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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몬드 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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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Desmond Thomas Doss(데스먼드 T. 도스)

생몰년도

1919년 2월 7일 ~ 2006년 3월 23일

Please, Lord help me get one more.(주님, 제발 한 명만 더 구하게 해 주시옵소서.)


1. 개요2. 육군 입대3. 마에다 고지 전투4. 전역 후의 삶5. 여담6. 외부 링크

1. 개요[편집]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신자이자 양심적 집총 거부자로 미군 역사상 처음으로 양심적 집총 거부자[1]로써 명예 훈장을 수여받은 자이다. 그를 기념하는 동상도 있고 여러모로 미국내에선 의무병의 전설처럼 여겨지는 인물이다. 단순히 부상당한 동료들 뿐만아니라 숨을 거둔 동료들도 집으로 돌려보내어 하나의 중대를 모두 살린 사나이로도 불린다.

2. 육군 입대[편집]

1919년 미국 버지니아 주 린치버그에서 가난한 목수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유년기 시절은 세계 대공황기였고, 그로 인한 어려운 생활 환경 탓에 9학년(우리나라의 고등학교 수준) 이후의 학업을 포기하고 버지니아 주 뉴포트 뉴스에 위치한 조선소에서 일하게 된다. 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조선소에서의 연장근무 요청도 거절하고 1942년 4월 미 육군에 입대하게 된다. 당시 조선소 근무자들은 대체복무가 가능했다.

3. 마에다 고지 전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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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에다 고지 절벽 위의 도스. 1945년 5월 4일 촬영된 사진이다.

2차 세계대전이 치열하게 벌어지던 1942년 4월 1일.

미 육군에 입대한 데스몬드 도스는 신실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신자로서 살인을 금지한 계명과 안식일에는 일상적인 활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계명을 철저하게 지키기를 원했고, 그리하여 집총을 거부[2]하고 의무 병과에 자원한다. 당시 미 육해군의 야전 의무병은 개인 호신을 위해 M1 카빈 소총으로 무장했다. [3] [4] 그러나 의무병이 전투 전면에 나서 총을 쏠 일이 많이 없으니 비무장 상태의 의무병으로 복무하길 원한 것이다.

그는 첫 훈련소에서 토요일(안식일)에 있던 지휘검열을 교회에 나가야 한다는 이유로 거부했고 순식간에 부대 내 최고의 문제덩어리로 떠올랐다. 전투병과로의 전환을 요구하는 지휘관들의 말도 끝까지 거부했고, 안식일이라는 이유로 훈련도, 지휘검열도 참여하지 않았다. 다만 응급 환자를 돌보는 일은 안식일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안식일에도 수행했다.[5]

결국 육군은 설득을 포기하고 도스를 의무병으로 유지시킨다. 당연하지만 군대가 사병에 대한 설득을 포기했다는 것은 말하기는 쉽지만 정말 수많은 고난과 역경과 빡침의 시간이 지나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이야 인권 문제에서 훨씬 선진화된 미군이지만 2차대전 당시는 지금보다 훨씬 문제가 심각했다는 점을 유념해 두자. 어쨌든 헌법재판관에게 집총 안 하고도 참전할 수 있는 권리를 허락받아 부대 내 유일한 의무병이 된 도스는 육군 제77보병사단에 배속되어 태평양 전선에 배치된다. 을 비롯한 각지의 태평양 전쟁의 전투들을 차례차례 거치며 수많은 총탄과 포탄이 빗발치는 전쟁터를 그는 신앙에 의지하며 자신을 지켜줄 소총 대신 들것과 붕대 그리고 밧줄만을 들고 누빈다.

이윽고 1945년, 꺼져가는 제국의 불씨를 붙잡고 발악하던 일본의 숨통을 서서히 조여가던 미국은 일본 본토 침공에 앞서 일본 남부의 섬 오키나와에 상륙 작전을 펼친다.

1945년 5월 5일[6], 미 육군 제 77보병사단 제 307보병연대는 오키나와의 마에다 절벽 반대편에 숨어있는 일본 육군 지휘소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하달받았고, 도스가 소속된 제1대대 200여 명은 벼랑을 향해 진격한다. 하지만 언덕에 도착하자마자 매복한 일본 육군의 치열한 습격이 시작되었고 대포기관총에 집중 포화를 맞은 1대대의 100여 명이 순식간에 쓰러지고 겨우 살아남은 55명만이 후퇴하게 된다.

1대대의 유일한 의무병이던 도스는 후퇴하는 아군을 바라보며, 적진 한복판에서 자신의 일을 시작한다. 비처럼 쏟아지는 일본군 기관총의 포화 속에서도 도스는 쓰러진 동료들을 일일이 확인하며 살아있는지 확인하였고 살아있는 동료가 있으면 들쳐업거나 둘러메는 식으로 한 명씩 아군이 있는 곳으로 나르기 시작했다. 한 명 한 명 들것에 싣고 밧줄에 묶어 안전 지역으로 보내기 시작한지 한참 뒤, 일본군이 숨어서 수류탄을 던지고 있는 참호 10미터 앞까지 달려가 쓰러진 동료 7명을 차례차례 구해낸다.

입고 있던 육군의 국방색 M43 HBT 작업복은 피에 절어 검붉은 색으로 변해버린 지 한참이었다. 본인의 생사도 알 수 없는 상황 속에서 필사의 구조 작업을 하던 중 일본 육군이 던진 수류탄 파편에 맞아 다리에 부상[7]까지 입는다. 그렇게 75명의 생명을 구한 도스는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고 본진으로 귀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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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 상병에게 명예 훈장을 수여 중인 트루먼 대통령. 1945년 10월 12일 촬영된 사진이다.[8]

미국은 데스몬드 도스 상병에게 최고 훈장 중 하나인 명예 훈장을 수여하며 그의 영웅적인 공적을 기린다. 그는 당시를 "하나님이 나를 보호해 주실 것을 믿었다"라고 회고한다.

4. 전역 후의 삶[편집]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인 1946년, 도스는 필리핀 레이테 섬[9]에 주둔하던 중 결핵 진단을 받는다.

이로 인해 1951년 8월 명예전역을 하기 전 5년 반 동안 치료를 받았다.[10] 전역 이후에도 계속된 치료를 받았지만, 과도한 항생제 복용으로 인해 1976년 청력을 잃었다가[11] 1988년 인공 달팽이관 이식 수술 이후에야 청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1942년 도로시 슈트(Dorothy Schutte)와 결혼했지만 1991년에 교통사고로 사별하게 되고, 몇 년 후 프란시스 듀만(Frances Duman)과 재혼한다. 전 부인과의 사이에 아들 데스몬드 토미 도스(Desmond "Tommy" Doss) 1명을 두었다.

2006년 3월 23일 향년 87세의 일기로 사망한다. 그의 장례식은 명예훈장 수여자답게 최고의 예우를 받으며 진행되었고, 시신은 채터누가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5. 여담[편집]

  • 그의 영웅적 일대기를 그린 영화 핵소 고지가 2016년 개봉했다. 국내 개봉일은 2017년 2월. 데스몬드 도스 역은 앤드류 가필드가 맡았다.

  • 영화가 끝나면 도스를 비롯한 영화 속 실존 모델들의 인터뷰를 비롯해 이후 도스의 인생을 간단히 요약해 주는 실제 사진들이 나온다.

6. 외부 링크[편집]

[1]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도스는 양심적 병역 거부자가 아니다. 양심적 병역 거부자는 병역의 의무 이행 자체를 거부하나, 양심적 집총 거부자는 도스와 같이 말 그대로 총을 잡는 것만 거부할 뿐 그 외의 모든 병역의 의무를 이행하고자 하는 이들을 가리킨다.[2]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집총 거부에 대한 공식적인 입장을 표명한 바가 없다. 다만 안식일만큼은 교단 이름에 반영되어 있듯 매우 중요시한다.[3] 군의관, 의무부사관, 의무병 등은 "비무장" 의무가 있지만, 상대가 먼저 오인 혹은 고의로 공격할 경우 방어 수단인 권총 정도는 소지할 수 있으며, 교전 상대가 먼저 의무 인원을 무장시켜 전투에 투입하거나 자신들의 의무 인원들을 공격할 경우 이를 지키지 않아도 된다.[4] 영화 핵소 고지 속 데스몬드 도스의 동료 의무병인 어브 셱터가 카빈 소총으로 일본군 장병을 쏴죽이는 장면이 있다![5] 안식일에 응급 환자를 돌본 도스의 행동은 본인의 종교적 신념의 측면에서 볼 때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고, 오히려 교리 차원에서도 권장할 만한 일이다. 성경에 보면 예수가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치는 장면이 수도 없이 나온다. 이에 대해 당시에 예수가 병을 고치는 '일'을 하여 안식일 계율을 어긴 것이 아니냐며 유대교 지도자들의 반발을 낳았고, 그에 맞서 안식일에 병자를 돌보는 것이 옳다는 가르침을 전한 것이 마찬가지로 복음서 여러 곳에 등장한다. 이후 예수가 십자가형을 당한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이 문제였을 정도. 그러니 기독교적 교리의 측면에서 볼 때 안식일에 환자를 돌보는 일은 예수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따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6] 공교롭게도 이날은 안식일이었다.[7] 이로 인해 들것에 실리지만 자신보다 더 심한 동료 전우에게 양보하기까지 한다.[8] 수여식 이후 아내와 함께 찍은 사진[9] 미국이 일본에게 빼앗긴 필리핀을 탈환하기 위해 벌인 필리핀 탈환전레이테 만 해전과 연관된 곳이다.[10] 그 당시 출연한 TV 프로그램 영상This Is Your Life - Desmond Doss 참조.[11] 당시에는 결핵약의 수준이 크게 발달하지 못했다. 결핵균은 느린 분열로 인하여 분열과정에 작용하는 다수의 항생제들은 크게 효과를 미치지 못한다. 덕분에 당시에 주로 쓰였던 결핵약은 직접 침투해서 결핵균을 죽이는 약인 아미노글리코사이드 계열중 streptomycin. 문제는 이 계열의 항생제는 청각 신경에 무조건 손상을 준다. 항생제는 대부분 신장이나 간에서 해독되지만 어쩔수 없이 일부가 달팽이관 내의 림프액에 축적되고, 청각 신경을 서서히 갉아먹는다. 지금도 결핵은 걸리면 죽는 병은 아니지만 최소 6개월 그중에서 2개월은 항생제를 네개나 복용해야하는 중한 병이다. 다른 감염증들은 항생제를 네개나 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 당시 열악한 의료환경에선 결핵으로 5년정도 치료받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정 안되면 폐자체를 절제해버리는 수술까지 했을 정도로 결핵이라는 병은 당대에는 불치에 가까운 질병이었다. 목숨과 청력을 등가교환할 수 있다면 당연히 청력을 포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청각을 상실할 위험성을 알면서도 쓸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다. 현재는 대체 할 수 있는 신약들이 있어 정해진 regimen대로 치료하면 90%이상은 완치되는 질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