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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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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김주열(金朱烈)

출생

1944년 10월 7일, 전라북도 남원군 금지면 옹정리

사망

1960년 3월 15일(향년 만 15살), 경상남도 마산시

학력

금지동초등학교(졸업)
금지중학교(졸업)
마산상업고등학교[1](명예졸업)

사인

경찰의 진압에 의한 중상

비고

4.19 혁명의 주요 인물
1995년 마산상업고등학교 명예졸업장 추서

가족관계

할아버지 김태종, 아버지 김재계(? ~ 1965), 어머니 권찬주(1920 ~ 1989.7.5)
형 김광열(1942 ~ 1985), 큰누나 김영자(1936 ~)
작은누나 김경자(1941 ~), 남동생 김길영(1955 ~ )


1. 생애2. 사망과 그 여파3. 기타

1. 생애[편집]

전라북도 남원군 금지면 옹정리에서 아버지 김재계와 어머니 권찬주 사이의 3남 2녀 중 차남(넷째)으로 1944년 10월 7일에 태어났다. 생존해 있었다면 현재 만 73살.

할아버지 김태종은 해방의 혼란기에 면장을 지냈으며, 아버지는 조합장을 지낸 천석꾼 부잣집이었다. 김주열이 어린 나이에 죽었으면서도 비교적 많은 사진이 남아 있는 것은, 이미 사진기와 전축을 가진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이다. 어머니 권씨는 경상남도 함양군 사람으로 ‘함양댁’이라 불렸으며, 이는 김주열의 영남 지방과의 인연을 암시하고 있다.

1956년에는 용지국민학교(현 금지동초등학교)를, 1960년 남원 금지중학교를 졸업하여 마산상업고등학교(현 마산용마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이어 진주고등학교 시험에 합격하였으나 거리가 너무 멀다는 이유로 아버지가 반대해 남원농업고등학교(현 남원용성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적성에 맞지 않았는지 몇 달을 다니지 않고 집에서 재수를 시작했다.

1년 후, 아버지의 병환이 깊어져 가세가 서서히 기울고 있었다. 이에 서울로 올라가 학비가 별로 들지 않는 철도고등학교 입학 시험을 치르지만 실패하고 서울고등학교에 원서를 냈다. 그러나 형 김광렬의 친구이며 형같이 따르던 하용웅의 "집안을 일으켜 세우려면 은행원을 하는 것이 지름길이다."라는 권유를 받고 마산상업고등학교에 다시 원서를 내게 된다.

그렇게 마산상고 입시를 치르고 돌아와 3월 14일로 예정된 합격자 발표를 앞두고 형 김광렬과 함께 마산으로 갔으나, 3.15 부정선거를 앞두고 군중이 모이는 것을 극도로 꺼린 교육청에서 합격자 발표의 연기를 종용해서 16일로 연기되어 있었다. 그래도 하용웅 선배의 담임 선생님을 통해 합격했음을 확인하였지만, 당시에는 마산에서 남원까지 꼬박 하루가 걸려서 첫차를 타지 못하면 도중에서 유숙해야 했기 때문에 곧장 남원으로 귀향하지 못했다.

이 당시 김주열의 이모할머니는 열렬한 민주당 당원이였는데, 자유당의 부정선거로 인해 당연히 투표 통지표가 전달되지 않아 종일 울분을 터트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마산에서의 부정 선거가 들통이 났고, 학생과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시위를 하자 이를 목격한 이모할머니가 집으로 와 두 형제에게 시내에 나가보라고 한다. 이에 합류하게 된 두 형제 중 김주열이 돌아오지 않은 채 행방불명으로 처리되었다.

2. 사망과 그 여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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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행방불명 소식을 들은 어머니 권씨는 마산으로 달려가 아들을 계속 찾아 헤멨으나, 끝내 아들을 찾지 못하고 4월 11일 남원으로 돌아온다. 이 와중에 별별 소문이 다 났다. 권씨는 이름모를 경찰관이 와서 "나도 김주열 군 또래 아우가 있답니다. 주열 군이 사라진게 남의 일 같지 않네요. 자세히 알면 확실히 가르쳐 드리는데 저도 모르겠고, 소문으로 듣자하니 주열 군이 시위 도중 살해되어 시체가 경남도청 앞 호수에 버려졌다는 소문이 있더군요."라는 말을 하고 서둘러 사라진 적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권씨가 이걸 크게 외치면서 시위대가 경남도청 앞 호수를 경찰들과 같이 샅샅히 찾아봐도 없었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날 권씨가 집으로 돌아가던 날 11시 경, 마산의 중앙부두에 미국제 최루탄[2]이 눈에 박힌 시신이 떠올랐다. 그의 시신 사진은 당시 부산일보 기자 허종(1924~2008)이 찍어 특종으로 보도되었다.

이 주검이 김주열로 확인되자 용공 분자의 난동, 좌익 폭동으로 내몰린 마산 시민들의 울분이 다시 터져 올랐다. 이는 곧 4.19 혁명으로 이어졌고, 이후 전개는 해당 문서를 참조.

김주열의 묘지는 3곳에 조성되어 있는데 실제 묘는 고향인 남원시 금지면에 있으며 서울 4.19민주묘지와 마산 3.15 민주묘지에 각각 가묘가 있다.

3. 기타[편집]

중학교 시절 모 잡지를 통해서 알게 된 충청도의 한 고학생과 펜팔을 했는데, 그가 훗날 가톨릭 신부가 되어 꽃동네를 세운 오웅진 사도 요한이었다고 한다.

어머니 권찬주 여사는 이후 국밥집을 하며 조용히 살다가 1989년 별세했다. 돌아가시기 1년 전인 1988년 한 여성월간지에서 인터뷰할 당시 주열이 또래 학생보면 "주열이 생각나서 많이 먹으라고 퍼준다"면서 당연히 잊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니 영원히 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경남 함양이 고향이던 권 여사는 "내 고향인 경상도로 있는 학교로 가길 원해서 주열이를 죽였다"고 당시에 스스로를 자책했다고 한다. 당시 인터뷰에서 형이 사업을 하다가 어려움을 겪고 병까지 걸려서 마음고생이 심하니 더더욱 주열이 생각이 애타게 난다고 했었다.

제11대, 14대 국회의원을 지낸 김병오당숙부이다.

1995년 4월 11일 마산상업고등학교에서는 김주열에게 명예 졸업장을 추서했고, 그 졸업장은 김주열 열사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링크

[1]마산용마고등학교 [2] 이전에 4.19관련 다큐멘터리 중 EBS에서 방영한 쪽에서는 "이태리제 최루탄"이라고 나왔었는데 실제로는 아니라고 한다. 아마 현재 최루탄 발사용으로 쓰는 총기가 이탈리아 베넬리사의 산탄총이라서 헷갈린 듯 하다. 당시 주력이 된 최루탄은 M25 기종이었다가 1969년부터 미국에서 M25 및 총류탄인 MPG100 최루탄, 그리고 어깨에 매는 가스분사기 '페퍼포그'까지 수입해 1개 중대당 2대씩 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