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베클리 테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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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öbekli Tepe[1]

1. 개요2. 연도3. 유적지의 건설4. 몰락5. 해석
5.1. 혜성 소나기와의 연관성?
6. 발굴 책임자이던 슈미트 교수7. 기타
7.1. 아르메니아의 반발

1. 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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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남동쪽 샨르우르파(Şanlıurfa)도 외렌직(Örencik)군에 있는 유적. 해발 760미터에 위치한 언덕 정상에 묻혀 있다가 1963년에 미국 시카고 대학과 터키 이스탄불 대학의 공동조사[2]를 통해 처음 세상에 알려졌으며 1994년부터 2014년까지 독일 고고학자 클라우스 슈미트에 의해 발굴 조사가 이뤄졌다. 20여 개에 달하는 원 모양으로 세워진 총 200개 이상의 T자 형태 돌기둥 유적이 특징이며, 그중 가장 높은 것은 5.5미터에 달한다.

이렇게 보면 그냥 평범한 고대 유적지로 보이지만...

2. 연도[편집]

문제는 이 유적이 세워진 것이 기원전 80-100세기,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무려 12,000년 전이라는 것이다. 현재까지 발굴된 제3계층의 연도는 9100~8600년 전으로 분석되었으나 그 중심의 제의를 지내던 단상 부분은 기원 전 11000년이나 그 이전인 플라이스토세 말까지도 올라가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이는 메소포타미아, 이집트의 고대 유적을 아득히 뛰어넘을 뿐 아니라[3] 현재까지 발견된 어떠한 문화 유적까지 앞서는, 이제 겨우 원시적인 농업이 시작되려던 신석기 시대 초기로 추정되는 시기이다. 고고학계에서 주장하던 기존의 학설에 따르면 인류가 이러한 거대 유적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건설 작업에 필요한 체계적 노동력이 필요하고, 이에는 농경 생활에 따른 체계적 사회 조직의 등장을 전제 조건으로 보았는데, 현재까지 알려진 괴베클리 테페는 이러한 학설을 정면 부인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실존하는 초고대문명이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유적이 발견된 언덕 주변을 레이더 스캔해본 결과 또 다른 구조물들이 지하에서 발견됐는데 이들의 연대는 매머드가 활동하던 시대인 플라이스토세에 해당되는 14,000~15,000년 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는 사실인데 이쯤 되면 초고대문명설떡밥으로 쓰여도 이상할 것이 없지만 의외로 잘 알려지지 않아서인지 그런 주장은 별로 없다.[4]

3. 유적지의 건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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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베클리 테페는 언덕 위에 스톤헨지처럼 원 모양으로 세워진 돌기둥들이 특징인데, 이 돌기둥들에는 여러 곤충동물 형상들이 양각되어 있다. 돌기둥들은 사람을 나타낸 것으로 추정되는 T자 형상을 하고 있다. [5] 다른 유적에는 사람의 얼굴을 형상화한것을 보아 사람 얼굴을 조각할수있지만 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되며 애초에 이곳이 일상생활을 위한 곳이 아니라는게 유력한점, 굳이 중간에 T자형 돌기둥을 세워 몸통부분에 손모양을 조각한점을 보아 신앙을 위해 신을 형상화했지만 얼굴부분은 조각하지 않은것으로 추정한다. 유적지 주변에서는 농사를 짓거나 사람이 거주했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학자들은 수렵 채집에 의존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건립 집단이 이곳에서 연중 어느 정도는 머무르며 종교적 행사를 치렀을 것으로 본다. 이는 주변에서 잡아서 이곳으로 가져와 먹고 묻은 야생 동물들의 뼈가 대량으로 발견된 점에서 유추된다.

돌 기둥들은 인근에 위치한 석회암 언덕에서 바위를 떼어내 운반했는데, 기둥 하나의 무게가 10~20톤에 달했기 때문에 운반과 조각, 건설에는 적어도 체계적으로 집단화된 500명 이상의 사람들이 필요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괴베클리 테페에서 문자[6]바퀴, 토기, 청동기의 사용 흔적이 발견되지 않은 점, 그리고 농업이나 가축 사용을 짐작하게 할 만한 유물도 발견되지 않은 점에서 기존 신석기 혁명과 농업 발전을 통한 인류의 집단 사회 구조 형성의 흐름으로 이해되는 기존 학설에 충돌되는 점이다.

4. 몰락[편집]

괴베클리 테페는 세워진 뒤 약 2000년간 신전으로 사용된다. 원 모양으로 세워진 기둥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고의적으로 메워진 뒤 인근에 새로운 기둥들을 세우는 등 몇 번에 걸친 변화가 이루어진다. 후기로 갈수록 기둥을 제작하는 방식은 단순해지고 조잡해지는 경향이 있고, 결국 기원전 8000년쯤에 괴베클리 테페는 버려지게 되면서 땅속에 묻히게 된다. 다만 특이한 것은 이는 신전이 사람들의 왕래가 끊기며 자연스럽게 묻힌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고의적으로 땅을 파 기둥을 메운 뒤, 그 위에 석회 자갈과 석기 도구들, 그리고 동물과 인간의 뼈를 묻은 뒤 버려졌다는 것이다.

고의적으로 신전을 매장한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종교/정치적인 분쟁이나, 지배 계급에 대한 반란 등에 휘말렸을 것이라는 시각이 존재한다. 예를 들면 새로운 종교를 믿는 무리가 신전 일대를 지배하게 되면서 괴베클리 테페를 일종의 이교도의 건축물로 규정하고 묻어버렸거나, 혹은 그 이전에 누군가가 돌기둥들을 숨기거나 보존하기 위해 묻었다는 것[7].

5. 해석[편집]

이처럼 괴베클리 테페는 학계에 큰 혼란을 야기하면서도 동시에 향후 인류 발전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유적으로 여겨진다. 다만 문제는 유적의 극히 일부만이 출토된 상황[8]이기 때문에 제대로 된 연구가 나오려면 발굴 기술 발전 등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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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까지의 발굴 성과에서 유추된 가설들은 대부분 발굴을 진행했던 독일고고학연구소의 클라우스 슈미트 교수에 의해 제기됐다. 그는 신전의 성격을 돌기둥의 동물 형상들이 수렵 장면 속 사냥감으로서 묘사된 것이 아니라 신격화된 형상의 사자나 거미, 뱀, 전갈이라는 점에서 이곳을 사냥 성공을 기원하기 위해 지어진 곳보다는 죽은 자들을 보호하는 신들을 모시는 장소로 보았다. 또한 새들, 특히 독수리 형상이 많이 보이는데 이는 차탈회육(Çatal höyük)과 예리코에서도 많이 보이는 독수리 이미지와 더불어 괴베클리 테페를 비롯한 고대 아나톨리아와 중동권에서 조장 풍습이 존재했었을 거라 추측된다. 실제로 유적지에서는 인골들이 출토되어 이곳이 당시 사람들의 사후 세계관과 연관된 장소임을 추측 가능하게 한다. 돌기둥들의 T자 형태에 대해 슈미트는 앞의 가설과 더불어 동물신들이 보호하는 죽은 자들, 즉 당시 사람들의 조상들을 형상화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는 이러한 괴베클리 테페의 언덕 위 신들의 이미지가 고대 기억으로 남아 수메르인들에게 이어져 메소포타미아 신화속 에쿠르 신전 이야기로 전해내려왔다는 가설도 제기했다.

괴베클리 테페를 해석하는 데 가장 관건이 되는 것은 어떻게 이러한 건축에 필요한 조직 노동력과 문화가 농업이 나타나기 전에 가능했냐는 점이다. 아직까지 괴베클리 테페에서는 농경지나 거주지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인근에 위치한 후대 유적인 네발르 초리(Nevalı Çori)[9]에서 괴베클리 테페와 비슷한 양식의 돌기둥과 조각들이 발견되고 또한 괴베클리 테페와 달리 집터들과 원시적인 농사 흔적이 밝혀졌다. 두 유적이 위치한 지역은 현대 밀 재배종의 원산지이며 네발리 초리의 밀농사는 최초의 밀 재배로 여겨진다. 이에 대해 슈미트는 야생 곡물을 채집하여 식량원으로 삼던 이곳 사람들이 어느 순간부터 집단적으로 곡식을 재배하기 시작했다고 추정했다.

이를 종합하면 집단 사회 체계를 농경 정주 생활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기존 학설과 정반대로 수렵 채집민들에게서도 집단 체계가 나타날 수 있고 농업 또한 이들에 의해 조직적으로 발생할 수 있다는 기존 우리가 알던 상식과 반대되는 이야기이다. 다시 말해 기존에는 우선 원시적인 농업활동이 생기고 그에 따라 먹을 것이 충분한 상황에서 사람들이 을 섬기는 유적을 만드는 여력이 되는 것이 인류 역사의 흐름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이 당시 농업을 했다는 증거가 아직 발견되지 않았기에 문제가 되는 것. 여기에 스토리를 짜 맞추면, 먼저 종교가 있었고, 종교적 제단을 만들기 위해 사람이 모일 수밖에 없었고 그 인력을 먹여살리기 위해 농업이 발달한 게 아니냐는 충격적인 가설이 짜맞춰지게 된다.

사실 그동안에도 이에 대해 문제점이 제기됐었는데, 단순히 놓고 봤을 때 원시적인 농업은 결코 수렵채취보다 많은 식량을 얻기 힘들었으며 또한 영양학적으로도 수렵채취 쪽이 더 나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어떠한 이유 때문에 사람들이 다수 모였다면 일정 지역 내에 제한적인 식량만이 생산되는 수렵채취보다 인위적으로 식량 생산을 증가시킬 수 있는 농업이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즉 위의 가설이 맞는다면 인류가 농업으로 전향한 미스테리가 어느 정도 풀리는 것. 확실한 건 발굴이 더 진척돼야 알 수 있겠지만 기존 학설을 뒤엎을 수 있는 괴베클리 테페의 고고학적 중요성이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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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황소자리플레이아데스 성단과 비슷하여 천문학적인 요소가 들어간 것이 아닌가 하고 추정하는 사람도 있다.프로메테우스가 생각난다

5.1. 혜성 소나기와의 연관성?[편집]

떠돌아다니던 유목민들이 갑자기 어떤 동기로 모여서 신전을 건축하게 되었는가도 상당한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그린란드의 아이스 코어, 지구 궤도 이심률 변화, 북아메리카 지질 역사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기원전 11000년 경에 지구는 황소자리 유성우의 중심 지역을 통과했고, 이 때 대규모 혜성 충돌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밝혀졌는데, 이 사건이 괴베클리 테페의 건립 동기가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한발 더 나가자면, 혜성 충돌로 인해 전 지구적인 재앙이 발생했는데, 이 사건에 종교적인 영감을 얻은 한 무리가 이를 기록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한 곳에 정착하여 모여 살게 되었고, 자연히 농업을 터득하게 되었다는 것. 앞의 황소자리의 예와 비슷하게 돌기둥에 새겨진 동물들의 형상과 배치는 별자리와 관련이 깊을 것이라는 추측이 많다. 일부 학자들은 괴베클리 테페의 문양을 새긴 사람들이 지구의 세차운동을 알고 있었을 정도로 고도의 천문학 지식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6. 발굴 책임자이던 슈미트 교수[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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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스 슈미트 Klaus Schmidt 1953.12.11-2014.07.20

너무나도 안타깝게 이 유적의 발굴 시작부터 모든 것을 관리했던 클라우스 슈미트 교수는 2014년 7월 20일 수영 중 심장마비로 만 60세 나이에 급사하고 말았다. 현재는 아내 치으뎀 쾩살 교수가 유적을 관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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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으뎀 쾩살 Çiğdem Köksal

그녀의 페이스북을 보면 발굴 관련상황과 더불어 남편 클라우스 교수에 대한 재밌는 일화를 읽어볼 수 있다. 물론 터키어다. 꽤나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모양이다.

7. 기타[편집]

이 지역이 이슬람 국가에 의해 개판이 된 시리아 국경 접경 지역이라 유럽 난민 사태 등으로 인해 발굴에 차질이 생길 듯하다. 2014년 8월 경 이스탄불 대학의 이희수 교수가 이곳을 방문할 때 난민 수용지 근처라 검문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도 터키에서는 세계적인 유적지가 될 전망을 안고 기대하고 있으며 열심히 발굴 및 연구를 지원하고 있다. 위에 T자 돌탑들도 2016년 중순에 개장될 우르파 고대 박물관에 들어가 보관 중이며 중무장한 군이 배치되어 학자들을 경호하고 있다. 이희수 교수는 이 돌탑들을 보고 싶어했으나 박물관에 이동하여 개장 준비 중이라는 말을 듣고 그래도 조금이라고 볼 수 있을까 해서 박물관에 갔지만 당연히 개장하려면 한참 남았다고 거절당했다. 그래도 터키 내 인맥을 동원하고 외국인으로서 보고 싶기에 여기까지 왔다고 애원하여 마침내 부관장에게 특별히 개인적 관람을 허락받아서 정해진 시간이나마 직접 보았는데 겨우 10% 수준 발굴되었음에도 상당수 유적이 출토되어 이것들을 일부만 봤음에도 감명받았으며 이게 세계적인 관광지가 되고도 남을 것 같다는 소감을 적었다. 다만 인근 동네들이 정국이 좋지 않은 터라 문제이다.

2017년 9월 28일, 터키언론에 따르면 괴베클리 테페와 동시대의 유적이 티그리스강 근처 하산케이프 지역에서 발견이 되었다고 한다. # 무려 괴베클리테페를 세운 수렵, 채집생활을 하던 수준의 사람들이 천년간 거주하다 떠나간 도시 유적. 터키 정부의 아나톨리아 지역 개발계획에 의해 댐 예정지 조사를 진행하다 발견된 곳이라 몇 년 뒤 해당 지역이 수몰될 예정인 것이 문제.

7.1. 아르메니아의 반발[편집]

그런데, 아르메니아에서는 원래 고대 아르메니아 시절부터 아르메니아인들이 살고 있던 영토였다고 주장한다.[10] 아르메니아인들은 성경에서 방주를 만들었다고 기록된 노아의 5대손 하이크(Hike)가 시조이며, 대홍수 직후 처음 땅을 밟은 노아가 신에게 공물을 바쳤다고 알려진 아라라트 산을 자신들의 상징으로 삼았고, 고대 아르메니아 시절에는 그 엄청난 로마 제국과 전쟁을 벌일 정도로 그들의 역사는 깊다. 수많은 외침을 받은 이 지역에서 지금의 터키 전신인 오스만 제국의 소수 무슬림들이 기독교를 가진 다수의 아르메니아인들을 지배하기 시작한 건 11세기 무렵. 그동안 자치 구역으로 자신들의 삶을 이어갔지만 19세기 국가와 민족의 개념이 대두되는 민족주의가 전 세계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1915년부터 1918년에 걸친 아르메니아 대학살 이후, 아르메니아인들은 터키에 여러 영토를 빼앗긴 채 아라라트 산 바깥쪽 작은 땅으로 내몰렸다. 아르메니아인들은 그들의 긍지가 담긴 이 유적지를 원래부터 자신들의 역사인 것마냥 광고하는 터키에 대해서 분노를 느끼고 있으며,[11] 터키 이름인 괴베클리 테페 대신 예전 아르메니아 이름인 '포르타사르(Portasar)' 로 불러주길 희망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가 포르타사르라는 알파벳으로 구글 검색하면 뜨는 사이트들도 죄다 아르메니아 관련 사이트가 대부분. 여기선 괴베클리 테베가 아니라 이 이름으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영어나 프랑스어 등등 위키피디어를 봐도 괴베클리 테페에 대하여 아르메니아어로 나온 것 자체부터 아예 없다. 다만 본문에 아르메니아에서는 포르타사르라고 불린다 정도로만 언급될 뿐.

또한 괴베클리 테페가 발굴된 지역은 전통적인 메소포타미아 지역이자 문명권이였던 지역이기에 아르메니아의 주장이 억지라는 의견도 있다. 뭐 메소포타미아 최상류 지역에 아르메니아 인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시기가 있었으나 최소 7세기 이슬람 발흥 시기 이후 기존 원주민인 셈계열 아람-아시리아인들은 동로마, 이슬람의 분쟁지대가 된 해당지역을 떠나기 시작하고. 그 공백을 이슬람의 위협을 피하여 동로마 영내나 그 접경지대로 아르메니아인들이 대거 이주해서 해당 지역은 아르메니아 대학살 이전까지 아르메니아 인들이 다수를 차지했기에 고대 문명이랑 아르메니아는 무관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것도 진짜 토착민족이 누구인가를 전 세계에서 가장 찾기 힘든[12] 소아시아와 메소포타미아 지역 이라는 큰 차이가 있어서 같은 문제로 대입해서 보기는 힘든 실정이다.

그리고 까먹지 말아야 할 것은 아르메니아인들은 인도유럽어족이다......본래 흑해 근처가 고향인 사람들로 이 지역까지 오는 데엔 아무리 수천 보쯤 양보해서 이르게 잡아도 기원전 4000년 즈음이었을 터다. 지금도 흑해 근처인데??


그런 가운데, 2011년부로 유네스코 잠정세계유산에 등재되어 이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가능성도 크다. 터키 측에서는 세계문화유산 등재기준 i, ii, iii, iv, vi에 의거하여 신청했다. 쾨베클리테페 잠정세계유산 페이지. 당연하지만 아르메니아는 여기가 터키 이름으로, 터키 것으로 알려진다고 결사반대하지만 ... 미국도 유럽도 이런 아르메니아의 반대에 외면하고 있다. 그도 그런게 여기에 아르메니아인이 살았다는 증거또한 없다. 물론 사람뼈를 통하여 DNA체취를 하여 알아본다고해도 아닐 가능성이 더 높다. 극히 객관적으로 봤을때 웃음거리만 될 뿐...

[1] 터키어로 '배불뚝이 언덕'이란 뜻이다.[2] 첫 발굴은 현지인이 우연히 찾아서 몰래 파내려다가 걸려서 알려진 거였다고 한다.[3] 현대에서 기록이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문명인 수메르 문명과의 연도 차이보다 수메르와 괴베클리 테페의 연도 차이가 더 크다. 간단하게 보면 다음과 같다
괴베클리 테페 → (약 7,000년) → 수메르 문명 → (약 5,000년) → 현대시대(20세기 이후)
[4] 하지만 이 유적이 본격적으로 발굴되고 자료들이 축적되면서 국가 체계를 갖출 정도로 발달된 문명이 이 시기부터 이미 존재하지 않았냐는 추측과 주장이 주류학계에서 계속해서 제기되고 있으며 조금씩 힘을 얻고 있는 추세다. 요약하자면 괴베클리 테페는 국가 혹은 국가에 준하는 수준의 체계를 갖춘 문명 세력(초창기 원시 고대 도시국가)의 산물이 아니냐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국가는 그레이엄 핸콕이 주장하는 오버 테크놀로지 초고대문명국이 아닌 고대 도시국가를 의미한다.[5] T자형 돌기둥의 몸통부분(ㅣ부분)에는 손과 인체형상이 조각되어있지만 얼굴부분(ㅡ부분)에는 아무런 조각의 흔적이 없다.[6] 다만 유적의 기둥에서 문자로 추정되는 기호가 발견되었다.[7] 이 주장은 파괴의 흔적이 나타나기보다는 돌기둥들이 비교적 '온전하게' 묻혀 있었다는 사실로 유추할 수 있다[8] 아직 겨우 10% 남짓 발굴되었으며 이희수 교수의 글에 의하면 적어도 60~70년은 걸려야 한다고.[9] 1983~1991년간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초기 신석기 거주지 유적으로 농업의 흔적과 매장의 흔적도 발견된 곳이다. 약 기원전 8400년에 세워져 8100년에 몰락한 것으로 추정된다.[10] 확실히 튀르크족보다는 아르메니아가 선주민이라곤 하지만 이 유적은 1만 년도 넘는 유적이다.[11] 잘 알려져있다시피 터키인의 정체성은 중세에 동양에서 이주해 온 자들의 후손이다.하지만 그렇다고 아르메니아도 이 유적과 문화적으로 연관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여서 아르메니아 극우들의 이런 비하는 되려 비웃음만 듣는다.[12] 15000년 전이면 사실상 현재의 민족 분류를 대입하기도 힘들어진다. 저 지역 근방에 자리잡은 현재 민족들 공통의 조상의 범주로 넘어가버리기 때문.. 뭐 투르크계가 아르메니아인 이후에 들어왔다는데는 이견이 없긴 하다. 이건 터키인들도 이미 알고있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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