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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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寄生(생물학)2. 妓生
2.1. 개요2.2. 기생의 유래2.3. 기생의 기본 신조2.4. 기생이 되는 법2.5. 기생의 구분2.6. 기생과 기방에서의 예의2.7. 구한말, 근대의 기생2.8. 기타2.9. 창작물 속의 기생2.10. 관련 항목
3. 기숙사 학생의 준말

1. 寄生(생물학)[편집]

한 생물이 다른 생물의 영양분을 빼앗으면서 살아가는 관계를 뜻하는 말. 여기서 기생당하는 생물을 숙주라 한다.

어떤 생물이 다른 종류의 생물체 속이나 표면에 살고 있으면서, 그 생물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생활하면서 다소나마 그 생물에게 해(害)를 끼치는 경우를 기생이라 한다.[1] 서로 돕고 사는건 공생이라 한다.

기생 하면 흔히 기생충, 그 중에서도 선충류 등을 우선 생각하지만 사실 기생계의 본좌는 절지동물 중에서도 곤충이다. 파리목이나 목류 곤충 가운데 기생곤충이 특히 많으며 한 곤충학자는 곤충에 기생하는 곤충에 기생하는 곤충에 기생하는 곤충에 기생하는 곤충, 즉 4단 기생충을 발견한 바 있다. 기생충에기생하는기생충에기생하는기생충에기생하는기생충

물론 곤충이나 동물뿐만 아니라 기생 식물도 존재한다. 겨우살이가 대표적이고 라플레시아속 식물도 기생 식물의 대표자이다. 가장 큰 기생 식물로 오스트레일리아크리스마스 트리가 있는데 다른 식물들이 전부 말라가는 크리스마스에(알다시피 오스트레일리아의 크리스마스는 한여름이다) 혼자 꽃을 피우기 때문이다. 광범위한 지역에 기생 뿌리를 박는데 케이블에까지 손대는 바람에 통신 장애를 일으키는 식물이기도 하다. 민폐식물류 甲

반대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 생물에게 득(得)을 주거나 적어도 해를 끼치지는 않는다면 공생이라고 한다. 특정생물들의 소화기관에 살고 있는 미생물이 이에 해당된다.

그러나, 기생과 공생이 생각처럼 명확하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종의 경우(A라고 칭하자) 분명히 그 옆에 있으면 해만 되는 B라는 종과 항상 붙어 사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B종이 주는 피해가 다른 종들이 주는 피해보다 적기 때문에 차악으로써 B와 함께 사는 것이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며, 때문에 공생과 기생 개념은 모호함을 내포하고 있다.

2. 妓生[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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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 말의 기생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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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당시 수원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김향화)

관기, 민기, 약방기생(원래는 의녀), 상방기생 등 예기의 총칭. 기녀라고도 한다. 일패, 이패, 삼패 기생을 통틀어 '덥추'라 했다.

2.1. 개요[편집]

몸을 파는 창녀로 잘못 알려져있는데, 이것은 매우 큰 오해이다. 매춘을 업으로 삼는 부류는 기생 외에도 따로 있었을 뿐더러 주로 매춘을 하는 쪽으로 전락한 기생도 있긴 있었으나 이들은 기생 중에서도 하급인 삼패기생이었다. 영어로 번역할 시에도 창녀와 하급기생은 'prostitute'로 쓰지만 풍류를 읊는 고급기생은 'courtesan'이로 구분해서 번역한다. 멀쩡히 결혼해 남편이 있는 경우도 많았다.

기생이 있던 시대에도 예술이 중점이던 기생과 매춘이 업무이던 유녀를 구분했다. 성종실록에도 유녀의 음란한 짓을 금지한다는 기록이 있다. 성종실록 20권, 성종 3년 7월 10일 을사 네 번째 기사 출처

고급 기생들은 각자 집과 상당한 재산을 가지고 있었으며 결혼도 했다. 일패의 경우 궁궐에도 출입했다. 양반들은 자신의 후원에 따로 부르거나 교외로 나가서 춤과 음악을 즐기거나 학문이나 시, 글, 그림 등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고 하는데, 양반들조차 어지간한 명망이 있는게 아니면 일패기생을 쉽게 부를 수 없었다 한다. 주된 고객층은 상류층이었기 때문에 춤, 노래, 시조, 화예, 학문 등 수많은 예를 겸해야 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이를 관리하는 '기생청'이 존재했을 정도이다.

삼국시대에도 존재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틀이 잡힌 것은 고려조선 시대인데, 각종 정치 제도와 사교적인 자리에 예인이 동원되다 보니 국가 차원에서 종합 예술인을 양성했다고 한다. 정부에서 재능, 성격, 인격의 고매함까지 육성하는 엄격한 교육을 관장했다. 출처

일단 기예가 뛰어난 기생이라면 신분이 천민이라도 지식인으로 인정받는다. 애초에 높으신 분들을 매일같이 만나야 하는데 교양없는 천것들을 쓸리가 없다. 아무리 삼패기생이어도 일단 낮은 수준의 기예나마 보장되어 있었으며, 이들조차 아무나 만날 수 없었다. 가장 낮은 삼패라도 만나려면 돈이 꽤 필요했다.

조선시대의 창녀는 들병이, 화랑유녀, 작부 등으로 분화되어 있다. 들병이는 들병에 술을 담아 떠돌며 파는 이들이었는데 매음도 했다. 화랑유녀는 절 주변에서 매춘을 하는 여자였다. 작부는 술집에서 술과 몸을 파는 이들을 가리켰다. 기생이 창녀인 것이 아니라 창녀는 따로 있었다. 사당패도 떠돌아다니며 공연하면서 매춘을 겸했다.

원래는 이처럼 예술인 취급을 받았던 이들이 조선 후기로 갈수록 사회기강이 무너지자 매춘 유무에 따라 은근짜와 더벅머리로 분화되고,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에 의해 매춘부 취급을 받게 된다. 현재 기생=창녀라는 인식은 이 시기와 현재 사극들의 영향이다.

이에 조선시대에 '선비문학'을 제외한 예능은 전부 천한 것으로 치부했다는 것과 결합하여 오해가 더 심해진 경향도 있다. 이는 기생 외의 예술에 있어서도 그렇다. 이례로 그 당시 사군자, 풍경화를 제외한 그림들, 대표적으로 민속화 등은 ''을 친다라고까지 표현했다.

지금까지 전승되는 전통예술(춤이나 음악 등)은 상당수가 기생들에 의해 전승된 것이다. 즉, 이들은 전통 예술을 전승하고 가르치는 역할도 겸했다.

고려가요가 전승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참조

기생 중 유명한 기생으로는 황진이, 논개, 춘향[2], 이매창 추월(이춘풍전), 홍낭이 존재한다. 참고로 어우동은 기생이 아니다.

기방에 우르르 몰려살며 매춘하거나 정말 운 좋게 첩으로 들어가는 것은 삼패기생인 더벅머리에 해당하는 모습인데, 커다란 방에 여러 무리의 손님들이 좌정하고, 여기에 한 명의 기생이 들어갔다고 한다. 각자 기생을 끼고 노는 것은 불가능했다. 돈 많고 높으신 분들은 수준 높은 기생을 자기 집 후원에 불렀으니 그런 곳에 갈 이유가 없다. 그러니 더벅머리(삼패기생)들이 상대한 손님은 주로 높아봤자 양반 가문의 한량이나 군관, 무뢰배, 혹은 돈 꽤나 있는 중인 계층이다.

조선시대에는 사신이나 북방 관리에게 기생을 두어 접대하게 하는 것이 암묵의 룰이었다. '반계수록'에는 “오늘날 관아에서 창기를 길러 사객(使客)이 오면 얼굴을 단장하고 옷차림을 화사하게 하여 그를 접대하게 하는데, 술을 따라 권하고 악곡을 연주하여 흥을 돋우니 이름하여 방기(房妓)라 한다.”라며 관아에서 접대를 위한 창기를 양성했음을 시사했다.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서 과도하게 기생의 시침을 요구했는데, 이에 반발한 기생들은 자살하여 항거했다고 한다. 출처 벼슬아치에게 딸린 방기의 생활은 간혹 기생으로서 큰 연회같은 데에 동원된다는 것 빼고는 일반 어염집 아낙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고 한다. 자기가 모시는 군관에게 지급되는 양료로 살림을 하며 지냈다. 출처

조선시대의 춘화를 보면 창기로 추측되는 이들을 다수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모두 창기라고 할 수 없는게, 상술했다시피 조선시대에는 창녀로 분류되는 이들이 따로 있었다.

일부 선비는 도저히 수준이 맞는 사람이 없다며 기생과 학문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등 지적 교류를 나눴다고 한다. 실제로 기생들은 지적 수준이 매우 높았다. 지역에 따라 용비어천가유교 경전 등을 읊었고, 기생문학이 따로 남아있을 만큼 그녀들이 시를 쓰는 것도 흔했다.[3] 이는 당연한 것이, 이패기생이나 삼패기생 같은 중하급이 아닌 이상 상대하는 손님들은 모두 상당한 학식을 지닌 선비들이며, 이들은 놀 때도 시를 읊고 사군자를 그리거나 학문과 나랏일에 대해 토의하는 것이 흔했다. 그러니 기생도 당연히 이에 맞춰 많은 공부를 해야 했다. 안동의 기녀는 대학을 암송하고, 관동의 기녀는 관동별곡을 읊고, 함흥에서는 출사표를, 영흥에서는 용비어천가를 읊었다. 북방이나 제주도에서는 말을 타며 기예를 뽐냈다 한다.

조선은 속옷의 옷감이나 장신구, 옷 색까지 제재할만큼 사치 금지법이 엄격했는데, 기생은 이에 대해 몇 안되는 예외대상이었다. 그렇기에 이들이 입는 양식의 옷과 화장은 금새 유행되었다. 하지만 일반인들은 사치금지법에서 자유롭지 못해서 그대로 퍼지지는 못했으며, 양반가의 경우 그래도 차이를 두겠다며 흰색 분을 사용하는 기생과 달리 복숭아색 분을 사용했다.

흥청망청이란 말은 기생에서 유래하는데 연산군 집권시 '기생양성소'가 궁궐내로 들어가면서 기생은 '운평'이라고 일컬어졌으며, 운평 중에서 예능이 밝고 색기가 뛰어나면 그 운평을 흥청이라고 불렀다. 왕의 마음에 들어 잠자리를 같이 하게 되면 '천과흥청'이라는 직급이 된다. 그렇지 않은 흥청은 '지과흥청'이라고 일컬어졌다. 이 흥청의 뜻은 '맑음을 일으킨다'라는 뜻으로 '마음의 맑음을 유지한다'라는 명목하에 연산군은 말 그대로 흥청망청(…) 놀았다. 망청은 후렴구로 흥청의 흥(興) 자와 반대되는 의미의 망(亡) 자를 써서 연산군을 비웃는 의미다. 다만 운평을 반드시 기생들 중에서만 뽑은 것만은 아니고, 기생 출신의 첩들을 우선적으로 선발했다가, 나중에는 그냥 얼굴이 예쁘고 춤을 찰 추는 민간인 여자들을 마구잡이로 데려갔다. 나중에는 연산군이 명한 2천명이란 수를 채우기 어려워 얼굴이 추해도 춤과 노래만 되면 죄다 끌고 갔다(…).[4]

이후 반정을 일으켜 집권한 중종은 사회 풍기에 관해서 여러 가지 규제를 하는 가운데 의녀, 창기의 연회 참여를 금지시킨 일이 있다. 원래 의녀는 부인의 진료를 위해 뽑힌 일종의 의료직이었으나, 연산군 대에 의녀도 연회에 참여하도록 하면서 기생과 겸업하게 되었다. 1510년 중종은 크고 작고 간에 연회를 할 때 의녀나 창기를 부르는 것을 엄금하도록 사헌부에 명령하고 절목을 만들도록 하여 위반자는 물론, 의녀나 창기도 중벌로 다스리도록 하였다. 이는 연산군이 뿌린 악습을 거둬내려고 한 중종의 노력이자, 기생에 대한 민중의 민심을 다잡기 위함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의녀의 연회 참여는 이어져서 결국 '약방기생'이 의녀의 별칭이 되기까지 이르렀다.

일패기생 등 고급 기생들의 능력과 대우가 높은 수준이었다고는 하나, 전근대 사회이자 여성에게 억압적이었던 가부장제 유교사회인 만큼 한계도 있었다. 지체 높은 남성을 접대하는 여성으로서 어느 정도 대우를 받고 재산을 모을 수는 있었으나, 그런 접대대상이라는 것에서 비롯된 멸시가 없던 것도 아니고, 상류층을 대하지만 지체 높은 여성들 같이 정식으로 상류사회에 속하지는 못했다. 결국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전세계에서 오랜 역사동안 존재해온 남성을 위해 준비되고 착취당하는 여성집단이라는 면이 없지 않았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물론 기생이든 매춘 여성이든 이를 미화하거나 비하하는 것 자체가 크게 왜곡된 사고방식이라는 점은 당연한 일이며 이를 이용하여 성매매를 정당화하는 논리가 합당하지도 않다.

어쨌건 조선시대의 기생은 꽤나 알만한것도 아는 나름의 지식인이었기에 조선시대엔 기방오불이라고 기방에서 해야하지 말아야 할 다섯가지가 있었다.[5][6]

2.2. 기생의 유래[편집]

한반도에서의 유래는 삼국시대 때로 올라간다. 백제에서는 “백제 유기장(柳器匠)의 후예인 양수척(楊水尺)이 수초(水草)를 따라 유랑하매, 고려이의민(李義旼)이 남자는 노(奴)를 삼고, 여자는 기적(妓籍)을 만들어 기(妓)를 만드니, 이것이 기생의 시초”라 생각된다. 고구려에서는 정복 활동을 하고 끌고온 여자들이 '유녀'라는 이름으로 이러한 역할을 했다고 하며, 백제에서는 꽃쟁취라 했다고 한다. 신라에서도 천관녀 등을 보아 기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 이전에도 이러한 계층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고 한다. 이후 고려에서도 기생에 대한 기록이 등장한다.

2.3. 기생의 기본 신조[편집]

기생의 기본 신조는 매창불매음(賣唱不賣淫). 즉, '노래를 팔지언정 몸을 팔지는 말라' 였다고 한다. 기생은 기본적으로 매춘을 하지 않는것이 원칙이었으며, 춤, 노래, 기악, 학문, 그림, 글, 용모, 화술 등 모든것에 능통한 종합 예술인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외모보다 빠른 눈치와 화술이 더 중요했다고 한다. 불려간 연회에서 단번에 주최자를 가려내고 참석자들의 관계를 추측해야 했으니 당연하다.천민으로 분류된 것은 매음을 하는 창기(娼妓)였다. 일반 기생은 본인들이 상당한 지식인이라 정조관념과 매창불매음에 대한 신조가 강했다. 게다가 결혼을 할 수 있었기에 남편이 있는 경우도 흔해서 매음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보통 사극 등에서 비춰지는 것은 창기들의 모습이다[7]. 또한 일제강점기에 왜곡된 인식이 이어져 기생보다는 창녀의 유곽문화에 가깝게 묘사된다. 원래 기생은 예술가로서 궁이나 관아의 잔치에 동원되는 이들이었기 때문에 절대 매춘을 하면 안되는 계층이었다.

2.4. 기생이 되는 법[편집]

기생 학교를 ‘교방(敎坊)’이라 한다. 교방은 고려 시대의 기록에서도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8] 체계적인 기록보다는 구전으로 전승되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명창 박록주의 경우,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스승을 만나 배웠다고 한다.
일제강점기부터는 권번에 소속되어야 했다.

조선 전기의 서울 기생들은 나흘에 한 번 관습도감에 나가 악기와 춤을 배웠다. 추운 11~1월과 더운 5~7월은 쉰데다 나흘에 한 번 꼴이었기에 나머지 시간은 연습에 할애하거나 생업에 종사했다. 이후 성종 대에 관습도감을 다른 관서와 통합하여 장악원이 되었는데, 이 때에도 체제는 관습도감과 유사할 것으로 추측된다고 한다. 가곡과 악기를 배울 땐 스승을 정해 그 스승에게 배웠는데, 부지런하게 배우지 않으면 스승도 함께 벌을 받았다. 또한 관습도감 제조에게기예 시험을 봤는데, 능하지 못하면 벌주고, 심하게 못하면 돌려보냈다고 한다. 재색이 없어도 돌려보내 일정 이상의 수준을 유지했다. 주요 지방은 교방을 설치하여 교습했는데, 기생이 많으면 거주를 위해 기생청(妓生廳) 혹은 기생방(妓生房)이라는 별도의 거주 공간이 있었다. 교습 내용은 전해지지 않으나 서울과 비슷했을 것이라 여겨진다고 한다. 관습도감에서는 가곡과 당비파, 현금, 거문고, 가야금, 장구, 아쟁, 향비파, 해금, 대금, 소금, 필률 등 다양한 기악을 익혔다고 한다. 악기는 능하지 못한 자는 한 가지만을, 능한 자는 여러 악기를 배웠다.출처

애초에 기생이 체계화된 이유가 에서 체계적으로 종합 예술인을 양성하는 것이었던지라, 기생이 되는 일은 어지간한 사대부들이 관직에 오르는 것과 별반 다를 것 없는 무지막지한 난이도였다. 당장 갈고닦는 것만 해도 온갖 춤과 노래, 급에 따라 판소리나 잡가[9], 민요, 온갖 기악, 화술, 용모, 각종 재주뿐만 아니라 선비들이 공부하는 것들을 똑같이 공부해야 했다.그들과 말이 통하려면 당연하다 서예, 그림, 시, 글짓기는 물론이고 옷을 짓고 자수를 놓는 것은 당대 여인으로서 기본이었다. 심지어 지역에 따라 말을 타며 재주도 부려야 했다. 저 모든 것을 잘해야 하는게 기생이었다. 이렇게 해도 일정 수준을 만족하지 못하면 신세가 천양지차로 나뉘고 허락되는 예술 종류마저 제한되었다. 유일한 이점은 엄격한 복식금제의 유일한 예외 대상이라는 점이다.[10] 하나만 제대로 하는 것도 어려운데, 혼자 만능 엔터테이너이어야 했던 이들이다.

'화초머리 올리기'라고 하여 일종의 성인식이 있었다. 교육을 받은 기생이 '첫 손님'을 받은 뒤 화초머리라는 가체(加髢, 가발)[11]를 머리에 얹는 것. 이는 일반 민가의 혼인과도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화초머리를 올려줄 사람이 가체를 얹어 기혼자의 머리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이 때문에 첫 손님의 자격 또한 상당히 중요했다. 상당히 명망 있고 직위도 높은 인물이어야 했으며, 비용도 많이 필요했다고 한다. 화초를 올려주는 사람이 기생의 집과 가체 등의 장신구, 세간살이 등을 모조리 대줬는데, 이 사람이 가난하여 이를 제대로 대주지 못하면 그 기생의 앞날도 그리 밝지는 않았다고 한다. 후기의 여러 증언이나 기록에 따르면 이 때에 첫날밤을 치르는 경우도, 치르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니 화초 올려주는 사람의 성향에 따라 달랐던 모양이다.바로 위에서 매창불매음이라고 했었던것같은데.. 기생이 원래 매춘이 금지되었는데 후기로 갈수록 매춘 유무에 따라 계급이 분화되었다는 점과 삼패가 아닌 이상 기생도 평범하게 결혼할 수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원래는 화초를 올려준다 하여 첫날밤을 치르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한국일보1974년 1월 16일 자에 투고된 명창 박록주의「나의 이력서」기사에도 '낭군을 맞지 않고 머리만 얹는 풍습'이라 언급되었다. 따라서 얹어주는 사람이 유명하거나 부자여야 했으며, 풍습으로는 세간살이를 모두 대주고, 나중에 유명해지면 보답하는 식이었다고 한다. 박록주는 충청도 부자 변 씨가 화초머리를 올려주었는데, 그가 댕기를 풀자 동료와 선배들이 머리를 빗기고 쪽 쪄줬고, 하룻밤도 같이하지 않은 변 씨는 풍습에 따라 세간살이 등을 모두 대주었다고 언급했다.

<모던일본·조선판> 쇼와14년(1939년) 판에는 평양기생학교의 3학년 시간표가 실렸다. 일본식 공창제가 도입된 일제강점기였던지라 조선이나 고려의 체계와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유념하자. 보러가기

2.5. 기생의 구분[편집]

기강이 무너져 기생의 계층이 생기고 이에 따라 매춘 유무가 달라졌던 조선 후기의 기생은 일패기생(기생), 이패기생(은근짜/慇懃-, 隱君子), 삼패기생(더벅머리/搭仰謀利)로 나뉘는데, 등급에 따라 부를 수 있는 노래 등이 제한되었으며, 취급 역시 차별이 있었다. 이를 구분하는 기준은 본인의 실력과 매춘 유무. 기생은 예술과 학문의 수준이 떨어질수록, 기생으로서의 급이 낮을수록 어쩔 수 없이 매춘을 해야만 하는 구조이기도 했다. 그럴 경우에 같은 기생, 특히 일패기생이나 정조를 지키는 은근짜들도 곱게 보지 않았다고 한다. 같이 싸잡아 기생으로 불리는 것을 싫어했을 정도라고. 이전에는 국가에서 기생을 양성했기에 수청을 들더라도 기생과 창녀의 구분이 확실했다.

원래 조선은 성리학으로 인해 매춘이 금지된 국가였고, 관리의 수청을 들었던 관기의 경우조차 제도권 내에서나 허용되었지만 심하면 지탄받았다. 소위 창녀라 할법한 부류는 천민 여종이나 정조를 잃어 오갈 데 없는 여인이었다고 한다. 매춘 행위가 발각되면 노비가 되었으며, 양반조차 수청이 아닌 강간은 금지되었으며, 상중이나 국가 위급 상황에 기생과 어울리거나 그에 너무 빠지면 탄핵당했다고 한다. 출처 그러나 기록이 남아있는 명기들의 사례를 보면 마냥 문란하고 사회적 인식이 나쁜 계층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랬다면 그 콧대높은 양반들이 어울렸다는 기록을 남겼겠는가. 애초에 기생이 천한 매춘부로 동일시되기 시작한 건 구한말 일제강점기 때다.

  • 일패(一牌/기생)는 주로 최상류층과의 교분이 깊고 풍부한 교양을 자랑했으며 가장 상급의 춤, 노래 등의 예능을 익혔다. 궁중에서 국가 행사나 연회를 위해 이들을 동원했다. 이들은 가무나 창, 기예, 시, 서, 화, 학문 등 어느것 하나 빠지지 않고 다 잘하는 만능 엔터테이너여야만 했다. 매창불매음을 잘 지키며 정조관념이 투철했다고 한다. 궁궐에 출입하던 이들인지라 기생재상(妓生宰相)이라 불리기도 했던 만큼 어지간한 명망과 수준이 안되면 금을 준대도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한다. 아예 옥관자를 달았을 정도. 상것들은 이들에게 감히 말조차 걸지 못했다 한다. 원래 기생들은 각자의 집이 따로 있었다. 양반의 집에 따로 불려가 기예를 선보이거나 약방기생[12]이나 상방기생으로서 그 소임을 다했다. 궁중을 출입하며 왕이나 그에 못지않은 재상, 혹은 높은 왕족이나 양반들을 상대했다. 이들은 굉장히 지조있는 예술가이자 지식인이었다.약방기생이나 상방기생 빼고 이들은 그냥 간호사나 의상 디자이너가 궁궐에서 이패기생 내지는 삼패기생 노릇한 것과 다름없다 실력은 삼패 원래는 관기도 일패기생으로 분류했으나 후기로 갈수록 기강이 무너져 그 관기들이 매춘을 하게 되면서 은근짜나 더벅머리 수준으로 전락했다. 원래 관기는 관리를 상대하며 매춘을 하는게 아니라 궁이나 관가의 잔치에서 기예를 선보이는 이들이었다.

    • 약방기생상방기생대한제국 시절에 존재했다고도 하지만 연산군 때 시작되었다고 한다. 중종 때 수차례 이들을 원래 하던 일만 시키려 했으나 한 번 물이 흐려지자 돌이킬 수 없었다고. 혜민서내의원 의녀 출신인 약방기생과 공조나 상의원 침선비 출신인 상방기생으로 나뉘는데, 내의원 출신 약방기생은 궁초(宮綃)댕기를, 혜민서 출신 약방기생은 통견(通絹)댕기를, 상방기생은 갑사(甲紗)댕기를 드렸다. 원래 전문적으로 오랫동안 기예를 배운 이들이 아닌데다 진짜 기생들처럼 오랫동안 온갖 학문과 재주를 익힌 것도 아니기에 진짜 예술가적 면모로서는 기생이라 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대한제국 시절에는 이 약방기생과 상방기생들이 한성기생조합소, 다동기생조합, 광교기생조합 등을 거치며 일패기생으로 활동했다고 한다.부족한 실력을 궁궐물로 커버한다 의사나 간호사로서 환자를 치료하거나 옷 만들고 자수놓던 이들에게 예술가처럼 춤 추고 노래하라고 하면 과연 얼마나 잘 하겠는가.그냥 궁에서 삼패기생 노릇한 것과 다름없잖아 사실상 그냥 궁궐 연회에 같이 동원되니 싸잡아 일패라 분류된 것이라 보면 된다.

  • 이패(二牌/은근짜)는 일패와 같이 예능을 하기도 하지만 그보다 모자랐다. 애초에 할 수 있는 기예가 일패보다 급이 낮은 것으로 정해져 있었다. 겉으로는 기생의 품위를 유지하면서 뒤에서 몰래 매음하는 부류였다. 주로 남아있는 기생에 대한 기록 중 고급 기생이라 보일만한 것들은 대부분 이들에 대한 것이다. 은근히 매춘을 한다고 은근짜(慇懃-/隱君子)라는 이름이 붙었다. 하지만 은근짜라 하여 무조건 몰래 매춘을 했던 것은 아니고, 개개인의 신념에 따라 달랐다. 후대에 태어났다면 은근짜였을 황진이의 예를 보면 더벅머리에 비해 굉장히 취급이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13]. 자기 집이 따로 있기도 했다. 주로 일반 양반과 각 관아의 관리를 상대했다. 기본적으로 이들 역시 예술가였지만, 자신의 의지와 환경에 의해 좌우된 것으로 보인다. 아무래도 고객이 높은 신분인데다 이들 자체의 수준도 높기때문에 무턱대도 천하게 취급하지는 못했다. 돈 많은 양반들이 경관 좋은 교외나 자기 집 후원에 불러서 기예를 즐기거나 지적 교류를 했다.

  • 삼패(三牌/더벅머리)는 기생 중 가장 하급으로, '더벅머리(搭仰謀利)'라 불리우기도 했으며 술자리에서 낮은 수준의 잡가나 민요만을 부르며 상위 등급에 비해 대놓고 매춘을 하였다고 한다. 매춘 자체가 업이었다. 기생처럼 가무는 할 수 없었다. 즉, 보통 여겨지는 기생, 즉 창기(娼妓)가 바로 이들이다. 하지만 더벅머리도 조선시대 서민이 건드릴 정도는 아니라서 보통 백성도 돈이 조금이라도 있어야지 삼패라도 만날 수 있었다. 서민을 상대로 매춘하던 여인들은 따로 있었다. 들병이[14], 각 마을을 오가는 사당패, 절 주변에서 몸을 파는 화랑유녀(花娘遊女), 술과 함께 몸을 파는 색주가의 작부[15] 등이 있었다.참조 참조 지조 높은 양반 아닌 일반인을 상대했다. 기생에 대한 기록의 상당수가 이들에 대한 기록이며, 사극 등의 매체에 등장하는 기생 역시 더벅머리에 가깝다. 원래는 이들의 매춘 등에 대한 제재가 확실하였으나, 후기로 갈수록 기강이 해이해져 문란한 기록이 나타나는데, 기방에서 지낸 경우에는 어려서부터 성적 경험이나 수치심을 강제로 많이 당했다는 후기의 기록이 있다. 원래 기방에 출입하는 이들은 고상한 양반이 아니라 거리의 한량이나 왈자패, 하급 관리같은 다소 신분이 낮은데 돈을 꽤 가지고 있는 자들이었다. 이런 거친 남자들로 구성된 여러 무리의 손님들이 있는 방에 1명의 기생이 들어갔는데, 어린 기생의 경우 강제로 옷을 벗겨 희롱하거나 추행했다고 한다. 이것은 기생이 기방에 빨리 순응하게 만들기 위함이었다고 하는데, 기생서방[16]들이 손님들에게 일부러 요구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역시 경우에 따라 달랐던 것으로 보이는데, 줄곧 정절을 지키던 기생이 한 양반에 의해 강제로 겁탈당하자 매우 수치스러워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또 어떤 경우는 관아에 보내져 지방관들을 상대하기도 했으니, 결국 케바케였던 셈. 애초에 매춘을 하는 기생은 예술인이라기보단 천민으로 봤다. 천민으로 분류된 이들 중 창기(娼妓)가 있을 정도이니. 사극에서 주로 나오는 기방에서 남자와 희롱하는 그런 부류가 이들이고, 꽤 높은 수준으로 나오는 기생은 대부분 은근짜다. 진짜 기생(일패기생)은 잘 등장하지 않는다. 아무리 몸 파는 천한 하급 기생이라 해도 일반인이 건들지는 못했다. 보통 매체 등에서 접해 알고 있는 화려한 기방에 사는 기생들이 바로 이들이다. 아무리 더벅머리라 해도 돈이 많아야 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만일 이들이 기첩으로 들어간다면 그 앞날은…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보통 기첩이라 천시받는 이들이 보통 더벅머리 출신이다. 매춘 자체가 직업이라 굉장히 천시되었음에도 후에는 정계 유력자의 후원을 받아 신창조합(新彰組合)을 만들어 스스로를 기생이라 했다고 한다. 출처


이들 사이에서 은근한 신경전도 있었는지 조선 말~일제강점기 초에 서양에서 양산[17]이 들어오자 패에 관계없이 모두 붉은색 양산만을 사용해 서로의 패가 구분이 가지 않는다며 일패는 진홍색, 이패는 연홍색, 삼패는 그 외의 색을 쓰기로 정하기도 했다. 좁다란 골목길에 양산 셋이 나란히 걸어갑니다. 하나는 진홍색 하나는 연홍색 다른 하나는 다른 색이니 오호라 일패, 이패, 삼패로구나

어린 기생은 동기(童妓), 서울 기생은 경기(京妓), 지방 기생은 지방기 혹은 향기(鄕妓)라 했으며, 기생집의 우두머리 기생은 행수기생이라 했다. 나이에 따라 1살 위면 언니, 2살 위면 형님, 5살 위면 아주머니라 불렀다. 기생끼리도 계급과 나이에 따라 상하관계가 엄격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의로운 일을 한 기생을 의기(義妓)라 했는데, 독립운동을 할 때에도 기생들이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의기 현계옥의 사례 이외에도 노래를 잘하면 가기(歌妓)나 성기(聲妓), 춤을 잘 추면 무기(舞妓), 가야금을 잘 타면 금기(琴妓), 예술이 뛰어나면 예기(藝妓), 시를 잘 지으면 시기(詩妓), 의로운 행위를 한 기생은 의기(義妓), 절개를 지킨 기생은 절기(節妓), 수청을 드는 기생은 수청기(守廳妓), 방직을 하면 방기(房妓)[18], 성적 접대를 하면 창기(娼妓)라 하였다.출처

간혹 가능성이 보이는 젊은 선비를 지원해주기도 했다고 한다.

소속에 따라 관기, 민기, 사기, 가기 등으로 나뉘었다. 기본적으로 조선은 관아에 소속되는 체제였다. 관기는 관아에 소속되었고, 민기, 사기, 가기는 모두 민간의 기생이었다. 관기는 주로 관아의 관리를 상대했는데,[19] 집안이 몰락하여 관기가 된 경우는 주로 바느질 등의 잡일을 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와 사극의 영향으로 기생들이 모여있는 공창이나 집창촌이 있었다고 잘못 아는 경우가 많으나, 이는 일본의 요시와라에 가까운 체계다. 기생들은 관기인 경우는 관아에, 이외에는 자기 집이나 기방에 있었다. 게다가 원래 기강이 무너지기 전의 기생은 매춘이 금지된 이들이었다. 관아[20]나 기방에서 매춘을 하는 경우는 창기(후기의 삼패기생)라 하여 천하게 취급받았다. 신분도 아예 천민이었다. 영업 체계도 달라서 자기 집에 머물며 양반들의 후원이나 교외에 불려가 대화를 하거나 기예를 선보인 고급 기생과 달리, 기방이나 관아에서 의무적으로 상대하는 식이었다.

창호지나 비단실을 질에 넣어 피임했다고 한다. 페미돔같은 것을 원했겠지만 저게 별 효과가 있을 리가(…). 오히려 제대로 소독하지 않으면 다른 균에 감염될 수도 있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피임을 하려고 노력하기는 했다. 일반적인 피임법은 배란주기관찰법과 돼지 창자로 만든 콘돔같은 물건이었다.[21]

2.6. 기생과 기방에서의 예의[편집]

기생을 대할 때의 예의와 기방에서의 예의는 무척 까다로웠다. 이를 지키지 않아 기방에서 몰매를 맞아도 뭐라 못했을 정도. '계압만록'에 따르면 기생들과 어울릴 때 실언을 하면 그 실언한 사람을 멍석말이하여 거꾸로 세우는데, 간혹 죽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보통 양반들은 기방에 가지 않았으니, 이는 삼패기생들과 한량, 왈자패에게나 해당하는 얘기다.

  • 기방 5불

    • 월악붕(月岳崩) 맹세 말라. = 기생의 말을 믿지 말라. 여러 사람에게 웃음을 파는 기생은,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라면 어떤 거짓말도 할 수 있기 때문. 이것이 유래된 이야기가 있다.[요약]

    • 기생에게 꽃을 가져가지 말라. = 기생의 별칭은 해어화(解語花), 즉, 말하는 꽃이다. 꽃이 만발한 기방에 꽃을 가져가는 것은 기생을 기만하는 행위이다.

    • 처첩을 자랑 말라. = 기생은 특성상 정상적인 혼인 생활을 할 수 없는 몸이다. 그런 기생에게 자신의 아내를 자랑하는 것은 대단한 모욕일 수 밖에 없다. 기방에 안 놀러가고 아내를 섬길 생각은 안 했나보다

    • 문자를 쓰지 말라. = 기생들은 예술과 화술 등을 갈고닦은 만큼 공부도 많이 했기 때문에, 어지간한 사대부 못지않은 학식을 지니고 있었다. 즉, 학식이 정말 뛰어나지 않은 이상 망신당하기 십상이었다.

    • 효자, 효부 났다는 정문(貞門) 얘기를 하지 말라. = 위의 처첩 자랑과 비슷한 이유. 자식을 낳아도 사생아가 될 확률이 높고, 기생 본인도 그런 식으로 태어난 경우가 적지 않은데다 그렇지 않더라도 기생이란 신분은 부모에게 좋은 자식 취급을 받기란 어렵기 때문이다. 기생이랑 놀아나는 부모는 좋은 부모인지는 생각 안 했나보다


이외에도 일제강점기(1920년대)의 기록에 의하면 기생집 들어가는 격식, 대선 책망[23]하는 격식, 처음 나온 기생 말 묻는 격식, 기생 양주(兩主)[24] 욕보이는 격식 등 다양하고 까다로운 여러 격식이 있었다고 한다. 손님들은 말을 꺼낼 때에도 '좌중에 통할 말이 있소'라고 조심스레 입을 떼어야 했음은 물론이고, 기생의 춤이나 노래 등을 보고 싶을 때에도 다른 손님들과 해당 기생에게 격식을 갖춰야 했다. 해주에서는 서울과 달리 기방 문이 닫혀 있으면 들어갈 수 없었다.

기생청의 주업무는 가무 등 기생이 갖추어야 할 기본 기예는 물론, 행의, 시, 서화 등을 가르쳐 그들이 접대하는 상류 사족의 교양과 걸맞게 연마시켰다. 기생청은 후에 권번으로 개칭되어 기생청의 기능을 맡았거니와, 서울평양에는 기생학교가 있어 15세에서 20세까지의 처녀를 입학시켜 가음곡 외에 예의 ·서예 등을 가르쳐 예능과 교양을 겸비하도록 하였다. 일제강점기가 되면서 연예인이자 전통 예술의 전수자였던 이들을 일본의 유녀와 같은 창녀로 취급하면서 정기적으로 치욕스러운 성병검사를 당해야만 했으며, 이 시기에 왜곡된 인식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당시 기생의 신분은 상당히 애매했다. 예술만 하는 그런 기생은 결혼을 하기도 했지만, 매춘을 하는 창기의 경우 천민으로 대우받았다. 하지만 일패기생이나 은근짜는 많은 예능으로 많은 이에게 대우받는 미묘한 위치였다. 수준이 높은 은근짜는 설령 은근짜라 하더라도 두고두고 명기(名妓)라 칭송받는다. 이패기생(은근짜)인 황진이의 행보를 보면 살림을 차리는 것도 그리 나쁘게 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삼패기생, 즉, 창기는 빼도박도 못하는 천민인지라 양반가와 정분이 나 자식이 낳는다면 그 자식은 '서얼'이 되며, 창기의 경우 아비를 모르는 경우가 더 많기에 사실상 '천민'의 신분을 가지게 된다.

2.7. 구한말, 근대의 기생[편집]

일제강점기인 1916년 3월, 데라우치 총독이 도쿠가와 시대의 일본식 유곽(공창)제도를 공포하면서 이전에는 없던 일본식 공창제가 도입되었다. 조선은 관기 이외의 공창이라 할법한 것이 없었다. 애초에 성리학 이념이 워낙 강해서 관리를 수청드는 관기조차 수청은 되지만 강간은 안된다거나, 그것도 너무 과하면 안된다는 식의 규율이 적용되었다. 그러나 한일합방 이후 공창제가 공포됨에 따라 기생들은 '권번'에 기적을 두고 세금을 내며 활동하는 허가제로 운영되었는데, 권번은 동기에게 기예를 가르치며 기생의 요정 출입을 지휘하고 화대를 받는 중간 역할을 했다. 마이코게이샤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일본식 제도를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사실상 일본의 오키야(置屋/おきや)와 이름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출처

구한말에 '서양의학'이 보급되었을 때 유교적 사상이 제대로 박혀있는 국내에서는(소위 남녀칠세 부동석) 간호사를 구하기 힘들어 결국 어느 정도 지식을 가지고 있고 남자에게 손을 댈 수 있는 '기생'을 간호사로 뽑았다. 남자 간호사를 뽑을 생각을 안 한 건 그거대로 웃긴 일이지만 넘어가자

일제강점기에는 권번에 기적을 두고 3년동안 기예를 배운 뒤 배반에 합격해야만 기예증(技藝證)을 받아 소위 말하는 일패기생이 될 수 있었다고 한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기생청은 총독부의 일본 유녀 권번 벤치마킹에 의해 권번이라는 일종의 조합으로 바뀌었다. 이 권번은 기생들을 양성하는 학교 역할도 했는데, 일제강점기에는 공식 교육기관 중에선 전통 예술을 계승하는 사실상 유일한 곳이었어서 의의가 꽤 크다. 한 예로 일제강점기를 전후한 국악인들 중 상당수가 권번 출신 기생이었거나 권번에서 기생들을 가르치던 교사 출신이다. 당시 기생들의 항일 의식이 투철해서 3.1 운동에도 참가했다고 한다. 평양 기생 학교의 경우 강점기 초엔 400명의 학생들이 있었다고 한다.

평양 기생들과 진주 기생들은 아예 기생들의 만세시위를 주창하며 독립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평양 기생들은 "우리는 일본의 창녀가 아니다! 조선 기생들은 나라를 사랑한다!"며 가두시위에 참여했고, 진주 기생들은 "임진왜란을 기억하라! 왜병들에게 돌을 던져라!"라며 매우 적극적으로 일제에 저항했다.

강점기에 일본에서 유녀를 데려와 경성의 신마치(현재의 서울 중구 쌍림동), 혼마치(현재의 서울 명동)에 공창 지역을 설치하여 기생 제도는 점점 그 규모가 작아진다. 부산의 경우 미도리마치(완월동)에 일본에서 건너온 유녀들이 유곽을 형성해 현재까지 이어지는 유흥가의 첫 시작이 된다. 권번 제도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일제의 강요로 1942년에 폐지되었으며, 해방 이후에는 사실상 기생이란 개념이 사라지게 된다. 해방 후 그때까지 존재했던 기생들은 예능인으로 전환하거나 대도시의 요정으로 흘러들어가게 된다. 물론 기생 일을 그만두고 평범한 생업을 찾아간 여성들도 적지 않다.

초창기 한국의 연예계는 기생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는데, 기생들이 연예인이 되거나, 연예인이 기생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많은 인기를 끌었던 가수 왕수복, 이화자[25], 선우일선 등의 여가수가 기생 출신이었고, 석금성, 유신방, 김난주, 김난옥 등의 여배우들이 기생 출신이었으며, 이월화와 복혜숙은 여배우에서 기생이 되기도 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 197-80년대 까지만 하더라도 연예계를 화류계로 취급하며 깔보는 시각이 많았지만, 그러한 시각은 1990년대 이후 연예인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으로 개선 되면서 많이 사라졌지만, 아직도 나이가 제법 든 노인들 사이에서는 그러한 시각이 남아 있는 편이다.

유명한 평양 기생의 경우, 1950년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까지만 해도 남아있었다. 당시 백선엽이 평양을 점령한 후 평양 기생들이 아직 잘 있는가 궁금하여 찾아가 봤는데, 그때까지도 영업을 하고 있었다 한다. 음식을 주문하고 술을 시켰는데, 흥분한 기생들이 자기들이 술을 다 마시고 공산당 욕을 막 하더란다. 자기들이 즐기고 싶어서 기생집 운영을 강제로 시키고는, 인민들의 눈이 두려워 검은 옷만 입게 하질 않나, 음식이고 술이고 비싼 것을 잔뜩 먹고는 돈은 한푼도 안 내질 않나, 하고 기생들이 공산당 욕을 쏟아내었다. 그래서 평양 점령 기념으로 회포를 푸려던 술자리는 기생들의 하소연 자리로 변해 버렸다 한다.

남한 기생도 남아나질 못했는데 북한 기생들이 평양 폭격과 전쟁 이후엔 어찌 되었을지…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여담으로 음식이 별 맛없었다고 한다

2.8. 기타[편집]

기생의 출석부를 ‘기생안’이라 한다. 부를 땐 이름을 풀거나 수식 혹은 이름을 수식하는 말을 붙여 시처럼 호명했다. 춘향전에 등장하는 것을 보면, '중추 칠월 십오야에 광명 좋다, 추월이 나오. 분벽사창 요적한데 한가하다, 향심이 나오.' 식으로 한다. 그러나 공문서라 하기에는 영 아니었다. 그래서 기생안과 별도로 ‘기생 점고 호명기’가 있었다. 기생안은 말 그대로 기생 이름만 적어놓은 출석부이고, 호명기가 이름 부르는 방법을 적어놓은 것이다.

보통 기생의 머리라 하면 얹은머리만을 떠올리지만 모든 기생이 그런 크고 화려한 머리를 하지는 못했다. 가채는 기와집 한 채와 맞먹을 정도로 고가의 사치품이었기에 돈이 없거나 하급인 기생은 서민들과 같은 머리를 했다.

넷 우익들이 자주 써먹는 떡밥 중 하나. 기생을 꼭 창녀라고 부르며 위의 기생청을 보고 조선 정부도 창녀를 관리했다면서 일본군 위안부를 정당화하는데 쓴다. 어디 게이샤도 창녀라고 해보시지 사실 기생이 단순 성접대를 담당하는 매춘부로 전락한 것은 일제강점기 때라는 게 아이러니하다. 우리나라 만세 가사에도 일제가 소녀기생을 해방시켰다 어쩌구 자랑하는데, 구전으로 전해지던 것을 기생학교까지 세우며 이어나간 것이 일제다(…).

게이샤와 많이 비교되는데, 애초에 게이샤는 가무만 하고 그래서 예술 하나만을 죽도록 파기 때문에, 기생처럼 만능은 아니었다. 현재도 게이샤가 되려면 고등학교 교육은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니[26], 더 어릴 때부터[27] 게이샤 준비를 했던 옛날의 경우, 학식은 더 기대하기 어려웠을 터이다. 아이러니하게 기생에 대한 지식 부족으로 인해 기생이랑 게이샤 이 둘의 수준에 대한 이미지는 뒤집혀도 너무 뒤집혀버렸다. 안습.

다만, 급진적인 페미니스트 중에 실제로 몸을 팔지 않았다 해도 그래봤자 창녀나 다를 게 없다며 회의적으로 보는 사람도 있기는 하다. 공식적으로 성매매는 하지 않았을지라도 성적으로 착취당한 것은 마찬가지가 아니냐는 논리에서인데, 여성의 지위가 낮았던 그 시절을 비판하는 의도였다고는 하지만, 넷 우익 같은 부류들이 거꾸로 악용할 위험이 있다.
게다가 이런 식으로 성매매의 개념을 넓게 잡아 버리면 섹시한 이미지로 활동하는 연예인도 졸지에 성매매 종사자가 된다. 성적인 이미지를 파는 것을 비판하는 의도였다고는 하지만, 성희롱 악성 댓글을 정당화할 빌미를 제공한다.
또한 일반적인 서비스직 여성들도 넓은 의미에선 성매매를 한다는 억지 주장도 나올 수 있다.
과거에는 기생을 일컬어 웃음을 파는 이라고 했는데 이게 서비스용 미소를 말하는 것이므로 오늘날의 내레이터 모델과도 겹치는 부분이 있기 때문. 지금도 시골 어르신들은 잔치집에서 축가 알바를 하는 사람들을 기생이라고 하시는데 멸칭이 아니라 과거에 잔치집에서 노래 부르는 일을 기생이 담당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28]

2.9. 창작물 속의 기생[편집]

한국의 사극이나 시대극에서는 반드시라고 해도 될 정도로 자주 등장한다. 근대 이전의 한국에서는 여성으로서 사회 활동을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신분이고, 다양한 인물과 관계를 설정할 수 있는 배역이기 때문이다. 특히 황진이 등 유명 기생들은 사극의 단골 소재이자 주요 배역이다.

2.10. 관련 항목[편집]

3. 기숙사 학생의 준말[편집]

정식 용어는 기숙생 일부 학교에서는 사생(舍生)이라고도 한다.

[1]여성시대 모 회원의 주장과는 다르게, 태아는 기생이 아니다. 부연하자면 대표적인 공생관계인 꿀벌식물의 관계를 예로 들 수 있다. 해당 관계는 꿀벌이 일방적으로 식물의 영양분(꿀)을 갈취하기 때문에 기생으로 분류되어야 하지만, 벌이 식물의 수분에 기여한다는 점, 그로 인해 식물이 생식 상에서 이득을 본다는 점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공생관계라고 칭한다. 이러한 예로 보았을 때 생식행위 그 자체인 태아의 경우 모체의 입장에서 설령 몇 가지 신체적 편의가 제한되고 일방적으로 영양분을 공급한다고 해도 기생관계라고 칭하기에는 힘들다. 그 외에도 기생과 임신 간에는 몇 가지 기술적인 차이가 있으니 그러한 것들은 링크를 참조하길 바란다. 더불어 임신의 경우 일반적인 공생과도 또 여러면에서 구분되는 특징이 있기 때문에 임신에 대해서 공생관계라고 칭하기보다는 그대로 임신관계로 칭하자고 제안하는 의견도 있다.[2] 춘향의 경우 많은 이본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냥 중인의 신분인 것도 있고 기생인 것도 있다.[3] 제주도에서는 말을 타며 기예를 부렸다고 한다.[4] 이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5] 첫번째는 기생의 약속을 믿지 말것 두번째는 문자 읆지 말것 세번째는 꽃선물 하지 말것 네번째는 자기 처 자랑하지 말것 다섯번째는 가문의 열녀 자랑하지 말것[6] 첫번째의 경우 어차피 기생이야 돈이 중한 편이라 그랬겠고 두번째는 이들도 나름 지식인이었다만 과거 위주로 공부하는 양반가만 하겠나 기생들 입장에서는 잘난놈이 설교하려 드는것처럼 비쳤을 것이다. 세번째는 기생은 헤어화라 말하는 꽃이라 불렸다. 말하는 꽃이 꽃을 선물받은거면 모양새는 좋지 않을터 네번째와 다섯번째는 누군 남 접대하고 있는데 누군 처 자리를 차지하거나 열녀가 되었으니 당연히 좋지 않을것이다.(그럼에도 기생중에 열녀가 없지만은 않았다.)[7] 물론 사극에서도 춤과 노래 등의 예술 공연 등으로 활동하는 기생들이 안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출연하는 횟수에 비례하면 상당히 적다.[8] 고려 시대에는 기생 학교만을 의미했으나, 조선 시대에는 장악원의 우방(속악)과 좌방(아악)을 아울러 일컫는 말로 통용되었다.[9] 상급 기생은 판소리와 잡가를 절대 입에 올리지 않았다. 원래 기생으로서 이 둘을 입에 올리면 파멸이나 다름없었으나 기강이 무너지고 계급이 분화되면서 하급 기생의 전유물이 된다.[10] 미혼인 부녀자의 노란 저고리와 붉은 치마 조합은 금지되었다. 하지만 남들이 가체 못 올리고 장신구, 옷감, 옷 색깔까지 제재당할 때 이들은 마음대로 가체 올리고 장신구로 치장했다.[11] 가체 중에서도 기생하면 흔히 생각하는 그 가체를 말한다.[12] 의녀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약방기생은 원래 천민 출신인 의녀가 기생 노릇을 겸한 것이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예술가적 면모)로서는 일패기생이라 할만한 수준이 아니다. 단지 궐에 출입하거나 머물며 기생(은근짜나 더벅머리같이) 노릇을 하기도 하다보니 이렇게 분류된 것.[13]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인 김건우의 저서 <나는 당당하게 살겠다>를 보면 자유분방하지만 문란하지는 않은 여성으로 인식되었다 한다. 일종의 계약 결혼을 한 적도 있었는데, 결혼 기간에는 정조를 지켰다 한다.[14] 떠돌이 들병장수. 들병에 술을 담아 이고 다니며 팔았는데, 매춘부의 역할도 겸했다.[15] 소위 갈보(蝎甫)라고 한다.[16] 주로 군관이나 한량, 무뢰배, 왈자패, 검계 등이 맡았다. 창기의 기둥서방으로, 손님이 없으면 자신이 그 창기와 잠자리를 하고, 손님이 있으면 그에게 양보했다. 원래 이는 법으로 금지된 것이다.[17] 우산은 고대 중국에서 만들어진 뒤 아시아 지역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그러다 170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서양에 우산이 소개되었다. 뿐만 아니라 '일산'이라는 양산 같은 것이 오랫동안 사용되었다.[18] 방직은 심부름꾼을 뜻하지만, 방기는 관리의 수청을 들었다.[19] 은근짜가 관리를 상대하는 것과 다르다. 관기는 관아에 소속되어 의무적으로 투입되었고, 은근짜는 양반들이 따로 불러서 연회 등에 투입되는 체계였다.[20] 원래 관기는 일패기생으로 궁이나 관아의 잔치에 불려가 가무를 선보이는 이들이었으나 점차 기강이 무너져 관리를 상대로 매춘하는 하급 기생으로 전락한다.[21] 이것이 그려져있는 풍속화가 있다.[요약] 조선시대 충주에 금란(金蘭)이라는 기생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벼슬을 하던 전욱이 금란을 끔찍이 품었다. 전욱이 서울로 떠나게 되자 '내가 떠난 후에도 남에게 마음을 주지 말라'며 당부했고, 금란은 '월악산이 무너진다 해도 내 마음은 변치 않을 것'이라고 안심시켰다. 머지않아 금란은 단월역 역승이란 사내와 눈이 맞고 배가 맞았고, 이 소문이 전욱의 귀에 들어간다. 전욱은 분노하여 '당장 세모 방망이를 들고 달려가 월악붕을 두고 한 맹서를 따지겠다'고 서신을 띄웠고, 금란은 '맹서한 것처럼 산이 무너진다면 월악은 지금껏 몇 번이나 무너졌을고'(...)라고 답신했다.[23] 시비를 걸기 위해 하는 격식으로, 대가 설다고 하여 대선 책망이라 했다.[24] 바깥주인과 안주인이라는 뜻으로, 부부를 뜻한다.(네이버 국어사전) 여기서는 삼패기생과 기생서방을 가리킨다.[25] 이화자의 경우 권번에서 정식으로 교육을 받은 기생이 아니라 유곽의 작부였다.[26] 중졸 혹은 고등학교 중퇴 후 게이샤 교육을 받기 시작한다.[27] 오늘날은 최소한의 의무교육인 중학교까지는 졸업한 후에야 게이샤 수련을 시작할 수 있으나, 그런 법이 없었던 옛날에는 초등학교 저학년생 정도의 나이부터 게이샤 교육을 받았다.[28] 여담이지만, 한때 급진 페미니스트로 여겨졌던 전여옥이문열의 소설 <선택>을 비판하면서, 작품의 주인공 장계향을 두고 "그녀 또한 매춘부와 다름 없지 않은가"라고 발언해 안동 장씨 집안에서 격렬히 항의했다. 실제 장계향은 당시의 요리 레시피를 집대성한 음식디미방의 저자로,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시대의 한계 속에서도 그럭저럭 많은 것을 이룬 진취적인 여성으로 평가할 수 있으나, 이문열장계향페미니즘 비난자로 설정하는 고증오류를 범했다. 여기에 낚인 전여옥은 "양반가 여성이나 천민 여성이나 착취당한 것은 마찬가지"라는 맥락에서 이런 발언을 했다지만, 둘 다 역사를 자기 입맛대로 해석하는 병크를 범한 셈.[29] 오늘날까지 아직 기생이 남아있었을 경우를 가정하고 만든 대체역사물(...)이다. 후반에 빙의가 나와서 그렇지만..[30] 인간일때 기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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