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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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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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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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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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자유당 창당)


파일:Democratic Liberty logo.png 민주자유당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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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해당
(신한국당 창당)

파일:Democratic Liberty logo.png 민주자유당 대표

창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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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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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5be6c25a585de7bde1d79b8034c8d5c63e578fde9231b4f959eb991632f92d28.jpg 신한국당 총재

창당
(민주자유당 해당)

초대
김영삼

제2대
이회창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
김영삼
金泳三 | Kim Young-sam

파일:김영삼.png
대통령 기록관 사진

파일:김영삼대통령초상화.png
공식 초상화

출생

1927년 12월 20일[1]

경상남도 통영군 장목면 외포리[2]

거주지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3]

사망

2015년 11월 22일 (향년 87세)[4]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독립묘역

재임

1993년 2월 25일 ~ 1998년 2월 24일

서명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Kim_Young-Sam_signature.svg.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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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

김녕 김씨 충의공파 28세손

부모

아버지 김홍조, 어머니 박부련

형제자매

1남 5녀 중 장남

배우자

손명순

자녀

김혜영, 김혜정, 김은철, 김현철, 김혜숙

학력

서울대학교 철학 학사

병역

학도병 (국방부 정훈국)

종교

개신교 (예장합동)

신체

168cm, AB형

의원 선수

9

의원 대수

3, 5, 6, 7, 8, 9, 10, 13, 14

약칭

YS

거산 (巨山)

1. 개요2. 일생3. 평가4. 사상과 신념
4.1. 철저한 자유주의4.2. 공산주의, 북한에 대한 시각4.3. 종교
5. 다른 정치인들과의 사이6. 이야깃거리
6.1. 그의 인기6.2. 한자 선호파6.3. 인재 발굴6.4. 각종 타이틀
7. 어록8. 가족 관계9. 대중 매체에서10. 수상 내역11. 선거 이력12. 소속 정당13.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제14대 대통령.

대한민국의 정치가. 경상남도 거제 출신이며, 호는 '거산(巨山)'이다.[5] 대중들에게는 이름의 영문자 이니셜을 딴 'YS'로도 유명하다.

3김 시대의 일원이었으며, 김대중처럼 민주화 운동에 삶을 바친 투사였다. 민주당 구파에서 출발한 보수 정치인이다.[6]

평생의 라이벌이자 민주화 동지였던 김대중은 수읽기에 능한 지략가였는데, 김영삼은 거침없는 돌직구 스타일이다. 과거 적폐청산에도 적극적으로 앞장서서 집권 1주일 이내에 장성들을 잇달아 모가지를 날린 하나회 숙청,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겠다며 옛 조선총독부 건물을 해체한 일화가 유명하다. 이런 김영삼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말로는 대도무문(大道無門)이 있다.[7]

만 25세로 역대 최연소로 자유당에서 정치에 입문해 9선 국회의원을 지내면서 군사 정권 치하의 야당 지도자, 통일민주당 총재 등으로 19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까지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으며, 현재 자유한국당의 전신인 민주자유당의 첫 대선 후보로서 출마해 1961년 이후 30여년간 이어졌던 군인 출신 정부를 끝내고 민간 정부인 문민정부를 수립하였다. 다만 그 민주자유당을 만드는 과정에서 논쟁의 여지를 남겼다. 권좌에서 내려온 뒤부터는 자택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2015년 11월 22일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서 혈액 감염 의심 증세로 치료를 받던 중 급성 패혈증과 신부전증으로 사망했다. 향년 87세.

2. 일생[편집]

김영삼/일생 문서 참조.

3. 평가[편집]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우리나라 현대사에 매우 큰 영향을 끼친 인물 중 한 명.

김대중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일생을 바쳐 헌신한 우리나라 민주화 역사의 양대산맥이었다. 또한 고위 공직자 재산 공개를 도입한 청렴한 정치의 선구자이자 수많은 개혁을 단행한 개혁가라는 평가도 있으나 동시에 국가 및 집안 경영에 실패해 1997년 외환 위기를 막지 못한 지도자라는 평도 있다. 과감한 개혁 조치로 한국 갤럽 조사 기준으로 아직 까지도 깨지지 않는 역대 최고 지지율을 기록했으나, 임기 말 외환 위기로 지지도 조사에서 5%를 기록해 역대 최하 지지율을 기록한 대통령으로 오랜 기간 남아있었다. 이후 2016년 박근혜의 지지율 4%가 이를 경신했다.

하지만 사망한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IMF의 원인을 온전히 김영삼의 잘못으로 평가하는것은 온당치 못하다는 지적에 동의하는 사람이 늘고 금융실명제 도입 같이 긍정적 업적들이 재평가를 받기 시작해 지금은 말년을 제외하고는 괜찮은 대통령 이었다는 평가가 조금씩 늘어가고 있다. 뭐 그렇다고 전임 대통령 지지도 조사에서 크게 높게 나오지는 않지만[8] 2000년대 초반에는 그야말로 대한민국 역대 최악의 대통령이었다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에 나름대로 재평가 받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이때 김영삼 전 대통령의 디스에 박근혜 전 대통령이 역대 최하 지지율 기록한 대통령이라며 맞받아치기도 했다.

이렇게 김영삼이라는 개인의 대통령으로서의 업적은 여러 의견들이 갈리나, 군부 독재의 입김이 확 빠진 본격적인 문민 대통령의 시대가 이 사람을 시작점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9] 우리나라 현대사에 적지 않은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인물임은 분명하다.

이 외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4. 사상과 신념[편집]

김영삼의 정치철학은 자유민주주의에 기반하고 있었다. 야당에서 활동하였지만 정치학자 김용욱에 의하면 그의 노선은 보수주의 성향이었다고 한다.

4.1. 철저한 자유주의[편집]

자유 없는 세계가 잘못하면 공산화될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다. 한국의 보수정당 중 민주계 역시 자유주의를 지향하는 운동권 혹은 냉전의 붕괴를 겪고 자유주의로 노선을 바꾼 민주화 운동가 출신이 많았고, 김영삼은 그들을 데리고 초기 한나라당에서 군부 TK 기반의 보수/적폐를 숙청하는 데 앞장섰다. 전체적으로는 공산주의사회주의는 실현 가능성도 없고, 너무 인권 탄압적인 체제라고 좋게 보지 않았다. 라이벌인 김대중도 워낙 YS와 비교해 빨갱이 몰이에 방어할 수단이 없어서 그렇지 자유주의관이 뚜렷했다. 실제로 김영삼/김대중은 민주화 운동을 하고 대통령이 되면서도 PD/NL 운동권과는 끝까지 선을 그었고 집권 후에도 한총련에 강경하게 나오는 모습을 보였다.

그에 의하면 자유가 전부 없어지고 그런 구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되면 공산주의에 호기심을 갖는 사람이 생길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몽고메리 원수의 지도자가 가는 길을 감명깊게 읽었다고 한다. 존경하는 인물로는 한국 사람 중에서는 개인적으로 성격이라든가 지도력이라든가 정치가로서 조병옥을 지목했고, 외국 사람으로서는 전 미국 대통령인 존 F. 케네디를 지목하였다.

4.2. 공산주의, 북한에 대한 시각[편집]

그는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다. 그에 의하면 "공산주의자는 어렵습니다. 아무리 베풀어도 욕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재임 중에 쌀 15만 톤을 달라고 해서 5만 톤을 먼저 보내고 나머지는 순차적으로 보낼 생각이었습니다. 쌀을 실은 배가 원산으로 가는데 선장이 (북한 지역) 사진을 찍었다고 감옥에 보냈어요. 선장이 배에서 사진 좀 찍었다고 무슨 문제가 됩니까. '쌀을 안 주겠다' 했지요. (공산주의자들은) 매달리다가도 금방 변합니다"라는 것이다. 그는 야당활동과 대통령 재직 기간 내내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버리지 않는다. 사실 공산주의 국가들이 하나같이 독재/탄압적인 정국을 가졌다는 것도 민주화 운동을 하던 김영삼에게 부정적으로 보이도록 한 몫 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당연하게도 6.25 전쟁을 몸소 겪었던 인물이었던데다가 어머니를 무장공비에게 잃기까지도 했으니 공산주의에 대해 우호적인 시각을 가질 이유도 없었겠지만.

하지만 군사독재정권이 내세웠던 극강 반공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으며, 집권 기간 동안 반공을 내세우거나 강력한 반공 분위기를 만들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반공기조는 약해져, 공공장소에 비일비재하던 반공구호는 재임기를 거쳐 죄다 없어지고, 반공교육도 공교육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일단 김영삼은 어머니가 북한 공비에게 암살당했다는 걸 부울경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고, 그럼에도 공과 사를 구분해 이북과 대화를 추진하는 모습을 보였다. 미워도 동족이라 어쩔수 없다면서 말이다. 대북경수로 사업과 비전향장기수의 첫 송환이 이루어진 시기도 이때이다. [10] 첫 남북정상회담이 열릴수도 있었으나, 김일성의 사망이후 북한의 혼란으로 인해 무산된 바가 있다.

4.3. 종교[편집]

김영삼은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다. 일찍이 할아버지 김동옥의 대에 장로회를 받아들이고 대대로 기독교인이 되었다. 1975년 손세일과의 접견에서 국민이면 누구나 모든 문제에 참여해야 된다며, 종교인의 현실 참여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피력하였다. 그런데 그 방법을 어디까지 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라고 한정하였다. 2015년 그의 사후에도 종교적 예식에 맞추어 장례가 진행되기도 하였다.

5. 다른 정치인들과의 사이[편집]

5.1. 상도동계[편집]

파일:external/pds.joins.com/htm_201409132321020102011.jpg
파일:thumb_3717694133_kq5arizX_3.jpg[11]

상도동계는 김영삼의 자택이 상도동에 있다해서 김영삼 계파의 일원들에게 붙여진 이름이다. 상도동계 원로들이 현역이었던 시절엔 김대중동교동계와 쌍벽을 이루던 계파였다.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동교동계나 상도동계나 단순히 양김의 집이 거기 있던 것만으로 이름이 그렇게 지어진 것이 아니라, 정부의 탄압과 감시를 매우 심각하게 받던[12] 시기에 비밀 이야기를 할 곳이 각자의 집밖에 없어서 거기서 주요 당 현안에 대해 논의하는 일이 많았었고, 신변의 위협까지 받던 시기에는 김영삼, 김대중 두 사람을 지키기 위해 적지 않은 인원의 비서(훗날 주요정치인사가 된 사람들)[13]들이 아예 그 집에서 돌아가며 숙식을 한 경우가 잦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집은 하나의 사무실이나 회사 급이었다. 그래서 기자들이건 정부주요인사들이건 그곳 근처에서 기웃거려야 하기 일쑤였고, 그런 사람들끼리 정보를 나누는 대화를 할때 "어디가?" 하면 "상도동 간다", "동교동 간다" 하는 표현을 자주 쓰게 되면서 그 곳에 안 갈때도 계파 사람을 표현할 때, "상도동 사람 만난다", "동교동쪽 사람 만난다" 하는 일이 많아지며 아예 계파명으로 굳어지게 된 것이다. 먼 훗날의 유명 신흥 정치세력이라 불리우는 친노나 친문 등이 김해파나 거제파 등으로 불리우지 않는 이유는 본질적으로 상도동계, 동교동계와 생성 및 발전 메카니즘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상도동계나 동교동계는 한명의 절대 지도자의 카리스마 속에 그야말로 함께 먹고 자고 정부의 감시를 피해 비밀회의도 하여 혈육 같은 친밀감을 늘리면서 접착력이 강하게 생성된 계파이나, 신흥 정치세력들은 정치적 성향과 소신, 혹은 정치인에 대한 호감으로 뭉친 일종의 팬덤 형태라서 사적 친분의 영향력이 크게 강조될 수 없다.

김영삼 본인이 하나회 인물들을 쓸어버린 후, 한나라당의 뿌리 역할을 했었기 때문에, 대부분은 이명박 정부 때까지도 한나라당의 원로급을 맡고 있었으며,[14] 대표적인 현역 정치인으로 김무성[15], 서청원[16], 정병국[17], 김영춘[18], 박재호[19] 등이 있다. 은퇴한 이로는 김수한, 최형우, 김동영[20], 서석재, 김덕룡[21], 박종웅, 강삼재, 신상우, 박관용 등이 있다.

이외에도 김영삼의 천거로 정치를 시작한 정치인으로 한나라당계에는 이회창[22], 이인제, 이명박[23], 손학규[24], 이재오, 홍준표, 안상수, 정의화, 이완구 등이 있고, 민주당계는 노무현, 안희정 등이 있다. 다만, 이들은 상도동계로 분류되진 않는다. 김영삼과 함께 정치한 기간이 상대적으로 짧아 김영삼 직속(또는 비서)으로 인식되지 않기 때문. 다만 'YS키즈'라는 표현은 언론에서 사용된다.

1984년 말 김영삼과 김대중이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기반으로 신한민주당을 창당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민추협 세력과 기타 세력 간 인적 지분을 어떻게 하느냐에 대해 김영삼 계열과 김대중 계열의 의견이 나뉘면서 김영삼 계열 정치인들을 분류하기 위해 상도동계로 불렀던 것이 시초다. 이후 대체로 연합하며 민주화 운동을 전개했으나 87년 대선에서 양김이 분열되며 뜻을 달리하게 됐으며, 3당 합당을 계기로 동교동계와는 완전히 갈라졌다.

한 시대를 풍미하던 계파였지만 김영삼 퇴임 후, 이회창이 당권을 차지하여 한나라당이 보수정당으로서 색을 더 갖추기 시작하였고, 이해타산에 따른 이합집산을 거듭하여 상도동계라는 정치 계파가 무색해졌고,[25] 멤버들도 세월의 흐름을 피해갈 순 없는지 연로해감에 따라 대부분이 정계에서 자취를 감춘데다 남아있는 정치인도 친이, 친박, 민주당계 정당 같은 새로운 구심축의 등장에 따라 여기에 속하면서 현재 상도동계를 자처하는 인물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상태다.[26] 그리고 구심축이던 김영삼까지 사망함에 따라 상도동계도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세대가 되었다.

5.2. 이승만[편집]

YS가 역대 대통령들 가운데 유일하게 긍정적으로 평가한 대통령

이승만 집권 때 김영삼은 장택상 전 국무총리의 비서관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이후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만 26세의 나이에 자유당 후보로 당선됐다. 초선 의원 김영삼은 경무대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2009년 시사 주간지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3선 개헌 소식이 보도되기 시작하던 무렵 이 전 대통령에게 ‘박사님, 개헌하시면 안 됩니다. 국부로 남으셔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이 전 대통령은 화가 난 듯 손을 떨더니 말없이 나가버렸다”라고 말했다. 1954년 이른바 ‘사사오입’으로 초대 대통령 연임제한 철폐 개헌안이 통과되자 김영삼 의원은 자유당을 탈당했다. 그리고 그의 탈당은 6년 뒤엔 탁월한 선택이 되었다.[27]

2007년 시대정신이라고 하는 잡지에서 故 김일영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한국정치사 전공)와의 구술 대담에서 "나라를 건국한 국부", "건국의 아버지"라고 평가했다. 이미 38선 이북에 소련에 의해서 김일성이 지도자로 선택되고 정권이 수립되는 와중에 단독정부수립은 불가피한 현실이었으며, 김구는 이승만에 미치지 못한다고 했다. 다만 고령의 나이에 접어들면서 옆에 있는 사람들이 잘못한 것이라고 했다. 출처

5.3. 박정희[편집]

파일:김영삼_박정희.jpg

영원한 숙적1

1961년 박정희의 5·16 군사 쿠데타 이후 야당 정치인 김영삼은 반(反)군부 투쟁에 나섰다. 1963년에는 군정 연장 반대집회에 참여한 혐의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1969년 박정희 3선 개헌을 비판하던 와중 자택 인근에서 괴한들에게 ‘초산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1979년 8월9일 YH무역 사건으로 김영삼은 정국의 중심에 섰다. 가발회사인 YH무역 여성 노동자 170여 명이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며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을 벌였다. 그는 당시 당사를 에워싸고 까칠하게 굴던 경찰 간부의 멱살을 잡고 따귀를 올려붙였다. 8월 11일엔 경찰 2000여 명이 투입되어 YH무역 노동자 전원을 연행했다. 김영삼 총재는 이 일을 계기로 그해 10월 의원직을 박탈당하고 가택연금에 처해졌다. 김영삼 의원 제명은 10월13일 야당 의원 집단사퇴, 10월16일부터 20일까지 부마항쟁으로 번졌다. 2009년 인터뷰에서 김 전 대통령은 “김대중과는 화해했지만 박정희는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발언했다.

5.4. 전두환[편집]

파일:external/static.news.zum.com/388410_article.jpg
생전 제일 어색한 사진 1.[28]

영원한 숙적2

80년대 민주투사 시절엔 당연히 사이가 안 좋았다. 이 영상에서 보듯 그 서슬퍼런(...) 전두환 정권 시절부터 본인을 가택연금시킨 전두환을 가열차게 디스했을 정도다. 이 기간 동안 벌어진 목숨을 내건 23일 단식투쟁은 유명하다. 게다가 김동영, 최형우 등 양김 측근인 야당(신민당) 인사들이 전두환 정권 치하에서 숱하게 고문당하기도 했다.

다만 90년 3당 합당이 이뤄지면서 군사정권 관련자 인사들이 내건 조건이 살려달라 처벌의 감형이었다. 이는 집권하자마자 속전속결로 이루어진 현직(?) 하나회 척결 외엔 집권 3년째인 1995년 전반기(12.12 사태와 5.18의 이론상 공소시효 15년이 만료되던 시기)까지만 해도 여론의 질타를 받은 그 유명한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 못한다'라는 검찰의 괴상한 논리에서 볼 수 있듯 전직에 대한 처벌이 자제되면서 어느 정도 지켜지는 듯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에서 '성공한 쿠데타 역시 처벌할 수 있다'라는 판결이 나오고 1995년 10월 통합민주당 국회의원이었던 박계동이 노태우의 비자금 존재를 폭로하면서[29] 노태우에 대한 구속 수사가 이뤄지고, 국민들의 5-6공 비판 여론이 최고조에 이르자, 이를 계기로 김영삼은 뚝심있게 <5.18 특별법> 제정과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을 포함한 신군부 재판 회부를 이끌어낸다. 물론 군사 독재를 펼치고 국민들을 억압하던 자들의 뒤통수를 친 셈이었으니, 국민들에게는 폭풍 같은 인기와 지지를 얻었다.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굴에 들어간다던 그의 말대로

이후에도 김영삼은 그 특유의 직설적 화법으로 전두환을 디스했다. 2010년 광복절 당시 이명박 대통령이 주최한 전직 대통령 정모 초청을 받았을 때 전두환도 같이 참석하자 전두환이 듣는 와중에 "전두환이는 와 불렀노. 대통령도 아니데이. 죽어도 국립묘지 몬 간다."라고 폭풍 디스를 했으며 와인을 찾는 전두환에게 "니는 청와대에 술 처무러 왔나?"라고 대놓고 면박을 주어 전두환이 화를 참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간 일화가 있다.[30] 이 때 전두환이 속으로 얼마나 사무쳤으면 2015년 김영삼 전 대통령 사망 당시에도 조문은 했지만 화해했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끝까지 대답을 안 했을 정도다(...).

사실 김영삼은 인터뷰를 할 때도 전두환이 뻔뻔하고 치졸하다고 엄청 까댔다. 정권을 잡았을 때는 독재자로서 폭압적인 모습을 보였으면서, 문민정부 출범 후 잡혀들어가 사형선고를 받고, 이를 양김이 감형시켜주니 후에는 낯짝 두껍게 굽실거리는 게('아이고, 김대중 김영삼씨, 날 살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마음에 안 들었다고 한다. 김영삼은 차라리 노태우가 인간성이나 성격 면에서 더 높이 평가할 만하다고 언급했다. 이 이야기는 노태우 단락에서 후술.

5.5. 노태우[편집]

5공의 노태우는 하나회 부두목이었고 전두환과 더불어 신군부 군사반란의 주동인물 중 하나였으나, 직선제 6공의 첫 대통령 선거 때 야권분열로 인한 본인과 김대중의 병크로 당선된 거지만 어쨌든 정당한 절차를 거쳐 민주적으로 대통령이 된 사람이었기에 김영삼도 이를 인정하였다. 집권 후의 노태우는 쿠데타를 통해 국민을 무시하고 대통령이 되었던 전두환과 달리 '국민의 뜻에 따라 선출되었다'는 자긍심이 있었고, 그 이미지를 충실히 따르기 위해 전두환 세력을 축출/귀양보내는 모습도 보였다. 당시 전두환이 노태우를 꼭두각시로 만들고 본인이 상왕 행세를 하려고 하자 열받아서 귀양보낸 것이기는 하지만 그 때문에 전두환 세력은 이 때 힘을 잃었고 그 덕에 김영삼은 6공의 노태우를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했다.[31]

사실 노태우는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부터 김영삼을 상당히 가까이 하고, 김영삼과 현안을 의논했다. 노태우가 권좌를 차지한 뒤부터는 양김과 더 많이 교류했고, 이후 김영삼과 노태우, 김종필, 박태준통일민주당-민주정의당을 통합했다. 이게 3당 합당인데, 여기서 태어난 정당이 민주자유당이다. 그래서인지 김영삼도 생전에 노태우를 제법 호평했다. 물론 그러고도 하나회라는 악연 때문에 훗날 김영삼은 전두환과 함께 노태우를 감옥에 보내긴 했지만, 노태우는 전두환과 달리 그런 와중에도 별 탈 없이 묵묵하게 모든 걸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였다.[32] 그야말로 과도기라는 말에 정말로 적합한 인물이 노태우라는 것.

5.6. 김대중[편집]

파일:pM6Rx4M.jpg

김영삼씨는 대단히 어려운 일을 아주 쉽게 생각한다.

ㅡ 김대중[33][34]


양김의 한축. 김대중과는 자타가 공인하는 동지이자 라이벌. 어려울 때는 서로 의기투합했다. 박정희와 전두환이 폭정을 일삼을 때, 야권을 이끌어가며 서로를 지지하고 의지하던 관계였다. 재야의 민주화 운동가들에게는 정신적인 지주였다. 사람마다 양김에게 들이미는 잣대가 다르지만, 한국 민주화의 현대사에서 양김은 중요한 존재이기에 이를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정치 계보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민주당의 계파에서 김대중은 장면 신파의 적자로, 김영삼은 윤보선 구파의 적자로 자리잡아 정치 세력을 이끌었다. 또한 이들은 지주, 자본가 계급의 일부를 대변하던 한민당-민주당 계열의 체질 개선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때로는 경쟁하고 때로는 협력하며 한국을 군부독재의 그늘에서 벗어나게 만들었고, 또 재야 민주화운동가 그룹에서 새로운 인적자원을 수혈하고, 부분적으로나마 서구의 진보적 정책을 받아들여 '반 박정희-전두환' 정치결사체 성격이 강했던 신민당의 스펙트럼을 넓힌 것 역시 김영삼과 김대중이었다. 정당 족보를 따지면 중시조에 해당하는 인물격이다.

71년 대선에서 박정희에 대항할 신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1차 투표에서는 김영삼이 이겼으나, 2차 투표에서 김대중이 승리하며 김대중이 대선 후보가 되었는데, 김영삼은 결과에 승복하며 '김대중 후보의 승리는 곧 나의 승리이기 때문에 김대중 후보의 선거를 적극 돕겠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후로도 두 사람의 신민당 내 입지상 서로 맞서는 위치에 서서 대결하기도 했으나,[35] 궁극적으로 두 사람이 지향하는 바는 동일했다. 5공 역시 온갖 정치 탄압과 규제를 받으면서도 협력하여 민추협을 만들고 신한민주당을 창당하는 등 민주화 운동의 정계 구심점으로 맹활약했다.

이들의 성격을 나타내는 일화로 80년대 민주화 운동 당시 김영삼이 제안한 범국민 천만 서명 운동이 있다. 이때 김대중은 '군부정권의 감시가 서슬퍼런데 현실적으로 천만이 가능하겠냐며 백만도 어려운데 그냥 백만 서명 운동을 하자'고 제안했지만, 김영삼은 '어차피 둘 다 안 될 거면 통크게 천만 지르자'고 설득해 결국 천만 서명 운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와 묘하게 얽혀지는 얘기가 김대중의 '김영삼은 대단히 어려운 일도 아주 쉽게 생각한다'는 평과 반대로 김영삼의 '김대중은 쉬운 일도 대단히 어렵게 생각한다'는 평이다. 두 사람의 살아온 인생이나 성격차가 드러나는 부분으로 흥미로운 얘깃거리다. 어린 시절 가난했기 때문인지 현실적이고 꼼꼼한 자세를 가진 김대중과는 달리 김영삼은 부잣집 도련님으로 부유한 인생을 살았기 때문에 저런 추진력 있고 통 큰 자세가 나온 거 아니냐는 분석도 있다.

어쨌든 이들을 포함한 민주화 인사들의 노력으로 한국은 민주주의의 희망을 가지며 전진할 수 있었다. 허나 그 노력의 결실인 87년 대선에서 둘의 단일화가 실패하면서 사이가 멀어졌고, 전두환의 친구이자 신군부의 2인자였던 노태우가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어부지리로 당선되고 만다. 그리고 그 때부터 통일민주당평화민주당으로 별도의 노선을 굳히게 된다. 특히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노태우의 민주정의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이 90년 3당 합당을 하자 그 둘의 간격은 더욱 더 벌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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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92년 대선에서 김대중을 누르고 대권을 차지한 김영삼은 아이러니하게도 97년 대선에서 다음 정권을 김대중에게 넘겨주게 된다. 이때 차남 김현철에 대한 김대중 정부의 사면복권[36]이 거론되면서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는 듯 했으나, 여론을 거스르지 못한 DJ는 자신의 임기동안 김현철 씨의 사면 카드를 꺼내지 않았다. 김현철 씨의 사면이 이루어진 것은 노무현 정권 말인 2007년. 둘의 관계는 YS가 김대중에 대해 '착한 척 하면서 내 뒷조사를 엄청 한다'거나, 노벨평화상을 수상할 당시 "노벨상의 가치가 땅에 떨어졌다"라 비난했을 만큼 아직 거리가 있는 상태였다.

다만 오랜 민주화 동지였기에 서로 투닥투닥하다보니 YS의 비판 수위에 비해 사이가 그리 험악하지는 않았다. 양 진영 간에 사이가 급격하게 벌어졌던 1987년 대선 이후 치러진 88년 총선에서 등원한 평화민주당통일민주당 의원들은, 서로 팽팽하게 설전을 하면서도, 주요 사안에 대해서는 정치적으로 완전히 반대 진영에 있는 JP까지 끌어들여[37] 논의를 하는 대범함을 발휘했으며, 운동시합을 통해 단합을 다지기도 했다. 5공화국 시절의 비리를 추궁하는 청문회에서는 갓 등원한 노무현(통민당) 의원이 예리한 질문을 던지며 전두환 및 비리 기업인들을 몰아붙이는 모습을 본 DJ가 노무현 의원을 극찬하기도 했다.[38] 훗날 YS가 'DJ와 노무현은 공산주의에 가까운 정권, 나쁜 정권으로, 나중에 심판받을 것이다', 'DJ는 내가 광주로 유세를 가면 깡패를 동원한 나쁜 사람이다', '거짓말만 한다', 'DJ는 독재자다' 등 2000년대 들어서도 막말 수준의 발언을 종종 했지만 사람들은 'YS가 또...' 정도의 반응을 보였다(...). 나중에는 서로 간에도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수준이었다. 여담으로, 이 시기 김영삼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무수한 악평을 가하긴 했지만 그들과도 정작 만나선 별 충돌 없이 잘 지냈고, 특유의 친화력 덕에 험악한 관계까지 가는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2000년대에도 티격태격하던 둘의 사이는 결국 2009년 위독하여 사경을 서성이는 김대중에게 김영삼이 병문안을 가면서 말년에서야 화해의 움직임으로 나아가게 된다. 당시 병문안을 마치고 나온 김영삼이 "김대중 대통령하고 나하고 관계는 6대 국회부터 동지적인 관계에 있었고, 오랜 동지적인 관계로 있었지만, 경쟁 관계에 있었거든요. 그래서 애증이 교차하는 관계입니다. ... (기자들이 두 분이 화해한 것으로 받아들여도 되냐고 묻자) 그렇게 봐도 좋죠. 이제 그럴 때가 된 것도 아닙니까?"라고 언급한 것이다. 이때 김대중은 의식이 없었지만 김영삼은 김대중의 아내 이희호를 위로했고, 김대중 사망 후 측근인 동교동계 정치인들을 찾아가 위로하는 등 적극적으로 나서며 양 계파 간 화해를 이루려고 노력했다. 이후 2015년 김영삼이 사망했을 때 동교동계 정치인들이 조문을 오고 상도동계 정치인들을 위로하면서 화합하는 모습을 보였다. 김영삼의 유언대로 통합과 화합이 이뤄진 셈이다. 혼수상태였던 김대중도 김영삼과의 화해에 동의를 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줄곧 화해를 강조하며 대통령 임기중에 군사정권과의 화해 행보를 택해 김영삼으로부터 비난받았던 일을 생각하면, 김대중도 김영삼과 말년에나마 화해하고 싶었을 것이다.

5.7. 노무현[편집]

파일:[전직_대통령_초청_오찬에서_김영삼_전_대통령을_악수로_맞이하는_노무현_대통령]_노무현사료관.jpg
인권변호사로서의 행보를 눈여겨본 김영삼은 노무현 전 대통령을 통일민주당으로 입당시키며 노무현을 정계에 입문시켰다. 이후 노무현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청문회 스타'로 이름을 날리는 등 주가를 높이기 시작했고, 김영삼도 사적으로 노무현을 무척 아꼈다는 후문이 전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좋은 관계는 노무현이 3당 합당에 반대하며 민주자유당 합류를 거부하자 크게 틀어지고 만다.

노무현은 특유의 강직한 성격 때문에 김영삼의 행동을 야합으로 여기고 이에 실망하여 민자당에 합류하기를 거부하였고,[39] 이후 92년 대선에서 통일민주당의 이기택, 노무현 등의 잔류파와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이 합당해 민주당이 탄생하면서 민주당 소속이 되었다. 이에 대해 김영삼도 심기가 불편해졌는지, 훗날 노무현이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자 불편한 속내를 내보이기도 했고, "노무현은 내가 픽업했죠. 의리가 없어요. 평가 가치 없습니다"와 같은 악평을 상당수 남기기도 했다. 노무현은 김영삼에 대해 "87년 때까지는 DJ와 함께 훌륭한 분이었으나 3당 합당 이후 (기존 기득권 세력의) 인의 장벽을 넘어서지 못했다[40]"는 아쉬운 심정을 밝혔다. 다만, YS의 경우 그래도 기존 동지들의 힘이 있었던 덕분에 버틸 수 있었다는 평도 함께 남기며, "개혁혁명만큼 또는 혁명보다 어렵다"는 걸 국민들에게 알렸다. 그 후 노무현은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부산광역시장 선거에 출마하는데, 김대중이 지역간 고른 권리를 행사한다는 요지의 지역등권론을 주장한 역풍을 맞아, 성과를 제대로 거두지 못했다.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원기, 유인태, 원혜영 등과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당하여 DJ 지지로 다시 돌아가긴 하지만, '김대중 역시 김영삼 못지않게 지역감정을 이용한다' 고 평가, 양김이 모두 지역감정의 수혜를 입고 있다는 뉘앙스의 발언을 하기도 했다

노무현은 YS를 비판하며 뛰쳐나와 DJ 밑으로 후에 들어가긴 하나, 결국 호남 기반의 세력들이 차지한 새천년민주당에서 비주류였고, 나중에 진짜로 김영삼이 군사정권을 쫓아내고 구속시키며 호랑이굴에서 호랑이를 잡겠다는 김영삼의 약속이 이루어지자 YS를 비판했던 노무현은 입장이 난처해지며 YS와 DJ 세력 양쪽에서 배신자 소리를 들으며 찬밥 신세를 겪는다. 노무현이 대선 후보로 떠오른 것도, 김대중 정권이 본인+아들 비리 및 국정원을 이용한 도청 등의 스캔들로 김대중의 지지율이 떨어지며, 김대중 세력이 호남을 제외하고 지지율을 잃을 때, 2002년 대선에서 민주당이 정권 유지를 할 수 있는 그나마 유일한 카드로 판별났었기 때문이었다. 경남 기반 YS 밑에 있었기에 호남 기반 DJ세력에게서 외면받으며 찬밥 자리였던 영남의 민주당 후보로 끊임없이 도전하다 바보 타이틀을 얻었던 것이 큰 이유였다.

이후 2000년대 들어 노무현이 민주당 대선 후보로 선출되면서 김영삼을 예방하고 서로 덕담을 나누는 등 사이가 다시 복원되는 듯했으나, 이때 예전에 김영삼으로부터 선물 받은 시계를 내보이며 '이 시계만 보면 지금도 총재님 생각이 난다'는 등 옛 정을 언급했다가 호남 지지층으로부터 역풍이 불고 지지율이 떨어지자, 김영삼 전 대통령을 예방한 것 때문에 지지율이 떨어진 것 같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그런 점도 있는 것 같다고 대답해 이를 듣고 화가 난 김영삼과 사이가 다시 틀어졌다고 한다. 이때는 예전에 3당 합당 건에 대해서도 서로의 갈등도 풀고(김영삼이 진짜로 약속을 지켜 하나회를 숙청했기 때문이다.) 서로를 더 존중할 걸 그랬다라는 말까지 오고 갔었다. 호남 측에서의 역풍도 있었지만 노무현-이회창이 3김/지역주의 청산[41] 외치던 시기 3김 중 하나인 YS에게 노무현이 접촉하는 건 당시 너무 큰 리스크였다.

노무현이 대통령 시절 탄핵소추를 당했을때도 "사필귀정"이라고 했다.#

특히, 김영삼 前 대통령은 노무현 사망 직후에도 이명박에게 노무현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토로하며 노무현 사망에 대한 국민장은 너무 과한 의전이라고 불평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2009년 노무현이 먼저 세상을 떠나버리자 표면적으로는 장례에 참여하였으나, 노무현에 대한 '국민장'에 불편한 심경을 토로했음이 뒤늦게 밝혀졌다. "노무현의 장례식을 국민장으로 치른 것은 이명박이 실수한 것이었다. 가족장으로도 충분했다"고 말했다. 잡지에 따르면, 김영삼은 이어 "내가 발탁해서 국회의원이 되었으니 그는 내게 빚이 있는데, 이렇게 돼 버려서 조금 실망했다"며 "나도 전직 대통령으로서 장례식에 참석했지만, 헌화할 꽃만 그냥 던져버리고 왔다"고 한다.[42] 여담으로 MB도 김영삼이 정계에 입문시켰다. 그리고 김영삼은 박근혜나 정주영을 골탕먹이는 카드로서 이명박을 자주 밀어주었다. 훗날 공천에서 상도동계가 무수히 떨어지자 거리감이 생긴 감은 있지만.

그리고 이 인터뷰가 논란이 되자 김영삼 측은 사석에서 한 발언이 일본 잡지에 보도된 것에 대해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김영삼의 김기수 비서실장은 28일 오전 <오마이뉴스>와 한 통화에서 "도시오 회장이 일본 사람 여럿과 함께 각하를 만나고 갔지만, 그분이 기자도 아니고 정식으로 인터뷰한 것도 아니었다"고 밝혔다. 김 실장은 김영삼의 '가족장' 발언에 대해 "한국과 일본 모두 자살률이 높다는 기사가 나온 시점에서 각하는 '국가 지도자가 자살하면 후세를 위한 교육에 안 좋다'는 취지의 얘기를 먼저 했는데, 문맥이 거두절미되고 엉뚱한 얘기가 기사로 나간 것 같다"고 전했다.#

5.8. 이명박[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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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o-DEFAULT-570(1).jpg[43]

이명박을 먼저 정계에 발탁한 인물부터가 김영삼이었고, 김영삼은 생전 이명박의 실력과 재주를 상당히 높게 평가하면서 그를 아꼈다. 김영삼은 현대그룹의 회장이었던 이명박을 영입하여, 총선대선에서 보수 표를 놓고 경합했던 현대그룹 명예회장 정주영을 공격하기도 했다. 김영삼은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명박을 지지했고, 이명박 또한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김영삼에게 매우 깍듯히 대했다. 또한 상도동계의 몇몇을 제외한 거의 전부가(예외적으로 강삼재는 이회창을 지지했고, 서청원은 박근혜를 지지했으며, 김무성도 당시에는 친박으로 분류됐다.) 한나라당 대통령후보 경선 때부터 친이계로 편입돼서 이명박을 지지하기도 했다. 또한, 이명박과 김영삼은 김영삼 생전, 홍준표, 김무성, 안경률, 김덕룡, 정의화, 김형오, 박희태[44] 등과 함께 긴밀한 관계를 항상 유지하면서 인간적으로도 매우 가깝게 지냈다.[45] 이 중 김덕룡은 상도동계 직계인데, 이재오, 이상득, 박희태와 더불어 친이 6인회에 들어가기도 했다.[46]

이명박의 고향인 포항과 본관인 경주는 비록 행정상으로는 경상북도에 소속되어 있지만, 부산과도 지리적으로 멀지는 않기 때문에 실 생활권상으로 PK과도 가까운 지역인데다가[47][48] 이명박의 고향이기도 해서, 박근혜에 대한 반감이 극심했던 지역이기도 하고(압도적인 이명박 지지를 보였다.), 이명박과 친이계 자체가 김영삼의 후계임을 표방하는 만큼, 정치상으로 PK 계열로 분류된다.

또한 이명박은 김영삼에게 본인과 친한 저명 인사들을 김영삼에게 소개하기도 했고,[49] 재임 중에도 김영삼 뿐만 아니라 기타 상도동계 주요 인사들에 대해서도 매우 깍듯이 대접하였다.[50]문민정부의 핵심 인사들 중에서는 이명박 정부에서도 중책을 맡은 사람들이 많은데, 대표적으로 문민정부 때 경제기획원 장관을 지내고 이명박 정부에서 국무총리를 맡은 한승수와 문민정부 때 경제기획원 차관을 지내고 이명박 정부에서 기획재정부 장관을 지낸 강만수가 있다.[51] 실제로 이명박 재임 중에는 김영삼 - 이명박 동거정권이라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로 김영삼과 이명박의 인간 관계 및 친분은 상당히 각별했다.

이명박은 밑의 사람들 혹은 노무현, 손학규[52], 박근혜를 비롯한 경쟁자나 정적들에게는 지나치게 계산적이고 정략적이면서 냉정했지만 김영삼에게만큼은 매우 고분고분하면서 집안 어른을 대하듯이 깍듯이 대했기 때문에 충돌할 일이 없었다. 오히려 김영삼은 노무현이 투신자살로 생을 다했을 때 이명박에게 직접적으로 '노무현이 뭘 잘했다고 국가장을 치뤄 주나' 하면서 불평하기까지 했다.[53]

5.9. 박근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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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 가장 어색한 사진 2. 게다가 표정이 떨떠름하고 악수도 심히 어색해 보인다. 웃을 일도, 웃는 사진이 없었다.[54]

김영삼 질산 테러 사건 문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김영삼은 박정희 치하의 중앙정보부에게 신변의 안위마저 심각히 위협받았으며, 독재철폐와 민주화를 위해 투쟁했으니 그 투쟁의 대상이었던 자의 여식인 박근혜와도 당연히 껄끄러운 관계를 형성해왔다.

퇴임 후인 김대중 정부 당시 김영삼은 1999년 5월 서울 수유동 4·19 국립묘지를 참배한 자리에서 퇴임 후 처음으로 시국 성명을 발표하며 "박정희 정권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아직 남았으며 결코 미화될 때가 아니다"고 말했다. 이에 당시 한나라당 부총재였던 박근혜는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이 하면 옳다고 주장하고 남이 하는 것은 부정하는 반사회적 성격의 인물이 다시는 정치 지도자가 돼서는 안 된다"며 김영삼에게 반격을 날렸다. 김영삼으로서는 민주화의 동지이자 라이벌이고 어쩌면 더 큰 고초를 겪었을 김대중이 집권한 이후 오히려 지난 군사정권의 공로를 드높이는 등, 김영삼 정권의 적폐청산 행보와 달리, 화해 행보를 택한 것에 대한 아쉬움에 했던 발언이었다. YS “박정희 정권 결코 미화하면 안 된다."

그러다 2000년대 초반에는 인터뷰에서, 자신은 박정희 정권과 싸운 사람이고 그 정권이 자신에게 못할 짓을 많이 하긴 했지만 아버지와 딸은 다른 법이라며 선대(先代)의 일과 연관짓는 비난에 시달리는 박근혜 측에 대해 매우 유효한[55] 지원사격을 해주기도 하였다. 2006년 박근혜가 면도날 테러를 당했을 때는 직접 병문안을 가서 질산 테러를 당한 자신의 과거를 언급하며 뼈있는 위로를 하기도 했다.# 이토록 미묘한 두 사람의 관계는 김영삼이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당시 박근혜와 치열하게 경쟁했던 이명박의 손을 들어주면서 완전히 멀어졌다.

박근혜의 박정희 미화 발언에 격노하기도 했는데, 2011년엔 "18년 장기 독재를 한 박정희가 이 나라 군사독재 정권의 원흉"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김영삼은 2012년 7월 대선을 앞두고도 박근혜를 “유신시대의 퍼스트레이디로서 사실상 유신의 2인자 역할을 했던 사람으로, 대통령이 되기에는 결격사유가 있다”고 혹평하기도 했다. 기사.

이러한 두 사람의 악연은 2012년 선거 정국에서 절정에 달했다. 그해 총선 공천이 유력했던 차남 김현철 여의도 연구소 부소장이[56] 모종의 이유로 공천에서 탈락하자 새누리당 수뇌부를 비난했으며, 7월에는 새누리당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선 김문수를 만난 자리에서 박근혜를 겨냥해 지금도 두고두고 회자되는(...) 칠푼이라는 희대의 독설을 날린다.[57]

물론 이 칠푼이라는 발언이 박근혜가 어느 한테 휘둘려 가며 한심한 행보를 보였다는 사실을 예견하는 것이 되었을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어찌보면 칠푼이라는 말이 박정희에게 쌓인 감정을 박근혜에게 퍼붓는 비낭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는 최씨 가문에게 꼭두각시나 다름 없이 휘둘리는 박근혜를 한심하게 바라본 중의적인 표현이기도 할 것이다. 당시 김영삼을 비롯하여 정치계에서 원로격인 주요 인사들이나, 정치경험이 많은 사람들은 이미 최태민 일가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최순실 사건이 나오고 나서 김영삼의 칠푼이 발언 역시 재조명되었다.

그렇게 독설까지 하며 경계했지만, 끝내 몇달 뒤 새누리당 대선 후보로 선출된 박근혜가 방문하자 위의 사진처럼 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자세로 악수를 하며 불편한 심기를 보이기도 했다.

다만 그 해 대선 직전에 박근혜 후보에 대한 지지 선언을 했다는 얘기는 좀 미묘한 부분이 있다. 당시 박근혜 후보 지지 의사를 밝혔다는 주장은 김무성 의원 선거 유세에서 나왔고, 뒤이어 김영삼의 조직이었던 민주동지회가 박근혜 후보 지지를 선언하면서 지지 선언이 사실인 것처럼 알려졌다. 그러나 얼마 뒤 문재인 후보 지지 선언을 한 상도동계 김덕룡 전 의원은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역시 문재인 후보 지지 선언을 했던 차남 김현철에 따르면, 박근혜(박정희 일가) 측에 대한 악감정은 그대로 남아있으나 보수 진영의 승리를 위해 경상도 정체를 대표하는 박근혜 후보 지지를 할까 말까 사적으로 상의한 적만 있을 뿐 공개적으로 지지여부를 밝힌 적은 없으며, 현재는 엄정중립 상태로 부울경만을 대표하는 문재인 후보가 상도동에 방문해서 성의있는 모습을 보일 경우 김영삼이 공개적으로 누군가에 대한 지지 표명을 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58] YS의 퇴임 후 대변인 역할을 맡은 박종웅 역시 김영삼이 공식적인 입장을 내보인 일이 없고 입장도 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도 중립으로 행동을 같이 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이후 박근혜가 당선되고 대통령 취임식날이 되자, 측근들이 다 말렸는데도 불구하고[59] 그대로 취임식장에 갔지만[60], 박근혜의 취임 연설에서 대놓고 조는 모습이 카메라에 비춰지기도 했다(...).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는 어느 정도 활동이 있었으나, 그녀가 대통령에 취임한 지 몇달 안된 시점에 급격히 병세가 악화되어 쓰러진 후 2년여간 투병 후 작고했으므로 박근혜의 대통령 활동 시기 동안은 사회적 활동이 딱히 없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김영삼은 박근혜 임기 중 사망하고 말았는데, 사망할 당시 박근혜는 해외순방 여행 탈주 중이었고, 귀국 후 바로 빈소를 찾아가 헌화를 하긴 했다.

그러나 이후 일정을 소화하면서 피로누적으로 인한 고열증세 때문에 주치의가 쉬라고 권유했고 당신은 뭐 맨날 아프오?? 영결식 당일 눈이 내리는 등 기상 상태마저 좋지 않아, 본인이 의도했든아니든 장시간 진행되는 영결식에는 불참한 것이 화제가 되었다. 운구차가 떠나는 7 ~ 8분간 예를 표한 것이 전부. 이로서 박근혜는 '최초로 국가장에 참석하지 않은 현직 대통령'이라는 기록 아닌 기록을 쓰게 되었다. 결국 둘의 고약한 악연은 마지막까지 풀리지 못한 셈이다. 어쨌든 고인이 된 김영삼과의 마지막을 좋은 그림으로 마무리할 수도 있는 자리였기 때문에, 박근혜의 불참을 아쉬워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5.10. 문재인[편집]

6. 이야깃거리[편집]

  • 정치 인생의 대부분을 박정희 - 전두환 등 군사 독재 정권과 맞서 싸우는 일에 써왔던 인물이라 그런지 육사와 군인들에 대한 반감이 심했던 것 같다. 대통령 퇴임 후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육사는 공부도 안 하고 사람 죽이는 것만 배우는 집단"이라고 하거나, 심지어는 "육사는 바보들의 모임" 이라는 등 과격한 발언을 아끼지 않았다. 자세한 내용과 인터뷰 영상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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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법에 따르지 않고 나름대로 독창적인 글씨체를 구사했다고 한다. ‘大道無門’(대도무문)은 그의 필체 특징을 잘 보여주는데 붓만 왔다 갔다 한 듯 필획이 약하다는 평. 여백을 거의 두지 않고 굵은 체로 종이 전체를 메우고 있는 것에서 ‘통 큰’ 사람임을 드러낸다고 한다. 또한 글씨 속도가 매우 빠른 편이라 실제로도 일을 빠르게 결정하고 좌고우면하지 않았을 성격으로 보인다고. 글씨의 기교가 거의 없고 정확한 정사각형 형태로 쓰고 있는 것은 세련됨과는 거리가 멀고 올곧은 사람임을 드러낸다는 분석이다. 나름 마니아층이 있어서 그의 글씨는 한 점당 300~400만 원까지 꾸준히 경매에 낙찰된다고 한다. 최고 기록은 560만 원.

  • 단식 투쟁 하던 시기와 관련해 김영삼 보름달 사건이라는 유명한 도시전설이 전해진다. 그리고 보름달 사건보단 유명하진 않지만 또 도시전설이 있는데 노태우 대통령 시절 김영삼이 노태우의 집무실에 쳐들어와서 막말을 퍼부었다는 소문이 정가에 암암리에 퍼진 적이 있었다. 하지만 노태우 전 대통령은 회고록을 통해 이는 사실이 아니라고 해명한 바가 있다.

  • 김홍조(金洪祚, 1911~2008, 향년 97세)와 본인(향년 89세)은 모두 80이 넘게 살았다. 유일하게 아버지가 아들의 대통령 취임식을 본 사례다. 김태향(金泰香, 1910~1999, 향년 89세, 노태우의 어머니), 강한옥(姜韓玉, 1928~, 문재인의 어머니)은 어머니가 아들의 대통령 취임식을 본 사례다. 매일 아침 조깅과 배드민턴을 하면서 젊은이 같은 건강함, 활력을 유지하였으며, 대통령 시절 국빈이 방문해서 청와대에 머물면 같이 조깅을 하기도 했다. 지미 카터빌 클린턴도 예외는 아니었다. 천조국 전, 현직 대통령도 강제로 기상시켜 운동시키는 위엄 민주화 투쟁을 하던 80년대에는 가택 연금 해제 후 민주 산악회를 조직해, 민주화 동지들이 건강을 유지하고 뜻을 모으는데도 도움되는 일석이조 효과를 거두기도 했다.[61] 이런 철저한 관리 덕분에 단식 투쟁 후에도 회복이 빠른 편이었으며 만 88세까지 장수하였다.[62] 김영삼은 생전에 질산 테러 및 조폭, 경찰들과 부딪히며 위험한 고비를 수차례 넘겼으나, 심적으로 움츠러들지 않고 다음날 김대중과 함께 국회에 등원해 여권의 잘못을 지적하는 배짱을 발하였는데, 이러한 기백 저변에는 타고난 건강 체질 + 철저한 관리 + 용기가 있었던 것.

  • 선친 김홍조는 거제도에서 멸치 어업을 했다. 그냥 동네 어민 수준이 아니라, 멸치 가공 공장을 여러개 갖춘 업계의 큰손이었다고. 대한민국 국민중에 김영삼집안 멸치로 우린 국물을 안먹고 죽은 사람은 없다고 할 정도 YS의 주변인들 및 주요 정치인들에게 꾸준히 멸치 박스를 선물로 보내줬기 때문에 주요 정치인들 중 YS 멸치를 받은 사람이 허다했다. 김종필이 김영삼을 조문하면서 이 멸치 박스 이야기를 언급했는데, 김영삼은 여*야나 정치적 대립 관계 여부를 신경 쓰지 않고 설 선물로 멸치를 보냈다고 한다. 황교익에 따르면 서울 & 경기도 일대에서 멸치로 육수를 내는 요리법은 70년대 이후에 퍼졌으며, 서울내기 중에는 멸치육수가 비리다고 못 먹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일본의 영향을 받아 남쪽 해안 지역에서부터 멸치를 이용한 식문화가 퍼진 것이라고. 지금이야 서울에서도 깨끗한 멸치는 귀한 선물이지만 당시엔 꽤나 이색적인 선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김영삼 재임 시절인 1995년에는 멸치 가격이 급등해서 큰 난리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 때문에 당시에는 '김영삼이 아버지 돈 벌게 해주려고 멸치값을 올렸다'라는 루머가 나돌기도 했다. 물론 이 멸치값 급등 자체는 김영삼과는 무관하고, 실제로는 씨프린스호 기름유출 사고 등으로 멸치 어획량이 크게 감소한 탓이었다. 이 때문에 당시 야당에서는 정부의 물가정책을 질타하고, 김영삼 정부에서 긴급 대책 자료를 만들고 멸치를 긴급 수입하는 등의 소동이 있었다.

  • 이승만, 박근혜와 함께 금수저 출신 대통령으로 자주 언급된다. 바꿔 말하면 한국에선 부잣집 출신 대통령은 이 셋뿐이고 나머지 대통령들은 전부 가난 속에서 태어났다. 물론 이 시기에 잘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했던 것도 이유지만. 거기다 유일한 서울대학교 출신이기도 하다. 이런 부유한 집안 출신인데도 불구하고 학생 때 전쟁에 징병되어 군복무를 수행했다. 이는 라이벌인 김대중과의 네거티브 접전 중 강점이 되기도 했다. 가난 속에서 살아왔다고 강조하던 김대중은 정작 한국 전쟁 시기 상업에 종사한단 이유로 병역 비리 논란이 있었고, '금수저 물고 태어난 YS도 군대에 군말 없이 끌려갔다 왔는데 당신은 뭐냐' 라는 반격에 시달리기도 했다. 더군다나 김영삼은 집안의 하나뿐인 아들이였다. 집안의 대를 이어줄 아들을 낳는데 집착했던 과거에 외동아들이 군대에 끌려간다는 것은 부모 입장에서는 청천벽력같은 일이었을 것이다.[63] 또한 가진 돈도 다 털어붓고 목숨 걸고 민주화 운동을 했기에 금수저에 대한 반감이 강한 유권자들에게도 인정받았다. 더구나 아들은 몰라도 김영삼 본인은 부잣집에서 살아서 그런지 오히려 비리를 저지른 적도 없고 재산도 깔끔하게 공개했었다.

  • 방언 관련으로 재밌는 일화가 있는데 김영삼이 빌 클린턴을 두 번째로 만났을 때 대뜸 "Who are you!"(너 누구야!) 라고 인사를 건넸다. 화들짝 놀란 통역관이 대통령이 "How are you?"(잘 지냈어?)를 잘못 말한 줄 알고 정정했는데 나중에 왜 그러셨냐고 물어보니 경상도에선 반가운 사람을 오랜만에 만나면 "이게 누꼬?" 라고 인사한다며 그래서 Who are you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64] 심지어 통역관이 동남 방언을 모르자 "배아라(배워라)"라고 돌직구를 날리기도 했다. 이건 사실 확인이 필요한 부분으로 일본 총리 모리 요시로도 빌 클린턴을 만나 뜬금없이 "who are you?"라고 물었고 "man of Hillary"라고 답했다 카더라는 야사가 있다. 어느 한쪽이 와전된 발언인 듯하다. 그 외에도 YS 관련 유머를 보면 이 동남 방언과 관련된 유머가 많으며 실제 사례도 적지 않다.

  • YS 시리즈 내용 中에 김영삼 대통령이 재임 시절 빌 클린턴과 만나서 빌이 "I'm Hillary's husband." 라고 하자, 김영삼이 그걸 'nice to meet you' 비스무리한 인사말로 알아듣고 "Me too." (사실은 nice to meet you too 또는 you too 라고 해야 맞은 문법) 라고 답변했다는 유머가 있다. 한때 이 일화가 사실인 것처럼 항간에 퍼졌지만, 사실 이건 일본의 전 총리 모리 요시로의 일화를 차용한 것이다. 나중에 일본 모리 요시로 총리의 일화가 구설수에 오르자, 일본 측 관계자들은 "한국의 어느 대통령의 일화가 와전된 것."이라 변명해명하려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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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전에 칼국수를 매우 좋아했다.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칼국수 집 단골이었다. 단골 국숫집으로 알려진 모 점포에 매년 연하장을 보낼 만큼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 2013년 뇌졸중 증세가 악화되기 직전에는 고생 많이 했다고 따로 돈을 주고 갔는데, 이게 마지막 만남이었다고. 대통령 재직 당시에도 칼국수가 청와대 주력 메뉴로 완전히 자리잡은 바 있었다. 이 시절 청와대에 초청받은 손님들은 꼭 칼국수를 대접받았으며, 이에 대해 면을 싫어하는 사람은 초청받기를 질색했고, 또 국수의 특성상 먹어도 배가 빨리 꺼지기 때문에 YS와 함께 칼국수를 먹었던 사람들 중에는 식사가 끝나면 몰래 다른 식당에 가서 또 식사를 한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는 후문이 전해지기도(...). 나중에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곰탕을 메뉴로 내놓은 부분을 이와 관련해서 개그로 연결시키기도 했다. "청와대에서 칼국수 먹고 나온 사람들은 다 배고파서 곰탕집에 모여서 2차를 했는데, 그런 일이 없도록 곰탕을 차렸습니다!" 라고 페북에 적은 것(...). 이러나저러나 당시를 겪은 사람들에게는 감회가 남다른 듯도 하다.

    김영삼 관련 유머에도 칼국수가 단골로 등장한다. 당시 유행하던 김영삼 시리즈에는 칼국수 관련 유머가 하나씩은 들어 있었다. 임기 말에 터진 IMF 사태로 인해 인기가 바닥을 찍었을 땐 '먹으면 먹을수록 머리가 나빠지는 음식'이라는 조롱도 돈 적이 있었다(...) <고바우 영감> 만평에서 자꾸 먹으면 머리가 나빠진다면서 '4년 동안의 임상 실험 결과'라고 확인사살을 하는 장면이 나올 정도. 원래 김영삼은 서울대 출신이지만 머리 나쁜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있다 보니 더더욱 그랬다. 칼국수 애호에 대해서도 '일부러 청렴한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조작한 거 아니냐'라는 비난도 없지 않았다. 물론 이런 이미지 구축의 의도가 없지는 않았겠지만 김영삼이 칼국수를 좋아한 것 자체는 부정할 수 없다. 굳이 결론을 내리자면 이미지 메이킹을 할 필요가 있었는데 마침 좋은 소재가 김영삼 본인에게 있었다, 이 정도가 나을 듯 하다.

    당시 청와대칼국수 대접에 대해 정치적인 전략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는데, 3당 합당 이전까지는 김영삼을 열렬히 지지했다고 밝힌 시사평론가 이동형은 팟캐스트 이이제이 김영삼 편에서 "김영삼은 거제시의 아버지 선단에서 잡은 멸치를 자주 선물로 보냈다. 멸치라는 게 금방 먹는 것도 아니고 두고두고 먹는 식재료이기 때문에 선물받은 사람은 먹을 때마다 YS를 생각하게 된다. 칼국수 육수 또한 멸치로 우려내는 것이기 때문에 같은 이유에서 해석할 수도 있다"는 의견을 낸 바 있다. 다만 김영삼이 생전에 가장 즐겼던 칼국수멸치 육수나 바지락으로 국물을 낸 해물 칼국수가 아니라 쇠고기사골 육수로 끓인 형태의 안동식 칼국수, 일명 안동국시였다고 한다. # 시중에서 먹으려면 해물 칼국수에 비해 좀 더 비싸기는 하지만 일반인들도 쉽게 먹을 만한 가격대이다. 보통 서울 시내의 매장에서 한그릇에 1만 원 안팎 수준으로 판매하는 편이다.

    김영삼 대통령이 단골로 찾아 안동국시를 즐겼던 곳 중 한 곳인 성북구 성북동의 '국시집'이라는 음식점은 역사성을 인정받아 김영삼 사후 한 달 뒤인 2015년 12월에 서울특별시 미래유산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기사 그 외에도 서민 음식을 많이 좋아했다고 하며 설렁탕을 먹는 사진이 사후 포털에 올라온 적도 있었다. 신사동에 위치한 '봉희설렁탕'(새절역 인근)이라는 음식점 역시 김영삼 대통령의 단골 식당 중 한 곳이었다고 한다.

    김영삼이 칼국수를 좋아한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왔을 때 당시의 대학가에서는 YS를 폄하할 때 칼국수가 아니라 차라리 보름달빵을 먹으라는 대자보가 돌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올림픽 탁구 금메달리스트이자 김영삼의 정적이었던 박철언의 처제이기도 한 현정화인터뷰에서 "땀 흘려 뛰고 온 운동 선수들한테 칼국수가 뭡니까?"라고 까기도 했다.

  • 그의 딸 김혜영(김현철의 누나)이 배우 이덕화와 국민학교 6학년때 같은 반이었다. 이덕화에게 김영삼은 친구의 아버지인 셈. 그 인연으로 이덕화는 1992년 대선 때 김영삼을 공개 지지하기도 했고 유세에도 참여했으며, 1996년 총선에 출마하기도 했지만 낙선하였다. 이때 선거자금으로 돈 엄청 까먹었다고.(...) 이 때의 경험이 상당히 뼈아팠는지 이후 이덕화는 단순한 지지 선언 정도를 제외하면 정계에는 관여하지 않고 있다. 헌데 공교롭게도 이덕화는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 김영삼의 평생의 숙적 중 한 사람인 전두환 역할을 맡았다.

  • 김영삼이 평소 가장 아꼈던 차남 김현철은 2012년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고, 새정치민주연합 후보로 출마한다는 설이 돌았으며 본인이 2014년 하반기 재보궐 출마를 시사한 적도 있으나 성사되진 못했다. 원래 무소속이었다 한나라당 소속으로 거제시 지역구에 여러차례 출마하려 했으나, 과거 구속 전례 등 공천받기엔 워낙 여건이 좋지 않아(...) 공천을 못 받았고 2012년에도 새누리당 소속으로 공천받지 못하자 당을 탈당했다. 당초 2016년 총선새정치민주연합 후보로 출마할 가능성이 점쳐졌고, 이에 대해 구체적인 기사도 나왔으나, 부친의 사망 후 충격 때문에 정치 활동을 중단하고 부친의 기념사업에 전념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하지만 제19대 대통령 선거 때에 김현철문재인 후보를 지지했고 그의 선거운동을 도왔다. 또한, 더불어민주당에도 입당하면서 현재는 더불어민주당 소속 당원이 되었다.

  • 관공서 대통령 사진과 마찬가지로, 대통령에 대한 경칭인 '각하'가 쓰인 마지막 대통령이기도 하다. 역시 김대중 대통령부터 '대통령님'이란 호칭으로 바뀌었다.[65]

  • 상도동에 장기간 거주했다. 김영삼계를 지칭하는 상도동계라는 명칭이 여기서 비롯됐다. 1960년대 상도동이 영등포구에 속해 있어서 영등포구로 주민등록이 되어있다가 1973년 관악구가 영등포구에서 분구되고 상도동이 관악구에 편입되면서 관악구로 주민등록이 이전되었다가 1980년 동작구가 관악구에서 분구되고 상도동이 동작구로 편입된 이후 별세할 때 까지 동작구로 주민등록이 되어있었다.

  • 1994년 6월 북핵 위기 당시, 미국 클린턴 행정부가 영변 원자로 등 북한의 핵시설을 폭격하려는 계획에 대해 매우 무지하고 안일하게 대응하여 맹비난을 받게 된다. 당시 김영삼 본인은 미국북한간의 갈등 상황이 어떻게 진행되는지조차 모르는 매우 무지한 상황이었다고. 시사저널, 한국군 장교, ‘북핵 폭격’ 하려던 미 장군에 저항하다 북폭은 김영삼 정권도 모르는 새에 실행 일보 직전에 미국 스스로에 의해 취소되었는데, 클린턴 회고록이나 당시 관계자들의 증언으로는 이는 예상 사상자 규모(100만)에 놀란 클린턴이 취소 결정을 내렸던 것으로, 결국 서구권 외교는 철저한 실리, 실용에 바탕을 둔 논리 개발이 중요하다는 것을 재확인한[66] 사례이기도 하다.[67] 김영삼은 퇴임 후 회고록에서 자신이 미국의 북한 핵폭격을 막았다고 했지만 사실 확인 결과 거짓이었고 북한 폭격시 엄청난 피해가 예상되는 결과에 놀란 미국 측 판단에 의해 중단되었던 것이다.북-미 협상 길목 막은 YS 고집이 ‘불바다’ 발언 불러… 언론도 ‘사재기’ 부추겨 [68]

  • 김두한 의원과 같은 시기에 정치 생활을 했고 그와 같은 당이었던 적도(자유당, 신민당)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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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른쪽에서 첫 번째가 김두한, 두 번째가 김영삼.
    야인시대에서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이 등장했기 때문에 시청자들이 김두한이 3김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궁금해하기도 했다.[69] 위의 사진은 국회의원 야구대회 사진이고, 김영삼이 나중에 퇴임 후 2010년대에 김두한 이야기를 인터뷰에서 언급하기도 했다. 야인시대에서 나왔던 것처럼 김두한은 부하들 끼니를 챙겨주고자 김영삼을 포함한 동료 의원들에게 돈을 빌리곤 했고, 김영삼은 김두한을 '머리랑 언변은 좋은데 글은 못 읽는 사람' 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김두한 의원은 자신에게 온 편지들을 읽을 줄을 몰라 김영삼을 찾아와서 좀 읽어달라고 한 적도 많았다고 하는데, 이는 평소 김두한에게 "이렇게 작고 예쁜 손에서 어떻게 그런 힘이 나오느냐?"며 스스럼없이 말을 건네는 김영삼에게 호감을 느낀 김두한이 YS를 만나고자 그랬을 가능성도 있다.

  • 인재를 판단하는 통찰력 및 안목이라는 혜안 면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았고, 동지이자 맞수인 김대중보다 이 방면에서는 한 수 위였다. 3김이 우리나라 정치 무대에서 퇴장한 뒤 우리나라 정치를 좌우해온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김영삼의 손을 잡고 정계로 들어온 사람들이 많다. 대표적으로 노무현이명박. 또한 이회창, 손학규, 이재오, 정의화, 김영춘, 박형준, 안희정, 최기선, 박재호[70] 등의 인재를 발굴해 내었는데, 알다시피 노무현과 이명박은 대통령까지 되어 나름대로의 치적을 남겼고, 이회창 또한 3 대선에서 존재감을 보였으며 콩라인 기록을 갱신한건 덤, 손학규 또한 대통령엔 인연이 없었지만 경기도지사와 민주당 당대표를 역임했다. 이재오는 이명박 정부 시절 이명박의 왼팔 역할을 했고, 정의화는 18대 국회에서 부의장을, 19대 국회에서 국회의장을 역임했다. 안희정 또한 노무현의 측근에서 노무현을 보좌하다가 이후 충남지사가 됐으며, 민주당의 유력 대선 주자로 떠오르기도 했다. 김영춘 역시 문재인 정부에서 해수부 장관으로 재직 중이다. 최기선도 인천시장을 두번이나 역임했다.박재호는 3전 4기 끝에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어, 현재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당시 변호사였던 문재인박원순의 발탁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당시엔 이들이 정치에 관심이 없어 김영삼의 영입 제안을 거절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도 나중에 대통령과 서울시장이 되면서 정치적 거물이 되었다.

  • 이명박 정부 시절 이명박이 정운찬을 국무총리로 임명하면서 중용했는데, 이 시기에 정운찬과도 상당히 친해졌다.

6.1. 그의 인기[편집]

집권 초[71]반에는 하나회 숙청, 금융실명제 도입, 부정 부패 사정[72] 및 공직자 재산 공개 제도화[73] 등으로 초반 지지율이 80퍼센트를 상회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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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그를 소재로 한 유머집 YS는 못말려도 발간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원래 이 'YS는 못말려' 시리즈는 유머 일번지 작가 출신인 장덕균이 세간에 떠돌던 유머를 모으고 그 자신도 여러 개를 창작하여 1993년 대전 엑스포에 맞추어 펴낸 것이다. 상단 사진의 2권은 장덕균이 아닌 다른 편집자가 PC통신 유머를 끌어모아 엮어낸 것. 저자의 말로는 노태우 정권 당시 노태우를 주인공으로 한 풍자 유머집을 냈다가 안기부에 끌려가서 심문을 당했다고 한다. 고문이나 밤샘 조사 같은건 없었지만, 출판사까지 압력이 들어가서 광고도 못하고 증쇄도 못했다고 한다. 그와 관련된 여러 유머 시리즈는 그가 세상을 떠난 후 다시 회자되기도 했다.

김영삼을 주인공으로 한 무협소설도 나왔다. 그것도 팬픽처럼 대충 쓴 게 아니라 무협 1세대 작가 중 손꼽히는 사마달이 쓴 작품으로 전 12권 분량의 대하소설이다. 대도무문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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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도 심지어 PC용 게임(메인 게임은 퍼즐, 보스전은 대전 액션 게임형식...이라기엔 스트리트 파이터 2를 베낀 수준)까지 등장할 정도였으니...

물론 단순히 인기가 많았기 때문만은 아니고 문민정부가 출범하면서 언론등을 압박하던 이전 정부들과는 다르다면서 김영삼 본인이 자신을 소재로 한 풍자작품등을 만드는 것을 허용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농담이 아니라 이전 정권까지만해도 풍자 한 번 잘못하면 코렁탕을 먹을수있던 시대였기도 했고. 전임인 노태우 역시 자신의 풍자를 허용해서 여기저기서 노태우를 풍자하거나 하는 모습은 볼 수 있었다. (물태우라는 별명이 대놓고 쓰이는 등..) 그러나 노태우 역시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고, 당시는 민주주의 공화정 체제가 시작되긴 했지만 하나회가 시퍼렇게 살아있는 등.. 전두환과 달리 자신을 비판했다고 잡아가서 고문하거나 하진 않았지만 노태우 정권 때도 심한 풍자를 할 경우 데려가서 심문하거나 하는 경우는 있었다고 한다. 김형곤 항목의 방귀개그 참조.

다만 'YS는 못말려'를 비롯하여 당시 나온 풍자작품들의 경우 김영삼을 희화화하기는 했지만 대부분 호의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고, 김영삼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내용은 찾아보기 어렵다. 위 대도무문만 해도 사상 초유의 가상정치무협소설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왔지만 주인공 곡운성(김영삼을 모티브로 한 인물)은 부정적인 면모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한 인간형이다. 이런 점은 시대적 한계로 볼 수도 있다.

6.2. 한자 선호파[편집]

한글로만 된 신문은 읽지도 않아요.
- 월간조선 2001년 2월호 내용 중 조갑제 편집장과의 상도동 사저 인터뷰에서

사적으로 한자 선호자로 알려져 있어서[74] 항상 친필 사인에도 한글 대신 한자로 사인을 하는 편이다. 또 신문을 읽을 때도 한글로 된 신문은 보지도 읽지도 않는다고 조갑제 인터뷰에서 밝혔다.[75]

또한 퇴임 후에도 한자교육은 국민들의 인식능력이 향상된다는 측면에서도 중요하다면서, 한자 선호에 대한 애정과 자신감을 보이기도 하였고, 한자교육 강연회에도 곧잘 참석하는 행보를 보이기도 하였다.

6.3. 인재 발굴[편집]

1968년에는 정치학을 지망하던 서석재를 발탁하여 자신의 비서로 채용하여 정계에 입문시켰고 1970년에는 서울대학교 운동권 출신 김덕룡을 발굴하여 정계에 데뷔시켰다. 1971년 유신 선포 이후에는 김동영, 최형우도 측근으로 발탁하였다. 이들은 김영삼의 최측근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김동영과 최형우의 활동은 두드러져 '좌동영 우형우'라는 별칭이 생겼다. 그의 휘하에는 수많은 반군정, 반독재 성향의 정치 지망생들이 모였다.(대표적인 현재 상도동계 현역 정치인으로는 김무성, 김영춘, 정병국 등의 인물이 있다. 서청원은 성향이 180도로 달라져서 상도동계에서 영구 제명당했으니 빼자)

1986년에는 인권 변호사로 이름이 알려지던 노무현을 발탁하여 정계에 입문시켰고, 안희정 또한 김영삼 측의 통일민주당 보좌관으로 근무했었다. 그러나 민주정의당, 신민주공화당과 3당 야합을 하는 과정에서, 노무현과 안희정은 김영삼과 갈라섰다. 1993년에 권좌를 차지한 뒤부터는, 이명박이재오, 손학규[76]를 비롯한 여러 사람을 민주자유당에 넣었다. 홍준표, 제정구, 이인제, 홍사덕처럼 굵직한 사람이 많다. 지금 이미지와 달리 홍준표도 당시에는 민주화 투사들과 친했던 전설의 정의의 검사였고 이인제도 인권변호사로 활동했던 사람이었다. 위에 언급했다시피, YS키즈라고 분류돼는 인재들 중 김영삼 대통령 이후 정계 및 정계 계파에 큰 영향을 끼친 인재들을 상당수 발탁해 냈고, 현재도 호평을 받는 인물을 많이 발굴했다. 아닌 사람들도 있기는 하지만 그건 김영삼 이후에 급속도록 우경화된 사람들이라 본인과 직접적인 상관은 없다.

6.4. 각종 타이틀[편집]

7. 어록[편집]

YS는 특유의 직설적 화법으로 유명했다. 거물 정치인 치고 YS에게 비판받지 않은 사람이 드물다. 언론 등에서 언급된 주요 어록을 정리. 위의 일생 파트에서 언급이 된 어록들도 존재한다.

어제 한잠도 자지 못하고 여러가지 정신적으로 피로합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이 김영삼이가 목숨이 끊어지지 않는 한[78] 바른 길, 정의에 입각한 일, 진리를 위한 길, 자유를 위하는 일이면 싸우렵니다. 싸우다가 쓰러질지언정 싸우렵니다.

ㅡ 1969년 초산테러 당시 국회연설 中

ㅡ 1979년 YH 여공사태 당시 연설 中

"아무리 닭의 목을 비틀지라도 새벽이 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ㅡ 1979년 초 신민당 총재로 당선된 후

"아주 악재만 아니면, 정치인이 언론에 다양하게 노출되는 게 나쁜 일만은 아니다."

ㅡ 야당 총재시절, 여권에서 일부 언론을 통해 공격을 시도하자 했던 말. 여기에 그치지 않고 기자들과 자주 모임을 갖으면서 이야기를 화통하게 경청, 이들 대부분을 우군으로 끌어들이는 수완을 발휘한다.

나를 해외로 보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나를 시체로 만든 뒤에 해외로 부치면 된다.

ㅡ 1983년 5월29일, 광주 민주화 운동 3주기 단식농성 후

날 감금할 수는 있어. 힘으로. 이런 식으로 힘으로 막을 수는 있어. 그러나 내가 가려고 하는 민주주의의 길은 말이야. 내 양심은, 마음은 전두환이가 뺏지를 못해!

ㅡ 1985년 2월 8일 상도동 자택 앞에서

선거혁명을 통한 민주화가 내 지론이었으나, 이 정권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젯밤과 오늘 내내 생각한 끝에 이 정권을 완전히 타도할 것을 결심했다. 나는 박정희 정권을 타도시킨 사람이다. 기필코 전두환 노태우 정권을 타도할 것이다.

ㅡ 1987년 대통령 선거 직후 기자회견에서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

3당 합당

오늘 탄생되는 정부는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의 불타는 열망과 거룩한 희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ㅡ 취임사 中

우리가 먼저 달라져야 한다. 우리가 먼저 깨끗해져야 한다. 우리가 먼저 고통을 기꺼이 감당해야 한다. 나는 대통령인 나 자신이 솔선해야 한다는 각오 아래 오늘 나의 재산을 공개하는 바이다.

ㅡ 93년 첫 국무회의 中, 이후 공직자 재산공개 시행

개가 짖어도 기차는 달릴 수밖에 없다.

하나회 척결시 반발에 일침을 놓으며 [79]

이 시간 이후 모든 금융거래는 실명으로만 이루어집니다.

금융실명제 긴급 명령 담화문 中

그래서 이번에(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기어이 고쳐놔야겠다.

ㅡ 1995년 한 중 정상회담 후 기자회견, 일본 정치인의 거듭된 망언을 언급하며 영상

이에 일본에서는 '버르장머리'라는 한국어 단어 자체가 해석이 안 돼서 당황했었다는 후문이 있다. 일견 시원해보이는 발언이지만, 훗날 일본은 한일어업협정을 파기하고 1997년 외환 위기 당시 한국 내 외화를 적극적으로 회수함으로써 문민정부에 심대한 타격을 입히는 것으로 복수했다.(...)

'실정법에 엄연히 접촉되는 허위 사실 공포, 후보자에 대한 비방 등이 정치활동의 전부인 것처럼 거리낌 없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허위사실 유포와 명예훼손, 인신비방 등이 자행되는 풍토를 정화하기 위해 정부의 권한을 총동원할 것입니다. 모든 선거관련 범법자는 소속 정당과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법에 따라 단호하게 처리할 것입니다.'

1997.11.3 mbc 뉴스데스크/ 김영삼대통령, 정치권 허위사실 유포 엄단

나도 전에(제3공화국) 초산테러 등 테러를 많이 받은 사람이라 이번 일에 큰 충격을 받았다.

ㅡ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가 테러를 당하자 문병을 간 자리에서[80]

만약 내가 하나회를 깨끗이 청산하지 않았다면 김대중 전 대통령이나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통령에 당선되지 못했을 것이다.[81]

ㅡ 2008년 우석대 초청 강연 中

김대중 대통령하고 나하고 관계는 6대 국회부터 동지적인 관계에 있었고, 오랜 동지적인 관계로 있었지만, 경쟁 관계에 있었거든요. 그래서 애증이 교차하는 관계입니다. (기자들이 두 분이 화해한 것으로 받아들여도 되냐고 묻자) 그렇게 봐도 좋죠. 이제 그럴 때가 된 것도 아닙니까?

ㅡ 2009년 8월 10일, 병상의 김대중 전 대통령을 문병하며[82]

그건 사자도 아니다. 칠푼이다.
ㅡ2012년 상도동 자택을 예방한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를 만난 자리에서.

정치도, 대통령도 그 모두가 인간이 되고 난 뒤의 일입니다. 먼저 인간이 돼야 합니다. 2007년 발언. 출처 15.11.22 사망일 SBS 뉴스

햅상은 갤랠되었다.[83]

1987년 6월 24일, 전두환 대통령과 회담을 가진 후 했던 말.

김영삼이 어떤 인물인가를 단적으로 가장 잘 보여준 말이다.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였던 김영삼은 전두환과 회담을 가지며 '국민의 요구를 수용하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후 문을 박차고 나오며 걸쭉한 경상도 사투리로 저런 말을 했다고. 이에 대해선 유시민 작가의 '나의 한국현대사'에 나와있다.

통합과 화합

김영삼 대통령이 남긴 마지막 메시지, 사실상의 유언. 아들 김현철이 무슨 뜻이냐고 묻자,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답하였다고 한다.

8. 가족 관계[편집]

  • 아버지 : 김홍조 (1911년 ~ 2008년)

  • 어머니 : 박부련 (1909년 ~ 1960년) [84]

    • 여동생 : 김호금 (1932년 ~ )

      • 매제 : 김상기 (1925년 ~ 2003년)

    • 여동생 : 김호아 (1934년 ~ )

      • 매제 : 김영모

    • 여동생 : 김호임 (1936년 ~ )

      • 매제 : 김상한 (1934년 ~ )

    • 여동생 : 김두선 (1938년 ~ )

      • 매제 : 최영욱 (1933년 ~ )

    • 여동생 : 김두아 (1940년 ~ )

      • 매제 : 김창원 (1936년 ~ )

  • 배우자 : 손명순 (1929년 ~ )

    • 장녀 : 김혜영 (1952년 ~ )

      • 사위 : 이창해 (1948년 ~ )

    • 차녀 : 김혜정 (1954년 ~ )

      • 사위 : 송영석 (1950년 ~ )

    • 장남 : 김은철 (1956년 ~ )

      • 며느리 : 황경미 (1958년 ~ )

    • 차남 : 김현철 (1959년 ~ )

      • 며느리 : 김정현 (1960년 ~ )

    • 3녀 : 김혜숙 (1961년~ )

      • 사위 : 이병로 (1959년 ~ )

9. 대중 매체에서[편집]

한국 현대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인물인데다가 군사정권 이 후 첫 민간인 대통령이다보니 대중매체에서의 등장도 비교적 잦은 편이었다.

영상물에서는 길용우가 김영삼 역할을 독보적으로 많이 맡았다. 제2공화국, 제3공화국, 삼김시대에서 3번 김영삼 역을 맡았으며, 특유의 능란한 연기를 잘 살렸다는 평이다. 제4공화국에서는 임동진, 제5공화국에서는 김용건이 맡았다. 드라마 코리아게이트에서는 이영하가 맡았다. 무풍지대에 나온 젊은 김영삼은 이인철이, 야인시대에 나온 젊은 김영삼은 정명준[85]이 맡았다. MBC 라디오 드라마 격동 50년에서는 탁재인이상훈이 맡았다.

파일:KimYS.jpg
(길용우가 연기한 김영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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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준이 연기한 김영삼)
파일:KimYS-5.jpg
(김용건이 연기한 김영삼)

<김영삼>

이상한 순풍이었다
순풍의 연속
그가 탄 배는 뱃머리가 늘 힘찼다
25세에 국회의원
민주당 구파를 벌써 그가 이끌어갔다
이상한 순풍이었다

몇번의 역려(逆旅)[87]가 있었지만
그것은 다음날
더 좋은 순풍일 따름
그의 뱃머리 수평선은 짙푸르게 힘찼다

70년대에 접어들어
김대중의 상대였다가 동지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민주당 구파와 신파 사이의 연장이었다

이윽고 신민당 총재였다
약속장소에 항상 먼저 와 있었다
술 담배 끊고
새벽 달리기를 시작했다
항상 먼저 와
10분 전 혹은 5분 전 먼저 와 있었다
그에게는 이렇게 지키는 것이 있었다
그에게는 편안함이 있었다
하지만 천부적인 전술이라면
그 수준은 누구의 수준인가를 알 수 없다

79년 여름 는 그에게 달려갔다
그의 직감과 직감 이상의 결단으로
YH 노동자들 신민당 강당 농성을 허용해주었다
그것이 유신체제가 쓰러지는 바퀴소리일 줄이야
그 누구도 몰라야 했다
그것이 부산 마산 총궐기의 원점일 줄이야

10. 수상 내역[편집]

  • 1993년 해리먼 민주주의상

  • 1994년 비폭력평화상

  • 1995년 UN협회 세계지도자상

  • 1995년 마틴 루터 킹센터 비폭력평화상

  • 1996년 제1회 루스벨트 국제장애인상

  • 2011년 제3회 대한민국법률대상 입법부문

11.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54

제3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23)

자유당

20,770 (44.8%)

당선 (1위)

초선[88]

1958

제4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2)

민주당

18,862 (43.1%)

낙선 (2위)

[89]

1960

제5대 국회의원 선거 (민의원, 경남 2)

민주당

29,754 (66.9%)

당선 (1위)

재선[90]

1963

제6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3)

민정당

39,946 (39.4%)

당선 (1위)

3선

1967

제7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3)

신민당

61,957 (56.8%)

당선 (1위)

4선

1971

제8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3)

신민당

74,589 (62.5%)

당선 (1위)

5선[91]

1973

제9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2)

신민당

83,661 (39.6%)

당선 (1위)

6선[92]

1978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2)

신민당

137,826 (53.1%)

당선 (1위)

7선[93]

1987

제13대 대통령 선거

통일민주당

6,337,581 (28.0%)

낙선 (2위)

1988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서)

통일민주당

72,599 (66.5%)

당선 (1위)

8선[94]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민주자유당

7,923,718 (38.5%)

당선 (1번)

9선[95]

1992

제14대 대통령 선거

민주자유당

9,977,332 (42.0%)

당선 (1위)

[96]

역대 선거 벽보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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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대 국회의원 선거벽보

제8대 국회의원 선거벽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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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CM0120060032_0109S-1.png

제9대 국회의원 선거벽보

제10대 국회의원 선거벽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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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대 국회의원 선거벽보

제13대 대통령 선거 선거벽보

파일:filewastooigsoIcaptured.png

제14대 대통령 선거 선거벽보

[97][98]
선거이력이 긴 것은 라이벌 DJ도 마찬가지지만, 김대중과 달리 낙선전력이 딱 2번 뿐이다. 선거이력의 절반이 낙선인 김대중과의 엄청난 차이. 9선 의원이란 어마어마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12. 소속 정당[편집]

13. 관련 문서[편집]

[1] 1927년 음력 11월 27일[2] 現 경상남도 거제시 장목면 옥포대첩로 743-1[3] 생전 거주지. 아버지가 사준 마지막 집이라고 한다. 1969년부터 살았다고. 상도동계의 뜻이 바로 이 집이다. 정확한 주소는 서울특별시 동작구 매봉로2가길 11.[4] 김영삼 그가 살아온 모든 일생의 일수가 총 32115일. 1일의 기준일을 포함하여.(탄생 D-Day)[5] 태어난 고향인 '거제'와 정치적 기반이 된 곳(정치적 고향)인 '부산'에서 한 글자씩 따서 지었다.[6] 위키리크스에서 파악한 김영삼은 보수주의 정치인이었다. 마찬가지로 서구권 기준으로는 전형적인 보수우파 정치인이었던 DJ와 더불어, 격동의 시대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진보 정치 색채가 부각 된 경우[7] 사실 이 좌우명은 본래 뜻과는 조금 다른 의미로 김영삼 대통령이 사용한 것이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8] 이러한 성격의 조사에서는 박정희,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을 제외하고 높은 지지율이 잘 집계되지 않는다. 인터넷 조사에서는 노무현이 우세하고, 실제 언론 조사에서는 박정희와 김대중이 높은 수치를 기록한다. [9] 김영삼 이전의 대한민국 역사에서 문민 대통령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다들 알다시피 안정적으로 유지되지 못하고 쿠데타를 맞고 실권해야 했다.[10] 물론 대화는 군사정권도 했지만, 이들은 실질적인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11]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였던 김영삼 前 대통령과 김영춘 現 국회의원.[12] 당시 상도동계와 동교동계 정치인들 모두 물적 증거만 잡지 못했을뿐, 정황 증거상 자신들과 관련된 편지 검열이나 집 전화를 도청당하는 거 정도는 기본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둘이 전화로만 얘기한 걸 국회 근처에서 만난 정부 관계자가 말걸면서 다가와 당연한 듯이 웃으며 "~~하신다면서요?" 이렇게 말한다던가 소름 그 자체[13] 상도동계나 동교동계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은 당시 다 최소 한번, 보통 여러번씩은 그 집에서 숙식을 한 적이 있고, 수도 없이 자주 그 집을 들락거렸다고 보면 된다.[14] 거기다가 이명박의 김영삼의 후계자임을 내세우기도 했기 때문에 이명박과 친이계가 한나라당의 당권을 잡았을 때에도 한나라당 내 상도동계의 영향력은 강했다.[15] 상도동계 막내라고 불렸다고 한다. 김영삼이 대통령이 된 뒤 내무부 차관을 역임하기도 했다. 후에 김영삼이 사망한 뒤 김무성은 언론인터뷰에서 "그 분은 내 정치인생의 아버지와 같은 분이시고 나는 그분의 정치적 아들이다"라면서 상주를 자처하여 다른 상도동계 정치인들과 장시간 빈소를 지키기도 하였다.[16] 이 작자는 친박으로 전향하고 박근혜가 파면당한 직후, 후배 상도동계 현역 정치인인 김무성, 정병국, 김영춘, 박재호 등의 인물들도 상도동계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사실상 상도동계에서 제명당했다고 봐도 무방하다.[17] 정병국은 넣기도 하고 안 넣기도 하는데, 넣으면 상도동계의 막내인 김영춘의 바로 윗 세대가 정병국으로 넘어간다.[18] 김영삼의 최측근이자 상도동계 직계로, 명실상부한 상도동계의 막내라고 할 수 있다. 상도동계 직계로서는 한나라당 內 상도동계의 파워가 건재하던 시절부터, 참여정부 시절 한나라당을 탈퇴하고 열린우리당으로 이적한 몇 안돼는 인물이기도 하다. 김영삼이 여기서 있지 뭣하러 탈당하냐고 김영춘을 불러 대화했는데 김영춘은 '이 당이 민주정의당처럼 변해 가는데 더 이상 제가 남아있을 이유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19] 김영춘처럼 상도동계 막내로 통하며, 한나라당 시절 열린우리당으로 이적 직후 현재도 더불어민주당 소속인 현역 상도동계 직계 정치인이다.[20] 최형우와 김동영은 김영삼의 최측근으로서 민주화 운동 시절부터 평생을 보좌해와 '좌동영 - 우형우'라는 별칭이 생겨날 정도였다. 최형우는 김영삼 집권 뒤로도 큰 권한을 누리면서 승승장구한 반면, 김동영은 김영삼의 대통령 취임도 보지 못한 채 암으로 별세한 상태.[21] 김영삼의 최측근 중 한 명으로 이명박 前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의 선거 운동을 도와 이들의 대통령 당선에 기여하기도 했다.[22] 훗날 김영삼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한나라당의 핵심 인물로서 부상하여 당권을 장악하나, 김대중-노무현에게 대선 연패를 겪는다.[23] 김영삼이 "우리는 도덕적 선구자가 아닌 능력있는 정치인이 필요하다"라며 현대건설 사장으로 있던 이명박을 정치판에 데뷔시켰다. 혹은 대권 출마를 하려던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을 한 방 먹이기 위한 카드였을 수도 있다. 이명박 영입 외에도 김영삼은 이래저래 정주영을 골탕먹인 경력이 있다.[24] 이재오, 김문수처럼 민주화 운동을 했던 인사. 민주자유-신한국-한나라로 바뀌는 과정에도 당에 계속해서 남았지만, 결국 민주당으로 이적했고 당대표까지 지내는 등 나름 족적을 남겼고 대선 주자까진 나갔으나 문재인의 압도적 인기에 밀려 대선에는 못나갔다. 현재 다시 바른미래당이라는 중도보수 정당 소속이 된 상태.[25] 특히나 상도동계 및 김영삼이 발탁한 인사들이 주로 남은 한나라당은 삼김청산론을 기치로 만들어진 정당이라 상도동계라는 이름은 더더욱 무색해졌다.[26] 이는 동교동계도 마찬가지다. 한나라당은 YS 이후 박근혜와 이명박이 권력을 얻고 친이, 친박 체제가 생겼으며, 상도동계가 흩어졌듯이, 민주당 쪽은 DJ 이후 노무현/문재인/정동영 등이 권력을 얻고 친노, 비노 체제가 세워지며 동교동계가 약화되었다. 2010년대 들어 정치 기사에서 동교동계 운운하는 것은 실제 동교동계가 지금까지도 유의미한 간판이라 언급된다기보다는, 동교동계였던 정치인, 혹은 동교동계가 의탁하고 있는 정치인들에 대해서 언급하는 정도로 보면 된다. 유일한 예외가 있다면 박지원.[27] 만약 남아있었다면 자유당이 몰락할 때 같이 나락으로 떨어져 대통령은커녕 국회의원도 더 못 했을 수도 있다.[28] 박근혜 대통령 취임식 당시의 모습. 취임하는 대통령과도 껄끄러운데, 옆자리 짝꿍과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사진에서 어색함이 제대로 풍긴다. 그리고 잠시 뒤 김영삼은 저걸 덮고 자면서 자신의 렘수면(...)을 전국에 생중계했다.[29] 사실 서석재 당시 총무처 장관이 먼저 의혹 제기를 한 바 있으나, 민정계의 반발로 되레 서석재가 경질되면서 무마된 상태였다.[30] 김영삼은 1927년 생, 전두환은 1931년 생으로, 김영삼이 전두환보다 4살 더 많았다.[31] 다만 전두환 세력만 축출된 거지 하나회 자체가 없어진 건 아니라 하나회는 김영삼이 없앴다.[32] 이는 노태우가 5공의 독재정권의 핵심 중 하나였지만, '6공화국 이후로의 노태우로서'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이기도 하다.[33] 재미있는 것은 김영삼은 김대중을 쉬운 일도 대단히 어렵게 생각한다며 정 반대로 평가했다는 점이다. # 두 사람의 살아온 인생이나 성격차가 드러나는 부분. 썰전에서 이 일화에 대해 분석하기를, 김대중과는 달리 부잣집 도련님으로 부유하고 널널한 인생을 살았기 때문에 추진력 있고 통 큰(?) 자세를 보였기 때문이라고 한다.[34] 두 사람의 성격의 차이를 보여주는 일화로는, 70~80년대 김대중은 국회 근처에서 다른 정치인들의 보좌관이나 비서들을 우연히 만나면 타고난 그의 탁월한 두뇌를 선보이듯 그 의원과 관련된 현안에 대해 진행되고 있는 부분을 바로 기억하여 어찌 되어가는지 너무 꼼꼼하게 꼬치꼬치 캐물어서 보좌관이나 비서들이 힘들어 했다고 하고, 김영삼은 쾌남형의 호방한 기상을 선보이듯이 자신과 가까운 정치인 쪽이건 여당 정치인 쪽이건 가리지 않고 보좌관들만 만나면 몇명이건 관계없이 "마 어데 가노? 이리 잠깐 와 봐라"하고 불러 자기 호주머니에서 지폐들을 꺼내 밥값으로 한장씩 쥐어주고 "밥은 잘 묵고 다니라"하고 쿨하게 떠나서 김영삼쪽과 반대파 였던 쪽 보좌관들마저 김영삼을 만나는 걸 좋아했다는 일화가 있다.[35] 김영삼은 70년대에만 신민당 당수를 두 번이나 지내는 등, 당내 주류의 위치를 놓친 적이 없으나, 김대중은 신민당 당수를 지내 본 일이 없음은 물론이고, 87년에 평민당 당수를 지낸 것이 첫 당수직일 정도로 야권 내 비주류였다.[36] 보석 석방으로 징역에서는 석방된 상태였다.[37] 오랜 2인자 생활로 나름의 철학까지 갖출만큼 단련된 JP가 사실상 중재자 역할을 맡는 경우가 많았다고.[38] 평민당 의원들에게도 본받으라는 말을 했다는 후문.[39] 노무현의 최측근으로 여겨지는 안희정 또한 이에 대해 크게 반발하면서 김영삼과 결별했다.[40] 출처 : 97년 대선 김대중 후보 지원 연설.[41] 당시 한나라당은 경상도 출신, 민주당은 전라도 출신이 아니면 출세하기 힘들 정도로 김영삼-김대중이 휘두르던 지역주의가 강했다. 이북 태생에 충청도 기반인 이회창과 과거 YS의 부하였던 경남 출신의 노무현은 필사적으로 지역주의에 맞서 싸워야 했을 정도였다. [42] 그 말을 듣고 노무현처럼 김영삼에 의해 정계에 입문하게 된 YS키즈 출신 친노계 안희정 前 충남도지사는 김영삼에게 사과를 요구하기도 했다.[43] 당시 김영삼 민주자유당 대표최고위원과 이명박 민주자유당 국회의원 당선자. 김영삼이 친히 이명박의 국회의원 당선을 축하하고 있다. 당의 대표최고위원인 김영삼이 본인과 개인적인 인연도 없는 일개 초선 의원의 당선을 친히 축하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44] 사실 이상득, 김형오, 박희태민정당에서 정치생활을 시작한 인물들이지만, 14대 대선의 민자당 경선에서 김영삼을 지지하면서 김영삼의 민주계로 사실상 편입되었다.[45] 다만, 이명박 및 친이계가 2008년 한나라당 공천권을 쥐고 당시 친이계가 아니었던 김무성을 공천에서 떨어뜨리자 이 때만큼은 김영삼이 이명박을 비난하면서 친박무소속연대로 출마한김무성의 선거운동을 도와 주기도 했다. 그만큼 김영삼이 김무성을 아꼈다는 것을 알 수 있다.[46] 본문에서 언급되지 않은 나머지 둘은 이명박 본인과 이명박 정부에서 방송통신위원장을 지낸 최시중이다.[47] 특히 울산, 포항, 경주가 매우 긴밀한 관계로 엮여있다. 예를 들면 현대제철 포항 제철소의 가장 중요한 고객은 울산의 현대자동차 공장이며, 현대자동차의 자동차 시트 공급처는 이명박이 실소유주이고 경주에 본사가 있는 다스라는 회사다.[48] 반대로 경상남도 창녕, 합천지역의 경우 행정상으로는 경남이지만 대구와 워낙 가깝기 때문에 실 생활권상 TK에 속한다고 볼 수도 있다. 참고로 이런 모호성 때문에 이 지역에서 태어난 인물들은 각자 선택한 고등학교의 위치에 따라 TK 또는 PK로 서로 다르게 분류되는데, 예를 들면 대구에 있는 영남고를 다닌 홍준표대구공고를 다닌 전두환은 TK로, 부산에 있는 경남고를 다닌 강만수부산고를 다닌 안경률은 PK로 분류된다.[49] 대표적으로 정운찬 前 국무총리나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가 있다.[50] 김영삼 前 대통령이 이명박 前 대통령을 작심하고 비난한 적은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한나라당 공천에서 당시 친박으로 분류돼던 상도동계 직계 인물 김무성을 공천에서 탈락시켰을때가 거의 유일하다시피 했다. 실제로 이 때만큼은 YS는 MB를 강하게 비난하면서 김무성의 유세를 직접 도와주기도 했다.[51] 다만 이명박이 강만수를 기용한 것은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에 와서도 많은 비난을 받고 있다. 특히 진보 좌파 진영에서는 이명박이 문민정부 시절에 외환위기를 일으킨 주범으로 꼽히는 강만수를 기용해 대기업과 부동산 부자, 고소득층에 유리한 경제 정책을 폈다고 주장하고 있다.[52] 다만 이명박은 손학규에 대해서는 훗날 사적으로 아쉬운 감정을 크게 토로하기도 했다.[53] 노무현의 투신자살로 인해 당시 이명박 정부와 검찰참여정부 인사들에 대한 사정수사가 차질을 빚게 되었고, 이명박 본인의 지지율 또한 크게 하락했기 때문에 김영삼의 불평은 이명박에게 사이다로 들렸을 것이다.[54] 2012년 박근혜 후보에게 독설을 날린 이후 시점에서 찍은 사진이다.(...) 이 무렵의 YS는 할 말 다 할만큼 정신은 또렷하였지만, 고령(86세)으로 웃는 표정을 담당하는 근육이 약해져 맘 편히 참가하는 행사에서도 잘 웃지는 못한 상태였다. 참고로 뇌졸중 증세가 본격적으로 심해진건 2013년부터. 박근혜가 대통령 된 이후 얼마 못가 뇌졸중으로 쓰러졌으므로 사실상 이 사진 나올때까지 정도가 사회적으로도 마지막 활동이었다고 봐야 한다[55] 무리하게 해명하려 들거나, 정권 차원에서 교과서를 고치는 것보다, 이 YS의 지원사격 내용을 활용하는 게 더 나았을 것이라는 결과론도 있다. 정치 감각에 관해서라면 당대 제1로 꼽히는 9단 김영삼이 고른 말인만큼 그 파급력이 가볍지 않기 때문.[56] 사면복권 이듬해인 2008년, 본인이 설립을 주도한 친정 여의도 연구소로 복귀한 상태로, 세간에서는 김현철 씨의 국회 등원 여부가 관심사였다.[57] 다만, 김영삼이 인재 발굴에서는 뛰어난 실력을 보였어도, IMF 사태 때문인지, 당시의 반응은 오십보백보라는 식의 반응도 있었다.[58] 이에 대해서는 문재인 캠프 측에서도 움직임이 있었고 성사 직전까지 갔었다고 한다. 실제 두 사람은 경남중고교 선후배이기도 하다. 그러나 상술한 노무현의 시계 발언처럼 지지율 역풍이 불까봐 실행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다만 대선이 끝난 후인 2014년 문재인이 김영삼에 병문안 한 적은 있다. 당시 김영삼은 말조차 하기 힘든 상황이었지만 옆에 있던 김현철이 "덕담 한마디 해주시라"고 하자 고개를 끄덕이고 문재인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2017년에 이루어졌다.[59] 아마도 건강상의 이유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뇌졸중 증상이 나타나는 고령의 노약자에게 차디찬 바깥 바람은 매우 위험하기 때문.[60] 하필 옆자리가 전두환이었다(...). 역대 대통령 순서대로 배치된 듯 하다. 이런 원칙이라면 전두환 옆은 노태우가 와야 하지만, 애석하게도 노태우는 건강 문제로 불참한 상태였다.[61] 당시 중앙정보부나 안기부 등의 도청을 피하기 위해서였다는 추측도 있다. 건물 안이나 평지에 비해 미행이 붙거나 전자 도청을 하기가 어려운 높은 산에서 정치 전략을 짜기 위해 등산을 자주 하였다는 것이다.[62] 교통사고로 무릎이 불편하게 된 DJ은 몸 운신이 비교적 편한 수영을 택했다. 또한 부인인 이희호가 헌신적으로 음식 내조를 해주었다는 후문.[63] 그래서 1980년대까지는 조건을 총족시켜야되었지만 외동아들일 경우에는 일종의 병역특례를 받을수있었다.[64] 영어에도 거의 똑같은 표현이 있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에게 "look who it is!" 라며 못 알아보겠다는 척을 하는 것.[65] 원래 노태우 대통령부터 "'각하' 대신 '대통령님'이라 호칭하자"고 했지만, 김영삼 때까지 잘 지켜지지 않았다.[66] 과거 무기수입 실무를 담당했던 관료들은 뼈저리게 겪어보았던 터라 이를 익히 알고 있었다.[67] 1998년, IMF 및 미국 재무부 관리들과 한창 줄다리기를 할 때에는, 우리 언론인들이 자사 신문의 외교-경제란에 이런 대응논리들이 포함된 기사를 내보냈는데, 그 내용들 중에는 "~~~하는 것은 미국의 이익에도 부합(한다고 발언해야 한다)."는 문구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68] 오히려 북폭을 유도하도록 북미 양자협상중 나왔던 서울불바다 사건을 9시뉴스에 폭로한것은 김영삼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94년 북미협상 미국 수석대표였던 로버트 갈루치의 회고록인 Going Critical에[69] 야인시대에서는 자유당 정부 시절 젊은 YS가 유진산, 조병옥, 김두한 및 야당 의원들과 함께 원탁에 앉아 시국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방영되었다.[70] 김영춘, 박재호, 최기선은 상도동계 직계 인물이다.[71] 임기 2년 차 4분기부터는 직무수행 평가에서 긍정 비율이 30%대로 떨어진데다,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 사건 후에도 41% 밖에 얻지 못했기 때문에 중반도 인기가 없었다고 봐야 한다.[72] 수십 년 동안 권위주의 독재 정권의 집권으로 사회 곳곳에 부정과 부패가 만연화되어 있던 상황이라 사회 전방위로 하루가 멀다하고 비리로 잡혀가고, 공직을 사퇴하는 기사가 1면을 장식했다. 공직자의 의심스러운 과다한 재산, 율곡 사업과 같은 방위 사업의 비리, 사행산업과 연관된 검경 등등. 이러한 부정부패 관련 기사가 1면을 차지하는 것은 9월말까지 지속된다.[73] 이전 버전에 있던 구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는 집권 3년차 시점이라 초기도 아니었고, 지지율도 많이 떨어진 상태라 제외한다.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시점에는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폭발 참사,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지방선거의 참패로 인기가 많이 떨어져 있던 시기이다. 갤럽 자료에 의하면 95년 3분기의 업무수행에 관한 긍정 지지율은 29%이다.참고 그래프[74] 라이벌인 김대중도 마찬가지여서 평소에 국한문혼용체로 글을 쓰는 편이었고 그래서 측근들이 한자 해석하느라 골치 좀 썩혔다는 후문이 있다.[75] 재밌게도 조갑제는 김영삼 생전에는 '좌파숙주'라면서 김영삼을 비난했던 인물이었다. # 그러나 사망 후 조문왔을 때에는 김영삼은 독재와 싸운 챔피언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76] 이 셋은 10년 정도 이후에 노무현 정부 시절 때는 소위 한나라당의 Big4로 불리기까지 했다.박근혜가 여기 포함됐다는 게 함정 박근혜는 당시 어쨌든 지지세는 대단했으니 능력과 별개로 세력이 거대했다.[77] 그리고 뒷날에 이르러서도 두명의 전직 대통령이 구속되었다. [78] 연설을 들어보면 끊어지는한 으로 들린다.[79] 이후 홍준표가 경남도지사 재임 중 1인 시위중인 여영국 도의원에게 비웃음조로 던진 말이기도 하다. 여담으로, 여영국, 홍준표 양자간의 관계는 12건의 민사소송으로 얽힌 관계이다.[80] 당사자나 어법이나, 김영삼 본인이 박근혜를 보는 시선이나 위로가 아니라 면전에서 대놓고 놀리는 수준이다.[81] 김대중이 대선에 나올 때마다 돌았던 것이 '군 김대중 비토설'이었다. 하나회가 무너진 후 치러진 97년 대선을 제외하면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였다. 실제로 YS 정권 초기인 1993년에도 군 인사를 마음대로 하면서 YS 길들이기를 시도했던게 하나회였다.[82]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때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의식이 없었다. 그리고 이것이 두 사람 생전의 마지막 만남이 되었다.[83] 협상은 결렬되었다[84] 박부련 사후 김홍조는 새 아내를 2번 들였다. 최남순(1925년 ~ 1971년)과 이수남 (1924년 ~ 2012년).[85] CJ E&M 4기 성우로, 성우 외에도 각종 촬영물에 단역으로 종종 활동했으며 정치 초년병 시절의 젊은 김영삼 역할을 맡아 특유의 말투까지 훌륭하게 재현해냈다.[86] 이후 같은 작가가 쓴 야인시대에서는 이기붕 역할로 출연한다.[87] 나그네를 맞이한다는 뜻으로, 여관을 이르는 말.[88] 거제 및 통영 일대 선거구. 역대 최연소 국회의원 (만 26세 5개월), 1955년 민주당으로 당적변경 (사사오입 개헌 반대)[89] 현재의 부산 서구[90] 1961.5.16 자격정지 (5.16 군사정변)[91] 1972.10.17 자격박탈 (10월 유신)[92] 부산 서구 및 동구 일대[93] 1979.10.4 제명 (김영삼 제명 파동)[94] 1990년 민주자유당 합류 (3당합당)[95] 최다 국회의원 당선 (9선) 1992.10.13 의원직 사퇴 (대선출마)[96] 1997.11.7 신한국당 탈당[97] 제 3, 4, 5, 6대 국회의원 선거벽보는 확인 못함.[98] 그런데 사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정보도서관에서 김영삼으로 검색했을시 7대 이전의 것은 확인할 수 없다. 이는 김대중도 마찬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