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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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2. 이력
2.1. 1983~1989년: 충격적인 데뷔와 성장기2.2. 1990~1995년: 최전성기와 전격 은퇴2.3. 1996~2005년: 복귀와 시련기2.4. 2006년~ : 유학과 활동 재개
3. 이모 한백희와의 인연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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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김완선(金完宣)

본명

김이선(金緩宣)

출생

1969년 5월 16일(현재 만 48세), 서울특별시

신체

164cm, 45kg, B형

성좌/십이지

황소자리, 노란닭띠 (기유년)

학력

세화여자고등학교 (중퇴)
고등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 (합격)
하와이대학교 디지털아트학과 (전문학사)

종교

무종교[1]

데뷔

1986년 1집 앨범 '오늘밤'

가족

부모님, 5자매 중 셋째, 이모 故 한백희

배우자

미혼

소속사

KW선플라워엔터테인먼트

링크

페이스북

1. 소개[편집]

한국의 마돈나


80년대 후반~90년대 초를 풍미했던 대한민국 최초의 비디오형 댄스가수.

한국 최고의 여성 아이돌 댄스 가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2] 특히 90년대 초반에는 장르를 넘어 한국 여성가요계를 인기로 완전히 평정한 인기 원톱 여가수였다! 무대에서 노래를 표현해내는 춤 실력으로는 역대 최고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런 실력은 지금까지도 건재하다.[3]

가창력 부분은 데뷔 당시부터 여러 안 좋은 말이 있었지만 이후 꾸준히 노력을 하며 발전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초기에 가창력에 대해 안 좋은 말을 들었다 해도 당대에 인정받은 다른 여가수들과 비교해 그렇다는 것일 뿐, 지금도 가창력 부족을 지적 받고 있는 90년대 후반 이후의 아이돌 여가수 수준인 것은 절대 아니다.[4] 그래도 1집 시절부터 종종 라이브로 방송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는데, 립싱크 모드일 때는 화려하기 그지 없는 춤을 선보이는데 비해 라이브 때는 정적인 동작만 보여줬다. 그러다 최고 전성기인 5집에 이르면 립싱크 때만큼의 화려한 춤은 아니라도 춤과 자연스러운 라이브 노래를 동시에 선보일 정도에 이른다.

고음이 빼어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김완선에 대해 논의할 때 의외로 잘 언급되지 않는 부분은 특유의 비음이 섞인 음색. 나미나 김정미, 훗날의 조원선과 유사한 쿨하고 독특한 음색으로 유명했으며, 시대가 조금 늦어 본격적인 일렉트로니카 댄스 음악(EDM)의 시대에 데뷔했다면 훨씬 음악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았을 것이라는 견해가 많다. 이런 쿨한 톤은 오토튠이나 보코더 등 일렉트로니카의 보컬 이펙터와 아주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아무튼 대중가수로서 누구나 목소리를 들으면 알만한 고유의 음색을 가졌다는 것은 대단히 축복받은 일.

김창훈이 프로듀서를 맡았던 2집 시절에도 타이틀로 내세웠던 곡들 이외의 노래들을 보면 김완선의 음색을 살리려한 노래들이 많았고, 이장희가 맡았던 3집의 경우에는 너무 음색 쪽을 살리려다 김완선의 댄스가수로서의 장점을 살리지 못하기도 했다. 그러다 손무현은 5집에서 김완선의 음색과 댄스가수로서의 능력을 합칠 수 있는 곡들을 만들어냈고 결과는 대박으로 이어졌다.

댄스가수임에도 앨범은 록음악 관련 인물들과의 접점이 많다. 박광호, 김창훈, 박청귀, 손무현 같은 인물들은 전부 록음악을 기본으로 했던 사람들. 그래서인지 앨범들을 들어보면 잘 소화해 냈는가 하는 점은 살짝 논외로 치고 이런 곡을 김완선이 불렀나 싶을 정도로 록음악 성향이 강한 곡들이 곳곳에 있다. 뿐만 아니라 김완선의 히트곡들에서도 보통 댄스곡과는 달리 내지르는 듯한 창법으로 부른 부분들이 나오는 건 저런 앨범 관련 인물들 때문.

한마디로 말하자면 프로듀서 잘 만나야 대박, 그렇지 않으면 쪽박이 된다.

한데 1,2집 시절의 록음악 성향 곡들은 김완선의 가창력에 대한 평가를 깎아먹는데 일조한 면도 있다. 당시 곡들이 김완선이 가진 가창력 이상의 고음을 요구한 탓에 고음을 내기 위에 목을 쥐어짜다 음이 툭툭 갈라지는게 노래에 그대로 담겨있기 때문.[5] 그래도 4집 정도에 이르러선 록 성향의 곡도 적당히 소화해냈다. 이런 록음악과의 접점을 보면 2011년의 신곡인 수퍼러브가 록 스타일인 것도 뜬금없는 건 아닌 셈이다. 월간 윤종신 2012년 3월호에 수록된 록 발라드곡 '널 사랑해 오늘따라'에서 보컬을 맡았는데 이 또한 호평을 받았다.

2. 이력[편집]

2.1. 1983~1989년: 충격적인 데뷔와 성장기[편집]

인순이의 매니저였던 이모 한백희를 통해 1983년 인순이와 리듬터치의 백댄서(당시영상)로 연예계에 발을 들인 후, 1986년 1집 '오늘밤'을 발표하며 단번에 인기 가수로 자리 잡았다. 데뷔 당시의 나이는 겨우 만 17세였다.

그녀의 춤과 퍼포먼스, 의상과 표정 연기 등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이란 말도 부족할 정도였기에 한국의 마돈나라는 수식어가 생겨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김완선 1집은 이미지와는 달리 생각 이상으로 음악적인 완성도도 괜찮은 편이었으며, 이는 조용필의 백밴드인 위대한 탄생의 멤버였던 박광호가 프로듀서를 하고 산울림의 멤버인 김창훈이 전곡의 작사 작곡을 맡았기 때문이다.

1년 후 낸 2집은 김창훈이 작사 작곡만이 아니라 프로듀서까지 맡아 만들어진 앨범으로 2년차 징크스 없이 <나홀로 뜰앞에서>와 <리듬 속의 그 춤을>을 히트시키며 인기를 끌었다. 2집은 일단 김창훈이 전곡을 만든 버전이 나온 후 수록곡 중 하나인 <충격>[6]이 빠지고 신중현이 작사 작곡한 <리듬 속의 그 춤을>이 들어간 다른 버전이 다시 발매되는 형태로 나왔다.[7]



1987년 11월 둘째주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 오프닝 영상. 부탁~해요[8]

1988년 3집은 이장희가 프로듀싱한 음반으로 <나홀로 춤을 추긴 너무 외로워>를 타이틀곡으로 내세웠고, 이장희의 히트곡인 '그건 너'를 댄스풍으로 리메이크해 수록하면서 좀 느리고 엉성하지만 최초의 랩을 선보인 앨범이기도 하다. 그러나 김완선의 인기는 여전했어도 앨범 자체의 성적은 상대적으로 좋지 않았다. [9]

이 무렵 김완선은 그냥 춤만 잘 추는 가수가 아닌 가창력 있는 가수로 변신하기 위한 노력을 한다는 말을 기회가 될 때마다 했는데, 이를 위해 전인권에게 거액을 주고 보컬 트레이닝을 받은 일도 있다. 이게 원래는 보컬 트레이닝만이 아니라 4집 앨범 자체를 전인권과 작업할 계획이었던 건데, 전인권이 보컬 트레이닝 시킨다고 온갖 기행을 시킨 때문에 도중에 결별, 결국 보컬 트레이닝만 받은 상황이 되었다.


그리고 모두에게 충격과 공포를 준 사랑의 골목길 라이브 영상(..)이다. 팔과 다리에 막대기를 달고 인형들을 매달아서 춤을 추는 영상이다. [10]뭔가 무섭다 이후 정준하서해안 고속도로 가요제 이후 행사 하나마나 3탄에서 오마주했다 카더라 사실 스탠드 중 하나 라더라

1989년 4집은 90년대 들어가면서 스타 작곡가가 된 하광훈이 프로듀서를 맡는 한편 위대한 탄생의 멤버로 이름을 날린 기타 연주자 박청귀가 참여한 앨범으로, <기분 좋은 날>을 히트시키며 인기를 끌었다. 4집 활동 시기에 김완선은 오디오 가수로 변신한다며 손무현, 윤상, 이승호, 변준민으로 구성된 실루엣이란 백밴드와 함께 방송 활동은 물론 첫 단독 콘서트까지 했고, 이 때문인지 4집의 경우 유독 다른 앨범들과 비교해 곡들에서 연주가 튀는 편.

한편 나이에 걸맞지 않는 성숙함과 섹시함을 앞세웠던 앞선 앨범들에서의 활동[11] 에 비해 나이대에 걸맞는 발랄함을 내세우는 변화 또한 있었다.



4집 당시의 영상. 핸드싱크 중인 윤상과 손무현의 모습도 보인다.

2.2. 1990~1995년: 최전성기와 전격 은퇴[편집]

90년대 초반은 김완선이 그야말로 여가수로서 부동의 인기 원탑이었던 시절이다. 물론 90년대에도 이선희, 강수지, 하수빈, 김혜림, 양수경, 이지연 등 많은 스타 여자 가수들이 있었지만 그들이 가요프로 1위를 하든 못하든간에, 김완선의 인기 원톱 자리를 빼앗기지는 않았다. 물론, 당연히 김완선도 가요 순위 프로에서 1위를 한 적도 많다.

실제로 2000년대 이후에 방송에 나와서 90년대 초반을 회상할 때, 이선희는 방송에서 대놓고 "(인기) 최고는 완선씨였죠. 너무 예쁘고 섹시한 완선씨한테는 (제가) 안 됐죠"라 말한 적도 있었다.[12]

현재는 한국의 최고 레전드 가수 중 한명이지만, 데뷔초부터 본인의 프로듀서였던 사람이 자신을 버리고 김완선을 매니지먼트하는[13] 잔혹한 굴욕을 당했던 인순이조차 "완선이를 보며 그 친구가 최고의 인기를 가질만한 재능이 있었음을 알았기에 그 잠재력만큼은 분명 인정했다."라고 말했을 정도다.

차라리 남자가수들이 그녀의 인기 라이벌이면 라이벌이었지 여자가수들은 누구도 인기로 그녀의 라이벌이 될 수 없었다. 추후에는 댄스가수라는 핸디캡 아닌 핸디캡[14]을 가지고도 워낙 확고한 인기를 통해 변진섭, 신승훈같은 남자 발라드계의 신예 거성들과도 인기로 승부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야말로 1990년대 초반 여성들의 대중가요계는 누가 뭐래도 김완선의 시대였다.

4집 때까지 김완선은 최고 인기 여가수하면 언제나 빠지지 않았으며 오빠부대들의 맹활약으로 여성 가수들의 영역이 좁아지는 와중에도 선전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가수 개인의 인기를 노래가 따라주지 못하는 느낌이 있었는데... 드디어 1990년 5집에 이르러 마침내 김완선은 모든 면에서 절정에 다달랐다.

4집에서 실루엣의 멤버로 김완선과 인연이 닿은 손무현이 프로듀서와 작곡을 도맡아 만들어낸 5집은 앨범 녹음을 미국에서 해올 정도로 준비부터 기합에 차 있었으며, 김완선은 교통사고로 얼굴에 상처를 입은 와중에도 MBC의 가요 순위 프로그램인 <여러분의 인기가요>에 얼굴에 거즈를 댄 채 출연해 라이브로 노래를 소화하는 등 열정을 보였고[15], 결국 김완선은 콩라인을 벗어나 가수 활동 사상 처음으로 가요 순위 프로그램에서 1위를 차지했다.



김완선에게 처음으로 1위의 영광을 준 노래인 <나만의 것>은 기존의 무대와는 다른 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는 발라드 곡이다. 이 곡에서 보여준 김완선의 세련되고 여성스러우며 우아한 안무는 듣는 발라드가 아닌 보는 발라드의 매력을 살려주었다.

1991년으로 넘어와 후속곡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 활동이 이어졌고, 엄청난 인기로 김완선의 대표곡으로 자리를 잡았다.



뒤이어 <가장무도회>까지 총 세 곡이 연달아 히트하면서 김완선 5집은 1991년 내내 팔려나갔고, 덕택에 100만장에 달하는 판매고를 올린다. 다만, 당시는 음반판매 집계가 허술했기 때문에 이 부분은 좀 걸러들어야 될 부분도 있다. 이 시기 김완선은 1집 때부터의 이미지인 섹시함을 앞세운 무대를 보이는가 하면 발랄함으로 가득한 무대를 보이기도 하는 등 여러 모습을 번갈아 보여줬으며, 여자 가수임에도 불구하고 소녀팬들에게도 인기가 매우 높았을 정도로 다방면에 걸친 인기를 얻었다.

결국에는 당시 연말 가수상 중 가장 권위높다는 평가를 받던 MBC 10대 가수에 처음으로 선정되기까지 한다.[16] 10대 가수 선정 당시 지지도를 보면 남성팬들보다도 여성팬들쪽의 지지도가 더 높았다는 사실은 이 시기 김완선의 폭넒은 인기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1992년 6집 활동곡인 <애수> 역시 손무현이 프로듀서를 맡아 만들어져 5집 만큼은 아니지만 70만장 넘는 판매고를 올리면서 인기를 끌다가 11월 당시 김완선 자신이 고정 패널로 출연 중이었던 MBC <특종 TV 연예>에서의 특집 방송을 끝으로 돌연 은퇴를 선언하면서 대중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은퇴 보도와 동시에 "이미 홍콩 진출이 예정되어 있다"는 얘기도 함께 흘러 나오는 등 다소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김완선 본인도 처음엔 은퇴는 너무 극단적이라 동의하지 않았는데 한백희가 김완선의 부모에게 빚이 있었고 이를 갚겠다는 조건에 동의해[17] 동아시아 진출을 위한 기획 은퇴를 했으나, 팬들에게 거짓말을 해야 했던 상황이 너무 괴로웠다고 한다.

은퇴 선언 후 한국에서 사리진 김완선은 93년 말엔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홍콩의 영화배우 겸 가수 알란 탐(담영린)과 함께 듀엣곡도 냈고, 94년부터는 대만에서 진위엔쉬안(金元萱;김원훤)[18]이란 이름으로 활동을 시작해 3장의 중국어 앨범을 내며 활발하게 활동했다.

여러 원조 한류가 존재하지만 시기적으로나 장르, 스타일적으로나 이후 한류와의 연결성 측면에서 꽤 중요한 지점을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2.3. 1996~2005년: 복귀와 시련기[편집]

한국으로 컴백 선언 후 1996년 말에 7집을 발표했으며 '탤런트'가 가요톱10에서 최고 4위까지 랭크됐고 33만장 정도 팔려 이름값을 했지만 과거 김완선 음반에 비해서 망한 앨범이었다. 사실 타이틀곡인 '탤런트'에 표절 논란이 있었기 때문에 일찍 내릴 수 밖에 없었고 후속곡인 '운명의 장난'은 20위 권에 잠시 머물렀을 뿐이다. 앨범 자체도 능력 있는 프로듀서들과 함께한 덕에 이미지 이상의 완성도를 가지고 있던 이전 앨범들에 비하면 평이한 수준이었다.

'김완선의 제작자 데뷔'로 홍보언플했던[19] 댄스 그룹인 '오룡비무방'[20] 역시 망했어요가 된 1998년, 가수로서 자신이 활동한 데 대한 금전적인 대가를 한번도 정식으로 주지 않은 이모와 결국에 결별했고 이후 4년 정도 TV에서 김완선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다[21]. 이 때 한백희는 이미 김완선의 이름으로 온갖 빚을 져놓고 있었고, 그녀는 이를 갚기 위해 밤무대 출연과 온갖 행사를 마다하지 않고 뛰어야 했다.

2002년 내놓은 'S', 'Shall We Dance'와 리메이크 음반은 비교적 생소한 트랜스 테크노 장르였다. 이 음반이 10만장 정도 팔리며 생각보다 이름값을 해냈지만 빚문제는 여전한 상황이었으며, 결국 2003년 누드 사진집까지 찍었지만 누드 사진집을 찍고도 애초에 계약한 만큼의 돈을 받지도 못했고 사진집 문제로 트러블이 생긴 소속사와의 소송으로 고생만 했다. 당시 소속사는 다음 앨범 계획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고, 김완선은 이것이 계약 파기 사유가 된다라는 이유로 소속사와는 별도로 누드 사진집 제의에 동의를 했다. 당시는 여배우들의 누드사진집이 폭주하던 시대였고, 김완선은 빚 때문에 다른 것을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계약금 5억원에 러닝 개런티 포함. 이에 소속사가 반발하여 주택은 물론이고 김완선의 저축통장까지 압류했고, 누드사진집을 낸 곳은 이런 사정을 이용해서 누드사진집의 판매가 부진하다는 이유로 계약금 5억 중에서 2억 밖에 못 준다고 배째라가 되었다. 김완선은 밤무대를 뛰면서 2개의 소송을 동시에 진행해야 했다. 소속사와는 계약 해지 선에서 마무리되었고 사진집 기획사에게는 승소했다.

2005년 말에 9집 앨범 'Return'을 발표했으며 자전적인 노래라 할 수 있는 발라드 'Seventeen'을 타이틀곡으로 내세우고 직접 프로듀싱에 참가했지만, 일반 대중들이 김완선에게 기대하는 것과는 너무 간격이 큰 음악이었고, 왜 갑자기 그런 내용의 가사를 노래하는지도 골수팬들 이외에게는 잘 이해되지 않아[22] 진지한 의도가 아쉽게도 망했어요. 김완선 스스로는 예상치 못한 낯뜨거운 가사[23]라 여전히 떨떠름할 뿐이지만, 십여 년이 지난 지금 처음 받았던 느낌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2011년 4월 컴백 후 출연한 김승우의 승승장구 녹화 중 9집의 'Seventeen'을 부르던 도중에 갑자기 울음이 터져서 지켜보는 방청객이나 MC들 모두를 안타깝게 했다. 17세는 실제로 김완선이 방송에 정식으로 데뷔한 나이고, '작은 TV 속에 살면서 인형처럼 웃고 있는 너'로 시작하는 가사는 김완선의 삶 그 자체이다 보니... 노래 자체에 대한 감회도, 그리고 그 노래가 대중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도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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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2006년~ : 유학과 활동 재개[편집]

2006년 이모 한백희의 사망 후 하와이로 건너가 어학연수를 마치고 현지 대학에서 디지털아트를 전공했다. 2007년여성중앙이 하와이로 가서 취재했을 때는 새 앨범 준비 중에 사기를 당했으며 음악활동의 의지를 접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2009년 건강상의 이유로 한국에 돌아왔으며, 미술 쪽 진로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근황만이 간간이 보도되었다.

2011년 3월 일렉트로닉 듀오 로맨틱 카우치의 Like A Virgin 티저 영상에 그녀가 출연했는데 세월의 흐름과 나이에도 불구하고 매혹적인 춤을 선보였다. 2011년 4월, 드디어 신곡 티저가 공개되었다. 노래 제목은 슈퍼 러브(Super Love).[24] 불독맨션으로도 활동했던 이한철이 만든 곡. 4월 21일 뮤직비디오 풀 버전과 음원을 공개했다. 특이하게도 예전 특기라고 할 수 있는 댄스곡이 아닌 록 스타일의 노래를 타이틀곡으로 들고 나왔다. 확실히 특유의 포스와 일견 퇴폐적으로까지 보이는 분위기는 어린 아이돌들이 흉내 낼 수 없는 연륜이 묻어나는 영역이다. 다만 아쉬움이 남는 건 댄스여왕답게 춤이 더 가미되었으면 하는 점 정도. 2017년 현재 모종의 사정으로 인해 음원사이트에서 해당 앨범의 음원을 들을 수 없다. 음원을 재녹음과 동시에, 리마스터링해 출시될 예정이라는 관계자의 말은 과연?


2011년 7월, 지산 록 페스티벌의 참가가 결정되자 매니아들 사이에서 김완선의 참가가 록 페스티벌에 어울리는 것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다만 2AM정진운도 참가한다는 소식이 동시에 알려져 상대적으로 묻혔다.

2011년 10월에는, 하이라이트(구 비스트)의 용준형과 신사동호랭이와의 작업물인 "Be Quiet"를 발매.[25] 뮤직뱅크, 엠카운트다운, 윤도현의 MUST 등등의 가요프로그램에 출연했다.

2012년부터는 쇼, 예능 프로그램에 간간이 출연하면서 클럽, 페스티벌 등 공연 위주로 음악 활동을 하고 있다. MC로서도 꽤 꾸준히 기용되고 있는데 아직까지는 맡은 프로그램이 오래 가지는 못하고 있다. 2014년 7월, 2년만에 디지털 싱글을 발표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OAv-NDR0Tcw 위의 동영상은 86~05년도의 활동 영상을 간략히 10분에 걸쳐 보여 주는데
가수 30년 인생에서 앞의 20년 의 활동 영상만 보아도 그야 말로 가요계의 역사의 일부분을 보는 듯 하다.

자택 인테리어 솜씨가 호평을 받으면서 상당히 여러 프로그램을 통해 소개되더니 급기야 2015년 9월 동대문과 청담동에 개장한 더 디자이너스 호텔을 통해 인테리어 디자이너로서도 데뷔했다. 2015년 9월 내 딸, 금사월 2회에 특별출연했으며, 10초 정도 나와 그야말로 카메오 출연 제대로 했다.

2015년 12월, 히든싱어 4 변진섭 편에 출연했으며, 히든싱어 5에서 원조가수로 무대에 서고싶다고 밝혔다.

최근에는 고양이 애호가로서의 면모도 자주 소개되고 있다.

2015년부터 SBS 예능 불타는 청춘에 출연 중이며 2015년 SBS 연예대상에서 신인상을, 2016년 SBS 연예대상에서는 김광규와 함께 베스트커플상을 수상했다.

2016년 11월 27일 ~ 12월 4일에 방송된 복면가왕복면신부 결혼했어요라는 이름으로 출연하여 일해라 절해라 하지 마세요 우리말 나들이를 꺾고 2라운드에 진출했으나, 역도요정 김복면에게 밀려 2라운드에서 떨어졌다. 예능인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꽤 있어서 지금도 음악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나왔다고 언급했다.

2017년 4월 17일 그녀의 공식 첫 베스트 앨범 The Originals 가 발매된다. 총 3장의 구성이며 CD1~2는 80~90년대 히트곡들로 채웠고 CD3는 2000년대 이후 발표한 곡들과 신곡 It' s You 등이 담겨져 있다. 리마스터링을 거치긴 했지만 아쉽게도 몇몇 80년대 곡들의 음질은 썩 좋은 편은 아니다. (그래도 기존 오리지널 음반에 비하면 그런대로 들을만하다.)

3. 이모 한백희와의 인연[편집]

한백희가 스파르타식으로 춤을 가르치고 그걸 배웠는데, 지금의 연습생 개념의 선구라면 선구라고 할 수 있다. 중학교를 그만두고 데뷔 준비하느라 거의 3년동안 부모님 집에도 들르지 않았다고 한다. 기사 당시 이모가 살던 서울 도봉구 방학동에서 7년간 고립되어 살았는데 지금도 외진 축이지만 당시에는 더더욱 외진 곳이 도봉구 방학동이었다. 무릎팍 도사 출연 당시 밝힌 바에 따우면 당시 한백희는 길거리 댄서, 무용수들에게 연습실을 무료로 내어주는 대신 김완선을 트레이닝 시켜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고 한다. 덕분에 김완선은 그 당시에 브레이크 댄스, 발레, 현대 무용 등 다양한 춤들을 하드하게 트레이닝받으며 일종의 연습생 생활을 했다. 여담이지만 마침 김완선이 데뷔 준비를 하던 시기가 이수만이 연예기획쪽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때라 이는 이수만에게도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말그대로 연습생 시스템의 원조

그녀와 한백희의 질긴 인연은 한백희의 작고 때까지 계속되었다. 옷도 그녀가 맞췄고 안무도 그녀가 짜주었고, 김완선은 이모 한백희 때문에 전성기 시절에도 사람들을 마음대로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김완선에게 대가도 지불하지 않았으며 2006년에 세상을 떠났다.

무릎팍도사에서 이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김완선은 데뷔 후 1998년 그녀의 이모와 결별하기까지 13년 동안 가수 활동에 대한 금전적인 대가를 한 번도 정식으로 받지 못했는데, 당시 이모부의 사업이 잘 안 풀려 그쪽으로 돈이 들어간 것 같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렇게 돈을 주지 않았음에도 한백희가 따로 사치를 부리거나 한 일 없이 옷 2~3벌로 사계절을 버티고 병원비가 아까워서 아파도 병원에 잘 안가고 장신구 같은 건 전혀 사지도 않는 등의 구두쇠 생활을 했기 때문. 이에 김완선은 차라리 한백희가 자신을 위해서 돈을 사용했다면 덜 억울했을 것이라 말했다.

이후 한백희는 건강이 악화 된 후에 응급실에 자주 갔는데 당시 비참한 상황에서 연락 할 수 있는 사람이 김완선 밖에 없어서 돈을 빌려달라고 자주 연락을 했다고 한다. 이에 김완선은 할 수 없이 돈을 빌려주었지만 워낙 악연이었기에 왜 과거에 나에게 대가를 지불해주지 않았냐는 말을 했고 한백희는 계속 미안하다는 말만을 반복했다고... 그리고 김완선은 그게 자신이 이모에게 한 마지막 말이었다며 눈물을 흘렸다.

다음은 KBS2TV 승승장구 (2011 4월 26일) 에 나와서 이모 한백희에 대하여 한 얘기다.

"저의 모든거, 좋은거, 나쁜거까지 다.. 저의 부모님이기도 하고 선생님이기도 하고 친한 친구이기도 하고, 어떤 무대는 안좋게 끝날때도 있는데 같이 속상해 하기도 하고, 어떤 일이 잘돼서 성사되면 같이 너무 좋아하기도 하고.. 되풀이되고...그러다가 보니까 제가 남자를 만날수가 없었어요" "제발 좀 빨리 원망과 미움이 사라지길 바랐는데 이제는 많이 없어진것 같고..." "이모 이제 원망이나 분노는 없으니까 편히 쉬세요.... 미안해 하지 말고"


승승장구에서 MC들의 "왜 남자가 없었나"라는 질문에 당시 이모의 엄청난 보호 때문에 남자를 만나고 싶어도 못 만났다고 말했다. 앞으로 결혼계획에 대해선 지금 (2011년) 40대 나이에 결혼할 수는 없고 나중에 50~60대가 됐을 때나 결혼할 생각이라고 했다. 다만 팬들 중에서는 자신과 이모를 파국으로 내 몰았던 이모부라는 작자 때문[26]이 아닌지 걱정하는 이들도 있다.

2009~2010년 즈음 리즈 시절의 레이디 가가와 닮은 외모를 가지고 있다. 화장 짙게 하면 거의 엇비슷해 보일 정도. 40대에 이 정도니 한창 때였던 10대 후반~20대 시절이 어땠는지는...

4. 기타[편집]

  • 댄스로 한가락 하지만 의외로 드럼 실력이 수준급이다. 대만에서 가수생활을 했던 시절 어느 음악쇼프로그램에서 힘있게 드럼을 치는 영상이 한 때 돈 적이 있었다.

  • 대고 솜씨도 수준급이다. 유튜브 에서 金元萱 으로 검색하면 당시 예능에서 활약 했던 영상들을 볼 수 있다.

  • 3집 타이틀곡인 '나홀로 춤을 추긴 너무 외로워'는 민망한 가사 때문에 본인이 제일 싫어하는 노래라는 말이 있다. 원조 자뻑

  • 4집의 <기분 좋은 날>은 당시 토요일이 되면 빠지지 않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곤 했었고 지금도 토요일이면 가끔가다 흘러나오는 노래. 토요일 주말의 기분을 업할 수 있는 노래다. 그래서인지 가수 디기리는 이 노래의 가사를 인용 '토요일 오후'라는 노래를 불렀고 김완선이 피쳐링했다. 그런데 네이버에서는 19금으로 나온다. 뭥미 것보다 요새 대세는 불금이잖아

  • 외국의 여성 팝스타들에게서 볼 수 있었던 무대 매너를 한국에서도 보여준 거의 첫 가수[29]라고 할 수 있는데 고로 자연히 게이 팬층으로부터도 뿌리깊은 지지를 받고 이 계보는 엄정화, 이효리 등으로 이어진다. 전문적인 훈련을 통해 연마한 화려한 댄스 스킬을 시전하는 소녀 가수로 등장해 해외시장 개척에 앞장선 점 등에서는 BoA를 위시한 현 케이팝 아이돌 시스템의 전형을 찾아볼 수 있다.

1988년 일본 방송 출연 영상.[30]


[1] #[2] 그녀 이후에 그녀에게 비교될 수준의 독보적인 원톱의 인기 위상과 대중적 커리어를 만든 여성 댄스 가수를 뽑자면 엄정화, BoA, 이효리 외에는 전혀 없다고 볼 수 있다. 그 이외에 각자 나름 신드롬을 만들고 몇년 반짝한 스타가수들이 있지만 장기간 독보적인 톱스타였던 김완선에게 비교할 정도가 안 된다.[3] 컴백 후 출연한 TV프로그램 승승장구에서 G.NA가 즉석에서 한 번 알려준 Black & White 안무를 거의 그대로 따라하면서 댄스의 여왕이 아직 죽지 않았음을 보여줬다. 그때 지나가 허탈해하면서 말하길, "이거 하려고 1주일을 연습했는데..."[4] 이건 기본적으로 1980년대H.O.T. 이후 아이돌 세대와의 가요계 분위기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댄스뮤직(혹은 비디오형 가수)이란 용어가 통용되기 시작한건 1980년대 후반 김완선, 박남정 시대부터이고 기본적인 가창력이 갖춰진 가수한테 비트가 비교적 빠른 곡에 맞춰서 댄스(율동)연습을 시키는 수준이었다. 김완선도 15살부터 트레이닝을 받으면서 나름 가창력이 갖춰진 상태였다. 이에 반해 2000년 이후 아이돌 세대는 비주얼과 춤이 되는 연예인 지망생을 뽑아서 노래 연습을 시키는 구조라 이전과는 정반대이다.[5] 게다가 당시 한백희의 '가창'에 대한 지론은 "너무 잘 하면 자꾸 듣고 싶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어서 음을 전반적으로 높게 잡아 녹음시켰다고 하니 엎친 데 덮친 격이다.[6] 이 노래는 제목처럼 그야말로 충격적인데, 아이유의 3단 고음 못지않은 고음비명이 등장한다.[7] 신중현의 말에 따르면, 1970년대 박정희의 요구를 거부한 대가로 방송금지를 당하다가 정권이 바뀌고 겨우 해금이 됐지만 록의 시대는 이미 저물어서 음악을 할 수 없어 록의 대부가 나이트클럽에서도 쫓겨날 정도인 상황이었고, 이때 한백희와 김완선이 와서 곡을 달라고 해서 신중현은 김완선의 무대를 보고 그 느낌을 가지고 <리듬 속의 그 춤을>을 만들었다고 한다.[8] 전영록의 불티도 그렇고 이 당시의 노래들의 뮤직비디오들은 요상하게 공사 현장이 많이 등장한다.[9] 그리고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 김완선의 다른 곡은 나왔어도 3집 타이틀곡은 언급되지 않았다. 지못미.[10] 해당 인형이 사실 인형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괴담이 있는데 이는 터무니없는 이야기다. 인형을 잘 보면 무게감이 없는 그냥 가벼운 인형 그 자체란 것을 알 수 있다.[11] 당시 기준으로는 지나치게 어려서 과도한 화장과 복장 등으로 외견 나이를 일부러 올려잡은 감이 있다. 이게 김완선의 영향으로 좀 사라진 이후에 여고생 가수로 다시 등장했던 이지연, 하수빈에 이르러서야 이런 이미지가 약해진다. 초등학생 때 발탁되어서 중학생때 데뷔한 BoA 때 약간 돌아온 감이 있고. 그 이후에는 일본 영향 받아서 로리콘 저격용 이미지에 가깝게 갔을 정도니까 뭐[12] 이선희의 전성기는 1984년부터 1990년까지였기에 비교하기는 힘들다. 1990년대 초반에도 인기가 여전하긴 했지만 말이다.[13] 심지어 자기가 키운 가수인 인순이를 버리면서 대놓고 "너는 지는 해고, 완선이는 뜨는 해다"라는 모욕적인 말까지 남겼다고 한다. 미래를 위한 아름다운 이별 따위가 아니라 정말 잔인하게 버린 것이다. 그 말하던 시점에 인순이는 고작 29~30살의 젊은 나이로 못 나가던 시절도 아니었고, 이미 데뷔전 김완선은 인순이의 백댄서였고 친분이 있던 사이였으니 스타였던 인순이가 당했던 배신감에 수치심과 모욕감은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그러나 후에 김완선이 그녀에게 당한 착취를 생각하면 인순이 입장에서는 전화위복이었을지도 모른다.[14] 댄스가수에 대한 멸시는 지금보다 그때가 훨씬 더 심했다.[15] 유력한 1위 후보라며 방송에서 불러서 나갈 수 밖에 없었다고. 하지만 그 주에는 1위를 못했고 그 다음주인가 다다음주인가에 1위.[16] 높은 인기에도 불구하고 김완선은 이전까지는 유독 MBC 10대 가수상과는 인연이 없었다. 1986년 여자 신인상은 누가 같은 MBC 아니랄까봐 강변 가요제 대상곡이었던 <젊음의 노트>를 부른 유미리에게 돌아갔고, 10대 가수 선정이 거의 확실시됐던 1987년에는 조용필이 가요제 사퇴를 선언하면서 10대 가수 선정 없이 가요대제전 형식으로 치뤄졌다.[17] 어린 나이에 특히 아버지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행한 가수 활동이었기에 평소 부모님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고 한다.[18] 김완선이란 이름에서 완이 끝날 完이란 말을 떠올려 부정적이라는 현지인 충고로 바꾸었다.[19] 실제로는 전적으로 관여한 것은 아니었다.[20] 그룹 이름은 5마리의 용이 날아다니고 춤추는 동네라는 뜻이라고 한다.(五龍飛舞坊)[21] 2000년에 80년대 가수들이 합동 앨범을 내고 홍보할 때 잠깐 모습을 비춘 것이 전부[22] 결별 이후 몇몇 인터뷰를 통해 이모와 헤어진 이유를 언급하긴 했지만 그때까지는 아직 한백희가 살아있는 상태라 92년 은퇴의 실상 등 차마 완전히 털어놓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23] 3집의 타이틀곡인 "나홀로 춤을 추긴 너무 외로워"가 가사 때문에 저평가받고 있다. 다른 활동곡이었던 "사랑의 골목길"이 베스트 앨범에 들어간 것만 봐도 뭐. 스스로 낯뜨거운 노래라서 부르기 망설여진다고 한다.[24] 2017년 4월 중순 열렸던 김완선의 첫 단독 콘서트에서 오룡비무방의 쓰디쓴 경험과 함께, 이 노래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등장했다. 이미 알려진 바대로, 김완선의 패착으로 인해 타이틀곡을 잘못 선정해 오룡비무방이 1집 수록곡인 <비밥바 룰라룰라>로 활동하다가 해산하는 비운을 맞이했다. 그런 가운데 당시 오룡비무방의 앨범에 넣으려고 녹음했던 곡이 있었는데, 끝내 빛을 못 보고 사장되는 게 아까워서 2011년에 김완선 혼자 녹음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게 바로 이 곡이었다는 것. 1997년 당시 이 곡의 작곡가인 이한철은 대학가요제로 데뷔한 직후 두 장의 앨범을 냈지만, 매니아들 사이에서만 알려진 뮤지션이었을 뿐이었다. 참고로 오룡비무방은 2000년 안병기 감독의 영화 '가위' ost에 "'White Crow'''라는 팀으로 멤버 일부 교체된 채 음원을 냈다. 조필성 작곡가가 만들어 준 노래가 있었는데, 이게 인연이 되었는 지, 2011년 김완선의 컴백 앨범에 조필성이 참여하기도 하였다.[25] 김완선의 당시 소속사였던 다온마리엔터테인먼트와 신사동호랭이의 소속사였던 AB엔터테인먼트의 합작. 스탭이 AB엔터테인먼트 소속이었다.[26] 고 한백희가 김완선의 수익을 가로챈 이유가 바로 상기됐던 남편의 사업빚. 김완선이 벌어오는 돈을 믿고 계속해서 일을 벌리고, 그 사업이 계속 망했던 것으로 추정된다.[27] 가수 이장희 원곡. 이장희와는 3집 프로듀싱 작업을 하였다.[28] 1986년에 발표한 '길 바람 아이'로 7080 세대들에게 알려져 있는 가수.[29] 패션이나 컨셉적인 측면에서는 앞서 나미도 있었지만 카메라를 그렇게 강렬하게 쳐다보면서 춤을 그렇게 격하게 추는 건 김완선이 처음이었다.[30] 1988~89년에 일본 시장 진출도 모색했었는데 당시 일본 연예 관계자들이 아무로 나미에를 비롯한 일본 여자 솔로 댄스 가수 포맷의 영감을 얻었다는 것 역시 유명한 풍문이다. 물론 모두 결국 원류는 마이클 잭슨, 마돈나 등의 80년대 MTV 슈퍼스타들로 귀결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