넬슨 만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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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평화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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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

1902년

1903년

1904년

1905년

장 앙리 뒤낭
프레데리크 파시

엘리 뒤코묑
샤를 알베르 고바

윌리엄 크리머

국제법학회

베르타 폰 주트너

1906년

1907년

1908년

1909년

1910년

시어도어 루스벨트

에르네스토 모네타
루이 르노

클라스 아르놀드손
프레드리크 바예르

데스투르넬 드 콩스탕
오귀스트 베르나르트

국제평화국

1911년

1912년

1913년

1914년

1915년

토비아스 아서르
알프레트 프리트

일라이휴 루트

앙리 라퐁텐

수상자 없음

1916년

1917년

1918년

1919년

1920년

수상자 없음

국제적십자사

수상자 없음

우드로 윌슨

레옹 부르주아

1921년

1922년

1923년

1924년

1925년

칼 브란팅
크리스티안 랑에

프리드쇼프 난센

수상자 없음

오스틴 체임벌린
찰스 도스

1926년

1927년

1928년

1929년

1930년

아리스티드 브리앙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페르디낭 뷔송
루트비히 크비데

수상자 없음

프랭크 켈로그

나탄 쇠데르블룸

1931년

1932년

1933년

1934년

1935년

제인 애덤스
니컬러스 머리 버틀러

수상자 없음

노먼 에인절

아서 헨더슨

카를 폰 오시에츠키

1936년

1937년

1938년

1939년

1940년

카를로스 사베드라 라마스

로버트 개스코인 세실

난센국제난민 사무국

수상자 없음

1941년

1942년

1943년

1944년

1945년

수상자 없음

국제적십자사

코델 헐

1946년

1947년

1948년

1949년

1950년

에밀리 그린 볼치
존 모트

미국 퀘이커 봉사위원회
영국 퀘이커 봉사협회

수상자 없음

보이드 오어

랠프 번치

1951년

1952년

1953년

1954년

1955년

레옹 주오

알베르트 슈바이처

조지 C. 마셜

국제연합 난민고등판무관사무소

수상자 없음

1956년

1957년

1958년

1959년

1960년

수상자 없음

레스터 B. 피어슨

도미니크 조르주 피르

필립 노엘 베이커

앨버트 루툴리

1961년

1962년

1963년

1964년

1965년

다그 함마르셸드

라이너스 폴링

국제적십자사

마틴 루터 킹

국제연합아동기금

1966년

1967년

1968년

1969년

1970년

수상자 없음

르네 카생

국제 노동 기구

노먼 볼로그

1971년

1972년

1973년

1974년

1975년

빌리 브란트

수상자 없음

헨리 키신저
레득토 (수상 거부)

숀 맥브라이드
사토 에이사쿠

안드레이 사하로프

1976년

1977년

1978년

1979년

1980년

베티 윌리엄스
마레드 코리건

국제앰네스티

안와르 사다트
메나헴 베긴

마더 테레사

아돌포 페레스 에스키벨

1981년

1982년

1983년

1984년

1985년

국제연합 난민고등판무관실

알바 뮈르달
알폰소 가르시아

레흐 바웬사

데즈먼드 투투

핵전쟁방지국제의사회

1986년

1987년

1988년

1989년

1990년

엘리 비젤

오스카 아리아스

유엔 평화 유지군

14대 달라이 라마

미하일 고르바초프

1991년

1992년

1993년

1994년

1995년

아웅산수지

리고베르타 멘추

넬슨 만델라
프레데리크 데클레르크

이츠하크 라빈
시몬 페레스
야세르 아라파트

조지프 로트블랫
퍼그워시 회의

1996년

1997년

1998년

1999년

2000년

카를루스 벨루
조제 하무스 오르타

지뢰금지국제운동
조디 윌리엄스

존 흄
데이비드 트림블

국경 없는 의사회

김대중

2001년

2002년

2003년

2004년

2005년

국제연합
코피 아난

지미 카터

시린 에바디

왕가리 마타이

국제원자력기구
무함마드 엘바라데이

2006년

2007년

2008년

2009년

2010년

그라민 은행
무함마드 유누스

앨 고어
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간 패널

마르티 아흐티사리

버락 오바마

류샤오보

2011년

2012년

2013년

2014년

2015년

엘런 존슨 설리프
리마 보위
타우왁쿨 카르만

유럽 연합

화학무기 금지기구

말랄라 유사프자이
카일라시 사티아르티

튀니지 국민4자대화기구

2016년

2017년

2018년

2019년

2020년

후안 마누엘 산토스

핵무기 폐기 국제운동

드니 무퀘게
나디아 무라드

Congressional Gold Medal
의회 명예 황금 훈장

[ 펼치기 · 접기 ]

1776년

1777년

1779년

1781년

조지 워싱턴

소장 호레이쇼 게이츠

소장 앤서니 웨인

사령관 헨리 리 3세

준장 대니얼 모건

1781년

1787년

1800년

1805년

1813년

소장 너새니얼 그린

존 폴 존스

대령 토마스 트럭스턴

준장 에드워드 프레블

대령 아이작 헐
대령 스티븐 디케이터
대령 제이콥 존스

1813년

1814년

대령 윌리엄 베인브리지

대령 올리버 해저드 페리
대령 제시 엘리엇

대위 윌리엄 워드 버로우즈 2세
대위 에드워드 맥콜

대령 제임스 로렌스

대령 토머스 맥도너
대령 로버트 헨리
대위 스티븐 카신

1814년

1814년, 1848년

1814년

대령 루이스 워링턴

대령 존스톤 블레이클리

소장 제이컵 브라운

소장 윈필드 스콧

소장 피터 부엘 포터
준장 엘리저 윌락 리플리
대령 제임스 밀러

1814년

1815년

1816년

소장 에드먼드 P. 게인즈

소장 알렉산더 마콤

소장 앤드루 잭슨

대령 찰스 스튜어트

대령 제임스 비들

1818년

1835년

1846, 1847년, 1848년

1847년

1854년

소장 윌리엄 해리슨
주지사 아이작 셸비

대령 조지 크로간

소장 재커리 테일러

소머스 호의 장교 및 승무원 구출

중령 던컨 잉그함

1858년

1863년

1864년

1866년

1867년

프레데릭 로즈

소장 율리시스 S. 그랜트

코닐리어스 밴더빌트

로버트 크레이튼
에드윈 J. 로우
조지 C. 스투퍼

사이러스 웨스트 필드

1867년

1871년

1873년

1874년, 1904년

1883년

조지 피바디

조지 F. 로빈슨

대령 자레드 크랜달 그 외

존 혼 주니어

존 폭스 슬레이터

1888년

1890년

1900년

1902년

1909년

조셉 프란시스

수석 엔지니어 조지 W. 멜빌 그 외

중위 프랭크 H. 뉴콤

중위 데이빗 H. 자비스
소위 엘스워스 P. 버트홀프
사무엘 J. 콜 박사

라이트 형제

1912년

1914년

1915년

1928년

대령 아서 로스트론

폴 H. 크라이봄 그 외

로물로 세바스티안 나온
에두아르도 수아레즈 무히카

찰스 린드버그

로알 아문센
움베르토 노빌

1928년

1929년

1930년

1936년

토머스 에디슨

최초로 성공한 대서양 횡단 비행사들

소령 월터 리드

준장 리처드 에벌린 버드

링컨 엘스워스

1936년

1938년

1939년

1940년

조지 코한

리처드 올드 리치 부인
안나 불리니

하워드 휴즈

목사 프란시스 퀸

윌리엄 시노트

1942년

1945년

1946년

롤랜드 바우처

1939-1941년 미국 남극 탐험대 멤버들

미합중국 육군 원수 조지 C. 마셜
미합중국 해군 원수 어니스트 킹

미합중국 육군 원수 존 조지프 퍼싱

준장 빌리 미첼

1949년

1954년

1955년

1956년

1958년

앨번 W. 바클리

어빙 벌린

조너스 소크 박사

남북 전쟁의 참전 용사들

준장 하이먼 리코버

1959년

1960년

1961년

1962년

로버트 고다드

로버트 프로스트

토마스 안소니 둘리 3세

밥 호프

샘 레이번

1962년

1968년

1969년

1973년

1977년

미합중국 육군 원수 더글러스 맥아더

월트 디즈니

윈스턴 처칠

로베르토 클레멘테

매리언 앤더슨

1978년

1979년

중장 아이라 C. 이커

로버트 F. 케네디

존 웨인

벤 아브러조
맥시 앤더슨
래리 뉴먼

휴버트 호레이쇼 험프리

1979년

1980년

1982년

미국 적십자

케네스 테일러

1980 미국 하계 올림픽

베아트릭스 여왕

대장 하이먼 리코버

1982년

1983년

프레드 워링

조 루이스

루이스 라머

레오 라이언

대니 토마스

1984년

1985년

해리 S. 트루먼

레이디 버드 존슨

엘리 비젤

로이 윌킨스

조지 거슈윈
아이라 거슈윈

1986년

1987년

1988년

나탄 샤란스키
에비탈 샤란스키

해리 차핀

에런 코플런드

메리 래스커

제시 오언스

1988년

1990년

1991년

앤드루 와이어스

로렌스 록펠러

대장 매튜 B. 리지웨이

대장 노먼 슈워츠코프

대장 콜린 파월

1994년

1996년

1997년

랍비 메나헴 멘델 쉬니어슨

루스 그레이엄
빌리 그레이엄

프랭크 시나트라

마더 테레사

바르톨로메오스 1세

1998년

1999년

넬슨 만델라

리틀록 9인

제럴드 포드
베티 포드

로자 파크스

테오도르 헤스버그

2000년

존 오코너

찰스 먼로 슐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로널드 레이건
낸시 레이건

나바호 족 코드 토커

2002년

2003년

대장 휴 쉘튼

토니 블레어

재키 로빈슨

도로시 하이트 박사

조셉 디레인 [br[ 해리 & 엘리자 브릭스
레비 피어슨

2004년

2006년

마틴 루터 킹
코레타 스콧 킹

터스키기 에어맨

14대 달라이 라마

바이런 넬슨

노먼 볼로그 박사

2007년

2008년

마이클 데바키 박사

아웅산수지

콘스탄티노 브루미디

에드워드 브룩

아메리카 원주민 코드 토커

2009년

2010년

여성 공군 서비스 조종사

닐 암스트롱
버즈 올드린
존 글렌

아널드 파머

무함마드 유누스

100연대 보병 대대
442 연대 전투단
군사 정보국

2011년

2012년

2013년

몬트포드 포인트 해병대

2001년 9월 11일 미국에 대한 테러 공격으로 사망한 남녀들

라울 발렌베리

애디 매 콜린스
데니스 맥네어
캐롤 로버트슨
신시아 웨슬리

제1 특수임무단

2014년

둘리틀 특공대 멤버들

미국의 공군 에이스들

제2차 세계 대전 민간 항공 초계 부대 멤버들

시몬 페레스

모뉴먼츠 맨

2014년

2015년

2016년

제65 보병연대

잭 니클라우스

셀마 몽고메리 행진

제2차 세계 대전 필리핀인 참전 용사들

OSS

2017년

밥 돌

1993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
Time Person of the Year 1993

파일:attachment/1993time.jpg

빌 클린턴
1992

피스메이커
평화이식자[1]
1993

요한 바오로 2세
1994

파일:external/clekzo.com/Mandela.jpg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2]

본명

Nelson Rolihlahla Mandela
넬슨 롤리랄라[3][4] 만델라

출생

1918년 7월 18일, 남아프리카 연방 케이프 주 음베조

사망

2013년 12월 5일 (향년 만 95년 140일), 남아프리카 공화국 하우텡 주 요하네스버그

국적

남아프리카 공화국 파일:남아프리카 공화국 국기.png

직업

정치인, 변호사

배우자

에블린 은토코 메이즈 (1944년 결혼,1957년 이혼)
위니 마디키젤라 (1958년 결혼, 1996년 이혼)
그라사 마셸 (1998년 결혼)

종교

개신교 (감리회)

신체

187cm

정당

아프리카 민족회의

대통령
임기

1994년 5월 10일 ~ 1999년 6월 14일

학력

포트 헤어 대학교
런던 대학교 시스템 인터내셔널 프로그램
남아프리카 대학교
비츠바터스란트 대학교

서명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Nelson_Mandela_Signature.svg.png


1. 소개2. 생애
2.1. 대통령 만델라
3. 사망4. 여담5. 어록6. 대중매체

1. 소개[편집]

남아프리카 공화국국부(國父).
현대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 중 1인이자 평화의 화신[5]

남아프리카 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자, 보통선거 실시 이후 선출된 최초의 대통령이기도 하다. 오늘날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인종을 가리지 않고 존경받는 인물이며, 아프리카 대륙의 수많은 흑인들은 그를 영웅으로 높이 기리고 있다. 현대사에서 가장 위대한 위인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애칭이자 존칭으로 '마디바(Madiba-말 그대로 '어른')'라고 많이 불린다. '아버지'를 뜻하는 타타(Tata)로도 가끔 불리며, 혹은 '훌륭하다', '위대하다'는 뜻을 지닌 '쿨루(Khulu)'로 불리기도 한다.

2. 생애[편집]

파일:attachment/mandela-mulroney.jpg

1990년대 대통령 재임 시절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Nelson_Mandela-2008_%28edit%29.jpg

2008년의 모습


남아프리카연방 트란스케이 움타타에서 족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로부터 '나뭇가지를 잡아당긴다(말썽꾸러기, 장난꾸러기 라는 뜻이다. 나쁘게보면 문제아)' 는 뜻의 롤리랄라(Rolihlahla)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받았다. 넬슨(Nelson)은 초등학생 때 교사가 지어준 영국식 이름인데 이후 넬슨 롤리랄라 만델라는 그의 정식 이름이 되었다. 16세 때 성인식을 치른 뒤 얻은 이름 달리붕가(Dalibhunga)는 '새로운 권력자' 를 뜻했다.

학교에 가게 된 만델라는 학교에서 배우게 되는 내용들(백인 이야기만 있으며 흑인들은 노예강도로 나오는 얘기)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학교에서 공부를 잘했으며, 축구와 복싱, 장거리 달리기 등의 운동도 좋아했다고 한다. 자신이 어렸을 때 사망한 아버지 대신 그를 돌봐주던 후견인이자 족장이였던 종긴타바 달린드예보(Jongintaba Dalindyebo)에게서 아프리카의 역사와 진실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듣게 된 후 흑인들을 위해 일하는 꿈을 갖게 되었다.

어렸을 땐 막연히 후견인인 달린드예보가 추장으로서 재판을 집행[6]하며 진실을 밝히는 것을 보고 감명을 받아서 부족을 위해 일하는 법 상담자가 되기 원했으나, 요하네스버그로 도망치고 나서는 넓은 세계를 보고 감명 받으면서 본격적인 변호사의 꿈을 꾸게 된다.

젊은 시절에는 그도 파란만장한 인생을 보냈으며 특히 강제 결혼을 시키려는 후견인을 피해 친구 올리버 탐보(만델라의 동료이며 남아공 정치인 겸 민주화 운동가)와 함께 도망가 위장취업을 시도하기도 했다. 정확한 내막은 만델라가 법대에서 주는 급식에 대해 불만 급식소는 다 똑같구만[7] 을 가지고 투쟁을 벌였다가 정학을 당하게 되었는데 이를 전해 들은 후견인 달린드예보가 너무 과격하다고 생각하여 투쟁을 중단하고 학업에 정진하라고 했지만 만델라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래서 강제 결혼을 시키게 된 것. 강제 결혼에 만델라는 도망갔지만 끝내 사람을 보내 수소문한 달린드예보에 의해 그들의 행방도 알려지게 되었고 탐보는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만델라는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공부를 마치기로 결심한다.

파일:external/i.telegraph.co.uk/nelson-mandela-you_2466638c.jpg
복귀 후엔 훗날 남아공 민주화 운동을 함께 이끌게 될 동지 월터 시술루(Walter Sisulu)를 만나게 된다. 여기에 절친 올리버 탐보까지 재회, 합세하여 셋이서 아프리카 민족회의(ANC)를 일으켜 나가게 된다.[8] 아프리카 민족회의(혹은 아프리카 국민회의/ANC; African National Congress)의 지도자로서 남아공 옛 백인 정권의 악명 높았던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9] 맞선 투쟁활동을 벌이게 된 만델라와 일행들 ANC는 처음엔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주의를 받아들여 평화적 투쟁방법을 모색하였으나 현실은 시궁창. 남아공 정권이 친영국파인 연합당에서 반영국파인 국민당으로 옮겨졌는데, 문제는 이들이 연합당보다 몇배는 더 하면 더 했지 덜 하지 않은 백인 우월주의에 꽉찬 놈들이라 원래 있던 암묵적인 사회적인 차별까지 법으로 확실히 새기는건 물론이고 거주지 이전법안까지 통과시키며 아파르트헤이트시대를 정식적으로 열고, 게리맨더링의 일환으로 컬러드의 투표권을 박탈하며 일당체제를 구축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프리 시위대에 무차별 총격을 가하는 경찰을 보고 만델라는 무장투쟁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국민당과 싸우기 위한 군대를 만들기 위한 책임자가 된 만델라는 이 조직의 이름을 '민족의 창(Unmkhonto we Sizwe)'이라고 한다. 줄인 이름은 'MK'. 아프리카 민족회의에는 백인이 참가할 수 없었지만, MK는 진보계열의 백인들[10]까지 모두 받아들였다. 이후 남아공 정부를 상대로 사보타주와 테러를 행하다 결국 당국에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무려 27년 동안 투옥되었다.[11] 총 27년의 기간 중 로벤 섬 감옥[12]에서 18년을 생활하였고, 이후 일정 기간은 국제 여론에 압박을 느낀 남아공 정부에 의해 감옥이 아닌 교도관의 집에서 보내게 된다.[13]

파일:external/static.guim.co.uk/Nelson-Mandela-and-wife-W-010.jpg
그리고 드디어 1990년, 국내외 여론의 압박을 못이긴 클레르크 대통령은 만델라의 석방과 ANC의 합법화를 발표하여 그를 석방한다. 이후에 당시 남아공 정부와 국민당, 민주당, 인도계 정당, 컬러드계 정당들과 협상을 벌여서 1991년에 아파르트헤이트를 철폐시키고, 1993년에는 흑인들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법안을 통과시키게 만듬으로써 1993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고, 협상 후반기엔 극우정당인 보수당[14]반투스탄 내 기득권층이 협상에 반발하고 잉카타 자유당은 협상에 나섰다가 파기하다를 반복하고 ANC와 갈등을 벌여 한때 남아공에 내전으로 갈것이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지만, 반투스탄내 기득권층은 반투스탄 내 흑인들의 반발에 결국 굴복했고, 보수당은 자멸함에 따라 대다수 흑인들에게 첫 투표권이 주어진 1994년 총선이 치러졌고, 이 선거에서 ANC가 과반을 훨씬 넘는 의석을 확보함에 따라(252/400 62.7%) 국민당, 잉카타 자유당과 거국정부를 구성함으로써 잉카타 자유당과의 분쟁도 진정되어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2.1. 대통령 만델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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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델라가 대통령이 된 후, 정부에 있던 모든 백인들은 짐을 싸기 시작했다.지들도 잘못한 걸 아는거지 그런데 웬걸? 만델라는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구성해 과거의 인권 침해 범죄에 대한 진실을 낱낱이 밝혔지만 그들을 사면했다. "용서하되 잊진 않는다."란 슬로건 아래 단 한 명도 과거사로 처벌하지 않았고 오히려 당시 남아공의 위기를 함께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15] 또 경제적으로도 이 한 수 덕분에 남아공 백인들이 남게 되어 그들의 경제력을 잃지 않았다. 그래서 만델라가 사망하였을 때 백인들이 대거 떠나 남아공 경제에 타격을 주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있었지만 큰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은 만델라의 수감생활에 가장 큰 역할을 한 보타 전 대통령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는 것이다. 피터르 빌럼 보타(1916년 ~ 2006년)는 본래 보어인으로, 백인이다. 1948년 남아프리카 국민당에 입당 후 국회의원, 총리 등 승진을 계속하다가 대통령이 된 양반이다. 이 사람의 재임기간(1984년~ 1989년)에 남아공은 막장이었고, 이 사람이 만델라에게 저지른 일도 막장이다. 1984년 만델라는 코에체 장관에게 보타 대통령과의 협상을 요청했다. 4년이라는 긴 시간을 기다려 온 만델라에게 보타는 협상 결렬을 선언했다. 되려 보타 대통령은 만델라에게 "폭동을 선동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석방을 허락해 주겠다."라는 제안을 했다. 당연히 국제사회에서 남아공이 받는 비난 여론을 무마할 계획에 그런 말을 꺼냈지만, 만델라가 거절하는 바람에 보타와 만델라 두 사람 간에 갈등이 오갔다. 퇴임 후인 1998년 만델라가 재임중이었던 남아공 정부는 아파르트헤이트와 관련한 진실을 밝히기 위해 보타를 청문회에 출석하라고 통보했는데 보타가 거절을 해버렸다. 이후 "아파르트헤이트는 정당하다."는 소리를 지껄이다가 2006년 노환으로 죽었다.

훗날 만델라는 오프라 윈프리와의 인터뷰에서 "어떻게 감옥 생활을 하면서 복수심이 아닌 용서의 마음을 가질 수 있었는가?"라는 질문에 "만약 내가 감옥에 있지 않았다면 인생의 가장 어려운 과제, 즉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일을 달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감옥에 앉아서 생각할 기회는 바깥 세상에서 가질 수 없는 기회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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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1995년 남아공에서 열린 세계 럭비 선수권 일화도 유명한데 당시 전형적인 백인 스포츠[16]로 흑인들은 오히려 다른 나라를 응원했을 정도로 흑백 갈등의 상징이었던 럭비를 만델라는 흑백이 하나되는 장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만델라는 1명을 제외하고 전원 백인으로 구성된 럭비 대표팀을 수시로 찾아가 설득하고 격려하며 선수들의 마음을 열었다. 대회 직전에는 대표팀이 흑인 어린이들에게 럭비를 직접 가르쳐주는 행사까지 마련했다. 결승전에서 만델라는 주장 등번호 6번이 적힌 유니폼을 입고 나타났다. 그리고 기적처럼 남아공 럭비 대표팀은 뉴질랜드 대표팀을 꺾고 우승했고 그 날은 남아공 전체의 축제일이 되었다. 우승 트로피를 백인 주장에게 전달한 것 역시 만델라였다.

다만 이처럼 흑백간의 갈등을 아우르고 남아공의 분열을 막은 성과를 낸 만델라였지만 그의 집권 시기에 남아공 경제 문제[17]를 효과적으로 해결하지 못했다는 비판은 있다. 흑인 경제력 강화(BEE) 프로그램이라 해서 수탈당하던 흑인들에게 경제적 주도권을 줌으로써 빈부 격차를 줄이기 위한 제도를 시행했는데 이 계획으로 일부 흑인들만 혜택을 입었으며, 빈부격차는 더 심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존재하는데 1980년대 경제 제재 당시부터 경제는 이미 어려워지고 있었다. 흑인과 백인이 공존하는 사회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서는 흑인에게도 부의 재분배와 공평한 사회진출의 기회가 주어져야 했다. 1960년대부터 인종 차별이 약화되는 추세에서도 1990년대까지 흑백분리 정책을 유지한 이전 정부들의 바보 같은 짓이 화를 자초한 셈이라는 것이다.[18] 또 서구의 경제적 자원을 잃지 않은 것도 그의 공로 중 하나로 꼽힌다.

정치적인 수완으로 봤을때는 의회 구성문제로 당시 지리해져가던 협상을 성공적으로 끝맺었으며, 당시 아파르트헤이트 철폐에 반대한 극우 백인들과 반투스탄 내 기득권층의 반발, 잉타카 자유당과의 또다른 분쟁으로 남아공이 거의 내전 상태까지 갈 뻔 했던 것을 진화시켜 남아공을 안정시켰다. 허나 후에 그의 후배들이 일으킨 부정부패나 추문이 일어나는걸 적극적으로 제지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대학살이 나지 않은건만 해도 다행으로 여기는 백인들도 많으며 아파르트헤이트 시절에 벌어졌던 만행에 대해서도 관대하게 처분했고 재산몰수같은 조치도 취하지 않았기에 넬슨 만델라가 백인들한테도 엄청나게 존경받는다.

1999년 옛 동지 고반 음베키의 아들인 타보 음베키에게 대통령 자리를 넘기고 퇴임했다.[19][20] 존경받다 권력자가 된 후 권력의 달콤함에 취해 독재자의 길로 접어든 수많은 사례에서 볼 때 단임으로 깔끔하게 권력의 자리에서 물러난 것도 훌륭한 업적이라면 업적.

국내에는 1995년과 2001년 두 번 방한했으며 첫 방한 시에는 서울대에서 명예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21] 두 번째 방한 때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공동 기자회견을 가지기도 했다. 이후 김 대통령 사망 당시 만델라 재단에서 애도의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두 번째 방한 당시 모 방송사에서 만델라 부부의 투쟁기를 다룬 영화를 틀어주었는데 그때는 이혼한 지 얼마 안 된 때였다.방송국에 만델라 안티가 있다 여담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97년 대선에 출마하자 자신의 딸을 통해 27년 교도소 수감 생활을 함께 한 낡은 시계를 선물하였다. 이에 김대중 전 대통령은 유신독재 탄압을 받으며 20년간 사용한 낡은 가방을 선물하였다. 또한 만델라의 자서전을 번역한 것도 김대중 전 대통령. [22]

3. 사망[편집]

2009년 쯤부터 병세가 나타나다 2013년 12월 5일 요하네스버그에서 향년 9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 고난했던 행보에도 불구하고 장수했다. BBC/C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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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생전 마지막 모습

만델라가 타계한 후 전세계에선 추모의 물결이 일었다.

구글은 메인 페이지에 만델라를 추모하며 그의 인생을 돌아보는 만델라 재단의 페이지로 링크를 걸어놨다. 한국어로도 볼 수 있다. 그리고 2014년 7월 18일 넬슨 만델라 두들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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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홈페이지 아카이브

Amazing human being. Champion of freedom and human dignity. He set an example for all of the world. RIP Nelson Mandela. We miss you already.

— Tim Cook (@tim_cook) 2013년 12월 6일


애플의 CEO 팀 쿡은 "위인. 자유와 인간 존엄성의 대변자. 그는 세계 모든 이들의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평안히 쉬소서, 넬슨 만델라. 우리는 벌써 당신이 그립습니다" 라는 트윗을 올렸고 애플 홈페이지스티브 잡스의 사망 직후 스티브 잡스를 추모했던 것처럼 그의 사진, 이름, 출생년도 및 사망년도를 띄워 그를 추모하였다.

12월 10일 열린 추모식에는 미국흑인 대통령버락 오바마,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나루히토 일본 황태자[23] 등 세계 91개국 정상급 인사, 왕족들이 참석했으며 대한민국에서는 정홍원 국무총리가 대표로 참석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 서거에 유가족과 남아프리카 공화국 국민들에게 심심한 애도의 뜻을 전합니다. 고인은 오랜 세월 남아공을 분열시킨 인종 차별정책을 평화적으로 종식시킨 위대한 정치가였습니다. 그 위대한 뜻이 세계평화의 기틀이 되고, 남아공 국민은 물론 전 세계인의 가슴에 오래 기억될 것입니다. 저와 한국 국민들도 그 숭고한 뜻을 기리면서 만델라 전 대통령의 영면을 기원합니다."라는 조의를 표했다. 출처

반기문 UN 사무총장은 "남아공은 영웅이자 아버지를 잃었고, 세계는 사랑하는 친구이자 스승을 잃었다."며 애도했고, 오바마 대통령은 "만델라의 투쟁은 당신의 투쟁이었고, 그의 승리는 당신의 승리였다"면서 "만델라는 한 국가를 정의의 길로 이끌었으며,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 역사의 거인"이라고 그의 삶을 평가했다.

'토크쇼의 여왕'인 오프라 윈프리, 락그룹 U2의 보컬 보노와 미국의 흑인 인권 운동가인 제시 잭슨 목사도 참가했으며 추모식이 열린 요하네스 FNB 경기장[24]에는 10만여명의 인파가 몰려 만델라를 추모했다.

헌데 이 추도식에서 수화 통역을 담당하던 한 사기꾼이 아무 의미 없는 손동작을 한 걸로 밝혀졌다. 정신분열을 앓고 있던 자신이 갑자기 어쩔 줄 몰라했다는 듯. AP 인터뷰, CNN, BBC, ITN 남아공의 국가기간방송인 SABC에서 이를 알아챘는지 추도식을 중계하던 도중 자체 수화통역사를 급히 투하해 화면에 띄웠다. 직접 현장으로 간 게 아니지만 당사자와의 인터뷰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장례식은 12월 15일 국장으로 열렸다. 'Hamba Kahle, Madiba!!'(함바 칼레, 마디바!/잘 가요, 존경받는 어른!)

남아공 정부는 행정수도 프리토리아의 정부청사 앞에 만델라의 동상을 건립하였다. 그런데 황당한 해프닝이 벌어졌다. 동상을 건립한 후 사람들이 자세히 살펴보니 동상의 귀 안에 작은 토끼(...) 동상이 만들어져 있던 것. 동상을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동상 제작 시간이 촉박해 어려움을 겪은데다 동상에 서명도 남기지 못하게 한 점에 불만을 가져서 이런 행위를 했다고. (아프리칸스어로 토끼는 '서두르다'는 의미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하필 장난을 해도 만델라 동상에 하냐'는 여론의 비난을 받고 토끼를 제거하기로 했다.

4. 여담[편집]

오랫동안 옥바라지를 했던 아내 위니와 1996년 황혼 이혼을 해서 말이 많았는데 지위를 이용해 국정을 농단하는 등 전횡을 일삼고 외도까지 했다는게 사유였다고. 민족회의 시절에도 위니가 남편과 달리 추종자들에게 배신자들에 대한 보복행위를 허락하고 특히 스파이로 의심되는 흑인 청년을 살인하도록 사주했다는 의혹이 있는 등 폭력적 행위로 인해 평화적 해결책을 강구하던 만델라와 심한 의견 대립을 보였다고 한다.[25] 참고로 만델라는 총 3번 결혼했다. 위니는 2번째 아내였고 저 때 이혼하고 2년 뒤 모잠비크 대통령 사모라 마셸(1933-1986)의 아내였던 그라사 마셸 여사와 삼혼했다. 그때 연세가 무려 만으로 80세.

남아공 월드컵 개막식 당일에 증손녀가 안타깝게도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일이 벌어져 개막식에 불참하였다. 그런데 만델라의 조카가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만델라가 FIFA의 지속적인 경기장 참석 요청을 받아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한다. 조카의 표현을 빌리자면 협박 수준이었다고 한다. 때문에 매일 주치의로부터 만델라의 컨디션을 보고받아야 했고 가족들은 혹여 의사가 경기장 참석에 문제가 없다는 진단을 내릴까봐 노심초사했다고 한다. 사실 FIFA는 넬슨 만델라라는 이름이 가지는 엄청난 상징성을 팔아먹기 위해 바로 얼마 전 증손녀를 잃고 슬픔에 잠긴 91세 노인을 축구장으로 끌고가려 했던 것이다. 이후 폐막식에도 불참하리란 예상을 깨고 만델라는 요하네스버그 사커시티 경기장에서 열린 월드컵 폐막식에 참석하였다. FIFA의 더러운 속내와는 별개로 관중들은 비록 10분이 채 못 되는 짧은 시간이긴 했지만 부부젤라를 불면서 만델라를 환영하였다.

저서로 뉴욕 타임스가 뽑은 20세기 최고의 책에 선정된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 등이 있다. 국내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한국어번역해 1995년 처음 출판했고 2012년에 개정판이 나왔다.

에이즈 퇴치 운동에도 앞장섰다. 당장 자신부터 전처 소생인 큰 아들을 에이즈로 잃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큰 아들은 2005년도에 사망했다.

미국 공화당을 지지하는 보수파에게는 피델 카스트로와 친하고 이라크 전쟁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공산당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

2016년 수능완성 영어책에 일화가 실리기도 했다.

1996년 헌법 2조 9항의 인권선언을 수정하면서 인종, 성별 등을 비롯해 성적 지향에 따른 차별을 해선 안된다는 항목을 넣기도 했다. 이로 인해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헌법에서 성적 지향에 대한 인권을 명시한 최초의 국가가 되었고, 이는 결국 2006년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동성결혼을 합법화한 나라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5. 어록[편집]

"이 땅의 수많은 사람들은 나보다 먼저 자유를 얻기 위한 대가를 치러 왔으며, 앞으로도 많은 이들이 그러할 것이다."
- 1962년 11월, 노동자들의 파업을 유도한 혐의로 받은 재판 중 발언.

"죽음은 피할 수 없다. 국민과 나라를 위해 마땅히 해야 한다고 스스로 생각한 일들을 끝마친 사람이라면 누구나 편히 영면할 수 있다. 나 스스로 그런 노력을 기울여 왔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나는 영원의 시간 속에 잠들 것이다."

"삶의 가장 큰 영광은 한 번도 실패하지 않음이 아니라, 실패할 때마다 다시 일어섬에 있다. (The greatest glory in living lies not in never falling, but in rising every time we fall.)"
- 1994년에 출판된 자서전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Long walk to Freedom)"에서

"억압받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억압하는 사람도 해방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만약 내가 다른 사람의 자유를 빼앗는다면 남에게 나의 자유를 빼앗긴 것처럼 나는 진정으로 자유롭지 못합니다. 내가 감옥에서 풀려나왔을 때 억압하는 자와 억압받는 자 둘 다를 해방시키는 것이 나의 사명이었습니다."

"나는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을 걸어왔습니다. 나는 주춤거리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나는 도중에 발을 잘못 내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커다란 언덕을 올라간 뒤에야 올라가야 할 언덕이 더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는 비밀을 알았습니다. 내가 가야 할 머나먼 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감히 꾸물거릴 수가 없습니다."
-자서전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에서

"누구도 피부색, 배경 또는 종교 때문에 다른 사람을 미워하도록 태어나지 않는다. 미워하게끔 배운다. 미워하는 것을 배울 수 있다면 사랑하는 것도 가르칠 수 있지 않은가. 사랑은 미움보다 더 자연스레 사람 가슴에 다가온다."

"가장 위대한 무기는 평화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신념대로 살 자유를 (사회에 의해) 빼앗겼을 때, 그는 범법자가 될 수 밖에 없다. (when a man is denied the right to live the life he believes in, he has no choice but to become an outlaw.)"

"여러분이 '성자' 에 대해서 '끝없이 노력하는 죄인' 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시는 이상, 나는 성자가 아닙니다."성자 맞으시네

"교육은 세상을 바꾸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만약 ANC가 여러분에게 아파르트헤이트정부가 했던 것과 똑같은 짓을 한다면, 여러분은 아파르트헤이트에 싸웠던 것처럼 ANC와 싸워야 합니다.[26]"

"결혼이 얼마나 터프한 거냐면 넬슨 만델라도 이혼했어!" - 크리스 락

"나는 대단한 인간이 아니다. 단지 노력하는 한 노인일 뿐이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살았다는 단순한 사실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가 우리 삶의 의미를 결정할 것이다."

6. 대중매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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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만델라》의 한 장면. 데니스 헤이스버트 분.어째 빅토리아 호수낀 먼 나라 전직 독재자 이디 아민이나 윗나라 대통령 음난가그와하고 더 가깝다[27] 참고로 이 영화는 만델라가 사망했을 때 KBS 명화극장에서 추모 기념으로 방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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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빅터스: 우리가 꿈꾸는 기적》의 한 장면. 본인이 아니라 모건 프리먼 분.

당연히 할리우드에서 그의 생을 영화화한 적이 몇 번 있다. 대니 글러버(영화 《2012》에서 미 대통령으로 출연)는 만델라가 아직 옥고를 치르고 있던 1987년 HBO에서 제작한 TV 영화에서, 시드니 포이티어는 만델라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인 1997년, 데니스 헤이스버트는 2007년작 《굿바이 만델라》(원제 Goodbye Bafana)에서[28], 그리고 모건 프리먼은 2009년작 《인빅터스: 우리가 꿈꾸는 기적》[29]에서 각각 만델라로 열연했다. 모건 프리먼의 경우 만델라 본인이 자신을 연기한 최고의 배우라고 극찬한 적도 있었고, 만델라의 사망 이후 만델라를 추모하는 인파들이 만델라가 아닌 프리먼의 사진을 들고 나오기도 했다.(...) 실제로 만델라 사진 보여주면 모건 프리먼?이라고 하거나 모건 프리먼 사진을 보고 만델라?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다. 2013년 영국에서도 《만델라: 자유를 향한 머나먼 여정》이라는 제목에 영국 배우 이드리스 엘바 주연으로 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가 제작되었는데 런던에서 만델라의 딸 등이 참석하여 시사회가 진행되던 도중 만델라의 부고가 전해졌다고 한다. 여기선 젊을적 만델라가 꽤 난봉꾼으로 나온다

소설 《세계대전Z》에서는 조국을 살리기 위해서 레데커 플랜이라는 극약 처방을 내리기로 하고 레데커 플랜을 계획한 인종차별주의자폴 레데커를 불러와 도움을 요청한다.

본인이 영화에도 직접 출연한 적이 있는데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가인 맬컴 엑스를 다룬 동명의 영화 맨 마지막 장면에 깜짝 출연. 흑인 어린이들에게 엑스의 정신을 가르쳐주는 교사 역으로 등장한다.

흑인 패션모델인 나오미 캠벨이 친할아버지로 여기고 존경하는 인물이다. 만델라 역시 그녀를 친손녀처럼 생각했다고.

[1] 분란의 땅에 평화를 이식한 협약의 체결자들을 말한다. 93년, 94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넬슨 만델라와 더불어 야세르 아라파트, 이츠하크 라빈 총리, 남아공 대통령 클레르크가 공동 선정되었다. 그만큼 중요한 협약들이 같은 해에 체결되었다는 이야기. 물론 둘 다 다른 의미의 헬게이트를 불러왔지만 여하간 이 4명 가운데서도 가장 두드러지며 존경받을 만한 인물은 역시 만델라밖에 없다.[2] 아파르트헤이트 철폐 이후[3] 코사어로는 정확히는 "Rholihlahla"라고 적고, /xoˈliːɬaɬa/로 발음한다. /ɬ/ 발음을 굳이 한글 표기로 옮기면 '홀리흘라흘라' 정도에 가깝다.[4] 장난꾸러기(...)라는 뜻이라고 한다.[5] 해당 자료 단 해당자료에서 선정된 인물 중 헨리 키신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조.[6] 영국인들의 지배를 받고 있긴 했지만 소도시에서는 추장들의 권력이 유지되었다.[7] 사실 만델라의 이유도 정당한 것이 그가 다니는 포트헤어 대학은 아프리카에서 유일하게 흑인을 받는 대학이었으나 급식이 너무 형편없었다.[8] 물론, 투쟁 과정에서 인도 및 여러 유색인들을 대변하는 당들과도 같이 일한다. 또 공산당과도 손을 잡았는데 자서전에서 만델라는 공산당이랑 손 잡는건 무척 조심스러웠다고 말했다.[9] 근데 이는 1948년 이후에나 공식적으로 실시 된 정책이다. 정식적으로 초기에 대항한 것은 인종차별 정책/사회일 뿐, 아파르트헤이트가 아니다. 하지만, 시기가 겹쳐서 애매하긴 하다. 어차피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인종차별이지 않나?[10] 대표적으로 남아공 공산당 서기장이 된 조 슬로보(Joe Slovo)가 있는데, 그는 MK의 사령관직을 맡기도 했다.[11] 세계 최장기수 1위는 1995년 광복절 특사로 석방된 비전향 장기수 김선명 옹(총 45년).[12] 폐쇄된 후 1999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13] 영화 '굿바이 만델라'에서는 이 시기 만델라를 지켜보던 백인 교도관의 시점으로 영화가 진행된다. 참고로 이 교도관하고는 꽤 친하게 지내서 대통령 관저로 초대해올 정도였다고.[14] 남아프리카 국민당의 일부 과격파들이 탈당하여 만들었다.[15] 다만 이 때문에 당시 피해자들에게 가해자들에 대한 처벌을 포기한다면서 항의를 받기도 했다. 만델라 자신도 백인들의 영향력을 알았나보다. 오랫동안 남아공에 대해 정통한 백인들과 갈등일으켜봤자 좋을 거 없고 백인들 지지도 필요하다보니, 백인들을 공격하다간 자신 뿐 아니라 남아공 전체가 피를 보니까. 한국의 경우를 비유하자면 김대중의 독재세력 포용이 그러한 예시. 즉, 국가발전을 위해서라면 정적이라도 가리지 않았다.[16] 반대로 흑인들은 축구에 열광했다.[17] 다만 경제성장률 자체는 1980년대에 비해 상당히 상승하긴 했다.(1980년대 1%->90년대 중반 4%)[18] 사실 이게 아파르트헤이트가 남아공에게 남긴 가장 큰 폐해라고 할 수도 있다.[19] 타보 음베키는 만델라의 경제정책을 이어받아서 그가 재임하던 시기 남아공의 경제가 크게 성장했고 그 결과 아프리카의 맹주로 급부상하였지만, 그 과실은 일부 계층에게만 돌아갔고(이 시기에 남아공내에서 흑인 부유층과 중산층들이 대거 등장했지만 이들의 숫자는 아무리 넓게 잡아봐도 전체 흑인의 20%가 채 안되는 수준이고, 나머지 흑인들은 여전히 실업과 저임금 문제에 시달리고 있는 형편이다), 공공서비스 질 향상이나 범죄문제 대처에도 좋지 않은 모습을 보였고 결국 권력다툼에 밀려 2009년 총선을 6개월 앞둔 시점에서 결국 불명예스럽게 중도 퇴진하게 된다. 또 재임 초기 만델라와 대립하면서까지 에이즈에 대해 이뭐병스러운 대응을 했다가, ANC내에서도 욕을 먹는 등 망신을 사기도 했다. 그래도 퇴임 이후에는 외교활동에 주력하고 있고 크게 욕은 안 먹는선에서 평가가 좀 나은 편.[20] 그렇지만 이후에 취임한 주마에 비하면 평가가 나은편인데 이후 과도기를 거친 뒤 대통령에 취임한 주마는 성추문 문제가 있었음에도 분배정책을 내세워 흑인들한테 인기를 얻어 집권했지만, 정작 집권 뒤에는 부정부패로 말썽을 일으키는데다가 공약도 지키지 않았고 더군다나 만델라가 잠깐 퇴원해서 집에서 요양하고 있을 때 그를 찾아가 언플질을 시도하는 망발을 저질러 흑인들에게도 인기가 푹 떨어지게 된다. 그나마 2014년 총선에서 재선에 성공했지만 이건 남아공 대통령 선거가 직선제가 아닌 간선제라서 그렇지 직선제였으면 진작에 나가 떨어졌을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더군다나 재선 이후에 남아공의 실업률은 여전히 20%대를 기록하고 있고 다수 흑인들은 빈곤에 허덕이든데다가 사저건축에 세금을 유융했다는 의혹까지 곂치고 경제까지 침체되면서 지지율은 20%대에 머물고 있다. [21] 원래 외국 정상이 방한하면 서울대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수여하는게 관행이다.[22] 김대중 대통령은 국내 언론 및 외신에서 '아시아의 만델라'라고도 한다. 80년대 민주화 운동과 징역살이, 해외 망명, 정적 포용, 반대측의 극심한 저항, 노벨 평화상 수상 등이 공통점으로 꼽힌다.참고[23] 일본 황실 인사가 황족이 아닌 주요 인사 추모식에 직접 참석하는 예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24] 구 사커시티 스타디움. 2010 남아공 월드컵의 주경기장이었다.[25] 이에서 비롯된 말이 명언/결혼 항목에 하나 있다. "결혼은 진짜 빡쎈거야. 결혼이 얼마나 빡쎈 거냐면, 넬슨 만델라도 이혼했어. 넬슨 만델라는 27년을 남아공 감옥에 갇혀 있었어. 그는 27년 간 매일같이 당하는 고문과 매질도 참아냈고 40도가 넘는 남아공 사막에서의 강제노동도 견뎌냈어. 그 지옥 같은 27년 간을 참아내고 감옥에서 나왔는데 부인하고 겨우 6개월 지내고 이혼했다고." - 크리스 록...당연히 웃자고 하는 소리. 6개월만에 이혼하지 않았고 고문과 매질을 매일 당하지도 않았다.[26] ANC의 부패가 심해지면서 야당에서는 이 말을 자주 인용한다.[27] 만델라는 젊은 시절 복싱을 했던 경력도 있어서 사진 속의 덩치 깨나 있는 모습이 굳이 고증오류라고 하긴 어렵다. 다만 흑인이라고 다 외모가 같은 게 아니라, 만델라의 경우 약간 동아시아인 같은 쌍꺼풀이 안 드러나는 눈매에 엷은 피부를 가졌는데, 이 배우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흑인의 외모에 가까워서 실제 인물과 차이가 더 커보인다. 사실 남아프리카 지역의 경우 부시맨으로 유명한 코이산족 등 작은 이목구비의, 동양인 혼혈 같은 외모가 제법 많다. 미국 흑인의 경우 서아프리카 출신이 많은데 이 때문에 일반적으로 우리가 흑인 외모라고 여기는 많은 특징 - 낮고 펑퍼짐한 코, 짙은 쌍커풀, 두툼한 입술, 여성의 경우 풍만한 몸매 - 들은 사실 서아프리카인의 그것인 편. 동아프리카는 키 크고 호리호리하고 이목구비 역시 백인처럼 얄쌍하고 날렵한 사람들이 많다. 흑인들의 외모에 눈이 좀 익는다면 소말리아, 케냐 등의 사람들은 나이지리아코트디부아르 사람들의 외모와는 영 딴판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28] 만델라가 약 30년 동안 옥중 생활을 할 때 그를 전담했던 백인 간수와의 우정이 주 이야기. 2009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사망하자 KBS2에서 방송했고, 만델라의 사망 직후 KBS1에서 다시 방송했다.[29] 만델라의 취임 이듬해 남아공에서 열린 세계 럭비선수권 우승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