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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천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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貴賤相婚
morganatic marriage

1. 정의2. 유래3. 서양의 나라별 사정
3.1. 독일계 국가들
3.1.1. 귀천상혼의 예외
3.2. 프랑스3.3. 영국3.4. 그 외
4. 동양의 경우5. 결과물

1. 정의[편집]

서양에서 자신보다 낮은 신분의 배우자와 결혼하는 경우를 말한다. 참고로 여기서 낮은 신분이라 함은 평민귀족 간의 결혼 뿐만이 아니라 귀족끼리 결혼하는 경우에도 해당된다. 덴마크 등 일부 국가에서는 귀족 집안끼리의 경우에도 귀천상혼이 적용됐다. 쉽게 말해 남작남작 집안끼리, 백작백작 집안끼리 결혼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엄격하게 따지는 경우는 드물었고, 보통 귀족 집안끼리 또는 왕실끼리 결혼하는 식이었다. 예를 들어 독립국의 통치 가문인 경우 공작 집안이나 대공 집안이어도 결혼에서 다른 나라의 왕실과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 또 일부 통치 가문의 후손인 비통치가문 역시 귀천상혼이 적용되지 않는 통혼 상대로 인정받는 경우가 있었다.(ex: 슈탄데스헤어) 귀천상혼을 통해 태어난 자식은 부모 중 높은 신분의 작위를 계승할 수 없었다. 예를 들면 공작 집안의 남자와 백작 집안의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은 아버지의 작위인 공작 작위를 계승할 수 없었고, 어머니의 작위인 백작 작위를 계승할 수 있었다. 단 실제로는 슈탄데스헤어인 백작 가들도 있었으므로 좀 더 복잡하다. 왕위 계승의 경우도 마찬가지. 정부과는 달리 정식 혼인인데 유럽 귀족이나 왕족들이 사생아를 많이 낳는 바람에 혼동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귀천상혼은 법률상으로는 유효한 결혼이다.

귀천상혼의 우리나라식 표현으로 자신 기준으로 배우자가 낮은 신분이면 낙혼(落婚) 또는 강혼(降婚)이라는 단어를, 자신 기준으로 배우자가 높은 신분이면 앙혼(仰婚) 또는 상혼(上婚)이라는 단어를 쓰기도 한다.#

귀천상혼의 반대의 개념은 동등결혼(equal marriage). 동질혼(homogamy) 문서 참고.

2. 유래[편집]

게르만족의 관습에서 비롯되었다. 게르만족은 토지와 신분을 남자에게만 균등하게 상속했는데, 이러한 결과로 나중에는 공작의 모든 남계 후손들이 공작을 칭하는 경우가 발생했다. 따라서 귀족의 수를 줄이기 위한 방법이 필요했는데, 이것을 위해 고안된 상속법칙이 귀천상혼이다.

예를 들면 두 공작 가문에 각각 아들 둘 딸 둘이 있어서 각각을 상대방 가문에게 페어링결혼시키면, 비록 인구, 가구의 절대 수는 2배로 늘었으나, 4명의 자녀가 평균적인 출산율이라고 가정하면 타 계층 대비 상대적인 공작의 숫자는 그대로 유지된다. 헌데 이 8명 중 절반이 평민이랑 눈이 맞을 경우 더 낮은 신분의 배우자를 얻을 경우, 공작 커플은 두 커플인 반면 부모 중 한 명만 공작인 커플은 네 커플이 된다. 귀천상혼에 대한 제한[1]이 없을 경우 공작(의 후계자)의 숫자가 타 계층대비 증가하기 때문에 개별 파이 사이즈가 줄어듦을 알 수 있다.

왕의 배우자가 된다는 것은 막대한 권력을 얻는 수단이 될 수 있었으므로, 여러 나라에서 제한된 수의 가문이 왕비족(王妃族)으로 지정되거나 암묵적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매우 많았다.

사실 근세 이전에는 정확히 정립되지 않은 개념으로, 유럽에서는 18세기 후반~19세기쯤에 가야 개념이 완전히 정착된다. 그 이전에는 관습적으로 비슷한 신분의 상대와 결혼해 왔고, 가끔 상대적으로 낮은 신분의 상대와 결혼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아예 평민과의 결혼과 같이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동등결혼으로 인정되었다.

3. 서양의 나라별 사정[편집]

3.1. 독일계 국가들[편집]

귀천상혼의 원조 지역답게 매우 엄격한 귀천상혼 배제원칙을 적용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20세기 초에 룩셈부르크의 남계 후손이 단절되자 신주단지처럼 지키던 살리카법까지 어겨가면서 여대공을 즉위시켰다.[2] 그러나 바덴 대공가처럼 동등 결혼에서 태어난 직계 남성 후손 계통이 끊어지자 여계 계승 대신 귀천상혼 계통으로 상속한 경우도 있었다. 카스파 하우저가 여기 얽혀있는 이야기. 사실상 당시 군주가 누구에게 상속하고 싶은 지가 많이 작용한다. 룩셈부르크의 귀천상혼 남계 후손은 당시 대공의 친척이었지만 후계자가 된 공주는 대공의 친딸이었다.

엄격한 집안에서는 여계 후손과 귀천상혼 후손을 모두 제외하고 머나먼 친척을 찾는다. 또한 이 규칙 때문에 오스트리아-헝가리프란츠 요제프 1세는 후계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자녀들에게는 계승권을 주지 않았다.[3]

또한, 독일을 통치하던 선제후 가문 중의 하나였던 팔츠 가문의 예도 있다. 자식이 없던 선제후 카를 2세가 죽자 그의 아버지 카를 1세가 남긴 귀천상혼의 아들(즉 카를 2세의 이복동생들)이 매우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20촌에 가까웠던 남계 친척인 필리프 빌헬름이 선제후 위를 받은 것이다.[4]

이처럼 살리카 법+귀천상혼 배제의 까다로운 상속법을 적용시킨 독일에서는 정말 먼 친척이 작위를 물려받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우리나라의 철종도 먼 친척이 왕위를 물려받는 경우지만 사실 철종도 아버지와 형이 역모에 몰리는 바람에 죄인이 되어서 강화도 듣보잡으로 전락했을 뿐 사도세자의 증손자였고, 유배 전에는 한양에서 왕족 대우를 받았다. 독일에서는 균등상속을 받았기 때문에 먼 친척이라 해도 가문의 다른 영지를 상속받은 어엿한 제후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차피 다 근친결혼해서 실제 촌수(여계로 따지면)는 휠씬 가깝다…

3.1.1. 귀천상혼의 예외[편집]

슈탄데스헤어 가문 출신은 명목상 귀천상혼이 아닌 동등한 결혼으로 취급되었다. 실제로는 잘 지켜지지 않는 경우도 있었지만… 해당 항목 참조.

슈탄데스헤어 가문 외에도 1866년에 프로이센에 합병된 헤센카셀 공실, 하노버 왕국 왕실도 외국 왕실과의 동등결혼 자격이 있다. 헤센가문의 경우 친척인 헤센-다름슈타트가 제후령으로 존속하고 하노버도 영국 왕실의 친척이기에 영토가 없어져도 슈탄데스헤어와 달리 왕족혈통으로 인정받았다. 1871년 독일 제국 성립 이후에 그 구성국이 된 왕국들(바이에른, 작센, 뷔르템베르크), 6대공국, 5공국, 7후국 왕공실들은 프로이센에 합병된 게 아니라 독일제국의 연방 구성국이었으니 이들 또한 외국 왕실과의 동등결혼 자격이 있다.

3.2. 프랑스[편집]

프랑스의 경우는 법적으로 귀천상혼이 엄격하게 규정되지는 않았지만 관습적으로 귀천상혼을 피했다. 프랑스 귀족들은 결혼하기 전에 왕이나 자기가 모시는 영주의 허가를 받았어야 했기 때문에 귀천상혼이 알아서 걸러졌다.

왕의 경우는... 훗날 앙리 2세로 즉위하는 오를레앙 공작과 메디치 가문의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결혼이 있었다. 다만 이 때는 형인 프랑수아 왕세자가 살아 있었기 때문에 카트린이 왕비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후 앙리 2세가 즉위할 때 카트린의 신분이 문제가 되긴 했으나, 정해진 규정은 없기 때문에 일반적인 결혼으로 인정되었다. 이후 앙리 3세의 경우도 독립국의 통치가문과 결혼한 것이 아니라 로렌의 루이즈 공녀와 결혼했다.사실 이건 귀천상혼이 아니다. 로렌의 경우 엄연한 통치가문으로 로렌의 공작들 상당수가 다른 나라의 왕족들과 결혼이 가능하다.[5] 일례로 로렌 공작 샤를 5세(얀 3세 소비에스키와 함께 비엔나 포위 당시 비엔나를 구한 그 사람 맞다)는 절친한 벗인 레오폴트 1세의 이복여동생 오스트리아의 엘레오노르와 결혼했고 그 아들인 레오폴드 드 로렌 공작은 루이 14세의 조카딸 엘리자베트 샤를로트 도를레앙(루이 13세의 차남 오를레앙 공작의 3녀)과, 손자인 프랑수아 에티앵(프란츠 1세)은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와 결혼했다. 이외에도 프란츠 1세의 여동생의 경우 루이 15세, 외사촌 루이 도를레앙 공작[6]과 혼담이 있었지만 수상인 콩데 공작에 의해 무산된 후 사르데냐 왕과 결혼한다.

훗날 루이 14세의 경우 마담 드 맹트농과 비밀결혼을 했고, 서자(정확히는 사생아)들에게 계승권을 주려고 시도했던 것을 생각하면[7] 귀천상혼을 뭔가 피해야 할 금기이긴 한데 법적으로 규정이 안 되어 있는 관습으로 여겼던 것 같다.[8] 뭐 어차피 이 동네는 살리카법이 강했으니[9]

3.3. 영국[편집]

유럽 국가들 중에서는 귀천상혼 배제의 개념이 약했다.[10] 헨리 8세만 해도 6명의 왕비 중 단 둘[12]만이 통치가문 출신이었다. 또 다른 예로 제임스 2세에드워드 하이드 [13] 백작[14]의 딸 앤 하이드[15] 사이에서 태어난 메리 2세이 여왕으로 즉위한 것을 들 수 있다.

조지 5세의 아내이자 에드워드 8세조지 6세의 모후인 메리 왕비(테크의 메리, Mary of Teck)는 독일 뷔르템부르크 왕가의 귀천상혼으로 만들어진 테크(Teck) 공작 가문 출신이었다.[16] 다른 나라였으면 왕족과 결혼하지 못했겠지만 귀천상혼의 개념이 그다지 없었던 영국이었던 지라...[17]

카밀라 파커 보울스찰스 필립 아서 조지 왕세자의 결혼은 귀천상혼으로 취급받을 뻔했으나, 역시 귀천상혼 배제의 개념이 약한 영국답게(…) 이와 상관없다는 판결을 받았다#.

3.4. 그 외[편집]

  • 사실 근대의 거의 모든(전부라고 해도 좋다) 유럽 왕실에서는 귀천상혼 배제 관행이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영국이야 꽤 오랫동안 변방 섬나라로 취급받았고…[18] 러시아그리스, 스페인의 경우처럼 귀천상혼 배제 관행이 원래 없다가 상속에 의해 왕조가 외국 왕가로 바뀌면서 그 왕가가 가지고 있던 귀천상혼 배제 풍속을 들여오는 경우도 존재한다. 근대 그리스 왕국의 알렉산드로스 1세(재위 1920-22)는 파나리오테스 중에서도 가장 신흥 가문에 속하는 마노스 가문의 아스파시아 마노스와 결혼했는데, 아스파시아는 Queen이 되지 못하고 princess 칭호를 받았다.[19] 둘 사이에선 딸만 있었다만, 아들이 태어났어도 그리스 왕이 되었을 가능성은 낮다.[20]

  • 동로마 제국의 경우는 황제의 혈족을 외국 왕실과 결혼시켜 제위를 위태롭게 하기보다는 국내 귀족과 결혼시키는 쪽을 압도적으로 선호했다. 당장 바실레이오스의 의정서에서 외국에 절대 내보내서는 안 될 3가지 중 2가지[21]가 이와 관련된 것이다. 이 경우 해당 귀족 가문이 제위를 넘볼 여지가 생기지만, 그건 어쨌건 제위가 국내에서 움직이는 것이니. 로마-비잔티움은 애초에 혈통 계승도 아니었고 사위가 제위를 계승하는 경우도 흔했다.[22]사실, 이런 특징은 동로마 제국 뿐 아니라 역대 중국의 왕조들이나 조선 왕실 등에서도 보이는 것이다. 즉, 국내에서 왕권이 절대적인 나라일수록 외국의 왕조와 왕실 결혼을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 이 면에서 귀천상혼 배제는 하나의 광역 문화권 내에서 동등한 왕조 여럿이 영역을 분할하던 유럽의 특수한 풍습이라 보는 것이 옳다.

  • 신데렐라 콤플렉스에 걸린 사람이 있다면 귀천상혼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면 된다. 위에서도 설명되었지만 예나 지금이나 낮은 신분의 여자가 높은 신분의 남자와 결혼하는 경우 진짜로 행복하게 잘 사는 게 아니라, 자식한테 재산과 지위도 정상적으로 못 물려주고, 귀족들끼리의 공식 행사에도 제대로 참여하지 못한다. 그나마 요즘 와서 나아진 점은, 당사자가 아닌 자식들은 아버지 쪽 지위를 따르는 것이 인정된다는 사실 뿐이다. 물론 요즘의 신데렐라 콤플렉스는 허울 뿐인 귀족이랑 결혼하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라 돈 있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어하는 쪽.

4. 동양의 경우[편집]

사실 동양에도 귀천상혼과 비슷한 개념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 신라의 경우, 골품제 제도 아래에서는 다른 골품끼리 결혼하면 자식이 부모 중 낮은 신분을 따라가게 된다는 것이 일반적인 정설이다. 이것 때문에 성골의 수가 매우 적어진 6~7세기에는 근친혼이 매우 잦았다. 성골이라도 성골이 아닌 배우자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계승권이 없었기 때문에 이 시대에는 한국사에 전례없는 여왕도 등장했으며, 여성 성골까지 비로소 전멸하고 나서야 진골 남성이 즉위할 수 있었다. 일반적인 동아시아식 왕조 형태보다는 유럽의 그것에 가깝다.

  • 고려의 경우는 왕족 남성이 귀족 여성과 혼인한다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의 신분이 귀족이 되는 건 아니었으나, 여성의 상속권도 인정했기 때문에 왕이 되는 데엔 어머니의 신분이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래서 왕족들 사이에선 종친 간의 혼인(족내혼)이 흔했다. 그러다 충선왕이 왕실과 통혼할 수 있는 15개 가문의 재상지종(宰相之宗)을 선정하고 이 가문만 왕실과의 통혼을 허락하면서 상황이 변했다. 사실 공민왕이 종친의 딸인 3비 익비와 혼인할 때 그녀의 성을 바꾼 거나, 방계 왕족들 사이에선 종친들 간에 혼인(족내혼)한 사례가 있는 걸 봐선 철저히 지켜진 것은 아니었지만, 확실히 저 때부터 족내혼을 하는 경우가 드물어졌다.

  • 조선의 경우 초기에는 양천제로 인해 양반과 상민의 정식 혼인이 법적으로는 허용이 되었고 이 사이에서 나온 자식은 적자로 취급받을 수 있었으며, 대신 정부인의 자식인 적자의 자식인 서얼의 차이가 존재했다. 하지만 양반 제도가 정비되고 점차 반상제로 바뀌면서 자연히 양반 집안끼리만 혼인하는 풍습이 정착되었고, 양반과 상민이 혼인하는 것은 상민 여성이 양첩으로 들어가는 것만이 존재하게 되었다. 한편 천민과의 혼인은 일천즉천법이라고 해서 부모 중 어느 한 쪽이 천민이면 자식 또한 천민으로 규정하였다. 다만 예외로 천첩이라 하여 천민 신분으로 양반의 첩이 될 경우 자식은 중인 신분인 얼자가 되었다. 조선 후기에 양인의 수가 지나치게 줄어들자 노비종모법을 제정해 어머니가 양인이면 자식 또한 양인이 될 수 있도록 허락하기도 했다. 양반 계층 내에서의 통혼은 법적으로 제한이 없었다. 유력 명문가끼리 통혼하는 사례가 있긴 했으나 양반 계급 내에서 또다시 계층이 공식적으로 분화되지는 않았다.
    조선 왕실의 경우 법적으로 왕비는 양인 이상의 신분이면 누구나 간택 자격이 있었다. 하지만 정치적 이유 때문에 실제로는 몇몇 유력 가문의 자제로 후보가 좁혀지는 사례가 많았다. 간택 후궁도 이와 비슷하다. 예외로 후궁 중에는 본래 궁녀나 비자였다가 국왕의 승은을 입고 후궁 자리에 오르는 경우가 있었다. 정실 왕비와 후궁의 자녀들 또한 각각 적자와 서자로 차별하였다. 하지만 후궁의 자녀들도 계승 순서에서 밀릴 뿐 왕위 계승권 자체는 있었다. 또한 후궁의 자녀와 그 후손 또한 사대부 가문으로 인정받았다.

  • 일본도 한때 귀천상혼 배제 관행이 존재했다. 메이지 유신 직후부터 1947년 사이 시행된 '舊 황실전범'에 따르면, 황족은 같은 황족이나 화족과만 결혼할 수 있었다. 특히 황실 직계의 정실 부인(황태자비, 황후)은 반드시 같은 황족이나 화족 중 고셋케(五攝家) 가문 또는 왕공족 출신이어야 한다는 불문율이 있었다. 다만 이쪽은 서자의 계승권을 인정했다는 차이점이 있지만. 1947년의 신적강하로, 다이쇼 덴노의 직계 후손들을 제외한 모든 방계 황족들과 화족들은 평민 신분으로 전락했다. 그래도 그들은 자신들끼리만 결혼하며 자신들만의 세계를 굳게 지켜오고 있었다. 그런데 1959년 아키히토 황태자가 평민[23] 출신인 쇼다 미치코와 연애결혼을 하면서 이 견고한 철옹성벽이 깨졌다. 물론 미치코 황태자비의 황실 생활은 순탄치 못했다. 평민 출신이라는 이유로 갖은 시집살이와 모욕과 학대를 당했고, 황후가 된 뒤로도 고생하다가, 2000년 시어머니 나가코 태후가 사망한 후에야 겨우 좀 편안해졌다(무려 40여 년). 그러나 이후 아키히토 덴노와 미치코 황후의 2남 1녀도 모두 평민과 결혼하는 등, 일본 황실에서도 평민 사위/며느리를 맞이하는 일이 보통으로 되었다.

5. 결과물[편집]

  • 귀천상혼 배제관행의 특성상 결혼을 할 수 있는 집안이 한정되어 있으므로 유럽 왕가들은 유독 근친혼이 심해졌다. 가끔 듣보잡 가문이 높은 계급의 귀족이 되어서 새로운 혈통이 들어오는 경우도 있으나, 이 경우도 세대가 흐르면 결국 근친혼이 일어난다. 이런 외국 왕가들끼리의 결혼 결과물로 빅토리아 여왕혈우병이 러시아 황실로 유전되었다.[24] 게다가 그 혈우병으로 러시아 혁명까지 일어났으니 나비효과.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를 기준으로 볼 때, 친외가 따지지 않고 노르웨이의 하랄드 5세는 6촌이자 8촌, 덴마크의 마르그레테 2세, 스웨덴의 칼 구스타프 16세, 스페인의 후안 카를로스 1세, 벨기에의 알베르 2세, 룩셈부르크의 앙리 대공과는 8촌이다. 이보다 먼 관계의 군주들은 생략. 여담으로 엘리자베스 2세와 남편 필립 마운트배튼은 서로 8촌, 7촌관계이다.[25]

  • 위에서 보듯 왕가들이 자신들끼리 멀건 가깝건 친척이기에, 왕가의 대가 끊기면 왕을 외국의 친척 왕가에서 수입해 오기도 하고, 생판 다른 외국의 왕가에서 수입해 오기도 하고, 별 상관없던 다른 나라의 계승권을 주장하고 이것이 전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사례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아주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같은 성씨를 쓰는 친척 왕가에서 수입하려다 뒷수작 부리던 게 걸려 다른 왕가에서 수입하려 했고, 이것이 전쟁으로 이어진 사례.

  • 칼 14세 요한이 즉위한 스웨덴 베르나도테 왕조의 경우는 듣보잡 가문의 로또 출세라는 악평을 면하기 위해 귀천상혼 배제 원칙과 살리카법을 엄격하게 적용했다.[26] 그 결과 왕위를 계승한 후손이 얼마 남지 않아 버리는 바람에[27] 결국 귀천상혼 배제와 살리카법을 둘 다 폐지해 버리고 절대적 장자 상속법(남녀 구분 없이 먼저 태어난 왕자나 공주에게 계승권을 주는 계승 법칙)으로 계승 규칙을 바꾸었다.

  • 최근의 귀천상혼 사례로는 벨기에레오폴드 3세의 두번째 아내인 레티 공비 릴리안 바엘이 있다. 이 커플은 2차 대전 중인 1941년에 속도위반으로 결혼했는데, 바엘은 왕비 칭호를 받지 못했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3명의 아이들도 왕위 계승권이 없었다. 이 아이들은 나중에 여러가지 트러블을 일으키면서 벨기에 왕실의 골칫거리가 되었으니 어찌 보면 계승권이 없었던 게 다행일지도. 아이러니하게도 릴리안을 왕에게 소개시켜 준 사람은 왕의 어머니였다(...).

  • 귀천상혼으로 인해 왕가에서 파생되어 생겨난 귀족 가문도 상당히 있다. 예를 들면 합스부르크 왕가로부터 호헨베르크 공가(1900년. 오스트리아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자손들), 헤센 대공가로부터 바텐베르크 공가(1858년), 뷔르템베르크 왕가로부터 테크 공가(1871년. 1981년 단절), 우라흐 공가(1867년)가 파생되었다.

  • 스페인후안 카를로스 1세가 즉위하는데에도 귀천상혼이 영향을 끼쳤다. 원래 계승자인 후안 카를로스의 백부 아스투리아스 공 알폰소[28]가 귀천상혼을 하면서 계승권을 포기했기 때문. 하지만 그 아들은 평민 이혼녀와 결혼했으니 뭐.

  • 귀천상혼 논쟁으로 인해서 본가와 연을 끊은 경우도 있는데 룩셈부르크의 부르봉-파르마가문이 대표적이다. 룩셈부르크는 어찌되었건 현재 통치가문이기에 상대적으로 귀천상혼 논쟁에서 자유롭고 그로인해서 현 앙리대공의 아들들이 모두 평민과 결혼하였지만 통치지역을 잃어버린 부르봉본가에서 귀천상혼이라면서 논쟁이 발생되었다. 이에 앙리대공은 본가와 결별하고 자신을 나사우가문이라면서 성을 갈아버렸다.[29]


[1] 신분이 다른 남녀 혼인 금지, 또는 하더라도 자식은 자동으로 두 부모 중 낮은 신분이 됨.[2] 귀천상혼을 한 남계 후손이 있었으나 대공위 계승에서 제외시켰다.[3]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아내인 조피는 왕녀가 아니라 백작 영애였기 때문에 귀천상혼(貴賤相婚)이었다. 그래서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황태자였지만 조피는 황태자비가 될 수 없었고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세 아이도 모두 제위계승권이 없었다. 대신 조피에게는 호헨부르크 여공작 작위가 수여되었다.[4] 여담이지만 이 계승에 태클을 걸었던 사람은 엉뚱하게도 프랑스루이 14세. 그의 제수가 카를 2세의 누이였기 때문에 그녀의 권리를 주장한 것이다. 물론 살리카 법을 엄격하게 적용시킨 독일지역의 분위기상 그의 주장은 씹혔지만. 솔직히 살리카법으로 왕조를 몇 번이나 갈아엎은 프랑스왕이 말할 자격은 없었다[5] 뒤에 나오지만 훗날 로렌 가문은 프란츠 1세마리아 테레지아와 결혼 후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되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외손봉사를 하게 된다. 격이 낮은 가문이었으면 이런 일 자체가 불가능.[6] 1703-1752.이 사람은 루이 14세의 서녀의 아들이다. 프랑스의 뢍 루이 필리프 1세의 증조부[7] 이건 앙리 4세도 그랬다.[8] 루이 14세와 마담 맹트농은 비밀리에 결혼했지만 공표되지 못했다. 따라서 맹트농 부인은 사적으로는 왕의 부인이었지만, 공적으로는 왕비가 아니고 그저 후작부인일 뿐이었다. 루이 14세의 아들인 왕세자 루이도 낮은 신분의 슈앵양과 비밀결혼을 했고 슈앵양도 결코 왕세자빈이 된적이 없다. 이러한 비밀결혼은 이름만 다를 뿐이지 귀천상혼과 상당히 유사한 면을 보인다.(이러한 유사성때문에 종종 마담 맹트농이 루이 14세의 귀천상혼한 부인이라고 오기되기도 한다) 즉 프랑스라고 귀천상혼에서 자유로울순 없었단 얘기.[9] 프랑스 대혁명을 다룬 만화 베르사이유의 장미에서는 이 귀천상혼을 피하던 당대의 시대상이 반영돼서 귀족인 자르제 가문의 막내딸 오스칼과 자르제 가문에서 일하는 하인인 앙드레는 서로의 진심을 확인하고서도 공식적으로는 결혼을 하지 못한다. 오스칼의 아버지는 앙드레에게 '네가 귀족이었다면 당장 혼인시켰을 텐데'라거나 '귀족과 평민이 결혼하려면 왕의 허가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10] 애초에 영국은 귀족이 매우 적었고[11] 엄격한 장자 상속제가 적용되었기에 공작의 자손이라도 장자만 후임 공작이 될 수 있었다. 또한, 정식으로 작위를 잇기 전에는 엄밀히 말하면 평민으로 쳤기 때문. 상술한 것처럼 귀천상혼 자체가 게르만족의 풍습에서 유래되었는데 비록 영국이 게르만계 국가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섬나라인 만큼 앵글로색슨족이 유럽 본토의 게르만족과 다른 자신들만의 풍습을 만들어낼 수 있었고 선주민인 켈트족으로부터 귀천상혼을 따지지 않는 문화를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11] 다만 이는 앵글로색슨족이 막 잉글랜드를 세웠을 때의 영향보다는 다수민족인 앵글로색슨족이 피지배층으로 전락하고 소수의 노르만족이 지배층으로 군림했던 노르만 왕조플랜태저넷 왕조의 영향으로 보인다. 아무래도 앵글로색슨계 왕조인 웨식스 왕조 시절에는 왕족을 포함한 지배층부터가 앵글로색슨족이었기 때문에 귀족의 수도 상대적으로 많았겠지만(앵글로색슨족에게 복속당한 켈트족도 언어, 문화적으로 앵글로색슨족에 동화된 상태)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를 정복하여 잉글랜드 노르만 왕조를 세운 뒤에는 노르망디 공국의 침략에 저항했던 앵글로색슨 귀족들이 대거 피지배자로 전락해버리고 소수의 노르만족이 지배층으로 군림하면서 웨식스 왕조 때에 비해 귀족으로 군림하는 이들의 인구가 줄어들고 반대로 피지배층의 수가 늘어났을 것이기 때문이다.[12] 아라곤의 캐서린, 클레페의 앤[13] 동명이인이지만 지킬앤하이드의 다른인격 하이드의 풀네임이기도 하다-_- 무섭겠네요 그렇지, 백작님은 높으신분이니 무섭지 [14] 원래는 귀족이 아니라 평민 출신이다. 찰스 2세를 지지한 대가로 왕정 복고 직후 클라렌든 백작의 칭호를 받고 귀족이 되었다. 그래서 영국 언론들은 윌리엄 아서 필립 루이 왕세손과 캐서린 미들턴의 결혼을 "영국 왕실의 2번째 평민과의 결혼"이라고 한 것.[15] 제임스 2세가 즉위하기 전에 사망, 왕비는 되지 못했다.[16] 그나마 어머니가 빅토리아 여왕사촌이고 영국 공주이긴 했다. 영국 공주인 어머니가 귀천상혼으로 만들어진 가문의 남자와 결혼한 이유는 다름 아닌 비만...[17] 사실 귀천상혼 출신이라는 지적이 많았으나 빅토리아 여왕이 대대적으로 밀어준 결혼이라서 아무도 크게 반발하지 못했다. 원래 조지 5세의 형과 약혼했으나 그가 일찍 죽는 바람에 형사취수(?)로 조지 5세와 결혼했다.[18] 그래서 영국에서는 살리카법도 제대로 도입되지 않았다.[19] 귀천상혼한 왕의 배우자에게 princess 칭호를 주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20] 다행히 딸 알렉산드라는 이로 인한 피해는 별로 보지 않았다. 공주(Princess)의 지위를 받았고, 후에 유고슬라비아 페타르 2세의 왕비가 되었다. 그녀가 여왕이 되지 못한 것은 귀천상혼 때문이 아니라 당시 여성의 왕위계승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21] 포르피로게니타, 황제의 관[22] 하지만 안습하게도 동로마가 망한 후 황제의 조카딸이 러시아 모스크바 대공에게 시집가서 결국 황제의 혈족이 외국 왕실에 흡수되었다. 오늘날 러시아 국가 문장에 독수리가 있는 건 여기서 기인한다.[23] 말이 평민이지, 쇼다 미치코의 친가는 일본 굴지의 재벌 집안이며 외가는 옛 화족이다.[24] 러시아 제국 니콜라이 2세의 아내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가,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이다.[25] 필립공 기준으로 필립공과 엘리자베스 2세는 모계로는 8촌, 부계로는 7촌관계이다.[26] 그러나 왕가 성립 초기에 기존 왕실들은 로또 가문인 베르나도테 왕가와 결혼하는 걸 기피하는 바람에... 칼 14세 본인이야 말할 것도 없이 평민(데지레 클라리)과 결혼했고, 아들 오스카르 1세는 나폴레옹 1세 시절에 만들어졌던 같은 로또 가문 로이히텐베르크(Leuchtenberg, 나폴레옹 1세의 첫 아내 조세핀 보아르네의 가문이다)의 조세핀(조세핀 보아르네의 조카손녀뻘)과 결혼했다. 다른 나라 왕실들이 다 20세기 중반에 법적으로는 폐지한 시점에도 법으로 남아 있었다.[27] 남계 후손은 많았는데 상당수가 귀천상혼을 해버렸다. 현 스웨덴 국왕 칼 16세 구스타프가 태어날 때 쯤에는 사실상 유일한 후계자였다. 그리고 이 후계자 문제는 지구 반대편 일본에서도 겪고 있다. 물론 일본은 2차세계대전 패전 후 귀천상혼 배제를 폐지했지만 아직 여계 승계 금지가 멀쩡히 살아있는지라...[28] 귀천상혼은 스페인 왕조 붕괴 이전에 이루어졌으나, 이 사람은 자식이 없었으므로 결과는 어차피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29] 귀천 상혼이 국가를 왕가의 재산으로 보던 시절의 유산이기에 현대의 군주가문에게 있어서는 굳이 지키지 않아도 국민들의 지지가 지속되는 한 자신의 가문사람이 계속 군주직을 유지 가능하며 평민과의 결혼이 국민의 지지를 유지시켜줄 이벤트가 되기도 하는 반면 통치지역이 사라진 왕가 입장에선 귀천상혼 같은 전통수호를 통하지 않으면 자신이 왕가였다는 정체성을 유지하기 곤란하기 때문에 몸부림칠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