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드 벤구리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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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이스라엘 국장.png 이스라엘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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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라엘의 경우 임기가 중간에 단절되었다가 다시 집권해도 처음 집권했을 당시의 댓수를 유지한다.

1대

2대

(1)대

3대

(대행)

4대

5대

6대

다비드 벤구리온

모세 샤렛

다비드 벤구리온

레비 에슈콜

이갈 알론

골다 메이어

이츠하크 라빈

메나헴 베긴

7대

8대

(7)대

(5)대

(8)대

9대

10대

11대

이츠하크 샤미르

시몬 페레스

이츠하크 샤미르

이츠하크 라빈

시몬 페레스

베냐민 네타냐후

에후드 바라크

아리엘 샤론

12대

(9)대

-

-

-

-

-

-

에후드 올메르트

베냐민 네타냐후

다비드 벤구리온
דוד בן-גוריון‏‎

파일:David_Ben_Gurion.jpg

이름

한국어: 다비드 벤구리온
히브리어: דוד בן-גוריון
아랍어: دافيد بن غوريون
영어: David Ben-Gurion
중국어: 戴维 本 古里安

생몰년도

1886년 10월 16일 ~ 1973년 12월 1일

출생지

러시아 제국 폴란드 입헌왕국 플론스크
(現 폴란드 마조프셰주 플론스크)

사망지

이스라엘 텔아비브 구 라마트간

국적

폴란드 입헌왕국러시아 제국이스라엘

학력

이스탄불 대학교
바르샤바 대학교

직업

정치인

정당

마파이당 → 라피당

배우자

파울라 벤구리온

자녀

3

서명

파일:1280px-David_Ben-Gurion_Signature.svg.png

[ 이스라엘 수반 내역 ]

이스라엘 제 1대 총리&국방부장관

임기

1948년 5월 14일 ~ 1954년 1월 26일

후임

모셰 샤레트(총리), 핀하스 라본(장관)

이스라엘 제 3대 총리

임기

1955년 11월 3일 ~ 1963년 6월 26일

전임

모셰 샤레트

후임

레비 에슈콜

이스라엘 제 3대 국방부장관

임기

1955년 2월 21일 ~ 1963년 6월 26일

전임

핀하스 라본

후임

레비 에슈콜

이스라엘 제 3대 교육부장관

임기

1951년 5월 19일 ~ 1951년 10월 8일

전임

다비드 레메즈

후임

벤시온 디누어

이스라엘 제 4대 교통안전부 장관

임기

1952년 8월 14일 ~ 1952년 12월 24일

전임

다비스 즈비 핀카스

후임

요세프 세린

이스라엘 제 5대 법무부 장관

임기

1956년 2월 13일 ~ 1956년 2월 28일

전임

핀치스 로젠

후임

핀치스 로젠


1. 소개2. 생애3. 논란
3.1. 아랍인들에 대한 차별3.2. 전쟁 범죄 논란

1. 소개[편집]

현대 이스라엘국부(國父)중 한 명.

이스라엘의 정치가이자 초대 총리, 시온주의 운동가. 1948년 5월 17일 ~ 1954년 1월 26일, 1955년 11월 3일 ~ 1963년 6월 26일에 걸쳐 총리를 역임했다.

하임 바이츠만과 함께 이스라엘의 독립, 건국을 주도한 국부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바이츠만이 외교 무대에서 활약했다면, 벤구리온은 팔레스타인 현지에서 유태인들의 단합을 이끄는 역할을 했다. 건국 이전에는 바이츠만이, 건국 이후에는 벤구리온의 역할이 더욱 큰 비중을 차지했던 셈.[1]

2. 생애[편집]

1886년, 러시아 제국 치하에 있던 폴란드의 프원스크에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다비드 그루엔.

근대 시오니즘의 창시자 테오도르 헤르츨의 영향을 받았다. 1906년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여 팔레스타인 노동당의 활동분자가 되었으며, 그 기관지의 편집장이 되었다. 1912년, 법학을 공부하기 위해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유학했고, 거기서 성씨를 히브리어 성씨인 '벤 구리온'으로 바꾼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시점에는 팔레스타인에 있었으나, 연합군에 가담하였다는 이유로 국외로 추방되어 미국으로 건너가 시오니스트인 이크하크 벤츠비와 함께 유대 군단을 결성하여 영국군과 함께 팔레스타인 전쟁에 종군하였다. 전후에 팔레스타인에 머물면서 노동총연합을 조직하고 스스로 서기장이 되었다. 1933년 국제 시오니즘의 최고 감독기관인 시오니즘 집행위원회(Zionist Executive)에 들어가 2년 후에는 위원장이 되었다.

파일:external/amyisraelfoundation.org/BenGurion-1948-Herzl.jpg
1948년 이스라엘 건국을 선포하는 벤 구리온. 뒤쪽에 걸려있는 그림은 19세기 말 시오니즘의 주창자 테오도르 헤르츨의 초상화.

1948년 5월, 이스라엘 공화국 성립과 함께 총리가 되어 1953년까지 그 지위에 있었으며, 1955∼1963년 다시 총리가 되었다. 저서로 이츠하크 벤츠비와 함께 쓴 《투쟁》(전 5권, 1949)이 있다. 그의 이름은 현재 벤 구리온 국제공항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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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중동전쟁 당시 남부 전선을 시찰중인 벤 구리온 총리. 출처 바로 왼쪽에 서 있는 사람이 훗날 참모총장과 이스라엘 총리를 역임하는 이츠하크 라빈이다. 당시 직위는 중대장.

3. 논란[편집]

3.1. 아랍인들에 대한 차별[편집]

이스라엘 건국의 아버지로 여전히 칭송받지만, 이스라엘 출신 아랍인과 세파르딤을 차별했던 것으로 비판을 받는다. 가령 이스라엘 아랍인들을 가리켜 '제5열'[2] 이라 불렀다든지, "모로코리비아, 예멘에서 온 유대인들은 아랍인의 문화를 그대로 갖고 있다. 나는 아랍 문화를 싫어한다. 그들도 탐탁치 않다"고 말하는 등 공공연히 차별했다.

3.2. 전쟁 범죄 논란[편집]

이스라엘 독립 전쟁 당시 벤 구리온이 팔레스타인 민간인에 대한 인종청소를 지시하였는지의 여부는 아직도 논란의 대상이다. 벤 구리온이 인종 청소를 지시했다는 심증은 있고 실제로 아랍인들은 그렇게 보지만, 정작 물증이 없는 상황. 하지만 당시 그의 비서였던 시몬 페레스 전 이스라엘 대통령은 이를 부인하고 있다.

[1] 1949년 성립된 이스라엘의 내각제 초대 정부에서도 바이츠만은 상징적 국가원수인 대통령을 맡은 반면, 벤구리온은 실질적 정부 지도자인 총리로 선출되어 장기간 재임했다.[2] '첩자' 또는 '스파이'를 가리키는 표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