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기(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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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기 20대 시절. 풋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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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1951.3.31~

1. 개요
1.1. 출생1.2. 가수가 되기까지1.3. 순탄치 못했던 생활1.4.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다
2. 근황3. 대표작4. 이야깃거리

1. 개요[편집]

대한민국싱어송라이터이자 대한민국 포크계의 전설. 현재는 음악 활동보다 주로 뮤지컬 기획자로 활동하고 있다.

1.1. 출생[편집]

전라북도 이리 태생으로,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의사였는데, 6.25 전쟁 중 북으로 퇴각하던 조선인민군에 의해 살해당해 산파였던 어머니 혼자 자식들을 키워야 했다고 한다. 휴전 후 가족들과 서울로 이주했고, 재동초등학교와 경기중학교, 경기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에 입학했다.

1.2. 가수가 되기까지[편집]

이미 중학교 시절에 미술에 뜻을 두고 동아리 활동을 하고 있었지만, 자신보다 일찍 서울대학교 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있던 셋째 누나의 영향을 받아 우쿨렐레기타 등을 독학으로 익히면서 음악에서도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다. 미술과 음악 모두 포기하기 싫었는지, 대학에 입학한 뒤 고교/대학 동창인 김영세[1]도깨비 두 마리의 약자인 '도비두'라는 포크 밴드를 결성해 본격적으로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음악을 시작하면서 미대 수업은 아오안이 되었고, 1학년 첫 학기부터 낙제를 먹었다(...). 그 때문에 2학기 때 휴학한 뒤 1970년에 초기 대표곡인 아침 이슬과 가을편지(고은 작사), 꽃 피우는 아이 등을 작곡했고, 양희은과도 YWCA의 포크 동아리 '청개구리'에서 만나 공동 작업을 시작했다. 이듬해에는 시인 김지하와도 만나 현실에 대한 인식을 바꾸기 시작했고, 솔로 1집을 발표하면서 싱어송라이터로 두각을 나타냈다.

하지만 이 초기 시절부터 음악 활동은 그리 순탄치 않았는데, 1972년에는 서울대학교 문리대의 신입생 환영회 때 자작곡을 포함한 민중가요를 가르치다가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 때 가르쳤던 꽃 피우는 아이가 금지곡으로 지정되면서, 음반 활동에도 타격을 받기 시작했다.

1973년 초에는 김지하의 희곡 '금관의 예수'의 극음악을 작곡해 무대 공연 경험을 쌓기 시작했고, 1974년 4월에는 소리굿 '아구'의 대본을 쓴 뒤 작곡가 이종구가 곡을 붙여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공연했다. 이 소리굿은 공연윤리위원회의 제재를 받고 상연 금지 처분을 당했지만,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체포 위협을 무릅쓰고 재공연하는 등 화제를 모았다.

1974년 10월에는 카투사입대해 군 복무를 시작했으나 1975년 초 유신 반대 운동에서 김민기의 노래들이 불렸다는 것이 문제가 되어 보안대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고, 아침 이슬이 금지곡으로 지정됨과 동시에 솔로 1집도 판매 금지 조치를 받았다. 이 결정은 1987년 6월 항쟁 이전까지 지속되었고, 이후 전두환 집권기까지 공식적으로 발매된 김민기의 앨범은 전무했다.

보안대 조사가 끝난 뒤에는 영창 살이를 한 뒤 최전방 부대로 재배치되었는데, 경기고등학교 선배였던 소속 연대 수색중대장의 부탁을 받고 중대가를 작곡하기도 했다. 1977년 5월에 전역한 뒤에도 공연이나 음반 발매 등 공적인 활동에 제재를 받게 되자 당시 서울대학교 미대 학장이었던 조각가 김세중의 도움으로 학사 학위와 중등교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졸업할 수 있었다.

1.3. 순탄치 못했던 생활[편집]

하지만 졸업 이후에도 미술 활동이나 교편을 잡지 않은 채 막노동 등으로 생계를 꾸리면서 양희은의 음반 '거치른 들판의 푸르른 솔잎처럼'에 들어갈 노래들을 작곡해 주었다. 하지만 음반 발매 때는 가명을 사용했음에도 수록곡 중 '늙은 군인의 노래'가 장교들의 비위를 거슬렀다는 이유로 또 금지곡 판정과 음반 판금 조치를 받았다.

이렇게 되자 다른 민중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제도권 음악계의 도움 없이 비밀리에 작곡과 연주 활동을 진행했는데, 1978년에는 개신교 계열 시민단체인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의 후원을 받아 노래극 '공장의 불빛'을 제작했다. 이 노래극은 당시 대학 노래패들의 노래와 연주로 송창식의 집에서 몰래 녹음되었고, 녹음 직후 카세트 테이프로 복사되어 보급되었다. 대담하게도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행한 작업이었는데, 당연히 경찰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지만 별 처벌 없이 풀려났다.[2]

하지만 '공장의 불빛'을 만든 뒤에는 비공식 활동마저 힘들게 되었고, 결국 음악 활동을 일시적으로 중단한 뒤 고향으로 내려가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하지만 김민기를 받아준 농가에서 정기적으로 김민기의 행적을 경찰서에 보고해야 했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민폐를 끼치게 되었고, 멀지 않은 김제로 옮겨가 계속 농사를 지었다.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암살된 뒤인 1979년 12월에는 문화체육관에서 열린 유아원 기금 마련 자선 콘서트를 익명으로 기획하고 직접 출연도 하면서 일시적으로 음악 활동을 재개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두환을 비롯한 하나회 세력들이 12.12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잡게 되자 다시 농사를 지으며 대외 활동을 삼갔는데, 1981년 5월에는 국풍81 개최를 앞두고 정부에서 자신을 회유하려고 하자 농사일이 바쁘다면서 끝까지 참가를 거절했다. 대신 틈틈이 찾아와 농사를 도와주던 전라북도 각지의 연극패와 노래패들과 동학농민운동을 다룬 마당극 '1876년에서 1894년까지'를 만들어 전주에서 근대사 세미나와 함께 공연하기도 했다.

같은 해에는 김제에서 경기도 연천군의 전곡으로 옮겨가 참깨 농사를 시작했는데, 이 때 비료 회사에서 사익을 챙기기 위해 규정량보다 많은 양의 비료를 권장량으로 속여 판 것을 알고는 회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해 배상금을 받기도 했다. 이후에도 민통선 이북의 논에서 벼농사를 지으며 청년회를 조직해 농산물 직거래에 나서기도 하는 등, 구체적인 사회 운동에도 참가하기 시작했다.

1983년에는 2년 전 비공식 발표했던 마당극 '1876년에서 1894년까지'가 대한민국연극제 참가 작품으로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상연되었는데, 극단 연우무대 대표 오종우를 각본가로 기재하고 자신은 익명으로 연출을 맡았다. 이 때까지도 김민기는 주로 농사일에 전념하고 있었는데, 같은 해 12월에 전곡의 집이 화재로 전소되었다. 때마침 9년 전 소리굿 '아구'를 같이 공연했던 김석만이 김민기를 찾아와 공연 활동을 다시 재개하자고 설득했고, 결국 농부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로 돌아와 김석만, 오종우와 함께 어린이 뮤지컬을 만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계획은 공연윤리심의위원회에서 김민기가 참가한다는 것을 알아채면서 수포로 돌아갔고, 1984년에는 서울대학교이화여자대학교를 비롯한 대학들에서 활동하던 노래패들의 노래를 모아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라는 음반을 제작했다.[3] 하지만 이 음반도 공윤위에서 김민기의 노래를 모두 삭제하라고 지시했고, 발매 뒤에도 어른의 사정으로 발매는 되었지만 판매가 거의 안되는 안습 신세를 겪었다.

1985년에 뮤지컬 사무실 직원으로 일하던 이미영과 결혼했고, 1987년에는 6월 항쟁으로 본격적인 민주화 열풍이 불자 6년 전 충청남도 보령시탄광에서 잠시 광부 생활을 했을 때의 경험을 살려 탄광촌 아이들을 다룬 노래극 '아빠 얼굴 예쁘네요'를 만들었다. 하지만 아직 건재하던 공윤위의 꼬장 때문에 여러 대목의 가사를 고쳐서 출반해야 했다. 공윤위와의 마찰은 같은 해 12월에 노래일기 '엄마, 우리 엄마'와 훗날 록 오페라로 리메이크하게 되는 노래극 '개똥이'의 노래를 모은 음반을 낼 때도 똑같이 벌어졌다.

1989년에는 농촌 운동 경험을 살려 장일순, 박재일, 김지하, 최해성 등과 함께 생태운동 단체인 '한살림 모임'이라는 NGO를 만들어 초대 사무국장을 역임했다.[4] 이듬해에는 한겨레에서 발족시킨 '겨레의 노래 사업단'에서 그 동안 군사정권의 탄압 등으로 가창이 금지되어 있던 대한민국과 해외 동포들의 노래를 엮은 음반 '겨레의 노래'를 제작했고, 음반 발매 기념으로 순회 공연을 하면서 오랜만에 아침 이슬을 공개적으로 불러 화제가 되었다.

1.4.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다[편집]

1991년에는 독일의 극작가 폴커 루트비히 각본/비르거 하이만 작곡의 록 뮤지컬인 '지하철 1호선'의 한국어 번안과 연출을 담당했는데, 이 뮤지컬은 같은 해 김민기 자신이 사비를 들여 대학로에 개관한 학전 극장에서 공연되기 시작해 2008년까지 무려 18년 동안이나 상설 공연되었다. 심지어 2001년에는 독일중국, 일본에서 해외 순회 공연도 진행했고, 이 공로로 2007년에 독일문화원에서 수여하는 괴테 메달을 받아 한국인으로서는 윤이상 이래 두 번째 수상자가 되었다.

1994년에는 학전 극장을 상주 공연장으로 하는 극단 학전을 창단했고, 지하철 1호선 외에 록 오페라 '개똥이'의 작사/작곡/연출과 록 뮤지컬 '모스키토', 뮤지컬 '의형제'의 번안/연출을 담당했다. 다만 극단과 극장 운영에 따른 재정난으로 인해 한참을 고생해야 했고, 이것을 타개하기 위해 1993년에 오랜만에 솔로 2집을 발매해 음악 활동을 재개했다. 다만 솔로 4집까지 낸 뒤에는 뮤지컬 등 공연예술 분야의 활동에만 주력하는 것으로 보인다.

2001년에는 1970년부터 1984년까지 작곡된 김민기의 대표곡 아홉 곡을 김동성이 관현악으로 편곡한 앨범이 발매되었고, 발매와 동시에 '클래식 김민기'라는 타이틀로 임헌정 지휘의 부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공연해 화제가 되었다. 2004년에는 '공장의 불빛'이 정재일이적, 이소은, 전인권, 이지영, 이승열 등 후배 음악인들에 의해 리메이크되었고, 1978년의 오리지널 카세트 테이프 복각본과 합쳐 두 장의 CD로 재발매되었다. 이 음반들은 그와 초기에 듀엣 활동을 했던 이노디자인 대표 김영세가 앨범 디자인을 맡았다.

2. 근황[편집]

1991년 이후에는 공식 석상에 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극단 학전의 연출자로만 묵묵히 일할뿐, 언론사의 쏟아지는 인터뷰 요청이나 각종 공연 섭외도 모두 거절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사람들이 아침 이슬의 김민기로만 나를 기억하는걸 원하지 않는다고 이유를 밝혔다. 즉 자신은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세상은 여전히 과거의 한순간만을 기억하면서 화석화된 김민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라고.

그러던 그가 정말 오랜만에[5] 자신의 삶에 대한 인터뷰에 응했다. 다음은 한겨레와의 인터뷰 기사. 두번째

더불어 6월 항쟁의 마지막인 7월 7일 서울시청 광장에서의 이한열 열사 노제를 보러 갔다고 한다. 그 당시 백만 군중이 다함께 아침 이슬을 부르는 것을 듣고는 '아 이 노래는 더이상 나만의 노래가 아니구나'하고 느끼면서 이후 공식석상에서 '아침 이슬'을 부르지 않는다고 한다.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노래나 음악극 외에도 순수한 서정미가 돋보이는 노래들도 많이 작곡해 운동권이 아닌 일반 애호가들에게도 보편적으로 어필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사회적 소외자에 대한 시각을 유지하는 모습을 보이며, 사람에 대한 연민을 그린 곡인 '아름다운 사람'외에 친구와 마음 터놓고 이야기하듯 털털한 어조로 부르는 '봉우리', 순수한 동경과 열정을 담담하게 표현한 '날개만 있다면'등의 노래도 유명하다.

요즘은 김민기가 무명 가수 취급을 받곤 하는데, 그런 사람은 1970~1980년대를 살아보지 못했거나 국내 가요의 역사를 수박겉핥기 식으로만 알고있는 사람이다. 국내 대중음악계에서 형식적인 면(연주, 편곡)에서 혁명을 가져온게 록과 흑인음악을 도입한 신중현이라면, 내용적인 면(노랫말, 감성, 메세지)에서 혁명을 가져온 것이 김민기이다.[6]

대구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DJ 겸 음악평론가인 권오성은 김민기에 대하여 "대한민국 모던 포크가 한대수에서 시작됐다면, 대한민국적인 정서가 담긴 포크의 시작은 김민기다"는 평가를 했다. 덧붙여서 김민기는 음악이 무언지를 아는 뮤지션이며, 가사에서 보여 주는 인간에 대한 통찰이 압권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권오성은 김민기를 굉장히 좋아한다고 한다.

3. 대표작[편집]




말할 필요도 없는 김민기의 레전드. 자세한 사항은 아침 이슬 문서 참조.




김민기의 명곡이라하면 빼놓을 수 없는 또 다른 명작. 역시 자세한 사항은 상록수 문서 참조.
70년대 봉제공장에 다닐때 동료들 합동결혼식 축가로 만든 곡이라고 한다. 관련기사

검푸른 바닷가에 비가 내리면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이요
그 깊은 바닷 속에 고요히 잠기면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었소
눈앞에 떠오는 친구의 모습
흩날리는 꽃잎위에 어른거리고
저멀리 들리는 친구의 음성
달리는 기차 바퀴가 대답하려나

눈앞에 보이는 수 많은 모습들 
그 모두 진정이라 우겨 말하면
어느 누구 하나가 홀로 일어나 
아니라고 말할사람 누가 있겠소
눈앞에 떠오는 친구의 모습 
흩날리는 꽃잎 위에 어른 거리고
저 멀리 들리는 친구의 음성 
달리는 기차 바퀴가 대답하려나

아침 이슬, 상록수에 비하면 빛이 많이 바랜 감이 있지만, 70년대를 살아난 이들에겐 역시나 주옥같은 명반. 김민기 학창시절, 물에 빠져 죽은 친구를 기리기 위해 만든 음악이었다고 한다. 그 배경 때문인지, 세월호 추모 영화에 쓰일 곡으로 선정되려고 한 적도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생전 좋아했던 곡으로, 8주기 추도식 때 불리우기도 했다.


70~80년대 노동운동계의 한 획을 그은 작품. 해당 문서 참조.


1984년 LA 올림픽 때 메달을 못 딴채 쓸쓸히 귀국한 선수들을 내용으로 하는 다큐멘터리에 쓰인 노래로, 해당 프로그램 작가였던 송지나의 부탁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 배경이 88 서울올림픽이라는 얘기도 있으나 잘못된 정보로 보인다.관련기사관련기사


시인 고은이 작사한 노래로 만들어진 배경은 다음 글 참조 가을편지의탄생비화
이 노래를 비롯해 김민기의 대부분 노래들이 수록된 앨범이 1993년에 발매된 '김민기 전집'인데, 김민기는 당시 소극장 '학전' 운영으로 진 빚을 갚기 위해 선금을 받고 앨범을 녹음했다고 한다(이후 '지하철 1호선'이 흥행에 성공하면서 학전이 계속 운영됨). 노래를 부르기 꺼려하는 성격상

그런 일이 없었더라면 '김민기 전집'과 같은 앨범이 녹음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관련기사관련기사


양희은의 동생(탤런트 양희경인지 그 밑의 동생인지는 분명하지 않다)이 글짓기한 내용을 보고 노래로 만들었다고 한다. 관련글

4. 이야깃거리[편집]

70년대를 살아낸 인물로써, 김민기는 당 시대의 수많은 인물들과도 연분이 있었다. 김민기의 인간 관계는 다음과 같다.

재동초등학교 동창으로, 아침 이슬을 양희은에게 건넴으로써 양희은의 히트적인 데뷔에 도움을 주었다. 이외에도 양희은의 많은 히트곡들[7]을 작곡하여 양희은이 70년대의 일약 스타로 도약하는 것에 크게 공헌했다. 사실상 지금의 양희은을 만든 것이 김민기라고 말하는 것도 과하지 않다. 양희은의 동생 연극배우 양희경과도 친분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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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알 전인권
김민기와는 절친한 관계. 한대수와 김민기 모두 대한민국 포크 음악을 발전시키는데에 큰 기여를 했으며, 음악이 계몽적 성향을 띠고 있는 것도 공통점이다. 실제로 1971년 김민기의 앨범에 한대수의 음악 '바람과 나' 가 실리기도 했고, 한대수도 2013년에 부른 '행복의 나라' 에서 '이제 나이 들어서 (음반을) 녹음할 수 없는 사람들' 로 김민기와 전인권을 뽑았다. 이를 보면 전인권과의 커넥션도 있었을지도?

김민기의 대학시절, 김민기가 만든 2인조 밴드 '도비두' 의 멤버였던 인물. 김민기와는 절친한 관계라고 한다. 현재는 산업 디자이너로 이노디자인의 사장을 역임하고 있다.

김민기의 스승 같은 존재. 김민기의 인터뷰에서, 김민기가 김지하로 하여금 '우리말의 생동성을 일깨워준 ' 이라고 언급했다. 스스로 자신을 김지하의 친동생 그 이상의 존재였다고 말할 정도. 애초에 김민기는 그가 가수가 되는 과정에서 김지하의 '금관의 예수' 음악을 만들었기 때문에, 김지하가 자신의 인생의 갈림길에 있어서 중요한 존재였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김지하가 '오적' 을 쓰고 도피하는 과정에서, 혜화동 다방에서 처음 그를 만났다고 한다. 처음 만났을 때 인상이 별로였다고.[8] 김지하가 정치적 행보를 바꾼 일에 대해서는, '그것은 그의 일' 이라며 말을 아꼈다.

김광석이 처음 데뷔를 하게 된 것이 김민기의 극단 '학전' 의 배우로써였다. 처음에 김광석이 김민기 앞에 왔을 때는 그를 받아주지 않았지만, 학전이 빚에 떠앉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를 불렀는데, 의외로 큰 히트를 거두었다고 한다. 땡볕 아래 사람들이 모두 학전 앞에서 줄을 서고 있었다고 할 정도. 김민기는 그를 보고 '싱어송라이터들은 대개 자신들의 노래만 진창 부르려고 하는데, 그는 다른 이들의 좋은 노래도 부르려고 노력했다. 그것이 그의 좋은 점이었다' 라며 그를 칭찬했다. 김광석 사후, 김광석 추모사업의 회장을 맡았다. 김광석 추모사업 중 하나였던 '김광석 다시부르기' 콘서트로 인하여 학전에 사람들이 쏠리니, 밖의 대형 극장으로 콘서트를 옮겼다. 한 기자가 '오는 돈도 마다하는 것 아니냐' 라고 물어보니, '나는 물건을 만드는 사람이지, 돈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다' 라고 일언했다. 오오

공장의 불빛을 만들 때도 송창식의 집에서 비밀리에 녹음했고, 김민기 앨범 1에 수록된 송창식 작곡의 '내나라내겨레', 송창식이 부른 김민기 작곡의 '이 세상 어딘가에' 등, 김민기와 굉장히 많은 인연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둘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뉴스, 기사는 없지만 굉장히 친했던 듯. 사실 자칫 발각되면 함께 연행될 수 있었던 공장의 불빛의 녹음을 도와주었다는 것 자체가 어지간히 믿는 사이가 아니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양희은이 무릎팍도사에 나와서 이야기한 바에 따르면 송창식은 김민기에 대해 이야기하길 "아마 김민기가 세상에 나왔다면 나는 없었을 거다"라고 말했다고... 반면에 김민기는 송창식을 형님으로 칭하면서 대인이시며 자신에 대한 송창식의 평가에 매우 쑥스러워하는 인터뷰가 있다.(SBS 한수진 아나운서의 인터뷰 영상이 있는데 링크 추가 바람)

대통령 박정희 맞다. 70년대 당시 김민기는 제법 유명해서, 유신 정권의 눈에는 눈엣가시와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박정희의 긴급조치에 의하여 김민기의 앨범이 금지곡으로 지정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는 악연의 시작이었을 뿐, 1975년, 김민기가 카투사로 군대에 입대했을 때, 중앙정보부 요원이 접촉하여 그로 하여금 노래를 만들어달라고 반강제적으로 요청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노래를 만들어주었는데, 이 노래가 바로 '식구생각'.[9] 결국 김민기는 영창에 끌려가게 된다. 이 뿐만이 아니다. 그의 불온한 행각으로 인해 그는 수없이 취조실에 끌려가 고문당했는데, 사각형 각목으로 '아 내가 이제 죽는구나' 라는 생각이 날 때까지 맞았다고 한다. 인터뷰에서 말하길, '이 친구가 나 때문에 힘들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이렇게나 탄압하던 김민기의 노래가 이후 민주화의 구심력이 된 것은 아이러니. 나중에 김민기는 운동권들에게 '너무 미워하지마라. 그러다 걔(박정희) 닮아간다' 라고 충고했다고 한다.

전인권은 김민기가 프로듀싱한 겨레의 노래 음반에 참여해 '이등병의 노래'를 불렀다. 당시 곡 해석을 둘러싸고 김민기와 의견이 달랐다고 한다. 전인권에게 김민기는 우상이자 컴플렉스고 대한민국에 둘도 없는 천재다. 관련 기사.
전인권이 필로폰 복용 혐의로 형사재판을 받을때 김민기가 증인으로 출석해 전인권에 관해 증언한 바 있다.관련글 관련기사 관련기사

전 국무총리인 정운찬에게 부인될 사람(서울대 미대 동문)을 소개해주었다고 한다 관련기사 관련기사

음악평론가 강헌의 주선으로 조용필과 방배동 근처에서 만나 술을 마신 적이 있는데, 조용필이 노래방 기기로 아침이슬을 불렀다고 한다. 당시

만남에 대해 강헌이 과장된 어법으로 흥미진진하게 얘기한바 있다'김민기와조용필의만남'강헌

설경구는 무명시절 지하철1호선에 출연하면서 연기경력을 쌓았고, 당시 연출자였던 김민기를 은인이라 생각한다고 한다. 설경구 말고도 황정민, 김윤석, 이종혁 등이 학전에서 연극배우로 활동했다고 한다. 관련기사 관련기사

조영남과는 젊었을 때부터 친한 사이로 술을 같이 자주 마셨다고 한다. 관련기사
조영남과 쎄시봉 멤버들이 김민기의 환갑잔치를 해주었다고 하며, 이와 관련해 조영남이 무릎팍도사에 출연했을때 전화연결로 출연한 적이 있다관련기사 관련기사 관련기사

들국화의 최성원에게도 김민기는 우상이자 존경의 대상이다. 심지어 들국화 1집 이후 매니저 김진성씨와 함께 했던 이유가 바로 김민기의 음반을 제작했기 때문이라고... 더나아가 음악적 사상이나 철학에도 영향을 미친 듯 하다. 자신의 정치적 견해나 사회적 의식은 백기완 선생과 김민기 형으로 끝났다고 할 정도...관련 기사.


[1]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산업디자이너로 현 이노디자인 대표. 무한도전 디자이너 특집에도 나왔던 그분 맞다.[2] 당시 김민기는 분명히 요주의 인물로 찍혀 있었지만, 높으신 분들은 그 동안 자신들이 반독재 민주화 운동을 공개적으로 탄압하다가 국내외에서 많은 비난을 받은 것 때문인지 김민기만은 활동 금지만 시키고 자멸하도록 방치한다는 암묵적 합의를 했다고 한다.[3] 이 음반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노래패 '노찾사'가 시작된다.[4] 한살림은 2014년 현재 원주에 본부를 두고 있으며 전국적으로 조합원만 41만명이 넘는 세계 최대 규모의 생활협동조합이다. 조합원들이 친환경-유기농산물를 생산해서 전국에 있는 직영매장에서 직거래로 판매하고 있다. 이렇게 거대한 규모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선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나, 해외 언론과 NGO에선 대단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세계적으로 협동조합 운동에선 최고의 성과로 주목받고 있다.[5] 그의 삶을 다룬 책 <김민기>(김창남 저/한울)에 음악평론가 강헌과의 인터뷰가 실려있지만 일간지와는 최초라 한다.[6] 그리고 이 두가지 흐름이 다시 만나는 지점이 바로 1985년 나온 들국화 1집이다. 대중음악평론가들이 괜히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 같은 순위에서 들국화 1집을 처음에 꼽는게 아니다.[7] 아침 이슬, 상록수[8] 당시 김지하는 '오적' 을 만든 죄로 수배 중이었는데, 태평하겡 럭셔리한 바바리 코트를 입었기 때문이라고.. ?[9] 노래를 만들어주긴 했는데, 노동으로 인하여 가족이 흩어진 내용의 노래를 만들어주니, 중정부 요원이 갸우뚱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