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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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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한반도 내 최초의 공화헌정체제 수립3. 제1공화국의 정책4. 제1공화국의 영향
4.1. 긍정적인 영향4.2. 부정적인 영향
5. 의의6. 관련인물
6.1. 자유당 관련 인물6.2. 야당 관련 인물
7. 관련사건8. 동명의 드라마9. 둘러보기 틀

1. 개요[편집]

파일:external/www.mindan.org/20080815_02a.jpg

대한민국 정부 수립 국민축하식[1]


최초로 완성된 대한민국.[2] 동시에 48년간[3] 노태우 정부까지 지속된 반민주주의적 독재체제의 시발점.[4]

1948년 8월 15일부터 1960년 7월 28일까지 11년 11개월 14일간 존속하였다. 1960년 4월 26일은 단순히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난 날일 뿐이며 제2공화국이 수립되는 1960년 7월 29일 전날까지 제1공화국 체제라고 봐야 맞다. 물론 실질적 종결은 이승만 하야로 보는 게 맞긴 하지만. 반공이 주요 국가 정책이었고 이를 빌미로 정권의 입지를 강화하면서 경찰 및 극우단체와 결탁하여 여러 학살을 벌였고, 개혁 세력들이 극좌로 몰려 탄압당하기도 했다. 대북정책으로 북진통일을 시도했고 1950년 10월 거의 성공할 뻔 했으나 아쉽게도 중공군의 참전으로 결국 휴전으로 실패했다. 그리고 다시 실천에 옮기지는 않았다[5] 이후 발췌 개헌, 사사오입 개헌 등으로 장기집권을 시도했으나 4.19 혁명으로 하야할 수 밖에 없었다.

2. 한반도 내 최초의 공화헌정체제 수립[편집]

1948년, 5.10 총선거를 통해 국회가 설립되었다. 이후 국회는, 7월 12일에 헌법을 제정하고 7월 17일에 헌법을 공포하며, 7월 20일, 제헌헌법에 따라 간선제로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였다. 대통령은 동대문구 의원 겸 국회의장인 이승만이 당선되었으며 그해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하여 행정부가 공식 출범하였다.

3. 제1공화국의 정책[편집]

1. 민주주의를 전적으로 믿어야 될 것입니다. 우리 국민 중에 혹은 독재제도가 아니면 이 어려운 시기에 나갈 길이 없는 줄로 생각하며 또 혹은 공산분자의 파괴적 운동에 중대한 문제를 해결할만한 지혜와 능력이 없다는 관찰로 독재권이 아니면 다른 방식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으니 이것은 우리가 다 큰 유감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목하의 사소한 장해로 인해서 영구한 복리를 줄 민주주의의 대정방침을 모호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가 결코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독재주의가 자유와 진흥을 가져오지 못하는 것은 역사에 증명된 것입니다. 민주제도가 어렵기도하고 또한 더디기도 한 것이지만 의로운 것이 종말에는 이기는 이치를 우리는 믿어야 할 것입니다. 민주제도는 세계 우방들이 다 믿는 바로 우리 친구들이 이 전제정치와 싸웠고 또 싸우는 중입니다. 세계의 안목이 우리를 드러다 보며 역사의 거울이 우리에게 비치어 보이는 이때에 우리가 민주주의를 채용하기로 하고 30년 전부터 결정해서 실행하여온 것을 또 간단없이 실천해야 될 것입니다. 이 제도로 성립된 정부만이 인민의 자유를 보장하는 정부입니다.

2. 민권과 개인자유를 보호할 것입니다. 민주 정체의 요소는 개인의 근본적 자유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국민이나 정부는 항상 주의해서 개인의 언론과 집회와 종교와 사상의 자유를 극력 보호해야 될 것입니다. 우리가 40여 년 동안을 왜적의 손에 모든 학대를 받어서 다만 말과 행동 뿐 아니라 생각까지도 자유로 하지 못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민족이 절대로 싸워온 것입니다. 우리는 개인 자유활동과 자유판단권을 위해서 쉬지 않고 싸워온 것입니다. 우리를 압박하는 사람들은 유래로 저의 나라의 전제정치를 고집하였으므로 우리의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마음이 더욱 굳어저서 속으로 민주제도를 배워 우리끼리 진행하는 사회나 정치상 모든 일에는 서양민주국에서 행하는 방식을 모범하여 자래로 우리의 공화적 사상과 수난을 은근히 발전하여 왔으므로 우리의 민주주의는 실로 뿌리가 깊이 박혔던 것입니다. 공화주의가 30년 동안에 뿌리를 깊이 박고 지금 결실이 되는 것이므로 굳게 서 있을 것을 믿습니다.

3. 자유의 뜻을 바로 알고 존중하며 한도 내에서 행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나라에던지 자유를 사랑하는 지식게급의 진보적 사상을 가진 청년들이 정부에서 게단을 밟어 진행하는 일을 비평하는 폐단이 종종 있는 터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언론과 행실을 듣고 보는 이들이 과도히 책망해서 위험분자라 혹은 파괴자라고 판단하기 쉬웁니다. 그러나 사상의 자유는 민주국가의 기본적 요소이므로 자유권리를 행사하여 남과 대치되는 의사를 발표하는 사람들을 포용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못해서 이런 사람들을 탄압한다면 이것은 남의 사상을 존중히 하며 남의 이론을 참고하는 원측에 위반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비와 선악이 항상 싸우는 이 세상에 우리는 의로운 자가 불의를 항상 이기는 법을 확실히 믿어서 흔들리지 말어야 될 것입니다.

4. 서로 이해하며 협의하는 것이 우리 정부의 관건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새 국가를 건설하는 이때에 정부가 안으로 공고하며 밖으로 위신이 있게 하기에 제일 필요한 것은 이 정부를 국민이 자기들을 위해서 자기를 손으로 세운 자기들의 정부임을 깊이 각오해야 될 것입니다. 이 정부의 법적 조직은 외국군사가 방해하는 지역 외에는 전국에서 공동히 거행한 총선거로 된 것이니 이 정부는 국회에서 충분히 토의하고 제정한 헌법으로써 모든 권리를 확보한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는 우리 일반 국민은 누구나 다 일체로 투표할 권리와 참정할 권리를 가진 것입니다. 일반 국민은 누구를 물론하고 이 정부에서 분포되는 법령을 다 복종할 것이며 충성스러히 바뜰어야만 될 것입니다. 국민은 민권의 자유를 보호할 담보를 가졌으나 이 정부를 불복한다든지 번복하려는 권리는 허락한 일이 없으니 어떤 불충분자가 있다면 공산분자 여부를 물론하고 혹은 개인으로나 또 당으로나 정부를 전복하려는 사실이 증명되는 때에는 결코 용서가 없을 것이니 극히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민주주의가 인민의 자유권리와 참정권을 다 허락하되 불량분자들이 민권자유라는 구실을 이용해서 정부를 전복하려는 것을 허락하는 나라는 없는 것이니 누구나 다 이것을 밝히 알어 조심해야 될 것입니다.

5. 정부에서 가장 전력하는 바는 도시에서나 농촌에서나 근로하며 고생하는 동포들의 생활정도를 개량하기에 있는 것입니다. 기왕에는 정부나 사회에 가장 귀중히 여기는 것은 양반들의 생활을 위했던 것입니다. 지금부터는 이 사상을 다 버리고 새 주의로 모든 사람의 균일한 기회와 권리를 주장하며 개인의 신분을 존중히 하며 노동을 우대하여 법률 앞에는 다 동등으로 보호할 것입니다. 이것이 곳 이 정부의 결심이므로 전에는 자기들의 형편을 개량할 수 없던 농민과 노동자들에게 특별히 주의하려 하는 것입니다. 또 이 정부의 결심하는 바는 국제통상과 공업발전을 우리나라의 필요에 따라 발전을 실시하여 우리 농장과 공장소출을 외국에 수출하고 우리가 우리에게 없는 물건은 수입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즉 공장과 상업과 노동은 서로 떠날 수 없이 함께 병행불패(竝行不敗)해야만 될 것입니다. 경영주들은 노동자를 이용만 하지 못할 것이오 노동자는 자본가를 해롭게 못할 것입니다. 공산당의 주의는 게급과 게급 사이에 충돌을 붙이며 단체와 단체 간에 분쟁을 붙여서 서로 미워하며 모해를 일삼는 것이나 우리의 가장 주장하는 바는 게급전쟁을 피하고 전민족의 활동을 도모함이니 우리의 활동과 단합성은 우리 앞에 달린 국기가 증명하는 것입니다. 상고시대부터 태극이 천지만물에 융합되는 이치를 표명한 것이므로 이 이치를 실행하기에 가장 노력할 것입니다.

6. 우리가 가장 필요를 느끼는 것은 경제적 원조입니다. 과연 기왕에는 외국의 원조를 받는 것이 받는 나라에 위험스러운 것을 각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언제던지 무조건하고 청구하는 것은 불가한 줄로 아는 바입니다. 지금와서는 이 세계대세가 변해서 각 나라 사이에 대소강약을 물론하고 서로 의지해야 살게되는 것과 전쟁과 평화에 화복안위를 가치당하는 이치를 다 깨닫게 되므로 어떤 적은 나라의 자유와 건전이 모든 큰 나라에 동일하게 관심 되는 것입니다. 연합국과 모든 민족들이 개별적으로나 단체적으로 기왕에 밝히 표명하였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발표할 것은 이 세계의 대부분이 민주적 자유를 누리게 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방들이 우리에게 많은 도음을 주는 것이오. 또 계속해서 도움을 준 것인데 결코 사욕이나 제국주의적 요망이 없고 오직 세계평화와 친선을 증진할 목적으로 되는 것이니 다른 의심이 조곰도 없을 것입니다.

- 1948년 8월 15일 대통령 이승만[6]

제헌헌법에 따르면, 자유경제를 원칙으로 삼고 있으나, 사회정의와 균등경제 정신에 입각하여 농지를 농민에게 분배하고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기업이 노동자에게 이익 균점권을 보장하도록 하였으며 자연력, 공공성을 가지는 기업은 국영 또는 공영으로 두며 긴급상황에 한해 사영기업을 국유 또는 공유로 이전할 수 있도록 명시되었다. 또한 정부조직법을 통해 국무총리 직속에 예산 편성 사무를 담당하는 기획처를 신설하고 국무회의에 제출하는 종합적 계획안을 세우도록 하였다.[7]

이승만 행정부는 조봉암, 이순탁 등 중도계열 인사를 농림부, 기획부에 중용하여 농지개혁과 산업계획을 추진하였다. 이에 농림부는 지주의 전업을 보장하여 소유한 자본이 중소기업에 투자되기로 유도함으로써[8] 농촌 집중으로인한 토지 영세성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고 기획부는 산업부흥 5개년계획과 이를 뒷받침하는 물동 5개년계획을 마련하였다[9]

4. 제1공화국의 영향[편집]

4.1. 긍정적인 영향[편집]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나아가야 할 큰 방향인 한민족이 조선후기, 개항기, 일제강점기를 겪으며 뼈저리게 추구했던 근대화, 산업화, 민주화를 통한 민주적 자본주의 산업강국의 건설을 위해 초석을 놓았고 이를 위한 포석을 놓았다는 의의가 있다. 또한 이를 위해 외교면에서 대체로 옳은 방향으로 기초를 잡은 점이 있다. 일단 대한제국말 고종의 목표였지만, 실패하였던 '한반도에 영토적인 야욕은 없는 미국과 동맹 관계를 맺어 주변 러시아, 중국, 일본의 야욕에 대비할 만한 국력을 기른다'라는 대전략이 실현되었다는 점이다.

또한 수십년간 국내를 떠나있었던 탓에 내치나 조직 운영에는 사고를 터뜨렸지만[10], 무시할 수 없는 외교 감각을 지녔던 이승만이 외교를 잘한 측면이 많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확실하게 작전권을 넘겨버려서 미국 혹은 UN군이 발을 빼는 건 원천봉쇄하다시피 했으며,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시에도 미국과 의회의 생리를 너무나 잘 아는 입장에서 반공 포로 석방 같은 벼랑끝 전술로 아이젠하워 정부의 당면 목표였던 휴전을 훼방놓는 입장을 불사하며 체결을 성공하였다. 이걸로 모자라 아예 미군을 서울과 근교에 잡아두어, 북한이 남침한다면 미본토에서 위원회 통과다 의회 승인, 비준이다 하기도 전에 미군과 교전하지 않을 수 없어 자동으로 미군을 참전하게 하는 장치까지 마련하기 까지 하였다. 이걸 자주 입장에서 비판하는 견해가 있을 수 있는 데 문제는 이승만은 청년시절에 대한제국이 미국으로부터 전략적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일본 식민지가 되는 과정을 자기 눈으로 지켜본 사람이었다는 것이다.[11] 무슨 수를 써서도 이번에는 미국으로부터 버림받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고, 결국 이를 성공시켰다. 또한 주한미군이 남한에 있듯이 중공군이 북한에 남겠다는 주장도 개소리 말라면서 철회시킨 것도 이승만의 주장이었다.

비단 북한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주변국과의 관계를 생각해보아도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후 현재까지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실력을 기르는 인큐베이터 역할을 계속해주고 있는 것도 사실.참조

그밖에도 농지개혁법 등을 제정하고 개정한 것에 커다란 치적이 있는데, 농지개혁이 만약 개정이 안 되었다면 한국전쟁때 수 많은 농민들이 북한의 토지배분 선전에 넘어가 북한편으로 붙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학계의 주장이 있다. 때문에 농지개혁법은 매우 커다란 의의를 지니고 있는데, 농지개혁법은 농림부 장관 조봉암이 다 했지 이승만은 한거 없다는 주장도 있지만 조봉암을 자리에 앉힌 것이 이승만이니 그의 치적에 역시나 포함된다. 다만, 제대로 법제화가 되기 전에 이미 농촌 수준에서 밀어붙였던 것은 상당한 의의. 일각에선 당시 미국에게 엄청난 원조를 받아 전후 복구와 그 이후의 경제성장을 했다는 재평가가 일고있기도 한다.[12]

제1공화국의 최대의 의의는 대한민국이 미국과 동맹한 서방 자본주의 진영에 속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엄청난 대가를 치루었지만, 포석 면에서 올바른 방향이었고, 이 구도하에서 이루어진 국력 향상의 혜택을 후손들이 보고 있다. 산업화와 근대화에 뒤쳐져, 식민지로 전락하기까지 했던 대한민국에게 한미동맹과 주한미군은 북한 뿐만 아니라 중, 러, 일로 부터도 체제를 안정시켜 주는 인큐베이터 역할을 하였으며, 경제적으로도 군사비 부담을 대폭 경감하여 결과가 증명하듯이 세계 유수의 산업강국으로 국력을 키울 수 있었다.

다만 친미 외교노선에 대해서 단순히 친미적이었다고만 규정하기엔 무리가 있는것도 사실이다. 제1공화국 시절의 친미 노선은 35년이 넘는 제국주의 세력의 식민통치에서 막 벗어나고, 이후 3년 동안의 전쟁으로 전 국토가 초토화된 그야말로 최악의 특수한 조건에서 비롯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이승만 대통령 본인도 '한국의 생존을 위해 미국을 끌어들이려 했던' 점에서 친미일 수 있어도, '미국의 뜻에 맹목적으로 따르는' 의미에서의 친미는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이승만은 자신의 전 생애를 통틀어 미국과 마찰을 빚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국 전쟁 당시에도 이전의 여러 남침 징후를 무시하고, 에치슨 선언에다 한국군에 대한 지원에 미적지근했던 미국에 대해 분노를 폭발시키며 미국 대사에게 빨리 미군 참전 안시키면 남한에 있는 미국 민간인들 다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하는 깡을 부리기도 하였다[13]
반공포로 석방만 해도 미국을 제대로 물먹인 사건이라서 미국에서 길길이 날뛰었고 처칠도 열받아서 저런 인간이 통치하는 땅 지켜줄 필요없으니 영국군 철수시키자는 주장까지 했다. 미국 정부도 이승만을 몰아내는 쿠데타까지 획책했었다. 종이 위의 구상에서 그쳤지만.

요약하자면 조선 말, 가쓰라-테프트 밀약을 통해 단순히 국제법이나 이상주의적인 시각으로는 국가를 지킬 수 없음을 깨닫고 온갖 정치적 공작을 통해서 미국을 잡아두어 대한민국을 지키려고 했고 이를 이루어냈다는 것이다.[14] 하지만 외교로 미국을 잡아두고 안으로는 발췌개헌,사사오입 개헌,3.15 부정선거 등 내치는 최악이였다.

또하나 대표적인 예로는 중공군 개입으로 전쟁이 치열해 지면서 병력이 부족해지자 미군은 구 일본군의 한국전쟁 개입을 구상했는데, 이승만은 일본군이 한반도에 진주하면 일본군은 공산군과 싸우기 전에 먼저 한국군부터 싸워야 할 것이라고 반대했고 뒤이어 중공군의 공세가 좌절되자 결국 무산되었다. 물론 해양순찰이나 기뢰제거에 이승만과 한국정부 몰래 일본군 출신을 투입시킨 사실은 있지만 이 때도 일본군으로 한국 영토에 상륙시키거나 한 것이 아니라 그냥 일본군 출신이고, 미군에 소속된 특별부대의 형태였다.

4.2. 부정적인 영향[편집]

일단 외교적인 측면에서는 높게 평가할 수 있고, 경제적으로도 사실상 아무 기반도 갖춘 게 없었음을 감안하면 그럭저럭 선방은 했다고 할 수 있다.[15] 그러나 정치 및 사회적으로는 결코 긍정적인 시각으로는 평가할 수 없는 점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 문제다. 물론 이승만 대통령을 높이 평가하는 학계, 지식인들(주로 뉴라이트 성향)이 제1공화국의 외교, 국방상의 치적을 앞세워 제1공화국 시대에 나타났던 국내의 정치, 사회적인 여러 문제점들에 일종의 면벌부를 요구하기도 하지만, 업적은 업적이고 과오는 과오다.

물론 정부 수립 두 달 정도 뒤에 여순사건이 터졌고, 2년도 안되어 한국전쟁이 터진 점에서 실드칠 소지가 있기는 하다. 사실 미국이 한반도를 거의 포기하다시피하다가 북한이 남침하자 국제공산주의의 세력 확대 시도로 판단하고 개입한 데서 보듯이 전쟁 자체에 대해서는 제1공화국의 책임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으니까. 문제는 전쟁 난 다음. 한국전쟁에서 북한이 남침하자 국민들에게 국군들이 선전하고 있다는 방송을 틀고 열심히 도망한 뒤 한강철교를 폭파했고 부산에 임시 수도를 두었으며 그곳에서도 독재연장을 위한 권력투쟁이나 하였고 군간부와 행정을 치밀하고 체계적으로 통솔하지 못 하여 국민방위군 사건이라거나 보도연맹 학살사건같은 끔찍한 사건도 터뜨렸다. 또한 애초에 반대세력을 빨갱이로 몰아 제거하는 작업을 통해 세운 국가여서 민중합의에 의한 지지가 취약했던 탓에 체제 강화를 위한 기타 여러가지 뻘짓이 자행되었다.

우선 여순사건 직후 국가보안법이 제정[16]되었으며, 이건 그렇다 쳐도 발췌개헌(부산정치파동)안[17]이 통과되어 직선제를 통한 장기 집권이 실행되었고,[18] 초대 대통령에 한하여 중임제한을 없앤 그 유명한 사사오입 개헌안도 이 때 통과되었다.[19] 또한 강력한 라이벌로 떠오른 조봉암에게 간첩 혐의를 씌워 처형하는 사법살인도 이 때 처음 시행되었다.[20] 또한 당시 여적필화사건으로 논란을 일으킨 비판적인 신문인 경향신문[21]에게는 무기한 발행정지 처분을 내렸다. 한마디로 국내 관리는 삽질의 연속이었던 셈. 이 외에도 장면 부통령 피격 사건같은 일도 있었다. 또 각종 우상화 작업도 병행되었다.

이렇게 하여 12년간 집권했고 여기에 최종적으로 부통령으로 이기붕을 확고하게 당선시켜 계승을 명확히 하기 위해 3.15 부정선거라는 뻘짓을 하였으나. 그래도 대안이 없다고 참던 국민들이 민주주의 최후의 근간인 선거를 무력화하는 시도까지 용서하진 않았다. 도리어 쌓여가던 불만이 한꺼번에 터지면서 멸망을 자초하여 언론탄압에 반발한 언론사들의 공격이 이어졌고, 군부가 등을 돌린 상태에서 무엇보다 민주주의 교육을 받고 각성한 학생들이 중심이 된 시민혁명 4.19 혁명이 일어나 이승만이 대통령 자리에서 하야하였고 체제는 종식되었다. 그리하여 제2공화국이 시작되었다.

요약하자면, 대한민국 초대 정권으로 국제적으로 벼랑 끝에 몰려있었던 대한민국을 뛰어난 외교적 성과로 보전하는데 성공하였으나, 대한민국 역대 정권 중 가장 큰 사건사고를 내내 터뜨렸으며, 이에 분노한 국민들이 들고 일어나 붕괴되어 역설적이게도 대한민국 민주화에 기여한 정권. 덤으로 지금도 나라 현실을 개탄하는 사람들이 종종 이 나라는 시작부터 글러먹었어라고 탄식하는 이유이자 그 자체. 근데 사실 과거 추축국에 점령당한 국가들이나 다른 식민지 출신 국가들도 반공 및 국가재건의 대의 하의 과거 식민제국, 추축국에 협력했던 사람 청산하지 않은 것이며 이념대립으로 인한 학살, 부정부패, 독재체제 고착화에 있어서 더하면 더했다. 바로 저 북쪽만 봐도... 대한민국의 경우 이런 큰 사고를 터뜨리고도 국민들의 의식변화와 후속정부들에 의해 점차적으로 개선되어 오늘날이 이르긴 했지만.

물론 당시 사실상 국제적 미아 상황[22]이었던 대한민국에서 권력이 멀쩡히 유지되긴 상당히 어려웠다. 일단 당선되었다면 나라를 위해 잘 일하면서도 정권 유지를 해야하며, 정권유지가 중대 과제인 것이[23] 정치다. 장관을 임명할때도 자신에게 충성하지 않는 사람은 능력 좋다고 가져다 놓을 수가 없는 게 현실이다.[24][25] 이승만의 전략은 여러모로 대한민국에 대대로 이익을 주고 있으나, 그를 행해야했던 제1공화국의 구성물이 매우매우 좋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어거지로 정권을 유지하려 한게 문제. 농담 아니고 제1공화국의 내치 능력은 정말 처참하기 짝이 없었다. 채택한 전략은 매우 우수했으나 정작 그를 실행해야 했던 정권이 이승만 등 일부를 제외하면 한마디로 말해서 어중이 떠중이 다 모인 오합지졸이였다. 이게 무슨 소리냐면 그나마 외교를 잘했기 때문에, 즉 신의 한수가 된 한미동맹조차 없었으면 한국은 그야말로 현재의 북한이 부럽지 않은 수준의 막장 국가가 되었을 것이라는 소리다.[26]

5. 의의[편집]

대한민국의 기반은 이승만의 제1공화국이 다져놓은 것은 사실이나,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이승만을 무너뜨렸고 이승만을 부정한 이들이 사회의 주류가 되었기에 이렇게 발전했음을 명심해야 한다. 박정희를 비롯한 5.16 군사정변 주동자들은 소위 '혁명재판'을 통해 1공 시절 실세들 상당수를 처벌했다. 진보 세력에게는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5.16 군사정변4.19 혁명의 후계 중 하나로 보는 설도 있다. 민주화 세력들에게 있어서는 권위주의라는 병폐를 심어놓은 만큼 더욱 이승만에 대해 부정할 수 밖에 없었다[27]. 현대의 대만장제스의 유산을 지워나가는 것 처럼 말이다.

더불어 역대 정권 중 가장 많은 대한민국 국적의 사망자가 발생한 공화국이기도 했다. 조선인민군에 의한 학살도 부정해서는 안 되겠지만, 국민방위군 사건, 보도연맹 사건, 기타 양민학살, 한강 인도교 폭파 같은 건들은 이승만의 책임으로 봐도 무방하다. 이 외에도 제주 4.3 사건같은 것도 들 수 있고, 제주도의 사례에서 나타나듯이 식량난 문제도 후대 정권에 비해서 심각했다.

6. 관련인물[편집]

6.1. 자유당 관련 인물[편집]

6.2. 야당 관련 인물[편집]

7. 관련사건[편집]

8. 동명의 드라마[편집]

9. 둘러보기 틀[편집]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대한민국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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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플래카드에 적힌 한자[2] 물론 이미 한참 이전에 임시정부가 가장 먼저 수립되었지만 망명정부의 틀을 벗어나 정식정부로 수립된 건 1공화국이 처음이다.[3] 본격 오늘날 지금 이 시각까지의 진정한 민주주의의 실질적인 시작은 바로 '이 시'이라 볼 수 있다.노태우 정부부터 민주주의의 정식 시발점으로 볼 시에 총 40년간씩. .[4] 대놓고 독재를 천명한 대한민국 제4공화국이나 대한민국 제5공화국과 달리 이승만 정부는 표면상으로는 민주주의를 표방했지만 오늘날과 같은 완전한 민주주의 정부로 보기엔 역시 그 거리가 멀었다. 중간에 독재와는 거리가 멀었던 (2공)윤보선최규하(위관정부)도 존재했다만 그 실상이…[5] 만약 6.25 전쟁 당시 북진통일을 이루었다면 이승만과 1공화국의 위상은 지금과는 180도 다른 엄청난 신격화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당장 히틀러 못지 않은 학살을 했던 처칠과 스탈린이 히틀러보다 비교적 좋은 평가를 받는 것만 보아도 전쟁을 이긴 것과 비긴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6] 金珖燮 편, 『이대통령훈화록』, 중앙문화협회, 1950[7] 정진아, 정권의 자립경제론, 그 지향과 현실[8] 강진국, 1949, 농지개혁법 해설, 문화출판사[9] 기획처 물동계획국, 1949, 조선식산은행조사부[10] 하지만 내치도 못했다고 할수만은 없는 게, 이승만조봉암을 농림부장관으로 임명(그러나 이후 조봉암은 진보당 사건으로 사법살인 당한다.)해 농지개혁법을 제정(조봉암에게 휘둘리는 것처럼 보이기 위한 계획이었다는 설도 있다.)해서 농민들이 한국전쟁 당시 북한의 선전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 등 업적도 있었기 때문이다.[11] 국제법을 믿었던 대한제국이 한미수호조약에 의거해 미국에 일본의 침략을 저지해달라고 요청하는 일행의 통역을 맡은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이미 미국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한국을 일본에 넘기고 자기들은 필리핀의 영유권을 인정받은 상태였다. 이런 쓰라린 경험에다 이후 실제 수십년의 경험으로 이승만은 겉으로하는 미국의 립서비스에 관계없이 미국으로부터 필요성을 인정받지 못하면 또다시 버림받을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강해진다. [12] 삼성이 제일모직, 제일제당을 설립한 것도 제1공화국 시기의 일인데, 이들 두 회사는 6.25 전쟁 직후의 낙후된 한국경제에서 그나마 수입대체 효과를 통한 산업자립의 기반을 마련한 대표적 사례로 손꼽힌다.[13] 6.25 전쟁이전 이승만이 제의한 한미상호방위조약 요구는 미국에 의해 거절당하였다. 또한 미국은 근본적으로 에치슨 선언에서 드러나듯이 필리핀 일본 얄류산 열도를 잇는 선을 방어선으로 설정하고, 남한의 군비는 국경 경비대 수준으로 둘려고 하였다. 장개석 정권을 포기하고, 주한미군을 철수시킨데서도 나타나듯이 적어도 1950년 전의 미국은 아시아나 한반도에서 육전도 불사한다기 보다는 일본이나 타이완 필리핀 같은 섬에 거점을 두면서 해공군으로 미국에 대한 위협을 막으려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이승만은 주한미군 철수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진해에 미해군 기지를 유치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만다. http://www.imhc.mil.kr/user/imhc/download/gunsa/EEB03063N.pdf[14] 애시당초 중국은 한국을 언제든 집어삼킬 준비를 하고 있는 국가고, 일본 내부에도 혐한 감정이 꽤나 퍼져 있다. 즉 이 두 나라는 일단 준 적대국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며 그나마 러시아가 믿을 만하나 주관심사가 중앙아시아와 동유럽이기에 한국을 적극 도울 의지가 없으므로 결국 미국 말고는 대안이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중국, 일본과 대놓고 적대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두 나라와의 관계를 무작정 좋게 유지하는 것도 어려운 것이다.[15] 이승만 체제 하에서 한국의 문맹률 및 기본 상식에 대한 결여 비율은 엄청나게 줄어들었고, 그 인력을 박정희가 나중에 경제를 발전시킬 때 공장 노동력으로 잘 써먹었다는 걸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공장 노동자를 우습게 보는 사람들이 많은데 기본 판단 및 학습능력과 언어 구사 능력은 갖고 있어야 한다.[16] 당시 초대 대법원장이었던 김병로는 국가보안법에 대해 강력하게 반발했었지만... 프린스 이승만 박사의 권한이 워낙 막강했으니....[17] 말이 개헌이고 정치파동이지 내용을 보면 친위 쿠데타다. 거기다 이 짓을 한 시기는 전황이 교착되었다고는 하지만 한국전쟁 중이었다.[18] 당시 부통령이었던 김성수는 '민주주의를 유린한 행동'이라며 강력히 반발하였고 부통령이 사퇴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19] 다만 이승만은 고령이어서 혜택을 한번밖에 누리지 못하긴 했다. 재미있는 점은 한국의 대통령이나 미국 대통령이나 최대한 해먹은 게 4회가 마지막이라는 것이다. 한국은 이승만 3회. 박정희 4회(3선은 유신 임기로 바꿔서 재직). 그 외에는 단임. 미국은 FDR이 4회를 했다.[20] 진보당 사건을 지칭한다. 이 사건은 인혁당 사건과 더불어 정략적 차원에서 사법살인을 한 극히 일부인 사건이다.[21] 당시 경향신문은 천주교계 신문이었다.[22] 간단히 말해 전 세계가 버린 나라. 반공포로 석방도 지정학적 특성상 버려질 가능성이 높은 나라를 어떻게든 북한+중국+소련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나름의 시도였다. 초기 주한미군에 대한 통제가 거의 없었던 것도 이런 점 때문이다. 아쉬운 것은 한국이지, 미국이 아니었다.[23] 이 정권 유지가 나라를 위해 일하는 것보다 우선되게 되면 국가 막장 테크가 시작된다.[24] 비슷한 경우가 중일전쟁때 미국에서는 장제스에게 능력이 좋았던 바이충시를 중용하라고 계속 권유하였으나, 바이충시는 반장전쟁때 장제스하고 대립한 사람이었기에 장제스가 계속 그 권유를 씹었던 적이 있다. 그리고 그렇게 대립했던 사람들은 국공내전 당시 하나 둘 장제스의 예상대로 배신했다. 바이충시는 반장전쟁 이후로는 장제스한테 반기를 든 적도 없는데?[25] 물론 자신을 따르려 하지 않는 사람을 끝내 따르게 만들고 이런 사람들이 능력이 좋은 부류도 많긴 하지만 리스크는 상당히 큰 일이다.[26] 물론 미국이 한미동맹을 체결한 뒤에도 보장해준 것은 오직 한국의 안전뿐 내부가 어떻게 돌아가는가는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실은 가장 중요한 게 바로 그 안전 보장이다. 안전 보장을 못 받아서 제대로 성장하기도 전에 망한 나라나 북한의 김씨왕조처럼 쓸데없는 대미 전쟁 준비와 적화통일을 한답시고 GDP의 30%를 군비로 때려박는 정신나간 짓을 하다가 망한 체제가 세상에는 수없이 많다.[27] 그래서 이승만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백범 김구를 받드는 것이다. 백범은 진보개혁세력과는 거리가 훨씬 먼 인물이라는 점은 차치하고서라도 말이다.[28] 시작은 미군정기이나 제1공화국 시절 사태가 종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