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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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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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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기의 모습
정은이가 엄마 닮았구나

1. 소개2. 생애3. 여담

1. 소개[편집]

김정일의 후처 중 한명이자, 김정은의 어머니. 슬하에 김정은, 김정철, 김여정이 있다.

오사카로 건너간 제주도 출신 조선적 아버지 고경택의 7째로 1953년 6월 16일, 일본에서 태어났다. 고씨종문회 회장의 확인으로 본관이 제주 고씨 영곡공파라고 한다.[3] 일본에서 지낼 때의 통명은 다카다 히메(高田 姬) 고전희 또는 고용자이며 1962년 북송이후 이름의 '자'를 '희'로 변경한 것으로 보인다.[4] 기사

2. 생애[편집]

어린 시절을 오사카 이쿠노구 이카이노에서 살았다. 아버지 고경택이 여자 관계가 복잡했던 탓으로 여러 이복남매가 있었는데, 특별히 사상적인 이유 없이 여자문제와 밀항 사업 등 범죄행위를 해 일본에서 더 이상 생활할 수 없게 되자, 그 당시 조총련이 추진했던 재일교포 북송 운동에 동참해, 고용희가 10살 때였던 1962년 10월 21일 제99차 귀환선을 타고 고용희를 포함해 아버지의 부인 중 한 명인 어머니 이맹인과 낳은 자식 3명만 데리고 함경북도 명간군에 정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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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화보잡지 "조선" 73년 3월호에 실린 고용희 일가족의 모습.

평양음악무용대학 무용과를 졸업하고 1971년 만수대 예술단 무용수로 활동하고 이름을 고용희로 개명했다. 1972년에 공훈배우의 칭호를 받는다. 73년 만수대 예술단이 일본 공연을 성황리에 마치면서 일본 출신이던 고용희가 주목을 받아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74년 김정일이 후계자로 공식선출된 이후부터 권력강화를 위해 측근들과 비밀연회를 가졌는데 이 때 이후의 기쁨조의 원조격으로 만수대 예술단에서도 가장 미모와 재능이 뛰어난 여성들을 공연조로 뽑아 연회에 참석시켰고 이 때 함께 뽑힌 고용희가 김정일의 눈에 들어 김정일의 옆자리에 앉는 고정 파트너가 되었고 이후 함께 드라이브를 하면서 밀회를 즐기는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이 때 차안에서 즐겨 들었던 한국 노래가 심수봉의 '그 때 그 사람'. 이후에도 고용희는 이 노래를 자주 불렀다고 한다.

1976년 동거를 시작해 성혜림의 뒤를 잇는 김정일의 비공식 부인이 된다. 이후 유방암에 걸려 프랑스에서 치료를 받다가 2004년에 사망하였다. 그녀의 사후에는 김정일의 개인비서였던 김옥이 사실상 4번째 부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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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김정은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고용희.

야행성에 수면이 적은 김정일의 생활패턴에 맞추어 잠도 줄이고 항상 서류정리나 잔심부름 등을 성심껏 도맡아하면서 내조했고, 김정일의 주변 부하들에게도 항상 친근하고 다정하게 대해 주변 평판이 좋았다고 한다. 심지어는 자신 외에 김정일의 총애를 받는 김옥과는 거의 친자매처럼 지냈으며, 자신이 병약해지자 김옥에게 "내가 죽으면 나 대신 장군님과 자식들을 보필해 달라."고 부탁할 정도로 질투심이나 욕심없이 오로지 내조에만 신경쓴 전형적인 현모양처라고. 당연히 김정일은 이런 고용희를 매우 신뢰했기 때문에 그녀의 조언이나 부탁도 잘 받아들였고, 해외에 다녀오는 것도 자유롭게 허락했다.

그녀를 사모님이라고 부르면서 무려 13년 동안 김정일 가족의 밥상을 책임져 왔고, 그때의 경험으로 김정일의 후계자가 김정은이 될 것이라는 걸 유일하게 맞췄던 일본인 요리사 후지모토 겐지는 김정은과 함께 지냈던 시간을 회고하면서 쓴 책 북한의 후계자 왜 김정은인가?'에서 고용희가 김정일의 총애를 받을 수 밖에 없었던 일화 하나를 공개했다.

어느 날 함흥의 72호 초대소에서 김정일이 연회를 가지고 있는 와중에 김정일을 경호해야 하는 군관이 대담하게도 경계 근무 중에 몰래 빠져나가 술을 마시다가 그 모습을 김정일에게 걸렸다고 한다. 김정일이 지금 술 마시냐고 혼을 내자 얼마나 취한 것인지 그 군관은 김정일의 이마에 총구를 겨눴고 너무 놀란 김정일은 '내 목숨도 여기까지인가'라고 생각하면서 굳어버렸다. 그 일촉즉발의 사태에서 고용희가 군관을 뒤에서 공격해 총을 떨어뜨리게 했다고 한다. 그 사이에 다른 경비원들이 몰려와 그 문제의 군관을 사살해 김정일을 구해냈다고. 이후 김정일은 측근들과의 비밀 연회에서 자주 고용희에게 이 사건을 거론하며 고마움을 표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 김일성이 죽었을 때 멘붕한 김정일이 자기 집무실에 앉아 있었는데, 어떤 이유에선지 집무실 책상 위에 권총을 올려놓고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고 한다. 고용희가 그 모습을 보고 기겁을 해서 얼른 권총을 치워버린 일도 있었다고. 이 때문에 고용희가 수술을 받을 때는 김정일이 고용희를 걱정하면서 울음을 터트릴 정도로 둘의 관계는 좋았다.

후지모토의 회고에 따르면, 그녀는 일본 배우 하라 세츠코를 닮았다고 한다. 일본에서 태어난 영향으로 김정일이 없을 때 자신에게 일본의 제도와 문물을 칭송하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하며, 요리사인 자신에게도 공손하게 대하며 고향에도 방문할 수 있게 돕는 등 자상하고 배려깊은 성격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후지모토는 '북한의 후계자 왜 김정은인가?'에서 고용희의 사망에 관해 언급하면서 자신은 아직까지도 그 사실을 믿고 싶지 않다고 적어놓기까지 했다. 또한 메기 요리와 강냉이 국수를 자주 만들었는데 요리 솜씨가 매우 뛰어났다고 한다.

고용희에게는 고용숙이라는 여동생과 고동훈이라는 오빠가 있는데, 김정은은 스위스 유학시절 이모인 고용숙의 보살핌을 받았다. 하지만 2001년 고용숙은 미국으로 망명하여 성형수술을 한 뒤 이름도 바꾸고 미 정부의 보호를 받으며 살고 있다고 한다.

고동훈은 ‘박칠성’이라는 가명으로 스위스 주재 북한대사관에 나와 근무했다. 북한 외교관 출신의 탈북자 고영환 씨는 “그때 박칠성을 본 적이 있는데, 북한 외교관들이 그에게 많이 굽신거렸다. ‘김정일의 가족이다. 집안 사람이다.’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녀가 북한 사회에 끼친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면 그녀가 김정일의 부인이 된 후 북송 재일교포에 대한 북한 내부에서의 대접이 그나마 나아졌다는 점이다. 1970년대 김정일이 권력을 장악하고 수령 우상화가 진행되던 암흑기인 북한 사회에서 권력층에 있던 북송교포들도 간첩 등으로 몰려 숙청되었고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가는 경우가 많았다. 할아버지가 북송 재일교포였던 조선일보 기자 강철환 역시 할아버지가 숙청되고 하루아침에 가족들과 요덕 수용소로 끌려간 케이스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의 등장 이후 재일교포들의 정치범수용소 행이 상당히 줄어들었고 정치범수용소에 있던 사람들도 풀어주는 등 그나마 대접이 좀 나아졌다. 이는 물론 그녀 하나 때문만은 아니고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꾀하기 위한 측면이 더 크다고 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좋아진 것은 아니며, 여전히 적대계층 취급을 받는 것은 여전하다.

그녀의 아들 김정은이 왕위를 계승한 후 그녀에 대한 우상화 작업을 건드리는 정황이 포착되었다. 유튜브에 고용희를 찬양하는 다큐멘터리가 업로드된 것. 하지만 문제의 다큐멘터리는 며칠 만에 신속히 삭제되었다. 아직까지 대대적인 우상화 작업은 포착되지 않고 있으나 귀추가 주목되는 부분이다.

3. 여담[편집]

오랫동안 남한 언론에서는 이 인물의 이름을 '고영희'라고 소개해 왔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고희'가 맞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혁명열사릉에 있는 이 인물의 묘비명이 고용희라고 적혀 있었던 것. 정부에서도 이를 확인했다. 그리고 고용희 여동생의 남편 '리강'이 KBS기자와 인터뷰를 했는데 고용희가 맞으며 자신의 부인 이름도 고영숙이 아니라 고용숙이라고 말했다. 얼굴 용(容)자 돌림이라는 것. 사실 과거 김정은을 김정운으로 알고 있던 것과 다르지 않은 상황.
게다가 고용희는 위와 같은 사유로 인해 북한 대중에게 이름이 잘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니 구전으로 알려지면서 이름이 오기되지 않았을까 생각되기도 한다. 고영희라는 이름이 '째포'로 잘 알려져서 후에 우상화를 진행하며 고의로 고용희라고 이름을 다르게 하지 않았느냐는 주장도 있지만, 사실 1972년 로동신문에 이름이 실렸을 때도 '고용희' 라는 이름으로 나왔던 점을 보면 그냥 한국에서 실수한 듯하다. 그녀의 곁에서 일했던 후지모토 겐지 또한 일본인이다보니 한국어 발음 중 'ㅓ'와 'ㅗ', 'ㅕ'와 'ㅛ'를 헷갈려서 잘 모르는 모양이다. 게다가 북한의 어,오,여,요 발음과 남한의 발음이 다르기도 하다. 북한의 ㅓ와 ㅕ 발음은 남한의 발음보다 입술을 더 동그랗게 오므려 남한 사람이 들으면 ㅗ와 ㅛ 발음처럼 들린다. 또한 북한에서는 일본어처럼 ㅜ와 ㅡ의 발음 구분이 점점 없어지고 있는 상태다. 일단 통일부에서는 '고영희'를 고수하겠다고는 했으나 연합뉴스나 YTN, MBN 등에서는 이미 표기를 '고용희'로 변경하였다. 나무위키에서도 '고용희'로 변경하는 것에 대한 토론에서 이의 제기가 없었기 때문에 '고용희'로 수정되었다.

다만, 김정남과 외가 친척 관계로, 한때 북한에서 로열 패밀리 대우를 받았던 이한영은 본인 수기인 '김정일 로열패밀리'에서 고용희를 기존처럼 '고영희'라고 서술했다. 출판사가 교정을 한 것인지, 아니면 이한영이 북한에 있었을 때에는 고영희였지만 나중에 이름이 바뀐 것인지는 추가바람.

현재 김정은에게 고용희의 출신성분은 큰 약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여담이지만, 북한에서는 고위층 인사를 제외하고는 남조선계, 즉 남한 지역 출신 집안을 좀 더 하위계층으로 분류한다. 게다가 재일교포 출신은 하위계층임과 동시에 일반 주민에게까지 '일제의 자본주의 물을 먹은 간첩같은 사람들' 정도로 이미지가 안 좋다. 그런데 고용희는 남조선 집안(제주도)+재일교포로서, 최악의 출신성분을 가지고 있다. 즉, 김정은 역시 그 피를 타고난 것이다. 게다가 고용희는 김일성이 인정하지 않은 며느리다. 다시 말해서, 김정은에게는 김일성 집안인 백두혈통의 순수한 피가 흐르지 않는다. 이미 이것은 북한 전 주민들에게 소문이 나서, 정통성에 큰 타격을 입고 있다.

또한 고용희의 아버지, 즉 김정은의 외할아버지인 고경택이 친일파였다는 극비문건이 발견되었다.기사 이것은 제주도+재일교포 정도와는 비교가 안 되는, 북한체제의 특성상 절대 완화시킬 수 없는 치명적인 약점이다.

그런데 2015년 고용희의 여동생 고용숙이 탈북자들을 상대로 고소미를 시전하며 변호사로 강용석을 선임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보세요 너님도 북한 나와서 미국으로 망명해서 성형 받고 미정부 보호받으며 아무렇지 않게 살고 있잖아요. 지도 똑같이 살아가고 있으면서 뭔 명예훼손이야... 그런데 정작 탈북자들의 주소를 알 수 없는[5](...) 상황이 4개월이나 계속되었고 결국 법원은 2016년 3월 소장각하명령을 하렸다.
2018년 4월 14일 20대 젊은시절 사진이 공개됐다.관련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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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75년, 만수대 예술단원 당시 찍은 사진.[2] # [3] 그녀의 할아버지 고경택의 허묘를 비롯한 김정은 외가의 가족묘가 제주도에 남아 있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4] 북한은 김일성이 해방 이후 북한 여성의 이름 끝에 '자()'를 붙이지 못하게 했고, 이미 를 쓰던 여성들도 개명하라고 지시했다. 일제의 잔재라는 이유 때문.[5] 민사소송에서 피고의 주소는 원고가 파악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