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정상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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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南北頂上會談, Inter-Korean Summit

대한민국(남한)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최고지도자가 만나 회담하는 것을 의미한다.

2018년 4월 현재까지 정식적인 정상회담은 세 차례 있었다. 흥미롭게도 남측에서는 정치 성향과 상관없이 거의 모든 정권이 시도했지만, 정작 지금까지 성사된 회담은 민주당계 정당이 집권했을 때만 이뤄졌다.[1]

북한에서는 북남수뇌상봉(北南首腦相逢)이라고 칭한다.

2. 연혁[편집]

2.1. 전두환 정부[편집]

1984년 북한의 인도적인 대남 수해복구 물자 지원[2]을 계기로 남북대화의 물꼬가 트이고, 이것은 남북 예술단 상호 방문 공연과 이산가족 상봉으로 이어진다. 이러자 다음해인 1985년 북에서 대남정책을 전담하던 허담 대남비서 겸 조국평화통일위원장이 극비리에 내려와서 전두환을 만났고, 답례차 장세동 안기부장이 비밀리에 방북해서 김일성 주석을 만났다. 이러 밀사접촉을 통해서 남북정상회담 개최에 원칙적으로 합의했으나, 여러가지 내외부의 사정[3]이 겹치면서 자연스레 흐지부지 되버렸다. 당시 5공정권은 서울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에 정권의 사활을 걸고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북한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다. 또 남한의 올림픽 단독 개최는 곧 체제경쟁의 패배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던 북의 김일성 정권은 어떻게든 남한의 단독개최를 저지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대외적으로 꾸준히 공동개최, 분산개최를 요구하던 시점이었다. 이런 남과 북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서 남북 밀사접촉이 이루어졌지만, 워낙에 입장 차이가 크고 결국은 각자 정권안보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흐지부지 되고, 1986년이 되면 다시 남북간에는 극한의 긴장이 흐르게 된다. 이후 전두환 정권은 거세진 반독재민주화운동을 깔아뭉게기 위해서 수지 김 간첩 조작 사건, 금강산댐 수공설 조작 등 전가의 보도 북풍을 꺼내들고, 북은 전형적인 테러전술로 돌아가서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을 일으킨다.

2.2. 노태우 정부[편집]

남북정상회담이 최초로 제안된 것은 1988년이다[4].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을 통해서 김일성과 김정일을 20여 차례 만나 남북정상회담에 합의했다는 주장이 있다.관련기사 8월 15일 노태우 대통령의 정상회담 제안에 김일성이 용의가 있다고 회답한 것이다.관련기사 하지만 성사 직전 결렬되고 말았다. 결렬된 배경에 대해서는 노태우 정부 입장에서 군부와 보수세력의 저항이 너무 클 것같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을 생각하고 포기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본인은 육성회고록에서 북한과 중국의 여건이 덜 조성되었다고 판단했고, 북한이 자신들이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섣부르게 요구한다는 인상을 받으면서 정상회담으로 인한 실익을 거두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2011년 펴낸 회고록에서는 북한이 자신을 초청했으나 “김일성의 초청이 돈과 관련이 있다”고 말한 박철언 당시 체육청소년부 장관의 말에 따라 초청을 거절했다고 밝혔다. 참고로 박철언은 노태우의 손아래 처남이자 최측근으로 노태우정권에서 대북밀사로 활동하고 있었다.[5]

김일성의 회답으로 정상회담을 연다는 것은 일단 남북 간의 잠정적인 합의사항이 되었으나, 세부 사항 논의와 남북관계의 변동, 국내외의 정치적 문제 때문에 역사적인 회담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지연이 몇년간 계속되었다.

2.3. 문민정부[편집]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이 정말 실현되나 싶다가...

1994년 북한의 핵개발로 북한과 미국간의 외교적인 대결이 본격화되고 클린턴 행정부가 공공연히 북한 선제폭격 혹은 전면전을 시사하는 전쟁위기[6]로 치닫자,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전격적으로 평양을 방문해서 중재에 나선다. 지미 카터가 서울로 귀환해서 북의 대화의지를 전하고 김영삼 대통령이 여기에 화답해서 남북정상회담이 합의되었다. 남북 양쪽은 진지하게 실무접촉을 이어가면서 회담 장소, 일정, 의제, 경호, 숙식, 인원 규모, 언론취재 방식 등에 합의했다. 1994년에 합의된 일정은 7월 25일 평양에서 연다는 것이었다.관련기사 그러나 회담일자가 이미 잡힌 상황에서 7월 8일 김일성이 급사돌연사하는 바람에 무산되고 말았다.관련기사 이때 김영삼 대통령의 구상은 북에 파격적인 경제지원을 하고, 대신 대대적인 군축 혹은 조선인민군 병력의 후방배치를 이끌어 낸다는 것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때 김영삼정부는 고속도로, 철도, 발전소 건설, 남북경협 공단 등 구체적인 경제지원 패키지까지 만들었으나 회담무산으로 모두 묻혔다.[7]

일단 북한에서는 김일성 사망으로 인한 정상회담의 (사실상 무기한) 연기를 통보해왔다. 당시 김영삼 정부는 김일성 사망 발표 직후 전군에 비상경계령을 내렸다. 이후 공식적인 조문단을 보내는게 어떻냐는 이부영 의원의 제안을 둘러싸고 남한내에서 이념갈등이 폭발한데다가, 이제 북한은 끝났다는 북한붕괴론이 득세하면서 남북대화 분위기는 순식간에 증발하였다. 이후 김영삼 정부가 끝날때까지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더 이상의 남북대화는 없었다.[8]

2.4. 국민의 정부남북정상회담[편집]

2.5. 참여정부남북정상회담[편집]

2.6. 이명박 정부[편집]

2009년 이명박 대통령은 3차 남북정상회담을 은밀히 추진하기 위해 측근인 임태희 당시 국회의원(후에 대통령 실장)을 싱가포르로 보냈고 싱가포르에서 남한의 통일부장관에 해당하는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과 비밀회동을 가졌다고 한다. 이는 비밀로 묻혀졌으나 위키리크스가 미 국무부 기밀자료를 폭로하는 과정에서 이 사실이 드러났고 훗날 임태희는 김양건과의 비밀 회동을 시인했다. 당초는 임태희 의원이 아니라 이기택 평통 수석 부의장이 김양건과 회동을 가졌다는 보도가 있었으나 평통측은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했던 상황이었다.

이후 2011년 5월김태효 청와대 대외전략비서관 등이 베이징에서 북측 인사와 회동해 3차 남북정상회담 추진을 논의했으나 무산되었다.[9] 북한은 다음달인 6월에 국방위원회 대변인의 인터뷰 형식으로 이 회동을 폭로했고 "돈봉투를 주면서 정상회담을 애걸복걸했다"라고 주장해 큰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당시 베이징에서 남측 인사들이 “쌀은 군량미로 쓸 수 있으니까 옥수수로 줄게”라며 옥수수 5만톤을 줄테니 정상회담 하자고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2.7. 박근혜 정부[편집]

이 때문인지 박근혜는 남북대화에 비선라인을 동원하지 않겠다고 천명하기도 했으나 남북관계의 특수성다른 모든 곳에서 비선라인을 가동한 사실을 감안한다면 믿기 어려운 사실. 실제로 막후에서는 여러 움직임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남북정상회담 발언록 전문까지 공개되어 남북관계는 더욱 경색되었기 때문에 남북정상회담의 가능성은 극히 낮았다.

그러나, 2014년 인천 아시안 게임 폐막식에 황병서, 최룡해 등이 방남하면서 가능성이 생기기도 했다. 2018년 4월 10일에 방영된 PD수첩에 따르면, 북한에서 손을 뻗었는데도 박근혜가 '세월호 때처럼' 연락이 안 되었다고 한다.

"세월호 사건처럼 똑같이 대통령하고 연락이 안 됐어요. 북한은 만나겠다고 했는데 통일부 장관도 그렇고 거기 가 있던 사람들도 '아 만나는 게 좋겠다' 해서 청와대에 연락했는데 대통령하고 연락이 안 됐어요." 통일부 정책혁신위 관계자


당시 언론은 북한 측이 청와대 예방을 “시간관계상” 어렵다며 사실상 거부한 것으로 보도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내용에 류길재 당시 통일부 장관은 부인하였으나, 국정원 적폐청산TF에서 확인된 정보라고.

2015년에도 정상회담을 추진한 적이 있었다. 당시 박근혜의 밀명을 받은 한 친박 전직 의원이 싱가포르에서 김양건 통일전선부장 측과 접촉해 일정을 조율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김양건이 2015년 12월 의문의 교통사고로 갑자기 숨졌고, 그 이후 북이 2016년 1월 4차 핵실험을 강행하면서 이러한 논의는 중단됐다.

그리고, 2018년 1월 일요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2016년 11월경 최순실 게이트가 한창일 때 출구전략의 일환으로 일부 친박 의원들이 추진했던 것으로 뒤늦게 알려졌다. 모 의원은 "한 전직 의원이 여러 차례 해외를 나가 북측과 만났"다고 인정했다. 당시 김영철 통일전선부장 최측근과 만났다고. 북한이 긍정적으로 나오다가 막판에 결렬되었다고 한다. 북한도 탄핵 위기를 우려했었다.

2.8. 문재인 정부남북정상회담[편집]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2차례 이상 북한과 정상회담을 가졌으며 남한땅에서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했다. 그리고 역시 역사상 최초로 북한 최고 지도자가 남한 땅을 밟기도 했다.

2.8.1. 1차 정상회담[편집]

자세한 내용은 2018 남북정상회담 문서 참고.

2.8.2. 2차 정상회담[편집]

자세한 내용은 2018 2차 남북정상회담 문서 참고.

3. 여담[편집]

  • 남북관계 개선에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인도네시아 대통령이 많은 중재를 했다. 이로 인해 인도네시아는 대한민국의 민주당계 정당과의 인연이 상당히 깊고, 그동안의 남북정상회담도 모두 민주당계 정권 시절에 이루어졌다. 대통령이 되기전 민주당계 정당에 있었던 김영삼 전 대통령 또한 남북정상회담을 적극적으로 추진했고 일정까지 잡았었지만 김일성의 사망으로 성사되지는 못했는데 그 부분에 있어서는 본인도 매우 아쉬웠다고 한다.[10]

  •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은 정상회담에 대해 민주당계 정권은 보수우익 세력의 이념 공세에 직면할 수 있지만, 보수 정권은 그런 측면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훨씬 유리하다고 평가하였다. 박정희 정부와 노태우 정부에서도 정상회담은 아니었지만 여러 협정이 있었고, 김영삼 정부에서는 김일성 급사만 아니었다면 가장 먼저 이루어졌을 상황이었다. 이명박과 박근혜도 초기에는 대북관계 개선 및 정상회담을 시도했었다 대북도발로 인해 돌아섰지만 그 이후에도 막후에서는 여러 물밑접촉이 있었다. 즉 민주당계 정권에서만 이루어진 것은 여러 우연과 사정이 겹친 결과에 가깝다.

  • 1980년대 후반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가 유력시되면서 중국과 소련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로 각종 경제적, 군사적, 외교적 지원을 뜯어내서 체제를 유지해왔던 김일성, 김정일은 한국과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중국은 혈맹이었지만 동시에 이웃나라로서 중국의 패권주의 노선을 가장 경계했고 원교근공의 이치에 따라 도발과 함께 남한, 미국에게 화해의 제스처를 보냈는데, 여러 번 관계가 갈라진 이후에도 물밑에는 지속적인 연결이 있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4. 같이 보기[편집]

[1] 보수 정권때 남북정상회담이 열리지 않는 이유는 민주당계 정당과는 달리 북한을 경계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경우는 보수 정당으로 대통령이 되었지만 과거 민주당계 정당에 오래 머물렀던 영향 때문이었는지 남북정상회담을 적극 추진하였다.[2] 이것도 경위를 알고 보면 상당히 골떄리는 사건이었다. 1984년 여름 남한에선 소양강댐이 터지네 마네 할 정도의 큰 홍수로 엄청난 숫자의 이재민이 발생하였다. 이러자 북한은 조선중앙방송을 통해서 수해복구물자를 지원할 용의가 있다고 발표했는데, 이걸 당시 5공 정권이 덜컥 수락해버린 것이다. 북한에선 당연히 안받을줄 알고 언제나처럼 프로파간다 날린 건데 남에서 진짜 받는다고 해서 엄청나게 당황해 했다. 그래도 하여튼 준다고 했으니 빠득한 살림에도 의류원단과 식량, 건축자재(시멘트,철근) 등을 바득바득 긁어모아서 남으로 보냈다. 이때 북에선 나름 신경써서 고급이라고 보내온 물자들이 남쪽 기준으로 영 조악한 것들이라서 오히려 국민들 사이에선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하여튼 이걸 계기로 오랜만에 남북대화가 재개되서 남북적십자회담이 열리고 잠깐 해빙기가 도래한다.[3] 특히 팀 스피릿 훈련이 가장 큰 문제였다. 북은 팀스피릿이 곧 대북선제공격 연습이라고 인식해서 훈련기간에는 국가를 전시체제로 돌리곤 했었고, 이것이 막대한 경제적 부담이었다. 당시 팀스피릿은 국군과 주한미군은 물론 미 본토의 증원군까지 도합 20만명 이상이 동원되는 육/해/공군 총력전 연습이라서 북이 위협을 느낄만 하기도 했다. [4] 이전에는 순도 100% 실무자들만 움직였다. 일부 인사들이 상대 정상을 만나려고 시도했고, 실패하기도 하고 성공하기도 했다. 황태성이 박정희를 만나려다 실패한 것이 전자의 예이고, 7.4 남북 공동 성명 이전에 이후락이 평양에 가서 김일성을 만나고, 답례로 북한의 당시 부수상 박성철이 청와대에서 박정희를 만났던 것이 후자의 예이다. 하지만 이는 정상간의 만남을 노린 것은 아니었다.[5] 박철언은 이외에도 한소수교, 한중수교 등 북방정책 전반에 두루관여한 인물이다.[6] 이때 진짜 전쟁나는 줄 알고 전세계의 종군기자들이 모두 서울로 몰려왔는데, 정작 대한민국 사람들은 너무 평온해서 오히려 당황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태어날 때부터 평생을 전쟁의 공포속에 살다 보니까 다들 둔감해진게 대한민국이라서...[7] 이미 노태우 정부 시절인 1992년 김우중 회장이 북을 방문해서 김일성과 남포시에 남한 기업들을 위한 공업단지를 건설한다는 계획을 합의하였다.[8] 참고로 미국은 북미협상을 맡고 있던 로버트 갈루치 미 국무부 북핵특사가 스위스 제네바의 북한 대사관을 찾아가서 공식적으로 조문했으며, 이후에도 꾸준히 협상을 이어가서 북이 핵개발을 동결하는 대신에 미국이 원자력발전소를 지어주며, 원전 완공때까지는 매년 중유를 지원해 준다는 제네바 합의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 합의는 공화당(미국)이 장악한 미 의회가 석유지원 예산을 승인해 주지 않아서 휴지조각이 되버린다. 원전 건설도 대부분의 인력과 비용을 우리가 대는 조건으로 꾸준히 진행되다가 결국은 북한에서 공사 도중에 중단되었다.[9] 김태효는 이명박 정부 초기부터 대통령의 복심이자 외교안보정책의 최고실세라고 언론에서 주목하던 인물이다. 실제 김태효는 일개 비서관이 아니라 이명박 정권의 실질적인 외교안보 사령탑으로 대북정책, 외교안보정책을 설계하고 실행했다는게 언론의 평가이다. 한미 FTA 체결, 남북정상회담 추진, 한미 미사일 사거리 지침 개정, 군 정치공작 의혹 등 굶직한 안보이슈에는 항상 김태효의 이름이 언급되며 결국 2011년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졸속 추진 파문으로 사퇴한다.[10] 2018 남북정상회담 때처럼 당시에도 김일성이 먼저 남북정상회담을 제의 했다고 하고 그 제의를 김영삼이 받아들인뒤 본격적으로 회담 일정을 정하고 추진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