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토미 히데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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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정대신(다조다이진) 시절의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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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백(간파쿠) 시절의 초상화. [2]

신호

풍국대명신(豊国大明神)

시대

센고쿠 시대, 아즈치모모야마

도요토미 히데요시
豊臣秀吉, とよとみ ひでよし
/풍신수길

이명

기노시타 도키치로(木下藤吉郞), 기노시타 히데요시(木下秀吉)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

생몰년도

1537년 3월 17일[3] ~ 1598년 9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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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가문의 문장오동나무.[4]

하시바 가문 시절의 문장인 호리병박.


1. 개요2. 호칭/별명3. 유년기4.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5. 천하인이 되다6. 조선 침공7. 후계자 문제와 죽음
7.1. 히데요시 독살설?
8. 도요토미 가문의 멸망9. 히데요시의 능력10. 후세의 평가11. 불임 의혹12. 색욕마인13. 히데요시와 천주교14. 대중매체에서

1. 개요[편집]

豊臣 秀吉(とよとみ ひでよし) (1537년 3월 17일[5] ~ 1598년 9월 18일)

일본 전국시대 최후의 최고 권력자(정치인, 군인). 밑바닥에서 시작해서 오다 노부나가에게 중용되어 그의 사후 일본을 통일시키고 관백과 천하인의 지위에 올랐다. 조선을 침략해 임진왜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고, 정권의 지지기반을 다지는 것에 실패해 자신의 사후에 정권이 무너지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권력이 넘어가는 단초를 남긴 인물이기도 하다.[6]

센코쿠 시대최고로 출세한 인물로 유명하다. 서민 출신으로 태어나서 일본 조정 최고의 자리인 간파쿠(관백)[7]까지 오른 인물이다. 일본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표현할 때 빠지지 않는 어구가 바로 "戦国一の出世頭(전국 최고의 출세가도를 달린 인물)"일 정도로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입신출세의 아이콘과도 같은 인물이다.

한국에서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침략의 수괴로 유명한 인물이다. 병자호란과 더불어 한국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임진왜란의 주동자이기 때문에 일본 역사의 인물 중 한국인들에게 가장 유명한 인물 수위를 다툰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8] 이런 것 때문에 한국인에게는 별로 인상이 좋지 않다.

인터넷이라는 것이 발명된 이후부터는 상당수의 일본인들도 인터넷을 통해 임진왜란이 뭔지 알게 된 탓에 일본 본국에서조차 인식은 점점 부정적으로 변하는 추세이며 일례로 NHK 대하사극에서도 군사 간베에에서 처음으로 임진왜란을 대충으로나마 다루기 시작한 이래 일본 사극에서도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점점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2. 호칭/별명[편집]

다른 이름으로는 기노시타 도키치로(木下藤吉郞), 기노시타 히데요시(木下秀吉)[9],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 별명은 '대머리 쥐(禿げ鼠)', 원숭이. 한국에서는 조선시대부터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이름을 일본어 소리 그대로 옮기지 않고 그 한자를 한국식으로 읽은 '풍신수길'로도 불린다.

그리고 만년에 간파쿠에서 물러났기 때문에 퇴임한 셋쇼(섭정)나 간파쿠를 이르는 호칭인 '다이코(太閤:태합)'로도 많이 불린다. 사실 다이코라는 호칭은 히데요시만의 전용 호칭은 아니지만, 이 호칭으로 불린 사람들 중 제일 인지도가 높아서 일본인들이 그냥 '다이코'라고만 지칭하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가리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10] 그래서 나온 말이 '이마타이코(今太閤: 오늘날의 태합)'인데, 히데요시처럼 밑바닥 출신에서 입신출세한 인물들의 별명으로 쓰이는 단어다. 정치계의 이토 히로부미다나카 가쿠에이가 이 별명으로 불린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 외 파나소닉 창업자 마쓰시타 고노스케도 이 별명으로도 불렸다고 하며, 일본의 연예 기획사 요시모토 흥업의 창업자인 요시모토 세이(吉本せい)는 '여자 이마타이코(女今太閤)'라고 불렸다.

3. 유년기[편집]

본인의 주장으로는 일본 오와리국(尾張国, 아이치 현 서부)에서 아시가루[11]의 아들로 태어났다 하나 확실하지 않다.

공가나 무가출신조차 제대로 된 기록이 없던 시절인지라 히데요시의 출생배경을 정확하게 알 수단은 없다. 칸파쿠 취임 후에 자신의 모친이 주나곤의 딸로, 궁정에서 시녀로 일하다 낙향한 후 자신을 낳았다고 선전한 적은 있으나, 부정적인 주장을 따르면 미천한 신분까지 고귀한 것으로 만들 수는 없으니 그나마 부친이 아시가루였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동생 히데나가와 아사히히메, 히데요시가 평생 효도한 어머니 오만도코로(이름은 '나카')를 제외하면 친가 쪽의 친척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12]

아명은 고자루(小猿, 새끼 원숭이) 또는 히요시(日吉). 집을 나가면서 기노시타 도키치로(木下藤吉郞, きのした とうきちろう)로 개명하였고, 오우미 국을 평정한 뒤에는 노부나가로부터 지쿠젠노카미(筑前守)의 관위를 받으면서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라고 개명하였다가 태정대신(太政大臣), 관백(關白)이 되면서 도요토미(豐臣)라는 성을 썼다. 더해서 후지와라 가의 양자로 들어갔기 때문에 후지와라 성도 있다. 또한, 당시 겐지(源氏) 씨족이었던 아시카가 막부를 멸망시키고 헤이지(平氏)계임을 자처한 노부나가의 뒤를 이은 탓에 조선 측 기록을 비롯한 일부 문헌에선 '평수길(平秀吉, 다이라노 히데요시)'이라고도 불린다.[13] 단, 위에 기록한 다이라, 후지와라, 도요토미는 '우지(氏)'이므로, 실제 사용한 성씨(苗字)는 계속 하시바였다는 주장도 있다.

4.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편집]

아버지를 일찍 여읜 뒤 어머니가 재가하여 의붓아버지와 살았다가[14] 집을 떠나 마츠시타 유키츠나(松下之綱)라는 자를 섬기다 얼마 안 가 그만두고[15], 18세 때에 오다 노부나가의 하인이 된다. 이후 기요스 성 수리 실무자와 주방 담당자 등을 담당하며 상당한 성과를 올렸다고 한다.

추운 날 노부나가의 신발을 데우려고 품 속에 품고 있자 노부나가가 크게 마음에 들어했다는 이야기가 유명한데, 사실 이 일화는 명확한 사료가 있는 게 아니라 전설의 영역에 가깝다고 한다. 강항간양록에 따르면 노부나가가 뭔가 사와야 할 게 있어서 가신들에게 시키면 비싸기만 하고 질이 엉망인 것만 잔뜩 가져오기 십상인데 히데요시는 가신들이 주고 산 것보다 더 좋은 것을 더 싼 가격으로 구해오기 때문에 노부나가가 중용했는데, 사실은 히데요시가 중간에 일부러 자기 돈 보태서 더 비싼 걸 사다 바쳤기 때문이라고...[16] 1555년에는 하치스카 마사카쓰의 가신으로 들어갔다고도 하며, 유명한 스노마타 이치야 성(墨俣一夜城)의 일화도 이 시기(1561)의 것이지만, 이 일화도 후세에서 만들어냈을 가능성이 높다.[17] 히데요시의 이름이 사료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1568년의 일인데, 간논지 성 공략 당시의 편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해에 상락에 성공한 노부나가의 명으로, 아케치, 니와 등과 함께 교토의 정무를 담당하였다.

1570년의 가네가사키 전투에서는 아자이 나가마사의 배반으로 인해 급히 퇴각하는 노부나가의 후위(신가리)를 자청하여 자살에 가까운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살아나 큰 공을 세웠고, 1573년의 오다니 성 전투에서도 3천의 군세를 이끌고 아자이 격파에 일조하였다. 아자이 나가마사 사후 그의 옛 영지인 북 오우미 3개 군 18만 석을 영지로 받아 다이묘가 되었으며 치쿠젠노카미의 관위를 받았는데, 이때 오다 가의 중신 니와 나가히데(丹長秀)와 시바타 카츠이에(田勝家)의 성으로부터 한 글자씩 따와 하시바(羽柴)라는 성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오우미 출신의 인재들을 발굴하는데 힘을 쏟았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 이시다 미츠나리이다. 히데요시는 천한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때까지 그의 가신들은 대부분 그와 그의 아내 고다이인의 친인척들일 수밖에 없었고, 정식으로 가신들을 양성하기 시작한 것은 오우미에 터를 잡으면서부터의 일이었다. 이런 정황 때문에 히데요시 사후 이시다 미츠나리를 중심으로 하는 오우미 계열 가신들과 가토 기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을 중심으로 하는 오와리 계열 가신들의 갈등이 일어났다는 견해도 존재한다.

1575년에는 나가시노 전투에 종군하였고, 이듬해에는 상락해오는 우에스기 겐신을 막기 위해 시바타 카츠이에와 연합전선을 펼쳤으나 쌍방의 견해 차이로 히데요시가 이탈, 오다 군이 대패해버리는 사태가 벌어졌다(데토리가와 전투). 이 일로 노부나가의 격분을 샀지만, 이후 용서받고 시키산성의 마츠나가 히사히데를 공략하여 이를 멸하였다. 이후에는 주고쿠 지방 공략에 참가하여, 1579년까지 아카마쓰(赤松)[18], 마츠바라(松原)[19], 벳쇼(別所)[20], 고데라(小寺)[21], 우키타(宇喜多) 등을 항복시켰으나, 연달아 일어난 반란으로 모리 공략은 연기되었다.

1581년부터 재개된 모리 공략에서, 돗토리 성, 빗추 다카마쓰 성 등을 공략하였다. 특히 다카마쓰 성을 공략할 때 물줄기를 돌려 성을 물바다로 만든 것이 '다카마쓰 수공'으로 히데요시의 전공 중 가장 유명한 일화이다.

5. 천하인이 되다[편집]

이 빗추 다카마쓰 성을 포위할 때 노부나가가 아케치 미츠히데에게 통수 살해당하는 혼노지의 변이 일어났는데, 히데요시는 이 소식을 듣자마자 다카마쓰 성주인 시미즈 무네하루 한 명만 할복하고 더 이상의 진군을 멈추는 내용[22]으로 모리 측과 즉시 화친하였다. 이후 황급히 교토로 향했는데, 이를 주고쿠 회군(中国大返し)이라 한다. 현재 유력한 설을 따르자면, 6월 6일 오후에 다카마쓰를 출발하여 7일 밤에 히메지에 도착했다고 하는데, 비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 30시간 만에 70km를 주파했다는 기록만으로도 그의 군사적 재능을 알 수 있을 것이다.[23][24] 시바 료타로는 이에 대해서 본인이 직접 육상선수들에게 요청해서 가상실험을 해봤는데, 몸에 번잡한 장비를 최소한으로 줄인, 그러니까 식량을 휴대하지 않은 경보병 정도면 가능하다는 결과가 나왔고, 히데요시가 혼노지에서의 소식을 전해듣고 퇴각하기 전에 미리 발이 빠른 사람을 시켜 병사들이 지나게 될 길목에 위치한 마을마다 돈을 줘서 병사들이 도착하면 바로바로 식사를 조달받을 수 있도록(즉 신속하게 전투 병력만 움직일 수 있도록) 해둔 뒤에 보급 없이 무장을 최소화한 병사들을 선발대로 보내는 방법으로 빠른 속도로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했다고 해석했다.# 시바 료타로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사극 공명의 갈림길에서도 퇴각하는 히데요시의 군사들이 길에 늘어서 있던 주민들이 건네는 주먹밥을 말 위에서 곧바로 받아 먹으면서 진군하는[25] 장면이 등장한다. 이후 13일에 교토 근교인 야마자키에 도착하여 미츠히데와 회전(야마자키 전투), 이를 격파하고 교토에 입성하였다.

6월 27일에 열린 기요스 회의에서, 노부나가의 장남 오다 노부타다는 혼노지의 변에서 부친 노부나가랑 살해되어 차남 오다 노부카츠와 삼남 오다 노부타카 파로 중신들이 대립하는 가운데, 장남 노부타다의 적자인 산보시(훗날의 오다 주나곤 히데노부)를 지지하여 이를 옹립하였다. 이 일로 오다 노부타카 및 타키가와 카즈마스 등으로부터 탄핵장을 받았으나, 자신의 양자이자 노부나가의 4남인 하시바 히데카츠를 상주로 삼아 노부나가의 장례식을 성대히 치르는 것으로 회피하였다. 그 해 12월에는 시바타 카츠이에가 폭설로 군을 움직일 수 없는 틈을 타서 기후 성의 오다 노부타카를 공격하여, 생모와 딸을 인질로 받는 조건으로 화의를 맺었고, 이듬해 봄에는 이세의 타키가와 카즈마스를 공격하여 3월에 항복을 받아냈다.

그러나 2월 말에 출진한 시바타 카츠이에와 그에 동조하여 다시 거병한 오다 노부타카로부터 공격을 받았으나, 마에다 토시이에의 배반과 신속한 반격으로 승리, 4월 24일에 시바타 가츠이에와 시즈가타케에서 일전을 벌이고 그 결과 가츠이에는 부인인 오이치와 함께 자살한다. 곧이어 5월 2일에는 오다 노부타카가 할복하였다.

오다 가문은 몇 파벌로 갈렸는데, 혼노지에서 노부나가와 함께 사망한 노부타다의 아들 산보시는 아직 어렸기 때문에 히데요시가 데려다 옹립한 상태였다. 오다 노부카츠는 도쿠가와의 편에 섰으나 코마키 나가쿠테 전투 이후 영토와 영향력을 상실한다. 오다 노부타카는 히데요시를 반란을 일으킨 종놈쯤으로 취급하고 공개적으로 대항했으나 패배한 게 어지간히 분했던지, 아주 섬뜩한 절명시를 남겼다. "예로부터 주인을 치는[26] 곳이로구나. 천벌을 기다려라 하시바 지쿠젠[27]." 흠좀무

1584년에는 오다 노부카츠를 공격하기 위해 군을 일으켰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기이 사이가 당, 조소카베 모토치카 등이 오다 군에 가담하였다. 히데요시는 이세의 쿠키 요시타카오다 노부카네, 미노의 이케다 츠네오키 등을 포섭하여 초반 국면을 유리하게 이끌어갔으나, 하구로, 나가쿠테 등에서 연패하였다. 이에 히데요시 본인이 직접 전선에 나서자, 오다 노부카츠가 단독으로 강화에 응하여 전쟁은 종결되었다. 전투는 패배로 끝나 오다나 도쿠가와를 멸망시키는 데는 실패하지만, 이후 도요토미가 절대적으로 우세한 상황에 서자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여동생을 아내로 맞아 히데요시에게 귀순하고, 오다 노부카츠는 소국의 다이묘로 쫓겨난다.

전쟁이 한창이던 10월 중순에 종오위하 사콘에노곤쇼쇼[28]에 임명되었는데, 그로부터 약 한 달 만인 11월 22일에는 곤노다이나곤[29]으로 임명되었다. 이로써 관위로도 오다 가 필두가 되어, 명실 공히 히데요시 정권을 수립하였다.

이해에 오사카 성을 쌓았고, 1585년 3월 10일에는 정이위 나이다이진에 서임, 임관되었다. 3월 21일에는 토도 타카토라로 하여금 키슈를 정벌하게 하여 이를 평정하였다. 또한, 시코쿠를 정벌하여 7월 25일에 이를 평정하였다. 같은 달에는 오랫동안 지속하여 온 칸파쿠(關白)[30] 직 계승 문제에 편승하여, 후지와라 씨의 수장인 코노에 사키히사의 양자로 들어가 칸파쿠 직을 수여받았다. 이듬해에는 조정으로부터 도요토미 성을 하사받아 도요토미노 아손을 칭하게 되었고, 10월에는 총무사령을 선언하며, 다이묘끼리의 사사로운 전투를 금지시켰다. 12월 25일에는 다죠다이진(太政大臣)[31]으로 임명되었다.[32]

히데요시는 무가 출신으로써는 최초로 간파쿠에 취임하였고, 게다가 도요토미 성을 하사받음으로써 고셋케가 아닌 무가 출신의 새로운 가문이 간파쿠에 취임했다는 의의를 갖는다. 일본의 성씨제도는 우리의 성(姓)에 해당하는 씨(氏;우지)와 거기서 갈라져 나온 가문을 나타내는 묘지(苗字)가 구별되었는데, 히데요시는 고셋케의 일가인 후지와라(氏) 씨- 여기서 후지와라는 본성(本姓) - 코노에(묘지(苗字) 가의 일원으로 관백에 취임했으나, 천황으로부터 도요토미(氏;우지)를 하사받음으로써 새로운 가문을 열게 된 것이다.

이것은 막부가 아닌 조정의 일원으로써 율령체계에 입각한 통치를 하겠다는 의미였으며, 이후로도 조정의 관직을 무사들에게 수여하고 조정의 실권을 회복시킨다. 그리고 그 정점인 간파쿠직을 도요토미 가가 세습함으로써 정권을 유지하려는 구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헤이안 시대의 셋켄 정치와 유사한 면이 있다. 실제로 히데요시는 간파쿠 직을 후계자로 내정하였던 히데츠구에게 물려주었고, 히데츠구를 사사한 후에도 다른 누구에게도 간파쿠 직을 내리지 않아, 히데요리의 장성을 기다린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 체제가 확립되기 위해서는 도요토미 가의 당주가 간파쿠가 된다는 것을 당연시하는 것이 필요했는데, 히데요리가 너무 어려서 히데요시 사망 직후 간파쿠가 되지 못했고 후견 세력도 마땅치 못하여[33] 정권이 무너진다.

세키가하라 합전으로 실권을 잡은 이에야스는 간파쿠 직을 다시 고셋케에 주었고, 자신은 쇼군에 취임하여 막부를 통한 통치로 돌아갔으며, 관직을 공가의 것과 무가의 것으로 엄격하게 나누게 된다. 후대 메이지 시대에 히데요시의 이러한 정치체제 구상은 천황을 존중한 것으로 높게 평가되고, 이에야스의 막부 개창은 천황을 무시한 것으로 평가하게 되어 히데요시는 충신으로, 이에야스는 역신으로 평가하여 천황의 권위 강화에 써먹었다.[34]

1587년에는 20만 대군으로 규슈를 정벌하여 시마즈 씨를 복속하였고, 87년에는 교토에 주라쿠다이(聚樂第, 취락제 또는 聚樂臺, 취락대)라는 성곽대 저택을 건축하여 이듬해 텐노를 초청하였다. 이 해에 칼사냥(刀狩り) 및 해적 금지령을 내렸다.[35] 또한, 규슈 일대의 기독교도들의 횡포를 목격한 후에 바테렌 추방령(バテレン追放令)을 내려 기독교에 압박을 가하였다.

1589년에는 측실인 요도도노[36]로부터 장남 츠루마츠(鶴松)를 얻었다. 이듬해에는 호죠 가가 사나다 가의 영지를 무단으로 침범했다는 이유로 20만 대군으로 오다와라성을 포위, 3개월 만에 항복을 받아내었다. 포위 중에 다테 등 토호쿠의 다이묘들도 항복의 의사를 표했으므로, 이 시점에서 일본의 통일은 완수되었다. 장남 츠루마츠가 죽은[37] 1591년에 조카 도요토미 히데츠구를 양자로 삼아 칸파쿠 직을 물려주고 자신은 타이코(太閤, 전 칸파쿠에 대한 경칭)를 칭하여 히데츠구를 후계자로 선언하였다.

6. 조선 침공[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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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갑옷

1590년, 조선은 히데요시의 일본 통일을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조선통신사를 파견하였다. 히데요시는 조선에 대한 답서로 보낸 국서에서 정명가도[38]를 주장하였다. 조선 측이 이를 묵살하자 마침내 1592년 고니시 유키나가가토 기요마사를 선봉으로 하고 우키타 히데이에를 총대장으로 하여 16만 대군으로 조선을 침공한다.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킨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도 있고 그 중에는 1591년에 겨우 낳은 아들 츠루마츠마루의 죽음과 맞물려 그 충격으로 말미암은 '히데요시 노망설'도 있지만, 사실 히데요시가 대륙 진출을 운운한 최초의 기록은 1585년부터 나타나며 오다 노부나가의 대륙 진출에서 영향받았단 설도 존재한다. 즉 일본을 완전히 통일하기 전부터 대륙 진출을 운운했다는 뜻으로 대륙에 '진출' 한다는 생각은 어떤 형태로든 히데요시의 마음속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어쨌든 실현 가능성이 없는 망상에 가득한 계획에 불과했고, 히데요시와 관련된 많은 사료에서 그런 과대망상적인 심리가 드러난다. 조선에 보낸, 오만방자한 국서가 대표적. 자기가 태양의 아들이며 그 근거는 자기 어머니의 태몽(...)이고, 대륙을 정복하여 제국의 정치를 억만 년을 시행하겠으며, 늦게 따라오는 나라는 용서치 않을 것이라고 표현하였다. 이외에도 루손(=스페인령 필리핀), 태국,고산국(=대만), 류큐(=오키나와) 왕국에도 비슷한 내용의 친서를 보내는 똘기 위엄을 과시했다(물론 대부분 씹혔다.).[39] 심지어 포르투갈 선교사 편으로 인도에 있는 포르투갈령 고아(내가 인도까지 정복할 테니까) 거기서 보자는 내용의 글을 보내기도 했다. 대동아 공영권?

시바 료타로는 이를 두고 정치나 경제적인 면에서 이유를 찾는 많은 이론이 있지만,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은 겨우 10년이었으나 그는 일본 역사상 유례없는 독재자가 되었다. 여러 봉건영주를 복속시킨 후 그의 권력은 무제한의 공중에 떠서 무중력적 기분이 되어 망상세계의 병자가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라고 표현했다.

프로이스의 <일본사>에서는 이 동기에 대해 히데요시가 종종 주변인들에게 '이 정도의 권력을 얻었는데 커다란 위업을 이뤄내지 못한다면 지금 가진 권력이나 영광을 조만간 잃고 말 것이다'라는 발언을 했다고도 하며, 반란이나 음모를 통해 일을 해결하려는 성향이 강한 봉건영주들을 통제하기 위한 방안으로써의 성격도 있었다고 한다. 히데요시 이외의 모든 일본인이 이 침략 계획을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고 자신이 끌려들어갈까봐 두려워하였으며 개중에는 반란을 계획할까 망설이는 사람이나 '외국 땅에 끌려가서 죽을 바에는 자살하는 게 낫다'라고 처자식과 함께 한탄하는 사람들까지 나왔다고. 대규모의 무리한 전쟁 준비 때문에 죽는 사람이 속출할 정도의 대역사가 이뤄졌지만, 절대권력을 손에 쥔 히데요시에게 간언할 만한 사람이 없었고 다들 히데요시의 위광에 이상할 만큼 위압되어 있었으며, 이런 불만을 민감하게 알아챈 히데요시가 살살 달래면서 머뭇거리는 사람을 마구 협박해서 을러댔기에 예스맨히데요시의 가신들조차도 도저히 막을 수 없었다는 것이 프로이스의 설명이다.

다만 유일하게 예외인 인물이 하나 있었는데 그가 바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였다. 그는 222만 석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보다 유일하게 고쿠다카가 많은 256만 석의 다이묘[40][41]였고 그래서 되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신경쓰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히데요시의 가신 출신 다이묘들이나 마에다, 모리 등 다른 오대로급 다이묘들 전체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중심으로 움직였기 때문에 도쿠가와 이에야스 역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무시할 수 없는 형국이었다. 결론적으로 히데요시와 이에야스는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보는 형국이었고 그 결과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단 1명의 병력도 조선정벌에 파병하지 않게 되었다. 수천 명 정도의 소규모 병력을 히젠나고야에 예비대 형태로 주둔시킨게 전부였다.

혹은 이런 의도였을 수도 있어 보인다. 잘 알려진 대로 히데요시는 덴노 가문의 후손이 아니기에[42] 쇼군이 될 수 없었다.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양자가 되어 자기 가문을 세우려는 시도도 했지만 역시 실패. 따라서 그가 확실하게 권력을 잡고 유지하려면 결국 호죠 가문의 싯켄과 같은 노릇을 해야 했는데 그러자면 다이묘들을 휘어잡을 만한 확실한 업적이 있거나 그들을 압도할 만한 카리스마를 갖거나 해야 한다. 히데요시에게는 2가지 모두 없었다. 그렇다고 다이묘들을 다 잡아 족칠 수도 없으니 그 대신으로 조선을 정복하여 나름의 업적을 인정받고 조선을 새로운 자기 영지로 삼아 동일본 쪽의 다이묘들도 전부 제압할 생각이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도쿠가와 등 동일본 지역의 다이묘들로서는 출병하는 데에 서일본의 다이묘들보다는 더 많은 비용이 소모될텐데, 이는 히데요시에게는 논공행상에서 그들에게 그만큼 더 많은 몫을 두둑히 쳐줘야 한다는 양날의 검이 있다.[43] 히데요시가 관동의 호조 가문을 정벌할 때 규슈의 시마즈나 막 규슈에 배치된 부하 장수들의 병력을 부르지 않은 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였다. 도요토미는 도쿠가와를 조선 공격에 크게 동원할 의도가 없었고, 조선 침략에 동원된 장수들의 면면은 대개 히데요시가 비교적 신뢰할 수 있거나 히데요시 정권과 관계가 가까운 심복들 및 서일본의 영주들로 채워져 있었다. 프로이스 일본사 등 여러 문헌에서 히데요시는 자신이 신뢰할 만한 장수들을 성장경험치 벌이시키려는 속내를 일정 부분 드러내고 있다. 총대장이 둘 다 애송이급(...)인 것도 그러한 연유인데, 우키타 히데이에(임진왜란 당시 20세)나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정유재란 당시 15세)는 둘 다 히데요시의 친족이었다.[44] 여하튼 도요토미가 조선 및 명 정벌에 성공해 영지를 대폭 늘리고 부하들에게도 뿌렸다면 세력을 엄청나게 키울 수 있었겠지만 결과는 패착이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이후 가문과 부하들이 멸문으로 가는 길을 열게 된다.

아울러 동일본의 장수들은 히데요시가 신뢰할 수 없었고 영지도 멀어서 동원할 만한 메리트가 없었다. 이에야스는 일본 내에서 히데요시의 명에 따라 여러 성 건축 등의 사업을 시행하고 있었고, 기존의 세력 기반이었던 미카와에서 관동 지방으로 영지가 바뀐 이에야스는 새 영지를 안정화하는 사업 때문에 병사를 보내고 싶어도 보낼 수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히데요시는 껄끄러운 다이묘들을 통치가 힘든 지역으로 전봉시켜서, 이를 거부할 시 내쳐버리거나(오다 노부카츠), 이후 반란이 일어나는 등 영지의 경영에 실패할 시 그것을 구실로 숙청하는(삿사 나리마사) 일이 잦았다. 호조 가문의 세력이 깊이 뿌리내려 있고 반항적, 독립적 풍습이 있는 관동을 다스리는 것은 상당한 난관이었으므로 봉지 경영 때문에 군사를 동원할 수 없다는 것은 합리적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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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을 일으켰고 초반에는 예상대로 일본 측의 압도적인 무력에 조선이 연패를 거듭하여 평양 또는 함경도까지 일본군의 진격을 허용했다. 그러나 너무 빨리 진격하는 과정에서 주 진격로에 있는 도시만 점령한지라 조선군이 다시 재집결할 수 있었고 보급선이 길어지기 시작했다.

덤으로 해상에서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의 대활약과 각지에서 의병 등을 흡수하며 전열을 재정비한 조선군의 적극적인 반격으로 보급선이 급속도로 무너지기 시작했고, 여기에 명군이 본격적으로 참전하면서 전황이 불리해진다. 결국 전쟁을 빠르게 마무리하고 싶었던 명나라와 일본의 이해관계가 일치해 강화 협상이 시작되었다.

이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다음과 같은 강화의 조건을 내세웠다. 굵은 글씨는 히데요시의 조선/명나라에 대한 정보나 현실 인식이 제대로 되지 않은 수준을 넘어 과대망상 정도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조항들. 이런 히데요시의 망상적 조항들 때문에 상대국에 대한 제대로 된 정보와 현실적인 복안이 있던 심유경이나 고니시 유키나가 같은 실무진들은 협상 파탄을 막기 위해 주작 위조라는 극약처방까지 동원해야 했다.

  1. 명나라 황녀를 일본 덴노후궁(!)으로 삼는다.
    덴노의 정식 황후나 실권자인 히데요시 본인의 정실 부인으로 삼겠다고 했으면 명나라 입장에서 티끌만큼이나마 '어, 생각해 볼까?' 할 수는 있었을 것이다. 실제 역대 중화제국에서는 황녀를 외국의 군주에게 시집 보내는 일이 생각보다 드물지 않았다. 이를 화번공주라고 부른다. 당나라도 문성공주를 티베트에 시집보낸 적이 있고, 우리나라만 해도 고려 말기 오랫동안 원나라부마국이 되기도 했다.[45] 하지만 정실도 아닌 일개 후궁이었으니, 이는 명나라가 고려할 가치조차 없었다. 물론 당시 덴노나 히데요시 둘 다 정실 부인이 있었으니 하려고 했다면 정실 부인부터 내쳐야 할 문제지만 그래도 이 경우엔 황태자나 히데요시 본인의 아들의 정실 부인으로 삼게 한다면 되었을 부분 만일 일본군이 명나라 수도인 베이징까지 위협하거나 그보단 못해도 적어도 명나라 군을 압도하는 수준의 강함을 보였다면 명나라도 살기 위해서는 받아들였겠지만[46] 전쟁터는 조선이고 명나라 본토는 조금도 공격당하지 않았으며 명나라도 일본군에게 털리기만 하는 군대가 아니었다. 게다가 명나라가 이런 협상을 시작한것도 일본에게 털려서가 아니라 남의 전쟁에 귀한 피 더 흘리기 싫어서 그런것이었던데다가 털린 전투도 많았지만 일단 명-일본간 강화 협상을 맺으려고 할 정도니 명나라는 이같은 같잖은 조항따위는 무시해도 될 자격이 되었다.

  2. 무역증서제를 부활한다.[47]

  3. 일본과 명나라 양국 대신이 각서를 교환한다.

  4. 조선 8도 가운데 4도를 일본에 이양한다.: 7가지 항목 중에 가장 말이 안 되는 부분. 명이 강화협상 당시 조선에 약속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조선 영토 보장. 즉 일본을 평화롭게 물러가도록 하겠다는 것이었고, 그게 아니라도 영토 절반을 빼앗길 판에 아무리 명나라가 강요한다고 해서 조선이 들을 리 만무하다. 명나라에서조차 이건 받아줄 마음이 처음부터 없었고, 명군 내부에서 벌어진 논쟁도 '철군한 뒤 조선에게 전쟁을 맡기자 vs 우리가 영토를 다 찾아주고 난 뒤에 철군하자'는 쪽으로 일찍 후퇴하냐 아니면 같이 싸워 이긴 뒤에 후퇴하냐가 요점이었지 '영토를 넘기느냐 마느냐'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로선 대륙 정벌의 망상에서 최소한 조선 절반이라도 건질려고 내건 조건이었겠으나 점령 해봤자 잇키만 잔뜩 일어날 놈의 땅을 달라고 씨도 안먹힐만한 욕심을 부리고 있으니 이 정도로 국제적 현실성이 결여되고 자기 혼자만의 욕심에 사로잡힌 요구는 심지어 들어줘도 문제다. 당시 일본은 자국의 통일조차도 엉성한 봉건 할거 상황이었고 조선왕조를 멸망시키지도 못한 상태였으니 조선의 일본군은 그야말로 바다 건너 적대적인 피지배민 속에서 고립된 영지로 히데요시 사후, 잘해봤자 얼마 못가 조선 점령지에서 쫓겨났을 것이 뻔하다. 다 떠나서 일본 입장에서 한반도 내의 영토를 유지하기란 매우 어렵다. 반란도 반란이거니와 얼마든지 경기도와 북삼도 병력을 내려보낼 수 있는 조선과는 달리 일본이 병력을 보충하려면 바다를 건너서 병력을 상륙시켜야 한다. 그리고 제해권은 조선이 가지고 있었다.[48]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과 이순신의 활약으로 보급로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는 상황에 징병하려고 했다가 외려 의병 숫자만 불려줄것이다. 더하여 8도중 4도라 했고 분명 하삼도인 경상, 전라, 충청은 꿀땅중의 꿀땅이요 일본에서 가까운 땅이니 당연히 일본이 낼름 먹어치울 가능성 100%인데 문제는 남은 5도중 뭘 먹느냐다. 당연히 평안도,함경도는 명나라를 자극할 우려가 있고 너무 먼데다가 환경도 안좋아 먹어봤자 손해일 가능성 100%니 논할 가치가 없고 황해도도 너무 멀다. 그럼 남은건 경기,강원인데 문제는 경기도를 먹으려고 하면 조선은 죽을지언정 내놓을 수 없다고 할거고[49] 강원도를 먹어봤자 나올것도 없다.

  5. 조선의 왕자와 신하를 볼모로 일본에 보낸다.

  6. 포로로 잡고 있는 조선의 두 왕자를 석방한다.

  7. 조선의 권신일본을 배반(?!)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한다.: 조선도 일본처럼 권신에 의해 정국이 주도된다고 생각했다. 즉 히데요시의 부족한 대외 인식을 그대로 보여줬다. 실제로 1500년대 말 동아시아에서 봉건제도를 하는 것은 일본뿐이었고, 조선과 명나라 둘 다 중앙집권식 전제군주제를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조선과 명나라에서는 권신 따위가 감히 황제나 임금을 거스르면 목매달리거나 아니면 목잘리거나 하는 건 기본 베이스고 군주가 연산군처럼 또라이 기질이 있거나 영락제처럼 반항자들에게 보여줄 시범케이스가 필요하거나 스케일이 너무 크면 가문마저 박살날 수 있었다. 실제로 조선에서는 조광조 김안로[50]가, 명나라에서는 엄숭,위충현이 각각 왕/황제가 간단히 보내버렸다. 게다가 진짜 권신이 서약을 한다 치자 현실상 왕이 동의 안하고 권신을 갈아치우면 그만이다. 왕이 나서지 않아도 대간이 나서서 "전하 권신 OOO를 처벌하소서" 라고 할테고 왕은 올커니 하고 권신을 쫒아내고 서약을 휴지로 만들면 되기 때문 게다가 명나라 입장에서 보면 이건 어그로를 끌만한 일이다. 조선은 엄연히 자기네들 조공국인데 자신을 놔두고 다른 나라랑 배반이니 뭐니 한다면 기분 나쁠 일이기 떄문


히데요시는 강화협상을 유리하게 끌고 가기 위해 이런 들어 줄 수 없는 조건을 내밀었다. 또한 조선이 명과 교류하고 싶다는 일본의 입장을 명에 전하지 않았고 도리어 명과 일본을 이간질하였다는 입장을 내세웠다. 그러나 처음 요구와는 다르게 유화적인 모습을 보였고 강화 교섭은 고니시 유키나가심유경 등의 실무진 선에서 잘 처리가 되었다. 그러나 책봉을 받는 자리에서 히데요시는 조선의 왕자가 오지 않았다는 트집을 잡으며, 조선이 일본의 입장을 명에 전하지 않았고, 심유경의 중재로 조선을 용서하였으나 사례가 없었으며, 조선이 명와 일본을 이간질하였음을 주장하며 1596년에 다시 조선을 침공할 것을 명하였다. 자세한 것은 해당내용 참조. 이때, "전라도를 철저히 정벌하고, 충청도경기도도 되도록 침공할 것. 이후 성곽을 짓고 성주 대리를 둔 뒤에 귀국시키겠다."고 하였으며, 특히 학살을 직접 명해서 전쟁의 양상이 극도로 잔혹해졌다. 이듬해인 97년에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를 대장으로 삼아 14만 대군을 다시 일으켰고, 이번에는 조선군이 약화된 틈을 타 조선 절반의 병합을 목표로 중남부 지역을 휩쓸었으나 명군이 감축된 조선군의 자리를 대신해 잘 싸우고, 바다에서는 명량에서 이순신에게 털려 수로 병진 작전이 불가능해지게 되면서 결국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남부 지역에 왜성을 여러 개 짓고 장기간에 걸친 교두보 확보를 지시하게 된다. 이로 인해 1598년 내내 왜성에서의 혈전이 벌어졌다. 1599년에도 대공세를 계획하고 있었다고 하나,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실현되지 않았다.

조선의 잠재적인 국력[51] 과 당대 초강대국 명나라의 의지[52]를 제대로 읽지 못했으며 자기 군대의 능력조차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는 등[53] 무능의 연속이었기에 일본에서는 흑역사 취급되어 거의 다뤄지지 않는 편이고, 무리한 조선 침공이나 전쟁에 반대한 다인인 센 리큐[54], 히데츠구의 잔인한 숙청 등을 들어 만년의 히데요시는 지적 능력이 현저히 쇠퇴해 있었다고 주장하는 학자가 많다.[55] 그래서 현재도 일본인들은 도요토미를 언급할 때 이러이러한 업적과 실책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임진왜란을 신경쓰지는 않는다. 오히려 임진왜란도 도요토미가 말년에 노망나는 바람에 괜히 가만 있던 조선과 명나라를 건드려서 생긴 일이라고 생각하는 일본인들이 많다.[56] 물론 이러한 조선 침략도 미화하는 정치꾼들이나 왜곡 세력들이 있기는 하나, 임진왜란은 도요토미의 실책이라 생각하는 일본인들이 몇 배로 많다.

임진왜란을 겪은 모든 조선인들에게는 철천지원수이며 (조선인들의 코를 잘라서 본국으로 보내라는 정신나간 명령을 한 사람이다)[57] 선조암군으로 만든 주범이기도 하다.[58]

결론적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공은 스스로 안과 밖에서 강적에게 두들겨맞는 결과에다 스스로를 범죄자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는데 아무 잘못도 없는 조선을 먼저 공략해서 개전 초반기에 학살과 노략질을 일삼고 정발, 송상현, 윤흥신, 신립 등의 장수들과 그 휘하 병력들은 물론, 그 지역의 무고한 민간인들까지 죄다 학살해 악명을 얻었다. 그러나 조선침공기간 내내 일본 내부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조선에서는 이순신, 권율, 곽재우, 권응수, 송희립, 김완 같은 조선의 장수들에게 끊임없이 시달리거나 전투에서 연전연패를 거듭하였고 피말리는 전쟁 와중에 본인도 사망했다, 더군다나 조선 침공으로 인해 전쟁 말기에 자신의 세력이 약해져 결국 전쟁이 끝나고 나서 일본의 지배권 역시 정적(政敵)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강탈당해야만 했다. 한마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겐 철저하고 완벽하게 백해무익한 짓거리였다.[59]

7. 후계자 문제와 죽음[편집]

적남 츠루마츠가 죽은 뒤 히데요시는 조카 히데츠구를 후계자로 공인했으나, 1593년 요도도노가 다시 아들(히로이마루, 후의 도요토미 히데요리)을 낳자 아들을 후계자로 삼으려 하게 된다. 방해물이 되어버린 히데츠구는 자신의 딸과 히데요리를 혼약시키는 등 교섭을 시도했으나, 결국 1595년에 히데요시는 모반을 이유로 히데츠구를 코야 산으로 추방한 뒤 할복을 명하고 히데츠구 일가를 처형하였다. 어린 처자식까지 공개 처형한 이런 잔인한 처사 때문에 히데요시에 대해 우호적이었던 민중들의 평이 크게 저하되고 후일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가 죽고 손자 도요토미 쿠니마츠가 붙들려 처참한 죽음을 맞자 민중들 사이에서는 이게 모두 인과응보라는 내용의 풍자 노래가 유행했을 정도. 현대에도 히데요시가 민중에게 사랑받은 것은 부풀려진 과장이라는 설이 있다.

전국 최고의 출세아라는 화려한 타이틀을 갖고 있으나, 이는 역으로 보자면 다른 유력 다이묘나 무장들과는 달리 그 지지기반이 탄탄치 않음을 의미한다.[60] 말년의 히데요시는 도요토미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 안배를 하는데 그 핵심은 오대로(五大老)와 오봉행(五封行) 지방의 유력 다이묘인 오대로와 도요토미 가의 가신인 오봉행의 합의로 어린 히데요리를 보좌한다는 구상이었다. 또한 각 다이묘에게 히데요리에의 충성 맹세를 받고, 4살에 불과했던 히데요리를 원복시키는 등 도요토미 정권의 유지를 꾀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세 가지 설로 추측하는데 매독설, 위암설(임진왜란에 의한 스트레스 화병), (심유경에 의한) 독살설 등이 있다.

1598년에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 후시미 성에서 이에야스를 비롯한 오대로의 앞에서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후견을 거듭 부탁하고 숨을 거두었다. 오대로와 오봉행은 조선에서의 전쟁을 중단한다는 결정을 내렸고, 히데요시의 죽음을 한동안 극비로 부친 채 군의 철퇴를 명령한다. 이렇게 임진왜란도 히데요시의 죽음과 함께 왜군의 조선에서의 패퇴나 다름없는 철수로 종결된다.

사세구

몸이여, 이슬로 와서 이슬로 가나니. 나니와의 영화여, 꿈 속의 꿈이로다.
(露と落ち 露と消えにし 我が身かな 浪速のことは 夢のまた夢)

7.1. 히데요시 독살설?[편집]

히데요시의 사인에 대해서는 매독, 결핵, 이질, 위암 등 여러 설이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설화에 가까운 이야기지만 독살로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문제는 이 독살설의 주역이 명나라의 강화 사신으로 온 심유경과 조선인 소년 양부하라는 것. 이 이야기의 원전은 숙종조 문신 염헌 임상원의 개인문집 <염헌집>에 실려있다. 임상원은 직접 90세 고령의 양부하를 만나 히데요시의 죽음에 대해 들은 얘기를 채록했고, 후대에 이익의 <성호사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정조대에 <국조인물고> 등에도 약간의 차이는 있을 지언정 대체로 염헌이 정리한 독살설이 수록돼있다.

양부하[61]는 어린 나이에 동래에서 살다가 왜군이 부사 송상현을 죽이고 동래성을 함락시키는 와중에 할아버지를 비롯한 가족들이 왜군에게 살해당했다. 그 직후 포로로 끌려간 양부하는 하루 만에 간단한 일본어 회화를 구사해 총명함을 인정받아 히데요시의 시동으로 보내졌고 지근거리에서 수발을 들었다. 몇 년후 강화 교섭으로 건너온 심유경을 만났고 그와 히데요시 독살을 모의하게 되는데 그 과정은 이와 같다.

처음 히데요시는 사신들을 엄중히 가두고 감시하는 등 일종의 길들이기를 시전했고, 사신들의 하소연에 만나주는 척 응했다. 심유경은 히데요시와 대면하면서 이상한 환약을 자꾸 섭취했다.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계속 약을 집어 삼키는 심유경의 행동에 히데요시는 궁금하게 여겼다. 이윽고 히데요시의 질문에 심유경이 대답하길 대륙과 열도의 풍토가 맞지 않아 몸이 허해졌는데 그 허해진 기운을 보충해주는 아주 좋은 강장제라고 대답했다. 그 말에 히데요시는 처음에는 의심해 그 말을 믿지 않았지만 자꾸 권하는 심유경의 권유에 결국 약을 들이삼켰다. 그런데 얼마 후 히데요시는 몸에 기운이 솟는 것을 느끼게 되고 심유경에게 약을 받아 그 후로도 자주 약을 섭취하는데…….

이것이 사실 심유경이 진정 의도한 바였다. 훼이크다 이 병신들아

그 약은 사실 복용한 사람을 점점 말라죽이는 비소 계열 독약으로 심유경은 객사로 오자마자 바로 해독약으로 응급처치를 해서 아무 탈이 없었으나 이를 모르고 해독제 없이 복용한 히데요시는 그 탓에 점점 말라가고 기운이 빠져 사경을 헤메여 백약이 무효인 채 얼마 안가 비명횡사했다.


다만 이야기의 출처가 정식 사서가 아닌 개인이 기록한 야사이며 현재도 히데요시의 사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설이 있으므로 단순히 조선과 일본 소수 측에만 돌던 가설 중 하나라고 봐도 무방하다. 아무튼 이 설이 맞다면 세 나라를 속이고 더 나아가서 뛰어난 사기로 전쟁을 일으킨 전범까지 골로 가게 만든 심유경은 도대체(...). 대륙이 배출한 진정한 사기꾼 of 사기꾼, 사기의 신.

8. 도요토미 가문의 멸망[편집]

사후 교토 동산의 아미타봉에 묻혔고, 일본에서는 사실상 처음으로 평안하게 죽은 당대의 권력자를 신격화하여 신사에 신으로서 봉안되었다. 신명은 도요쿠니 다이묘진(豐國大明神). 보통 신사에서 신격화된 인간, 즉 히토가미(人神)을 받들 때는, 해당 사람이 원한을 품고 죽어 세상에 해를 끼친다고 판단할 때, 그 원혼을 달래고자 지었다. 그러므로 평안하게 죽은 당대의 권력자를 신으로 모시는 것은 신토의 논리로 볼 때 무척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살아서는 권력자로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고 죽어서는 신으로 받들린다니 그것 참 매력적인 일이기도 하고. 동상을 세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에 대한 기억을, 그리고 그 후예들을 단결시키는 상징이 되는 등 허영심과 실익을 겸한 효과가 매우 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러한 상징을 노려 자기가 죽은 뒤 신사를 세우도록 미리 유언을 남겼다.

도요토미 가문이 멸망한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신사를 해체하였고 히데요시의 무덤은 아예 폭탄으로 박살내버렸다. 이후 메이지 시대 히데요시를 제국주의의 심볼이자 조정을 중시한 천황숭배 사상의 선구자로 재평가하면서 재건하여 오늘날에 이른다[62].

포로로 끌려가 있던 유학자 강항은 히데요시를 기리는 탑에다가 '그렇게 기세등등하게 남의 나라를 침략해 놓고 죽어 버렸으니 앞으로 내부 분열이 진탕 일어날 텐데 이런 화려한 건물이나 성채가 다 무슨 소용이냐?' 라는 낙서를 해서 강항과 학문적 교류를 했던 후지와라 세이카가 급히 그 낙서를 떼었다.

히데요시 사후 이에야스는 각지의 다이묘와 혼인 관계를 맺는 등 히데요시가 사전에 정한 법도를 무시하지만, 마에다 토시이에의 생전에는 어떻게든 오대로-오봉행 체제가 작동하여 이에야스를 견제할 수 있었으나 그 기간은 결국 1년 남짓에 불과 했다. 토시이에 사후 도요토미 가신 내부의 무단파와 문치파의 갈등이 심화되고, 결국 이시다 미츠나리가 실각하면서 오대로-오봉행 체제는 와해된다. 사실 이것은 이시다 미츠나리의 잘못인데 완벽하게 가만히 있었으면 아무 일 없었던 것을 괜히 호소카와 다다오키의 아내인 가라샤를 납치하는 바람에 가라샤가 가신을 시켜 죽었고[63]그게 이유가 되어 오봉행에서 짤리고 만다. 미츠나리는 이에야스를 물리치기 위해 거병하지만 이에야스는 몰래 연락하고 있던 무단파의 지지를 얻어내어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그를 비롯한 문치파를 격파하고, 논공행상으로 도요토미 가문의 영지를 해체, 도요토미 가문을 65만 석의 다이묘로 전락시키고 에도 막부를 연다.

1615년 호코지 종명 사건을 빌미로 이에야스는 오사카 성을 공격, 두 번의 오사카 전투로 도요토미 가문은 멸망한다. 히데요리와 요도도노는 자살했으며 손자 구니마쓰는 숨어 있다가 결국 사로잡혔다. 구니마쓰는 당시 불과 7세에 불과했으나, 도요토미의 씨를 말려야 한다는 이에야스의 뜻에 따라 교토로 끌려와 살해당했고, 결국 히데요시의 대는 완전히 끊겼다. 다만 히데요리의 서녀였던 나아히메는 센히메와 가이히메의 조명을 받아 목숨을 건졌고 그대로 절에 들어가 비구니가 된다.

다만 중국을 제외한 당대 국가들의 정적 숙청 대부분이 그렇듯이 방계 후손들은 살아남았고, 그 중 상당수가 현재 일본에 생존해 있다.

9. 히데요시의 능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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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한 신분이라서 글을 거의 읽지 못하는 문맹으로 이 때문에 사이쇼 조타이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대신 글을 읽어주는 역할을 전담했으나 실력주의자였던 오다 노부나가에게서 중용된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매우 유능한 장수였다고 한다. 특히 공성전에 능하여 수공을 성공하거나 포위를 하기 전에 미리 인근 지역에 사람을 풀어서 시세보다 훨씬 비싼 가격으로 곡량을 긁어모아 두는 등 용의주도했다. 또한, 인물을 씀에는 노부나가를 본받아서 실력을 중시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소설이나 게임의 영향으로 잘못 알려진 사실도 적지 않은데 전국시대의 공명이라고까지 불리는 타케나카 시게하루는 원래 히데요시의 참모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시게하루 항목에도 있듯이 엄연한 오다 가의 직속 가신이었으며 히데요시 휘하에서 종군한 것도 '요리키(일종의 파견 근무)' 자격으로 종군한 것이었다. 이는 또 다른 그의 참모로 알려진 구로다 간베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원래 신분이 미천했던 히데요시는 적 아군 할 것 없이 인재를 끌어모았고 최종적으로 그것이 노부나가의 후계자 싸움에서 승리하는 요인이 된 것은 사실이다.

노부나가의 횡사 소식을 들었을 때도 당장 눈앞에 모리의 군이 있기 때문에 히데요시는 그대로 교전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회군을 할 수도 없는 처지였는데 이것은 그대로 전투를 계속하면 분명히 마에다나 시바타가 아케치 미츠히데를 토벌하고 노부나가의 후계자 자리를 꿰어찰 것이 분명했고 그렇다고 군을 돌리면 당장에 모리가 등 뒤에서 달려들어서 히데요시를 캐발살 낼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노부나가에 심취해있던 히데요시는 소식을 듣고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이때 히데요시에게 회군을 진언한 것이 바로 귀모(鬼謀: 귀신같은 모략)이라고도 불리는 구로다 요시타카였다.[64] 히데요시가 구로다의 제안에 따라서 한 신속한 회군은 일본사에 남는 역사적인 것이 되었다.

또한, 일본의 상업을 크게 발전시킨 것으로도 알려지는데 사실 이건 노부나가의 정책을 본받은 것이다. 원래 밑바탕이 없던 히데요시는 자신을 써준 노부나가에게 심취하여 노부나가 흉내를 많이 내었다.[65]

일본의 정치사적으로 보면 도쿠가와 막부가 다스린 에도시대 체제의 기틀을 다진 인물이기도 하다. 토지 조사(태합검지)와 가타나가리(칼사냥), 상업통제와 사농공상 신분제를 철저히 한 것은 도요토미 정권이 시행한 정책들로, 히데요시 정권의 정책은 이후 도쿠가와 막부가 그대로 수행해 나갔고 이것은 도쿠가와 막부가 전근대 일본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권을 수립하는 데 주춧돌이 된다. 원숭이가 쒀서 너구리 준거지(...)

이 외에도 정치력 역시 특기할 수 있다. 흔히 히데요시는 오다의 업적을 날로 먹은 먹튀로 평가받지만 사실 혼노지의 변당시만 해도 히데요시는 오다 사천왕에도 들지 못한 일개 방면군 사령관[66]에 불과했다는 걸 보면 자기보다 급이 높은 시바타 가츠이에를 비롯한 이들을 제치고 사실상 오다의 영토를 회복하다시피 한 것도 녹록하진 않았다. 야마자키 전투에서 주군의 복수를 명분삼은 것 외에 명목상 사령관으로 오다가문 사람을 앉힌 것부터 시작해서 니와 나가히데, 마에다 토시이에같은 오다 노부나가 생전 자기보다 급이 높았던 거물조차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부하로 만든 점, 이 외에 모리, 오토모, 류조지가문, 그리고 넓게보면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같이 되도록이면 정벌에 따라 국력 소모를 막고 자기편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최대한 적을 만들지 않고 시마즈, 호조 정복에서 보이듯이 이른바 다굴 형상을 만드는 능력은 발군이었다. 게다가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기습했으나 되려 역관관 당해 군대로는 도저히 이에야스를 굴복시킬 수 없자 오다 노부나가의 차남인 오다 노부카츠를 끌어들여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굴복시키는 데에 성공했고 임진왜란 기간 동안에도 그 권모술수의 화신이라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상대로 자신의 정권을 지켜내긴 했다.

장사하며 밑바닥부터 올라온 인생 여정 때문인지, 만화 등의 매체에서 묘사할 때는 물건이나 사람 보는 눈이 좋은 인물로 묘사된다. 어느 만화에서는 생선장수로 나오는데, 말투만 듣고도 그 사람의 출신을 알아내고 그 지역의 입맛에 맞게 소금간을 해서 인기를 끄는 모습도 보여줬다. 상인으로서도 대성했을 것 같은 모습이 긍정적인 면으로 자주 부각되는 인물.

미천한 출신 때문에 후다이(누대에 걸쳐 섬기는 가신단)나 자신의 가문에 충성을 다하는 지역적 기반이 없었고, 이것 때문에 '시즈가타케의 칠본창' 등 억지로 자신의 부하들을 무장으로 만들고 스펙을 부여해 띄워 보거나 자신의 친척들을 억지로 타 가문에 양자로 들이기도 하고(코바야카와 히데아키) 타 가문의 인물을 억지로 자기 가문의 중추에 포섭하기도 하면서(우키타 히데이에) 어떻게든 정권의 기반을 만들어 보려고 했지만, 리큐, 히데츠구 숙청사건처럼 말년에 어이없는 실책을 저지르고 본인도 죽어 버려서 정권이 몇 년 못가 붕괴해 버렸기에, 정치적 측면에서는 실책이나 한계도 크다.

권력자로 등극하고 나서는 과대망상적인 언행이 자주 보이는데, 후시미에 대지진이 일어나서 사람들이 엄청나게 죽거나 다치고 후시미 성과 함께 조영하고 있던 대불이 무너지자 대불에 활을 쏘면서 "나라와 백성들을 보호하라고 만들어 놨는데 네 몸 하나 못 지키냐!"라고 화를 냈고, 자기가 어머니가 태양 꿈을 꾸고 낳은 태양의 아들이라느니, 제국의 영토를 넓혀서 억만 년을 다스리겠다느니 하는 몹시 부끄러운(...) 구절을 조선에 보내는 국서에 집어넣기도 했다. 조선에 보낸 국서 자체가 외교문서로서의 기본적 서식이나 의전 등의 격식을 전혀 갖추지 못한 중2병에 가까운 내용으로, 히데요시의 당시 배경이 부족했음을 나타내준다.

이외에도 가마쿠라의 쓰루가오카 하치만구에서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목상을 보고 "당신은 덴노의 후손에[67] 명문 가문의 출신이므로 유배지에서 거병했을 때에도 사람들이 따랐지만, 나는 천한 신분으로 일어나 내 능력만으로 천하를 잡았으니 당신보다 내가 낫다"라고 말했다는 설화가 있다.

하룻밤만에 성을 쌓았다는 이야기가 자주 언급된다. 사실 성이라 하기에도 뭐한 뼈대만 세우고 외형만 그럴싸하게 한건데, 그걸 본 적장이 일하는 속도를 보아 엄청난 대군일거라 지레짐작하고 도망갔다는 일화가 점점 부풀려져서 정말로 사람들 갈궈서 하루만에 해냈다는 식으로 뻥튀기가 되었다고.

그러나 장기적인 계획을 세울 능력은 전무했고 대국적인 안목도 없고 한마디로 인스턴트라는 단어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표현하기에 가장 알맞는 영단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시땜빵의 천재였다. 오다 노부나가의 휘하에 있을 때부터 매사를 순간적인 기지로 해결했지만 사전에 긴 시간을 두고 뭔가를 계획하는 일따위 일절 없었으며 처음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상대로 무력으로 맞붙었다가 복날 개패듯 얻어터진 뒤에야 오다 노부카츠를 꼬득여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자신에게 맞설 명분을 없애버려서야 겨우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굴복시켰을 정도이다. 물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순발력과 순간판단력이 엄청나게 뛰어났기에 빠르게 돌아가는 전쟁터에서만큼은 이만한 전투지휘관도 없다.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능력은 그게 전부이기 때문에 오랫동안 계획하고 준비하는 능력이 뛰어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결국 모든것을 빼앗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알고 보면 임진왜란 역시 천하를 얻은 이후 시종일관 임시땜빵만 하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로서는 갑자기 대폭 불어난 부하들을 통제하기 위한 임시땜빵으로 일으킨 전쟁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는 매우 잔인하게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결함을 최대한 이용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몰락시켰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너무 쎄서 그 힘을 약화시키려고 당시 기준으로는 엄청난 험지였던 간토 지방으로 전봉시켰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되려 그걸 핑계로 아직 기반이 닦이지 않았다고 하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임진왜란에 병력을 일절 보내지 않으면서 간토 지방을 그 특유의 극에 달하는 정치능력으로 안정시키고 완전히 복속시키는 데에 성공했으며 몰래 힘을 키웠고 임진왜란이 끝난 시점에서는 여타의 다이묘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250만석을 초과하는 유일한 다이묘로 성장해있는 상태가 되었다. 게다가 옛 영지에 대한 영향력마저 그대로 보존했으니 사실상 전일본의 절반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세력권이 되고 만 셈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당장의 크고 강력한 적이라서 전봉으로 세력을 깎는 임시땜빵을 감행했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되려 그걸 핑계로 힘을 키워버린 꼴이 되고 말았다. 차라리 전봉을 시키지 않았더라면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는 아무 명분이 없기 때문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임진왜란에 참전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조선에서 전사시키기만 하면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그 가문은 현세까지 일본의 지배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사실상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통제하는 게 불가능한 유일한 다이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였기 때문이다.[68]

한마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참모 또는 연대장 이하의 중하급 지휘관으로서는 최고일지는 몰라도 국가지도자로서는 확실히 실격인 인물이었다.

10. 후세의 평가[편집]

에도 막부 시절에는 당연히 저평가되었지만, 메이지 유신 이후 (명분상이지만) 덴노를 중시했다는 점이 높게 평가되어 히데요시를 신으로 모신 신사를 재건하는 등 이후 일본 제국 시절까지 상당히 고평가되었다. 한국과 대륙 침략에 광분한 그들에게는 히데요시가 선구자였으니까. 실제로 초대 조선 총독 데라우치는 경술국치 당시 "'코바야카와, 가토, 고니시가 이 날을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시를 지을 만큼 그들에게는 임진왜란을 대륙 침략의 모범적 사례, 히데요시는 나름 국위선양을 한 인물로 인식된 모양이다.[69] 다만 이는 히데요시를 너무 좋게 평가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게, 애시당초 히데요시가 쇼군을 해먹지 않은 건 본인이 덴노가의 후손이 아닐 뿐더러 본인이 미천한 신분 출신이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분명해서 덴노가의 후손을 사칭해봤자 소용이 없었기에[70] 쇼군을 할 수 없어서지, 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다.결과는 좋았다? 역으로 패권을 잡자마자 이에야스가 쇼군이 된 것은 그가 족보 주작해서 표면상 덴노가의 후손이었던 것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일본의 패전 후에는 이 평가가 정반대로 뒤집혀 이에야스는 야마오카 소하치의 대하소설 버프를 받아 평가가 수직상승한다. 다만 히데요시에 대해서도 객관적인 평가를 하여 임진왜란 전의 업적은 인정한다. 이래저래 이데올로기에 따라 평가가 왔다갔다 하는 인물들이지만 임진왜란 등의 막판 사고만 제외하면 분명 저마다 그 나름의 매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장점은 한국에서도 인정하는 부분.

한국내에서는 임진왜란의 원흉인 탓에 대체로 영 부정적인 이미지이지만 일본에서는 그의 입지전적인 출세 경력과 일본 국내에서의 업적, 평소 다정다감하고 허물없던 성격에 더 많이 주목한다. 일본 사람들이 자주 쓰는 히데요시의 호칭 중 하나는 생전에 그의 경칭으로 쓰인 '타이코(太閤)'다. 특히 오사카 성을 쌓고 오사카를 크게 발전시켰던 인물이라 그런지, 오사카에서는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으며, 오늘날에도 오사카 사람들은 히데요시를 타이코한(太閤はん)[71]이라는 친숙한 애칭으로 부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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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성 앞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그의 동생 도요토미 히데나가(豊臣秀長), 그리고 그의 아들인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제신(祭神)으로 기리는 호코쿠(도요쿠니) 신사(豊國神社)가 있다. 일본의 107대 덴노인 고요제이 덴노(後陽成天皇)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호코쿠다이묘진(豊國大神明)이라는 신호(神呼)를 내려주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신으로 모셔지게 됐고, 신호에 따라 호코쿠 신사라고 불리게 됐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가지고 있던 출세의 운을 받아보고자 지금도 많은 일본인이 이곳에 와서 참배한다고 한다.

하지만 군사 간베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젠 일본에서조차 임진왜란이 슬슬 알려지기 시작해서 이런 점 때문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부정적으로 평가되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논지는 딱 원균옹호론 수준에 불과하고 '군사 간베에'라는 드라마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의 뜻을 이뤄 천하통일을 달성했을때 까지만 하더라도 카리스마 넘치는 일본의 주인이 되어 나라를 통치해나가는 모습을 보였지만 바로 그 임진왜란을 일으킴과 동시에 미쳐돌아가기 시작했고 이순신에게 자기 부하들이 빗자루에 쓸려지듯 쓸려나가자 그 광기는 절정에 달했다. 그리고 사망하기 일보직전에서야 자신의 광기를 뒤늦게 후회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빨리 끝날 줄 알았던 임진왜란은 조선에 있던 이순신과 같은 장수들과 함께 각 지방에서 일어난 의병과 승병들 때문에 장기전으로 가 국력을 많이 소모시켰고, 자신의 세력인 서군파들이 조선으로 파병을 가 전사하거나 탈영, 전염병으로 죽은 것도 모자라 무엇보다 나중에 퇴각 중이던 일본군은 결사를 다짐하며 공격한 이순신과 그 휘하 조선군들이 아주 무참히 박살내 놓아서 세력이 많이 축소되었다. 이 덕분에 호시탐탐 일본의 통치자가 되고 싶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도 좋은 기회를 주고 말았으니 임종을 마감하기 전에 그에게 약속을 얻어 자신의 후계자를 부탁한다고 했지만 당시 일본의 전국시대 상황을 생각해보면 이건 언제든지 어길 수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이나 임진왜란 직전 통신사들이 남긴 기록에서 그에 관한 서술이 남아 있는데, 대체로 "생김새는 원숭이 같고, 왜소한 체격을 숨기기 위해 낙낙한 옷을 입었다. 볼품없는 풍채이나, 눈빛만은 광채가 형형해 주위의 대신들을 압도했다"는 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또한 일본인들의 기록에는 없지만 강항 선생의 간양록이나 프로이스의 일본사 등 히데요시를 특별히 감싸 줄 이유가 없는 외국인들이 남긴 기록에 의하면 오른쪽 손가락이 6개였다고 하는데 이것 때문에 컴플렉스가 있어서 잘라버렸다고도 한다. 만화 센고쿠 덕분에 한국에도 알려졌다.

이 외에도 조선에서는 한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주군을 시역했다는 식의 풍문이 널리 퍼진 바 있다. 이러한 풍문은 징비록과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시역했다는 사실은 조선 조정이 일본과의 수교를 꺼린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이는 사극 징비록에도 나타나 있다. 훗날 강항 등이 도착해서 찬탈, 즉 반역을 한 것은 맞으나 시역은 아니라고 했다.[72]

조일관계가 정상화되고 상당히 악감정이 해소되어 일본에 대해서 은연중에 우월감이나 부심은 있는대로 드러내지만 꽤나 좋게 평가하게 된 이후의 조선 통신사들도 히데요시에 관한 문제에만큼은 늘 민감했고 임진왜란 전에 대한 평가는 조금씩 바뀌어도 적어도 왜란 이후의 히데요시에 대해서는 '용서 못할 국적이자 침략자, 천하만민의 원수'라는 태도를 계속 유지했다[73]. 숙종 때는 히데요시를 모신 사찰에서 조선 통신사들의 연회가 열렸는데, 히데요시를 모신 절이라는 걸 알게 된 통신사 일행이 노해서 항의하는 바람에 다툼이 벌어진 적이 있다. 일본 측은 얼버무리기 위해 가짜 사료를 들고 와서 '이 절은 다른 사람이 세운 것이며 히데요시와는 관계가 없다.'라고 거짓으로 해명했는데 이렇게까지 성의를 보이자 통신사도 그냥 넘어가기로 했는지 환영연이 재개됐다고 한다.[74][75]

밑바닥의 병사부터 시작해서 최고 위치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일본 드라마 등에서는 매우 다정다감하고 잔혹한 살육을 싫어하는 인물로 묘사되곤 하지만, 사실 노부나가의 부장일 때부터 잇코 잇키를 토벌하기도 했고 심지어 모리와의 싸움에서는 모리에 대한 위협으로 여자와 아이 2백여 명을 책형에 처하는 잔인한 행위를 저지르기도 했다. 이것들은 당시에는 흔히 있던 일이라 특별히 히데요시가 잔인하다고 할 만한 일은 아니지만, 권력을 잡고 나서는 친조카인 히데츠구의 일족을 아이까지 잔인하게 학살하거나 자신을 비방한 사람을 집요하게 찾아내서 몰살하곤 했다. 강항 같이 히데요시를 증오하는 사람조차도 인정할 만큼 젊은 시절의 히데요시는 매력적이고 인심을 널리 얻은 사람이었지만, 나이가 들고 나서는 여러 잔인한 행동으로 인심을 잃었다.[76] 오사카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것은 사실 지방의 역사적 인물일 뿐이어서 그럴 뿐, 정작 히데요시 본인은 오와리(현 나고야) 출신인데다가 오사카 사람들에게는 이런저런 일로 비방이나 풍자의 대상이 될 정도였다.

요약하자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젊었을 적에는 아주 카리스마있고 결단력 있으며 다재한 인물이었으나 정작 천하를 통일한 후로는 자기 망상과 허영심에 사로잡혀 무리하게 임진왜란을 일으켰다가 결국 성과도 없이 퇴각 명령과 함께 임종 직전에 뒤늦게 후회했으며 이미 그의 잔인한 만행에 진저리난 일본 사람들에게 마저도 인심을 잃어버려 결국 자신의 가문이 2대만에 자신의 라이벌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멸망 당했고 그의 사세구처럼 진짜 꿈속의 꿈처럼 되어버렸다.

11. 불임 의혹[편집]

히데요시는 여자를 꽤 좋아해서 전국에서 미인을 끌어모았는데 그럼에도 밝혀진 자식은 세 명이며, 두 명은 요도도노 소생이다.

히데요시가 나가하마 성주 시절 결혼하고 10년만에 처음으로 첩을 맞이하고 첫번째 측실이 된 여인 사이에 아들 하나와 딸 하나가 있었다는 기록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후계자 아들을 얻기 위해 히데요시는 이후 15명의 측실을 두었고, 그 가운데 5명은 출산 경험이 있는 재혼녀였다. 그런데도 자식을 낳은 사람은 요도도노 뿐이었다. 그래서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히데요시의 친자가 아니라는 소문은 히데요시가 살아있을 시절때 부터 있었고, 첫번째 측실의 자식도 히데요시 사이에서 태어난 친자가 아니라 그녀가 데려온 자식이라는 설이 있다.

더 자세한 사항은 도요토미 히데요리 항목 참고.

12. 색욕마인[편집]

여색은 그야말로 혹해 있었던지 주라쿠다이 저택에 수백의 첩을 둘 정도였는데, 의외로 취향은 건전했다고 한다. 첩들은 다 성인이고 그중에는 친구인 마에다 토시이에의 딸도 있었다. 나이차는 당연히 30세 이상이지만 일본 통일 시점에 이미 히데요시의 나이 자체가 50세가 넘었다.

낮은 신분에 대한 컴플렉스 탓인지 고귀한 여성이 취향이었다고 하며 측실 중에 옛 주군 노부나가의 혈연이 많다. 노부나가의 여동생의 딸, 노부나가의 남동생의 딸, 노부나가의 딸 등등. 본인도 알고는 있었는지, 히데츠구에게 '너는 여색만큼은 나를 닮으면 안 된다'고 충고했다고 한다.

이런 행각에 화가 난 코다이인은 생전의 노부나가에게 이를 알리자, 노부나가는 '저 대머리 쥐새끼가 그대처럼 훌륭한 여자를 또 얻을 수 있을 리는 없으니 질투하지 말고 아내답게 잘 처신하시오.'라고 정중하게 달래는 답장을 보내기도 했다.

밑바닥 출신이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여자는 대단히 밝히지만 당시 다이묘나 무장 중에선 드물게도 남색을 좋아하지 않은 인물이다. 당시 일본 상류층에는 미소년들과의 동성애를 즐기는 문화가 있었으며 이를 '와카슈도'라고 했는데[77], 히데요시는 서민 출신이라 이런 상류층 문화를 전혀 몰랐고, 취향도 아니었기에 전혀 즐기지 않아서 반대파들은 이를 두고 "천한 출신이라 풍류도 모른다"고 깠다. 한 번은 이러한 평판을 불식시키려고 부하들이 미동 수십 명이 있는 방에 히데요시를 데리고 갔는데, 히데요시가 미동 중 하나를 보고는 달려가서 그 아이를 데리고 나갔다. 잠시 후 미동이 돌아오자 부하들이 그 미동에게 '총애'를 받았냐고 물으니까 미동 曰, "누나 있냐고 물어보셨습니다."

13. 히데요시와 천주교[편집]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와는 달리 천주교를 매우 탄압했는데, 루이스 프로이스 같은 선교사는 "우수한 기사로 전투에 숙련되어 있으나 기품이 부족하다. 키가 작고 추악한 용모에 한 손에 여섯 손가락이 있었다. 극도로 음탕하고 악덕에 오염되어 있었다. 빈틈없는 책모가이다. 그가 지은 오사카 성에는 300여 명의 여자들이 우글거려서, 성이라기보다는 유곽에 가까웠다."라고 히데요시를 평가했다. 이에 반해 그 부인인 네네에 대해서는 "이교도이지만 대단한 인격자이며, 그녀에게 부탁하면 이뤄지지 않는 것이 없다."라고 호평하기도 했다.[78]

히데요시 초기에는 오다 노부나가의 정책을 이어받아 천주교에 대해 긍정적이었지만 갑자기 태도를 바꿔 선교사 추방령을 내렸는데, 동기로는 일본의 천하인으로써 일본의 전통 종교인 불교-신토의 비위를 맞출 필요가 생겼다는 것, 그리스도교 포교가 상대국의 식민지화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과 규슈 정벌 중에 쿠마모토 현 아마쿠사 제도(熊本縣 天草諸島) 지방에서 일본 백성들을 노예로 팔아넘기는 포르투갈 노예 상인들의 행태를 목격한 사건이 꼽힌다. 하지만 당시 수출할 상품이 없던 일본이 긴 전쟁 기간동안 외국에 판 주력상품은 다름아닌 일본인들이였다. 일본이 통일되기 전에 일직히 세상 하직한 다케다신겐 우에스기 겐신등이 인신매매 1,2위를 다툰다는 점을 고려해보자. 다만 노예 장사를 금지시킨 건 아니고, 노예로 전락시키는 대상을 임진왜란 당시 조선인으로 바꿨을 뿐이다.[79]

14. 대중매체에서[편집]

[1] 오다 사천왕과 더불어 이 인물을 합하여 오다 5대장이라고 부른다. 지휘관 성향의 나머지 오다 사천왕과는 달리 도요토미는 참모에 더 가깝다.[2] 모자가 칸무리가 아닌 , 조선풍의 복두사모인 도칸무리(唐冠)다. 자세히 보면 금사로 수까지 놓아 매우 화려하다.[3] 1536년 2월 2일이라는 설도 있다.[4] 쓰쿠바대학의 로고와 매우 비슷하다. 현재 일본 정부를 상징하는 인장이기도 하다. 정확히는 고시치노키리(五七桐)이라고 하며, 사실 이 문장은 히데요시만의 전용 문장이 아니라, 본래는 일본 황실이 쓰던 문장 중 하나였는데, 아시카가 다카우지고다이고 덴노에게 하사받은 이래 재상이나 주요 정치가에게 하사되는 문장이 되었다. 오다 노부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이 문장을 하사받은 적(다만 이에야스는 정권을 잡은 초기에만 이 문장을 사용했고 이후 본래 자기 가문의 문장인 접시꽃 문장을 쇼군 가문의 문장으로 사용했다.)이 있으며 노부나가 항목에 있는 초상화에도 노부나가의 옷에 이 문장이 그려진 것을 볼 수 있다. 고시치노키리는 주로 조정이나 중앙 정계의 정치적 유력자에게 수여되는 문장이고, 이외에도 각 가지의 잎 수가 2개씩 적은 고산노키리(五三桐)를 비롯해 키리몬은 평민과 무가를 불문하고 폭넓게 쓰인다.(다만 일반적으로는 도요토미 가문의 문장이라는 인식이 강한 편이다. 도요토미와 관련된 신사의 천막이나 기와, 깃발은 이 문장으로 장식되어있고, 일부 사극에서는 하시바 히데요시였던 시절에 이 문장을 사용하는 고증 오류가 일어난 경우도 있었다.) [5] 1536년 2월 2일이라는 설도 있다.[6] 한 마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천하통일이라는 밥을 만들었는데 그의 사후 히데요시 밑에서 조용히 힘을 키워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히데요시 가문을 멸망시키고 전부 꿀꺽해 에도 막부를 열어버렸다. 자세한 것은 세키가하라 전투오사카 전투참조.[7] 역직은 군정직이고, 관백은 조정직, 그리고 관백은 품계 없는 관위로 품계가 가장 높은 관위는 태정대신. 다만 품계가 없다는 의미와 히데요시의 권력을 감안하면 최고의 자리라고 해도 무방하다. 특히 무가 출신으로 관백이 된 이는 자기가 물려준 도요토미 히데츠구 이외에는 유일하다. 정일위는 죽어서나 되었고 생전에는 종일위였으니(살아서 정일위는 역대 일본사 인물 중 6명만 했다.) 위계 기준으로는 사실상 산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까지 올라갔다. [8]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 도도 다카토라, 후쿠시마 마사노리, 와키자카 야스하루, 시마즈 요시히로 등 임진왜란 때 참여했던 무장들도 상당수 있지만 그래도 당연히 임진왜란을 주도했던 히데요시보다는 덜 유명하다. 아마도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가장 유명한 케이스일듯.[9] 바보와 시험과 소환수키노시타 히데요시의 이름은 여기서 따왔다.[10] 한국에서 '대원군'이라고 하면 흔히 흥선대원군을 가리키는 것과 마찬가지다.[11] 당시 일본에선 아시가루는 말이 좋아 무사이지(전국시대에는 하급 보병단 역할) 하졸이며, 사실상 일반 백성 출신으로 보는 사람이 더 많다.[12] 그런데 히데요시는 그런 어머니를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자신의 여동생 다음으로 인질로 보냈다. 효자인 히데요시는 이 일로 평생 어머니에게 미안해했다고 한다. 사실 히데요시가 이에야스에게 어머니를 인질로 보낸 이유는 천하를 거의 먹어치운 자기가 전투에서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었던 이에야스를 굴복시키기 위해서 "이렇게 관대한 내가 너를 감싸려고 이렇게까지 해주는데 너는 어째서 내게 항복을 하지 않으냐? 그러니 좋은 말로 할 때 항복해라."라는 경고였다.[13] 조선 사람들은 일본의 성/씨의 차이나 구별을 잘 몰라서 일본인들의 성씨를 마구잡이로 ///로 표현하곤 했다.[14] 이때 얻은 이부(異父)동생이 도요토미 히데나가와 여동생 아사히히메. 이에 대해 이설도 있지만, 아무튼 히데나가는 그의 영지였던 야마토국의 이름을 따서 야마토 다이나곤이라 불리며 형의 충실한 동반자요 심복으로 활약한 인물로 그의 이른 죽음이 도요토미 정권의 붕괴로 이어졌다는 설까지 있는 거물, 그리고 아사히히메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정략결혼을 하여 스루가 마님이라 불렸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했다.[15]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배배신, 즉 가신의 가신의 가신이었다![16] 이 카더라는 태합입지전 4, 5에서 주명 시스템으로 아주 훌륭히(?) 구현된다. 무장 플레이시 초창기에 주로 물자구매 임무를 맡게 되는데, 훈공을 더 많이 받기 위해 물자를 더 많이 사려면 대부분 임무수행용 자금에다가 사비를 퍼부어야 하는 일이 빈번하기 때문(...)[17] 정말로 지었다고 한다면 현대 공법으로도 불가능하므로 제대로 된 성일 리는 없고, 목책을 세워두고 로마군식 숙영지 정도로 꾸며뒀을 가능성이 높다.[18] 62대 무라카미텐노의 7대손인 미나모토노 스에후사(源季房)의 아들 아카마쓰 히데노리(赤松秀則)을 시조로 하는 가문. 무로마치바쿠후의 창건에 힘쓴 가문이지만 가키쓰의 난을 일으킨 대가로 멸문당하기도 했다.[19] 아카마쓰 히데노리의 5대손인 아카마쓰 노리무라(赤松則村)의 4대손 마츠바라 사다모토(松原貞基)를 시조로 하는 가문. 흔히 무라카미겐지 아카마ㅆㄷ시류 마쓰바라씨(村上源氏赤松氏流松原氏)라고 불린다.[20] 아카마ㅆㄷ 노리무라의 증손자 벳쇼 아츠미쓰(別所敦光)를 시조로 하는 가문. 이렇게 1579년까지 멸망했던 가문 중 아카마쓰·마쓰바라·벳쇼의 세 가문은 같은 혈족에서 갈라져 나온 가문이다.[21] 훗날 히데요시의 군사가 되는 구로다 간베에가 고데라 가문의 가신이었다.[22] 성내 약탈을 금지해 달라는 성주 무네하루의 요청도 받아들였다.[23] 고대 로마군이 잘 정비된 가도에서 강행군을 해야 이것과 근접한 숫자가 나온다. 도로 사정도 별로 좋지 않던 당대 일본의 형편과 당시의 기후를 감안하면 그야말로 무시무시할 정도의 피로와 피해를 무릅쓴 강행군인 셈.[24] 츠츠이 야스타카가 이것을 소재로 <야마자키>라는 단편 소설을 썼는데, 초반에는 진지하게 상황 묘사를 하는 듯 하더니 히데요시가 갑자기 전화기를 꺼내 들고 신칸센을 예약, 신칸센과 전세 차량을 이용해 이동한다. 이에 황당해하는 가신에게 히데요시가 '설명 따윈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장면이 백미.[25] 자신들과 같은 농민 출신의 히데요시가 미츠히데를 치러 간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와 같은 농민 출신인 하시바 히데요시가 이제 천하를 잡으러 간다. 우리와 같은 농민의 시대가 열린다!"며 축하하러 나온 백성들이었다는 이야기도 존재한다.[26] 우츠미로 발음하는데, 노부타카가 죽은 곳의 지명. 그리고 과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등의 아버지였던 요시토모가 부하에게 배반당해 죽은 곳이기도 한데, 이를 빗댄 구절이다.[27] 이때 히데요시의 관직이 지쿠젠노카미였으므로 하시바 지쿠젠노카미 히데요시(羽柴 筑前守 秀吉)고 불렀다.[28] 근위부의 차관급[29] 태정관의 차관급, 조선의 도승지에 상당. 단 권관이므로 정원 외.[30] 헤이안 시대에 등장한 율령 외 직위로써, 헤이안 시대 후지와라 가문이 섭정(셋쇼), 관백(칸파쿠)를 장악한 셋칸 정치를 벌인 바 있었다. 이 시기에는 명예직에 불과한 공가의 직위였다. 유래는 <한서(漢書)> 곽광전(霍光傳)에 “모든 정사는 곽광에게 거친 뒤에야 천자에게 아뢰었다.”는 글에서 나온 것.[31] 조정 최고위 관직으로, 히데요시의 경우는 헤이안 말기의 다이라노 키요모리처럼 단순히 명예직이 아니라 조정과 일본의 모든 실권을 장악한 독재자로서의 지위를 상징하는 관직으로 보아야 한다.[32] 간파쿠 취임에 대해 조금 더 서술하면, 당시 일본의 직위 체계는 조정의 권위 실추와 함께 개판이 되어 있었다. 막부 정치 이후 어차피 실권은 슈고 등의 막부 무가직에 있었으나 전국시대에 오면 그것 또한 유명무실에 가까웠고, 다이묘들은 무가직 뿐만 아니라 조정의 관위 또한 뇌물을 주고 얻어내거나, 혹은 참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최고직인 간파쿠는 공가에서도 최고 명문이었던 후지와라 씨의 고셋케끼리 돌아가면서 취임하였는데, 혼노지 사건 직전 조정은 노부나가에게 정이대장군, 관백, 태정대신 중 원하는 관직을 주겠다고 한 바 있었으나 그 대답을 듣기 전 노부나가가 죽게 된다. 이 부분은 소위 '삼관추임문제'라고 하여 일본 역사학계에서는 끊이지 않는 논쟁이다.[33] 뒤를 이었던 관백 히데츠구가 히데요리가 장성할때까지 잘 버텨줬어야 하나...그를 오히려 숙청해버렸다.[34] 또한 히데요시가 간파쿠가 되어 조정 내에서 정치를 한 이유는 쇼군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비록 덴노가 무력화된 지 오래라고는 하지만 그 상징성까지 없어지는 게 아니어서 일본은 누가 뭐라 해도 덴노가 다스리는 나라이고, 여기서 덴노를 무력화시키려면 어쨌건 덴노가문의 출신 정도는 되는 등 최소한의 혈연적 유사성은 있어야 했다. 그래서 미나모토 가문도 덴노가에서 떨어져 나간 뒤 무사가 된 것을 강조하며 막부를 수립했던 것이고 호조 가문싯켄에 머물러야 했던 것이다. 그 뒤 쇼군은 덴노와 혈통상 연관성이 존재하는 미나모토 가문의 후손이어야만 한다는 전제가 반드시 붙었는데 잘해봐야 농민 출신인 아시가루의 아들에게 그런 고귀한 혈통이 존재했을 리 없고, 있어도 증명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쇼군 대신 간파쿠에 취임하여 실권을 행사하려 든 것이고 권력의 정당성이 인정되지 못했기에 쉽게 무너진 것이다. 물론 그 휘하의 병력을 동원해 압박할 수는 있었겠으나 그 병력은 대부분 조선 정복하겠다고 보내어 다 소모시켰다.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도요토미 가문이 확실하게 믿을 만한 병력은 이시다 미츠나리, 고니시 유키나가, 오오타니 요시츠구, 우키다 히데이에 등 소수에 불과했고, 오사카 성의 전투 때는 좀더 병력이 늘긴 했지만 이것도 실상은 진짜 충성하는 자들이 아니라 에도 막부에 대한 반감이 큰 낭인들이 대거 가세한 것이다. 반면 덴노 가문 출신은 아니라도 그 방계 후손이기는 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가문에 충성하는 소수의 가신들만 쳐낸 다음 막부를 수립하고 쇼군이 될 수 있었다. 다만 이는 흔히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오해다. 먼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천황의 방계 후손을 지칭했지만 실제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조상은 지방의 촌장 정도의 직위를 가졌었다가 다른 호족들과 연합 등을 걸쳐서 세력을 확장한 뒤 마쓰다이라 씨를 칭하며 다이묘가 되었으며 자신의 가신인 사카이 씨보다 격이 낮았다. 도쿠가와라는 성씨 역시 이에야스가 노부나가 등과의 동맹으로 성장한 후 내세웠던 성씨이지 결코 이에야스가 덴노의 방계 후손이기에 사용한 성씨가 아니었고 전국시대 인물들은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지만 힘에 굴복해 넘어간 것. 즉 히데요시 역시 자신이 쇼군을 원한다면자신은 사실 덴노의 방계라고 지칭 후 쇼군을 칭하는데 아무 무리가 없다.[35] 다만 농민과 무사를 완전히 분리하지는 않은 것 같다. 임진왜란이 터지면서 대규모 병력이 필요해졌기 때문이다.[36] 야사나 민간설화에서는 히데요시가 오이치를 짝사랑했다는 설이 많고, 오이치의 딸 중 그녀를 가장 많이 닮은 딸이 요도도노라고 한다.[37] 이 때 너무 슬퍼한 나머지 자기 상투를 칼로 잘라버렸을 정도라고 하며, 또한 이 때의 충격으로 히데요시가 노망 잔혹하고 의심많은 성격으로 변했다는 해석도 있다.[38] 일본이 곧 명나라를 정복할테니(정명) 조선이 그 길을 안내하라(가도)는 뜻. 만약 조선의 왕이 이를 받아들인다면 그때부터는 히데요시 휘하의 다이묘로 전락하게 된다.[39] 실제로 조선 이전에도 도요토미가 태국에 계속 자신들에게 항복하고 같이 명을 공격하자는 협박을 해서, 참다못한 태국이 명에게 같이 일본을 정벌하자고 요청하기까지 했다![40] 물론 그렇다고 이 당시 이에야스가 히데요시를 누를 만큼 강했던 것은 아니다. 사실 그 256만석도 히데요시가 강제로 보낸 간토의 오지였고(잠재력은 있지만), 히데요시의 영지 중 적지 않은 것은 한솥밥 먹던 선배 출신으로 자기를 지지해 준 사실상의 부하들(니와 나가히데, 마에다 토시이에), 어린 시절부터 먹이고 재워가면서 키웠거나 기타 자기의 직속 부하라고 할만한 이들(유명한 시즈가타케의 칠본창, 이시다 미츠나리, 고니시 유키나가, 쿠로다 간베에 등등), 양자제도 등을 이용해 어쨌든 굳건히 도요토미 가를 지지해줄 만한 부하들(우키타 히데이에)같은 이들에게 퍼준 게 많아서 의외로 본인의 석고는 얼마 안 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단순히 정복자로서의 짬밥만 따지면 히데요시는 하리마국에서 시작하다시피 해서 친구들을 잘 사귀어서 오다가의 영토를 사실상 제패하고 규슈, 칸토 일대는 아예 정복했고 주고쿠, 시코쿠는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다시피 해서 일본을 통일한 달인이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히데요시가 억지로 이에야스와 동생을 결혼시켰다는 것과 어머니를 인질로 보냈다는 것을 보면 이에야스가 히데요시의 최대 위협이었다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41] 그리고 이에야스의 석고가 250만석 이상이라고 해도 그 중 150만석은 일문중이나 가신들에게 배분했기 때문에 직할령은 약 100만석 전후였다. 물론 이 정도의 직할령만으로도 다른 오대로 중 2, 3번째로 석고가 많았던 모리 테루모토, 우에스기 카게카츠의 전체 석고에 버금갈 정도로 강대한 세력이긴 하지만 도요토미의 220만석이 히데요시의 직할령이고 중신들의 영지는 따로 분리된 것을 감안하면 세력비로도 도쿠가와는 도요토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42] 역대 쇼군들은 모두 족보의 신빙성은 차치하고 덴노 가문의 후손이다. 미나모토 요리토모는 덴노 가문에서 떨어져 나간 무가인 미나모토가 사람이고, 호죠 가는 덴노 가문 출신이 아니기에 쇼군으로 인정을 받을 수 없어서 싯켄으로 권력을 휘두르며 덴노 가문의 일원을 그 자리에 형식적으로 앉혀 놓아야 했다. 즉 어떻게 보면 가마쿠라 막부는 미나모토 3대가 끊어진 뒤 사실상 헤이지 시절처럼 덴노가 조정인 집단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 뒤 아시카가 다카우지도 미나모토 가문임을 인정받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어쨌거나 공식적으로는 미나모토 가문의 후손. 즉 덴노 가문의 친척이었다. 반면 오다 노부나가는 타이라 계열 성이기 때문에 쇼군이 되지 못했다는 주장도 있다. 되고 싶어한 것 같지도 않지만(실제로도 조정에서 쇼군이 될 것을 권했지만 본인이 거절했다) 어쨌든 막부가 그리 오래 유지될 수 있었던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43] 도쿠가와의 영지는 상술했듯이 안정화되지 않은 지역이 많았으며 워낙 관동인들의 텃세가 심해서 치안 유지에도 골머리를 앓고 있을 정도였다.[44] 우키타 히데이에는 준양자, 히데아키는 양자였다가 파양했다.[45] 제국대장공주, 계국대장공주, 노국대장공주[46] 백등산 전투에서 패한 전한이 흉노와 형제의 맹약을 맺으면서 동생이 된거나 북송-남송이 요나라와 금나라에게 세폐를 바친 일도 보면 모두 중원 왕조가 북방 유목민족에게 털려서 그런거다.[47] 그러니까 감합무역을 다시 부활시켜 달라는것인데 본디 무로마치 막부 시절 이뤄졌던 감합무역은 무로마치 막부가 제 기능을 못하고 다이묘들이 서로 다투어 하려고 하다보니 중지되었는데 이를 다시 하게 해달라는거다.[48] 조선 수군은 부산포까지 나아가 상륙함대를 타격하는 것 까지는 힘들지 몰라도 남해 해상교통망을 마비시키는 것 정도는 할 능력이 있었다. 심지어 부산포가 털리기도 했다(...) 상륙거점지까지 털려버린것[49] 서울 위치부터 생각해보자[50] 김안로의 경우는 중종이 벼르고 벼르다가 숙청한 상황이었다.[51] 오랜 평화로 인해 군역이 문란해서 그렇지, 당시 일본(1800만 가량 추정)과 조선(1300만 가량 추정)은 인구수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이는 일본이 오랜 전국시대로 인구수가 격감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전란이 크게 일어나자 조선은 순식간에 17만의 대군을 징집한다. 다만 임란초기 정예병들이 너무 많이 죽어서 야전 주도권이 없어서 전쟁이 오래되었고, 이 야전 주도권은 명군이 합류하면서 되찾게 된다.[52] 요동지방의 안보에 있어서 조선이라는 건실한 동맹국의 존재는 매우 중요하다. 조선군의 여진족 약탈전쟁은 동북지방의 안보를 동맹국을 통해 효율적으로 해결하려는 명나라의 요구도 있었다. 즉, 조선이 일본에게 점령당하는 것은 명나라의 천하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으로, 명으로서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53] 수군 상태야 말할 필요도 없고, 육군도 초반에는 전술적 식견과 조총 운용 능력으로 앞섰지만 조선군이 백병전에 익숙해지고 조직도 개편하면서 별 차이가 없게 됐다. 특히 일본 열도에는 제대로 된 기병이 없었기에 조선과 명나라의 기병대를 상대하는 데 매우 애를 먹었다. 그 결과 전쟁 막판 양측의 전투 양상은 거의 대등한 수준으로 바뀌게 되는데, 명군이 활약한 게 크지만 조선군도 상당한 전과를 올린 편이었다고 볼 수 있다. 흔히들 알고 있는 조선군의 졸전은 거의다 초창기고 나중에는 사정상 문제점이 없는건 아니었지만 졸전기록의 이미지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54] 1591년 할복[55] 히데요시가 주인공이며 그의 업적이나 출세가도를 소재로 한 소설에서 이런 경향이 현저하다. 히데요시의 업적만 조명하려고 비판점이나 실책들을 통생략해 버리는 경우도 흔한 편. 야마오카 소하치의 <대망>에서는 시종일관 부정적인 관점에서 서술되며, 소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히데요시가 일본 통일을 하였으며 말년에는 노망나서 임진왜란을 일으켰다가 쓸쓸하게 죽었다는 단 한 줄로 끝내 버린다. 대략 200년 뒤 유럽에선 나폴레옹모스크바에서 같은 경험을 하지 96년작 NHK 대하드라마인 <히데요시>에서는 아예 히데요시가 본격적으로 막장 행보를 보이기 전에 드라마를 서둘러 끝내 버린다. 히데요시 전문 배우로 인식될 만큼 유명해진 히데요시역 배우 다케나카 나오토는 "히데요시의 어두운 면을 연기하고 싶었다"며 이것을 아쉬워했는데, 2013년의 <군사 칸베에>에 출연하면서 이 소원을 이룬다. 반대로 히데요시를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그의 단점을 비판하는 창작물에서는 이 임진왜란을 '일본에게도 불필요했던 전쟁'이라고 간략하게나마 꼭 언급한다.[56] 임진왜란은 조선이 처음에 밀리긴 했으나 전세가 깊어져가며 오히려 일본 측 패전의 연속이었기에 일본에서는 흑역사 취급되어 매체로 다루지 않으려 들며, 다뤄진다 해도 일본이 잘한 것이 아닌 원래부터 일본의 잘못(자국의 실책)으로 표현한다.[57] 고대와 중세의 전쟁이란 원래 잔혹했지만, 아니 전쟁이란 원래 그런 것이지만, 그래도 임진왜란 때의 나름 민간인에 대한 상대적인 온화한 태도와는 달리 정유재란 때 일본군의 학살은 그야말로 잔혹했다. 아니 임진왜란에서조차도 조선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일본군은 도살자 그 자체였다. 동래성과 부산진, 경주성, 진주성, 기타 조선의 여러 성읍에서 일어난 일본군과의 전투와 양민학살로 죽어나간 군민만 수천에 달한다. 중요한건 저항했냐 안했냐로 죽인게 아니라 그냥 죽였다.[58] 선조암군목록의 거의 대개가 임진왜란 전후에 생긴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원래 있던 찌질이 기질이 전쟁을 겪으면서 폭발해버린 것으로 많이들 설명하는데 전쟁이 없었다면 그럭저럭 평타는 치는 왕으로 평가받았을 수도 있다. 물론 전쟁을 예상도 못 했고 대비는 했긴 했는데 불충분하다고 평가받는다. 또한 명나라로 도주하려고 시도하였다. 다만 실현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 또한 까임거리이기도 하다.[59] 참고로 이로 인해 명-조선-일본 3국 모두 질서개편이 이뤄졌는데 명과 조선은 성장하는 여진족에게 압박감 느끼다가 결국 명나라는 멸망하고 조선은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를 받들게 되었고 일본은 도요토미가가 몰락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 막부를 세운다.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안한 이들이 제일 큰 이득을 본 셈[60] 당장은 힘으로 누르고 있는 이에야스만 하더라도 미카와에서 누대에 걸친 충성스러운 가신단을 보유하고 있다. 이런 자신의 약점을 잘 알고 있는 히데요시는 자신의 일부 친척이나 측근을 육성하기도 하고, 타 가문의 어린 인물을 어거지로 자신의 가문에 편입시키기도 했지만 대부분 별 효과가 없었고, 그의 사후...망했어요.[61] 남원 양씨로 히데요시 사후 모리 테루모토 휘하에 있었다가 35세의 나이로 조선인 백여 명을 데리고 조선에 귀환 후 95세까지 장수했다. 참고로 이 이야기는 윤승운 화백의 맹꽁이 서당 등에도 나와서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별개로 양부하는 오랜 일본 생활로 히데요시 전후의 일본 사정을 꿰차고 있어서 강항의 간양록처럼 당시 일본이 이랬다 정도로만 알아두자.[62] 그래도 일본이 세계 2차 대전 패전 이후로 이에야스도 다시 재평가를 받고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으로 인한 가문의 멸망에 대한 중립적인 평가가 다시 부활했다.[63] 가톨릭신도인 가라샤는 자살하지 못했다.[64] 일설에 따르자면 이때 구로다는 "'마침 잘 되었군요. 이걸로 히데요시님에게 천하의 길이 열렸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히데요시는 몹시 놀라서 손에 들고 있던 물건까지 떨어트릴 정도였고, 구로다의 말에 따르기는 했지만, 그 지략을 몹시 두려워하여 경계했다고 한다. 자세한 것은 구로다 간베에 참조.[65] "노부나가가 진을 치면 풀 한 포기 나지 않지만, 히데요시가 진을 치면 시장이 들어선다"란 말이 있다. 다만, 이것은 상업 장려 외에도 히데요시가 즐겨쓰던 '기동전'과 '기만전술'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한데, 예를 들어 오다와라의 호죠가를 정벌할 당시에 대군으로 오다와라 성을 포위한 뒤 뒤에 목책을 쌓고 그 너머에 시장과 유곽(!)을 세워 비번인 병사들과 여자들이 노닥거리는 모습을 일부러 보여주어 적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등의 공작을 펼치기도 했다고 전한다.[66] 정확히는 하리마 일대의 다이묘.[67] 겐지/헤이케는 덴노 가문에서 갈라져 나오는 가문이다. 일본에서 황족은 4대가 지나면 겐지나 헤이케 등의 성을 받아 무가로 신분이 바뀐다.[68]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이 이길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조선에 보낼 생각따윈 하지도 않았다. 왜냐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승리를 거두면 그만큼 땅을 나눠줘야 하기 때문이며 애시당초 조선 침략의 의도가 자신의 봉신들에게 땅을 나눠주려던 것이었다. 또, 그게 아니더라도 히데요시의 힘으로는 어차피 이에야스를 통제하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므로 아예 안보내는게 나았다. 물론 이에야스는 실패하기 딱 좋은 조선땅에 굳이 가고 싶어하지도 않았을 것이다.[69] 반대로 이에야스는 음침한 계략꾼으로 상당히 저평가되었는데, 이유는 물론 메이지 유신 체제에서는 타락한 구체제 역할을 맡은 것이 에도 막부인데다가 교토 근방이 거점이었던 히데요시에 비해 막부를 세우고 에도에 거점을 둔 이에야스는 일본 황실을 푸대접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이에야스 외에도 일본 역사상 덴노를 갈아치웠던 아시카가 다카우지, 아시카가 요시미츠는 그 목상(木像)이 대역죄로 효수를 당했다(…).[70] 상술한 것처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미천한 출신이었던 탓에 후다이(누대에 걸쳐 섬기는 가신단)나 자신의 가문에 충성을 다하는 지역적 기반이 없었다. 게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히려 본인이 미천한 출신이었다가 크게 성공한 사실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을 뿐더러 애초에 본인의 직위였던 관백 자체가 쇼군보다도 훨씬 손에 넣기 어려운 직위였기에 굳이 쇼군이 되기 위해 덴노가의 후손을 사칭할 필요를 못 느꼈을 것이다.[71] 'はん'은 "~씨"를 뜻하는 'さん(~상)'의 간사이 방언이다. 한국식으로 번역하자면 방언이니까 '태합 씨' 정도.[72] 히데요시가 반역자인지 어떤지에 대해 여기서도 토론이 있었다. 통상 반역을 주인에게 가야 할 권리를 부하가 빼앗는 행위로 해석한다면 히데요시는 오다 히데노부에게 가야 할 주군으로서의 권리를 결과적으로 볼 때 빼앗은 셈이므로 히데요시도 반역자가 맞다. 다만, 전국시대는 워낙에 상막장의 시대였으니 이것이 당시 일본에서 특수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오다 가문은 히데요시와 서열이 뒤바뀌어 있기는 하나 요도도노 등의 사례를 통해 볼 수 있듯이 히데요시의 배려로 완전히 몰락하지는 않았고 훗날 가문이 이어져서 메이지 시대 당시 자작급은 될 정도로 그 세력을 유지했다.[73] 그래도 예외가 있기는 있었으니, 1763년 당시 서기(書記)로 파견된 원중거(元重擧)라는 사람이다. 그는 사행 후 일종의 일본 백과사전인 '화국지(和國志)' 를 쓰는데, 여기에서 임진왜란과 관련하여 도요토미를 까면서도 '중국으로 치면 진시황같은 사람' 이라며 긍정적인 평가도 내렸다.[74] 그 절은 히데요시와 히데츠구가 증축한 덕에 도요토미 가문을 떠받들고 있었다. 철저하게 도요토미 세력과 그 일족을 몰살한 이에야스였지만 그 지지자들을 다 죽일 수는 없어서 방치플레이한 것이다. 즉 새빨간 거짓말. 외교 문제로 비화할까봐 거짓 자료를 가지고 와서 출전이라면서 증거로 제시해 통신사들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다. 사실 지금 와서 연회를 취소하고 국교 파토낼 수도 없으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75] 여담으로 이때 조선통신사들과 같이 있으면서 그 가짜 문서를 가져와 보여준 인물이 아메노모리 호슈였는데, 신유한의 사행기록인 <해유록>에는 그때 아메노모리는 조선통신사들이 끝내 접대를 거절하자 분해하면서 칼까지 빼려고 하는가 하면, 조선통신사들에게 그 가짜 기록을 보여주고 난 다음날에도 실무 맡은 일본측 관리들에게 일본말과 조선말을 섞어가며 마구 갈구고아 너무 흥분해서 조선어가 나왔네요 통신사들에게도 "저희가 아니라고 문서까지 가져와 보여드리고 그렇게 말씀을 드렸는데 안 믿어주시니 너무 섭섭합니다"라며 불만을 표했다고 되어 있다. 쓰시마의 입장을 대변하는 위치였던 아메노모리로써는 조선통신사들의 강경한 태도는 쓰시마 번이나 실무 관료의 총책임자격인 자신에게 화살이 다 돌아오느니만큼 매달릴 수밖에 없었기도 했다.[76] 강항은 '히데요시가 살아있을 때는 사람들이 히데요시를 싫어하고 이에야스에게 기대를 걸었는데, 히데요시가 죽자 이에야스가 인심을 잃었다'고 기록했다.[77] 조선측 서장관인 신유한이 유학자아메노모리 호슈에게 그건 좀 이상하지 않냐고 따져 묻자 "학사님이 그게 얼마나 좋은 건지 모르시나봐요"라고 대답했다. 나중에 신유한은 "성리학자인 아메노모리도 저런데 보통 일본인들은 오죽하겠나 ㅉㅉ"라는 식으로 평했다.[78] 물론 프로이스의 평가는 프로이스의 극도로 천주교적인 종교적 멘탈리티나 그의 이해관계를 감안해서 분석해야 한다. 가령 프로이스는 불교 코스프레를 하던 무신론자인 오다 노부나가를 냉소적으로 보고 오토모 소린처럼 인간성 면에서 여러 비판이 제기되는 사람을 마구 칭찬하기도 했는데, 오토모 소린이 포르투갈인들을 보호하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이다. 네네의 경우는 선교사 등 이방인들의 이런저런 부탁을 잘 들어주고 신변을 돌보아 줬기 때문에 칭찬한 것. 반대로 히데요시의 경우는 반기독교적인 정책을 시행했기 때문에 실제보다 지나치게 폄하했을 가능성이 있다.[79] 이렇게 팔려나간 조선인들 대부분은 해외에서 노예로 죽었다고 전한다. 여성의 경우는 자손을 남겼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 자식이 노예가 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이후 결혼하여 자손을 남기는 과정에서 혼혈되어 조선 쪽 유전자가 계속 줄어들었을 가능성이 크므로 현재로서는 한국계가 있다고 쳐도 그 존재를 바로 확인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일본 제국에서 맹활약한 자들의 상당수가 조상대에 조선인 도공의 후손들이었던 데서 보듯이, 조선인의 후손이 있었다고 쳐도 대부분 유럽인이 되었을 것이고, 그들 자신도 자신들이 유럽인이라 믿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