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딩로딩중

김대건

최근 수정 시각:

파일:나무위키+유도.png   前 프로게이머 김대건에 대한 내용은 김대건(프로게이머) 문서를, 포커즈의 멤버 김대건에 대한 내용은 포커즈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파일:external/www.catholiclane.com/St._Andrew_Kim_Taegon.jpg

파일:external/img.seoul.co.kr/SSI_20080604171518_V.jpg

나의 마지막 시간이 다다랐으니 잘 들으시오. 내가 외국인과 연락한 것은 나의 종교를 위해서이고 나의 천주를 위해서입니다. 이제 내가 죽는 것은 그분을 위해서입니다. 나를 위해 영원한 생명이 바야흐로 시작되려 합니다. 여러분도 사후에 행복하려면 천주를 믿으시오.

이름

김대건(金大建)

아명(兒名)

김재복(金再福)

보명(譜名)

김지식(金芝植)

세례명

안드레아

생몰년

1821년 8월 21일 ~ 1846년 9월 16일(향년 만 25세)

출생지

충청도 면천군 범서면 송산리[1]

본관

김해 김씨 안경공파 13세손[2]

시복

1960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

시성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

축일

7월 5일 (모든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성인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축일)


1. 소개2. 생애
2.1. 어린시절2.2. 순교2.3. 순교 후
3. 트리비아4. 관련 문서

1. 소개[편집]

대한민국 최초의 가톨릭 사제(신부).[3]

세례명은 안드레아.[4] 김대건 신부는 한국 최초의 가톨릭 사제에 그치지 않고, 한국 천주교 역사에 한 획을 그었을 만큼 업적이 뛰어나다는 데 의의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김대건 신부와 동기이자 한국의 2번째 신부라는 타이틀을 거머쥔 최양업 토마스 신부[5]는, 그 입지가 김대건 신부보다 업적은 많을지언정 인지도에서는 미비하다. 한국 천주교에서 김대건 신부를 의 증거자라고 부르고 최양업 신부를 의 증거자라고 부르는데, 최양업 신부가 죽은 김대건 신부의 몫까지 도맡아 하느라 결국 과로로 선종한 걸 보면, 땀의 증거자라는 말이 그냥 붙은 게 아니란 걸 알 수 있다.

2. 생애[편집]

2.1. 어린시절[편집]

임해군, 광해군 형제의 외조부이며 안경공 김영정의 증손인 해녕부원군 김희철의 동생 김희현의 9대손이다.

집안 대대로 천주교 집안인데, 그의 증조 할아버지때부터 천주교를 믿었고 증조할아버지, 큰할아버지, 아버지(1839년 기해박해)가 순교했다.

충청도 솔뫼[6](현 충청남도 당진시)에서 태어났으나 출생 몇 년 만에 가족이 천주교 박해를 피해 경기도 용인(지금의 미리내 성지 인근)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어린 나이에 신부 수업을 받으러 중국 마카오까지 가서 비밀리에 사제 수업을 받았다.[7][8] 1845년에 사제서품을 받고 1년 1개월 만에 순교했으니, 그가 밟아온 사제의 길을 세속적 시점에서 바라보면 매우 안습하다. 당시 조선의 시대상을 반영했다 하더라도 그에게는 사제로서의 삶뿐만이 아닌, 정신적으로라도 살아갈 수 있었던 일말의 기회조차 오지 않았던 것이다.

2.2. 순교[편집]

김대건은 용인(龍仁) 사람으로서 나이 15세에 달아나 광동(廣東)에 들어가서 양교(洋敎)를 배우고, 계묘년(1843년)에 현석문(玄錫文)등과 결탁하여 몰래 돌아와 도하(都下)에서 교주(敎主)가 되었다. 이 해 봄에 해서(海西)에 가서 고기잡이하는 당선(唐船)을 만나 광동에 있는 양한(洋漢)[9]에게 글을 부치려 하다가 그 지방 사람에게 잡혔는데, 처음에는 중국 사람이라 하였으나, 마침내 그 본말(本末)을 사실대로 고하였다.


헌종실록》13년.


[10]이 말하기를,
"김대건(金大建)의 일은 어떻게 처치할 것인가?"
하자, 권돈인이 말하기를,
"김대건의 일은 한 시각이라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사교(邪敎)에 의탁하여 인심을 속여 현혹하였으니, 그 한 짓을 밝혀 보면 오로지 의혹하여 현혹시키고 선동하여 어지럽히려는 계책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사술뿐만 아니라 그는 본래 조선인으로서 본국을 배반하여 다른 나라 지경을 범하였고, 스스로 사학(邪學)을 칭하였으며, 그가 말한 것은 마치 공동(恐動)하는 것이 있는 듯하니, 생각하면 모르는 사이에 뼈가 오싹하고 쓸개가 흔들립니다. 이를 안법(按法)하여 주벌(誅罰)하지 않으면 구실을 찾는 단서가 되기에 알맞고, 또 약함을 보이는 것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헌종실록》

천주교 조선교구 2대교구장으로서 김대건과 같이 상해에서 라파엘 호를 타고 충남 강경을 거쳐 입국한 페레올 주교는 김대건 신부에게 선교사들이 입국할 수 있는 길을 개척할 것을 지시했다. 김대건 신부는 중국어선들이 조기잡이를 위해 조선 해안에 온다는 사실을 알아내고,1846년 6월 5일, 선교사 입국로 개척을 위한 조선 지도와 편지들을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에게 보내려다 발각되었는데, 해주감영의 조사로 천주교 신부라는 사실이 밝혀져 체포된다. 이후 김대건 신부의 죄목은 '혹세무민'과 '청나라 밀입국' 혐의를 씌웠고 최종적으로는 천주교를 믿는다는 죄명으로 사형을 선고받는다.


1846년 프랑스 세실 함장은 1839년 기해박해 때에 프랑스 선교사들이 처형된 사건에 항의하는 서신을 전달했는데, 조선 정부는 김대건 신부를 통하여 프랑스와의 외교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김대건 신부는 라틴어, 중국어, 프랑스어사용(1842년 세실함장이 파리 외방전교회 마카오대표부 리브와 신부에게 부탁하여,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조선과 프랑스와의 외교시도에 통역으로 참여함. 당시 프랑스 선교사들은 조선과 프랑스가 외교를 한다면, 조선정부의 천주교 탄압으로 연락이 끊긴 조선 천주교회의 소식을 알 수 있고, 선교사 입국을 위한 해로개척도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음)이 가능한 엘리트였고 당시 조선 팔도 통틀어 이런 인재는 전무후무한 수준이었기에[11] 국가적으로도 상당히 쓸모있는 인재였던 것이다. 김대건 신부가 조정 관리들 앞에서 즉석에서 깃털펜을 만들어 가늘고 꼬부랑대는 서양 글자 필기체를 능숙하게 써 보이자, 조정 관리들이 마술 보듯 신기하게 보았다는 일화가 있다. 관리들 대부분은 철펜이나 깃털 펜의 존재 자체를 몰랐기 때문에, 서양인들은 으로 그 가늘고 꼬부랑거리는 서양 글자를 쓰는 능력자들의 집합체인 줄 알았다고.[12]

조정 내 몇몇 대신도 그 능력이 너무나도 아깝다고 하여, "천주교만 버리면 살려줄 뿐 아니라 벼슬도 내리고 후한 보상을 하겠다"면서 설득해 보았지만 그가 결사코 거부했다. 다만 배교는 거부해도 조정에서 프랑스와의 협상을 요청해 오면 그 일은 협조할 생각이었는데, 천주교 사제 신분으로 조선 정부를 대신하여 프랑스와 협상을 좋게 이끌어 내는데 성공만 한다면 천주교 공인까지는 몰라도 천주교의 이미지가 올라갈 건 확실하니 김대건 신부로서도 해 볼 만한 일이었던 셈.

그러나 프랑스 함대가 자신들의 입장이 담긴 종이 쪼가리만 휙 던져주고 사라져버려 이런 기대는 물거품이 되었다. 결국 조선 정부도 어쩔 수 없었는지 배교를 다시 권했으나 거부하자 결국 사형 판결이 내려져, 김대건 신부는 새남터 형장에서 다른 신자들처럼 참수를 당하며 순교하였다. 김대건 신부의 순교 이후에는 강화도 조약 체결 전까지 흥선 대원군이 다시 한 번 쇄국정책을 시행하게 된다.

2.3. 순교 후[편집]

1857년 교황 비오 9세가 가경자로 선포한 것을 시작으로, 1925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 때문에 그의 이름 전체를 다시 세례명으로 쓸 수 있다. 이 경우 본명인 '대건'과 세례명인 '안드레아'를 모두 합쳐 세례명으로 쓰기 때문에 홍길동이란 사람이 이 이름으로 세례성사를 받으면 교적홍길동 대건 안드레아라는 식으로 올라가게 된다. 이것은 본명을 갖고 있는 한국 출신 성인의 경우엔 모두 마찬가지.

파일:external/serony.com/Saint-Andrea-3.png

본래 사형을 받은 죄수는 통상 사흘 뒤에 연고자가 시신을 찾아 가는 것이 관례였으나, 김대건 신부의 경우는 참수된 자리에 시신을 파묻고 경비를 두어 지키게 했다. 당시 17세의 소년 이민식 빈첸시오는 파수군졸의 눈을 피해 김대건 신부 순교 40일이 지난 후에 시신을 한강 새남터 백사장에서 빼내는 데 성공. 그리고는 시신을 가슴에 안고 등에 지고, 험한 산길로만 밤에만 걸어서 닷새 만에 자신의 고향 선산이 있는 現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에 도착하여 무사히 안장시킬 수 있었는데. 바로 이곳이 오늘날의 미리내 성지이다.

참수된 후 신자들이 수습한 김대건 신부의 두개골으로 방부처리한 후 보존되어 있었기 때문에 한국 천주교에서는 이 두개골의 측정치를 이용하여 생전 모습을 3번에 걸쳐 복원하였는데, 흔히 알려진 초상화와 마찬가지로 갸름한 서양형 얼굴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김대건 신부의 유해는 미리내 성지에 안장되어 있으며, 경당 바로 밑에 묘소가 조성되어 있다. 김대건 신부의 아래 턱뼈는 미리내 성지 내의 조그만 성당인 성 요셉 성당 제단 아래에 모셔져 있으며, 치아는 절두산 순교기념관에 분리안치, 기타 여러 뼛조각들도 성유물로 전 세계에 산재되어 있다. 또한 가톨릭대학교/성신교정 대성당 및 이천시 어농성지 성당에도 김대건 신부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3. 트리비아[편집]

여담으로 전국에 있는 대건중학교, 대건고등학교들은 바로 김대건 신부의 이름을 따서 만든 학교이다. (대구광역시, 인천광역시, 논산시에 있다.) 당연히 천주교 계열 미션스쿨. 그 외에도 예수회 재단인 서강대학교에 김대건 신부의 이름을 딴 김대건관이 존재한다. 몇몇 미션스쿨에서는 김대건 신부를 수호성인으로 지정하는 경우도 있다.[13]



평화방송에서 김대건 신부의 삶을 조명한 특집 드라마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4. 관련 문서[편집]

[1]충청남도 당진시 우강면(솔뫼성지)[2] 증조부 김진후(金震厚), 조부 김택현(金澤鉉), 아버지 김제준(金濟俊)이 각각 경파(京派) 16세손, 17세손, 18세손 항렬자를 사용한다.[3]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사제서품을 받았기에, 한국 천주교 사제 인명록에 등재된 수품번호에서도 당연히 1번을 받았다.[4] 김대건 신부를 주보성인으로 모시는 '대건 안드레아'라는 세례명도 있다. 김대건 신부가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됐기 때문에 하상 바오로, 효주 아녜스, 효임 골롬바, 정혜 엘리사벳처럼 한국 성인의 이름을 세례명로 쓸 수 있다.[5] 최양업, 최방제는 모방 신부의 천거로 1836년 12월 김대건과 같이 사제 공부를 하러 마카오로 출발하여 1837년 6월 도착하여 제2차바티칸공의회 이전까지 가톨릭교회에서 사용한 말인 라틴어,신학,교리, 성가, 철학,프랑스어 등을 공부했다. 최양업 토마스, 최방제 프란치스코는 마카오에서 김대업과 함께 같이 사제 공부를 하다가 최방제가 위열병에 걸려 1837년 11월 27일 밤에 종부성사를 받아 유명을 달리하고(당시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의 기록), 최양업은 사제가 되기에는 나이가 부족하단 이유로 중국에 남겨졌다.[6] 김대건 신부 생가 일원은 현재 성지로 조성돼 있으며,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을 찾았을 때 이 성지를 순례하고 '젊은이와의 대화' 행사를 진행했다.[7] 김대건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개명한 것이다.[8] 마카오에서 아편 문제로 인해 대내 정세가 혼란해지자, 필리핀으로 피신해 사제수업을 이어나가기도 했다. 현재 필리핀 마닐라 인근 롤롬보이에 김대건 신부를 기념하는 성지와 성당이 건립돼 있다.[9] 중국 광동성 아오먼 또는 마카오에 위치했던(1847년 홍콩으로 이전)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을 말함.[10] 헌종을 말한다.[11] 조선의 대외관계가 매우 폐쇄적이었기에 당시에 역관들이 할 수 있었던 외국어라고는 중국어, 일본어, 만주어, 몽골어 정도였고 라틴어, 프랑스어는 접해본 이도 없었다.[12] 당시엔 훌륭한 서예 능력은 곧 인신수양의 결과이자 선비로서의 자질이요 업무에 필요한 핵심 능력이었으니, 그 가늘고 조그만 서양 글자를 붓으로 쓴다고 생각했다면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13] 오천중학교에 김대건의 이름을 딴 성 김대건관이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