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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제(전한)

최근 수정 시각:

한나라의 역대 황제(전한)

추존 태상황 유태공

1대 태조 고황제 유방

2대 혜황제 유영

파일:attachment/한고제/Example.jpg

묘호

태조(太祖) / 고조(高祖)[1]

시호

고황제(高皇帝)

유(劉)

방(邦)[2]

계(季)

생년

음력

기원전 256년 혹은 기원전 247년

출생지

패현(沛縣) 풍읍(豊邑) 중양리(中陽里)

몰년

음력

기원전 195년 4월 갑진일(53세 혹은 62세)

사망지

장안(長安) 장락궁(長樂宮)

능호

장릉(長陵)[3]

영문표기

한고조(Emperor Gaozu of Han) 유방(Liu Bang)

재위 기간

음력

기원전 202년 ~ 기원전 195년 (7년)[4]


1. 개요2. 출생과 외모3. 생애4. 가정5. 평가
5.1. 군사적 능력5.2. 정치적 능력5.3. 용인술5.4. 인간적인 면모5.5. 총평
6. 기타7. 대중 문화 속의 한 고조 유방
7.1. 초한전기
7.1.1. 행적7.1.2. 능력 및 인품 표현7.1.3. 기타

1. 개요[편집]

朕若逢高皇,當北面而事之,與韓彭競鞭而爭先耳。
"짐이 만약 고황(高皇)을 만났다면 응당 북면하여 그를 기쁘게 섬겼을 것이고, 공을 세우기 위해 한신(韓信), 팽월(彭越)과 채찍질을 경쟁하며 선두를 다투었을 것이오."


석륵


중국통일 왕조전한의 초대 황제. 본명은 유방(劉邦)[5]이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평민 출신 황제로, 기존의 지배층이었던 제후나 귀족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피지배층에서 황제라는 최고의 자리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 진(통일왕조)(秦) 말기의 대혼란에서 세력을 일으켜, 초한대전에서 최대의 호적수이자 압도적인 항우(項羽)를 패배시키고 승리를 거두어 천하를 차지하였다.

이후 각지의 반란을 평정하고 이성왕(異姓王)들을 숙청하여 대제국 한나라의 기틀을 닦았다. 특히 한(漢)족, 하나의 중국과 같은 오늘날까지 엄존하고 있는 중국의 국가적 문화 정체성을 만들어낸 낸 왕조의 창시자로서 중국사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황제는 중국을 처음으로 통일했지만 중국을 하나로 묶어내는 것에는 완벽하게 실패했는데, 한고제는 이를 이뤄냈고, 또 중국에 이후 분열기가 찾아왔어도 그 때마다 통일 국가의 대의명분을 제공해줬다. 따라서 오늘날 중국, 혹은 한족의 실질적 시조(중시조) 정도 되는 인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헌원황제로 대표되는 삼황오제가 있고 역사적 실증으로만 따져도 상나라 왕조 등 한고제보다 까마득한 윗대가 있지만, 후세에 통일된 중국과 중화문명의 큰 기반을 제공하였으며, 오늘날까지 중국인들이 자신들을 한족(漢族)이라고 칭하는 것으로만 해도 '중시조'라 불릴만한 자격이 있다.

워낙 파격적인 행동이 많고 질기게 살아남고 버틴 타입이라 인물에 대한 호불호가 꽤 극단적으로 갈리는 탓에 이를 배경으로 하는 초한지 소설 등에서는 라이벌인 항우나 부하인 한신 등에 비해 인기가 아주 높은 편은 아니지만, 최후의 승자로서 가지는 역사적 입지와 비중은 가장 높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주로 한고조(漢高祖)라는 표현으로도 불리는데, 이는 정식 표현은 아니다. 유방의 묘호는 태조이며 시호는 고황제다. 다만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서 고조라는 표현이 나와서 그것이 유방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칭호로 굳어진 것. 정확히 말하자면 고조는 시호인 고황제의 존칭인 것이다.

2. 출생과 외모[편집]

유방은 초나라 출신으로서 패현(沛縣) 풍읍(豊邑)[6] 중양리(中陽里)에서 태어났고 부친은 태공(太公)이었고 어머니는 유온(劉媼)이었다. 그러나 태공이나 온은 남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높여 부르는 호칭에 지나지 않았다고 사기집해나 사기색은 등의 주석서에서 일관되게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유태공과 유온을 현대어로 풀이하자면 그저 유씨댁 어르신, 유씨댁 안주인 정도의 의미로 유방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진짜 이름이 무엇이었는지조차도 사서에 보이지 않는 셈이다.

사실 이는 부모 뿐만 아니라 유방 본인도 마찬가지인데, 사기나 한서(漢書)에서는 아예 유방(劉邦)이라는 이름 자체가 언급되지 않는다. 그저 성이 유씨이고 자(字)가 계(季)라고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 유방이라는 이름이 언급되는것은 순열(荀悅)의 한기(漢紀)에서부터인데, 물론 다른 이야기를 하는 설은 있기는 하지만 일반적인 관점으로는 유방이 어렸을 당시에는 유계라는 호칭으로 통하다가, 즉위한 후 유방이라는 호칭을 사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유방의 형제를 살펴보면 이 이름이 형제 간의 서열, 순서를 간편하게 나타내는 백중숙계(伯仲叔季)를 붙여서 지어진것을 볼 수 있다. 실제로 유방의 형들로 유백(劉伯)과 유중(劉仲)이 언급되는것을 보면 '유계' 라는 호칭이 어떻게 붙여졌는지는 확실하다고 볼 수 있다.[7] 이렇게 보면 유방은 본래 개별적인 이름은 없는 것이나 다름 없고, 그저 "유씨네 막내" 정도로 통용될 수 있는 유계라는 이름만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형 유중은 유희(劉喜)라는 휘가 알려져 있고, 동생 유교(劉交)는 아예 자인 유(游)로는 거의 기록되지 않아 모든 사람의 휘가 불명확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백중숙계가 대충 지은 이름 같아 보이지만 그게 정식 자나 이름인 예가 꽤 있어 그 유계라는 이름이 개별적인 이름일 가능성은 다분하다. 더욱이 유교가 유학자로, 특히 시경에 능한 인물이었음을 감안하면 집안 사람들 중에 이름이 아예 없는 인물이 있는 것 자체가 신기한 일이기도 하고.

유방의 출생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유방의 어머니인 유온이 연못가 근처에서 쉬다가 문득 잠이 들었는데, 꿈 속에서 (神)을 만났다고 한다. 그때 뇌성벽력이 치고 하늘이 시커멓게 변했는데, 근처에 있던 태공이 그 모습을 보자 유온의 배 위쪽에 교룡(蛟龍)이 떠 있었고, 유온의 몸에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으니 그 사람이 유방이었다.

유방은 외모에 대해서도 융준용안(隆準龍眼), 용안미수염(容顔美鬚髥)과 같은 식으로 용과 연결이 자주 되는 편인데 공룡상 이러한 과정에서 나온 전설이라고 보는것이 좋을 듯 싶다.

유방의 외모에 대해서는 앞서 말한대로 콧날이 높고 이마는 넒어 용의 얼굴을 닮았으며, 수염이 아주 그럴듯 해서 멋있었다고 한다. 또한 왼쪽 넒적다리에는 72개의 반점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많은 반점의 숫자야 '비범한 인물' 에 대한 묘사에서 자주 나오는 특징 중에 하나고, 용의 얼굴을 닮았다지만 사람 얼굴을 보고 연상시키는 동물이야 모두 다른 법이니 일단 알 수 있는 사실은 콧날이 높고 이마는 넒고 수염이 꽤 멋있었다는 정도다.

그리고 좀 뒤의 이야기지만, 유방은 정장(亭長)의 벼슬을 하고 나서부터는 자기 밑의 부하를 설(薛)[8] 땅으로 보내 죽피관(竹皮冠)[9]을 만들어 오게 하여 외출 할때는 무조건 이를 쓰고 다녔는데, 허세를 위한 용도로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훗날 황제가 되고 나서도 이 죽피관은 계속 착용하고 다녔다고 한다. 대체로 유방의 초상화에서는 넒은 이마, 콧날, 죽피관이 강조되는 편이다.

3. 생애[편집]

문서 참조.

4. 가정[편집]

고제는 8남 1녀를 두었는데, 여덟 아들의 어머니가 모두 다르다.

5. 평가[편집]

"유방은 무정했다. 그러나 냉혹하지는 않았다. 현실적이었다. 그러나 낭만이 없지는 않았다."
-이중톈

한고조 유방의 다양한 모습들

아랫사람을 돌보고 이끄는 타고난 리더 기질,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도 공황에 빠지지 않는 두둑한 배짱, 베풀 땐 화끈하게 베풀 줄 아는 배포, 한 두번 같이 행동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할 줄은 아는 눈[10], 쓴소리를 들을 줄 아는 열린 귀,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사로운 감정의 문제가 있어도 실익을 잊지 않는 무엇을 원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11][12]

유방에 대한 고전 문학 작품들과 그 문학 작품의 영향으로 유방을 능력이 없고 무식하며, 욕심만 많은 인물이라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군사적인 능력은 다른 장수들의 방해만 되는 수준이며, 판세를 읽는 능력도 부족하고 그저 운만 좋아서 천하를 얻은 인물이라는 인식이다. 또한 호쾌하고 남자다운 면모가 있는 항우에 비해[13] 비열하고 추악한 인물처럼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런 인식은 초한지 소설등에서 퍼진 부분이 대부분이며, 실제 사기나 한서, 자치통감 등의 기록으로 살펴본 유방은 결코 무능한 인물이 아니었고 오히려 덕이 있는 군주라는 이미지가 있었으며 인기도 매우 높았다. 훗날 삼국지연의의 유비에게 덧씌워진 이미지는 딱 (능력치를 제외한)유방의 그것이다. 덕분에 유비 역시도 본인의 능력이 엄청나게 저평가되었다.

5.1. 군사적 능력[편집]

사람들이 유방에 대해 가장 크게 비난을 하는 부분이 바로 군사적 능력이다. 이상하게도 보통 유방은 군사면에서는 무능하고 졸렬한 지휘관으로 인식되는 편이다. 이것은 중국사에서 열 손가락에 꼽히는 불세출의 지휘관인 한신과, 중국사 최강의 무용을 자랑하며 돌격의 대가인 항우가 비교 대상이기 때문이다. 사실 산적두목에서 고작 2년 사이에 군사를 몰아 왕이 된것만 해도 비교대상이 많지 않은 위업이다.

실제 역사 기록에서 유방은 거병 후 대부분의 전투에서 직접 군대를 지휘했으며, 그 대부분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조참, 번쾌주발 등의 초반 행적을 살펴보면 이들은 전투에서 앞장 서 싸우는 정도였으며, 실제 군을 이끈건 유방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신은 팽성 전투 이후로 마지막 해하전투에서 선봉에 서기 전까지 항우와 전쟁터에서 만난 적이 없다. 사실 그 정도가 아니라 초한 전쟁 내내 항우와 직접 맞싸움을 한 사람은 유방밖에 없다.[14]

백전 노장 한고조 유방

따라서 거병 초창기부터 황제가 되어 천하를 통일하고 난 뒤에 이르기까지, 당대에서 가장 풍부한 전투 지휘 경험을 가진 사령관 중에 한 명 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정식으로 군인이 되어 병법을 익힌 것은 아니지만, 밑바닥 동네 패싸움을 이끄는 술집 형님으로 시작해서 망탕산에서 들고 일어나 봉기하여 패현을 점거하고 크고 작은 공성전, 수성전, 야전을 두루 겪었다. 따져보면 단순히 참전 수준이 아니라 사령관으로서 지휘한 전투 중 제대로 기록된 것만 30~40번은 너끈히 되는 수준. 누경의 표현을 빌리자면 큰 전투만 70회, 작은 전투는 40회에 달했다. 그리고 막연한 이미지와는 다르게 그 대부분의 전투에서 거진 승리를 거두었고, 패전이라고 할 만한 전투들도 하나하나 따져보면 졸렬한 지휘 탓에 졌다기 보다 나름 이해가 가는 패전이 많은 편이며 또, 패전으로 가진 것을 다 날리거나 한 적도 없다.[15][16] 한신이 군 지휘권을 잡자마자 두각을 나타낸 불세출의 천재라면, 유방은 작은 규모의 군사부터 차근차근 지휘하며 역전의 경험을 쌓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항우와의 교전에서는 최후의 해하전투를 제외하면 유방은 항우를 상대로 이긴 적이 없다시피 하지만[17], 당시 항우는 가히 최강의 힘을 가진 세력이었음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또한 항우는 중국사 최고의 소드마스터이자 모랄빵 제조기이기도 하니, 항우가 이끄는 군대에게 패배했다는 이유만으로도 졸렬하고 무능한 지휘관으로 보기는 힘들다. 따지고 보면 지는 게 더 이상한 전투일 때도 많았으며, 다시 붙을 때는 노출된 약점을 고쳐놓는 치밀함도 보였다. 팽성대전에서의 참담한 패배가 가장 큰 굴욕 요소로 손꼽히는 부분이었지만, 이 부분은 특수한 당시의 상황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18] 이것이 단순히 '군사적 역량의 차이'로만 발생한 상황이었다면 항우는 이후에도 팽성대전같은 전투를 수 차례는 더 치러야 했겠지만, 그렇지는 못했다. 항우로서도 특수한 승리였다는 것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초한 대전의 거의 대부분의 시간 동안 항우의 발목을 잡고 중원에서 버틴 것은 유방이다. 항우가 패배한 건 정치적인 실책도 있지만 결국은 유방과 팽월이 앞뒤에서 자리를 잡고 벌인 무한 소모전을 끝내 돌파하지 못했기 때문이며[19], 이것은 엄연한 유방의 군사적 성과였다. 이미 광무 대치 시점에서 항우는 인질극이나 저격 등의 기책을 시도하는 등 초조한 심경을 드러내고 있었고, 용저가 한신에게 격파당하자 그간의 원한을 누르고 땅을 반으로 뗀 뒤 끝내자는 말에 승낙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는, 항우의 자존심을 생각하면 반쯤 항복에 가까운 결정까지 내렸다. 한신, 팽월 등이 망치에 해당한다면 유방은 전쟁 중 모루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다. 바꿔 말하면 유방은 초한 대전의 한나라 진영에서 가장 위험한 역할을 맡은 것이다. 오히려 그러면서도 자기 병력을 빼서 한신이나 관영, 조참, 유가 등에게 나눠준 것을 보면 진짜 대단한 배짱이 아닐 수 없다.[20]

또한 한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고 난 뒤 벌어진 여러 차례의 반란을 제압한 인물이 유방이라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개국 초기의 반란들은 상당히 위험하기 마련인데 유방은 이 반란들을 수차례 제압했다. 그 중 영포 같은 인물은 거록대전 당시 눈부신 공을 세우기도 하는 등 당대에도 이름이 높은 지휘관이었지만, 유방을 상대로는 패배하고 말았다. 직접 전투를 진두지휘하는 일이 많았기에 전장에서 부상을 입은 적도 있는데, 광무 대치 때는 항우의 죄상을 열거하다가 쇠뇌를 가슴에 정통으로 맞아 죽을 위기에 처했었고, 영포의 반란을 진압하던 와중에도 화살에 맞아서 결국은 이 부상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죽음을 맞는다. 영포는 한군에 있는 사람 중에선 한신, 팽월, 유방 빼곤 다 자기 상대가 안된다고 말했으며, 유방은 유방대로 시황제가 천하를 정벌할 때도 스스로 나서지는 않았는데 유방이 자꾸 친정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못 미더워서 그러는 것이냐고 주설이란 신하가 울면서 매달려도 친정을 계속하면서 암묵적으로 이 말을 인정했다. 내외적으로 대부분의 장수들보다는 유방이 한 수 위로 평가받았던 셈.

아주 단순히 말해서, 유방은 항우한신을 제외하고 본다면, 엄청난 군웅이 즐비한 당대에서도 손꼽히는 군사적 능력 및 업적을 보유했다. 옹치 때문에 풍읍을 잃어버리니 오히려 진승을 쫓아온 진나라 군대를 박살내서 성과 사람들을 빼앗아 세력을 불린 일화나, 일찍이 거록 대전에서 항우군의 선봉을 맡으며 군사적 역량을 인정받은 영포나 진나라 최후의 보루였던 장한까지 유방에게 격파됐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유방의 군사적 능력은 특출난 편이지, 무능한 것과는 절대 거리가 멀다. 유방 정도 되니까 중국사 최고의 소드마스터이자 돌격대장인 항우의 공격을 무식하게 정면으로 받고도 그정도 버틴것이지, 다른 인물들은 항우 앞에선 그저 광탈당하기 바빴다. 그리고 한신이야 중국사 최고의 군사천재이니 비교하는게 말이 되겠는가. 또한 취중에 흘린 말이라 모두가 간과하지만 유방은 중국사 최고의 군사천재인 한신이 병력 10만 정도는 지휘할 능력이 있다고 인정한 사람이다.

다만 백등산 포위전은 확실히 유방의 흑역사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유목 민족의 유인 후 포위 전술은 거의 필살기에 가까운 전법으로서, 역사상 최고의 정복자 중 한사람으로 손꼽히기도 하는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키루스 2세(Cyrus II)조차 죽음에 이르게 했던 방식이다.[21] 그리고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 같은 서양 전투들과 항우와의 동양 전투들을 모두 참조하여 기병의 위력을 분석하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사실 유방은 이미 더 적은 숫자의 항우의 정예 기병대에게 더 큰 대패를 당한 적이 있었다. 그래도 최후에는 결국 승리하였으니 군사적 능력이 나쁜 것은 아니다. 또한 전투의 전개 과정을 살펴보면 유방이 아무 생각도 없이 포위에 말려든 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유방은 여러 차례 흉노의 상황을 살피면서 신중한 면모를 보였는데, 기만책으로 이를 속여낸 묵돌의 기민함을 칭찬해야 할 것이다.[22]

유방의 진정한 군사적 능력은 전술적 차원이 아닌 전략적 차원이다. 대전략의 개념조차 없던 항우에 비해 유방은 전쟁의 큰 그림을 그리고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고, 이를 달성함으로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중요한 순간마다 자신의 생각보다 더 옳은 전략을 제시하는 수하가 있으면 지체없이 그에 따랐으며, 항우가 자신의 꽁무니만 쫒아다니는 틈을 타 한신을 파견해 하북을 평정케 했고, 영포를 회유하고 유가와 노관으로 하여금 팽월을 지원케 함으로서 적을 고립무원 상태로 만들었다.

이러한 전략적 식견은 정치적인 부분과 연계가 되기에, 유방의 정치적 능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5.2. 정치적 능력[편집]

유방의 정치적인 능력은 당대 모든 사람을 통틀어서도 가장 고단수라고 칭할 수 있다.[23]적어도 거시적인 식견이 눈꼽만큼도 없던 항우에 비해 유방은 몇 배나 앞선 인물이었다.

행적을 살펴보면 단 2년 동안의 기간동안 경구, 항량, 의제로 라인을 갈아타며 그들 모두에게서 최대한의 실리를 뽑아내 제 3세력으로 독립했으며, 비교적 늦게 합류한 항량의 기의군에서도 유방은 금세 주동적인 위치에 놓인 주요 인물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24] 또한 이를 바탕으로 군사력을 모아 함양에 입성 한 후에 백성에 대한 피해를 최소화 하면서 민심을 손아귀에 넣을 수 있었는데, 이는 신안대학살 후 함양에 입성하고 온갖 만행과 행패를 부려 민심을 잃어버린 항우의 태도와 대조되는 부분이다. 이후 관중은 유방의 지배 영역이 되는데, 진나라 사람들이 병사로 나선 진나라 젊은이들을 학살하고 마지막 왕 자영을 참살하며 궁궐을 노략질 하던 항우와 약탈을 금하고 가혹했던 법을 없애고 항복한 마지막 왕 자영에게 조용히 여생을 누리게 자비를 베푼 유방 중 누가 이기기를 바랐을지는 너무 뻔한 이야기다.

또한 살해된 의제를 추모하는 부분이나 팽성 대전 패배 후 바로 영포에게 연락을 취해 그를 회유하고, 팽월과는 계속해서 연락을 취하며 노관 등을 보내 지원을 하는 부분에서 보이듯이 기본적으로 유방은 항우보다 큰 그림을 그릴 줄 알았다.

또한 비판받는 토사구팽도 사실 전한과 유방 입장에선 반드시 행해야 할 일이었다.[25] 강한 권력, 능력을 가진 신하를 제거해야, 왕권이 강화된다. 왕권 강화를 위해서는 신하의 숙청은 필요 불가결하다. 당장 무지렁뱅이 출신인 부하들이 서로 자신의 공이 크다며 왕궁에서 서로 칼부림을 해서 기둥에 칼자국이 남았을 정도니 말 다했다.[26] 유방의 토사구팽에 대한 비판은 사실 '400년간 이어져 내려온 통일 왕조 한 제국'이 기정 사실이 된 현재의 시선이 반영된 부분이 없잖아 있다. 유방 생전의 한나라는 아직 진정한 의미에서 완성된 통일인가를 확신할 수 없는 단계였다. 중국을 통일했던 진 제국만 해도 시황제가 죽은 직후부터, 아니 시황제 때부터 이미 붕괴 수순을 밟고 있었고, 고작 몇 년 정도라 무시당하는 것이긴 해도 항우를 필두로 한 초나라 역시 분명히 중원의 종주국으로 군림했으며, 바지 사장이었지만 유방 자신도 모시던 전 중국의 천자 초의제도 있었던 것이 극히 최근의 일이다. 그러니 유방이 항우를 이기고 통일 한나라를 열었다고는 하나, 그 '유방의 한나라'가 안정된 통일 왕조를 이룩할 것인지, 진이나 초처럼 계속되는 군웅 할거의 전국 시대 속 일시적인 통일 후 역사에서 사라질 것인지는 아무도 확신할 수 없는 일이었고, 유방 자신도 제국의 개조로 길이 남을지 진 왕조 3대나 초 의제의 전철을 밟을 것인지 말할 수 없는 상태였다. 즉 유방 시절의 한 왕조는 아직 춘추 전국시대의 연장에서, 쉼표로 끝날 것인가 확실한 마침표를 찍을 것인가의 기로에 놓여있는 상황이었고, 유방이 행한 '내부 숙청'은 춘추 전국시대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한나라만의 새로운 장(章)을 여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27]

또, 애초에 한신만 해도 충신이 아닌 몇 번이나 자신을 기만한 위험분자였으며, 통일 후에는 번쾌다다익선 등의 일화로 욕심을 드러낸 터라,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같은 존재였다. 당장 유방 본인도 초가 임명한 제후왕으로 있다가 힘을 길러 천하를 얻은 인물이다. 언제 반란을 일으켜 자신의 자리를 탐낼지 모르니, 유방이 자신 같은 불온분자(…)를 견제하지 않는다는 게 더 이상할 노릇. 또한 이 과정에서 주로 책임자와 그 가족들이 제거되는 정도에서 끝나 사건의 파장도 적은 편이었다.[28] 유방이 이러한 정책 기조를 깔아 놓았기에 제후왕들의 궐기는 개국 후 한참을 지난 한경제 시절에나 오초칠국의 난으로 표면화 되었으며, 이를 제압함으로서 전한은 군현 제도를 확립했고 이후 고대의 초강대국으로 발돋음 할 수 있었다.

또한 미앙궁 축조 등에 대해 비판적이던 모습에서 보듯이 사치만 부리면서 민생을 도탄에 빠뜨리는 일과는 거리가 멀었던 편. 애초에 패업을 진시황릉 만들 인원 끌고 가다 탈주하면서 시작한 사람이다.

5.3. 용인술[편집]

유방의 능력 중에 가장 큰 능력은 사람을 모으고 쓰는 능력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보통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유방의 인재 운이 좋다." 는 식으로만 이야기를 하는 편이나, 운이 계속 이어진다 해도 그걸 갈무리하여 성과를 낼 능력이 없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애초에 유방은 기껏해야 동네 청년회장이 되어서 마을 장정들 모아서 패싸움하면서 똥폼이나 잡았던 사람이고 거병했을 때는 진나라의 관직 경력이 있는 소하와 조참 정도를 제외하면 제대로 된 인재라고 할 사람 자체가 없었다. 장량은 원래 일국의 귀족으로서 진시황 암살 기도를 주도할 만큼의 거물이어서 한미한 촌동네 한량인 유방 아래에서 일할 사람도 아니었고 한신은 원래 항우 휘하에 있었다. 그들을 모으고 포용하고 활용한 것은 결국 유방의 능력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에 비하면 초나라 귀족 출신이라서 가문의 지인들만 해도 넘쳐났었고, 범증이라는 모사가 있었으나 그들을 제대로 쓰지 못한 항우는 비교할 수도 없다.
이 부분은 유방 본인도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린 바 있다.

고조가 낙양 남궁(南宮)에서 술자리를 마련하여 “제후들과 장수들은 짐을 속이지 말고 모두 마음을 이야기해보라. 내가 천하를 얻은 까닭이 무엇인가? 또 항씨(항우)가 천하를 잃은 까닭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고기(高起)와 왕릉(王陵)이 이렇게 대답했다.
“폐하는 오만하셔서 사람을 업신여기지만 항우는 어질어서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폐하는 사람을 부려 성과 땅을 공략하게 하여 항복시키면 그것을 나누어 주어 천하와 함께 이익을 함께 합니다. 항우는 어질고 유능한 자를 시기하고 질투하여 공을 세우면 해치고 어질면 의심합니다. 싸워 승리해도 그 사람의 공을 인정하지 않고 땅을 얻어도 다른 사람에게 그 이익을 나누어주지 않습니다. 이것이 그가 천하를 잃은 까닭입니다.”
고조가 말했다.
“공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 군막 안에서 계책을 짜서 천 리 밖에 승부를 결정짓는 것이라면 나는 장량만 못하다. 국가를 안정시키고 백성을 다독거리고, 먹을 것을 공급하되 식량 운송로가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은 내가 소하만 못하다. 백만 대군을 몰아 싸웠다 하면 승리하고 공격하면 반드시 취하는 것이라면 내가 한신만 못하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인걸들이다. 내가 이들을 기용할 수 있었고, 이것이 내가 천하를 얻은 까닭이다. 항우에게는 범증 한 사람 뿐이었는데 그마저 기용하지 못했다. 이것이 그가 내게 붙잡힌 까닭이다.”
출처:사기 권8 고조본기(高祖本紀), 5년 5월 기사


그리고 유방의 세력은 몇 번이나 와해될 뻔했음에도 그것을 견디어 냈고, 종국에는 당대 최강의 세력과 힘겨운 맞짱을 거듭한 끝에야 패권을 잡았는데 이러한 고난의 과정을 거치면서 힘든 일은 부하들이 전부 처리해 주고, 유방은 그저 다 된 밥에 숟가락만 얹는 식으로만 일을 진행했다면 항우와 본격 맞짱을 뜨기도 전에 부하 손에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 단적으로 초한전쟁 기간 중에 유방의 부하들의 활약이 가장 돋보였던 형양 · 성고 전역만 봐도 팽성전투에서 유방 본인은 거의 죽었다 살아나고 항우는 전력을 온존하여 물밀듯이 서쪽으로 진군하고 있었으며 제후들은 몇몇 빼고는 유방에게 등을 돌린 최악의 상황이었다. 이걸 우리와 항우의 1:1 구도가 아니라 1대多의 구도로 만들어야 살 수 있다는 대전략을 제시한 장량, 항우의 제후들 중에서도 제일 항우에게 위협이 될 영포를 직접 설득하여 포섭한 수하, 배신자 위표를 처단하고 하북을 평정하여 천하대세를 사실상 결정지은 한신, 항우의 보급로를 끈질기게 괴롭힌 팽월, 항우의 브레인인 범증을 제거한 진평, 함락되는 형양성에서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여 유방을 살려낸 기신, 오창의 곡창 지대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향후의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어갈 수 있게 해준 역이기, 유방이 죽을 힘을 다해 버티는 동안 뒤에서 서포트를 해준 소하 등 수많은 부하들의 활약이 있어서 결국 유방은 최악의 패배를 딛고 전황을 유리하게 역전할 수 있었으며, 이 사람들을 전부 기용하고 그들의 올바른 조언을 받아들여 실행한 것은 바로 유방이다.[29]

유방의 인재 파악 능력은 앞서 나왔던 유언에서도 잘 볼 수 있다.

(여태후가 죽어가는 유방에게 만약 소하조참이 죽는다면 그 후임 재상들을 어떻게 임명하면 좋겠냐고 물어보자)

"왕릉(王陵)으로 하시오. 그러나 왕릉은 우직하므로 진평으로 하여금 돕도록 하시오. 진평은 지혜로운 사람이나 그렇다고 그에게 모든 맡기지는 마시오. 또한 주발(周勃)은 행동거지가 무겁고 믿음직하오. 비록 배운 바는 부족하지만 장차 유씨 왕조를 지켜 안정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주발일 것이오. 그를 태위(太尉)로 삼으시오."


유방 사후 왕릉은 실제로 여태후 일족의 전횡에 우직하게 항거했으며, 진평의 경우 여씨 일족과 적당히 타협[30]하는척 하며 정국의 안정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여태후 사후 주발에게 군권을 넘겨주었다. 그리고 주발은 이 군권으로 여씨 일족을 일대 숙청하여 유씨 왕조를 안정시켰다. 죽어가는 마당에 부하들에 대한 평가를 한치도 틀림없이 하는 유방의 매의 눈이다(…) 그리고 이 매의 눈은 후손 유비가 물려받았다 카더라

무엇보다 유방의 부하들은 수차례 엄청나게 강도 높은 직언(直言)[31]을 퍼부었지만, 유방은 자신에게 비판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비판을 경청 할 줄 알았다. 싫은 소리를 하면 고통스럽게 사형을 한 항우와는 정반대 케이스다. 이런 유방의 가장 적절한 사례로 육가(陸賈)와의 대화가 있다.

"이 어르신(乃公)은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다. 시서(詩書)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육생이 대답했다.

"말 위에서 얻은 천하를 말 위에서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고제(유방)는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부끄러운 표정을 짓고 말했다.

"나를 위해 진나라가 어떻게 천하를 잃었고, 내가 어떻게 천하를 얻었으며, 과거에 나라를 얻은 일, 잃어버렸던 일을 글을 지어 올려주시오."


사기》역생 육가 열전'''


이렇게 충고를 들을 줄 아는 태도는 유방의 가장 큰 장점이었다. 아무리 주위에 좋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해도 그 충고와 제안을 써주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이다. 한신도, 진평도 본래 항우의 군단에 있었다. 물론 백등산 포위전에서 유경의 말을 무시했다고 혼쭐이 난 사례가 있기는 하다. 다만 이 경우는 유방이 이미 나름대로 경계를 하고 확신을 가진 후 전투에 나섰을 시점에서 유경의 충고가 있던지라 무르기가 곤란했던 점도 있었다. 유방은 백등산에서 실패를 경험하고 유경에게 사과한 뒤 그의 조언을 자주 들었다.

그리고 여러 비판을 수용할 줄 안다는것은 자신에 대해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유방이 "나는 한삼걸보다 지략, 내정, 통솔 능력이 모두 부족하지만 이들을 쓸 줄은 알았다. 항우는 범증 한 사람도 제대로 쓰지 못했다." 에서 보이듯이 유방의 성격은 독선적인 지도자들이 자주 보이는 지독한 아집, 자만심과는 거리가 있었다. 유방과 비슷하게 가방끈이 짦은 편이었던 아돌프 히틀러 등이 자신에 대한 과대 평가로 주위 사람들의 의견을 무시해버리며 계속 삽질을 하다 몰락해버린 것과 대조적이다.

즉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참모들의 의견을 수립해서 채우는데, 그 의견을 수립하는 과정에서도 개중 가장 적절한 의견을 수용 할 줄 아는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단순히 남의 말을 잘 들어주기만 한다면 그건 비판을 잘 수용하는 사람이 아니라 귀가 얇은 사람일 뿐이다. 기록을 보면 유방은 항상 올바른 건의만을 들었고 유방은 단지 그대로 시행했을 뿐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지도자는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수많은 건의를 듣기 마련이다. 유방은 그 중에서 더 바른 건의를 하는 사람의 말을 듣고 그대로 따랐기 때문에 그러한 건의들만 기록에 남은 것이다. "자신의 부족한 부분에 대해 사람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올바른 건의를 분별할 판단력이 있으며, 날선 비판을 수용할 줄 알고, 자신의 태도와 행적을 반성하고 나아지는 지도자"라고 한다면 그야말로 이상적인 지도자상의 끝판왕 급이라고 볼 수 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서도 훌륭한 군주는 1. 스스로 좋은 생각을 짜내거나 2. 좋은 생각을 받아들일 줄 안다고 평가했는데 유방은 2. 스타일의 끝판왕급인 셈이다.

고문원(古文苑)에 실린 手敕太子文에서는 유방의 이러한 태도가 가장 적절하게 보여진다. 이 글은 유방이 태자에게 경각심을 가지게 하기 위해 지었다는 부분인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내가 난세를 만나 진나라가 학문을 금하자, 스스로 기뻐하여 책을 읽는 것이 유익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임금이 되고 난 뒤로부터 비로소 때때로 책을 살펴보았는데 글 쓴 사람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이에 비추어 내가 옛날에 행동하였던 것을 생각해보니 옳지 않은 일이 많았다."[32]


요약하면 유방 역시 군주로써의 냉철함은 가지고 있었다는 소리다. 주위 수많은 인재들이 싸우는 와중에 옳은 소리만 걸러 들을려면 이성이나 예측력 등 여러가지가 필요하다, 운빨로 동네 백수가 황제가 된것은 아니다.

유방의 이런 능력이 폄하받는 기저에는 비판을 수용하고, 문제점을 개선하고, 더 나아가 사람을 활용하는 능력 자체에 대한 현대인들의 과소평가가 뒷받침되었다고 봐야 한다. 쉽게 말해 역사를 전지적 시점에서 받아들이다 보니 저 정도는 인재만 주면 자기들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 고로 형편없이 쉬운 것이라고 인지하는 셈이다. 하지만 우리가 살면서 면전에 대고 단점을 지적하는 말을 기껍게 받아들인 적이 얼마나 있는지[33] 계산해 보면 유방의 대단함은 바로 견적이 나온다. 게다가 유명인사들의 명성은 후대의 평가가 누적되어 간단히 알 수 있는 것이고, 당대의 위치에서 누가 옥석인지 판별하는 것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어려운 일이다.[34] 못 믿겠으면 직접 주변 사람들 중에서 옥석을 가려보면 된다. 누가 진짜 실속 있는 인재인지, 아니면 말만 번드르르한 빈 수레인지 판별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리고 남이 하는 말에 귀만 기울이는 건 그냥 귀가 얇은 것에 불과하다. 진짜배기는 그 수많은 정보 중에서 무엇이 가치 있고 무엇이 헛소리인지 분별하는 안목이며, 유방은 그 안목을 두루 갖추었기에 한신, 장량, 소하 같은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활용할 수 있었던 셈이다. 인생은 실전이지, 초한지나 삼국지연의가 아님을 명심하자. 유방이 폄하하는 내용대로 운빨만 억센 건달이었으면 애초에 황제까지 올라가지도 못하고 유지도 못한다.

5.4. 인간적인 면모[편집]

창작물에서 대체로 유방의 인간적인 면모에 대해서는 토사구팽 등을 이유로 비열하고 추악한 인간으로 그려지는 편이 많고, 그 적수인 항우에 대해서는 남자답고 화통한 면면으로 묘사되는 편이 많다. 실제로 초나라 귀족 출신인 항우가 품위를 지켜 예법으로 사람을 대할 줄 알았던 편이었던 것에 비해 동네 왈자패 대장 출신인 유방은 그만큼 언행이 방자하고 틈만 나면 마구 욕을 내뱉는 편이었는데 이는 한신, 왕릉, 소하 등이 모두 말한 부분이다. 사기에서 유방이 욕을 퍼붓는 장면은 12번에 이른다. 고대에 이건 생각보다 큰 결점이다. 소하도 유방이 너무 오만하고 무례하고 욕을 많이 해서 호걸들이 유방의 곁을 떠난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지도자로서는 항우가 틈만 나면 부하들을 의심하고, 작은 것은 폼나게 뿌리면서 정작 작위나 봉지같은 큰 것을 하사해야 할 때는 아까워서 어쩔 줄을 모르는 속좁은 본색을 보였던 반면에, 유방은 일단 결정을 내리면 그야말로 배포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신이 제나라의 임시 왕을 자칭할 때 처음에는 욕을 퍼붓다가, 지금은 한신의 마음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자 이내 '임시' 왕이 뭐냐? 왕을 할거면 '진짜' 왕을 해야지!'고 하던 게 대표적. 애시당초 한신의 인사 자체도 그저 소하의 추천만 듣고 아무런 공적도 없었던 인물을 단숨에 대장군에 봉했던 파격 중의 파격이었다. 또한 꼭 결정적일 때 배신해서 자신을 곤경에 빠트린 옹치를 대접하는게 이득이 된다고 판단하자 지체없이 그렇게 했다. 이렇게 유방은 개인적인 원한보단 장기적인 이득을 중시하였다. 또 항우의 심복으로서 몇 번이나 자신을 괴롭힌 계포에게 그를 붙잡거나 죽이면 현상금을 주겠다고 수배를 내렸지만 계포를 숨긴 사람이 하후영을 만나 "어차피 항우는 망했는데, 굳이 그 부하를 죽여봤자 괜히 폐하의 속만 좁아보이지 않을까요?"라는 요지의 논리로 계포를 변호했고, 하후영이 그걸 그대로 유방에게 전하자 바로 용서해 주고, 낭중으로 임명시켜 줬다. 거기에 계포는 한고제 때는 물론 혜제, 3대인 한문제 시대까지 살아서 중랑장과 하동 태수를 역임하며 천수를 누리고 살았다.

또한 비판을 들을 줄 알았다는 태도에서 보이지만 유방은 자기에게 직언을 빙자한 폭언을 퍼붓는 신하들에 대해서도 배짱 있는 모습을 보였다. 수차례 신하들에게 무례하다는 언급[35]을 듣고, 심지어 주창(周昌)에게는 "폐하께서는 (桀紂)와 같은 폭군이십니다." [36]라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였지만 유방은 그저 웃고 말았다.[37]

이런 면모는 중원 제패 후 도읍을 정할 때도 잘 드러난다. 유방은 수자리하러 지나가던 제나라 평민 유경의 말을 듣고 그 날 하루만에 도읍을 바꾸는, 이 이상 보여주기도 어려울 만큼의 화통함을 보였다.[38] 비슷하게 항우가 수도를 옮길 때 반대 의견을 제시했던 한생은 개무시당한 다음 뒤에서 원숭이라고 욕했다가 냅다 끓는 솥에 던져졌다. 어쩌면 이 일 때문에 유경의 말을 귀담아들었을 수도 있다.

게다가 유방은 정말 배짱과 언플능력이 좋았는데 항우와의 대치에서[39] 항우가 직접 쏜 화살에 가슴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항우를 무서워하긴 커녕 유방은 갑자기 허리를 굽혀 앉더니 자신의 발을 쓰다듬으면서 항우에게 "이 버르장머리 없는 놈을 봤나. 어린 아이가 감히 어른의 발을 쏘다니!"라는 말로 일갈했다. 아니 이건 깡의 문제가 아니라 감각의 문제[40] 불리해서 도망을 칠 지언정 겁을 먹은 적은 없었고 아무리 항우에게 수세에 몰려도 항우를 우습게 여겼을 뿐이었다. 그 정도로 유방은 배짱이 좋았다.

숙청의 경우 아무렇게나 숙청한 것은 아니다. 또한 자신에 대한 암살 음모를 꾸몄던 관고(貫高)가 기개있는 모습을 보이자 장오(張敖)를 조나라 왕에서 해임하는 정도로 처벌을 끝낸다.[41] 토사구팽에 있어서도 유방이 이들을 견제할 목적을 가졌다고 해도, 대부분의 경우 먼저 책 잡힐 만한 행동을 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한신만 해도 유방을 수차례 기만했고, 노관은 공이 부족한 인물을 친구라고 왕으로 봉해주니 뒤통수를 쳤다.[42] 장도나 경포의 경우 자신들이 알아서 반란을 일으킨 것. 잘못 없이 억울하게 제거된 것은 팽월뿐이다. 소하의 경우 다른 사람의 조언을 받아들여 숙청을 그만 두었다. 이성왕 숙청은 사실 한고제보다도 여후의 의지가 더 강하게 작용하기도 했다.

사실 유방은 후대의 홍무제, 영락제와 같은 진짜 숙청 전문가들이나, 멀리 갈 것도 없이 자기 아내인 여후와 비교한다면 토사구팽의 대명사라 불리기에는 억울한 면이 많다. 실제로 노관을 제외하면, 그와 거병 초창기부터 함께했던 풍읍과 패현 출신의 동지들 중에 토사구팽당한 이는 아무도 없다. 이름을 남긴 친구들 외에도 한왕 등극 이전부터 쭉 함께한 고참병들에게도 모조리 고급 작위와 함께 집과 땅을 주려고 했는데 돈계산 하느라 머리아팠던 관리들이 딴청을 피우면서 시간을 끌자 나도 지키는 법이 너희들은 우습냐는 말까지 하면서 재차 꾸짖기도 했다.[43] 심지어 노관도 유방이 죽지 않았다면 용서받을 수 있으리라 확신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실제로 유방은 용서를 구하거나 여간한 변명을 하면 다 용서를 해주었다.[44] 더구나 사실 죽임을 당한 공신들도 여후가 처리한 경우가 많고 유방 역시 그러한 여후를 좋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죽기 직전에 번쾌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것도 예외에 속할 수 있겠으나, 자기가 아끼는 아들을 죽이려 한다는 말을 듣고 눈이 뒤집히는건 당연한 노릇이다. 명령을 받은 진평과 주발만 해도 유방이 홧김에 한 소리라 여기고 그대로 따랐다간 오히려 나중에 유방이 후회했을 때 불똥이 튈 것이라고 여겼다.

본질적으로 보면, 유방이 제거하려 했던 대상들은 거의 대부분 중앙 집권에 걸림돌이 될 게 분명한 분봉왕들이었다. 공신이라서 제거당한 게 아니라 제후라서 제거당한 것이다. 이러한 제후들은 유방에 대한 친분이나 충성보다는 이익을 따지는 무리였고, 그렇기 때문에 결국 제후의 지위까지 오르게 된 것이다.[45] 충성심도 장담 못하고, 반란을 일으킬 능력과 실력도 있는 이들(그 중에서 일부는 진짜로 실행하기도 했다.)을 가만히 둘 수야 없지 않는가? 심지어 애초에 정말로 죽이려했던 경우는 대놓고 반란을 일으켰던 경우나 잦은반란으로 인해 말년에 의심병 도졌을때의 번쾌였지, 한신, 팽월의 경우는 오히려 무장해제만 시키고 살 길은 터주려 했던거 여후가 죽여버린거다. 한신이 죽기전 토사구팽만 안 외쳤어도 숙청얘기에는 거론조차 안됬을 사람. 경포는 한신, 팽월이 죽자 다음은 본인 차례라고 생각해 겁을 먹은 것과 아랫사람의 참소가 겹쳤기 때문에 억울한 면이 있긴 하나, 이미 먼저 반란을 일으킨 이상 남은 길은 이기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뿐이었다. 반대로, 친분이나 충성심으로 유방을 따른 무리들은 노관 정도를 제외하면 모두 중앙 정부에서 임직하다가 대체로 무난하게 살았다.[46] 또한 한신에게 반란을 권고했던 괴철이나, 팽월의 시신을 수습해준 난포도 실질적인 위협을 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서 살려두었다.

위험 인물(몇 명은 자멸한)들 몇을 제거한 유방은 비열하고 잔혹하다고 욕을 먹고, 힘도 없는 수십만의 양민들을 학살하고 생매장한 항우는 남자답고 화통 하다고 2차 창작물에서 띄워주는 것은 감정이입 할 수 있는 영웅들 위주로 생각하고 캐릭터 없는 백성들은 '재밌는' 전쟁을 위한 소모품으로 생각하는 영웅주의에서 나왔다.

유방이 그저 자신의 탐욕밖에 모르는 인간이었다면, 그의 사후에도 유씨 황족을 지키려 노력한 충신들이 존재했을 리가 없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애초에 유방에게 복속을 거부하다가 항우 때문에[47]늦게 합류했고, 유방과의 관계가 껄끄러운 면이 있었던 왕릉이다. 그런 왕릉이 유방 사후에 여후 일족을 왕으로 세우려는 계획에 찬성하는 진평에게 '당신은 무슨 낯으로 지하에 계신 선제를 뵈려고 하느냐'고 일갈하는 충신이 되어 있었다.

다만 아버지나 남편으로서는 좋은 사람이라 할 수 없었다. 여색을 밝히는 편이라 여후가 심하게 맘고생을 했고[48][49][50][51], 자식들을 팽성 대전에서 던져버린 사례[52]하며, 백등산 포위전 이후 묵돌의 압박이 심해지자 당시 장오와 결혼해서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딸인 노원 공주를 묵돌에게 줘 버릴 생각도 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더 큰 목적을 위해서 작은 원한을 잊고 옹치를 대접해준 사례처럼, 더 큰 목적을 위해서는 가족도 던져버릴 수 있는 사람. 지도자로서는 나쁘다고만 하긴 그렇겠지만 부모로서는 무책임하다.

거기다 팽월은 의심으로 제거하고 소하마저도 한때 가뒀으면서 정작 외척인 여씨 세력은 견제하질 않아 사후에 여씨 세력이 날뛰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그렇게 좋은 소리를 듣지는 못한다. 실제 진평 같은 공신 세력들이 여씨 세력을 물리치지 않았다면 한나라는 몇대 만에 끝장났을지도 모르는 일이라 더더욱 그렇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결과론일 뿐이고, 제후왕들의 숙청이 끝나자마자 죽은 탓에 여씨 쪽에 손을 댈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고 봐야 한다.[53] 실제로 죽기 직전 번쾌를 참수하려 드는 것으로 여씨 일족을 견제하려 하기도 했고[54] 후일 여씨를 몰아낸 신하들도 전부 유방이 추천한 인물들이다.[55][56]

항우마냥 대규모 학살은 저지르지 않았어도, 항우 타도를 위해 팽월 등의 장수를 이용해 전쟁 내내 초나라 지역을 숱하게 공격하고 약탈하게 하는 과정에서 직간접적으로 살해했을 사람을 따지면[57] 이쪽도 어지간한 규모였을 것은 예상할 수 있다. 유경이 댁 때문에 죽은 해골이 아직도 지천에 깔렸다고 할 정도이니 당대에도 유방을 인군보단 독한 인물로 인식하는 경향이 어느 정도 있었던 듯하며, 실제로 왕릉 같은 경우에도 유방이 인덕이 있다는 말은 하지 않고 단지 유방이 항우와 달리 논공행상이 푸짐해서 제장들이 유방에게 붙었다는 식으로 얘기했다. 평소 성격만 따지면 항우가 훨씬 다정했다는 건 한신도 언급한 부분. 즉 초한 전쟁기라는 난세의 인물들은 딱히 명분도 없이 그냥 다들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자기 보신과 영달을 위해 '유방 밑에 있는것이 수지타산에 맞으니까', '항우 밑에 있는것보단 더 짭짤할 것 같으니까' 그렇게 행동한 것일 뿐. 물론 사람을 끌어들이는 순수한 마성' 매력'이나 적재적소에 사람을 기용하고 적절한 논공행상으로 부하들을 만족시키는 것은 탁월한 관리 능력/정치력이지만, 유방이 딱히 '황실 재건', '역적 토벌' 따위의 정의롭거나 천하에 평화를 가져다주겠다 하는 고차원적인 이상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역시 생각하기 나름이다. 사실 이상이 없기로는 항우도 마찬가지, 아니 어떤 면에서는 더 질이 나쁘다. 항우의 경우 처음에는 최소한 진나라 체제를 무너뜨리고 과거 춘추 전국시대로 회귀하겠다는 복고적 이념이 희미하게나마 있었지만 결국은 의제를 죽여서 스스로의 구상을 무너뜨려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한 가지 사실, 즉 천자(초의제)를 시해한 역적 항우 토벌만으로도 그 시대에는 충분하고도 남는 대의명분이었다. 실제로 팽성 대전의 격문이나 광무 대치 때의 논변에서도 가장 중심이 되어 지적한 사항이 바로 이것이었다. 항우 입장에서는 자기가 세운 천자를 자기가 죽임으로써 자신의 최대의 적에게 정말 최고의 대의 명분을 제공해준 셈(...). 또, 그 시점에서는 이상이 중요한게 아니라 일단 누군가가 먼저 중원을 통일하고 혼란한 세상에 평화와 질서와 안녕을 가져오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그리고 이후 고제는 숙손통을 앞세워 제도의 정비 등을 통해 새로운 제국 건설을 이룩했으니 딱히 흠잡을 일은 아니다.[58][59]

또한 인간적 단점들도 오히려 이런 건달 같은 인간이 황제가 되었다는 입지전적인 스토리에 기묘하게도 중요한 상황에선 옳은 결정을 하는 모습에 오히려 인간적인 영웅상으로 재평가되기도 한다. 특히 전형적인 귀공자스러운 영웅과는 달리 서민적인 맛이 있어서 오히려 이런 유방을 더 선호하는 작가들도 많다. 물론 정사에서는 결코 단순한 일개 건달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사실만 보면 나름 지식인[60]에 무예[61]도 뛰어났고, 외모도 용이라는 평을 들었으며 사람들도 자신을 잘 따르게 만들었다. 유협 시절 따르는 집단의 위세만 봐도 이미 그 지방 유력자들이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고, 직접 근방 도적들을 토벌하기도 한다. [62] 출신만 명문 엘리트가 아니지, 평범한 인물은 결코 아니었던 셈.

게다가 쇼맨쉽이 정말 비범했는데, 아무리 심각한 상황에 몰려도 절망하거나 슬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전혀 없다. 정황상[63] 가장 신뢰하고 있는 사람으로 보이는 소하가 자기를 버린 줄 착각하고 있을 때 정도를 제외하면[64] 위험한 위기가 와도 절망하거나 슬퍼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고 보통 정신으로는 하기 힘든 일들을 태연하게 하기 때문에 사이코로 오해받을(…) 정도다. 실제로 미화판 위인전이 아닌 정사로 보면 망하고 있을 때 일시적으로 재기불능 상태에 빠지거나 자살을 생각하거나 자기 판단이 틀린 줄 알고 두려움에 떠는 둥 심각한 상황에서 나름 보통 사람들과 같은 모습을 보이는 영웅들이 보편적인데 유방은 그런 거 없다.

심지어 위기에서의 가족 관계에서도 그런 점들이 거의 없다. 구체적으로, 항우가 아버지를 삶아버리겠다고 하자 당황하거나 슬퍼하기는 커녕 "우리는 예전에 의형제를 맺었는데, 지금 우리 아버지를 죽이면 너는 네 아버지를 스스로 죽이는 거다. 그래도 죽이려면, 아버지를 요리한 국물을 나한테도 한 사발 다오!" 라고 오히려 큰소리를 쳤다. 팽성전투에서 패배하고 도망을 갈 때 가족들 때문에 수레 속도가 느려지자 가족들에게 우린 이제 다 죽었다 같은 소리를 하고 망설임 없이 가족들을 버리려고 하자 하후영이 "짐승이 아무리 독해도 제 새끼는 먹지 않는 법이라는데, 어떻게 친자식들을 버리고 갈 수 있습니까!"라고 해서 겨우 말렸다는 일화가 있다. 목숨이 달린 위기에 처할 때조차 가족, 친구들과 감정 교류를 하거나 위안을 얻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인물이라 흔히 떠올리는 평범한 건달과는 거리가 멀다. 그리고 당시에도 평범한 사람 취급을 받지 않았다. 실제로 유방과 어울리고 나면 다들 유방을 비범하거나 위험한 인물로 여겨서 자기 편으로 삼으려고 하거나 죽이려고 하는 정황이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고 감정이 결여된 인간은 결코 아니였으니, 죽음을 앞두고 고향을 들릴 때 그 냉철한 쇼맨쉽에 가려져 있던 눈물을 사람들 앞에서 보였다.

"객지를 떠돌아다니는 나그네는 고향 생각에 슬픈 법입니다. 내가 비록 관중에 도읍하고 있지만, 만년 뒤에라도 나의 혼백은 여전히 패현을 좋아하고 그리워할 것입니다. 게다가 나는 패공일 적부터 포악한 반역자들을 정벌해 마침내 천하를 얻게 되었는데, 패현을 내 사유지로 삼아 이 곳 백성들에게 부역을 면제해 주어 대대로 납세와 복역이 없게 할 것입니다."


그밖에도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킨 노관의 고향에 대해 똑같이 부역과 세금을 면제해주었다. 물론 유방도 사람인지라 어릴 때부터 친했으며 이후 자신과 같이 동고동락 하며 고생했던 친우의 배신에 대해 서운함과 분노에 해당 지역에 대해 특별하게 우대하는 것을 아예 하지 않았지만 고향에서 마을 사람들과 어울려 잔치를 하며 같이 술을 나눌 때 지역 유지들과 노인들이 계속해서 유방에게 주청을 올리며 부탁을 올렸다. 이에 유방은 몇 번 거절하다가 못이기는 척 마지막에 슬쩍 노관의 고향 풍읍에도 똑같이 세금과 부역 등을 면제해주었다.

또한 황제가 된 이후에도 아버지를 극진하게 대우한 기록이 있다. 고제가 황제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5일에 한번씩 꼬박꼬박 아버지 유태공을 문안 인사하였는데, 이 때는 황제가 아닌 일개 평민의 부자 관계처럼 서로를 편안하게 대했다. 그러자 집사가 '황제께서는 태공의 아들이지만 엄연히 백성들의 임금이니, 황제의 위엄을 위해서라도 예를 갖춰야 한다'라고 충고하고, 유태공도 이를 받아들여서 이후에 유방을 만날 때는 직접 황제에 대한 예를 갖추었다. 그러자 유방도 태상황이란 호칭을 유태공에 올려서 공식적으로 유태공의 위치를 확립했다. 동시에 이 간언을 한 집사에게는 상을 따로 내렸다. 이 것이 중국 역사상 최초의 태상황 칭호이다.
또한 서경잡기에 따르면, 아버지 유태공은 장안의 궁궐에서 대접받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우울해했다. 위에 나왔듯이 유태공은 평민 출신이어서 적막한 궁궐 생활을 불편하게 여겼던 것. 그러자 고제는 장안 근처에 신풍이라는마을을 새로 만들고 고향 풍읍의 사람들을 이주시켜서 살게 하였다. 유태공도 이를 매우 좋아했다고.

한신의 죽음에 대해서도 다소 씁쓸해하는 등 사이코패스 성향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여하튼 유방을 비판하자면 분명 다른 깔 거리가 많다. 상술했듯이 형양에서 기신과 수천 명의 여성들을 사지로 내몬 것, 친자식들을 수레에서 버린 것, 장량 등의 진언이긴 했지만 어쨌든 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항우를 공격한 등의 행동은 "항우가 더 나쁘다"고 할 수 있어도 "유방이 잘했다"고 할 수 있는 올바른 행동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유방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은 토사구팽 드립을 위시로 한, 공신 숙청[65]에 대한 잘못된 해석이거나, 아니면 유방의 상대역인 항우를 좋은 사람이라고 띄워주는 등, 타당하지 못한 내용들이 대부분이다.

5.5. 총평[편집]

항우란 이름의 최고의 야전 지휘관이 군주라는 과분한 지위에 있어 패망했다고 한다면, 유방은 오직 군주가 되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유방의 전술적 능력은 그 나름대로 봐줄 만한 재주는 있으나 그 맞수인 항우보다 못했고 정치적 식견도 대국의 흐름을 읽는 재주는 타고 났으나 자신이 데리고 있던 장량과 소하 같은 인재보다는 부족한 편이었다. 허나 한신이 말했던 '저는 병사를 이끌 능력 밖에 없으나 황제께서는 10만 명의 장수를 이끌 능력이 있다.'는 말처럼 여러 사람을 휘어잡아야 할 난세의 군주로서는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여러 사람들의 말을 들을 줄 알고, 사고가 유연하며, 옳은 말을 따를 줄 알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파악했으며, 결정적으로 이러한 능력을 써먹을 수 있는 배포를 가지고 있었다. 군주감으로서는 이만한 인물도 드물 것이다.

유방은 실수를 안하는 초인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반성할 줄은 아는 사람이었다. 이런 면에서 그는 항우와는 극단적으로 대조된 인물이었다. 인간성이 완벽한 것은 아니었지만 신기하게도 군주로서 가져야 할 장점만 거의 골라서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최초의 평민 출신 군주로서 이전의 관습과는 상관없이 즉위한 유방은 이후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중국을 최초로 통일하여 하나로 만든 것은 진나라였지만 이는 곧 멸망하고 말았다. 하지만 유방은 한나라를 탄생시키고 개국 초기의 정권을 단단하게 닦아 진나라처럼 모래성으로 무너지는 일을 막았으며, 이후 한나라는 전한 - 후한 400년의 역사를 이어나가며 이전까지 분열의 역사였던 중국을 '하나의 중국'으로 만들었다. 언어도, 문자도, 단위도 다 제각각이었던 '다른 나라' 들은 외관, 혈면, 문화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한나라의 치세를 거치면서 하나가 되었다.

또한 이 한나라에서 시행된 유교 국교화, 군현 제도 정비, 율령(律令)의 정비 등이 시행되었고 이것이 향후 2,000여년간 중국은 물론이고 동아시아 문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것을 생각하면 유방은 그 출발점을 닦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66]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중화(中華)를 시작하게 했던 인물. 가히 최초의 중화인이라고 불러도 지나치지 않다. 물론 이는 유방 개인의 차원이 아닌 거대한 역사적 흐름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겠지만, 유방의 적수였던 항우가 봉건제에 대한 선호부터 해서 최후의 전국인(戰國人) 그 자체였던 것을 생각하면 상당히 대조적인 편이다.

6. 기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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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한중 석문잔도풍경구(石門棧道風景區)에 있는 유방의 석상. 왼편으로 소하, 오른편으로 한신이다.


자기 자신을 3인칭으로 호칭하는 경우가 꽤 있었다.

"乃公居馬上而得之,安事《詩》、《書》!"


사기》역생 육가 열전


"豎儒,幾敗而公事!"


사기》유후세가


여기서 보이는 내공(乃公)과 이공(而公)은 비슷한 표현인데, 이는 본래 '자신' 을 가리키는 표현이 아니다. 여기서 사용되는 乃나 而는 "너" 아니면 "자네" 정도의 의미가 되는데, 뒤에 公이 붙이니 그렇다면 "자네 아버지" "네 어르신" 정도의 의미가 된다.

그런데 유방은 여기서 이 표현을 자신에게 사용했다. 이건 자기를 일컫어 "네 아버지" "(너희 아버지에 해당하는) 이 어르신" 같은 묘한 어감이 된다. 마찬가지로 상대 역시 "아들" "조무래기" 같은 상황이 된다. 이런 점을 생각하고 어감을 살려 문장을 번역하면 이런 느낌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어르신께서는 말 위에서 천하를 얻으셨다. 그런데 시, 서 따위가 대관절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


"하찮은 유생 놈 때문에 이 어르신이 대사를 그르칠 뻔 했구나!"


물론 황제 등은 3인칭으로 자신을 호칭하기도 했지만, 이건 황제의 어투라기보다는 건달쫄따구에게 하는 느낌이 강하다. 그런 '쫄따구 풋내기' 등을 일컫는 수자(豎子)[67]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와 대조해서 보면 그런 느낌이 더욱 강하다.

"吾惟豎子固不足遣,而公自行耳。"


사기》유후세가─


이 부분은 경포의 반란때 여후의 아들인 혜제가 나설 지경이 되자, 여후가 울면서 만류하여 유방이 대답하는 부분이다. 기서 유방은 자기 아들을 수자(豎子)로 표현하고, 자신을 이공(而公)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대략 이런 늬앙스가 될 수 있다.

"나도 그런 조무래기가 나서기에 적절치 않다는건 알고 있었다. 이 어르신께서 직접 가시겠다."


혹은,

"그 조무래기가 시원치 않으니, 당신 남편이 나서야겠구만."


이런 느낌으로, 여하간 평민 출신 황제만이 할 수 있는 어법이라고 해야 할 듯 싶다. 사실 멀리 갈 것 없이 유방의 이런 어법은 오늘날로 치면 싱하형의 어법과 비슷한 느낌이라고 연상하면 쉬울 듯하다. 남자가 좀 허세를 부리거나 잘난 척 할 때 쓰는 "이 형이 말이야.", "오빠가 한 턱 쏜다" 이런 분위기라고 생각하면 될 듯.

자신을 따르는 신하를 고발했다고 코를 잘라버린 적이 있다(…).

正疆首茉事而當,上使參乘,解玉劍以之。天下定,出以爲守。有告之者,上曰:「天下方急,汝何在?」曰:「亡。」上曰:「正疆沐浴霜露,與我從軍而汝亡,告之何也?下廷尉劓。


정강正疆이 수차례 사건에 대해 하는 말이 타당하자, 주상(유방)은 수레에 참승하도록 하고 옥검을 풀어 그에게 채워주었다. 천하가 안정되자 (정강을) 내보내 군수로 삼았는데 그를 고발하는 자가 있었다. 이에 주상이 물었다.

"천하가 위급해졌을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도망쳤습니다." 라고 대답하자 주상이 말하였다.

"정강은 서리와 이슬로 목욕을 하며 나와 더불어 종군하였는데, 너는 도망을 하고서 이제 고발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그리고 정위에게 하명하여, 코를 베어버리는 의형에 처하였다.


《태평어람太平御覽》 648, 《초한춘추楚漢春秋》

후에 자신과 똑같은 인생을 살게되는 후손인 유비가 나타나게 된다. 한국의 성씨 유(劉)씨의 먼 조상이기도 하다. 유(성씨) 문서 참고.

생년에 관하여 논란이 있는데, 만약 256년으로 칠 경우[68], 진나라가 전국을 통일한 게 221년이었으니 인생의 반 이상을 전국시대에서 보냈다는 얘기가 된다. 247년으로 칠 경우, 인생(53년)에서 반에 가까운(26년)을 전국시대에서 보낸 셈이 된다.

아버지인 유태공보다 불과 2년 늦게 죽었다. 아버지에 비하면 별로 오래 살지도 않은 셈이다. 아니면 아버지인 유태공이 엄청 장수했거나.

이름이 여자 가슴이랑 동음이의어다 보니까 종종 이름으로 섹드립을 치기도 한다.

7. 대중 문화 속의 한 고조 유방[편집]

요코야마 미츠테루항우와 유방에선 그럭저럭 유비와 유사하게 묘사해 놓았다. 아예 그 이미지 때문인지 만화 내용이 항우가 자결하는 데서 끝나고 이후 유방의 숙청 과정은 완전히 누락되어 있다. 근데 나중에 나온 요코야마 미츠테루 판 사기에서는 숙청 과정이 나름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참고로 생긴 모습은 항우와 유방에서의 그 얼굴 그대로다.

적룡왕에서는 전형적인 모토미야 히로시형 열혈남아지만 원판이 원판이니만큼 인간이 좀. 그러면서 부하들을 잘 챙기는 모습을 보이지만 마지막 두 페이지의 토사구팽이 그 이미지를 다 깬다.

고우영 초한지에서는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어리버리하고 개념없고 싸가지없고 능력없는 전형적인 안하무인 건달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하는 짓만 보면 고우영 만화에 등장했던 수많은 찌질이 소인배들과 별로 다른 것이 없을 정도. 항우를 등진 수많은 사람들이 유방에게는 항우에게 없는 덕망이 있다…면서 몰려드는데 도대체 고우영 화백이 묘사한 유방 어디가 그렇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

고우영 삼국지의 유비도 좀 희화화한 모습이 있지만 중반 이후로는 간지를 뿜어내며 겉으로는 쪼다처럼 보여도 속으로는 광대한 야심을 숨긴 효웅으로서의 이미지가 강조되는 반면, 유방은 시종일관 주색잡기에 빠져서 찌질대다가 천하통일 이후에도 공신들을 신나게 숙청하며, 장량이 은퇴한다고 전하러 올 때도 '혹시 쟤도 벼슬달라고 하면 어쩌지?' 하며 불안해하는 천박 모습만 보여준다. 고우영 화백이 자료 조사하면서 유방에게 큰 실망을 한 듯.

사실 초반만 해도 능글맞긴 해도 부드러운 면모를 보였고, 중간까지도 직언은 잘 받아들이고 충신들을 아끼기도 했는데 수수 대전 직전부터 갑자기 오만하고 의심만 많은 인간 쓰레기로 추락했다. 유방에게 절대적인 신임을 받은 장량까지 사실상 내쳐졌다고 묘사되는지라 원래부터 비열한 인간으로 묘사하려 한건지 권력맛을 보고 타락한 영웅상을 그린건지조차 애매한 부분. 사실 항우도 그리 좋은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은 아니지만 최후에는 간지를 내뿜으며 사망하기에 더욱 대조된다. 일단 유비도 그랬지만 유방도 고우영 화백 본인의 얼굴을 오마쥬해서 그렸다. 실제 유비의 조상이기도 하고... 사실 유방의 능력도 능력이지만 숙청 내막이나 이유를 살펴보면 유방이 지나치게 능력이나 성격 등에서 까인 감이 있지만 이때 당시 유방이라는 인물에 대한 재평가가 없던 상황이기는 했다.

고우영 삼국지에서는 유비의 출신을 설명하면서 한 고조 유방이 잠깐 설명되는데 그의 모습에 여성의 가슴을 붙여놓은 개그를 선보인다. 동음이의어를 활용한 개그.

고우영 십팔사략에서는 능글맞은 이미지가 더 강조된 얼굴로 묘사된다.[69] 한신과의 '다다익선' 대화에서 한신의 답변을 듣고 "그러하냐?"라며 한신을 향해 싸늘한 미소를 날리는 장면은 제법 섬뜩한 느낌까지 들 정도.

문정후의 초한지에서는 게으르고 느긋해서 허풍선이 취급받지만, 차후 천하를 손에 쥐는 인물답게 범상치 않은 인물로 등장한다. 다만 후반으로 갈수록 초반의 개 같은 성격도 어느 정도 고쳐지고 폭풍간지가 이어지는 항우와 달리, 후반으로 갈수록 초반의 느긋하면서 비범한 이미지나 실제 역사의 격의 없고 호쾌한 면이 많이 사라져 이미지를 좀 많이 구긴 캐릭터. 물론 후반까지 가서도 한신이 인정하는 천우신조나 인품에 대한 언급이 지속적으로 나오기는 한다.

형민우의 초한지에서는 처진 눈을 한 동네 건달로 등장. 여타 매체에 등장하는 유방과 비슷하며 주위 여러사람의 마음을 끌어들이는 호감형 인물로 묘사된다. 장량에게 내가 천하를 담을만한 그릇인가 물어보며 대답을 듣고 피식 웃는다던지 항우에게 찍힌 한신을 위로하면서 큰뜻을 포기하지말라고 웃는등 여러모로 범상치 않은 인물.

조조: 황제의 반란이란 영화에서 삼국지조조가 유방에 대해 잠깐 얘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헌제가 "이럴거면 차라리 나를 죽여라"고 하자 조조가 이에 "폐하가 고조와 같았다면 저는 기꺼이 폐하의 장량이 되었을 것입니다"라고 한다.

사마의 미완의 책사에서도 언급되는데 1화 의대조 사건 당시 조조가 헌제더러 칼로 자기를 죽여보라고 하지만 헌제가 덜덜 떨며 죽이지 못하자, '한고조와 광무제는 영웅인데 그 후손이 이 모양이라니!'라는 식으로 조조가 헌제를 모욕하는 장면이 등장한다.자신이 유방의 후손이라는건가

성룡이 제작한 드라마 신화에서는 리역상이 분하였다. 역시나 처음에는 별볼일 없어보이는 백수건달처럼 보였지만, 유방을 알아본 역소천의 접근으로 의형제가 된다. 앞서 역소천이 항우와의 인연으로 의형제를 맺었기 때문에 그로 말미암아 항우와도 의형제로 엮인 셈(...) 극이 진행됨에 따라 임기응변에도 능한 모습을 보이며 야심을 드러내지만, 역소천과 고요를 만리장성 축조 노역과 관노로 넘겨버리면서 만악의 근원이 된다.

초한쟁웅에서는 황추생이 열연하는데 융중용안으로 대표되는 외모의 묘사와 상당히 싱크로가 일치한다. 황추생은 아버지가 영국인인 혼혈인. 유방 서역인설

드라마 왕의 여인에서는 라진이 열연했다. 여기서는 항우여후를 두고 은근히 알력을 두는 걸로 묘사된다. 작중에서 여후항우는 오히려 서로 사랑하는 관계인데, 여후가 유방에 시집왔는데도 계속 항우만 그리워해서 마음 고생하는 걸로 나온다.[결말] 참고로 이 배우는 미인심계에서 유방의 아들인 혜제 유영 역을 맡았고, 신삼국에서는 헌제 역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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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유기의 유방)

코에이의 초한지 기반 게임인 항유기에서는 항우와 함께 양대 주인공 중 한 명. 전투력과 용병은 그야말로 좌절이지만 삼국지 시리즈의 유비는 충분히 강할지도? 통솔력이 이 게임 전무장 중 최고치를 자랑한다. 단, 이 게임의 통솔력은 삼국지 시리즈의 통솔력과는 다르다는 것[71]. 일러스트는 사서에 남은 특징을 그럭저럭 잘 살린 편. 유방으로 이 게임을 클리어하면 황제가 되어 금의환향하는 장면이 엔딩으로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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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2,13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고대무장중 한 명으로 등장하는데 매력이 유비조차 뛰어넘는 최고치인 100인 것을 제외하면 다른 능력치는 평균 50~60대 정도로 웬만한 B급 무장들만도 못한 인물로 나온다. 기존 초한지 관련 창작물들에서 묘사되는 사람을 끄는 매력은 있지만 그 자신은 운만 기막히게 좋고 능력은 고만고만한 인물로 표현되는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자기 후손도 오랫동안 이런 인물상을 받으며 능력이 저평가를 받아왔다는 공통점이 존재한다.

삼국지 9 PS2판에서 고대 무장으로 등장한다. 이떄 매력이 없는지라 통무 지정 순으로 70/76/61/77의 평균적인 능력치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후손에 비해 공격계 병법은 아예 없는게 흠. 모략은 배반, 책략은 매도, 고무를 가지고 있다.

삼국지10에서는 매력이 100이지만 전작에 비해 그 외의 능력치는 70을 넘는게 하나도 없다. 그리고 본작에서 가진 특기로는 징병, 고무, 도발, 주호가 전부. 농민 출신 황제이니 농업 특기를 줄 법도 하지만 농사에 게을렀다는 고증을 살려서 농업 특기가 없다. 능력치는 56/65/50/69/100.

삼국지 11에서의 특기는 강운. 정말 걸맞는 특기다. 역시 유비는 충분히 강한 건가? 능력치는 전작에 비해 상향이 되었으나 67/66/44/58/100으로 지력, 정치가 더욱 너프가 되고 여전히 C급 무장이다. 얼굴에 수염이 풍성했다는 기록과는 달리 일러스트는 그냥 경박해 보이는 사람처럼 그려 놓았는데 어떤 의미에선 제대로 표현한 걸지도.

삼국지 12에서는 능력치가 전작에 비해서 통솔 87[72], 무력 70, 지력 59, 정치 83[73]으로 상향되었다. 그리고 삼국지 10에서는 특기가 적었지만 본작에서는 특기가 무려 8개로 늘어났다.[74] 일러스트도 적절하게 썩소를 보인다. 자기 후손처럼 전법이 의용병이라서 지속 시간이 짧지만 병력 회복을 가능해서 쓸만한 좀비이다. 다만 전국칠웅의 고대 무장들이 너무 빨리 급조한건지, 아니면 코에이가 까먹은건지 한 고제의 친애 무장 데이터에 신릉군이 빠졌다. 신릉군 덕후인데. 친애 무장에 신릉군이 빠져있네?

삼국지 13에서도 등장한다. 전법은 자신의 머나먼 후손과 같은 대의지휘다. 게임을 시작하며 설정한 난이도와는 상관없이, 군주로 세력 회의를 해서 '매우 어려움' 사명을 채택하고 달성할 시 해금되는 무장이다.능력치는 전작과 같이 통솔 87, 무력 70, 지력 59, 정치 83에 특기는 농업 5, 훈련 5, 순찰 5, 인덕 9, 신속 4, 분전 1, 연전 3, 공성 7, 견수 6, 수영 5에 전수 특기는 인덕. 병과 적성은 창병 기병 궁병 모두 C인데 실제 한고조가 상당한 명장이라는 걸 생각하면 굉장히 불합리한 병종 편성이다. 전반적으로 삼국지 무장보다 고스펙을 부여하는 경향이 많은 고대 무장임에도 어째 자기 후손보다도 스펙 면에서 딸리는 황당한 상황이 발생했는데, 일반적인 초한지에서 묘사되는 '군사적 능력은 별로인 건달인 주제에 적당한 인덕과 운빨, 주위 인맥은 좋아서 천하를 통일한 인물'이라는 편견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는 셈. 삼국지 시리즈 내에 워낙 탁월한 능력치의 인물이 많아 큰 임팩트는 없다지만 그래도 삼국지의 사실 무장 중에선 사마염 빼곤 못 이룬 통일 왕조까지 세운 인물이라는 의의가 있다. 중신 특성은 신중견수. 병기와 서적, 술을 좋아하며 물욕은 강욕이다.

영걸전 시리즈 정통파에서는 등장이 없었으나,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에서 무장 일러스트로 존재함이 확인되었다. 이후 2017년 12월 업데이트에서 태조고제의 패가 등장하면서 정식으로 출전할 것이 예고되었다. 병종은 현재로서는 유방 단독 병종인 천자계.

Ken Liu의 Dandelion Dynasty 시리즈의 주인공 Kuni Garu는 한고제에서 부정적인 부분을 제거하고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시킨 캐릭터이다. 사실 1권인 Grace of Kings가 딱 초한쟁패를 판타지 판으로 바꿔놓은 것으로 항우에 해당하는 Mata Zyndu와 처음에는 친구였다가 오해가 겹치고 여러가지 사정 때문에 적이 되버린다. 작중에서는 잔머리 팽팽 돌아가면서 인간적인 면모를 보이는데, 처음 등장했을 당시 황제의 행차를 구경하러 친구와 함께 땡땡이를 쳤으나 이후 황제 암살 사건이 진행되는 도중에 친구가 폭발에 휘말리기 전에 자신의 몸으로 막아주기도 했으며, 제국 관리에게 희롱당하는 여인을 구해주기 위해 뇌물 바치는 척하면서 속여넘기기도 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나 신들에게는 사기꾼, 거렁뱅이 취급을 받기도 하지만, 함께 했던 사람들에겐 신뢰받는 인물이다.

7.1. 초한전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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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한전기에서는 영화 영웅에서 진시황, 드라마 강희대제에서 강희제를 맡은 것으로 유명한 진도명이 유방으로 나온다.

한국 더빙판 성우는 홍진욱. 항우와 같이 주인공 급이며 1회에서 자신이랑 눈이 맞은 조씨를 희롱한 진의 관리를 손봐줄때 처음 등장한다.

7.1.1. 행적[편집]

초반부엔 건달의 포스가 좔좔 흐르며, 노관의 도박 빚을 대신 값아줄려고 집안 물건을 내어주다가 다 큰 나이에 아버지에게 맞을뻔 하고 자기 형수에게 국좀 달라고 하자 형수가 국이 가득한데도 불구하고 차갑게 "없다"라고 말하는 등 갱힐후 예약이요 가족에게도 영 좋지 못한 취급을 받고 있다. 특히 형수들 구박이 심한 편인데 나가서 돈도 못벌고 맨날 놀러 다니니 눈에 가시인 듯. 뭐 일은 안하고 맨날 놀러다니는데다 남의 빚을 대신 갚아주는 등 집안 손해보는 일만 해대니 가족들이 좋아할래야 좋아할 수 없었다.

진시황의 행렬이 지나가자 소하와 같이 숨어서 구경하는데 "사나이라면 저 정도쯤은 해야지"라고 말한다. 물론 옆에 있던 소하는 이 이야기를 듣자 '저 미친놈'이란듯 이 쳐다본다(…).

건달이지만 사람 끄는 모습은 이미 초반부터 나와서 하후영이 조씨의 술집에서 술값 때문에 유방 패거리와 싸우다가 상처를 입자 그를 치료해주었고 이후 감격한 하후영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유방의 이름을 대지 않는다.[75] 이후 여공이 이사오고 나서 일만전을 내겠다고 허풍을 치면서 잔치에 오는데, 여공을 괴롭히던 사람들을 몰아내줘서 호의를 얻게 된다. 이후 여치와 결혼하게 된다.

한편으론 나중에 토사구팽을 할 유방을 예고하는 것인지 냉정하거나 뻔뻔한 모습도 보인다. 노관이 돈을 떼먹고 유방에게 들킬까 전전긍긍하다가 결국 털어놓자 돈떼먹는 걸 문제 삼은게 아니라, "그럴땐 끝까지 잡아떼었어야지"하고 충고를 해준다거나, 조씨가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것을 알고도 "내가 나이가 몇살인데 계속 건달로 살순 없다"는 이유로 여치를 선택한다. 물론 아예 냉혈한 철면피스러운건 아니고, 조씨와 인연을 끊을 때 비가 쏟아지는 길가에서 주저앉고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잠시 흐느낀다. 물론 다시 얼굴 표정을 고치고 여치에게 돌아가지만.[76]

항상 패거리들과 건들 건들 다니는 놈팡이 건달 같지만, 일이 생기면 앞장서서 해결해주며, 정장으로서도 역할도 제대로 한다. 이웃 마을과 물줄기 다툼이 벌어졌을 때 꾀를 써서 이웃 마을 사람과 옹치를 골탕먹인 다던지, 부역에 동원 될 인원과 징발을 두고 소하와 나름 협상하기도 한다던지 말이다. 여산부역으로 가던 도중 징발 인원에서 도주자가 생기자 무대뽀 별 고민도 없이 징발자들을 풀어주려 하고 이에 반대한 관병 수장을 번쾌가 죽이게 된다. 그리곤 '마을에 가도 죽고 날 따라와도 사는 건 보장 못함. 알아서해라'하곤 패거리+ 따르는 사람들과 망탕산으로 향한다.

한편 이로인해 가족들도 옥에 갇히게 되지만 소하의 보살핌으로 별 어려움은 겪지 않게 된다. 도리어 그간 유방의 쌓은 친분 인맥 이 효력을 발휘해 조참, 하후영 외 유방의 지인들이 알아서 유태공을 대접하게 된다. 유태공은 그제야 아들의 친분 관계에 흐뭇.

망탕산에서 식수 부족과 식량 부족에 시달리다가 원래 있던 그곳 관리를 죽이고 패현을 점령, 소하를 비롯한 다른 이들의 추대를 받아 패공이 된다. 흰 뱀을 죽였다는 사기의 일화는 처음엔 노관이 망탕산에서 허풍을 친 것을 유방을 패공으로 추대할 때 하후영이 패현의 원로들을 설득하기 위해 써먹는 것으로 나온다.

패공이 된 뒤 이름도 소하의 조언을 받아 방으로 고쳤다. 소하는 유방을 주공이라고 부르면서 말을 높이지만, 유방 역시 소하를 계속 소대인이라고 부르면서 말을 높이고, 계속 조언을 구하고 예전에 여김없는 관계를 가진다. 옹치가 배신을 해 뒷통수를 치자 가왕 경구에게 구원군을 요청하러 가게된다. 구원군을 요청하러 가는 도중 드디어 장량을 만나고 그와 함께 동행하지만 경구군은 이미 항우군에 점령당했고 지원군을 못얻을 처지에 놓였으나 기지를 발휘해 용저와의 대면끝에 항우에게 지원군을 얻기 위해 항우와의 첫 대면을 한다.

첫 대면시에는 말 그대로 유방 군대는 본거지도 잃고 거지꼴로 구원군을 빌리러 찾아왔으나 항우 쪽은 군대도 잘 훈련하고 있고 군영도 잘 갖춰져서 둘의 대비가 확연히 난다. 이런 꼬라지 때문인지 항우는 유방을 보자 홀대해 병영도 아니고 마굿간만 내준다(…). 그래도 옹치에 대한 복수의 결의를 보이자 항우는 군사 8백을 빌려준다고 하고는 출진할 때는 5천을 빌려주긴 했다. 물론 패현을 찾은 후에는 유방의 군사까지 항가군에 합류한다는 조건을 걸었지만. 장량도 유방의 풍모를 보고 그에게 자신의 사병을 기꺼이 내준다. 그 후 패현을 점령했던 옹치를 물리치고 다시 패현을 점령하지만 항우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패현을 떠나 항우 밑으로 들어간다.

항우 밑으로 들어갔지만 영 좋지 못한 취급은 계속 받고 있으며 범증까지 관심깊게 보고 있어서 힘든 생활을 계속 하는 듯 했으나 양성을 함락시키는 등 나름 큰 활약을 하면서 지내고 있었다. 그러다 본대와 떨어져 별동대를 만들어 이끌던 중에 항량이 장도에서 장한의 계책에 걸려 위기에 처하자 부하들 모두가 반대 하지만 그를 구하기 위해 장도에 가려한다. 하지만 적절한 타이밍에 번쾌가 뒷치기로 기절시켜 가까스로 막았다. 이후 깨어나선 자신을 때렸던 번쾌를 용서하지만 화를 내는걸 봐선 항량을 구하러 했던건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그를 구하기 위해서 부하들의 반대도 무시하고 장도로 갈려고 했던 듯 하다.. 그렇지만 이후 항우가 온다는 소리를 듣자 항우가 질책 할것을 예상하고 이를 피하기 위해 명을 번복하여 채찍질을 하라고 명령한다. 다만 진심으로 벌하는게 아니라 보여주기 위해서인 만큼 살살 치라고 조참에게 따로 명령도 한다. 그리고 항우가 들어올 때 부하들이 가자는 걸 자기가 거부했다면서 항량의 죽음의 조의를 보이자, 들어오는 길에 번쾌가 맞는 걸 본 항우는 유방이 가려던 걸 부하들이 막은 거 아니냐고 하고는 다른 제후는 본체만체 할 때 유방만이 숙부를 구하려 했다면서 공경의 뜻을 보이고 의형제를 맺는다.

항우를 견제하려는 송의와 초 회왕에 의하여 무안후로 봉해져서 드디어 제후의 반열에 오른다. 그리고 하사받은 저택이 있는 팽성으로 떠나면서 항량 전사 이후 머무르던 마을에서 만난 척부인을 데리고 간다. 이때 정실 부인은 없는 살림이 형수와 사이도 안 좋아서 고생하는 중인데, 따로 데려오라는 말은 하지도 않았다. 여후가 척부인 미워할만 하네.

회왕이 유방에게 관중으로 진격하라고 하자 군사 부족 등으로 어렵다고 엄살 떨다가 넌지시 관중을 먼저 점령하는 제후를 왕으로 봉한다고 선포하라고 권한다. 그리고 공식적으로 회왕이 선포하자 관중을 향해 진격을 시작. 이 중에 범증에 회유된 위표가 부하를 보내 유방군의 후미의 군사들을 죽이자, 이를 알고 유인하여 상대를 죽인다.

그리고 역이기가 진류성 현령을 죽이고 항복하자 그를 참모로 들인다. 계속 진격하여 진군과 대치하며 어려운 싸움을 하던 중 적 증원군이 왔다는 소리에 최후도 생각하지만, 실은 장량이 한나라 군사를 진군으로 위장시킨 것이라, 그와 재회한다. 적을 격퇴한 유방은 관중 점령 이전에 먼저 장량이 있는 한나라를 돕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이 점령한 한(韓)나라의 도읍이었던 양적을 한왕에게 내어주고 대신 장량을 달라고 청한다. 유방은 1년만 빌리겠다고 했지만, 양적을 거저 찾는 것에 넘어간 한왕은 겨우 바라는 게 장량이냐며 1년이고 뭐고 그냥 가지라고 하고 장량을 유방에게 보낸다.

이후 진나라의 수도인 함양으로 무난히 진격, 호해의 뒤를 이은 진왕 자영의 항복을 받아내고 항우보다 먼저 함양 입성에 성공한다. 진나라의 수도인 함양을 점령해서인지 호해의 후궁들이나 끼고 놀면서 정신을 못차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장량항우가 가만히 있지 않을것이라며 대책을 세워야 된다고 하자 이제까지 조언을 잘듣던 모습도 내팽겨치고 "내가 함양을 점령했으니 이젠 왕이다. 그리고 여긴 군량도 많은데 뭐가 문제냐?" 라고 오히려 따지는 모습도 보여준다.

잠시 이런 모습을 보여줬지만, 부하들이 계속 조언해준 덕에 그나마 정신을 차려 문을 다 걸어 잠그고 함양을 항우에게 내준 뒤 뒤로 물러난다. 이후 항우가 초대한 홍문연에 참가해 범증의 계략 때문에 죽을 뻔하는데, 칼춤추던 항장을 항백이 막아서고, 그 후 번쾌가 들어오면서 암살은 피하게 된다. 연회가 진행되자 화장실을 핑계로 연회장을 나가는데, 거기서 옹치와 재회하게 된다. 옹치는 유방이 자기 앞에 무릎을 한번 꿇게 한 뒤, 배신자가 조무상이란 걸 알려주고 유방이 도망가게 해준다.

그리고 파촉 땅으로 들어가면서 도망병은 증가하는데, 한(韓)왕은 그냥 가지라고 할 땐 언제고 장량을 보내달라고 요청하여 어쩔 수 없이 아끼는 부하를 보내 준다. 떠나는 장량의 충고대로 잔도를 불태우고, 고민이 많던 차에 소하로부터 한신의 병법서를 전해 받는다. 시간이 없어 다 읽진 못하다가 한신이 자신의 이동경로를 정확히 예측해 보급을 처리한 걸 알고, 병법서도 보고는 그의 능력을 인정하여 직급을 올리기로 한다. 좌로 장군에 봉할려고 하였으나 그것도 너무 낮다고 대장군에 임명하라는 소하의 말에는 주저하지만 결국 그 말을 따른다. 그리고 한신이 대장군이 되고 삼진을 평정하자 한신과 1:1 술자리를 함께 하는데 여기서 다다익선의 일화가 나온다.

삼진 평정 뒤 초나라 의제가 항우에게 살해당하자 이걸 계기로 본격적으로 거병을 하여 초나라 땅으로 진격한다. 각 제후들의 도움을 받아 연합군을 결성, 팽성으로 진격하는데 이렇다 할 어려움 없이 수도인 팽성을 점령하자 진나라의 수도 함양을 점령했을때 처럼 또 다시 자만심에 빠져 한신, 장량 등을 만나주지도 않고 조언을 듣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한신과의 불화도 이때부터 본격화 되는데 한신이 2만의 병력을 말도없이 빼서 외곽에 주둔시키자[77] 조금 의심을 하는듯한 표정을 보여주며 이후 겨우 한신이 유방을 찾아가 만나는데 성공하여 항우가 이쪽으로 올것이니 대비해야 된다라고 하자 듣지도 않고 신경질을 내는 모습도 보여준다.

이후로도 정신을 못차리고 장량이 "항우가 오는 것을 대비해야 한다" 라고 하자 "항우는 팽성에 오지 못하거나 와도 한참 후에나 온다. 그러니 걱정할 것 없다" 라는 말만 되풀이 하고 더불어 장량한신에게 군사를 더 내줘야 한다는 말을 하자 화를 내며 "2만을 가지고도 나에게 대항하는데 군사를 더 주라는건 말도 안된다" 라고 하는걸 봐선 한신에 대한 깊은 불신이 이때부터 생긴 것 같다. 그러나 유방의 예상과 다르게 항우의 군대가 폭풍같이 나타나자 연합군이 50만이라고는 하지만 오합지졸에 군기도 제대로 잡히지 않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야말로 개발살이 난다.

결국 쫒겨나 도망치게 되는데 같이 마차에 탔던 아이들을 내팽겨 치는 장면도 나온다. 하지만 원래 이야기와는 다르게 "나는 죽을 수 있어도 너희들은 살아야 된다. 여기서 같이 가면 우리 모두 다 죽는다. 그러니 너희들은 다른 곳에 가서 숨아라" 라는 식으로 진짜 쫒아내려고 했던 원래의 유방과는 다르게 아이들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쫒아내려 했던걸로 각색하였다.

겨우 추격을 따돌리고 살아났지만 팽성에서의 대패와 자기 자식을 내쫒았다는 죄책감이 겹쳐 자신감이 매우 떨어진 상태에서 패현에 숨어 지내게 된다. 이를 본 장량소하까지 불러와 소하가 유계라고 부르며 야자까지 트며(…) 설득한 끝에 정신이 되돌아와 관중으로 가게 된다. 관중으로 진입 후 한신[78]을 불러와 향후 책략을 묻고 이에 한신이 "대왕께서 형양에 가있으면 항우가 미친듯이 달려들테니 그 때 제가 나머지 제후국을 다 쓸어버리겠습니다." 라는 전략을 받아들여 형양으로 가게된다.

형양으로 간뒤 미칠듯한 항우의 공세를 막아내면서 버티고 있었으나 결국 위기에 빠져 제후국을 차례대로 쓸어버리고 있던 한신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응답이 없자 기신의 도움을 받아가며 겨우 탈출하기에 이른다. 이에 나름 화가 난 유방은 단숨에 한신의 군영으로 달려가 잠자고 있던(…) 한신의 대장군 인수까지 뺏어가며 한신이 잘 훈련시켜놓은 군사를 데리고 다시 내려간다. 그리고 항우와 다시 대치하던 중 역이기를 보내 제나라와 동맹을 맺게 하고 역이기는 임무를 완수 하지만 한신이 그만 제나라를 공격해버리는 바람에(역이기가 제나라로 갔다는걸 모르는게 아니라 알고서도 공격을 했다.) 분노한 제나라 왕에 의해 튀김이 되어 죽게된다. 이 소식을 들은 유방은 매우 화를 내며 만약 한신이 제나라 공략에 실패한다면 죽여버리겠다는 말까지 할 정도로 점점 갈등이 심해진다. 다행히 한신은 제나라를 정복하였지만 "제나라의 민심을 얻기위해 자신을 왕으로 봉해달라" 라는 말을 하자 안그래도 역이기 사건 때문에 심기가 뒤틀려있던 유방의 어그로를 제대로 끌게된다. 처음에는 자신을 왕으로 봉해달라는 한신의 말을 듣자 노발대발 하였으나 장량의 발밟기 조언에 맘을 바꿔 어쩔수 없이 제나라왕에 임명한다.

이후 항우군과 긴 대치 상태에 빠지게 되고 항우는 군량이 부족해지자 유방의 아버지인 유태공을 솥에 삶아 죽인다는 협박을 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유방은 능청스럽게 넘어가고(항우 앞에서는 "내 아버지를 삶거든 고기나 줘라" 하면서 능청스럽게 대응하지만 군영에 돌아와서는 아버지 하면서 울긴한다.) 이 방법이 통하지 않자 항우는 유방과 대화한다는 명목으로 유방을 불러내 몰래 화살을 쏴버려 유방의 가슴을 맞춰버린다. 가슴을 맞고 잠시 쓰러진 유방이었으나 여기서 자신이 완전히 쓰러지면 군사들의 사기가 떨어진다는것을 잘 알았기에 아픔을 참고 또 다시 화살이 발뒤꿈치에 맞았다면서 능청스럽게 연기한다. 하지만 상처 때문에 결국 군영으로 돌아와 쓰러지고 만다.

이 중상으로 한동안 사경을 해매게 되고 군영은 척부인의 행각[79]으로 혼란과 반목이 생겨나게 된다. 그러나 박희가 화살을 뽑고 치료하자고 강력히 건의해 결국 목숨을 구할 수 있게 된다.[80]

이후 가족이 인질로 잡히고 팽월, 한신의 원호가 미진하자 노관에게 은밀히 지령을 내려 초군에 위장투항케 하고 항우가 흥구 협정을 맺고 가족을 송환케 만들고 만다. 이후 가족들이 돌아오자 여치 등과 회포를 푸는 한편 한신, 팽월에게 봉지를 내리고 경포의 병력을 비롯한 각군을 소집, 정비해 회군하는 항우 의 뒤통수 를 공격한다. 하지만 한신군이 와주질 않아 고릉에 되려 갇히게 된다. 한편으론 초조해 하면서도 항우와의 대치에선 약을 올리며 위세 허세 를 잃지 않으려고 한다. 이때 초군의 날아오는 화살에 엎어졌다 기어 도망가는 건 덤 결국 한신군이 초군의 측면을 공격하며 곧이어 각 제후군이 집결하면서 50만 대군이 된다. 유방은 한신에게 지휘권을 위임. 한신은 서서히 초군을 몰아넣어 해하에서 마침내 격파하게 된다.

전투 마지막 항우가 최후의 분전을 하려 할때 급히 항우에게 가[81] 잠시 시선을 나누더니 짧고 차갑게 "죽여라" 하고는 돌아가버린다.

전후 노관, 한신, 경포를 비롯한 형제이자 동료였던 공신들을 숙청한다. 그런데 뉘앙스 상 대체로 누명을 씌워 숙청하는 모양새.[82] 경포 숙청 후 고향 중양리로 와선 마을 사람들이 단속으로 집에서 나오지 않아 거리가 조용하자 주발을 타박하며 "고향 사람들을 잘 대해 줘야지."라고 하고[83] 주창에겐 어떻게든 기신의 일족을 찾아 꼭 보답해주라고 당부한다.[84] 그리고 옛집에서 감회에 젖는데, 문을 들어서자 아버지 유태공에게 갈굼 당하던 일이나(...) 그 유태공과 식구들이 '어서 와서 밥 먹어라'라고 맞이하던 일과 부역을 떠날때 배웅을 받던 일, 형제같던 친구들과 어울리던 일과 여치와 결혼하던 옛 일을 회상하는 모습을 보이곤 옛 여인 조씨를 만나 다시 회포를 푼다. 이때 조씨와 이야기를 나누는 유방의 모습은 마치 옛날 중양리를 떠나기 전과 비슷하다. 그러면서 조씨가 옛 형제들의 안부를 묻자 "공적만큼 잘 대우해 줬는데, 괘씸하게 죄를 지음. 그래서 합당한 벌을 내렸다."라는 말을 하며 소하마저 탐관[85]이 됐다며 한탄한다. 그려면서 "탐관이 더 낫지. 야심은 없을테니"하고 조씨는 기막혀 한다. 그리곤 이대로 죽긴 싫다, 계속 살 수만 있다면 중양리에서 살아도 좋다며 한탄하는데, 그러다 소리를 듣고 나가 가무가 보이자 자신도 횃불을 들곤 그 가무 한 대열에 동참해 같이 춤을 춘다. 앞서 유방에게 자신이 오래 못살거란 이야기를 듣고, 가무에서 마치 회광반조를 하듯 춤을 추는 모습에 조씨는 안타까움에 눈물을 흘린다.

장안으로 돌아와선 장락궁에서 손자 유양[86]과 놀며 자기 인생을 이야기하는데 유양이 할아버지는 여기 사냐고 묻자 "지금은 여기서 살지만 곧 장릉으로 이사를 간단다"라며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암시한다.[87] 장량, 소하, 한신 같은 영걸이 무능한 자신을 섬겼으니 그 이유는 자신이 용이기 때문이라고[88] 해놓곤 진승의 이야기를 하며 결국엔 자기도 거기에 용기를 얻었고 마침내 봉황인 항우를 참새인 자신이 이겼다 라고 자랑스러워한다. 자기 비하인가 칭찬인가 그리곤 한의 후대를 걱정하며 집안의 부실함[89]을 탄식한다. 이에 유양은 집(장락궁)은 튼튼하다면 자기 아버지같은 소리를 한다고 한다. 이에 그 집이 아니란다라며 씁쓸해하며 왕도패도를 이야기하며 군주에겐 그 둘 모두가 있어야 한다며 극은 끝을 맺는다.

7.1.2. 능력 및 인품 표현[편집]

유방이 건달 출신이란 걸 많이 반영한 듯. 작중 유방은 매사 껄렁껄렁하고, 소하장량에게는 수시로 문서 대필 셔틀을 시키며[90], 전투에 나가서도 그다지 유능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먼치킨인 항우와 달리 문에나서 무에서나 딱히 특출난게 없다. 하지만 앞서 건달 시절서 부터 꾀를 쓰는 부분이라든가, 망탕산에서 패현 현령의 계략을 혼자서 눈치챈것이나, 가왕 경구에게 군사를 빌리러 가다 경구가 망해버리자 곧바로 항우와 우호 관계를 맺는 기지를 발휘해 장량의 감탄을 자아내는 등 지도자로써의 상황 판단과 위기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은 수준급으로 표현된다. 임기 응변이 강하다는 건 소하도 인정한 부분. 또한 팽성 대전 대패 이후 정공의 군사들과 마주치자 손수 칼을 뽑아 백병전을 치르는 등, 무에서도 마냥 맹탕은 아니다.

또한 격식 없는 모습도 보여주는데 항우와 대면한 상태에서 자리를 가리지 않고 털썩털썩 앉을려고 하는 등 이런걸 아주 싫어하는 항우와 대조되는 성향을 보여준다. 그리고 옹치가 공을 세우고 돌아오자 직접 말을 끌어주는 등 부하들을 생각하는 모습도 나온다.

고향에서 같이 지내고 망탕상에서도 같이 지내던 형제들이 한 두명씩 크고 작은 전투에서 계속 목숨을 잃자, 생명의 소중함에 대해서 많이 생각을 하게 된다. 그 이후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않으며 전쟁에서도 최대한 싸우지 않는 방법을 먼저 찾는다. 군사들에게 충성심을 강요를 하면서 전투에서 죽으라고 강요하는 항우와는 정반대의 면을 보인다.

그리고 포로들을 죽이지 말라고 직접 항우를 찾아가 요청하는 장면도 있다. 이는 소하와의 대화에서 단순히 포로들을 부하로 들이게 해달라고 하는 게 아닌 포로들의 목숨을 살릴려고(그냥 놔두면 항우가 다 죽일게 뻔하니) 하는 의도도 있는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청이 거부되고 포로들이 다 학살당하자 씁씁한 표정을 짓는 등 불같은 성격의 항우보단 훨씬 괜찮은 인품을 가지고 있는걸로 묘사된다. 그리고 망탕산에서 숨어있을 때부터 괜히 이목을 끌게 하지 않기 위해서 민가에 대한 불필요한 약탈과 살육을 금지했으며, 이를 어길시 무조건 죽게 하거나 엄벌에 처한다.

그리고 생각이 단순한 항우와 달리, 유방은 어떤 일이 생기면 그에 대한 생각이나 심정을 다른 사람들과 서로 말하는 편이다. 가령 양성의 포로들이 학살당했을 때, 부하들에게 죽는게 두렵냐고 물어보는데, 부하들이 두렵지 않다고 말하자, 자기는 죽는게 두렵다며 포로 학살에 동의하게 된 자신을 간접적으로 깐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사람 이끄는 능력이야말로 유방의 가장 큰 강점으로 그려진다. 건달 시절서부터 사람 끄는 능력을 보여주는데, 자신과 자기 집안이 손해본다 하더라도 동료들이 다치지 않게 하며, 신용을 지키는 모습을 보여준다. 앞서 언급한 하후영 일도 그렇고, 노관이 도박하다 손가락 잘리게 되었을 때도 노관의 손가락을 자르는 대신 자신의 집 물건들을 가져가게 해 노관을 구해낸다. 노역에 끌려갈 때 주발에게 주발의 노모는 자기 집에서 잘 보살펴드리게 하겠다고 말한다. 범증도 평하길 유방 자신의 능력은 별볼일 없는 것 같으나 수하에 있는 부하들은 모두 천하의 기재들이라 평했다. 그러면서 이들이 주군으로 모시는 유방 또한 보통 내기가 아닐거라고 말하는데 한마디로 보통 사람도 아니고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알아서 꼬이는 유방만이 가지고 있는 아주 특별한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자신이 잘못을 했다는걸 알면 그것을 받아들이고 반성을 한다는 점도 항우와는 다른 강점으로 그려진다. 장량의 말처럼 유방은 성인군자가 아니기 때문에 보통 평범한 사람들처럼 조그만 일에도 자만을 잘하고 향락에 빠져서 정신 못차리는 모습을 종종 보여준다. 하지만 일단 한번 크게 당하거나 그것이 잘못된 행동인줄 인지하게 되면 그걸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진나라 함양을 점령하고 나서 향락에 빠져 정신을 못차렸지만 부하들의 직언에 정신 차리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팽성 점령후 또 다시 자만에 빠져 정신 못차리다 항우에게 크게 당해서 쫒겨날때도 노관, 번쾌 등이 "이게 다 한신 때문이다. 그놈이 대장군이니 다 그놈 책임이다." 라고 말하지만 오히려 "한신은 책임없다. 모든건 내 책임이다." 라고 잘못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유방은 잘못을 종종 저지르는 타입이지만 그걸 남탓으로 돌리지 않고 자신의 잘못으로 받아들이고 또 고쳐나갈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정리하자면 초한전기에 묘사된 유방은 실제 역사속에 묘사된 유방과는 비슷한듯 미묘하게 다른 편. 실제 유방이 친화력과 포용력으로 인재를 모으고 조언을 받아들이고 사람의 마음을 얻는 등 정신적 측면에서의 리더였다면, 초한전기의 유방은 임기응변과 이성적인 관점으로 사람들을 중재하고 나름 독자적으로 그림을 짜면서 다른 모사들과 토론을 하듯 조언을 얻는, 참모형 리더라 볼 수 있다.

전작 격이라 할수 있는 삼국이 유비의 매력에 대해 언행이 일치된 덕행으로 표현해 나름 설득력을 부여한 것처럼 초한전기의 유방 또한 그 매력이 그의 행동으로 표현된다. 한편으로는 냉철한 면도 보여주기에 매력적이면서 복잡한 모습을 보여준다.

7.1.3. 기타[편집]

극초반부에 유방은 '호랭이'란 이름의 누렁이 강아지를 데리고 다니는데, 그야말로 영혼의 동반자로 묘사된다. 유방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장면들이 여럿 나오며, 부역길까지 따라갔다가 식량이 떨어져 동료 조무상이 굶어죽어가자 어쩔수 없이 번쾌가 호랭이를 죽여 식량으로 제공한다(9화). 애지중지하던 호랭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유방은 멘붕하나, 어쩔수 없는 상황인지라 그 것을 애써 이해할려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살린 조무상은 훗날 유방이 가장 위급한 순간통수를 치고...

이 외에도 웬 대추나 밤같은 걸 씹어먹곤 하는데 뭔가 하려고 하면 그걸 퉤 하고 길바닥에 뱉으면서 건달 포스를 좔좔 풍긴다. 유앙과 함께하는 마지막 장면에서도 유앙에게 그런 걸 먹인다. '나는 이거 먹구 자랐단다.', '맛없어요.'[91]

[1] 이 묘호는 시호인 고제의 높임말이다.[2] 이후 피휘하여 여러 문헌의 나라 방(邦)자를 나라 국(國)자로 바꾸었다. 이전에는 나라 방이 훨씬 많이 사용되었으나, 이후로는 나라 국 자가 훨씬 많이 쓰이게 되었다. 흔히 상국으로 알려진 관직명도 원래는 상방이었다.[3] 지금의 산시 성 셴양 시 웨이청(渭城) 구 소재. 여후도 옆에 묻혀 있다.[4] 이 재위 연도는 전 중국을 통일한 '황제'가 된 후의 연도로 유방이 한왕이 된 해는 기원전 206년이다.[5] 우리나라의 경우 이름이 워낙 그 신체부위(?)를 연상케 해서 고우영 만화 '초한지'에는 "해가 떠도 유방, 달이 떠도 유방, 유방이 최~고~야. 아냐. 아냐. 젖통이 최~고~야."라는 개드립이 나오기도 했다.[6]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풍현(豊縣)[7] 이와 같은 케이스로 삼국지 시대의 많은 인물들을 들 수 있다. 손견의 아들들인 손책, 손권, 손익, 손광의 자를 각각 백부, 중모, 숙필, 계좌로 썼으며, 사마랑, 사마의, 사마부, 사마욱 형제 역시 자를 각각 백달, 중달, 숙달, 계달로 백중숙계에 맞춰 자를 지었다. 공자 또한 형제 중 둘째였기 때문에 자를 중니로 썼다. 덧붙여 막내의 자에는 유(幼)를 붙이는데, 사마의 막내 아우인 사마민의 자가 유달이었으며 마량의 막내 아우인 마속의 자는 유상이다. 마량 또한 자를 계상으로 썼는데, 이것이 백중숙계에 맞춘 것이라면 마량은 형제 중 넷째이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마씨 형제들의 자는 백상, 중상, 숙상이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8] 산동선 등현(縢縣) [9] 대나무 껍질로 만든 관(冠) [10] 죽기 전에 여후와의 대화에서 알 수 있다.[11] 조언을 분별하는 능력이 장점으로 종종 오인되곤 하지만, 유방은 더 설득력 있는 말을 들으면 금세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수정할 줄 아는거지 본인이 간언을 듣고 꼼꼼히 사리판단을 하는게 뛰어나다고 하긴 힘든 사람이였다. 대표적으로 역이기의 제안을 듣고는 좋다고 여기다가 장량이 젓가락을 8개나 부수면서 하나하나 따져가면서 잘못을 논하니 금세 수긍했다는 일화.[12] 정치감각 쪽도 약간 과장이 있는데, 신릉군 일화에 감명을 받고 그 이후부터 의협을 중시하게 되었으며, 그게 뜻하지 않게 명분상으로 많은 이점을 가져다 주었단 것과, 조언자의 말들을 귀담아 들을 줄 알았다는 점이 큰거지, 본인이 딱히 무언가 실익을 노리는 경우는 나중에가서나 조금씩 생긴다는 점에서 정치감각이 뛰어나다기엔 무리가 있다. 태자 폐위 시도 때의 막무가내식 행동을 보면 친화력과 별개로 흔히 정치감각 하면 떠올릴 모략가적인 면모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13] 아이러니하게도 남자답고 대범한것은 넓은 포용력의 유방에게 더 어울리는 평이라고 볼 수 있다. 남자답다는 항우는 실제론 소인배라서 크게 배풀어야할때 아까워하는 쪼잔한 인간이었고 그로 인해 무수한 실책을 저지르며 몰락했다.[14] 그것도 자신의 최강의 패라고 할 수 있는 한신, 조참, 관영, 번쾌 등은 전부 밖에 내보낸 채였다.[15] 심지어 인생 최대의 패전인 팽성 전투에서도 가진 걸 전부 날리거나 하지는 않았고 악전고투하던 성고 형양 전역에서도 관중이라는 든든한 뒷배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16] 유방이 패배했던 전투는 보통 공성을 하다가 안되면 무리하지 않고 물러나는 식이라 패배하더라도 피해 자체는 크게 심하지 않은 편이었다.[17] 심지어 해하 전투에서도 병력 상에서는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었음에도 몇 번이나 항우에게 털릴 뻔 했다.[18] 숫자만 많지 제후들의 연합으로 인한 군사 지휘권의 혼란, 지도부의 방심과 허를 찌른 기습 등.[19] 물론 이 무한 소모전부터가 정치적인 실책에서 비롯된 일이다.[20] 특히 한신은 "나 왕 안 시켜주면 그냥 진군 안 하고 제자리에 있을거임"이라고 협박조에 가까운 말을 했음에도 감정적으로 행동하기보다 오히려 "그래, 왕 하고 싶으면 해라."라고 화끈하게 나왔다.[21] 사실 키루스 2세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확실하지 않고 다양한 설이 존재한다.[22] 백등산 포위전 문서에 나온 흉노의 패배는 일부러 패전하여 깐 밑밥이라고 한다. 애초에 백등산 포위전 자체가 유경의 충고를 듣지 않아서 일어난 일인데 한고제는 이전까지는 남의 충고를 그렇게 쉽게 내치는 인물이 아니었다.[23] 단 이 부분은 유방 자체의 정치적 자질보다도, 의협을 근본으로 삼는 신릉군이 롤모델 이였고, 인재가 모일 친화력이 있었고, 조언을 귀담아 듣는 자세에서 비롯된것이지, 위의 각주에서도 강조했듯 '정치적 고단수'이라는 말을 듣고 바로 떠오를만한 이미지의 스스로 숙고해서 큰 그림을 그리는 인물은 아니였다.[24] 항우가 관중을 점령하러 갈 때 초나라 의제의 신하들이 항우가 너무 난폭하다면서 그의 대항마 위치에 놓았을 정도로 유방은 의제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25] 그리고 사실 이 토사구팽 자체가 밑 항목과 토사구팽 문서의 변호에서 보면 알 수 있듯 오히려 인간적으로 해결하려 했지 피도 눈물도 없는 그런 숙청과는 거리가 꽤나 멀었다.[26] 이후 유방이 살아 생전 가장 증오했던 인물인 옹치를 제후로 세웠고 숙손통을 정식으로 황제의 스승으로 임명하여 예를 세우면서 그나마 줄어들었다.[27] 당장 진승 오광만 해도 제대로 기틀도 세우지 않고 왕을 칭했다가 순식간에 세력이 와해되었고 항우는 기껏 중원을 일통했는데도 중앙집권 정부를 세우지 못하고 유방 등에게 촉과 한중을 퍼줬다가 그 여파가 고스란히 자신에게 돌아왔다.[28] 재미있는 비교지만 유방과 비슷하게 미천한 출신에서 통일 왕조의 황제 자리에 오른 주원장의 경우 3족도 모자라 9족을 멸한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유방과는 비교도 안 되게 공신들에게 가혹했다. 게다가 유방은 한신을 견제하고 실권을 빼앗기는 했지만 회음후 자리를 준 이후로는 더이상 건드리진 않았다. 사실상 한신을 죽인 건 여후다. 팽월도 마찬가지.[29] 덧붙여 유방 본인은 항우라는 당대 최고 망치의 공격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모루의 역할을 직접 수행했다.[30] 왕릉이 이를 탓하자 "지금 따지고 항거하는건 자네가 나보다 낫지만 여태후가 죽은후 일을 정리하는건 내가 자네보다 나을걸세."라고 대답했다고 한다.[31] 무례하다느니, 어린아이 같다느니, 걸주 같다느니 등등.[32] "吾遭亂世,當秦禁學,自喜。謂讀書無益。洎踐祚以來,時方省書,乃使人知作者之意,追思昔所行,多不是" [33]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적을 받으면 오히려 지적한 상대방이 무례하다고 깐다. 그러면서 비판을 수용 안 한 이유를 듣기 좋게 돌려 말하지 않고 기분을 상하게 한 상대방 탓으로 돌리기 바쁘다. 그런데 유방은 단 한번도 상대가 예의를 갖추어 단점을 조목조목 비판했던 적이 없다. 즉 인신공격에 가까운 비난을 받아도 사리에 맞는 이야기면 백이면 백 수용하고 뒤끝도 없었다는 소리.[34] 한신을 추천한 건 소하이니 유방은 인재 보는 눈조차 형편 없었다고 비하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이는 실로 무식한 단편적인 시각인 게, 정말 인재 보는 눈이 없었으면 당장 그 소하부터 쓰지 못했을 것이다. 인재가 인재를 부르는 건 아주 당연한 이치이고, 무엇보다 한신은 그 진가를 알아봐 준 사람이 별로 없었다. 초군에서도 범증을 빼면 아무도 한신을 중용하라는 건의조차 않았고, 소하도 이야기를 나누고 그 식견을 파악하기 전까지는 한신이 뭐하는 인간인지조차 몰랐다. 보자마자 견적이 나올 것 같으면 점집을 차려야지[35] 소하가 그런 요지로 한신을 추천했으며 그리고 한신도 "님은 항우보다 잘난게 뭐가 있냐"고 깠다, 왕릉은 "항우만도 못한 인성"이라고 깠고, 진평은 "자꾸 욕만 하고 천박하게 구시니까 저처럼 재물에 눈이 먼 놈들만 몰려들잖아요."라고 깠다.[36] 폭군으로 유명한 걸왕제신을 함께 일컫는 말로, 오늘날로 치면 "히틀러 같다." 우리나라로 따지자면 "연산군과 같다"와 같은 표현[37] 이때 상황이 재밌는데 주창이 황제 유방을 알현하려고 방에 들어왔는데 마침 유방은 척부인과 그렇고 그런 행위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에 놀란 주창이 얼른 방을 빠져나와 엣헴 달아나자 이에 장난기가 발동한 유방이 뒤쫓아가 뒷덜미를 잡고(...) 덮쳐 넘어뜨린 다음 프로레슬링으로 헤드락을 걸며 "얌마 ㅋㅋ 내가 어떤 임금인거 같냐?ㅋㅋ" 라고 물었던 상황... [38] 심지어 유경은 이 때 일개 군졸의 신분으로 유방 면전에 대고 "당신 주제 파악 좀 잘하세요."라는 식으로 돌직구를 날렸다고 한다. 현대로 치면 일병대통령에게 국정 문제를 두고 면전에서 돌직구를 날린 격이다(...). 유경 문서 참조.[39] 광무대치.[40] 이때 유방은 엄청난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사기가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위장한 것이다. 결국 후방으로 실려가 사경을 해매야 했다. 이건 독하다는 말로도 부족한데;;[41] 물론 장오가 유방의 첫째딸 노원 공주의 남편인 것도 영향이 있었겠지만[42] 사실 유방의 뒤통수를 친 것이기 보다는 유방의 부인인 여후와의 사이가 안좋았었고 유방이 늙어 오늘 내일 하는 사이 여후가 권력을 틀어쥐고 한신과 팽월을 숙청해대니 이제 내 차례겠거니 해서 지레 겁을 먹고 흉노로 달아난 것이지만...[43] 당초엔 유방이 패현에서부터 알고지낸 가까운 사람들 위주로만 봉작을 내렸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소외감을 느낀 결과 굳이 옹치를 후로 봉해야 했던 것이라 오히려 이들은 유방 아래에선 편애를 받으며 지냈다. 진작 병사하지 못한 왕릉, 주창, 주발등이 유방이 죽은 후로는 성격 때문에 찍혀서 불행한 말년을 보내는 것만 봐도….[44] 한신에게 바람을 넣은 괴철도 용서를 해주었고 한신도 여후가 유방이 오기 전에 처리했다.[45] 그 억울하다는 팽월도 해하 전투에서 진격하지 않다가 유방이 분봉을 승낙한 뒤에야 움직였다.[46] 심지어 노관이 달아난 것도 유방 때문에 달아난 것이 아니다. 유방은 자신을 용서해줄 수 있겠지만 표독스러운 여후가 자신을 제거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였다.[47] 왕릉의 어머니가 심부름꾼을 시켜 왕릉에게 "유방은 훌륭한 사람이니 그를 섬겨야 한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결하자, 분노한 항우가 왕릉의 어머니의 시체를 삶았다. 효자였던 왕릉은 당연히 항우에게 크게 분노하여 원한을 품게 된다.[48] 사실 이 부분은 그 당시 축첩이 당연하고 부인만 여러 명을 두었던 지배층 사이에서 이런 것에 앙앙불락하며 사사건건 대드는 여후가 오히려 특이한 케이스다. 유방의 주변 인물들은 계속 여자 문제로 남편을 쪼아대는 여후를 결코 좋게 보지 않았다.[49] 그러나 별 다른 이유도 없이 적법한 왕위 계승자인 멀쩡한 세자를 밀어내고 자신이 총애하던 첩인 척부인의 자식이란 이유만으로 유여의에게 태자 자리를 주고자 강경하게 밀어붙인 사례에서 보듯이, 여색이나 처첩 논쟁을 떠나서 유방 본인도 문제가 될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여후의 질투심이 워낙에 악명이 높았으니 자신의 사후 척부인 모자의 안위가 걱정되었을 테고, 여후의 권력욕을 자제시킬 목적이라고 해도, 특별한 결함없이 멀쩡하게 세자의 일을 하고 있는 혜제를 뜬금없이 폐할 이유가 되진 못하며 당대 신하들 사이에서도 폐할 이유가 없다는 의견이 태반이었다.[50] 거기다 이런 왕의 독단에 의한 후계 교체는 나중에 어떤 식으로든 피바람과 혼란을 불러올 뿐이며, 아무리 모친인 여후의 권력욕을 제어할 목적이라 해도 이것이 이미 세자 자리를 수행하고 있으며, 적장자이기까지 한 혜제를 폐할만한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거기다 이후 유방의 반응을 보면, 유방이 후계자 교체를 밀어부친 이유는 현 세자의 능력과는 아무 상관없이 단지 척부인 모자의 안위가 걱정된다는 이유가 가장 컸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전통적인 왕위 정통성의 크기를 무시하고 오로지 본인의 감정만을 앞세워 후계를 정하는 건 왕으로서 굉장히 잘못된 일이다. 결국 대신들의 반대와 여후의 계략에 패해 후계 교체가 실패되어, 더더욱 독이 오른 여후는 유방 사후 그 유명한 인간 돼지 사태를 일으키며 결과적으론 사태를 더 악화시켰다. 사실 국익과 더 큰 목적을 위해서라면 가족도 버릴 정도로 냉정하고 이성적인 유방이 단지 자기가 아끼는 부인과 아들이 걱정된다는 이유만으로 국가의 안위를 뒤흔들수도 있는 후계 구도를 쉽게 바꿔버리는 행동을 한 것에서 과연 유방이 정말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인가에 대한 논쟁이 있기도 하며, 가족애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여후와 그 소생들이 싫었던거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실제로 유방이 가족에게 모질었다고 표현한 본문의 일화들은 전부다 여후의 자식들에게 한 행동들이다. 이게 사실이라면 혜제가 제일 불쌍하다[51] 다만 혜제가 시종일관 여후에게 휘둘리며 제대로 황제 노릇을 못해서 사마천이 본기의 대상으로 혜제가 아닌 여후를 올릴 정도였던 것을 보면 유방이 단순히 감정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혜제가 황제가 되는 것을 진지하게 걱정했을 수도 있다.[52] 패주하던 와중에 마차의 속도가 떨어지자 자식들을 던져버렸다. 이때 하후영이 마차를 운전하다가 멈추고 유방의 자식들을 다시 태웠다. 그렇게 십수차례 반복되자 유방이 "이러다 우리 다 죽는다! 내가 죽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모두 다 죽는다고!"라고 칼까지 꺼내 위협하며 자신의 명령을 따르라고 외쳤지만, 되려 하후영이 "짐승도 자기 자식은 안 버리거늘, 대왕처럼 인의를 모르는 사람이 지금 당장 산다고 잘 될 것 같습니까? 대왕이 되서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 알고 계신 겁니까!"라고 역정을 내니 유방이 깨갱하고 조용히 있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는 모두가 도주에 성공하고 이 일로 하후영은 여치에게서 '가족처럼 지내자'고 제안을 받을 정도로 신임을 얻은 몇 안 되는 인물이 되었다.[53] 사실 그 공신들도 유방이 여후를 견제하려고 할 때는 호응해주지 않기도 했다. 척부인은 황제의 총애를 등에 없고 기생충 노릇을 한 여희의 경우가 있었기에 제때 경계하고 차단했지만 여후같은 방식은 거의 선례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54] 번쾌의 부인이 여후의 동생이다.[55] 사실 이 부분은 고제가 아니라 혜제가 책임졌어야 했었는데 안타깝게도 혜제가 척부인의 일로 맛이 가서 일찍 죽은 탓에 결국 여태후의 폭주를 견제할 방법이 없어져서 문제가 더더욱 심각해졌다고 할 수 있다.[56] 게다가 혜제를 먼저 폐하지 않는 한 그 어머니인 여후 또한 정통성 관계상 건드리기 힘든 부분이 있었다. 여씨를 몰살시킨 공신들도 전부 '간악한 외척의 횡포'로 전가했지 여후 본인의 명예는 거의 훼손하지 않았다.[57] 예를 들어 유방은 형양에서 탈출하기 위해 자신의 부하인 기신과 여자들을 자신과 자신의 병사로 분장시켜서 항우의 진영으로 보냈는데, 이때 기신이 결국 살해당했으니 다른 수천 명의 여성들도 멀쩡하게 끝냈을 리가 없다.[58] 그리고 애시당초 한고제가 나라를 세우기 이전에는 통일 왕조라는건 존재하지도 않았고 그나마 단일 왕조였던 은, 주도 수백년 전의 얘기였다. 춘추 전국시대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던 사람들인데다 진시황 사후에는 나라라는 시스템 자체가 무너진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명분은 통일 왕조를 건설하고 중원에 평화를 가져오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명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59] 다만 초와 한이 본격적으로 붙기 전에는 진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이 가장 큰 명분이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시스템이 무너진 진나라(및 과거의 춘추 전국시대)를 대신하여 가장 실력이 뛰어난 인물이 진 대신 중원의 천자로서 새로운 질서를 건립할 명분을 갖는 것으로 해석된 것인데 정작 진을 무너뜨린 항우는 정말로 진만 무너뜨리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일에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었던 탓에 한고제에게 차례가 돌아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60] 독학으로 글을 익히고 당시에 귀했던 서적들을 구해서 배웠다. 단지 당시엔 본인이 좀 읽다가 질렸을 뿐.(...) 시대상 인구 대비를 감안하면 일개 건달 수준은 아니었다.[61] 한신과 다른(...) 기록이 있는데, 깡패들이 도발하자마자 베어버리니까 나머지 깡패들이 칼질만 보고 상대가 되지 않음을 깨닫고 살려달라고 빈다.[62] 지방군과 싸워서 이기고 일종의 민병대 내지 도적들도 때려잡는 세력을 보유한 일개 건달(?)[63] 초창기 멤버에 나중에 가장 큰 상을 줄 때도 유방의 의견이 반영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초한 전쟁 내내 후방을 맡겼던 신하가 소하[64] 소하가 도망갔다는 오보를 전해듣고는 넋이 나가서 그대로 주저앉았고, 한참 뒤 소하가 한신을 다시 끌고 데리고 왔을 때는 소하한테 "야, 진짜 죽을래?? 놀랬잖아! 이 자식아!"라며 야박을 주었다.[65] 특히 이야깃거리를 많이 남겼던 한신에 대한 동정으로 유방을 싫어하는 경우가 많다.[66] 유교에 대한 유방의 태도는 성장형 주인공을 연상시키는 흥미로운 점이 있다. 유생이나 세객들 업신 여기기를 즐겨하던 유방이 역이기에게 크게 지적받고, 자기 밑에서 수하나 역이기, 육가 같은 인물들이 혁혁한 공을 세우는 것을 보며 다르게 보다가 기신이나 주가, 종공 등이 유교적 충성심에 입각해 자기 대신 희생하는 것을 직면하게 되면서 더이상 유생들을 업신여기는 행동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유교는 숙손통의 예법 제정 등을 시작으로 입지를 구축하다 한무제 즈음부터 명실상부한 한나라의 지배적 사상이 된다.[67] 더벅머리 놈 정도로 번역되기도 한다.[68] 여담으로 주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난왕이 같은 해에 사망했다.[69] 물론 초한지에서도 유방은 어리버리한 얼굴 속에 음흉함을 감추고 있는 캐릭터로 묘사되었지만 음흉함이 더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무래도 십팔사략 쪽.[결말] 스포일러 결말에 가서 전국을 통일한 유방 앞에 여후가 나타나는데 유방은 여후에게 당신에게 거절당하는 것에 지쳐서 당신을 사랑하는 것을 포기하겠다고 한다. 근데 이때 오히려 여후가 유방에게 마음을 줄려고 했다면서, 혹시 용서가 안되냐고 하자 유방은 여후를 용서 해주는 걸로 마무리되는 다소 황당한 결말이다.[71] 영문판에선 매력을 나타내는 Charm으로 번역되었다.[72] 그것도 곽회과 동급인 통솔이다.[73] 손건과 같은 급이다.[74] 내정 특기로는 경작, 병심, 연병, 인맥, 변설을 가지고 있고 전투 특기로는 신속, 수련, 원사를 가지고 있다. 내정용으로 쓸 만하고 전투용으로도 꽤 좋다. 그리고 유방이 가진 전투 특기 때문인지 병력을 다 잃고 도주해도 쉽게 잡히지 않는다. 이는 아무래도 유방이 병사들을 다 잃고 죽을 위기를 여러 번 넘긴 것을 반영한 배치다.[75] 피해자가 하후영이건만 사건 은폐를 한다는 명목으로 하후영은 모진 고문을 당한다. 같은 시간에 유방도 심문당하며 채찍질을 당했다. 이때 유방은 "간지러워! 간지러워!" 하면서 애처롭게 외치고 있었다.[76] 조씨는 떠났다가 유방이 패공이 된 후 돌아오는데, 그녀가 낳은 유방의 아들이 장남이지만 서자로 황제가 되지 못한 유비다.[77] 다른 뜻이 있어서 그런건 아니고 항우와의 싸움 때문이었다. 하지만 유방 본인 눈에겐 별로 안좋게 보인듯.[78] 불러오는 과정에서 서로간의 약간의 마찰이 있었다. 유방이 어서 오라고 하였지만 한신은 상황이 난처하여 지금은 갈 수 없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도 결국 가긴한다.[79] 남편이자 왕이 죽을 상황에 후사만 생각해 소하를 포섭하려 하거나 유방의 중상을 모두 비밀로 하는데 쾌유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려고 한다던가[80] 여기서 척희와 박희의 기량 차가 두드러짐이 보인다. 결국 나중에는 척희 소생의 아들은 여후에게 죽지만 박희 소생의 아들은 문경치지를 이끈 성군이 된다.[81] 이때 의형제를 맺었던 기억이 스쳐 지나간다.[82] 아예 한신의 경우 누명으로 그려진다. 여치, 소하가 꾸민 일이지만 유방도 묵인했다는 암시가 있다.[83] 이때 같이 있는 주발, 조참, 하후영의 표정이 난감, 또는 어색해 하는 분위기다.[84] 중양리 씬은 80회에서 유방이 처음 나오는 부분인데 80회 전반 행적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85] 소하가 일부러 의심을 피하려고 횡령죄를 뒤집어 썼다.[86] 조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서장자인 제도혜왕 유비의 아들. 뒷날 제애왕(齊哀王).[87] 실제로 유방은 장락궁에서 죽었으며, 유방의 능호가 장릉이다.[88] 이때 유오의 교룡 이야기를 하는데 뉘앙스 시바 료타로의 항우와 유방의 가설을 떠오르게 한다.[89] 아마 여씨 일족의 횡행을 암시하는 듯 하다.[90] 아예 문맹은 아니어서 읽는 씬은 꽤 많지만... 한신에게 원병을 재촉하는 서신을 쓰려다 난데없이 장량에게 "한신 할 때 한(韓)을 어떻게 쓰죠(...)?"라고 물을 정도로 가방끈이 짧다. 물론 이 시절 문맹률을 알 길은 없으나 평민 출인 부하들은 거의 다 까막눈으로 묘사되는 점을 보면 평균 이상은 되어 보인다. 그러니까 정장 노릇도 하겠지만.[91] 씹을수록 단맛이 우러나는 특성이 있는지, 처음엔 맛없다고 말하던 유양도 그 다음엔 곧잘 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