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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성서초등학생 살인 암매장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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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실종됐을 당시, 이들의 사진이 걸린 트럭 앞에서 가족과 후원회 회원 등이 행인들에게 소년들의 사진 등이 인쇄된 전단을 나눠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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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소년 실종 1년 후, 아이들을 찾기 위해 만들어진 포스터[1]

1. 개요2. 실종자3. 사건 발생4. 경과5. 결말6. 의혹
6.1. 11년이 지나고서야 발견된 유골6.2. 5명의 아이들을 살해한 수법6.3. 함승훈이 들은 비명소리6.4. 그 외
7. SBS그것이 알고 싶다》의 분석8. 참고 자료

1. 개요[편집]

1991년 3월 26일. 대구광역시 달서구 성서 지역에 살던 5명의 국민학생[2]들이 인근 와룡산에 올라갔다 실종된 사건으로, 국내에서 발생한 실종 사건 중 가장 유명한 어린이 실종 사건이다. 소위 국내 3대 영구 미제 사건. 나머지 셋은 《살인의 추억》으로 영화화된 화성 연쇄살인 사건과 《그놈 목소리》로 영화화된 이형호 유괴 사건, 으로, 동 사건은 《돌아오라 개구리 소년》과 《아이들…》로 영화화되었다.

원래는 아이들이 도롱뇽 알을 채집하려고 집 근처 와룡산에 올라갔다가 실종되었는데, 사건 초기에 도롱뇽이 개구리로 잘못 알려지는 바람에 5명의 아이들은 개구리 소년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개구리 소년으로 잘못 알려진 이유는, 도롱뇽 알을 주우러 나갔다가 실종되었다고 보도하면, 도롱뇽을 잘 모르는 학생들이 도롱뇽에 대해 막연한 공포감을 지니고 도롱뇽을 티라노사우루스라도 되는 괴생명체로 오인할까봐 개구리로 보도했다고 한다.[3] 그런데 아이들이 가는 길에 만난 친구에게는 "탄피를 주우러 간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 와룡산에 있던 육군 제50보병사단 사격장에서 흘린 탄피를 주우러 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도 없다.

정식사건명은 “대구 성서초등학생 실종사건”이었으나, 2002년 시신들이 발견되면서 “대구 성서초등학생 살인 암매장 사건”이 되었다.

살인자가 쓴 도구가 보통 일반인이 쓰지 않은 도구여서 살인자의 직업은 조선소 노동자 또는 자동차 공장 기술직또는 생산직으로 추정된다.

2. 실종자[편집]

  • 우철원: 1979년생. 당시 6학년.

  • 조호연: 1980년생. 당시 5학년.

  • 김영규: 1981년생. 당시 4학년.

  • 박찬인: 1982년생. 당시 3학년.

  • 김종식: 1983년생. 당시 3학년.

3. 사건 발생[편집]

1991년 3월 26일최초로 전국의 광역/기초 지방의원을 뽑는 선거일이어서 임시공휴일이었다.

아침 8시 무렵, 성서국민학교에 재학 중이던 3~6학년 어린이 6명 우철원(12·6학년/1979년 생), 조호연(11·5학년/1980년 생), 김영규(10·4학년/1981년 생), 박찬인(9·3학년/1982년 생), 김종식(8·3학년/1983년 생), 그리고 김태룡(9·3학년/1982년 생)은 조호연 군의 집 근처에서 놀고 있었다. 조호연의 집에 세 들어 살고 있던 청년은 아이들에게 "시끄러우니까 나가 놀라"고 핀잔을 줬다.

6명 가운데 김태룡은 이때 집으로 아침을 먹으러 갔다. 나중에 급히 아이들을 뒤쫓아 와룡산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따라잡았지만, 산에 따라갈까 하다가 "너무 멀리 가서 놀지 말라"는 어머니의 말이 생각나서 혼자 집으로 돌아갔다. 크게 보면, 그는 개구리 소년들 중 이 끔찍한 사건의 화를 면한 유일한 생존자이다.

우철원 군을 비롯한 5명의 아이들은 분유 깡통과 막대기를 챙겨들고 인근 와룡산으로 갔다.

조호연의 형 조무연(당시 중학교 1학년/1978년생)은 자전거를 타고 와룡산 입구에 갔다가 아이들을 만났는데, 도롱뇽 알을 찾으러 간다는 말을 듣고 아이들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왔다.

와룡산 기슭 마을에 살면서 시내에 나가 파출부 일을 하는 김순남 아주머니가, 9시쯤 아이들을 목격했다고 한다. 이 아주머니는 일찌감치 투표를 마치려고 학교 쪽으로 내려오다가, 와룡산 쪽으로 올라가는 5명의 아이들과 지나쳤다. 그때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2시간 안에 갔다 올 수 있을까?" 하는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다고 한다.

우철원과 같은 반인 김경열과 이태석이 "12시쯤 아이들을 와룡산 입구에서 봤다"고 증언했다. 이들은 점심 먹기 직전, 우철원이 아이들과 산 쪽으로 가길래 잠깐 동안 얘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와룡산 기슭에 사는 김이수 아주머니는, "2시 무렵에 5명의 아이들이 산으로 올라가고 있는 것을 봤다"고 증언했다.

같은 학교 4학년에 다니던 함승훈(1981년생)은 아이들을 보지는 못했지만 증언을 남겼다. 와룡산 바로 밑 군인 아파트에서 살고 있던 함승훈은 이 날 동네 형과 함께 도롱뇽 알을 찾으러 와룡산 계곡에 갔다. 그는 형들과 혼자 떨어져 혼자 와룡산 중턱에 있는 무덤가 근처까지 올라갔는데, "그때 산 위쪽에서 10초쯤 간격으로 다급한 비명소리를 2차례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같이 올라갔던 형들은 듣지 못했다고 한다. 함 군은 "이때가 점심 먹기 직전이었으니까, 11시 30분 쯤 되었을 것"이라고 증언했다.

김종식 군의 어머니 허도선과 김영규 군의 어머니 최경희는 함승훈이 산에서 비명을 들었다는 11시 30분 쯤에, 똑같이 "가슴이 오그라드는 듯한 묘한 '위기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아이들을 찾아 나섰다가 와룡산에 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집에 돌아오면 야단이나 쳐야겠다'고 생각했으나, 점심 때가 훨씬 지나서도 아이들이 돌아오지 않았다.

부모들은 18시쯤부터 와룡산 주변에서 아이들을 찾다가 허탕을 치고 19시 50분에 경찰에 신고하였다. 경찰은 아이들이 와룡산에서 길을 잃었다고 보고, 부모들과 함께 다음날 새벽 3시까지 샅샅이 산을 뒤졌다. 그러나 아이들을 찾지 못했다.

4. 경과[편집]

사건 초기 경찰은 뚜렷한 근거도 없이, 무작정 5명의 아이들이 가정불화로 가출한 것이라는 일방적인 수사 방향을 정하는 우를 범했다. 이게 이상한 짓인 이유는, 일단 5명의 아이들 모두 집안 사정이 부유하진 않았어도 별다른 문제없이 화목했기 때문에 가출할 만한 사유가 없었던 데다, 애초에 5명의 아이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전부 일시에 가출한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결과야 모르지만 본격적인 수사를 늦추는 계기가 되어 버렸다. 만에 하나, 정말 만약에라도, 여기서 수사가 좀 더 빨리 진행되었더라면 찾았을 가능성도 희미하게나마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이 사건이 매스컴을 통해 전국에 알려지면서, 당시 대통령 노태우의 특별 지시로 군인경찰이 총동원되어, 개구리 소년들이 실종된 와룡산 주변은 물론 전국을 이 잡듯이 뒤졌다. 그러나 별다른 성과가 없었고, 심지어 "아이들을 데리고 있으니 돈을 내놓으라" 라던가, "아이들은 내가 보호하고 있으니, 아이들을 찾고 싶으면 OO로 찾아와라" 같은 장난전화가 빗발치기도 했고, 자기가 실종 어린이들 중 한 명이라는 장난전화를 하며 부모를 놀리는가 하면, 정신이상증세를 앓고 있던 어린이가 "내가 개구리 소년"이라고 주장하며 떼를 쓰며 난동을 부리기도 해 부모와 조사중인 경찰들을 허탈하게 하기도 했다.

다행히 어떻게든 이 사건을 해결해보자는 의지가 강했던 덕분에, 당시 어린이들이 즐겨보던 만화, 비디오 등에는 어김없이 개구리 소년 관련 광고가 삽입되었고, 그 외에 초코파이 등의 과자에도 개구리 소년 광고가 인쇄되었다. 개구리 소년을 주제로 한 영화 《돌아오라 개구리 소년》(1992년 11월)이나 노래도 제작되었고, MBC 《여론광장》(1991년 5월 4일 방송분), SBS 《그것이 알고 싶다》(1993년 3월), KBS1의 《사건 25시》(1993년 6월) 등에서 심층 분석하기도 했다. 심지어 대교출판에서 해당 사건을 소재로 한 동화《개구리 잡으러 간 친구들은 어디에 있을까(이기창 저)》를 출간했다.

1996년에는 "실종된 김종식의 아버지인 김철규가 아이들을 모두 토막살해한 후 그 집에 암매장했다"자칭 범죄 심리학자인 김가원의 주장이 강하게 제기되면서, 집안 곳곳을 파내는 촌극을 빚기도 했는데, 결과는 참혹했다. 김철규의 집에서는 아이들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해프닝으로 김가원은 재직 중인 카이스트에서도 해고되었고 심리학회에서도 제명되었지만, 그 뒤로도 끝없이 "김철규가 범인이다"라는 주장을 펼쳤다. 모 웹사이트에 카페를 개설해서 여론을 모으는 한편, 나중에 유골이 발견된 후에도 지속적으로 김철규 범인설을 주장해서 관련 책 《아이들은 산에 가지 않았다》도 썼다. 결과는... 2011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자신이 오판했던 것만 인정하고 사과할 뿐, 다른 가설들은 신빙성이 있다고 여전히 주장하는 중이다.해당 기사, 당시뉴스.

한편으로는, 1970년대에 남파 간첩을 훈련시키는 교관으로 이용할 목적으로, 북한 공작원이 남한 고교생 등을 납치한 사례가 있었기 때문에, 북한 공작원의 납치설도 떠돌았다. 또 허무맹랑한 UFO 납치설[4] 등이 제기되었으며, 심지어는 "나병 환자들이 병을 치료하기 위해, 아이들을 생체 실험 대상으로 삼았다"는 주장(나병 항목과 어린아이 간 빼먹기 참고)까지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관심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성과 없이 영구미제 사건으로 기록되었으며, 생업을 포기한 채 전국을 돌며 자식들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쓴 부모들의 눈물겨운 노력도 허사가 되는 듯 했다. 심지어 사건 발생 약 10년 후인 2001년 10월 22일에는 김종식의 아버지 김철규 씨가 아들의 실종을 술로 달래며 살던 게 화근이 되어 간암으로 사망, 다른 부모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었다. 그 와중에 경찰 측은 1995년과 2001년에 그 다섯 소년의 얼굴을 가상으로 가정해 낸 몽타주를 전단지에 싣기까지 했다.

5. 결말[편집]

세간의 관심이 거의 사라졌던 2002년 9월 26일, 실종 11년 만에 도토리를 주우러 와룡산에 올라갔던 오우근 씨에 의해 5명의 유골이 와룡산 중턱에서 발견되었다. 이곳은 구 육군 50사단 사격장 부지였으며, 50사단은 이미 1994년에 북구로 이전한 상태였다.

이 지역은 과거 군부대 사격장과 가까이 있어서 탄피가 많이 발견되었고, 실제로 인근 어린이들이 탄피를 모으기 위해 와룡산에 자주 올랐다는 제보도 잇따라, 일각에서는 오발탄에 의한 타살로 추정되었다.

여기서 경찰은 11년 전과 마찬가지로 또 성급한 수사를 해 빈축을 샀다. 대구 달서경찰서[5]는 시신 발견 신고를 받고 출동한 후 현장보존도 하지 않고 과학수사대도 부르지 않은 채 곡괭이 등을 이용해 땅을 파헤쳤다. 또, 정확한 부검도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유골만 봤으면서도, "조난을 당했고 추위에 떨다가 저체온증으로 사망한 것이다"라는 순 엉터리 같은 추리만 남발해 거센 항의를 받기도 했다.

경찰이 계속해서 아이들의 조난을 주장하던 것에 대해 와룡산 기슭에 컨테이너를 두고 살던 할머니"(길을) 잃어버리긴, 갓난쟁이도 아니고 국민학교 5학년, 6학년씩이나 된 애들이 그러는건(동네 뒷산에서 조난당하는건) 말도 안 되는 소리야."라고 일축했으며, 김영규의 아버지 김현도씨 또한 "바로 뒤에 경부선 철도가 지나가고, 밤이 되면 그 때나 지금이나 주변 마을 불빛이 환합니다. 이런데 무슨 조난을 당해요?"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그리고 여기서 경찰은 아무 생각 없이 사건 현장을 건드려서 크게 훼손시킨 것으로 드러났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제작진이 2002년에 유골에 대한 미스테리를 방영할 때, 실종된 소년들과 같은 연령대의 남자아이들을 모아, 어두워진 후에 와룡산에서 마을로 내려가게 실험했었는데, 아이들은 무서워하는 기색은커녕 긴장하는 기색조차 없이 마을로 "대단히 쉽게" 돌아왔다(…). 아이들이 실종된 1991년 당시, 인근은 전형적인 농촌이었고, 주택가 및 아파트가 유골 발견 지점 인근까지 확대되기는 했다. 하지만 유골 발견 지점 인근 500m 근방에 수십여 가구가 사는 마을이 있었고, 좀 더 바깥으로는 당시로서는 구마고속도로로 불렸던 중부내륙고속도로의 지선이 통과하고 있기 때문에, 아이들이 바로 앞에 있는 불빛을 보고도 마을로 못 내려왔을 리가 없다. 더군다나 당시 농촌이었던 이 동네의 아이들은, 동네 뒷산 정도는 놀이터나 같을 정도로 산으로 자주 놀러 다녔기 때문에.

게다가 한 아이의 옷소매가 뒤로 묶인 상태였고, 이 매듭의 형태나 강도가 잘 풀리지 않도록 잘 묶인 형태로, 보통 사람들이나 아이들이 아닌 전문가나 관련 업계 종사자들이 쓰는 형태였기 때문에, 이것을 타살의 근거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찰은 "아이들이 추위에 떨다가 옷으로 덮으려고 했다는 증거, 매듭의 모양은 저체온증에 이성을 잃으면 설명되지 않는 이런저런 행동을 할 수도 있다"라고 성급한 결론을 내려 유족들의 화만 더 돋우었다.

더 심각한 것은, 1993년 3월 SBS의 《그것이 알고 싶다》 프로그램에 출연한 경찰조차도, "와룡산은 높은 산이 아니라 야산이기 때문에, 아이들이 그곳에서 조난당할 가능성은 없다"라고 밝혔었다는 점. 아이들이 조난당한 상태였다면, 수천 명의 군경이 수색하는데 눈치도 채지 못했을까?

결국 법의학자들의 부검 결과 둔기로 맞거나, 흉기에 찔려 타살된 것이라는 추정이 내려졌다. 하지만 그 외에는 별다른 사망 원인조차 밝혀지지 않았고, 당연히 범인도 알 수 없었으며 범죄 도구도 불분명해서 경찰이 온갖 도구를 가지고 조사했으나 결국 찾지 못했다. 그리고 사건 발생 15년이 지난 2006년 3월 26일 공소시효가 만료되어, 이제 와서 범인이 잡힌다고 해도 소용이 없게 되었으며 물론 현재로서는 진범이 잡힐 가능성도 없어 보인다.

6. 의혹[편집]

6.1. 11년이 지나고서야 발견된 유골[편집]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점은 사건이 발생하고 얼마 되지 않아 수많은 군인과 경찰, 그 밖에 많은 자원 봉사자들이 총 동원되어 와룡산을 뒤졌는데, 11년 6개월이 지나고서야 유골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와룡산은 높이 300m 정도의 야산일 뿐인데..[6]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다른 장소에서 피살된 아이들이 나중에 잠잠해지자 와룡산에 암매장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법의학자들이나 범죄심리학자들의 분석은 "아이들이 살해되고 거의 시차를 두지 않고 매장되었다"라는 데에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실제로 와룡산은 야산이지만, 아이들이 놀러갔다고 알려진 서남쪽의 '불미골'이 아닌, 당시에 존재하던 저수지에서 반대쪽 능선을 지난 '세방골'에서 발견되었고, 아이들의 유골이 발견된 지점은 와룡산에서도 골이 가장 깊고 수풀이 우거진 지점이었다.

2011년 방영된 《그것이 알고 싶다》의 분석으로는, 90년대 초를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야산들 대부분이 녹화사업 전이라 민둥산에 가까웠고 와룡산 또한 마찬가지였는데, 이 인근은 군 사격 훈련장이 있기 때문에 성인들도 발길이 뜸하였고, 그만큼 수풀이 우거진 지점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비가 내리면 실개천 같은 게 형성되는 지점이기도 했다고 한다. 11년이 지나서야 유골이 발견된 이유에 대해선 사건 당일 저녁에 비가 내린 탓에, 아이들의 흔적이 모두 빗물에 씻겨 내려간 탓이라는 지적이 있다. 그리고 발견 당시 쉽게 눈에 뜨인 것은 그 해 여름 폭우로 살짝 덮인 흙 등이 씻겨 내려갔기 때문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당시 아이들이 살고 있던 지점에서 산 반대편까지 아이들의 부모들은 "왜 아이들이 그곳까지 갔을까" 하는 의문을 갖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역시 탄피 등을 주우러 갔거나, 범인이 일부러 아이들에게 "탄피 등이 많은 곳을 알려주겠다"고 유인했거나, 아니면 정말 다짜고짜 아이들을 외진 곳까지 끌고 갔을 것 등등의 분석이 나왔다.

아무튼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처럼, 와룡산에 대한 수색은 의외로 그리 철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는 여론에서도 살인이 아니라 실종, 납치 등에 비중을 두고 있었던 데다가[7] 앞서의 증언들처럼 와룡산에서 어린이들이 살해당하고 암매장당할 가능성은 생각되지 않았고[8], 암매장을 한다고 해도 이렇게 가까운 곳에 묻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6.2. 5명의 아이들을 살해한 수법[편집]

5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범인이 1명이었다면, 2~3명의 아이는 손으로 붙잡는다고 해도, 그 사이에 1~2명은 달아날 수 있다. 이 때문에 범행 당시의 정황을 추측하기 어렵다.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벌인 실험에서도, '어른 1명이 5명의 아이를 붙잡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게다가 이 5명은 깡통이나 작대기 들고 산과 들을 매일같이 뛰어다녀서, 운동 신경이 뛰어날 수밖에 없는 시골 아이들이다. 피살된 아이들 중에는 태권도를 익힌 아이들도 있었다.

2011년 방영된 《그것이 알고 싶다》 3대 영구 미제 사건 특집에서는, 범죄심리학자의 말을 통해 '아무리 상대가 어린아이라도 5명이나 되면, 범죄자의 입장에서도 어느 정도 위축되는 면이 생긴다'는 분석과 범인이 1명이었다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산에 오르거나, 일시적으로 한두 명이 떨어져서 놀던 차에 아이들 중 일부를 먼저 발견하였고, 순차적으로 살해하였을 가능성도 제시하였다.

6.3. 함승훈이 들은 비명소리[편집]

1993년 3월 SBS 《그것이 알고 싶다》 방송분에서 이 사건을 심층적으로 다룬 바 있는데, 당시 성서국민학교에 재학 중이던 함승훈의 인터뷰가 눈길을 끌었다. 함승훈도 사건 당일 개구리 소년들과 비슷한 시간대에 와룡산에 갔었는데, "골짜기 쪽에서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렸다"는 것. 이후 유골이 발견된 2002년, 대학생이 된 함승훈은 다시 이 방송의 인터뷰에 응했었는데, "당시 비명소리가 들렸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절대 잊지 못한다"는 말을 남겼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와룡산에서 5명의 아이들이 피살된 게 분명하지만, 당시 경찰은 이 주장을 거의 무시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엔 사이코패스란 말도 대중적으로 통용되지 않던 때라, 이유없이 5명의 어린아이를 죽인다는 것은 좀처럼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가출, 혹은 불량배나 폭력배 집단에게 노동력 갈취 목적으로 납치당했다고 추정하는 게 상식적이었다. 이 사건이 전국적인 화제로 떠오르는 바람에, 제보의 허울을 쓴 온갖 장난이나 오인 신고 등이 빗발친 탓에, 엉뚱한 방향으로 경찰력이 분산되기도 했으나, 그 어느 장난 전화도 살인, 즉 아이들을 죽였다는 것은 입에 담지 않았다.

또한 이 당시 사건 이후 몇 개월, 몇 년이 지나도록 실종 혹은 납치로 인식되어, 많은 사람들이 개구리 소년들의 귀가를 기다렸다는 점은, 당시 시대가 한 번에 다수의 어린이들을 살인한다는 개념 자체를 떠올리지 못했다는 걸 방증한다. 1명이나 2명의 어린이라면, 부모나 가족 관련 원한을 동기로 생각할 수도 있었겠으나… 시신도 발견되지 않은 탓에 더더욱 그랬을 가능성이 크지만.

김종식의 아버지 김철규 씨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도 함승훈의 인터뷰를 계속 되뇌며 아들 걱정만 했다고 한다.

근데 위의 함승훈의 인터뷰는 다른 사람들의 인터뷰와 어긋나는 부분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12시쯤 우철원과 같은 반인 김경열과 이태석이 서로 만난 증언이 있으며, 2시쯤 김이수 아주머니가 "5명의 아이들이 산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는 증언도 있고, 기타 12시 이후의 목격증언이 있기 때문. 다만 모두들 확실하게 증언을 하고 있으므로, 당시 누군가는 이들 증언을 토대로 정확한 수사를 해야 했지만 그 시기를 한참 전에 놓쳐버렸으니..

6.4. 그 외[편집]

  • 소년들의 유해가 발견된 곳에서 400m 떨어진 곳에는 50사단 사격장이 있었으며, 2002년 대구시의 한 구두닦이방에서 30대로 보이는 한 손님이, "군 복무 중 갑자기 튀어나온 소년 5명을 오발하여 1명이 즉사, 1명이 부상당한 사건이 있었는데, 5명 전부 다른 곳으로 끌고 가 죽이고 은폐했다"는 말을 들은 구두닦이방 주인이 이를 제보한 바 있다. 하지만 50사단에서는 "소년들이 실종된 당일은 임시공휴일이었기 때문에, 그 날은 사격 일정이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이에 대해 당시 주임원사가 진술한 바 있다.[9] 군대에 갔다 온 사람들은 알겠지만, 비명소리가 들릴 정도였다면 총 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므로, 사격장 오발 사망은 신뢰성이 낮다.[10] 미상으로 밝혀진 상흔이 총격으로 인한 관통상이 아니냐는 의혹이 있었지만, 이 역시 밝혀지지 않았다. 물론 그 말을 했다는 30대 중반의 남성도 찾지 못하였다. 이런 사건이 벌어지면 반드시 나타나서 자신이 관계자라거나 범인을 안다고 금품을 요구하거나, 장난을 치는 사람들이 있다. 90년대 말 전국을 경악시켰던 대구 아동 황산 테러의 경우도, 자칭 범인이라는 사람이 PD수첩에 나온다고 자수한 적이 있었다. 물론 장난으로 밝혀졌지만, 장난으로 밝혀지기 전에 지속적인 속보 방송과 생중계 준비까지 했는데. 결국은 특선 영화를 틀어주었다. 지금도 가끔 음모론이 나돈다. 여담으로 현재 대구 서문시장을 가면 한 사람이 술에 취해서 "군인들이 개구리 소년들을 쏴죽였다"고 하는데, 별로 믿을 것은 못 되지만 이 말을 듣고 음모론을 믿는 사람들이 좀 된다.

  • 살해방법과 같은 핵심 증거들이 영구미제가 되었기 때문에 발포설은 무작정 확신할 수 없다. 다만 개구리 소년들의 유해가 당시 사격장 근처에 묻혀있었다는 점과 시신이 매듭 묶기 전문가에 의해 매듭 묶기가 되어 있었다는 점, 상식적으로 범인 1명이 아이 5명을 동시에 제압하기 힘들다는 점[11]이 이 설을 신빙성을 더할 뿐이다.

  • 일부 소년들의 옷은, 일반인이 거의 하지 못하는 정교한 매듭 방식으로 묶여 있었다. 이 때문에 범인, 공범이 있을 경우 최소한 일부는 평소 포장 작업 등에 종사하는 노동자이며, 임시 공휴일에 회사를 쉬면서 범행을 저지른 것이라는 추측이 나오기도 했다.

  • 인터넷에 떠도는 진범설은 사실 앞에서 이야기 한 김철규 범인설과, 2008년쯤에 어느 재미 교포가 주장한 김철규의 부인 범인설을 조합한 도시전설이다. 고인드립은 자제하자.

  • 유골 발굴전 한 남성이 아이들이 묻힌 곳을 알고 있다며 거짓 제보를 했는데 경찰은 이 남성의 몽타주[12]를 만들어 전국에 수배했고, 결국 붙잡혔다. 하지만 이 사건과 아무 관계없는 정신이상자의 해프닝으로 끝이 났다.

  • 와룡산이 당시 우범지대였다는 설도 있다. 이하 전문.

    대구시 서구에 위치한 서도초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중학교는 당시 50사단(개구리 소년들의 유해가 발견된 곳)과 그리 멀지 않은 죽전중학교를 졸업했다. 물론 내가 초등학교나 중학교에 다닐 때와는 약간의 세월 차는 있다. — 난 30대 초반으로써 1984년 중학교에 입학했다 — 하지만, 나도 중학교 때까지 와룡산 사격장으로 탄피와 더불어 유탄을 주우러 다닌 경험이 있다. 군부대 관계자들은 부인하겠지만, 당시 근처(서구 평리동 일대까지)의 초, 중학생들 중 탄피와 유탄을 주우러 다녀본 경험이 있는 이들은 다 알 것이다. 예비군 사격훈련장까지도 들어갈 수가 있었다. 거기서 탄피를 주워 오기도 했던 기억이 생생하기 때문에 장담한다. 당시 꽤 먼 거리에 총 쏘는 곳이 있고, 총알이 박히는 쪽에는 모래주머니와 더불어 흙으로 벽이 둘러쳐져 있었다. (참고로 나는 생계곤란으로 방위병 훈련소집 면제되었다. 태어나서 아직까지 실제 총은 한 번도 만져보지 못한, 그야말로 당시의 기억대로이다.) 모아서 팔기도 하고, 목걸이나 기타 장식품을 만들기도 했으며, 자랑삼아 필통에 넣어 다니기도 했던 기억이 있다. 중학교 때에는 이곡동(당시 50사단 근처)에 친구네 집이 있어서 자주 놀러가서 산새들과 토끼 등을 잡겠다고 와룡산에 많이 올랐었다. 지금 소년들의 유해가 발견된 곳. 민가에서 많이 떨어지지 않았던 곳으로 기억한다. 그곳에서 내려다보면 민가의 불빛이 보였고, 오솔길도 아래쪽으로 나 있던 곳으로 기억한다. 나도 그 근처까지, 아니, 더 위쪽으로도 자주 놀러 가봤고, 해가 지면 내려오곤 했었다. 내 기억과 경험으로 비춰봤을 때 소년들이 당시 날이 추워서 저체온증에 시달릴 정도로 추웠다면, 민가의 불빛을 보고 내려왔을 것이다. 그리고 근처에 살지 않는 나도 초등학교 때 친구들과 와룡산에 갔을 때, 해가 지면 민가의 불빛을 보고 내려오곤 했었는데, 하물며 인근에 살면서 와룡산에 자주 오르락거렸던 소년들이 내려오지 못하고 사고를 당했다는 건 상식적으로도 생각하기 어렵다. 그러나 난 그 소년들이 다른 곳에서 피살되어서 옮겨졌다기보다는, 그곳에서 당했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물론 내 경험에 비추어봐서 추론해 본다. 앞서도 말했듯이 나도 어릴 때 와룡산에 자주 오르곤 했다. 그러나 늘 재미나는 산행(놀이)만은 아니었다. 가끔은 정말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사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와룡산은 그리 높지 않은 야산형태이면서 깊숙이 들어가면 어느 정도 숲이 형성되기 때문에, 불량한 이들이 꽤 많이 있었다. 어릴 적 당시에 술에 취한 고등학생이나, 20대 초반 정도의 형들이 싸우는 것도 자주 목격을 했었고, 심지어는 은밀한 행각도 많이 보아왔었기 때문이다. 또한, 가끔씩은 그들의 노리갯감이 되곤 했었다. 술에 취한 채 담배를 물고 나타나서는 우리가 주워 놓은 탄피와 탄두를 모조리 뺏고, 때리기도 했으며, 엎드려뻗쳐 등 심한 기합을 받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떤 때에는 복싱을 시킨다며 우리 일행을 싸움을 붙이기도 했고, 나무에 묶어놓고 괴롭힘을 당한적도 있었다. 난 그런 이들에 의한 살인이라 여겨진다. 물론 처음에는 죽일 의도가 없었겠지만, 어찌어찌하다보니 죽이게 되었고, 서둘러 암매장을 하지 않았나 하는 느낌이다. 아니면 묶어놓고, 또는 무릎을 꿇린 채 하체 부분을 흙으로 덮어놓고(실제로 어릴 때 이렇게 당해서 거의 초죽음이 된 적이 있었다), 괴롭히다가 가해자들이 그냥 내려가 버리는 바람에 사망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절대 자연사란 있을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5명이 전부 다쳐서 움직일 수 없었다면 또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바로 아래 희미하게 민가의 불빛이 보일 것이고, 또한 근처에서 거주하던 아이들로서는 그렇게 모여서 자연사할(저체온증으로) 이유가 없다고 본다. 와룡산 일대는 소위 우범지대였던 것이다. 나는 지금도 당시 와룡산에서 불량배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기억이 생생하고, 20년이 지난 지금도, 허벅지에는 그때 와룡산에서 그들이 장난삼아 괴롭히며 도루코칼(하얀색, 연필 깎는 칼)로 찌른 흉터가(채 1cm도 안 되는 길이지만) 남아 있다. 아마도 어릴 때 와룡산을 드나들어봤던 이들이라면, 현재의 경찰발표나 수사상황에 대해 어이없어하고 답답해하며 한숨짓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부디 조금 수고가 되더라도 정확한 사인규명과 더불어 수사가 진행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위 출처를 보면 알 수 있듯, 정식 인터뷰가 아니라 단순히 언론사 자유발언대 게시글이다. 즉 글 내용의 신뢰도가 보장되지는 않음을 유의하자.[13]

  • 위 글을 읽고 '땅에 반쯤 묻히거나 서로 싸움 붙인 걸로 일어날 사건이 아닌데?' 하고 의아해할 수도 있겠지만, 위 글의 요지는 글쓴이의 구체적 경험담이 아니라, 불량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위에서도 언급됐듯이, 성인 1명이서 어린애 5명은 힘들다는 관점에서, 다수에 의해 행해진 범죄일 가능성에 초점을 둔 추측이라 볼 수 있다.

  • 모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와룡산에 사는 도사견 견주가 진범이 아닐까 하는 글이 올라오기도 했는데, 해당 글의 후속 내용이 전혀 올라오지 않고 시기상으로도 앞뒤가 안 맞는 부분이 많아 금세 잊혀지기도 했다. 관련 게시물 이런 종류의 사건과 관련해서 인터넷에서 항상 올라오는 '나는 모든 진실을 알고 있는데 사정이 있어서 밝히지 못한다'는 식의 흔한 유언비어 글 중 하나. 진지하게 분석하자면 이 글의 작성자는 아이들의 사인조차 확실하게 말하지 못하고, 처음에는 자신이 뭔가 중요한 자료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말하면서 나중에는 이모한테 들었다고 말이 바뀌는데다, 정작 가장 중요한 그 자료가 무엇인지에 대한 얘기는 전혀 없으며, 다른 사람의 반박이 들어오면 '당신같은 사람들 때문에 말하기 싫다'는 식으로 답변을 회피하고 있다. 본문에 따르면 작성자는 이 이야기를 자신의 이모에게 들었을 뿐이고 정작 범인의 부인이라고 하는 당사자는 만난 적도 없으며 그나마 이모에게 들은 내용도 아이들의 사인조차 명확하지 않을 정도로 불확실한 내용이라는 말이 되는데 도대체 경찰에 넘길만한 무슨 중요 자료가 있단 말인가? 즉 겉으로만 그럴 듯해 보일 뿐 이 글에는 실체가 전혀 없으며 이 글은 전형적인 인터넷 관심병자가 쓴 글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애초에 언론이나 경찰에다 사기치는 인간들도 있는데 하물며 인터넷에 올리는 이런 음모론 수준의 글은 신빙성이 거의 없다고 봐도 좋다.

7. SBS그것이 알고 싶다》의 분석[편집]

800회 특집을 맞아, 국내 3대 미제 사건의 2번째 편으로 《개구리 소년 편》을 방송했다.[14] 《그것이 알고 싶다》는 이미 93년과 2002년에 이 사건을 다룬 바가 있었다.

방송은 아이들의 유골에 드러난 타살 흔적을 바탕으로 살해 도구를 분석하는 데 주력했다. 여러 공구들을 토대로 실험해 본 결과, 가장 유력한 살해 도구로 추정되는 것은 용접 후 생기는 찌꺼기를 끊거나 때려서 제거하는 데 쓰이는 용접 망치로, 흔히 깡깡 망치라고 불리는 것이다. 일반인들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도구지만, 공사 현장이나 공장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공구라고 한다.

이 소년들이 살해된 시점에 대해 채종민 법의학자는 "초등학생 때는 이미 영구치가 자란 성인들과는 달리 6개월 단위로 치아 발육이 달라지는데, 이 점을 토대로 미루어볼 때, 개구리 소년은 1991년 3월 26일에 실종된 후 아무리 길게 잡아봤자 6개월 이내에 살해되었을 것"으로 주장했다. 그리고 두개골 하나는 돌에 눌려 납작하게 변형이 되어 있었는데, 당시 부검에 참여했던 채종민 법의학자는 "뼈도 70~80%는 물로 이루어져 있고, 물이 있어야 변형이 일어날 수 있다."라고 지적하였다. 이는 아직 뼈의 물기가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돌에 눌렸음을 뜻하는 것으로, 아이들이 살해된 직후에 매장되었을 것이란 걸 말해준다.

미국의 법의곤충학자 데이비드 포크너 또한, 조호연의 두개골에서 나온 구더기 껍데기를 통해 "소년들이 살해된 직후에 곧바로 매장되었다"라고 주장했다. 조호연의 두개골에는 성체 파리가 이미 날아간 흔적이 있는데, 이는 2가지 가능성을 상정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시신이 매우 얕게 매장되어 있어서 성체 파리가 날아갈 수 있었다는 것이고, 2번째는 파리 한 세대가 발생한 후에 매장되었을 가능성을 말한다. 전자라면 시신이 살해된 직후에 곧바로 매장되었다는 걸 말하고, 후자라면 시신이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매장되었다는 걸 말해준다.

그런데 알에서 구더기가 깨어나는데 걸리는 시간은 보통 8~14시간이라고 하며, 파리 한 세대가 발생했다면 번데기가 많이 보여야 하는데, 조호연의 두개골에선 번데기의 수가 적었다. 이는 곧 파리 1마리에서 구더기들이 만들어졌고, 시신이 매우 얕게 매장되어서 성체 파리가 다 날아가버린 것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시신에 곤충이 접근하는 것을 막을 것이 없다면, 24시간 내에 곤충이 시신에다 알을 낳는다고 한다. 그런데 조호연의 두개골에서 구더기가 부화한 흔적이 있고, 구더기가 부화하는 데는 알을 낳고 8~14시간 이내라고 하니, 이는 곧 구더기가 부화하기 전에 매장되었다는 뜻이다.

채종민 법의학자의 소견과 데이비드 포크너 박사의 주장을 종합해 보면, 결국 소년들이 살해당하고 짧게는 8시간 이내에 길게는 14시간 이내에 매장되었다는 걸 말해준다. 그래야 뼈의 물기가 아직 마르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돌에 두개골이 눌려 두개골이 납작하게 변형이 일어날 수 있고, 또 두개골에 깠던 파리의 알이 부화해 구더기가 생길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매장은 성체 파리가 날아가버릴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얕게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두 학자들의 주장으로 미루어 볼 때, 실종 당일인 1991년 3월 26일에 곧바로 살해당했고 그날 바로 매장되었다고 봐야 할 듯하다.

그것이 알고 싶다에 출연한 경찰대학 박지선 심리학과 교수는 "이 사건은 계획성과 우발성을 동시에 갖고 있다"고 지적했다. 계획성을 나타내주는 증거는 일반적으로는 잘 쓰지 않는 흉기를 사용했다는 점이고, 우발성을 나타내주는 증거는 타깃을 소년들로 정한 것이란 점이다.

사실 아무리 범인이 성인이고 상대는 어린이들이라도, 성인 1명이서 5명의 어린이들을 상대로 살인을 저지를 때는 성인 범죄자라도 심리적으로 위축되는 면을 보인다고 한다. 상식적으로 성인 1명이 한꺼번에 어린이 5명을 붙잡아두기에는 어렵다는 점을 볼 때, 범인이 한꺼번에 5명의 어린이를 모아놓고 그 자리에서 죽인 것이 아니라 여러 차례 순차적으로 죽인 것이라고 분석했다. 즉, 아이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약간 떨어져 있었을 때 먼저 1~2명을 죽이는 모습을 보여 공포심을 안겨 주었고, 겁에 질려 있는 아이들을 향해 무차별로 구타해[15] 제압한 다음 죽였을 것이라는 것이다.

범인의 수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복수(複數)라고 예상했던 것과 달리, 1명이라고 분석했다. 왜냐하면 범인이 복수일 경우엔 가해자 중 1~2명은 순종적인 경향을 보이는데, 그런 점이 보이질 않는다는 데서 1명이라고 분석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1명의 범인이 와룡산에 올라온 아이들을 보고 처음엔 5명이나 되는 줄 모르고 먼저 앞에 있던 1~2명의 아이를 죽였는데, 알고 봤더니 일행이 몇 명 더 있었고, 입막음을 위해 나머지 아이들도 뒤쫓아가 모조리 살해했다는 분석이었다.

미국의 유명한 범죄심리학자 에릭 힉키는 "처음엔 두개골에 찍힌 상처가 여러가지 형태라는 점을 미루어 범인이 복수일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다시 한 번 두개골의 형태를 살펴본 결과 범인은 역시 1명"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가 범인을 1명으로 결론내린 이유는, 유골에 난 잔혹성 때문이었다. 극도의 잔혹성을 드러내는 범죄자 2명 이상이 짝을 이루는 경우는 매우 드물기 때문에[16], 혹 5명의 소년을 제압하는데 조력자가 있었을지는 몰라도, 직접적으로 흉기를 휘두른 인물은 2명이 아니라 1명이라고 주장했다. 만일 정신이상자의 소행이라면 증거가 꽤 많이 남았을 것이고, 시체를 매장하는 일도 거의 없다고 한다. 에릭 힉키 박사는 "범인이 생각보다 시체가 늦게 발견되어서 놀랐을 것"이라고 하며, "자신이 살인을 저지르고 있다는 걸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고 법적으로 문제가 된다는 걸 알고 있어도 신경쓰지 않는 인물"이라고 설명한다. 또 "아이들의 옷처리나 묶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는 점에서, 살해 경험이 이 사건 이전에도 있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미리 계획을 세웠을 수도 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매장을 얕게 했던 것도, 단지 시간을 벌기 위함에 불과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힉키 교수는 이 사건은 "사이코패스가 저지른 사건이며, 범인의 수는 1명이고, 다시 살인을 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매우 위험한 인물로, 아마 체포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17]"고 주장했다.

박지선 교수 역시 "범인과 개구리 소년 5명은 아무런 관계도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돈을 노린 범죄라고 하기엔 진짜 범인은 단 1번도 돈을 요구한 바 없었고, 원한에 의한 소행이라기엔 한 자리에서 5명이나 되는 소년들을 모조리 죽인 게 설명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소년들의 시신이 매장된 곳이 세방골에서도 가장 골이 깊고 수풀이 우거진 곳이라는 점과, 가시덤불이 많고 인근에 군부대 사격장이 있어서 사람들의 출입이 뜸하다는 걸 알고 있었고, 마을에 사는 소년들이 탄피를 모으러 자주 오르락거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점으로 볼 때, 현지 사정과 지리에 매우 밝은 인물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소년들을 살해한 이유는, 단지 살인 그 자체를 위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결국 이 방송에서 개구리 소년 사건의 범인과 흉기에 대해 내린 분석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범인의 수는 1명으로 와룡산 일대의 지리와 사정에 매우 밝은 사람이었고, 사이코패스 성향을 가지고 있었으며, 한꺼번에 5명의 아이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죽인 것이 아니라 여러 차례에 걸쳐 순차적으로 5명의 아이들을 살해했고, 그때 사용한 흉기는 공장이나 건설 현장에서 자주 쓰이는 용접 망치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사건이 일어났던 1991년 당시에는 사이코패스에 대한 개념이 희박했기 때문에 수사에 대한 초점을 잘못 맞추었고, 거기서 해결을 할 길이 없어져 버린 것이라 볼 수 있다. 실제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사이코패스라는 개념이 회자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중후반 유영철, 정남규, 강호순 등의 등장 때부터라고 볼 수 있다. 1990년대 초로서는 아무런 이유 없이 단순히 살인을 즐기려고 무고한 어린이 5명을 죽인다는 것은 상상조차도 못할 일이었다. 당시만 해도 아이들을 납치해 가서[18] 앵벌이를 시키는 등의 사건이 많았다. 때문에 개구리 소년 찾기 캠페인이 벌어질 때도 "각종 역, 터미널, 지하철 승강장 등에서 앵벌이하는 아이들을 유심히 봐달라"고 호소하던 수준이었다.

방송 말미에 진행자 김상중은 "공소시효가 끝났다고 하더라도 절대 이 사건을 잊어서는 안 된다. 범인을 계속 추적해야 하는 이유는, 이 자가 현재도 우리들의 이웃인 척하고 살면서 또 살인을 저지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라고 시청자들에게 당부의 말을 남겼다.

8. 참고 자료[편집]

[1] 통계청에서 제공하는 소비자물가지수를 이용한 화폐가치 환산에 따르면 1991년 당시의 4,200만원은 2018년 5월 기준으로 98,868,000원, 즉 현재 가치로 약 1억원에 해당되는 거금이다.[2] 당시에는 초등학교가 아니라 국민학교라고 불렀었다.[3] 사실 또 당연한 것이, 개구리야 한국의 산이나 계곡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동물이었던 반면, 도롱뇽은 개구리처럼 그렇게 흔하게 만날 수 있는 동물은 아니었던 이유도 있다.[4] 변종으로 아이들은 사실은 인류가 아니라 어느 별의 외계인(...)이라서 외계인이 불러간 것이라는 개소리도 있다.[5] 당시 달서경찰서장이었던 김용판은 2012년 서울경찰청장에 임명됐다.[6] 그렇다고 산이 가파른 것도 아니라 완만한 산인데다가, 정상까지 올라가보면 그리 높지 않고 동네 주민들이 산책 코스로 올라가는 수준밖에 안 된다.[7] 당시에는 살인사건이라고 해야 원한 혹은 치정과 연관된 사건이 대다수였던데다가, 아이들을 범죄에 이용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수단이 유괴였기 때문. 위에서 상술한 바대로 부모들의 성화를 못견뎌 가출을 하는 경우도 허다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었다.[8] 더구나 당시의 범죄행위들은 상당히 온건(?)한 성향이 대다수였다. 오늘날과 같이 흉포화한 범죄는 그야말로 가뭄에 콩나듯 했던 정도여서, 사람들이 '묻지 마 범죄'가 터진 후에 나오는 반응이 "도대체 왜!?"가 아닌 "어떻게 그런!?"이었다. 오죽하면 흉포한 범죄 앞에 붙이는 수식어가 '천인공노할'이었다.[9] 일단 군 의문사 사건이라는 것이, 목격자가 수십 명이어도 그 수십 명이 전부 공범일 경우, 진실이 묻히는 경우도 있긴 하다. 허원근 일병 사건의 경우, 사람이 M16 소총으로 스스로에게 3발을 쏴서 자살했다는 말도 안 되는 진술을 목격자였던 전 중대원들이 30년째 번복하지 않고 있다. 딱 1명, 부사관에 의한 사살이라고 증언한 사람이 있었지만, 12번에 걸친 조사 끝에 결국 자신의 진술을 번복했다.[10] 장난감 BB탄 총과는 달리 실제 소총의 격발음은 엄청나게 크다. 군대 사격장에서는 귀마개를 비치하는 경우가 흔할 정도다. 사격장에서는 수명~십수명이 여러 발을 연이어 쏘기 때문에 비명 소리가 묻히면 묻혔지 반대일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좋다.[11] 아이 3명이 각자 다른 방향으로 도망치는 일이 있으면, 2명이서 범죄를 저질러도 범죄가 탄로날 가능성이 높다.[12] 몽타주의 얼굴이 굉장히 섬뜩하다. 물론 진짜 범인은 아니지만 개구리소년사건 관련 글을 찾다 보면 이 얼굴이 상단에 같이 보이기 때문에 무서울 수가 있다. 심약자는 특히 주의해야 한다.[13] 2010년대인 지금이야, 동네에 인접한 야산들 상당수가 공원화되어 새벽 및 초저녁에도 운동하는 사람들이 수시로 다니고 있고, 조명등 및 CCTV가 곳곳에 설치되어 있어 덜하다. 하지만 야산들이 방치되고 CCTV가 거의 설치되지 않았던 1990년 당시에는, 비단 와룡산 뿐만 아니라 어느 동네건 인근 야산은 우범 지역이었다. 때문에 당시 학교를 다니던 학생들은 학교로부터 "근처 야산에는 밤은 물론 낮에도 가지 말라"는 주의를 받곤 했다.[14] 즉, 이 방송은 801회 때 방영된 것이다.[15] 조호연 군의 두개골과 박찬인 군의 두개골에서 구타를 당했다는 소견이 나왔고, 김종식 군의 왼팔 뼈가 골절된 것으로 보아, 왼팔을 들어 범인의 공격을 방어하려다 발생한 흔적(방어흔)이라는 소견이 나왔다. 또 김영규 군의 상의가 심하게 찢어진 것으로 보아, 범인에게 우악스럽게 잡혀 찢어진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16] 맨슨 패밀리처럼, 순종적인 조력자가 있는 경우는 있다.[17] 물론 미제 사건이기 때문에 범인은 체포되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서 "이 사건의 범인이 체포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의 뜻은 그 뜻이 아니다. 연쇄살인사건의 범인들은 간혹 다른 사건으로 붙잡혀 이미 교도소에서 복역 중인 경우가 많다. 일례로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에 대해서, 연쇄살인범 유영철은 "나의 경험에 비추어, 이 사건의 범인은 아마 죽었거나, 오래전에 다른 사건으로 이미 교도소에 수감되어 복역 중일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이 교수가 말하는 것도 그와 같은 뜻이다. 다른 사건의 범인으로라도 잡히지 않고 계속해서 우리의 주변에 머물고 있다는 뜻이다.[18] 물론 전문적인 납치범이 아니라, 불량배 등이 아이들을 집에서 먼 곳에 데려가거나 자신들이 지속적으로 감시하여 억류하는 수준의 유괴. 가출한 아이들이나 가정의 보호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주된 피해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