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성공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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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성공회 홈페이지

파일:한국 관구 문양.png

언어별 명칭

한국어

대한성공회 (大韓聖公會)

영어

Anglican Church of Korea

중국어

大韩圣公会(dàhánshènggōnghuì)

일본어

大韓聖公会(だいかんせいこうかい)

1. 개요2. 역사3. 한국 관구 현황
3.1. 서울교구3.2. 대전교구3.3. 부산교구
4. 타 교단과의 교류5. 여담
5.1. 여성 사제5.2. 타 교파와의 성찬례 교류 문제
6. 인물
6.1. 성직자6.2. 평신도

1. 개요[편집]

성공회는 전 세계적으로 8천만-1억의 신자를 보유하고 있는 메이저 교단이다. #. 천주교기독교 가운데 제일 많은 12억 정도의 신자를 보유하고 있으며, 정교회가 둘째로 약 3억, 그 다음이 침례교와 성공회로 약 1억의 신자를 보유하고 있다. 다시 말해, 성공회는 기독교 가운데 3-4번째로 큰 교파이며, 개신교 내에서는 침례교와 더불어 1-2위를 다투는 규모이다. 개신교 신자 수가 6억 정도이니, 성공회의 규모는 개신교 전체 신자 중 약 15%를 차지한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의 신자 수는 5만명 정도으로, 주류 개신교 교단들로부터 이단으로 지목되는 몰몬교여호와의 증인보다도 교세가 더 작다. 한국의 성공회 신자들의 대부분은 대대로 성공회 신앙을 이어온 사람들이거나 가톨릭[1][2]에서 넘어온 사람들 또는 장로회/감리회 등 주류 개신교 교단[3]에서 옮겨온 사람들이다. 부모님으로 부터 이어내려오거나 기독교 타 종파에서 온 경우가 아닌, 성공회에서 처음 신앙 생활을 하는 새신자는 적은 편이다. 이런 경향은 성공회가 타 개신교단과 달리 전도에 적극적이지 않기에 더 심해진다. 사회 구원으로서 전도하려는 생각이 많기 때문. 단순히 팜플렛이나 휴지 등을 나누어 주는 얌전한 형태의 길거리 전도도 잘 하지 않는다.

대한성공회 홈페이지에 의하면 2011년 2월 말 현재 5만여 명의 국내 신자가 있고, 3개 교구(서울교구, 대전교구, 부산교구)와 100여 개의 성당이 있다. 서울특별시 시청역 3번 출구 덕수궁 옆에 서울주교좌성당성가(聖架) 수녀회 본원이 있으며[4], 구로구 항동에는 성공회대학교도 있다. 이외에도 성공회대학교 내에는 특수학교인 성베드로학교도 있다.

근본주의를 지양하면서, 사회 구원을 추구하며 소수자의 편에 서고[5] 권력을 향해 쓴소리를 하는 교단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성공회 공동체 내부 기준으로는 다양성을 중시하는 성공회 특성 때문인지 신자들의 성향 스펙트럼[6]이 넓은 편이다. 성공회 교세가 그나마 가장 강한 곳[7]인천광역시 강화군이고, 인천 본토와 부천시, 광명시, 구로구 등지를 비롯한 경기도 서부권, 평택시, 충청도 일부[8]도 다른 지역보다는 성공회 성당들이 밀집한 편이다.

대한성공회는 앵글로-가톨릭(고교회파[9])이 주류라서[10] 전례 형식은 가톨릭의 현대식(바오로) 미사와 많이 비슷하다. 더군다나 특히 수도권 지역은 하드코어 앵글로-가톨릭으로 한국 천주교에 비해서 더 장엄한 느낌을 받기 쉽다. 예를 들어 감사성찬례[11] 시작 전에 복사들이 십자가를 들고 입당식을 하고 사제가 향을 피우는 것을 들 수 있는데, 가톨릭에선 이런 장엄한 예식은 부활대축일이나 성탄대축일처럼 정말 중요한 축일에나 볼 수 있다. 성공회 고교회파 성당들에선 이런 걸 연중 평상시 주말에도 한다. 그리고 전반적으로 기도문들이 더 긴데, 가톨릭에서 축약형 사도신경을 바치는 것을 성공회 고교회파에선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경으로 낭독하는 등 가톨릭보다 더욱 각 잡고 감사성찬례를 드린다. 다만 앵글로-가톨릭 성향이 강한 수도권 지역에서도 일부 복음주의(저교회파) 성향의 교회들이 존재한다.

과거 대한성공회는 전례적으로나 신학적으로나 고교회파 일색이었으나, 장로교 출신 사제/평신도의 영향 및 복음주의 개신교의 영향 때문인지, 현재 대한성공회는 신학적인 면에서는 고교회파 일색에서 벗어나는 경향이 있다. 현재 대한성공회는 전례상으로는 아직 고교회파 색깔이 강하게 남아있으나, 대체적으로 신학적 성향은 광교회파[12]에 가깝다.[13]

흔히 성공회를 신학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교파라고 생각하는데, 성공회 교인들은 이 말에 별로 동의하지 않는다. 성공회의 특징을 진보 혹은 보수 같은 특정 성향에서 찾기보다는, 이들을 모두 감싸는 유연성/포용성에서 찾는 것이 성공회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확실하게 맺고 끊는 것을 선호하는 우리나라의 주류 정서에는 잘 맞지 않다고도 볼 수 있지만, 이성적이고 유연한 신앙생활을 원하는 신자들에게는 꽤 좋은 선택지가 된다.

2. 역사[편집]

1890년 영국 성공회의 찰스 존 코프(Bishop Charles John Corfe 한국 이름 고요한) 주교가 5명의 사제미국 펜실베니아 출신 의사로서 의료선교를 한 랜디스(한국 이름 남득시)와 함께 입국하였다. 한국인 교인이 한 사람도 없는 상황에서 주교가 선임되고 한 교회가 시작된 것으로, 이는 세계 교회사에서도 흥미로운 일이라고 한다.

1891년 인천 중구 내동에 첫 성공회 교회인 내동교회를 세웠다.[14]

1900년 강화군 강화읍에 강화읍성당을 세웠다. 서구의 바실리카 양식과 불교 사찰 양식을 대담하게 조합해서 세운 이 성당은 초기의 성공회 선교사들의 토착화의 의지를 보여 주는 증거물이 되고 있다.

1908년 첫 한국어 공동기도문을 발간하였다. 영국 성공회의 1662년 공동기도문을 번역했으나 축성경만은 1549년 것을 채택했다.

1914년 강화도에 지금의 성공회대학교의 전신인 성 미가엘 신학원을 세웠다.

1915년 김희준 (마가) 사제가 처음 한국인 성공회 사제가 되었다. 조선에 뿌리를 내린 성공회는 대한제국 개화기에 근대 서양식 교육을 보급하기 위하여 충남 천안에 신명학교를 설립하고, 인천, 여주, 진천 등지에 병원을 설립하였으며, 경기도 수원과 안중에는 보육원을 개설하였다.

1919년 3.1 운동 중 병천교회와 부속학교인 신명학교가 태극기 제작에 참여하여, 일제에 의해 강제 폐쇄당했다.

1926년 서울 중구 정동에 서울주교좌성당을 세웠다.

1936년 천주교, 감리교, 재림교회, 성결교, 구세군과 함께 신사참배를 시작하였다.[15][16]

1940년 일제에 의해 외국인 주교들이 추방되고 성공회대학교가 폐교당했다. 이 당시는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었고, 영국일본의 적국이었다. 일제는 국내에서 활동 중인 영국인 주교들과 영국 켄터배리 관구 소속인 한반도의 성공회를 가만히 둘 수 없었던 것이다.[17][18]

1950년 한국전쟁 중 서울주교좌성당 주임신부이던 윤달용(모이서) 신부를 비롯한 6명의 성직자가 조선로동당에 의해 희생되었다.

1965년 이천환(바우로) 주교가 최초의 한국인 성공회 주교로 주교서품을 받았다. 또한 이 때까지는 교구(diocese)가 서울교구 하나밖에 없었으나, 대전교구가 분리됨으로서 2개의 교구를 유지하게 되었다.

1974년 대전교구에서 부산교구가 분리됨으로서 3개의 교구를 유지하게 되었다. 이로서 대한성공회에 한국 관구가 성립되는 조건을 갖추게 된다.[19] 그러나 한국 관구의 성립은 19년이 지나서야 이루어지게 된다.

1987년 6월 10일, 서울주교좌성당에서 박종철 군 고문치사 조작,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개최되었다. 그날 오후 6시 저녁 기도 시간을 알리는 서울주교좌성당의 종소리로 6.10 항쟁이 시작되었다.

1993년 정식으로 한국 관구(province)가 성립되었다. 한국 관구로 독립하기 전에는 캔터베리 관구 소속이었기 때문에, 대한성공회 교회법 개정도 캔터베리 대주교의 최후 승인이 필요했다. 물론 지금은 대한성공회가 독립적인 관구로서 기능을 하고 있기 때문에 교회법 개정에 캔터베리 대주교의 승인 절차 그런 거 필요 없다.[20]

2017년 4월 현재 대한성공회 의장주교는 성공회 부산교구 박동신(오네시모) 주교이다.

3. 한국 관구 현황[편집]

서울교구·대전교구·부산교구의 총 3개의 교구가 있으며, 이 세 교구가 한국관구를 이루고 있다. 현재 박동신 오네시모 부산교구 주교가 한국 관구의 관구장 주교로 재임하고 있다.

아래 나열된 교구(diocese) 산하 교무구(parish) 관할 구역은 성당이 위치하는 지역으로 한다.

3.1. 서울교구[편집]

교구장 주교: 이경호 베드로 주교
주교좌성당: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관할구역: 서울특별시·인천광역시·경기도·강원도 북부(영동고속도로 이북)


대한성공회 내에서는 상대적으로 고교회파 성향이 강하다.

3.2. 대전교구[편집]

교구장 주교: 유낙준 모세 주교
주교좌성당: 대한성공회 대전주교좌성당
관할구역: 대전광역시·충청남도·충청북도·세종특별자치시·강원도 남부(영동고속도로 이남)·전라북도·전라남도·광주광역시

중앙교무구

대전광역시[66]

강원교무구

강원도 남부(원주시[67]·태백시[68])

충북교무구

충청북도[69]

충남교무구

충청남도[70]

전라교무구

전라북도[71]·전라남도[72]·광주광역시[73][74]

3.3. 부산교구[편집]

교구장 주교: 박동신 오네시모 주교
주교좌성당: 대한성공회 부산주교좌성당
관할구역: 부산광역시·울산광역시·대구광역시·경상북도·경상남도·제주특별자치도

중앙교무구

부산광역시[75]·경상남도[76]·제주특별자치도[77]

북부교무구

대구광역시[78]·경상북도[79]·울산광역시[80][81]


교무구가 2개밖에 없을 정도로 대한성공회에서도 교세가 가장 빈약한 지역이다. 사실 영남과 제주, 이 지역들은 성공회 뿐만 아니라 천주교개신교등 그리스도교 전반의 교세가 약한 지역이기도 하다.

대한성공회 내에서 상대적으로 저교회파 성향인 교구이다.[82] 대한성공회의 최초 주교인 코프 주교(영국 성공회 파송)가 1890년 인천제물포항에 발을 내딛기 전, 1880년 이미 일본 성공회에서 파송된 쇼 사제가 부산에서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후 부산 및 영남 지역은 자연스럽게 서울 교구의 주교 치리 하에 들어가게 되지만 이런 초기 선교 상황이 지금의 부산교구의 모습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부산교구는 일본 오키나와 교구와 자매결연을 맺고 활발히 교류하고 있다.

4. 타 교단과의 교류[편집]

한국기독교장로회와 함께 교회일치운동에 가장 적극적인 교단으로, 다양성을 중시하다 보니 다른 주류 개신교 교단들은 물론 가톨릭과 정교회와도 적극 교류하며, 타 교단에 대해서 정말 웬만해서는 이단시하지 않는다. 그래서 위에서 이야기 했듯이, 가톨릭이든 정교회든 다른 개신교든 타 종파에서 성공회로 옮길 때, 해당 기성 기독교 종파에서 세례 받은 것을 다 인정해준다.[83] 반면 그래서 이단에 대해서 취약하다는 평을 듣기도 한다.[84]

대한성공회는 한국기독교장로회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교단, 감리교회와 활발히 교류한다. 한국기독교장로회의 경동교회[85],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의 새문안교회[86], 기독교대한감리회 정동교회[87] 등과 교환예배를 하기도 한다. 또한 한국의 교회일치 기도회[88]가 개최되는 장소는 서울주교좌성당이다.

천주교정교회와 같은 보편교회들과도 교류를 하고 있다. 성공회는 천주교나 정교회도 같은 믿음의 형제로 보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이들과의 교류를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특히, 한국 정교회와의 사이가 매우 돈독하다. 6.25 전쟁 중에 성당이 파손당한 정교회의 신자들이 새 성당이 지어지기 전까지 임시로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지하 예배당을 빌려 성찬예배를 드리기도 했었다.[89]
천주교 신부가 성공회로 개종해 사목하는 경우도 있다. 한국에도 구균하, 황인찬, 최석진, 정지원 신부 등 가톨릭 사제였다가 이런저런 이유로 개종하여 성공회 사제가 된 사람이 있다. 반대로 성공회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성공회 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하다가 개종하여 가톨릭 신학생이 된 사람도 있다.#[90] 다른 나라에서는 성공회 사제가 개종하여 가톨릭 사제가 된 경우가 꽤 흔하다. 천주교에서는 성공회를 떠난 주교와 사제들을 받아들여, 이들을 천주교 사제로 다시 서품하고 있다. 다른 교파에 대해 엄격하기로 유명한 천주교로서는 일종의 배려를 성공회에게 하고 있는 셈이다. 심지어 결혼한 성공회 신부가 천주교 신부가 되더라도 그 결혼 생활을 계속 유지하는 것을 허락한다.

물론 교회일치운동에 앞장서는 건 대한성공회만의 특징이 아니라, 세계 성공회의 특징이기도 하다. 세계 성공회는 '본질적인 것에 일치됨, 비본질적인 것에 다양함'이라는 입장으로, 다른 종파와의 우애, 관용, 공존을 추구하고 있다.[91] 19세기 이래 가톨릭과 일치를 위한 대화가 끊긴 적이 없으며, 정교회와의 관계는 전통적으로 돈독했다. 복고 가톨릭교회 / 북유럽 루터교회 / 영국 감리교 / 미국연합감리교회(United Methodist Church·UMC) 등과는 완전한 성사 교류[92]를 이루어냈다.

영국 성공회의 중심지인 캔터베리 대성당에서 행해지는 강론에서도 마더 테레사 수녀나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 마틴 루터 킹 목사와 같은 가톨릭 성인과 개신교 목회자들이 신앙의 모범으로 언급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또한 영국 성공회가 현재 관리하고 있는 (헨리 8세가 해산시키기 이전의) 옛 수도원 건물들에서 정기적인 가톨릭 미사를 드리는 것을 허락하는 경우도 있다.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설립자도 영국 성공회 신부였다.

다만 최근 들어 보편교회들과의 교류가 점차 어려워지는 상황이다. 여성 성직자 허용 문제와 성소수자에 대한 입장 차이가 제일 큰 갈등의 원인이 되고 있다. 성공회가 여성의 성직자 서품을 허용함으로 인해서, 성공회의 사도전승을 인정하려 했던 정교회가 그 결정을 유보하게 되었다. 여성의 서품은 보편교회에서 매우 강경한 입장을 취하는 문제로 이 당시 일부 정교회 주교들이 성공회의 이런 결정에 매우 격노했다고 전해진다. 가톨릭도 성공회의 여성 서품에 대해 정교회와 비슷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93][94]

성소수자에 대한 입장 차이는 여성 성직자 서품에 대한 논쟁이 꽤 쉬운 문제로 보이게 할 정도로 어렵고 복잡한 문제이다. 성소수자를 옹호하는 광교회파의 행보로 인해 보편교회들과 보수적인 개신교 교파들에게 경계의 대상된 것은 물론이고, 성공회 내부에서도 큰 분란이 일어났다. 세계 성공회가 동성결혼의 교회법적 인정을 강행한 미국 관구에게 3년간 관구로서의 자격을 정지시킨 것.[95]

5. 여담[편집]

  • 성공회는 선교 초기부터 한국 문화의 토양에 깊이 뿌리를 내린 교회가 되고자 토착화에 힘썼다. 그래서 한국 건축 양식인 한옥으로 지은 성공회 교회들이 지금도 강화군 강화읍(강화읍교회)과 온수리(온수리교회)·진천군(진천성당)·청주시(수동성당) 등에 남아 있다.

  • 대한성공회가 1945년 광복 당시 일본관구 소속이 아니라 영국의 켄터베리관구 소속이었던 것은 천운이었다. 다행히 성당과 교구 재산이 적산가옥으로 취급되어 몰수되는 상황을 비켜갈 수 있었다. 이에 반해, 한국 정교회는 당시 일본 정교회 소속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광복 후에 재산이 모두 적산으로 분류되어 몰수되는 날벼락을 맞았다.

  • 1908년 첫 한국어 공동기도문을 발간한 이래로, 1912년·1939년·1965년·1972년·1982년·1992년·1999년·2004년·2015년 개정을 하였다. 2004년판 부터는 공동기도문이 아니라 성공회 기도서가 공식명칭이 되었다.

  • 제사 문제에 대해서는 가톨릭과 비슷한 입장이다. 제사 자체를 금하지는 않으나, 제사에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금한다.

  • 옆나라 일본의 성공회 신자 수가 6만 정도로 우리나라의 성공회 신자 수와 비슷하다. 그러나 일본은 기독교인이 다 해야 100만 정도밖에 안되기 때문에[99] 일본 기독교 내에서 성공회의 입지는 꽤 큰 듯하다. 나라 안에서 기독교세가 작은 가운데 기독교 내 교파의 입지가 큰 일본성공회와, 나라 안에서는 기독교세가 크지만 기독교 내에서 너무 작은 교파인 대한성공회의 상황이 대비가 된다. 일본성공회와 대한성공회는 매우 긴밀히 교류하고 있으며, 양국 간의 우호 증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 미국에는 한인 성공회 교회들이 여럿 있는데, 어떤 곳은 대한성공회에서 파견 보낸 사제가 사목하기도 하고, 또 어떤 곳은 미국 성공회에 소속되어 있기도 하다. 다만 현지 한인 성공회 교회 신자들에 대한 견진성사는 현지 성공회 주교가 집전한다.[100]

  • 2011년 공식통계상 성공회 신자 수는 5만명이다. 하지만 실제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 수는 공식통계보다 훨씬 적다고 하며, 공식통계상 신자 수와 실제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 수의 간극이 꽤 크다고 한다. 그리고 개신교, 천주교를 떠나 성공회로 개종하는 사람도 있지만 반대로 성공회를 떠나 개신교, 천주교로 개종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고 한다.

5.1. 여성 사제[편집]

2001년에는 대한성공회 최초로 여성사제서품을 받았다.[101] 주인공은 부산교구의 민병옥 가타리나. 1978년 성공회 신학대학원을 졸업했으나, 당시에는 여성의 서품을 허용하지 않아, 줄곧 전도사로만 머무르고 있다가[102] 졸업하고 23년이나 지난 후에야 사제서품을 받을 수 있었다. 대한성공회 내부에서 부산교구가 다른 교구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교회파적이고 개방적이었기에 여성 사제서품이 가능했다는 평이 있다. 민병옥 가타리나 사제는 이후 10년간 사목한 후 2011년에 은퇴했다.

사실 대한성공회에서 최초로 여성이 부제고시에 합격한 것은 1994년이다. 주인공은 박미현 도미니카. 그러나 그녀는 합격했는데도 곧바로 부제품을 받을 수 없었고, 오랜 시간 기다려야 했다. 그나마 이것도 예전보다 발전한 것이었는데, 더 이전에 부제고시를 보았던 유명희 데레사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합격 판정 보류' 통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1998년 대전교구에서 이정운 페트라가 대한성공회 최초의 여성 부제가 되었고, 기약 없이 기다리던 그녀들도 부제품과 사제품을 받고, 사목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서울교구에서도, 2004년 김기리 미리암이 처음 사제 서품을 받았다. 서울교구에서는 최초, 대한성공회에서는 5번째 여성 사제다. 그녀는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미학과 김문환 명예교수의 1남 1녀 중 둘째로, 본래 한국기독교장로회 경동교회에 다니다가 성공회로 옮겼다. 1998년 성공회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입학했지만 여성으로서 사제가 되는 것은 쉽지 않았고, 여성의 서품을 가로막는 제도와 싸운 끝에 사제가 될 수 있었다.# 성공회 성직자는 결혼 여부를 선택할 수 있는데, 위의 민병옥 신부가 독신인 반면 김기리 신부는 기혼이며, 남편 또한 성공회 사제라고 한다.

2007년에는 성가수녀회 오인숙 가타리나 수녀가 사제서품을 받아, 대한성공회 최초의 여성 수도사제가 탄생했다.[103] 한국전쟁 중 인민군에 의해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여동생과 함께 성공회 고아원에서 자란 오 수녀는, 자신을 헌신적으로 돌보아 준 수녀들에게 감동을 받아, 서강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후 성가수녀회에 입회했다. 그리고 수녀원장과 성공회대학교 영문과 교수 등을 지내며 활약하다가 사제로서의 부르심을 받아, 2007년 사제서품을 받았다. 2009년에는 성가수녀회 이양란 엘리사벳 수녀가 사제서품을 받아, 2번째 여성 수도사제가 탄생하였다.

위에 기술된 여성 성직자들을 필두로, 대한성공회는 지속적으로 여성들을 성직에 서품하였다. 최근에는 거의 모든 서품식에서 여성 부제/사제가 나오고 있으며, 현재 대한성공회에는 20여 명의 여성 사제들이 있다.

5.2. 타 교파와의 성찬례 교류 문제[편집]

가톨릭정교회에서는, 자기네 신자가 성공회 감사성찬례에 와서 성찬례를 하는 것을 올바른 성체성사를 행했다고 보지 않는다. 반대로 성공회의 입장에서는, 가톨릭 또는 정교회 신자가 성공회 감사성찬례에서 성체를 받아 모셔도(먹어도)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라도 성공회 성찬례에 참여할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성찬례 교리로는 가톨릭, 정교회 보다 훨씬 진보적이고 열려있다는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다.

가톨릭정교회에서는 성찬례를 행할 때, 포도주가 진짜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성변화)고 믿는데 반해, 성공회는 이에 대한 견해가 자유롭다. 성공회 나름의 견해가 있긴 있지만, 가톨릭과 정교회처럼 성변화를 믿는다고 해도 문제를 삼지도 않고, 침례교처럼 단지 상징이며 기념일 뿐이라고 생각해도 상관 없다. 그러나 외국에서나 국내에서나 성공회 내 성직자와 신자 다수는 천주교와 정교회에서 믿는 성변화를 믿지 않는다.

그러니 혹시라도 성공회 감사성찬례에 참석해 보고 싶은 가톨릭 신자나 정교회 신자가 있다면, 그냥 체험을 위해 참석해야지 가톨릭 미사영성체(성체성사)를 대신하러 가면 안 된다.[104][105] 실제로 성공회 측에서 가톨릭성찬례를 서로 교류하자는 요구를 몇 차례 했었으나, 위와 같은 이유로 번번히 거절당했다.

6. 인물[편집]

6.1. 성직자[편집]

  • 구균하 - 천주교 부산교구 사제였으나 가톨릭 교리에 대한 회의로 사제직을 내려놓고 무신론자로 지내다, 회심하고 성공회 사제가 된 케이스. 브랜든 선교 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 김근상 바우로 - 직전 서울교구 교구장 및 한국관구 관구장 주교. 2011년 부터 CBS(기독교방송) 이사로 재직하고 있다. 이사장으로 선출되어 2017년 7월부터 2년간 재직하게 되었다.

  • 대천덕(Reuben Archer Torrey Ⅲ, 루번 아처 토레이 3세) - 성공회 사제이자, 성공회 수도원예수원[106][107]의 설립자

  • 민김종훈 자캐오 - 대한성공회 '길찾는교회'의 사제이자, '용산해방촌나눔의집'의 원장이다. 어린 시절부터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교단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들을 위해 사목하겠다는 목적으로 순복음교단에서 전도사까지 되었다가, 성공회로 옮겼다. 한국의 개신교계에서 드물게 성소수자를 위한 사목을 하는 성직자이다.

  • 민병옥 가타리나 - 대한성공회 최초의 여성 사제. 가톨릭이나 정교회에서는 여성에게 사제 서품을 주지 않기 때문에, 한국 최초의 여성 사제이기도 하다.

  • 박동신 오네시모 - 현 부산교구 교구장 및 한국관구 관구장 주교.

  • 이재정 - 대한민국정치인이자 성공회 사제로, 참여정부에서 2006년부터 2008년까지 통일부 장관을 지냈고 2014년 6월 4일 경기도 교육감으로 선출되었다. 성공회에서는 이럴 경우에 휴직 처리가 된다. 언제든 다시 성공회 사제로 돌아갈 수 있는 것.

  • 최석진 - 천주교 의정부교구 사제였다가 개종하고 성공회 사제가 되었다.

  • 황인찬 - 천주교 원주교구 사제였다가 개종하고 성공회 사제가 되었다. 사제이면서 목수로 일하고 있다. 가톨릭 사제 시절 강원도 평창군의 대화성당을 설계하고 건축했다고 한다.

6.2. 평신도[편집]


[1] 가톨릭의 보수적이고 까다로운 교리 때문. 여성은 성직자가 될 수 없는 점이라든가, 성소수자에 대한 태도 등의 문제에 반발하는 이들도 있다.[2] 다만 가톨릭의 입장을 설명하자면, 가톨릭에서 남성만이 성품성사를 받도록 하는 것은 결코 여성을 차별하거나 천대해서가 아니다. (가톨릭뿐 아니라 정교회에서도 여성의 서품을 허용하지 않는다) 또한 가톨릭은 성소수자를 미워하거나, 배척하거나, 저주하지 않는다. 반대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동성 간 육체관계와 동성결혼 같은 행위이지, 성소수자(사람)가 아니다. 동성애 성향을 가진 사람이라도 동성애 행위를 하지 않고 절제하여 정결을 지키며 산다면 가톨릭 신앙생활을 하는 데 문제가 없고, 구원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3] 헌금 및 봉사 강요, 신사도 운동, 통성기도, 근본주의(극단적 세대주의 포함), 정치적 보수세력과의 결탁, 성소수자 배척 등에 반발하기 때문. 주류 개신교단에서 성공회로 옮기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천주교 입교까지 고려했으나 천주교의 보수적인 교리(성 관련 교리, 금육)나 이질적인 교리(천주교 특유의 성모 마리아 신심, 고해성사), 미신처럼 보이는 행위(스카풀라, 기적의 패, 성모승천)에 동의하지 않아서 성공회로 발길을 돌린 경우다.[4] 주한영국대사관과 가까운 위치에 있다. 사실 이 성당과 영국 대사관 모두 예전 덕수궁의 원래 권역 안에 있는 것이다. 덕수궁 건물 중 하나인 양이재 건물이 주교관으로, 현재 대성당 경내 안에서 사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5] 젊은 층과 성소수자를 위한 선교형 교회인 '길찾는 교회'가 있다.[6] 자유주의 신학관부터 보수적 복음주의 신학관까지. 다만 근본주의 신학관은 배격하는 편이다. 그런데 근본주의 성향을 가진 신자들도 없지는 않다. [7] 물론 모든 개신교 교단을 통틀어서가 아니라 성공회 내에서의 차원을 말하는 것이다.[8] 천안, 아산, 청주, 진천, 음성[9] 18세기 경직되었던 영국 성공회에 존 웨슬리 등을 필두로 한 복음주의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 당시 가톨릭적인 형식과 보편교회로서의 전통을 고수하던 부류에서 '우리가 고교회(high church)고 복음주의에 영향을 받은 너희들은 저교회(low church)다.'라며 만든 용어가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국교회에 남았던 청교도의 계통이거나, 당시 웨슬리 혹은 청교도(조지 휫필드 등)복음주의의 영향을 받은 성공회 신자들 중에 성공회에 남은 부류가 저교회파가 되었고, 성공회를 나간 부류가 감리교를 세우게 된다. 감리교의 기원은 존 웨슬리가 안수한 사역자들이다. 이들은 잉글랜드 국교회에서 완전한 개혁에 동의하던 주교들이, 국교회에서 받은 서품이 없던 목사들(청교도)을 강사로 임명하던 것과 잇닿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10] 한국에 처음 성공회가 전래된 19세기 말엽은 영국에서 옥스퍼드 운동이 활발하던 시기였다.[11] 미사, 예배를 성공회에선 이렇게 부른다.[12] 성공회 내에서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부류로, 사회 참여를 강조한다. 성공회에서 진리 추구의 세가지 기준으로 제시하는 전통, 성서, 이성 중에 고교회파는 전통을, 저교회파는 성서를, 광교회파는 이성을 조금 더 중요시하는 부류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같다.[13] 성공회는 보편교회(가톨릭)주의, 복음주의, 자유주의를 아우르는 신학의 스펙트럼을 보인다. 성공회 전통 안에서 성공회는 그들을 내치지 않고 보듬어 안고 있다. 다른 어떤 기독교 교파도 가지지 못한 이런 전통은 현재 성공회가 보이는 신학의 유연성과도 직결되며, 교회일치 운동에 앞장설 수 있는 사상적 토대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유연함이 오히려 타 교파의 경계를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여성사제 서품을 허용하면서 천주교정교회와의 관계가 서먹해지는 것, 성소수자를 지지하는 광교회파로 인한 내외부의 갈등 등이 그 예.[14] 내리감리교회와 같은 동네에 있다.[15] 1938년 장로교마저 신사참배의 압력에 굴복하였다. 이때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조선예수교장로회를 나온 장로교인들이 고신(고려신학)이라는 분파로 나누어졌다. 고신은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믿음을 지켰다. 예수교장로회의 수많은 교파들 가운데 분파의 명분이 가장 마땅하고 옳았던 교파이지 않을까 생각된다.[16] 신사참배를 교단 차원에서 끝까지 거부한 것은 침례교가 유일했다. 침례교는 교단이 폐쇄되고 32명의 목사가 투옥되어 고초를 겪는 등 혹독한 대가를 치루었다.[17] 어짜피 이런 꼴을 당할 줄 미리 알았더라면, 불과 4년 전 하느님 앞에 큰 죄를 지으며 굴욕적으로 신사참배를 받아들이는 어리석은 짓은 안 했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드는 장면이다. 악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하면 그 악은 차츰 더 큰 댓가를 요구한다는 것을 역사는 가르쳐주고 있다.[18] 이와 관련하여 2015년에는 대한성공회와 일본성공회 간 메시지 교류가 있었다.[19] 성공회는 교구가 3개 이상이어야 한 관구로 독립할 수 있다.[20] 세계 성공회에는 39개의 관구가 있으며, 39명의 관구장 주교는 모두 평등하다. 단 켄터베리 관구의 관구장 주교가 '평등한 가운데 첫째'로 불린다.[21] 성공회에서는 각 교구의 주교좌성당이 있는 교무구를 중앙교무구라 부른다.[22] 서울주교좌성당·약수동교회[23] 대학로교회[24] 상계동교회[25] 도봉교회[26] 동대문교회[27] 성북나눔교회[28] 용산나눔교회[29] 일산교회·행신교회[30] 의정부교회[31] 연수리교회[32] 포천나눔교회·예수평화마을[33] 동두천교회[34] 강남교회[35] 강동교회[36] 봉천동교회[37] 영등포교회[38] 송파교회[39] 성남교회, 분당교회[40] 구리교회[41] 남양주교회[42] 하남교회[43] 춘천교회, 성프란시스수도원(수사회)[44] 강릉교회[45] 항동교회·대학교회(성공회대학교 교내 교회)·성공회대학교[46] 광명교회. 광명교회가 영등포교회에서 분가되었음에도 강남교무구가 아닌 서부교무구로 편제되었다.[47] 부천교회[48] 김포교회[49] 내동교회[50] 화수동교회[51] 간석교회, 서창교회[52] 부평교회[53] 계양교회[54] 서인천교회[55] 안양교회[56] 산본교회[57] 안산교회[58] 수원교회·세류동교회[59] 오산세마대교회[60] 평택교회·팽성교회·안중교회·대안리교회·송탄교회[61] 용인교회[62] 이천교회[63] 여주교회[64] 강화읍교회·내리교회·냉정리교회·넙성교회·삼흥리교회·석포리교회·선수리교회·송산교회·온수리교화·장화리교회·초지교회·흥황리교회[65] 군 하나만으로 교무구가 구성될 정도로 성공회 교세가 센 지역이다[66] 대전주교좌교회·성남동교회·유성교회·보문교회[67] 원주교회[68] 태백교회·예수원[69] 내수교회·금왕교회·복대동교회·초평교회·복계교회·대소교회·대소원교회·교현교회·수동교회·봉전교회·음성교회·묵방교회·진천교회·광혜원교회[70] 공주교회·금산교회·당진교회·온양교회·예산교회·병천교회·봉항교회·둔포교회·백석포교회·부대동교회·봉명동교회·원성동교회[71] 전주교회·경원동교회·김제교회·정읍교회[72] 여수교회[73] 광주교회[74] 호남은 성공회 교세가 크지 않아서, 광주광역시/전라남도/전라북도를 묶어 한 교무구를 구성한다.[75] 부산주교좌교회·동래교회·서면교회·덕포교회·기장교회[76] 마산교회·진주교회·거제교회·성분도수도원(수녀회)[77] 제주교회·서귀포교회[78] 대구교회·서대구교회[79] 포항교회·상주교회·영주교회·구미교회·성프란시스수도원(수녀회)[80] 울산교회·서울산교회[81] 울산이 부산·경남이 소속된 중앙교무구가 아니라 대구·경북과 함께 북부교무구에 소속되어있다.[82] 통성기도와 비슷한 것을 하는 경우가 간혹 있다고 한다.[83] 장로회, 감리회세례명이 없는 개신교 교단 출신이 성공회에서 타 교파 영접식이나 견진성사를 받을 때 세례명을 설정할 수 있다.[84] 요즘 이단들은 너무 잘 알려져있어서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새로 생긴 이단에 대한 대처가 늦을 수 있는 문제는 있을 수는 있다.[85] 한국 교회일치운동의 산실이자 기장 교단의 대표적인 교회이다.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첫 여성 사제인 김기리 미리암 신부가 성공회로 옮기기 전 다니던 교회라는 인연도 있다. 2017년 현재까지도 매년 한번씩 교환예배가 이어지고 있다.[86] 영락교회와 더불어 예장통합 교단의 대표적인 교회 중 하나이고, 또한 한국 장로회 역사에서 매우 비중이 큰 교회이기도 하다.[87] 인천내리교회와 함께 한국 감리교에서 역사상 비중이 큰 교회로 꼽힌다.[88] 가톨릭, 정교회, 성공회, 기타 개신교 연합[89] 사실 그 당시가 지금보다 더 사이가 좋았다. 그 때는 성공회의 여성 사제 서품이 이뤄지기 전이라, 전반적으로 당시 세계적으로 성공회-정교회 간의 사이가 매우 좋았기도 했고, 당시 대한성공회는 지금보다 고교회파(보편교회주의) 성향이 더 강했기도 했다. 양 교파 간의 우애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게, 한국 정교회가 다른 개신교 교파들과 교류를 할 때 거의 언제나 대한성공회가 그 자리에 함께 하고 있다.[90] 이 동영상에 나오는 통역하는 복사[91] 성공회 안에 존재하는 여러 갈래의 신앙 태도(churchmanship)에 대해서도 같은 입장으로 공존하고 있다.[92] '서로의 주교가 상대 교단의 서품식에서 서로 안수하며 서로의 성직자를 교환하여 파송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93] 구 가톨릭교회도 여성의 서품으로 가톨릭이 아니라는 비판을 들었다.[94] 하지만 가톨릭과 정교회의 여성 성직자 반대는 21세기 여성인권과 양성평등의 가치에 위배된다는 지적도 상당히 받고 있다. 해당 종파 내 진보파가 여성 사제 인정을 지속적으로 주장해오는 것도 이 때문.[95] 이전 버전에서는 동성애자 사제 인정이라고 써져있었으나, 사실은 동성결혼 인정 문제가 가장 주된 이유였다. 영국 성공회도 정결 서약을 한 동성애자에 한정하여 제한적으로 성소수자 사제 서품을 인정하고 있다.[96] 주로 향린교회를 비롯한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일부 교회에서 쓰이고 있다.[97] 연세대학교 이사회를 구성하는 12명의 이사 가운데 4명이 이렇게 개신교 교단들에게서 각각 파송을 받아 임명되었다.[98] 조선일보 일가로 알려진 그 방우영이다. 아래 사건을 계기로 사실 상 주인 없는 연세대 이사회를 사유화하려는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조카인 방상훈 조선일보 대표이사와 그 가족은 성공회 신자이다. 서울주교좌성당 1996년 증축 완료 당시에는 조선일보 사주 일가에서 성당에 증축 기념비까지 세워줬다. 우연의 일치인지 조선일보 사옥이 서울주교좌성당에서 꽤 가까운 거리에 있다.[99] 천주교가 약 50만명, 정교회는 약 1만명, 개신교가 약 50만명으로 집계된다.[100] 이는 천주교의 한인성당도 마찬가지로 현지 천주교 주교견진성사를 집전한다.[101] 영국에서는 1862년 여성이 첫 부제 서품을 받았다. 영국 성공회와 대한성공회에서의 첫 여성 성직자의 서품 연도가 이렇게 차이 나는 이유는, 성공회에서는 교회 치리에 대한 많은 부분을 세계성공회공동체에 속한 각 지역 성공회 교회들의 전통에 맡기기 때문이다.[102] 전도사라는 직책이 성공회에서 흔한 건 아니다. 성직자가 아닌 전업 교역자에게 직책을 줘야 할 때 주고 있다. 타 개신교 교파에서의 전도사의 의미도 목사가 아닌 전업 교역자 정도의 의미를 가지는 경우가 많다. 물론 신학대학원이나 그에 해당하는 과정을 마친 후 말이다.[103] 수도자수녀가 성직자인 사제를 겸하게 되는 것이다. 천주교정교회는 여성이 사제 자체가 될 수 없기 때문에 당연히 여성 수도사제도 있을 수 없다.[104] 원칙적으로는 가톨릭 신자가 성공회 성찬례를 비롯하여 개신교 성찬식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허용되어 있지 않지만, 에큐메니컬 성향의 신자들은 가톨릭 미사 참례와 영성체를 대신할 목적이 아니라면 문제 될게 뭐 있냐는 분위기인 듯. 이 때문에 폐쇄성 있는 천주교 주교회의와 진보적 성향의 천주교 신자간에 갈등이 약간 있는 듯 하다.[105] 가톨릭에서는 비가톨릭 그리스도교 성찬예배로 가톨릭 미사영성체를 갈음하는 것이 허용되는 것은 대략 이러하다. 예를 들어 외딴 섬으로 여행을 갔는데, 가톨릭 성당은 없고 성공회 성당만 있다는 상황 등이다.[106] 강원도 태백시 외나무골길 97(하사미동)[107] 대전교구 강원교무구 특수 선교 교회[108] 김종철, 김종희, 김종식 등 일가가 신앙을 공유하며 특히 어머니와 아내가 독실한 신자로 유명하다. 김승연 본인도 소년 시절에 성공회 성당에서 복사활동을 한 적이 있다. 참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