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운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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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활동3. 성씨4. 기타

1. 개요[편집]

파일:external/image.ohmynews.com/paxcinema_190420_1%5B243026%5D.jpg

교과서에 나운규 사진이 실려있다면 대부분 이 사진이다.

파일:external/movie.phinf.naver.net/01.jpg

흔히 아리랑 1편의 스틸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 아리랑 2편의 스틸이다.


羅雲奎
1902년 10월 17일 ~ 1937년 8월 9일
일제강점기 한국의 영화배우/영화감독. 호는 춘사(春史).

2. 활동[편집]

함경북도 회령 출생으로 조선왕조의 군관이었던 나형권의 셋째 아들이다. 학교 졸업 후인 1920년에는 독립운동단체인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에 가입하여 항일전을 전개하여 활동하거나 홍범도가 이끌던 독립군에 들어가서 독립운동을 하였다.[1]

결혼을 했지만 윤마리아라는 여자와 사귀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헌병 보조원으로 악명이 높던 친일파 허진종(許振鍾)[2]의 협박과 구타 등으로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1924년 일본 자금으로 돌아가던 영화사인 '조선 키네마'에 들어가 배우로 데뷔했다. 처음에는 엑스트라 배우나 맡다가 '농중조'에서 비중있는 역할로 등장해 큰 인기를 끌게 되었다. 나도향의 단편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 '벙어리 삼룡이'에서 주인공 삼룡이역을 맡기도 했다.

1926년에는 직접 메가폰을 잡아 영화 아리랑을 제작하면서 스타급 감독으로도 떠올랐고 조선 영화의 황금기를 불러왔다는 평을 받는다.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으로 영화판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놨다는 평가를 듣고 이후 뇌물수수혐의로 구속된 조희문이라는 인간은 '아리랑은 나운규가 만든 작품이 아니라 일본인 감독이 연출한 작품이다' 라고 혼자 주장했다. 물론 말도 안 되는 헛소리이다. 영화 아리랑은, 애초부터 일제 강점기 시대에 제작된 반일 영화였던 탓에 심의를 통과시키기 위해 일본인 이름으로 심의를 넣어 무삭제로 통과시킨 것이었다. 결국 이것이 빌미가 되어 이후 제작한 작품들은 심의 통과가 어려워진데다, 심의 통과를 해도 가위질이 엄청나게 당하는 등 영화 제작을 하면서 끊임없이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나운규는 조선 키네마 영화사에서 독립하여 나운규 프로덕션을 설립하고 독자 노선을 걸었으나, 여전히 심의 통과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통속적인 영화나, 그동안 자신이 영화에서 보여줬던 정서와 동떨어진 일본 영화에 출연하는 등 어렵사리 활동을 이어갔다. 어떻게든 영화판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몸부림의 일환으로 작은 극단 소속 배우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대표작이었던 아리랑 후속작으로 아리랑 2탄, 3탄을 제작하기도 했으나 1편만 못한 후속작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실패했다. 특히 3탄은 당시 최신 기술이었던 유성 영화로 제작 되었는데, 여러모로 유성 영화로서의 수준도 좋지 않았던 듯.

그렇게 영화인으로서의 경력이 끝나는 듯 했지만, 천만 다행히도 사망 직전 개봉한 영화 오몽녀가 대흥행하면서 영화 감독으로써 자존심을 되찾게 되었다. 특히 기존의 작품들은 제작, 시나리오, 감독, 주연 등을 혼자 다 했다면, 오몽녀는 오롯이 감독으로만 참여하여 이목을 끌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당시로써는 난치병이던 결핵으로 인해 36세의 나이로 1937년에 죽고 말았다.

나운규를 기리기 위해 1990년 한국영화감독협회 주관으로 '춘사영화상'이 제정됐으며, 물론 한국 영화/영화인 대상의 시상식이다. 목록 특이한 점은 그 해에 줄 사람이 없다고 판단되는 상은 시상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2014년에는 감독상 수상자가 없었다.

나운규의 2남 1녀 중 둘째 아들 나봉한도 1960~70년대 영화감독으로 활동했다.

영화 아리랑 개봉 90주년을 맞아 최초로 나운규 사망 후 썼던 여배우들의 추모글이 발굴되었다. #

3. 성씨[편집]

참고로 실제 성은 ''씨라고 한다. 그래서 원래는 라씨로 하는게 맞지만 우리나라 행정상 공문서에 라씨를 나씨로 기록하던 관례로 학교다닐 때부터 성인된 이후까지 나씨로 계속 등록되어 와서 본인도 그냥 나씨로 살았다고 한다. 실제로 한국에는 많은 라씨들이 행정상 나씨로 살고 있다. 라미란의 경우에도 과거 데뷔 초 언론에서 '나미란''이라고 표기한 적이 많았다.

2007년 법이 개정되어 대법원이 호적예규 변경을 통해 두음법칙을 적용하는 성씨(姓)에 예외를 둠에 따라 '라'씨로 정정신청을 할 수 있게 되어서 신청한 사람들이 있지만 실제로 신청할 때 아버지 호적까지 라씨로 바꿔야 하는 규정이 있어 행정상 복잡한 부분도 있고 하기에 대부분의 라씨들이 안 하는 걸로 알려져 있다. 라미란의 경우에는 이를 신청하여 이후 언론에서 나미란이 아닌 라미란으로 표기되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세한 사항은 문서 내에 관계된 내용을 찾아 보면 알 수 있다.

4. 기타[편집]

파일:external/rikszine.korea.ac.kr/%EC%9B%901411-%EC%82%AC%EB%9E%91%EC%9D%84%EC%B0%BE%EC%95%84%EC%84%9C.jpg
이경규
사진에서 보면 알겠지만 나운규를 언급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은 강렬한 시선이다. 딱봐도 포스가 느껴진다. 실제로 같은 영화사 소속의 선배 배우가 이 눈빛을 보고 "너는 악역이나 범죄자 같은 배역이 어울린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50px-Na_Woon-gyu.jpg
근데 의외로 평소모습을 찍은 사진을 보면 윗사진처럼 강렬하지는 않은 편이다. 이건 손아섭 닮았다 콩짤?

한편으로는 무절제한 여자관계로 인해 비난도 받았다. 가정이 있었음에도 오향선이라는 기생과 동거하였으며 심지어 기생과 뱃놀이를 하기 위해 촬영 장비들을 팔았다는 루머도 있을 정도였다.[3]

나운규의 말기작들에 출연했었던 원로배우 전택이가 남긴 증언에 의하면, 어떤 여성이 배우가 되고 싶어서 나운규가 묵는 여관까지 찾아 왔는데, 그러다가 어느새 나운규와 눈이 맞고 말았다고 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그 여성의 남편이 격분하여 여관에 쳐들어와 각목을 휘두르는 사태가 발생했는데, 마침 그 자리에 있었던 전택이가 일본도를 휘두르며 (...) 나운규를 보호한 덕분에 나운규가 간신히 봉변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그야말로 평가가 카멜레온처럼 다양하다. 어떨떄는 천재적인 영화감독 이고 어쩔때는 여자관계가 문란했던 사람 어쩔떄는 조국을 위해 몸을 바쳤던 독립운동가 그야말로 드라마틱한 삶을 살다갔다.

1991년 MBC에서 광복절 기념으로 그를 주인공으로 하는 특집 2부작 드라마를 방영했다. 이덕화가 나운규 역으로 출연했다.

[1] 이 때문에 독립투사로 인정받기도 하며, 1993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2] 어떤 자인지 추가바람.[3] 오향선은 유신방이라는 이름으로 배우 활동을 하였다. 성격도 까칠한 편이였는지 당대 영화인들 사이에서는 평가가 좋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