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약진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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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우파 투쟁

대약진 운동

문화대혁명


大跃进运动/大躍進運動
The Great Leap Forward Movement

파일:attachment/대약진_운동.jpg
1958년 농업대약진의 포스터. 포스터에 쓰여있는 중국어 표어는 '农业大跃进社社放卫星'인데 "농업 대약진, 인민공사들은 인공위성을 쏘자!"라는 뜻이다. 1957년 소련의 스푸트니크가 지구촌을 흔들었고, 마오쩌둥은 중국 인민들에게 중국도 곧 인공위성을 쏠 것이라고 약속했다.[1] 이때 "위성을 쏘다(放卫星)"라는 어구는 이 당시 숙어처럼 쓰여 "생산에서 신기록을 내다"는 뜻으로 쓰였다. 헌데 포스터 그림은 벼 뭉텅이가 송두리째 뽑혀나가는 듯이 보이는데다 그 모양이 마치 버섯구름같이 보인다.

1. 개요2. 배경3. 전말
3.1. 농업집단화3.2. 토법고로3.3. 제사해 운동3.4. 를 빽빽하게 심기3.5. 공포정치와 학살
4. 비참한 결말5. 먹을 것이 없으면 끼니를 줄여라6. 사실 원흉은 첸쉐썬?7. 대약진 운동, 그 후8. 관련 매체
8.1. 서적
8.1.1. 정발된 저서8.1.2. 비정발된 저서
8.2. 영화

1. 개요[편집]

"너무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소! 역사는 당신를 심판할 거요. 심지어 식인 행위도 역사책에 남게 될 거요!"[2]


1962년 8월, 류사오치.


마오쩌둥과 공산당이 열의를 가지고 시작한 사회부흥운동이자, 최초로 '농촌이 주체가 된' 혁명[3]...이라는 의도는 좋았으나,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만을 좇다 결과적으로 수천만의 인민을 굶어죽게한 마오쩌둥과 공산당의 대참사.
대후진운동

정식 명칭은 제2차 5개년 계획. 그 유명한 토법고로제사해 운동은 대약진 운동의 일부분이다. 이름과는 정반대로 중국을 대후퇴시킨 마오쩌둥의 대실책으로 평가받으며, 문화대혁명과 함께 중국 전체의 문화적 수준과 경제적 수준을 20년 이상 퇴보시켰다고 평가받는다. 이로 인해 중국 전역에서 기근이 발생해 3,000~5,000만명이 굶주림으로 사망했다.

니키타 흐루쇼프소련옥수수도배를 하며 미국의 경제력을 능가하겠다고 도발하자 마오쩌둥이 이에 경쟁심을 느끼며 소련과 마찬가지로 농공업의 대증산 계획정책을 내놓으면서 시작했다.[4]

2. 배경[편집]

"영국은 연간 2000만톤의 철강을 생산하고 있다. 15년 후 영국의 생산량은 3000만톤까지 늘어날지 모른다. 중국은 어떻게 될까? 15년 후 중국은 4000만톤의 철강을 생산하게 될지 모른다. 그렇다면 영국의 생산량을 초월하는 것이다. 올해 우리나라는 강철 520만톤을 생산했고, 5년 뒤에는 1000~1500만 톤을 생산할 수 있을 것이다. 5년이 더 지나면 2000~2500만톤을, 다시 5년 뒤에는 3000~4000만톤을 달성할 것이다. 내가 허풍을 떠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장래 또 다른 국제 모임에서 만났을 때 여러분은 내가 너무 주관적이라고 비판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지금 상당한 증거를 바탕으로 말하는 것이다. (...) 흐루쇼프 동지는 소련이 15년 안에 미국을 따라잡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15년 안으로 우리 또한 영국을 추월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대약진 운동을 선포하는 마오쩌둥의 교시


중국은 건국 이후 여러 부문에서 소련벤치마킹하는 정책을 폈고, 마오쩌둥도 짧은 기간에 후진농업국에서 선진공업국으로 탈바꿈한 소련의 발전 경로를 따라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에 따라 소련에서 많은 원조를 받고, 소련의 기술자들을 고용해서 개발계획을 실시했다. 중공은 1950년대 초반 연 20%의 성장을 상정하고 소련에 160개의 산업 플랜트 건설을 비롯한 엄청난 원조를 요청했으나 스탈린은 이를 비현실적이라고 까면서 90개 플랜트로 중공의 계획을 축소시켰다. 마오쩌둥은 소련의 속도조절 요구에 불만스러웠으나 천하의 마오쩌둥도 스탈린을 거스를 순 없었기 때문에 스탈린이 살아있을 때 중공은 대약진 급의 무리한 공업화 드라이브는 나서지 않았다.

이후 50년대를 지나며 토지개혁, 집산화, 전매제 등이 정착하고 중국 공산당이 농촌 절대 다수를 장악하게 되고 삼반운동, 반우파운동으로 국내 반대파들까지 때려잡게 되면서 마오쩌둥은 거의 마음대로 정책을 휘두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던 중 1953년 이오시프 스탈린이 사망한 후 집권한 니키타 흐루쇼프가 스탈린을 격하하고, 서방과의 화해를 추진하자 마오쩌둥은 수정주의라고 화를 내며 이에 반발하게 된다. 마오쩌둥은 스탈린은 두려워했지만 흐루쇼프의 경우는 나약한 인물이라 얕잡아보고 혐오했으며 이때부터 중공은 소련을 제치고 사회주의권의 우두머리로 나서기 위해 소련에 대한 노골적인 경쟁심을 보이게 되었다. 그러던 중 흐루쇼프가 미국을 따라잡겠다고 선포하고 처녀지 개간 운동을 비롯하여 무리한 경제성장과 수출에 나서게 되자 마오쩌둥 역시 뒤지지 않겠다고 영국을 따라잡겠다고 선포했고, 이 구호는 곧 7년 안에 영국을 추월하고 15년 안에 미국을 따라잡겠다는 황당한 목표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오쩌둥은 중국을 역사상 유례가 없는 속도로 최대한 빨리 발전시키려고 했다. 미국이나 소련의 경제발전 속도를 뛰어넘어 10년안에 이들과 맞짱 뜰 강국을 건설한다는 것. 그것을 위해 농업생산과 공업생산을 폭발적으로 늘려 지상낙원 사회주의 국가를 완성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검증도 안 된 여러 가지 사이비 이론에 따른 엉터리 정책이 마구잡이로 실시되기 시작했다.

3. 전말[편집]

七年超, 十五年赶 - 毛泽东
7년 안에 영국을 초월하고, 15년 안에 미국을 따라잡는다. - 마오쩌둥[5]

한국에서는 공상적 계획의 산물로서 일방적인 병크로 흔히 알려져 있으나 이는 사실과 좀 다르다.

국가가 주도하여 농업을 희생시키고 대신 급속한 공업화를 밀어붙이는 이런 경제개발은 사실 1930년대의 이오시프 스탈린이 실시한 5개년 계획이 원조였다. 그 이전까지 서유럽미국의 공업화는 수십~수백년에 걸쳐서 자생적으로 일어난 현상이다.

역사상 국가 권력의 주도로 계획을 세워서 단기간에 경제를 성장시킨 사례로는 보통 소련을 최초로 보는 경우가 많다.[6] 이는 소련이 인력, 물자, 금융 등 모든 것을 국가가 통제하는 일당독재+전면적 계획경제 국가라서 가능했던 일이었고, 농업부문이 희생되었다는 문제점은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성공적이었다. 불과 19세기 이전만 하더라도 땅만 넓은 촌동네로 치부되고 유럽으로 쳐주지 않던 가난한 나라가 2차 세계 대전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음에도 미국에 맞서는 초강대국으로 성장했으니 말이다. 문제는 이걸 보고 중국이 따라했는데 중국은 소련에 비해서 농업인구의 비중이 훨씬 높았고, 거기다 소련에 비해서 기술력도 공업화 의지도 부족한 점이 문제였다.

당시 중국은 서방과는 물론 소련이나 다른 동구권 공산국가들과도 관계가 악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어디서 기술원조를 받을 수도 없었고, 식량자급을 이루었다는 선전을 한 그놈의 체면 때문에 공업드라이브로 감산한 식량도 수입하지 않았다. 상황이 좋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타국의 사례를 그대로 적용한 것도 모자라서 체면 차리려고 뒷수습도 못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남의 나라 계획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대로 파악도 안 하고 타국의 도움없이 계획을 추진하려니 무리수가 작렬했다. 일단 모든 인민들을 생산 단위로 묶어 취식을 함께 하도록 했다. 덤으로 각 마을마다 할당량을 부과하여 생산하게 했으며, 모든 마을에 소형 용광로 즉, 토법고로를 배치하여 대형 공장을 대체하고 강철식량을 생산하는 것을 골자로 했다.[7]

저런 소련식 공업화 계획은 1930년대 후반 만주국일본인 관료들이 복사해서 그대로 시행했는데, 이 과정에서 소위 만주 인맥이라고 해서 일제강점기 시기 관동군만주국을 경험한 관료, 전문가 그룹이 이후 한일 양국 정권에 상당부분 포진해 있었던 것이 20세기 중후반 양국 경제정책을 수행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북한의 김일성도 당연히 소련의 영향을 받아서 정부가 주도하는 급진적 공업화를 추진했는데 북한도 초기에는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1970년대 초반까진 제3세계 국가들 중에선 경제발전이나 생활 수준으로도 선두권이었다.[8] 다만 그 이후에 '계획경제 특유의 비효율성'에 '국방/경제 병진 노선'을 택하면서 군사비 부담으로 주저앉게 된다. 물론 북한은 소련과 중국에서 받은 '막대한 원조'도 한몫했다. 실제 계획경제 특유의 비효율성이 부각되기 시작하고 소련과 동유럽의 원조가 줄어들기 시작한 1960년대 말부터 독립채산제 등 경제개혁에 관한 논의가 북한 내에서 있었으나 곧바로 김일성의 확고한 1인숭배체제가 확립되면서 그냥 묻혔다. 결국 1980년대의 대삽질과 소련붕괴의 영향으로 경제가 붕괴되면서 북한의 경제 정책도 실패로 돌아간다.

크게 농업집단화와 토법고로로 나누어지며, 함께 진행된 제사해운동도 워낙 영향이 커서 대약진 운동을 설명할 때 들어간다. 이외에 여러 가지 정책이 있었다.

3.1. 농업집단화[편집]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고 나서 마오쩌둥은 전국민의 0.1~0.3%를 제거하는[9] 가혹한 숙청을 통해 전국을 장악하고 자신이 원하던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전통적인 중국 농촌 경제흐름[10][11] 고려하지 않은 마구잡이식 분배와 부농과 중농에 대한 무차별적 공격, 수익을 올리는 것 자체에 대한 적개심, 농민들의 전통적인 부수입인 여러 가내수공업들이 중국 공산당의 손에 철저히 파괴되면서 이미 공산당이 장악한 첫 몇 년 동안 중국 전체의 생산량은 국민당 시절보다 30% 이상 감소한 상태[12]였다. 마오쩌둥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소련식 집단화를 이루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인민공사, 영어로는 commune(코뮌)을 설립해서 협동농장으로 개편했다. 소련의 예에서 보듯이 이는 농업생산량을 극도로 떨어뜨리는 조치였다.

이를 위해 인구이동을 법적으로 금지해버렸고, 집에 재산을 쌓아두거나 음식을 저장하는것은 반동분자로 몰아 강력하게 처벌했다. 식당과 객잔은 물론이고 사원, 도관 같은 곳도 모두 폐쇄시켜버린 다음 공용 급식소로 개편했고, 일반 가정집들도 공산당원이 집집마다 방문해서 곡식과 소금, 조미료, 솥과 그릇, 심지어 수저까지 모두 수거해갔다. 모든 인민들은 일체의 개인 취사를 금지당했으며, 이를 어길 시에는 엄한 벌을 받았다. 식사는 모두 공용 급식소에서만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일을 한 이유는 농민이든 공장에 다니는 공민이든 간에 자신이 해야 하는 일에만 집중해야 한다는 것과 개인 취사를 하면 잉여 식량을 비축하게 되고, 이는 곧 계급이 된다고 보는 공산주의 원칙 때문이었다.

그나마도 이게 제대로 작동했으면 그런대로 괜찮았겠지만, 아무런 대비도 없이 갑작스럽게 개인의 식량 보관을 금지시켜 버리고, 단체로 밥을 해먹인다는 발상은 채 1달도 지나지 못해 온갖 문제점을 내뿜으며 공용 급식소의 폐쇄로 끝나버리고 만다. 이 공용 급식소의 운영이 어찌나 허술했던지 첫째, 모든 인민들은 자신의 노동에 의한 대가로 밥을 먹는 것이므로 전면 무상인데다 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 양을 먹든 제재할 수가 없었고, 둘째로 인원관리가 허술하여 공용 급식소를 돌아다니며 하루에 몇 끼를 먹어도 막을 방법이 없었다. 셋째, 관리하는 사람과 공산당원도 자신의 음식, 식재료가 아니니 열정적으로 통제하지 않았고, 넷째로 작게는 마을 1개, 크게는 도시 하나의 인구가 모두 한꺼번에 집단으로 취식을 해야한다는 태생적인 한계점[13] 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농업 생산량에 맞춰 인구를 재배치하고, 잉여 농산물을 저축/보관해서 미래를 대비하는 게 불가능해져 결과적으로는 재앙을 더 키워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이후 공용 급식소가 완전히 망해버리자, 어쩔 수 없이 중국 공산당도 공동식사가 '당군 관계의 악성 종양'이 되었다고 인정하면서 예전처럼 개인 취식으로 선회할 수밖에 없었는데, 문제는 예전에 이미 개인 가정의 음식들은 둘째치고, 솥과 식기도구까지 모조리 거둬가버려 밥을 지어먹으려면 당장 솥부터 구해야할 형편이 되고 만 것이다.

덤으로 인구 이동을 제한하는 제도는 느슨해졌지만 21세기가 된 현재도 시행되고 있다. 호구제(戶口制)라고 하며, 자기가 소속된 호구를 벗어나 다른 지역에 가서 일하는 사람은 여러 가지 불이익을 받는다.

3.2. 토법고로[편집]

"이처럼 작은 뒤뜰 용광로에서 이렇게 많은 철을 생산할 수 있는데 왜 외국인들은 거대한 제련소를 건설하지? 참으로 한심하군!"


엄청난 양의 똥철이 만들어진 것을 보고 흡족해한 마오쩌둥이 수행원에게 한 말.


마오쩌둥은 매 집마다 뒤뜰에 토법고로를 지어서 대규모의 용광로 없이도 강철 생산량을 늘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각 지역마다 증산 경쟁이 벌어졌고, 지방에서는 허위보고와 임시변통, 예를 들면 멀쩡한 물건을 고철로 만들어 녹인 것으로 엉터리 생산량을 중앙에 보고했다.

뿐만 아니라 토법고로에 쓸 연료를 구한답시고, 주변 삼림을 모두 벌목해 버렸으나 정작 만든 건 기술부족으로 인한 조악한 품질의, 우리들이 소위 이야기하는 똥철이었다. 덕분에 농기구들은 모두 잡철이 되었고, 이는 다시 농업생산량을 반감시켰다. 당연히 이런 똥철은 철강등 유용한 재료로 사용할 수 없으며, 제대로 사용하려면 다시 녹여서 불순물을 제거하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연료비와 시설 투자가 필요할 뿐더러, 이렇게 해도 애초에 제대로 철강을 생산한 것보다 품질이 떨어지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이런 똥철을 만들기 위해 멀쩡한 농기구와 각종 도구를 토법고로에 넣어서 녹이는 아스트랄한 상황이 연출되었는데, 애초에 토법고로의 목적이 강철을 생산해서 각종 도구와 장비를 만드는 것임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본말전도된 사태였다.

여기에 토법고로에 쓸 연료를 구하기 위해 주변 삼림을 모두 벌목해버린 결과 대규모 홍수와 산사태가 일어났다.

3.3. 제사해 운동[편집]

"저 새는 해로운 새다". 사해란 참새, , 모기, 파리를 의미한다.

대약진 운동과는 별개로 제사해 운동"이 실시되어 전반적인 위생개선운동을 벌였는데, 문제는 위생과 별로 상관없는 참새를 대대적으로 사냥하는 개판을 벌였으니… 거기에다가 참새는 원래 병해충들을 먹이로 사냥하기 때문에 여름에는 병해충이 들끓게 되었다.

그렇게 참새를 제외한 나머지는 구제에 실패했다. 그래서 쥐, 모기, 파리는 전멸을 피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번성하게 된다.

3.4. 를 빽빽하게 심기[편집]

"작물은 다른 동무와 함께 잘 자라며, 함께 성장하면서 더 편안할 것이다."


빽빽하게 벼 심기를 장려하는 마오쩌둥의 발언.


에다 아주 빽빽하게 심었는데, 이는 칼텍에서 항공공학과 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칼텍 교수를 역임한 첸쉐썬 박사의 아이디어였다. 첸 박사는 생산량 증분을 과학적으로 증명해서 마오쩌둥에게 보고서를 냈고, 이를 본 마오쩌둥이 "신묘한 계책"이라고 하면서 실험도 안 해 보고 전국적으로 실시했다.

문제는 농업분야에서는 문외한인 첸쉐썬 박사가 내놓은 계산은 전혀 농학에 근거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첸 박사가 제시한 모와 모의 간격은 10cm × 15cm이다. 이게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부연설명을 곁들이면, 모와 모의 간격은 최소한 12cm × 20cm은 유지해줘야 한다. 이것도 계단식 논에서나 어쩔 수 없이 쓰는 최소한의 간격이다. 그 이하로 간격을 좁혀 심으면 벼와 벼끼리 생장을 방해하면서 병충해가 발생하기 쉬운 조건이 된다.

그리고 수확도 크게 줄어드는데, 생장을 방해하는 가까운 벼보다 더 크게 자라기 위해 낟알을 줄이고 잎을 늘려 광합성을 하는 것이다. 결국 모 20개 심어서 나올 수확보다 정상적으로 모 10개 심어 나오는 수확이 더 많게 된다. 당연하게도 생산성 하락 등의 농업 재앙의 조짐을 보였다.

3.5. 공포정치와 학살[편집]

"진시황은 우리에게 크게 못 미친다. 지금 우리는 열명의 진시황처럼 행동해왔다. 단언컨대 우리는 진시황보다 더 강하다. 진시황은 460명을 생매장했지만 우리는 4만 6천명, 아니 460만명은 매장할 수 있다."


-마오쩌둥


중국 공산당은 대약진의 대열에서 낙오하는 사람들을 고문하고 학대하거나 죽였는데 이런 낙오자들의 대열엔 노인, 임산부, 아이, 병자들이 있었다. 초등학생들이나 잘 걷지도 못하는 노인들까지 모조리 일터로 끌고가서 일을 못하거나 불평하면 때려죽였고[14] 거동 못 하는 임산부들에게 본보기를 보인다고 벌거벗겨서 빙판으로 내몰거나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때려죽이기도 했다. 정말로 일을 못할 정도로 어린 아이나 나이든 노인들은 보육원, 양로원에 보내졌는데 부패한 지방 관료와 당 간부들이 이들을 위한 재원을 거의 다 가로챘기 때문에 국가의 양육 시설들은 사형 집행장에 가까웠다. 지방 당 간부들 입장에선 이런 살육에 동참하지 않으면 자신들이 죽을 판이니 그들도 경쟁적으로 사람을 때리고 죽이는 일에 합류했다. 결과적으로 100만명이 사망했던 1960년의 신양 사태[15]에서 공산당이 때려죽인 인민의 숫자만 70,000명에 달했고 1961년 저우언라이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1960년 후난 성의 86개 현 중 82개 현에서 간부들이 주민들을 때려죽였고[16] 후난 성 전체의 사망자의 10%가 맞아죽은 수치였다. 대약진 운동이 끝난 후에 후난 성의 노인 인구는 양로원 7개에 수용된 1058명에 불과했다.

4. 비참한 결말[편집]

2년 뒤에는 당신도 굶어죽을 것이오."


1961년 허베이의 이름없는 농민이 저우언라이에게 한 말.

"나는 40년 동안 고향에 온 적이 없기 때문에 정말로 한번 와 보고 싶었습니다. 이제 왔다가 여러분들이 얼마나 힘든 생활을 하고 있는지 똑똑히 보고 돌아갑니다. 우리가 일을 잘못했습니다. 여러분,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1961년 4월 1일, 고향 마을을 방문한 류사오치의 발언.


결국 1960~1961년에 홍수가뭄의 자연 재해가 발생했는데, 이는 토법고로를 만들기 위해 나무를 캐서 숲을 모두 민둥산으로 만들어서 생겨난 인재였다. 이 자연재해는 운이 나빴던 것이 아니라, 삽질의 결과였다. 당연히 사태가 이런 개판인데 인민들이 개나 돼지도 아니고 앉아서 죽었을 리가 없다. 베이징으로 몰려가 집단으로 진정서를 내고 숨겨둔 편지를 중앙에서 내려온 조사단에게 제출하거나 무기를 들고 학정을 일삼는 간부들을 죽이고 징발에 저항하거나 식량창고를 습격하는 등 저항이 이어졌다. 하지만 조직적인 저항이 아니라 대부분 식량창고의 식량을 얻기 위한 민란 수준의 저항이라서 손쉽게 진압되었다. 디쾨터는 당시 중국 인민들에게는 저항할 생물학적인 여력 자체가 없었던 상황이라 평가한다.

이러한 문제들이 한꺼번에 폭발하면서 결국 대기근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 사망자와 비슷한 3,000~5,000만 명의 사람들이 순식간에 증발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 한방으로 죽은 사람들의 수가 히틀러가 학살한 유대인의 수와 2차 세계대전 전선에서 죽은 사람들의 수와 맞먹는다. 아돌프 히틀러가 학살한 유대인 600만 포함한 홀로코스트 총 사망자 수가 1,100만~1,700만명 정도,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 전선에서의 사망자가 군인과 민간인을 합쳐 4,000~5,000만명 정도로 추산되는데 거의 그 정도의 합계만큼을 한방에... 초기에는 미국의 가장 반공적인 학자들도 최대 200만명선을 추측했으나 1980년 후야오방은 공식사망자가 2천만명이라고 발표했다. 90년대에 대약진운동의 사망자 숫자에 대한 추측은 3천만으로 뛰어올랐고 이후 중국의 언론인 양지성이 '묘비'를 출판하여 3,600만명설을 내놓았으며 '아귀'의 저자 재스퍼 베커와 홍콩대학의 프랑크 디쾨터 교수는 '마오의 대기근'에서 4,500만명설을 주장했다. 중화인민공화국 공안부 내부에서는 5500만명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1979년 자오쯔양이 주도했던 중화인민공화국의 자체적 조사결과는 4300~4600만명 수준이었다 한다. 허나 현재 시진핑이 사회적 통제를 강화하고 조직적인 역사왜곡을 명령하는 가운데 중국의 어용 지식인들은 기존의 수천만명이 사망했다는 분석은 터무니없는 과장이며 200~400만에 불과하다고 깽판을 치며 후안무치의 왜곡을 자행하고 있다.

사실 중국이었으니까 이런 대참사에도 인구손실을 딛고 일어날 수준의 회복을 보였지, 타국 같았으면 그냥 국가가 절단나고도 남았다. 중국의 스케일이 워낙 거대해서 한 번의 치명적인 병크에도 피해가 어이없을 정도로 거대한데 타격은 수치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적게 받았다고 봐야 된다. 즉 중국이니까 이런 초현실적 재난이 발생했고, 또 놀랍게도 극복할 만한 수치였다. 실제로 19세기 중국에서는 평범한 기근으로 천만 명이 훌쩍 넘는 인구가 아작났고 이는 동시기 조선이었으면 국가 멸망에 가까운 수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중국 인구는 성장세였다.

참고로 중국의 인구는 1955년 606,736,000명에서 1965년 715,546,000명까지 오히려 늘어났다(!). 대약진 운동 이후론 인구가 더욱 빠르게 증가해 1975년 917,899,000명까지 늘어난 이후 덩샤오핑의 한 자녀 정책으로 인구 증가는 주춤하고 있다. 같은 기간 동안 인도 공화국은 404,268,000명(1955)에서 494,960,000명(1965), 618,923,000명(1975)까지 증가했으며 이후에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다만 70년대 이후에 출산율이 크게 떨어진 편.

이때 정부는 대약진 운동이 잘되고 비축 식량이 있다는 걸 선전하기 위해 식량을 무상으로 원조한다든가 외국 인사들을 초청해 파티를 벌였지만...[17] 식량이 가득 차 있다던 창고 문은 굶주리는 인민들을 위해 열리지는 않았으며, 마오의 면전에서 주석도 책임져야 한다고 항의했던 국방부장 펑더화이(팽덕회)는 짤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인민 해방군 서열 2위의 원수 중 하나이자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의 총사령관으로 맹활약했던 그 펑더화이가.[18]

5. 먹을 것이 없으면 끼니를 줄여라[편집]

"먹을게 충분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굶어 죽는다. 인민 절반이 배를 채울 수 있도록 나머지 절반은 굶어 죽게 둬야 한다."


1959년 2월, 마오쩌둥.

"중국인들은 모두 채식주의자들이에요."


1960년 에드거 스노와의 인터뷰에서 마오쩌둥이 한 발언.


당시 중국6.25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소련으로부터 소총부터 MiG-15와 같은 최신식 무기까지 대량으로 사들이고 이후 MiG-17에 대한 라이센스권을 구매하는 등, 소련제 무기를 적극 도입했다. 뿐만 아니라 탄도 미사일 기술과 핵무기 기술을 이전해준다는 조건으로 1956년 <중소합작>이라는 이름으로 소련에 거액의 계약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중국은 외화가 부족했고, 소련에게 대가로 지불할 만한 것은 식량 밖에 없었다. 마침 소련도 식량자급을 못해 상당량의 곡물을 외국에서 수입하던 처지였던지라 중국이 식량으로 이를 갚는다는 제안에 흔쾌히 동의했다.

그런데 마오쩌둥이 대놓고 핵전쟁이 일어나도 중국인들은 살아서 새 지구를 건설할 것이며 핵폭발도 우주적으론 아무 것도 아니다, 따위의 발언을 하며 서방과 핵전쟁을 불사해야한다고 주장하자 소련 당국은 마오쩌둥에 대해 큰 경계심을 갖게 된다. 흐루쇼프는 마오쩌둥에게 핵무기의 무서움에 대해서 여러차례 설명하고 미국의 해군과 함대에 대응하기 위한 공동 군사 기지 건설 등을 제안했으나 흐루쇼프를 나약한 인물로 우습게 보았던 마오쩌둥은 그를 크게 비웃었고 수영 못하는 흐루쇼프를 수영장에 집어넣어 망신주는 등 그의 성격을 크게 건드렸다. 결국 분노한 흐루쇼프는 중국에 등을 돌리게 되었고 이런 중소 관계의 악화는 가속화되어서 1959년 흐루쇼프는 1956년에 맺은 중소합작을 파기하고 소련인 기술 고문들을 모조리 데려가버렸다. 이 때문에 중소 사이는 완전히 돌이킬 수 없이 벌어졌고, 중국은 독자적으로 핵무기와 유도탄을 개발하게 된다.

어찌되었든 문제는 중국의 지도부가 벌인 여러 삽질과 자연재해가 합쳐지면서 곡물 생산량이 반감했는데도, 소련에게 "상환 좀 늦춰주면 안 되나?"말하다가는 자국의 기아가 들통날 지경. 그러면 체제경쟁에서 이런 기아가 발생했다는 것을 알리면 소련에 체면이 안서므로 어떻게든 곡물 수출을 계속해야 했다. 마오쩌둥은 이를 위해 전국의 수확량의 3분의 1을 징발하라는 구체적인 수치를 지시하기까지 했다.

이런 마오쩌둥에게는 연일 중국 각지에서 수천만 명의 국민들이 굶어 죽는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하지만 그는 다음과 같이 대꾸했다.

"먹을 것이 없으면 끼니를 줄이면 되잖나! 굶어 죽는 건 옛날에도 있었던 일인데 그게 뭐가 큰일이라고 보고까지 하나?"


심지어 중국인은 초식동물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육류 수출에도 박차를 가했다. 결국 수천만 명의 중국인들이 굶어 죽어 가는데도 "우리는 풍년이 들었다!"허세를 부리며 이전의 무기대금+기술 라이센스비로 소련에 수많은 농축산물을 상환했다. 결국 사람들은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인육을 먹거나 그냥 굶주림 속에서 얼어죽어야 했다. 일부 논자들은 마오쩌둥의 대약진운동을 학살로 분류하기도 하는데, 마오쩌둥이 중국 전역의 기근을 보고받고도 정책 실패를 인정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상황이 너무 엄청나게 심각해졌으며 사망자[19]의 숫자가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을 파악하자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에서 곡물 수입을 승인했으며[20] 공동 식사 등의 황당무계한 정책들을 일부 폐기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참상에 마오쩌둥 이하 공산당 지도부 전원이 멘탈이 나가서 마오쩌둥은 에드거 스노에게 중국을 발전시키기 위해 뭘 해야 할지 전혀 모르겠다고 말해 에드거 스노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15년 안에 미국과 영국을 초월하겠다는 마오쩌둥은 100년이 걸려도 서방을 따라잡을 수 없을 것이라며 매우 회의적인 태도로 돌아서게 된다. 천윈이 대놓고 위대한 인민공화국보다 반동과 제국주의자가 장악한 장제스 시절이 더 먹고 살기 좋았다고 자조할 정도였다. 하지만 1961년 흐루쇼프가 곡물 100만톤과 쿠바산 설탕 50만 톤을 제공하여 중국의 기아를 퇴치하는데 돕겠다고 제안하자 소련에 부담을 주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거절하는 등 수천만명의 목숨을 값으로 치른 마오쩌둥의 자존심병은 치유되지 않았다.

6. 사실 원흉은 첸쉐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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첸쉐썬(1911-2009)

사실 마오쩌둥이 황당무계한 농업정책을 세우게 된 계기는 바로 첸쉐썬 박사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첸쉐썬 박사는 항저우에서 태어나 상하이 교통대학[21]을 졸업하고, 칭화대학 장학금으로 칼텍(California Institute of Technology)에서 폰 카르만 교수 밑에서 수학과 항공공학의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초음속 비행체 및 유도탄으로 학위를 얻고 1946년, 34세의 나이로 칼텍 교수를 역임한 세계적 과학자로서, 매카시즘 시절에 미국에서 중공의 간첩이라는 혐의를 받고 한국전에서 잡힌 미국 포로와 교환되어 1955년 중국으로 추방되었다. 결국 미국은 스스로 중국에 미사일 개발 1급 인재를 넘긴 셈이었다.[22]

중국은 이렇게 미국에서 쫓겨난 첸쉐썬 박사를 대대적으로 환영했고, 첸 박사는 중국의 미사일 개발을 담당하며 마오쩌둥을 자주 만났다. 세계적인 학자였던 첸쉐썬은 마오를 만난 자리에서 중국을 금방 미국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고 말했고, 자신의 논리를 잡지에 기고하기도 했다.

첸쉐썬의 기본 논리는 단위 면적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곡물을 빽빽하게 심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작물은 태양 에너지에 의해 자라는데, 태양 에너지는 충분하므로 물과 비료만 계속 공급하면 작물 생산을 20배 늘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문제는 이런 것을 그냥 예상만 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수치로 계산해서 정말로 그럴듯하게 보였다는 점. 전직 MIT 교수가 구체적 수치까지 제시하는데 넘어가지 않는 게 더 이상할 정도였다. 마오쩌둥은 이 말을 듣고 솔깃해서, "신묘한 계책"이라고 하며 대약진 운동을 추진했고, 결과는 파멸. 그러나 첸 박사는 일급 과학자였지만 농학은 전공한 적도 없는 사람이었다. 순전히 책상머리 계산만 가지고 '비료 증원 + 파종 밀집도 증가 = 식량증가'라는 방정식을 만들어서 검증도 없이 게시한 셈.

그렇지만 천쉐썬의 주장이 마오쩌둥에게 실질적으로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는 둘째치고, 중국의 문호개방이 이미 오래 전부터 진행되었기에 근대 시절의 지옥을 맛보고도 중일전쟁 종결 당시에 이미 유학파 박사들만 수천 명이나 있었고, 공산당을 민주적 정당이라 믿어 장제스를 따라가지 않고 공산 중국에 잔류한 유학파 전문가들이 가득한 상황이었다. 오히려 이들 유학파 전문가들은 대부분 부르주아 반동들로 몰려서 당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핍박과 형편없는 대접만 받고 있었고 이들의 분노가 백화제방 운동 때 폭발하기도 했다. 첸쒜썬은 마오쩌둥의 15년 안에 미국 따라잡겠다는 뇌내망상을 뒷받침할 개소리를 했기 때문에 마오가 솔깃한 것이지 만약 첸쒜썬이 마오쩌둥의 구상이 불가능했다고 직언했더라도 마오가 '아 미국 출신 박사가 그랬으니 안되겠구나!'하고 깨달았을 가능성은 없다. 그땐 오히려 첸쒜선이 숙청당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대약진운동 초기에 황하를 푸르게 만들겠다는 마오쩌둥의 말도 안되는 치수사업을 비판했던 미국 유학파 학자인 황안리는 마오쩌둥에게 인민일보 사설을 통해 개소리하지 말라고 욕이나 먹었다.

대약진 운동이 개판으로 돌아갈 동안 첸 박사는 비난을 피했음은 물론이고 중국의 우주개발을 이끌며 핵무기 제조까지 감독했다. 중국의 1세대 미사일과 인공위성, 핵무기는 모두 그가 이끈 연구팀이 만들어냈다. 한국에서 알려진 이휘소 신화의 상당부분은 전직 MIT-칼텍 교수였던 첸쉐썬이 중국에서 실제로 이뤄낸 일이다. 중국이 문화대혁명이라는 국가 멸망에 가까운 사태 중에도 항공 공학이나 미사일 면에서 기술축적을 계속 할 수 있었던 것은 마오가 비판의 화살을 맞는 동안 무사했던 그의 덕이 크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설령 첸 박사가 저런 헛소리를 했다 하더라도 최종 결정권자는 마오쩌둥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책임은 그에게 돌아간다.

첸 박사가 당시 소련을 주름잡던 사이비 농학자 트로핌 리센코의 농법을 일부 채택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다만 트로핌 리센코는 당연히 이런 말도 안되는 계획이 제대로 작동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7. 대약진 운동, 그 후[편집]

대기근으로 대약진 운동은 철회되고,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중국 공산당 내부가 분열하기 시작했다. 이 실수 때문에 마오쩌둥은 국가주석을 사임할 수밖에 없었고, 덩샤오핑류사오치가 부상하게 된다. 서서히 권력을 잃어가던 마오쩌둥은 불안해진 데다가 가뜩이나 자신의 멋진 계획을 비판하던 지식인들에 대한 불만이 쌓여 결국 문화대혁명이라는, 세계 역사에 길이 길이 남을 병크를 터뜨리게 된다.

대약진 운동을 다룬 영화로는 장이머우 감독의 인생이 있다. 공리와 갈우 주연. 이쪽은 일제시대부터 문혁까지를 폭넓게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이 시기 역사를 조금이나마 알고 싶다면 꼭 볼만한 작품. 토법고로, 집단농장으로 대표되는 대약진 운동과 홍위병으로 대표되는 문화대혁명과 같은 거대한 사건들을 배경으로 살아가는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다. 토법고로와 협동농장 부분은 꽤나 자세하게 나오니 영화라는 점을 감안하고 본다면 당시 시대상을 참고하기에 좋은 편.

이렇게 대약진 운동은 1960년대 들어 진정되었으나, 근본적으로 달라진 건 없었기 때문에 1960~1970년대 중국은 마오쩌둥이 사망하는 1976년까지 식량부족을 넘기면서 기근을 피해 갔다. 토법고로, 참새잡기, 빽빽히 모심기의 뻘짓 3연타로 대기근이 든 1959년 이후로는 중국에 큰 기근은 없었고, 식량은 남아돌지 않아서 철저히 배급제로 실시되었으나, 모자라는 부분은 수입하고, 여러 가지 개간사업을 통해 농지를 늘려서 식량생산은 아슬아슬하게 인구증가를 지탱할 수 있었다. 덩샤오핑 이후 대대적인 개혁, 개방이 이뤄진 후에야 식량 부족 사태가 완전히 근절되었으며, 덩샤오핑은 중국에서 최초로 기근을 없앤 지도자로 칭송을 받게 되었다.

8. 관련 매체[편집]

8.1. 서적[편집]

8.1.1. 정발된 저서[편집]

  • <마오-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집필한 것으로 유명한 장융의 "대륙의 딸"(영문판 : wild swan)이 대약진-문화대혁명 시기의 중국 모습을 알고 싶을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서적이며 서구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대륙의 딸은 저장인 장융 자신의 가족의 일대기를 쓴 소설이므로 웬만한 중국 근현대 역사가 다 나온다. 군벌에게 시집간 외할머니. 청렴한 공산당원 남편과 결혼한 어머니, 국공내전, 대약진 운동, 그리고 홍위병을 필두로 한 문화대혁명까지...

  • 위화의 소설 허삼관 매혈기도 대악진 운동 시기를 다루고 있다. 앞의 작품과 달리 묘사는 떨어지지만 허삼관의 묘사로 당시 형편을 짐작할 수 있다.

  • 국내에는 홍콩 대학 교수 프랑크 디쾨터가 집필한 인민 3부작의 2권인[23] 마오의 대기근이 대약진운동을 다루고 있다. 새뮤얼 존슨 상을 수상하였으며 당시 중국에서 벌어진 지옥도에 대해서 해금된 중국 국가기밀문서를 바탕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까지 드러내고 있다.

  • 당연하겠지만 알렉산드르 판초프의 마오쩌둥 평전, 장융의 마오, 로스 테릴의 마오쩌둥 평전 등에서 대약진 운동 이야기가 빠지는 일은 없다.

8.1.2. 비정발된 저서[편집]

  • Roderick MacFarquhar, The Origin of the Cultural Revolution:The Great Leap Forward, 1958-1960, 컬럼비아 대학 출판부, 1983.

  • Alfred L. Chan, Mao's Crusade:Politics and Policy Implementation in China's Great Leap Forward, 옥스퍼드 대학 출판부, 2001.

  • Ralph A.Thaxton, Catastrophe and Contention in Rural China:Mao's Great Leap Forward, Famine and Origins of Righteous Resistance in Da Fo village, 캐임브릿지 대학 출판부, 2008년.

  • Jasper Becker, Hungry Ghosts:Mao's Secret Famine, 헨리 홀트 출판사, 1996년.

  • 그 외에 중국에서도 많은 연구가 나왔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양지성의 허난성 지역의 참상을 다룬 <묘비:1960년대 중국 대기근의 진정한 역사>, 대약진 시기 마오쩌둥 주변의 궁정정치를 다룬 린윈후이의 <유토피아 운동:대약진 운동부터 대기근까지, 1958~1961>, 대약진 시기 농민들의 저항을 다룬 가오왕링의 책 등이 있다. 양지성의 책은 대약진으로 인한 사망자가 총 3600만에 달한다는 주장을 담았으며 중국에서 금서로 지정되었다. 외국에도 번역되었으니 중국어를 모르는 사람들은 Tombstone - The Great Chinese Famine, 1958-1962, Yang Jisheng을 검색해 볼 것.

8.2. 영화 [편집]

장예모감독의 1994년 작품인 "인생"이 민국시대, 국공내전,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까지의 모든 기간을 다루고 있는데 공동취사와 토법고로를 비롯하여 대약진운동 역시도 비중있게 등장한다.

[1] 이때 첸쉐썬의 주도로 소련제 R-2 미사일을 카피해서 DF-1 미사일이 개발되었고 인민들의 기대는 커져 있었지만, 인공위성은 단순한 지대지미사일과는 차원이 다른 물건이라 시행착오가 많았다. 중국 최초의 인공위성은 그보다 10여년 후에 동방홍 위성으로 실현되었다.[2] 장융의 수필이자 소설인 대륙의 딸(야생백조)에서도 이 대목이 나온다. 그것도 아주 실감나게...[3] ...이라는게 당시 공산당의 생각이었다. 마오주의에서 혁명의 주체는 도시 노동자가 아닌 농촌의 농민들이며, 산업혁명을 비롯한 여태까지의 혁명은 모두 도시에서 주도했으니 이번엔 농촌에서 혁명을 해보자는게 대약진 운동의 핵심이었다. 그러니까 도시에 제철소와 자동차공장을 만드는게 아니라 농민들이 토법고로로 철을 만들고 농촌에서 트랙터를 조립해 '우리식의' 혁명을 해보자는것. 의도는 그럴듯 해 보였지만 결국 이는 현실과는 안드로메다급으로 떨어진 이상이었을 뿐이다. 산업화에는 반드시 '도시 인구의 증가' 및 '생산시설(공장)의 활성화'가 필요하다.[4] 해당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흐루쇼프도 똑같이 말아먹었다.[5] 이 대사는 중국 근현대사를 다룬 장예모의 영화 인생에도 촌장의 입을 빌어 나온다. 촌장은 제련한 철로 대만을 정벌하고 영미를 앞서 나갈 것이며 인공위성을 쏠거라고 호언장담을 하지만...[6] 엄밀히 말하면 프로이센독일 제국이 더 원조이긴 하지만 현대적 의미로는 소련이 먼저다.[7] "근대화"라는 단계를 거치기 위해서는 철이 꼭 필요하다. 공장, 건물, 비행기, 선박, 차량, 무기 등 철이 안 쓰이는 곳이 없기 때문. 그래서 메이지 유신 당시 일본의 중요 과제 중 하나가 제철소 건설이었고, 우리나라의 1960~70년대 포항 제철소 건설도 이와 같은 맥락이었다. 그리고 제철소 건설에 투입한 자금이 바로 일제 식민통치 시절 보상금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근대화 과정에서 철이 얼마나 중요한지 증명해주는 예.[8] 1970년 UN자료를 보면, 대한민국은 국내총생산 순위가 세계 39위, 북한은 세계 54위다.[9] 1949~1953년에 죽은 중국인만 5억 5천만 중국인구 중 마오쩌둥이 인정한 수치도 71만에 따르고 중국 공산당 내부에선 200만명 설까지도 나왔다.[10] 윌리엄 스키너가 제시한 Late imperial china의 경제 구조는, 그러나 이미 아편전쟁 이후 청나라가 해안방어하겠다고 깨뜨린지 오래였다...[11] 예를 들어 중국의 둥베이 지방은 지주세력인 리안챤(糧殘)이 마방(정미소), 유방(기름정제소, 공업화 이전 둥베이 지방의 경제력의 축은 대두에서 나오는 기름이었다. 산미증산계획 때 일본이 한국의 쌀을 약탈하고 식량으로 준 것이 만주에서 나오는 탈지대두였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 지주을 축출하면서 경제적 순환구조가 무너졌다.[12] 마오쩌둥 항목에는 53년부터 50년대 중반까지는 경제 성장을 했다고 나와있다. 즉 성장은 하는데 성장해도 국민당 시절보다 중국 전체 생산량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 그런데 국민당 언제와 비교해서인지 나오지 않았으므로 45년을 기준으로 한다면 국공내전의 여파+한국전쟁 탓이 크다. 그러나 기준이 제대로 잡히지 않았고, 첫 몇 년간이 한국전쟁 시기일 수도 있다.[13] "1,000가구가 사는 부락에서 한꺼번에 밥을 지어 먹으려면 솥과 부뚜막이 1,000개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1,000개의 부뚜막이 한 번에 들어갈 곳이 없으니 결국 판소(급식소)를 가호로 나눠야만 했다. 이것이 개인 취사와 다른게 무언가?", 『易歷求林地區燒給䛩言』, 2003, 吳正龍[14] 가족들에게 때려죽이게 하거나 아버지에게 아들을 생매장하거나 우물에 던져 죽일 것을 지시하는 막장 상황들이 지방 당 문서고에 수도없이 남아있다. 심지어 부모에게 자식을 죽이게 하고 그 시체를 삶아 비료로 쓰라고 지시한 기록도 있다.[15] 이 신양 사태 자체도 신양에서의 식량 공출량을 정부에서 줄여줬으면 100만명 까진 죽지 않을 사태였지만 마오쩌둥의 가오를 위해서 공산당은 가차없이 신양의 곡물을 수탈했고 식인이 만연하고 주민 중 최고령자가 40대 초반이고 최연소자는 7살인 개막장 상황이 신양에서 벌어지고 만다.[16] 근데 이게 그나마 제일 덜 폭력적인 경우였다.[17] 이때 초대된 유명인으로 프랑스의 프랑수아 미테랑이나 영국의 버나드 로 몽고메리 원수가 있다.[18] 이후 펑더화이는 문화대혁명 당시 류사오치와 함께 가장 혹독하게 박해를 받게 되었고 홍위병들의 고문과 조리돌림 속에서 고통받다가 1974년 옥사했다. 덩샤오핑때 다시 당적이 복구되었다.[19] 단순 아사자 뿐만 아니라 늙고 병들어 일 못하거나 너무 배가 고파 음식을 훔친 사람들이나 그 가족들을 반동으로 몰아 지역 공산당이 닥치는대로 죽여댔다. 이렇게 맞아죽고 총살당하고 생매장되고 삶아져서 비료로 쓰인 숫자 사람들만 수백만에 이른다.[20] 1961년에만 400만톤을 수입해야 했다. 1959년에 중공이 세계 각국에 팔아치운 곡물의 양이 400만톤이 넘는다.[21] 이름은 '교통'대학이지만, 교통 관련 학과만 있는 건 아니고, 이공계열 학과가 다 있다. 즉, 중국 버전 MIT인 셈이며, 실제로도 상하이 교통대학은 세계적으로도 알아주는 명문대학이다.[22] 그리고 첸쉐썬을 중국으로 추방시킨 원인이었던 매카시즘은 현재 오히려 미국의 안보를 도움은 커녕 더 악화시켰다는 평을 받고 있다.[23] 원래 출판 순서로는 1권이나 국내에서 시대 순서대로 재배치하여 2권을 나중에 정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