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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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대법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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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선과도정부
사법부장

대한민국
대법원장

초대
김병로

초대
김병로

제2대
조용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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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炳魯
1887∼1964.



1. 소개2. 일생3. 비판점4. 여담5. 관련항목

1. 소개[편집]

"이의 있으면 항소하시오!"

"사법관으로서의 청렴한 본분을 지킬 수 없다고 생각될 때는 사법부의 위신을 위하여 사법부를 용감히 떠나야 한다."


한국의 독립운동가,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이자 정치가이다. 호는 가인(街人)이다. 일제강점기 시기 이인, 허헌과 더불어 3대 인권 변호사로 유명했다.

2. 일생[편집]

2.1. 구한말 ~ 일제강점기[편집]

1887년 전라북도 순창군에서 태어났다.

아홉 살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집안의 가장이 되었으며, 조선 최후의 거유(巨儒) 라 불리는 간재 전우 문하에서 전통적인 성리학 교육을 받다가 1906년 창평군[1]의 창흥학교에 입학했다. 1910년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학 전문부 법학과와 메이지 대학 야간부 법학과에 입학하여 동시에 두 학교를 다녔으나, 폐결핵으로 귀국했다. 1912년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 대학 3학년에 편입하여 이듬해 졸업하고, 1914년 주오대학 고등연구과[2]를 마치고 귀국했다.[3]

귀국한 뒤 경성전수학교보성법률상업학교의 강사로 형법과 소송법 강의를 맡았으며, 1919년 경성지방법원 소속 변호사로서 개업했다. 변호사 시절, 그는 수많은 독립운동 관련 사건을 무료 변론하였으며, 다채로운 사회활동으로 독립운동에 공헌했으며, 1927년 좌우합작 성격의 합법적인 단체였던 신간회에서도 적극 활동했다. 당시 광주학생항일운동을 조사하였다. 대표적인 민족변호사로서, 긍인 허헌, 이인과 더불어 '3인'(세 사람 모두 이름이나 호에 '인'이 들어갔으므로)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4] 1932년부터는 경기도 양주군으로 내려가 농사를 지으면서 광복될 때까지 13년간을 은둔생활로 일관하였다. 따라서 창씨개명하지 않았고, 조선총독부의 배급도 받지 않았다.

2.2. 미군정 ~ 대한민국[편집]

1945년 8.15 광복 직후, 초창기에 안재홍을 통해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가담하려 했으나 이내 곧 건준위 중앙위(서울지부)내부에서 조선공산당 재건파가 주도권을 잡아 급진화되어 조선인민공화국이 선포되자 이에 반대의사 밝히며 합류하지 않고 9월 초,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1946년 좌우합작운동 활동 당시 합작노선을 지지표명하며 한민당을 탈당했다. 이후 남조선 과도정부 사법부장을 지냈다. 1948년 초대 대법원장, 1953년 제2대 대법원장이 되어 1957년에 70세로 정년 퇴임하였다. 일제강점기 때 같은 인권변호사로 동지였던 허헌과 달리 보수주의자로 6.25 전쟁 중 북한군에게 아내를 잃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공보다 인권을 우선시하였으며,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1950년에는 골수암 치료 때문에 한쪽 다리를 절단해야만 했다. 다리를 절단한지 얼마 되지 않아 한국 전쟁이 터져서, 불편한 몸으로 피난 생활을 겪었다.[5] 이 때 아내를 친정인 담양군으로 보냈다가, 북한군(빨치산)에게 아내가 살해당하기도 했다.

제왕적 사고를 가지고 있던 이승만과는 사법부의 독립을 위해 대립하는 관계[6]였으며 초대 대법원장 임기 중 반민특위 활동 적극지지하였고 반민족행위 처벌 재판 판사로 활동하여 이승만과 대립하기도 했다. 또한 전시중이던 1952년 이승만이 일으킨 부산 정치파동에도 반발하였다. 이승만이 법원의 판결을 비난하자 '억울하면 절차를 밟아 항소하면 될 일'이라고 받아친 것은 오늘날까지도 명언으로 꼽힌다. 그가 초대 대법원장으로서 소장 판사들을 보호한 덕에 사법부는 비교적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후임으로 친일 판사 백한성, 민복기, 김용철 등 그의 후임 대법원장들은 그만한 역량이 없거나 오히려 독재정권에 아부한 탓에 진보당 사건, 사법 파동, 10월 유신을 거치면서 사법부의 독립은 크게 훼손되고 말았다.

정년퇴임 후 변호사로 활동하였으며, 1960년 총선 때 고향인 순창군에서 민의원 후보출마했으나 낙선했다.[7] 5.16 군사정변 당시 박정희의 민정 참여와 군정의 지속을 반대하였다. 1963년 민정당 대표최고위원과 ‘국민의당’의 창당에 참여 정작 손자국민의당이 아니라 더불어민주당에 비대위원장으로 있다 이제 나갔잖아하여 그 대표최고위원으로 윤보선, 허정과 함께 야당통합, 대통령 단일후보 조정작업 등 야당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듬해인 1964년 향년 77세로 별세하였다.

말년에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후손 중에는 손자 김종인이 있다.

3. 비판점[편집]

  •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이태영 씨와 약간의 인연이 있다. 이태영이 여성 인권의 향상을 골자로 한 가족법 개정안을 제출하자 "천오백만 여성들이 불평 한마디 없이 다 잘 살고 있는데, 법률줄이나 배웠다고 건방지게 법을 고치라고 나서다니!"[8]며 호되게 꾸짖었다고. 이것은 그가 전통적인 유교 교육을 받은 보수주의자인 데다 시대를 고려하면 어쩔 수 없는 한계라고 봐야할 것이다. 서구권에서도 양성평등이 제대로 시작된 게 20세기이니. 하지만, 아이러니한 점으로 이승만이 판사 임용을 거부할 당시 이태영을 임용할 것을 건의한 사람이 바로 김병로 자신이었다는 것이다.[9] 판사 임용을 건의할 권한이 대법원장에게 있으니 이 또한 당연한 행동이지만..츤데레

  • 신간회 활동 당시, 지도부 위치에 올랐을 때, 자치론자들과 제휴를 모색하는 등 타협적인 노선을 띄어 지방의 신간회 지회는 강력하게 반발했다. 타협적인 지도부의 등장은 이후 신간회 해소론의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했고, 조직은 급격한 쇠퇴의 길로 빠져들게 만든 장본인으로 비판받는 시각도 있다.#

4. 여담[편집]

  • 현재 법학전문대학원생들이 참가하는 모의 법정변론경연대회로 김병로의 호를 딴 가인법정변론경연대회가 있다. 이후 다른 유사한 변론경연대회가 우후죽순처럼 생겼지만(대부분 특정 분야에 대한 대회이다) 이 분야에서 가장 권위 있는 대회이다.

  • 둘째 아들 김재열보성전문학교와 큐슈(九州) 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변호사 시보를 마친 후, 변호사 개업을 하기 직전에, 그것도 해방을 불과 1년 앞둔 해인 1944년에 병마로 사망하였다. 그래서 김재열의 외아들이자 김병로의 손자인 김종인은 할아버지 김병로 슬하에서 어렵게 커야 했다.

  • 95년 김병로의 일대기를 다룬 KBS 1TV <인간극장> 특집 '가인 김병로'가 방영됐는데 신구(노년), 김경응(청장년)이 주인공 김병로 역을 맡았다.

5. 관련항목[편집]


[1] 1914년 담양군에 흡수되었다.[2] 일종의 대학원 과정[3] 니혼대학 법학과는 1889년 일본에 일본제국 헌법이 제정공표된 뒤, 당시 법무대신이던 야마다 아키요시 가 법률연구를 위해 설립한 일본법률학교(1889년)를 모체로 한다. 일본 제국헌법이 독일제국 프로이센 헌법을 받아들인 것이므로 독일법 위주의 법학과라 볼 수 있다. 반면 메이지 대학 법학과는 프랑스법을 연구한 학자들이 설립한 메이지 법률학교(1881년)가 모체이며, 주오대학교 법학과는 1885년 설립된 영국(英吉利) 법학교가 모체이다. 김병로는 세 학교를 다니며 독일법, 프랑스법, 영국법 모두에 대한 공부를 하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4] 허헌은 메이지 대학 법학과, 이인은 니혼대학 법학과, 메이지 대학 법학과 출신이므로, 김병로는 둘다 동문 선후배이기도 하다. 이외에 동시기 민족 변호사로 할동한 김용무도 김병로의 주오 대학 동문[5] 이때 한 말이 '앉아서 연구만 할 수 있으니 잘 됐네.' (..)[6] 하지만 이승만은 친일파가 아니였고, 그 점에 있어 김병로도 마찬가지였다. 이 전Ver에서 이승만은 '3권분립과 사법부 독립의 중요성 모를리 없다'고 기술되어있는데, 실제로 이승만은 자신이 절대적인 국부가 되길 원하던 사람으로 의회,사법부를 다 자기것으로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그의 명예욕은 특히 나이가 들수록 심해져갔는데, 당장이라도 진보당 사건 때 사사건건 재판에 개입하는가하면, 사법부에 압력을 넣는등 법치를 파괴하는 반민주주의적인 행태를 보였다.# 여담으로 이승만은 사석에서 주변인물에게 김병로 대법원장의 안부를 물을때, "constitution(헌법)은 잘 있는가?"라고 물었다 한다. 이는 자신의 권력욕 때문에 김병로 대법원장과는 대립했으나, 인격적으로 비난하거나 증오하는 관계는 아니었다는것을 보여주는 대목.[7] 떨어진 이유가 선거 벽보만 붙히고 선거운동을 안했다고 한다. 선거 운동을 안한 이유가 가관인게 '어떻게 아랫사람들한테 표를 달라고 고개를 숙이나?' 라는 이유였다고.[8] 이렇듯 여성 인권에 대해서는 무심한 편이었다. 여자는 집에서 밥이나 하라고 할 정도로..[9] 바꿔 말하자면 거의 평생을 미국에서 살았던 이승만보다, 평생 한복을 입었다는 유학자 김병로가 이 부분에서는 더 깨어 있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