿐이다. 대부분의 친일파들의 후손들은 엄청난 부를 누리며 살고있다.[8] 헌데 독립유공자 전형은 정원 외로 따로 주는 것도 아니고 정원 내로 되어있는데다가 수급자나 저소득층, 군인자녀, 경찰, 소방관, 교사, 공무원 자녀 또는 다자녀나 다문화 가정과 같이 묶여서 경쟁하기 때문에 그다지 혜택을 받는다고 보기도 어렵다.[9] 보난자에 출연했는데,당시에는 동양인에 대한 인식이 안 좋아서...[10] 대한민국 국군 창설 당시 광복군 출신자들도 대부분 건군에 참가했다. 물론 일본군 출신(특히 육군)이 워낙 많다 보니 숫적으로는 미약했다. 다만, 해군의 경우 함선 근무 경력이 있는 일본군 출신자들이 전무하여 손원일 제독을 비롯한 민간 상선사관들이 창군의 주축이 되었으며, 공군의 경우 일본항공대, 중화민국 공군(광복군 출신자들 대부분이 중화민국 공군 소속이었다), 민간비행사 출신들이 골고루 분포해 있었다. 채병덕이 워낙에 유명해서 6.25 초기 일본군 출신이 다 말아먹었다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꽤 다양하게 섞여 있었고 삽질한 사람도 삽질하지 않은 사람도 일본군, 독립군, 팔로군/중국군 출신에 다 있었다. 전쟁 초기의 어이없는 패퇴에 대해서는 복잡한 분석이 있지만, 단순화하면, 중1에게 고3이라고 불러주고 여름방학 끝나고 예고없이 대입 시험보게 한 셈이라고 치면 비슷하다.[11] 권력형을 제외한 대다수의 친일파는 토지/재산 등을 이용해 배를 불렸으나 이승만 대통령의 농지개혁과 6.25 전쟁 후 남은 땅마저 개판이 되며 이들의 힘도 사라지다시피했다.[12] 해당 인물이 여타 공적을 세웠을지언정 친일파였다는 이유로 견제받는 일이 당연히 많다. 백선엽 등의 인물도 높은 지위와 군 내부적 명망을 얻었으나 친일경력을 이유로 원수추대에는 실패했다.[13] 이들도 "우리 가문 친일파다"라고 떠들지 못하고, 변명을 한다는 거만 봐도 절대 명문가문으로 통하지는 않는다. [14] 김구 선생이 타계한 경교장의 원래 소유주가 최창학이다[15] 이 때문에 손자 김진씨는 주택공사 사장 시절에 비리를 저질렀다가 할아버지와 아버지 이름에 먹칠하기도 했다. 할배의 까방권 때문에 1년 만에 특사로 풀려났지만.[16] 다만 김구 선생님 집안이 빵빵한 이유는 국가에서 독립유공자인 김구 선생님 집안을 후원해줬기 때문이 아니라, 김구 선생님 자신이 해방 이후 유력 정치가 였으며, 아들인 김신 장군 또한 공군 내부의 유력인사였고 5.16 쿠데타 가담으로 줄을 잘선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거기다 이승만에 대해서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박정희가 김구 선생을 밀어준 점도 있다.[17] 안태훈은 김구의 은인으로 이 사람의 손녀이자 안중근의 조카인 안미생 여사는 김구의 큰며느리였다.[18] 윤치호의 사촌인 윤치영과 시일야방성대곡으로 유명한 장지연이 취소되었다.[19] 가수 송대관이나 신해철, 서태지, 하이트진로 사장인 양인집, 국방부장관 한민구 등은 본인들이 자수성가해서 나중에 알려진 케이스다.[20] 실제 김구 선생의 증손자인 김용만씨는 어릴때 이 때문에 부담이 많았다고 밝히기도 했다.#[21] 이 문제와 관련해 이런 일도 있다. 훈련소에서 공익들 훈련맡은 조교가 공익들 4주 훈련 끝내고 집에 가는 게 아니꼬왔는지, 멀쑥하게 생긴 훈련병더러 "넌 무슨 병신이라서 공익으로 빠졌나?"라며 빈정거렸다. 공익으로 빠지는 게 대개 신검에서 떨어지거나, 아니면 전과 있거나 하기 때문. 열받은 훈련병이 "우리 아버지 국가유공잡니다!"라고 쏘아붙였고 할 말 없어진 조교는 때굴멍.[22] 해평 이재현 선생의 경우 ‘투사는 지분을 요구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23] 외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 특히 임시정부 관계의 인물들의 경우, 나라 자체가 없을 경우 국제사회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 직접 경험했기 때문에 광복 후 나라의 치안과 국방이 우선시 했다. 대한민국 해군의 아버지였던 손원일 제독은 해병대 창설을 위해 신현준, 김석범과 같은 일본 해군, 만주군 출신들을 기용할 수 밖에 없었으며, 역시 공군의 아버지인 최용덕 장군 또한 공군 창설을 위해 김정렬과 같은 일본 육군항공대 출신들을 끌어들일 수 밖에 없었다.[24] 물론 이용구는 반일이 아닌 그냥 종교적인 이유에서 싸웠을 가능성이 크다.[25] 독립유공자 정도로 대접받지 않지만, 전두환의 부친 전상우가 대표적인 사례다. 노름꾼 빚 보증을 서다 트러블이 나서 합천 주재소 순사부장이랑 소환을 받았는데, 응하지 않다가 마을 근처 낭떠러지에서 마주쳤다. 그리고 순사부장을 절벽 아래로 떨어트리고 만주로 튀었다.(…) 1982년 5월 출판하려다 포기했던 전두환의 자서전 <촛불>에 따르면 "그(아버지)는 유도 3단의 시즈오카 순사부장을 100길의 낭떠러지로 내던진 애국자였다."는 대목이 나온다.(…) 잠깐만, 이거 이성계 조상이 전주에서 회령갈 때 이야기삘이 나는데..[26] 그 대신 대한민국 정부는 1984년에 야나기 무네요시에게 문화훈장 보관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