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딩로딩중

곽영주

최근 수정 시각:


郭永周
(1925 ~ 1961)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00px-%EA%B3%BD%EC%98%81%EC%A3%BC.jpg

파일:attachment/B0FBBFB5C1D6_1.jpg

이승만의 하야 이후에도 계속해서 경호하던 모습

사형 집행 직전 최후의 모습


1. 개요[편집]

한국의 전직 경찰. 지금의 대통령경호실장격인 경무대 경찰서장이었으며, 이승만의 신임을 등에 업고 막강한 권력을 남용하여 월권을 행사하고 시민들을 탄압하였다. 최종 계급은 경무관이었다.

2. 생애[편집]

경기도 이천 출신으로 이정재와는 고향 선후배 관계였다. 일제강점기 당시의 행적은 알 수 없으나, 해방 후 경찰로 있던 이정재[1]의 도움으로 수도경찰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다 대통령 당시 이승만의 눈에 띄어 이승만의 경호일을 보게 되었다.

이때 뽑힌 일화가 있는데 당시 곽영주는 수도경찰학교를 졸업하고 경찰서 보초근무를 서고 있었는데, 이승만이 경찰서 방문 시 문앞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곽영주를 인상깊게 보았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기준으론 엄청난 덩치와[2] 우렁찬 목소리, 강렬한 마스크가 눈에 확 띄었고, 왕족의 후예를 자처하던 이승만은 곽영주가 자기 소개를 하면서 '곽영주라 하옵니다'라고 한 궁중어투가 맘에 들었던지 경무대 경호원으로 특채, 이후에도 이승만의 총애를 받고 1956년엔 지금의 대통령 경호실장격인 경무대 경찰서장에 임명된다.

경사에서 경무관으로 올랐으니 무려 5계급 특진을 한 셈. 군대로 치면 일개 부사관이나 하급 장교가 장성급으로 한번에 진급을 한 셈이니 그야말로 파격 중에서도 파격인사. 허나 이런 곽영주의 승진은 공무원 사회의 인사원칙을 깡그리 무시하는 일이었고, 그 결과 공무원들 사이에선 대통령에게 무조건 아부해야만 출세한다는 그릇된 사고방식을 심어주는 부작용도 있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다만 곽영주가 파격 진급해 그의 영향력을 사회에 유익한 방향으로 행사했으면 그래도 다행이었겠으나, 더 큰 문제는 이후 곽영주의 행보였다. 곽영주는 이승만의 빽을 믿고 대통령 경호 임무를 넘어서는 월권을 행사하며 이리저리 날뛰기 시작한다. 우선 이정재에 대한 은혜를 갚는답시고 깡패가 된 그가 어떤 문제를 일으키든 무조건 그의 편을 들어줬다. 그 결과 이정재는 경찰에 신고 당해도 거의 체포당하지 않았으며, 도리어 신고한 사람이 잡혀가는 황당한 경우마저 발생하기도 했다. 지금으로 따지면 일개 대통령 경호실장이 행정부에 사사건건 참견을 해대는 심각한 수준의 월권 행위를 저지른 셈으로, 이때 곽영주가 얼마나 까불고 다녔는지 부부통령(副副統領)이라는 별명도 얻었을 정도였다.[3]

곽영주는 군 장교의 진급 심사에도 참견했는데, 자기 나름대론 자기 기준선에서 불온분자 소탕에 적극적이었는지 해당 장교의 소양보다는 당사자나 가족의 사상 관계를 캐묻는 경우가 더 많았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태클 걸렸던 사람이 아이러니하게도 김익렬박정희. 김익렬은 4.3 사건 당시 무분별한 경찰의 진압에 회의를 느끼고 빨치산과 일시 휴전을 맺은 탓에 공개장소에서 면박당해서 끌려나갔고, 결국 김익렬은 1950년대 내내 찬밥 신세였다. 박정희는 과거 남로당에 가입한 경력이 있으니 당연히 문제가 될 수 밖에 없었다. 다만 김정렬 당시 국방부 장관이나 백선엽이 찾아와서 심사위원들을 일일이 설득시켜 기어이 진급시켜줬다고. 그런데 곽영주는 박정희의 남로당 경력을 드러내도 먹히지 않자 빨갱이 색출에 실패했다고 생각했는지, 박정희와 김호남의 이혼 경력을 어디서 알아냈는지 들고 와 그의 여자 관계가 굉장히 문란하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권불십년 화무십일홍이라, 1960년 4.19 혁명이 발생하자 곽영주의 앞날도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그는 시민들의 시위를 폭동으로 규정하고 경찰력을 동원하여 시민들을 무력 진압했는데, 서대문 앞 총격사건이나 이기붕 자택(현재의 4.19 도서관 터) 발포 사건은 그의 직접 명령에 의한 것. 허나 이후 이승만이 4.19혁명으로 하야하자 곽영주는 자신의 권력 기반을 잃게 되었고, 그대로 체포되어 장면 정권하에서 벌어진 재판 결과 단기형을 받았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라 5.16 군사정변으로 혁명재판이 벌어지자 그는 다시 체포되었는데, 묘하게도 같은 혐의로 같이 체포된 홍진기[4]와 유충렬이 사형 선고 후 각각 무기징역과 징역 20년으로 감형된 것과 달리 곽영주는 그대로 사형이 선고되었다. 결국 곽영주는 최인규, 이정재, 임화수, 신정식과 나란히 1961년 교수형을 당했다. 당연히 호사가들 사이에선 과거 곽영주와 박정희의 갈등을 지적하며 곽이 박의 원한을 사서 사형을 당했다는 말도 나왔으나, 사실 이걸 빼더라도 사형 당해도 싼 사고들을 치긴 했다. 굳이 문제라면 쿠데타군이 정권 유지용으로 정적 제거를 한 모양새라는게 문제였을 뿐.

1995년 월간조선 10월호에 그가 최인규, 이정재, 임화수, 조용수, 최백근, 신정식, 한필국과 함께 교수형을 당했을 때의 사진이 모두 공개되었다.

3. 평가[편집]

권력 남용과 시민 탄압으로 인한 부정적 평가가 절대적이다. 다만 1979년 10.26 사건 당시 화장실로 도망갔던 차지철과 달리 끝까지 이승만에 대한 충성심은 있었던 모양 당연한 소리지만 권력자에게 아부하며 월권을 행사하고 사익을 채운 것은 결코 묵과할 수 없는 일이다. 애초에 충성심이란 것도 자신의 권력 기반이 상실될까봐 발악 비슷한 것을 했던 것에 불과하니...

게다가 4.19 혁명 이후 구속된 기사에 의하면 곽영주는 깡패를 두둔한 적이 없고 부패도 일삼지 않았다며 끝까지 진지한 반성도 안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런 업보인지 4.19 혁명 이후 그의 장남(곽승근)이 유괴되는 씁쓸한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4. 미디어[편집]

4.1. 제1공화국[편집]

대장금의 내금위장, 제5공화국에서 이규광(전두환의 처삼촌) 역을 맡았던 임문수가 연기했다.

4.2. 제2공화국[편집]

이동신이 연기했다. 첫 등장시부터 이승만에게 궁중어투를 사용해 해설자에게 제대로 까였다. 함께 경무대에서 이승만을 보좌하는 비서관 박찬일과 경쟁, 암투를 벌이는 사이로 묘사된다.

4.19 혁명이 발발한 이후엔 계엄사령관이 된 송요찬을 포섭하려 시도하지만 실패하고, 친하게 지내던 깡패 임화수, 유지광이 계엄군에 체포될 위기에 처하자 송요찬에게 고대생 습격 사건은 시위 때문에 피해 본 노점상들이 빡쳐서 벌인 일일 뿐이라는 식으로 뻘소리를 해대면서 이들의 체포를 막으려 하지만 제대로 까임만 당한다.

결국 이승만이 하야하자 분노를 터뜨리고 허정 과도정부가 수립된 이후 경무대 발포 사건 책임자로 구속당한다.

4.3. 무풍지대[편집]

이운우[5]가 연기했다.

4.4. 야인시대[편집]

[1] 고향인 이천에서 씨름 선수로 활동하다 강제징용 때 경성으로 상경, 김두한의 반도의용정신대에서 서기 일을 보다가 경찰 특채가 되어 해방 후에 다시 경찰에 복직해서 활동하고 있었다.[2] 1950년대에 곽영주의 신장은 무려 180cm가 넘었다고 한다. 전성기의 김두한이 키 182-3cm 정도에 몸무게 92kg이었고, 이정재가 키 180cm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거구.[3] 참고로 이런 안하무인적인 월권 행태는 훗날의 유신 시절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도 충실히(?) 계승한다.[4] 조봉암을 사형시킨 법무장관이자 중앙일보의 창업주.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 홍석조 BGF리테일 회장, 홍라희 리움미술관장의 아버지이다. 이병철과는 사돈이자 이건희의 장인이다.[5] 제3공화국에서는 권일과 홍종철 1인 2역을, 코리아게이트에서는 허문도를 연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