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앤 파이터/외전 스토리

최근 수정 시각:

1. 개요2. 스토리 북
2.1. 청색의 수호자2.2. 날개 없는 천사
2.2.1. 1장2.2.2. 2장
2.3. 프리스트의 길2.4. 대모험가 카라카스
2.4.1. 1장2.4.2. 2장2.4.3. 3장
2.5. 품위있는 아라드인을 위한 넓고 얕은 지식
2.5.1. 1장2.5.2. 2장2.5.3. 3장2.5.4. 4장2.5.5. 5장
2.6. 연금술사친구2.7. 하급기사 교육일지
2.7.1. 1장2.7.2. 2장2.7.3. 3장
2.8. 천계에 부는 바람
2.8.1. 1장2.8.2. 2장2.8.3. 3장2.8.4. 4장
2.9. 숨어있는 폭탄, 사이퍼2.10. 체인피스의 아이들
2.10.1. 1장2.10.2. 2장2.10.3. 3장2.10.4. 4장2.10.5. 5장
2.11. 즐거운 마법교실2.12. 울루의 마지막 후계자2.13. 옛 친구2.14. 카르텔, 그들을 말하다
2.14.1. 1장2.14.2. 2장2.14.3. 3장
2.15. 제국의 어린 기사
2.15.1. 1장2.15.2. 2장2.15.3. 3장2.15.4. 4장
2.16. 돌아오지 않는 2.17. 검은 성전 보고서2.18. 테이베르스의 빛2.19. 애이불비2.20. 창신세기2.21. 붉은 죄
2.21.1. 1장2.21.2. 2장2.21.3. 3장
2.22. 장난꾸러기 호문쿨루스2.23. 막간의 이야기 - 노블스카이
2.23.1. 챕터12.23.2. 챕터22.23.3. 챕터3

1. 개요[편집]

온라인 게임 던전 앤 파이터에픽스토리와는 별개로 NPC들의 과거이야기 혹은 에픽 스토리와 연관은 있으나 시간대가 맞지않아 에픽스토리로 나오지 못한 이야기들이 스토리 북 이라는 컨텐츠로 나오며 스토리당 챕터는 최대 5까지 존재한다.

보다보면 전혀 뜻밖의 스토리들이 나오기도 한다. 애이불비 문단을 보면 알겠지만, 전혀 나올 것 같지 않았던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불명.

2016년 1월 28일 패치로 몇 몇 등장 인물들의 일러스트가 추가 되었다.

2. 스토리 북[편집]

현재 네오플 측에서 공개한 외전 스토리는 총 22개이다.

2.1. 청색의 수호자[편집]

THE GUARDIAN OF BLUE
파일:S7rlWu7.png

비탈라의 과거 이야기로 비탈라가 수호자를 선택하는 과정을 담은 이야기.

녹색의 수호자 가웬 : 비탈라. 고집은 그만 부리세요.

수련자 비탈라 : ……

가웬 : 용족이 바깥에 나가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 잘 알잖아요?
제국군에게 걸리기라도 하면 당신도 수용소로 잡혀갈 거예요.

비탈라 :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대전이가 일어난 이후 요정들의 마법진의 소멸 속도가 빨라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분명 있을 겁니다.

가웬 : 용족이 할 수 있는 일? 분명 많죠.
하지만 우리가 왜 자신을 희생하며 가시밭길을 걷지 않으면 안 된단 말이죠?

용족의 수호자 아드리나 : …긴 세월을 아라드에 살면서 남은 건 상처뿐이오. 어린 것들은 잡혀서 애완동물 취급이나 받고, 실험 재료라며 뿔을 뜯겨 죽어버린 자도 한둘이 아니라오.

아드리나 : 제국이 주도했다지만 돌이켜 보시오. 제국만 우리를 핍박한 것이 아니오. 그들에게 협력한 자들이 숱하게 넘쳐나오. 바깥은 우리에게 사지나 다름없소.

비탈라 : 물론 무섭고 슬픈 일입니다. 하지만 저는 제국의 천박한 실험에 도움이 되려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저를 위해 요정의 마법진을 지켜내고자 합니다.

비탈라 : 저는 한 때 이 아라드를 미워했습니다. 수가 적은 종족이기에 받아야했던 차별과 경멸… 그 무자비한 시선 앞에서 제 개인의 인격과 생각은 먼지일 뿐이었지요.

비탈라 : 하지만 요정들이 목숨을 걸고 마법진을 만들어 아라드를 지켜내고자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정말 감동했습니다.
타인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 말로는 쉬운 일입니다만 이 얼마나 용기 있고 고결한 행동입니까.

비탈라 : 저는 그들 앞에서 비겁해지고 싶지 않습니다.

가웬 : 더 이상 말려봤자 소용없겠군요. 마음대로 하세요. 하지만 당신이 나가면 우리는 다른 곳으로 이주하겠어요.

아드리나 : …비탈라. 그대가 수호자의 위치에 매달린 것은 마법진을 지키기 위해서였소?

비탈라 :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만… 제 생각도 많이 바뀐 것이겠지요.

아드리나 : 그대는 어릴 때부터 고집이 셌었지. 걱정도 되었지만 착한 심성과 현명함이 뒷받침되었기에 늘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소.

비탈라 : 모자란 저를 가르쳐 주신 스승님 덕분이지요.

아드리나 : 하하. 그대 앞에서는 스승이라고 잘난 체 할 수도 없겠소만… 고맙게 받아들이겠소.

아드리나 : 비탈라. 아라드를 위해 요정이 남긴 마법진을 관리해야 한다는 그대의 판단은 옳다고 보오. 아마 이 아라드에서 그 일을 할 수 있는 자는 용족의 수호자밖에 없을 거요.

아드리나 : 다만 우리는 용기가 없어서 그대와 함께 하지 못하오.
지독히도 괴로운 나날을 보내 왔으니까…

아드리나 : 이 비겁한 스승은 이곳에서 그저 그대의 안전을 기원하겠소. 그대를 나의 유일한 자랑으로 삼으면서.

비탈라 : 고맙습니다. 스승님의 가르침을 언제나 되새기며 수호자로서의 마음가짐과 행동을 잊지 않겠습니다.

아드리나 : 짐까지 다 챙긴 걸 보니 바로 떠날 모양이군. 하지만 가기 전에 아직 수호자의 칭호를 받지 못하지 않았소?

비탈라 : 네… 아무래도 바깥으로 나가겠다는 제 결정 때문에 받기는 어려울 거 같습니다.

아드리나 : 그럴 순 없지. 우리 용족의 수호자가 아라드를 지키겠다는데 이름도 받지 못하고 가게 할 수는 없지.

아드리나 : 제대로 된 수여식은 못해주지만 이 로브를 가지고 가시오. 언제고 이런 날이 오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어서 미리 준비해 두었소.

아드리나 : 그대에게 내리는 색은 '청색'. 이름은 '청색의 수호자 비탈라'. 앞으로는 이렇게 불릴 것이오.

아드리나 : 푸른 하늘처럼 모두에게 희망이 되고, 푸른 바다처럼 모두를 포용하는 수호자가 되어주시오.

비탈라 : 네. 물론 그렇게 하겠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아드리나 : 비탈라. 그대의 앞길에 용왕의 용기와 네메르의 지혜가 언제고 함께 하기를.

2.2. 날개 없는 천사[편집]

An wingless angel
파일:zHBWqoD.png

카곤이 세리아에게 고백하다 차이는 이야기(...).
대전이 전처럼 전용 에피소드로 나올 정도였던 카곤의 고백작전은 없어졌지만 대전이로 음유시인 아벨로가 추가되어 감초 역할을 수행한다.

2.2.1. 1장[편집]


카곤 : 으음... 어떻게 해야 좋을까... 으으으음...,
아아! 엄청 짜증나네! 왜 탁, 하고 좋은 생각이 안 떠오르는 거야?! 젠장. 요새 너무 피곤했어..

아벨로 : 왜 거리 한복판에서 소리를 지르고 있어? 무슨 일이야?

카곤 : 누구야? 사람 머리를 대뜸 치는 녀석이... 아벨로 님? 머리 치지 마세요. 스타일 망가지잖아요.

아벨로 : 별로 세게 친 것도 아니구만... 근데 왜 그렇게 짜증을 내고 있어? 또 새똥이라도 맞은거야?

카곤 : 새가 아니라 천사를 만났어요, 천사! 하아.. 그 가녀린 어깨와 나긋나긋한 목소리..
사랑스러운 얼굴.. 눈을 감아도 떠오르는 상냥한 미소.. !

아벨로 : 아.. 또 짝사랑이구만.. 힘내! 잘 가! 나중에 결과 얘기해줘! 술 사줄게!

카곤 : 으익, 사람이 고민하고 있으면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전에 하모니카도 고쳐줬잖아요!

아벨로 : 도대체 언제적 얘기를 하는 거야? 그치만 너의 짝사랑 소동에 또 말려들기는 싫단 말이야..

카곤 : 원래 사랑은 고난과 역경이 많을 수록 빛나는 법이죠.

카곤 : 완벽하게 아름다운 이야기로 끝날 테니까 좀 도와줘요. 노래의 소재로 써도 봐드릴게요.
10만 골드 정도에.

아벨로 : 점점 내가 손해라는 생각밖에 안 드는데.. 뭐 좋아.
왕궁에 인사하러 가는 것도 귀찮으니 친구를 도와주느라 못 갔다고 핑계나 대야겠다.

카곤 : ...그러다가 여왕님이 화나시면 나까지 혼나는 건가요. 갑자기 후회가 되는데...

아벨로 : 괜찮아, 괜찮아. 사랑은 고난과 역경이 많을 수록 빛나는 법이라며? 동감이야.
자아, 대로 한복판에 있지 말고 우선 자리를 피하자구.

아벨로 : ..여기라면 조용하겠네. 이제 말해봐. 누구야? 사랑 따위 이제 질렸다며 30년 동안 떠들고 다니더니.

카곤 : 원래 사랑이라는 단비는 매마른 대지에 내리는 법이죠. 이름은 세리아라고 하는데 정말 청초한 소녀에요. 인간이고 나이는 십대 후반 정도?

아벨로 : 우와.. 아저씨, 도둑이네.

카곤 : 아니 음유시인이라는 사람이 로맨틱하다고 좋아해야 할 판에 왜 아까부터 그렇게 찬물이나 끼얹는 겁니까?

아벨로 : 응. 난 상대로는 현실주의자야. 어릴 떄의 그 사건 이후로.

카곤 : ... 할말 없군요. 젠장.

아벨로 : 지금 둘이 어떤 사이야?

카곤 : 아마 제 얼굴이나 이름은 알걸요. 그리고 나는 심장을 관통당한 그런 사이?

아벨로 : ...와... 40년 전의 그 차가운 봄날하고 상황이 똑같은 거 같아서 점점 싫어지는데..

카곤 : 그런 식으로 말하면 내가 바람둥이 같잖아요. 이래봬도 한번 정착하면 일편 단심이라고요!

아벨로 : 정착한 걸 한번도 못 봐서 잘 모르겠어. 아무튼, 그 애는 지금 어딨는데?

카곤 : 언더풋 광장 근처에 지내는 모양이에요. 어떤 무례한 모험가를 따라 잠깐 온 모양이지만.

아벨로 : 그럼 간단하게 언더풋을 안내해준다고 하면 되지 않아?
여자애니깐 맛있는 케이크나 과자를 사주면서...

카곤 : 아벨로 님.
그러니깐 당신은 여자친구가 안 생기는 겁니다!!

아벨로 : 뭐?

카곤 : 그런 시시한 데이트라니! 그래선 내 인상이 제대로 남질 않잖아요!
아주 강렬하면서도 달콤한 충격을 줘야 한다구요!

아벨로 : 으음.. 그럼 노래라도 불러주면서 곷을 안겨쥐라도 하려는 거야?
제목은 '날개 없는 천사' 정도가 되는 건가.

카곤 : 오, 이제야 아벨로 님한테 이야기한 보람이 생기기 시작하는군요. 곡 좀 써봐요. 지금 당장.

아벨로 : 창작의 고통 같은 거 너무 무시하는 거 아냐?

카곤 : 하하. 그런 거 없죠. 내가 사랑의 고통으로 죽게 생겼는데.

아벨로 : ...왜 아버지는 그때 카곤을 소개시켜 주신걸까..

카곤 : 오오, 아, 아름다운 소녀요..!

세리아 : 네..? 아, 저, 저요?!

카곤 : 여기에 당신보다 아름다운 소녀가 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 이 당신을 위한 노, 노래를 준비해 왔으니 부디 이 노래를 듣고...

세리아 : 아... 죄송해요. 저는 카곤 님의 노래를 받을 자격이 없는 것 같네요.

카곤 : 그, 그,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은 그야말로 날개 없는 천사...!
하지만 내게는 보입니다, 당신의 새하얀 날개가!!

세리아 : 나, 날개요? 죄송해요. 저어, 갑자기 너무 부담스러워서... 호감을 가져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다시는 이런 말씀 안해주셨으면 하네요.

세리아 : 그리곤 전 카곤 님의 관심을 받을 수 없답니다.
모험가님의 곁에서 그분을 돕는 것이 제 사명이거든요.

카곤 : 그, 그런... 그럼 이 꽃이라도...

세리아 : 죄송해요. 받을 수 없어요. 제게 호의를 주신 마음만은 기쁘게 받을게요.
고마워요, 안녕히 가세요.

카곤 : 세리...세리아아아아 니이이이이임!!

아벨로 : (만돌린의 현을 뜯으며 갑자기 나타나서는)...이렇게 한 사내의 사랑은 어이없이 끝났다...
그의 슬픈 절규는 언더풋에 울렸으나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고... 천사의 날개 아래 쓰러진 그는 돌이 되어 영영 움직이지 못했으나...
사람들아, 기억하라. 언더풋 역사상 최고속으로 차인 남자가 여기에 무릎 꿇고 있었음을...

카곤 : 아벨로오오오옷!!!

2.2.2. 2장[편집]

아벨로 : 카곤. 여기 있었네.

카곤 : 웬일인가요. 또 놀리려고 찾아온 겁니까?

아벨로 : 딱히 놀릴 생각은 없는데... 전에 카곤 덕분에 영감을 받아 지은 노래가 인기가 많아서 말이야. 술이라도 한턱 내야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 찾아왔지.

카곤 : 그거 아아아주 잘 됐군요! 그렇잖아도 술이 마시고 싶던 참입니다!

아벨로 : 왜 그렇게 열을 내는 거야? 무슨 일 있었어?

카곤 : 아뇨! 아무 것도! 아무 것도 없어서 열을 내는 거죠!

아벨로 : 으음... 그 세리아라는 아가씨하고는 여전히 잘 안되고 있는 모양이로군... 워낙 강렬하게 인상을 남겨놨으니까 여자 입장에서는 피하고 싶겠지.

아벨로 : 그냥 포기해 내가 봤을 때 그 여자애는 카곤 곁을 피하는 게 행복할 거 같더라고.

카곤 : 친구라는 사람이 왜 맨날 그런 밉살맞은 소리나 해대는 겁니까?! 두고 보라고요. 세리아 님에게 내 마음을 꼭 전하고 말 테니까!

아벨로 : 아니, 전달이 안 돼서 일이 안 풀리는 게 아닌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카곤 : 내 생각엔 그 노래가 잘못된 거 같아요.

아벨로 : 분노에 이어 현실 도피인가... 내가 써준 가사는 너무 약하다면서 자기가 그렇게 바꿔놓고선...

카곤 : 그래서 이번엔 선물을 준비하려고요.

아벨로 : 뭐냐고 물어보지 않는 게 재밌을 거 같네... 어차피 조언해봤자 듣지도 않을 테고.

카곤 : 혼자서 뭘 중얼거리고 있는 겁니까? 포장지 있어요? 가장 화려하고 반들거리고 비싼 걸로!

아벨로 : 비단거미 가죽이 화려하고 반들거리긴 한데... 정말 그걸로 포장하려고?

세리아 : 아... 안녕하세요.

카곤 : 세, 세리아 님. 잘 계셨나요? 조, 좋은 날이로군요. 햇살이 세리아 님의 마음처럼 따, 따사롭고...

세리아 : 네에. 정말 좋은 날이네요...

... 저어, 카곤 님?


카곤 : 네, 네넵?!

세리아 : 제가 넘겨짚은 걸 수도 있겠지만 혹시... 전에 절 찾아오셨던 때와 비슷한 말씀을 하시려는 거면...

카곤 : 아, 그거, 그거요?! 그건 제가 너무 성급했죠! 저도 압니다.

세리아 : 그럼...

카곤 : 그, 그래서 사과의 의미로 선물을 드리려고요! 오, 오, 오해하지 마세요! 딱히 어떻게 해보려는 게 아니라 사과를 하고... 치, 친구로...

세리아 : 아... 선물 같은 건 괜찮은데... 그래도 카곤 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감사히 받을게요.

카곤 : 오오...!!

세리아 : 어머나. 상당히 특이한 포장지...네요. 아무래도 가죽 같은데...

카곤 : 그거는 비단거미라고, 이~만한 거미의 가죽을 무투질한 겁니다.

세리아 : 거, 거미요...?! 그렇게나 커요? 가죽이 있는 거미도 있다니 신기하지만... 좀...

카곤 : 아 모르시나보군요. 비단거미는 껍질 위에 비단을 두른 것 같다고 해서 비단거미라고 불립니다. 표류동굴 근처에서 사는데 제가 보여드릴게요.

세리아 : 아, 아뇨. 괜찮아요...

카곤 : 겁먹을 필요 없어요! 제가 이렇게 쉭! 하고 잡을 수 있으니까! 하하하!

세리아 : 그러니까 정말 괜찮아요... 아, 이건 뭔가요? 하얀색 깃털... 날개?

카곤 : 세리아 님은 날개만 없다뿐이지 천사나 다름 없죠. 저는 첫눈에 알아봤어요!

세리아 : 네?

카곤 : 그러니까 그 날개를 하고 있으면 정말 잘 어울릴 겁니다. 한번 해보세요!

세리아 : 전 이런 건 별로... 당황스럽네요.

카곤 : 당황할 필요 전혀 없어요! 제가 세리아 님의 몸매에 딱 어울리는 디자인으로 준비했으니까. 간단하게 고정할 수 있도록 개량도 해놨어요.

세리아 : 음...

카곤 : 아 혹시 부담스러우신가요? 며칠만 하고 있다보면 아주 익숙해질 겁니다. 뭣하면 제가 날개와 어울리는 하얀색 원피스도...

세리아 : 카곤 님. 저를 아껴주시는 그 마음은 감사하지만 역시 저와는 맞지 않는 것 같아요. 이거 돌려드릴 테니까 더 멋진 여성분께 드리세요.

카곤 : 그런 여자는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천사보다 더 아름답고 찬란한 여성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세리아 : 아 그럼 환불하시면 되겠네요... 음... 저는 이만 모험가님이 돌아오실 때가 되어서 가볼게요.

카곤 : 그, 그 전에 잠깐 차라도 하시죠! 친구가 된 기념으로...

세리아 : 친구...보다는 친절하신 분으로 기억하고 싶네요. 그래도 괜찮을까요?

카곤 : 아... 네? 제가 물론 친절한 남자긴 합니다만 사실은 냉철한 면도 있습...

세리아 : 그럼 카곤 님. 안녕히 가세요. 저는 모험가 님과 여행을 떠날 거라 한동안은 못 뵙겠네요. 몸 건강하시길.

카곤 : 네? 아? 세, 세리아 니이임?!

아벨로 : 와아. 선물이 날개였구나. 우와아아.

카곤 : 세리아 님은 왜 저렇게 달려가시는 거지... 넘어지면 어쩌려고...

아벨로 : 그야 여기 있고 싶지 않겠지. 그렇게 눈을 시뻘겋게 부릅 뜨고 거대 거미를 보러가자느니, 천사 날개를 하고 있으라느니 하는데 나라도 도망가고 싶겠다.

카곤 : 뭐? 잠깐. 그럼...

카곤 : 세리아 니이이이이임...!!!

아벨로 : (만돌린의 현을 뜯으면서)아아, 가련하고 가련하구나! 이런 남자에게 걸리고 만 죄 없는 소녀의 운명이여.
그리고 사람들아, 기억하라. 만일 카곤이 다른 여성에 접근을 하려 한다면 신속히 경비대에 연락을! 경비대는 바로 이런 때를 위해 움직이고 있다!

샤란 : 좋은 이야기군요. 제자들에게도 조심하라고 해야겠어요.

미네트 : 음... 제 친구들에게도 이야기를 해두는 편이 좋겠군요. 그리고 저 소녀를 보호할 인원을 배치하는 게 좋겠어요.

그란디스 : 카곤 님. 마음이 괴롭다면 언제든 오셔서 기도를 통해 회개하십시오.

풍진 : 역시 사람의 일 또한 순리대로 진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카곤 : 잠깐. 왜 사람들이 여기 다 모여서 구경하고 있는 거야?

아벨로 : 카곤이 만에 하나 난동을 피워서 세리아라는 여자애를 협박하면 나 혼자서 말리는 건 무리니까 도움을 요청했달까.

칸나 : 구경 왔어요! 이 순둥이한테도 미리 조심하라고 알려주려고~!

아니스 : 저어, 힘내세요! 으음, 방법은 좀 바꿔보시는 게 좋을 거 같지만...

카곤 : 으아아악, 제기라아아알!!


안구가 습해진다

2.3. 프리스트의 길[편집]

The road of PRIEST
파일:iLL0jbL.png

대전이가 일어난 후 프리스트 교단의 총본산은 헨돈마이어의 레미디아 바실리카에서 언더풋의 레미디아 카테드라로 이전하였다. 지반이 상승하면서 지상으로 나온 언더풋이 아라드가 중심지로 떠올랐기 때문이며, 흑요정의 개방 정책에 힘입은 덕택이기도 하다. 흑요정의 여왕은 대전이를 계기로 닫힌 문을 열어 타 종족과 그 문화를 받아들였고, 레미디아 카테드라는 커다란 상징이 되었다.

하지만 카테드라가 안정이 되었음에도 젊은 프리스트인 그란디스 그라시아의 얼굴에는 한 가닥 근심이 서려있었다. 단 하나 남은 혈육인 닐바스 그라시아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오빠인 닐바스는 모범적인 팰러딘으로, 어린 그란디스의 영웅이었다. 부모님이 그리워 우는 동생을 달래주고, 공부도 도와주곤 했다.

프리스트들을 어떻게 잘 이끌 수 있는지, 어떻게 위장자를 구분할 수 있는지 가르쳐 준 것도 그였다. 닐바스는 그야말로 훌륭한 스승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 전 이야기다. 닐바스는 대전이가 일어나기 전, 위장자를 처치하기 위해 그란디스를 교단에 남기고 떠난 후 아직까지 소식이 없다.

사람들은 이미 죽었을 거라며, 포기하라고 했지만 그란디스는 오빠가 살아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건 행방불명된 오빠를 둔 여동생이 막연히 품는 기대와는 달랐다.

같은 신을 모시는 성직자 특유의 어떤 예감과 비슷했다. 직접 계시를 받은 것은 아니지만 기도를 올릴 때마다 포기하지 말라는 음성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럴 때마다 흔들리던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수행을 이유로 한적한 시골 마을로 소속을 옮기는 다른 프리스트들과는 달리, 각지의 사람들이 모이고 흩어지는 번화한 언더풋에 남은 것은 닐바스에 대한 정보를 모으기 위해서였다.

그롯 : 그란디스 님, 오랜만입니다.


그런 그란디스 앞에 거구의 프리스트가 다가왔다. 무거운 갑옷으로 몸을 감싼 그는 닐바스와 동기지간인 그롯이라는 남자였다. 닐바스와는 다른 시기에 수행을 떠났다가 대전이가 일어나자, 가끔 교단에 돌아와 도움을 준 후 떠나곤 했다.

그란디스 : 그롯 님, 오랜만입니다. 언제 오셨습니까?


그롯은 그란디스와 잠시 한담을 나누었다. 언더풋 바깥의 이야기는 다른 프리스트들에게서도 듣고 있지만, 대부분은 여행 중에 겪은 아라드의 슬픈 이야기뿐이었다. 하지만 그롯은 주로 밝고 희망적인 이야기를 했다. 아름다운 실버크라운, 서로 힘을 합쳐 대전이의 상처를 이겨내는 사는 사람들, 체념의 빙벽에서 몬스터들을 봉인하는 웨펀마스터들, 폐허에서 피어오르는 파릇한 새싹같은 이야기였다.

그롯 : 제 이야기는 이 정도고… 그란디스 님은 요즘 어떠십니까? 낯선 곳에서 힘드시지요? 닐바스 녀석은 도대체 어디서 뭘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란디스 : 괜찮습니다. 오빠는 어딘가에서 신의 뜻을 행하고 계시겠지요.
프리스트의 길을 걷고 계시는 오빠의 수고에 비하면 제가 하고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란디스는 웃으며 대답했지만 밝은 모습 너머에 긴장과 초조가 있음을 모를 그롯이 아니었다.

그롯 : 신의 뜻이라, 불경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세상에 그만큼 알아듣기 힘든 건 없을 겁니다.

그란디스 : 네…?

그롯 : 물론 우리로서는 상상하지 못할 지혜를 갖고 계시니 짐작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겠습니다만.

하긴, 그분도 우리가 답답할 겁니다. '떠먹여줘도 못먹는다'고 하던가요. 그런 점에서 대주교님의 가르침도 비슷하지요.
하루 종일 힘든 심부름을 시키시는 바람에 지쳐서 방에 돌아가면, 잠에 빠지기 전에 '아아, 이런 뜻이었구나.'하고 뒤늦게 깨닫는 것 말입니다.
가끔은 직접 말씀해주시지 왜 그러시나 원망도 했습니다만… 많은 경험을 통해 그런 식으로 가르쳐야 효과가 더 좋다고 생각하셨기에 그리하시는 거겠지요.
하지만 그분도 아침에 눈을 뜨면 배운 걸 모두 잊어버리는 저 때문에 '아아, 이것이 내 시험인가'라고 생각하셨을 겁니다. 이 역시 신의 뜻이겠지요.


그롯이 근엄한 표정 그대로 말하는 바람에 그란디스는 괜히 더 웃음이 나왔다. 마주 웃을 법도 하건만, 그롯은 눈 한번 깜빡이지도 않았다.

그롯 : 예시가 조금 이상했습니다만, 하여튼 신의 뜻은 우리가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란디스 님, 모든 것을 '신의 뜻'이라 규정하지는 마십시오.
그건 먹으면 안 되는 사탕 같은 것입니다.
힘들거나 즐겁거나, 혹은 잘못을 저질렀을 때 '신의 뜻'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는 것은 신만이 가능합니다.

그롯 : 신에게 모든 것을 맡긴 프리스트는 자신이 사람이라는 것을 항상 의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신이 보여주시는 길을 끝까지 따르는 것은 사람이고, 거꾸로 달리는 것도 사람입니다.
신이 되려고 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외로움과 걱정을 인정하십시오. 닐바스 녀석이 밉다면, 밉다고 말해도 됩니다.
그 녀석이 프리스트의 길을 걷기 위해 정진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자신의 의지로 돌아오지 않는 것 역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롯 : 원망하고 슬퍼하는 것 역시 프리스트가 걸어야 하는 길입니다. 그래야 원망하고 슬퍼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잘 이끌 수 있습니다.
감정을 모두 표현하라는 것은 아니지만 부정하지는 마십시오. 신은 우리를 감정이 있는 생물로 만들었습니다. 그 점을 잊지 마십시오.


처음엔 당황하던 그란디스였지만 그롯의 말뜻을 알아듣고는 살며시 웃었다. 요컨대 이 요령 없는 프리스트는 친구의 동생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꾹꾹 누르기만 했다간 언젠가 터져버릴 테니, 그 전에 조금씩 풀어줘도 괜찮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언더풋으로 오고서 계속 긴장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낯선 환경에서 힘든 것은 프리스트라고 해서 예외인 것이 아니다. 타인을 바른 길로 인도해야하는 프리스트이기에, 더욱 외롭고 힘들 수밖에 없다.

그란디스 : 고맙습니다. 저도 때로는 쉬면서 프리스트의 길이 어떠한 것인지 찬찬히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빠와는 다른 저만의 길을 찾아서 타인을 구원할 수 있도록 해보겠습니다.

그롯 : 훌륭하십니다. 뭐, 닐바스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스스로 안 나타나면 제가 머리끄덩이를 잡고서라도 끌고 오도록 할 테니까요.

그란디스 : 그럼 저는 오빠에게 그동안 걱정 끼친 것에 대한 원망의 뜻으로 한 방 때려줘야겠군요. 그 정도로 풀릴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지요.


배시시 웃는 그란디스를 보고 그롯은 이 당차고 인내심 많은 소녀가 자신의 뜻을 알아들었음을 알고 마주 웃었다. 하지만 제 몸만한 무거운 십자가를 휙휙 돌리는 이 소녀의 주먹맛을 보게 될 친구의 걱정에 마냥 밝게 웃을 수만은 없었다.

2.4. 대모험가 카라카스[편집]

CARACAS The great adventurer
파일:sUMKbzW.png

모험가 길드의 창시자인 카라카스의 이야기. 일부 공개된 내용을 보면 그의 과거를 동화책 같이 만든 이야기인 듯 하다.

2.4.1. 1장[편집]


대전이가 일어나기 전, 평화롭던 시절에 어느 조용한 마을에서 카라카스라는 작은 남자아이가 태어났어요. 너무 작아서 어머니의 치마 주머니에 쏙 들어갈 정도였어요.

하루는 어머니가 카라카스를 치마 주머니에 넣어놓고 밭을 나갔어요. 그런데 그날따라 밭에 두더지가 많지 뭐예요? 어머니와 형 누나들은 열심히 두더지를 잡았어요. 카라카스가 구멍으로 떨어지는 것도 모른 채 말이에요.

구멍으로 떨어진 카라카스는 바깥으로 나오려고 허우적거렸지만 그럴 때마다 더 깊은 곳으로 빠져버렸어요.

땅속에 들어간 카라카스의 눈앞에 있는 것은 높고 커다란 두더지였어요. 두더지가 말했어요.

"아가야, 왜 여기에 있니?"

"어머니가 날 떨어뜨렸어. 올라가고 싶은데 올라갈 수가 없어."

"내가 너를 올려줄 수 있어. 너는 살겠지만 나는 잡혀서 죽을 거야."

"널 잡지 말아 달라고 할게."

"좋아, 그럼 내 등에 타렴. "

카라카스를 태운 두더지는 약속과는 달리 더 깊은 땅속으로 데려갔어요.

"멈춰! 왜 아래로 내려가는 거야? 더 깊이 들어가면 난 숨을 쉴 수 없어."

"너희 가족 때문에 내가 밭에서 쫓겨났으니까 너를 잡아먹고 힘을 차려서 살기 좋은 곳으로 갈 거야."

카라카스는 두더지의 등에서 내리고 싶었지만 금방 커다란 발톱에 잡힐 게 뻔했어요.

"알았어. 하지만 나는 고블린 고기를 먹고 자라서 냄새가 심하고 맛이 없어. 날 그대로 먹었다간 네 몸에서 냄새가 나서 깊은 땅속에 숨어도 금방 잡히고 말 거야."

"그럼 어떻게 하지?"

"우유를 마시면 냄새가 사라지니까 그때 먹으면 돼."

"좋아. 그럼 우유는 어딨어?"

"고개 넘어 들판으로 가면 젖소가 풀을 뜯고 있을 거야. 거기로 데려다주면 우유를 마실 수 있어."

늙은 두더지는 카라카스가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했어요. 하지만 인간의 아이가 우유를 마신다는 것은 알고 있었기에 진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고민하던 두더지는 마침내 카라카스를 젖소에게 데려가기로 마음먹었어요.

들판으로 가는 길은 멀었어요. 땅 위로 달려가면 빨랐겠지만, 햇빛을 싫어하는 두더지는 지하로 가야 했지요. 카라카스를 등 위에 태우고서 말이에요.

두더지는 지쳐서 헉헉거렸지만, 카라카스는 도망가지 않았어요. 땅속에서는 두더지가 더 빠르니 금방 잡혀버릴 테니까요.
카라카스는 오히려 두더지의 수염을 단단히 붙잡고는, 빨리 가자고 재촉했어요. 오래 걸린다며 졸기까지 했어요. 두더지는 카라카스가 꾀를 부린다고 의심할 수 없었지요.

마침내 들판에 도착했을 땐 늙은 두더지는 숨이 차서 말조차 할 수 없었어요. 하지만 여기의 부드러운 살을 먹을 일념에 힘겹게 젖소가 있는 곳으로 올라갔어요.

두더지가 판 구멍에서 폴짝 뛰어나온 카라카스는 젖소의 커다란 엉덩이에 달려 있는 긴 꼬리에 온 힘을 다해 매달렸어요. 젖소는 깜짝 놀라 날뛰기 시작했어요. 두더지는 젖소를 피할 힘이 없었어요.

두더지는 젖소의 딱딱한 발굽에 채여 날아갔어요. 그리고 벌통 위에 떨어졌어요. 집이 망가져 화가 난 벌들이 두더지를 향해 날아갔어요.

못된 두더지는 벌에 쏘여 죽고, 아기 카라카스는 걱정하고 있는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갔어요.

2.4.2. 2장[편집]



무럭무럭 자란 카라카스는 장난꾸러기 소년이 되었어요. 눈은 언제나 재미있는 것을 찾아 반짝이고 있었고 주머니에는 자신이 만든 장난감이 가득했어요.
어느 날, 카라카스의 형이 부탁을 했어요. "카라카스. 내 연이 서쪽으로 날아가버렸어. 찾아와 주겠니?"

카라카스의 발이 무척 빨랐기 때문에 부탁을 한 것이었죠. 카라카스는 형의 연을 찾아주기로 마음 먹었어요..

카라카스의 집 서쪽에는 작은 호수가 있었어요. 날이 더워서 물을 마시는데 빨간색 그림자가 호수에 비치는 것이 아니겠어요? 고개를 들어보니 형의 연이 나풀거리며 날아가고 있었어요.

하늘에서 춤을 추던 연은 그대로 숲을 향해 날아갔어요. 카라카스는 덜컥 겁이 났어요. 숲에 살고 있는 마법사가 어린아이를 재료를 쓴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용기를 내어 숲으로 들어갔어요.

마법사의 숲은 아주 오래된 나무로 가득했어요. 얼마나 걸었을까? 카라카스의 눈 앞에 마법사의 집이 나타났어요. 회색 지붕의 작은 오두막이었어요.

문을 두드리려고 했지만 문도 창문도 보이지 않았어요. 단단한 벽뿐이었지요. 안에 사람이 살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어요. 그때, 아무도 없는 곳에서 커다란 소리가 났어요. 마치 천둥소리처럼 컸어요.

"꼬마야, 넌 왜 이곳까지 온 거냐? 방해하지 말고 돌아가라."

"제 형의 연을 찾으러 왔어요. 이쪽으로 날아왔는데, 혹시 못보셨나요?"

"그건 내가 주운 연이다. 그러니 이미 내 것이다. 돌아가라."

카라카스는 화가 났어요. 마법사의 태도는 도둑이나 다름없었어요. 그래서 무서운 것도 잊고 마법사의 집에 들어가야겠다고 마음 먹었어요.

마법사의 집 앞에 작은 버섯이 있었어요. 집을 둘러보던 카라카스가 실수로 그 버섯을 밟자, 스르륵하고 아무 것도 없는 벽에 문이 생겼어요. 카라카스는 깜짝 놀랐지만 용기를 내어 집안으로 들어갔어요.

문의 안쪽은 길고 긴 터널이었어요. 벽에는 마법횃불이 활활 불타고 있었어요. 게다가 몹시 퀴퀴한 냄새가 나서 숨을 쉬기도 힘들었어요.

얼마나 걸었을까? 커다란 방이 눈앞에 나타났어요. 방 안 탁자에는 형의 연이 놓여있었지요. 그리고 화가 난 마법사가 의사에 앉아 있었어요.

"내 집에 함부로 들어오다니! 널 개구리로 만들어 버리겠다!"

"미안해요. 하지만 그 연은 제 형의 것이에요. 돌려주시면 돌아가겠어요."

하지만 마법사는 연을 돌려줄 생각이 없었어요. 게다가 카라카스에게 마법을 걸어 평생 하인으로 부려먹을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카라카스가 재빨리 머리를 굴렸어요.

"좋아요. 연을 포기하겠어요. 당신의 하인이 되어줄게요. 하지만 조건이 있어요. 아주 맛있는 케이크를 저에게 주세요."

"그야 어렵지 않지." 마법사는 지팡이를 휘둘러 아주 먹음직스러운 케이크를 만들었어요. 카라카스의 키만큼이나 크고, 온갖 과일과 과자로 장식된 휘황찬란한 케이크였죠. 살짝 맛을 본 카라카스가 고개를 저었어요.

"이건 맛있지 않아요. 제가 원하는 케이크는 아주 맛있는 케이크예요. 당신은 그런 케이크를 만들 수 없나요?"

마법사는 화가 났어요. 자신의 마법 실력을 보여주기 위해서 계속 케이크를 만들어내었죠. 좁은 방은 금방 케이크로 꽉 찼어요. 카라카스는 몰래 형의 연을 등 뒤로 숨겼어요. 케이크를 만들기 바빠 마법사는 눈치채지 못했지요.

마법사는 케이크를 잔뜩 만들고는 의기양양하게 웃었어요. "어떠냐 꼬마야? 이 정도면 네가 맛이 없다는 얘기를 하지 못하겠지?"

카라카스는 케이크의 맛을 보았어요. 혀가 녹아버릴 만큼 달콤한 초콜릿 케이크, 달콤씁쓸한 와인이 들어간 케이크, 딸기로 장식한 케이크, 구운 바나나를 올린 케이크는 굉장히 맛있었어요. 게다가 곰처럼 커다랐죠.

"이 케이크는 귀족의 파티에서 먹을 만한 케이크로군요."

마법사는 또 화가 났어요. 자신이 만든 케이크가 왕들이 먹을 수준이 아니라는 뜻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또 자꾸자꾸 케이크를 만들었어요. 방은 케이크로 꽉 차버렸기에 복도로 나올 수 밖에 없었어요.

"어떠냐? 이 정도면 네가 불만을 말하지 못하겠지?"

"아까보다 훨씬 맛이 있군요. 하지만 왕이 먹을 정도밖에 되지 못해요. 황제라면 먹다가 뱉어버릴 거예요."

잔뜩 화가 난 마법사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해버렸어요. 그래서 지팡이를 계속 휘둘렀죠. 지팡이 끝에서 나오는 케이크는 정말 아름다운 모양을 하고 있었어요.

영웅의 모습을 본뜬 조각상 같은 케이크도 있었고, 녹은 초콜렛으로 흘러가는 강의 풍경을 그대로 옮긴 듯한 케이크도 있었지요. 카라카스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열심히 마법사를 부추기면서 더욱 커다란 케이크를 만들도록 했어요.

마법사와 카라카스는 점점 출구 쪽으로 뒷걸음질 쳤어요. 케이크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지요. 케이크를 만든 것이 마법사 자신이기 때문에 마법사는 카라카스가 도망칠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어요.

너무 많은 케이크를 만들어서 지친 마법사가 헉헉거리면서 카라카스에게 말했어요.

"어떠냐? 이 정도면 황제도 감탄할 만큼 멋있고 맛있는 케이크지? 이제 불만을 말하지 못할 거다."

카라카스는 고개를 끄덕였어요.

"정말 그렇군요. 황제가 먹을 만큼 맛있는 케이크예요. 그러니까 당신도 먹어보는 게 어때요?"

카라카스는 마법사를 케이크가 있는 곳으로 세게 밀었어요. 늙은 힘이 빠진 마법사는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케이크로 가득찬 복도에 넘어지고 말았어요. 마법 지팡이도 놓치고 말았지요.

재빠른 카라카스는 그 지팡이를 주워 옆에 있는 케이크를 무너뜨렸어요. 복도를 가득 채운 케이크는 마법사의 위로 쓰러졌지요. 마법사는 버둥거렸지만 그림 때문에 미끄러워서 일어날 수가 없었어요.

"살려줘! 살려줘! 숨을 쉴 수가 없어! 케이크가 다 무너지면 난 죽고 말 거야!"

마법사가 비명을 지르자 문 바깥으로 나온 카라카스가 말했어요.

"거기서 나올 방법을 알려줄 테니 다시는 날 괴롭히지 말아요."

"알았어. 널 괴롭히지 않을게. 어떻게 하면 이 케이크의 산에서 내가 빠져나올 수 있지?"

카라카스는 문 바깥에 있는 버섯을 밟았어요. 문이 천천히 닫히기 시작했죠. 문이 완전히 닫혀 복도에 어둠이 찾아오기 전, 카라카스가 큰 소리로 말했어요.

"케이크를 다 먹으면 되잖아요. 그럼 살 수 있어요."

마법사는 고맙다며 다시는 괴롭히지 않겠다고 약속했어요. 그리고 문이 닫혔지요. 무사히 빠져나온 카라카스의 손에는 마법 지팡이와 형의 연이 있었어요.

카라카스는 다시는 마법사가 나쁜 짓을 하지 못하도록 지팡이를 부러뜨렸어요. 이 일이 있은 후에 마을 아이들의 연이 난데없이 사라지는 일이 벌어지지 않았어요.

2.4.3. 3장[편집]

청년이 된 카라카스는 본격적으로 모험가가 되기 위해 집을 떠났어요. 아버지가 쓰던 낡은 검을 들고 여기저기 발길 닿는 대로 향했어요.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카라카스가 도착한 곳은 몹시 추운 곳이었어요. 눈폭풍을 일으키는 나쁜 드래곤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만나러 간 것이었죠.

하지만 드래곤은 잠에 빠진 후였고, 카라카스는 맥이 풀렸어요. 꼭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기 때문이죠. 그렇다고 잠든 드래곤을 깨워 사람들을 위험하게 할 수도 없었기에 몹시 실망했어요.

"어쩔 수 없지. 다음 기회로 미루고 내일 다른 곳으로 떠나야겠다."

그렇게 생각한 카라카스는 하룻밤 자고 갈 곳을 찾았지만 마을은 커녕, 사람 그림자조차 볼 수 없었어요. 가방에 든 육포와 마른 빵으로 배를 채울 수는 있었지만 가만히 있어도 몸이 얼어버리는 곳에서 노숙을 할 수는 없었죠.

추위에 벌벌 떨면서 주변을 헤매던 카라카스는 어떤 산 중턱에 불빛이 켜져 있는 것을 보았어요. 해가 이미 서산에 걸려있던터라 얼른 산을 올라갔죠.

카라카스는 마음 착한 노부부가 사는 따뜻한 오두막을 기대했어요. 하지만 그곳은 산적들이 사는 곳이었어요. 너무 추워서 모자를 푹 눌러썻던 카라카스는 그들이 말하는 소리를 듣지 못했고, 깨달았을 때는 너무 늦어, 산적에게 붙잡히고 말았어요.

산적들은 열 다섯명 정도 있었는데, 추운 지방 사람들이 아니었어요. 제국의 산적 소탕을 피해 도망 왔다가 이 산에 있는 오두막을 발견하고 잠시 머무르고 있었던거죠. 카라카스는 운이 나빴다며 한숨을 쉬었어요.

카라카스는 꽁꽁 묶인 채 오두막 뒤에 있는 낡은 창고에 갇혔어요. 물론 가방과 검을 뺏긴 채로요. 창고 안에는 털옷을 입은 소년이 두 명 있었어요.

잡히기 전에 산적과 싸웠는지 상처투성이었죠. 소년들은 카라카스를 보고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공용어가 아니었기 때문에 알아들을 수 없었죠.

"이봐, 난 이 곳을 나갈거야. 도와주지 않겠어?"

보다 못한 카라카스가 그렇게 말하자 소년들은 대화를 멈추고 그를 쳐다보았어요. 공용어가 통한다는 것을 알게 된 카라카스는 마음이 조금 놓였어요.

"여기 계속 있으면 얼어 죽든가, 굶어 죽게 될 거야. 배가 고픈 산적들이 우리를 먹어버릴지도 모르지. 어때? 나를 도와서 이곳에서 빠져나갈래?"

똑똑해 보이는 소년이 물었어요. "어떻게 빠져나가지? 우린 꽁꽁 묶였어. 소리를 질러봤자 우리 부족에게 닿지도 않고."

"너희 부족이 찾고 있다고? 하지만 어디서 찾고 있을지 몰라. 우리끼리 먼저 빠져나가야 해. 나에게 작전이 있으니 따라줘."

"좋아. 우린 외부인을 믿지 않지만 이번만큼은 믿기로 하지." 똑똑한 소년과 덩치 큰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어요.

약속을 받은 카라카스는 몸을 살짝 비틀어 결박을 풀었어요. 모험을 떠나기 전에 익힌 비장의 기술이었죠. 카라카스는 두 소년도 풀어주었어요.

풀려난 소년들은 산적에게 복수하겠다며 화를 냈어요. 카라카스는 그들을 달래며 작전을 설명했어요. 투덜거리던 두 소년은 카라카스의 작전을 듣자 바로 찬성했죠.

깊은 밤이 되었어요. 카라카스의 비상식량으로 오랜만에 배를 채운 산적들은 잠에 빠져 있었죠. 달빛도 없는 밤에 눈이 조용히 내리는데, 갑자기 오두막 바깥에성 이상한 울음소리가 들리지 뭐예요? 산적들은 놀라 서로를 깨워 바깥으로 나왔어요. 소리는 분명 창고 안에서 나오고 있었어요.

하지만 인간의 소리가 아니었죠. 늑대의 울음도 아니었어요. 거대한 괴물이 내는 듯한 끔찍한 소리였어요. 산적들이 겁에 질려 웅성거렸어요. 어떤 용감한 산적이 문을 열어보려고 손을 뻗었을 때, 카라카스의 절박한 외침이 들려왔어요.

"도와줘! 여기 괴물이 있어! 냉룡의 저주를 받아 괴물로 변하고 있어! 이대로면 난 뜯겨 먹힐 거야! 어서 날 꺼내줘!"

하지만 산적들은 문을 열어주지 않았어요. 자기들도 괴물에게 당할까 무서웠기 때문이죠. 울음소리는 점점 더 커져, 산을 울릴 정도가 되었어요. 산적들은 모두 귀를 막았어요. 카라카스의 도와달라는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어요. 그리고 마침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어요.

"무슨 일이지? 먹혀버린 건가?"
"괴물은? 괴물도 죽은 건가?"
"그 녀석과 괴물이 싸우다가 서로 죽인 게 분명해."

산적들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죠.

"이대로 태울까?"
"무슨 소리야, 괴물의 발톱은 비싸게 팔릴 거야. 그것만 있으면 우린 산적질을 하지 않아도 돼."

산적들은 조심스레 창고의 문을 열었어요. 그러자 눈 앞에 번개가 쳤어요. 엄청나게 밝아서 산 전체를 밝힐 정도였죠. 사실은 번개가 아니라 카라카스가 불러낸 마법의 빛이었어요.

달도 없는 어두운 밤이 었기에 갑자기 강한 빛을 본 산적들은 눈을 뜰 수가 없었어요. 산적들이 눈을 부여잡고 쓰러지자, 두 소년이 고함을 지르며 그들에게 덤벼들었어요. 산적은 괴물이 잡아먹으려는 줄 알고 깜짝 놀라 도망쳤어요.

사실 창고 안에 괴물은 없었어요. 두 소년이 늑대의 울음소리를 내고, 카라카스가 마법으로 소리를 키운 것 뿐이었죠. 눈이 내리는 산에서 소리가 울려 더 무시무시하게 들렸던 것이었어요.

눈을 못 뜨는 산적들이 도망가자, 카라카스는 오두막으로 가서 짐을 챙겼어요. 소년들도 빼앗긴 무기를 찾았죠. 산적들이 돌아오기 전에 도망가려고 하는데, 벌써 발자국 소리가 들리지 뭐예요? 한 두명이 아니었어요.

"큰일 났군, 내가 막을테니 너희는 어서 도망쳐."

카라카스가 검을 단단히 쥐었어요. 검술에 자신이 있었고, 간단한 마법도 쓸 줄 알았지만, 두 소년을 지키며 열다섯 명과 싸우는 건 무리였죠. 하지만 북쪽의 소년들은 카라카스보다 어렸지만 훌륭한 전사였어요.

함께 싸우겠다고 말했어요. 카라카스는 든든한 친구가 생긴 기분이었어요. 맞서 싸울 각오를 하고 바깥으로 나온 세 명은 얼떨떨해졌어요. 산적이 돌아오고 있었던 것은 맞지만, 산적뿐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죠.

덩치 큰 소년이 신이 나서 소리를 질렀어요. "족장님이다! 우리를 찾으러 왔어!" 소년들을 찾으러 온 북쪽의 부족이 산적을 발견하고 싸우고 있었던 거예요.

부족원들은 모두 덩치가 컸고 용맹했어요. 그들은 산적을 모두 쫓아낸 후 소년들이 있는 곳으로 왔어요. 낯선 카라카스를 보고 경계했지만, 설명을 듣고는 웃으며 손을 내밀었어요.

"고맙소. 이 둘은 내 아우와 친구의 아우요. 늑대를 잡겠다고 몰래 빠져나가 돌아오지 않아 찾고 있었는데, 이곳에 있을 줄은 몰랐소. 그 시끄러운 소리가 아니었다면 찾을 수 없었을 거요."

카라카스가 마법으로 크게 키운 소리를 따라 왔던 거죠. 이들은 카라카스를 친구로 맞아들여 마을로 초대했어요. 카라카스는 삼일 밤낮을 배부르게 먹고 즐겁게 지낸 후, 모두의 축복을 받으며 다시 모험을 찾아 떠났답니다.

2.5. 품위있는 아라드인을 위한 넓고 얕은 지식[편집]

AN ADVENTURES' GUIDE TO THE ARAD[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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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 1장[편집]

인간

기원의 시기부터 요정들과 더불어 아라드 대륙에 넓게 분포하고 있는 종족. 짧은 수명과 허약한 육체 등, 타 종족에 비해 많은 약점을 가지고 있지만 끊임없는 단련으로 한계를 극복해 그 어떤 종족보다도 강한 힘을 얻기도 한다.

요정이 자취를 감춘 뒤 현재 아라드 대륙을 지키고 있는 가장 대표적인 종족이기도 하다.


천계

미들오션 위에 있는 대륙인 천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 흑요정보다 훤칠한 키와 쭉쭉 뻗은 팔과 다리가 특징이라고 한다. 1000년도 전에 천계와 교류가 끊겼기에 이들에 대한 기록은 그다지 남아있지 않다.

흑요정

검은 피부와 흰 머리카락을 가진 요정. 폐쇄적인 성향으로 주로 지하에 숨어살며 인간을 비롯한 다른 종족과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다.

기본적으로 호전적이지만 수는 적다. 기본 신체능력이 인간보다 월등하고 강력한 마법을 쓸 수 있어 이들을 함부로 앝보고 시비 거는 자는 없다.

선천적으로 빛이 적어도 멀리 볼 수 있고 몸놀림이 재빨라 대륙 각지에서 암살자로 활약하고 있는 흑요정들도 있다.

그러나 최근 대전이로 중력역전이 일어나 흑요정 왕국의 수도 언더풋이 지상으로 솟구쳐 드러나고 모험가들을 비롯한 인간들이 언더풋으로 모여들면서 흑요정들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현재는 언더풋을 개방하고 인간들과 많은 교류를 하고 있으며 소수종족에 불과했던 흑요정 종족의 영향력도 갈수록 커지고 있다.


반투족

스트루 산맥 너머 변방에 있는 인간 부족들에 대한 총칭. 오래 전 산맥을 넘어 지금의 헨돈마이어 영역까지 지배했다는 고대영웅 반투의 이름을 따서 종족의 이름이 붙여졌다.

여러 개의 작은 집단으로 나뉘어져 있지만 기근이 들거나 냉룡 스카사가 깨어나면 합심해서 산맥을 넘어오곤 했다. 보통 사람보다 몸집이 크고 완력도 센 편이다.

추운 땅에서 오랫동안 악착같이 생존해온 이들은 거칠고 난폭한 습성이 강하며 술과 싸움을 좋아한다. 그러나 대전이 때 이들이 살고 있던 만년설산이 무너지면서 대부분의 반투족이 죽었으며 현재는 살아남은 소수만이 북의 쉼터에 거주하고 있다.


요정

'아라드에서 가장 완벽했던 종족.' 기원의 시기부터 강대한 마력과 폭넓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복잡한 마법도 손쉽게 사용했다. 가느다란 몸매와 하얀 피부, 길고 뾰족한 귀가 특징이다. 용모는 몹시 아름다워, 지금까지도 미의 기준이 되고 있다.

이들은 아라드 대륙을 아름답게 가꾸는 일을 도맡아 했고, 인간에게도 수많은 지식과 마법을 전수했다. 그러나 강한 힘을 갖게 된 인간 중 몇몇이 요정들의 보물에 눈이 먼 나머지 요정들이 살던 숲을 습격해 불태웠다.

이로 인해 많은 요정들이 죽게 되고 광활하던 숲이 붙타 아라드 대륙은 점점 사막화가 진행되었다.

그러던 중 위대한 마법사 마이어가 사막 한가운데에 대마법진을 건설해 환경을 조성하고, 살아남은 요정들이 그란플로리스 숲에 모여 결계를 쳐 그의 마법진을 관리했다.

그러나 대화재로 마이어의 대마법진이 소실되자 요정들은 자신들을 희생해 마법진을 복구하고 아라드 대륙에서 영원히 자취를 감추었다.


용족

인간보다 마력이 굉장히 높으며 그들만의 고유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 또한 인간형과 드래곤형으로 자유로이 변신이 가능하다.

인간들의 공격을 피해 아라드의 깊숙한 곳에서 숨어 지냈으나, 이들이 장차 아라드에 위협이 될 것을 우려한 제국은 끝까지 추적해 반동분자를 축출하고, 나머지는 엄격하게 관리하고 있다.

용족 중 온순한 자는 인간들과 공존하며 아라드의 평화를 추구하고 있으나, 제국에 불만을 가진 는 아라드를 뒤엎어 자신들이 세력의 중심이 되기 위해 각지에서 테러 활동을 벌이고 있다.


몬스터

대전이 이후 기존에 있던 다른 아인종들도 같이 포함하며 부르는 명칭이다, 기본적으로 폭력적이며 이유를 알 수 없는 사악함이 있는데, 천성적인 것으로 보인다. 전이가 영향을 끼쳤다는 설도 있다.


고블린

대전이 이전 아라드에 살던 몬스터, 지능은 조금 떨어지는 편이다. 포악하게 생긴 외모와 작은 체구가 특징이며, 육체적인 힘을 중시하기 때문에 나약한 고블린은 소외되거나 심한 경우 죽임을 당하기도 한다.

철저한 계급 사회이며, 인간을 납치하여 만든 옷이나 무기 등은 계급에 따라 엄격하게 배분한다.

주로 서식하던 그란플로리스가 대전이의 직격을 받은 탓에 이 종족은 멸종한 것으로 추정된다.


정령

대전이 이전부터 아라드에 살고 있던 종족. 마법적인 이유로 인해 생겨나는 것으로 보이며 정확한 생태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이 세상을 채우고 있는 각 속성이 무엇인지에 따라 종이 분류된다. 각 속성의 정령은 다른 속성의 정령과 크게 다른 성질을 지니고 있다.

평균적인 지능은 인간 이하이나 오래된 정령이나 힘이 센 정령은 인간보다 심오한 지혜를 갖추고 있기도 하다.

2.5.2. 2장[편집]

대전이

그란플로리스 숲 대화재로 마이어의 대마법진이 소실된 이후, 요정들의 희생으로 마법진이 복구되었으나 한번 망가진 마법진은 예전의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점점 약화되었다.

결국 약해진 마법진에 거대한 차원의 균열이 발생해, 커다란 전이의 폭발이 일어났다. 이 폭발에서 발생한 대규모의 전이에너지는 아라드에 있던 몬스터들과 인간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아라드의 여러 지역에 중력역전을 일으켰다.

흑요정들의 지하도시 언더풋이 공중으로 떠오르고 지하수가 솟구쳐 미들오션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도 다 대전이로 인한 중력역전 때문이다. 그리고 대전이 때 터져 나온 전이에너지는 현재까지도 계속해서 아라드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전이

언젠가부터 시작된 차원이동 현상으로 생물을 비롯하여 건축물, 지역 등 온갖 것들이 아라드의 세계로 넘어온 것을 말한다. 모든 혼란의 원인이 되고 있으나 아직 많은 부분이 불명인 상태이다.


비명굴 사건

대전이가 일어나기 전, 비명굴이라 불리는 불길한 동굴에서 거대 누골들이 바깥으로 몰려나와 일대가 혼란에 빠졌다. 조사한 결과 비명굴 안에 누골보다 더 엄청난 괴물이 자리 잡았기 때문으로 밝혀졌다.

제국은 군대를 보내어 퇴치하려고 하였으나 그 괴물의 이름이 '사도 시로코'라는 것만 알아냈을 뿐, 안쪽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괴멸되고 말았다.

이에 제국은 엄청난 포상금을 내걸었고, 아라드 대륙의 이름난 마법사와 전사들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시로코를 처치한 사람은 단 네 명의 웨펀마스터뿐이었다.

시란, 브왕가, 아간조, 이 그들이다. 사람들은 이들은 아라드를 구한 영웅이라 칭송하게 되었다.


귀신의 전투

데 로스국이 아직 제국임을 선포하기 전, 펠 로스 제국의 마지막 왕권을 강탈해 정통성을 확립하는 계기가 된 전투. 칸티온이라는 도시에서 벌어진 이 전투는 그 치열함 때문에 3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람들에게 잊혀지지 않고 있다.

30만이 넘는 데 로스국의 군사를 맞아 단 2만의 펠 로스 제국군이 목숨을 건 방어전을 펼친 전투로, 이 때 펠 로스 제국의 마지막 충신이었던 신관 지그는 병력의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귀신의 힘을 사용하였다.

그로 인해 데 로스군은 압도적인 군세에도 불구하고 고전을 면치 못했으나 지그가 귀신의 힘에 먹히게 되면서 칸티온을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카잔 증후군

소멸의 신 카잔에서 비롯되었다는 정신붕괴 상태. 증세가 악화되면 눈동자의 색깔이 변하고 신체능력이 대단히 상승하지만 이성을 잃고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을 파괴하게 된다.

불치병이며 지나친 감정의 폭발을 피하면서 조용히 살아가는 것이 생명을 연장시키는 유일한 방법이다. 가끔 한쪽 손이 기괴하게 변하기도 하는데 모든 환자에게서 발생하지는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위험이 없는 것은 아니기에 주변에 이런 사람이 있다면 조용히 피하도록 하자.


위장자

인간의 모습으로 위장하고 있는 악마. 사신의 제안을 받아들여 혼돈의 신이 된 오즈마는 '피의 저주'를 내리는데 이 저주에 걸리면 위장자가 된다.

위장자에게 습격 당한 사람 또한 위장자로 변하게 된다. 겉모습으로는 위장자와 정상인을 구분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서로를 믿지 못하게 되었고, 억울하게 마녀사냥을 당하는 경우도 자주 일어났다.

오로지 프리스트만이 위장자를 알아볼 수 있다. 검은 성전 이후 위장자는 대부분 숙청하였으나 아직도 안심해서는 안된다.

2.5.3. 3장[편집]

데 로스 제국

펠 로스 제국의 멸망 이후 후계자들이 펠 로스의 부활을 외치며 건국한 나라. 수도는 제 1령에 있는 황금의 도시 비탈론이며, 절대권력의 황제가 다스리는 중앙집권국가이다.

데 로스 제국은 팔로만을 중심으로 남부의 제1 령, 북부의 제2 령으로 구분된다. 엄격한 군사문화의 남부와 밝고 개방적인 북부는 서로 분위기나 성격이 판이하게 다르다.

그러나 결속력이 강하여 아라드의 남부지역은 제1 령이, 북부지역은 제2 령이 주도하여 야심차게 대륙 통일을 추진하고 있다. 또한 데 로스 제국의 국민들은 자국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며, 평화와 질서를 사랑한다.


펜네스 왕국

흑요정들의 오래된 왕국. 수도 언더풋을 중심으로 지하세계에서 성장한 국가다. 처음 흑요정 왕국을 세운 것은 펜네스의 위대한 왕 군트람으로, 원로원이 창시되고 나서야 흑요정들은 체계적인 왕국의 시스템을 갖추게 되었다.

언더풋이 지상으로 부상한 현재는 군트람의 직계 후손이자 왕족인 메이아 여왕이 펜네스를 지배하고 있으며, 장로 사프론을 비롯한 원로원들이 그녀를 보좌하며 펜네스를 통치하고 있다.


벨 마이어 공국

수도는 헨돈 마이어. 벨 마이어는 요정어로 '선한 사 람들의 국가'라는 뜻이다. 스카디 발로아 마이어 여왕을 모시는 3명의 의원들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다.

제국과 수쥬로 통하는 붉은 숲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비옥한 대평야지대가 있어서 식량은 넉넉한 편이었다.

회화, 음악, 시, 문학, 출판 등 다양한 분야의 문화가 골구로 발달하였고 사람들은 낙천적이었다.

그러나 그란플로리스를 중심으로 발생한 대전이로 인해 벨 마이어의 지역 대부분이 사람이 살 수 없는 환경으로 변하고, 공국은 500년 역사를 끝으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수쥬국

수도는 쇼난. 현재 통치자는 쇼난 아스카. 펠 로스의 기록과는 차이가 있으나 자국의 기록으로는 200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한다. 아라드 대륙의 서북쪽에 위치한 소국으로 복식과 언어, 문화가 다른 나라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키가 작고 마른 반면에 재빠르고 넨을 잘 다루는 사람들이 많다. 좁은 토지에 만족하고 살고 있을 정도로 성향이 온순하지만 전시에는 산과 계곡과 동굴로부터 나온 많은 넨마스터들이 힘을 합쳐 적을 물리친다.

쇼난의 외곽지역에는 젊은 넨마스터들이 운영하는 도장이 있으며 시장에 가면 좋은 를 싼 값에 흥정해 볼 수 있다. 휘청거리는 취객이라고 무시했다간 엄청난 검술을 쓰는 무사로 돌변하므로 이곳에서 나쁜 짓은 금물이다.


펠 로스 제국

'소멸의 카잔'과 '혼돈의 오즈마'가 인간이었을 때 살고 있었던 나라. 현재의 데 로스 제국의 전신이기도 하다.

지금의 데 로스 제국이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것처럼 당시의 펠 로스 제국도 막강한 힘을 자랑했다. 특히나 전설로 남은 카잔과 오즈마 생존 당시의 위용은 대단했는데 실질적으로 아라드 대륙 전체를 통일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오즈마가 혼돈의 신이 되면서 생겨난 위장자들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입고 서서히 멸망하였다.

2.5.4. 4장[편집]

GBL교

세상의 모든 지식을 수집하고 탐구하여 최종적으로는 궁극의 지식을 완성하고자 하는 종교단체.

거대생물 베히모스의 등에서 최초로 고대문명을 발견한 레슬리 베이그란스는 그 심오한 지식에 감화되어 세계 각지의 방대한 지혜를 모으기 위해 베히모스를 타고 대륙을 떠돌아 다녔다.

그러나 이 업적이 자기 대에서 완성되지 못한다는 걸 깨달은 그는 후대에라도 궁국의 지식이 완성되길 바라며 GBL(Grand Blue Lore)단체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레슬리가 죽은 후, GBL단체는 그를 신격화하면서 일종의 종교단체로 발전하였다. 종교적 열정을 가지고 있지만 대상은 레슬리가 아니라 궁극의 지식이라고 봐도 좋다.

프리스트 교단

혼돈의 신 오즈마와 위장자들로부터 세상을 지켜내기 위해 설립된 프리스트들의 단체, 오즈마를 봉인해 검은 성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원래 벨 마이어에 위치한 대성당 레미디아 바실리카를 총본부로 하고 있었으나 대전이로 레미디아 바실리카가 붕괴되고, 교단은 살아남은 프리스트들을 이끌고 언더풋에 새 본부 레미디아 카테드라를 차렸다.

신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정의와 헌신을 큰 가치로 여기고 있으며, 각지에서 모여드는 프리스트들을 교육시키고 있다.

모험가 길드

모험가 길드는 아라드 전역에 흩어져 있는 모험가들을 하나로 뭉치기 위해 카라카스가 만든 조직으로 모험가들에게 여러 조언과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모험가들에게 의뢰를 맡기고 싶은 자들은 길드를 통해서 쉽고 빠르게 접선이 가능하다. 천덕꾸러기 모험가들을 관리하는 조직이 생겼다는 사실만으로도 사람들의 기대를 모으고 있는 중이다.

4인의 웨펀마스터

비명굴 사건에서 시로코를 쓰러뜨린 영웅들이 모두 웨펀마스터였기에 묶어 지칭한다.

의 달인 수쥬시란, 둔기의 달인 반투브왕가, 대검의 달인 아간조, 소검의 달인 제국이 이들이다.

제국 연금술사 길드

데 로스 제국의 강력한 국가 정책 하에 키워진 연구단체, 주로 무기 개발에 힘을 쏟고 있다.

쇼난공방

수쥬의 수도에 있는 공방으로서 손재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의 최고 직장으로 알려져 있다. 이 단체는 최고의 무기와 방어구를 제작하며 쇼난공방의 브랜드는 널리 알려져 모험가들이 탐을 내고 있다.

이들의 제작품은 가볍고 강력하며 대부분 마법력을 가지고 있어 모험가들에게 인기가 높다.

그만한 명성이 있는 만큼 만드는 물품마다 걸작이 아닌 게 없으며 그 디자인 또한 알아준다. 하지만 제작을 많이 할 수가 없어서 소수의 선택된 모험가만이 쇼난 공방의 혜택을 볼 수 있다.

2.5.5. 5장[편집]

메이아 여왕

현재 흑요정의 여왕. 어린 나이이지만 매우 이성적이며 침착하다는 평을 받고있다. 대전이 후 솟아오른 언더풋을 개방하여 모험가들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스카디 발로아 마이어

벨 마이어의 여왕. 왕세자였던 남편에게 시집온 시민계급의 부유한 상인의 딸이다.
남편이 즉위하자 병약한 남편을 대신해 국정을 살폈다. 이런 나이에 상처한 후에는 자신을 옹호하는 세력을 모아 직접 왕좌에 올랐다. 대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와 유연한 정치수완은 역대 벨 마이어의 왕들 중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대전이가 일어나 벨 마이어 공국이 황폐해지자 돌연 모습을 감추었으며, 생사는 불분명하다.

반 발슈테트

제국의 웨펀마스터. 비명굴 사건 당시 시로코와 직접 맞서 싸운 4인의 웨펀마스터 중 소검의 달인. 비명굴에 전이되었던 시로코를 처치한 후 제국으로 돌아와 남작위를 받았다. 현재는 황제 직속의 기사단인 아이언울프단을 이끌고 있다. 밝고 정의로운 성격이라고 한다.

시란

비명굴 사건 당시 시로코와 직접 맞서싸운 4인의 웨펀마스터 중 도의 달인. 한창 시절에는 아라드 전역을 돌아다니며 이름을 날렸다. 높은 명성과는 달리 제자를 딱 한 명만 두었다.

아간조

비명굴 사건 당시 시로코와 직접 맞서 싸운 4인의 웨펀마스터 중 대검의 달인. 조용하고 말이 없는 성격이라고 한다. 비명굴 사건 이전에는 대륙 각지를 홀로 돌아다니던 방랑자였다.

브왕가

비명굴 사건 당시 시로코와 직접 맞서 싸운 4인의 웨펀마스터 중 둔기의 달인. 반투족의 족장이다. 우람한 덩치에 족장 대대로 물려받은 거대한 둔기를 들고다녀 늠름한 풍채가 돋보인다. 자신감이 강하고 야심이 있지만, 정의로운 영웅호걸이라는 평이 대부분이다.

쇼난 아스카

수쥬의 현 국왕. 격투에 천재적인 자질을 발휘하였고, 이름난 넨마스터의 반열에 오른다. 어릴 적부터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많아 12세가 되던 해부터 여행을 떠나 견문을 넓히는 동시에 많은 강자들과 실력을 겨루었다. 현인왕 쇼난 케이가 서거한 후 국왕자리에 오른후, 오랫동안 이어져온 수쥬의 쇄국정책을 타파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웨펀 마스터 솔도로스

수천 수만의 무기를 다룰 수 있다고 하는 전설의 웨펀마스터. 주변의 무기와 공명하여 엄청난 힘을 낸다는 웨펀셀렉터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자아를 가진 에고소드 클라리스를 습득해 애용했다고 하는데, 클라리스의 성별은 여성이라고 알려져있다. 오로지 검술만을 연마하고 강한 자와의 대결에만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마이어

점점 황폐해져가던 헨돈마이어 지역 사막위에 대마법진을 건설하여 사람이 살 수 있도록 환경을 바꾼 대마법사. 마법을 인간에게 전한 요정들마저 놀랄만한 실력과 마력을 지닌 전설의 마법사로 흰색을 매우 좋아했다. 등장 당시에는 강대한 마력을 이용해 청년의 모습을 유지했으나 노인네의 말투를 써서 많은 이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고 한다. 자연을 굉장히 사랑하는 낙천적인 성격으로, 몇몇 인간의 횡포로 숲을 잃은 요정들을 딱하게 여긴 그는 자신이 평생 쓸 마력을 쏟아 대마법진을 건설하고 자연환경을 조성해주었다. 이후 그는 더 이상 마법을 쓸 수 없는 몸이 되고, 외모도 원래 나이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마지막에는 안티엔바이(AntiEnbi)라는 마법서를 만들어 자신의 마법의 정수를 기록하고 종적을 감췄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란플로리스 대화재 이후 그가 만들었던 대마법진은 사라지고 말았다.

성안의 미카엘라

최초의 계시를 받은 성자(聖子). 검은 성전을 승리로 이끈 성스러운 5인 중 한 명. 프리스트들만의 고유 전투기술인 무술 신격권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신의 축복을 받아 늙지 않으며, 그의 성스러운 푸른 눈은 상대의 진실된 내면을 꿰뚫어볼 수 있다고 한다. 미카엘라에 의해 결집된 프리스트들은 위장자와 인간을 구분해내어 혼란스럽던 세상을 진정시키고 검은 성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홀연히 자취를 감춘 탓에 그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지만, 다시 위험이 닥치면 아라드를 구하기 위해 올 것이다.

2.6. 연금술사친구[편집]

A FRIEND OF ALCHEMIST
파일:xQ1N2w7.png

모건 : 오랜만이로군 클론터. 잘 있었나?

클론터: 모건! 오랜만이로군. 언더풋엔 언제 온 건가?

모건 : 막 도착한 참일세. 여왕님께 보고를 드리러 가기 전에 자네 얼굴이나 볼까 싶어서 말이야. 라미[2]도 건강해 보이는군.

클론터 : 그런데 그 꾸러미는 뭔가?

모건 : 자네가 난쟁이 때문에 고생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어서 갖고 온 걸세.

클론터 : 그거 고마운 말이로군. 선물은 뭔가? 피로회복제인가?

모건 : 아니. 강력한 끈끈이 풀일세.
이걸 황금에 발라 이곳저곳에 놔두면 난쟁이들이 손이 철썩 달라붙어서 움직이지 못하게 되네. 그럼 그들을 모아서 자네의 특기인 설득을 시도해볼 수 있을 거야.

클론터 : 음...난쟁이들이 화만 나지 않을까? 설득하러 갔다가 도끼를 던져오면 큰일인데.

모건 : 처음에 놀라서 손을 떼려고 양손을 붙일 테니 도끼를 던질 손도 없을 걸세.

클론터 : 마치 여름날에 벌레를 잡는 것 같군.

모건 : 바로 그걸세. 그리고 이건 아마도 성장촉진제인데...

클론터 : '아마도'?

모건 : 동물 실험을 해봤더니 성장 속도가 빨라지더군. 통상 두 배 정도? 문제는 성향도 좀 난폭해져서 제어가 힘들더라고. 아... 그리고 특이하게 머리에서 뿔이 나던데... 난쟁이들은 좋아하지 않을까?

클론터 : 절대로 자네가 난쟁이들에게 다가가게 내버려 둬선 안되겠군.
클론터 : 손의 상처는 뭔가? 실험하다가 다친 건가?

모건 : 오는 길에 새끼 쥐를 한 마리 잡았는데 시도 때도 없이 물어뜯는 바람에 잠도 제대로 못잤네. 지나가던 모험가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난 아마 해골이 되어 여기 도착했을 거야.
모건 : 아무튼 너무 그렇게 매몰차게 거절하지 말게. 난쟁이들에게 키 크는 약으로 꾀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나? 전에 보니 키와 덩치가 클 수록 난쟁이들 사이에서 떠받들어지는 것 같던데 말이야.

클론터 : 모건... 나는 그들과 대화를 하려는 것이지 먹이로 낚으려는 것이 아닐세.

모건 : 하지만 자네가 대화를 하려고 해도 자네 앞에 나타나질 않지 않나? 그래서 이런 게 있으면 그들도 돌 뒤에서 바깥으로 나오는 게 더 쉬워질 거라고 생각하는데.
모건 : 그럼 이건 어떻나? 여기까지 오다가 발견한 특이한 열매의 씨를 빻아서 술에 섞어봤는데 잠이 확 깨더군. 그리고 이건...

클론터 : 아니 잠깐만. 도대체 이 꾸러미 안에 뭐가 있는 건가? 말을 들어보니 제대로 만든 건 하나도 없는 것 같은데.

모건 : 아. 눈치 챘나? 사실은 논문의 주제가 영 생각나질 않아서 말이야. 여왕님께 실버크라운의 생태에 대해 보고를 드린 후에 학술원에 들러야 하는데 요새 실버크라운 쪽에 꽤나 일이 많았거든.
모건 : 나도 좀 바빠져서 차일피일 미루다보니 제출일을 깜빡 넘겼지 뭔가... 답답해서 오는 길에 보이는 재료로 무작정 만들어 봤지.

클론터 : 하아... 그럼 이 많은 짐이 실버크라운에서 여기까지 오면서 심심풀이로 만든 약이란 말인가? 세상에, 언더풋을 쑥대밭으로 만들 수도 있겠군!

모건 : ...음? 오호...

클론터 : ...안 되네. 언더풋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것만은...

모건 : 심심풀이라. 그거 괜찮은데? '심심풀이 삼아서 생활의 재료로 간단히 만들 수 있는 재미있는 약'을 대충 정리해서 내면 어떨까? 학술적이진 않지만 대중에게 다가가기 위한 입문서 정도로 썼다고 하면 할아범들도 까다롭게 굴지 않을 텐데 말이야.
모건 : 좋아. 클론터. 펜하고 종이를 좀 빌려주지 않겠나? 그리고 라미도 잠깐 빌려주게.

클론터 : 라미나비엔토는 왜?

모건 : 조용한 곳에 가서 쓰려고. 내 머릿속에 있는 생각들이 언더풋의 소음에 지워지기 전에 빨리 종이에 담아야겠네!

클론터 : 빌려주는 것은 좋지만 그 이상한 약 중 하나라도 라미나비엔토에게 닿게 하지 말게.

모건 : ...오?

클론터 : 절대로 안 돼.

모건 : 알겠네... 그럼 다녀오겠네! 여왕님께는 일이 생겼다면서 대신 보고해주게나. 자, 여기 보고서. 그럼 부탁하네!

클론터 : 뭐? 아차, 모건!
클론터 : 모건!

샤란 : 안녕하세요. 모건 님이 언더풋에 오신 것 같아서 함께 입궐할까 싶어서 찾아왔습니다만...... 제 예상에서 한 치의 벗어남 없는 일이 벌어진 모양이로군요. 이번엔 또 어떤 기발한 방법으로 당하신 건가요?

클론터 : 하아...하하하... 워낙 자유로운 성향이기도 하고, 왕궁 안의 사람들을 대하기 어려워 해서 저렇습니다. 왜 모험가가 되지 않았나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샤란 : 그렇군요. 하지만 여왕님께 보고는 하셔야 할 텐데요.

클론터 : 보고서는 여기 있습니다. 대리 보고자로서 제가 가는 수밖에요. 모건 때문에 연금술 지식이 늘어나는게... 나쁘지는 않지만 이게 과연 정상인가 싶습니다.

샤란 : ...특이한 분이시지요. 저분은.

클론터 : ...휴우우...


시간배경은 작중 시점 어느곳에 두어도 상관 없을 것 같아보이지만, 모건이 '최근에 여러가지 일이 있었다' 라는 언급을 하는 것으로 보아 모험가가 실버크라운 퀘스트를 클리어하고 떠난지 얼마 안된 시점으로 추정된다. 모건의 경우 극 초반 지역인 실버 크라운에 거주하는 NPC라 자신의 성격을 드러낼 만한 스토리나 텍스트가 많이 부족한 편인데, 이 에피소드를 통해서 모건의 성격을 어느정도 엿볼수 있다는 점이 특징.의외로 매드사이언티스트

2.7. 하급기사 교육일지[편집]

LENNYS EDUCATIONAL JOURNAL
파일:1s4ANbO.png

레니의 일기장으로 훈련을 받아 서품을 받고 베히모스까지의 일을 담고 있다. 일기장이라 그런지 레니 본인의 심정을 묘사하고 있으며, 하츠의 코멘트가 끝에 달려있는 것을 보아 교환일기 식으로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모험가 입장에서는 알 수 없었던 이야기를 풀어놓음으로써 스토리 2차 개편과 함께 하츠의 성품이 재조명되는 역할을 했다. 맨 마지막의 '미안하다. 잘 쉬어라.'라는 짤막한 한 마디는 그야말로 백미. 이 스토리를 읽고 레니나 하츠에게 모에(...)를 느낄 사람이 생길지도 모른다.

상반된 의견으로는 하츠와 레니의 또다른 일면을 볼 수도 있는 외전 스토리지만 시체팔이 이상도 이하도 아닌 수준이라거나, 하츠 너프를 하랬더니 이미 죽은 캐릭터까지 이용하며 처절할 정도로 미화를 하는 스토리작가의 하츠편애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기존 캐릭터를 누를 정도의 시나리오 상 비중을 줄이랬더니, 비중은 그대로 두고 언어만 순화하였다 보는 것. 그나마 겐트에서부터는 하츠 대신 반이 더 자주 보이긴 하지만...

더군다나 제목부터가 에러다. 저것은 교육일지가 아니라 교환일기에 가까운 수준이다. 중간에 하츠 쪽이 더는 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감안해도 "하급기사 교육일지"보다는 "하급기사의 이야기"라는 식으로 제목을 정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그래도 하츠는 하향 이전에도 레니가 없어졌을 때 바로 알아차리거나 그의 시신을 고향으로 보내주는 등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을 생각하면 아주 하츠를 띄워주려 작정했다기보다는 좀 더 하츠의 부하를 아끼는 성격을 보여 유저들 측의 반감을 깎으려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의도가 성공한 건지는 몰라도 레니에 대한 던파 캐스터의 글이 올라왔었는데, 유저들의 반응은 지금 로터스 죽이러 갑니다, 어벤저 악마화로 로터스 패러 간다, 악은 ANG으로! 등이 있었다. 생각보다 효과는 좋았던 모양.캐스터의 글

스토리 북 제목만 보고 괜히 이상한 생각한 사람은 반성하자

2.7.1. 1장[편집]

9월 4일.
오늘은 훈련소가 끝나고 드디어 합격 발표를 하는 날이다.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면서 합격 발표장으로 들어가는데 엄마가 입구까지 따라오며 시시콜콜 잔소리를 했다.
내가 잘해야 집안이 산다는 둥, 기사님들 말씀 잘 들으라는 둥... 엄마는 너무 걱정이 많아서 탈이다.
발표장에 가니 이미 많은 하급기사들이 모여있었다. 합격이든 불합격이든 발표가 나올 때마다 시끄러워지는 바람에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마리 그 계집애가 합격 소리 듣자마자 난리칠 때는 정말 때려주고 싶었다.
어쨌든 그런 일이 있어 소란스러웠지만 내 결과는? 당연하지, 합격이다! 그것도 공동 2위! 1위를 못하다니 아쉽긴 하지만 반 발슈테트 님이 계시는 아이언울프에 배속되었다! 만세!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런데 나랑 공동 2위를 받은 그 남자애는 어디로 갔을까?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보고 싶은데.
형식은 까다롭게 굴지 않겠다곤 했지만 너무 어린애처럼 쓰지 마라. 헤몬 데리케는 시론스 백작 휘하의 수호 기사단에 배정된 걸로 알고 있다.

9월 5일.
제2 연병장 집합에서 장시간 훈련, 저녁 7시 환영회, 맛은 별로. 단장님은 불참.
제일 많이 먹은 놈이 맛없다고 하는 건가. 단장은 왔었다. 네가 고기완자를 던져댔던 그 남자인데... 기억이 없는 거냐? 술 좀 줄여.
그리고 이것보다는 자세하게 적어라. 너무 간략하다. 이래서는 도움이 안 돼.

9월 6일.
오전 5시 32분 23초에 제2 연병장에서 검술 훈련을 시작, 약 3시간 42분 동안 계속. 14분을 걸어 식당에 도착하여 12분 동안 기다려서 배식을 받음.
메뉴는 절인 고기와 삶은 콩과 감자, 피클, 치즈와 브로콜리 수프, 절인 고기의 질김 정도는 적당했지만 너무 구웠음. 삶은 콩은 약간 비릿한 맛이 났고 이에 불만을 가진 인원은 23명 정도.
삶은 감자는 식어가고 있었기에 평이 좋지 않았으나 크기는 적당하고 익기는 다 익었기에 먹을 만은 했음. 수프는 고소해서 좋았지만 브로콜리라는 재료 선정에서 다소 호오가 있었던 것 같음. 피클은... 죄송합니다. 지면이 부족합니다.
그렇게 적고 싶으면 오전 5시 30분부터 약 4시간 검술 훈련 후 오전 식사. 이런 식으로 적어라. 근데 왜 훈련보다 식사가 더 자세한 거냐?

9월 7일.
검술 훈련이 너무 힘들어서 펜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팔이 떨려서 잉크가 자꾸 튑니다. 검술 훈련은 열심히 하자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내가 살다살다 너 같은 놈은 처음 본다. 이거 보자마자 당장 나한테 튀어와.

9월 8일.
휴일, 집밥도 먹고, 단검도 사고, 머리끈도 사고, 구두도 사고, 과자도 사고, 행복행복!
추신) 부단장님, 아까 맘대로 적어도 된다고 하셨죠? 이렇게 써도 되죠?
그래 맘대로 적어. 무슨 말을 해도 이해를 못하니 설명할 자신이 없다. 그래도 좀 영양가 있는 내용으로 쓰도록 노력해봐라.

9월 9일.
오늘은 정말 충격적인 날로 기억될 것 같다. 단장님이... 반 발슈테트 님이 유부남이었다니...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다...
내용은 좀 생각하라고 하지 않았나? 뭐가 힘들고 어려운지를 써야 내가 조언을 하든, 개선을 하든 할 거 아니냐? 혼자 보는 것도 아니고 나한테 보여주기까지 하면서 지나치게 개인적인 내용만 자꾸 써대지 마.

9월 10일.
그저께 주워온 개가 밤에 자꾸 짖습니다. 피오나가 계속 짜증을 내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네놈이었냐. 당장 끌고 와.

2.7.2. 2장[편집]

10월 4일.
기사단에 들어온 지 딱 1개월이 되는 날이다. 훈련이 끝나고 부단장님이 하급기사들만 따로 모아놓고 고생했다고 말씀하시는데 눈물이 나올 뻔했다. 그동안 힘들었던 일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그리고 시험 결과를 발표하셨다. 지나, 베시, 돈, 게일은 떨어지고 나와 피오나, 덴이 남게 되었다. 예상은 했는데 결과 발표를 들은 후에야 안심이 되었다.
떨어진 애들은 다시 훈련소에 들어갈 것 같은데 지나는 기사를 그만두겠단다. 재능이 없는 걸 이제야 인정했나보다. 집에 돈이 많다고 잘난 척만 하더니 꼬시다.
그리고 돌로레스 선배는 오늘 정식으로 기사가 되셨다! 귀족이었으면 벌써 기사로 활약하고 계셨을 텐데… 하지만 정말 대단하다.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을가? 되고 말테다!
아참 그리고 오늘부터 일지 검사는 안한다고 하셨다. 솔직히 어린애도 아니고 일기 검사 받는 거 같아서 좀 그랬는데 다행이다. 그래도 부단장님하고 글로나마 대화 할 기회가 있어서 좋았다.
대부분 혼나기만 했지만… 아직은 괜찮겠지? 아, 이제 여기에 아무 거나 써도 되는거지? 내일 훈련 단장님이 봐주러 오시면 좋을 텐데… 바쁘셔서 어쩔 수 없나. 아쉬워라.
뒹굴뒹굴하고 싶다. 검 새로 사고 싶다. 오늘 술집에서 만난 모험가 짜증나. 사과 먹고 싶다. 빨리 정식 기사되고 싶다… 아아 졸려! 아침 훈련 빼먹고 싶다아!
바보인 줄은 알았는데 정말 바보군. 오늘 아침에는 왜 내 책상에 놓고 갔냐? 내가 어제 말 안 했나 했다. 내일부터 1시간 일찍 일어나서 잠 깰 때까지 연병장 돌아.

10월 5일… 죽을 뻔한 날.
아침에 연병장 돌면서 졸다가 담장에 부딫히고 부단장님께 크게 혼났다… 하급기사 전원이 연병장을 오전 내내 돌고, 오후에는 땡볕 아래서 기사단 전체가 프록실 산 정상까지 뛰었다… 그리고 기초 훈련이 밤까지…
피오나가 날 죽이려고 했다. 내가 실수해도 웃으며 봐주시던 그레이 선배 마저도… 정말… 우리 단 전체가 날 죽이겠다고 했다… 내일 모두에게 한턱을 쏴야겠다. 내 월급… 난 왜 이렇게 잠이 많을까…

10월 8일.
단장님이 오랜만에 오셔서는 모두에게 저녁을 사주셨다. 그리고 식당에서 옛 공국으로 가게 되었다는 뜬금없는 발표를 하셨다. 특무라고 하시는데 뭘 하게 될지는 자세히 말씀하지 않으셨다. 다들 먹다 말고 멍하니 있을 뿐이었다.
도대체 무얼 하게 되는 걸까? 덴은 그래도 북부로 가지 않게 된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 한다는데… 솔직히 옛 공국이면 폐허뿐일 텐데 그런 곳으로 보내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걸까?

10월 11일.
이동 날짜가 구체적으로 정해졌다. 정말 갑작스럽게 먼 곳으로 가게 되어서 다들 당황하는 눈치다. 혹시 전쟁이 벌어지는 건가?
가증스러운 흑요정들과 전쟁을 벌인다면 기쁜 마음으로 싸우러 가겠지만 도통 목적을 알 수가 없으니 답답하다. 단장님과 부단장님은 하루 종일 회의하러 궁에 가시고서는 훈련장에 나와보지도 않으신다. 큰일이 벌어지는 걸까?

10월 15일.
다들 수군수군한다. 기왕이면 진짜 엄청난 일이 벌어지면 좋을 텐데. 단장님은 내 또래일 때 검술로 세상에 이름을 알리셨는데… 나도 기회만 오면 제국의 기사로서 이름을 드높이고 싶다. 단장님이랑 대등한 위치에 서서 나도 기사단을 이끌고 싶다.
그치만 힘들겠지 이름난 가문도 아니고… 어쩔 수 없지. 우리 가문을 다시 일으키려면 이번 장기 임무에서 공을 많이 세울 수 밖에. 힘내자!

2.7.3. 3장[편집]

7월 2일. 와아 벌써 다섯 권째네.
흑요정의 마가타를 타고 베히모스 위로 올라왔다. 무서워서 죽는 줄 알았지만 피오나가 비웃을까 꾹 참았다. 기집애. 단장님 앞에서 날 까지 못해 안달이라니까.
전에 부단장님한테 혼날 때도 어찌나 깔깔거리며 웃던지… 요즘은 모험가보다 얘가 더 짜증 난다. 내일부터는 굉장히 바빠질 거 같으니까 이만 자야지.

7월 15일.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적자면 끝도 없겠지만 제일 인상 깊었던 건 웨펀마스터들을 만난 일이다. 달인답게 한 걸음 걷는 동작에서도 군더더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경지에 달하는게 저런 거로구나.
부단장님이 평소에 말씀하시던 게 무슨 뜻인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단장님도 달인의 면모가 없는 건 아니지만 우리 앞에서는 굉장히 유쾌하게 행동하시니까 잘 알지 못했는데…
아무튼 그 두분을 보고 새삼 보이는 것도 있다. 이래서 많은 사람을 만나보는 게 중요하다고 하는 것 같다.
그리고 미들오션! 숨을 쉴 수 있는 바다에 내가 정말 들어가게 될 줄이야. 정말 엄청나다. 듣기만 한 거랑 실제로 가보는 거랑 정말 차이가 크구나.
이런 경험 때문에 모험가들이 모험을 계속 하는 걸까? 아무 데나 몰려가서 분탕 치는 녀석들이 좋다는 건 아니지만, 이해가 되기도 한다.

7월 28일.
요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단장님은 상당히 짜증이 나신 것 같고, 부단장님도 우리 앞에서는 아무 말씀을 하지 않으신다. 조사는 계속하고 있는데 무엇을 찾는 것인지 자세하게 전달받지 못했다.
명령이니까 따르고는 있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GBL교의 사람들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7월 30일.
얼마 전부터 몸이 좀 무거운 게 상태가 영 좋지 않다. 긴장해서 그런가 싶었는데 사도의 영향력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사도라면 단장님이 비명굴에서 쓰러뜨렸던 그 괴물일 텐데… 설마 그런 녀석하고 싸워야 하는 건 아니겠지?

8월 3일.
피오나가 겁 먹은 거냐고 비웃길래 아니라고 대답했지만, 솔직히 여기에 있는 사람중에서 겁이 안 나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저렇게 말하는 피오나도 지가 겁나니까 괜히 저러는 거다.
단장님이 사도와 싸우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말씀하셨다. 모두 긴장했지만, 영웅이 될 기회라며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다.
부단장님은 별거 아니라고 말씀하시면서도 평소보다 까다롭게 장비를 점검하셨다. 어차피 단장님과 다른 웨펀마스터가 있으니까 우리는 괜찮을 거라고 하셨는데 그래도 긴장된다.

8월 9일.
떨린다. 내 첫 무대는 전쟁터일 거라 생각했는데 사도라니… 잠이 안 온다. 지금이라도 본국에 지원 요청하면 안될까?

8월 11일.
덴이랑 부단장님을 찾아갔다. 피곤하신 것 같았다. 하급기사는 이번 작전에서 빼고 싶은데 인원이 부족해서 어쩔 수 없다고 하셨다. 그래도 우리는 단장님이 데리고 가실 거라고 하셨다.
기사가 이러면 안되겠지만 그래도 무섭다. 하지만 제국의 기사니까 모험가나 GBL교 앞에서 약해 보이면 안되겠지. 내 문제가 아니라 우리 제국 전체의 위신이 걸린 문제니까…

8월 12일.
내일 출발할지도 모르겠다. 엄마가 보고싶다.

8월 13일.
집합 명령이 떨어졌다. 조금 후에 출발할 것 같다. 사도고 뭐고 싫다. 가기 싫은데… 나중에 돌아와서 이거 보고 괜히 야단 떨었다며 부끄러울지도 모르니까 여기까지만 적어야지… 진짜 가기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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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천계에 부는 바람[편집]

NEW GENERATION OF THE HIGH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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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녀 에르제가 즉위하는 과정을 담은 이야기. 어째서 그녀가 황녀가 되었는지와 유르겐과 잭터의 심리를 심층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또한 나이에 맞지 않는 황녀의 근엄한 말투와 달리 실제론 아이같은 면이 있음도 알 수 있다.

2.8.1. 1장[편집]


천계군을 지휘하여 카르텔의 맹렬한 공격을 막아내던 최고 사제 벨드런이 세상을 떴다.
천계 백성들은 카르텔이 입힌 피해를 복구하기도 전에 큰 슬픔을 맞이해야만 했다.
자진해서 상복을 입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어버이가 죽은 듯 곡을 하는 소리도 들렸다.
하지만 천계 지도부는 슬픔에 빠져있을 수는 없었다.
안정을 위해서도 빨리 벨드런의 빈 자리를 채워야했다.
천계의 최고 사제위는 선대의 유언을 통해 계승된다.
화려한 계승식은 축제이기도 하므로, 다른 때 같으면 빠르게 진행되었을터였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상황이 달랐다.

"벨드런 님이 서거하신 지 벌써 열흘. 슬슬 에르제 님의 계승식을 준비해야 할 때입니다.
전쟁의 피해를 빨리 복구하기 위해서라도 최고 사제위를 오래 비워둘 수 없습니다."

"일리 있는 말씀이오만... 좀 더 기다려봅시다."

"웨인 공. 여기까지 와서 기다릴 필요가 있습니까?
벨드런 님께서는 분명히 자신의 후계자로 그분을 지목하셨습니다.
그 뜻을 무시할 생각입니까?"

다소 성급히 몰아붙이는 페트라 노이만의 말에 대귀족 안제 웨인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누가 무시한다고 했습니까? 다만 전쟁의 뒷처리가 급한 이 때에 너무 어린 소녀가 감당하기는 어렵지 않냐고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총명하시긴 하나 아직은 더 배우셔야 할 시기입니다."

좁지 않은 회의실이 한숨으로 채워졌다.
너무나 막중한 자리, 한시라도 비울 수 없는 자리. 하지만 여염집에서 나고 자란 어린애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 하지만, 누가 그 자리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최고 사제가 과연... 이런 시기에 필요하겠습니까?"

"무슨 말씀이시오?"

"... 별말 아닙니다. 그저 저 패악한 카르텔이 방자하게 황도에 쳐들어온 것을 생각해 보았을 따름입니다.
전쟁에 필요한 것은 사제의 능력이 아니었지요."

어느 때보다 조심스러워야할 자리에서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하는 테레사 슐츠의 말에 넓은 회의실이 팽팽한 긴장으로 가득찼다.

"분명 벨드런 님께서는 카르텔을 염려하시지 않았소?
게다가 전쟁이 일어나자 직접 선봉을 이끄시어 혁혁한 공을 세우고 놈들을 무법지대로 쫒아내셨잖소."

"그렇습니다. 훌륭한 '지휘관'이었지요."

"......"

"자자, 모두 진정들 하십시오. 각자 생각하시는 바가 있을 테고 논의할 가치도 충분하지만 지금은 먼저 상을 제대로 치르는 것이 먼저 아니겠습니까."

날카로워지려는 분위기가 유르겐 가의 수장, 네빌로 유르겐의 말에 수그러들었다.
한 사람을 제외하고 이 회의장에 모인 모두가 각자의 가문을 대표하는 자였으나, 그만큼 묵직한 발언권을 가진 자는 없었다.
하지만 유르겐은 자신의 뜻을 설파하기는 커녕, 격앙된 회의장의 분위기를 가라앉힐 뿐이었다.

"에르제 님의 나이가 어리신데 우리가 시끄럽게 떠들어 더욱 불안한 마음을 가지시게 하는 것은 아니될 일입니다.
이 일은 추후에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시지요."

"유르겐 공의 말씀이 맞겠구려. 그럼 저는 이만..."

"저도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휴우. 말들이 많군요. 그럴 거라곤 생각했습니다만 왠지 지치는군요.
이런, 제가 장군 앞에서 피곤하다고 말할 처지가 아니었지요. 괜찮으십니까, 장군? 전쟁의 피로가 아직 채 풀리지 않으셨을텐데요."

"괜찮소."

귀족들이 회의장을 나간 후 남아있는 자는 유르겐과 대장군인 잭터 에를록스뿐이었다.
벨드런 사후 천계의 최고 사령관의 자리에 올라섰으나, 잭터의 낯빛에는 한점의 교만과 기쁨 따위를 찾아볼 수 없었다.
무법지대 출신으로 이 정도의 지위에 올라선 자는 없었다.
벨드런이 그를 황도로 데리고 왔을 때만 해도, 시골 촌놈이 곧 나가떨어지리라는 예상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글아이라고도 불리는 이 남자는 그런 험담쯤 가볍게 무시하듯 승승장구했고, 마침내 군인의 정점을 찍었다.
이 남자를 어떻게 다루어야하는가... 말 한마디로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치열한 정치판을 제 손금 보듯하는 유르겐이지만 잭터의 생각만큼은 읽기 어려웠다.

"그나저나 유감입니다. 벨드런 님께서 장군의 취임식을 보고 싶어하셨을텐데."

"시끄럽고 화려하기만 한 취임식 따위로 눈을 어지럽히지 않으셨으니 오히려 다행이오. 그럼 나도 이만 돌아가겠소."

군인답게 무뚝뚝하게 대답하고 일어서는 잭터를 유르겐은 붙임성 좋게 따라붙었다.

"아, 사령부로 돌아가십니까? 저도 방향이 같으니 같이 가시지요.
... 날이 참 좋군요. 이렇게 좋은 날에 아름다운 정원을 감상할 수 있는 것도 다 벨드런 님과 장군의 덕택입니다."

"나보다는 장병들이 애썼소."

"하하. 너무 겸손해하지 마십시오. 우리 병사들도 용감히 맞섰지만 훌륭한 지휘가 있었기에 그들이..."

큼직한 걸음을 옮기던 잭터가 자리에 우뚝섰다.

"유르겐 공. 하실 말씀이 있으면 그냥 하시오. 나는 무식한 사람이라 귀족들의 기품있는 회화에는 익숙하지가 않소."

"대단찮은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저 구름이 걷히니 햇볕이 들어 날이 참 좋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을 뿐이었습니다."

"때가 되면 구름은 저절로 물러가는 법이오. 조바심 낼 것도, 억지로 바람을 일으킬 필요도 없소."

날씨 이야기였지만 결코 날씨를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눈치가 빠른 자라면, 이 수라장 같은 다툼에서 살아남으려는 자라면 유르겐의 숨은 뜻을 모를 리 없을 것이다.
하지만 평생을 싸움터에서 보낸 잭터의 얼굴에는 감정을 읽을 만한 아주 작은 변화조차 없었다.
그는 그저 귀찮음이 뚝뚝 묻어나는, 하지만 예의에 어긋나지 않을 목소리로 짧게 대꾸했다. 유르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군요. 그럼 장군, 저는 이쪽으로 가야하니 다음에 뵙겠습니다. 나중에 장기나 한 수 가르쳐 주시지요.

"그럽시다."

귀찮은 사람에게서 드디어 풀려난 잭터의 목소리에는 옅은 해방감이 묻어있었다.
그래서 유르겐은 더 아리송해질 수 밖에 없었다.

2.8.2. 2장[편집]


벨드런 사후 열닷새째가 되는 날. 잭터는 수행원도 모두 물리친 채 한 소녀의 방을 찾아 정중히 노크를 했다.

"에르제 님. 잭터 에를록스입니다. 들어가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잠깐만요, 열어드릴게요."

깊은 고동색의 문이 조용히 열렸다. 키가 큰 장군의 허리에 겨우 닿을까 싶은 작은 소녀가 '긴장된 표정'이라는 훌륭한 견본을 보여주는 얼굴로 목이 꺾어져라 올려보았다.

"안녕하세요, 장군님. 오늘은 총 연습 안 하시나요?"

"하도 많이 쏴댔더니 손가락에 쥐가 내려서 말입니다. 가끔은 쉬어 줘야겠더군요."

에르제는 진심으로 놀랐다.

"네? 손가락에 쥐가 와요? 쥐는 총을 좋아해요?"

"하하. 그 쥐가 아니라 근육이 갑자기 당겨져서 움직이지 못하고 아플 때 그렇게 말하는 겁니다."

"에이 재미없어."

"벨드런 님이 돌아가신 후 힘들지 않으실까 해서 찾아왔습니다. 괜찮으신지요?"

"......집에 가고 싶어요."

어린아이가 슬픔을 감출 때 으레 그러듯 하얗게 굳어버린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가슴에 맺힌 것이 풀리지 않았는지 에르제는 주저하면서도 한 마디를 덧붙였다.

"여긴 무서워요."

"그렇지요. 저도 집에 가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아저씨... 아니, 장군님 집은 어디에 있어요?"

"제 집은 웨스피스에 있습니다. 못 간 지 한참 됐군요."

"왜요?"

잭터는 어린아이에게 말해도 될지 잠시 고민했지만, 그냥 성격대로 툭 터놓고 얘기하기로 했다.

"황도로 올 때 같이 가자고 했는데 고향을 떠나기 싫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아내와 딸을 두고 왔지요. 많이 후회됩니다."

"음... 장군님은 제일 높은 장군님이니까 병사들한테 데리고 와달라고 하면 되잖아요?"

"그럼 좋겠군요. 하지만 전쟁이 막 끝났는데 제 가족 때문에 병사를 무리하게 움직일 수야 없지요. 병사들도 지쳤으니 집에 가서 쉬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좋겠다. 저도 집에 돌아가고 싶어요."

"에르제 님이 이곳에 오신 지 얼마나 되었지요? 반년 좀 됐나요? 가족이 많이 보고 싶으시겠습니다."

"네... 근데 안 보내줄 거죠? 저는 여기에 있어야 한다고 엄마가 그랬어요."

"그렇습니다."

잭터는 딱히 무겁게 말하지 않는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어린 소녀는 충분히 무겁게 받아들일 것이다.

"그리고 알고 있었어요. 제가 이곳에 오게 될 거라는 거... 왠지는 잘 모르겠는데요, 알고는 있었어요. 혼자 큰 방에 앉아 있게 될 거라는 거..."

"혼자는 아닙니다. 모두가 곁에 있어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네에..."

에르제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이미 그런 겉치레 위로는 지겹도록 들은 터였다. 그러나 잭터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힘든 것이 힘들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슬픔과 외로움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직은 슬플 때 울고, 기쁠 때 웃어도 괜찮습니다."

"아직은?"

"나중에는 기쁠 때 울고, 슬플 때 웃어야 하는 일도 생길 겁니다. 지도자의 자리는 언제나 고독해서 가면을 쓰지 않으면 산산조각이 나고 말지요."

"그런 거 싫어요."

"저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 현실을 바꿀 힘이 제게는 없습니다."

잭터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이 말을 어린아이에게 해도 되는 것인가... 제정신이라면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잭터는 에르제의 총명함과, 이 소녀를 후계자로 선정한 벨드런을 믿기로 했다.

"최고 사제라는 자리는 무척 불안합니다. 이 황국의 중심으로 떠받들어지면서도 황제는 아니며 실질적인 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언제나 의심받고, 남이 필요할 때만 책임자의 책무를 이행해야 합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그게 당신이 짊어질 짐입니다."

"......"

"당신을 두고 허수아비, 혹은 꼭두각시라고 부르는 자가 얼마든지 나올 것입니다. 하지만 에르제 님. 그들의 말을 모두 무시하십시오. 그리고 그들이 부려먹기 쉬운 최고 사제가 아니라 황제가 되도록 하십시오."

"황제요?"

천계에서는 듣기 어려운 단어였기에 영민한 에르제도 그저 눈을 깜빡이는 수밖에 없었다. 잭터는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나라는 모래로 쌓은 성처럼 쉽사리 무너질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귀족의 세력은 지나치게 크며. 권력의 중심은 분산되어 있습니다. 이래서야 바칼처럼 강력한 적이 나타나면 금방 흩어지고 맙니다. 그렇게 되면 당신이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들은 모두 죽어버리겠지요. 그 전에 이 나라를 하나로 결속하여 단단하게 뭉쳐주십시오. 당신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시면 도와드리겠습니다."

"아... 잘 모르겠어요. 아저씨가 하시면 되지 않나요?"

겁먹은 에르제의 애원 같은 물음이었으나, 잭터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안 됩니다. 저의 사고는 전투로 굳어진 지 오래고, 타인을 적과 아군의 이분법으로 구분하는 것이 너무 자연스러워졌습니다. 게다가 저는 군인입니다. 제가 지배자의 자리에 오르면... 뭐, 갈아엎기는 쉽겠습니다만 좋지 않은 선례가 생기고 맙니다. 누구나 힘으로 이 나라를 뒤엎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겠지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뭔데요?"

"저는 귀찮은 게 딱 질색이라서요. 업무 마치면 바다도 보고, 술도 좀 마시고, 친구와 이야기도 해야하거든요. 황제는 그걸 못 해요."

앞서 열거한 다른 이유보다 노는 게 더 중요하다는 듯한 잭터의 말투에 에르제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에에... 저도 노는 게 좋은데."

"물론 에르제 님도 적당한 사람 잡아다가 자리에 앉히고 도망가 버려도 되겠지요. 그렇게 하고 싶으십니까?"

에르제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열심히 생각하더니 혀를 삐죽 내밀며 웃었다.

"제가 떠나버리면 다른 사람이 이 넓은 방에서 떨고 있어야 하죠? 그건 싫어요. 그리고 또... 아저씨가, 아차, 장군님이 이 나라에서 제일 세죠?"

"어쩌다보니, 네."

"장군님이 도와주신다고 했으니 해볼게요. 이 나라가 위험해지면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도 다칠 테니까... 나쁜 사람이 착한 사람들을 괴롭히지 못하게 할게요. 근데 황제가 뭐에요? 최고 사제 친구에요?"

"옛날에 그런 게 있었다고 하더군요. 신과 사람을 잇는 자가 최고 사제라면, 사람들을 하나로 뭉쳐 강력하게 이끄는 사람이 황제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이름에 '황국'이 붙는 것도 옛날에는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고요."

"그건 좀 무서운데... 황제 말고는 없나요? 그 아래 거."

에르제의 진심 섞인 투정에 잭터의 말문이 막혔다. '황제의 아랫자리? 그게 뭐지?' 그 역시 황제라는 개념이 낮선 천계인이었다.

"음... 황제의 아래면 황녀 정도인가요."

"그럼 저 황녀할래요."

"하지만 황녀는 황제의 딸일 텐데요... 뭐, 황제의 자리는 성장하신 후에 오르셔도 되겠군요. 어차피 이 나라는 이름은 황국인 주제에 황제는 없었으니까 성인이 되기 전 과정이라고 말해두면 되겠습니다."

' 벨드런이 살아있다면 그게 뭐냐며 웃어넘어갔겠지.' 잭터는 갑작스레 사무치는 그리움을 아무렇지도 않게 떨쳐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수락하신 걸로 알고 가보곘습니다."

"또 땡땡이 치러 가시나요?"

"그러고 싶습니다만 제 일을 대신 해줄 사람이 없어서요. 나중에 소개 좀 시켜주십시오."

물러가기 전에 경례를 하는 잭터를 어설프게 따라하던 에르제는 그가 방문을 열기 전에 퍼뜩 생각났다는 듯 쪼르르 달려가 그의 군복을 잡아당겼다. 그러곤 무릎을 꿇은 잭터의 귀에 소곤거렸다.

"있잔아요. 제가 황녀가 되면 장군님의 딸도 찾아줄 수 있겠죠? 그럼 저랑 친구 해달라고 하면 안돼요?"

"제 딸은 에르제 님보다 나이가 많은데요. 어린애끼리 노는 건 상관없지만 언니 노릇을 하려고 들 겁니다."

"와아, 저 언니 갖고 싶었어요. 제 언니 해주면 안 돼요?"

천진난만한 에르제의 말에 잭터가 콧방귀를 뀌었다.

"제 딸이 황녀의 언니면 저는 뭐가 됩니까? 자꾸 그런 식으로 함정짜지 마시죠.안 그래도 밖에 나가면 죽을 맛입니다."

"에... 치사해."

"어른은 원래 그렇죠. 그리고 어린애는 심심하다고 자꾸 찬 바람 쐬지 말고 얌전히 계십시오. 황제든 황녀든, 즉위식에서 코 찔찔거리는 주군을 모시고 싶지 않으니까."

2.8.3. 3장[편집]


잭터 : "...그러므로 나는 에르제 님을 황녀로 추대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를 적극 지지하는 바요. 이상이오."

에르제의 최고 사제 계승식을 결정하는 자리였다. 어차피 다른 대안이 없었으므로, 그저 귀족원이 형식상의 승인을 하는 자리라고 할 수 있었다. 예정대로라면 아주 조용하고 엄숙한 자리가 될 터였다. 그러나 천계의 최고 사령관인 잭터의 엉뚱하다 못해 기발한 선언은 평화로워야 할 회의실을 다시 한번 수라장에 밀어넣었다.

페트라 노이만 : "황녀? 황녀라니..."

너무 당황한 탓에 제대로 말도 못 꺼내는 귀족들을 눈앞에 두고도 잭터는 태연스러웠다. 아니, 뻔뻔스럽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귀족들은 울화통을 터뜨렸고, 테레사 슐츠는 용감하게도 "제정신입니까?"로 시작하는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얻은 것 하나 없이 잭터가 왜 이글아이라고 불리는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는 잘못을 저지른 신병처럼 얼굴을 붉혔다.

테레사 슐츠 :"...흠흠, 당연히 매우 깊은 생각이 있으셨겠지만... 하여튼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입니다."

잭터 :"전례라면 카르텔의 대규모 공격이 전례에 없던 일이오. 그렇지 않소? 적어도, 바칼의 압세 속에 수많은 역사책이 불살라진 이후에는 처음 기록되는 일이라고 들었소만."

페트라 노이만 :"하지만 황녀라 함은 황제를 고려에 두고 있다는 말인데, 에를록스 장군은 이 나라가 어째서 황제를 버리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십니까?"

"바칼이 스스로 왕 노릇한 것에 질려서라고 알고 있소만."

안제 웨인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 괴물의 독재체제에 긴 시간 고통 받았으며, 따라서 각자의 의견이 존중받는 체제를 유지 및 발전시키자고 합의했습니다. 하지만 황제를 내세우게 되면 지금까지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게다가 어린 에르제 님이 그런 중책을 맡을 수 있을 거라 보십니까?"

잭터 :"어리지만 착하고 총명하시니 적절히 보좌할 수만 있다면 큰 문제는 안 될 거라고 보오. 그리고, 중책을 맡을 수 있겠냐는건 무슨 뜻이오? 그분은 황제가 아니더라도 최고 사제의 자리에 오를 분이오. 이미 이 황국에서 가장 무거운 책임을 지고 계시오. 그대의 말은 듣기에 따라 꽤나 불경스럽게 들리오만."

안제 웨인 :"그, 그런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최고 사제와 황제는 명확히 다르지 않습니까? 우리가 악습이라 판단하여 버린 것을 왜 다시 취해야 한단 말입니까?"

당황하긴 헀으나 이 회의장에 모인 귀족의 수장들은 허투루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몹시 날카롭고 촘촘하게 잭터의 주장을 파고들었다. 실로 교묘하기 이를 데 없이 잭터의 의도를 왜곡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제아무리 준비를 갖춰왔다고는 해도 하루아침에 달변가가 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잭터가 준비한 재료가 모두 떨어지기 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던 유르겐이 조용히 끼어들었다.

네빌로 유르겐 :"에를록스 님의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 바꿀 의향이 없다는 것도. 하지만 이 사안은 저희 귀족원에서도 심도 깊은 논의가 필요합니다. 시간을 좀 주셔야겠습니다."

잭터 :"알겠소."

네빌로 유르겐 :"그럼 오늘 조회는 이것으로 마치도록 하시지요. 귀족원 소집은 제가 따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페트라 노이만 :"알겠습니다."

귀족들이 모두 빠져나간 후 유르겐은 한숨을 쉬며 어깨를 으쓱였다.

네빌로 유르겐 :"후우. 제 예상보다 훨씬 저돌적이시군요. 좀 더 돌려서 말하실 줄 알았습니다."

잭터 :"요령이 부족하다는 건 알고 있소만, 일부러 에둘러 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소."

네빌로 유르겐 :"장군께서는 자신의 발언이 귀족원에 얼마나 큰 충격을 줄지 고려하지 않으십니까?"

잭터 :"실상 이름만 바뀌는 거잖소. 어차피 나라의 일은 최고 사제가 결정하는데, 그 이름이 황제로 바뀐다 한들 달라질 게 뭐가 있겠소?"

네빌로 유르겐"다릅니다. 정치인은 조그만 것에 매달리는 족속입니다. 그런데 장군이 던진 것은 이곳의 판세를 뒤집어 놓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단순히 이름만 바뀌는 게 아닐 테지요. 그런 식으로 절 시험하지 마십시오."

잭터는 조용히 유르겐을 바라보았다. 네빌로 유르겐. 젊은 나이에 귀족원의 실세를 거머쥔 남자. 이름뿐인 최고 지도자를 제외한다면 그가 이 나라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남자는 도대체 무엇을 노리는 것일까. 잭터는 유르겐의 속내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누가 보아도 잭터의 의도는 명확했고 큰 충돌이 일어날 것은 각오한 바였다. 그러나 가장 반대하고 나서야 할 유르겐이 알듯말듯한 입장을 견지하며 가만히 보고만 있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대귀족의 수장이 황제 중심의 권력구조를 원한다고? 정말로?

잭터로서는 이런 정치 싸움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안됐다. 비단 벨드런의 유언이 아니더라도 잭터는 그토록 무시하던 무법지대의 쓴맛을 본 지금이 아니면 이 나라가 바뀔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시작한 싸움. 유르겐은 도대체 어떻게 나올 것인가.

네빌로 유르겐 :"아무튼 그럴 뜻이 있으셨다면 제게 먼저 말씀해 주셨으면 좋았을 것을. 일이 복잡해지겠군요."

잭터 :"나에게 찬성하는 거요?"

네빌로 유르겐 :"장군의 말씀은 벨드런 님의 뜻이었지요?"

잭터 :"...유언이었소만 어찌 아는 거요?"

네빌로 유르겐 :"벨드런 님이 에르제 님의 이름에 '베가'를 붙여주셨을 때부터 눈치를 채고 있었습니다. 베가는 태평성대를 이루었지만 황권 또한 가장 강력했던 황제의 이름이지요. 요즘 와서는 아는 사람이 적습니다만. 하여간 언제가 될지는 모르곘지만 장군이 나서실 거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강압적인 방법으로 일을 추진하실 줄은 몰랐습니다만."

유르겐의 말에는 명백히 탓하는 뉘앙스가 배여있었고 잭터는 솔직하게 잘못을 인정했다.

네빌로 유르겐 :"이 일은 저에게 맡겨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벨드런 님의 뜻은 제가 반드시 이룰 수 있도록 협조하겠습니다."

잭터 :'네빌로 유르겐... 무슨 꿍꿍이인가. 귀족원의 뜻대로 흘러가는 천계를 황제의 강력한 통치 하에 두겠다는 벨드런의 뜻을 알아챌 리가 없을 텐데. 하지만 나는 정치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이 남자를 적으로 두기에는 에르제 님도 너무 어리고, 뒷받침해 줄 세력 또한 없다... 이거야 원. 총알이 날아다니는 전장이 훨씬 마음이 편하겠군.'

잭터 :"유르겐 공이 도와주신다고 하니 더할나위 없이 강력한 우군을 맞은 것 같소. 하지만 이 일은 신중을 기해 진행해 주시오."

네빌로 유르겐 :"물론입니다. 그나저나 요즘은 한가하십니까? 전에 말씀을 드렸던 술자리에 꼭 장군님을 부르고 싶은데... 괜찮으시다면 준비를 해두고 기다리겠으니 편하신 때에 부디 누옥에 왕림해 주십시오."

잭터는 정말로 대귀족의 집에 가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잭터 :"그렇게나 불러주시니 더는 핑계를 댈 수가 없겠군. 마침 좋은 술이 있으니 들고 가도록 하지요."

2.8.4. 4장[편집]


"황녀 전하 만세!"

"황녀 전하 만세! 부디 태평성대를!"

"아..."

"그냥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십시오. 연설은 다른 곳에서 하게 될 겁니다."

"네... 아, 아니 알겠소..."

즉위식이 결정을 항해 달려갈수록 어린 에르제의 얼굴은 보기 딱할 정도로 굳어졌다. 하지만 미리 연습한 대로 의연하게 행동했고, 최고 사제 겸 황녀의 즉위라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음에도 큰 탈 없이 식이 진행되었다.

"꽤나 분위기가 좋군. 하필 벨드런의 뒤를 잇는 게 꼬마 여자애라 다들 말이 많았을 텐데 바람잡이라도 심어 놨나"

"그런 건 없습니다."

"자네는 모르겠지만 유르겐은 심어놨을 거야. 이런 건 분위기가 중요한 거라고, 최고 사제에, 황녀라니. 누가 불안과 불만을 안 갖겠나? 하지만 구체화되기 전에 여론을 조성해 놓으면 사람들은 거기에 휩쓸리게 되지."

"남이 뭐라 하든 결국엔 자기가 판단해서 행동하는 법입니다."

"그래서 저 군중이 모두 자기 머리로 생각해서 즉위를 진심으로 환영하고 있다고? 집어쳐. 그런 발언은 지나친 낙관주의자나 바보가 하는 말이야. 그리고 자네는 낙관주의자가 아니지. 삥다구 같으니라고. 귀족에게 휘둘리다보니 머리도 개머리판처럼 굳어버렸나?"

세븐 샤즈의 메릴 파이오니어는 잭터가 웨스피스에 있을 때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다짜고짜 연구를 도우라며 쳐들어왔던 메릴은 잭터가 최고 사령관이 된 지금도 거침없었다. 긴 악연 탓에 이미 익숙해진 잭터는 불쾌한 기색도 없이 꼬박꼬박 받아쳤다.

"모험을 하겠다며 여기저기서 사고나 치는 당신에게 듣고 싶진 않군요. 그렇게나 참견하고 싶으면 아예 본격적으로 해보면 어떻습니까? 난 사람이 필요합니다."

"미쳤나? 과학자는 군대에 들어가는 순간 끝난 거야. 군인이란 놈들은 성급하고 결과주의적이고 잔소리가 심해. 제대로 된 성과가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행 착오가 있는지 이해하질 못한다고."

"제자도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나엔? 알아서 잘 할 거야. 그만큼 키워줬으면 됐지, 내가 언제까지 뒷바라지를 해야겠어?"

메릴은 곰방대에 쌈지 담배를 비벼 넣었다. 궁녀장이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렸지만 바깥에서 보이지 않는 위치임을 들어 기어이 담배 한 모금을 빨아마셨다.

"아참. 그러고보니 해안수비대 쪽에 헤르만의 제자가 활개를 치고 다닌다던데. 완전히 복수에 미친 놈이더만, 언제까지 군복을 입혀둘겐가? 겉으로는 서글서글해 보이면서 피를 좋아하는 놈이 가장 골치가 아픈 법이야."

"공이 많습니다. 대체할 인재도 없고, 증거도 없습니다. 유심히 지켜보기는 하지요."

"하여간 마음에 안 들어. 헤르만은 왜 싹수를 못 알아봤는지... 쯧쯧쯧. 뭐어 골치 썩일 사람이 내가 아니라는 게 참 다행이야. 훈장이 더덕더덕 붙은 놈하고 얘기하는 건 여기까지 해두지. 시간도 됐고 슬슬 가보겠네."

"즉위식은 지금 한창입니다만."

"흥미 없어. 이렇게 사람 많은 곳은 답답해서 짜증도 나고. 젖냄새 나는 어린애한테 무거운 옷을 입힌 꼴도 보기 싫고. 이번엔 몇 년 정도 돌아다닐 셈이야. 언제 돌아올지는 모르겠지만 나 없는 새 꼴까닥 가지나 말어."

"당신이 먼저겠죠. 할멈."

시큰둥하게 대답하는 잭터에 메릴이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껄껄껄! 이 세상이 나이 순대로 가는 세상이던가? 젊은이들 목숨 덕에 서 있는 주제에 착각은 하지 말자고."

메릴은 담배 연기를 길게 날리며 휘적휘적 사라졌다. 괴짜이긴 하지만 인맥도 넓고 지혜도 깊은 메릴이 에르제 옆에 있으면 일이 수월해질 텐데 아쉬운 일이었다. 수없이 말을 꺼내어봤지만 번번히 거절당했던 잭터는 가는 길에 무좀이나 걸리라는 상큼한 축복을 빌어주었다.

메릴이 가자 자리를 바꾸듯 다가온 것은 네빌로 유르겐이었다.

"생가보다 호응이 좋군요. 이대로라면 아무 문제 없이 황녀님이 자리에 오르실 겁니다."

"공의 노고가 크셨소."

"별말씀을. 장군이 황녀님을 적극 지지한다고 표명한 것만으로도 일이 이렇게까지나 쉬워질 줄은 몰랐습니다. 정말 백성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계시더군요."

"낯간지럽구려. 도대체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으니 그만둬 주시오."

적당히 겸양을 붙여 유르겐의 말을 자른 잭터였지만 속마음은 복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는 자신을 흘끗 돌아보고 있는 에르제에게 손을 흔들어주면서 조용히 자신 속으로 침잠했다.

'벨드런의 말대로 고여버린 귀족원의 물을 갈아버려야 한다.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바람이 불어야하지. 이번 카르텔의 침입도 결국은 오랜 차별과 권력의 집중으로 인한 것. 그걸 불러일으킨 것은 귀족... 답답하게 막고 있는 천장을 뚫어버려야 한다. 황녀님 아래 모두가 평등하고 차별이 없는 세상을 보내야해. 정말로 귀찮을 일을 맡겼군. 벨드런..'

'백성들은 귀족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 최고 사제 중심의 권력 집중은 거스를 수 없을 바에야 흐름을 주도해야 한다. 카르텔도 모두 소탕된 것은 아니고 앞으로도 크고 작은 충돌은 일어날 것이다. 당분간은 군을 내 편으로 하되 모든 책임은 오롯이 황녀가 지게 해야 한다. '최고 사제' 겸 '황녀'인 만큼 책임을 묻기도 쉽겠지. 말도 안 되는 신관 정치의 쓰레기는 황녀와 함께 치워버리고, 강력하고 정통성에 의심이 없는 새로운 지도자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이 나라를 발전시키는 길이다...'

"오늘도 날이 참 좋군요. 새로운 왕이 일어나기에 더없이 좋은 날입니다."

"그렇군. 좋은 날이오."

유르겐과 잭터는 같은 하늘을 올려보며 그런 말을 주고받았다.

2.9. 숨어있는 폭탄, 사이퍼[편집]

CYPHER The hidden bomb
파일:zDzt6Hh.png

사이퍼즈를 경계하라는 선전문으로 인종차별적인 면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이야기. 미셸 모나헌의 입에서 단편적으로 드러난 사이퍼즈에 대한 편견이 실제로 어떠한지 보여주고 있다. 쓰여진 시기는 대략 아라드력 997년 경으로, 모험가들이 천계로 막 진입할 시점으로 추정된다.


이 10년 간 많은 이변이 있었다. 산이 무너지고 지하도시가 솟아올랐으며, 아라드의 중심이었던 헨돈 마이어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셀 수 없는 사상자가 생겼고, 난폭해진 몬스터로 인한 피해는 늘고 있다. 종말이 왔다고 떠드는 점쟁이의 말이 허언으로 들리지 않는 시대다.

이렇게 위험천만한 세상을 사는 우리가 생존의 의지를 꺾지 않는 것은 참으로 자랑스러운 일이다. 후손 앞에서 떳떳하게 열심히 살았노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혹시 사이퍼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가? 그들을 아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들어본 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마법사와 무엇이 다른지 잘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이토록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이유는 대부분의 사이퍼가 지역사회에서 은폐되기 때문이기도하고, 그들이 놀랍도록 영악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기까지 읽은 독자들은 '그렇다면 사이퍼는 도대체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다다를것이다. 이 다음부터는 아주 중요한 내용이니 부디 눈을 크게 뜨고 천천히 읽어주길 바란다.

사이퍼는 간단히 말하여 일종의 마법사다. 그들은 일반인이 사용할 수 없는 힘을 다루며, 그 때문에 실제로 마법사로 오인을 받곤 한다.

그러나 신분과 인격이 증명 받은 소수의 재능 있는 지원자가 고된 과정을 거친 후에야 마법사로 성장하는 것과 달리, 사이퍼의 강력한 힘은 태어나면서부터 발현된다.

이것이 가장 큰 특이점이자 위험한 이유이다. 관리는 커녕 연구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않은 상황에서 돌연변이로 태어나는 사이퍼는, 강력한 힘을 가졌으나 힘을 제어 할 말한 올바른 가치관이 성립되어 있지 않다.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알 수 있겠는가? 생각해보라. 마법사는 긴 훈련을 통하여 자신의 한계를 인지하고 마법의 위험 또한 뼈저리게 깨닫는다.

그리고 오랜 역사 속에서 정해져 온 규율을 익히도록 교육받으며 이를 어기고 선량한 시민에 피해를 끼쳤을 경우 마법길드에 보고되어 처벌을 받도록 되어 있다.

한마디로, 가지기 어려울 뿐더러 나름의 안전장치가 작동하고 있는 힘이다.

그러나 사이퍼는 그렇지 않다. 태어나면서 부터 갖는 능력의 범위와 한계는 본인밖에 모른다. 더구나 사이퍼에 대해 연구가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이 재능을 악용하여 범죄를 저지르더라도 이를 판단할 근거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

이말은 갖가지 이변이 일어나고 있는 작금의 아라드에서 그들에 의한 피해가 일어나도 추궁하기가 쉽지 않다는 뜻이다.

실제로 사이퍼가 자신들의 '익명성'을 악용한 사례는 과거에도 몇 차례 있었다. 나는 과거 기록 중에서 사이퍼의 돌발행동이라 추정되는 사례를 몇 가지 찾아내었으며, 이들에 의한 피해는 내가 찾은 것의 배 이상으로 많을 것이라 추측한다.

하지만 소름끼치는 사실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사이퍼들은 대체로 숨어살기 때문에 그들의 수와 행동이 파악조차 되지 않는다. 더구나 마법으로 감지하기 쉽지 않기 때문에 작정하고 숨은 그들을 찾기란 굉장히 힘들다.

나의 옆집에 사는 이웃이 사이퍼일지도 모른다니, 이 얼마나 소름 끼치는 일인가?

더구나 그들이 하늘의 저주를 받아 가지게된 힘은 소유자의 인성을 파괴한다. 이는 여러사례를 통해 입증된 결론으로, 그들이 일으킨 사고는 여지없이 대규모 희생을 불러들였다.

혹시 주변에 어두운 얼굴을 하고 눈을 희번득거리며 희생양이 될 무고한 시민을 찾아 다니는 사람이 있지는 않은가?

혹시 그의 주변에 불행이 연달아 일어나고, 일반인의 상식으로 납득할 수 없는 무고한 희생이 계속되지는 않은가?

의심하고 의심하라. 정황 증거가 확인된다면 즉시 관청으로 달려가라. 지역사회는 사이퍼가 숨어있지는 않은지 지속적으로 조사하고 경계하라.

이들의 발생 원인을 찾아서 제거할 때까지 우리 모두는 경계를 늦추어서는 안 될 것이다.

2.10. 체인피스의 아이들[편집]

Chlidren of Chainpeace
파일:MokQMSG.png

체인피스 소속의 인물들의 이야기. 운의 정신상태가 거의 한계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2.10.1. 1장[편집]

침대에 앉아 책을 읽던 메이윈은 병실 바깥에서 노크하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반사적으로 침대에서 내려가 문을 열려고 했지만, 다리를 움직일 수 없는 현실을 새삼 깨달았을 뿐이다. 그래서 목소리를 높여 들어오라고 대답했다.

가족이 없는 메이윈에게 있어 찾아올 사람은 부대원밖에 없었지만 이미 다녀간 후였다. 바깥의 사람은 좀 머뭇거린 후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메이윈은 재빨리 경례했다.

딱딱한 표정으로 경례를 받은 사람은 운 라이오닐 대령이었다. 위문품을 침대 옆에 내려놓은 운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메이윈의 안부를 물었다.

운 라이오닐 : …좀 어떠십니까?

메이윈 :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치료를 계속 받으면 걸을 수는 있을 거라고 합니다.

: 그렇습니까.

메이윈 : 바쁘실 텐데 일부러 찾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 아니… 그런 건…


유능한 젊은 대령이라는 평과는 달리 운의 말은 계속 헛돌았다. 메이윈은 그의 속내를 알아차리고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메이윈 : 정말이지. 대령씩이나 돼서 그렇게 버벅대면 어떡해? 계급장 빼고 얘기하자는 말을 어째서 이쪽이 먼저 꺼내야 하냐고?

: 죄송합니다.

메이윈 : 거기 의자 꺼내서 앉아. 설마 다른 사람들 병문안 갔을 때도 그렇게 얼어있었던 건 아니지? 숨쉬기도 불편해했을 텐데.

: 딱히 병문안 때만 겪는 일은 아닙니다.

메이윈 : 이글아이 사령관님하고는 다른 의미로 숨을 못 쉬게 하는구나. 그분은 잘 계셔?


둘은 소소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주로 메이윈이 묻고 운이 대답했다. 이 조용한 청년에게는 더이상 어린 소년의 까불거리던 모습이 남아있지 않았다. 메이윈이 씁쓸하게 웃었다.

메이윈 : 이제 완전 군인이네. 웃지도 않니? 누가 보면 얼굴 근육 없는 줄 알겠어.

: 죄송합니다.

메이윈 : 하아… 군에는 언제까지 있을 거야? 아직도 레베카를 찾고 있어?

: …….

메이윈 : 포기해. 10년도 지났어. 그 사고에서 빠져나갔더라도 혼자 사막에서 어떻게 살아남았겠어? 카르텔에 잡혔거나 벌써…

: 살아있을 겁니다. 그때 무너지는 동굴에서 저를 끌고 나온 게 레베카였습니다.

메이윈 : 근데 지금은? 널 구하고 어디로 갔는데? 살아있다면 왜 우리 앞에 나오지 않는 건데?

메이윈 : 그래, 살아있다 쳐. 나도 걔가 살아있으면 좋겠어. 레베카는 체인피스의 리더였고 내 친구였는걸.

메이윈 : 하지만 운, 넌 군복만 봐도 무서워했잖아. 군인이 싫다고 뻗댄 것도 실은 무서워서였지? 지금도 좋아서 군에 남아있는 건 아니지? 그렇게 널 희생하며 찾을 필요는 없어.

: 무의미할지도 모른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레베카를 아버지와 만나게 해주기로 약속했습니다.


메이윈은 말문이 막혔다. 상처 자국이 아파졌다. 얼마 전에 다친 상처가 아니라 10년도 전에 다친 상처에서 피가 흐르는 것 같았다.

메이윈 : 그래. 부녀상봉을 이루게 해주는 게 네 꿈이라면 마음대로 해.

메이윈 : 하지만 이제 우리도 그만 보자. 레베카가 돌아오기 전에는… 아니, 돌아와도 우리가 만나는 게 썩 좋을 거 같지 않아. 넌 어떨지 몰라도, 내가.

: …….


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메이윈은 그의 가면 같은 얼굴에 짜증이 났다. 다리만 멀쩡했다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의 뺨을 때렸을 것이다. 마구 소리라도 지르면 편해질까? 그래봤자 악몽 같은 현실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10여년 전. 카르텔이 싫다는 철없는 마음에 무모하게 도전했고, 실패했다. 실패는 모두 아픈 법이라지만 유난히도 뼈아픈 상처였다. 주저앉아 하염없이 울고 싶었으나 나라는 이미 전쟁 중이었다.

황녀가 납치된 나라는 상처 입은 아이들을 다시 전쟁터로 내몰았다. 군인이 부족한 상황에서 소년병으로 싸운 아이들은 중요한 전력으로 취급받았다. 하루 아침에 지도에서 마을이 사라지는 현실 속에서 징징거릴 수는 없었다.

긴 싸움 끝에 마침내 전쟁은 끝났다. 하지만 여전히 가족이나 친구는 죽은 채다. 바뀐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바꾸고 싶어도, 바뀌고 싶어도,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눈을 돌리고 있던 과거의 상처는 이제와서 맹렬히 고통을 호소해 온다.

운에게 화가 난 것은, 그러니까 엉뚱한 화풀이나 죄책감이 마구 뒤섞인 범벅 같은 것이다. 그날의 일 따위 모두 극복했다며 웃고 싶은데, 완전히 변해버린 막내의 모습이 '넌 실패했다.'고 외치고 있다.

메이윈 : …돌아가.

메이윈 : 가. 경례를 붙여줘야 갈 거야?

: 가겠습니다. 치료 잘 받으시고…

: ...죄송합니다.


운이 병실에서 나갔다. 메이윈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이불을 팡팡 치고는 책을 다시 들었다. 곧 있으면 주인공의 비극이 절정에 달하는 부분이었다. 내일부터는 퇴역 준비를 해야해서 바쁠 테니 운이 왔던 일은 싹 잊고 쉬어둘 생각이었다.

메이윈 : …….


메이윈은 책을 내려놓았다. 다친 후에야 짬이 나서 읽기 시작한 비극 소설은 시시하기 짝이 없었다.

현실보다 슬픈 것은 없으니까.

2.10.2. 2장[편집]


레베카는 어린 딸이었다. 나이가 많은 아버지는 훌륭한 사람이었지만 아이 대하는 것을 어려워했다. 아마 딸이 성인이 되면 좋은 조언자가 되어주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레베카는 아버지의 사정을 이해할 만한 나이가 아니었다. 항상 집을 비우는 아버지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버지는 능력을 인정받아 황도로 부임을 받았다. 함께 가자고 했지만 사막에서 나고 자란 어머니는 끝끝내 거부했다. 카르텔의 위협도 뿌리 깊은 차별 앞에서는 작은 고민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아버지는 홀로 가버렸고, 어머니는 아버지를 죽은 사람 취급했다. 고향 사람들은 아버지를 비웃었다. 졸지에 아버지가 없어졌지만 레베카는 기 죽는 법이 없었다. 골목대장 자리를 두고 나이가 많은 제이와 싸우면서 물러선 적이 없었다. 자기보다 어린 애가 바득바득 덤벼드는 꼴에 화가 난 제이에게 많이도 쥐어박혔지만,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기어코 항복 소리를 받아내었다. 멀리 간 아버지는 계속 연락을 취해왔다. 어려운 책도 많이 보냈다. 어머니는 그걸 시장에 내다팔아 먹을거리나 무기를 사오곤 했다. 무기는 아무리 많아도 부족하다는 것이 어머니의 지론이었다. 레베카는 늘 어머니 편이었지만 몰래 아버지의 책을 빼돌려 숨어서 읽기도 했다. 어머니는 모른 척해주었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의 일이다.

낌새가 수상하던 카르텔이 바다 건너 황도를 습격했다. 마을사람들은 카르텔을 미워했지만 그렇다고 황도 편은 아니었다. 어른 몇몇은 카르텔이 자랑스러운 혁명군이라며 치켜세우기도 했다. 그만큼 골이 깊었다. 마을에는 레베카 말고도 군인의 자식이 한명 더 있었다. 이라는 꼬마였다. 집에서는 아버지에게 얻어맞고 밖에서는 동네 아이들에게 놀림받는 운은 언제나 멍투성이였다. 레베카는 놀리는 아이들을 모조리 혼내주었고, 운은 작은 강아지처럼 레베카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나이 차이가 나는 오누이 같았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카르텔의 횡포는 더 심해졌다. 레베카의 어머니는 마을 자경대를 이끌었지만 카르텔의 습격에 맞서다 크게 다쳤다. 울먹이는 딸의 눈동자 속에서 남편을 보며 숨을 거둔 어머니의 마지막은 무척 애처로웠다. 이렇게 레베카의 소년기는 끝났다. 연락이 귾긴 지 오래된 아버지를 찾으러 갈 수도, 갈 마을도 없었다. 대신 어머니가 숨겨둔 무기를 꺼내고 앞으로의 계획을 짰다.

체인피스라는 이름을 지은 것도 이때였다. 작은 평화(peace)가 엮이면 큰 평화가 오지 않겠냐는 말에 제이가 유치하다며 웃었다. "조각(piece)이 나지 않게 열심히 해보자고." 초기 멤버는 레베카와 제이, 운 세 명이었다. 키가 어른만큼 큰 제이가 리더가 되었다. 레베카가 운과 함께 숨어들어 정보를 캐내면 제이가 작전을 짰다. 처음에는 장난 수준이었지만 무법지대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군의 도움을 받으면서 나름대로 활약을 펼쳤다. 군은 체인피스를 마음에 들어했다. 이름이 알려지자 갈 곳이 없는 또래들이 몰려들었다. 메이윈도 이때 체인피스에 가입하였다. 카르텔에 질린 어른들이 무기와 먹을 것을 보태주었다. 웨스피스군 역시 지원을 늘려주었다. 인원이 많아지자 군이 맡기는 일도 점점 더 다양하고 위험해졌다. 다치는 일은 잦아졌지만 그만큼 성과가 쌓였다. 이대로라면 카르텔을 물리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린애 착각이었다. 현실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다. 전기를 먹는 괴물이 나타났고, 카르텔은 다시 바다를 건넜다. 황도군의 전선이 점점 밀려난다는 소식에 잠을 이룰 수 가 없었다. 이즈음 제이가 이상했다. 가까이 지내던 몇 명끼리 숙덕거리며 돌아다니더니 급기야는 군기를 세운다며 친구를 때리기까지 했다. 외부 활동이 잦았던 레베카는 이런 사정을 뒤늦게 알았다. 둘은 크게 싸웠고, 제이는 체인피스를 탈퇴했다. 리더는 레베카가 맡게 되었다. 아이들은 온건하고 진지한 레베카를 무척 좋아했다. 제이가 나간 후로 카르텔의 추격이 더욱 교묘하고 정확해졌다. 몇 번이나 사로잡힐 뻔했다. 친구를 의심하고 싶지 않았지만 바보는 아니엇다. 추궁 끝에 내통자를 색출해 내었다. 목숨의 위협을 받은 아이들은 배신자는 죽여야 한다고 했고, 레베카는 고민 끝에 본거지를 먼 곳으로 옮겼다. 이 와중에 로이라는 이름의 이상한 아저씨를 만났다.[3] 로이는 이상한 남자였지만 잔해를 가지고 뭔가를 뚝딱뚝딱 잘도 만들어내었다. 몇 번의 위기를 그의 발명품 덕으로 넘겼다.

너댓 달을 머물며 도와주던 로이가 떠난지 얼마 되지 않아 황도에서 황녀가 납치되었다는 급보가 날아왔다. 함께 카르텔에 항거하던 많은 어른들이 총을 버리고 항복했다. 투지는 급격히 꺾이고, 마음은 절망으로 가득 찼다.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라는 말이 너무나 식상한 나날이었다. 하지만 그만둘 수는 없었다. 황녀를 납치하고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황도를 아주 끝장내려는 카르텔은 노인과 아이를 가리지 않고 잡아들여 병사로 썼다. 살아남으려면 싸우는 수밖에 없었다. 긴장을 풀고 쉴 틈이 없었다. 아이들은 지쳐갔고, 사소한 일로 크게 다투는 일이 많아졌다. 이제는 싸우는 게 문제가 아니라 살아남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레베카는 친구들 앞에서는 여전히 당찼다.

그러나 남몰래 아버지를 떠올리는 일이 많아졌다. 보고 싶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살아서 만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아버지와 함께 황도로 가길 거부했던 어머니를 원망한 적은 없었다. '부모님은 각자의 길을 걸어간 것뿐이야. 나도 마지막까지 내 길을 걸어가면 돼.' 그게 레베카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레베카의 걱정은 오로지 친구들의 안위에 쏠려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마음이 쓰이는 것은 점점 표정을 잃어가는 운이었다. 진짜 동생처럼 따르고 도와주던 운이 구석에 오도카니 앉아 몇 시간이고 멍하니 있는 모습은 보기 힘들었다. 너무 이른 나이에 전쟁터로 나온 운은 아직도 어린애였다. 외딴 마을에 보내주려고 해도 자기 살기도 힘든 세상에 아이를 받아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해줄 수 있는 게 없는게 미안하여 운의 생일에 어머니의 유품인 목걸이를 주었다. 위로할 마음도 있었지만 어떤 예감이 들었던 탓이기도 했다. 끈적거리고 피할 수 없는 그런 기분 나쁜 예감은 열병처럼 레베카를 괴롭히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불길한 예감은 잘도 들어맞는다. 화염과 비명이 가득 찬 동굴을 빠져나오다 오랜만에 제이와 마주친 레베카는 입매를 끌어올리며 픽하고 웃었다. 아버지와 꼭 닮은 웃음이었지만 당연하게도 자각하지 못했다.

이날을 마지막으로 체인피스의 아이들은 레베카를 만날 수 없었다.

2.10.3. 3장[편집]


제이는 천애 고아였다. 가족은 없지만 노래를 잘하고 사람 앞에 나서는 걸 좋아해, 어렴풋이 가수가 될 거라 생각했다. 아이들 사이에서 가수보다는 총잡이가 더 멋진 꿈이었지만 총성이 귀를 따갑게 했기에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유명한 가수가 옆 마을에 왔다는 소식에 구경을 갔던 제이는 하마터면 카르텔에 잡혀갈 뻔했다. 또래보다 키가 컷던 탓에 다 큰 애로 보였던 것이다. 생존의 문제는 더욱 뼈아프게 다가왔고, 결국은 악보를 불태웠다. 12살 때의 일이다. 이 무렵 제이는 곧잘 골목대장 노릇을 하곤 했다. 제이보다 더 큰 아이들은 시시한 놀이에서 벗어나 사격을 익히기 바빴기에, 대장 자리는 언제나 따 놓은 당상이었다. 하지만 레베카라는 여자애가 덤벼들기 시작하고서는 상황이 달라졌다. 악으로 똘똘 뭉친 여자애 하나 때문에 골목 싸움의 양상이 바뀌어버렸다. 단순한 힘겨루기에서 벗어나 패를 나누어 제법 그럴싸하게 전쟁을 치르며 치열하게 다투었다. 마을의 어른들은 혀를 끌끌 찼으나 아주 진지하고 숭고한 싸움이었다. 마지막에는 꼭 진흙탕 싸움으로 흘러가는 게 문제였지만.

이렇게 마을의 사고뭉치로 명성을 떨치던 제이였지만 나름대로 기준은 있었다. '낭만에 부합할 것.' 유명한 총잡이 모래바람의 베릭트가 세운 규칙이었다. 좋은 노래 소재라고 여기던 것을 자신의 행동 지침으로 삼은 것이다. 낭만적이라고 생각했기에 골목대장에 집착했고, 낭만적이라고 생각했기에 6살짜리를 발로 차는 술주정꾼에게 덤벼들었고, 낭만적이라고 생각했기에 체인피스를 만들어 카르텔에 대항하겠다는 레베카에게 찬성했다.

그러나 '낭만'이 낡은 유물이 되어버렸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었다. 낭만은 결국 본심을 숨기기 위한 핑계에 불과했다. 골목대장에 집착한 것은 오기였지만 레베카의 계획에 동참한 것은 살길이기 때문이었다. 카르텔은 일할 나이가 된 아이들을 닥치는 대로 끌고갔다. 아직은 마을 사람들이 카르텔을 쫒아내고 있지만 길게 가지 못하리라는 것은 뻔했다. 체인피스를 창설하여 마을을 나온 세 명은 갈 곳이 없었다. 말이 좋아 총잡이지, 보호자 없는 가출 소년이었다. 함부로 의용군에 들어갔다가는 총알받이로 써먹힐 게 뻔했고 언제까지나 사막을 배회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제이는 황도까지 밀려났다가 겨우 돌아온 웨스피스군에 접촉했다. 그들은 이곳에서 외톨이였다. 무법지대 사람들은 카르텔을 두려워 했지만 군 역시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제이는 '무해한' 여자애와 꼬마에게 정보를 모아오도록 시킨 후 잘 골라내어 군에 팔았다. 지역 정보원이 절실했던 군은 마뜩잖아하면서도 제이의 거래에 응했다. 어른들과의 협상은 어려웠지만 제이는 그래도 나름 잘 해냈다. 보수로 받은 돈을 모아 이 사막의 섬에서 탈출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웨스피스군은 기껏 들어온 정보원이 도망가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레베카에게도 말하지 못한 고민이 잔뜩 쌓여갔다. 군의 간부가 펼치는 달콤한 회유가 무서운 협박으로 바뀌는 데에는 그리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레바카의 아버지를 이용할까 싶기도 했지만 자칫했다가 레베카만 뺏기게 될지도 몰랐다. 차라리 그 정도면 다행이었다. 카르텔의 물자 부족을 잘 알고 있었던 천계 지도부는 버린 땅인 무법지대의 평화 유지에 큰 돈을 들이고 싶지 않아했다. 모자란 군비 지원을 늘리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웨스피스군이 레베카를 알아본다면? 순순히 레베카를 아버지에게로 보내줄 리 없었다. 보나마나 더러운 방식으로 레베카를 희생하여 지도부를 자극할 것이 뻔했다.

갈피를 잡지 못하는 사이에 체인피스의 이름은 유명해졌다. 필요 이상으로 유명해졌다. 웨스피스군은 카르텔에 대항하는 아이들을 하나의 상징으로 삼을 생각이었다. 웨스피스군은 선전용 모델을 요구했다. 어떻게든 레베카의 이름과 얼굴을 숨겨야 했기에 운을 대신 보여주었다. 제 몸만한 총을 메고 다니는 어린아이의 사진은 자극적인 제목과 함께 기사로 뽑혀나갔다. 바다 건너 사람들은 제 편할 대로 굴었지만 아이에게는 약했다. 지원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신이 난 웨스피스군은 체인피스를 이곳저곳에 잘도 써먹었다. 천성인지 자란 환경이 좋아서인지 레베카는 이런 사정에 영 둔감했다. 모범생 타입이었다. 작전을 성공시키고 사람들을 구하면 그게 다인 줄 알았다. 제이는 레베카의 전술이나 총 솜씨는 칭찬했지만 너무 우직하다며 한탄했다. 웨스피스군의 선전 때문에 체인피스의 멤버는 늘어났다. 셋만으로도 버거웠는데, 어른들은 어서 덩치를 키워서 멋진 영웅담을 펼쳐보이라고 강요했다. 그래도 그만큼 지원이 늘었기에 틈만 잘 노리면 탈출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며 수없이 되뇌었다.

하지만 세상의 일이라는 것은 너무 가혹하고, 실로 어처구니 없기까지 하다. 천계의 괴물이 나타나 전기를 빨아먹고 있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냐며 웃어 넘겼지만 아무래도 진짜인 것 같았다. 조금씩 들어오던 지원은 끊기고, 웨스피스군은 꽁꽁 틀어박혔다. 분위기는 더욱 흉흉해졌다. 카르텔은 혼란을 놓치지 않았다. 산골 마을의 우물 물까지 쪽쪽 빨아먹은 그들은 다시 황도를 습격했다. 정규군의 승전보는 들려오지 않았다. 날아오는 소식은 족족 패했다는 이야기뿐이었고, 나중에 이마저도 듣지 못했다. 제이는 자신을 쳐다보는 친구들의 눈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살기위해서 제이는 다시 움직였다. 뜻이 맞는 몇 명과 함께 도둑질을 하며 생활을 이어나갔다. 그러다가 붙잡혔다. 자신을 붙잡은 카르텔 병사는 다름아닌 고향 마을의 어른이었다. 간신히 도망쳤지만 한동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러던 중에 레베카에게 꼬투리를 잡혀 크게 다투었다. 골목대장 싸움을 하던 때처럼 끈질기게 파고드는 레베카가 너무 밉고, 화가 나고, 미안했다. 하지만 사과하지는 않았다. 자존심도 자존심이지만 어쩔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기던 것도 자신을 보자마자 겁을 먹고 어쩔 줄 몰라하는 운을 보고 무너져버렸다. 고향에서는, 아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형아 형아'거리며 잘 따르던 동생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레베카와 운만은 슬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살아 남으려고, 지키려고 싸웠다. 카르텔이 싫었고 비겁한 어른이 미웠다. 하지만 어느새 자신이 그런 어른이 되어 었었다. 참을 수가 없었다. 참담하고 낯뜨거워서 더 머무를 수 없었다. 그래서 체인피스를 떠났다. 도둑질에 가담했던 몇몇이 말없이 따라왔다. 친구들을 두고 떠나던 밤, 제이는 새카만 하늘을 보며 부질없는 가정을 해보았다. 만약 체인피스를 만들자는 레베카를 말렸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가수의 꿈을 접지 않았더라면? 무법지대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태어났더라면? 몰려드는 상념은 신기루보다 허망했고 사정없이 불어대는 모래바람에 코끝이 찡해졌다.

'이제 레베카을 만날 일은 없겠지'

생각해보면 그 둘이 자신의 가족이었다. 부디 평화로운 날까지 건강하게 잘 살아주기를 바라며 제이는 걸음을 옮겼다.

2.10.4. 4장[편집]


의 아버지는 사냥꾼이었다. 몸을 숨기고 사냥감에게 접근하여 정확하게 머리를 노리는 법을 배운 것이 언제부터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철들기 전부터 총을 들었던 것과, 아버지의 실력이 좋았던 것은 기억난다. 좀도둑도 쓰지 않는 조잡한 총알은 술보다 쌌다. 운은 작은 동물을 잡으며 아버지의 술값을 벌었다. 군인인 어머니는 집에 잘 돌아오지 않았다. 어머니가 언제부터 군인이었는지 모른다. 아마 아버지가 왼다리를 잃은 후부터였던 것 같다. 술에 취한 아버지는 곧잘 운을 때렸고, 그런 날은 집에서 쫓겨나 별을 보며 잤다. 여린 피부는 늘 푸르죽죽 멍이 들어있었고 짐승의 발톱에 긁힌 상처 때문에 따가웠다. 마을 어른들은 매정하지는 않았지만 힘이 센 아버지를 말릴 정도로 바지런하지도 않았다.

동네의 큰 형이었던 제이가 아버지에게 맞는 운을 구해주었고, 대찬 성정이었던 레베카의 어머니가 집으로 운을 데려와 씻기고 밥을 먹여 주었다. 레베카는 운을 귀찮아하면서도 제법 챙겨주며 누나 노릇을 했다. 그 나이엔 언제나 동생이 갖고 싶은 법이라, 어머니를 뻿기는 것도 참아주었다. 운은 싹싹하고 애교도 잘 부려 귀여움을 받았다. 둘은 금세 친해졌다. 하지만 꼬마 운의 모범적이고 밝은 성격은 난폭한 아버지와 무관심한 어머니 아래서 자란 탓이었다. 버려질 것을 두려워하여 무리하는 운을 보며 레베카의 어머니는 무척 가슴 아파했다.

하지만 이런 시간도 레베카의 어머니가 죽으면서 끝나버렸다. 레베카와 제이는 카르텔에 맞서겠다고 했고, 운은 바득바득 우겨 끼어들어갔다. 어른과 싸운다는게 감히 상상도 되지 않았지만 두 명과 멀어진다는게 너무 무서웠다. 마을을 떠나던 날, 레베카는 같은 성(姓)을 쓰자는 제안을 했다. 제이는 비웃으면서도 갖가지 성씨를 늘어놓으며 물러섬이 없었다. 한참을 옥신각신하던 둘은 라이오닐이라고 하자고 결정했다. 그래서 운은 '운 라이오닐'이 되었다. 둘의 진짜 동생이 된 것 같아 그것만이 기뻤다. 나중에야 이 십 대 소녀가 정말로 원한 것은 아버지에게 들키지 않을 가명이었다고 깨달았다.

체인피스는, 비록 그 의기는 좋았지만 금방 무너질 것이 뻔했다. 하지만 여론 조성에 유리하겠다고 판단한 웨스피스군은 그들이 죽지 않을 정도로 지원하며 활약할 기회를 주었다. 운은 뛰어난 저격수였다. 모든 게 무섭고 두려웠지만 가까스로 해나갔다. 훨씬 연상인 두 명의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 바다 건너에서 '카르텔과 싸우는 어린 영웅들'의 뉴스는 동정과 분노를 일으키는 재밋거리였다. '꼬맹이 라이오닐'이라는 별명이 붙은 것은 이때였다. 상처가 클수록 반응은 격렬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불쌍하면 도와주러 오면 될 텐데,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는 바다 건너 사람들은 멀리서 지켜보며 우는 소리만 낼 뿐이었다. 제이는 웨스피스군과 접촉할 때마다 운을 데리고 다녔다. 종군기자라도 만나는 날이면 꼭 양 무릎이 깨지곤 했기에 운은 군인이 무서웠다. 그래도 지기 싫어서 큰 소리를 치고 다녔다. 어쩌면 군인인 어머니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리저리 찾아보기도 했지만 어머니는 끝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운은 어머니의 생사를 모른다.

체인피스에서 운은 늘 막내였다. 어릴수록 나이는 서열을 정하는 중요한 기준이었기에 제이와 레베카는 운에게 '누나'나 '형'이란 호칭을 빼고 부르게 했고, 작전 회의에도 꼭 데리고 다녔다. 반발하는 아이들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항상 최상위권인 사격 실력 덕분에 운을 무시하는 아이들은 줄어들었다. 체인피스를 이끌던 제이가 탈퇴한 후 레베카가 리더가 되었다. 안톤이라는 괴물의 등장과 황녀 납치라는 초유의 사태가 겹쳐지가 아이들을 압박하는 현실은 더 가혹해졌다. 좋은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많이 힘들었다. 카르텔의 횡포는 점점 심해졌고, 도망친 친구들은 적이 되어 나타나거나 시체로 발견 되었다. 왜 살아야하는지 의미를 찾지 못했다.

그래도 살아남은 것은 리더인 레베카 덕분이었다. 힘든 내색을 보이지 않고 궂은 일을 도맡아하고, 밤새워 작전을 짜 먹을 것을 구하거나 때로는 카르텔의 공격에 맞선 레베카는 억지로 꾸미지 않아도 충분히 영웅적이었다. 운은 그날의 일만 없었다면, 혹은 그날 자신이 레베카를 구했더라면 전쟁이 좀 더 쉽게 끝났을 거라고 수만 번도 생각했다. 하지만 구조된 것은 레베카가 아니라 자신이고, 레베카는 지금까지도 실종 상태다. 기억을 헤집어 레베카의 단서를 찾고 싶어도 그 중요한 날에 남은 기억은 별로 없다. 단편적인 조각뿐이다.

붉은 하늘. 외침과 폭발. 죽어가는 친구들의 얼굴. 그리고 피투성이가 된 자신을 업는 레베카. 그것밖에 남아있지 않다. 누가 배신을 했고 누가 폭탄을 던졌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사실, 이제와서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분노도 슬픔도 기쁨도 그날 모두 잃어버렸다. 운은 그날을 자신의 기일이라 여기고 있다. 이미 죽었는데 몸뚱이가 살아있는 것이 불합리하게 느껴져 스스로에게 총구를 겨눈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아직 방아쇠를 당기지 않은 것은 오직 레베카의 한마디 때문이다. 자기 어머니의 유품을 생일 선물로 주던 날의 일이었다. 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레베카는 우는 듯 웃으며 말했다.

"좀 늦은 말이지만 아빠가 보고싶어."​

레베카의 작은 소원을 이루어주고 싶었다. 체인피스에서의 일은 누가 땅속에 파묻기라도 했는지 제대로 떠오르지 않는데, 레베카의 목소리는 생생히 남아있다. 살아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죽었다는 확증도 없다. 그렇기에 운은 가느다란 희망 한 가닥을 품은 채 쉼없이 싸웠다. 기억 속에서 언제까지고 십 대 소녀인 레베카가 평화로운 하늘 아래 자신의 아버지와 만나 웃을 수 있게. 그 눈부신 광경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운은 계속 싸우고 있다.

2.10.5. 5장[편집]


안톤을 쓰러뜨리고 겐트에 돌아온 후에도 군인들은 긴장을 풀지 못했다. 전쟁은 끝났지만 치안이 회복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원래 천계 군인의 주 임무는 외부의 적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치안 유지다. 지리적으로 고립되어 있기도 하거니와 인구가 적어 세세한 조직을 만들어 관리할 필요가 없기에 지금까지 큰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평화로워야 할 겐트에서는 잦은 충돌이 일어나고 있었다. 아라드에서 올라온 모험가가 일으키는 작은 다툼에서 전쟁의 후유증이라고 할 수 있는 도둑떼 발생까지, 모두 지친 군인들이 담당해야 할 문제였다.

그랬기에 잭터는 큰맘 먹고 내준 휴가를 이틀도 못쓰고 돌아온 부관을 보고 난감해졌다. 윽박질러서라도 쉬고 오라고 해야겠지만, 체계를 새로 만들려는 겐트 사령부에서 그가 빠진 이틀이 워낙 아수라장이었던 탓이다. 사령관의 고민도 모르고 복귀 절차를 마친 은 언제나처럼 신속하고 정확하게 업무를 처리하여 감탄을 샀다. 상관이 쉼으로써 사령부 내에서 유일하게 행복했던 그의 부하 몇몇만 작게 투덜거렸을 뿐이다. 식사와 시간을 빼고 사흘 내내 일을 처리한 끝에 간신히 일단락을 마친 운은 비틀거리며 집무실 옆 자료실로 가, 긴 의자 위에 쪼그려 누웠다. 부하들이 출근하기 전에 잠깐 쉬어둘 생각이었다. 오후에는 장성들을 모시고 병원에 위문을 가야 했다. 귀족들에게 모자란 병원을 더 지어달라고 요구하기 위해서다. 목적이 무엇이든, 엉망인 치안을 고려하면 호위하는 입장에서는 가장 긴장되는 일정이 아닐 수 없다.

무리한 탓인지 채 낫지 않은 상처에서 열이 올랐다. 그건 상관없지만 10여 년 전부터 때때로 들리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는 것이 신경 쓰였다. 슬그머니 말을 걸어오는 목소리는 한둘이 아니었다. 지키지 못한 부하에서 쓰러뜨린 적까지 다양했다. 긴 전쟁을 겪은 이 나라의 많은 군인들은 운과 비슷한 증상을 겪곤 했다. 부하들의 호소를 들어주면서도 운은 자신의 상태를 토로한 적이 없다. 타인에게 정상으로 보이는 것이 스스로에게 부과한 임무 중에서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사령관의 위신에 누를 입히지 않기 위해서기도 했고, 유일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군에 머물러야 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운은 많은 면에서 '정상'을 연기하기 위해 노력했다. 뒤에 있는 것이 아군이라면 자꾸 경계하지 않으려 이를 악물었고, 체인피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숨이 막히는 것을 참았다. 제정신으로 할 짓은 아니었으나 어떻게든 견뎌냈다.

처음에는 스스로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체인피스의 생존자들이 하나 둘 도태되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억지로라도 요령을 깨우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해도 나아지지 않는 한 가지를 뺀다면 꽤 성공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우왓?!"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인기척에 일어난 운은 아직 악몽과 현실을 구분할 수 없었다. 흐릿한 시야 속에 서있는 인영은 덩치 큰 카르텔 병사로 보이기도 했고, 타르탄 같은 괴물로 보이기도 했다.

"저... 운 대령님? 루카스 소위입니다. 깨워서 죄송합니다. 편지가 쌓여있기래 드리려고... 주무시길래 나가려고 했습니다만..."

"...신입인가."

반사적으로 쥔 총에서 손을 떼며 운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자기 전에 빼놓은 탄창이 의자 아래로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미안하군. 조금 뒤에 나갈 테니 먼저 가있게. 그리고 앞으로는 이름이 아니라 성으로 불러주겠나? 만에 하나 섞여 들리면 곤란해서...... 어쨌든, 부탁하지."

"네? 네, 알겠습니다. 그럼 편지는 여기 두고 가겠습니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부하가 허둥지둥 문을 닫고 나가서야 운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식은땀 때문에 기분이 나빴다. 시계를 보니 세 시간 정도 지나있었다. 쉰 것 같지 않지만 그래도 많이 나아있었다. 메이윈을 보러 병원에 다녀온 이후로 계속 긴장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체인피스의 생존자가 다친 것이다. 그럴 만도 했다며, 운은 자신의 상태를 남의 일처럼 진단했다. 창 밖에서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며 루카스 소위가 두고 간 편지를 뜯어보던 운은 메이윈에게서 온 편지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연락하지 말자고 말한 것은 그쪽이었을 텐데. 급하게 썼는지 글씨가 날림인데다 내용도 짧았다. 메이윈은 와줘서 고마웠고 화내서 미안하다고 했다. 나중에 놀러 오라며 주소까지 적어 놓았다.

'이럴 땐 고마워해야 하는 건가? 아니면 미안해해야 하는 건가?'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다음 편지를 뜯었다. 치안 유지 등을 이유로 부족한 병력을 채우기 위해 13세에서 16세의 소년병 자원 입대 모집안을 통과시켜달라는 내용이었다. 웨스피스 사령부에서 보낸 편지였다. 사령관에게 전해야 할 내용이었다. 몇번이고 같은 내용을 읽던 운은 천천히 편지를 구겼다. 잠잠해졌던 목소리가 다시 귓가에 쟁쟁히 울렸다.

살려줘! 운!

운..., 운! 나 다리가 없어졌어... 아파...!

운, 제발... 도와줘! 너무 아파... 죽기 싫어!


운 라이오닐은 한참이나 머리를 감싼 채 자료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2.11. 즐거운 마법교실[편집]

A happy magic les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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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리가 샤란에게 마법을 배우다가 일어나는 샤란의 작업실을 망쳐놓는 에피소드.

키리 : 야호~ 좋은 아침! 오랜만이네요, 샤란 씨!

샤란 : 아, 네… 좋은 아침이로군요…

키리 : 많이 바빴나봐요. 요새 통 안보이던데.

샤란 : 학교가 좀 바빠서 말이죠. 음… 인사는 이 정도면 됐죠? 저는 그럼 보고서 준비 때문에…

키리 : 보고서? 요즘도 많이 바쁜가보죠? 뭐 간단한 일 없어요? 도와드릴게요!
일이 빨리 끝나면 오늘은 마법 기초에 대해서 가르쳐 주시면 좋겠어요. 전에 알려주신다고 했죠?

샤란 : 그건 하도 밀어붙이셔서 어쩔 수 없이… 흠… 알겠습니다.
흑요정이 아닌 자에게 마법을 가르치는 것은 제한되어 있지만 그렇게나 열성을 보이시니 마법학교 원장으로서 무시하고 있을 수는 없군요.

키리 : 정말요? 와아! 이제 저도 불기둥을 슈욱하고 불러낼 수 있나요?

샤란 : 목표가 높으시군요. 의욕이 있는 건 좋지요. 그럼 거기에 앉으세요. 네. 이 약을 마시세요. 그리고 천천히 심호흡을 하고…

키리 : ……

샤란 : ……

키리 : 음… 좀더 알기 쉬우면 좋을 텐데…

샤란 : 집중하세요. 누구나 마나를 다룰 수 있어요. 재능의 차이는 있겠지만 자신 내부의 힘을 다루어 본 사람이라면 쉬울 거예요.

키리 : 저는 총을 써서 내부의 힘 같은 건 하나도 모르는데요…

샤란 : 천계에서 유명한 전사였다면서요? 검에 의존하는 검사도 몸 속에 흐르는 기를 운용하는 것은 기본일 텐데요.

키리 : 아하하하… 천계는 몸 속의 힘보다는 몸 밖의 힘에 치중하거든요. 이런 표현이 맞을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겠어요. 하지만 저는 몸 속에 내재된 힘 같은 건 잘 모르니까 어떻게 하면 그걸 잡아낼 수 있는지 알려주세요.

샤란 : 흑요정은 태어날 때부터 마법과 친숙해서 타종족에게 말로 설명하기는 좀 어렵군요.
그럼 눈을 감고 뭔가 강렬한 기억을 떠올려보겠어요? 그 기억에서 당신은 무엇을 느끼죠?

키리 : 강렬한 기억이라… 역시 분노이려나…
카르텔 녀석들… 난장판을 부리고 닥치는 대로 파괴하는 무법자들… 그 녀석들보다 더 용서 못하는 건 배신자들이야!

샤란 : 진정해요! 부의 감정에 너무 빠지면 마나가 폭주해서 제어하기 어려워져요!

키리 : 하지만 그 녀석들 생각만 해도 화가 나는 걸요. 천계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반드시 죗값을 치르게 해줄 텐데!

샤란 : 흐음. 당신의 이야기를 듣는 건 처음이로군요. 천계에서 왔다는 이야기만 들었지, 뭔가 복잡한 일이 있었을 줄이야…
지금 당장 천계로 돌아가는 방법을 찾는 건 어렵겠지만 좋은 소식이 있어요. 키리 씨, 당신에게는 마법의 재능이 있어요.

키리 : 와… 정말요?

샤란 : 네. 몸 속의 힘이란 개념에 낯선 당신이 순간적으로 보여준 마나의 흐름은 나쁘지 않았어요. 너무 격앙되어서 마법으로 맺히기 전에 꺼지고 말았지만.

키리 : 와아, 그럼 저도 이제 마법사가 돼서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을까요?

샤란 : 처음에도 말씀드렸지만 재능이 필요해요. 그리고 노력도. 이론은 알려드릴 테니 천천히 해보도록 해요.
다행이네요. 솔직히 당신에게 가르칠까 말까 고민이 많았는데 가능성이 있는 학생을 발견해서 기뻐요. 술이라도 마시며 축하를 할까요?

키리 : 그거 좋네요! 천계에서도 기쁜 일이 생기면 술을 마시면서 축포를 쏘거든요. 어딜 가나 똑같네요.

샤란 : 하긴 예전엔 소통이 있었으니까 닮은 풀습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겠군요. 그런데 축포라는 건 뭐죠?

키리 : 궁금해요? 한 손에는 술, 한 손에는 총을 들고… 이렇게 하늘을 향해 쏘는 거죠!

(신이 난 키리가 천계의 술집에서 하던 버릇대로 총을 쏘아댔다. 시약이 들어있던 병은 깨지고, 자고 있던 고양이가 화들짝 놀라 도망가다가 끓고 있는 솥단지를 엎어버렸다.)
샤란의 연구실은 금새 난장판이 되었고, 위험한 약품이 흘러 불까지 나기 시작했다.

키리 : ……꺄아아…

샤란 : ……아주 머엇진 축포, 고맙군요.
그럼 키리 씨, 이제 제 제자가 되셨으니 자기가 벌인 일의 뒷정리는 시키지 않아도 잘 하시겠죠? 그 정도로 체력이 넘친다면 이곳을 원래대로 치우는 것도 10분이면 가능하시겠군요.

키리 : 10분이요오?

샤란 : 그래요. 아주 충분할 것 같군요. 그럼 저는 여왕님께 다녀올 테니 청소 후에 이 책을 읽고 있도록 하세요.
아참, 당신이 깨뜨려서 뒤섞인 시약 중에선 닿기만 해도 모습이 바뀌어 버리는 약도 있으니 알아서 조심하도록 하세요.

키리 : 우와, 변신약도 있어요?

샤란 : 네에. 피부에 닿기만 해도 까맣고 반들반들하고 아주 날쌘 벌레가 되어버리는 약도 있죠.
잘못하면 제가 원래 모습으로 돌려주기도 전에 고양이에게 잡아먹힐지도 모르니 조심하셔야 해요?

키리 : 꺄아아아…


총알에 넨을 싣는다고 풍진 도장에서 깽판치는 스토리도 나올 것 같다

2.12. 울루의 마지막 후계자[편집]

The last Successor of Wull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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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을 먹는 안톤의 과거 이야기.

그들이 살던 세계는 마계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며 그 넓이를 이루 짐작할 수 없다.
그곳은 울루라고 불리던 어떤 종족이 지배하고 있었으며, 개체의 외양은 제각각이었으나 한결같이 강인하였다.
인간의 여린 살이라면 닿자마자 문드러질 독기와 쇠도 녹일 열 속에서 그들은 단단하고 둔하게 변모하며 살아남았다.
먹을 것이 풍족하지 못했으니 보이는 것은 닥치는 대로 삼켰고, 그 속에서 취할 수 있는 것은 모조리 취했다.
생존이 최고의 승리인 세계였다.

한편 그들과 함께 그 시대를 살아가던 종족이 있었다.
그들은 작았지만 연약하지는 않았으며, 지혜가 뛰어나 여러 생존법을 익혔다.
그들은 울루에 맞서 싸우는 기술을 익혔지만 결국 패배하였고, 자신들의 운명을 받아들여 울루들을 신으로 모시며 살았다.
그들은 스스로를 타르탄이라고 일컬었다.

울루와 타르탄.
두 종족의 기묘한 공존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울루는 타르탄을 묵인하였으며 타르탄은 울루의 식사를 도왔다. 울루의 신체는 작은 먹이를 찾아 움직이기에는 비효율적이었다.
하지만 큰 덩치를 유지하기 위해 소모되는 에너지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울루는 점점 타르탄에 의지하게 되었다.
울루의 특징이 커다란 몸과 무엇에서든 에너지를 섭취하는 능력이라면 타르탄의 능력은 환경에 적응하기 쉬운 신체와 정신감응능력이었다.
타르탄의 연약한 육체는 울루를 닮아 강인하게 연마되었고, 독특한 정신적 연결망을 이용하여 사냥을 효율적으로 해내었다.
마침내는 울루와의 종족을 뛰어넘은 정신적인 접촉까지 해내었다.

그러나 예견된 일의 하나로서, 세계는 작동을 정지하였다.
아니, 더 이상 기능이 돌아가지 못할 정도로 황폐화되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울루의 지나친 에너지 섭취로 인해 세계 자체가 먹힌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타르탄은 오래 전부터 이 사태를 막고자 하였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미 타르탄은 울루의 일부였으며 울루의 식욕 역시 타르탄의 본능이었기 때문에 속수무책으로 세계가 먹혀가는 것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멸망해 가는 세계에서 안톤은 가장 어린 울루였다.
그의 몸은 아직 작고 가벼워서 네 다리를 움직여 이동할 수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몸이 더욱 단단하고 무거워져, 마침내 산이 되는 고령의 울루에 비하면 굉장히 날렵하고 유연했다.
그리고 이 사실을 타르탄 역시 알고 있었다.
멸망의 문턱에서 별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타르탄은 어떤 계시와 마주하였고, 움직여야 할 때임을 알았다.
그들은 모두 안톤의 몸에 올라탔다.
오랫동안 섬긴 다른 신들을 버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생존이 최고의 승리인 곳이었다.

그리고 안톤은 타르탄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울루조차 살 수 없을 정도로 뜨거운 용암지대를 피하며 안톤은 계속 움직이고, 살아남았다.
마침내 이동할 대지 한 조각이 버석한 흙이 되어 무너져 갈 때 어떤 빛이 내리쬐며 부드러운 음성이 그들에게 닿았다.

"여러분을 위해 왔습니다."

세계가 완전히 무너지기 직전에 안톤은 타르탄과 함께 그곳으로 올라섰다.
그들의 다리가 새로운 땅에 닿는 순간, 울루와 타르탄이 공존하던 세계는 흔적도 없이 무너졌다.
마치 안톤이 옮겨가기를 기다리며 버텨왔다는 듯이.

타르탄이 받은 계시대로 안톤은 선택된 자였다.

2.13. 옛 친구[편집]

OLD FRIE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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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배경은 로터스 퇴치를 위해 4인의 웨펀 마스터가 베히모스로 모였을때로 라이너스와 아간조의 해후를 다루고 있다.

라이너스 : 아니 이게 누군가. 자네를 여기서 보게 되다니.

아간조 : 라이너스... 설마 베히모스에 있었을 줄은.

라이너스: 나도 자네가 여기 올 줄은 몰랐네. 얼마 전에는 모험가가 오는가 싶더니 기사단까지오고, 자네까지 이런 곳에 오다니.. 굉장히 심각한 일인가보지?

아간조 : 나도 아직은 잘 모르겠네. 어쩌면 의 호들갑 일수도 있지... 자네는 무얼 하는 건가? 여전히 그 때의 상처를 못 잊어 대장장이 노릇인가?
하긴. 자네나 나나 별반 차이가 없겠지.. 하지만 왜 이런 곳에 있나?

라이너스 : 물론 가슴에 묻은 이야기야 술 한두 병으로 끝나겠느냐만 여기에 오게 된 것은 신다 어르신의 권유 덕분일세. 나는 지금 그분께 일을 배우고 있다네.
라이너스 : 대전이가 일어난 후 생각이 많아지셨던 모양이야. 당신께서 가신 뒤에 후계자가 끊기는 게 걱정이 되었는지 내게 고마운 제안을 해주시더군.
기왕 대장장이로 살기로 결심했는데, 스승이 생겼으니 얼마나 잘된 일인지 몰라. 스승이라고 부르지 말라고는 하시지만... 하여간 어르신이 이곳에 오겠다고 하셔서 나도 함께 여기에 오게 됐네. 이곳에서만 나온다는 특이한 광물도 궁금했고 말이야.

아간조 : 그런가.

라이너스 : 나는 그렇고 자네는 어떻게 지내나? 가끔 마가타를 통해 왕래가 이어지기는 하지만 아라드의 소식을 제대로 듣기가 어렵다네.

아간조 : 그다지 좋지는 않네.

라이너스 : 그런가..

아간조 : 라이너스. 그 특이한 광물이 얼마나 재미있는지는 몰라도 슬슬 아라드로 내려오는게 낫지 않겠나?

라이너스 : 이곳도 살기에 썩 나쁘지는 않네. 신기한 광물도 많고, 풍경도 매일 바뀌고... 어깨 너머로 듣는 GBL교리 내용도 제법 재미있다네. 때로는 나도 모르는 지식을 알게 되기도 하고 말이야.

아간조 : 라이너스. 자네 많이 변했군.

라이너스 : 그렇겠지. 대전이는 너무나 엄청난 일이었으니까.

아간조 : ......

라이너스 : 하지만 나에게는 자네가 너무 옛일에 매달리는 것처럼 보여서 걱정스럽다네.

아간조 : 자네의 염려는 자네만 하는 것이 아니네. 이미 여러 번 들은 말이지.

라이너스 : 하지만 바뀌지는 않는다... 는 말이로군.

아간조 : 긴말 할 필요는 없겠지.

라이너스 : 그렇군.

아간조 : 그럼 난 가보겠네.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어서.

라이너스 : 그러게나. 여기엔 얼마나 머물 건가? 바쁜일이 끝나거든 나를 찾아오게나. 맛있는 술을 얻어놨으니 자네와 자네 들에게 나누어주겠네.

아간조 : 한가해지면 들르도록 하지.

시란 : 이바구 다 끝났나? 뉘고? 니 친구가?
걱정하덜 마라. 내 귀가 안 좋아갖꼬 니 말 하나도 안 들렸다. 여그까지 와서 뭐한다 하드나?

아간조 : 대장장이가 검을 만들지 그럼 무얼 하겠소?

시란 : 하이고~ 입에 독사가 들었나, 내뱉는 뽄새 봐라. 여까지 와서 친구도 오랜만에 만났는데 와 기분이 더 나빠진기고? 내 이해를 몬하겠다.

아간조 : ...때로는 아는 이의 바뀐모습에 화가나고, 내가 무엇을 해줄 수 없음에 더욱 화가 나기도 하는 법이오.

시란 : 아따, 니가 그런 생각을 할 정도면 어지간히 친한 사람이었나보다.

아간조 : 예전에 일이 많았소.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 반이 기다릴테니 가도록 합시다.

시란 : 그래. 그러자. 니 이바구는 이따 술이나 하믄서 마저 듣도록 하자. 저짝도 꽤나 술을 잘 알 것 같은데? 여까지 왔는데 좋은 술 없다더나?

아간조 : 정말 아무 것도 안 들은 것 맞소?

2.14. 카르텔, 그들을 말하다[편집]

BEWARE OF THE CART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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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텔의 창립 배경과 역사 등 이모저모 이야기. 에르제 즉위 전, 즉 최고 사제 벨드런과 귀족원이 통치하던 시기에 쓴 것으로 보이며, 인게임 내 카르텔이 비추던 각종 설정구멍(매드O스라던지)들을 스토리북을 통해 합리화 보충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2.14.1. 1장[편집]


현재 '카르텔'이라 일컫는 무법자 집단은 초기와 현재의 모습이 매우 이질적이다. 초기의 그들은 지금처럼 조직적인 체계를 갖추지 못했으며, 그저 힘깨나 쓰는 한량들의 모임에 가까웠다. 혈기를 주체할 수 없어 행패를 부리고 술에 취해 총을 마구 쏘아대는 그런 구제불능의 폭력배가 바로 그들이었다. 카르텔이라는 일반명사가 그들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년 안팎의 일이다. 그러나 조짐은 훨씬 전부터 있었다.

약 20년 전 '에돈의 형제단'을 이끌던 엔조 시포모래바람의 베릭트라는 두 젊은 남자가 있었다. 이들은 당시 무법지대에서 끗발을 날리던 총잡이였으며, 비교적 평화를 존중하였기에 주민의 지지를 받았다. 물론 적에게 자비를 베풀지는 않았다. 신사적이면서도 냉혹한 모습은 상당히 매력적으로 보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개인의 매력만으로 지금의 카르텔이 성립되었을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기본적으로 무법자는 자신의 개성과 자유를 억압받는 것을 싫어하는 부류다. 소규모 집단이라면 몰라도 온갖 규율로 통제하는 군대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토록 철저한 개인주의자들이 어떻게 세력을 규합하여 덩치를 불려갔을까? 왜 군대처럼 치밀한 조직을 이루었을까? 이들을 이해하려면 웨스피스, 통칭 무법지대 사람들의 뼛속 깊은 열등감과 분노를 먼저 생각해봐야 한다.

무법지대는 척박한 땅으로, 예로부터 죄인들이 강제 이주된 곳이다. 엄한 정책 탓에, 그들의 후손들도 나오지 못 하고 대를 이어 살게 되었으며, 100년 전까지도 이 제도는 꾸준히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차별제도가 폐지되어 거주 이전의 자유가 부여됐음에도 무법지대 출신이 정상적인 사회 구조속에 들어가는 것은 여전히 힘들다. 그들에게는 낙오자의 낙인이 찍혀 있으며, 사회는 그들을 거부한다. 그렇기에 무법지대에서 태어나 입대하여 황도로 이동한 잭터 에를록스 준장이 그렇게나 주목을 받았던 것이다. 최고 사제 벨드런 님의 무법지대 출신 기용 정책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가 된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중략)...바다를 건너 간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억양이나 말투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에 금방 들통이 나며, 차별을 견디지 못해 돌아오거나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기에 밖으로 나오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서, 무법지대의 주민들은 '정상적인 사회'에 속하고 싶은 마음과 자신들을 거절하는 사회를 거부하는 마음을 함께 갖게 되었다. 그러나 많은 정치적인 이유로 그들을 포용하는 정책은 아직도 걸음마 단계다.

무법지대의 사람들은 좌절했고, 분노를 술과 폭력으로 풀었다. 그렇게 무의미한 파괴와 자포자기한 삶을 살아가던 그들에게 어느 날 갑자기 의문이 떠올랐다.

'왜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당연한 불만이지만, 지금의 우리에게는 달갑지 않은 물음이.

2.14.2. 2장[편집]


자, 우리의 시선을 에돈의 형제단으로 다시 옮겨보자. 20년 전까지만 해도 무법지대에는 카르텔이라 부를 만한 통합적인 조직, 즉 무법자 카르텔은 아직 생겨나지 않았다. 그저 크고 작은 수많은 세력이 서로의 깃발을 걸고 싸우고 다투고, 죽이고 있었을 뿐이다. 누구도 이들을 하나로 뭉칠 생각을 하지 못했을 때였다.

그러나 누군가 시작한 작은 의문은 점점 덩치를 불려 마침내 무법자들까지 움직이게 만들었다. 폭력에 얼룩진 일상을 바꾸려는 자, 혼란한 세상에서 세력을 키우려는 자, 그저 싸움이 좋아서 끼어든 자... 각자 목적은 달랐지만 모두가 들고 일어섰다. 그야말로 폭풍의 시대였다. 어느 때보다 치열한 전투가 곳곳에서 벌어졌다. 싸울 힘이 없는 주민들은 차별을 감수하고 바다를 건넜다. 하지만 그 수는 얼마 되지 않는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그들의 유전자 속에서 박힌 분노는 엄청났고, 그 폭발적인 에너지를 서로에게 쏟아냈다. 에돈의 형제단은 치열한 생존 경쟁을 이기지 못한 약소 조직을 흡수하며 덩치를 불려가고 있었다.

에를록스 준장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온갖 심각한 대의를 내세운 다른 군소집단과는 달리 에돈의 형제단은 '로망'이라는 독특한 가치를 내걸었다. 영리한 작전이었다. 웨스피스군은 반역을 일으킬지도 모르는 다른 조직에 신경을 쏟았다. '유치한 놀이'를 하는 그들을 감시할 여력이 없었다.
성미에 맞지 않는 거창한 대의에 질린 무법자들은 자신들의 본래 삶과 가장 가까운 에돈의 형제단을 도피처로 삼았다. 또한 맹렬한 투쟁 속에서 살아남을 자신이 없는 조직은 그들과 동맹을 맺기를 원했다. 세력은 계속 커져갔고, 다른 조직들이 이들을 위협이라 느꼈을 때에는 너무 늦었다.


리더인 시포는 용병술에 뛰어났다. 스스로 2인자를 자처했던 베릭트는 다소 독단적인 면이 있었지만 강렬한 카리스마로 지지를 받았다. 이들의 투톱 체계는 상당히 오랫동안 이어졌다. 초기에 시포가 원했던 것은 베릭트와 마찬가지로 낭만적인 삶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세력이 커져가면서 목표는 점점 바뀌었고, 당시 유명한 용병단이었던 '란제루스의 개'를 흡수하면서 그의 야심은 온 나라를 대상으로 삼게 되었다.

란제루스의 개의 리더인 란제루스는 시포의 오른팔이 되었고 뼛속까지 낭만주의자였던 베릭트는 세력의 재편에서 제외되었다. 시포가 10여 년만에 친구를 내친 것이다. 그러나 베릭트는 시포를 계속 지지하며 에돈의 형제단을 원래 모습으로 돌려놓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변화를 막지는 못했고, 홀로 탈퇴하게 된다.

2.14.3. 3장[편집]

읽는 이들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하여 지금까지 카르텔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알다시피 카르텔의 본뜻은 여러 조직들의 담합을 말한다.

여러 조직과 손을 잡은 에돈의 형제단은 시포가 대표자인 무법자 카르텔이며, 다른 무법자 카르텔 또한 존재했다. 하지만 베릭트의 탈퇴를 기점으로 하여 에돈의 형제단은 마침내 무법지대의 유일무이한 카르텔이 되었다. 역설적이게도, 시포와 함께 에돈의 형제단을 만든 베릭트의 탈퇴가 카르텔의 탄생과 맞물린다고 볼 수 있을것이다.

이 때를 카르텔 탄생으로 삼아 10년이 지나 현재에 이른다. 단순한 무법자 집단이었던 카르텔은 군대처럼 체계를 갖추었으며, 뛰어난 군사기술력을 자랑하고 있다. 물론 세븐 샤즈를 중심으로 하는 황도의 기술과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군의 체계를 따라오지는 못하지만 실전을 거듭하며 발전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섬뜩할 지경이다.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이미 그들을 경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소수의 의견으로, 부족한 자원으로 인해 자멸할 것이라는 낙관론이 대다수의 의견이다. 무법지대의 열악한 상황을 생각하면 그들의 말이 무조건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더구나 거대화 된 카르텔의 횡포는 이미 주민들의 거센 반발을 받고있다.

그럼 우리는 무법지대의 '자정능력'을 믿고 기대해도 좋은 것일까? 세븐 샤즈의 일원이며 천계 최고의 과학자이자 갈라하 사막을 연구하기 위해 무법지대를 자주 방문한 지젤 로건 박사는 필자의 질문에 확신을 담아 대답했다.

웨스피스 섬에서 카르텔이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현지 주민의 말을 들어보면 내부 갈등이 심하다고 한다. 내가 보기에도 그랬다. 사실 물자가 부족한 그들로서는 당연한 일이다. 조직 생활의 기본은 자신의 자유를 제한하는 규칙을 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법을 무시하는 무법자들이 그 억압을 오래 버틸거라고 생각할 수 없다. 천성적으로 버틸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을 쓰기 전 부터 필자와 여러 차례 인터뷰를 가진 에를록스 준장은 이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혹독한 환경에서 승리한 카르텔에게는 강한 원동력이 내재되어 있다. 하나는 천계 사회에 대한 불만이고, 하나는 카르텔에 속함으로써 자유를 빼앗긴 것이 대한 불만이다. 그리고 시포는 조직원의 불만을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 잘 알고 있다. 웨스피스의 평정이 끝나면 머지않아 외부로 총구를 향할 것이다. 크든 작든 피해는 나올것이다. 어떻게 대비를 하여 때에 맞게 대응을 하느냐가 중요한 관건이 될 것이다.


무법지대에서 일으킨 반란이 그 동안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고질적인 문제인 자원 부족을 해결하지 못하여 크게 성장하지 못했고, 군에 의해 와해 되었다.

카르텔 낙관론자가 아무 근거도 없이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 예상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필자를 비롯한 비관론자가 보기에 카르텔의 성장은 심상치 않다. 걱정도 팔자라는 말이 있지만 유비무환이라는 말도 있다. 슬슬 대처를 강구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기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움직여야 할 때다.

2.15. 제국의 어린 기사 [편집]

A YOUNG KNIGHT OF EMP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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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발슈테트의 과거 이야기.

2.15.1. 1장[편집]


아라드를 공포에 몰아넣은 사악한 괴물 시로코를 쓰러뜨리고 제국으로 돌아온 반 발슈테트에게 쏟아지는 관심은 그야말로 엄청났다. 제국인들은 연륜 많은 기사들도 해내지 못한 위업을 이룬 어린 웨펀마스터에게 찬사와 축복을 보내었다. 여자들은 소년 영웅을 향해 꽃을 뿌렸고 남자들은 힘차게 박수를 쳤다. 아이들은 반의 행렬을 따라가며 꺅꺅 소리를 지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팔 소리와 함성이 뒤섞인 축제의 주인공이 된 반은 얼떨떨해하면서 황궁에 입궐하여 황제 앞에 무릎을 꿇었다.

반 발슈테트 : 반 발슈테트, 지금 막 돌아왔습니다.

레온 하인리히 3세 : 수고많았다. 무사히 돌아왔군. 궁정마법사조차 당했다고 들었는데 나이 어린 그대가 사악한 시로코를 쓰러트리고 올 줄이야.

: 저 혼자만의 힘이 아닙니다. 그곳에 함께 있던 다른 웨펀마스터들이 아니었다면 저 또한 쓰러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반의 목소리는 크고 또렷했다. 자신을 위한 날이니 황제가 건네는 창찬을 혼자의 것으로 해도 상관없었을 테지만 그는 다른 웨펀마스터들도 언급하며 혼자만의 공이 아니라고 분명히 밝혔다. 황제는 부드럽게 웃었다.

황제 : 겸손하군. 그러나 오늘만큼은 그대의 공적을 깎아내리고 숨길 필요 없다. 그대는 우리 제국의 자랑스러운 기사다.

: 네? 저는 기사가 아닙니다만...


황제의 실수를 지적하는 것을 주저하며 머리를 조아리는 반의 모습에 황제가 더 큰 미소를 지었다.

황제 : 지금까지는 그랬지. 그러나 지금부터는 그대는 기사로서 나와 제국에 봉사하고 그대 자신의 이름을 드높이게 될 것이다. 가까이 다가와 무릎을 꿇어라.


기사라는 말에 반이 얼굴을 들었다. 반은 기사가 되기 위한 절차를 밟지 않았다. 실력은 인정받았지만 복잡한 이해 관계가 얽혀있는 기사후보생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하지만 검술을 갈고 닦는데 바빴거니와, 딱히 기사라는 명예에 매달리고 싶지 않았다. 웨펀마스터의 이름을 받은 것으로도 충분히 뛰어난 업적이었다.
아니, 검술을 인정받았다는 점만 보면 웨펀마스터의 칭호가 더 명예로웠다. 하지만 황제가 직접 기사 작위를 수여한다는데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황제 : 반 발슈테트. 그대는 기사도 앞에 부끄러움이 없는 기사로서 정의를 숭배하고 봉사를 즐기며 만인의 앞에 몸가짐을 바로 하겠노라고 맹세하는가?

: 맹세합니다.

황제 : 반 발슈테트. 그대는 데 로스 제국의 영예로운 기사로서 나라에 헌신하고 그대의 피와 삶을 바쳐 국가를 지키겠노라고 맹세하는가?

: 맹세합니다.

황제 : 반 발슈테트. 그대는 데 로스 제국의 제 1기사이자 가장 정당한 지배자인 나 레온 하인리히 3세의 충실한 종복으로서 모든 위험에서 나를 구하고, 나의 명령을 성실히 따를 것을 맹세하는가?

: 맹세합니다.

황제 : 그대의 충성에는 사랑과 신뢰가, 그대의 배신에는 분노와 처벌이 돌아올 것이다. 이 서약은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계속될 것이며, 죽음만이 그대를 쉬게 할 것이다.
고개를 들고 일어서라. 그대는 데 로스 제국의 기사가 되었다. 또한 앞으로 반 발슈테트 남작으로서 대대로 역사에 이름을 남길 것이다.

클라우스 : ......!


좌중이 술렁였다. 제국의 귀족들은 황제 선언에 너나할 것 없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자신이 잘못 들었길 바랐다.
하지만 황제는 잘못 말하지 않았다. 내세울 것이라곤 검술 실력밖에 없는 반 발슈테트는 오늘부로 귀족이, 그것도 남작이 되는 것이다.

슈만 : (폐하는 제정신이신 건가? 저런 얼뜨기에게 남작위를 내리다니! 논의된 건 기껏해야 자작위가 아니었나? 저런 망할 귀수 꼬맹이에게...!)[4]


반 본인도 당황하고 있는 지금, 황제를 제외한다면 유일하게 평정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은 무인 집안으로 유명한 크루거 가의 콘라드였다.

콘라드 폰 크루거 : (남작위라... 폐하께서도 장난을 좋아하시는군. 반대가 만만치 않을텐데... 하지만 발슈테트라면 충분히 그 고난을 헤쳐나갈 수 있겠지. 지금의 썩은 기사들보다 저 젊은이가 백 배는 나으니...


황제의 깜짝 선언에 호의적인 시선은 그뿐이었다. 반은 자신의 등 뒤에서 조용하고 빠르게 오가는 시선 교환을 알지 못한 채 힘차게 맹세했다.

: 황공하옵니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2.15.2. 2장[편집]


: 에밀리! 에밀리!


황제 알현이 끝나자마자 반이 달려간 곳은 한 소녀가 기다리고 있는 조용한 정원이었다. 사람들이 반의 그림자라도 보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상황에서 몰래 빠져나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반은 긴 원정 중에 한시도 잊은 적 없는 에밀리를 위해 모든 난관을 뚫고 한달음에 달려갔다. 늘 둘이서 만나던 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소녀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몸을 돌렸다. 숨어오느라 엉망이 된 반의 모습에 잠깐 놀랐다가 바로 얼굴 가득 장미빛 기쁨을 띠는 모습은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소녀였다. 반은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달려오는 에밀리를 가볍게 들어올려 빙글빙글 돌았다. 에밀리는 반을 세게 끌어안았다.

에밀리 폰 크루거 : 반! 돌아왔구나! 반!

: 응! 궁에 들렀다가 바로 만나러 왔어. 아, 에밀리! 굉장한 일이 있었어! 오늘부터 내가 뭔지 알아?

에밀리 : 기사님이지? 꺅! 잘됐다! 축하해! 엄청 멋있어!


반은 에밀리를 내려놓았다. 에밀리는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호들갑을 떨었지만 반의 표정은 실망으로 가득 찼다.

: 뭐야... 누가 말해줬어? 쳇, 내가 제일 먼저 말해주려고 했는데.

에밀리 : 반이 오기 전부터 사람들이 그랬는걸! 아버지도 반이라면 기사도 되고도 남을 거라고 하셨어! 그리고 콘라드 당숙님도!

: 콘라드 폰 크루거 님이?

에밀리 : 응응. 자작위는 따 놓은 거나 마찬가지라고 하셨어! 잘됐다, 이제 어머니도 우리 결혼을 싫어하시지 않을 거야!


품안에 안긴 에밀리를 멍하니 내려보던 반이 씨익 웃었다.

: 자작이라니? 난 남작이야! 남작!

에밀리 : ...정말?

에밀리 : 정말?! 발슈테트 남작님! 너무 멋있어!


에밀리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해 반의 팔을 잡고 팔짝거렸고, 반은 기품이고 뭐고 다 던져버리고 어울리며 웃었다. 눈부신 햇살은 이 두 연인을 위해 준비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한참 법석을 떤 후에야 진정이 된 반과 에밀리는 누가 떨어뜨리기라도 할 것처럼 손을 꼭 잡고 나무 그늘 아래 앉았다.

에밀리 : ...걱정했어.


반의 손을 쓰다듬으며 에밀리가 조용히 말했다. 누구보다 확고한 목표를 가진 약혼자를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지만, 그를 기다리며 지새워야했던
밤은 너무 길고 가혹했다. 그 편린을 본 반은 충동적으로 에밀리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에밀리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 올라 반의 가슴을 때리며 얼른 떨어졌다.

에밀리 : 뭐, 뭐야... 누가 지나가면 어쩌려고... 바보!

: 뭐 어때? 이미 약혼한 사이인데. 아아, 빨리 결혼하고 싶다!


에밀리는 새빨간 얼굴로 반의 입을 막으려 애썼다. 하지만 종달새의 다리처럼 가느다란 손가락으로는 신이 난 소년을 막을 수 없었다.

에밀리 : 조용히 해!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 결혼하고 싶다아아!!

에밀리 : ......

: ......죄송합니다. 다시는 떠들지 않겠습니다. 제가 너무 들떴나봅니다. 용서해 주세요.


반은 고개까지 숙여가며 사과했다. 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소녀는 화가 나면 정말로 무섭게 변했다.

에밀리 : 다음에도 또 그러면 한 달 동안 안 만나 줄 거야.

: 알았어...


금세 시무룩해지는 반을 샐쭉하게 쳐다보던 에밀리였지만 이내 까르르 웃으며 반의 팔을 껴안고 어깨에 기대었다.

에밀리 : 그런데 그 괴물은 어땠어?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는데 그렇게나 강했어?

: 엄청났어. 내가 거기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정말 죽을 뻔했다니까?

에밀리 : 그러니까 누가 그런 데 가래! 바보야! 자업자득이야!

: 진짜 미안... 그래도 얻은 것도 많았어. 상상도 못하던 걸 봤거든. 사도의 힘이라는 거 굉장해. 제대로 연구하면 제국에 큰 도움이 될 텐데!

에밀리 : 무서운 괴물이라며?

: 무섭고 끔찍하기는 하지만 엄청났어. 사람의 정신을 파고드는 그 힘은 궁정마법사조차 못 막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역으로 생각해봐. 그런 힘을 자유자재로 운용할 수만 있다면 제국은 더욱 강대해질 거야. 아무도 제국을 위협하지 못할 거고, 용이나 괴물이 다시 난동을 피우면 최소한의 희생으로 막을 수 있겠지.

에밀리 : 하지만 괴물의 힘은 사악한 힘이잖아.

: 그래. 하지만 힘 자체에는 죄가 없잖아. 사용하는 사람이 문제지. 검을 생각해 봐도, 검 자체에는 죄가 없어. 도구일 뿐이지.

에밀리 : 그래도 위험할 거 같은데... 안 그래도 반은 귀수 때문에 고생했으니까 그런 위험한 건 다른사람한테 부탁해. 반이 다치면... 난 또 울어버릴거야.


말뿐만이 아니라 정말로 울먹거리는 소녀의 젖은 눈망울을 보며 반은 두 손을 휘저으며 당황했다.

: 울지 마. 네가 울면 난 어째야 좋을지 모르겠다구.


마음을 졸이던 나날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에밀리는 저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바삐 훔치며 반을 올려보았다.

에밀리 : 그러니까 그런 위험한 생각은 하지 마. 알았지?

: 그래. 알았어.


반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2.15.3. 3장[편집]


화창한 봄날에 불어오는 따스한 바람과 코를 간지럽히는 꽃내음이 향기롭다. 이런 날은 누구에게나 기쁘고 즐거운 하루가 되어야할 터였다. 피어나는 초록 이파리가 연보라빛 하늘에 물들어갈 무렵. 평화로운 작은 도시에서 짙고 매캐한 연기가 걷잡을 수 없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 에밀리! 에밀리!!

경비병 : 안 됩니다! 지금 들어가시면 같이 죽을 뿐입니다!

: 젠장, 이거 놔! 내 약혼자가 저 안에 있단 말이다!

경비병 : 소방 마법사들이 올 겁니다. 잠시만… 어이쿠!



반은 자신을 말리는 경비대를 뿌리치고 무작정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콜록거리며 도망치는 사람들을 헤치며 찾아보아도 익숙한 밤색머리의 약혼자는 없었다.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동안 반의 옷은 검댕이 묻고 타들어갔지만 뜨거움을 느낄 새가 없었다.
에밀리는 결혼식을 앞두고 친구의 별장에 놀러간 참이었다. 친구들에게 소개해 주고 싶다는 에밀리의 부탁에 훈련이 끝나자마자 말을 타고 달려왔다. 어떻게 하면 에밀리의 체면을 세워줄 수 있을지 무척 고민스러웠다. 하지만 고민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발견한 것은 지독스런 화마였다.

나이 많은 웨펀마스터들에게 침착하다는 평을 듣던 반이었지만 에밀리가 미처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이야기에 앞뒤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무턱대고 헤매다 머리가 빙글거리며 어지러워질 쯤에야 퍼뜩 정신을 차린 반은 허리에 찬 검을 뽑아 짧은 기합과 함께 검기를 날렸다. 몰려오던 연기가 물러나고 창문이 부서졌다. 반은 창 밖으로 몸을 빼내 심호흡을 하면서 쿵쾅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 (에밀리는 점심을 먹고 따로 쉬고 있었다고 했지… 어디서 쉬고 있었을까? 하녀가 방에는 없다고 했었어… 그럼…)



밖에서 본 저택의 구조, 에밀리의 성격, 구조자들의 증언을 종합해 본 반은 다시 복도로 들어가 빠르게 달렸다.
숨을 멈추고 달리는 것쯤 별것 아니었다. 몸을 태우는 불 따위 비명굴을 가득 채운 진득한 저주에 비하면 간지럽지도 않았다.
반은 저택의 반대편으로 달려가 굳게 닫힌 서재의 무거운 문을 부수었다.

: …이건…


코가 마비될 지경이었지만 반은 익숙한 냄새를 맡았다. 피 냄새였다. 발끝부터 솟구쳐올라오는 불안을 무시한 채 넓은 서재를 샅샅이 찾았다. 이곳은 서재라기보다는 도서관에 가까웠다. 반은 에밀리가 친구와 어울리게 된 계기가 책이었다는, 그런 아무래도 좋을 기억을 떠올리며 소녀의 모습을 찾았다.

: ……!


원목의 커다란 책장 너머에 에밀리가 있었다. 혼자는 아니었다. 큰 다툼이 있었는지 책은 쏟아져 있었고 그 뒤의 책장은 모두 무너져 있었다.
그리고 얼굴을 검은 천으로 감싼 남자 둘이 쓰러져 있었다. 에밀리는 복부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경비병의 뒤에 기절해 있었다.
반은 에밀리를 얼른 안아들었다. 하얀 팔이 목각인형처럼 툭 떨어졌다. 힘을 잃은 몸은 흔드는 대로 흔들릴 뿐이었다. 손에서 떨어진 작은 은장도가 반짝거렸다. 반은 경비병의 상태를 살폈다. 가냘프게 숨을 쉬고 있는 에밀리와 달리 그는 정말로 죽어있었다. 아무래도 에밀리를 찾으러 왔다가 자객들과 싸우다 죽은 것 같았다.
반은 죽은 경비병의 눈을 감겨주고 짧게 묵념을 했다. 그리고 에밀리를 단단히 안은 후 탐욕스럽게 서재 안으로 쳐들어오고 있는 화염을 피해 창문을 깨고 바깥으로 뛰어내렸다.

2.15.4. 4장[편집]


몇 년 후. 명을 받들어 북방 출정에 다녀온 반은 황제 앞에 무릎을 꿇고 보고를 올리고 있었다.

반 발슈테트 : 명하신 대로 우리 제국의 영토를 넘보는 북방의 이민족을 토벌하고 왔습니다. 놈들은 다시는 허튼 꿈을 꾸지 못 할 것입니다. 그들의 리더인..

레온 하인리히 3세 : 이번에 죽은 병사는 몇이나 되나?

: 126명입니다. 하지만 적의 사상자는...

황제 : 많이 죽었지. 안 그런가?



황제의 매몰찬 질문에 반은 당황스러웠다. 분명 사상자가 나오긴 했지만 물리친 적의 수와 비교하자면 큰 손실이라고 할 수도 없을 터였다.

그러나 황제의 말대로 사상자가 나온 사실은 변함이 없기에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 ..네 그렇습니다.

황제 : 그래선 곤란하지 않나? 병사가 싸움이 날 때마다 그렇게 죽어서야, 어떻게 제국이 존속될 수 있겠나? 황후는 미개인의 도끼에 맞아 죽을까봐 두려워 덜덜 떨고있어.

: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 반 발슈테트가 무슨 일이 있어도...

황제 : 그래. 일단은 믿어보지. 달리 믿을 사람도 없으니 말이야.

: ......



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레온 황제가 말을 잘라버렸다. 반은 당혹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더 깊이 숙였다.

황제 : 아아, 그러고보니 자네 부인은 어떤가? 아차, 아직 결혼은 안했던가? 미안하군.

: 아닙니다. 폐하께서 신경을 써주신 덕분에 많이 좋아졌습니다. 이제는 제 얼굴도 잘 알아보고 스스로 식사도 할 수 있습니다.



불행한 화재 사고에서 다친 에밀리는 간신히 살아남았다. 출혈이 컸지만 경비원이 지켜준 덕분이었다. 방화범은 제국에 불만을 가진 모험가들로 밝혀졌다.

하지만 긴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에밀리는 반을 알아보기는 커녕 남자만 보이면 괴성을 지르며 물건을 집어던졌다. 에밀리의 부모는 조심스럽게 파혼을 권하였으나 반은 에밀리 외의 여자를 처로 맞이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결혼을 할 수도 없었다. 귀족의 딸인 에밀리는 가문의 명예 때문에 저택 깊숙한 곳에서 나오지 못 했다.

더구나 제국의 법은 신랑과 신부가 본인의 의지로 혼약의 맹세를 나눌 때만이 부부로 인정한다. 자기 이름을 겨우 말할 줄 아는 에밀리가 결혼이라는 개념을 이해할리 만무했다.

황제 : 자네를 아픈 약혼자에게서 떼어놓고 여기 저기로 나가서 싸우라고 해서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네.

: 아닙니다. 외적과 싸우는 것은 기사의 의무. 나이가 어린 저를 신뢰해 주시니 힘껏 보답할 따름입니다.

황제 :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군. 하지만 자네도 슬슬 아이를 키우며 살고 싶을 때가 아닌가? 자네는 약혼도 일찍한 편이니 아이가 한둘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 ..아직 그런 생각은 없습니다.

황제 : 그런가. 그거 잘됐군.

: 네?



반은 얼굴 가득 의문을 담은 채 고개를 들었다. 설마 베필감을 직접 마련해주겠다는 뜻인가?

반과 에밀리의 사정을 아는 몇 사람 중 한 명인 황제에게는 충분히 그럴 권리가 있고, 그의 기사인 반은 황명으로 내려진 결혼을 거부할 입장이 아니었다.

반의 오해를 알아차렸는지 보고를 받는 내내 딱딱한 얼굴로 일관하고 있던 황제가 피식 웃었다.

황제 : 오해하지 마라. 아이가 없으니 어린 죄수를 보며 괜한 동정심에 휩싸이지 않을 테니 잘 됐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니까. 공과 사를 구분 못하는 자들은 질색이야.

: 아... 그 걱정이라면 문제없습니다. 어리다고 해도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는 다 알고 있습니다. 자신의 선택으로 죄를 지은 자는 남녀노소 동정할 필요가 없지요.

황제 : 자네는 매사가 분명해서 좋다니까. 다른 귀족들이 자네만큼 유능했다면 병사 한둘 죽은 것 갖고 골머리를 썩히지 않아도 될 텐데 말이지.
칭찬하는 거니까 너무 긴장하지 말게. 그래, 자네의 소중한 에밀리 이야기나 해볼까? 정신적으로 아프다곤 해도 결혼은 해야할 것 아닌가? 결혼을 얼마 안 남지고 사고가 났다면서.

: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에멜리가 맹세를 제대로 할 수 있을지... 폐하께서는 본인의 의지로 나눈 맹세를 통해 맺어진 부부만을 인정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결혼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황제 : 흠... 그녀의 상태를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되지?

: 사용인을 제외하면 몇 안됩니다.

황제 : 실은 말이지, 자네가 약혼을 한 지도 꽤 됐지 않나? 사람들은 점점 이상하게 생각 하고 있다네. '그 잘난 반 발슈테트가 왜 결혼을 하지 않는가. 혹시 문제가 있는 건 아닌가.' 라면서.

: ...하지만 저는 에밀리 외에는 생각이 없습니다. 그리고 에밀리도... 아무리 크루거 경께서 막아주신다고 해도, 파혼되면 가문의 보호를 받지 못할 겁니다...



그나마 에밀리가 본가 저택에 머무르고 있는 것은 발슈테트 남작의 약혼녀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종질녀를 아끼는 콘라드의 배려도 있어 에밀리의 부모는 아직 딸을 버리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반이라는 방파제가 없어진다면 쓸모가 없어진 귀족의 딸이 어떻게 될지는 뻔했다.

황제 : 그게 말인데. 그냥 내가 인정해주면 될 것 같아서 말이지. 그렇잖은가? 그 소녀도 불행한 사고를 겪기 전에는 결혼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을 테고, 자네를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았을걸세.



황제의 제안에 반의 눈이 번쩍 뜨였다. 황제의 말대로 결혼을 하여 에밀리를 자신의 집에 데리고 올 수만 있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 지금껏 그러지 못 했던 것은 지엄한 황제의 법 때문인데 바로 그 황제가 편의를 봐주겠다고 하는 것이다.

황제 : 남의 눈은 피해야 할 테니 성대한 결혼식은 못하겠지만 멀리 떨어진 곳에 작게나마 열어주겠네. 그곳에서 부부의 연을 맺고 조용히 돌아오게.

황제 : 다만 에밀리는 그곳에서 쉬다가 온다고 하고, 자네마 먼저 돌아오는 게 좋겠어. 아무래도 새신부를 보고 싶어서 시끄러울 테니까.
오붓하게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못돼먹은 황제가 새신랑을 억지로 오라고 했다고 하면 다들 납득하고 불쌍하게 여겨주지 않을까? 하하하!

: 그런 배려를...



말도 제대로 못 할 정도로 감동한 반을 황제는 뿌듯하게 내려보았다.

황제 : 사실은 사실이니까 미안할 것 없네. 자네는 좀 먼 곳에 가주면 좋겠어. 자네밖에 할 수 없는 일일세.

: 무슨 일입니까? 어떤 임무든 해내보이겠습니다.

황제 : 믿음직스럽군. 아까 이야기로 돌아가서, 우리 제국이 안전해지려면 강한 병사가 있어야하지 않겠는가?

황제 : 그래서 그들을 어떻게 튼튼하게 만들지 연구하는 연구소를 만들었다네. 허나 귀족들이 시끄러울지 몰라서 외딴 곳에 있거든. 무슨 말인지 알겠나?



'귀족이 시끄러워질지도 모른다.' 무슨 뜻인지는 명백했다.

: 경비 임무입니까. 알겠습니다. 언제 출발하면 되겠습니까?

황제 : 따로 연락 주겠네. 자네는 결혼 준비를 해야지. 하지만 너무 기대말게. 나도 결혼을 했지만, 하기 전엔 좋은데 하고 나면... 무슨 말인지 알지?

황제 : 하하, 그럼 피곤할 텐데 돌아가 쉬게. 준비는 내가 맡아서 진행해 줄 테니 마음 놓고.

: 감사합니다.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반이 알현실에서 물러났다. 황제는 손을 들어 다른 사람들을 모두 물렸다. 텅 빈 알현실에서 잠시 생각에 빠져있던 황제가 입을 열었다.

황제 : 믿겨지나? 제정신도 아닌 여자를 꽃처럼 아끼고 기다리고 있는 남자야. 저런 멍청한 외곬수는 그냥 방패 역할이나 시키면 될 것을, 왜 집착하는 건가?

??? : 저분은 이 제국에서 사도의 힘을 가장 잘 알고, 또 경외하고 있는 자. 분명 폐하의 뜻에 따르게 될 것입니다.



황제의 뒤에 쳐진 휘장 너머에서 검은 로브를 쓴 여자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얼굴을 포함하여 전신을 가리고 있었으나 그 실루엣 속에 숨긴 심상치 않은 마력은 궁정마법사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황제는 여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황제 : 그것도 예언에 있는 내용인가?

??? : 그렇습니다. 모든 것은 제국의 안녕과, 아라드를 위한 것. 이 높은 뜻을 알게 된다면 반 님은 누구보다도 큰힘이 되어주실겁니다.

황제 : 바뀌리라고 보나? 세상에 발전하는데 무엇이 필요할지 모르는 저 남자가?

??? : 이제는 알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은 위대한 예언대로...



의심을 떨치지 못하는 레온 황제를 안심시키듯 검은 로브의 여자가 미소를 지었다.

2.16. 돌아오지 않는 [편집]

THE LOST FOREST
파일:bBFflml.png

아름다운 숲 그란플로리스에는 여러 종족이 어울려 살고 있다.
아라드가 생겨날 때부터 살아온 지혜의 종족 요정과 거대한 몸집에 걸맞은 힘을 가졌으며, 순수하지만 현명한 타우가 대표적이다.
그들은 힘을 합쳐 마이어가 만든 대마법진을 지키며 평화로이 살고 있었다.
가끔 찾아오는 불청객도 있었지만 숲이 이들을 아끼고 보호했기에 작은 소동 수준에만 그칠 뿐이었다.
그렇게 조용한 나날이 이어지던 어느 날, 모든 짐승의 왕이라는 칭호를 가진 위대한 타우의 왕, 움타라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수왕 움타라 : 여기 있었군. 찾았다네.


그가 찾던 사람은 다름아닌 요정의 장로였다.
요정끼리는 서로 마법의 기척을 통해 쉽게 찾을 수 있지만 마법에 무지한 움타라로서는 직접 찾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요정 소녀 : 안녕하세요. 움타라 님.

장로 카위렐 : 오랜만이군요. 수왕이여. 나에게 볼일이 있습니까?

수왕 움타라 : 음, 조금 걱정되는 게 있어서 의논을 하러 왔네.


숨기는 것 없이 직설적으로 말하는 타우가 어울리지 않게 말을 돌리는 것을 보고 요정 소녀가 눈치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요정 소녀 : 아참, 책을 돌려주러 가야하는데 깜박했네요. 장로님, 움타라 님.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수왕 움타라 : 미안하군.

요정 소녀 : 아니에요. 저는 괜찮으니 말씀 나누세요.


요정의 밝은 귀로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소녀가 멀리 가고 난 후에야 장로가 조용히 물었다.

장로 카위렐 : 그래, 무슨 일입니까?

수왕 움타라 : 요즘 바깥에서 인간들이 많이 들어오고 있네. 모험가나 여행객까진 상관없지만 쇠로 온몸을 감싼 놈들이 서성이는 게 신경이 쓰여.

장로 카위렐 : 그 문제라면 저도 알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궁수들을 더 배치해 놓을 참입니다.

수왕 움타라 : 음. 요정들도 경계에 나서준다면 우리도 한결 편해지겠지. 그런데 그 인간들은 도대체 뭐하는 자들이지?


움타라의 목소리에는 경계의 기색이 깃들어 있었다. 이치를 따져 설명하지는 못하지만, 수왕답게 본능적으로 위협을 느낀 탓이리라.

장로 카위렐 : 군인인 것 같더군요. 정확히 무엇이 목적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조사를 하고 있는 듯했습니다.

수왕 움타라 : 대마법진에 손을 대려는 것은 아니겠지...


그란플로리스 숲을 둘러싼 대마법진은 인간이지만 요정조차 존경하는 대마법사, 마이어가 그의 모든 마력을 쏟아서 만든 것이다.
삶의 터전을 자꾸 늘리려는 인간의 횡포에 쫓겨난 요정들이 지금처럼 숲의 종족으로 남아있을 수 있는 것은
그가 만든 마법진이 이 그란플로리스를 수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란플로리스는 요정들에게만 중요한 곳이 아니었다. 오래되고 광대한 숲은 많은 짐승들과 나무들이 자라는 곳이다.
아라드 전체의 생태를 유지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장로 카위렐 : 그럴 리가요, 마이어 님의 마법진이 무너지면 그들 역시 큰 피해를 입게 될 텐데, 아무리 생각이 짧다고 해도 자멸하는 짓을 하지는 않을 겁니다.

수왕 움타라 :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만 인간들은 전부터 이 숲을 파괴하고 약탈해 왔네. 아라드를 가득 채운 많은 인간들 중에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한 녀석이 없으리라고 볼 순 없어.

장로 카위렐 : 그러니 경계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요정뿐 아니라 강인한 타우도 이곳을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가 힘을 합쳐 주의를 계속 기울인다면 우려하는 사태가 벌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수왕 움타라 : 나도 그러길 바라네. 하지만 왠지 예감이 좋지 않아. 아니, 관두지. 요정 앞에서 예감이 어쩌고 하는 말을 꺼냈다간 부끄러워질 뿐이니.


움타라는 그렇게 말을 끝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애용하는 거대한 망치를 들어올렸다.
인간이나 요정이라면 몇 사람이 덤벼들어도 까딱하지 못할 테지만 그의 힘이라면 가볍게 들어올릴 수 있었다.
요정의 장로는 그 엄청난 힘에 순수하게 감탄했다.

수왕 움타라 : 그럼 이만 순찰을 돌러 가봐야겠어. 그 군인들 말고도 엉뚱한 짓을 벌이는 놈들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이번에는 숲 외곽을 중점적으로 돌아볼 생각이네.

장로 카위렐 : 긴 여정이 되겠군요. 모쪼록 무사히 돌아올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수왕 움타라 : 고맙군. 그럼 나중에 보도록 하지.


요정 장로는 움타라의 거대한 몸이 나무들 사이로 사라져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 조용한 숲은 타우의 왕마저 작아보일 정도로 크고 오래된 나무가 가득하다.
인간들이 아무리 수를 써도 타우와 요정이 지키는 한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것 역시 인간들이다.
요정의 지혜로도 예측할 수 없는 그들의 돌발적인 행동은 언제나 당혹스럽다.
젊은 요정들은 인간을 대상으로 전쟁을 일으켜야 한다고 말하지만, 혈기 탓에 무모한 소리를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아라드를 지배하는 종족을 상대로 수가 적은 요정이 이길 가능성은 거의 없다.
다만, 바라는 것이 있다면 모든 종족의 평화와 공존을 바랐던 마이어처럼 인간들이 조금만 더 먼 미래를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요정의 안위를 위해서가 아니다. 이 그란플로리스 숲은 아라드를 위해서 꼭 필요한 곳이다.
이곳마저 습격받아 대마법진까지 파괴되었을 때 일어날 일은 상상도 하기 싫었다.
한번 파괴된 숲은 다시는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요정 장로는 숲과 아라드를 위해 움타라의 불안이 현실로 일어나지 않기만을 기원했다.

2.17. 검은 성전 보고서[편집]

BLACK CRUSADES REPO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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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안의 미카엘라사도였음을 알게 된 프리스트 교단의 반응과 그 대처를 기록한 보고서. 그 대처의 결과는 프리스트의 2차 각성 퀘스트와 그란디스 그라시아 문서에서 볼 수 있다.

이 문서는 극비문서로 분류되며, 레미디아 카테드라의 신실한 대표자가 승인한 자만이 접근 가능하다.

원문 및 사본의 전체, 혹은 일부를 허가를 받지 않은 자에게 대여, 암시, 구술 및 서술 등, 내용을 전달하는 일체의 행위를 불허한다.

위반할 시 교단의 적으로 간주되어 파문 및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물론 도망자에게는 기한 없는 추적이 뒤따를 것이다.

아래의 내용은 누락 및 변경 없이 보존되어야 하며, 첨언하고자 하는 바가 있으면 신빙성 있는 자료와 함께 제시되어야 한다.

세간에 검은 성전이라 알려진 대(對)오즈마 전쟁은 신의 선택을 받은 성안의 미카엘라를 필두로 한 성스러운 프리스트의 피 덕택에 아라드의 모든 생명을 악에서 구원한 전쟁이었다.

희생이 컸으나 세상을 위장자로 더럽히는 사도를 쓰러뜨렸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고, 공이 높은 자를 성자로 시성하며 기록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성안의 미카엘라를 수호신으로 모셔 신도들로 하여금 그의 용기를 배우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신도들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한 어려운 결정의 결과일 뿐이다.(첨부 자료1을 확인하라.)

신이여, 우리를 인도하소서. 저 신실하고 혜안이 깊어 신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일컬어지던 미카엘라는 실은 사악의 길을 이끄는 악마에 지나지 않았음을 여기에 기록한다.

그는 결국 선을 가장하여 신의 이름으로 우리를 악으로 떨어뜨리는 악의 추종자였다. 그 교묘한 함정에 우리는 보기 좋게 걸려들고 말았다.

회개하고 기도하라. 우리의 어리석음을 부끄러워하고 신의 엄하고 오묘한 가르침 앞에 탄복하라.

사악한 미카엘라가 정체를 드러낼 때까지 우리는 아무 것도 몰랐다. 이 얼마나 참담한가.(미카엘라가 사도였음을 확신하는 근거는 첨부 자료2, 첨부 자료3에서 확인하라)

이 통탄 속에서도 프리스트 교단의 대주교이자 뛰어난 크루세이더였던 메이가 로젠바흐는 모든 책임을 지고 그의 시성식을 주관하였다.(이 일의 까닭과 경위에 관해서는 첨부 자료4에서 확인하라.)

다만 메이가 로젠바흐는 이 일에 한계를 두어 아라드의 신도들이 혼란한 시대에서 벗어나 충분히 안정하였다고 판단될 때 이 보고서를 공개하여 신 앞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 보고서를 읽는 모든 이는 시대를 막론하고, 메이가 로젠바흐의 뜻이 흐트러짐 없이 행해질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훗날 힐더의 행적이 던파 세계관에 완전 공표되었을 때의 교단의 반응이 궁금하다

2.18. 테이베르스의 빛[편집]

The light of Tayber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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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공의 이시스-프레이의 과거 이야기로 설정으로 짧게 언급된 그의 과거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그가 살던 세계에선 이름을 두 단어로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금색의 별 테이베르스는 찬란한 빛깔로 가득 찬 곳이었다. 오색의 보석이 흔한 돌처럼 수북이 뿌려져 있고, 커다란 바위를 품은 나무가 태양의 궤적을 따라 천천히 흘러가는 곳이었다. 사계절이 존재하지 않았고 낮과 밤은 항상 함께였다. 누구든지 피곤하면 하늘을 떠다니는 나무 아래에 날개를 다듬으며 눈을 붙였고, 배가 고프면 잘 익은 과실을 따서 먹었다. 조용히 넘실거리는 투명한 금색 바다에서 어린아이들은 아직 채 여물지 않은 날개를 파닥이며 물장난을 쳤고, 청년들은 커다란 나무를 차지하기 위해 거센 바람을 헤치며 목숨을 건 경주를 했다. 하지만 아무도 '가장 높은 자'를 이길 수 없었다.

그는 위대한 자였다. 모든 것을 얼리는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솟아올라, 하늘에 박힌 별의 노래를 들으며 잠을 잤다. 그를 따라가려다 쓰러진 자 셀 수 없으며, 그의 날카로운 깃털에 눈을 다쳐 떨어진 자 역시 셀 수 없었다. 가장 먼 곳을 보았으며, 별빛 너머의 미래를 볼 줄 알았다. 그는 빛의 샘물을 마신 자였다. 금빛 찬란한 세상에서 그는 온전히 홀로 빛나는 자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바다로 내려온 태양이라 불렀다. 누구나 그의 노래와 아름다운 날개를 사랑하였다.

하지만, 이 평화로운 세계에 보라색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빗물의 맛을 씁쓸하여 모든 나무의 과실을 시고 떫게 만들었다. 황금의 바다는 사납게 몰아쳤고, 노란 들판에 금이 가더니 급기야 갈라지고 무너졌다. 무언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된 것이 분명했다. 푸른불의 어머니 루프송이 그를 불렀다. 이변을 조사해 달라는 부탁에 그는 다시 날개를 퍼덕여 단번에 붉은 하늘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별빛 사이에서 불길하게 흔들리는 어떤 조각을 발견하였다. 기괴한 조각은 그의 고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조각으로 향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유성이라 생각하여 파괴할 생각이었지만, 가까워질수록 저 어둡고 더러운 조각 속에 강력한 의지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단번에 돌진하려던 그는 문득 생각을 바꾸어 고향으로 돌아와 루프송에게 말했다. "저 검은 조각에 위험이 있으니 제거하고 곧 돌아오겠다. 내가 곧 돌아오지 못하면 모두 피하라." 루프송은 함께 피하자면 만류하였으나 그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걱정을 떨치고 날아 올랐다. 모두가 그를 전송하며 슬피 울었다.

하루가 지났다.

이틀이 지났다.

사흘이 지나고 나흘이 지났다.

닷새가 되었을 때 루프송은 날개를 펼쳤다.

"아이들아, 날아올라라. 누구보다 높이 날며, 누구보다 멀리 보며, 누구보다 강력한 이시스-프레이를 도우러 가자."

하지만 그가 있는 곳은 너무 멀었다. 고된 비행에 지쳐 누구보다 단단한 부리를 갖고 있던 스레니크론의 날개에서 깃털이 모두 빠졌다. ㅡ 그 깃털은 약탈자 로스올이 가져가 자신의 꼬리에 붙였다. 그래서 로스올은 그 풍성한 꼬리를 가지고도 스레니콘이 두려워 밤의 동굴에 숨어 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ㅡ 또한, 너무 높이 올라간 자들의 깃털을 뚫고 칼날보다 날카로운 얼음이 날개를 상하게 하였다. 날개가 얼어 떨어진 자들이 속출하였는데 붉은다리 알케도-프렉세스는 두 날개가 어깨에서 동시에 뜯겨 바다로 추락하였다. 알케도-프렉세스는 바다 한가운데 떠다니는 작은 바위섬에 머리를 부딪혀 기절하였지만 다행히 죽지는 않았다. 지금도 그 섬에 가면 알케도-프렉세스의 머리자국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이시스-프레이를 돕기는 커녕 그가 있는 곳으로 갈 수조차 없자, 루프송이 슬피 울며 노래를 불렀다. 모든 이가 함께 노래를 따라부르며 구름 너머로 보이는 검은 조각을 바라보았다. 그들 앞에서 갑자기 하늘이 크게 일렁였다. 조각은 어디론가 빨려가듯 사라졌다. 보라색 비는 곧 멈추었으나 이시스-프레이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지금도 테이베르스의 백성들은 이시스-프레이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가장 높이 날던 그의 모습이 다시 황금바다 위에 수놓아진다면 슬픔에 가득 찬 세상은 예전처럼 행복의 노래로 채워질 것이다.

2.19. 애이불비[편집]

哀而不悲[5]
Some are lonely[6]
파일:4JpRv4p.png

아간조의 이야기로 놀랍게도 우가 아간조를 사모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뭣 모르고 보면 왜 아간조가 우의 스승으로 서술되지, 라고 볼 수도 있는데 우의 잔 실수를 스승님은 못 본 척하고 있다고 하고, 아간조가 떠날 때 잘 가라는 말만 하고 있다고 한다. 시란은 옆에서 보고만 있을 뿐, 우가 아간조를 보고 스승이라고 한 게 아니다.

이게 의외로 좀 위험(?)한 부분도 있는데, 저 당시의 아간조는 30대 후반 ~ 40대 중반쯤이었고, 우는 잘 쳐줘도 10대 중후반(...)이라 잘 생각해보면 어린 소녀가 아버지뻘 되는 떠돌이에게 반했다는 상황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7]그리고 어린 소녀의 대쉬를 묵묵히 걷어찬 아간조는 고자 겸 성자가 되었다 인게임에서 우의 분위기도 그렇고, 말투가 좀 고상한 편이라 크게 와닿지는 않지만 우는 아직 24세다.

아예 이 스토리를 바탕으로 던파 카툰에 패러디된 내용이 올라왔는데 반응은 호평일색.#

그분을 모셔온 지 벌써 보름이라.
회복이 빠른 것은 다행이지만 표정이 내내 어두워 안쓰럽기 이를 데 없네.
이따금 검을 쓰다듬는 모습에 늘 노심초사하는 어리석은 계집이 여기있네.

가까이 뵈니 기쁘고 수줍어 얼굴을 들기 힘들지만,
한편으로는 슬프고 우울하여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네.
잔 실수도 잦아졌으나 스승님은 별말씀이 없으시네. 나도 아닌 척하네.

아무 말 없이 먼 하늘을 볼 때마다 무너지는 것은 내 가슴이니,
창 밖 지저귀는 원앙 한 쌍이 얄밉기만 하네.

입맛이 없다 하여 죽을 쑤어 드렸더니 억지로 수저를 들었다가 놓으며 누군가를 잊은 듯한데 생각이 나지 않아 답답하다 하시네.
떨리는 눈썹을 숨기지 못했더니 알고 있으면 대답해 달라시네.
평소에는 제대로 대답도 않더니 야속하기만 하네.

하는 수 없이 죽은 자라 대답하니 이름이라도 알려달라 하시네.
모른 척 돌아섰으나 어찌 잊었으리오, 그 부러운 여인의 이름을.

서산에 걸린 해를 동쪽 바다로 움직이면 꿈이 이루어질까.
어머니가 나를 일찍 낳았더라면 그분의 곁에 내가 설 수 있었을까.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이 어리석은 마음을.

버림 받은 것도 아닌데 설움이 복받치니 달이 나를 비웃겠네.
차라리 버림 받은 거라면 씁쓸한 추억 껴안고 잠이라도 들 것인데 잠들지 못하는 밤은 길기만 하네.

찬 방에 초를 켜니 새어온 바람이 작은 불을 흔들어대네.
바람아 멈추거라. 내 마음 이미 알고 있는데 왜 너까지 괴롭히느냐.
한심하고 불쌍하여 눈물이 그치질 않네.

날이 밝아 떠난다 하시니 박정한 스승님은 잘 가라는 말뿐이네.
다시 떨어진 물음 답할 이는 나뿐이니 곤궁한 내 모습 무어라 생각하실까.

망설이고 주저하니 나를 바라보는 눈빛 그저 궁금해하는데,
돌 같은 마음에 이 어린 계집은 그저 들풀이었구나.

하는 수 없이 이름을 일러드리니 드디어 환해지는 목소리에 폐부가 끊기네.
그리 소중한 것이었으면 처음부터 잃지나 말 것이지 왜 남의 복장을 뒤집는가.

고맙다며 가뿐히 떠나는 뒷모습.
그림자는 길기만 하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 옮기며 그저 웃네.
웃어야지, 어쩔것이냐. 웃어야지.

2.20. 창신세기[편집]

GENE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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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끝에 위대한 의지로부터 수많은 신이 태어나니 그들은 하나이자 무한이요 무한이자 하나이되 능히 그 의지와 권능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 없더라.

그들 중 하나가 문득 슬퍼하여 가로되 원통하고 원통하다 우리가 능히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으되 우리를 찬양하는 이가 없고 영원 속을 떠돌되 임하여 뜻을 이룰 곳이 없노라 하니 그들 중 나머지가 함께 슬퍼하더라.

또한 그들 중 하나가 입을 열어 가로되 우리가 스스로 우리를 영광되게 할 사랑할만한 것과 거하고 안식할 곳을 새로이 만들자 하니 이윽고 그들 중 나머지가 함께 기뻐하더라.

이 말을 한 자는 두 가지 얼굴에 찬연히 빛나는 이슬을 감춘 자였더라.

그가 다시 슬픔에 젖은 소리로 말하기를 창조는 곧 소멸이거니와 오직 우리 중 일부의 소멸로만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으리니 과연 우리 중 누가 이를 위해 소멸하여 위대한 의지로 회귀할 것이가 하니 그들 중 나머지가 무한의 목소리로 탄식하며 궁리하고 마침내 그들 중 열둘이 선택되어 앞으로 나왔더라.

이슬을 감춘 자가 눈을 들어 열둘을 바라보니 죽음이 두려워하는 자불의 숨결을 내는 자땅에 발을 딛지 않는 자피로 강철을 적시는 자수 백의 얼굴을 가졌으되 보이지 않는 자죽음에서 일어난 자한번에 수천의 무기를 쥘 수 있는 자더러운 피를 흘리는 자몸을 뻗어 능히 세상 끝에 닿을 수 있는 자말 없이 흙을 만지는 자진실을 꿰뚫어 보는 자비밀을 알고 있는 자였더라.

두 얼굴을 가진 자가 가들에게 외쳐 가로되 선포하노니 희생은 거룩한 것이요 우리가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하지 않을 것이매 오직 시련으로 연단된 칼만이 우리의 심장을 꿰뚫어 위대한 의지에 회귀토록 하리로다.

이것이 참 희생이요 소멸은 곧 창조이리니 우리가 임재할 곳과 우리로 하여금 영광되게 할 것들이 이로부터 창조되리라 하니라.

2.21. 붉은 죄[편집]

BLOODY S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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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 로바토의 과거 이야기

2.21.1. 1장[편집]


제국 협상단이 언더풋에 들어왔다는 소식은 빠르게 퍼졌다. 경계당하지 않기 위함인지 호위하는 인원이 많지는 않지만, 그 대장이 웨펀마스터 반이라는 소식이 주목거리였다. 제국을 싫어하는 흑요정들도 호기심을 참을 수는 없었던지 행렬이 지나가는 대로에 잔뜩 몰려나왔다.

나이트 로바토 : (반 발슈테트...)

잘난 척 손을 흔들고 있는 제국 귀족과 약간 거리를 둔 채 말을 몰고 있는 반의 얼굴은 그야말로 기사다웠다. 젊고, 자신만만하며, 절제된 행동거지 허리에 매달린 검이 부끄러울 지경인 협상단 대표와 비교하는 것이 미안할 정도로 품격이 느껴졌다. 로바토는 자기도 모르게 귀수를 어루만졌다. 무거운 구속구가 매달린 검게 비틀린 팔. 귀수를 가진 것에 좌절한 적은 없으나 이 귀수에 죽어간 사람들을 생각하면 부끄럽기 그지 없었다.

한때 로바토는 저 의기양양한 제국 기사들의 동료였다. 강함을 중시하는 제국에서 귀수를 가졌다는 사실은 아라드의 다른 나라만큼 큰 흥이 되지 않았다. 비정상적인 힘을 내는 귀수를 부러워하는 자가 있었을 정도다. 그런 환경 속에서 로바토는 비교적 탄탄대로를 걸으며 성장하였다. 귀족 출신이 아니기에 거쳐야 할 관문이 많았으나, 타고난 재능과 끈기로 남보다 쉽게 성과를 내었다.

하지만 언제가 떠오른 의문이 가슴에 박히기까지 시간이 그리 걸리지 않았다.왜 제국은 이다지도 강함에 집착하는가? 왜 약한 이를 구하는 것보다 스스로의 강함을 뽐내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가? 의문은 시간이 지날 수록 커져갔다. 로바토는 믿을 만한 동료 몇몇에게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그리 신통치 않았다.

"우선 내가 먼저 강해져야지 더 많은 사람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것이 그나마 가장 그럴 듯한 대답이었다.

언젠가 기사단장은 로바토와 다른 단원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었다.

"이 아라드는 썩었다. 질서가 무너졌고 법이 해이해졌다. 타락한 사람들은 탐욕을 위해 움직일 뿐이고, 몬스터는 이 혼란을 이용해 사람을 해친다. 그러니 우리가 곧은 법과 엄격한 잣대로 이 세상을 나락에서 건져올려야 한다!"

그 말은 작은 의문에서 시작된 흔들림을 단번에 멈춰버릴 정도로 강력했다. 우리는 옳다. 아니, 우리가 옳다. 우리야말로 구원자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싸우는 전사들이다! 이런 엄청난 사명을 받든 기사단 생활이 가혹했느냐고 한다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훈련은 고되었지만 충실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실수에는 관용이 베풀어졌고, 아픔에는 응원이 따랐다. 엄격하고 도덕적인 단장은 사적인 자리에서는 서투르지만 자상한 아버지 같았다. 단단하게 엮인 가족 같았다. 부모를 일찍 여읜 로바토로서는 처음 느껴보는 연대감이었다. 목숨을 건 임무도 이들을 위해서라면 해내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다소 경직된 기풍을 지닌 제국을 수호하는 기사단이 자유스럽고 화목한 분위기인 것은 역설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요즘 로바토는 그것이 황제가 노린 바라고 생각하고 있다.

제국, 정확히는 황제로 대표되는 황실을 위해 싸우는 정예군. 유대가 단단할수록 이단을 용서치 않는다. 로바토 역시 제국의 방향에 의문을 가진 것이 들통나 단장에게 불려간 적이 있었다. 크게 혼날 것이라며 겁먹은 신입 기사를 엄한 눈초리로 쳐다보던 단장은 갑자기 싱긋 웃었다. 백마디 호통보다 효과적이었다.

"기사단도, 제국도,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완벽한 조직이 아니다. 황제 폐하도 그렇지. 신이 아니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 잘못 생각할 때도 있고, 그건 우리 모두 마찬가지이지 않느냐? 나는 개인적으로 우리 제국이 강함을 추구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영토가 크다는 것은 그만큼 지켜야 할 것이 많다는 거지. 높은 분들은 좀 극단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말이지. 어쨌든 본질은 같다고 본다. 지켜야할 것이 너무 많기 떄문에 때로는 지키지 못하는 일도 발생하지. 네 말대로 약한 자를 구하지 못할 때도 있다는 말이다. 그건 우리 기사에게 있어 수치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훈련을 하고, 경험을 쌓는다. 약한 자를 하나라도 더 구하기 위해. 그런 와중에 가끔 본질을 잊고 잘난 체하는 바보도 있지만... 어딜가나 바보는 한둘 있지 않느냐? 네가 그런 놈들을 혼내주면 되는 거야."

신입 기사 로바토는 그날 이후 더욱 열심히 검을 휘둘렀다.. 황제의 뜻에 따라 더 많은 사람을 구하기 위해. 아라드의 구원자인 제국이 더 많은 아라드인을 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2.21.2. 2장[편집]


안정적인 생활을 계속하면서 처음 품었던 의문은 마치 반항기의 홍역처럼 잊혀졌다.

그런 '지루한' 의문을 가질 정도로 도덕적 이었지만, 로바토는 결코 싸움을 싫어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누구보다 호전적이고 겁이 없어, 늘 앞장 서서 싸우곤 했다.그래봐야 여자 힘이라며 비웃던 동료들도 단단하게 단련된 근육이 뿜어내는 괴력 앞에 맥을 못추고 나가떨어졌다.그럼에도 결코 자만하는 일 없이 꾸준히 수련을 계속했다. 그 성실함과 정의로운 성품은 그야말로 기사도의 화신이라고 할 만했다. 경험만 더 갖춘다면 제국 최고의 기사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단장이 로바토를 불렀다. 황제가 젊은 기사들을 각지에서 불러, 새로운 기사단을 만들 거라는 이야기였다. 단장은 기쁜 마음으로 추천서를 써주겠다고 말했고, 로바토는 그낭 당장 황금의 도시 비탈론으로 향했다.

수도 비탈론에 도착한 로바토는 새로운 기사단 시험에 무사히 합격하였다. 제국 각지에서 내로라하는 인재들이 모인 기사단답게 체력과 정신력의 한계를 시험하는 훈련이 매일 계속되었다. 하지만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국의 주인인 황제가 명예 단장이라 자처하고 있었다. 젊은 기사들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로바토는 첫 임무를 앞둔 그날을 상세히 기억하고 있다. 황제에게 드디어 실력을 보일 기회. 흥분되지 않을 리 없었다. 기사된 자가 주군 앞에서 자신의 명예를 드높이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 아니던가. 어린애처럼 잠을 못 이루던 밤, 창 밖에 총총히 빛나고 있던 별빛은 응원의 메세지인 것만 같았다.

그러나 깨달아야 했다. 기사의 가장 큰 영광을 '주군 앞에서의 활약'이라고 생각하는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다. 약자를 구하기 위해 검을 들겠다던 맹세를 어째서 잊었단 말인가? 그 알량한 명예가 얼마나 대단하기에 공명심에 취해 황제의 인형이 되어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또 죽였단 말인가?

기사단이 받은 임무는 간단했다. '더 나은 제국의 미래를 위해 검을 들자.' 기사단은 강력한 무력집단이다. 그들이 할일은 이름뿐인 부단장에게 물어볼 것도 없었다. 침략해오는 외지인을 처단하고, 그들의 땅을 빼앗는다. 제국인이 살 땅은 언제나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정말로 침략하였는지 여부는 알 바가 아니었다. 황제에게 불만을 가져 봉기한 자들을 베고 그 삼족을 멸한다. 제국의 질서를 어지럽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정말로 봉기했는지 여부는 알 바가 아니었다. 단지 '그런 자들을 처단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무엇이 진정 잘못되었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황제에게 향하는 비난은 곧 기사단원 각자를 모욕한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그들은 개인적인 분노마저 품은 채 검을 휘둘렀다. 먼 타지까지 나온 귀족이 황제를 대표하여 치하하는 말은 언제가 같았다. '진정으로 제국을 위하는 훌륭한 기사로다.' 정말로 강력한 최면제였다.

물론 그 과정에서 불합리가 있음을 몰랐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거대한 수레바퀴를 굴리기 위해서라면 방해가 되는 돌을 길에서 치워야했다. 억울함과 슬픔은 돌을 치울 때 생기는 자잘한 생채기 같은 것이다. 모두들 그렇게 생각했다.

긴 출정을 끝내고 돌아왔을 때 로바토는 외톨이가 되어 있었다. 밑바닥에서 꿈틀거리는 의문을 고고한 애국심으로 밟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생명은 모두 소중하니 적까지 구하겠다는 그런 허울 좋은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저지른 일을 납득할 수 없었던 로바토는 기사단을 나오겠다고 말했다. 부단장은 심드렁한 얼굴로 몇 가지를 물어보더니 갈 곳이 있냐고 물었다. 없다고 대답하니 추천서를 써주겠다고 했다. 제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연구자들을 돕고 호위하는 일이라고 했다. 기사로서 제국을 바꾸어보고 싶었던 로바토는 잠시 망설이다가 추천서를 부탁하였다. 행동하기 전에 어딘가 다른 곳에서 마음을 추스르고, 앞으로의 계획을 세울 시간을 갖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결정은 로바토의 인생을 크게 바꾸게 된다.

2.21.3. 3장[편집]


로바토가 가게 된 곳은 숲에 둘러싸인 넓은 실험장이었다. 평생 검만 휘두르며 살아온 로바토로서는 휘황찬란한 설비에 입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나이가 로바토와 크게 다르지 않은 연구원은 아라드에서 제일 가는 기술이라며, 이 기술이 유출되지 않게 막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실험장의 경비 업무를 서고, 연구원들을 호위하는 일은 전투에 비하면 일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수월했다. 휴양을 온 기분까지 느끼며 로바토는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골똘히 고민했다.

잠시나마 평화로운 시간을 보냈다. 자기반성과 패기 넘치는 의욕에 빠져 그곳이 어떤 곳인지 제대로 알아보지 않은 것을 지금도 후회한다. 인적이 드문 숲 속에 숨어있는 이유가 단순히 '기술 보안' 때문이라는 말을 도대체 왜 순진하게 믿었던 것일까.

언제부턴가 실험장의 분위기는 바뀌었다. 연구원들이 바깥으로 나가는 일이 금지되었고, 로바토가 속한 경비대도 마찬가지였다. 밖으로 나갈 수 없는 대신, 바깥에서 사람들이 찾아왔다. 커다란 나무 상자가 하루에도 몇 차례나 옮겨졌다. 간혹 들려오는 우는 소리는 실험용으로 끌려온 동물의 소리라고 얼버무려졌다.

어느 날 밤, 유달리 잠이 오지 않는 밤이었다. 산책 겸 바깥에 나온 로바토는 실험장 안쪽의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 숨죽여 다가갔다. 통제 구역 안으로 들어갈 권한은 없었지만 사고가 일어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무작정 들어갔다. 그리고 정말 기이한 곳에 도착하였다. 지금껏 멀리서 보아온 실험 장비들과는 사뭇 분위기가 다른 거대한 기계가 있었다. 원형의 고리가 얽히어 있는 듯한 그 기계는 바로 부서질 것처럼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웅웅거렸다. 주변에 서 있는 연구원들이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것은 무언가 잘못되어서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벌어질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는 설렘이었다. 로바토는 자기도 모르게 상자 뒤로 몸을 숨겼다.

한참을 시끄럽게 돌던 기계의 중앙이 빛나는 듯하더니 이내 강력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먼 곳에서 해가 뜬 것이라 착각할 정도로 엄청났다. 그뿐만 아니라, 빛 속에서 불어나오는 거센 바람 때문에 상자 바깥으로 얼굴을 내밀기 힘들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영문을 알 수 없어 주변을 둘러보던 로바토는 지금껏 어둠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것을 발견하고 굳어버렸다.

아이들이 있었다. 어른들도 있었다. 재갈까지 물린 채 두려움에 떨고 있는 그들의 팔은 붉은색이었다. 로바토의 숨이 턱 막혔다. 설마하는 마음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연구자들이 지켜보고 있는 것은 빛을 내뿜는 기계가 아니라 그 아래에 꿇어앉고 있는 한 남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른 귀수병 환자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귀수로도 끊을 수 없는 단단한 쇠사슬로 묶여있었다. 제압당한 흔적인지 온몸은 상처투성이였다. 입에 재갈이 물려있어 무어라 말하는지 들리지 않았지만, 분노와 증오로 치뜬 눈을 통해 그의 목소리가 생생히 들리는 것 같았다.

로바토는 벌떡 일어났다. 말릴 생각이었지만 기계에서 뿜어지는 빛이 한층 강해져, 그 일대가 온통 불길한 빛 속에 삼켜졌다. 시간이 조금 흘러 겨우겨우 눈을 뜨자 믿기지 않는 광경이 펼처져 있었다. 기계 곁에 있던 남자가 온데간데없었다. 대신 쇠사슬에 감긴 이상한 괴물이 있었다. 차마 생물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그것은 말라버린 생선머리에 나무 뿌리를 붙인 듯한 괴이한 모습이었다. 로바토는 물건 바꿔치기 같은 서커스의 기술을 떠올렸으나 그럴 리는 없었다.하지만 뇌가 사실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크게 뜬 채 괴물을 멍하니 바라보고만있었다. 심장이 마구 요동쳤다.

그때 누군가 로바토를 잡았다. 기겁하며 돌아보자 웬 여자 연구원이 다급한 표정으로 자기를 따라오라고 입으로만 이야기하고 있었다. 적의는 없어보였고, 너무나 당황했던 로바토는 그 여자가 이끄는 대로 달렸다. 뒤쪽에서 아득히 감탄과 한숨, 억눌린 비명이 섞이어 들려왔지만 욱씬거리는 귀수를 붙잡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로바토를 바깥으로 데리고 나온 연구원은 다시는 가까이 오지 말라고 경고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로바토는 그저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맥없이 돌아간 로바토는 자신을 잃었다. 제국을 바꾸겠다는 생각은 풋내기의 허세나 다름없었다. 도덕론은 괴물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거품처럼 사라졌다. 도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단 말인가? 나는 어떻게 해야 좋은 것인가? 이날 밤 이후, 주변의 모든 것은 달라져버렸다. 웃으며 지나가는 연구원들의 얼굴과 괴물의 얼굴이 겹쳐보였다. 믿을 사람도 없는 타향에서 홀로 무엇을 해야하는지 알 수 없었다. 고뇌하고 망설이며 시간만 보내고 있던 중, 기밀 자료를 훔쳐간 도둑을 잡으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의욕 없이 수색에 참여했던 로바토는 그들을 발견하고 자리에서 멈춰 섰다. 행색이 초라하고 비쩍 마른 그들은 모두 귀수를 가지고 있었다. 귀검사들은 악귀에 씐 것처럼 경비대를 향해 달려들었고 로바토는 이 싸움에서 의도치 않게 몇 명을 죽이고 말았다. 그러지 않았다면 자신이 죽을 판이었다. 정신을 차리고보니 자신과 함께 온 수색조는 모두 살해당하고 쓰러진 귀검사들은 악에 찬 눈빛으로 자신을 쏘아보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을 마주하며 로바토는 자신이 선택의 기로에 섰음을 깨달았다.

명령은 절대적이다. 이들을 살려보낸다면 자신도 제국에 쫓기게 될 것이다. 귀수를 가졌으니 어쩌면 실험대상으로 끌려가 그 무서운 기계 앞에 끌려가게 될지도 모른다. 로바토가 살아서 이들의 적으로 서 있는 이유는 오직 제국의 기사라는 이름 덕분이었다.

로바토는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갔다. 끔찍한 괴물이 자꾸 눈앞에 어른거렸다. 죽는 것은 두렵지 않다. 하지만 자신이 그런 괴물이 될지도 모른다는 위협은 죽음과는 별개의 공포였다. 결국 로바토는 자신의 마음이 이끄는 대로 행동했다. 귀검사들에게 숲에서 빠져나갈 길을 알려고 뒤쫓아온 다른 수색대원들을 베어 쓰러뜨렸다. 죽이지는 않았으나 배신자로 낙인 찍히기에 충분했다.

그날로 로바토는 제국 기사의 자격을 잃었다. 추적자를 피해 도망친 로바토는 검 한 자루를 들고 아라드를 정처 없이 떠돌아다녔다. 늘 긴장하고 살아야 했지만 그때 귀검사들을 도망치게 해준 일을 후회한 적은 없었다.

언더풋에 온 것은 수배령이 조용히 없어진 후였다. 빌마르크의 연구원들이 비인도적인 실험을 하던 것이 발각되어 황제의 분노를 사, 모두 엄벌레 처해졌다는 소문이 쉬쉬하면서 퍼졌다. 진실은 시간 속에 묻혔다.

로바토는 상념을 떨쳐내고 이제 상당히 멀어진 반 발슈테트의 뒷모습을 다시 눈에 담았다. 황제의 검이 되어 정의를 구현한것이 웨펀마스터 반이라는 이야는 들어 알고 있었다. 과연 저 남자는 제국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반 역시 제국에 이용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뻔뻔스레 그에게 충고를 해줄 수는 없다. 세상의 영웅이라는 평가대로 그가 제국을 바꾸어주길 바라는 수밖에.

로바토는 몸을 돌려 행렬에서 빠져 나왔다. 자신의 손에 죽은 이와 간접적으로 죽게 한 모든 이들에게 사죄와 명복을 빌 생각이었다. 등에 짊어진 생생한 죄가 오늘따라 유달리 무겁고, 아팠다.

2.22. 장난꾸러기 호문쿨루스[편집]

Beky . The LITTLE HOMUNCUL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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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자의 성의 말괄량이 베키가 말썽부리는 이야기(...).

아주 먼 옛날부터 마계의 한쪽 끝에는 하늘을 뚫을 듯 높고 커다란 성이 있었다. 그 성을 이름은 아무도 몰랐는데, 왜냐하면 들어간 사람은 다 죽었기 때문이다.
성이 엄청나게 높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저 성을 통해 하늘로 가면 신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조금 힘이 센 사람들은 신을 만나기 위해 도전했다.
그런데 성 안에는 엄청 강한 괴물이 있었다. 들어온 사람들은 강했지만 괴물들이 더 셌다. 사람들은 모두 죽어버렸다.
그래서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고, 밖에 남은 사람들은 안에 들어간 사람들이 하늘에 있는 신에게 가서 돌아오지 못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도전을 계속했다. 그런데 어떤 미친 용이 나타나서 사람들을 가로 막았다.
"내가 이 성의 주인이다! 신에게 가는 길은 나만의 것이다!"
용은 굉장히 컷고, 또 엄청 강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함부로 덤비지 못했다. 용은 의기양양해서 성으로 들어갔다.
괴물이 나와서 싸웠지만 용이 다 이겼다. 거인도 이기고 낡은 피에로도 이겼다. 용은 무적이었다.
그러다가 용은 성의 가장 높은 층에 다다랐다. 아무도 가보지 못한 곳이었다. 그곳에는 아주 아름답고 귀여운 금발 소녀가 있었다. 그 소녀는 무지 셌다.
용은 다짜고짜 소녀에게 덤볐지만 소녀가 이겼다. 소녀가 주먹을 휘드르자 용이 납작해졌다. 왜냐면 용은 소녀에 비하면 너무 약했기 때문이다.
소녀는 지금도 성의 꼭대기에 있다. 이 세상에서 제일 강하기 때문에 계속계속 그 자리에 있을 거다. 하지만 언젠가는 성을 무너뜨리고 밖으로 나가서 세상을 지배할 것이다.
그 소녀의 이름은 베키다.

베키 : 끝! 와아, 다 썼다! 이제 이걸 잔뜩 베껴서 바깥 세상에다가 뿌려아지. 그럼 언젠가는... 헤헤헤!

골드크라운 : 뭐~하는 거지요?

베키 : 으아, 꺄아아아아아아악!!

골드크라운 : 허덜덜! 갑자기 왜 소리를 질러요오오?! 아이언에임이 놀라서 경보 발동하면 어쩌려고!

베키 : 들었어? 들은 거지? 어디서부터 들었어? 왜 들었어?

골드크라운 : 웬 용이 성에 쳐들어가는 부분? 도대체 무슨 소설을 쓰는 거죠?

베키 : 바깥에 나가면 아무도 날 아는 사람이 없을 거 아냐. 내 이야기가 유명해지면 다들 날 신으로 섬기겠지? 그럼 맛있는 것도 먹고~ 예쁜 옷도 입고~~ 히히히.

골드크라운 : 호문쿨루스가 이상한 욕심만 가득 차서는... 이것도 루크님이 너무 완벽하게 개조를 해버리셔서 그런 걸까.
여기서 못 나간다는 얘기를 몇번이나 해야 알아먹나요? 그렇게나 심심하면 나한테서 마술이나 배워보시죠. 뭐어, 멍청한 호문쿨루스는 배우지도 못할테지만... 핫핫하!

베키 : 무궁한 꽃이 피었습니다!!

골드크라운: 에엥?

베키 : 무궁한 꽃이 피었습니다! 라고 했는데 움직였어! 골크가 수울래! 나 잡아봐라!

골드크라운 : 뭐? 뭐뭐? 골크? 골크라니... 왠지 어감이 멋있.. 아, 거기 서라구요!


골드 크라운을 피해 망루에서 도망친 베키는 쿵쾅거리며 죽은 자의 성을 들쑤시고 다녔다.

느닷없이 들려오는 소음에 놀란 펀쳐가 주먹을 날려, 버블버퍼의 뒷통수를 때렸다.버블버퍼는 이내 투명한 방울을 쏘며 응수했고, 이 싸움에 램퍼 셋이 희생되어 바닥에 굴렀다.

웹 스파이더는 베키가 오자마자 붙잡기 위해 위협적으로 높이 뛰어올랐다. 하지만 베키는 몸을 작게 움츠려 재빨리 굴렀고, 애꿏은 블루램퍼의 전구만 깨졌다. 베키는 발랄하게 웹 스파이더를 놀리며 도망쳤다.

하지만 멀리 가지는 못했다. 샐러맨더의 화로에 다가가자마자 경보가 울려며 아이언에임의 기동을 알렸다. 아무리 장난꾸러기라고 하더라도 말도 통하지 않는 아이언에임이 전투 태세로 변경했다는 말에 더이상 나아갈 수는 없었다.

비상 계단을 통해 몰래 돌아가려던 베키는 거인 아르고스의 커대란 손에 붙잡히고 말았다.

베키 : 놔줘~! 놔아줘어!!

아르고스 : 베키, 시끄럽다. 베키, 또 난장판을 만든다. 베키, 던져버린다!!

베키 : 아안돼애!!

골드크라운 : 아고고고, 아르고스!

아르고스 : 내 이름은 '아고고고, 아르고스'가 아니다!

골드크라운 : 아르고스! 그 꼬마를 놔요! 그 꼬마가 없으면 루크 님이 만드신 차원향법시스템이 멈춰버린다고요!

아르고스 : 크르... 애송이. 또 시끄럽게 하면..

베키 : 알았다구우! 놔줘! 피가 머리로 올라가서 토할 거 같단 말이야!


아르고스는 마음에 들지 않다는 듯 코를 벌렁거리더니 베키를 툭 내려놓았다. 머리부터 떨어진 베키가 앓는 소리를 했지만 아르고스는 쿵쿵거리며 제자리로 돌아갈 뿐이었다.

베키 : 우씨이... 아프잖아, 저 돌대가리!

골드크라운 : 용도 한방에 쓰러뜨린다면서 어째 아르고스한테 붙잡혀서 꼼짝도 못한데요?

베키 : ...씨이, 내 새총에 맞았으면 꼼짝도 못했을 거야! 내가 봐준 거라구!

골드크라운 : 그렇다고 쳐주죠. 크할할할할!

베키 : ...웃지 말란 말이야! 내가 호문쿨루스라도 엄청 강해질 수도 있는 거잖아! 흥이다! 내가 강해지면 제일 먼저 너를 잡아서 빙빙 돌려버릴 거야.

골드크라운 : 뭐 조금만 기다리라구요. 조금만 더 있으면 헤블론의 왕께서 힘을 되찾으실 테니... 그때가 되면 바깥으로 나갈 수 있을지도요. 이 세상을 전부 다 가지실 테니까.

베키 : 내가 더 강해지는 게 좋은데... 뭐어, 루크할아범한테 신세 진 것도 있으니까 그때까지만.. 아야! 왜 때려?!

골드크라운 : 다른 건 다 봐줘도.. 루크 님을 할아범이라고 부르는 건 용서 못합니다요오!

베키 : 알았어, 루크 님.. 루크 님이라고! 제대로 부르면 되잖아! 치이...
하아.숨바꼭질도 이제 지겨워. 진짜진짜 심심하다아. 바깥에 못 나가는 거면 누구라도 좀 놀러오면 좋겠다아~.

2.23. 막간의 이야기 - 노블스카이[편집]

INTERLUDE - NOBLE SKY
파일:INTERLUDE-NOBLESKY.png

천계 내전으로 반란군이 황도를 점령한 이후 조각난 세력의 뒷이야기.
스토리북 최초로 드롭 형식이 아닌 에픽퀘스트 최종 보상으로 각 챕터 중 한권을 받을 수 있다. 3캐릭 돌리면 된다.

2.23.1. 챕터1[편집]

황녀 에르제 : 짐은 어찌해야 했겠는가.


천계의 전함 노블스카이의 함교. 안톤을 물리치기 위해 군인들이 바삐 움직이던, 하지만 지금은 텅 빈 함교에 선 황녀 에르제가 두 눈 가득 푸른 바다를 담고 있었다.

에르제 : 짐은 어찌해야 했겠는가.

에르제 : 그들의 말대로 무법지대에 복수의 불을 질러야 했나. 대장군에게 어처구니없는 죄를 뒤집어 씌우고 있는 것을 보고 있어야 했나. 제국 황녀처럼 나라를 비우고 마계에 갔어야 했나.

에르제 : 할 수 없는 것을 시키는데 어찌했어야 했단 말인가.

운 라이오닐 : ......


대장군의 곁을 지키던 대령은 말이 없다. 그는 이곳에 도착한 후에도 몇 번이나 정신을 잃어 걱정을 샀다. 아직도 얼굴이 창백한 그를 보며 에르제는 염려도 되었으나 고맙기도 했다. 든든한 대장군이 곁에 선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잭터는 저 멀리 겐트에 갇혀 있을 것이다. 얼른 은퇴할 수 있게 도와 달라던 욕심 없는 노장군에게 그런 불명예를 안기고 있는 현실이 참으로 믿어지지 않았다.

에르제 : 왜 그러는가?

: 죄송합니다. 혼잣말을 하시는 건지 하문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에르제 : 답이 있으면 말하게.


허락이 떨어지자 운은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바닥에 대었다. 순전히 고집만으로 병상을 박차고 일어난 몸으로 차가운 바닥이 부담스러울 법하건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 의무를 저버리고 전쟁에서 도망친 귀족들은 큰소리를 칠 입장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기세 등등한 것은 황녀님께서 죄를 묻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체포되지 않은 범죄자가 그러하듯 그들은 자신들에게 정말로 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귀족들을 용서한 황녀님께 화를 내니, 이번 일은 거기에서 비롯되었다 볼 수 있습니다.


사실은 위로를 받고 싶었던 에르제가 입술을 깨물었다. 비판을 언제나 달게 받아들이겠다고 했지만 한계에 몰려 있기에 어쩔 수 없이 나온 분노였다.

예전에 잭터에게도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는 도망친 귀족들을 체포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카르텔에 붙잡힌 자신도 죄인이라며, 그들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며 끝내 반대했다.

그렇지 않아도 회한이 물밀듯이 몰려오고 있는데 같은 이야기를 들으니 눈물이 고였다. 자연스레 말투가 딱딱하게 바뀌었다.

에르제 : 이 나라의 부는 그들이 가지고 있으며 병사들 역시 상당히 다쳐 그들을 제압하기 어려웠다. 포로가 되어 나라에 우환을 안긴 짐으로서는 덕을 보여 그들에게 반성할 기회를 줄 수밖에 없었다.

: 하지만 네빌로 유르겐이 있었습니다. 그는 야심이 있지만 남자라서 받는 차별 때문에 황녀님이 보이신 틈을 더 집요하게 파고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 그가 왜 안전을 버리고 겐트에 남았으며 스스로 젤바에 가 탐사를 주도했겠습니까. 정말로 권력의 중심에 있는 자는 자리를 함부로 비우지 않습니다. 그는 황녀님과 다른 귀족들에 대비되어 보이려 했습니다.

: 그의 행보에 불만을 느낀 귀족들이 먼저 들고 일어났습니다만, 작금의 위기만 넘기면 백성들의 민심은 네빌로 유르겐에게 향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황녀님의 입지는 더욱 좁아집니다.

에르제 : 이번 일은 귀족들이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해 벌인 짓이다. 그들이 네빌로 유르겐을 압박하지 못하리라 보는가?

: 백성들이 기억합니다. 황녀님이 부재하실 때 누가 겐트에 남아 싸웠는지. 도망쳤던 귀족들은 이번 일의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백성들의 지지를 받지 못할 것입니다.

에르제 : 그렇다면 이글아이 대장군이 천계를 위해 싸우신 것도 기억할 터. 백성들은 왜 그분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인가.

: 그 점은 저 역시 무법지대 출신이라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에르제는 입을 다물었다. 사실, 답을 알고 있는 물음이었다. 황도 백성들과 귀족들이 잭터에게 갖는 경계심은 에르제가 부추긴 것이나 다름없다.

무법지대 출신인 잭터가 황녀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는 모습은 오래된 편견으로 가득 찬 사람들에게 위협으로 받아들여졌다. 그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던 운이 대답을 피한 것이다.

에르제 : 그럼 대장군에게 누명을 씌우는 것은 어떻게 해야 했겠는가. 짐은 그들이 헛된 소문을 떠드는 것을 막기 위해 많은 시간을 들여야 했다.

: 차라리 사령관님의 죄를 따지셨음이 나았겠습니다. 그들이 꼬투리를 잡은 것은 겐트를 비워 황녀님의 봉변을 초래했다는 것과 안톤을 불필요하게 추격했다는 부분이었습니다.

: 하지만 안톤을 막는 것은 필요한 과정이었고 승리를 거두었으니 작전상의 흠이 될지언정 죽을죄까지는 되지 못합니다.

: 국문장에서 황녀님이 직접 용서하시고, 안톤을 토벌함으로써 루크 역시 막을 수 있었음을 강조하시어 공으로써 흠을 덮었다면 일사부재리에 따라 더 이상 수면 위로 뜨지 않았을 것입니다.

: 하지만 사령관님의 공만 강조하시고 흠을 덮지 못하셨습니다. 적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으며, 그들의 뜻대로 재판이 진행될 것입니다.


운은 자주 기침을 했지만 막힘 없이 대답했다. 문답이 시작될 때만 해도 서운함이 앞섰던 에르제는 완전히 다른 기분으로 젊은 대령을 보았다. 20대에 준장 임명 제안이 나온 게 오직 군공 덕분만은 아닌 듯했다.

하지만 에르제는 거부감 역시 느꼈다. 운이 내놓은 해결책은 영웅의 이름에 한순간이나마 먹칠을 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에르제 : 우리는 카르텔이 아닐세. 명예는 명예로써 답해야 하네. 군인은 나라와 명예를 지키기 위해 싸우지 않나.

에르제 : 말도 안 되는 소문을 풀기 위해 대장군을 국문한다니... 자네의 생각에 새로운 점이 있는 것은 알겠으나 그분을 모욕하는 건 아니될 일이야.


아까보다는 말투가 부드러워졌으나 황녀의 목소리에는 채 숨기지 못한 거부감이 남아 있었다. 만일 유르겐이 여기 있다면 에르제를 가리켜 '도덕적 결벽증'이라 했을 것이다.

에르제 : 그러나 대장군이 왜 자네를 중히 쓰셨는지 알겠네. 남의 말만 듣고 사절로 보내려 했는데 진작에 자네와 깊이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것이 아쉽군.

에르제 : 대령, 유르겐은 천계를 좌지우지하고자 하네. 하지만 제국을 끌어들인 그가 천계를 이끌면, 제국에 빚을 진 꼴이 되고 마네. 그럼 제국과의 협상에 대등하게 나설 수 없게 되지.

에르제 : 유르겐을 막아야 해. 그러려면 겐트로 돌아가야 하네. 자네에게 계획이 있는가?

: 원군을 부르시고 작전은 다른 분들께 맡기십시오. 이번 일은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에르제 : 웨스피스와 이튼 말인가. 그들은 아직도 움직이지 않았어. 짐이 부른다고 해서 오겠는가.


에르제는 치맛자락을 꼭 쥐었다. 끝끝내 참지 못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배신감과 슬픔이 다시 떠올랐다.

만약 위로의 한마디라도 들었다면 울음이 터졌을 것이다. 하지만 운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덕분에 나약함을 꾹꾹 누를 수 있었다.

에르제 : ...그들을 기다리며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네. 유르겐만이 문제가 아니야. 귀족들은 대장군을 죽일 것일세.

에르제 : 짐을 믿고 도와준 모험가와 겐트에서 기다리고 있을 다른 이들을 실망시킬 수 없네. 어떻게든 빨리 움직여야 해.

: 저에겐 그럴 힘이 없습니다. 차라리 네빌로 유르겐의 암살을 명하십시오. 그것만이라면 제 목숨을 버려서라도 성공시키겠습니다.

에르제 : 자네마저 잃을 수는 없네. 그리고 암살 역시 허락할 수 없네. 우리는 그들과 달라야 해. 힘겨운 길이 되더라도 전쟁에 지친 백성들 앞에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단 말일세.

에르제 : 다른 방법이 있을 것일세. 지금은 찾을 수 없더라도 필사적으로 찾으면 보일 것이야.


에르제는 단호했다. 운은 엎드린 채 황녀를 올려보다가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에르제 : 무리한 요구를 하여 미안하네. 하지만 우리마저 피의 정치에 흽쓸린다면 백성들이 믿고 의지할 대상이 사라지고 마네.

에르제 : 짐에게는 그간 생각해 온 계획이 있네. 여태 귀족의 방해 때문에 이루지 못했으나 이번 일을 넘기기만 하면 성사될 가능성이 커지네.

에르제 : 그러면 짐과 대장군이 그리던 천계에 한 발짝 가까워지지. 지금처럼 멋대로 날뛰는 귀족들도 힘을 못 쓸 터. 자네를 아들처럼 여긴 대장군을 위해서라도 힘내 주게.

: ...알겠습니다.


운이 가까스로 대답하자 에르제는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함교를 떠났다. 갑작스레 날아든 바닷바람에 잠시 움츠러들었으나 이내 어깨를 펴고 눈을 크게 떴다.

떨며 눈물짓던 황녀는 온데간데 없었다. 타고난 명민함과 카르텔 앞에서도 꺾이지 않았던 의지가 에르제를 새로이 채웠다.

에르제 : (...비록 이곳까지 몰렸지만 아직 살아있다. 살아있는 한 나라와 백성을 위해 할 일이 많다. 나를 믿어준 대장군과 모험가를 위해서라도 절대 포기해서는 안된다...)


에르제의 눈은 이제 더 이상 차가운 바다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운은 상황이 달랐다. 자책, 또 실패할 것이라는 두려움, 자신이 아니라 잭터가 이곳에 있었다면 상황이 훨씬 나았을 것이라는 확신이 그를 심하게 괴롭혔다.

함교에 홀로 남은 운은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에 몸이 굳어가는 것도 모른 채 부하들이 올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2.23.2. 챕터2[편집]

황녀가 없는 겐트의 궁궐. 곳곳이 부숴지고 심지어 불에 탄 흔적도 남아 있는 오래된 궁궐이 들어선 네빌로 유르겐은 치솟는 분노를 간신히 억누르고 자신의 딸, 마리안 유르겐을 불렀다.

하지만 화를 참은 보람이 없었다. 주변 사람을 물리친 채 황녀의 서재에서 딸을 기다리던 그는 부른 지 상당한 시간이 지나서야 딸이 해안수비대의 대장 하이람과 함께 얼굴을 들이미는 것을 보고 분통이 터지고야 말았다.

네빌로 유르겐 : 멍청하구나! 네가 어찌 아비에게 이런 불효를 저지를 수가 있단 말이냐?

마리안 : ...생각보다 빨리 오셨군요, 아버님.

네빌로 : 할 말이 그것뿐이냐?

마리안 : 저야말로 아버님이 왜 그렇게 화를 내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버님 대신에 잭터 이글아이를 사로잡고 황녀를 쫓아내었는데 왜 역정이십니까?


너무 화가 나서 말이 막혀버릴 때가 있다. 너스레를 떠는 딸을 앞에 둔 네빌로 유르겐의 상황이 딱 그러했다. 유창한 언변을 자랑하는 그였지만 목에 뭐가 막힌 듯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리안의 뒤에서 참으로 화목한 부녀의 대화를 지켜보던 하이람이 싱긋 웃었다.

하이람 클리프 : 너무 화내지 마십시오. 따님은 지휘관 노릇을 제법 훌륭히 해내셨습니다. 염려하시던 것처럼 품 안의 자식이 아님을 확인하셨으니 오히려 마음을 놓으셔야 할 때가 아닙니까?

네빌로 : 하이람 대장. 자네는 도대체 무슨 생각인가? 내 딸을 부추겨 사달을 내다니! 이렇게 되면 우리가 카르텔과 다를게 무엇인가?

하이람 : 무슨 말씀이십니까? 당연히 다르죠. 하늘은 기다려주지 않으니 때가 가까워지면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법이라고 하신 건 공이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해안수비대도 대기하고 있었던 거고요.


하이람은 가볍게 대꾸했으나 인상을 찌뿌리는 것까지는 숨기지 못했다. 하지만 유르겐은 그의 표정 변화를 알아챌 여유가 없었다.

네빌로 : 아직은 아니었네! 자네들은 황녀가 무력하게 쫓기는 모습을 백성들에게 보여주고 말았어! 카르텔도 아니고 제국과 귀족에 의해 쫓기는 꼴을!

네빌로 : 동정심은 무서운 방패일세. 무능한 황녀가 왜 아직도 지지를 받는 줄 아나? 케케묵은 충성심 때문만은 아니야. 백성들은 정에 약하네. 그놈의 정 때문에 황녀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단 말일세.

네빌로 : 황녀는 아무 일도 안한 대신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어. 백성들도 그걸 알아. 어린 나이에 고생하는 황녀를, 자식처럼 여기고 있는 이들이 우리를 또 다른 카르텔로 여길 거란 말일세!


유르겐의 언성이 커졌다. 하지만 마리안은 당황하기는커녕 차가운 시선을 보낼 뿐이었다.

마리안 :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이번 일에 아버님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는데 '우리'라니요?

네빌로 : 무슨 말이냐?

마리안 : 황녀가 도망치고 이글아이가 사로잡혔을 때 아버님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젤바에 계셨지요. 일을 주도한 것은 저와 베르테 공, 그리고 해안수비대인데 아버님이 왜 제게 역정을 내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던 네빌로는 낯선 것을 보는 눈으로 마리안을 쳐다보았다. 시키는 말에 순순히 따르던 딸이 너무도 달라진 까닭이다.

마리안은 그런 아버지에게 켕기는 구석이 있었으나 턱을 들어 당당한 태도를 취했다. 아버지를 존경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여자가 언제까지 아버지 등 뒤에 숨을 거냐는 비웃음을 지겹게 들어온 터였다.

마리안 : 아버님께서 준비해주신 덕분에 저의 일이 수월해진 점에 대해서는 따로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저도 언제까지고 아버지 도포자락이나 잡고 다닐 수는 없습니다.

네빌로 : ...내가 하는 일이 네가 하게 될 일이었다. 그 잠깐을 참지 못하여 일을 그르친단 말이냐?

마리안 : 남자의 눈으로는 성급해 보이시겠지요. 하지만 여자의 시각으로는 충분히 때가 무르익었습니다. 이글아이는 나라를 어지럽힌 죗값을 치를 것이며, 황녀가 그 옆에 꿇어앉게 될 것입니다.


허탈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던 네빌로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네빌로 : 내가 이래서 너의 귀족원 출입을 최대한 늦추었던 것이다. 황녀를 심판하겠다고? 내가 아까 무어라 말했느냐? 황녀는 죄가 없다. 우리가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도, 백성들은 무능할지언정 죄가 없다고 생각한단 말이다.

네빌로 : 무능한 왕은 물론 그 자체로 죄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옥좌에 오른 황녀에게 시간이 부족했음은 너도 알고 그들도 안다. 내가 왜 위험을 무릅쓰고 이글아이를 공격했겠느냐? 왜 군인무용론을 퍼뜨렸겠느냐? 그럴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네빌로 : 황녀의 날개이자 보호막은 이글아이였다. 새를 잡을 때 먼저 날개를 꺾듯, 필요한 순서였기에 이글아이를 공박한 것이다. 그를 떨어트리고 홀로 남은 황녀를 압박하여 제 손으로 옥좌를 넘기게 해야 했다!

네빌로 : 그 후에 시골에 있는 작은 신전에나 처박아 두고 평생을 비웃음 속에 살아가도록 해야 했거늘! 네 덕분에 황녀는 또다시 가여운 어린 황녀가 되었단 말이다!

마리안 : 그럼 황녀를 죽여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서야 후환거리가 생기지 않습니까!


마리안이 반발하자 네빌로는 차라리 적을 보는 눈으로 제 딸을 쳐다보았다.

네빌로 : 후환은 안톤에게서나 찾아라. 군대를 무너뜨리고 파워스테이션을 짓밟은 안톤과 가진 것이라고는 백성의 동정뿐인 황녀가 같은 줄 아느냐? 만일 이글아이가 그 때 추격을 반대했다면...


홧김에 말을 계속하려던 네빌로 유르겐은 옆에 하이람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가까스로 말을 삼켰다.

하이람 클리프. 해안수비대의 대장이며 헤르만의 제자였던 남자. 서글서글해 보이지만 그의 본모습이 외견과 같지 않다는 것을 네빌로는 알고 있다.

이 남자를 곁에 두어야 한다. 현재 네빌로가 가질 수 있는 가장 날카로운 무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뢰해서는 안 된다. 폭탄의 위력을 믿는 것과 폭발 속에서 자신만은 안전할 것이라 믿는 것은 다르니까.

네빌로는 심호흡을 했다. 머릿속은 온갖 감정과 생각으로 끓어 넘치기 직전이었지만 자연스레 체득한 포커페이스가 훌륭한 방패가 되어주었다.

자신이 갈고 닦은 방패 뒤에서 재빨리 머리를 굴린 그는 가장 효과적으로 딸을 움직일 목소리, 즉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네빌로 : 가라. 곳간을 열고 백성들을 진정시켜라. 젤딘 슈나이더와 마를렌 키츠카에게 가서 황녀를 해할 생각이 없다고 말해라. 절대로 둘을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나도 너를 도와줄 방법이 영영 없어지게 된다.


네빌로의 예상대로였다. 아버지의 꾸중보다 지친 목소리가 마리안을 초조하게 했다.

모험가의 참견 때문에 완전한 승리를 거두지 못해 내심 불안해하던 마리안은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총총히 자리를 떠났다.

하이람 : 당당하더군요. 경험한 좀 더 쌓으면 훌륭한 군인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네빌로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군대는 필요하지만 군인은 필요 없다. 폭력을 훈련받은 군인은 카르텔과 본질적으로 같기 때문이다. 유사시에는 민간인이 무기를 들면 된다.'라며 군인을 감축시킨 네빌로에게 하이람의 말이 결코 칭찬일 수 없었다.

네빌로 : 자네는 내 딸과 성급한 귀족들을 충동질하여 이 사태를 벌여 놓았네. 도대체 무슨 생각인가?

하이람 :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저는 이글아이가 싫습니다. 안톤 때야 달리 방법이 없어 저를 믿는 시늉을 했지만 언젠가는 저를 내칠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하이람 : 당하기 전에 먼저 움직이는 것은 군인이나 정치가나 마찬가지지 않습니까? 굳이 해명하지 않아도 충분한 이유라고 생각하는데요.

네빌로 : 기다리고 있으면 내가 자네에게 기회를 주었을 것일세.

하이람 : 그만두시죠. 당신의 계획대로면 저와 해안수비대는 단순히 당신의 무기로 쓰이고 버려졌겠죠. 그런 손해 보는 짓을 왜 해야 합니까?

네빌로 : ......

하이람 : 아무튼 당분간 황녀를 쫓지 않는 것으로 결론이 났군요. 천계의 영웅인 모험가가 황녀를 도왔으니 이번 일에 동조한 귀족은 물론 백성들도 당황스러워할 겁니다.

하이람 : 그러니 더더욱, 이글아이를 죽여야 할 겁니다. 당신은 그를 죽이는 대신 유배를 보낼 생각을 했던 것 같지만.

하이람의 마지막 말은 비웃는 듯했고, 짜증을 내는 듯도 했다. 유르겐은 흘러내린 안경을 들어 올리는 척하며 놀란 눈을 감추었다.

네빌로 : ...이글아이가 어쩌면 필요해 질 수도 있네.

하이람 : 하나만 하시죠. 버리든가, 살리든가. 게다가 이젠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늙은 독수리를 살려 놓으면 다음에 죽는 건 당신이 되겠지요.

하이람 : 아무튼, 저도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당신의 준비 덕분에 편한 점도 있었지만 귀찮게 된 것도 많아서요. 정산은 나중에 하시죠.


하이람까지 돌아가자 황녀의 서재에 남은 것은 네빌로뿐이었다. 의자에서 일어난 그는 한참을 서성였다.

네빌로 : (하이람을 죽여야겠군. 쓸 만한가 싶어서 주웠지만 오발만 일으키는 총 따위 애초에 쓰는게 아니었어...)

네빌로 : (없애야겠군. 없애야겠어. 지금은 황녀가 문제가 아니야. 낡은 생각에 빠져 날뛰는 다른 귀족들도 문제가 아니야. 제 목숨줄을 누가 쥐고 있는지도 모르는 미친개가 문제다.)


이를 빠득빠득 갈면서도 네빌로는 신중함을 잃지 않았다. 혹시 있을지 모를 염탐을 우려한 그는 결코 입 밖으로 소리를 내지 않았다.

하지만 네빌로의 머릿속은 피로 가득 차 있었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갖은 수단을 떠올리던 그는 문득 어떤 생각을 떠올랐다. 그리고 빙그레 웃었다.

2.23.3. 챕터3[편집]

니베르 미하일 : 어쩔까.

비연 : 뭘요?

니베르 : 황녀님에게 달려갈까, 아니면 가만히 있을까


이튼 사령부의 연병장 구석에서 콜라를 마시던 니베르가 한가롭게 물었다. 하지만 말 상대가 된 비연은 결코 한가로운 기분에 빠질 수 없었다.

그녀는 목을 무리하게 꺾어 상관이 혹시 취하지는 않았는지, 혹은 다른 사람이 가발을 쓰고 앉아 있지는 않은지 확인했다.

켜켜이 쌓인 구름을 먼눈으로 보던 니베르는 비연의 얼굴이 가까워지자 피식 웃었다.

비연 : 콜라 냄새가 지독한 걸 보니 중장님이 맞군요. 오늘 몇 캔째죠?

니베르 : 콜라에 취하진 않아. 그나저나 콜라가 냄새가 나던가?

비연 : 중장님처럼 마시면 안 날 것도 나요. 그렇게 마셔대면 마흔 넘기자마자 틀니를 하게 될 걸요.

니베르 : ...늙은이 취급하지 마. 아직 내 이빨은 튼튼하다고.

비연 : 이상하니까 그러죠. 황녀님을 위해 싸우던 분이 갑자기 그런 소리를 하니까.


비연은 읽던 책을 덮었다.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는 조용한 오후다. 군인이라는 틀 속에서 상관과 부하라는 경계를 지켰던 두 사람은 용병이었을 때의 말투로 대화를 계속했다.

니베르 : 그때는 황녀님이 카르텔에 대항하는 하나의 상징이었지만... 이젠 나도 좀 지겹군.

니베르 : 싸우는 거야 상관없지만, 끝이 있어야 보람 있는 거잖아. 전쟁이 겨우 끝이 보인다 싶더니 이번에는 겐트에서 반란... 이 난리가 언제 그칠까.

비연 : 카르텔은 황녀님의 잘못이 아니었죠.

니베르 :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지. 선대 사제가 죽은 후에 카르텔이 다시 일어났으니까. 안톤이야 자연재해급이지만 그 외의 문제는 책임자의 잘못이지.


생각에 잠긴 니베르를 보던 비연은 그가 만지작거리던 콜라를 빼앗아 쭉 들이켰다.

달달하고 시원한 콜라를 기대했지만, 생각보다 더 미지근한데다 김도 다 빠져 있어서 입맛만 버리는 꼴이 되었다. 잔뜩 인상을 구기는 고운 얼굴을 보며 니베르가 거들먹거렸다.

니베르 : 이래서 내가 보급의 중요성을 늘 강조하는 거라고. 싸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병참이지. 하지만 아직도 해결이 안 됐어.

비연 : 중장님의 콜라 타령은 좀 심하지만요. 그래서? 사령관님이 뭐라고 하셨길래 어울리지도 않게 고민이시죠?


비연이 말하는 사령관은 이튼 사령부의 총책임자를 가리키는 것이다. 짜증의 원인을 지적받은 니베르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니베르 : 이참에 독립하는 게 어떨까 하더군.

비연 : 네?

니베르 : 천계의 전기는 이곳에서 생산하지. 기반 시설이 다 복구되지 않았지만 기술자들이 돌아왔으니 세븐 샤즈의 지원을 받지 않아도 이튼 하나쯤 돌릴 정도로 회복됐어.

니베르 : 해안수비대는 겐트로 갔고, 귀족들도 당분간 그쪽 문제에 정신이 없을거고, 황도군은 말할 것도 없으니 전기 공급을 약점 삼아 권리를 주장한다는 게 그 아줌마 생각이야.

니베르 : 요컨대, 우리 사령관 아줌마는 이튼의 총독이 될 생각이란 거지.


가벼운 말투였기에 충격이 천천히 찾아왔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총독'이라는 두글자를 중얼거리던 비연이 돌연 니베르의 어깨를 세게 때리기 시작했다.

비연 : 미쳤어! 그걸 가만히 듣고만 있었어요? 그러니까 낙하산 소리나 듣지!


이번엔 니베르가 잠시 말을 잃었다. 갑작스레 날아든 진실이 너무나 아팠기 때문이다.

니베르 : 아직은 망상 수준이야. 괜히 자극하기 뭐해서 그냥 '재밌네요, 허허.'했지 뭐... 아야! 그만 좀 때려!

니베르 : 이튼에 있어 중요한 시점이라고! '우리끼리라도 잘 살 거냐, 아니면 오래된 대의를 이어갈 것이냐'라는 선택의 기로라니까?

비연 : 엉뚱한 생각하지 말아요! 이 좁은 나라에서 그딴 짓 했다가 잘못되면 꼼짝없이 죽을 텐데 무슨...아.

니베르 : 그래. 옛날과는 달라. 아랫세계가 있지. 게다가 꼭 겐트를 통하지 않아도 갈 수 있고. 거긴 여기보다 훨씬 넓다고 하니 도망자를 찾기도 힘들걸.

비연 : 나라의 위기라고 생각했는데... 야심가들에겐 딱 좋은 기회로군요.

니베르 : 그러니까 처음에 물어본 거잖아. 황녀님에게 달려갈지, 아니면 가만히 있을지를.

니베르 : 황녀님에게 달려가면 감성은 충족시킬 수 있겠지만 다른 일이 벌여졌을 때 움직일 수 없어. 탈주자도 나올 거고, 여차하면 이튼을 벗어나기도 전에 아줌마에게 잡혀.

니베르 : 여기 남으면 총독 지망생께서 허튼짓하기 전에 적절히 조치할 수 있어. 하지만 이 경우 황녀님은 부평초 신세를 혼자 힘으로 이겨내야 해.

니베르 : 여기 남아서 지지표명을 하면? 바로 영창에 처박히겠지. 대탈주극 끝에 바다에 빠지는 소설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으면 입 다물고 있어야 해.

니베르 : 머리 좋은 아줌마야. 반란죄에 죄다 걸릴 짓을 꾸미고 있으면서 증거 하나 안 남겨. 총독 건도 자기가 직접 말한 게 아냐. 고자질하면 상관 모독죄로 내가 잡혀 들어갈걸?


니베르는 투덜거렸지만 비연은 안심이 되었다. 이러쿵저러쿵해도 용병 시절부터 모신 상관이 바뀌지 않았다는 걸 확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니베르 한 명이 옛 모습 그대로라고 해서 모든 일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비연 : 황도에는 제국군이 많이 있어요. 숫자만 보면 그쪽이 더 많죠. 카르텔 때문에 낡은 무기도 다 망가진 상황에서 전기까지 끊기면 상황은 더 어려워지겠죠. 그땐 황녀님의 복권이 문제가 아닐지도요.

비연 : 무법지대, 아니 웨스피스 사령부는요? 거기도 아직 안 움직이고 있잖아요. 어떻게 하겠어요?

니베르 : 거긴 논외로 치지. 집안 정리하는 것만으로 힘들걸. 카르텔 잔당에, 민병대에, 반정부 시위에... 어휴. 닐스한테도 매달리나 보던데? 내가 거기로 안 간 게 다행이야.

비연 : 이럴 때야말로 이글아이 사령관님이 계셔야 하는 건데... 귀족들이 그분 이미지를 다 망쳐놨어요. 그분만큼 훌륭한 분도 찾기 어려운데.

니베르 : 글쎄. 휘둘린 사람도 잘못이 있지 않을까. 욕할 땐 같이 욕해 놓고 추궁받을 땐 남이 하는 말만 듣고 그랬다고 하는 게 더 싫은데.

비연 :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요...


부하가 툭 떨어트린 슬픔 앞에 니베르가 입을 다물었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을까. 혹자는 안톤의 등장이 천계의 근간을 흔들었다고, 혹자는 아랫세계와의 교류가 천계의 비극을 초래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니베르는 생각이 달랐다. 그는 고개를 숙인 비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두꺼운 구름 뒤로 숨은 태양이 이제 완전히 지평선 너머로 넘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니베르 : 모험가님이 아랫세계와의 길을 열었지. 그분이 제국군과 함께 온 후에 카르텔과 안톤의 사태가 정리되었어. 루크도... 어쩌면 이 모든 게 모험가님이 불러온 변화의 일부일지도 몰라.

니베르 : 새로운 바람일지, 단순한 부작용일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갈등의 원인은 그분이 가져온 게 아냐. 우리 내부에 있던 거지.

니베르 : 앞으로 어떻게 될까... 그나마 다행인 건 나에게 선택의 여지가 있다는 점이군.

비연 : 선택했어요?

니베르 : 응. 난 이 곳에 남겠어. 너는?

비연 : 뭘 물어보세요. 중장님 혼자 둘 수 없죠.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 아래로 비연이 부드럽게 웃었다.

[1] 영제 자체는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패러디이다 (Hitchhiker's guide to the Galaxy).[2] 클론터의 애완 동물인 날아다니는 호랑이 라미나비엔토 애칭[3] 원문에서는 '이상한 아저씨를 주웠다.'라고 비문이 적혀있다.[4] 유럽 귀족 계급상 공후백자남을 떠올리고 '자작이 남작보다 높은데?'라 생각할 수 있지만 역사적으로도 왕이나 황제가 직접 임명한 남작은 높은 귀족들도 무시할 수 없는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로인해 반은 제국 정계에서도 이른바 '실세'로 격상된 것이니 당연히 기존 귀족들이 탐탁찮게 여길만 하다.[5] 속으로는 매우 슬프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모습.[6] 스토리북 표지의 철자가 틀렸다.[7] 비명굴 직후라고 착각할 수도 있는데, 아간조는 록시를 떠나보낸 후 수 년에 걸쳐 대륙 곳곳을 떠돌아다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