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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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전쟁(南北戰爭, The Civil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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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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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합중국[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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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연합국[2]

수도

워싱턴 DC

리치몬드[3]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

제퍼슨 데이비스

인구 (1860)

22,100,000[4]

9,103,332[5]

인구 (1864)

28,800,000[6]

5,600,000[7]

참전 병력 합계[8]

2,100,000

1,064,000

철도 총연장 (1860)

21,800마일

8,800마일

철도 총연장 (1864)

29,100마일

-

공업 생산력 (1860)

90%

10%

공업 생산력 (1864)

98%

-

수출 (1860)

30%

70%

수출 (1864)

98%

-

The Civil War
南北 戰爭

1. 개요2. 배경3. 남북전쟁 전의 타협과 무산
3.1. 서막3.2. 미주리 협정(1820)3.3. "위대한 양보" 협정의 실패 남/북부 간 갈등의 심화3.4. 남부의 탈퇴와 전쟁의 개막3.5. 아메리카 연합국(CSA)의 탄생
4. 전개
4.1. 북부4.2. 남부4.3. 동부전역 초기 - 남부의 우세4.4. 서부전역 - 북부의 반격4.5. 종료
5. 분석
5.1. 북부5.2. 남부
6. 결과와 의의7. 무장
7.1. 육군7.2. 해군
8. 주요 인물
8.1. 북부8.2. 남부
9. 주요 전투10. 대중문화 속의 남북전쟁11. 여담12.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남북전쟁은 국가를 만들기 위한 비싼 전쟁이었다.
ㅡ 제임스 러셀 로웰

남북전쟁은 이 나라에서 전에는 결코 없었던 것인 국가적 의식을 만들었다.
미국 제28대 대통령 우드로 윌슨, 1915년 현충일 기념사에서

최후의 근대전이자 최초의 현대전
푸른 외투(북군) 대 회색 외투(남군)의 전쟁[9]
미국에서 지금까지 일어난 2번째이자 마지막 반란

1861년 4월 12일부터 1865년 5월 13일까지 미국에서 벌어진 내전.[10] 1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앵글로 아메리카 최후의 전쟁. 그리고 가장 많은 미국인이 죽은 전쟁. 미국 독립전쟁 이후 미국사상 최대의 위기이자 기회.

American Civil War(미국 내전) 또는 그냥 The Civil War(내전)이라고 부른다. 후자는 미국에서 주로 쓴다. The는 종종 생략하기도 할 정도. 그러나 영국에서는 찰스 1세와 의회가 싸웠던 내전을 의미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남부측에서 부르던 명칭은 주(州) 간 전쟁 War between the States. 좀 더 노골적으로 친남부적 관점을 보이는 사람들은 War of Northern Aggression(북부 도발 전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이건 적반하장 식이라 보수적인 레드넥들을 제외하고는 잘 쓰이지 않는다. 한국에선 주로 '남북전쟁'이라고 하는데 이는 일본에서도 그렇다. '미국 내전'이라고 해도 됐을 텐데, '보불전쟁'처럼 남군과 북군이 싸우니 같은 원리로 지은 것 같기도 하다.


남북 전쟁의 전반적인 흐름을 소개하는 Civil War Trust 제작 30분 짜리 영상. 남북전쟁의 흐름, 굵직한 전투들과 그 배경과 의의와 결과의 영향 등이 짤막하지만 잘 소개되었다. 채널에 들어가보면 각 전투들에 대한 설명 영상도 있으니 남북전쟁을 좀 더 알기쉽게 배우고 싶은 사람은 참고할 것

전쟁의 전체적인 흐름이 묘하게 훗날의 세계대전들을 연상시킨다. 전쟁 개전과 중반까지 전술적 능력이 떨어지고 패배를 자원으로 보충하는 북군(연합군), 전술적 능력으로 승승장구하지만 자원 및 전략적 안목 부족과 명분 부족으로 수세에 몰리다가 결국 패배하는 남군(동맹/추축국)이라는 구도는 1,2차 세계대전에서도 비슷하게 진행된다. 명분과 자원력과 공업력이 우세한 쪽이 대부분 승리한다는 현대전의 그림을 최초로 확립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패배한 쪽의 소수 지지자들(레드넥, 네오나치, 일본 극우)이 훗날 미화를 시도한다는 점에서도 상당히 비슷하다.

2. 배경[편집]

신사들의 클럽이 있는데, 아주 공정한 클럽이야. 우리 모두 그 신사 클럽에 가입했다고 가정해보자고. 시간이 흐른 후 몇몇 회원이 우리들의 사생활이나 가정생활을 간섭하기 시작했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기 시작했지. 그때 우리들 가운데 누구든 그것을 거부할 권리가 있지? 거부해야지! 우린 거부한 거야. 하지만 저들은 우리 보고 거부할 권리가 없다고 하고 있어.
- 조지 피켓(남군의 장군), 영화 <게티스버그> 中

대표적인 이미지는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는 북부와 노예제 존속을 주장하는 남부간의 대립이 낳은 전쟁인데, 그 배경은 매우 복잡하고 심지어는 명칭 자체도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결론적으로 원인은 노예제가 맞다.

의외로 원인으로 주목되던 것들 중 경제적인 측면은 1950년대 이후로는 제외되었다. 1860~61년 사이에 전쟁을 피하기 위해 논의되었던 3가지 타협안은 모두 도망 노예법, 개인 자유법, 준주에서의 노예제와 이미 존재하는 노예 주에서의 노예제 개입 문제를 다루고 일부에서 중요시되는 관세와 같은 경제적인 문제는 전혀 다루지 않았다.

애초에 면화 생산에서 노예의 효율은 생각만큼 높지 못했다. 실제로 남부는 면화 농업이 본격화되기 전, 담배 농사를 짓던 시기에 노예제의 비효율적인 측면 때문에 노예제도를 자진 폐지하려는 분위기마저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노예가 임금 노동자보다 비쌌다는 소리는 물론 아니다. 노예들이 거주할 집은 노예들을 시켜서 근처에서 나무를 베어다가 짓게 하면 그만이고 미국 남부는 농업이 기반인 동네라 먹을거리도 풍족했다. 그리고 백인 노동자들도 플랜테이션에서 부리려면 임금뿐만 아니라 숙식 제공은 기본이었다. 근본적인 문제는 노예는 임금을 받으면서 일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열심히 일할 인센티브가 없다는 점이었다.

물론 경제적 문제가 없는 건 아니었다. 첫번째는 북부의 경제적 발달과 서부 개척으로 남부에서 노동력이 유출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면화 농장마저도 점점 서부로 이동하고 있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조지아가 중심이 되었던[11] 면화 농업은 다시 미시시피앨라배마 주로 주도권이 이동했고, 이후에는 루이지애나가 급부상했다. 이 5개 주가 당시 미국 면화 생산량의 3/4 이상을 차지했다. 그리고 미국의 면화 생산량이 다시 세계 면화 생산량의 3/4를 차지했고. 때문에 노예제 하의 남부에서도 서쪽으로의 노예제 확장은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면화 경작지의 확대를 위해서는 노예제도 역시 그를 따라서 확장되어줘야 했던 것이다. 때문에 붙잡아 놓고 일을 시킬 수 있는 노동력은 남부에서 상당한 가치가 있었다. 실제로 남부의 수출품들은 면화 외에도 상당수를 노예들이 생산하고 있었다.

두번째는 노예 가격이다. 이 시기는 미국 남부를 제외하면 노예 무역이 끝장난 시기였다. 단적으로 미국의 노예 수입은 이미 1808년에 법으로 금지되었다. 하지만 텍사스와 멕시코를 통한 불법 수입이 등장하였고, 이건 당시 주간 거래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다. 하지만 가격 폭등에서 알 수 있듯이 수요를 공급이 따라가지 못했고, 이후 노예 생산 단계로 접어들어서야 노예 가격 폭등이 누그러지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남북전쟁 시기까지도 노예 가격은 꾸준히 상승세였다.

이는 노예 수입이 대부분 끊겼다는 것이다. 이런 공급의 급격한 감소와 면화 산업의 발달[12]이 더해지면서, 시장 원리에 따라 노예 가격이 꾸준히 치솟고 있었다. 담배 농업이 무너졌다가 면화 농업이 다시 각광받기 시작한 1800년에서 1850년 사이 노예 가격은 약 50달러에서 800~1,000달러까지 상승했다.

이후 갈수록 노예의 생산력보다 노예 자체의 가치가 좀 더 부각되고 있었다. 1850년대 무렵 노예들의 가치는 당시 기준으로 약 20억 달러 정도였는데, 이건 남부가 소유한 총자본의 약 1/4이며 연방 예산의 10배 정도였다. 면화 작물의 가치도 이것의 1/10 정도 밖에는 안되었다. 이처럼 노예는 비싼 재산이었고, 노예제 폐지는 그 재산을 통째로 증발시키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 직전 남부 플랜테이션 농업은 백인들 중에서도 상위 5% 미만의 대부호들이나 하는 것이었고, 백인 인구의 80%를 차지하는 대다수 중소 자영 농민들은 노예를 부린 적도, 부릴 일도 없었으나 오히려 이들이야말로 노예제 폐지에 가장 격렬하게 저항한 부류였다. 결국 남북전쟁의 발발 원인에는 경제적 요인도 있었지만 정치적, 가치관적 문제가 더 중요했다.

이런 도덕적 논란은 당시 미합중국이 브라질과 스페인령 카리브 섬들을 제외하면 백인 문명권에서 유일하게 노예제를 굴린다는 것 자체가 큰 원인이었다. 초기에는 노예의 필요성에서 시작했을지 몰라도, 이것이 외부의 시선과 대립하는 과정에서 흑인 노예들의 존재를 통해 자신들의 인종적[13], 문화적 우월성을 만족시키는 것을 넘어서 도덕적인 부분까지 나아가고 있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과 같이 당대가 배경인 소설들이다. 작중 핀은 친구인 흑인 노예가 도망나온 것을 보고 갈등하는데, 왜냐하면 도망나온 노예를 고발하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주입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남의 시선을 신경쓰는 모범생도 아니고 오히려 자기 멋대로 남이 곤란해지는 일을 즐겨 하고 다니는 부랑아인 핀이 결국 내가 지옥에 가겠다고 굳은 결심을 해야 친구인 도망 노예를 도와줄 수 있을 정도였던 것이 당시 남부의 썩은 도덕관이었다.

그야말로 노예로 뭘 하기 이전에, 노예를 가진다는 것 자체로 부유함과 우월함의 상징이 되는 것이 이 시기 남부 백인 사회의 모습이었다. 이 시기 미국 남부는 유럽 귀족 사회를 모방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었다. 대부호들은 자신들과 노예를 통해 유럽식 귀족과 평민을 구현했고, 이런 상류층의 문화는 하류층으로 전파되었다. 실제로 남부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며 노예를 부릴 꿈도 못 꾸었던 가난한 백인 자영농들에게 아무리 못나고 가난해도 백인은 깜둥이보다 낫다라는 이데올로기를 주입시키던 차에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는 세력이 북부를 기반으로 부상하니 남부 엘리트들은 이걸 방치하면 자기들의 사회적, 문화적 우위를 완전히 상실한다고 판단하여 반란을 주도했던 것이다.

또한, 정치적으로 민주당과 공화당&휘그당의 대립 구도도 하나의 요인으로 볼 수 있다. 백인 남성이라면 1인 1표라는 규칙이 노예주들에게는 조금 다르게 적용되었다. 노예 1명당 1/4표로 계산이 되었고 북부는 상대적으로 인구가 적은 남부는 이로 정치적 이념들을 견제해나갈 수 있었는데 공화당 주도의 노예제 폐지가 실시 될 경우, 해방 노예 중 남성에 대한 투표권이 부여되면 공화당 지지 세력이 남부에서 강해지며 민주당의 지역 지지 기반을 잃을 수도 있다는 판단도 분명히 존재한다. 실제로 노예제 폐지 후, 해방 노예들의 지지와 표는 공화당으로 향했다.

미국의 정치의 가장 큰 장점은 타협이다. 건국 초, 코네티컷 타협을 통해 국가의 기틀이 정해졌다. 노예제라는 명분아래 발생한 남북전쟁은 확실한 해결책보다는 문제를 빠르게 봉합하려는 정치적 타협들이 만들어낸 산물이었다.

이처럼 남북전쟁의 배경은 대단히 복합적인 것이었다. 위에 난잡하게 언급된 내용들도 남북전쟁의 원인으로 꼽히는 모든 배경들을 설명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링컨을 까는 매체들에 의해 오로지 경제적 문제 때문에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실상은 경제적 문제 외에도 위에서 언급한 투표권 문제 등의 정치적인 헤게모니와 사회 문화적인 요인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3. 남북전쟁 전의 타협과 무산[편집]

3.1. 서막[편집]

독립 이후, 미국은 공업이 발달하고 외국이민자들이 많이 유입되던 북부[14]영국식 전통이 강하고 농업을 중심으로 하던 남부간의 정치적인 주도권 다툼에 휩싸이게 된다. 노예제는 남부의 경제적인 기반 중 하나였으며, 노예 인구가 상당수를 차지하는 남부의 정치적 입지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남부는 독립 당시부터 헌법제정 시 인구수 비례에 흑인 노예를 넣을 것을 주장하였으며, 타협 끝에 양측은 흑인 인구의 3/5을 친다는 협정을 맺고[15] 향후 20년 동안 이 문제를 논의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또한 북부가 연방정부의 권리를 중시하고 고관세 정책을 지지하던 반면 남부는 주정부의 권리를 중시하고 저관세 정책을 옹호하였으나, 대체로 미국의 관세는 북부의 주장에 따라 상승하는 추세였다.

하지만 양측의 갈등이 근본적으로 해결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문제는 지속되었다. 대표적으로 앤드루 잭슨 대통령의 임기 동안 사우스 캐롤라이나주에서 연방법 집행거부 사태(Nullification Crisis)가 터지기도 했다. 이 때 잭슨은 1833년 5월 1일에 '관세는 그저 구실일 뿐이며, 연방해체와 남부연합의 설립이 진짜 목적이다. 다음 구실은 아마도 흑인이나 노예제가 될 것이다.'고 기록했는데 그의 생각은 딱 들어맞았다.

3.2. 미주리 협정(1820)[편집]

이런 양측의 갈등을 중재한 것이 남북전쟁을 적어도 50년 이상 늦췄다는 평을 듣기도 하는 헨리 클레이 상원의원이었다. 클레이는 1819년 메사추세츠 주의 분할, 자유주로서 메인 주의 독립, 1820년 '미주리 협정'을 통해 위도 36도 30분선을 중심으로 남쪽은 노예주로, 북쪽은 자유주로 결정하면서 양측간 비율을 1:1로 맞춰 갈등을 수습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1840년대에 접어들면서 미국-멕시코 전쟁(1846-1848) 이후 텍사스, 캘리포니아, 유타 주 등의 새로운 주가 편입되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3.3. "위대한 양보" 협정의 실패 남/북부 간 갈등의 심화[편집]

새로운 주는 남측에 위치했으나 노예제가 금지된 자유주였고 이들의 미국연방 가입으로 균형이 깨질 것을 우려한 남부의 반발로 연방 붕괴의 조짐까지 보인다. 이때 백가쟁명으로 각종 아이디어들이 떠올랐는데, 헨리 클레이는 30년 만에 소위 대타협(Great Compromise, 1850)을 제안한다.

클레이의 안은 다음과 같다.

1) 캘리포니아는 자유주로 편입한다.
2) 유타 주뉴멕시코는 주민투표에 의하여 노예주의 유지 여부를 결정한다.
3) 워싱턴 D.C.의 노예주는 유지하되, 노예 시장을 없앤다.
4) 36도 30분 이북 텍사스의 영역을 뉴멕시코 준주에 양도하고, 정부는 그 대가로 텍사스 주에 멕시코와의 전쟁에서부터 나온 비용을 지불한다.
5) 도망노예단속법을 강화한다.


그러나 5항에서 다시 갈등이 발생한다. 강화된 도망노예단속법으로 소위 노예사냥꾼들이 등장하면서 추노 자유주라 할지라도 마음대로 가택수색을 할 수 있는 상황이 발생하고, 이에 북부주들은 체포당한 노예에게 재판받을 권리를 줘 시간을 끌 수 있게 하는 주법을 만들어 반항한다. 거기다 작가 해리엇 스토우도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라는 소설로 노예제의 비도덕성을 꼬집었고, 소설이 널리 알려지면서 남북전쟁을 가속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양측의 갈등은 스티븐 더글러스가 캔자스-네브라스카 법을 제안하게 되며 다시 불거진다. 미주리 협정에 따라 준주에서 주로 승격될 캔자스는 자유주로 편입되어야 할 상황이었다. 그러나 더글러스는 인민주권의 논리에 따라 각 주의 주민들이 노예제 존폐여부를 투표로 결정하게 하자는 내용을 이 법안에 넣었다. 각 주의 주민들이 인민주권에 따라 스스로 투표를 하여 노예제의 존폐여부를 결정하게 해서 골치아픈 노예제 문제에서 손을 뗀다는 게 목적이었지만, 이 때문에 더글러스는 북부에서 큰 비난을 받았다. 북부는 이제 아예 노예제의 완전 폐지를 주장하고 있었고 또 만약 투표로 캔자스가 노예제가 될 경우 대타협의 36도 30분 이북에 노예주가 떡하니 생기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1850년의 협정이 무효화되고 캔자스-네브라스카 법이 통과되면서 또다른 갈등이 시작된다.

바로 캔자스를 노예주로 만들기 위하여 바로 옆 주였던 미주리에 사는 노예 주인들이 대거 캔자스로 이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이를 막기 위해 이번에는 북부의 노예 해방운동가들이 대거 캔자스로 이동하며 맞불을 놓았다. 이들 모두 무장을 한채 왔고 개중엔 심지어 대포를 끌고 온 사람들도 있었다. 양쪽 모두 개표 조작과 협박을 서슴지 않았고, 결국 미주리 상원의원까지 합세해 부정선거를 한 끝에 캔자스는 노예주가 되었다. 하지만 이미 캔자스 땅의 대부분의 농부들과 주민들은 노예주의자가 아니었다. 결국 또 문제가 터지는데 캔자스가 노예주가 되기 전부터 존재했던 자유주의 마을 로렌스가 노예제 지지자들에게 불태워지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그에 대한 복수로 급진 해방론자였던 존 브라운과 그 아들들이 노예제를 지지하는 농부 5명의 손을 자르고 칼로 가슴을 찔러 죽이는 일이 일어났고 사실상 캔자스는 피흘리는 캔자스(Bleeding Kansas)라 칭하는 준 내전 상태에 돌입했다.

이 때 미주리 협정을 파기하는 판결이 연방대법원에서 내려졌는데, 이것이 바로 드레드 스콧 대 샌드포드(Dred Scott v. Sandford) 판결이었다. 이 판례의 당사자였던 드레드 스콧(Dred Scott, 1795~1858)은 흑인 노예로 버지니아 주 출신이었다. 본래 그를 소유하고 있던 피터 블로(Peter Blow) 가문은 후에 앨라바마 주로 이주했으나 농사에 실패해서 다시 미주리 주로 이주했고 스콧은 그곳에서 미군에서 복무중이던 의사 존 에머슨(John Emerson)에게 팔렸다. 에머슨은 군 복무중이었으므로 자주 거주지를 바꿨고, 자유주였던 일리노이, 위스콘신 준주(현재의 미네소타 주)에서 장기간 거주했기 때문에 자유를 달라는 청원을 낼 수도 있었지만 그 당시에는 그러지 않았다. 그러나 에머슨이 노예주였던 미주리 주로, 그 다음에는 루이지애나 주로 전출되었고, 이때 스콧은 결혼했다.

에머슨도 아이린 샌드포드(Irene Sanford)와 결혼했는데 에머슨이 1843년에 사망하면서 아내였던 아이린이 모든 재산을 상속받았다. 스콧과 그 부인도 마찬가지였는데 처음에 스콧은 자신에게 자유를 주면 현 시가로 7,000달러인 300달러를 지불하겠다고 했으나 거부당하자 1846년, 지역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세인트루이스 순회법정에 소송을 제기했다. 1847년에 진행된 재판에서는 스콧에게 불리한 판결이 나왔으나 전문 증거가 나왔기 때문에 재심이 결정되었다. 1850년, 미주리 주 법원에서는 스콧과 그 부인이 자유주인 일리노이 주와 위스콘신 준주에서 오랫동안 거주중인 때 불법적으로 노예 상태에 있었으므로 자유를 주어야 한다고 판시하였으며, 일레네는 이에 불복하고 상소하여 미주리 주 대법원에서는 1852년 한 번 자유면 언제나 자유(once free always free)가 아니라고 하여 하급 법원의 판결을 뒤집고, 28년간의 판례도 뒤집는 결정을 내렸다.

당시 미주리 주의 법에 따라 에머슨 농장의 권리는 아이린의 남자형제였던 존 J.A. 샌드포드(John F. A. Sanford)에게 있었고, 샌드포드는 뉴욕시민이었다. 따라서 스콧의 변호사들은 관할권이 다르다는 근거로[16] 연방 법원에 소송을 제기해야 한다고 하여 스콧은 연방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연방 지방법원에서 패소하자 다시 상소를 하여 연방 대법원까지 갔으며 이것이 드레드 스콧 대 샌드포드 사건. 연방 대법원은 노예는 시민이 아니므로 고소할 권리조차 없으며, 비록 북부주가 자유주라고 하나 이것은 개인의 재산을 침해하는 권리이므로 무효이며 미주리 협정 자체가 무효라고 7-2로 스콧의 패소를 판결했다. 이 판결은 존 마셜 대법관이 마버리 vs 매디슨 사건에서 최초의 위헌법률심판을 내린 이후 대법원이 민주적 정당성을 가진 의회의 권한을 무시한다는 문제가 불거져서 무려 50년 동안 위헌 법률심판이 벌어지지 않고 있던 상황에서 나온 판결이었기 때문에 충격이 엄청났으며, 연방 대법원의 판결 중 역사상 최악의 판결로도 손꼽힌다.

스콧과 부인은 판결에 따라 아이린에게 돌아가야만 했다. 한편 아이린 샌드포드는 1850년에 칼빈 C. 채피(Calvin C. Chaffee)와 재혼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점이 채피는 노예 폐지론자였지만 정작 자신의 새 부인이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노예를 소유하고 있다는 걸 연방대법원의 판결이 내려질 때까지 모르고 있었기에 어찌할 틈도 없이 노예 소유주와 결혼했다는 비난에 직면했다. 채피는 스콧 가족을 원주인에게 되돌려주자며 부인을 설득했고, 결국 스콧 가족은 피터 블로 가족에게 돌아갔다. 피터 블로 가족은 미주리 주로 이주한 상태였고 노예제에 반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해방시켜 주어 스콧은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이후 그는 세인트루이스에서 짐꾼으로 일하다가 1858년에 사망했다.

드레드 스콧 대 샌드포드 사건의 판결은 미주리 협정을 무효화시키는 판결이었고, 북부와 남부의 노예 폐지론자와 존속론자 간의 갈등을 가속화시켜 전쟁 직전까지 상황을 악화시킨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남북의 대립이 악화되면서 이전까지는 비교적 이성적으로 타협을 시도하려고 했던 정치인들마저 분열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대표적인 사건이 1856년 상원의회에서 일어난 찰스 섬너 의원의 구타 사건으로, 사우스 캐롤라이나 출신 하원 의원 프레스톤 브룩스가 상원으로 난입하여 매사추세츠 출신 상원 의원인 섬너가 자신의 친척인 앤드류 버틀러 상원의원을 모욕했다는 이유로 지팡이로 무자비하게 구타한 것이었다. 이떄 남부 출신 상원의원들은 주위를 둘러싼 채 서로 희희낙낙거리며 구경했으며, 브룩스와 함께 입장한 동료 하원의원들은 권총으로 다른 의원들을 위협하는 등 의회마저 극단적인 폭력에 노출되었다. 섬너는 거의 죽기 직전까지의 상황에 이르렀고, 이후 약 3년 동안 공직을 수행하지 못한 채 혼수상태에 빠졌다. 브룩스는 이후 섬너의 동료 앤슨 벌링게임의 도발에 넘어가 결투를 신청했다가 갑자기 시시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결투를 거부하여 망신당하고 스스로 정계에서 물러난 뒤 곧 죽는다. 섬너는 남북전쟁 이후 남부를 벌하자고 주장하는 급진 공화당의 핵심 인물이 된다.

3.4. 남부의 탈퇴와 전쟁의 개막[편집]

이 시기 주요 양당이었던 미국 민주당과 미국 휘그당에서도 남부계와 북부계의 분열이 극심했으나, 민주당이 스티븐 더글러스가 어정쩡하고 어중간하게나마 중도 노선을 취할 수 있었던데 반해 휘그당은 에이브러햄 링컨 등이 탈당하여 신생 공화당에 입당하는 등 당 자체가 와해 위기로 몰리기에 이르렀다. 56년 선거에서는 민주당, 휘그당, 공화당의 3파전이 벌어졌다. 그 뒤인 1860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휘그당은 완전히 몰락하고, 스티븐 더글러스가 끝까지 어정쩡한 위치에서 어물적대자 폭발한 남부계 민주당이 존 C. 브레킨리지(John C. Breckinridge)[17]를 따로 후보로 내놓는 등 대분열이 일어나 공화당의 에이브러험 링컨이 북부지역의 표만 가지고 39.8%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공화당은 노예제 폐지라는 단일 어젠다를 갖고 있던 당이었기 때문에, 공화당에서도 온건파였던 링컨은 바로 노예제 폐지를 공약하진 않았지만 개인적인 신념은 노예제 폐지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에 따라 남부에서는 링컨의 인형을 불태우면서 연방 탈퇴의 여론이 빗발치고 있었다. 아이러니한 점은 링컨은 "노예제 폐지하면 좋겠지만 그게 나라를 갈라버릴 정도의 이슈라면 차라리 노예제를 안고 가겠다"라는 말을 공공연히 할 정도로, 연방의 유지를 최우선으로 보고 노예제 폐지 및 축소는 부차적으로 보는 인물이였다는 점이다.

이미 의석수도 북부 공화당에게 뺏긴 상황에서 민주당은 분열되고 대통령직까지 공화당에 넘어가게 되자 불안을 느낀 남부 주들에서는 연방 탈퇴론이 득세하여 1860년 12월 전부터 툭하면 연방탈퇴한다고 징징대던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가 결국엔 가장 먼저 연방을 탈퇴하였고 뒤이어 조지아, 플로리다, 앨라배마, 미시시피, 루이지애나, 텍사스가 연방을 탈퇴하여 1861년 2월 4일, 제퍼슨 데이비스를 임시 대통령으로 추대하고 2월 8일, 기존의 미 헌법에서 본을 딴 헌법을 제정하여 앨라배마 주의 몽고메리를 수도로(후에 버지니아 주의 리치먼드로 이전) 아메리카 남부맹방(Confederate States of America)[18]의 건립을 선언하였다.

이에 "갈라진 집안은 바로 설 수 없다"며 강력한 연방 유지파임을 천명했던 링컨은 취임식에서 남부에 대해 탈퇴를 취소할 것이며 불응시 무력사용을 불사하겠다는 경고를 보냈고, "우리 깃발에서 별이 하나라도 줄어드는 일이 벌어진다면 난 죽어버리고 말 테다"라는 말을 공공연히 하고 있었다.[19] 여기에 반발한 남부는 자국내 연방군의 철수를 요구하며 국내의 연방군 요새와 병기창 등을 차례로 무력점령한다. 1861년 4월 12일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의 찰스턴 항 인근에 있는 섬터 요새의 연방군이 철수를 거부하자 남군은 요새를 공격하였고 이를 계기로 남북전쟁이 발발한다. 섬터 요새는 이미 식량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이에 갓 대통령이 된 링컨은 섬터 요새에 식량을 공급하겠다고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에게 통보하였다.

이때 섬터 요새에서의 에피소드 하나. 섬터 요새는 남군의 공격을 받았지만 워낙 요새가 튼튼해서 사상자는 없었다. 하지만 탄약이 다 떨어지고 요새도 크게 파손당하자 연방군 지휘관인 로버트 앤더슨 소령은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하고 요새를 포기하기로 했다. 대신 요새를 포기하는 대가로 북군 병력이 무사히 철수하는 것을 남군에게 허락받았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깃대에서 성조기를 회수하며 연방군 포대가 예포를 발사했는데, 이때 폭발 사고가 나서 1명이 사망하고 3명이 부상당하는 등 연방군에서 사상자가 발생한 것(...). 이 때문에 남북전쟁의 최초 사망자는 교전이 아닌 폭발 사고로 인한 것이라는 특이한 기록을 남기게 되었는데, 요새와의 교전에서 남군의 피해는 전무했다.

3.5. 아메리카 연합국(CSA)의 탄생[편집]

전쟁이 시작되자 버지니아 주, 노스 캐롤라이나, 테네시, 아칸소가 남부에 가담하게 되었으며, 버지니아의 리치먼드는 곧 신생 남부연합의 수도가 되었다. 그러나 모든 노예제 허용주들이 남부로 간 것은 아닌데 버지니아의 서부(웨스트 버지니아), 델라웨어, 켄터키, 미주리, 메릴랜드는 연방에 잔류했다.

  • 버지니아 주의 서부와 동부는 차이가 극심했다. 서부는 산업이 발달하고 대농장과 노예가 별로 없었던 반면, 동부는 남부의 다른 주에 노예를 판매해서 수익을 얻었다. 주 정부를 장악하고 있던 것은 동부 쪽이었는데, 전쟁이 시작되자 서부쪽에서 연방에 잔류하고 따로 주를 만들자는 분리 움직임이 일어나 1862년 12월 31일자로 링컨 대통령이 웨스트 버지니아 주 창설에 서명하게 되었다. 완전히 공인된 것은 전쟁 후. 버지니아는 전쟁 기간 남부의 중심지인 동시에 주 자체로 봐도 서부 지역이 북부에 떨어지고 남은 지역이었으니 그야말로 알짜배기 노예주였던 셈이다. 이런 연고로 버지니아는 1960년대까지 인종차별이 극심했고, 현재까지도 보수적인 기풍이 강하다. 그런데 왠걸, 20세기 중반을 지나면서 웨스트 버지니아의 광공업은 점차 쇠락하면서 웨스트 버지니아가 깡촌, 버지니아가 상대적인 도시지역이 되어버리면서 상황이 뒤바뀌어버렸다. 그런데 마침 공화당도 보수정당으로, 민주당도 진보정당으로 자리를 맞바꾸면서 지지정당은 유지되었다.

  • 메릴랜드 주에서는 남부를 지지하는 이들이 연방에 반대하는 폭동을 일으키고 다리를 불태우는 일이 벌어졌는데, 남부 정부에서 사태를 파악하기 전에 링컨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연방군을 파견하여 메릴랜드 주와 컬럼비아 특별구를 장악하고 분리주의자들을 모두 재판없이 구금시켰다. 구금된 이들은 나중에 석방되었다.

  • 켄터키 주는 전쟁 초기에는 중립을 표방하다가, 이후 남군의 침입을 받자 바로 연방측으로 가담했다. 정작 이 침입은 남부 장군 레오니다스 포크가 테네시주에서 방어선 구축 중 남부정부 명령없이 멋대로 들어간 삽질이었다(...). 전쟁 초반 서부전선에서 북군의 선전은 대부분 이 장군의 오판에 기인한 바가 컸다.

  • 미주리 주에서도 분리 움직임이 있었으나 연방군에게 진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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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색이 북부, 붉은색이 남부. 연보라색은 연방에 잔류한 노예제 허용주인데 이를 경계 주(Border States)라고 한다. 흰색은 아직 주로 승격되지 않은 영토(Territory)로써, 인구가 많지 않고[20] 산업기반도 그리 발달하지 않은 지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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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정확한 지도. 정확히는 1863년 웨스트 버지니아가 분리되고 1864년 네바다 주가 승격된 최종 국면의 지도다.

4. 전개[편집]

북군과 남군의 상황은 웃기게도 제2차 포에니 전쟁과 일정정도 비슷하다. 자원 등에서 일방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에서 반대편은 지휘부 역량 딱 하나가 유리해서 붙어보겠다고 덤볐고, 전술적인 승리도 많았으며, 실제로 성공을 거둘 가능성이 보이는 시점도 있었지만, 결국은 물량이 앞서는 쪽이 지휘부 역량마저 성장하자 결국 밀렸다는 점 등이 그렇다.

4.1. 북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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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ted States of America이므로 Union이라고 부른다.

북부, 즉 연방은 정부조직이 이미 잘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중앙집권체제에 익숙해져 있었고 따라서 의사결정이 신속하고 유연하게 이뤄질 수 있었다. 때문에 물자 동원도 훨씬 수월했다. 국력도 공업의 발전으로 전쟁물자 생산에서 우세했는데 당시 총기생산량의 97%가 북부에서 나왔다. 여기에 힘입어 북군은 미니에 탄 등 당시로서는 최신 기술을 많이 도입하여 더 우월한 무장을 갖출 수 있었다. 반면 남군은 총기를 비롯한 각종 무기를 갖추는 데에 애로점이 있었다.

여기다 전쟁 중에 4000km 이상의 철도를 가설했고, 기존의 철도망도 계엄령을 통해서 국유화를 실행한 결과 잘 갖추어진 철도망과 효율적인 운용 덕분에 병력이나 물자 수송에서도 우위를 점했다. 인구의 측면에서도 압도적이라 농업이 주 산업인 남부보다 식량 생산량이 많았고 인구는 4배나 차이가 났다. 당시 북부의 농장들에는 당시로서는 최신식인 콤바인이 도입되었으며 덕분에 주요 노동 인구였던 남성들이 군대로 빠져나갔어도 남은 여성들만으로도 충분히 농업 활동이 가능하여 그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리고도 남아 전시 중에도 영국에 식량을 수출할 정도였다. 반면에 남부는 농업 비중이 높았음에도 대부분이 목화고 식량 작물 도입도 늦어서 전쟁 말에 가면 굶주림을 면치 못했다. 물론 남부 정부도 사안의 심각성을 알고 감자, 사탕무, 콩 등의 작물 재배를 독려하였으나 워낙 고집 세고 독립 기질이 강한 농장주들 때문에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다. 게다가 북부 연방 정부가 식량줄을 줄기차게 공격 해서 식량난이 더욱 심해졌다.

자유민 인구만 따져도 4:1로 연방이 우세했는데, 당시 미국의 주요 항구가 모조리 북부 손에 있었고 제해권도 북부군이 장악했기 때문에 유럽에서 넘어오는 이민자들은 전부 다 북부로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당시 미합중국 정부는 전쟁중에도 지속적으로 이민을 받았고 도착한 이민자들은 돈받고 정착하는 대가로 북부군에 입대해 싸웠기에 병력 차가 더 벌어지게 된다. 이쯤 되면 남군이 그 정도까지 선전한게 신기할 지경 다만 이 때문에 북군의 병사의 질은 남군보다 낮았으며 이는 초반의 남군의 선전과 양측 전사자 비율 격차에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거기에 도망 노예들이 북군에서 복무를 시작하자 안 그래도 우위였던 수적인 우세가 더 강화되었다. 매사추세츠주에서 편성된 제54 매사추세츠 의용보병연대(54th Massachusetts Volunteer Infantry)가 대표적인 흑인 부대였다. 이들을 다룬 영화로 1989년에 개봉한 영광(Glory, 국내개봉명은 영광의 깃발)이 있다

와그너 요새 전투에서 54연대의 선전으로 이후 흑인들의 모병이 적극적으로 시작되었고 18만명의 흑인들이 입대하여 복무하였다. 54연대는 프레드릭 더글러스[21]와 같은 당시 노예제 폐지운동계에 활동하던 유명인사들이 징집운동을 하기 위해 자원하던 것으로 유명했으며, 미군 최초의 유색인종 부사관이자 역시 최초로 유색인종으로 명예 훈장을 받은 월리엄 H. 카니 상사를 배출하기도 하였다. 의회 명예 훈장은 전쟁이 끝나고 50년이 지난 1900년에 수여되었다. 상사는 국기를 들고 돌격하였으며 적의 진지에서 저항하다 퇴각 과정에서 4발의 총탄을 맞았지만 다른 병사들을 무사히 퇴각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군대는 전쟁 시작 때 육군 1만 6천명, 해군은 7천 6백명, 42척의 전함이 있었다. 그 방대한 영토를 지키기에는 군대의 규모가 너무 적었는데, 이는 민병대 전통이 강했던 미국에서 연방 중심의 상비군은 소수로 유지했던 것에서 기인한 것이었고, 미국-멕시코 전쟁을 끝으로 주변에서 미국에 대결할만한 강국 자체가 사라진 것도 있어서 대규모 상비군을 유지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무기 역시 미국 독립전쟁 때 쓰던 구식조차 더러 섞여있었다. 때문에 얼마 전에 해외 원정까지 한 국가라고 하기에는 매우 적은 군대만 존재했고 전반적으로 병력의 질이나 경험도 장담하기는 어려웠다. 장교단의 질도 사관학교가 있는 버지니아 주가 남부에 가담하면서 상대적으로 떨어졌고 이는 전쟁 초반 남군에게 밀리는 원인이 되었다. 객관적으로 남부보다 국력이 우세했지만 연방도 전쟁 준비가 안 되었고 그 우세를 전쟁에서 실제로 가용하게 동원하려면 시간이 걸렸기에 전쟁 발발 시점에선 남부에 비해서 딱히 우세하다고 하기는 어려웠다.

북부의 목표는 연방의 재통일과 반란군인 남부의 진압이었다. 전략목표는 명확하게 남부연맹의 수도인 리치먼드였다. 북부의 대전략은 전쟁 시작 당시의 북부군 총사령관이었던 윈필드 스콧 장군[22]이 남부를 경제적으로 말려버리기 위해 입안한 소위 아나콘다 계획(Anaconda Plan)이 중심이었다. 남부의 전 해상을 봉쇄한 후 미시시피 강을 장악하여 남부를 동/서로 쪼개는 것이 그 골자였다. 이론적으로 매우 타당한 계획이지만 남부를 포위하기 위해 장기간의 봉쇄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자원이 많이 든다는게 문제였다. 이에 빠르게 전쟁을 끝낼 목적으로 남부연맹의 수도 리치먼드가 있는 동부의 주공 방향에서 단기결전 형태의 육상 작전들이 입안되었으나, 시대가 흐르면서 방어용 화력이 급속도로 발전한 것을 도외시한 공세 작전들이 입안된 탓에 전쟁을 초기단계에 해결할 희망이 불 런 전투에서의 패배로 막혀버리고 점점 더 지지부진하게 끄는 역설적인 결과를 낳았다. 이 계획은 나중에 스콧의 뒤를 이은 조지 B. 매클레런(George B. McClellan)[23]이 실행에 옮겼으며, 이로 인하여 남부의 수출/수입량의 95%가 막혔다. 정리하면 동부에서 적극적인 공세로 남군의 주력을 붙들어 매면서 수도인 리치먼드를 공략하는 동시에 연방의 수도인 워싱턴 D.C.를 방어하고, 서부는 대전략의 핵심으로 서부 남부주들의 물자가 동부로 넘어가는 것을 막는 한편 서부의 주를 탈환해서 남부의 전쟁 수행 역량 자체를 감소시키는데 있었다.

수도인 워싱턴 D.C.가 최전선에 근접하다보니 남군이 약간만 북진하는 것으로도 정치적, 군사적으로 위기에 처한다는 게 전략적으로 약점이었다.

4.2. 남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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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federate States of America이므로 Confederacy라고 부른다. Union이나 Confederacy나 우리 말로는 "연합", "연맹"이라는 뜻이다. 위의 깃발은 공식적인 국기가 아닌 해군기였으나 그리고 남부연합 군대의 상징으로 사용되었으며 현대에는 남북전쟁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연합기(confederacy flag)"내지는 "반란기(rebel flag)"로 불리며 남부연합을 상징하는 깃발로 받아들여진다.

남부는 근본적으로 주의 발언권과 자주성에 의거해 탈퇴한 주들이 모여 결성된 만큼 각 주들의 발언권이 상당히 강력한 지방자치제 국가였다. 이로 인해 새로 구성된 정부조직은 주 정부들에게 권력을 휘두르기 어려웠고 아예 주 정부들이 중앙의 말을 안 듣고 제멋대로 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이 때문에 애틀란타가 포위당했을 당시에 애틀란타를 포기 못 하고, 그 때까지 잘 먹히고 있던 상대방을 자신들이 구축한 진지로 끌여 들여 조금씩 피해를 주던 방식을 버린다음 전면적인 역공을 강행해야 했다. 결과는 뭐...

예를 들어서 북부는 철도를 효율성을 위해서 국유화 했지만 남부는 민간에게 맡겼기 때문에 효율성이 떨어졌다. 이 때문에 남부의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는 이를 조정하고 남부 정부의 지침을 확정하느라 고생 좀 해야 했다. 그런다고 이 사람이 일을 잘했냐면 그것도 아니다. 전쟁 중에 일부 장군들만 편애하고, 일부 장군들은 싫어하는 성향을 보이면서 전쟁을 말아 먹었다.

그리고 남부는 인구 면에서 북부에 밀리고 농업 위주의 사회였던 탓에 경제력도 빈약해 전쟁 물자 생산도 어려웠다. 한 예로 미국의 남부 지역 주들 상당수가 면화 재배 및 가공업이 사장 되면서 거의 빈곤 주들로 전락해갔다. 게다가 대체 산업이 발달한 것도 아니었으니 농업이 사장되는 즉시 이들 주는 극빈 주로 몰락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생긴 반전이 바로 미국 자동차 기업의 '빅 3'와 성장세인 일본과 유럽의 자동차 메이커들의 미국내 생산 공장 설립이었다. 고등교육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기본 기술 교육 및 훈련을 받으면 곧바로 생산라인에 투입 가능하기 때문에 쉽게 남부 주에 대체 산업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

농업도 대부분이 목화를 중심으로 한 상품 작물 재배가 목적이어서 식량 생산조차 북부에 밀렸다. 북군 병사들이 커피, 베이컨 밖에 없는 단조로운 군대 식단을 불평하고 있을 때, 남군 병사들은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셔츠를 물어 뜯고 있어야 했다. 덕분에 남군은 신발도 없어서 맨발로 행군을 해야 했고 무기의 질도 북군보다 훨씬 떨어졌다. 물자 수송에 필요한 철도도 남부는 600Km를 추가 가설 하는데 그쳤다.

군대도 이미 군대가 조직된 북부와 달리 새롭게 구성해야 했으며 기병의 경우 말 주인이 자기 소유의 말을 가지고 참전하는 등 민병대적인 성향도 강했다. 여기에 상기했듯이 생산력 차이로 군화도 지급 못받아 자비로 마련해야하거나 맨발로 가야할 지경이었다. 보급이 이러니 군복도 통일이 될리가 없었다. 아예 군복이 아닌 민간인 복장을 하고 참전한 군인도 있을 정도였다. 무기의 질 역시 상대적으로 뒤떨어졌다. 특히 남부 사회는 ‘민병(Militia)’의 전통이 강했으며 민병이 아니더라도 군은 스스로 자원해서 가는 곳이었지, 억지로 끌려가는 곳이 아니다보니 초반에 징집이 힘들었다. 더군다나 당시 싸우고 있던 지원병들도 1년 복무를 조건으로 군에 자원한 것이었다. 하지만 병력이 부족함을 느낀 남부 정부는 1년 병사들이 만약 복무를 연장하면 60일 휴가와 50달러의 급료를 주는 것과 동시에 새로운 부대를 선택할 수 있게 하고, 부대장을 직접 선출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자 병사들이 기병이나 포병 등 상대적으로 죽을 위험이 적은 부대를 택하고, 엄격하고 유능한 지휘관보다는 친한 사람을 선출하는 부작용이 생겼다. 결국 3월 28일에 대통령 데이비스는 남부 의회에 징집령이 포함된 법안을 상정하였는데, 대다수의 의원들은 이 법안이 주(州)들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반대했다. 물론 상황이 절박해서 의원들도 할 수 없이 대통령의 법안에 동의하여 1862년 4월 16일, 징집법안이 남부 의회를 통과하였다.이 징집령으로 1861년에 32만 5,000명이었던 남부의 총병력은 45만으로 늘어났다. 물론 대리인을 세울 수도 있고, 일부 직업인들은 징집에서 제외시키는 예외 사항을 두는 바람에 돈 많은 부자들이 징집을 피하고 특정 직업인을 양성하기 위한 ‘학원’이 생기는 등 부작용이 있었지만, 이 징집령은 남부의 절박한 상황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침략자 북군을 물리쳐서 자기 주와 노예제를 지켜야 한다"라는 명확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병사들의 사기가 북군보다 훨씬 높았다. 다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북군의 사기도 추상적인 목표를 위해 싸워야 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당시 북부인들은 교육 수준과 문자 해독율도 전반적으로 상당히 높은 편이었고, 지금 관점으로는 상상하기 힘들 만큼 미국 특유의 민주주의(그리고 그것을 대표하는 연방)에 대한 자부심도 높았다. 따라서 미 연방과 미국 혁명으로 탄생한 정부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과 열기는 고향을 수호하는 남군의 전투의지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또 당시만 해도 미국은 유럽에 비해 낙후된 국가로 측량에 의한 정확한 지도가 부족했으므로 남부 측이 고향을 방어하는 입장에서 지형지물을 이해하는 수준도 높았다. 그리고 북부의 장교단에는 교육자나 정치가, 사업가 등이 비교적 많았다. 중간에 연방군 총사령관이 되는 매클레런은 철도 기술자 경력이 있고 제 20 메인연대를 이끌었던 조슈아 체임벌린은 대학교수였다.

남부는 북부에 비해 노예제와 대농장 등이 발달되어 귀족 사회에 가까운 면이 있었고, 이들은 미국 초기 장교단의 산실과도 같았다. 또한 뉴욕의 웨스트포인트 같은 국립 사관학교는 아니지만, 나름 전통있는 군사학교 등이 위치한 버지니아가 가담하였고 따라서 각 사관학교 출신들이[24] 고향을 지킨다는 이유로 돌아갔을 때 남부가 더 장교단을 많이 확보할수 있었다는데 이건 사실이 아니다. 북이나 남측이나 두 측다 장교진들은 대부분 웨스트 포인트 사관학교 출신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더 많은 웨스트 포인트 출신 장교들이 북부(연방)측에 가담하였고, 장교의 질이나 장교의 숫자나 북부가 훨씬 우세했다. 예로 최고참 장성급들중에서 7중 5명이 북부편이였고, 2명만 남부편이였다. 다만 이들은 나이가 너무 많아서[25] 실질적으로 복무한 사람들은 1~2명밖에 안 된다. 그나마도 죄다 남북전쟁도중에 죽거나 은퇴한다.

그러나 참모진들은 10명에 8이 북부편이였고, 그 중에서 2명만 남부편이였다. 남부연맹측 이 2명중에서 남부팬덤측에서 졌다고 로버트 E 리에 비해서 평가절하 당하는 존 E 존스톤[26]이 있다. 아주 뛰어난 장교라는 편견과 다르게 로버트 E 리는 장성도 아니였고, 이 때까지만 하더라도 학교시절 성적만 좋았던 2선 장교였다. 자 그렇다면 기타 장교들 숫자를 살펴보자. 웨스트 포인트, 버지니아 밀리터리 아카데미등을 포함한 군사학교 졸업생들중에서 남부측에는 약 280명 그 중에서 웨스트 포인트 출신은 184명이 가담했고, 북부측에는 809명 웨스트 포인트 출신은 640명이 가담했다. 즉, 고위 영관급 사관급 장교진만 보더라도 북부측이 압도적이였다. 다만 사관급, 부사관급 하급장교들은 버지니아 밀리터리 아카데미 출신들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이들의 대다수가 남부측에 붙었다. 다만 북측에서도 버몬트에 위치한 노르위치 군사 아카데미[27]가 존재했고 거기에서도 전후로 600명 이상의 하급장교들을 배출했다. 즉, 개전시점에서 종전까지 장교단조차 질이나 숫적이로 북부가 남부보다 절대 못한 수준이 아니였다.

국가 자체의 체급이나 물리적 힘의 단순비교에서는 남부는 크게 열세에 있었지만, 개전 초기 전략적 상황에서는 오히려 남부가 압도적으로 유리했었다. 북부의 목표는 반란의 완전 진압인 반면 남부의 목표는 연방에서 독립하여 아메리카 연합국의 존재를 인정받는 것이었다. 북부 입장에서는 남부의 수도 리치먼드는 물론, 반란을 지속하는 다른 주들까지 하나 하나 다 진압하고 평정해야 할 막중한 부담이 있었지만, 남부의 경우 북부 여론과 엘리트들이 지쳐서 남부의 분리를 받아들일 때까지 버티면서 북부를 물먹이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를 위한 대전략이나 전략목표 설정은 부실했는데, 정치적 상징성이 큰 연방의 수도인 워싱턴 D.C.를 노린 모습은 없었고 전반적으로 "고향에 쳐들어 온 양키"를 격퇴하고 조국을 지키는 형태의 작전만이 이루어졌다. 북진의 경우 각 주의 자주권을 내세우며 독립한 남부의 정치적 성향상 북부의 다른 주를 침략하는 것에 대해서 거부감도 있었고 다른 주의 주권을 침탈하는 점에서 남부연맹 성립의 명분과도 어긋났다. 게다가 남부의 주들은 전쟁 이전에 북부의 주들과 교류가 있었다. 심지어 전쟁 도중에도 남부와 북부 사이의 교류는 계속되었다. 이 때문에 상대적으로 주도권을 북부에 넘겨준 형태였으며 리가 감행한 북진을 위한 두 차례의 전략 기동이 앤티텀 전투게티스버그 전투에서 각각 막힌 뒤로 전략적으로 우세를 점하지 못하였다.

또한 비슷하게 남부는 외교적으로 초반은 나쁘지 않았으나 결과적으로 북부에게 뒤쳐지게 된다. 남부의 외교 전략은 바로 미국이 영국과의 독립 전쟁에서 프랑스를 끌어들여 영국을 치게 만들어 독립을 쟁취한 것처럼 유럽을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이는 꽤나 타당성이 있는 전략 이였는데, 유럽의 강대국들의 입장에서는 미래의 위협이 될 수도 있는 미국을 둘로 갈라 놓는 것이 이득일 것이라는 계산이 나오고, 게다가 남부 측은 전쟁 시작 전까지는 세계 최대의 면화 공급원으로 사실상 시장을 독점하는 중이기에 산업혁명으로 원자재 수요가 막대했던 유럽에 상당한 영향력이 있었다. 실제로 전쟁 초반에는 유럽의 각 나라들은 남부를 응원할지, 북부를 지지할지 간을 보고 있던 상황. 남부는 이 점들을 이용해 유럽 열강들, 특히 당시 세계 최대의 면 수요국인 영국을 압박,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여 국제적으로 존재를 인정받아 북부의 전쟁 수행 의지를 꺾을 목적이었다. 하지만 처음에는 먹혀 드는 것 같았던 이 전략은 북부가 제해권을 잡고 아나콘다 작전을 통해 해상을 봉쇄해버리자 면화를 팔고 싶어도 팔 수가 없게 되어버리며 실패한다. 게다가 마침 면화 산업에 뛰어든 이집트가 남부의 면화 공급이 끊긴 틈을 타 어부지리로 대박을 치며 유럽의 면화 수요 물량을 공급해주자 영국을 위시한 유럽 열강들이 남부를 지지할 이유가 줄어들게 되어버리고 만다. 게다가 이 시점에서는 대다수의 유럽 국가들은 노예제를 폐지 한지 오래고, 이미 유럽의 지식인들에게는 노예 제도가 야만적인 풍습이라는 인식이 있었기에 유럽에게 실용적인 이익을 주지 못하게 된 남부의 지지 요청에 대한 대답은 날이 가면 갈수록 차가워지고, 결국 영국을 포함한 유럽의 강대국들은 전세가 천천히 기울기 시작하자 남부를 아예 못본 것 마냥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 외 유럽 열강들, 특히 엘리트 귀족사회였던 프러시아조차도 북부를 지지했다. 아일랜드인들 다음으로 남북전쟁에서 가장 많이 자발적으로 참전한 병사들이 바로 독일 이민자 출신 병사들이였으며, 이들은 유럽의 계몽주의를 바탕으로 열렬하게 노예 해방을 지지했다. 모든 북부 병사들이 노예해방을 찬성하는 건 아니였지만, 많은 병사들이 남북전쟁을 노예 해방을 위한 성전이라고 여겼다. 북부(연방)측에서 가장 유명한 노래인 "Battle Hymn of the Republic"를 들어보면 이해가 쉽다. "As He died to make men holy, let us die to make men free,"(예수님께서 스스로 희생해서 인류를 성스럽게 했듯이, 우리는 스스로를 희생하여 인류를 자유롭게 하자)라는 가사가 매우 의미심장하다. 참고로 이 노래는 따른 남부연맹 노래들과 다르게 미정부가 여기저기에서 대놓고 틀어준다. 심지어 도널드 트럼프 현 미국 대통령이 취임할때도 틀어줬다.

4.3. 동부전역 초기 - 남부의 우세[편집]

전쟁 초반 남군은 고향을 지키겠다는 열의로 모인 병사들과 명장 로버트 E. 리 장군 등으로 대표되는[28] 우수한 지휘관들의 기여 등에 힘입어 승승장구하였다. 전사자 통계를 분석해 보면 남군 1명이 사망할 때 북군은 3명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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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초기 남군은 버지니아 주를 침공한 북군을 격퇴하다 못해 (북부 입장에서) 남단에 있는 워싱턴 D.C.까지 위협했으며, 북부는 《크리텐든-존슨 결의안》(노예제 폐지를 포기할테니 연방으로 돌아오라는 내용)으로 남부를 달래보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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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해 1862년 남부는 북부의 초기 마지막 공세인 버지니아 남동부(리치먼드 근교)에서 7일 전투로 대표되는 반도 전역(Peninsula Campaign)[29]에 승리한 뒤, 포토맥 강을 넘어 북부의 메릴랜드를 침공했으며, 앤티텀 전투(Battle of Antietam)까지 북부를 계속 몰아붙였다. 하지만 이런 남부의 움직임은 결정적인 연방의 수도 워싱턴 D.C.에는 미치지 못했으며 첫번째 대규모 회전인 앤티텀 전투(9월 17일)에서 남부의 진격이 저지되면서 남부의 공세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하게 되었다(다르게 보면 북군의 첫 승리이다). 링컨은 이에 맞추어 노예 해방 선언(9월 22일)을 선포했다.

그러나 남부 정부의 외교적인 오판으로 영국과 프랑스의 승인을 얻는 데는 실패했다. 당시 남부에서 수출하는 목화는 전세계 생산량의 75%를 차지할 정도였다. 이를 빗대 킹 코튼(King Cotton)이라고 불렀으며, 남부의 외교술은 이 목화를 중심으로 했다. 그러나 전쟁 발발 직전인 1861년에 남부에서는 목화를 많이 수입하는 영국의 개입을 노리고 목화를 수출하지 않았는데, 정작 전쟁이 발발하자 북부의 해상봉쇄로 인해 수출이 불가능해졌고 결국 남부의 경제력을 크게 깎아먹은 것은 물론 영국의 지지를 얻는 데도 실패해버렸다. 영국은 남부의 목화를 수입하지 못하자 이집트[30]와 인도에서 생산량을 늘리는 것으로 대응해 일시적인 목화 부족사태를 넘겼다. 또 당시 영국은 자국에서 소비하는 식량의 상당량을 북부에서 수입하고 있었는데, 만약 영국이 남부 편을 들면 당장 먹을 것이 없어질 판이었다. 프랑스는 내부 사정도 좋지 못하고 멕시코 원정을 하다가 실패한 탓에 전혀 도움을 줄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다른 시각도 있는데, 사실 영국 정계는 실제로 남부에 상당히 우호적이었으며 정치적으로도 미국이 분열되는게 유리했기 때문에 실제로 남부를 거의 승인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영국의 반노예제적 국민여론 때문에 노예 해방 선언 이후 승인이 좌절되었다. 프랑스도 당시 나폴레옹 3세 치세에서 보수화되던 시대였고, 따라서 귀족적인 남부에 더욱 우호적이었다. 다만 프랑스 혼자서는 개입이 부담스러웠고, 따라서 영국이 개입할 경우 함께 개입할 작정이었다. 결국 영국이 노예해방선언으로 개입을 포기하면서 프랑스도 개입하기가 어려워진 것이었다. "영국이 개입하면 영국과 라이벌인 프랑스가 북부 편 들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으나, 이 시기 영국과 프랑스의 관계는 역사상 거의 유일할 정도로 친밀했다.

또한 북부의 외교전술도 주효했는데, 앤티텀 전투에서 남군의 북진을 저지하자마자 노예 해방 선언을 발표해 이 전쟁을 부당한 노예제에 맞서는 성전으로 만들어 영국, 프랑스가 끼어들 명분을 없애버렸다. 유럽에서는 이때 이미 천부인권 사상이 널리 퍼져서 대부분의 국가에서 농노제 노예제를 폐지한 상태였다. 참고로 제정 러시아의 농노 해방이 1861년.

4.4. 서부전역 - 북부의 반격[편집]

상당히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관심도 많았던 동부전역에 비해 남북전쟁의 서부전역은 당시에는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아나콘다 계획에 따른 서부 대전략이 충실하게 이루어지면서 남부연맹의 서부는 북부의 손에 넘어간다.

1863년 7월 4일, 미시시피 강 유역의 마지막 남부 요새였던 빅스버그가 율리시스 S. 그랜트에게 함락된 빅스버그 포위전은 남북전쟁의 주요한 전환점 중 하나였다. 이 전투로 인해 남부의 동/서가 단절되어 텍사스아칸소 주에서 남부의 다른 지역에 지원을 해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7월 5일은 게티스버그 전투에서도 북군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전쟁은 이를 분기로 뒤집히기 시작한다.

# 북부의 전략 다른 그림
서부의 남군은 최선을 다해서 저항했고 빅스버그 전투 전까지 승리도 몇 차례 거두었으며 지연전으로 북군을 어느 정도 잡아두었지만 서부전역에서 북군의 전체적인 우세는 꺾이지 않았다. 빅스버그가 함락된 후 북부군 총사령관으로 그랜트가 임명되었고, 서부전역에는 그 후임으로 윌리엄 테쿰세 셔먼이 임명되었다. 그랜트와 셔먼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남부의 전쟁수행능력과 의지를 완전히 꺾어야만 한다고 판단했으며 이에 셔먼은 총력전의 개념을 시행에 옮겼다. 1864년에 수행된 애틀랜타 전역에서 셔먼이 승리를 거둔 후 그 개념에 따라 실시한 게 유명한 바다로의 진군(March to the Sea)이다. 이때 셔먼의 북군은 애틀란타에서 출발해 서배너(Savannah)까지 진군하며 가는 길마다 생지옥을 만들었다.

몇몇 남부측 역사학자들은 셔먼의 바다로의 진군은 셔먼이 애틀랜타를 점령한 시점에서 서부전역의 남군은 사실상 박살났으며, 프랭클린-내슈빌 전투에서의 패배는 이에 쐐기를 박았기 때문에 의미가 없었다고 주장하지만, 바로 그 바다로의 진군의 프리퀄격인 전장이 애틀란타였고, 셔먼이 "바다로의 진군"으로 남부의 후방을 쑤셔놔서 급해진 후드가 프랭클린-내슈빌에서 불리한 병력을 가지고 싸움을 걸어 남부측 서부전선이 완전히 붕괴하는 상황이 만들어졌다는 걸 상기하면 의미가 없다고 하기 매우 힘들다. 그리고, 하도 남부군이 북부군의 보급을 방해할려고 우월한 기병대를 동원해서 북부군의 물자를 약탈하고 파괴했는데 이 피해가 어마어마 했다. 결국, 셔먼 입장에서는 애틀란타를 점령한 이후에 보급로를 사수하기 위하여 후방으로 되돌아가 철도 및 보급로를 보호하면서 후드하고 지루한 숨박꼭질을 하던가던가, 아니면 그대로 앞으로 진격하면서 중간중간 현지에서 보급을 조달하면서 남부군의 방해 없이 보급을 마음껏 받을수 있는 항구로 갈것인가 둘 중에 하나를 골라야 했는데 당연히 셔먼은 "바다로의 진군"이라는 논리적인 선택을 했다.


남군은 남부의 교통의 허브이자 주요 보급도시였던 애틀랜타를 지키지 못했는데, 이게 전쟁을 사실상 결정지은 결정적인 패배였다. 이 패배가 없었으면 로버트 E. 리는 북진을 강요당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후방이 털리지 않은 남부군은 어느정도 전역유지가 가능해서 장기전으로 끌고갈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링컨이 대선에서 패배했을 것이다. 거기에 셔먼의 북군에게 애틀랜타 전투에서 크게 패함으로써 사실상 전쟁지속능력을 잃어버렸으며 남은 전력도 프랭클린-내슈빌 전투에서 후드의 남군이 토마스 장군과 스코필드 장군의 북군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면서 상실하게 된다. 애틀란타 전투가 전세를 기울어지게 한 전투였다면, 이 전투는 남군이 전쟁을 이길수 있는 눈꼽만한 가능성마저 완전히 날라간 전투라고 볼수 있다. 이 전투는 어떤 관점에서 보면 게티스버그 전투보다 더 중요한 전투였는데, 이 당시 셔먼이 바다로의 진군으로 남군의 후방을 휘젓고 있긴 했으나 북군이 프랭클린-내슈빌 전투에서 패배할 경우 남군 역시 무주공산이 된 북군의 후방을 휘저을 수 있게 되므로 전쟁이 장기화되어 남부 정부가 원하는대로 북부 정부를 협상테이블로 끌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애틀랜타 전역에서 큰 패배를 당하여 전력이 많이 줄어든 시점에 있어 남군의 패배는 필연적이었고 실제로도 그렇게 됐다. 이 때의 패배로 후드는 woodenhead[31]란 별명을 얻었다. 본래 뜻은 공세을 펼치는 모습이 마치 통나무로 밀어붙이는듯 하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었으나, 이 패배 이후엔 머리가 나무로 가득 찬, 즉 돌대가리와 같다는 모욕어린 뜻으로 바뀌었다. 결국 남군은 이런 서부전역에서 열세로 말미암아 서부의 물자와 인력이 동부를 지원하기는 커녕 동부의 주전력으로 서부를 지원해야 할 상황에 몰렸다.

4.5. 종료[편집]

동부전역에서는 그랜트의 지휘 아래 북군의 대병력이 리의 북버지니아군을 다방면에서 공격해 압박하기 시작했다. 야전에서 의 남군은 병력과 물자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환상적인 작전능력을 선보이면서 그랜트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보통 패배하면 퇴각해서 재정비와 보급에 치중하던 기존 지휘관들과 다르게 그랜트는 굳이 후방 기지로 퇴각하지 않고 어차피 패배했어도 현존 전력이 우위였으니 계속 싸울 수 있으므로 보급은 철도와 해로를 통해 해결하기로 하고 리치먼드로 진격하기로 하였다. 이 결정은 전쟁의 판도를 완전히 뒤집어 버리는데, 전술적인 승리로 전략적 열세를 만회하던 상황에서 전략적으로 많은 인구와 물자로 인해전술로 밀어붙이는 소모전으로 바뀌자 가 계속 전투에서 승리하더라도 연방의 주력인 포토맥군을 완전히 '증발'시키는, 그러면서 자신의 북버지니아군은 온존하는 수준의 대승리가 없이는 북군을 내쫓을 수 없게 된다. 전쟁터가 남부 한가운데가 되었고 그랜트가 패배에도 불구하고 계속 우회하면서 끈질기게 리치먼드로 진격하자 는 자신의 장기인 기동전을 버리고 야전 축성을 해서 농성전을 벌이게 되는데 애초에 의 장기는 축성전이었다.

이렇듯 전술적으로도 소모전이 된 것이다.

동시에 셔먼도 사우스 캐롤라이나노스 캐롤라이나를 거쳐 버지니아 주 쪽으로 진격해 를 남북에서 압박하는 형세가 되었다. 1864년 7월에는 리의 명령을 받은 주발 얼리(Jubal A. Early)가 상황을 뒤집어보려고 1만 5천의 군대로 포토맥 강을 건너 워싱턴을 기습 공격해보려 했으나 그랜트의 신속한 증원군에 가로막혀 실패하고 이후 쉐리던이 이끄는 추격군과의 전투에서 세난도어 계곡이 초토화 된다. 1865년 4월 1일에는 남부의 수도인 리치먼드가 함락되었으며, 는 전술적으로나 병참 상황으로나 계속해서 싸울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결국 같은 해 4월 9일, 남군 총사령관 장군이 버지니아 주 애퍼매톡스(Appomattox)에서 그랜트가 보는 가운데 항복 문서에 조인하면서 남북전쟁은 완전히 종전됐다.

5. 분석[편집]

5.1. 북부[편집]

북부는 전쟁 초반에 준비가 안되었기 때문에 그 막강한 국력을 가지고도 제대로 야전에 투입할 수 없었고 초반에 남부에 계속 패배하여 포토맥 강 근처까지 밀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기본적인 국력의 우위 덕분에 몇 번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계속 병력을 충원할 수 있었고 장비나 보급에 있어서도 항상 여유가 있었다. 덕분에 북군은 전쟁 내내 남군보다 잘 먹고 잘 입고 좋은 무기로 싸울 수 있었으며 언제나 전력상 우위를 놓치지 않았다.

여기에 북부는 정치적 혼란과 인기없는 전쟁이라는 악재에도 불구하고 전쟁 목표를 명확하게 설정하여 뚝심있게 밀어붙였다. 연방 대통합을 위해서 남부의 항복이라는 목표를 우선 확인하게 했고 그를 위해서 장기적으로는 아나콘다 계획으로 서부와 동부를 분리한 후 수출입을 막아 고사시켰으며, 단기적으로는 동부의 포토맥군이 리치먼드 함락 혹은 동부전역 남군의 주력인 의 북버지니아군 섬멸을 목표로 끊임없이 공세를 지속했다. 그 결과 남부를 고사시키면서 전쟁 수행 능력을 빼앗았을 수 있었으며 결국 셔먼에 의해 서부가 완전히 박살나는 동안 동부에서 그랜트의 소모전에 말린 남군은 남부 한가운데서 결전을 강요받고 패배했다.

하지만 북부는 비단 초반뿐 아니라 그랜트 취임 이전까지 지휘관들의 역량이 남부에 처지는 것에 더해서 소극적인 지휘 때문에 우세한 전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전술적 문제를 갖고 있었다. 능력이 있고 병사들에게도 인기가 있던 매클레런은 소극적인 지휘로 하마터면 가 북부로 진격하는 것을 허용할 뻔 했다. 심지어 게티스버그 전투 당시 지휘관인 미드마저도 전투가 끝난 후 링컨의 추격 명령에도 불구하고 소극적으로 나서서 의 남군을 끝장내는 데 실패했다. 이런 소극적이고 고전적인 지휘로 북군은 상당히 오랫동안 남군에게 계속 휘둘릴 수 밖에 없었다. 이 상황은 그랜트의 부임으로 비로소 반전되었다.

5.2. 남부[편집]

남부는 북부 이상으로 전쟁 준비가 안된데다가 기본적인 국력이 북부에 한참 미달하였지만 북부도 당장은 상황이 비슷했기 때문에 초반에는 그렇게까지 불리하지 않았다. 남부는 각 주를 지키기 위해서 모인 자발적인 병력이 근간이어서 '침략군'인 북부를 몰아내자는 병사 개개인의 목표 의식이 강했고 전투의지도 높았다. 북군에 비해 모든 게 부족한 상황에서 끝까지 전투를 치른 남군의 감투정신은 이런 기반에서 나왔으며 그 결과 신발도 없어서 맨발로 행군하면서도 전술 단위의 전투력에서는 항상 뛰어난 전과를 보여주었다. 장교단도 미국-멕시코 전쟁을 경험한 인재들이 많았고 특히 리와 잭슨 등 남군의 명장들이 뛰어난 병력과 합쳐진 덕분에 초반에는 강력한 북군을 말 그대로 관광태우고 다녔다. 그래서 전쟁 초기 북군의 연이은 패배는 연방에 충격을 주곤 했다. 압도적인 국력을 가져서 남부는 간단하게 제압할 수 있으리라는 예상이 빗나갔기 때문.

사실 그 잘난 장교단도 전쟁 중반을 넘어서면 실력의 간극이 좁혀진다. 율리시스 그랜트나 윌리엄 셔먼 등 북군에서 새로 유능한 장군들이 계속 등장한 반면 남군의 장교단은 스톤월 잭슨이 죽는 등 지속적으로 소모되고 있었다. 고급 장교들 뿐만 아니라 하급 장교들도 북군의 경험이 쌓이면서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오르게 된다. 뭐 애초에 장교단 차이도 없었다. 북측에 더 많은 웨스트 포인트 졸업생들이 가담하였고, 상급 장교들도 북측이 더 많았다. 예를 들어서 최고위 장성급들은 알버트 존슨 및 3명정도만 빼면 죄다 북측에 붙었다. 그나마 점점 전쟁이 불리해지니 남측은 정치적 및 여러가지 이유로 유능한 장교들을 해임하고 겨우 위관급 장교 출신에게 별을 달아주는등 아주 개판 이였다.

하지만 전략 단위로 보면 남부는 실패했다. 남부는 연방에서 벗어난다는 목표를 세우고 이를 위해서 유럽, 특히 영국과 프랑스의 승인을 얻으려고 노력했다. 전술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외교적으로 승인을 얻는 전략은 독립전쟁 당시와 비슷한 방법이었는데, 영국이 이집트에서 대체 목화 수입로를 확보하면서 남부 목화의 경제적 가치가 줄었고 앤티텀 전투 후에 노예 해방 선언으로 유럽 국가들의 참전 명분까지 차단되면서 실패했다. 오히려 북부의 봉쇄로 목화 수출이 중단되어서 경제적 어려움만 커졌다.

전술적 승리를 외교적으로나 국가 전략으로나 써먹지 못하게 되자 남부 대통령인 제퍼슨 데이비스는 북부보다 훨씬 모자라는 전력을 가진 남부가 방어전을 펼쳐야 이길 수 있다고 보았고 북진 공세에 소극적이었다. 애초에 남부가 전쟁에서 우월한 교환비로 계속 이길수 있던 이유는 대부분 전장이 남부였고, 남부는 공세가 아니라 주로 방어하는 측이였기 때문이였다. 전술적으로 아무리 승리해도 전략적 상황이 개선되지 않으니 북부는 계속 병력을 모아서 밀어붙이고 남부는 이걸 겨우 저지하는 형태가 되면서 전쟁의 주도권은 북부로 넘어갔다. 그나마 로버트 E. 리가 이끌던 동부전선은 전선유지라도 했지, 서부전선은 빅스버그 전투 이후에 상태가 개판이였다. 아무리 장교단이 좋아도 병력이 부족하고, 물자가 부족한데, 대통령이라는 작자는 정치질하기 바쁘고, 주 정부들은 서로 따로 노는데 도저히 이길수가 없었다.

방어전 위주의 전략이 아주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제대로 된 준비없는 방어전략은 결국은 소모전만 강요하게 될 뿐이었다. 반전여론을 지피기 위해서라도 북부에 심대한 타격을 주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최소한 동부에 있는 북군 주력인 포토맥군을 전멸시키는 수준의 승리가 필요했다. 사실 애틀란타를 점령하기 이전에 선거에서 링컨의 실각은 거의 확실시 되고 있었지만, 동부전선이 고착된 상황에서 덜컥 셔먼이 남부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인 애틀란타를 점령하면서 군대의 사기가 확 오르고, 북부의 전쟁 의지도 다시 살아나게 된다. 전쟁 초반에 그런 기회도 간간히 왔지만 제대로 된 마무리가 부족해서 북군의 주력은 끝까지 건재했다. 게다가 상황이 그 지경인데도 흑인 노예들을 끝까지 멸시하여 군사력으로 활용 안하다보니 군사력의 열세는 면할 수가 없었다. 이 때에도 몇몇 주들은 흑인 노예 인구가 주 인구의 절반가량이였다. 흑인 노예들을 군재로 동원하려면 해방을 시켜주어야 하고, 그러면 남부 동맹의 결성과 전쟁을 일으킨 것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여러모로 태생적, 이데올로기적 측면에서 남부의 명분은 이렇게 취약했다. 북부와 같이 흑인들의 대규모 입대는 없었어도 남군에 흑인 병사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남북전쟁 시기의 사진을 살펴보면 남군 출신의 흑인 병사가 찍힌 사진들도 꽤 나온다. 다만 오해를 하면 안 되는게, 전쟁 최후반까지 흑인 노예들의 입대는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흑인 병사들은 대부분 집안에서 데려온 노예였다. 남부군의 1/3이 노예를 소유한 집안 출신이였다.

결국 아무리 전술적으로 승리해도 상대방은 좀 쉬면 금방 다시 공세에 나서고 이를 지난번 전투로 피해를 입은 병력을 동원하여 다시 막는 상황이 이어졌다. 이처럼 전술적으로 아우스터리츠에 비견될 정도가 아닌 이상 소모전에서 남부가 우세를 점할 가능성은 없었다.

한니발의 예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오히려 막강한 전력의 북군이 남부에 쏟아지지 않고 남부가 전장에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적극적으로 북부로 진격해서 북군을 붙들어매고 북부 영토를 휘젓고 다닐 필요가 있었다. 실제로 리가 제대로 북진했으면 북부의 수도권이 전부 남부의 영향에 들어가기 때문에 링컨은 어쩔 수 없이 종전 협상에 나서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다음 선거에서 패배하여 실각할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 그냥 전선유지만 해도 어차피 미국 어디까지나 민주주의 국가였기 때문에 돈 많이 들어가고, 많은 인명이 희생되는 전쟁에 지친 국민들이 링컨을 재선시켜주지 않으면 남부가 이기는 것이였다. 그리고 거의 그렇게 될 뻔 했다. 다만, 오히려 북부가 고착된 동부전선은 유지하고, 빅스전투 이후에 미시시피 강이 확보되어 진격이 훨씬 더 쉬워진 서부전선를 통해 승부를 보려고 했고, 애틀란타를 점령한 이후에는 오히려 남부의 후방을 휘저으면서 남부의 전쟁의지를 완벽하게 꺽어버렸다. 이에 두 차례의 북진이 하필이면 명령서 분실 몰 말아먹은 앤티텀 전투와, 장군들의 삽질로 패한 게티스버그 전투로 왕창 꼬인 로버트 리의 사정도 감안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정작 경험도 없던 장교들에게 지휘를 맞기고, 내리는 지시는 맨날 애매모호하게 내린건 리 본인이다. 스톤웰 잭슨같은 경우 이 방식이 운이 좋아서 맞아 떨어진 거지, 따른 장교들도 통할거라고 똑같이 지시를 내린 건 리 본인 책임이다. 정말로 큰 마음 먹고 감행한 북진인데 북군이 남부에 공세를 가할 때 겪던 지리적 정보의 부족 문제와 주민의 비협조 등을 역으로 겪으면서 결국 실패했다. 북부주에 가까웠던 동네 사람들이 보면 남군들이 침략자 딕시들이였던것이다.

6. 결과와 의의[편집]

이제 그만하게. 반란군[32]들은 다시 우리 동포가 되었어.
율리시스 S. 그랜트 장군, 북군의 일부 병사들과 장교들이 승전을 축하할 때 남군 패잔병들을 폭행하려는 것을 제지하며

나는 전쟁에 진절머리가 난다. 전쟁의 영광이란 것은 다 헛소리다. 적들의 피를 요구하고 복수와 파괴를 외치는 놈들은 모조리 총 한번 쏘아본 일도 없거나 부상자들의 절규와 신음을 들어본 일도 없는 작자들이다. 전쟁은 지옥일 뿐이다.
윌리엄 테쿰세 셔먼


미국 내에서만 벌어진 전쟁이라 잘 인정받지 못하는 경향이 있으나, 사실상 최초의 현대적인 총력전이다. 전열보병 위주의 근대적인 전투에서 처음 탈피한 전쟁이 남북전쟁인 것은 맞다. 그러나 현대전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현대전이란 보통 베트남 전쟁이나 그 이후 전쟁을 말한다. 물론 남북전쟁이 최초의 현대적인 총력전인 것은 맞다. 모든 국가적 역량을 동원해서 싸우는 총력전은 이미 나폴레옹 전쟁 때의 프랑스가 완전하지는 않아도 선보인 바 있지만 나폴레옹 전쟁을 현대전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후술 하겠지만 남북전쟁의 군사학적 최대 의의는 기존과는 판이한 '전술의 변화'일 것이다. 당장 이전의 크림 전쟁만 해도 전열보병이 주축이 되서 싸웠다. 그러나 남북전쟁 이후론 더이상 전열보병이 주축이 된 전투가 없었다. 당장 그 뒤에 벌어진 보불전쟁만 봐도 그렇다. 또한 기병 역시 전통적인 충격력을 이용한 돌격전만을 수행한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기계화보병처럼 활용되기도 했다.

유럽에서는 1차 세계대전 때나 경험하게 되는 현대전의 모습들이 비행기[33]와 전차의 존재만 빼고 대부분 여기서 벌어졌다고 보면 된다. 총기 기술과 정밀도의 발전으로 보병 전술이 이전과는 달라짐과 동시에 최초로 저격수라는 병과가 탄생해 전장에 투입되고[34] 수동식 기관총이 실전에 투입되었다. 이미 미니에 탄이 사용되고 있어서 총기의 명중률이 높아진 데다, 전쟁 말기의 북군 일부에선 스펜서 연사 소총(Spencer repeating rifle) 같은 연사화기까지 사용했기에 나폴레옹 시대와 같이 개활지에서 대오를 갖춰 일제사격을 노리는 전투는 상대측에게 사격 연습 타겟을 제공해 주는 것이었고, 당연히 큰 손실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제1차 세계대전 때와 같은 참호전 양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남북전쟁을 참관했던 유럽 군인들은 하나같이 "역시, 촌놈들은 전쟁을 무식하게 하는구만ㅋ."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런 전투 양상은 50년 후에 유럽에도 똑같이 재림하게 된다.

물론 그 결과는 막대한 사상자의 발생이었으나, 철도의 존재로 기계화된 보급 수송수단을 가진 관계로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막대한 양의 물자와 병력을 전투에 투입 가능했다. 그런가 하면 국가의 모든 능력을 전쟁에 동원한다는 총력전의 개념이 처음으로 서기도 했고, 상대국의 전쟁수행능력 자체를 목표로 삼아 전략적으로 공격하는 행동 양상도 이때 생겨났다. 이 '바다로의 진군'을 수행한 셔먼 장군을 최초의 현대전을 지휘한 장군으로 평가하는 문서는 유럽에서도 종종 나올 정도. 심지어는 최초의 철갑선끼리의 포격에 잠수함(!)까지 등장했다.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자국민이 사망한 전쟁[35]이었으나 미국은 이를 바탕으로 민주국가로서의 대외적인 '간판'을 세울 수 있었고, 이전과 달리 정치적, 군사적으로 강력한 통합을 이루게 됨으로써 이후 미국이 제국주의 열강 국가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그리고 전쟁의 명목이었던 '노예제 폐지'가 이루어졌으며 흑인의 지위가 마침내 백인과 동등해지고 공직에 진출하는 등 장밋빛 전망이 펼쳐졌으나, 흑인 지위 상승과 함께 남부의 '옛 반란군'을 박살내려던 전쟁장관 스탠턴 등의 공화당 급진파[36]가 몰락하고 공화당이 보수화되면서 대통령 선거 부정을 덮기 위해 민주당과 타협한 끝에 결국 흑인의 지위가 달라진 건 별로 없었다. 뒤늦게 남부에서도 전쟁 말기에는 '독립을 위해서라면 영국프랑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노예 해방도 가능하다'란 주장을 검토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미 전세를 뒤집기엔 너무 늦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정치적 타협과는 별도로 전후 미국 민주당은 내전을 일으킨 원흉으로 지목받아 엄청난 어그로를 끌어모아서 한동안 대통령을 배출하지 못했으며, 19세기 후반에 뉴욕주의 지지를 얻은 그로버 클리블랜드만이 당선될 수 있었다. 남부 출신 대통령은 남북전쟁이 끝난지 50년 가까이 지난 때, 버지니아 주 출신 우드로 윌슨이 공화당의 분열 끝에 당선되면서 이루어졌다. 1872년 대선에서는 아예 민주당에서 후보조차 내지 못하고 공화당에서 분당한 자유공화당(남부에 대한 탄압이 주 레퍼토리)의 호레이스 그릴리를 지지하는 촌극까지 벌인다.

게다가 남부 지역 전체가 군부의 지배를 받는 등[37] 그 처벌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미국 역사상 독립 이후 특정 지역이 군부의 지배를 받은 것은 이때가 유일하며, 이 조치는 편법을 써서 대통령이 된 러더퍼드 헤이스 대통령의 공약으로 해제된다. 항목 참조.

여담이지만 남북전쟁 이후에도 남부 해군기는 반항과 저항의 상징(...)으로는 심심치 않게 사용되는데, 현재에는 남부기를 들고 다닐 경우 인종차별주의자 + 꼴통으로 찍히지만 한편으로는 병신같지만 멋있어(...)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미국의 Deep South 라고 불리는 지역에서는 이런 반응이 현저히 적다. 미국 전체가 이런 반응은 아니다. 실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오키나와 전투 중에는 오키나와의 중심지 '슈리 성'에서 대공식별용 성조기가 없자 해병들 중 한 명이 휴대하고 다니던 남부기를 게양해 당시 미군 지휘부가 황당해한 에피소드[38]가 있으며, 심지어 6.25 때도 남부기를 달고 다니는 미군 전차부대를 본 한국군 포병대가 '헐 어디 군임? 저거 적군임 아군임?'하고 발포를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마침 미군 군사 고문단 장교가 말려서 아군인줄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베트남전 때는 남부 출신 백인 미군들이 남부기를 달고 다니다가 흑인 및 북부출신 미군들과 패싸움이 터지는 일도 잦았다. 이 때문인지 게임에서도 심심찮게 나온다. 국민장기 스타크래프트의 테란 연방도 남부기 사용(...). 미국 남부주 흑인들과 인권운동가들이 남부 주청사에 게양된 남부기의 영구폐기를 강력히 주장해 성공한 일도 있지만 이에 반해 계속 게양되어야 할 것을 주장하는 세력의 반발 역시 만만치 않다. 2015년 딜런 루프에 의한 총격 사건으로 남부기는 잠재 테러집단인 백인 우월주의 인종주의의 상징으로 낙인찍힌 상태. 아마존, 이베이, 월마트 등의 기업들은 남부기가 찍힌 상품을 취급하지 않기로 결정했고, 미국의 국기 제조 회사들도 더 이상 남부기는 생산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최근까지만 해도 이 깃발을 두고 찬반 논란이 팽팽했던 구도인데, 퍼거슨 사태, 에릭 가너 폭행 치사 사건, 딜런 루프의 테러 사건 등으로 근 몇년 사이 인종 문제가 미국 사회의 주요 담론으로 다시 재부상하면서 나치의 하켄크로이츠나 동아시아에서의 욱일기 같은 혐오, 증오 상징으로 단속해야 한다는 여론이 더 커지고 있다. 하여튼 외부인이 뭣도 모르고 "멋있다", "자유를 사랑하는 남부동맹 짱짱맨"하면 험악한 눈초리가 쏟아지는 분위기이니 주의해야 한다.

현재도 미국은 연방 탈퇴에 관한 성문화된 법이 없는데, 남북전쟁은 어떤 주가 연방 탈퇴를 선언할 시 연방정부가 전면전을 불사하고 무력으로 굴복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다시 연방으로 끌어들이는 강력한 선례로 남았기 때문에 현재 연방 탈퇴란 상상할 수도 없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현재도 미연합(Confederacy)을 그리워하는 정서가 있는 남부 인구 일부가 공공연히 연방 탈퇴를 바라고는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현실성 없는 허황된 꿈일 뿐.

대외적으로 아시아에서 미국의 개입 능력이 약해지는 원인이 되어 조선에서 제너럴 셔먼호 사건(1866년) 이후 5년이나 지나서야 신미양요가 일어나게 되었고, 일본에는 쿠로후네 사건 이후 미국의 영향이 적어져 메이지 유신에 간접적으로 도움이 되었다.

7차 교육과정 한국근현대사 교과서에는 남북전쟁을 다루지 않았기 때문에 본문에 서술된 부분까지 파악하게 되면 "참 뜬금없는 전개다"라는 생각을 갖게 될 수 있다. 애시당초 미국의 건국에서부터 서부개척, 남북전쟁, 미국의 제국주의화까지 전부 연관되어 지속된 역사인데 그 일부분만 떼어놓고 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다. 물론 그렇게까지 몰라도 근현대사 시험치는 데는 지장없었다.

특히 한국의 경우, 신미양요에서의 미군의 일시적인 승리에도 불구하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던 주된 이유로 남북전쟁 이후 원정을 벌일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점이 꼽히고 있다. 당시 조선의 강화도 수비군은 궤멸당했으며,[39] 그 상태로 한성이 함락되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던 상황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여담으로 조르주 클레망소가 이 시기 미국을 방문하여, 최초의 현대전이 총력전으로 가고 있음을 체험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그가 이끈 프랑스는 비슷한 행동과 비슷한 대응들이 이어졌다.

7. 무장[편집]

7.1. 육군[편집]

7.2. 해군[편집]

8. 주요 인물[편집]

8.1. 북부[편집]

8.2. 남부[편집]

9. 주요 전투[편집]

10. 대중문화 속의 남북전쟁[편집]

현재 미국인의 정체성에 영향을 미친 가장 큰 사건으로서 미국인들의 관심사도 대단하다.

  • 미국 공영방송 PBS에서 방영한 9부작 다큐가 유명하다.

  •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한 가장 유명한 작품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이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 참고. 그리고 패트릭 스웨이지가 주연한 TV 드라마 남과 북은 이들 사건이 배경이 되어 이야기가 전개된다(1980년대 중반에 한국 KBS에서 방영되어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 이 드라마만 봐도 남북전쟁의 배경이나 전개 양상을 잘 알 수 있다.

  • 서부극의 수많은 구도 중 대표적인 연방보안관 vs 무법자 갱단의 대립구도는 사실 남북전쟁 때문에 발생했는데, 서부개척기의 유명한 무법자(대표적인 예로 제시 제임스)들은 대부분 남부 패잔병들이 주류였고, 그들을 체포하러 다니는 연방보안관은 대부분 북군 출신이었다. 이 때문에 서부개척기를 남북전쟁의 연장선으로 보는 시선도 있다.

  • 콜 오브 후아레즈 : 바운드 인 블러드의 프롤로그는 남북전쟁 말기에서 시작하는데, 주인공인 레이 맥콜과 토마스 맥콜은 남군으로 복무했다가 가족이 위험해지자 탈영하여 무법자가 된다. 하지만, 맥콜 형제가 탈영한 탓에 원래 지켜야 할 곳이 함락되고, 그렇게 남부의 패배가 더욱 빨라졌다고...

  • 미국 드라마 파이어플라이에 보면 인간끼리 내전을 겪은 뒤 패한 측의 군인 출신들이 중앙 정부에 의해 자주권을 빼앗겼다는 불만을 갖는 설정이 있는데, 이 때문에 그 배경 설정이 미국 남북전쟁과 유사하다고 보는 평가가 있다.

  • 미국 영토 안에서 미국 국민에 의해 자발적으로 수행된 대규모 장기전이었기 때문에 미국인들의 역사 인식에 아주 커다랗게 남아 있다. 미국인들 사이에서는 남북전쟁을 연방의 수호를 천명한 북부와 주의 자주성을 주장한 남부의 '선과 선의 대결'이라고 보는 시각이 꽤 있는데, 이 때문에 양편 모두 매력적인 면모가 필요한 미국산 서브컬쳐 계열에 많이 투영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마블 코믹스의 시빌 워도 있고, 트랜스포머에서도 오토봇과 디셉티콘의 기나긴 대결을 Civil War라고 칭한다. 스타워즈의 클론전쟁 또한 은하 공화국과 분리독립하려는 자들의 대결인데, 여기서는 오랫동안 전쟁이 없었기 때문에 전술 개념마저 실제의 남북전쟁 수준으로 퇴화되어 드로이드 군단은 일단 밀집 대형을 형성해서 회전을 시도한다. 그리고 스타크래프트테란 연합의 경우 아예 깃발을 남북전쟁 당시의 남부기로 쓰고 있다.

  • 미국의 현대음악 작곡가 필립 글래스는 남북전쟁을 주제로 총 2편의 오페라를 작곡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애퍼매톡스. 그만큼 남북전쟁은 여전히 미국인들에게 큰 역사적 화두인 것.

  • 퍼시 잭슨 시리즈의 후속작인 《올림푸스 영웅전》에서는 남북전쟁이 그리스 반신과 로마 반신들 사이의 싸움이었다고 말한다. 그 때의 위대한 장군들은 반신들이었으며, 그 전쟁 때문에 신들이 이중인격자가 되어버리는 일이 발생하여 전쟁 종결 후에 서로의 존재를 감추었다는 설정이 붙었다.

  • 1989년에는 인포그램에서 남북전쟁을 게임으로 발매하기도 했다. 자세한 내용은 남북전쟁(게임) 항목 참조.

  • 현재는 도산한 미국의 게임회사 탤론소프트(TalonSoft)에서 남북전쟁의 주요 전투를 배경으로 한 워게임 타이틀을 여러개 발매했다. 대표적인게 배틀그라운드 시리즈. 현재는 판권을 이어받은 매트릭스 게임즈(Matrix Games)에서 존 틸러의 배틀그라운드: 시빌 워라는 패키지로 관련 5작품(게티스버그, 샤일로, 앤티텀, 불 런, 치카모가)들을 묶어 판매하는 중이다. 그 외 2005년 3D 그래픽으로 제작한 턴제 게임인 American Civil War: Gettysburg도 존재. 또다른 턴제 전술 게임으로 1996년 임프레션 게임즈(Impressions Games)에서 개발하고 시에라 엔터테인먼트(Sierra Entertainment)에서 유통한 로버트 E. 리: 시빌 워 제너럴과 이듬해 발매된 후속작 그랜트-리-셔먼: 시빌 워 제너럴 2도 존재.

  • 한국만화 웨스턴 샷건이 남북전쟁 직후의 시기를 모티브로 했다. 해당 작품에선 노우스 군, 사우스 군이라는 명칭으로 불리며 해당 전쟁을 겪은 인물들의 후계자들이 주인공. 단 전쟁 자체는 그저 배경 소재이며 내용은 서부극 액션만화.

11. 여담[편집]

미국에서는 이 전쟁을 연방 사수(북부) vs 주의 자치권(남부)의 대립으로 보는 경향도 강하다. 노예제는 명분에 불과했다는 시각이다. 후대 컬럼비아 대학을 중심으로 한 친남부 역사학자들은 더 나아가 "남북 전쟁은 노예제를 두고 남부가 일으킨 반란이 아니라 각 주의 권리를 짓밟기 위해 북부 연방 정부가 시작한 전쟁이다"라는 극단적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비판적인 관점에서 보면 막상 전쟁 이전과 당시, 직후에서 남부 동맹측 주요 정치인, 언론인, 장군들의 발언들을 조합해 보면 남부 동맹의 대의는 명백하게 노예제와 백인 우월주의의 사수였지, 주의 자주권 따위 거창하고 세련된 명분이 아니었다. 노예제와 상관없이 주의 자주권이 문제였다면 앤드류 잭슨 시절 사우스 캐롤라이나가 연방 탈퇴 드립을 쳤을 때 같은 남부 주들이 전부 다 이를 외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북부, 특히 영국과의 교역에 깊게 의존하던 뉴잉글랜드 지방의 주들도 1812년 전쟁 당시 주의 자주권 드립을 치며 연방의 전쟁에 비협조적으로 나온 적이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뉴잉글랜드가 반란을 일으키고 독립 전쟁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이러한 사관에 비판적인 역사학자들은 이 사관이 노예제 문제를 희석해 남부동맹을 미화하는데 그 목적이 있으며, 전쟁이 끝난 이후 제퍼슨 데이비스 같은 남부 인사들의 사후 변명과 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에드워드 폴러드, 더글러스 프리먼 등 친남부적 역사학자들이 확립하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국가의 탄생 같은 프로파간다성 대중 매체를 통해 재생산된 관점이라 주장한다. 여기에 이 문서의 '배경' 항목에서 언급한 경제적인 요소나 전쟁 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흑인의 권리 문제, 전후 처리 문제 등이 연방 정부의 정당성을 희석했을 가능성이 있다.

2017년에 들어와서는 이 남북전쟁의 문제 때문에 미국 사회가 다시 골머리를 앓고 있다. 로버트 리의 동상과 같은 남부의 시각에서 만든 남북전쟁 조형물의 철거 문제를 두고 시위대들이 충돌하고 있다. 특히 버지니아 샬러츠빌에서는 철거를 반대하는 백인우월주의자 시위대들이 나치 깃발을 들며 대규모 폭력 시위를 행하고, 인종차별을 반대하던 시위대에게 백인우월주의자가 차량을 몰고 돌진해서 사망자가 발생하는 등의 대형 사건이 벌어졌다.

USA 투데이
남북전쟁의 연금수령자가 아직 생존해 있어 화제가 되었다. Moses Triplett이라는 이름의 1846년생 남자가 남북전쟁에 참전해서 연금수령 자격을 얻었고 1920년 그의 첫번째 아내가 죽자 1924년 50세 연하의 Elida Hall이라는 여성과 결혼했으며 1930년 83세의 나이로 Irene Triplett이라는 딸을 낳았다. Irene Triplett은 부모 사후 Moses의 자녀 자격으로 연금수령자가 되었는데 2017년 8월 현재 생존 중이며 미국 보훈부는 Irene Triplett에게 매달 73.13달러의 연금을 지급하고 있다고 한다.

12. 둘러보기[편집]

[1] United States of America[2] Confederate States of America[3] 1861년 5월 29일까지는 앨러배마의 몽고메리였다.[4] 노예는 약 40만 명이었다. 노예주 중 일부가 북부 연방에 참여했기 때문. 본문 참조.[5] 이중 노예가 3,521,110명에 달했다.[6] 노예해방으로 전원 자유인.[7] 노예는 1,900,000명.[8] 연인원이 아니다. 1963년 최대 병력을 기준으로도 북부는 60만이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 #.[9] 각 진영이 입은 군복의 색상을 따와서 'Blue and Gray War'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10] 남부에 대한 군정이 해제된 1877년까지로 잡는 시각도 있다.[11] 기아자동차 미국 현지 공장이 있는 조지아 주의 웨스트 포인트가 한 예로 주력 산업이 방직업이었다가 사장된 지역이다.[12] 면화 생산은 본격화된 시기를 기준으로 10년마다 2배씩 증가하였다.[13] 이 시기 남부에서는 수많은 인종학자들이 흑인 열등론을 전파하고 있었다. 이들의 기준에서 흑인은 인류에서 가장 저급한 부류이자 퇴화한 존재였기 때문에 이들을 구제할 방법도 없다고 믿고 있었다.[14] 실제로 이때 이탈리아아일랜드같은 유럽의 여러 국가에서 이민자들이 뉴욕과 같은 북부주와 같은 지역으로 이민 러시를 이룬다. 이 시기를 다룬 영화가 바로 갱스 오브 뉴욕.[15] 흑인 한 명의 3/5 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전체 인구의 3/5이었다. 하지만 둘 다 이상하기론...[16] Diversity jurisdiction, 민사소송의 당사자가 서로 다른 주의 주민이거나 미국 시민이 아닌 경우, 연방 법원에서 이를 재판할 수 있게 한 개념.[17] 당시 제임스 뷰캐넌 대통령 밑의 부통령이었다. 미국 역대 최연소 부통령. 나중에 남부연합에 가담하여 남부군에 장성으로 입대한다.[18] 혹은 아메리카 연합국, 미연맹국, 남부연맹, 남부동맹, 남부맹방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한다.[19] 미국 깃발에서 별은 연방의 주 숫자만큼 있기 때문에, 별이 줄어든다는 것은 주의 연방 탈퇴를 의미한다.[20] 영토가 하나의 주로 승격하기 위한 최소한의 기준이 "현재 있는 주들중 가장 적은 인구수를 가진 주보다 더 인구수가 많을 것"이다. 2017년 기준으로는 알래스카 인구가 기준이고, 저 당시에는 보통 인구 5만 ~ 6만 명을 기준으로 했다.[21] 그의 아들도 입대하였다.[22] 1812년 영국과의 전쟁에도 참전한 노장으로 당시에 이미 74세(...)였다. 이 사람도 버지니아 주 출신이지만 연방군에 계속 남았다.[23] 자칭 나폴레옹(...)이었는데 군사적 재능은 있는 편이었지만 막상 전선에 나서면 리에게 끌려다니는게 일상이어서 결국 조지프 후커로 교체되었다. 매클레런은 이 일에 앙심을 품었는지 1864년 대통령 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다가 패배하자 곧바로 유럽으로 떠나버렸다.[24] 로버트 E. 리, 스톤월 잭슨, 제임스 롱스트리트 등의 장군들은 모두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 출신이다.[25] 1780년대생, 즉 18세기 사람도 섞여 있었다.[26] 장교단에서 극히 드문 19세기, 즉 1800년대 생이였으며 최초의 웨스트 포인트 출신 장성이였다. 실질적으로 고위급 장성들에서 유일하게 현장지휘가 가능한 나이였고, 실제로 남부로 붙자마자 남부측 장교단중에서 가장 높은 계급인 장성으로 곧바로 진급했으며, 전쟁이 끝날때까지 현역이였다.[27] 미국에서 제일 오래된 군사 대학이다. 미국 ROTC 제도의 산실.[28] 의외지만 리는 초창기에는 패전을 경험했고 한동안 참모장 격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리가 전면에 나서게 되는 것은 데이비스 대통령과 손발이 잘 맞는다는 면에서 발탁된 반도 전역부터이다. 하지만 그 전에도 남군의 뷰리가드, 잭슨, 롱스트리트 같은 지휘관들은 대체로 북군 지휘관들보다 우수했다.[29] 정확히는 포토맥 강 사이의 삼각주를 의미한다.[30] 이때 독립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이집트는 전쟁 덕분에 목화가격 폭등으로 많은 이득을 보았지만 남북전쟁이 종전되고 남부의 목화가 수출시장에 쏟아져나오자 가격폭락에 직격탄을 맞아 경제위기에 빠져 후일 영국의 보호령으로 전락하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31] 직역하면 나무로 된 머리. 적당히 로컬라이징하면 돌대가리 정도로 번역 가능하다.[32] 북군에서 남군을 흔히 비하할때 구사한 호칭(Rebel)으로 연방정부가 남부연맹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반란집단으로 규정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남군 스스로는 딕시(Dixie)로 불려졌다.[33] 비행기는 없지만 열기구를 통해서 정찰을 수행했다는 기록이 있다.[34] 여기에는 이견이 있다. 저격수라는 병과는 나폴레옹 전쟁 시대에도 있었고 따로 정규 부대편성만 안되었을 뿐이지 나폴레옹 전쟁이나 남북전쟁 훨씬 이전부터 있었다. 그러나 기술의 발전으로 1km 가까이 되는 거리를 저격할 수 있게 된건 최초였다[35] 당시 인구 약 3000만 명 중에 60만 명 이상이 죽었다. 남성 전투원만으로 전체인구의 2%가 죽었으니...[36] 다만 링컨 대통령 암살사건으로 인해 이들 급진파들의 관점에 힘이 크게 실렸고 한동안은 남부지역의 통치가 이들의 뜻대로 영향을 받는다. 밑에 후술하듯이 10년이 넘는 군정과 남부인들의 권리제한 등..[37] 연방 공직 임명시 남부인은 무조건 배제에 충성 서약을 하지 않을 시 참정권 등의 시민권 행사 불가는 덤.[38] 사단장이 새 국기를 보내줘서 이틀만에 성조기로 교체했다.[39] 강화도에서 조선군은 상대에게 극소수의 피해를 입혔을 뿐, 지휘관이 전사하고 군기까지 빼앗기며 패했다. 이때 빼앗긴 어재연 수자기는 136년만에 겨우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