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광역시/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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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회의원 목록2. 최근 선거 결과
2.1. 지선2.2. 대선2.3. 총선2.4. 세부 내용
3. 설명
3.1. 서막 : 독재 시절3.2. 제 1막: 고통의 시간3.3. 제 2막: 민주당 집권 10년
3.3.1. 제 1장 : 선택된 운명3.3.2. 제 2장 : 신뢰에서 불신으로
3.4. 제 3막: 보수 정권 9년3.5. 제 4막: 민주당의 전성기 속에서
3.5.1. 제 1장: 대안정당 심판3.5.2. 제 2장: 민주당의 운명3.5.3. 제 3장: 여당
4. 여담

1. 국회의원 목록[편집]

2. 최근 선거 결과[편집]

2.1. 지선[편집]

광주광역시 개표 결과 (자치단체장)

광주광역시장

구청장

정당

더불어민주당

바른미래당

정의당

정당

더불어민주당

민주평화당

후보

이용섭

전덕영

나경채

의석수

5석

0석

득표수
(득표율)

573,995
(84.07%)

34,487
(5.05%)

40,916
(5.99%)

득표수
(득표율)

487,007
(71.58%)

103,887
(15.27%)

동구

83.58%

6.92%

5.33%

동구

53.92%

40.40%

남구

84.91%

5.33%

5.78%

남구

68.85%

8.93%

서구

84.37%

4.92%

6.05%

서구

66.61%

-[1]

북구

83.94%

4.76%

5.64%

북구

77.21%

22.78%

광산구

83.62%

4.79%

6.66%

광산구

75.82%

15.55%

광주광역시 개표 결과 (광역의원)

지역구

비례대표

정당

더불어민주당

민주평화당

정의당

더불어민주당

민주평화당

정의당

의석수

22석

0석

1석

461,406
(67.47%)

56,341
(8.23%)

87,327
(12.77%)

동구

2

0

0

65.15%

10.90%

10.62%

남구

3

0

0

66.77%

8.16%

13.50%

서구

4[2]

0

0

68.08%

8.32%

12.57%

북구

6[3]

0

0

67.70%

9.89%

11.96%

광산구

5

0

0

68.07%

5.53%

13.85%

지역구

20석

0석

0석

2석

0

1석

광주광역시 개표 결과 (기초의원 · 교육감)

구의회의원

교육감

정당

더불어민주당

민주평화당

정의당

민중당

후보

이정선

장휘국

최영태

의석수

55석

9석

1석

3석

득표수
(득표율)

243,574
(35.80%)

258,321
(37.97%)

178,330
(26.21%)

동구

5

1

0

0

동구

40.00%

36.98%

23.01%

남구

7

2

0

0

남구

36.94%

35.00%

28.04%

서구

8

2

0

1

서구

35.63%

36.56%

27.79%

북구

13

4

0

1

북구

35.11%

38.35%

26.53%

광산구

13

0

1

1

광산구

34.88%

40.75%

24.35%

지역구

46석

9석

1석

3석

비례대표

9석

0

0

0

2.2. 대선[편집]

* 동별 단위 대선 득표율을 알고 싶다면 동구, 남구, 서구, 북구, 광산구 항목에서 각각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광주광역시 개표 결과

정당

더불어민주당

자유한국당

국민의당

바른정당

정의당

후보

문재인

홍준표

안철수

유승민

심상정

득표수

583,847
(61.14%)

14,882
(1.55%)

287,222
(30.08%)

20,862
(2.18%)

43,719
(4.57%)

동구

56.05%

1.97%

35.45%

2.07%

4.03%

남구

58.82%

1.73%

32.73%

2.11%

4.12%

서구

60.76%

1.55%

30.44%

2.26%

4.52%

북구

61.06%

1.45%[4]

30.38%

2.15%

4.53%

광산구

64.27%

1.46%

26.42%

2.22%

5.08%

문재인 득표율 TOP5 [동 단위]
◎ 1위 광산구 수완동 (68.22%), 2위 광산구 신창동 (67.42%), 3위 광산구 하남동 (66.79%), 4위 북구 건국동 (65.80%), 5위 광산구 운남동 (65.66%)

문재인 득표율 LOW5 [동 단위]
◎ 1위 광산구 본량동 (46.07%), 2위 동구 충장동 (49.86%), 3위 동구 계림1동 (51.06%), 4위 서구 양동 (51.42%), 5위 북구 중앙동 (52.51%)


안철수 득표율 TOP5 [동 단위]
◎ 1위 광산구 본량동 (44.05%), 2위 서구 양동 (43.35%), 3위 동구 계림1동 (41.29%), 4위 동구 충장동 (40.83%), 5위 남구 월산동 (40.42%)

안철수 득표율 LOW5 [동 단위]
◎ 1위 광산구 신창동 (23.42%), 2위 광산구 수완동 (23.48%), 3위 광산구 첨단2동 (24.77%), 4위 광산구 하남동 (24.93%), 5위 광산구 신가동 (25.48%)

2.3. 총선[편집]

광주광역시 개표 결과

국회의원

비례대표

정당

더불어민주당

새누리당

국민의당

더불어민주당

새누리당

국민의당

정의당

의석수

0석

0석

8석

-

-

-

-

득표수
(득표율)

241,276
(34.10%)

15,720
(2.22%)

398,594
(56.33%)

200,628
(28.59%)

20,124
(2.86%)

374,308
(53.34%)

51,390
(7.32%)

동구[5]

40.87%

2.93%

53.11%

26.85%

3.79%

55.30%

6.52%

남구[6]

30.61%

2.37%

56.23%

26.82%

2.86%

54.97%

6.65%

서구

33.33%

2.52%

55.35%

28.26%

2.91%

53.30%

8.20%

북구

30.33%

1.31%[7]

61.93%[8]

28.17%

2.63%

54.97%

6.57%

광산구

39.35%

2.78%

51.40%

30.99%

2.84%

49.81%

8.14%

2.4. 세부 내용[편집]

2012년 18대 대선 / 2017년 19대 대선 권역별 득표율 비교

진보 (더불어민주당, 정의당)

중도 (국민의당)

보수 (자유한국당, 바른정당)

선거

18대 대선
(문재인)

19대 대선
(문재인+심상정)

증감률

19대 대선
(안철수)

18대 대선
(박근혜)

19대 대선
(홍준표+유승민)

증감률

득표율

823,737
(91.97%)

627,566
(65.72%)

- 196,171
{▼26.25}

287,222
(30.08%)

69,574
(7.76%)

35,744
(3.74%)

- 33,830
{▼4.02}

동구

89.71%

60.08%

▼29.63 (-33.0%)

35.45%

9.83%

4.05%

▼5.78 (-58.8%)

남구

91.49%

62.95%

▼28.54 (-31.2%)

32.73%

8.24%

3.85%

▼4.39 (-53.3%)

서구

91.72%

65.29%

▼26.43 (-28.8%)

30.44%

8.06%

3.82%

▼4.24 (-52.6%)

북구

92.38%

65.60%

▼26.78 (-29.0%)

30.38%

7.37%

3.61%

▼3.76 (-51.0%)

광산구

92.68%

69.36%

▼23.32 (-25.2%)

26.42%

7.06%

3.68%

▼3.38 (-47.9%)

18대 대선

19대 대선

후보

박근혜

문재인

격차

후보

문재인

안철수

격차

관내투표

7.53%

92.24%

▼31.50 (-34.2%)

관내투표

60.74%

30.95%

▼5.99 (-79.5%)

관외투표

13.62%

85.62%

▼21.99 (-25.7%)

관외투표

63.63%

24.79%

▼11.92 (-87.5%)

2012년 19대 총선/2016년 20대 총선(비례) 권역별 득표율 비교

진보 (민주통합당, 통합진보당, 더불어민주당, 정의당)

중도 (국민의당)

보수 (새누리당, 자유선진당)

선거

19대 총선
(민주당+통진당)

20대 총선
(더민주+정의당)

증감률

20대 총선
(국민의당)

19대 총선
(새누리+선진당)

20대 총선
(새누리당)

증감률

득표율

502,826
(87.52%)

252,018
(35.91%)

- 250,808
{▼51.61}

374,308
(53.34%)

37,787
{6.57%}

20,124
{2.86%}

- 17,663
{▼3.71}

동구[9]

82.08%

33.36%

▼48.72 (-59.4%)

55.30%

8.53%

3.79%

▼4.74 (-55.6%)

남구[10]

88.16%

33.47%

▼54.69 (-62.0%)

54.97%

6.62%

2.87%

▼3.75 (-56.6%)

서구

85.89%

36.47%

▼49.42 (-57.5%)

53.30%

8.61%

2.91%

▼5.70 (-66.2%)

북구

87.90%

34.75%

▼53.15 (-60.5%)

54.97%

5.60%

2.63%

▼2.97 (-53.0%)

광산구

90.20%

39.13%

▼51.07 (-56.6%)

49.81%

5.06%

2.84%

▼2.22 (-43.9%)

3. 설명[편집]

민주당계 정당의 최대지지기반
민주당의 텃밭

민주당계 정당을 압도적으로 지지하는 지역이다. 총선이나 지선에서는 70% 이상, 대선에서는 90% 이상이 민주당계를 지지한다. 민주당에서도 전통적으로 영향력을 가장 강하게 행사하는 지역으로 민주당의 정책 방향을 가장 크게 휘어잡는 구역이며, 민주당계 정당이 분열했을 때에는 전략적 투표로 한쪽 정당에 대한 경고성 결과를 가져다 주는 편이다. 그래서 주요 선거 및 정치적 분기점 때마다 광주광역시의 여론은 항상 주목을 받는다. 광주의 민심이 곧 호남, 그리고 민주당계 정당 전체의 성향의 바로미터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또한 민주정의당에서 시작된 보수 계열을 무조건적으로 배척한다.[11]

민주당계 정당을 제외한 진보 정당은 아직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지역 사회에서 기존 민주당계 정당의 기반이 워낙 튼튼해서 진보 정당의 경쟁력이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7회 지선을 계기로 정의당, 민중당이 기초의회, 광역의회에 의석을 가지고 있으므로, 아직은 지켜보아야 한다. 원래부터 이런 극단적인 정치 성향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보수세력이 광주에서 어느 정도의 세력을 갖추고 있었고, 심지어는 선거에서 이긴 적도 몇 번 있었다. 정치 성향이 완벽히 반대되는 대구광역시도 1960년대 후반까지는 2.28 학생민주의거를 주도할 정도로 진보세력이 제법 힘을 쓰는 도시였다.

3.1. 서막 : 독재 시절[편집]

사실 민주당계 정당이 처음부터 광주에서 힘을 썼던 것은 아니었다. 그 당시에는 지역색이라는 것이 없었고, 지역 정당이라는 개념도 없었다. 모든 선거는 여촌야도 구도로서, 도시에서는 민주당, 시골에서는 자유당이 이기는 구도를 보였다. 그러나 관권선거가 횡행했던 시기여서 도시 지역에서도 자유당 세력이 이긴 경우가 때때로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가 있는데, 이 선거에서 자유당 이승만 후보가 55.83%를 득표해 조봉암 후보를 큰 차이로 이겼고, 이 시기의 대한민국 국회의원 선거대한민국 지방선거에서도 자유당이 강세를 보였었다. 4.19 혁명 이후 박정희쿠데타를 일으킨 후 열린 1963년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선 박정희가 37.26%를 득표해 선전하였으며[12], 4년 뒤 열린 1967년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박정희는 오히려 더 상승한 40.91%의 득표율로 접전을 벌일 만큼 군사정권 세력의 힘이 강성했다. 그러나 박정희 시절의 고도성장기 때 경부축의 개발로 인해 도태되고, 같은 시기 야당인 신민당에서 김대중이 전면으로 등장하면서 구도가 바뀌기 시작한다. 김대중 후보가 40대 기수론과 독재 견제론을 외친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76.01%를 득표하면서부터 민주당의 세가 강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당시 집권여당인 독재세력이 어느 정도의 지지도는 확보하고 있었으나, 1980년 5월 18일에 민주당을 배타적으로 지지하는 계기가 생겼다.

3.2. 제 1막: 고통의 시간[편집]

3.2.1. 제 1장 : 광주의 비극[편집]

10.26이 터진 지 겨우 50일 내외만에 전두환 일당은 12.12를 일으켰다. 이때 전국적으로 군사 쿠데타 세력에 대한 시위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먼저 일어난 시위는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번졌고, 광주에서도 대학생을 주축으로 전남도청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시위가 발생했다. 그러나 서울에서는 시위가 갑작스레 중단되었고, 광주에서는 5월 18일에 민주화를 외치는 대학생과 시민에게 특수부대까지 끌어들여서 학살극을 일으켰다. 그리고 전남 밖으로 나가는 길목을 모조리 막아 외부인의 출입을 금지하고, 광주에서 전남 곳곳으로 흩어진 시민들을 끝까지 쫓아 무력으로 연행하여 고문과 살인을 자행했다. 그리고 모든 언론에서는 광주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북한군이 쳐들어와 간첩과 손잡고 반란을 일으켰다는 허위 사실을 유포하고 가짜 뉴스를 매일같이 반복해 떠들어댔다. 이것이 바로 5.18 민주화운동의 내막이었으며, 이로 인해 기존에 있었던 전라도에 대한 지역감정이 노골화되면서 광주뿐만 아니라 호남에서 올라온 사람들은 지역비하 발언을 듣는 것 이외에도 빨갱이라는 색깔론까지 뒤집어쓰면서 온갖 멸시를 당했다. 이때부터 광주는 민주당계 정당을 일편단심 수준으로 지지했다.

이런 비극적인 아픔을 겪고도 참아내야 했던, 그리고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위안은 김대중이었다. 그는 호남의 구심점 역할을 하면서 독재세력에 맞서 살인 시도로 추정되는 사건까지 겪고 목숨을 위협 받으면서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던 인물이었다. 공교롭게도 그는 전라남도 신안군 출생에 목포시에서 해운사업을 했던 적이 있었고 전남권 최대도시인 광주광역시에 연고를 두고 있었다. 이것이 지역주의와 결합되어 5.18 민주화운동의 비극 및 지역차별을 해소해 줄 영웅으로 삼는 호남인의 정서가 뿌리깊게 형성되었고, 대표도시인 광주에서는 그러한 성향이 두드러졌다.

1980년대 중반까지는 제5공화국 체제로서 모든 선거가 관권선거로 진행된 시기라 지역 구도가 드러날 기회가 없었지만, 이게 처음으로 드러난 것은 1987년 6월 항쟁으로 직선제 개헌을 이뤄낸 직후 치러진 제13대 대통령 선거였다. 집권여당이자 독재세력이었던 민주정의당에선 전두환의 후계자이자 대구직할시 출신 노태우를 후보로 내세우고, 당시 야당이던 통일민주당거제도 출신이자 부산직할시를 연고로 하는 김영삼이 후보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김대중은 이에 반발하여 동교동계를 이끌고 집단 탈당해 평화민주당을 창당하게 되었고 평민당 대표로 독자 출마를 하게 되었다. 한편 박정희 정부의 수장으로서 군림했던 충청남도 부여군 출신의 김종필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여 역시 출마를 선언했다. 이로서 TK - 호남 - PK - 충청이라는 지역 구도가 완벽하게 들어서면서 지역 간 세력 싸움으로 번진 선거였다.

이 선거에서 평민당 세력의 핵심인 광주에서는 너무 당연하게 평화민주당의 김대중 후보를 일방적으로 밀어주게 된다. 당시 두 야당 후보가 갈라지면서 유권자들 또한 지역 중심으로 똘똘 뭉치게 되어, 오랫동안 민주화 투사로 같은 편에서 싸웠지만 대권을 눈앞에 두고 공방전을 펼치며 적이 된 두 후보 지지자 간 갈등의 골이 깊어지면서 역시 지역을 중심으로 완벽하게 일치단결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결과 김대중 후보가 광주에서만 무려 94.41%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해 전국 1위 득표율을 기록했으며, 경쟁자인 김영삼 후보는 0.51%에 불과한 표를 얻어 5.18을 일으킨 장본인 노태우(4.81%)보다도 적은 득표율을 얻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드러난 지역 구도는 다음 해에도 계속되었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광주의 다섯개 지역구에서 평화민주당이 전석을 80% 이상의 득표율로 압살했다. 한마디로 지난 대선의 완벽한 연장선상에 있는 선거였다.

3.2.2. 제 2장 : 광주 포위구도[편집]

한반도 남부가 넷으로 갈라져 있는 상황이 계속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1990년 1월에 평화민주당을 제외한 세 당이 3당 합당을 선언하고 민주자유당이 창당되는 식으로 끝나게 될 줄은 누구도 몰랐다. 가뜩이나 박정희 때부터 이어져 온 노골적인 지역감정 부추기기가 5.18 민주화운동을 기폭제로 하여 호남에 대한 안 좋은 인식이 전국적으로 퍼져있는 마당에, 호남정당인 평화민주당을 남겨놓고 나머지 세 당이 합당해 버리면서 지역적으로 완전히 갇히는 구도가 생겨버리고 말았다. 다행히 3당 합당에 반대한 통일민주당의 몇몇 의원들[13]이 합당 직전에 탈당하고 평화민주당에 입당하면서 이들은 민주당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민주당계 정당 역사상 가장 험난한 싸움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있었던 광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2년 뒤 있었던 제14대 국회의원 선거는 3당 합당 이후 처음으로 치러진 전국단위 선거였다. 6년 전과 마찬가지로 민주당 후보들이 광주 다섯 개 선거구를 압도적인 득표율로 싹쓸이했으나 이전보다는 소폭 감소하여 최저 58%까지 내려가기도 했다. 이는 공천에서 불복해 탈당한 사람들이 무소속 출마하여 표를 갉아먹은 것도 있었고, 정주영 현대 회장이 통일국민당을 창당하면서 민주당 지지도를 일정 부분 얻은 것도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에 열린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다시 민주당의 김대중 후보가 95.84%로 4년 전보다 더 압도적인 득표율로 1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비호남권에서는 서울을 제외하고 전지역에서 김영삼 후보에게 패해 낙선했는데, 거듭된 낙선과 지역 차별로 인해서 대선에 한해서는 광주 유권자들이 하나로 결집되는 성향이 점점 강해졌던 것으로 분석된다.

김대중이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민주당이 사실상 공중분해되다시피 하면서 광주 유권자들은 슬픔에 잠겼고, 구심점이 사라지면서 정치적 관심도가 크게 낮아졌다. 그 결과 1995년 열린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불과 64.83%의 득표율로 이전 선거들에 비해 투표율이 크게 하락하였고, 집권여당인 민주자유당의 득표율이 박정희 : 김대중 양자구도였던 7대 대선 이후 24년 만에 두 자릿수를 기록했다.

3.2.3. 제 3장 : 대통령 김대중, 여당 민주당[편집]

그러나 같은 해 연말에 김대중 총재가 복귀하고 민주당에서 동교동계를 끌어와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면서 다시 광주 유권자들은 결집했다. 다음해인 1996년에 열린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가 광산구를 제외한 모든 선거구에서 80% 이상의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되었는데, 이는 13대 총선 못지 않은 압도적인 지지로 광주 유권자들이 김대중 총재에게 보낸 환호의 메시지나 다름없었다.

결국 그동안의 실패를 교훈 삼아 DJP연합, 참신한 대선전략 등을 펼치며 중도표를 공략한 김대중 총재는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40.3%를 득표해 네 번째만에 당선에 성공하였다. 이것이 진짜 마지막 기회였던 만큼 광주 유권자들은 사상 유례 없는 초결집을 이룬다. 무려 97.28%라는 말도 안 되는 지지도를 보내면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당선에 압도적으로 기여를 했다. 사실상 이 득표율은 독재국가나 공산주의 국가에서나 볼 법한 수준이어서 당시에 많은 조롱을 받았고 지금도 일부 커뮤니티에서 조롱을 받기도 하지만, 독재 세력 및 그 후신만은 절대로 집권을 내줄 수 없다는 광주 유권자들의 선택과 집중이 총결산된 것이었다. 이 기록은 대한민국 선거 역사상 (단독 출마 제외 시) 최다 득표율 기록이기도 하며, 그 뒤로 광주의 그 어떤 선거에서도 이런 득표율은 지금까지 나오지 않고 있다.

3.3. 제 2막: 민주당 집권 10년[편집]

3.3.1. 제 1장 : 선택된 운명[편집]

이후 열린 선거들 모두 민주당계 정당이 압도적인 지지도를 받기는 하지만, 집권에 대한 열망을 이루어낸 탓인지 이전만큼의 결집도는 보이지 못하고 유권자들은 빠르게 느슨해졌다. 대선 6개월 뒤 열린 1998년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고재유 후보가 당선되긴 했지만 67.20% 득표율로 고작 더블스코어밖에(?) 차이를 내지 못했고,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공천에 불복한 후보들이 난립하면서 직선제 이후 사상 처음으로 광주에서 다자구도로 선거가 열렸다. 대다수는 낙선했지만 강운태 후보가 과반의 득표율을 얻으면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를 누르고 첫 무소속 대표로 당선되었는데, 민주당 일색이었던 광주에서 이변으로 받아들여질 놀라운 결과를 일으키며 일대 신드롬을 일으켰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나중에 광주광역시장까지 오르게 되었다.

김대중 대통령 당선 이후 힘을 얻은 광주 유권자들은 민주당 내에서 막강한 힘을 과시하며 당 내에선 동교동계, 당 외부에선 경선에서 민주당의 방향을 결정짓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김대중 정부 말기인 2002년 대선 경선 당시 한화갑, 이인제 등 쟁쟁한 경쟁자들 대신에 광주 유권자들은 영남 출신 노무현을 후보로 선출시켰는데, 당시 호남 결과로 인해서 노무현이 대통령 후보로 선출될 수 있었던 만큼 이들의 영향력은 민주당 내에서 매우 결정적이었다. 호남 출신 후보가 있었음에도 당내 세력 하나 없는 노무현을 광주가 선택한 이유로는, 당시 여론조사에서 다른 후보들은 그 어떠한 구도에도 한나라당이회창 후보에게 패배하는 것으로 나온 반면에, 노무현 후보가 유일하게 양자구도에서 이회창을 이기는 것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영남 출신이라는 당시로서는 치명적인 단점[14]에도 불구하고 광주 당원들은 한나라당을 이기기 위한 전략적 선택을 한 것이다.

이전의 선거 양상과는 분명히 다른 결과였다. 이전에는 김대중 한 사람에 대한 맹목적인 지지와 그를 통해 호남이 바뀌기를 바라는 열망에 가까웠다면, 이번 결과는 많은 선택지 중에서 이길 가능성이 있는 답안지를 선택한 것으로, 사실상 '호남 유권자들의 선택과 집중'을 전면에 드러낸 역사적 사건의 첫걸음이었다. 노무현 후보는 이후 여러 부침을 겪은 끝에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48.9%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광주에서는 이번에도 90% 이상의 표를 몰아주면서 민주당계 정당의 두 번째 대선 승리에 기여했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 취임 직후인 2003년부터 대북송금 특검 사태로 동교동계와 친노계가 갈라서기 시작했으며, 당내 쇄신을 놓고 내분이 벌어진 끝에 새천년민주당에서 열린우리당이 갈라져 나오게 되었다. 노무현 당시 대통령도 열린우리당을 창당하면서 동교동계에 대한 비판적 뉘앙스의 발언을 여러 차례 했고, 그 와중에 '유권자들이 열린우리당을 선택했으면 좋겠다'는 발언을 하게 되었다. 이것을 문제 삼아 동교동계 주축의 새천년민주당은 한나라당을 끌어들어 탄핵을 발의하게 되었으나, 오히려 새천년민주당 및 한나라당에게 역풍이 불면서 탄핵 가결 뒤에 치러진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열린우리당이 지역구 7개를 싹쓸이하는 위엄을 과시했다. 이는 당시 새천년민주당이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과 공조하여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을 끝끝내 밀고 간데 대한 시민들의 반발과 호남의 정신적 지주라 할 수 있는 김대중 전 대통령마저 탈당 사태에 대해 침묵하고 탄핵에 관해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면서 사실상 노무현 대통령에 동조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사실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대중은 노무현을 포함한 통합민주당(1995년)의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 소속 정치인들 대부분의 새정치국민회의 입당을 환영하였다. 그래서 탄핵 사태 때 김대중은 작심한 듯 탄핵 주도 세력에게 쓴소리를 했고 이는 새천년민주당에게 있어 돌이킬 수 없는 치명타였다. 물론 단순히 탄핵과 김대중 전 대통령 덕분에 열린우리당이 승리한 건 아니다. 이미 탄핵 이전부터 광주뿐만 아니라 호남 전역에서 열린우리당이 새천년민주당을 누르고 지지율 1위를 고수하고 있었다(새천년민주당이 한나라당과 함께 탄핵을 추진했기 때문).

이 결과는 매우 큰 의미를 가진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열린우리당의 입장을 지지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고는 하나 엄연히 김대중 전 대통령의 후신정당은 새천년민주당이었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광주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어떤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지 감안하면 아무리 역풍이 불었다 하더라도 사실상 광주에서 20여년 간 집권여당 노릇을 한 민주당이 참담하게 버림받을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열린우리당 지지율이 새천년민주당을 큰 차이로 따돌렸을 때에도 많은 사람들은 '썩어도 준치라고 광주에선 민주당을 뽑겠지'하는 평가가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열린우리당의 승리였다. 이는 아무리 김대중 전 대통령의 후신 정당이라 해도 무턱대고 지지하지 않는다는 강한 시그널이었으며 광주를 텃밭으로 여기고 소홀히 했다가는 강한 심판을 내릴 것이라는 광주의 경고나 마찬가지였다. 이는 선택과 집중 전략이 국가단위 선거에서 처음으로 영향을 발휘했던 선거라고 볼 수 있는 중요한 변곡점이었다.

3.3.2. 제 2장 : 신뢰에서 불신으로[편집]

2004년을 기점으로 광주에서는 기성 정치에 대한 불신감과 혐오감이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되었다. 이전에도 김대중 전 대통령 및 집권여당에 대한 비토 기류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당장 눈 앞에 있는 악마를 해치우는 일이 급급했기에 민주당에 대한 선호도 논의가 있을 수가 없는 분위기였던 반면, 이 사태를 기점으로 정치권에 대한 심판, 민주당에 대한 견제의식이 민심의 주류로 자리 잡게 되었다.

좋은 예로 17대 국회에서 열린우리당이 과반 의석을 차지했음에도 당 내에서 내분이 일어나고 제대로 된 개혁 정책을 시행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이자, 2년 뒤인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반대로 열린우리당이 참패를 당했다. 시장 선거에서 민주당의 박광태 후보가 51.61%를 얻어 당선되었는데, 집권여당인 열린우리당 조영택 후보는 17.67% 차이로 대패를 했다. 뿐만 아니라 구청장 선거에서도 다섯 곳 모두 민주당 후보가 10% 이상의 큰 격차로 열린우리당 후보를 누르고 전석을 석권하여, 선택과 집중이 역으로 일어나는 결과를 나타냈다.

3.4. 제 3막: 보수 정권 9년[편집]

3.4.1. 제 1장: 민주당의 참패[편집]

이후 두 당 모두 지지율이 지지부진하여 대선을 앞두고 대통합민주신당으로 합당하면서 분열은 잠시 봉합되었지만, 민주당 자체에 대한 실망감과 배신으로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정동영 후보가 79.75%에 그치면서 민주당 후보 역사상 처음으로 80% 득표율에 실패했다. 이 때는 전국적으로 민주당이 완전히 지지도를 잃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오히려 그 반동으로 민주당 지지세가 결집하면서 이듬해 열린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강운태 전 시장을 제외한 모든 민주당 후보가 선거에서 50~80%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일방적인 민주당 지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듬해 열린 2009년 재보궐선거 시의원 선거에서 민주노동당 후보가 민주당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는 일이 있었다. 이 때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로 인해 민주당 지지도가 급격하게 결집되어 한나라당 및 이명박 정부에 대한 강한 분노감이 일었던 시기여서 민주당이 선거하는 족족 승리하던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반대의 결과가 나온 것이다. 비록 시의원 선거로 규모가 매우 작기는 하지만 민주당 간판을 달고 나온다 해서 무조건적으로 뽑아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광주 유권자들이 몸소 보여준 결과였다.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때도 민주당의 강운태 후보가 56.73%의 득표율로 당선되기는 했지만 강운태 후보 자체가 무소속으로 광주에서 연속 당선된 만큼 원래부터 민주당 주류세력과는 결이 다른 인물이었으며, 민주당 득표율 자체도 크게 떨어져 과반을 겨우 넘는데 그쳤다. 한나라당 정용화 후보는 민주화 이래 보수정당 역대 최대인 14%를 득표했는데, 이는 국민참여당 정찬용 후보와 맞먹는 수준으로 두 후보간의 표 차이는 불과 1,340표에 불과했고, 민주노동당, 진보신당보단 월등히 좋은 성적으로 보수정당에 대한 지지세가 이전보다 유의미하게 늘어났음이 증명되었다. 또한 대놓고 호남정당을 표방한 한화갑의 평화민주당(2010년)은 1.12% 득표율로 처참히 무너졌다. 이 선거 결과로 깃발만 꼽아도 당선된다는 식의 무조건적인 지지가 점점 옅어지고 있는 게 확인된 것이다.

지속적으로 이러한 결과가 나온 이유로는 노무현 정권 시절에 참여정부가 호남 홀대론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호남 개발에 소극적이었다는 논란의 영향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태까지 믿고 뽑아줬더니 돌아오는게 없더라 하는 지역 정서 및 "호남이 나(노무현) 좋아서 뽑았나, 이회창 싫어서 뽑았지"나 "전라도 정치인(국회의원) 들하고 정치를 못해먹겠다"는 등의 발언의 파장[15], 그리고 민주당 내부 총질 및 분열과 합당 반복으로 광주 유권자들에게 믿을 수 없다는 불신감을 강하게 심어준 것이 지속적인 득표율 및 지지도 하락의 원인이 되었다. 실제로 내분 끝에 동교동계 일부는 새누리당으로 넘어가기도 했을 정도다. 현재 참여정부 시절 임명된 고위 공직자 중 호남출신이 절대 적은 게 아니라는 사실이 퍼져서 이 부분은 어느 정도 오해가 풀렸지만[16], 이런 노무현 정부 및 친노세력에 대한 배신감은 꾸준히 이어져 훗날 국민의당이 분열되었을 때 광주 민심이 국민의당으로 직접적으로 쏠리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경제계에서 호남출신을 찾아보기 힘든 만큼 정치계에서도 호남을 대표할 할만 거물급 정치인이 김대중 전 대통령 이후엔 보이지 않은 것도 지역민들에게 상대적 박탈감과 더불어 상실감을 안기게 했다. 역대 대통령 11명 중 7명이 영남 출신이고 호남 출신은 김대중 단 1명이라는 것이 광주시민들에겐 커다란 불만 사항 중 하나이며, 민주당에서 왜 차기 호남 대권주자를 키우지 않느냐는 여론이 강하나 이것이 중앙정치에 반영이 안 되고 있다는 것에 있어서도 우리가 밀어줘도 떡고물은 남한테 준다는 인식이 퍼지는 계기 중 하나가 됐다[17].

2010년 이후에도 각종 재보선에서 비민주당 계열 정당과 무소속의 약진이 돋보였다. 반면 민주당의 득표율은 점점 하락하고 2012년 서구청장 보궐선거에선 민주당 후보가 10%대 득표율로 참패했다. 또한 당선되는 후보들도 50% 미만의 득표율로 간신히 당선되는 사례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무조건 민주당 계열 후보가 70% 이상의 대승을 거둔 것에 비하면 확실한 위기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무렵엔 박근혜가 보수정당의 전면에 등장하면서 이명박 정권에 실망한 유권자들을 대거 끌어모았고, 지역정당에 머무른 자유선진당 및 대표가 의원직을 상실한 창조한국당 같은 대안정당들이 지리멸렬해지면서 새누리당 : 민주당 양강 구도로 가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민주당 입장에서는 광주의 불만을 신경쓸 이유도, 여력도 없었다. 그들이 자신들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한들 대안이 될 만한 정당이 사실상 없었기 때문이다.

민주당을 점점 떠나는 광주의 민심이 결과로 반영된 사례 중 하나는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새누리당 이정현 후보[18]였다. 그는 비록 낙선했지만 40% 가까운 득표를 하면서 당선권에 근접한 결과를 내 호남뿐만 아니라 전국에 충격을 안겼다. 반대로 같은 선거에서 영남지방인 대구 수성구에서 민주통합당 김부겸 후보도 40%에 육박하는 득표를 하면서 양 지역간의 지역구도가 무너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지만, 실제로는 민주당에 대한 실망감이 임계치에 이르면서 정말 못하면 새누리당 후보도 찍어줄 수 있다는 강력한 경고성 결과였다. 한편 광산구 을에 출마한 통합진보당 소속 황차은 후보는 일대일 구도속에서 무려 25%대의 득표율을 얻었고, 북구 을에 출마한 윤민호 후보도 18%대의 득표율을 얻었다.

3.4.2. 제 2장: 임계치 돌파[편집]

새누리당 이정현 후보의 선전으로 민주당 텃밭이라는 입지가 위협받기 시작했지만 아직은 뿌리가 튼튼했고 지지는 견고했다. 같은 해 12월에 열린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문재인 후보가 91.97%를 득표해 여전히 90%가 넘는 지지세를 보여줬으며, 민주당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안철수 · 김한길 공동대표 당시 치러진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본격적으로 텃밭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안철수계로 분류되어 전혀 지역 연고가 없는 윤장현이란 사람이 시장 선거에 전략공천되었는데, 이에 대한 반발로 당시 시장이었던 강운태가 탈당하여 독자 출마했다. 당연히 광주시민의 여론은 크게 분노했다. 강운태가 마음에 들진 않지만 지도부 마음대로 전략공천하는 건 '꿀지역구라고 광주를 무시하는 거다'라는 반응을 보다. 선거 결과는 새정치민주연합 윤장현 후보가 57.95%를 얻어 31.77%에 그친 강운태 시장에게 더블스코어 가까이 압승하기는 했지만, 이건 강운태 시장의 실정에 대한 심판적 성향이 민주당 전략공천에 대한 반발보다 더 강했기 때문으로, 이 결과가 새정치연합 및 윤장현 후보에 대한 지지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좋은 예로 이 선거에서 직선제 이후 처음으로 광주 선거에서 새누리당 후보가 당선되었다! 당선된 사람은 광산구의회의 새누리당 박삼용 의원으로, 그다지 큰 영향력은 없는 기초의원이라지만 지역구 투표로 당선된 사람이었다. 그동안 지역주의의 벽이 아주 높았던 현실을 생각해보면 당선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의의가 있는 것이었다.

그나마 2014년에는 시장 및 구청장 선거에서 전부 새정치연합이 큰 차이로 승리를 거두었지만, 2015년 4월 29일에 열린 재보궐선거 광주 서구 을 보궐선거에서는 '호남의 천재' 라고 불리는 천정배 의원이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새정치민주연합에 위기감이 조성되었다. 그러나 광주이기 때문에 새정연이 이길 거라는 전망이 많았으나... 천정배 후보가 52.37%의 득표율로 당선 되었다. 새정치민주연합에게는 텃밭을 내어준 꼴이 되었다.

이미 호남 민심은 근 몇년간 굉장히 좋지않는 기류를 보였다. 당장 해당 지역구 19대 총선에서 새누리당 후보 이정현이 40% 가까운 득표율을 자랑했고, 결국 2014년 7.30 보궐선거에서 전라남도 순천시·곡성군 국회의원으로까지 당선되는 이변이 일어난 것이다. 또한 6회 지방선거에서는 무소속 의원이 대거 당선되는 등 새정치민주연합이 밀리는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위기가 계속됨에도 호남의 심장인 광주는 괜찮을 것이라는 희망 섞인 낙관론도 있었으나, 2015년 4.29 선거에서 대패한 꼴이 된 것이다.

패배 요인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많은데, 호남민들이 대부분 말하는 의견과 정치평론가들이 내놓은 결론으로는, 새정치민주연합이 호남을 홀대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는 것이다.[19]새민련이 호남을 자신들의 텃밭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지원을 안 해줘도 당선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는 이야기가 농담이 아니다.[20]결국 호남 민심이 돌아선 것을 제대로 보여준 선거였다. 이 선거 결과로 인해서 민주당의 동교동계와 안철수계 의원들이 집단 탈당을 하기 시작한다.

3.4.3. 제 3장: 대안정당의 압승[편집]

이후 호남 의원 대다수가 순차적으로 시간을 두고 하나씩 탈당을 하기 시작했다. 문재인 전 대표는 이들을 만류하고 설득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이미 오랫동안 쌓여온 갈등의 골은 이를 메우기엔 역부족이었고, 지속적으로 선거에 참패한 민주당 탈당파들은 더 이상 민주당에 희망이 없다 여기고 새로운 제3당의 창당을 준비하고 있었다. 결국 2016년 1월안철수를 중심으로 국민의당이 창당되었고, 여기에 광주 의원 8명 중 5명이 참여하여 그동안 일당 독재나 마찬가지였던 광주의 정치 지형에 새로운 선택지가 들어오게 되었다.

이들은 이미 나가기 전부터 참여정부 시절에 만연해 있던 영남패권주의를 비판했고, 광주를 찾아가 '그동안 무능했던 민주당을 심판해달라'는 구호를 외쳤다. 이에 언론들이 동조하기 시작하며 광주의 민심은 매우 요동을 치게 되었다.

여태까지 민주당 텃밭으로 인식되어온 지역이었지만 이미 17대 총선의 사례가 한 차례 있었고, 지난 몇 년 간의 선거에서 득표율이 지속적으로 떨어지고 지역 민심이 매우 싸늘하다는 것을 지역 조직부터가 깊게 인식하고 있었기에 또 한차례의 위기가 오게 되었다. 이것을 때마침 2016년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가 열리면서 국민의당에게 빼앗긴 민심을 어느 정도 회복하였지만, 박영선 비대위원이 갑자기 필리버스터 종료를 발표하면서 유권자들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직후에 김종인 비대위원장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이해찬, 정청래, 강기정, 부좌현 의원 등을 컷오프하고 자기 계열 인물들을 전략공천하면서 광주의 민심이 다시 국민의당으로 빠르게 이탈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설상가상 강기정 지역구 자리에 전략공천된 정준호 후보가 뜬금없이 문재인 전 대표에게 비난을 가하며 은퇴를 비는 삼보일배 퍼포먼스를 하면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지지율 격차가 벌어지게 된다. 후보라고 나온 사람이 사실상의 당 대표이자 이미지인 사람에게 공격을 가하는 팀킬을 한 것 때문에 기존 지지층이 배신감과 분노를 느끼고 등을 돌려버리면서, 총선 결과는 사실상 이 때부터 끝난 싸움이었다.

뒤늦게 문재인 전 대표가 광주에 내려가서 지지 읍소를 했지만 때는 너무나 늦었다. 결국 4.13 총선에서 광주는 국민의당 후보만을 당선시키며 더민주를 심판했다. 민주당에 대한 민심이 돌아선 것이 확실히 드러난 선거로, 모든 선거구에서 새정치민주연합의 후계인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낙선하고, 동교동계 인사들이 참여한 국민의당 후보들이 당선하는 결과가 나왔다. 국민의당 싹쓸이 결과뿐만 아니라 비례대표 득표율에서도 국민의당이 53%를 득표해, 28%에 그친 더불어민주당을 더블스코어로 누르고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다. 당시 민주당 소속 현역 정치인으로 나왔던 여러 후보들은 낙선의 고배를 마셔야 했고, 송기석, 김경진, 최경환과 같은 국민의당 정치 신인들이 대거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있었던 이유는 역시 참여정부기간 노골적으로 지속된 호남 소외였다. 중간에 필리버스터를 통해 국민의당 지지율을 잠시 따라잡았지만, 필리버스터가 끝난 직후 김종인 비대위 대표가 컷오프 논란을 일으키며 호남 민심에 불을 질렀다. 제대로 된 인사로 1:1 경쟁을 해도 될까말까한데 광주에 별다른 연고가 없는 신인들을 대거 공천시켜 논란을 일으켰고, 특히 북구 갑에서 현역 의원이었던 강기정을 누르고 전략공천된 정준호 후보가 문재인 은퇴롤 요구하며 석고대죄하는 희대의 팀킬을 자행한 탓에 민주당의 지지율이 급속도로 빠졌던 것이다. 이후 주변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문재인 전 대표가 총선 며칠 직전에 호남을 찾아가 급격히 읍소하면서 지지율을 반전시켰지만 시기가 너무 늦었고, 이미 20% 이상 벌어진 탓에 결과를 되돌리지 못했다.

이 선거의 의의는 여러가지가 있다. 우선 광주에서 일당 독주체제가 아닌 양당체제가 본격적으로 시작이 되었다는 점, 그리고 세대대결이 본격적으로 드러났다는 점이다. 새누리당 : 민주당 양강 구도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유권자가 새누리당을 견제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민주당을 일방적으로 밀어주는 구도였는데, 당시 야당이 둘로 분열되고 광주를 기반으로 했던 의원들이 대거 탈당하면서 영남 친노패권을 비판하면서, 민주당에 섭섭함과 불신감을 느끼던 층이 대거 국민의당으로 이동했음은 물론 50대 이상 반노성향 장노년층이 국민의당 지지로 대거 넘어갔다. 반면에 젊은 친노친문 성향의 유권자들 사이에서는 상대적으로 민주당에 대한 지지가 더 높아져서 세대 대결로 분화하는 양상을 보였다. 이는 광주 정치역사에서 사상 처음으로 있는 일이었으며, 결과는 달랐지만 1년 후 대선에서도 이러한 구도가 그대로 재현되었다.

3.5. 제 4막: 민주당의 전성기 속에서[편집]

3.5.1. 제 1장: 대안정당 심판[편집]

제20대 총선 이후 더불어민주당국민의당의 양강 구도가 그려졌고, 총선 6개월 이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라는 사상 초유의 국정농단 사태가 터진다. 전국 어디서나 사람들이 크게 분노하고 박근혜 내려오라는 촛불시위를 하긴 했지만, 애초에 박근혜 및 새누리당 혐오성향이 강한 광주에서는 더 큰 분노가 일어나서 전국적인 하야, 탄핵 여론에 큰 힘을 보탰다.

이 와중에 대통령 후보 지지율도 문재인, 이재명, 안철수 등 두 정당 소속 후보진으로 갈렸다. 각 당의 경선이 끝난 뒤엔 호남에선 사실상 문재인vs안철수 구도로 잡힌 상태. 세대별 지지율이 뚜렷하게 갈렸는데 50대 이상 장-노년층은 반문 정서로 인해 안철수 지지율이 강한데 비해서 2~30대 등 청년층은 문재인 지지율이 강하게 나오고 있었는데, 막판에 안철수 후보가 여러 가지 논란을 터뜨리면서 지지율이 급격히 하락했고, 안철수에게 이탈한 표가 고스란히 문재인에게 쏠리면서 선거 막판에는 큰 격차로 지지율이 벌어졌다.

그리하여 결국 선거가 열리고 나서는 문재인 득표율이 2번째로(1위는 전라북도) 높은 지역으로 결과가 나왔다. 그 외의 정당 후보들은 한 자리수의 저조한 득표율이 나왔다. 결국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가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를 상대로 2배 넘는 득표율 차이로 승리하였다.

문재인이 안철수에게 다섯개구 모두 승리를 가져간 것은 물론, 동 단위로 따져봐도 안철수에게 모든 지역에서 승리했다! 노년층이 많은 충장동, 계림1동, 월산동, 사직동, 중앙동과 같은 구도심 몇몇 지역에서는 안철수 후보가 40% 이상을 득표하면서 두 후보 간의 격차가 10% 이하로 따라붙었지만 어쨌든 승리자는 문재인 후보였고, 충장동을 제외하면 문재인 후보가 모든 동에서 50% 이상의 높은 득표율을 얻었다. 심지어 광산구 및 북구의 신시가지인 수완동, 신창동, 하남동, 건국동에서는 문재인 후보가 65%를 넘겨 안철수 후보와의 격차를 무려 40%까지 벌렸다.

이 선거에서 확연히 드러난 것은 역시 세대 대결이었다. 이전 선거부터 시작된 세대 대결이 대선에서도 여전히 이어졌는데, 이 세대 대결이 더욱 강화된 모습을 보였다. 선거 직전까지는 20~40 vs 50대 이상 구도가 될 것으로 전망되었지만 실제로는 50대까지 문재인 지지율이 더 높게 나오면서 20~50 vs 60대 이상으로 구도가 갈라졌다. 광주의 60대 이상은 안철수 득표율이 더 높았는데, 이는 전국에서 유일한 결과였다. 전라남도와 전라북도에서는 60대 이상에서도 문재인 득표율이 더 높게 나온 것과는 대비되는 결과였다.

50대 유권자의 민심이 급격히 문재인에게 넘어간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안철수가 후보로 선출된 직후 여러 가지 검증으로 인한 부패 및 비리 의혹들이 터지면서 청렴할 것이라 믿었던 유권자들이 실망을 느끼고, 유치원 발언을 통한 공약 논란 및 토론회에서의 삽질로 '안철수는 안 돼'라는 여론이 형성된 것이 주효했다. 광주 및 호남 지역에서 한해서는 선거 막판에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 지지율이 급격히 올라오면서 위기감을 느낀 유동층이 문재인에게 몰리기도 했다.

이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데, 보수정당에 대한 혐오감이 강한 것을 확인함은 물론 박근혜 사태에 관해 책임이 있는 자유한국당을 심판해야 한다는 여론이 기본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번 대선에서 안철수 후보가 보수층 지지도를 많이 끌어오기는 했지만, 광주를 비롯한 호남권의 안철수 유권자들 대부분은 정권 교체 및 박근혜-새누리당 심판론에 있어서는 적극적인 찬성을 보인 층이었다. 다만 이들이 생각하는 것은 '민주당은 호남을 홀대했고, 민주당이 호남에서 계속 해 먹었으니 이번엔 다른 정당을 밀자'라는 생각의 차이 때문에 안철수를 지지한 것 뿐이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유한국당 지지층 결집이 무서운 나머지 마음은 안철수에 가있는데 도장은 문재인을 찍는 유권자들이 상당수 발생했다는 것은, 집권여당 심판론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할 수는 중요한 증표였다.

반면에 60대 이상은 위에 적힌 여러 이유들에도 불구하고 '문재인은 안 된다'는 여론이 여전히 적지 않았다. 심지어 일부 노인들은 문재인이 북한하고 내통했다는데 사실이냐?라고 자녀들에게 되묻는 사례까지 있었을 정도로 왜곡된 정보를 그대로 믿어버리는 현상이 다른 계층보다 매우 크게 발생했다. 호남에서도 저런 가짜 정보가 알음알음 퍼진 것은 사실이다. 보수정당에 대한 혐오감이 있는 지역이라고 해서 저런 허위뉴스가 없는 것이 아니다. 이는 신문매체, TV뉴스 및 종편, 카톡과 문자를 통한 가짜뉴스로만 정보를 접하기 때문에 실제 사실과 현실에 대한 인식의 괴리가 생기게 되고, 결국에는 정권교체보다 문재인, 친노 심판을 명분으로 안철수에게 표를 주는 원인이 되었다. 60대 이상 유권자들의 힘으로 광주에서 급격히 민심을 잃던 안철수 후보는 그나마 30%의 벽을 지켜낼 수 있었다.

한편 문재인과 안철수 외의 대선 후보들은 사실상 존재감이 없다시피 했다. 3위를 차지한 심상정도 지지율이 4% 대에 머물렀으며 새누리계인 홍준표와 유승민은 두 사람의 지지율을 합쳐도 심상정에게조차 뒤쳐지는 결과가 나왔다. 특히 홍준표는 단 1% 대에 머물렀다. 홍준표의 이 결과는 광주의 표 쏠림이 가장 강했던 제15대 대선 당시 이회창 지지율(1.7%)보다도 낮은 수치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집권한 이후 고개를 돌렸던 민심이 문 대통령을 중심으로 서서히 다시 민주당으로 돌아오고 있다. 정부가 타 지방에서 볼 맨 소리가 나올 정도로 적극적으로 호남 인재를 기용 했으며, 문재인 대통령은 약속대로 대통령으로서 5. 18 기념식에 참석해 피해 유족들의 가슴 절절한 사연에 눈물을 흘리며 행사 도중 일어나 안아주며 위로해 주는 진실된 모습을 보여주어 광주 시민들이 '이번은 다르다.'고 생각하게 했다. 그리고 문 대통령의 소통 행보와 강력한 적폐청산 수행 의지가 폭발적인 지지를 끌어모아 '무등일보'가 10월 한국 갤럽에 의뢰해 문 대통령 국정 수행 지지도를 조사한 결과 90%를 상회 한다는 압도적인 결과가 나왔다. 그 외 갤럽과 리얼미터의 정례 조사에서도 광주 전남의 모든 연령대에서 70 ~ 80% 이상의 선호도를 보였다. 이 때문에 대안 정당으로 평가 받던 국민의당은 '그래도 같은 뿌리에서 나왔으며 도와주고 그래야지 하는 짓이 보수야당과 다를 게 없다.'는 비토 정서가 서서히 강해지다 조작 사건으로 완전히 이미지가 추락 하면서 지역 기반이라고 말하기 부끄러운 수준의 지지율을 보이고 있다. 결국 국민의당은 바른정당과의 통합을 둘러싼 계파 갈등으로 인해 안철수계와 호남계로 갈라져서 호남계는 민주평화당을, 안철수계는 바른정당과 통합해서 바른미래당을 창당하였다.

위와 같이 지역 맹주를 자처했던 국민의당이 붕괴됨에 따라 반한국-비민주 성향 보수계열 시민들의 민심은 일부 정의당으로 흡수되었다고 한다(...).

3.5.2. 제 2장: 민주당의 운명[편집]

이후 더불어민주당은 2018년 남북정상회담2018년 북미정상회담 등으로 조성된 남북평화무드를 기반으로 한 강력한 지지를 바탕으로 광주를 탈환할 준비를 마치고, 민주평화당과 호남에서 결투를 벌였다. 결과는 더민주의 대승으로 끝났고, 그 중심에 있던 광주에서는 80% 이상의 표를 더민주에게 몰아줌으로서 확고한 정통 민주당의 자리를 탈환하게 되었다. 지방선거와 같이 열린 서구 갑 선거구의 재보궐 선거에서는 더불어민주당 소속의 송갑석 후보가 압승하면서 2년만에 더불어민주당이 광주에서 국회의원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반면 광주광역시장 후보를 못낸 민주평화당은 기초자치단체장 선거, 지역구 광역의원 선거에서 후보전원이 낙선하고, 서구 갑 재보궐선거에서 간신히 선거비 보존만 받고 펜타스코어 차이로 참패를 당했으며, 비례대표 광역의원조차 정의당에게 근소하게 밀려 입성에 실패한다. 지선 이후 민주평화당의 호남 지지율은 정의당에게조차 밀리고 있으며, 이 하락세가 계속 이어지면 21대 총선에서는 비례대표에서조차 정의당에게 밀릴 가능성이 있다.

한편 이들 외에 두 보수정당들인 자유한국당바른미래당은 지방선거 당시에 지역 주민들로부터 관심조차 받지 못했다. 자유한국당은 아예 시장 선거에 공천을 하지 못했으며[21] 바른미래당 후보로 나온 전덕영 후보는 5%를 간신히 넘겨 득표하는데 그쳤다.

3.5.3. 제 3장: 여당[편집]

4. 여담[편집]

지금도 5.18이라면 이를 갈기 때문에 5.18 민주화 운동을 왜곡하는 주장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22] 2013년 5월 20일에는 2일 전인 5월 18일 행사를 계기로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폄하 및 왜곡을 하는 것에 대해 강력 대응한다고 강운태 전 광주광역시장이 밝혔다. 그리고 2017년 1월 17일에는 윤장현 시장도 인터넷상 악의적 광주 비하·폄훼에 대하여, 강력 법정 대응조치를 한다고 밝혔다.

[1] 서구청장 후보를 내지 않았다.[2] 서구 제1,4선거구에서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투표 없이 자동으로 당선되었다.[3] 북구 제5선거구에서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투표 없이 자동으로 당선되었다.[4] 홍준표 후보가 전국 최저 득표율을 기록한 곳이다.[5] 선거구 일부가 남구와 합산되어 순수 동구 영역으로만 계산함[6] 선거구 일부가 동구와 합산되어 순수 남구 영역으로만 계산함[7] 북구 갑 선거구에 후보를 내지 않았다.[8] 북구 갑의 김경진 후보가 국민의당 전국 최대 득표율(70.80%)로 당선되었다.[9] 20대 비례대표에서 남구 양림·방림·사직·백운동이 동구에 합산되어 이 지역들을 제외하고 계산함[10] 20대 비례대표에서 양림·방림·사직·백운동이 제외되어 이 지역들을 포함하고 계산함[11] 이에는 1980년대 민주화 운동 당시 광주를 탄압한 정치인들의 당의 전신이 현재의 보수주의적 정당이기 때문이다.[12] 당시 전남 전체에서는 박정희가 이겼으나 광주에서는 윤보선이 이겼다. 즉, 이 시기의 전남은 전형적인 여촌야도 성향이었다.[13]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었다.[14] 지금의 지역감정을 생각해선 안 된다. 이 때도 1980년대에 비하면 누그러지긴 했지만 지역감정이 상당했던 시절로서, 광주 사람이 영남 사람을 사귀기만 해도 집안에서 좋은 소리 못 듣던 시절이었다.[15] 후일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야권 대선주자였던 문재인이 인정하고 사죄할 정도로 이 부분도 나름대로의 앙금이 있다.[16] http://www.hankookilbo.com/v/1d453f937f5c471eada18ddd00c9bfee[17] 당장 지난 제18대 대통령 선거 때만 하더라도 호남이 텃밭인 민주당에서의 후보는 경남 출신의 문재인 후보였다. 17대 대선 당시 전북 출신의 정동영 후보가 출마했지만 사상 최대 표차로 이명박 후보에 대패한 후 비호남권 민주당 지지자들의 상당수는 호남 후보로는 안 된다는 여론이 대세를 이룬다. 이는 호남과 비호남간 민주당 유권자간의 괴리를 점점 심화시키고 있는 이유 중 하나다. 물론 호남후보여서 패배한 건 아니었고 당 내분 및 집권여당에 대한 실망이 반영된 결과이기는 하지만[18] 여론조사에서는 1위를 한적도 있었다. 이정현 후보는 나중에 순천-곡성 재보선에서 당선에 성공한다.[19] 집권 30년차에 발전이 별로 없다는 것, 영남친노패권주의로 인한 호남 동교동계 인사 홀대 등[20] 새누리당의 텃밭인 영남권에서도 역시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21] 청원경찰 출신 한명이 예비후보로 등록하였으나 본선에는 출마하지 않았다.[22] 5.18 민주화운동은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싸우다 희생된 사건으로 절대 왜곡하고 비하 해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