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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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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용대장시절. 주성치?

단선 단정 반대 대책에 관한 결정서 초안을 낭독하는 인민공화당 김원봉.

1. 소개2. 생애
2.1. 출생, 학력2.2. 의열단 활동과 중국혁명 활동2.3. 조선의용대 조직2.4. 조선의용대의 분열2.5.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2.6. 해방 이후2.7. 북한 정권 수립 참여, 실각과 최후
3. 가족4. 평가
4.1. 비판
4.1.1. 대한민국 테러 행위
4.2. 장준하의 평가
5. 인물 연표6. 각종 매체에서의 등장7. 성격 및 일화

1. 소개[편집]

의열단, 혁명당, 의용대를 조직하여 독립운동가이자 항일무장 투쟁의 전설적인 인물 그러나 월북과 종파와 분단으로 에서 인정받지 못했던 존재
1898년 9월 28일[1] ~ 1958년 11월(추정)

2. 생애[편집]

2.1. 출생, 학력[편집]

경상남도 밀양시에서 태어나 경성부 중앙중학교를 중퇴하고, 중국으로 건너가 1918년 난징 금릉대학(金陵大學)에 입학하였다. 그 뒤 만주로 건너가 만주 신흥무관학교에서 수학하였으나 자퇴하였다.

2.2. 의열단 활동과 중국혁명 활동[편집]

1919년 12월, 의열단을 조직하여 의백(맏형)에 취임, 국내 기관 파괴, 일제 요인 암살 등 다양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26년에는 보다 더 체계적인 무장투쟁을 위해, 중국 국민당 정부가 설립한 광저우 황포군관학교에 입교했다.[2] 이곳에서 얻은 군사지식 및 사회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조선공산당재건동맹, 조선민족혁명당을 조직하여 활동했다. 김원봉은 황포군관학교를 4기로 졸업하고, 국부군 장교로 임관하여 군관학교의 교관으로 근무했다. 그가 이끌던 의열단원들도 중국 국민혁명에 가담하였다.

1927년 8월에는 저우언라이, 주더 등이 지도한 중국 공산당의 출범을 이루어낸 난창봉기에 참여했다.

2.3. 조선의용대 조직[편집]

민족유일당 운동 이후 1930년 조선민족혁명당을 조직한 뒤, 1932년 장제스의 도움으로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중국 난징 외곽에 설치하고 요원을 모집, 양성하였다. 1938년 10월에는 훈련해온 청년들을 규합하고 중화민국 정부(중국 국민당 정부)의 동의를 얻어 한커우에서 조선민족전선연맹 산하에 항일 군사조직인 조선의용대를 조직, 편성하여 대장에 취임했다.

당시 중국의 2차 국공합작에 의해 통일된 후원 세력을 얻은 조선의용대는, 국민당 정부군의 지원부대로 창설되어 중국 본토에서 일본군과 대항하여 싸웠으며 대원들은 국민당 정부로부터 식비와 공작비 등을 후원받았다.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를 모두 구사할 수 있는 대원들이 많았으므로 선무공작, 즉 선전 업무를 맡아 일본군에게 전단을 배포하고 확성기를 이용한 방송을 했다.


(조선의용대 선무공작 홍보영상). 1940년 作. 현재까지 알려진 그의 육성이 담긴 유일한 영상이다.

2.4. 조선의용대의 분열[편집]

그러나 조선의용대의 젊은 대원들 사이에 "전선에서 떨어진 곳에서 편하게 훈련만 받고, 정보수집만 할 것이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 군대가 있는 곳에 가서 싸우면서 항일운동을 하자"는 주장이 제기되기 시작하면서, 1941년 사이에 박효삼이 일부 대원들을 데리고 이탈, 화북지역의 태항산으로 올라가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활동하게 되었다.

조선의용대의 분열은 무장독립운동에서 김원봉의 영향력이 축소되는 계기가 되었고, 김원봉도 화북지대의 활약에 비해 국민당의 소극성에 붙잡혀 있는 본대의 현실에 분개했다. 이 부분은 항일 무장독립운동사에 있어서 가장 비극적인 부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임시정부의 광복군 세력보다 조선의용대 세력은 실전경험이 풍부했다. 광복군은 엄연히 말하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직속 단체라기보다는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직속 단체나 다름없었다. 이는 국민당 정부의 지원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던, 임시정부의 극빈한 자금력에 기인한다. 거기에 국민당 정부에게 광복군은 외국군대인데, 말 그대로 믿기힘든 외국군대를 훈련시켜주고 군복에 무기까지 지원해주는데 그걸 공짜로 해줄 리가. 지원을 받는 대신 광복군의 통수권은 국민당 정부에게 있었다. 사실 이에 대해 뭐라고 하기도 힘든 것이,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 아프리카 어느 망명 정부가 들어와서 산골짜기에 사령부를 차리고 젊은이들을 모아 군사훈련을 한다면, 암만 우방국이래도 신경이 상당히 거슬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나마 국가원수인 장제스 총통이 윤봉길과 김구 덕에 조선과 임정에 호의적이었던지라 이 정도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일본군과 여러 차례 교전을 벌이기도 했다. 대표적인 전투가 바로 태항산 전투다. 이 당시 지휘관이 김무정. 일본군 지휘관은 홍사익. 1942년 7월 김두봉을 위원장으로 하는 조선독립동맹이 결성되면서,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도 같은 해 8월 조선의용군으로 개편되었다. 이들은 중국 공산당과 함께 항일 전쟁을 계속했고, 해방 이후 국공내전까지 참전했다.

2.5.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편집]

1942년 조선의용대를 이끌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한다. 이는 임정이 1941년 대한민국 건국강령에 포함시킨 조소앙삼균주의가 그의 뜻과 일치하는 바가 있어서 그러하였다.[3] 임시정부에서 광복군 제1지대장 및 부사령관을 맡았다. 당시 사령관은 지청천이었는데...

문제는 김구를 비롯한 임정 내 우파세력들과 항상 마찰을 겪었다는 점이다. 해방 이후에도 김원봉 계열의 광복군과 지청천 계열의 광복군은 사이가 굉장히 나빴다. 해방된 지 40년 넘게 지난 뒤에도 서로를 친일파(?!?!)이자 빨갱이(?!?!)라고 몰아붙이는 험악한 인터뷰를 찾아볼 수 있다. 두 사람 손에 죽어나간 일본군이 한둘이 아니며, 지청천은 대놓고 우익인데 오죽 앙금이 심했으면 저리 말할까 싶을 정도.[4][5] 당시 지원해주던 중국 국민당 단체도 달랐다. 조선민족혁명당대립남의사지원을 받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CC단(CC파벌)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자세한 건 중국 국민당 문서의 조선 독립운동 부분을 참조.

2.6. 해방 이후[편집]

해방을 맞아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귀국한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특별정치위원회 중앙위원으로 좌익 쪽과 협상을 하다가 좌·우익의 대립이 첨예하게 발전하자 임시정부를 탈퇴하고 민주주의민족전선에 합류하였다.

1947년 7월 좌우합작운동을 주도했던 여운형이 암살되자, 여운형의 죽음에 분노하여 애도문을 '광명일보', '노력인민' 등 좌익지 7월 25일자에 게재하여 여운형의 유지를 받들어 미소공위를 성공시키자고 호소했다.[6]

1948년 4월 남북협상김구, 김규식과 함께 북한으로 건너갔다가 그대로 잔류하여 월북인사가 된다.

김삼웅을 비롯한 진보성향의 인물들은 친일파들 탄압에 못 이겨 월북하였다고 한다.[7][8] 김원봉의 여동생 김학봉 씨에 의하면 김원봉 월북전에 자신(김학봉)은 물고문을 당했고 김원봉의 월북 후에는 상황이 더 나빠졌으며 비슷한 시기에 끌려간 용봉·봉기·덕봉·구봉 등 오빠 4명이 모두 총살 되었다고 한다.[9] 다만 다른 남동생인 봉철은 1986년까지 생존했고, 조카들도 생존 중이다.

황용주 전 MBC 사장은 "민전이 흐지부지되고 좌우합작이 실패한 데 대한 실망에다 자기를 따르던 단원들이 거의 북쪽으로 돌아서 버린 점에 따른 동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추측했다.참고

사실, 해방 후 중도파를 아우른다 하였으나 실상은 공산당이 주도하였던 '민주주의 민족 전선'의 의장단 일원이었던 그가 무사하길 바라는 것이 더 힘들 것이다. 참고로 그와 함께 의장단에 속했던 사람이 박헌영, 허헌, 여운형, 백남운이다. 암살당한 여운형을 제외하고 나머지 3인은 모두 47년 말에 월북하였는데 김원봉은 그래도 반 년 이상 남한에서 무사히 살아남았으니 생존력이 대단했던 셈. 강준만에 의하면 김원봉은 일제시대 때의 경험을 통해 한곳에 2시간 이상 머무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가장 오래 살아남았다고.

2.7. 북한 정권 수립 참여, 실각과 최후[편집]

1948년 9월, 북한정권이 수립되면서 국가서열 7위에 해당하는 국가검열위원장에 올랐고 이 밖에도 노동상,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중앙위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의장 등 여러 고위직을 거쳤다.

6.25 전쟁과 남침에 반대했다는 설도 있고, 1957년 9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임명을 근거로 6.25 전쟁에 참여했다는 설도 있지만 확인된 바는 없다.

1954년 1월 25일 남파간첩 4명이 체포되었는데, 조사결과 이들은 김원봉의 직접 지휘 아래 남한의 경제 혼란 및 선거방해 목적으로 남파된 것으로 밝혀졌다. 참고

1956년에 터진 8월 종파사건을 계기로 연안파가 숙청된 후, 1957년 9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임명되기도 하였으나 1958년 전면 실각했다. 그리고 실각 이후에 행방이 묘연해지는데, 시골로 내려갔다는 설, 자살설, 총살설 등이 나오고 있지만 대체적으로 실각 직후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을 뿐 자세한 사망 시기, 경위는 알 수 없다. 다만 '국민당 장개석의 간첩이자 종파주의자'라는 어처구니 없는 혐의를 뒤집어 씌워 죽였다는 설이 매우 유력하다.[10] 이후 김일성에 의해 형무소로 끌려가 거기서 울분을 참지못해 청산가리를 입에 털고 자살했다고 알려져 있다.[11]

김원봉 본인은 황포군관학교 졸업생이므로, 당시 교장이던 장개석과 사제관계였다. 무엇보다 김원봉이 황포군관학교 졸업생인 만큼, 국민당군 장교로 임관한 이력까지 있었다. 그것도 군관학교 교관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이끌던 조선민족혁명당도 중국 내 백색테러를 주도하던 국민당 남의사의 지원을 받던 단체였는데... 그 남의사의 총수 등걸(藤杰)이 김원봉의 군관학교 동기였다. 등걸은 국부천대 이후 대만으로 건너가 고위직을 역임했다. 등걸의 증언에 따르면 김원봉과 군관학교 동기생이었기 때문에, 지원은 물론이고 잦은 연락을 가졌다고 한다. 김일성으로선 국민당 간첩으로 몰아붙여 뒤집어 씌우기 너무나 좋은 이력을 가졌던 것이다. 그러면서 정작 똑같은 황포군관학교 졸업생에 국민당군 대령이던 최덕신이 월북했을 땐 좋다고 넙죽 받아주며 김일성 훈장까지 수여했다.

1945년 재혼한 부인에게서 중근, 철근 두 아들을 뒀는데,[12] 문제는 숙청 당시 부인과 아들 모두 평양에 있었다. 가족은 지방으로 내려보내기라도 했다면 백석(시인)처럼 고난의 행군 시기에 외부로 이야기가 흘러나왔을 텐데, 지금까지도 아무런 소식이 없다. 따라서 연구자들은 숙청의 와중에 부인과 두 아들 모두 피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3. 가족[편집]

첫 부인 최씨는 평안도 출신 여성이었고, 두 번째 부인은 유명한 여성 독립운동가로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 단장을 지낸 박차정으로 1931년에 결혼하였으나, 1939년 장시 성에서 일본군과 전투 중 입은 총상의 후유증과 관절염 등으로 1944년 충칭에서 병사했다. 이어, 세 번째 부인 역시 조선의용대 출신의 최동선이다. 최동선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큰 아들은 김중근(1945년~)이고 둘째는 김철근(1947년~)이다. 북에 최동선이 낳은 그의 두 아들이 생존해 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앞서 설명한 것처럼, 연구자들은 김원봉이 김일성에 의해 숙청될 때 부인은 물론 아들들도 모두 피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거물급 월북/납북인사들의 소식은 냉전시기에도 판문점 채널(북한 기관지나 언론인을 통한 북한의 공식입장)이나 조총련계열 재일교포들을 통해 알음알음 전해졌고, 특히 국가통제가 일시적으로 붕괴했던 고난의 행군 시기 외부로 알려진 바가 많았다. 그러나 김원봉 일가의 소식은 아직까지도 감감 무소식이기 때문. 50년대 중후반 김일성의 숙청작업으로 멸절된 인사들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숙청된지 반 세기가 넘어서, 숙청인사 가족들의 최후를 정확하게 기억하는 사람도 없는 것이다.

남에서 가족들 중 남동생들은 한때 보도연맹 사건으로 살해당한 것으로 알려져있었으나, 김봉철(1918 - 1986)은 살아남았다.

남에 남은 유일한 남동생 김봉철은 4. 19. 혁명 당시 동생들의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밀양피학살자조사대책위원회에 참여했는데, 이후 이를 이유로 박정희 정권 하에서 무고한 옥살이를 하다 1986년 사망하였고, 2010년 유족들의 노력으로 인해 대법원에서 재심결정 및 무죄를 선고 받았다(관련기사). 현재 김봉철의 외손자 전경민 변호사가 부산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약산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여동생 김학봉(1932년~)은 여전히 밀양에 살고 있다. 김학봉의 자제 (약산의 조카) 김태영의 인터뷰 : 형제 4명은 총살.. 김원봉 집안 풍비박산

두 번째 부인인 박차정은 김두봉의 5촌 조카뻘인데, 박차정의 외당숙이 바로 김두봉이다. 박차정의 어머니가 김두봉의 사촌동생이라고.

4. 평가[편집]

일제로부터 해방을 위해 목숨을 내걸고 무장 독립투쟁을 이끈 인물 중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던 독립운동가.

독립운동 가운데 중 특히 무장투쟁 노선으로는 절대 빼놓으려야 뺄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이다. 빼놓을 수 없는 굵직굵직한 단체의 장을 여럿맡았으며 이 분의 거취에 따라 무장투쟁세력들의 판도가 달라졌다. 그럼에도 무장투쟁활동 활약상에 비해 남북한 양쪽의 평가는 낮은 편이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에게 숙청되어 묻혀버렸고, 한국에서는 북한 정권에 공헌한 공산주의자로 인식되어 독립운동 경력까지 도매금으로 넘어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감이 있다.

근래 한국에서는 독립운동 경력을 인정받고 있으며, 교과서에도 실린다. 그러나 뭐가 어떻게 되었든 북한정권 수립[13]에 참여하여 활동한 사람이기 때문에 건국훈장은 받지 못하였고 앞으로도 받을 가능성은 매우 적다.[14]

북한에서 활동하긴 했으나 "진짜로 공산주의자였는가?"는 부정하는 주장이 많다. 1945년 8월 광복 직후, 귀국 전에 중국 상하이에서 체류할 기간 동안 일본군으로 강제징집 당했던 '황용주'[15]는 김원봉과 오랜 시간 얘기를 나누었다 한다. 황용주에 따르면 '김원봉은 김일성의 무장항일투쟁을 매우 좋지 않게 생각했다. 그는 김일성의 활동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회고하였다고 한다.# 사실 김원봉이 활동한 의열단은 아나키즘적 성향이 더 강한데, 김원봉이 공산주의자에 아나키스트였는지는 아직까지 밝혀진 바는 없다. [16]

북한 정권에서 직책을 역임할 때도 상당히 온건하고 치우지지 않은 성향을 보여 한국전쟁 때 납북된 정치인들[17]을 최대한 도와주었다고 알려지며 한국전쟁 휴전 이후에도 '중립화 평화통일안'을 주장한 인물이기도 했다.[18]

최근에는 교과서에도 실리게 되고 한국사능력검정시험에서 의열단과 조선의용대의 활동내용이 출제가 되면서 입시를 위해서라도 김원봉을 기억한다는 점이 다행이라면 다행. 그리고 영화 암살밀정 등 대중매체에서 조금씩 다뤄지기 시작하면서 김원봉의 업적이 재조명 받고 있다.

참고로 항일 투쟁 당시 일제가 김원봉에게 100만 원이라는 현상금이 걸었었는데 그 당시 100만원을 현재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약 320억 정도라고... 이 320억이라는 금액은 현대 세계 주요 테러리스트 집단의 우두머리들에게 내건 금액과 맞먹는다. 그만큼 일제에겐 김원봉이 지독하고 두려운 인물이었다는 반증. 물론 현상금이 매우 컸기에 일제가 김원봉을 잡아들여도 제보자에게 이 금액을 지불할 능력도 없었고 그럴 의지도 없었을 것이라는 게 정설이다. 임시정부 주석인 백범 김구에게 걸린 현상금은 60만원[19]이었던 걸 감안하면 김원봉이 얼마나 존재감이 크던 인물인지 알 수 있다.

4.1. 비판[편집]

4.1.1. 대한민국 테러 행위[편집]

'''김원봉이 대한민국의 경제혼란과 선거방해를 위하여 간첩단을 파견했다는 경향신문 기사."'

김원봉이 직접 지시했다는 내용이다.

실제로 김원봉은 북한 초기내각의 핵심 인물 중 하나였다.

1948년 6월 29일부터 7월 5일까지 제2차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를 다시 개최하자 참여, 8월 25일에 북쪽에서도 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해 8월 북조선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이 되었고,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수립 후 내각 국가검열상이 되었다.

1948년 8월 북조선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정부수립 이후 국가검열상에 임명되었다(9월 9일).

4.2. 장준하의 평가[편집]

"몇 사람씩 따로 불러다가 술을 사 먹인다든가 혹은 금품으로 매수하는가 하면 조선민족혁명당의 김원봉 계열에서는 심지어 미인계를 쓰기도 하였다."
- 장준하, 《민족주의자의 길》(박경수 저, 돌베개 2003.08.05)에서

"김원봉 일파는 중국 남의사 라는 특무기관의 원조를 받고 있는 처지였다."
- 장준하, 《장준하전집 1 : 돌베개》(장준하 저, 세계사, 2001.11.03)에서

"즉 개별적으로 몇 사람씩 불러다가 술을 사먹인다든가, 심지어 김원봉일파에서는 미인계까지 쓰고 나서는 형편이었다."
- 《장준하전집 1 : 돌베개》(장준하 저, 세계사, 2001.11.03)에서


장준하의 경우 반공주의자의 면모가 강했으므로 좌익인 김원봉에 대한 그의 평가는 이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5. 인물 연표[편집]

연도

행적과 역사

1898년

경남 밀양 출생

1910년

한일강제병합

1916년

중국 망명

1919년

3·1운동 ,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 신흥무관학교 재학(6~9월)
- 의열단 창설 (11월)

1920년

부산·밀양경찰서 폭탄 투척 (의열단원 박재혁·최수봉)

1921년

조선총독부 폭탄 투척 (의열단원 김익상)

1922년

일본군 대장 저격 미수 (의열단원 김익상·오성륜·이종암)

1923년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및 도심 총격전 (의열단원 김상옥)
- 신채호 <조선혁명선언> 집필

1924년

도쿄 궁성 폭탄 공격 미수 (의열단원 김지섭)

1926년

황포군관학교 입학
- 동양척식(주)·식산은행 폭탄 투척 (의열단원 나석주)

1927년

중국 공산당 봉기 참여, 의열단 조직 위기

1929년

'레닌주의' 창간호 발간, 조선공산당 재건설동맹 결성

1932년

'조선혁명간부학교' 설립 (교장 취임)

1935년

난징에서 의열단 등 5개 단체 '민족혁명당' 결성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조선민족전선연맹 (독립운동단체 연합) 결성

1938년

'조선의용대' (군사조직) 결성

1941년

민족혁명당, 임시정부 참여 선언

1942년

조선의용대 광복군 편입 (부사령관 취임)

1944년

임시정부 군무부장 취임

1945년

광복, 귀국

1946년

대구 총파업 발생, 민주주의민족전선 공동의장 취임

1947년

친일경찰 노덕술에게 체포

1948년

월북·북한 정부의 국가검열상 , 남북한 정부 수립

1950년

6.25 전쟁 발발

1952년

북 노동상

1957년

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부위원장

1958년

숙청설, 사망 추정(향년 60세)

출처 : 2015년 8월 15일자 경향신문 광복 70주년 약산 김원봉 특집기사

6. 각종 매체에서의 등장[편집]

《아리랑(Song of Arirang)》(님 웨일즈 지음, 조우화 옮김, 동녘)과 《김산 평전》(이원규 지음, 실천문학사 펴냄)에 주인공 장지락이 만난 주요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약산 김원봉이다.

야인시대》에서도 등장. 실제로는 공산주의자와는 거리가 있었던 김원봉을 왜곡해서 해석했다. 하필이면 그 옆에 있던 사람이 심영이라...

팟캐스트 방송 이박사와 이작가의 《이이제이》 중에서 2013년 2월 20일에 업로드된 29화에서 약산 김원봉 특집을 다루어 매체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우리가 전혀 몰랐던 독립운동가를 알게 됐다는 평이 많았다. 다만 해당 방송은 김원봉에 대한 낭만적인 인식이 강하다. 관련 팟캐스트로 '다시또역시' 25화를 참고하면 된다.

팟캐스트 《다시또역시》에서도 김원봉에 대해 방송하였다.

광복절 특집극 《절정》에서 김원봉 단장이 등장한다. 윤세주의 천거로 이육사의열단에 받아들이게 된다.

2015년 7월 개봉된 영화 《암살》에서 비중있는 조역으로 등장한다. 사실상 한국 내 영화, 드라마 내에서 김원봉에 대한 의미있는 조명은 이 영화가 처음이라고 봐도 좋다. 한국사회가 70년 동안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알게 해주는 부분. 배우는 조승우. 여담으로 암살의 흥행과 김원봉에 대한 재조명이 이뤄지면서 2013년 초에 업로드했던 이이제이 김원봉 특집 편의 순위와 구독수가 급상승했다고 자신들의 방송에서 언급하면서 이 영화에 대해서도 응원 메세지를 보냈다.

암살에 이어 2016년 9월 개봉인 《밀정》에서 이병헌이 맡은 역할인 정채산이 김원봉을 모티브로 한 의열단 단장으로 나온다.[20]

2019년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아 3년만에 다시 부활하는 KBS 대하드라마의 주인공으로 김원봉이 선정되었다. #

7. 성격 및 일화[편집]

  • 상당히 말이 없고 과묵한 인물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다지 말을 잘 하지 않는 성격인데 토론이나 웅변 때문에 한 번 말했다하면 상대방을 휘어잡는 카리스마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 항상 무표정이었다고 한다. 그와 임시정부 시절 오랜 시간을 보냈던 김구마저도 그가 웃는 모습은 거의 못봤다고 한다.

  •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여성 독립운동가였던 박차정 여사와 결혼하고, 신접살림까지 차려서 살았다. 나중에 부인이 1939년 곤륜산 전투에서 어깨에 총상을 입고 순국했을 때, 손수 밀양에 돌아와 묻어주었다고 한다. 김원봉이 손수 만든 무덤은 아직도 밀양에 보존되어 있다. 다만 관리가 잘 안 돼서 풀숲이 무성하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박차정 여사의 모교인 동래여고 동문회에서 주기적으로 묘소 관리를 하러 들른다고 한다.

  • 밀양의 절에 자주 들려서 주지스님과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었다고 하는데 주지스님이 회고하길 인생에서 만나본 사람 중 가장 완벽한 인간이었다고.

  • 의열단의 단장답게 항상 인물을 만나면 의심과 경계를 했다고 하며, 아무에게나 쉽게 정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같은 장소에서 2시간 이상 머물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잠은 제대로 잤을까 싶을 정도. 초인적인 그의 정신력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 어릴 때부터 강한 반일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김원봉이 보통학교에 다니던 1911년 4월, 일왕의 생일 때 학교에서 나눠준 일장기를 화장실 변소에 처박고 자퇴했다고 한다.[21]

  • 의열단 창립 때부터 얼마나 잘 피해다녔는지 일본 경찰이 현상금 100만 원[22][23]을 걸어놨지만 일제 패망 때까지 잡히지 않았다.


[1] 음력으로 8월 13일[2] 정규군을 양성하는 군사학교인 만큼, 체계적인 교육을 이수할 수 있었다. 당시 교장은 다름아닌 장제스. 한때 중화민국과 (국부군 출신의)대한민국 군부 요인 가운데는 이 황포군관학교 동문들이 존재했다.[3] 보통선거에 의한 민주공화정/토지와 대생산기관의 국유화/국비 의무교육 실시[4] 김구 세력인 독립운동가 석린 민필호는, '김원봉은 사사건건 김구에 대들었다. 그는 교활한 공산주의자'라고 맹렬히 비난하기도 했었다(...). 허나 1945년 김원봉이 재혼을 할 때 결혼식에서 김구가 주례를 서주었다는 일화가 있다고 한다. https://www.kookmin.ac.kr/site/ecampus/new/special/1127?pn=16 정말 사이가 그렇게 안 좋다면 결혼식에 와서 주례까지 서 줄 이유가 없으니 둘 간의 사이가 심각하게 나쁘지는 않았을지도...? 다만 완전히 검증된 사실인지 알 수 없으므로 확인 및 수정바람. [5] 앞서 말했듯이 조선의용대 소속의 부대원들 대부분이 옌안의 태항산으로 갔기 때문에, 세력이 약한 김원봉은 임정 내에서 마냥 뜻대로 활동할 수는 없었다.[6] 김원봉은 여운형과 친분이 깊었다. 여운형은 김원봉이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할 수 있도록 주선해주었으며, 김원봉은 해방 후 여운형의 환갑잔치에 참석하기도 했다. 플래쉬로 돌아가는 사진 중에 오른쪽에서 두 번째, 선글라스를 끼고 고개를 숙인 인물이 김원봉. 여운형이 자주 테러를 당하자 김원봉은 여운형의 신변 보호에 나서기도 했다.[7] 여기서 노덕술이 김원봉의 빰을 때리고 모욕했다는 썰이 등장한다.이 글에 따르면 해방 이후 김원봉은 중부경찰서에서 고문을 받았다고. '약산 김원봉 평전'에 의하면 언론인 송건호의 언급을 인용하며 체포당했을 당시에 김원봉은 화장실에서 용변을 다 마치기도 전에 끌려갔다고 한다. 항일무장투쟁의 전설이 기회주의자 친일파한테 독립이 되서도 뺨을 맞았다는것은 상상을 초월할 고통이었을 것이다.[8] 고문은 없었다는 주장도 있다. 동아일보 송평인 칼럼 참조.[9] 연합뉴스와 인터뷰, 2015/08/14[10] 박헌영 역시 미국 간첩으로 몰렸다.(...)[11] 조선의용대 출신 김학철의 증언.[12] 첫 번째 부인 사이에서는 자식이 없었다.[13] 국가보훈처 내부규정에 의하면 북한정권 수립에 관여한 사람은 건국훈장수여명단에 제외된다.[14] 예컨대 김일성의 외삼촌이었던 독립운동가에게 건국훈장이 추서되어 논란이 되었는데, 사실 건국훈장의 수여 요건을 보면 전혀 문제가 없다. 그 사람은 북한정권 수립 이전에 사망했고 따라서 북한정권에 참여한 바 없기 때문이다. 1990년 이후로는 북한에 가담한 이적행위를 하지 않은 이상, 좌파계열 독립운동가들에게도 지속하여 건국훈장을 서훈하였다. 어처구니 없는 것은 김일성 일가인 독립운동가에게 건국훈장을 수여했다고 트집잡은 것은 좌파계열 언론매체였다.정부여당만 깔 수 있다면 괜찮다는 건가 결론은 북한정권에 참여한 김원봉이 건국훈장을 서훈받기는 매우 힘들다.[15] 뒷날 MBC 사장이 되는 인물이다.[16] 다만 그의 행적이나 언행으로 말미암아 볼 때 민주사회주의에 가깝다는 의견이 있다.[17] 조소앙, 안재홍, 조완구, 엄항섭[18] 이러한 점 때문에 김일성 눈 밖에나 숙청당하는 커다란 계기로 작용되기도 한다.[19] 현재 화폐가치로 치면 약 200억 원.[20] 재미있는건 내부자들에서 같이 출연한 조승우, 이병헌이 한 번씩 김원봉역할을 하게 되었다.[21] 이게 단순히 자퇴로 끝났기에 다행인 거지 시대가 어느시대인지를 감안하면 정말 대단한 패기가 아닐 수가 없다.[22] 2017년 현재 가치로 320억 원[23] 우리에게 잘 알려진 김구와 이승만은 각각 60만 원, 50만 원이 걸렸다. 하지만 이들도 안 잡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