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항해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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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별 명칭

영어

The Age of Discover

한자

大航海時代

중국어

地理大发现

일본어

大航海時代(だいこうかいじだい)

1. 개요2. 배경들
2.1. 포르투갈의 경우2.2. 스페인의 경우2.3. 기술력2.4. 향신료
3. 연표4. 경과 및 쇠퇴5. 목숨을 건 항해6. 관련 문서7. 대중매체에서의 등장8. 기타

1. 개요[편집]

유럽인들이 항해술을 발전시켜 북아메리카남아메리카로 가는 항로와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동남아시아, 동북아시아로 가는 항로를 발견하고 최초로 세계를 일주하는 등 다양한 지리상의 발견을 이룩한 시대를 말한다. 대체로 포르투갈엔히크 왕자를 주축으로 한 15세기 초중반의 해외진출에서 시작되었다고 본다. 이후 콜럼버스의 유럽-아메리카 항로의 개척, 바스코 다 가마의 아프리카 남단을 통한 인도항로의 개척, 그리고 마젤란의 세계일주 항해가 이루어진 15세기 말~16세기 초반에 정점에 달하였다. 그리고 스페인 정복자들에 의한 식민제국 건설, 영국네덜란드동인도 회사 설립을 끝으로 대항해시대는 막을 내리고 유럽은 식민지 땅따먹기에 혈안이 되는 근대 제국주의 시대로 넘어가게 된다는 점에서 세계사적 의미가 크다. 이를 두고 진정한 세계사의 시작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비록 피로 물들기는 했지만...

이전에는 한국에서도 '위대한 콜럼버스가 최초로 대륙을 발견했다'는 식의 표현을 자주 사용했고 지금도 그러한 표현이 널리 퍼져 있다. 정작 한국이 그러한 서구 세력의 '발견과 진출'의 주체가 아니라 피주체임을 생각해 본다면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90년대까지만 해도 서구의 전통적인 사관이 한국에서도 널리 교육과정에 받아들여질 만큼 일반적인 사관이었다. 아니, 서구에서도 이러한 식으로 재평가가 이루어진 것은 그렇게 오래 되지 않았으며[1], 2010년대 와서는 세계적인 십자군 전쟁이나 서구 제국주의 등을 정당화하려는 재재평가의 관점 또한 나타나고 있다.[2]

특히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던 땅을 유럽인의 입장에서 신대륙이라고 부르는 것을 회의적으로 보는 의견이 일어났고, 바이킹들이 11세기 경 뉴펀들랜드 지역에 정착했다는 '빈랜드 설'을 뒷받침하는 유적이 발견되면서 수정되는 추세이다. 자세한 내용은 빈란드문서참조. 아프리카를 넘은 것 또한 바스코 다 가마 이전에 이집트의 재정 지원을 받은 페니키아인이 성공한 적이 있으며, 특히 폴리네시아 인들의 항해는 원조 대항해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폴리네시아 문서 참조.

대항해시대, 신항로 개척, 지리상의 발견, 신대륙 등의 명칭은 침략자이자 가해자인 유럽인들이 자신들 입장에서 붙인 명칭일 뿐이고 아메리카와 아시아, 오세아니아와 다른 여러 지역의 피해 국가 입장에서는 침략을 위한 발판 개척일 뿐이라는 점 때문에 비교적 중립적이라 할 수 있는 '신항로 개척'이 교과서 등에서 사용되는 추세이다. 검인정화 이전 중등과정 국정 사회교과서도 제5차교육과정 중인 1989년 '지리상의 발견'을 '신항로 발견'으로 바꿨다.[3]

2. 배경들[편집]

2.1. 포르투갈의 경우[편집]

대항해시대 전까지만 해도, 포르투갈의 지리적 입지 조건은 유럽 최대의 해상무역권이었던 지중해와, 그 다음가는 북해발트해 그 어느 곳에도 끼지 못하는 유럽의 변방이었다. 그렇다고 농업이라도 잘 되냐면 그건 또 아니라 농지는 척박하니 결국 상업 말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때문에 포르투갈은 유럽 그 어느 나라보다도 상업 부르주아 세력이 강성했는데, 이는 포르투갈 왕위계승전쟁에서 전통귀족세력이 지지한 카스티야가 패하고, 상업 부르주아 세력이 후원한 아비스 왕조가 들어섰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업 부르주아 세력에 의해 탄생한 아비스 왕조는 자연스레 해양정책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엔히크 왕자가 특별히 바다에 관심이 있었다기보단 국내 내부적으로 바다로 나아가야 할 정치적·경제적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허나 당시 포르투갈의 국력으로는 유럽 대륙 안쪽으로 나아가기가 벅찼던 것이 사실. 결국 포르투갈이 갈 수 있었던 곳은 대서양아프리카 뿐이었다.

2.2. 스페인의 경우[편집]

스페인은 포르투갈과 달리 서지중해를 접하고 있었고, 자연스레 지중해 해상무역권 쟁탈에 일찌감치 참여하고 있었다. 이를 주도한 것은 아라곤 왕국인데, 아라곤은 발레아레스 제도를 점령하고 이를 발판으로 지중해 각지로 뻗어나가 아테네 공국을 접수하더니 시칠리아나폴리 왕국의 왕위까지 장악하여 지중해에 아라곤 해상국가를 완성시켜, 베네치아, 제노바와 함께 지중해 3대 세력으로 거듭나려고 했는데 오스만 제국이 나타났다.

오스만 제국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며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고 그 직후 아테네 공국까지 꿀꺽하며 아라곤의 동지중해 레반트 무역을 차단시켰다. 이후 오스만 세력은 중부 지중해로 뻗어나가기 시작했고, 유럽 지중해 국가들의 해상무역권은 완전 날아가 버렸다. 오스만에 적대적이던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까지 박살난 이후에는 아예 해상 패권 자체가 오스만으로 넘어가버린 상황.

아라곤과 카스티야의 국왕간 혼인에 따른 국가통합으로 탄생한 스페인으로서 이는 묵과할 수 없는 현실이었으나 당장 오스만에 맞서 싸운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아라곤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 해양 부르주아지 세력은 왕가에 지속적으로 빼앗긴 지중해를 되찾던가, 아니면 이를 대신할 새로운 무역루트를 개척하게 도와달라고 요구하는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그 시점에 이미 포르투갈은 인도로 다가가는 중이어서 스페인의 상업 부르주아지들은 포르투갈에 뒤쳐질지 모른다는 조급함에 자신들도 이에 따라 신항로 개척을 해야한다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2.3. 기술력[편집]

당연한 이야기지만 유럽인들에게 원양항해는 이때가 최초였다. 원양항해에 필요한 지식이나 기술은 전무했고, 현지에 대한 정보는 당연히 거의 없었다. 중국이나 인도의 존재는 그 당시에도 알려져있긴 했으나 몇몇 여행기에서 전해오는 오래되고 단편적인 지식이 전부였고, 아메리카는 존재하는지조차도 몰랐었다.

그러나 과거 이슬람과의 교류를 통해 전래된 나침반, 아스트롤라베, 사분의 같은 각종 측정기구들은 태양과 별의 위치보다도 더 정확하게 방위를 알 수 있게 해주었으며, 또한 그들의 원양항해술을 배울 수 있었다. 변방에 위치해 먹고 살려면 바깥으로 나아가야 했던 포르투갈은 가장 이에 관심을 보였고, 포르투갈의 1세기에 걸친 서아프리카 항해로 어느 정도 대양 항해를 위한 항해술과 해도 제작능력을 습득할 수 있었다.

이러한 기초적인 원양항해 능력과 때마침 강성해진 오스만 제국의 등장으로 항해술은 급속도로 발달, 카락캐러밸같은 본격적인 대양 항해용 선박들이 등장하였다. 후에 이는 다시 갤리온으로 이어져 어느새 유럽인들의 대양항해 수준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성장하는데 성공한다. 정리하자면 수요에 의해 기술이 맞춰 발전한다는 말에 따라, 유럽의 변방이었던 포르투갈은 원양으로 눈을 돌릴 수 밖에 없었고 이는 후에 발전할 원양항해술의 밑거름이 되었다. 이후 동방의 강성한 오스만 제국의 등장으로 필연적으로 대양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었던 유럽인들은 포르투갈을 따라 원양항해 기술을 발전시켜 나갔으며 덕분에 대항해시대가 찾아올 수 있었던 것. 덕분에 유럽 세력은 좁은 유럽에서 넓은 세계로 시야를 확장시키는데 성공했으며, 이는 후에 산업 혁명제국주의의 바탕이 된다.

2.4. 향신료[편집]

대항해시대의 발생 원인 중 하나로 향신료(특히 후추)를 꼽기도 하는데, 비록 중반 이후부터는 너도나도 향신료 무역에 뛰어들어 수요보다 공급이 배로 급증하는 바람에 향신료 무역이 시들해져버리긴 했지만 대항해시대를 열게 만든 결정적 원인 중 하나였던 것은 틀림 없는 사실이다.

향신료가 고가의 사치품 취급을 받았던 이유는 당시 유럽의 향신료 무역은 인도-이슬람-베네치아를 거치는 독점에 독점을 거듭한 중개무역 형태였기 때문으로, 대항해시대 이전부터 동방의 향신료는 귀중품 취급받는 고가의 물건이었다. 이랬던 향신료가 오스만 제국의 성립 이후, 단순히 비싼 사치품에서 아예 구할 수 없는 물건으로 바뀌어버렸고 이에 '돌아서 인도에 가면 그 비싸고 구하지도 못하는 향신료를 거저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출발하게 된 것.

이는 국왕, 귀족을 비롯한 수많은 투자자들의 귀를 솔깃하게 할만한 요소가 되었고 덕분에 많은 탐험가들이 신항로 개척을 위한 재정적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물론, 향신료는 대항해시대 자체를 열게 만든 기폭제 역할이었으며, 대항해시대 중반부터는 개척된 항로를 바탕으로 무역이 과열되어 향신료는 예전의 메리트를 잃어버리고 만다. 그 이후부터는 새로 유럽인들의 시각에 들어오게 된 아메리카 대륙의 , , 노예, 설탕과 같은 것들이 향신료 위치를 대신하였다.

3. 연표[편집]

  • 1415년: 포르투갈, 지브롤터 해협 건너 북아프리카 거점 세우타 함락

  • 1418년: 포르투갈, 아프리카 항해 시작

  • 1420년: 포르투갈, 마데이라 제도 발견

  • 1427년: 포르투갈, 대서양으로 나아가다 아소르스 제도 발견

  • 1444년: 포르투갈, 카보베르데 발견. 아프리카 최서단 일대까지 진출

  • 1462년: 포르투갈, 지금의 시에라리온 지역까지 남하

  • 1488년: 포르투갈의 바르톨로뮤 디아스, 아프리카 최남단의 희망봉 발견[4]

  • 1492년: 스페인크리스토퍼 콜럼버스, 바하마에 상륙.

  • 1493년: 콜럼버스의 제2차 항해

  • 1498년: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 인도의 캘리컷에 도착. 콜럼버스의 제3차 항해

  • 1500년: 포르투갈의 카브랄, 브라질을 발견

  • 1502년: 콜럼버스의 제4차 항해

  • 1508년: 포르투갈, 디우 앞바다에서 이슬람 연합함대 격파

  • 1510년: 포르투갈, 고아를 함락하고 식민지배 시작

  • 1511년: 포르투갈, 말라카를 함락하고 동남아 진출의 교두보 마련

  • 1519년: 스페인의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세계일주 항해를 시작

  • 1520년: 마젤란 선단이 마젤란 해협을 발견하고 태평양으로 진입

  • 1521년: 태평양을 횡단한 마젤란 선단이 필리핀을 발견하나 마젤란은 세부 섬에서 사망

  • 1522년: 마젤란 선단이 스페인으로 귀환하여 세계 최초의 세계일주 항해 종료

  • 1538년: 오스만 제국, 포르투갈령 디우를 포위공격하나 보급 문제로 퇴각

  • 1565년: 스페인, 필리핀 식민지화 시작

  • 1572년: 스페인, 잉카를 멸망시키고 중남미 식민통치 시작

  • 1595년: 네덜란드, 동남아시아 향료제도 진출

  • 1600년: 영국, 동인도회사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대항해시대 합류

  • 1602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설립

  • 1604년: 프랑스, 동인도회사 설립

  • 1642년: 네덜란드의 아벌 타스만, 뉴질랜드를 발견

4. 경과 및 쇠퇴[편집]

대항해시대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바하마 상륙과 카리브 지역 탐험을 마치고 몇 명의 원주민들을 납치하여 본국으로 돌아오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열리게 된다. 원주민들의 존재를 확인한 유럽인들은 미지의 신대륙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고, 새로운 대륙과 새로운 항로의 등장은 그들의 인식에 큰 변화를 주었다.

그 결과 국가 단위로 행해진 탐사가 크게 벌어졌고 곧 이는 국가 간의 충돌을 야기했으며 이를 중재하기 위해 토르데시야스 조약과 같은 것들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신대륙인 아메리카와 함께 유럽인들의 원래 목적이었던 인도로의 항로 개척도 충실히 이루어져 바스코 다 가마는 1498년, 드디어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에 도달하였고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는 더나아가 말라카까지 정복하여 동남아시아 진출로의 교두보까지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일련의 성과로 무역의 판도는 마침내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넘어가게 되었으며, 이후 지속된 탐험으로 드디어 콜럼버스가 발견한 신대륙이 인도가 아닌 또다른 대륙임이 알려지게 되었고, '아메리카'라는 이름으로 명명되게 되었다.

아메리카와 인도가 다른 지역임이 알려지고 향신료 원산지인 인도와 동남아시아로의 진출도 어느 정도 이루어지자 유럽인들은 '그렇다면 아메리카와 인도 사이에 또 뭐가 있단 말인가?'라는 궁금증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를 탐사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것이 바로 태평양이며, 태평양의 발견과 함께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이끄는 함대는 최초로 세계일주를 마치는데 성공한다.

여기까지가 대항해시대 동안 항해를 통해 이루어진 발견의 전부이며, 뒤이어는 내륙 탐험 및 정복의 역사가 주를 이룬다.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스페인의 정복자들에 의해 마야 문명, 잉카 제국, 아즈텍이 차례대로 멸망하고 중남미 아메리카는 브라질을 제외하고[5] 스페인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이렇게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빠르게 눈을 대양으로 돌린 덕분에 이를 바탕으로 막대한 이익을 거머쥐자, 북해의 영국네덜란드도 이에 동참하게 된다. 당연히 이 둘은 포르투갈과 스페인 양자 간의 합의인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간단히 무시해버렸고 몇차례의 분쟁과 전쟁을 걸쳐 앞선 두나라가 얻어낸 영토와 이권을 어느 정도 뺐어오는데 성공한다. 이들은 해상 무역과 거점 확보를 총괄하는 동인도회사를 각각 설치하여 본격적인 범세계적 무역 활동에 나서기 시작했으며 양쪽 모두 해상 강국으로 성장하다 벌어진 충돌에서 영국이 승리, 이는 대영제국으로 나아가는 발판이 된다.

대항해시대는 수십 년에 걸친 탐험과 개척, 정복 끝에 유럽인들이 지구상의 거의 대부분의 문명들을 발견하여 더이상 새롭게 찾아나갈 곳이 없어지자 자연스레 끝나게 된다. 이쯤되자 거의 유럽에서 먹고 살만한 나라들은 대부분 대양으로 진출하게 되었고, 대항해시대 당시 유럽으로 흘러들어간 막대한 은으로 인한 가격 혁명과 이로 인한 신흥 자본 세력의 대두, 봉건 세력의 몰락과 함께 유럽은 제국주의로 나아가는 길을 걷게 된다.

5. 목숨을 건 항해[편집]

각종 창작물에서의 묘사와 일본 코에이 사의 동명의 게임 때문에 낭만적으로 느껴지는 시대이지만 현실은 시궁창이다.[6] 그나마 대항해시대 3 정도가 "간신히" 현실을 반영한 정도지만 그걸로는 택도 없이 부족하다. 당시 선원들이 운용했던 범선은 크기로 보자면 불과 한강 유람선 수준[7]에 불과했으며, 이런 손바닥만한 배들에 수십 명의 선원을 싣고, 몇 달씩 육지 구경도 못한 채, 바람에만 의존하여 세계의 바다를 누빈 것이 당대의 항해자들이었다. 물론, 그동안 이들은 돌처럼 딱딱한데다 곰팡이가 피었고 가장자리는 쥐가 갉아먹은 빵(비스킷)을 먹고 죽은 쥐가 떠다니는 썩은 물을 마시며 생활해야만 했다.[8]

이런 상황해서 선원들을 이끌고 항해를 하려면 선원들의 반항심을 씹어먹을 엄격한 규율이 필요한데 럼주 훔쳐먹은 놈 채찍 몇대, 고기 훔쳐먹은 놈 채찍 몇대 이런식이었다. 맞다가 죽는 선원도 있었다. 특히 식사배급시, 자기가 음식 좀 더 쳐먹을라고 동료선원을 밀쳐 다치게 한 경우는 사형에 처한다는 규정이 있었을 정도로 통제에 엄격했다.

끔찍한 선원 대우 뿐 아니라 질병 통제가 잘 될리가 없는 협소한 공간에서 오랜 시간 생활했기 때문에 선원들은 당연히 질병에 매우 취약했다. 특히 당시 위생 관념상, 각종 질병의 창궐을 막기 위해선 주기적인 목욕과 신선한 야채 공급이 필수인 것조차 몰랐으므로 이를 대처하기도 힘들었다. 이는 거의 18세기가 되어서야 제임스 쿡이 선원들에게 강제로라도 절인 양배추를 먹이고 찬물 목욕을[9] 시키면서 해결되었으며, 그전까지 수많은 선원들이 질병에 시달리면서 죽어갔다.

게다가 당시의 모든 항해용 선박이 그렇듯이 범선이 주로 쓰였는데, 선원, 선장 가릴 것 없이 제일 무서워했던 것이 바로 무풍지대. 차라리 맞바람이라도 불면 돛을 이용해 나아가는 것이 가능하지만[10] 바람이 안 불면 그냥 망망대해에서 선장과 동료선원들과 함께 사이좋게 천천히 말라죽어 갈 뿐[11]이었다. 이렇게 무풍지대에서 선원들이 전원 사망한 후 선박은 사람없이, 바람이 안 부니 해류를 따라 떠다니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유령선의 모티브가 되었다.

6. 관련 문서[편집]

7. 대중매체에서의 등장[편집]

  • 대항해시대 시리즈 - 대항해시대하면 가장 유명한 작품이자 대중들에게 대항해시대의 이미지를 각인시킨 명작.

8. 기타[편집]

오스만의 대두 이래 지중해의 항해자와 선원들, 조선기술자, 해도제작자 등이 상당수 실업자가 되어서 대서양 항해에 나서고 있던 이베리아 국가로 몰려 왔다. 다만 주요 이탈리아 국가들은 여전히 무역으로 적지 않은 부를 계속 쌓았는데, 지중해 국가들의 무역은 포르투갈의 인도양 정리와 아메리카를 통한 막대한 귀금속 유입으로 인해 가격 혁명이 발생하면서 완전히 몰락하게 된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입장에서는 우수한 항해술, 천문학 자질을 갖춘 엘리트들이었고 실제 항해 경험도 상당했기 때문에 이들을 극진히 대접하여 인구가 적은 이베리아 국가에게 항해에 나설 만한 충분한 인력, 기술을 확보시켜 주었고 아울러 항해인력 및 수준의 전체적인 질적 향상까지 가져다 주었다.

[1] 물론 좌파는 오래 전부터 이러한 관점을 비판해왔지만 제도권의 시각은 아니었다.[2] 사실 2010년대 상식이 된 역사적 관점들은 세계사와 한국사를 포함해서 90년대까지만 해도 전혀 다르게 알려진 경우가 많았다. 그것은 단지 대중 서적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권 교육과 학계 역시 마찬가지. 이런 점을 고려하지 않고 당시 나온 대중 서적들만 비난할 경우에는 문제가 있을 수 있다.[3] 사실 '신항로 개척'이라는 단어도 서구적 관점이 들어갈 수 밖에 없다. 당시 세계의 국제 무역로는 오스만 제국-인도-중국(더 나아가서 일본)을 잇는 거대한 연결선이었고, 여기에 유럽이 새롭게 참여했을 뿐이다. 아메리카 지역과 관련된 항로 개척의 의미는 단어에 부합할지 몰라도, 유럽이 가장 중요하게 여겼고 무역 규모도 컸던 곳은 기존에 있었던 국제 무역로였기에 완벽히 중립적인 용어라고 볼 수는 없다. 당시 무역과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주경철의 『대항해시대』와 안드레 군더 프랑크의 『리오리엔트』를 참조.[4] 발견 당시에는 폭풍의 곶으로 명명되었으나, 차후 희망봉으로 변경되었다.[5] 브라질은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따라 포르투갈령이 되었다.[6] 다만, 미지의 먼 바다를 항해하는 것이 남자의 로망을 자극하는것은 옛날 사람들도 마찬가지라서 바다와 항해에 관한 작품들은 그때부터 수 없이 많이 등장했다. Antonio Pigafetta, George Best, Richard Hakluyt 같은 사람들이 이미 16세기에 항해기를 출판했으며 소설로도 The Life, Adventures & Piracies of the Famous Captain Singleton(1720),The Adventures of Roderick Random(1748)등 진작부터 해양 소설이 출판되었다. 또한 해적에 관한 낭만적인 묘사 역시 18세기가 원조다. 영국에서 출판된 A General History of the Pyrates(1724)가 처음인데 이 책에서 이미 검은 수염, 졸리 로저, 앤 보니, 윌리엄 키드 등 오늘날 유명한 해적들에 관한 유명한 에피소드들을 다 담고 있었고, 오늘날 캐리비안의 해적같은 이미지가 만들어진 것도 이미 이 때부터였다.[7] 캐러밸 선은 배수량이 150톤으로 진짜 한강 유람선 수준이다.[8] 현대 해군은 항해 도중에 멀미와 구토 등에 시달려서 정박 시보다 많은 칼로리를 소모하는 함정요원들을 위해 간단한 야식을 포함한 1일 4식을 제공하는 것이 기본인데 건빵염장고기, 썩은 물에만 의존하며 수십일을 버텨야했던 당시 선원들은 어떻겠는가? 자세한 내용은 전투식량 항목 참조. 썩은 물을 마시는 문제는 나무 통에 물을 담으면 물이 썩는다는 문제를 인지하고 그 대안으로 철제 통이 등장함으로서 해결되었다. 하지만 이것도 상당히 늦게 도입되었다.[9] 당시 범선은 화재에 취약했기 때문에 물을 데울 수가 없었다. 심지어는 차디찬 남극 앞바다에서도 실행되었지만 이 덕분에 쿡의 선원들은 괴혈병을 비롯한 각종 질병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선원들이 양배추 배급에 반발하자 쿡은 양배추를 강권하는 방법 외에도 간부들에게 양배추를 우선 배급하는 방법을 썼다. 간부들만 양배추를 받는 것을 보고 선원들이 자기들도 달라고 하게 만든 것이다. 그 외에도 위생을 위해 늘 이불을 훈연하고 배를 청소했으며 식료품 역시 저장된 염장 고기나 비스킷은 최대한 아끼고 섬에 상륙해서 조달한 신선한 고기나 과일, 채소 등을 우선적으로 섭취했었다.[10] →W 이렇게 바람이 부는 방향을 향해 지그재그로 침로를 바꿔나가면 바람을 뚫고 전진이 가능하다.[11] 보트를 띄워 모선과 밧줄로 연결한 후 노를 저어 견인하기도 했다. 물론 보트에 탈 수 있는 선원의 수와, 범선을 노를 저어 몰고가기 위한 근력을 생각하면 이런 방식으로 무풍지대를 벗어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안 해보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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