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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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고려

백제

고려

백제

고려

백제



공산 전투
公山戰鬪

시기

927년 11월

장소

신라, 공산 (현 대구광역시 팔공산)

원인

후백제의 신라 침공과 고려의 대응.

교전국

고려

후백제

지휘관

왕건
복지겸
신숭겸
김낙†
전의갑†
전이갑†
강공훤

견훤
능환
최승우
애술
신덕
상귀
최필

병력

15,000 명

20,000 명

피해

전사자 4,930 명
고위 지휘관 8 명 전사

피해 규모 불명

결과

후백제의 승리

영향

후백제, 후삼국의 주도권 장악.


1. 개요2. 공산 전투의 배경3. 공산 전투의 전개4. 왕건의 도주와 여러 지명5. 공산 전투 결과와 영향6. 공산 전투와 관련한 대중 매체의 묘사

1. 개요[편집]

공산주의 전투가 아니다.

후삼국 시대의 전투.

서기 927년 고려왕건후백제견훤이 지금의 대구광역시 팔공산 일대에서 벌인 전투. 이 전투는 후백제의 승리로 끝났으며, 이 전투 이후 얼마간 후삼국 시대의 형세는 후백제가 우위를 점하게 된다.

왕건 개인적으로는 물론 고려의 전체 역사에 걸쳐서도 최대의 패배였다고 평할 수 있는 전투다. 전투에 참여한 말단 병사들뿐 아니라 주요 장수들 태반이 전사한 것도 모자라, 심지어 전군을 총지휘한 임금마저 온갖 역경을 뚫은 끝에 겨우 목숨만 부지해 나온 전투가 고려를 넘어 우리 나라 전체 역사를 통틀어 얼마나 될까.

그런데 이렇게 군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에는 그야말로 탈탈 털렸으며 그 결과 후백제의 위세가 최고조에 달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정치적인 관점에서 볼 때에는 신라 왕실 및 호족들의 지지를 얻는 밑거름이 되었다는 점에서 훗날 고려의 후삼국 통일에 기여한 전투이기도 했다. 이것은 반대로 후백제 입장에서는 자국의 삼국 통일의 마지막 기회였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신라가 견훤의 태세에 실망했다고 해도 고려 국왕인 왕건이 죽었으면 다 소용없는 짓이기 때문. 어쨌든 왕건이 전사했다면 또 모르겠지만 구사일생으로 끝내 살아 돌아왔으니...

파일:공산전투-충렬도.jpg
신숭겸 충렬도.

2. 공산 전투의 배경[편집]

918년 왕건이 쿠데타를 일으켜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한다. 초기에는 서로 사신을 왕래하는 등 고려와 후백제는 별다른 충돌 없이 평화롭게 지낸다. 견훤은 숙원이었던 신라 공략에 매진하기 위해 고려 쪽에는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 같고, 이는 건국 초기 온갖 반란으로 혼란스럽던 고려에게는 엄청난 행운이었다.[1]

하지만 왕건과 견훤 모두 삼한 통일의 야망을 가진 군웅이었기에 충돌은 불가피했고, 잠시 시간이 지난 후 본격적인 충돌이 일어난다. 특히 신라를 적대시한 궁예와는 달리 왕건은 신라와의 화친 정책을 폈고, 이는 신라 공략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던 견훤에게는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왕건과 견훤의 첫 대결은 두 번에 걸친 조물성 전투로, 후백제가 우위를 점하기는 했지만 고려가 성을 지켜내어 승패가 명확히 가려지지는 않았다. 왕건과 견훤은 인질을 교환하고 강화에 동의하지만, 후백제의 인질인 진호가 1년만에 죽자 견훤은 왕건이 진호를 주살한 것이라 생각하고 강화를 파기한다. 왕건은 신라와 연합하여 견훤과 대항했다.

견훤의 군대가 웅진으로 치고나오자, 고려와 신라군은 웅진과 문경 인근에서 후백제군과 교전을 벌였다. 그 때 고려의 장군 김락이 한반도를 반바퀴 돌아 진주에 상륙, 견훤이 수 차례 공격 끝에 간신히 점령한 대야성을 탈환하고 백제의 장군 추허조를 사로잡는다. 이 기동으로 인해, 견훤은 어느 통로로 진격해도 고려군의 협공을 받게 되는 형세에 빠지게 되었다. 왕건은 내친김에 직접 진주까지 남하해서 백성들을 위무하자 문경 일대의 호족들도 고려에게 투항하면서 견훤은 전략적으로 극도로 불리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3. 공산 전투의 전개[편집]

927년 9월, 견훤은 대대적으로 군사를 일으켜 신라 근암성과 고울부를 함락시키고 수도 금성으로 진군한다. 견훤은 고려의 이중 전선의 간극이 지나치게 넓어, 자신의 주력 부대만으로 신라를 굴복시키고 고려군을 각개격파할 수 있다는 것을 정확히 파악한 것이다. 신라 경애왕은 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하자, 왕건은 시중 공훤이 이끄는 1만 명의 군사를 원군으로 보낸다. 그러나 고려군이 도착하기 전에 후백제군이 먼저 금성을 점령하여 경애왕을 자결하게 하고 경순왕을 새 왕으로 세웠다. 이때 경애왕은 포석정에서 연회(일설에는 제사나 팔관회)를 베풀고 있었는데, 이는 후백제군의 기동이 신라군이 제대로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신속했거나, 혹은 후백제군이 고려군의 지원 소식을 듣고 물러나는 척했다가 전광석화 같이 금성으로 쇄도했음을 의미한다. 이에 왕건은 5,000명의 기병을 직접 이끌고 후백제군을 격파하기 위해 출전한다. 그러나 왕건은 필승을 장담할 수 없다 생각했는지 미적거리다 김락의 군세까지 합류한 뒤에야 견훤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한다.

전투가 벌어진 곳은 지금의 대구 광역시 공산 동수 일대. 고려군은 왕건 직속 기병 5,000에 공훤의 선발대 1만, 김락의 군대, 여기에 여타 보병 및 호족들의 병력도 상당히 동원되었으리라 생각되고, 후백제군의 병력은 불명이지만 신라를 정복한 직후인 만큼 최소한 몇 만 단위는 되었으리라 추정된다. 그러나 견훤의 주력 부대는 항상 3,000명 ~ 5,000명 남짓이었고 금성을 기습하기 위해서는 다수의 군대보다는 소수의 정예병이 유리했으므로 그보다 적었을 여지도 있다.

일대의 지리를 잘 모르던 고려군은 후백제군의 매복 작전에 걸려들고, 결국 고려군은 대패하고 만다. 동화사, 태조지, 파군재 등에 남은 민간 전설로 볼 때, 공산 일대에서 후백제군과 고려군이 수 차례 교전을 벌였고 고려가 계속 밀렸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고려군은 공산성까지 몰렸고 최후의 결전에서도 완패, 왕건 역시 포위되어 죽기 일보 직전까지 간다. 그러나 지형상 후백제군의 포위가 완전하지는 않았고, 부하 장수 신숭겸기신의 일화를 들며 왕건의 복장을 대신 입고 대신 왕건이 도망칠 시간을 벌기 위해 미끼가 되어 전사했으며 그밖에도 김락, 김철, 전이갑, 전의갑 등 고려의 장군 8명이 전사하고[2] 5,000의 직속 기병 중 70명만이 살아남는다. 선발대와 보병까지 합치면 만 명 단위의 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왕건 본인은 견훤군의 눈을 피하기 위해 병졸의 군복으로 갈아입고서야 겨우 도망치는 데에 성공했다.

主乙完乎白乎 을 온전하게 하기 위한
心聞際天乙及昆 그 정성 하늘 끝까지 미치고
魂是去賜矣中 넋은 이미 가셨지만
三烏賜敎識麻又欲 임께서 내려주신 벼슬은 또한 대단하구나.
望彌阿里刺 바라보니 알겠구나.
及彼可二功臣良 그 때의 두 공신이여
久乃直隱 이미 오래 되었으나
跡烏隱現乎賜丁 그 자취는 오늘날에도 나타나는구나.


예종, 『도이장가(悼二將歌)』[3]

4. 왕건의 도주와 여러 지명[편집]

이 전투에서 패한 왕건은 글자 그대로 죽을 고비를 넘기며 도주했는데, 이 사건은 팔공산 일대에 많은 전설을 남겼다. 오늘날 팔공산에는 왕건의 도주로를 따라 팔공산 왕건길이라는 트래킹 코스를 조성해 놓았다.

대구 파군재(破軍峙) 삼거리는 왕건의 군대가 크게 패한 곳이라 하여 이런 이름이 붙게 되었다. 또 근처 절에는 왕건이 홀로 파군재에서 군대가 격파당하는 모습을 보았다는 독암, 왕건이 후백제군을 피해서 3일 동안 숨었는데 거미들이 거미줄을 치고 안개가 자욱하게 드리워져 겨우 모습을 숨길 수 있었다는 자연 동굴 왕건굴, 왕건이 잠깐 들렀다가 주먹밥을 얻어먹고 도망쳤다는 실왕리[4], 신숭겸 장군의 기묘한 계책으로 왕건이 살아났다는 뜻을 지닌 마을 이름인 지묘동 같은 왕건과 관련된 지명이 남아 있다.(이렇듯 이 지역엔 왕건 때 붙여진 지명이 무척 많다. 대구광역시/공산 전투 관련 지명 항목 참조.)

지명과 관련된 전설이 모두 사실이라고는 보기 어려우나, 실제로 이 전투에서 패배한 왕건은 한달 가까이 생사불명 상태였다. 후백제군의 수색과 포위를 돌파하기 위해서 단신, 혹은 소수의 호위병만 거느리고 팔공산 일대를 피해다니다가 가까스로 살아남아 고려로 귀환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5. 공산 전투 결과와 영향[편집]

친히 정예(精銳)한 기병(騎兵) 5천 명을 거느리고 견훤을 공산 동수(公山桐藪)에서 맞아 크게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견훤의 군사가 매우 급하게 왕을 포위하여 대장 신숭겸(申崇謙)ㆍ 김낙(金樂)이 힘껏 싸우다가 죽고, 모든 부대가 패배하니 왕은 겨우 단신으로 탈출하였다. 견훤이 이긴 기세를 타서 대목군(大木郡 경북 칠곡군(漆谷郡) 약목면(若木面))을 빼앗고 전야에 쌓아두었던 곡식을 불태워 없애 버렸다.


고려사


견훤 : 허허... 이런 이런... 그래도 그렇지.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태자들이 대체 어떻게 했길래, 대야성을 잃어...?
최승우 : 폐하, 폐하께오서는 두 개의 성을 내어주시고, 고려를 얻고 신라를 얻으시는 것이옵니다. 이보다 큰 거래가 어디에 있사옵니까?
견훤 : 물론 그럴 수만 있다면야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너무 아깝지가 않은가? 대야성이 어떤 성인가?
최승우 : 대야성이 아니라, 고려와 신라라 했사옵니다, 폐하.


사극 태조 왕건 155화 가운데.[5]


이 전투를 계기로 해서 후삼국의 주도권은 확실히 후백제에게 돌아간다. 신라를 실질적인 속국으로 만든 동시에 영토 역시 신라 9주 중 6주에 이르러서 최대 판도에 이른다. 구체적으로는 전주(전북), 무주(광주 전남), 강주(경남 서부), 웅주(충남과 충북 일부), 상주(경북 북부), 양주(경남 동부)의 일부이다. 한편 신라는 서라벌과 양주(경남 동부)의 일부만으로 근근히 버티고 있었고 고려는 변두리의 한주(경기도와 황해도), 삭주(영서 지방) 2주만을 점유하고 있었다. 그것도 땅만 넓지 산지가 많고 경제력이 좋지 않은 지역이었다.[6] 한편 명주(영동 지방)는 독립세력이었던 김순식이 점유하고 있었다.[7] 견훤은 오랫동안 눈의 가시였던 나주 점령에도 성공한다.

이렇게 더없이 치솟아 오르던 견훤의 패기는 고창 전투가 벌어지기 전까지 계속된다. 견훤이 왕건에게 "나는 평양 성루에 내 활을 걸고, 패강(대동강)의 물로 내 말의 목을 축이게 할 것이다!"라고 패기 있게 국서를 보냈던 게 이 후백제 우세기에 있었던 일이다.

그러나 왕건에게 손해만 있었느냐면 그것은 아니다. 공산 전투 자체는 견훤의 군사적 천재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전투였으나, 왕건의 지원군 때문에 신라에 확실한 친백제 세력을 결집시키는데는 실패했다. 오히려 왕을 죽이고 왕비를 능욕한 사건으로 신라의 호족들은 견훤에게 큰 반감을 보였으며, 역으로 신라의 민심은 신라를 도와주려다 일격을 당한 왕건 쪽으로 기울었다.[8] 경순왕도 즉위 후 얼마 안되어 고려와 돈독한 관계를 맺었으며, 고창 전투에서도 신라 호족들이 왕건의 편을 든 것이 결정타가 되었음을 고려할 때 공산 전투로 이어지는 전역은 견훤이 군사적 능력에 비해 정치적 능력이 부족했음을 보여주는 전역이었다 할 수 있다. 만일 왕건이 전사했었다면 곧 후백제의 삼한 통일로 이어졌을 사건이었겠으나,[10] 왕건이 기어코 살아남았기 때문에 발해 유민과 신라 호족의 힘으로 판도가 역전될 수 있었던 것이다.

6. 공산 전투와 관련한 대중 매체의 묘사[편집]

KBS의 대하 사극인 태조 왕건의 159부 ~ 161부 사이에 잘 묘사되어 있다. 실제 역사와 마찬가지로 다수의 고려 장수들이 여기서 전사하였고, 왕건을 호위한 복지겸, 박수문,박수경만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천년의 신화에서도 고려 3번째 미션으로 등장. 여기에서는 왕건과 신숭겸이 참전한다. 동쪽의 후백제 성을 함락시키면 갑자기 후백제의 유닛들이 몰려와 왕건을 포위하기 시작하고, 서쪽으로 왕건과 신숭겸을 도주시키면 신숭겸이 혼자서 대신 싸우는 틈을 타 왕건은 재빨리 퇴각하는 것으로 나온다.

[1] 환선길의 난, 이흔암의 난, 명주의 대호족 김순식의 반기, 웅주(옛 웅진) 일대 호족들의 대거 이탈 등 고려는 수많은 장수들이 죽거나 이탈하고, 영토는 거의 반토막이 난다.[2] 그외에도 전이갑, 의갑 형제의 사촌 동생인 전락, 개국 공신 평장사 호원보와 대상 손행을 포함한 8명의 장수가 전사해서 그곳의 지명이 팔공산이 되었다는 설화가 있다. 한편, 《삼국사기》 〈고려사〉에는 신숭겸, 김락, 김철 이외에 다른 장수는 언급되지 않는다. 나머지 장수들은 각자의 족보에만 기록이 있다.[3] '두 장수(二將)를 애도(悼)하는 노래(歌)'라는 뜻이다. 예종이 1120년 서경에서 팔관회가 열렸을 때 공산 전투에서 전사한 신숭겸과 김락을 추모하며 지은 노래. 원문이 향찰로 표기되어 있는데 연구자에 따라 해석이 조금씩 다르다.[4] 도망치는 왕건에게 주먹밥을 준 나무꾼은 그의 신분을 모르고 그냥 패잔병인줄 알고 선심을 쓴 것인데 나중에야 그가 고려 왕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매우 아쉬워했다고 한다. 선심 함부로 쓸 일이 아니다. 왕(王)을 놓쳤다(失)고 해서 실왕리가 된 것이다.[5] 덤으로 내레이션으로 친절하게 왕건 최대의 패배라고 한번 더 짚어준다. 이 장면은 최승우가 후백제의 삼한 통일 플랜을 설파하면서 역대급 포스를 뿜어내는 장면으로 파진찬의 팬이라면 필견(...).[6] 이는 오늘날에도 그런데 사람이 적고 경제력이 딸리는 도외지의 행정구역은 크고 아름답다.. 반면에 인구가 많고 세수가 커지면 행정구역은 촘촘이 작아진다. 동서고금 다 그런경향이 있고 사실 그럴수 밖에 없는 것이다.[7] 이후 922년 다시 일어선 왕건에게 귀부하고 왕씨성을 하사받는다.[8] 공산의 대패 이후 명주를 지배하고 있던 호족 김순식이 위무를 목적으로 본인이 직접 개경으로 왕건을 찾아 왔다. 김순식은 명주 군왕이라 불릴 정도로 강대한 호족[9] 이었고 궁예가 독립적인 세력을 꾸리는데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때문에 궁예를 몰아낸 왕건과의 관계가 불편했는데 그런 그가 직접 왕건을 찾아 온 것. 사실상의 김순식의 왕건 지지 선언이었던 셈이다. 친신라, 반신라를 불문하고 호족들이 견훤이 금성에서 벌인 행위에 대해 얼마나 큰 반감을 지니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인 셈.[9] 후삼국 최후의 전투였던 일리천 전투에 왕건 진영에 가담하면서 단독 세력으로 1만 이상의 병력을 냈던 세력이다. 당시 농업 생산력을 감안했을땐 일본 에도 막부 시대 최대 번이자 최대 외양번이었던 마에다 가문 이상의 비중이었을 것이다.[10] 궁예를 따르던 자들의 반란이 연이어 일어난 상황에서 그나마 힘 세고 노회한 호족 세력이 '고려'라는 정치 시스템에 편입되어 있었던 건 왕건의 개인적인 정치력과 카리스마에 기인한 바가 컸는데, 그 왕건이 공산 전투에서 전사했다면 고려는 호족들의 급격한 이탈로 인해 순식간에 공중 분해되었을 공산이 크다. 훗날 후삼국이 통일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왕건이 사망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곳곳에서 잡음이 발생하다가 광종의 피의 숙청으로 겨우 기틀이 잡힌 국가가 고려였는데, 하물며 호족 세력이 후백제와 고려 사이에서 한참 간을 보던 혼란한 시기에 왕건이 죽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