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북송금 특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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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수사 결과4. 현대5. 정치적 영향
5.1. 불법
6. 기타

1. 개요[편집]

2003년 2월 한나라당이 법안을 제출한 남북 정상 회담 관련 대북 비밀 송금 의혹 사건 등의 진상 규명을 위한 특별 검사 임명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특검 수사가 진행됐다.

2. 배경[편집]

2002년 국정감사에서 한나라당에 의해 처음 현대상선의 대북 비밀송금 의혹이 불거졌다. 김대중 대통령은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지만 수사 요구는 거세지기만 했고 이에 '검찰수사유보'라는 강경책을 내놓아 수사를 막았지만 의혹은 날로 커지기만 했다.

2003년 1월 말 감사원은 '1760억 원은 현대 측의 운영자금으로 사용됐고, 나머지 2240억 원은 북한에 지원한 것으로 보인다'는 내용의 감사결과를 발표했다. 현대상선 측이 산업은행으로부터 대출받은 4000억 원 가운데 사용처가 규명되지 않았던 2240억 원을 북한으로 보냈다는 내용의 자료를 제출했다. #

이에 어떤 식으로든 대북송금과 관련된 의혹을 해결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당초 청와대와 노무현 당선자 측은 관련자들이 국회에 출석해 해명을 하는 것으로 대북송금 의혹을 마무리하려고 했다. #

한나라당과 자유민주연합은 즉각 특검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국회 다수를 차지한 야권이 여당을 무시한 채로 날치기 처리했다. 국회 법사위는 2월19일 오후 전체회의를 열어 한나라당이 제출한 대북송금 사건 관련 특검법안을 민주당 의원들이 전원 불참한 가운데 처리했다. # 국회는 2월26일 민주당 의원들이 불참한 가운데 본회의를 열어 한나라당이 제출한 대북송금 사건 특검 법안 처리를 강행, 찬성 158 반대 1 기권3으로 통과시켰다. #

2003년 3월 초 민주당 내부에서는 특검 자체는 실시하되, 한나라당과 재협상을 벌여 특검법안을 수정하고, 대통령의 조건부 거부권 시사로 야권을 압박하기로 당론이 모아졌다.

2003년 3월14일 민주당은 수정을 전제로 특검법을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만약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다면 대북특검 수정안을 발의하기로 했다. #

결국 노무현 대통령은 거부권 행사를 하지 않겠다면서 "민주당은 일단 특검법 공포를 거부해주면 여야협의를 거쳐 새로 만들겠다는 것이었고 한나라당은 일단 수용해 공포하면 다시 법률개정해서 조사범위의 한계를 두도록 하겠다는 주장이었다"며 "결국 순서의 문제이지 특검을 하되 제한적으로 하자는데 양당지도부의 의견이 일치해 일단 공포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

한나라당 입장에서는 결국 대북송금 특검이 여야 합의에 의해 수정되는 선에서 실시되었으니 만족스러운 결과라고 할 수 있다. [1] 대북송금 특검법 실시는 민주당 내 동교동계를 중심으로 반발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특히 친DJ 또는 호남 기반의 민주당 의원들은 강하게 반발했고, 이는 차후 창당된 열린우리당이 민주당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병을 이유로 병원에 입원하는 것으로 심기를 드러냈으며, 측근들을 통해 "화병"이 난 것이라는 메시지를 내보낼 정도로 양측의 관계는 냉랭해졌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특검을 수용함으로써 친DJ세력, 즉 호남 세력과 친노 세력의 분열의 씨앗이 생겼고, 이후 2015년에도 무소속이 된 천정배가 2015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호남형 신당을 창당하겠다고 선언한 뒤 호남인들이 "친노와 화합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다. 천신정이 민주당 내 대표 친노였고, 친노와 손을 잡고 열린우리당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일단 잊자.[2]

이들의 감정싸움이 얼마나 심했는지는 2009년 노무현이 검찰 수사를 받을 때, 민주당 비노 인사들이[3] 검찰에 엄정 수사를 요구하며 노무현을 압박했던 데서 여실히 드러난다.

3. 수사 결과[편집]

이렇게 해서 구성된 특검팀은 곧 현대그룹이 대북 7대 사업권 구입 명목으로 4억 5천만 달러를 북한 정부에 몰래 송금한 사실을 밝혀내었고, 그 중 1억 달러는 정부의 정책지원금이라는 사실까지 알아냈다. 결국 비공식적 송금을 한 것이 밝혀졌다.[4]

이 사건과 관련하여 현대에도 강도 높은 수사가 진행되었고 추가적으로 현대의 비자금 150억이 드러나는 등 현대에 대한 압박이 거세지자 당시 현대 회장이자 사건 핵심 인물인 정몽헌 회장이 현대 계동 사옥에서 투신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이 사건 관계자들이 줄줄히 징역을 선고받았다. 김대중 대통령의 측근이었던 박지원 전 비서실장이 징역 3년을 선고받고, 그 외에도 이기호 전 청와대 경제수석, 임동원 전 국정원장 등이 수감되었다. 박지원을 제외한 이들은 2004년 일찌감치 사면되었으나 박지원만은 참여정부 말기인 2007년에야 특별사면되었다. 그런데 사실 박지원은 엄밀히 말해 대북송금 때문에 감옥 간 것은 아니었다. 현대비자금 150억원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 받았는데 SK에서 3천만원, 금호에서 7천만원을 따로 받은 혐의가 인정돼 징역을 살다 온 것이다. 어쨌든 이는 당시 지지율이 악화되었던 참여정부가 동교동계에 화해의 제스처를 내밀고자 결정했다는 시각도 있다.

4. 현대[편집]

(1999년에 현대백화점그룹이 현대그룹에서 계열 분리를 신속히 실행하였던 이후)

“2000년 이른바 ‘왕자의 난’ 직후 정몽구 회장 측근 그룹에서 격론이 벌어진 적이 있다. 당시 김대중 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하던 대북사업과 관련한 갈등이었다. 현대자동차에서 성장해온 임원들은 ‘이미 정몽헌 회장이 주도권을 쥔 만큼 거리를 둬야 한다’고 선을 그은 반면, 다른 계열사에서 온 임원들은 ‘정부의 움직임에 발을 맞출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결국 정몽구 회장이 기아자동차 인수와 해외 진출에 초점을 맞추기로 결정하면서 사안은 자연스레 정리됐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그때 결정이 현대그룹과 현대자동차그룹의 명운을 가른 셈이다.”

현대·기아자동차그룹 핵심에서 일했던 한 전직 인사의 회고. 그에 따르면 당시 쟁점이 된 사안은 평양에 현대자동차 공장을 건설하는 방안이었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이후 재계가 경쟁적으로 북한 관련 사업 아이디어를 쏟아내던 무렵, 현대차 측에서 정보당국 핵심 관계자를 중간에 내세워 청와대에 이를 구체적으로 타진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몽헌 회장으로 대북사업을 단일화한다는 정권 핵심의 판단에 정몽구 회장 주변의 만류가 이어져 아이디어는 결국 백지화된다. 당시 사정에 정통한 인사들은 현대차가 현대그룹에서 본격적으로 분리해 나오게 된 계기로 이때 일을 꼽는다.

송두환 특검은 정상회담 성사와 현대의 대북사업 대가로 현금 4억5000만 달러, 현물 5000만 달러 등 5억 달러가 비밀리에 북한에 전달됐다고 밝혔다. 현금 4억5000만 달러는 현대상선 현대건설 현대전자 등 모두 ‘정몽헌 현대’에서 나왔다. 당시 특검팀은 박 전 장관이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을 통해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에게서 150억원 상당의 양도성예금증서를 받았다는 단서를 포착해 대검에 넘기기도 했다.

정 회장은 “무기중개상 김영완씨가 알려 준 스위스 계좌로 현대상선 자금 3000만달러를 입금했다”고 진술했다. #

특검은 수사를 끝내면서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과 임동원 전 국정원장, 이기호 전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 이근영 전 산업은행 총재, 김윤규 현대아산 사장 등 8명을 불구속 기소했다. 그러나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이 박지원 전 문화관광부 장관에게 전달했다는 150억 원의 실체를 밝히는 데는 실패했다. 결국 이 의혹은 검찰로 넘어갔다. 정 회장은 150억 원의 비자금 조성에 관한 정신적 압박을 이겨 내지 못하고 그해 8월 4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러나 또 다른 재벌님환란 덕분에 또 다른 환란을 넘길 수 있었다는...

현대그룹은 그야말로 쑥대밭이 됐다. 당시 현대상선에서 근무했던 현대그룹 임원 D 씨는 “마치 벌집을 쑤셔 놓은 것 같았다”라고 했다.

5. 정치적 영향[편집]

적법절차에 의하지 않은 대북송금이 사실이 드러나면서 국민의 정부 시절 이루어진 김대중 대통령노벨상 수상에 대해서 돈 주고 산 노벨상이라는 비판이 한나라당과 보수세력을 중심으로 등장했고, 전반적으로 햇볕정책에 대한 비난이 거세지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이는 남북관계가 경색되는 계기가 되었다. 남북한 철도 연결 사업도 이때 중단된 뒤 재개되지 못하였고, 노무현 정부 역시 부시 행정부의 입장에 대체로 순응하여 대북강경책으로 회귀했으며[5] 부시가 대북 온건책으로 돌아선 임기 말에 들어서야 변화가 생기게 된다. 그리하여 노무현 정권 말기에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되고 분위기가 유화적으로 바뀌었으나, 그때는 이미 노무현 퇴임 직전이었던데다 후임으로 새로 집권한 이명박 정권이 기존 정권의 대북정책을 전환하여 북한의 개방을 요구하는 강경책을 구사하면서 남북관계는 얼어붙게 된다.[6] 이 사건에 대해 옹호측에서는 당시 닫혀있던 북한의 빗장을 열기 위해 어쩔 수 없던 필요악이라는 주장을 하며 정치적인 행동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였으나[7], 북한에 대북송금이 사실상 현재의 핵무기를 만든 것이나 다름없다는 비판도 있다.

한편 대북송금 특검으로 인해 직접적인 정치적 피해를 입은 박지원 등의 동교동계 잔류파는 반 노무현 정서를 문재인 대통령후보와 민주당 내 친노세력에 투사하였다. 그리하여 민주당 내의 두개의 큰 정파는 사사건건 충돌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박지원 계열은 친노세력을 패권주의로 몰아붙이게 된다. 문재인이 당대표가 된 후, 기존의 계파정치를 극복하기 위해 공천권을 계파가 아닌 시스템에 의해 결정되도록 개혁하자, 비문세력은 민주당에서 탈당하여 안철수를 얼굴마담으로 한 국민의당을 창당하게 된다.

한마디로 노무현 대통령이 대북송금 특검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은 것의 여파가 10년 넘게 나비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셈이다.

5.1. 불법[편집]

대법원은 이 사건이 통치행위의 일환으로 볼 수 있으나 그 수단에 위법성이 있다고 판단했고 그 결과 사법심사의 대상이 되어서 법원의 재판에 의하여 결국 불법임이 확정되었다.
판례

6. 기타[편집]

금융실명제, 비상계엄령 등과 더불어서 7/9급 공무원 시험 행정법총론 부문에서 통치행위 관련 문제로서 시험 문제로 자주 출제되었다. 주로 국가직 시험에서 자주 출제되었다고 하며, 교재 역시 '통치행위' 판례 항목에서 비중있게 다루어지고 있는 부분으로, 법원은 정상회담 개최 자체는 통치행위에 속하기 때문에 사법심사의 대상이 아니지만 이러한 대북불법송금 활동은 사법심사의 대상이 된다고 판시했다.

이 사건이 여의도에서는 친노와 친DJ를 가르는 단초가 되었으며 호남이 친노를 불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김영환 의원은 당시 대북송금특검에 대해서 열렬히 반대했고 이후 노 대통령 탄핵에 가담한다. [8]

http://blog.naver.com/opi21/130143351054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322631

대북송금과 특검의 본질에 관한 일론
대북송금특검: 그 진실과 전말, 그리고 영향
https://m.facebook.com/notes/elhe-taifin/대북송금특검-그-진실과-전말-그리고-영향/297446103643532

2015년 1월에는 새정치민주연합의 당대표 선거에서도 이 이야기가 문재인과 박지원 의원 측에서도 나와 진실공방이 다시 벌어졌다.

그리고 이 사건은 박지원친노와 원수지게 되는 원인이 되었는데, 새정치민주연합에서 호남 중심으로 지지 기반을 얻은 국민의당과 친노의 연장선인 더불어민주당으로 나뉘는 데에 이르게 된다.

2016년 군나르 스톨셋 전 노벨위원회 부위원장(2000년 당시의 직함)은 "당시 국정원 주도로 이루어진 노벨상 캠페인이 김대중 대통령을 노벨상 수상자로 확정짓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지는 않았으나, 오히려 이 사건을 당시 알았더라면 그를 노벨상 수상자로 지목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밝혔다.

[1] 당시 정무수석이었던 유인태는 한나라당에 찾아가 큰 선물을 했다. 라고 발언했다.[2] 정확히 따지면 천신정은 친노였다기보다는 친노와 동맹 관계에 있었던 별개의 인사들로 보는 게 맞다. 요즘 분류하는 식으로 말하면 이른바 '범친노'라고 부르는 것처럼 분류해 볼 만할 듯.[3] 당시 명칭은 통합민주당이며, 열린우리당이 해체된 뒤의 시기이다. 대선과 총선의 참패로 친노들이 지리멸렬해졌던 시기이기도 하다. 안희정의 친노는 폐족이라는 발언이 이미 나왔을정도로 발언권도 약했다.[4] 2009년 7월 이명박 행정부의 통일부가 국회에 제출한 자료 중 일부를 근거로, 위에서 언급된 대북송금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으나 현대의 포괄사업권과 대북사업의 독점권을 획득하기 위해 현대가 보낸 돈이었고 정부는 송금의 편의만 제공했다는 주장도 있다.언론기사. 그리고 북한이 운용할 수 있는 1년 예산이 100억달러가 안 될 것으로 예상되는 등 적어도 어느정도 규모가 있는 셈인데, 여기서는 사실 중국이 북한에 석유와 자금지원 등으로 제공하는 것들이 더 많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다.[5] 실제로 노무현 정권때 남북관계의 발전은 거의 없었다. 김대중 정권이 만들어 놓은 것이 굴러가고만 있었을뿐... 김대중 정권과 비교해서 유일하게 발전된 항목이 남북해운합의서 단 하나다.[6] 물론 이명박 정권의 강경책이 단순히 이전 정책의 반발인 것만은 아니고, 일본-미국과의 군사동맹 강화와 중국-북한에 대한 온건책 지양을 주장하는 보수정책(대표적으로 김태효)이 정권내 온건정책파(대표적으로 류우익)를 누르면서 이행된 것이었다. 정책은 강경책이었을지 몰라도 내적으로 대북지원은 5.24조치 이전까지 지속되었다.[7] 박지원 현 민주당 의원의 경우 이 사건을 본인의 정치적 커리어로 내세우고 있다. 의원회관 호실도 6.15 남북공동선언을 기념하는 615실.(이상득 전 의원이 4.19 혁명 참가를 내세워 419호실을 쓰는 등 몇몇 의원들의 특정 호실 선호가 존재한다고 한다)[8] 사실 당시에 이 문제에 대해 더 큰 정치적 반향을 일으킨 것은 추미애의 특검 비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