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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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의 도자기 장인들.

영어

china[1], porcelain[2]

한자

陶瓷器[3]

일본어

陶磁器, 瀬戸物[4]


1. 개요2. 역사3. 한국의 도자기4. 와 도자기5. 도자기의 유해성6. 시대지역별 도자기의 종류7. 참고 외부 링크8. 같이보기

1. 개요[편집]

진흙으로 빚어서 높은 온도에서 구워낸 그릇의 총칭. 요즘은 세라믹이라는 신소재로 다시 각광받고 있다. 재료는 다르지만 제작 방식은 도자기와 닮았다. 정확히는 도기와 자기의 합성어인데, 도자기라 하면 보통 고운 태토(흙)를 써서 만들고 유약을 발라 구워 매끈하게 만든 자기를 떠올리게 된다. 도기에는 넓게는 유약을 칠하지 않거나 재, 자연 유약을 써서 만든 토기까지 들어가므로 꽤 넓은 의미 범위를 아우르는 단어가 된다.

도자기를 굽는 사람은 도공 혹은 도예가라고 한다. 도자기를 이용한 예술은 도예라고 한다. 도자 공예의 줄임말.

예로부터 쓰인 재질로 여전히 , 접시, 화분등을 만들 때 많이 쓴다. 인체에 무해하고[5] 방수성을 가지면서 높은 경도를 지니고 있고 만들 때 모양 내기가 쉬워서 그렇다. 다만 충격에 약해 잘 깨진다는 약점이 있다. 그러나 이것도 제품마다 달라 어느 정도 높이에서 떨어져도 금도 안가는 제품도 있다.

한때 중국이 서양 등을 상대로 거래한 주요 물품. 실크로드나 배를 통해 자주 운송되었다. 그래서 영어로 도자기를 china라고 한다. 유럽에서는 이게 귀해, 연금술사가 도자기를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말에 왕이 그 자리에서 스카웃했다는 이야기도 있다.[6] 중국의 백자를 수입하지 않고 자체 생산하려는 노력 끝에 유럽에서는 동물의 뼛가루를 이용해 하얀 색을 극대화한 본 차이나(Bone china)가 나왔다. 중국이나 한국의 백자가 일반적으로 백자 하면 떠오르는 푸르스름한 빛깔이 감도는 창백한 백색을 띤 데 반해 본차이나는 특유의 우윳빛같은 따뜻하고 부드러운 질감이 특징이다. 기원이 기원이니만큼, 골동품인 경우 메이드 인 차이나를 최고로 치지만 현대에 생산된 것들은 유럽제를 더 쳐준다.[7][8]도자기의 본고장인 중국에선 송나라 시대 때 고려청자를 최고로 치며 비싼값에 사와 모셔두었다던 기록도 다수 존재한다.

800~1,000℃의 흙그릇을 "도기" 1,100~1,400℃에서 만드는 것을 "자기"라고 하고 합쳐서 도자기라고 한다. 그리고 1,000℃ 내외에서 자기가 되는 온도에 도달하지 못한 발전 중간형 그릇을 석기(stoneware , 炻器 돌로 만든 그릇이 아님)라고 한다. 유약을 바르지 않은 것, 800도 이하 낮은 온도에서 구운 것, 특히 굽지 않은 것까지 포함해서 토기라고 한다.

실수로 깨뜨렸을 경우 파편이 상당히 날카로운지라, 과거에는 연싸움을 할 때 연줄에 사금파리(도자기의 깨진 조각)를 갈아 만든 가루를 풀 먹여 입히기도 했다. 과거 조선시대에 행한 압슬이라는 고문 방법은 바닥에 사금파리를 깔고, 무릎을 끓린 후에 무거운 돌을 얹어 놓는 형벌이었다. 하지만 도자기는 유리에 비하면 파편이 적게 나오고, 미세한 파편들은 일부러 도자기를 망치 같은 것으로 내려치치 않는 이상 많이 나오지는 않는 편인 데다 투명한 것도 아니라서 유리를 깨뜨렸을 때와 비교해보면 그나마 안전한 편에 속한다.

2. 역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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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살무늬 토기

도자기의 역사는 문명이 시작되기 이전의 토기가 그 기원이다. 인간의 문명이 시작되면서 음식을 저장할 용기의 필요성이 요구되었다. 초기에 등장했던 토기는 원시적인 노천소성 기법으로 구웠는데, 섭씨 600~800도로 가열하여 굽는 이러한 형식은 물에 쉽게 풀어져버려서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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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암포라

고대 시대에 도기가 등장한 것은 원시적인 형태의 가마가 등장하면서 부터였다. 열의 방출을 막는 방법이 나오면서 섭씨 1000도에 달하는 열로 흙을 굽는것이 가능해졌다. 이렇게 구워서 나온 도기는 물과 만날 때 풀어지는 현상을 막을 수 있었다. 단순히 사냥과 채집을 한 음식물 보관용인 토기는 문명이 발전하여 4대 문명 이 등장함에 따라 단순히 음식용이 아닌 왕의 권위용이나 제사용으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그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도기의 발전이 이루어졌다. 진시황릉의 병마용은 당시 고대 문명의 도기 발전의 궁극적인 모습이었다.

하지만 초기의 도기는 여전히 물을 흡수하는 흙의 성질을 극복하지 못했고, 때문에 와인이나 고급 음식물을 보관하기 어려웠다. [9] 이런 와중에 중동 지방에서 발견한 유약[10]과, 중국에서 발견한 점성이 더 높은 흙인 고령토의 발견은 기존보다 매우 섬세한 형태의 도기를 만들수 있게 했다. 여기에 중국에서 1300도 이상의 온도로 굽는 가마기술이 나옴에 따라 우리가 흔히 아는 형태의 자기의 초기 형태가 나오게 되었다.자기의 등장은 인간이 음주예절이나 다도와 같은 고급 식문화에 영향을 주었다.

초기에 등장한 자기는 원시적인 형태의 청자였는데, 이 당시 청자는 우리가 흔히 아는 옥빛의 자기가 아니라 "그냥 도기에 유약을 바르는게 목적임을 확인할 수 있는" 빛깔이었다. 이후 여러 왕조를 거치면서 제작기술과 유약의 발전이 우리가 아는 청자로 발전하게 된다. 중국의 도자기는 북방식의 백자와 남방식의 청자로 나누어져 있었다. 물론 당시의 백자는 현재의 완전한 형태는 아니었다.

북송대의 양각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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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대에 만들어진 영청과형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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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이후로 송나라 대까지 당시 귀족들은 백자와 청자를 두루 사용하였다. 그런데 송 휘종이 "황제의 그릇은 청자로 하라"고 명령하게 되자 청자의 대유행이 시작되었고, 송의 귀족들은 청자를 애호하게 된다. 또한 북송이 멸망하고 남송이 강남으로 쫓겨나면서 남방식 청자가 우세하게 된 이유도 있다.

물론 고려도 이에 영향을 안 받을 수가 없는 것이고, 고려도 청자에 기울어지게 된다. 서해에서 발견되는 도자기 운반선의 경우 실려있는 도자기의 대부분은 송 청자이다. 고려의 특산품이라 불렸던 상감청자는 도자기에 그림을 넣으려는 방법을 고안하다가 나온 자기이다. 당시에는 코발트를 사용한 청화나 철을 사용한 검은 채색등이 나오기 이전이었다. 그냥 일반 안료를 사용하여 굽게되면 색이 변하거나 안료가 번져버리기에 "물감이 안되면 다른 색의 흙을 사용하면 되잖아?"라는 발상에서 나온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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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의 한국 도자기 기술을 높게 평가하는 것이 민족주의의 폐해라는 말이 있기도 하지만, 송, 원, 명대 초반까지 중국 수준의 도자기 기술을 구현할 수 있던 나라는 한국이 유일했다. 아니, 구현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중국인들에게 특유의 색과 양식을 인정받고 중국시장에 팔리는 수준까지 왔다. 따라서 중세의 도자기 역사를 말할때 중국과 함께 한국이 거론되는 것은 사실이다. 후술하겠지만 임진왜란 이전까지 세계 도자기 역사에서 고려와 조선은 빠질 수 없다. 경매에서 수십 억에 낙찰되는 도자기가 조선백자라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그러니 한국 도자기 역사에 대하여 무슨 우리나라만 도자기 만들었는 양 중국은 쌈싸먹었다니, 일본은 막사발 밖에 없었다니 지나친 민족주의적 우월의식도 곤란하지만 자학적으로 평가절하 하는 것도 틀린 자세이다. 늦어도 16세기 중후반이면 포르투갈, 네덜란드 주도로 열린 동아시아 세계 시장에 뛰어 들었던 일본, 중국과 달리 끝까지 세계 체제에 직접적으로 참가하지 않았던 우리 조상님들이 만드신 물건 중 인삼, 종이와 함께 몇 안되는 세계적으로 경쟁력 있었던 조선의 특산품이었다고 인식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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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예술품 최고가인 396억 원에 낙찰된 원나라 시기 청화백자 '귀곡하산(鬼谷下山)'

그런데 원나라가 세계를 제패하면서 유행에 변화가 온다. 원은 세계제국으로 원 황제의 통행증만 보유하면 콘스탄티노플에서 베이징까지 안전하게 교역을 할 수 있는 시대였다. 참고로 중국과 마주보고 있는 황해 연안의 상업도시에는 상인 출신 이슬람인들이 오늘날의 시장으로 임명된 사례가 비일비재할 정도었다. 전통적으로 우유와 양모를 귀하게 여기는 몽고족은 백색을 좋아했다. 게다가 원의 수도가 북방에 있는 관계로 북방식 백자가 우세하게 되었고 이때에 이르러 중국의 백자는 기술적으로 완성되게 된다. 그리고 원황제가 황제의 그릇은 청자가 아닌 백자로 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유행은 완전히 기울게 된다.

세계적으로도 이슬람인들은 종교적인 이유로 백색을 좋아했고, 서구의 국가들도 기독교적 교리 때문에 백색을 숭상하는 편이었다. 따라서 국제무역에서도 백자의 단연 우세였다. 물론 현대의 도자기 유행도 백색이 우세하다. 레스토랑에서 파란색 식기가 나오는 일이 없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을 것. 일반적으로 백색은 사람의 심리를 안정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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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대에 고려에 북방식 가마기법이 본격적으로 소개되어서 기술적으로 크게 진보하게 되었으나 14세기 나라가 혼란해지면서 분청사기 형태의 청자만이 만들어지게 된다. 고려 말기는 역사에서도 막장 중의 막장으로 주요 도자기 산지이던 남해안이 왜구들에게 초토화된 결과로 양질의 고령토를 얻을 수가 없었던 이유도 있다. 결국 완성된 형태의 백자가 제작되기 시작한것은 15세기 조선조였다. 도자기를 만들고 연구하는 사옹원의 총책임자는 왕자들이 주로 임명되었다. 백자 개발에 얼마나 신경 썼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게다가 청화백자의 재료인 토청을 구하기 위해서 왕실에서 많이 노력했다. 그 후 조선의 도자기 기술은 급발전하게 되고 18세기까지 절정을 이루나, 18세기부터 양반 사대부의 취향이 놋그릇 쪽으로 바뀌게 되고 19세기 세도정치 시기가 닥쳐오면서 정체되기 시작하였다.

일본의 경우, 13세기 즈음에 중국인 귀화 도공들이 만든 도자기 가마들이 있고, 자체적으로도 생산을 했지만. 역시 중국이나 조선에 비하면 품질과 디자인에서 확연히 밀렸다. 현재 일본에 국보로 지정된 몇몇 찻잔들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밀리다 못해 조악하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다. 그러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잡아서 본토로 납치해온 조선의 도자기 장인들을 통해 도자기 제조기술이 뛰어 올랐으며. 오래된 가마터에는 조선인들이 남긴 흔적이나 조선인들의 후손들이 사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도쿠가와 정권으로 바뀐 후 조선통신사와 같은 사절단을 통해 포로 송환협정이 진행되었음에도 이들만은 돌려보내지 않으려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 때 일본의 다이묘들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도 같던 이들 납치한 조선인들을 가두고 숨기고 매수하는 등 온갖 짓을 다해가며 돌려보내지 않으려고 버텼다. 당시로서는 고부가가치 상품을 생산할 수 있는 고급 기술을 가진 엔지니어와 같던 이들의 위상을 보여주는 일화.

대접을 워낙 잘해줘서 그들 스스로가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으려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이야기는 어느 정도 사실인 것이 1617년 8월 27일자 조선 통신사로 갔던 종사관 이경직에 따르면 어찌어찌 조선인들을 겨우 만난 이경직이 돌아가자고 제안했으나 도공들이 당최 돌아가지 않으려 했다고 한다. 일부 도공들은 성씨까지 하사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일본이 조선인 도공들을 무조건 우대해줬다는 것은 아니다. 도자기에 장인의 이름을 쓰게 했다는 것을 근거로 도공들의 대우가 좋았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장인들을 브랜드 제작자로 인정해줘서 그랬다는 지나치게 현대 중심적인 주장이며, 이미 조선시대에도 도자기에 이름을 쓰게 하는 제도가 있었다. 거기에 이렇게 이름을 쓰게 한 것도 브랜드 가치 때문이 아니라, 품질이 저하될 때 책임질 사람을 찾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책임전가는 조선인 뿐만 아니라 일본인 도공들에게도 적용되는 이야기다. 이들은 재일교포 1세대로 흔히 여겨지고 있는데 도쿠가와 막부는 이들이 만든 자기를 내국 생산제품과 구분해서 이도다완이라는 이름을 붙여 판매했는지라 귀화를 불허했고, 자기생산 이외에 다른 일을 할 수 없었으며 거주지를 바꿀 수 없게 제한했다. 그리고 각 계층에 대한 엄격한 사회적 통제를 가한 에도 막부의 특성상 딱히 조선 도공들만 이런 불이익을 받은 것은 아니다.

도자기 제작 기술이 뒤졌던 일본 전국시대(일본)에는 차를 따르는데 쓰던 다기 하나하나가 부르는 게 값이었고, 그중에는 성 하나 값에 맞먹는 것도 있었다고 한다. 자국에서도 생산을 했었지만, 현재의 외제차와 국산차와 마찬가지로 상등품의 외제 도자기는 높으신 분들이 썼고, 저질의 국산은 서민들이 썼다지만 그마저도 국산의 숫자가 적어서 한참 밀리는 형편이였다. 일본 지배층에 다도 문화가 도입되면서 차를 마시는 것이 최고급 문화 향유로 인식되었고, 당연히 여기에 사용되는 각종 기물들 역시 값이 뛰는 것이 당연했다. 이런 데에 나무 잔 같은 평범한 물건을 쓴다는 것은 최고급 호텔 파티에 초대해놓고 튀긴 청어 몇 조각 대접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임진왜란 이전의 일본 다완의 대표적인 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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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에는 제대로 된 태토가 아닌 거친 진흙에 유약도 아닌 잿물을 발라 구운 옹기 수준의 싸구려도 최고급 자기로 치기도 했다. 다완이라고 하여 귀하게 여기던 그릇은, 본래 조선의 막사발 수준의 그릇이다. 막사발이란 싸게 많이 만들기 위해 그릇 바닥에 자그마한 돌받침을 놓고 수십개를 쌓아 굽는 대량생산품이다. 지금도 도요지 터에서 이렇게 굽다 무너진 것들을 볼 수 있다. 이런식으로 여러 그릇을 쌓아 만드는 것은 중국과 한국 모두 공통이다. 완은 하나만 올려 놓고 만들면 너무 낭비인지라 쌓아서 만들며,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보면 보물로 전시한 고려-조선시대 다완에도 그 쌓은 방식에 따라 남은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이 쌓는 방식이 시기마다 달라서 그 흔적으로 고고학적 세부 편년도 가능하다. 예를 들어 고려시대 청자완은 내화토라는 것을 굽 아래에 발라서 계속 쌓는데, 이 경우 아래의 그릇 안에 묻어서 남는 경우 많다. 실제로 박물관가서 청자완을 관찰하면 이상하게 흰 색의 뭔가가 묻어 있을 텐데, 그게 내화토 비짐이다. 조선의 자기는 그릇 아래 모래 알갱이 같은게 보일텐데, 이건 모래비짐이라고 모래를 발라서 쌓았기 때문이다. 이런 흔적이 없는 완들은 주로 갑발이라는 흙으로 만든 상자를 이용했는데, 중국의 경우 M자형 갑발을 이용해 일반적인 상자 형태의 갑발보다 더 대량으로 쌓을 수 있는 갑발을 만들어 대량생산을 했다. 지금도 장인에 의해 만들어지는 다완들을 보면 이 막사발 형태를 하고 있다.

서양에 수출되던 대표적인 양식의 일본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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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시대의 중국 도자기, 17세기경 중국과 일본은 세계 도자기 시장에서 경쟁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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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열악했던 도자기 제조 기술이 상술한대로 임진왜란에서 납치한 조선의 도공[11]들을 통해 발전하게 되었다. 여기에 명나라가 멸망하게 되자 도자기의 종주국인 중국의 도공들도 대거 일본으로 망명해와 더더욱 많은 기술이 일본에 전해졌고, 17세기에 이르러서는 네덜란드를 통해 서양에 수출하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당시 네덜란드청나라가 무역봉쇄를 시작하자 새로운 자기생산지를 찾았다. 일본이 조선에서 납치한 도공들의 힘으로 도자기 생산을 시작했을때, 중국 대륙은 이자성의 난+명나라청나라 교체+삼번의 난이라는 3단 콤보를 맞고 경덕진을 비롯한 도요지가 초토화되는 바람에 수출할 만큼의 잉여물량을 생산하지 못했다. 네덜란드는 일본에 디자인을 수주하고 샘플을 보내는 등의 공을 들여 일본 생산품 자체의 질을 끌어올리고 값싸게 사가는 방식의 무역을 했다. 손잡이가 달린 찻잔도 일본에서 최초로 제작했다. 물론 질그릇에 손잡이가 다린 것은 그 유래가 훨씬 오래된 것이긴 하다. 고대 신라-가야에서 만든 도질토기 중에서 파배라는 것은 현대의 컵하고 똑같이 생겼다. 이러한 도질토기 제작기법은 일본에 전해져 스에키라는 토기 형식을 탄생시키는데, 사실 둘 다 형태는 거의 같다. 물론 파배와 같은 질그릇이 중세, 근세에도 이어졌는지 여부는 별개의 문제다. 17세기 이후 일본이 서양에 수출한 도자기는 뜨거운 차와 찻잔에 익숙치 않았던 서양인들의 기호에 맞춰 제작한 것이라 한다. [12] 여담이지만 메이지 유신 전후로 막부정권을 몰락시킨 유신지사들의 자금줄중 하나가 바로 도자기였다고 한다. 즉, 임진왜란을 일으키다 망한 자들의 후예가 임진왜란때 잡아온 자들을 통해 얻은 돈으로 임진왜란 덕에 어부지리를 얻은 자들의 후손들을 몰락시키고, 다시 조선을 침략했다는 씁쓸한 이야기.

임진왜란 이후 17~18세기 경 일본과 중국이 경쟁하던 도자기가 궁금하다면 여길 참조.

터키의 경우 13세기 경부터 도자기를 굽기 시작했다. 특히 이즈닉(İznik)의 도자기가 유명하다. 만드는 법이 상당히 다르기 때문에 터키에서도 도자기(Porselen. 영어로는 Porcelain이라고 한다.)이 아니라, 치니(Çini)라고 별도의 용어로 부른다. 이 이즈닉 도자기는 중국산 도자기에 열광하던 당대의 요구에 의해 중국산 도자기를 모방해서 만들기 시작했다. 코발트 염료를 사용하는 중국식 청화백자의 영향을 짙게 받았지만, 코발트 염료와 더불어 다양한 색깔의 광물성 물감을 직접 도자기 위에 그리고, 그 가장자리를 가느다란 붓으로 검게 윤곽선을 두드러지게 만들고 구워내는 점이 다르다.[13] 색깔이 매우 선명하며 겉에 유리질의 유약을 발라서 굽기때문에 광택은 진짜 자기와 비슷하지만, 고령토와 산화 실리콘과 유리질을 혼합한 점토를 사용하여 자기 느낌의 도기를 만든것이라[14] 동시대 중국산 도자기에 비해 가벼운 것이 특징이다. 주로 모스크벽을 장식하는 타일로 만들었고 그 외에 중산계급과 귀족들을 위한 각종 그릇과 생활용품들을 만들어 사용했다. 왕족들은 여전히 진품 중국산 도자기를 애용했다고. 훗날 16세기가 되어 이즈닉에서 질 좋은 흙이 고갈되자 중심지는 내륙의 퀴타햐(Kütahya)로 옮겨졌고 심지어 한때 이즈닉 도자기는 맥이 끊기기도 했으나, 1985년 에쉬레프 에르오울루(Eşref EROĞLU)와 세이한 에르오울루(Seyhan EROĞLU)부부에 의해 복원되어 오늘날에는 관광지에서 값비싼 기념품으로 팔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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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명나라 시기 경덕진에서 생산된 당초문 청화백자 (1470년경)와 1세기 후인 1550~1570년경 이즈닉에서 만든 도자기의 비교. 위쪽이 경덕진 도자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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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경 네덜란드 델프트 자기. 딱 보더라도 중국 청화백자의 열화카피판임을 알 수 있다.

유럽의 도자기 역사는 17세기 까지만 하더라도 중국의 열화 카피에 불과했다.그러니 참으로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인 것이다 하지만 18세기 중반 들어서 유럽 나름대로 백자 관련 제작기술이 완성되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장인정신을 강조하면서 사승관계와 무형의 노하우 전승을 강조하던 동양의 문화와는 달리 온갖 실험을 꼼꼼히 기록하는 서구 문화는 이런 제작기술이 빠르게 퍼지는데 공헌을 했다. 18세기 들어서 동양에는 없던 색채기법 및 금채를 칠하는 방식이 등장하고, 기존에 유럽이 르네상스 부터 발전시켜오던 사실주의 양식이 가미되면서 동양과 서양 두 세계의 도자기 품질이 역전되기 시작했다. 우리가 흔히 아는 본차이나도 이 무렵에 등장했다.

18세기 무렵 유럽에서 나온 대표적인 형태의 세브르 양식의 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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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영국 웨지우드의 도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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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랫포드셔 초콜릿컵 본차이나, 1815-20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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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년대에 제조된 오스만 제국 이을드즈 도자기[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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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중국산 도자기의 문양은 근대의 서양양식에 비하여 그 섬세함이 부족했으며, 그 화려함도 서양 귀족들의 기준과는 달랐다. 때문에 이 무렵 중국제 도자기는 유럽의 서민계층용으로 전락했고, 고위 계층이나 왕실 스스로 기술을 개발하여 자체생산하던 유럽식 도자기는 상류층용으로 사용했다. 예외적으로 같은 섬세함을 추구하면서도 동양 분위기 특유의 낯섬과 함께 깔끔한 양식을 보여주던 일본제 도자기 일부가 인정받았다.

유럽 도공들의 중요한 업적이 있다면 바로 대량생산의 개발이다. 물론 한국에서야 도공이 흙도 준비하고, 반죽도 하고 성형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굽기도 하고 모든 과정을 혼자 혹은 제자 한 둘만을 대동하고 해냈지만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일찌기 분업화가 이루어졌다. 명나라때 경덕진의 수출용 도자기를 굽는 가마에서는 고령토 채취, 흙 혼합, 분쇄, 토련, 반죽, 성형, 초벌구이, 채색, 재벌구이 등 총 75가지의 공법을 각각 한 사람이 전담해서 분업이 이루어졌다.[16] 이는 업무 효율을 높이기 위함과 더불어 도자기 제법이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도공 하나를 매수해봤자 그 도공은 자기가 하는 일만 알테니까(...) 유럽에서는 여기에 도자기에 넣을 무늬를 대량생산하는데 성공했다. 유럽에서 보편화된 예술인 판화를 응용했는데, 가장 오래된 대량생산 기법은 동판에 작가가 손으로 문양을 파고 액화시킨 코발트안료를 홈 위에 붓고 롤러로 미는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17] 초창기에는 오직 파란색만 넣을 수 있었지만 이후 금속안료를 개발해서 빨간색, 녹색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산업혁명 이후로 대량생산이 가능하게됨에 따라 다양하고 많은 형태의 도자기를 대량생산으로 시중에 저가에 공급하는 것이 가능해졌고, 이는 서양문명이 만들어낸 도자기가 질 뿐만이 아니라 양 또한 동양의 수준을 초월했음을 의미했다. 현대에 전 세계적으로 시중에 사용되는 자기들이 대부분 서양식 자기들이라는 점은, 시작은 동양에서 했지만 완성은 서양에서 이루어진 도자기 역사의 결과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18]

2018년 기준으로 본차이나 생산량에서 공업대국인 중국이 최대 생산국가가 되어 도자기 종주국으로써의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켰다.....만 마데 인 차이나가 그렇듯 품질이나 명성 면에서는 부족하다.

3. 한국의 도자기[편집]

한국의 전통 도자기에는 대표적으로 선사시대의 토기, 신라토기, 가야토기, 고려청자, 분청사기, 그리고 조선백자가 있다.[19]

청자와 백자는 높은 온도를 만드는 기술이 아주 중요하다.

일단 기술적인 측면에서 청자는 필연적으로 백자로 발전하게 되어 있다. 이를테면 기술적인 면에서는 백자는 청자의 발전형이다. 가끔 이걸 모르고 조선은 백자밖에 못 만드는데 고려는 청자 만드니까 조선 자기 기술은 퇴보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조선 백자의 예술은 고려청자에 뒤지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백자를 만드는 백토가 청자의 원료인 태토보다 입자가 훨씬 고운데다가 불순물이 섞이면 작품이 안 나온다. 색이야 청자가 더 화려하지만, 자기는 색이 전부가 아니다. 다만 사회의 중심 이념이 청빈을 강조하면서 사치를 멀리하는 쪽으로 변화하다 보니 청자에 비해 화려함이 줄어들었을 뿐이다.

백자는 재료부터 제약이 있다. 백자는 양질의 고령토로 만들어야 한다. "고령"이라는 명칭은 중국에 있는 도자기의 총본산인 "고령산(kaolin)"에서 왔다. 청자는 약간의 불순물을 포함하는 것이고, 백자를 만들자면 불순물을 완전히 제거하는 기술이 필요하다.

온도면에서도 청자는 제련온도인 1,100℃ 이상의 온도를 유지할 수 있는 기술이면 만들 수 있다. 2011년에 재현된 고려청자는 2,000℃나 되는 플라즈마 상태까지 갔었지만.(#) 고려시대에 이 온도를 유지하는게 가능했을리는 없고, 과거와 다른방식으로 비슷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나타났다고 볼수 있을것이다.

백자는 최고 1,400℃ 이상까지 온도를 올릴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청자도 온도에 따라 구현되는 색이 다르긴 한데, 어디까지나 기본적으로. 0.도자기는 구현하기 어려운 색이 제법 된다. 경매로 올라서 최고가를 경신한 조선백자는 그 가치가 백자에 그려진 붉은 꽃에 있었다고 한다. 붉은 색은 진사라고 부르는 주사로 그려내는데 높은 온도에서 변색되지 않고 그런 붉은 색을 만드는게 보통 어려운게 아니라고 한다. 자칫하면 담황색, 암록색, 암흙색으로 변화한다.

통일신라 이전까지 한국의 도자기 기술은 조악한 수준이었다. 통일신라 말기부터 중국에 혼란기가 계속되면서 중국의 도공들이 한국으로 망명하였고, 이 덕에 도자기 기술이 전래되면서 고려시대에 완성을 보게 되었다. 10~11세기에서는 송으로부터 다양한 제조기법이 소개되었고, 고려 도공들은 그것을 바탕으로 독특한 고려자기를 만들어 낼 수 있게 되었다.

파일:백자청화산수인물문접시.jpg

파일:이마리 채색자기.jpg

조선 후기의 도자기들은 화려함 면에서 중국이나 일본에 떨어졌다. 이것은 양반 층의 취향이 놋그릇 쪽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부유층의 도자기 수요가 감소해 그만큼 관련 교류가 줄어든 탓이다. 따라서 도자기 기술도 자연히 답보할 수밖에 없는데, 후기의 조선 백자는 특별하게 색이 많거나 섬세하지 않고 균형에 신경 쓰지 않으며 검소, 투박한 것이 특징이다.

도자기와 관련된 유명한 클리셰 중 하나가 일반인의 눈엔 멀쩡해보이는 도자기가 장인의 마음에 안 들면 거침없이 깨지는 전개.[20] 그런데 어지간히 네임밸류가 높은 장인이 아니면, 지인들이 아까우니까 달라고 하면 준다고도 한다. 발굴되어 나오는 도자기들도 기형이 뒤틀리고 터져나간 것이 나오는 것도 모자라서 사용한 흔적까지 남은 경우도 있다. 장인정신이니 뭐니 하면서 거침없이 깨버리는건 오늘날에야 가능해진 것이다. 청화백자에 사용하는 코발트 안료 같은 경우 정말 질 좋은 것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중국을 통해 들여와서 더럽게 비쌌다. 게다가 관요에서 납품할 때도 뇌물로 그 갑절을 찔러줘야 했다는 기록도 있어 도공들이 가마에서 안터지고 나온 자기들을 마구 깨버릴 여유는 없었다.

가마에 그릇을 구우면 일정 분량 불량품은 나오게 된다. 그런 건 싸게 팔거나 정상 제품 팔 때 덤으로 주면 되므로 깨 버릴 이유가 없다. 깨 버린 도자기는 바닥에 깔거나 하는 용도 외에는 다시 쓸 수가 없기 때문이다. 도자기는 만드는 것도 시간과 재료가 들어가지만 굽는 데 많은 시간과 인력이 들어가는, 따지고 보면 원가가 비싼 그릇이다. 현대의 도공, 도예가들도 그릇이 망가지면 때우고 고쳐 가면서 쓴다.

한중일 도자기 사이에는 웃지못할 관계가 있는데, 일본이 임진왜란부터(심지어 도공들도 납치해갔다) 일제강점기까지 한국의 도자기를 쓸어간 후, 중국에서 미쳐 날뛰는 도굴꾼과 밀수꾼들이 세탁을 위해 한국으로 자기네 도자기를 끌어오기 시작했다. 중국에서는 도굴 등의 문화재 장물 매매는 심하면 사형까지 떨어질 수 있는 중범죄로 친다.

때문에 중국에서 전멸한 송나라 시대의 여요부터 장제스대만으로 탈출하면서 바리바리 싸들고 가던 도자기, 피난박스라 불리는 물건들까지 한국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다 세탁보낸 도자기가 도리어 한국에서 사회 혼란기를 거치면서 전국으로 흩어지기 시작했고 집구석이나 골동품점에 유통되었다. 최근 중국은 중국의 신흥 부자들이 경매에서 이런 유출 도자기를 사들이기 시작하자 문화재 회수를 위해 갖은 노력을 하고 있는데, 중국으로 역수출(?)되어 경매에 붙여지기면 비싸면 수십억원까지 불리기도 한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몇몇 장인들의 작은 공방들의 자품을 제외하면 대부분 기업에서 만든 공장제 도자기가 유통되고 있다. 오늘날의 한국 도자기 산업은 업계 1위 '한국도자기'를 중심으로 , '한국도자기'의 형제기업인 'ZEN', 목포에 공장을 둔 '행남자기', 광주에 공장을 둔 '광주요', 여주에 공장을 둔 'yido'등의 크고 작은 기업들이 이끌고 있는데, 최근에는 외국기업의 도자기들에게 경쟁력에서 밀려 어려움을 겪고 있다.

모공이나 잡티가 없는 꿀피부를 도자기 피부라고도 한다. 그런데 화장을 너무 심하게 해서 사람 피부같지 않다는 의미로 도자기 인형같다는 말도 하니까 오해의 여지가 생길수도 있다.

충치 치료시 대신 충전재로도 사용된다. 금과 달리 색상이 기존 치아와 같아서 미관상 좋고 경도도 좋다. 다만 강도가 떨어져 깨질 수 있으므로 어금니에는 잘 쓰지 않는다.

만든 지 얼마 안되었는데도 억소리나는 값이 불리는 도자기도 있다.(#) 이게 몇백년이 지나도록 유지된다면 후덜덜한 가격이 될 듯하다.

4. 와 도자기[편집]

중국에서부터 시작한 음차 풍습은 도자기 발전사상 상당히 중요하다. 당대에 주로 소비되었던 차의 종류와 차의 색에 따라 오직 차를 마시기 위해 사용하는 도자기가 개발되었다. 오늘날의 우려먹는 녹차는 제다기술이 발전한 명나라 시기에야 보편화되기 시작했고, 초창기의 차는 황갈색을 띄었다. 때문에 보색인 청자가 유행했다. 당시에 고급으로 여겨졌던 황색의 차색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하지만 송대에 들어 말차가 유행하면서, 다완의 색도 천목다완 같은 검은색으로 바뀌었다. 당시의 말차는 오늘날과 같은 초록색이 아닌 약간의 황색을 띈 녹색이었으며 거품을 내면 우유처럼 흰 거품이 났다. 그리고 흰 거품이 풍부하게 핀 것을 좋은 차로 여겼기 때문에 이를 위해 당시에는 청자를 고급으로 여겼지만 차를 마실때 만큼은 검은 다완을 썼던 것이다. 그리고 거품을 보다 풍부하게 일으키기 위해 역삼각꼴로 찻그릇을 만들었다. 참고로 여기다 차 이외의 다른 음식을 담으면 균형을 못 잡아 넘어진다. 순전히 차를 마시기 위해 이런 디자인을 고안한 것이다. 이후 명청시기에 들어 녹차, 황차, 청차, 홍차, 백차, 흑차의 오늘날과 같은 차의 구분이 완성되자 어떤 종류의 차를 마시든 차의 고유 빛깔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는 백자가 선호되어 오늘날에도 다기의 대부분은 백자인 것을 볼 수 있다.

5. 도자기의 유해성[편집]


도자기는 식기로써의 재질 중 손에 꼽을만큼 안전한 재질로 손꼽힌다. 이는 유약[21]이 고온에서 녹아내리면서 유리화하면서 코팅을 하기 때문인데, 유리는 반응성이 낮을뿐만 아니라 물질 투과성도 낮아 안전한 식기 재질로 손꼽히기 때문.

문제는 이 유약 가운데 이 함유된 유약이 있고 이 납 유약을 바르게 되면 가열 과정에서 연료를 적게 써도 되고 도자기 표면이 반들반들해지는 효과가 있다. 때문에 여러 업체에서 납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당연히 인체에는 굉장히 유해하다. 이러한 유약을 광명단이라고 하며, 보통 유약에 비해 단가가 싸서 많이 쓰였다.

거기에 완성된 도자기에 장식을 더하기 위해 유약을 다시 바르고 다시 구울 경우[22] 유약이 제대로 유리화 되지 않고 표면에 남을 수 있는 문제점이 있다. 즉, 기존의 도자기 만드는 방식으로는 위험성은 전혀 없지만, 장식을 더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것.

현재 기이하게 많은 수치의 납 성분이 납득이 안가는 부분도 있고, 당사자들이 강하게 부정하며 재조사를 의뢰하기도 했다.(#) 또 위 불만제로에 대한 반박글도 있다. 언론에 대한 불신도 많이 쌓인지라 명확하지 않은 시점이다.

크리스털 그릇에는 납이 함유되긴 한다. 불만제로에 대한 반박글은 대부분 불만제로 측에서 한국의 도자기라는 도기는 크리스털 그릇을 검사한 결과라는 것. 크리스털 그릇의 경우 투명도를 위해 납이 함유되고 이는 유연과 무연으로 나뉘는데, 무연의 경우 함유된 납이 산화납이므로 인체에 무해할 수도 있다는 것이며, 유연의 경우 사용 전에 한번 식초물에 행궈 닦아주어야 된다.

6. 시대지역별 도자기의 종류[편집]

7. 참고 외부 링크[편집]

8. 같이보기[편집]

[1] 중국의 도자기가 유럽에 전해지다 보니 붙은 이름이다. 중국을 말할 때는 C가 문장 어디에 오든 항상 대문자이나, 도자기를 뜻할 때는 앞 글자를 소문자로 쓴다. 이는 칠기를 뜻하는 japan도 마찬가지.[2] 이 쪽은 도자기를 아우르는 표현이라기보다 아래에서 설명할 '자기'에 부합하는 단어이다. 하지만 실제 사용상으론 큰 차이는 없고 대개 의미가 통한다.[3] 瓷(사기그릇 자) 대신에 磁(자석 자)를 쓰기도 한다. 중국의 자주요(磁州窯)에서 생산되는 자기를 磁器라고 하였는데 품질이 좋아 유명해져서 자기의 대명사가 됐기 때문이다.[4] 원래는 일본의 6대 도자기 양식 중 세토 지역의 '세토야키(瀬戸焼)'에서 나온 말로, 예전에는 주로 긴키지방 동쪽에서 통하는 말이었다지만 현대에 들어선 도자기를 총칭하는 표현으로 주로 쓰인다.[5] 과거 사용했던 납 등 중금속 성분이 들어간 유약을 쓰면 안 그렇지만, 정상적인 제조 방법은 아니므로...[6] 18세기부터 현재까지 도자기 업계의 원톱 자리를 지키고 있는 마이센의 경우 작센공국의 군주였던 아우구스트 2세가 연금술사를 잡아다 가둬놓고 도자기를 만들어내라고 닥달했고 결국 성공하였다. 연금술사들 뿐만 아니라 도공들의 경우에도 감시를 받았는데, 독일에서 도자기를 생산한게 성공한지 8년만에 도공 두명이 탈출하여 결국 노하우가 전유럽에 퍼졌고 도자기 업계 춘추전국시대가 열린다.[7] 대표적으로 독일의 마이센, 덴마크의 로얄 코펜하겐, 헝가리의 헤렌드, 영국의 웨지우드 등등[8] 거기다 중국제는 중국의 특성상 짝퉁이 매우 많아 실제 유물인지 아닌지 일반인이 구별하기 힘들다는 점도 있다.[9] 반면 이런 약간의 통기성과 흡습성은 내용물이 상하지 않게 하고, 물이 증발하며 빼앗은 열로 담은 것을 시원하게 하는 효과가 있어 현재까지 일부러 그런 도기를 쓰기도 한다.[10] 노천 소성시 나뭇재에서 부착되는 자연유는 더 오래 전부터 각 지역에 있었다.[11] 대표적으로 이삼평이 있다. 자세한 건 항목 참조[12] 그리고 이렇게 발전한 일본의 도자기는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 유럽의 기술까지 도입하여, 매우 얇고 가벼운 도자기를 공장에서 찍어내는데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백자를 대체하는 소위 왜자기로 한국 시장을 잠식해서 한국 도공들의 밥줄을 끊어버렸다.[13] 중국과 한국의 전통적인 자기와 달리 굽는 온도가 상당히 낮다. 초벌구이는 900~1100도에서 하고, 색을 입히고 유약을 입힌 다음 850도에서 재벌구이를 하는데, 동아시아의 자기는 최소한 1300도 이상에서 구워져야 한다. 후술하지만 터키의 치니는 유리질의 유약으로 코팅한 도기라고 보면 된다.[14] 수정자가 터키인 치니 장인에게 물어본 결과 치니에 사용되는 흙의 비율은 성형시 흙을 무르게하고 건조되면 백색으로 변하는 점토 20-30%, 완성품의 흰색을 내게 하는 고령토 25-30%, 3. 강도를 강화하기 위해 추가하는 석영 등의 산화 실리콘질 돌가루 25-35%, 그리고 장석 15-20%라는 정보를 들었다.[15] 18세기 이후 오스만 제국도 서구화의 영향으로 도자기 취향이 유럽풍으로 바뀌게 된다. 참고로 이을드즈 도자기는 압뒬하미트 2세 황제가 돌마바흐체 궁전을 비롯한 유럽풍 궁전에서 생활하면서 직접 사용하기 위해 취미삼아 시작했다가(...) 귀빈 선물등의 목적으로 도자기를 만들다보니 품질이 수준급으로 좋아졌다. 참고로 오늘날에도 공방이 열려있다.[16] 유명한 자사호도 자사니를 취급하는 공장, 작가, 가마가 서로 분업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17] 오늘날 상업도자기에서 많이 행해지는 전사지기법은 1950년대에나 대중화되었다.[18]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공산품으로써 시판되는 도자기 제품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유물이나 문화재로써의 가치를 보자면 중국을 중심으로 한 송나라시대 등의 고대의 동양식 도자기가 서양보다 인정을 받는다. 굳이 비슷한 경우를 찾자면 조잡한 초창기 금속활자 인쇄본인 직지나 구텐베르크 성경 등이 현대의 완성된 프레스기로 찍혀나온 책들보다 훨씬 큰 가치를 갖는 것을 생각하면 될지도.[19] 그외에 마이너하게 고려백자, 조선청자, 옹기등이 있다.[20] 소설 및 이를 희곡화한 '독 짓는 늙은이'가 대표적. 뚜왕 뚜왕하면서 9평때 멘붕을 선사한 그거 맞다.[21] 규석과 석회 등을 물에 풀어 만든다.[22] 굽기 전 장식을 해도 원하는 결과를 내기 어렵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