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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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한국명:민덕효)
Gustave-Charles-Marie Mutel

  • 생몰년도 : 1854년 ~ 1933년

  • 재임기간 : 1890년 ~ 1933년


1. 개요2. 실체3. 친일 활동 및 행적
3.1. 안중근 의사 고해성사 거부 3.2. 대학 설립 방해3.3. 독립운동 밀고와 친일종교화3.4. 뮈텔이 고해성사의 비밀을 누설한 것인가?3.5. 3.1 운동 방해3.6. 우월의식과 조선인 차별
4. 후대의 평가

1. 개요[편집]

프랑스에서 조선에 파견된 가톨릭 선교사.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으로 1881년 조선에 와서 선교에 힘쓰다가, 1885년 파리대학 학장이 되어 돌아갔다. 5년 후인 1890년에 제7대 조선교구장인 백 블랑 주교가 선종(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제8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되어 다시 조선에 발을 디딘다. 이후 천주교의 교세 확장을 위해 노력하며, 신학교를 창설하고 명동성당 등을 건립하였다. 독일베네딕토회에 조선 진출을 요청하여, 베네딕토회 독일인 신부들과 수사들이 서울 백동(現 혜화동)에 수도원[1]을 세워 활동하게 했다.

한국어와 한문에 능했고 한국 천주교와 관련된 역사자료를 수집했다. 안중근 토마스 의사와도 교류가 깊었다. 그 외에 <황사영 백서>를 프랑스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뮈텔 본인은 황사영 백서 사건에 대해서 "조선 정부가 엄히 처벌한 것을 이해할 수 있다."라는 감평을 내놓기도 했다.

이러한 공적으로 19세기 말~20세기 초 한국 천주교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이며 한국 천주교의 기틀을 다졌다고 평가받는다.

…로 끝나면 좋았겠지만…

2. 실체[편집]

그 실체를 알고 상식이 있는 천주교 신자 입장에서는 외세의 힘을 빌려 나라를 엎으려 했던 인물제주도를 지옥으로 만든 천주교 신자들을 뛰어넘는 한국 천주교 역사상 사상 최악의 흑역사 원탑인 인물.

교세 확장을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으면서 한국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방해하고, 친일부역하면서 독립운동가를 밀고하고 조선을 깔보고 폄훼하면서 인종차별 의식까지 가졌을 뿐 아니라, 교회법까지 무시하며 독립운동 탄압에 적극적으로 협조한,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의 생명의 은인.

황사영 알렉시오는 뮈텔 주교처럼 고해성사 누설은 안했고 적어도 같은 천주교 신자를 폭도로 칭한적은 없지만, 본인의 신앙을 위해서 역적모의를 했기 때문에 뮈텔처럼 대놓고 차별을 의도하지 않은 뮈텔에 비해 그나마 낫다는 거지 천주교도들 입장에서는 그놈이 그놈일 뿐이다. 굳이 황사영을 비교해서 옹호한다면 결과가 반역이라서 그렇지, 신앙심만은 인정 받을만 했고, 신축민란도 천주교를 빙자한 만행을 저지른 놈들의 잘못이 있었다.

그리고 뮈텔이 신앙적으로는 괜찮았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교회법을 무시한 월권 행위들 때문에 가톨릭적으로 보더라도 깔 거리가 넘쳐난다. 또한 뮈텔 대주교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주교들이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 등장 전까지 서울대교구장을 맡게 되면서, 1960년대 후반 이전까지 한국 천주교는 주교 개인의 정치적 활동은 넘쳐났지만 한국 천주교의 사회참여 활동은 억제되었다.[2]

3. 친일 활동 및 행적[편집]

3.1. 안중근 의사 고해성사 거부 [편집]

안중근 의사의 집안은 천주교였다. 이것은 부친 안태훈 베드로가 천주교 신자였기 때문인데, 안중근도 19살 때 부친의 권유에 따라 토마스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이 때 영세를 준 이가 프랑스인 니콜라 빌렘 신부였다.

이후 안중근은 열성으로 신앙생활을 하며, 선교활동도 열심히 했으며, 빌렘 신부의 복사 일도 맡아보면서, 성당을 건립하는데도 집안의 힘을 보탰다. 이런 인연으로 안중근은 물론 집안 전체가 조선교구장인 뮈텔과도 잘 아는 사이였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이후, 니콜라 빌렘 신부의 장상인 뮈텔 주교는 안중근을 핍박하기 시작한다. 안중근은 일제의 재판으로 사형을 선고받게 되자, 순국하기 전에 고해성사를 보기를 원했다. 일본인 관리도 이에 동의하였기에 안중근의 동생과 사촌이 니콜라 빌렘 신부에게 고해성사 집전을 요청했으나, 뮈텔은 "안중근 토마스가 정치적으로 자신의 의견이 잘못되었다고 시인하지 않으면, 고해성사를 줄 수 없다"고 거부했다. 아래 내용은 뮈텔이 당시 쓰던 일기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1910년 2월 16일자 일기

오늘 저녁 5시 경에 여순 재판소 일본 검사로부터 사형수 안중근과 니콜라 빌렘 신부의 면회를 허락한다는 공문을 받았다. 이에 면회를 허락해 주어 감사하지만 여순으로 어떤 신부도 보낼 수 없다 답하였다.


이에 사촌 안명근 야고보가 뮈텔을 찾아와 다시 부탁했으나 그걸 거부하면서, 자신의 일기에는 "안명근 야고보가 아주 무례했다"면서 비난하기까지 했다. 여기서 알아둬야 할 것은, 뮈텔이 고해성사를 거부한 것에는 일제의 어떤 압력도 없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어떤 범죄를 저질렀다 하더라도 조건을 내걸면서 병자성사나 고해성사를 거부하는 것은 교리는 물론 교회법으로도 잘못된 행위이며, 주교에게 그럴 종교적 권한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안중근 의사에게 이토 히로부미 사살을 정치적으로 뉘우치지 않으면 성사를 주지 않겠다고 버틴 것이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와 인연이 깊었던 니콜라 빌렘 신부가 뮈텔의 금지령을 어기고 뤼순으로 건너가 고해성사를 집전했다. 그러자 뮈텔은 빌렘 신부가 귀국도 하기 전에 "정치적인 일에 관여했다"면서 2개월간 성사를 금지시키기까지 했다.[3] 이에 빌렘 신부는 파리외방전교회를 거쳐 교황청의 포교성성에 직접 탄원하였고, 교황청은 빌렘 신부의 행동에 정당성을 인정하고 성사금지령을 해제했다. 뮈텔 주교의 성사금지령을 교황청이 직권으로 취소시킨 것.

또한 당시 빌렘 신부는 이 모든 일에 대해서 뮈텔이 교회법과 교리에 어긋나고 파렴치한 행위를 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편지를 보냈으나, 뮈텔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나아가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후 자신의 일기에,

1910년 3월 28일

토마스[4]의 사형 집행이 26일에 있었다. 일본인들은 그 시신을 유족에게 넘기려 하지 않는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라고 적었다. 민족적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아도 사제로서 매우 의문이 드는 발언이다. 또한 그는 이전부터 안중근 의사와 잘 아는 사이였는데도, "그와는 전혀 모르는 사이이며 그런 흉악한 자가 천주교 신자일 리가 없다"는 주장까지 했으며, 이토 히로부미신토식 장례에 선교 사제 3명을 데리고 참여하거나, 수녀들이 만든 조문화환을 전시했다. 이에 대해서는 조선총독부에 잘 보여서 교세 확장에 도움을 받으려 했다는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다.

게다가 한국 천주교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뮈텔의 이런 태도는, 이후 천주교 내에서 안중근 의사가 수십 년에 걸쳐 암묵적인 배교자 취급을 당하며 묻히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현대 한국 천주교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故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이 안중근 의사를 평가하며 추도미사를 집전하고 그를 살인자로 매도한 천주교의 과오를 공식 사죄한 것은 겨우 1990년대 들어서의 일이다.

3.2. 대학 설립 방해[편집]

사실 안중근 토마스 의사와의 대립은 이미 오래된 것이었다. 안중근 의사는 민중의 교육 수준을 높이기 위해 대학을 설립하려고 했다. 이 대학은 일반 교육은 물론 천주교 신앙도 함께 가르치려는 것이었기에, 천주교 입장에서도 좋은 일이었다.

"지금 한국의 교인들은 학문에 어두워 교리를 전도하는 데 어려움이 적지 않습니다. 따라서 나라의 앞날은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만합니다. 민 주교[5]에게 말씀드려 서양 수사회에서 박학사 몇 분을 청하여 대학교를 세운 다음, 나라 안의 유능한 자제들을 뽑아 교육시킨다면 몇십 년이 지나지 않아 반드시 큰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 <안응칠 역사> - 40p[6]


그러나 뮈텔과 그를 추종하는 외국인 선교사들은 그 계획을 반대했는데, 이유는 만일 한국인이 학문을 배우게 되면 천주교를 믿는데 소홀해진다는 것이었다. 조선인에게 교육을 해서는 안 된다는 뮈텔의 사고방식들에 큰 충격을 받은 안중근 의사는 이후 외국인을 믿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고 반드시 필요한 외국어 공부들을 그만두었으며, 주변에도 "외국어를 익히면 외세의 종이 되기 쉽다"며 조심할 것을 권했다고 한다. 믿었던 뮈텔 주교에게 배신당한 안중근 의사의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다.

여담이지만 한국 천주교가 교육 사업 자체에 관심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그 대상이 중등교육이나 고등교육이 아니라 초등교육에 초점이 맞춰졌을 뿐. 그래서 해방 이후 정부 수립 과정에서 초등교육기관을 국유화하는 과정에서 천주교는 상당한 타격을 입는다. 반대급부로 중등교육과 고등교육에 더 관심을 가졌던 개신교는 그 때부터 승승장구.

3.3. 독립운동 밀고와 친일종교화[편집]

안중근 의사에게 세례성사고해성사를 모두 주었던 니콜라 빌렘 신부는 안중근 의사 집안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후, 그 사촌이던 안명근 야고보 의사 또한 독립운동에 투신했는데 비밀 독립운동 단체였던 신민회와 관련이 있었고 당시 일본 총독을 암살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으로 그 또한 천주교 신자였으므로 빌렘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하면서 이 계획을 털어놓았다. 빌렘 신부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이것을 뮈텔 주교에게 알렸다.[7][8]

이 말을 전해들은 뮈텔은 당시 날씨가 매우 안 좋았는데도 서둘러서 일본 헌병대에 밀고했다. 이 날이 1911년 1월 11일이라고 자신의 일기에 적혀 있다. 이 결과 국사책에도 나오는 105인 사건이 일어나고 신민회는 일망타진당하고 말았다. 이때, 수사와 관련해서 뮈텔과 헌병대는 긴밀하게 의논하며 협조했다는 사실이 뮈텔 본인의 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의 대가로 조선총독부의 도움을 받아 명동성당의 진입로를 넓히고, 총독부와의 우호적인 관계를 갖게 되었다. 더불어 조선왕조가 작성, 관리하던 공문서와 실록 등 온갖 기록을 마음대로 열람할 수 있게 해주고 희귀문서를 구할 수 있는 길을 알아봐주는 등 갖은 편의를 다 봐주었다.

즉, 뮈텔은 사제이면서 고해성사의 내용을 팔아서 성당을 짓고 많은 혜택과 특권을 누린 것이다.

3.4. 뮈텔이 고해성사의 비밀을 누설한 것인가?[편집]

뮈텔이 식민지 당국에 안명근 야고보의 '고백'을 누설한 것은 윤리적으로 책임을 물을 수 있지만, 교회법상으로 문제가 되는 '고해 비밀의 누설'은 아니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고해성사가 유효하기 위해선 고해자 자신이 이미 저지른 잘못에 대한 반성과 통회가 있어야 한다. 안명근 야고보가 니콜라 빌렘 신부에게 "내가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을 살해하려는 음모를 꾸몄는데, 잘못한 것이다. 하느님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한 것이라면 빌렘 신부와 뮈텔 주교가 저지른 행동은 가톨릭 교회법상 자동파문에 해당하는 대죄인 것이다. 그러나 안명근이 무슨 생각에서 데라우치 총독의 제거 음모를 일일히 말하고 "내가 민족과 형님의 원수를 갚기 위해 데라우치를 없애려고 한다.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하고 신의주까지 가려고 했다면 이는 무엇일까? 데라우치 제거 음모를 꾸민 것을 용서해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데라우치를 제거할 것이니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고해하는 것이 과연 합법적인 고해일까? [9] 오히려 안명근의 행동은 모고해로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런 식의 고백은 고해 신부가 사죄경을 거부해도 문제가 되지 않으며, 설령 사죄경을 바쳤더라도 적법한 고해성사가 될 수 없다. 고해를 한 사람은 다시 고해성사를 봐야하며 경우에 따라 모(侮)고해로 그 죄를 고해하여야 한다.

뮈텔 주교와 니콜라 빌렘 신부의 모국 프랑스에서는 범죄 음모를 꾸미려는 사람이 고해성사를 보면서 잘못을 속죄하려는 것이 아니고, 나중에 저지르는 범죄에 대해 벌을 면하려는 요량으로 고해성사를 보려는 경우 경찰 당국에 신고하거나 사죄경을 주지 말라는 사목지침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지침은 앙리 4세 암살 사건 이후 만들어 진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교회의 전통으로 미루어 봤을 때 빌렘 신부와 뮈델 주교의 처사를 고해 비밀의 누설이라고 볼 수 없고, 안중근 토마스와의 인연에도 빌렘 신부가 안명근 야고보의 이야기를 한 것은 교회를 지키려고 하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으나, 이들의 행동은 정당화 될 수 없다. 빌렘 신부야 안중근과의 옛 정을 버리고 밀고하여 조선 독립의 소중한 기회를 걷어찼단 점에서 비난을 받아야 할 것이고, 특히 뮈텔 주교의 행적은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10]

3.5. 3.1 운동 방해[편집]

1919년, 3.1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서울의 천주교 신학생들도 이에 가담하려고 했다. 이에 대해 뮈텔은,

“그들은 나를 붙잡고 나라가 이렇게 학대받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다며 울기도 하고 발을 구르기도 하고 정말로 무서운 모습이었다. 마침내 그들에게 질서를 지키도록 간청했고 이에 동의하지 않으면 차라리 신학교를 떠나라고 했다.”


이라고 자신의 일기에 묘사했다. 이처럼 뮈텔은 동족의 고통에 울면서 애타하는 신학생들을 무서운 폭도처럼 묘사하고 독립군들을 산적과 강도라고 주장하면서, 만세운동에 참여하지 말 것을 강요하고 이에 따르지 않는 신학생들은 퇴학시켰다.

어떤 이는 "당시 교황 베네딕토 15세가 직접 나서 퇴학당한 신학생들을 복교시켰다"고 하는데, 이는 억측에 불과하다. 당시 신학생이었던 서울대교구 윤형중[11] 마태오 신부, 방유룡[12] 레오 신부, 구천우 요셉 신부의 회고에 따르면, 하나같이 "만세운동 대열에 우리들도 끼고 싶었지만, 신학교 교수 신부님들과 주교님들이 퇴학시키겠다고 엄포를 놓아서 그저 속으로만 외쳤다"고 한다. 기어이 만세운동에 참가하여 퇴학당한 학우에 대한 그리움 혹은 안타까움을 드러내고 있는데, 신학교에 다시 돌아온 사람에 대해서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뮈텔 주교의 처사가 그릇된 것이 너무나 많지만, 사실에 근거해서 꾸짖어야지 거짓말(혹은 집필자의 상상)을 덧붙일 이유는 하나도 없다. 쓰레기 주교

이건 다른 교구의 외국인 주교신부들도 다를 바가 없었다. 대표적인 예로 대구대목구의 초대 감목이었던 프랑스인 플로리아노 드망즈 주교의 일기에서도 드러난다

한국 젊은이들이 전 황제의 장례식을 계기로 서울과 다른 곳에서 조선독립을 위한 시위를 했다(3.1 운동을 말함). 수많은 사람들이 체포됐지만 신문들은 절대적 침묵을 지키고 있다. 대구 신학교에서는 신학생들이 흥분돼 있다. 그들은 그저께 저녁, 운동장에서 독립을 위한 노래를 불렀고, 교장은 그것을 그만두게 하느라 애를 먹었다. 그 후 화가 나 있으며, 아마도 성소(聖召)[13]를 잃는 학생들도 나올 것이다.

9일, 아침에 대성당(계산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돌아와 식사를 한 후, 줄리앙 신부가 "신학교 상황이 심각하다"는 이야기를 하러 왔다. 샤르즈뵈프 신부의 온갖 권면도 소용이 없었고, 학생들은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고, 시내에서 행진을 하기로 결정했다.

샤르즈뵈프 신부는 그의 권위가 무시된 것을 보고 의기소침해 있다.[14]신부들을 포함해 전 학생을 체육실에 집합하도록 지시하고, 교리 강의 때문에 대성당으로 가는 길에 신학교로 갔다. 그들을 앉히지 않고 나는 그들에게 "순명하지 않는 신학교를 원치 않는다. 신학생들과 상관 없는 정치적 소요 같은 행동이 일어난다면, 유죄/무죄를 불문하고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고, 신학교 문을 닫겠다."고 냉혹하게 단호하게 말했다. 그 후 교리 강의를 하러 갔는데, 거기에 경찰이 있었다.

3.6. 우월의식과 조선인 차별[편집]

<안응칠 역사>에 나오듯이 조선인의 교육을 방해하고 우매하게 만들어 가톨릭 교리만 가르치려고 노력하던 뮈텔은, 조선미개한 국가로 여겼다. 이런 우월의식을 바탕으로 그는 "프랑스인 신부가 한국 법정에 출두하게 되면, 조선인의 눈에 한 유럽인이 조선 법정의 재판권에 굴복한 것처럼 보여 좋지 못한 결과를 가져오지 않겠는가"라면서 프랑스 신부들이 조선의 정부와 법정을 무시하도록 권유했다. 이러한 뮈텔의 지침 때문인지, 외국인 선교사들은 외국인이라는 특권을 이용해 조선 관아에 난입해 죄수를 마음대로 데리고 나가고 건물을 부수거나, 신자들을 거느리고 비신자나 관리들을 폭행하며 타 종교의 상징물을 부수는 등의 파렴치한 행위를 일삼았다.

게다가 같은 천주교 신부라도 조선인이면 같은 사제라고 여기지 않았고, 조선인 신자들이 인사를 해도 받아주지도 않았다. 이러한 뮈텔 주교와 외국인 신부들의 행태에 대해, 당시 조선인 김명제 베드로(1908-1960)[15] 신부가 "왜 우리들을 막 대하는가?!" 라고 편지를 쓸 정도였다.

사실 이런 문제는 천주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개신교도 비슷한 문제를 겪었다. 장로교 조선인 목사들은 "서양인 선교사들이 우리를 하등인종 대하듯이 한다!!"고 항의한 일도 있었고[16] , 구세군인종차별 문제로 분규를 겪기도 했다.

4. 후대의 평가[편집]

온갖 막장 행태를 보였는데도 한동안은 한국 천주교의 기틀을 다진 인물로 평가받았으나, 그가 남긴 일기가 번역되고 다른 사료들이 발굴, 연구되어 그가 저지른 만행과 그릇된 사고방식이 밝혀지면서 비판받고 있는 인물이다.

게다가 그가 저지른 행동은 단순히 한국인의 관점만이 아니라 신앙의 관점에서만 보아도 매우 잘못된 점이 많은데다[17], "뮈텔 주교의 적극적인 친일행각과 조선 민중에 대한 무시가 1920년대 천주교의 성장을 정체시켰다"는 주장도 있을 정도이다. 그래서인지 그에 대한 연구가 진척되는 근래 들어서는, 천주교에서도 뮈텔 주교를 적극적으로 옹호하지는 않는다. 또한, 천주교 주도로 그의 일기가 번역, 발간되기도 했다. 번역은 故 최석우 안드레아 몬시뇰이 시작했으며,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발간했다. 참고로 연구소장은 주교급이다. 일기의 내용을 생각하면 번역, 발간한 천주교의 대인배 인증일지도.

그러나 뮈텔의 실체를 일반 신자들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은 채 그와 관련된 사적지를 성지순례라는 명목으로 신자들에게 권유하고 있는 실정이다. 교회사나 한국 근대사를 잘 모르는 신자들의 경우에는 그저 위대한 선각자로 착각할 우려가 큰 대목이다. 2011년도에는 그와 관련된 심포지움도 개최되어 여러 사학자들의 연구가 발표되었다. 또한 그가 수십년에 걸쳐서 남긴 일기는 구한말~일제강점기한국 천주교 역사뿐 아니라 독립운동에도 중요한 자료이다.

취소선을 그어놓기는 했지만, 예수의 성전 정화 일화에서 보듯이, 당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에게 디스를 하셨던 예수님께서 이 자의 위선을 보셨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는 안 봐도 비디오다.

[1]가톨릭대학교/성신교정 자리[2] 후임교구장 아드리앙 조셉 라리보 주교는 서울대목구의 보좌주교로서 뮈텔 주교의 사목활동에 협력했고, 노기남 바오로 주교는 서울대목구 주교좌 성당인 명동성당의 보좌신부를 12년간 지내면서 뮈텔 주교와 라리보 주교를 모셨다. 그러나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은 출신이 서울대목구가 아니라 대구대목구였으며, 독일에서 사회학을 공부했던 진보적 사제였다.[3] 이 과정에서 뮈텔은 어떤 절차도 지키지 않았다.[4] 안중근 의사의 세례명이다. 안중근 의사가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고 주장한 뮈텔이, 정작 일기에는 세례명으로 안중근 의사를 부른다.[5] 뮈텔 주교의 한국식 성이 민씨이다.[6] 안중근 의사가 순국하기 전 쓴 자서전이다.[7] 이에 대해서는 고해성사가 아니라 단순한 대화였기 때문에 문제가 안 된다는 옹호가 있었다. 그러나 털어놓은 내용의 중대성과 니콜라 빌렘 신부가 안중근 일가의 신앙생활에 큰 역할을 하던 신부라는 것, 그에 더해 암살, 즉 살해계획이라는 성질상 고해성사였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뮈텔의 일기를 통해 이런 주장이 나오지 않게 되었다.[8] 빌렘 신부 또한 고해성사 내용을 누설했기에 교리로도 문제가 된다. 어쨌든 그가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뮈텔 주교와 달리 그는 한국독립운동에 비교적 호의적이었다. 뮈텔 주교와 계속 갈등을 겪던 그는 결국 1914년, 프랑스로 내쫓기다시피 옮겨갔는데 3.1 운동 당시, 프랑스에서의 만세운동을 도왔다.[9] 이런식의 고해성사가 유효하다면 가톨릭개독으로 전락할 위험이 개신교에 비해서 많아지게 된다. 시어머니를 몹시 미워하는 며느리가 독살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고해 사제에게 고백을 하고 주어진 보속을 한 다음 시어머니의 밥상에 독약을 타면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결과가 된다.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일까? 고해성사에 있어서 필요한 것은 다시는 죄를 짓지 않기로 하는 굳은 결심이다. 나중에 죄를 짓겠다고 하는 것이 그런 결심의 발로인가? 뮈텔 주교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가톨릭 신자들이 많지만, 이들이 뮈텔에 대해 '고해성사 누설' 의혹을 제기하지 않은 것은 그런 이유에서이다.[10] 믿었던 성직자의 배반에도 불구하고 안명근 야고보는 신앙을 잃지 않았다. 오히려 신앙인으로서 안명근은 이들 두 프랑스인 사제보다 훌륭한 태도를 가졌던 것 같다. 안명근은 공소 신자들을 돌보다 전염병에 걸려 선종하였다.[11]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은 소년 시절, 마르크스주의와 유물론에 대해 들으며 신앙이 흔들렸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1947년 사순시기에 명동성당에서 윤형중 신부의 강의를 듣고 크게 깨달아 신앙심을 굳건히 다지게 되었다고 한다.[12]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한국순교복자수녀회, 한국순교복자빨마수녀회의 설립자.[13] '하느님의 부르심'이라는 뜻. '성소'란 넓은 의미로는 직업, 직분, 가정생활, 독신생활 등 다양한 삶의 형태를 가리키며, 어느 것이건 하느님의 부르심이므로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다만 흔히 가톨릭에서 (좀 더 구체화시켜 좁은 의미로 말하는) 성소란, 사제수도자의 길로서의 부르심을 뜻한다.[14] 학생들을 달래면서 본국에서 수도원장 주교직도 포기하고 이 조선에 왔는데 학교 문닫아버리면 나는 어떡하란 말이냐라고 징징거렸다고한다.[15] 16번째 한국인 사제. 천주교 부산교구 소속.[16]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던 김활란, 윤치호대동아 공영권을 내건 일제에 부역하면서 들은 이유변명 중의 하나가, 그들이 미국에서 체재할 당시 받았던 극심한 차별 때문이었다. 미국인의 인종차별은 그렇게 치를 떨면서, 일본인들의 차별은 안 느껴졌더냐?[17] 고해성사 누설의 경우는 누설이 아니라는 의견 역시도 타당성이 있으니 그렇다쳐도, 고해성사 거부, 적법한 절차를 무시하고 니콜라 빌렘 신부에게 성사 금지 크리를 먹인 점 등등 교회법적으로 봐도 이미 맛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