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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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 사건 이후 현장검증을 하는 모습.

1. 개요2. 생애
2.1. 최태민에 대한 조사, 그리고 경고2.2. 10.26 사건
2.2.1. 민주화 운동 층의 평가2.2.2. 그게 최선이었을까?
2.2.2.1. 긍정론2.2.2.2. 부정론
2.2.3. 최후 진술
2.3. 최후와 그 뒤
3. 재평가4. 이야깃거리
4.1. 생전4.2. 사후
5. 매체에서

1. 개요[편집]

김재규(金載圭, 1926년 3월 6일 ~ 1980년 5월 24일)는 대한민국군인·정치가이다. 호는 덕산(德山)이고, 본관은 김녕 김씨. 경상북도 구미시 출신.[3] 유신정권 당시 중앙정보부장을 재임했으며, 10.26 사건 당시 대통령 박정희를 암살하고, 사건 다음날 새벽 육군본부에서 검거되어 이후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미수에 대하여 유죄판결을 받고 사형을 언도받아 교수형에 처해졌다. 김재규의 육성이나 말투를 들어보고 싶으면 본 육성녹음을 참고. 이것은 1979년 12월 8일의 보통군법회의 최후진술 녹음 중 하나다.

2. 생애[편집]

1943년 안동공립농림학교[4]를 졸업한 후, 그 해, 대구농업전문학교 중등교원양성소[5]에 입학하여 1945년 수료하였다.[6] 1945년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조선인이 징집 대상이 되었을 때 일본군 해군카미카제 양성을 위한 예과 후보생으로 차출되었으며 카미카제의 생존률이 0%라는것을 감안해보았을때 만약 일본이 빨리 몰락하지 않았다면 김재규는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해방 후 김천중학교[7]에서 교직 생활을 하다가 1946년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교하여 1946년 12월 졸업하였는데, 졸업당시성적은 196명 중 14등으로 우수한 성적이었다. 그러나 중대장 대리로 복무 중에 군경체육대회 때 미 육군과 충돌을 일으킨 죄로 면관당한 후 잠시 낙향하여 김천중학교와 대륜중학교[8] 교사 생활을 하였다. 그 후 복직되어 22연대 정보주임으로 안동지구 공비토벌작전에 참가하여 큰 공을 세워 충무무공훈장을 받기도 하였다. 이 때의 공을 인정받아 3사단 22 연대 제 2 대대장으로 부임하는데, 공교롭게도 부임일에 6.25 사변이 발발한다. 김재규는 2대대를 지휘하며 의정부·대구·영덕 지구의 전투에 참여하여 북한군과 혈전을 벌였고, 6.25의 전투 중 치열하기로 손꼽혔던 황간 전투에도 참여하였다. 국군과 연합군의 북진에 선봉에 서서 함경남도의 땅까지 밟으나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황이 악화되어 남으로 후퇴하게 되고 이후 여수 제 2 보충연대장으로 부임한다.[9] 1970년에는 한양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57년에 육군대학 부총장을 지낸 후 방첩부대장, 육군보안사령관, 제3군단장을 역임한 후 육군 중장으로 전역하였다.

윤필용 전 수도경비사령관과는 악연이 좀 있었다. 윤필용이 1.21사태김신조의 모가지 발언을 여과없이 보내는 바람에 윤필용이 방첩부대(현 국군기무사령부)장에서 경질되고 김재규가 후임 방첩부대장이 되었다. 이후 김재규는 방첩부대를 육군보안사령부로 개편하고 자신은 육군보안사령관이 되었다.[10] 육군보안사령관이던 1971년 8월 수도경비사령관이던 윤필용의 전화를 도청하다가 발각되어 제3군단장으로 전보되었다.

군단장 시절 한계령 도로 건설을 지휘했으며, 이 때문에 한계령에 건설 중 사망한 장병 위령비에 이름이 들어가 있었으나 현재 위령비에는 그 부분이 삭제당했다 한다. 이 뿐만이 아니라 안동댐 건축 기념탑에도 원래 그의 이름이 들어가 있었지만 10.26 사건 직후 그 이름 부분이 뜯겨나가 있다. 여담이지만 인트라넷 3군단 역대 군단장과 그가 복무했던 모든 부대에도 김재규 장군은 삭제되어 있다. 한편 이때 그의 전속부관이었던 박흥주 포병대령은 이것이 인연이 되어 김재규의 가장 충실한 심복이 되고, 10.26 사건 당시에도 중앙정보부 부장 수행비서 자리에 있었고, 결국 박정희 암살에도 가담한다. 정말로 장래가 촉망받는 엘리트 장교였다.

박정희는 군사쿠데타를 우려해서 육군참모총장, 국방부장관에는 그저 그런 무난한 인물만 앉혔고, 정말 유능하고 후배들의 존경을 받는 육군 장군은 사단장, 군단장 수준에서 전역시켰다고 한다.[11] 김재규도 이런 케이스로, 월남전의 영웅인 채명신 장군 또한 대장을 못 달고 중장에서 전역해야 했다. 이후 유신정우회 국회의원, 중앙정보부 차장, 건설부 장관을 거쳐 1976년 12월에 제8대 중앙정보부장으로 임명되었다. 참고로 5.16 군사정변에 참여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국방부 총무과장(준장)으로 있다가 5.16 쿠데타 직후 반혁명 세력으로 몰려 감금 당했다가 박정희의 명령으로 풀려났다. 김재규는 군인은 정치에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종찬 장군 계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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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군중장 김재규

1973년 초 3군단장으로 전역 후 박정희의 강권에 의해 제9대 국회에서 유신정우회 1기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러다가 그 해 12월 이후락의 뒤를 이어 신직수가 중앙정보부장이 될 때 중앙정보부 차장이 되었다. 이 때 김재규는 신직수를 매우 껄끄러워했는데 자신이 제5보병사단 참모장일 때 육군 법무소령 신직수가 그 밑에서 법무참모를 지냈기 때문이다. 1974년 9월 개각 때 건설부 장관이 되었다. 건설부 장관 부임 당시 8000만 달러 밖에 안되던 해외건설 계약고를 30억 달러까지 끌어올리는 공을 세워 근정훈장을 받았다. 1976년 12월 신직수의 뒤를 이어 중앙정보부장이 되었다.

1977년 박정희에게 직선제를 건의하기도 했다. 1979년에는 긴급조치 9호의 해제를 건의했다. 이때 김재규는 “긴급조치 9호는 효력을 다했으니 더 강력한 긴급조치 10호가 필요합니다.” 라며긴급조치 10호를 건의했다가 반려당하기도 했는데, 그 내용에는 노동및 종교의 추가탄압이 들어가있어 과격하기는 마찬가지였던지라 현재까지도 그에 대해 비판하는 이들이 존재한다. 다만 김재규는 훗날 법정에서 그 건에 대해 말하길 박정희의 눈을 속이고 긴급조치 9호의 독소를 제거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방법이었다고 해명했다.[12] 김재규는 또한 당시 연금중이던 김대중의 외출을 눈감아주어서 김대중이 김영삼측 단합대회에 참석할 수 있게 해서 김영삼의 전당대회 당선을 도와주기도 했다.[13] 당시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던 정국을 순리대로 풀기 위해서 나름대로 방법을 모색한 것. (물론 결과적으로는 남의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박정희에게는 소귀에 경읽기였다.)

2.1. 최태민에 대한 조사, 그리고 경고[편집]

최 같은 자는 백해무익하므로 교통사고라도 나서 죽어 없어져야 한다.


김재규

구국여성봉사단이라는 단체는 총재에 최태민, 명예총재에 박근혜 양이었는 바, 이 단체가 얼마나 많은 부정을 저질러왔고 따라서 국민, 특히 여성단체들의 원성의 대상이 되어왔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아니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영애가 관여하고 있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아무도 문제 삼는 사람이 없었고 심지어 민정수석 박승규 비서관조차 말도 못 꺼내고 중정부장인 본인에게 호소할 정도였습니다. 본인은 백광현 당시 안정국장을 시켜 상세한 조사를 하게 한 뒤 그 결과를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던 것이나 박 대통령은 근혜 양의 말과 다른 이 보고를 믿지 않고 직접 친국까지 시행하였고, 그 결과 최태민의 부정행위를 정확하게 파악하였으면서도 근혜 양을 그 단체에서 손떼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근혜 양을 총재로 하고, 최태민을 명예총재로 올려놓아 결과적으로 개악을 시킨 일이 있었습니다.


김재규

김재규는 중앙정보부를 통해 최태민의 조사를 지시했고, 10.26 사태가 발생하기 3일 전 최태민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보고했었다. 이 보고서엔 최태민과 박근혜 간의 부적절한 관계와 최태민의 문란하고 부적절한 사생활이 기록되어 있었다. 이 보고서를 처음 입수한 언론에서 공개한 시점이 2012년 말, 즉 18대 대선 직전이였기 때문에 당시엔 찌라시 취급을 받으며 묻혀졌지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며 최태민과 박근혜의 관계에 주목하는 사람이 늘어남에 따라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위 항소이유서에서 보다시피 현재 최순실박근혜와 함께 기업들에게서 돈을 뜯어낸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40년전 최순실의 아버지 최태민은 박근혜와 함께 부정한 여기저기서 돋을 뜯어내고 있었다. 1970년대 아버지가 했던 사기행각을 그 딸이 그대로 2016년까지 써먹은 것이다. 당연히 최태민의 범죄행각에 대한 민원이 빗발쳤으나 서슬퍼런 군사정권의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던 박근혜에게 직언을 할 용기를 가진 관료들은 아무도 없었다.

위의 항소이유보충서에서 나왔듯이, 청와대 내에서 실세 권력이 결코 작지 않은 박승규 민정수석비서관조차 어찌할 수 없어서 김재규에게 직접 하소연했다는 내용을 생각해보자. 당시 박근혜는 단순한 공주가 아닌 육영수의 역할을 대리하여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하는 유신정권의 주역이나 다름없던데다, 저격 사건으로 죽은 육영수의 딸이란 동정표까지 더해져, 당시 노인들은 박근혜만 보면 "공주님 오셨다"며 큰 절을 올리며 눈물 흘릴 정도였다.# 더욱이 마음에 안드는 경찰청장이나 도지사를 호출하여 호통치는 등의 국정농단의 기미까지 보이는 최태민을 두고 볼 수 없었던 김재규는 박정희에게 최태민과 박근혜를 떼어놓아야 한다고 직언한다. 그러나 박정희는 김재규의 직언을 듣기는 커녕 박근혜를 구국여성봉사단의 총재직에 올리고 최태민을 명예총재직에 올리는 등의 조치로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다. 그리고 이 때 느꼈던 절망감이 10.26 사건의 동기가 되었다고 김재규는 증언하였다.

거기다가 김재규의 말이 완전한 사실이라면 박정희는 김재규를 불러 최태민을 대질시켜놓고 친국을 벌였다는 말이 된다. 당시 김재규는 독재정권의 중앙정보부장으로 의전상 부총리에 있는, 사실상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 있던 인물이다. 그런 거물이 일개 사이비 종교인을 고자질하는 상황이 되었으니 엄청나게 체면을 구긴 일이다. 2017년 기준으로 보자면 검찰총장이 사이비 교주 하나 기소했다고 대통령에게 친국을 당하는 것보다 더 심한 꼴이다. 거기다가 김재규가 최태민이 저지른 온갖 부정의 입증을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박정희는 오히려 최태민(정확히는 박근혜)을 신뢰하는 꼴을 보였다. 이는 김재규 입장에서 자신이 끝까지 모신 박정희가 중앙정보부 부장인 자신보다 어디서 굴러와 영애를 홀린 사이비 종교인을 더 신뢰한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으니 있던 충성심도 바닥이 날 수밖에 없다.

즉, 10.26 사태를 결심한 동기 중 하나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최태민 - 박근혜와의 부적절한 관계를 알고도 이를 바로잡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항소이유보충서로 남겼다. 김재규는 최태민과 박근혜의 관계가 지속될 경우 벌어질 잠재적 위험성을 알고 이를 항소이유보충서로 남기며 최후의 순간까지 경고 했지만, 그의 우려와 경고는 37년 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라는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악의 정치 스캔들이 터지면서 결국 현실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10월 26일날 최씨 일가도 같이 쏴버렸어야 했다.

2.2. 10.26 사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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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10월 26일 혁명의 목적을 말씀드리자면 5가지입니다. 첫 번째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요, 두 번째는 이 나라 국민들의 보다 많은 희생을 막는 것입니다. 또 세 번째는 우리 나라를 적화로부터 방지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혈맹의 우방인 미국과의 관계가 건국 이래 가장 나쁜 상태이므로, 이 관계를 완전히 회복해서 돈독한 관계를 가지고 국방을 위시해서 외교, 경제까지 보다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서 국익을 도모하자는 데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로, 국제적으로 우리가 독재국가로서 나쁜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씻고 이 나라 국민과 국가가 국제사회에서 명예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5가지가 저의 혁명의 목적이었습니다. 당시 실제 육성

민주화를 위하여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나는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하여 그리 한 것이었다. 아무런 야심도 어떠한 욕심도 없었다.

국민 여러분! 자유민주주의를 마음껏 누리십시오! 저는 먼저 갑니다!

당시 최후진술의 녹음본이 있다. 들어보자. 무려 40년 가까이 된 녹음본임에도 의외로 들을 만 하다. 유튜브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에는 인맥의 영향력이 더 컸다. 박정희와 고향 후배이며 육사 동기라는 2중의 인맥인 김재규는 그야말로 심복이었다. 하지만 김재규는 1979년 10월 26일, 종로구 궁정동 안가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청와대 대통령경호실차지철발터 PPK 권총으로 저격하여 암살했다.[14] 이것이 이른바 10.26 사건이다.

대통령경호실장 차지철이 경호원들과 함께 현장에 동행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의 최측근인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을 저격할 줄 생각 못한 경호팀은 무력했고 그들 모두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제압당한다. 경호실 요원 중 유일하게 생존한 사람이 당시 경호계장이던 박상범이고, 그는 나중에 김영삼 정부에서, 민간인 출신으로는 최초로 대통령 경호실장을 맡게 된다.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경호원들을 다 죽이고 확인사살까지 했으나 박상범은 기적적으로 총알이 치명적 부위를 피해간 데다 부상입고 쓰러지면서 머리를 찧어 기절해 죽은 것처럼 보였고, 식사하던 경호원들을 중정 요원들이 습격하는 과정에서 경호원들과 같이 식사하던 중정 직원들[15]인 운전수와 요리사가 자신들의 총에 다치는 바람에 확인사살에 소극적이어서 죽음을 면했다.

어쨌든 거사를 비교적 성공적으로 마무리 한 김재규가 이동한 곳은, 엉뚱하게도 중정이 아닌 육군본부였다. 만약 김재규가 거사 후 중앙정보부로 향했더라면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는 게 지금까지도 중론이다. 암살장소인 안가는 중앙정보부의 완전한 통제하에 있었으므로, 부장인 그가 마음만 먹었다면 자신이 박정희를 죽인 사실을 은폐하고 불순세력의 소행으로 몰아가 국무위원과 장성들을 깨끗하게 속이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런 후에 사태 수습을 빌미로 자신이 정권을 장악하는 시나리오를 써갈 수도 있었다.

특히 박정희를 암살한 장본인이 차지철이었다고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했을 것이다. 평소 차지철은 대통령 경호라는 미명으로 온갖 월권행위와 경거망동을 서슴치 않았고, 부통령이라 불릴 정도로 막강한 위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당시 쿠데타가 일어난다면 주동자 1순위는 단연 차지철이라는 얘기가 공공연히 떠돌 정도였다. 실제로 사건이 터진 후 청와대로 들어와 김계원 비서실장에게 대통령 유고 소식을 들은 김치열 당시 법무장관은 "그 새끼가 까불더니 결국 일을 저질렀군!!" 하고 호통을 쳤는데, 그 새끼는 물론 차지철을 지칭한 것이었다.

그러나 김재규는 자신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육군본부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체포되면서 사태를 장악하지 못했다. 김재규가 육군본부로 간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추측이 나오고 있다.

  • ① 대통령의 그늘 밑에서만 권력을 휘두를 뿐 대통령 사망 후에는 특별한 권한이 없는 중앙정보부장으로서는 비상계엄 상황에서 특권을 휘두르는 군부의 협조가 절실하므로 이를 얻기 위해 육군본부로 갔을 거라는 설. 특히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정승화는 김재규와 원만한 관계였으므로, 그에게 자신의 박정희 저격을 알리고도 그의 협조를 받아낼 수 있으리라 오판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러나 군부는 기본적으로 박정희 정권을 강력히 지지하는 세력이었고 박정희 암살자에게 협조하여 그의 정권 획득을 도울 장성이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게다가 김재규는 당시 군에 자기 인맥이라고 볼 수 있는 장군을 거의 만들지 못하고 있었다.

  • ② 김재규가 박정희를 순전히 우발적으로 저격했으므로 거사 후 사태장악에 대한 아무 계획이 없었다는 설. 사건 수사결과에 의하면 거사 후 김재규는 정승화와 승용차에 동행하여 사건현장을 떠나 이동하던 중, 수행비서 박흥주 대령에게 "정보부와 육본 중 어디로 가는게 좋겠느냐"고 묻자 정승화가 말을 가로채어 "육군본부로 가는게 좋겠다"고 제의하였고, 김재규는 아무 생각 없이 운전기사에게 육군본부 행을 지시했다. 이때 정승화는 안가 본관(연회장은 나동)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가 사건을 저지른 김재규와 차에 동승한 것이었는데, 그땐 김재규가 박정희를 죽였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당시 김재규가 육본으로 갈 때 신발도 신지 못하고 박흥주 대령의 구두를 빌려 신을 정도로 우왕좌왕했던 행동을 볼 때, 이 견해도 설득력은 있다.

  • 이 추측들에 대해서는 10.26 사건에 보다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사건에 대한 합동수사본부장이 된 전두환은 알려진 바와 같이 12.12 군사반란 때 계엄사령관인 정승화를 긴급체포하여 군을 장악하게 되었고, 김재규는 육군 고등군법회의에서 내란목적 살인 및 내란미수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1980년 5월 20일 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박선호, 유성옥, 김태원과 같이 사형이 확정되어 기각 4일 만인 5월 24일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당시 대법관들 사이에서는 소수의견으로 대통령 박정희를 살해한 내란목적이 아니라 자연인 박정희를 살해한 단순살인에 불과하다는 의견도 있었다. 특히 형사3부 판사인 양병호와 서윤홍은 내란 목적이라기에는 암살후 김재규의 움직임이 너무나 어설펐기 때문에 내란을 목적하고 박정희를 죽인 게 아니고 그저 우발적으로 죽였다고 본 것이며 최종판결 당시 민윤기 등 6명의 판사들이 내란죄 불성립 의견을 냈다. 이로 인해 소수 의견을 낸 판사 6명은 신군부의 보복으로 전부 법복을 벗어야 했으며 특히 양병호는 보안사에 끌려가 온갖 고문을 당하였다. 이로 인해 판결문이 비공개 처리되어 묻혀버렸으나[16], 이러한 주장은 훗날 판결문이 공개되면서 밝혀졌다. 한홍구, 사법부 - 회한과 오욕의 역사 참조.

10.26과 관련한 김재규의 보다 자세한 입장표명은 김재규/항소이유 보충서에 되어있다.

2.2.1. 민주화 운동 층의 평가[편집]

민주화 운동 층에서는 평이 서로 상반되게 갈라지는 편이다. 옹호하는 쪽에서는 '유신독재라는 암흑기 속에서 독재자를 몰아낸 영웅'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를 대변하는 용어로 요즘 인터넷에 빈번히 보이는 단어가 김재규 의사.[17] 이렇게 영웅으로 치켜 세우진 않더라도 10.26 사건이 독재를 몰아내는데 일정부분 기여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주목하는 경우도 많다.

유야무야 하면서 유신이 장기화 되었다면, 최악의 경우 북한처럼 반대세력이 모두 숙청되거나 중국처럼 정도는 덜해도 독재가 지속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박근혜가 만약 정치에 참여하였다면 지금까지 독재였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김재규를 긍정하는 사람들로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함세웅 아우구스티노 신부, 강신옥, 장호권, 이해학 등이 있다. 보면 알겠지만 주로 교계 사람들로, 민주혁신계 중에서도 약간 보수적인 사람들 쪽이다. 함세웅 신부는 "김재규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으며 효림 스님은 "여러가지 정황 근거로 봤을때 재평가할 가치는 충분하며, 사회 분위기 때문에 좀더 시일을 요구할 뿐 명예 회복은 희망적"이라고 보고 김재규의 행적과 뜻을 제대로 알리기 위한 작업에 매진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반면 상대적으로 비판하는 쪽에서는, 그 또한 과거 유신정권하에서 한자리를 해먹던 중앙정보부장이었으며, 박정희를 암살해 결과적으로는 박정희를 국민의 손으로 정당하게 심판할 기회를 빼앗았음을 지적한다. 실제로 그동안 갖은 압제와 고문 속에서도 민주주의를 쟁취하려 노력해오던 자신들보다, 단순히 박정희 한 명 암살했다고 김재규가 포커스를 더 받는 건, 몇십 년을 민주화 투쟁한 사람들 입장에선 기분이 상할 수도 있다.

다만, 소극적인 국민들의 성격과 견고한 기득권의 힘 때문인지 몰라도 근·현대사를 통틀어 당사자 개인에게 국민의 심판이 이루어진 사례는 실제로 흔치 않다. 또한 박정희 본인은 이승만이나 전두환, 노태우와는 달리 어떤 상황이 온다고 해도 결코 자리에서 물러날 의사가 없었다는 평가가 압도적이다. 또, 국민의 심판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적게 잡아도 수천, 많으면 수만에서 수십만의 애꿎은 목숨이 필요할 터인데 그것을 대신 이루어준 것이 과연 부정적으로 평가해야 할 사안인지에 대한 논란도 있다. 실제로 장준하가 긴급조치로 구속되었을 당시 감방동기였던 이해학 목사는 "당시 장준하가 '이제 민중투쟁으로는 안 된다. 양심적인 군인을 포섭해서 쿠데타를 일으키는 수 말고는 박정희를 몰아낼 방법이 없다'고 말했고, 나는 그 말을 듣고 상당히 절망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김재규를 비판하는 재야/민주운동가들은 김재규의 박정희 암살 동기로 '민주화에 대한 열망'에 의한 기여도 및 가능성을 낮게 평가한다. 대표적인 좌파 역사학자인 한홍구 성공회대학교 교수 역시도 “박정희 정권은 당시 부마항쟁을 비롯한 일련의 민중저항을 통해 어차피 붕괴할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다”며 “김재규의 행위가 민주화에 큰 기여를 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18] 진보적 사회운동가 백기완도 “당시는 박정희 유신독재를 타파하기 위한 민중항쟁이 거셌고, 박정희 내부 권력의 모순이 더 격화되어 그 과정에서 일어났던 조그마한 사건일 뿐이며 민주화운동의 본체, 기본적인 흐름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라고 주장하였다. 출처

2.2.2. 그게 최선이었을까?[편집]

2.2.2.1. 긍정론[편집]

김재규는 정권 내에서 온건파였고, 당시 부마항쟁이 격화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이때 박정희는 먼저 이승만과 곽영주 운운하며 총기사용을 지시했고 차지철캄보디아의 킬링필드를 거론하며 아부를 하여 무력사용을 부추겼다. 결국 대통령이 직접 유혈진압을 지시한 이상, 김재규가 10.26 사건으로 박정희를 살해하지 않았더라면 부마항쟁 때 5.18 민주화운동이나 천안문 6.4 항쟁처럼 사격명령이 동반된 학살이 벌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김재규의 항소이유 보충서[19]를 보면, 김재규는 부마항쟁에 대해서 대단히 진지하게 반응하고 있었고 자칫하다간 민란이 일어날 수도 있는 위기라고 판단했다. 또한 박정희와 차지철의 총기 사용 및 캄보디아 운운하는 발언에 심각한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었음이 나타난다.

김재규는 자유민주주의 회복을 위해선 박정희의 희생이 불가피하다고 여겼다. 김재규가 자신의 변호인인 안동일에게 털어놓은 내용에 의하면 이승만은 물러설 때 물러설 줄 알았지만 박정희의 성격은 절대로 물러설 줄 모르기 때문에 반드시 국민과 정부 사이에 수많은 희생자가 나올것이라 생각했으며 이를 막기 위해 박정희를 사살한 것이라 말하였다.#

  • 실제로 항쟁 당시 부산마산 내의 시민들이 대거 경찰서로 끌려가거나 무자비하게 구타당했다. 또 김영삼 당시 신민당총재 외에도 김대중, 이철승 등 호남인사가 신민당에 있었고 여촌야도 현상이 강하여 수도권 민심이 야당에 있었으므로 단순히 부마에만 그치지 않고 호남, 수도권까지 퍼져 전국적으로 경찰, 군인들과 시민들의 대규모 충돌이 생겨 엄청난 희생자가 났을 것이다.


또한 당시 한국미국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박정희가 미국의 만류를 뿌리치고 강경진압을 했을 가능성도 존재했다. 서울에도 계엄을 내리고 군을 투입할 계획이 있었음을 고려하면 유혈사태로 번졌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김재규 역시 박정희 사망 이후 비상계엄령을 추진하려는 의도가 있었지만, 5개월 한정이라는 전재를 달았으며 부마민주항쟁 때도 유혈 진압을 비판했던 입장이기 때문에 강경한 방식으로 막가파 운영을 했을거라는건 아니라는 시각도 있다. 군부의 시각을 돌리기 위해 그럴싸한 핑계를 대려고 했다가 뽀록이 났다는 견해다.

김재규는 차지철과의 갈등 이전에도 유신의 방향에 대해서 회의적인 입장을 자주 내비쳤고, 장준하 등의 민주화 운동 인물들을 비밀리에 도우면서 관련 가족들에게 경제적 지원을 하기도 했으며,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에게 박정희를 '환자'로 비유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고, 법정에서도 시종일관 의연한 자세를 보이며 사형 선고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논리를 논리정연하게 설명하는 자세를 보았을 때 단순히 차지철과의 갈등으로 인한 우발적인 권력 싸움은 아니라는 주장이 있다. 결정적으로 그가 극단적인 선택을 결단했던 건 부마민주항쟁에 대한 대응책 방향이었는데, 박정희와 차지철은 강압적인 진압을 요구했으나 김재규는 반대 의사를 표명했고, 결국 이것이 10.26이라는 도화선으로 일어났다는 주장이다.

이밖에도 자신에게 아무런 이득이 없고 알아주는 사람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김영삼의 구속을 반대하는 동시에 김대중의 가택 연금을 일시적으로 해제시키고 김영삼과 만나게 승인했으며, 차지철과의 갈등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승진과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다가 발생한 갈등이 아니라 국정 방향에 대한 이견으로 인해 갈등이 생겼다는 증언이 나오고 있다. 박정희를 추앙하는 조갑제조차도 김재규가 사욕이 있었다고 보기에는 근거가 희박하다는 칼럼을 개시했을 정도였다. 김영삼의 측근이었던 김봉조의 회고에 의하면 김재규는 중앙정보부장 시절 자신을 방으로 불러 격려하며 김영삼은 한국을 위해 큰 일을 할 인물이고 앞으로 김영삼이 정치활동을 하는 데 어려움이 없도록 자신있게 잘 모시라며 격려하였다고 한다.#

1970, 80년대에도 국정 방향에 대해서는 뒤에서 "박정희에게 실망했다"는 의사를 자주 표명했다는 증언이 나오고 있으며, 7대 대선에서 마지막만 하고 다시는 안 하시겠다는 약조를 김재규가 청원했다는 증언과 더불어, 한 때 진지하게 하야를 권고하려 했다는 증언도 있다. 결국 10.26은 박정희에게 오랫동안 직언을 통해 온건한 설득을 하려 했지만, 박정희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고 오히려 차지철을 중용하며 실망스러운 행보를 보이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동안 쌓였던 실망감과 울분이 폭발하여 강경한 수를 두었다는 주장이다.

윗 내용들이 복합적으로 담긴 관련 출처

그동안 김재규를 썩 좋게 평가하지 않았던 한홍구도 2013년에는 주장이 달라졌다.#

김재규의 거사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는 데 이르지는 못했지만, 여성 연예인들이 저런 식으로 대통령의 술자리에 불려가는 일만큼은 확실히 차단했다. 윤보선 전 대통령은 김재규의 구명을 호소하면서 우리의 민주화가 김재규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말했는데, 민주화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그 여성 연예인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우리 역사에는 또다른 10·26 사건이 있다. 안중근이토 히로부미를 쏜 날이 1909년 10월 26일이었다. 70년을 두고 2개의 10·26 사건이 있는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해 군사독재가 왔는데, 일본제국주의를 상징하는 이토의 제삿날과 군사독재의 상징인 박정희의 제삿날이 같다는 것은 단순한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중략)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득세한 나라에서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김구로 상징되는 보수우익 의사의 계보는 대가 끊어졌다.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으면서도 박정희의 명예는 끝까지 지켜주고자 했던 김재규는 대가 끊겼던 한국 보수우익의 계보학에서 돌출한 마지막 대륙형 인간이었다.

대한민국박정희와 유신의 망령을 떨치고 자유민주주의를 만끽하게 될 때 김재규에 대한 평가는 분명 달라질 것이다.

덧붙여 한홍구는 "김재규는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를 만끽해야 제대로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라는 견해를 밝혔다.

최상천 전 교수는 각종 문헌과 증언들을 근거로 김재규의 10.26을 재평가해야한다는 강의를 하기도 했다. 강의 1 강의 2

야권의 거물정치인인 천정배 의원도 10.26 희생자 30주기 합동 추모제에 참석하여 "김재규 장군과 의인들이 역사의 재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수환 추기경은 김재규가 박정희를 저격한 것을 "더 큰 희생을 막은 정의로운 행동"이라고 표현하였다. 또한 10.26 재판 때 인권변호사들에게 김재규의 변론을 부탁하기도 하였고, 훗날 김재규와 그 부하의 가족들이 구명탄원을 위해 김 추기경을 찾아갔을 때 이들을 따뜻하게 위로해 주었다고 한다.#

김영삼의 측근으로 현재 민주동지회 회장을 맡고 있는 김봉조 전 의원도 처음에는 김재규를 유신정권의 사냥개쯤으로 여겼으나, 자신을 직접 찾아와 격려하며 김영삼에게도 격려와 덕담을 전해 달라는 김재규의 모습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김재규가 박정희를 죽인 이유는 사심이나 감정적인 이유 때문이 아닌 역사 앞에 정의감 때문이었다며, 훗날 이런 사실이 밝혀질 것이라 주장했다.#

김재규의 변호인이었던 강신옥 변호사는 김재규를 의사라 칭하며 박정희는 절대로 스스로 물러날 사람이 아니기에 김재규의 거사가 없었으면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불가피했을 거라고 평가하였다. 또한 최태민 문제 관련하여 박근혜와 최태민을 떼어놓아야 한다는 김재규의 충언을 무시하고 김재규의 주장이 모함이라는 박근혜의 말만 믿고 사건을 덮어버린 박정희의 행태도 10.26의 원인이 되었다고 증언하였다.#

이회창 전 총리는 김재규의 저격이 박정희 시대라는 한 시대를 마감하고 다음 시대를 여는 역사의 전환을 가져왔다고 평가하였다.#

2.2.2.2. 부정론[편집]

김재규가 10.26을 일으킨 것은 결국 경호실장 차지철과의 '권력투쟁' 속에서 벌인것 이라는 해석이 있다. 2004년 국무총리 산하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서도 김재규의 행위를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보도했다. 출처 김재규는 자기보다 새파랗게 젊고 군대 계급도 낮은 차지철에게 면박을 당하거나 무시당하는 수모를 당했고 이에 대해서 격분했다는 증언이 주변 인물들로부터 흘러나온 바 있다.[20] 출처 이런 점들로 비추어 보았을 때 김재규가 민주화 운운하는 것도 자신의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해 내건 명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이 있다. 그가 차지철이라고 하는 인물에 대비해보았을 때 '상대적으로' 온건성향으로 비쳐질 따름일뿐, 그 역시도 결국 독재정권에 부역한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해석이다. 출처

유신정권의 크게 3개의 권력 축인 대통령 경호실, 중앙정보부[21], 국군보안사령부를 대표하고 있는 인물이 바로 차지철, 김재규, 전두환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서로 간에 치열하게 견제하고 있었다. 출처 바로 이러한 구도 속에서 파장이 일어난 것이 10.26이라는 것. 출처 드라마 제5공화국(드라마), 제4공화국(드라마) 등 공화국시리즈 등에서도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묘사되고 있다. 특히 경호실과 중앙정보부의 대립과 반목은 그 이전부터 지속되어 왔다. 대표적으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 박종규 대통령 경호실장 시절에도 이들은 사이가 몹시 좋지 못했다. 더군다나 이 무렵에 차지철계로 분류되고 있던 김치열 법무부장관이 차기 중앙정보부장으로 갈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고, 박정희가 야당문제와 부마항쟁 등에 대한 미흡한 대처에 대해서 김재규를 책망하는 일이 잦아지자 김재규 본인도 파워게임에서 밀릴 것이라는 직감을 하게 될 공산이 컸다는 주장이 있다. 출처

실제로 쿠데타 이후 김재규는 박정희를 자신이 죽였다는 사실을 숨기고 장관들을 모아놓고 계엄령을 선포하라고 압박했는데, 이를 정권탈취시도로 보는 경우도 많다. 김재규 본인은 권력장악을 의도하지 않았고, 유신의 잔재를 청산한뒤 물러나 박정희 묘에 시묘살이나 할 생각이라고 했었지만 이런거야 자기만 아는 일이니까.

다른 한편으로 그가 쿠데타 당시 보여주었던 일련의 치밀하지 못했던 행동 역시도 결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당시 김재규는 차지철박정희를 암살한 후, 자신이 정국을 주도할 수 있는 중앙정보부가 아닌 육군본부로 이동하는 등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수 시간만에 체포되었다. 이는 김재규가 단순히 차지철, 혹은 박정희를 암살한다는 계획만 세웠을 뿐, 그 후 신정부 수립이나 정국 주도에 대해서는 사실상 무계획이나 마찬가지였음을 보여준다.

국가원수 암살이라는 극단적인 방식을 통해서 급진적 권력 교체를 시도한다면, 이를 뒷받침할 만한 치밀한 계획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 10.26이 역사에 긍정적 영향을 주려고 한 계획이었다면, 단순히 박정희를 암살하는 것으로 끝낼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박정희를 암살했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은폐하고 이와 관계된 사람들과 철저하게 입을 맞추었어야 했다. 그리고 난 이후 정권교체 및 민주화까지 질서있고 안정적으로 진행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했다. 그래야 진정으로 쿠데타가 성공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런 중대한 일을 저지르는 입장에서 그는 너무나도 무능력한 모습을 보였다.

이렇다 보니 10.26으로 박정희의 장기 철권 통치는 끝났을지 몰라도, 이를 대체할 새로운 권력질서가 안정적, 민주적으로 등장하지 못했고, 그 결과는 모두가 다 아는 전두환의 신군부 등장과 12.12, 5.18, 그리고 8년 동안의 또 다른 군부 독재였다. 만약 김재규가 좀 더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서 동조자를 늘리는 동시에[22] 신정부 수립에서 정권 이양까지의 과정을 안정적으로, 질서 있게 진행시킬 수 있었다면, 신군부의 폭주를 막는 것이 결코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간단하게 거사 직후 육군본부로 가지 않고 중앙정보부로 갔으면 신군부의 폭주를 간단히 막을 수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

김재규는 10.26 사태 직후 유신의 잔재를 5개월 내로 설거지하겠다는 생각으로 전국으로 비상계엄령확대를 구상했는데, 출처1, 출처2 민주공화당은 이러한 구상안에 동의했을 가능성이 낮다. 10.26 직후 김종필민주공화당의 총재로 만장일치 추대되었는데, JP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시절 청구동 가택수색과 협박까지 당한터라 김재규에게 호의적이기도 어려웠다.# 거기다 10.26 이후 JPYS, DJ과 함께 개헌과 민주회복 이행에 공감하고 협조해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민주공화당 역시도 김재규의 구상에 동의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1, #2

또한 체포되기 전까지 김재규는 박정희 암살 사실을 숨기려고 했고, 박정희 사망 이후 국민들의 박정희에 대한 동정과 추모 분위기 등을 감안해본다면 김재규가 암살 사실을 철저하게 은폐하지 않는 한 저항에 직면했을 공산이 크다.

김재규는 10.26이후 전국비상계엄령 확대 조치를 취하고, 군 지휘관들을 중심으로 혁명위원회를 구성해서 자신이 위원장을 맡고 육군참모총장이 부위원장을 맡은 뒤 유신의 잔재를 제거하겠다는 방안을 구상했다고 밝혔다. 출처1, 출처2 대법원 판결에서는 김재규가 계엄군을 장악하여 무력으로 사태를 제압하고, 입법, 사법, 행정 권력을 장악한 이후 대통령 출마까지 계획했다고 판결하였는데, 김재규 본인은 대통령 출마 의사나 사리사욕은 없다고 부인하였다.[23] 그러나 김영삼이나 김대중 등 야당이 과연 김재규의 계획에 동의하거나 협조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계획대로 이루어지기는 거의 어려웠을 것이다.

2.2.3. 최후 진술[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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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진술을 통해 박정희 정권동안 나라에는 많은 쓰레기가 꽉 들어차 있고, 당시까지 정부나 대통령이 순리대로 선출된 적이 없음을 지적하며, 자신이 앞장서서 순리대로 하는 사례를 만들어 보고 싶어 했음을 밝히고 있다. 또한 최규하 대통령에게 자유민주주의가 문 앞에 왔으니, 받아들이기를 간청하고 있다. 하지만 자신으로 하여금 나라가 혼란에 빠지는 것에 대해 걱정을 한다고 말하였다. 또 자유민주주의 회복을 20~25년 앞당겨놨다는 자부을 가지며 간다는 말을 남기면서 그 자유민주주의의 만발을 보지못하고 가는게 아쉽다고 하였다. 끝으로 자신을 따라준 부하에 대해 그들은 좋은사람이고 자신의 명령에 복종했을 뿐이라며 선처를 바라면서 극형만은 면해줄 것을 청하였다.

2.3. 최후와 그 뒤[편집]

먹구름 하늘을 덮고 광풍 몰아 덮칠 때
홀로 한 줄기 정기를 뿜어 어두운 천지를 밝혔건만

눈부신 저 햇살을 다시 맞지 못하고
슬퍼라만 사람 가슴을 찢는구나

아! 회천의 그 기상 철색 무지개 되어
이 땅위에 길이 이어지리

- 김재규 묘비 윗면에 쓰인 추모시

사형 판결을 받은 김재규는 1980년 5월 24일에 교수형으로 숨진다. 이때가 향년 54세. 사형 집행 장면 그 비극은 김재규의 남은 가족들에게도 이어져, 부인인 김영희와 동생 김항규는 무자비한 고문을 당하고 재산까지 빼앗기는 비극을 당했으며 '3족을 멸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주변인들 역시 갖은 고초에 시달려야 했다.

그의 묘소는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의 삼성공원묘지에 있다. 묘비에는 '의사 김재규 장군 추모비(義士 金載圭 將軍 追慕碑)'라고 적혀 있었다. 당초 그는 유언으로 묘비에 '의사 김재규 장군 묘'를 쓰라고 했지만 신군부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1989년에 1월에야 광주/전남 송죽회가 세웠다. 그러나 수십년 전에 박정희 지지자로 추정되는 누군가가 '의사' 와 '장군' 이라는 글씨를 훼손시켰고, 추모비를 굴러 떨어뜨려 금이 가게 만들었다.

이 추모비는 아직까지도 금이 가고 글자가 훼손된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데, 추모비를 새로 세우는 데 도움을 주겠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김재규의 유족과 송죽회가 현 상태 그대로 두겠다고 밝혀 그대로 남아있다고 한다. 추모비가 훼손되고 금이 가 있는 모습도 역사의 기록이라는 판단에서라고. #

3. 재평가[편집]

나는 여기서 명확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데 하늘의 심판인 제4심에서 이미 나는 이겼다는 것입니다.

김재규의 "의사(義士)"로서의 재평가는 그를 옹호하는 소수 사람들이 그 명맥을 이어왔으나 당시 대중들에게는 대부분 헛소리로 취급당했다. 10.26 사태도 객관적으로 볼 때 사상 초유의 사건[24]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할 정도로 언급 자체가 많지 않았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 집권 이후 박근혜의 실책에 대한 반발, 조롱으로 "의사 김재규"라는 "유머"컨텐츠가 인터넷 커뮤니티 상에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다만 이 또한 김재규 드립을 치는 사람들의 상당수는 어디까지나 개드립이었고, 그가 진짜 의사라고는 믿지 않는 사람이 다수였다.[25]

그러나 대한민국 헌정 사상 초유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 박근혜가 보여준 후안무치한 행각과 헌법부정으로 인해 '딸인 박근혜가 2016년에도 저 정도인데, 이미 무소불위의 견제가 불가능한 권력자인 1979년 박정희를 강제로 끌어내리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의 민주화는 불가능했을 것이다'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 양지의 대중들을 향한 그를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이 태동하기 시작했다. 1 2 3 4 이 움직임은 효과를 봐,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도 정치에 관심이 많은 집단 사이에서 김재규에 대한 "진지한 재평가"가 이루어져 의사 김재규 드립을 더이상 개드립으로만 쓰지 않게 되었다. 혹자가 평하길 "박근혜박정희 신화에 금을 냈다"라고 했는데 동시에 "김재규에 대한 재평가"도 불러일으킨 상황. 다만 단순히 "일반적으로는 불가능한 박정희 독재를 종결"이라는 것이 재평가 받은게 아니라, 생전에도 존경받을만한 많은 언행 + 특히 독재정권에 몸을 담고는 있지만 민주세력들을 배려하는 행동 등이 조명받으면서 "권력 투쟁이 아닌, 진심으로 국민과 민주주의를 생각한 거사"로 뒤바뀐 평가가 퍼져나간 것이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직후 2016년 말에서 2017년 초, 인터넷 상에선 김재규 의사라고 불리기도 하며 그에 대한 드립과 진지한 논쟁이 지속해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디시인사이드 주식 갤러리는 '10·26 의거 명예회복 추진위’라는 조직까지 꾸리고 재평가에 앞장서고 있다. 여기에 일찍이 2013년 김재규와 10.26 사건에 대한 재평가가 담긴 평전인 문영심 작가[26]의 <<바람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 역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계기로 부상한 대중의 김재규 재평가 여론과 맞물려 빛을 발하며 배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다.

그리고 2016년 12월 17일 대한민국의 유력 일간지이자 진보매체 중 하나인 경향신문박근혜가 묻어버린 ‘박정희 신드롬’라는 기사가 올라오고 기사의 상당부분이 김재규 재평가에 대한 내용이 할애되는데 이르렀다.

인터뷰에 응한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의 과거 발언내용인 2004년 8월 11일 한겨레21 기사와 최근 발언내용을 비교하면 그의 김재규에 대한 평가가 변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몇 년 전까지는 김재규에 매우 비판적이었으나, 2013년 5월 17일 한겨레 기사를 통해 재평가 여지가 있음을 밝혔고 2016년 12월 17일 경향신문 기사에서도 마찬가지 입장임을 알 수 있다. 경향신문 기사를 참고하면 한 교수는 지금이 박정희와 유신의 망령을 떨쳐내는 시기라고 규정하고 그렇기 때문에 김재규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는 측면이 있다고 여기는 듯하다. 과거 한 교수는 '대한민국이 박정희와 유신의 망령을 떨치고 자유민주주의를 만끽하게 될 때 김재규에 대한 평가는 분명 달라질 것이다.'라고 발언한 적이 있다. 아래 기사 참고.

한 교수는 “박정희 정권은 당시 부마항쟁을 비롯한 일련의 민중저항을 통해 어차피 붕괴할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다”며 “김재규의 행위가 민주화에 큰 기여를 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한 교수는 “김재규의 행동이 민주화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은 그 뒤 실제로 5·17 쿠데타를 통해 더욱 폭압적 군사정권인 전두환 체제가 들어선 점에서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2004년 8월 11일 한겨레21 기사

김재규는 보수우익계의 마지막 대륙형 인간
(중략)
김재규의 거사는 자유민주주의 회복엔 완전히 이르지 못했어도 여성연예인들이 대통령 술자리에 불려가는 일만은 확실히 차단했다.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득세한 나라에서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김구로 상징되는 보수우익 의사의 계보는 대가 끊어지고 말았다.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쏜 김재규가 뒤를 이은 셈이다.
(중략)
대한민국이 박정희와 유신의 망령을 떨치고 자유민주주의를 만끽하게 될 때 김재규에 대한 평가는 분명 달라질 것이다.
2013년 5월 17일 한겨레 기사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김재규가 살아나는 것은 박정희 신드롬에 치명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김재규는 10·26의 주범일 뿐만 아니라, 중앙정보부장 시절 박 전 대통령에게 최순실의 부친 최태민의 비위사실을 알린 당사자다. 한 교수를 김재규를 ‘박정희의 충신’이라는 관점에서 재평가해야 한다며 “유신시대의 자료를 꼼꼼히 읽으면서 김재규란 사람이 자기가 잘릴 수도 있는데 박정희의 충신으로서 자기 몸을 던져서 최태민을 막으려 했던 것을 알게 됐다. 그때 최태민을 막았다면 오늘의 불행한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며 “이런 내막이 최근 들어 다시 알려지면서 집회에 김재규 얼굴이 들어간 깃발을 들고 나오는 사람들이 생기는 게 아니겠나”라고 말했다.
(중략)
한 교수는 “그래도 박정희박근혜보다는 낫다”는 취지의 말을 남겼다. 그는 “박정희에게는 그래도 충신들이 있었다. 김재규 중정부장이나 박승규 민정수석처럼 자신의 직을 걸고 최태민 보고서를 올리던 사람들이 있었다. 김정렴 비서실장도 다른 비서관들에게 최태민과 어울리지 말라고 지시할 정도로 유신정권의 핵심 참모들은 분별력과 상식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드러난 바로 볼 때 박근혜 정권의 참모 중에 최순실 문제에 대해 올바른 소리를 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 아니냐”며 씁쓸해했다.
2016년 12월 17일 경향신문 기사

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삼성공원 묘지에 위치한 김재규의 묘소[27]10.26 사건 당시 김재규를 변호했던 변호인단이나[28] 몇몇 민주화 운동가들, 그의 생전 부하들만 찾는 쓸쓸한 묘소였다. 박정희 신드롬이 한창이였을땐 박정희의 추종자들이 찾아와 김재규의 묘비나 제단의 글자를 훼손하거나 심지어 추모비를 산 밑으로 굴려 떨어뜨리기까지 하였다.[29] # 그러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김재규에 대한 재평가 여론이 높아진 이후 그를 추모하는 젊은이들이 묘소에 김재규의 영정을 갖다놓거나 주변을 꽃다발이나 헌정시 등으로 장식하여 현재는 제법 묘소다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재평가 받은 것과는 별개로 유족들이 왜 훼손된 상태로 묘비를 놔뒀는지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텐데, 2013년 당시 김재규 유족과의 인터뷰에서 '훼손된 것도 역사의 일부'라는 취지로 내린 결정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리고 덧붙인 "훗날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다."라는 부분에서 무언가 의미심장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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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 탄핵 소추 직후의 모습으로 알려져 있다. 제단 위의 술병은 시바스 리갈. 10.26 사건 당시 연회상에 올라온 술로 유명한 그 술이다.

참배객들이 쓴 글들. # 박근혜 탄핵 인용 직후의 방문

언론에서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 김재규의 묘소에 추모객이 늘어나는 현상을 주목하고 있다.중앙일보, 해럴드 경제

채널A의 보도에 의하면 최순실 게이트 이후 김재규 관련 책들의 판매량이 18배 이상이나 급등했다고 한다.#

시사IN의 정희상 기자가 김재규를 재평가하기 위해 시작한 스토리펀딩 프로젝트 김재규, 역사의 심판대 다시 오르다는 목표금액 1천만원을 270% 초과한 2700만 2900원을 모금하며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4. 이야깃거리[편집]

4.1. 생전[편집]

박흥주 전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의 말에 따르면, 김재규는 인망이 넓어서 많은 사람들이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중앙정보부장에 부임하고 난 뒤 남산의 고문실을 없애고 강압수사 금지 조치를 시행하였으며, 비대해진 기구를 축소하거나 해외정보업무 중심으로 중정을 개편하였다고 한다. 또한, 부장 판공비 8억원을 내놓아 직원들의 퇴직기금을 마련해주었다고 말했다. 알다시피 10.26 사건 당시의 8억원이면 정말 큰 돈이다.오마이뉴스

초등학교 4학년 때 일본 순사가 조선인 나무꾼을 구타하는 걸 보고 '이 순사 도둑놈이다'라고 했다가 유치장에 갇힌 적이 있다.[30]

김재규의 변호인이였던 안동일 변호사는 김재규의 첫인상은 겸손하고 정중하였으며 대화를 나눌수록 진정성이 느껴졌다고 평하였다.

그를 부마항쟁에서 만났던 이는, 최루가스에 고통스러워하는 어린아이를 그가 구하려고 애썼다고도 말한다.# 장준하 의문사 이후 그의 식솔들에게 조그만 전세를 얻을 수 있도록 손써주었다는 일화도 있다.

심지어 일요신문 1996년 1월 21일자 2~3면 기사에서 윤보선 측근인 이한두의 증언에 의하면, 김재규가 거사 21일 전에 이 사실을 윤보선 전 대통령에게 알렸다는 이야기도 있었다고 한다.

평상시에는 온화하고 아랫사람에게는 따뜻한 성격이었으나,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에는 욱하는 성격이 발동해서 바로 반격을 가했기 때문에 지위를 막론하고 말릴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김재규는 10.26사건 이전인 1979년 봄부터 '자유 민주주의', '위대의', '민주민권자유평등' 등의 휘호 6점을 남겼다고 한다.

1979년 12월 1일 변호인단과의 3차 면담에서 김재규가 털어놓은 이야기에 의하면 김재규는 1977년 감옥에 갇혀있는 김대중을 서울대병원으로 옮긴 뒤 모친에게 '어머니, 추운 감방에서 고생하는 한 분을 따뜻한 방으로 옮겨 모셨습니다'라는 말을 하였다고 한다.

박정희의 전화를 받을 때 일어서서 차렷자세로 받았고, 다른 사람한테 박정희를 지칭할 때는 항상 존칭을 썼다고 한다.[31] 또한 남은 여생을 박정희 무덤에 묘막을 짓고 시묘하며 보내겠다고 말하기도 하였으며,[33] 최후진술에서 박정희와는 친형제간도 그럴수 없을정도로 가까운 사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김재규는 10.26 이전에 수차례나 박정희의 암살을 시도했다고 법정에서 증언한 바 있고, 김재규의 수사를 총 지휘한 당시 보안사령관 전두환도 회고록에서 김재규의 언동에서 박정희에 대한 존경심이나 충성심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충격을 받았다고 밝혔으며, 10.26 직후 김재규를 목격한 국무위원들이 김재규가 박정희를 죽이고도 전혀 슬퍼하는 기색이 없는 걸 보고 의아해했다는 증언 등 위의 언급을 반박할 행적들이 많이 존재한다.#

김재규는 자신이 중앙정보부장으로 재임할 때 중앙정보부에 자신의 심복들을 심어놓았다. 의전과장 예비역 해군 보병대령[34] 박선호는 그가 대륜중학교 체육교사로 잠시 재직할 때 가르친 제자이며, 수행비서 육군 포병대령 박흥주사단장 시절 그의 전속부관이었다.

김재규는 대한민국 국군에서 최초로 명예면관[35]을 당한 장교이기도 하다. 광복 후 얼마 지나지 않은 1947년 6월, 군경체육대회가 열렸는데 자기 부하를 강제로 연행하려는 미 육군 장교와 대립각을 세우며 칼로 위협하다 면관을 당한 적이 있다. 이후 고향인 경북 선산으로 내려와 대륜중학교에서 체육을 가르쳤는데 이 때의 제자 중 유명한 사람들이 꽤 있다. 위에서 말한 박선호와 전 국회의장 이만섭 등이 그 예다. 그러나 면관 1년 4개월만에 군에 복귀하였다. 건국 초기 군과 경찰은 서로 총질까지 하는 등, 사이가 굉장히 좋지 않았다.[36]

김재규의 주치의의 증언에 의하면 김재규는 유신독재 시절 "데모하는 학생들을 처벌하지 말라"는 지시를 대학총장들에게 내리기도 하였다고 한다. 심지어 자신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 어떤 대학총장에게는 "학생을 잡아가라고 하는 사람이 스승이냐"라면서 꾸짖기도 하였다.

김재규의 지인인 김진우 전 판사가 주진우 기자와 한 인터뷰에 의하면 김영삼이 국회에서 제명당했을 때 박정희는 김영삼을 구속하라고 지시했으나 김재규가 설득하여 지시를 철회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10.26 사건 당시에 나온 말이 그 유명한 "정치를 좀 대국적으로 하십시오"다.

김진우 전 판사가 부마민주항쟁 당시 부산지방법원장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김재규는 부산에서 기관장회의를 소집하였는데, 이 자리에서 군인들이 절대로 국민들에게 총을 쏴서는 안된다고 지시하였다고 한다. 또한 국민들도 군인들에게 잘 협조하도록 당부하여 무고한 사상자가 나오지 않도록 힘쓰기도 하였다.

유신독재에 항거하는 학생들을 전부 빨갱이로 몰아서 취직을 포함해 아무 것도 못하는 폐인으로 만드는 박정희의 통치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방식으로 생긴 '자생적 빨갱이'가 북한에서 넘어오는 '진짜 빨갱이'보다 무서운 존재"라며 박정희에게 정책의 시정을 요청했으나, 들어주지 않았다고 한다. 김재규는 평소에 유능한 인재들이 빨갱이란 이유로 탄압받는 일에 안타까워 하였고, 이런 일들이 발생하는 원인이 개인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 인재들이 잘못된 이념에 빠지도록 몰아가는 사회제도의 문제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사형 직전까지 쓴 옥중 수양록을 보면, 본인은 사형을 피할 수 없더라도 동조한 부하들을 어떻게든 살리고자 애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변호를 맡은 안동일 변호사와의 접견에서 자기보다는 부하들을 위해 변호해달라고 부탁하였으며, 법정에서도 본인은 죽더라도 부하들은 선처해달라며 재판관들에게 호소하기도 하였다. 또한 부하 가족들의 생계를 염려하여 자신의 남은 재산으로 이들을 돌봐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이후 김재규의 부인이 부하 가족들의 교육비와 생활비를 지원해주었다.

끝으로 나의 부하들은 착하고 순한 양 같은 사람들입니다. 무조건 복종했고 선택의 여유나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저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저 하나가, 중앙정보부장 지낸 사람이 총책임 지고 희생됨으로써 충분합니다. 저에게 극형을 주고, 나머지는 극형만 면해 주도록 부탁합니다. 특히 박 대령은 단심이라 가슴 아픕니다. 매우 착실하고 결백하며 가정적인 사람입니다. 청운의 꿈이 있던 사람입니다. 군에서 곤란하더라도 여생을 사회에서 봉사 할 수 있도록 극형을 면해 주시기 바랍니다. (김재규의 최후 진술)

문제는 밑에 친구들인데 무슨 방법으로든지 살리고 싶다. 법도 정상참작이 있을법 한데... 관세음보살님 저 젊은 사람들 살려주소서(1월 21일)
박흥주 대령 살릴 길 없겠는가. 한량없이 마음에 아프고다. 박선호 군 선량한 얼굴, 경비원들 저 무심한 표정들 살리고 싶다.(1월 23일)
부처님께 서원한다. 박선호, 박흥주 외 경비원 일동, 김계원, 정승화 장군 극형만은 면제되게 해 주십시오.(1월 24일)
저 젊은 생명 여하히 하겠는가. 나에게 끝까지 충성하고 있지 않는가.(음력 12월 29일)


김재규 옥중수양록

제 부하들은 아무 죄가 없습니다. 제 명령에 복종한 죄밖에 없습니다. 과거 일본에서도 부하들에게는 죄를 묻지 않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나보다는 그들(부하들)을 위해 열심히 변론해주십시오.


안동일 변호사와의 접견#

서명숙 현 제주 올레 이사장이 민주화 운동으로 감옥에 수감되었을 때 사기 혐의로 들어온 한 ‘장군의 부인’을 만난다. 이 장군의 부인은 수감 중 박정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대성통곡을 하지만, 죽인 이가 다름 아닌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라는 소식에 안면을 바꾸었다고 한다. '김재규 장군이 그랬다면 반드시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며 서명숙에게 김재규가 군 시절 얼마나 참된 군인이었는지 조목조목 들려주었다고 한다.#

이 사람이 세운 학교도 있다. 지금은 서울 용산구 이촌동에 있는 중경고등학교가 그 학교로, 원래는 서빙고동 지금의 한강중학교 위치가 학교 위치였다. 중경고등학교는 설립 당시에는 군 간부 자녀 전용학교였던 걸로 유명했는데, 최초의 특수목적고등학교 중에 하나이기도 했다.# 덕분에 박정희 정권 당시 후덜덜한 빽을 지닌 자녀들의 총집합소(?) 비슷한 곳이 되었던 과거가 있다.

그 시절에 학교 스쿨버스가 청계고가차도[37] 위를 휙휙 날아다녔다는 도시전설이 있고, 지금 육군사관학교 비슷한 스타일의 교복폭풍간지였다고. 그런데 10.26 사건 후 학교 부지가 몰수크리. 마침 중경고 근방에는 오산고등학교가 있었고, 한강중 근처에는 용강중학교[38]이 있었기 때문에 두 학교 위치를 바꿔버린 것.[39] 그 와중에 교훈이며 교표며 싸그리 갈렸다가 1999년에 와서야 교훈은 원래대로 환원됐다.

<사나이 결심>이라는 노래를 좋아했다고 한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사육신 목록에 자신의 조상인 김문기의 이름을 넣도록 하기 위해 학계에 압력을 가한 적이 있다. 사육신 문서 참고. 이는 사육신만 알고 삼중신을 몰라서 벌인 촌극이다.

1950년대 말 대령 시절에 참모총장 송요찬 장군에게 브리핑을 하다가 실수를 하여 송요찬 장군이 그를 크게 질책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욱한 김재규 대령이 욕을 퍼부으면서 "옷 벗으면 그만 아니냐!!"고 문을 걷어차서 나가버리는(!) 행패를 부린 사건이 있었다. 송요찬 장군은 어이가 없어서 그 자리에선 화도 못 내고 김재규 대령을 영창으로 보내버리려 했는데, 이를 이종찬이 말려서 육군대학 부총장 자리를 제의함으로 처벌을 피했다 한다.

다만, 이때는 송요찬 장군 본인의 무리한 요구도 문제였다. 김재규 대령의 사단은 당시 사단장이 다른 업무로 부재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사전 통보없이 갑자기 불시에 방문해서 김재규 대령에게 부재중인 사단장의 업무보고까지 요구하며 이것저것 트집을 잡았는데, 선술했듯 평소엔 온화하다가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폭발하는 성격이 발동(?)된 것이다.

첫 번째 결혼을 실패한 후, 김영희와 재혼하여 외동딸 김수영을 두었다. 그리고 당시 3대 요정 중의 하나였던 선운각[40]의 마담 장정이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을 두었다. 김재규는 당시 유부녀였던 장정이가 이혼한 후, 서빙고동의 약 200평대 부지에 고급주택을 지어주었고 15년간 동거했다고 한다. 장정이는 선운각 마담으로 일하던 당시, '몸빼', '억척이' 등으로 불리울 정도로 강한(?) 사람이었다고.

4.2. 사후[편집]

국가정보원 홈페이지에서는 그래도 역대 원장들 중 한 명으로 기록해주고 있다. 하지만 육군에선 대우가 전혀 다른데, 이 사람이 사단장을 지냈던 6사단의 역대 사단장, 연대장으로 지냈던 5사단 독수리연대 역대 연대장 목록에는 제명당한 상태다.

어른들과 술자리를 할 때, 제 때 술을 따르지 않으면 간혹 "박정희가 왜 죽었는지 아냐? 차지철한테만 술 따라주고 김재규는 술 안 따라 줘서 죽은 거다!"라고 농담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위의 분노설을 생각하면 나름대로 뼈 있는 농담이다.

전두환10.26 사건 이후 김재규에게 "왜 거사 후 자살하지 않았느냐? 당신이 한 자리 차지하려고 그런 것 아니냐??"며 조롱했다. 훗날 5공 청문회에서 국회의원이 된 김재규의 변호사 강신옥이 전두환에게 "당신이나 자결하라"는 말로 되갚아준다.#

대한민국 민주화운동의 원로이자 '10.26 재평가와 김재규 장군 명예회복 추진위원회' 대표인 함세웅 아우구스티노 신부는 2012년 8월 인터뷰에서 "33년이 지난 지금까지 국민과 역사가 김재규 부장의 참뜻을 깨닫지 못하고 있어 매우 안타깝다"고 말했다. 기사

김재규와 장정이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은 김재규 사후 어렵고 빈곤하게 살고 있다. 김재규는 10.26을 일으키기 전에 자신의 아들에게 "나 없이도 잘 살아야 한다"라고 했다고 하며, 김재규의 아들은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아버지를 말렸을거라고 털어놓았다. 관련 링크 그의 어머니인 장정이는 김재규 사후, 80년대에 부동산 사기로 구속되기도 하였으며 2008년 12월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다만 현재 김재규의 유족은 수백억대의 재산을 가지고 유복하게 살아가고 있다.기사김충식이 쓴 남산의 부장들에 따르면 제주지역에서 수렵장을 건설하겠다는 청탁을 김재규가 받아들였는데, 이를 김정렴 실장이 제지하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또, 동아건설 최원석 회장에 따르면 장충동에있는 자신의 30억짜리 집을 1억 주고 뺏어가서 10.26 이후에 전두환에게 돌려받은 일이 있다.

한국 미술계의 대형 스캔들인 천경자 미인도 위작 사건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미인도는 한때 김재규의 개인 소장품이었는데, 10.26 사건 후 김재규의 재산을 몰수하는 과정에서 이 그림이 국가로 귀속되어 1980년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된 이후 위작논란이 시작되었다. 즉, 김재규가 이 작품의 위작 여부를 알고 있었는지, 작품을 소장하게 된 경위가 어떤 지를 밝히는 게 위작논란의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일단은 김재규의 남동생에 의하면 "형수가 그 그림이 진품인지는 알지못하고 걸었다"라고 인터뷰한 바가 있고 검찰에 의하면 김재규의 부인이 친한 오모 대령의 부인에게서 받은 그림이라고 한다. 처음 이 논란이 시작되었을 때는 단순히 전 소유주라는 사실 이상의 관심을 받지 못했지만, 2016년 그 사건이 터지고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도 다루면서 김재규의 업적을 깎아내리기 위한 신군부와 미술계의 결탁이라는 가설이 힘을 얻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고.

김재규의 이름인 '재규'에서 연상되는 동물인 재규어를 이용하여 김재규를 재규어로 돌려말하는 사례가 많다. 그가 했던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는 말에서 야수가 있었다는 점도 재규어 드립을 연상시키는데 도움을 준 듯하다. 예전엔 벌집핏자, 수육과 같이 박근혜와 박정희를 돌려서 비하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시인 정호승은 1992년에 김재규 사형 전후를 배경으로 한 세 권짜리 장편소설 <서울에는 바다가 없다>를 냈다.

박근혜 탄핵 심판을 인용한 이정미 재판관은 "본래 수학교사가 꿈이었는데, 고등학생 때 10.26 사태로 인한 사회적 혼란을 보고 법률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

5. 매체에서[편집]

  • 욕망의 문
    정한용정주영 회장이 연상되는 거대 재벌총수로 나오는 드라마. 여기서는 실명 대신 정보부 부장이라는 호칭 아래 백찬기가 열연했다. 사진상의 김재규와 상당히 비슷했고 원래 정치자금 문제로 박정희와 같이 회장님에게 충고하는 1회성 출연이었으나 의외로 인기를 끌어 고정 게스트화 되었다. 여기서 박정희로 나온 사람은 연극인 故 이진수. 박정희와 정보부 부장 2명은 실제 인물과 꽤 비슷했기 때문에 당시에도 인기가 있었다.

  • 다큐멘터리 극장 - 12.12편
    KBS에서 방영된 12.12 사건 세미 다큐 드라마. 여기서는 김재규라는 이름으로 초기부터 나온다. 역시 백찬기가 김재규를 맡았고, 드라마 진행상 10.26 사건 이후 전두환에게 체포되면서 리타이어된다. 이 다큐 드라마에서 박정희이창환, 최규하김성겸, 전두환박용식으로 이후 정치드라마의 고정 배역의 시초가 된 작품.

  • 야망의 세월
    유인촌이 주연을 맡은 당시 건설회사 대표였던 이명박의 전기 드라마. 이휘향에게 정치공작을 지시하는 부장님으로 백찬기가 나왔다. 김재규라는 이름은 언급되지 않으나, 몇 번의 출연 후 작중에서 대사로 각하를 저격했다는 언급이 나와 그가 김재규임이 확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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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형이 극강의 김재규 포스를 보여주었다. 역대 최강의 포스를 자랑하는 김재규로 차지철을 쏠 때에 "이 새끼 너 건방져!"는 가히 명대사로서 차지철과의 말싸움과 그 싸움이 끝나고는 "이 개새끼!"라고 뇌까린 적도 있다. 10.26 사건을 일으키기 전 총을 겨누며 일본어로 '고로시마스(죽여버리겠습니다)'라고 중얼거릴 때의 포스는 압도적이다. 10.26 사건을 다룬 영상 매체에서 김재규가 '고로시마스'라고 중얼거리는 장면은 거의 빠지지 않고 나온다. 그 장면에선 아이러니하게 박정희의 사진이 배경으로 보이면서 총을 겨누니 가히 긴장감을 일으키게 만드는 명장면.[41] 박정희를 저격한 후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더 이상 언급이 없다가 5.18 민주화운동 이후 4공을 본격적으로 다루면서 차지철과 말싸움을 주고받으면서 개그 캐릭터화가 될 뻔 하였으나 배우의 포스로 그나마 무게를 잡았다.

덧붙이자면 전작인 제3공화국의 김재규는 김동현이 맡았다. 6사단장 시절로 나왔는데 비중은 실로 미미했다. 이후 김동현은 코리아게이트에서 장태완 소장을 맡게 되었으나, 2005년 제5공화국에서 같은 배역을 맡은 김기현의 포스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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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에서 정도전 전문배우로 유명했던 김흥기가 김재규 역을 맡았다. 제4공화국과 같은 시기에 방영되어 드라마는 신통치 않았고 4공에 묻힌 감도 있다. 배우가 배우인지라 연기력은 훌륭했지만 워낙 4공에서의 박근형 포스가 막강했던지라 그에 비하면 살짝 역부족. 그런데 드라마 초반에는 중앙정보부장 시절에도 안경을 착용하지 않았다가 후반부에 착용한다. 이 드라마 19화와 마지막 화인 20화는 김재규의 일생이 중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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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윤식이 열연했다. 김재규와 박정희 살해 사건을 주제로 한 블랙 코미디 영화. 이런 류의 풍자 코미디가 드문 한국에서는 괜찮은 수작이다. 다만 조롱에 중점을 둔 나머지 영화 속 청와대 사람들에 대한 묘사의 리얼리티는 떨어진다는 평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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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명품 역사 드라마. 여기서도 김재규가 포스 있는 캐릭터로 등장한다. 연기자 김형일은 실제 김재규와 외모, 분위기가 매우 비슷하다. 다만 김형일은 체구가 크고 목소리도 되게 묵직한데 비해서, 실제 김재규는 체구가 작고 목소리도 가늘게 높다. 본관까지 같은데 김형일이 한 항렬 위다. 조카를 연기하는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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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수가 연기하였다. 작중 묘사되는 10.26은 김재규가 술에 취해 갈지자 걸음으로 나와 부하한테 총을 빌리고 쐈다는 뉘앙스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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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관련된 원문이 삭제되어 짤만 존재하는 상태. 여포동탁을 살해하는 장면. 이말년 시리즈 하차 이후 이말년 서유기를 연재하기 전 삼국지를 검토한 적이 있고 그 중간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그림. 이말년 집 침대에 장식되어 있다 카더라. 이말년은 이것 말고도 전두환노태우패러디한 이각과 곽사가 김재규로 패러디한 여포를 낙양성에서 쫓아내는 그림도 그렸다. 실제 역사와도 유사한 게, 여포(김재규)가 동탁(박정희)를 죽였으나, 정작 이후 이각과 곽사(전두환노태우)가 권력을 잡게된다.

  • 빛과 그림자
    김병기가 연기한 김재욱 중정부장. 실존 인물 김재규를 모티브로 한 인물이다. 이는 그가 차지철을 참고한 역할인 장철환과 대립하고 있다는 점, 장철환이 그에게 전면전을 선포하려 하자 차수혁(이필모)이 "김 부장은 각하와 동향(경북 선산)으로 특별한 신임을 받고 있다"고 진언한 점 등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역사적 사실과는 달리 김재욱은 정권이 바뀐 후에도 죽지 않고 사업가로 변신하여 강기태(안재욱)를 뒤에서 지원해준다.

  • 브이
    김재규라는 이름은 나오지 않지만 김훈(태권V)의 과거 회상에서 김부장이라는 캐릭터가 등장하며, 김훈은 신군부에게 대통령을 시해한 김부장과 한패라는 누명을 쓰고 고문을 받았다.

  • 택시운전사
    극중 김재규의 10.26 사건에 대한 재판 결과 때문에 외신기자들의 관심이 다 그 쪽으로 쏠려 있다고 힌츠페터의 한국 동료(정진영)가 언급한다. 영화보다가 김재규라는 말에 놀란 사람들이 많았다.

  • 기타
    영화 내가 살인범이다, 드라마 시그널에 출연한 배우 정해균이 김재규를 닮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2016년 12월 기준으로) 네이버에 정해균을 검색하면 자동완성으로 김재규가 뜰 정도. 특히 10.26 사건 이후 머리를 풀어헤치고 현장검증을 하고 재판을 받을 당시의 모습과 매우 닮았다.


[1] 10.26 사건을 일으키고 수감된 이후에 불교를 믿었다. 관련 출처.[2] 당시 건설부장관으로서 몸소 중동에 방문해 (한국 기업을 통한) 중동 개발에 적극적으로 협조한 공을 인정받아 획득했다.[3] 박정희의 고향 후배인 것이 이후의 진로에 도움을 주었다는 이야기가 많다.[4] 해방 후 안동농림고등학교, 현 한국생명과학고등학교의 전신[5] 이전 문서에 경북대학교 농과대학이라고 기술되어 있었는데, 이 당시에는 2년제 전문학교였다. 해방 후 대구농과대학을 거쳐 1951년 대구사범 등과 통합하여 경북대학교로 개교한다.[6] 일제강점기 당시 중등교원의 수가 부족한데 반해, 조선 내에는 고등사범학교가 없었다. 문과의 경우 경성제국대학 졸업자 등으로 수요를 채울 수 있었지만, 이공계 쪽의 교사가 부족하여 일제는 각종 전문학교에 2년제 '교원양성소' 과정을 도입하여 교사인력을 충원했다.[7] 現 김천중학교&김천고등학교[8]대륜중학교&대륜고등학교[9] 참고로 박정희는 6.25때 후방에서 보급병과 장교로 근무하느라 전공은 커녕 북한군과 마주친 적조차 없다.[10] 이 시절 재일교포 서승 형제 간첩단 사건에 관여한 흑역사가 있다. 이 형제는 방한 전 재일교포 신분으로 북한에 방문하고 선물까지 받아온 전력이 문제가 되어 보안사에 체포되었다. 이들은 고문을 동반한 고강도의 조사를 받았는데, 고통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간첩 혐의를 인정하게 되고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이는 훗날 고문에 의한 강제자백이었음이 밝혀졌다. 김재규를 긍정적으로 보는 학자들도 이 건에 대해서는 옹호하지 않는다. 기사 [11] 이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는데, 김종오, 박병권, 민기식, 김용배, 김계원, 이세호, 임충식 등은 그저 그런 무난한 인물들이 아니다. 다만, 12.12 군사반란 때 당시 국방부 장관이던 노재현이 보여준 추태가 워낙 커서 앞의 인물들까지 도매금으로 같이 까이는 경우가 많다.[12] 파일:walderppk-20161228-150640-001.jpg출처 [13] 그리고 여기에 책임을 진다는 구실로 중정부장 자리에서 물러나고 싶다고 사의를 표했으나 거절당했다. 출처 이는 그가 권력욕에 취해 10.26 사태를 일으켰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 논거로 쓰인다.[14] 라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 박정희 암살에 성공한 총기는 M36 치프 스페셜이다.[15] 포섭해 두지 않아 내막을 몰랐던 이들[16] 80도306 판결 참조. 내란죄에 있어서 목적에 대한 인식의 정도는 미필적 인식, 즉 자신의 행위가 범죄발생의 가능성이 있음을 인식하고 있는 상태만 되도 행위자가 그러한 목적이 있었다고 볼 수 있으며, 이로인해 구성요건이 충족된다. 즉 김재규는 박정희를 죽일 때 국헌문란을 일으키고자 하는 목적은 없었으나, 대통령의 사망이 국헌문란을 가져올 것을 미필적이나마 인식하고 있었고 그것으로도 국헌문란에 대한 목적의 인식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는 소리다.[17] 열사라고 칭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만약 칭호를 붙인다면 무력을 사용했으므로 열사가 아닌 '의사(義士)'라고 해야 맞다. 열사는 보통 자신의 지조를 지키다가 죽은 사람을 의미하는 반면 의사는 무력을 통해 의거를 한 사람을 뜻하므로 '김재규 의사'가 의미에는 좀 더 부합한다. 김재규 묘비에도 의사(義士)로 적혀 있다.[18] 그러나 한홍구는 하단의 긍정론에 서술되어 있듯 2013년을 기점으로 김재규에 대한 견해가 바뀌었다.[19] 김재규/항소이유 보충서 [20] 대표적으로 김재규는 그가 교사 시절 제자였던 이만섭 전 국회의장과 가까웠는데, 10.26이 터지기 전 이만섭과의 식사 자리에서 "다른 건 다 참겠는데 차지철이 때문에 골치야"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출처1 [21] 강직한 군인 유능한 건설부장관 무능하고 유약한 중정부장을 보면 알듯이 폭주하던 중정을 제어한 것을 보면 이런 비난도 무색하다[22] 물론 시간이 배로 걸린다는 전제가 붙는다. 실권을 쥐고 있는 핵심 요직원들과 군부쪽 인사들은 확고한 박정희 지지자이기 때문에 설득하기 어렵다는 부분도 걸리긴 하다.[23] 김재규 본인은 소위 설거지론을 얘기하며 5개월간 유신의 잔재를 처리하려 했다고 밝혔다. 대통령이라는 직위를 자신이 담당하는건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며, 다만 혁명위원회를 구성해서 권력을 인수하겠다는 정도를 생각했다고 밝혔다.[24] 독재 국가에서 독재자가 살해당한 사례는 많이 있지만 집권 도중 최측근인 부하에게, 그것도 권력 찬탈 목적의 암살이 아닌 대놓고 너죽고 나죽자는 식으로 살해한 사례는 많지 않다.[25] 거의 조승희를 미국내의 인종차별에 맞선 사회 운동가라며 제너럴 조라고 치켜올리며 조롱하는 것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보면 된다.[26] SBS 환경 다큐멘터리 '물은 생명이다' 의 원고 집필로 유명, 이외에 2016년에는 통합진보당 내란음모 수사 사건에 대한 재고찰과 관련한 내용을 담은 <<이카로스의 감옥>>을 집필하기도 했다.[27] 묘소 위치를 자세히 설명한 글 링크[28] 당시 변호인단들은 김재규의 인품에 반해 37년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김재규를 장군이라 칭하며 추모하고 있다. 이 영향인지는 몰라도 디시위키에서도 김재규를 장군으로 부르며 존경하고있다.[29] 추모비 하단에 금이 가있는 것은 이 때의 흔적이다.[30] 아버지가 찾아오자 풀어줬다고 한다. 출처는 안동일 저서 '나는 김재규의 변호인이었다.'[31] 심지어 10.26 사건 이후 재판과정에서도 항상 "대통령 각하"라고 존칭을 쓰면서 말한다. 또 궁정동에 대한 이야기는 심지어 재판정에서 박선호의 증언을 제지하면서까지 막았다. 당시 박정희조차 김영삼김대중의 사생아 문제가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었음에도 "남자의 허리 아래는 거론하지 말라"[32]고 일축할 정도로 당시 시대에 남자의 성생활 문제를 언급하는게 금기시되었던 이유도 있을 것이다.[32] 이는 이토 히로부미도 생전에 했던 말이었다. 이토는 생전에 매우 문란한 인물이었다.[33] 또 다른 증언으론 박정희를 죽이고 자신도 박정희 무덤에 가서 자살하겠다고 했다고 한다. 다만 이 말을 했던 시점은 10.26이 벌어지기 전이기에, 최종적으론 시묘살이를 할 생각이었던 모양이다.[34] 해병대사령부 해체 후 해병대 인원들은 해군 상륙전 계열 병과 인원들로 서류상 변경되었다.[35] 예편과 비슷[36] 전부 좋지 않은건 아니고 광복군출신과 일제 순사출신과의 사이[37] 마이크로버스 이상은 통행금지이다.[38] 당시에는 용산여자중학교.[39] 하필이면 한강중학교가 이전한 곳에도 근방에 남중인 오산중학교가 있다. 이것 때문에 현재 한강중에는 여학생이 훨씬 많다.[40] 선운각의 에이스 기생이 바로 정인숙이었다.[41] 그런데 이것은 영화 택시 드라이버 표절 냄새가 나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