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부고속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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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고속도로 | ||
노선 번호 | 1번 | |
기점 | ||
종점 | ||
연장 | 415.4 km[2] | |
개통일 | ||
관리 | ||
왕복 차로 수 | 4차로 | |
6차로 | 구서 - 양산JC | |
8차로 | ||
10차로 | ||
12차로 | ||
구조 | ||
주요 경유지 |
경부고속도로 개통이 되고 얼마 안되었을때의 사진. 저 버스는 지금은 금호고속에 인수합병된 구 유신고속[6](이후 코오롱고속으로 변경) 소속의 차량이다. 새 마크만 보고 한진고속 소속 차량으로 오해할수 있으나 당시 한진고속은 차체에 '한진고속버스'로 표기했다.
한국도로공사 제16회 길 사진 공모전 은상 수상작인 "판교의 하루" 작품.
출처 : Studio Alux, 라이선스 : CC BY-NC 4.0
경부고속도로 중에서도 교통량이 손에 꼽힐 정도로 많은 서울시 고속화도로 구간 포함 양재IC → 천안IC 구간 주행 영상이다.[통계]
1. 개요[편집]
삼천만 온 겨레가 힘과 뜻을 한데 뭉쳐
이 나라 근대화의 길로 줄달음질 이 해는 왔네
보아라 저 험산 뚫고 뻗어가는 고속도로
대국토 건설의 맥박이 뛴다-건설의 노래 - 듣기
국토의 대동맥[8]
1번이라는 번호에 걸맞는 대한민국 고속도로의 중추 노선
대한민국의 산업화와 근대화의 상징
대한민국에서 두 번째로 완성된 고속도로로[9] 부산광역시 금정구에서 시작하여 서울특별시 서초구를 연결한다.[10]
대한민국에서 가장 교통량이 많고 단일 노선으로 총 연장이 가장 긴 고속도로다. 종축과 횡축이 적절히 혼합되어 대한민국의 국토를 대각선으로 완전 가로질러 통과하는 선형이기 때문에 서해안고속도로, 남해고속도로, 동해고속도로 등의 해안 노선을 제외하면 주요 축선으로 활약하는 웬만한 내륙 통과 노선들은 대부분 경부고속도로와 접속하게 되어 있을 정도니,[11] 단순히 교통량이나 역사로만 볼 것이 아니라 실제 도로 연결망 차원에서 생각해 보아도 '대한민국의 도로 교통의 대동맥'이라 불릴 자격이 충분히 있다고 볼 수 있다.[12]
노선 번호는 1번인데, 2001년 8월 25일 노선 번호 체계가 변경된 후에도 기존의 번호인 1번을 그대로 존치하게 되었다. 한국도로공사의 설명에 따르면 국토의 대동맥이라는 상징성을 감안하여 기존 번호인 1번을 존치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실제 도로 선형상으로도[13] 개편된 노선 번호를 굳이 적용하여 바꾸기 애매한 점도 한 몫을 한다고 볼 수 있다. 경부고속도로의 특수한 선형 때문에 종축과 횡축 방향을 기준으로 노선 번호를 매기는 현행 고속도로 노선 번호 체계에 따라 단일 노선으로 번호를 새로 부여하기 사실상 불가능했으며, 지금 상황에서 굳이 노선 체계에 따라 번호를 매긴다면 구간별로 번호들이 모조리 쪼개져 버려서[14][15] 경부고속도로의 상징성은 물론이고 명칭마저도 사라졌을지 모른다.[16]
한편, 남북통일이 되어 평양개성고속도로 등과 연결되고 평양~신의주 구간에도 고속도로가 들어설 경우 경부고속도로의 명칭이 부의고속도로(釜義高速道路, 부산광역시~신의주시) 등으로 바뀔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서울시내에서 두 고속도로가 완전히 직결될 가능성은 매우 낮기 때문에, 노선번호만 1번으로 공유하고 명칭 자체는 경부고속도로, 경의고속도로 등으로 각자 따로 유지될 가능성이 더 높긴 하다.[17] 동일한 번호를 공유하지만 노선명이 구분되는 35호선 중부고속도로+통영대전고속도로의 경우처럼.[18]
▲ 부산방향 양산IC 부근.
서울~대전 구간은 1번 국도, 대전~경주 구간은 4번 국도, 경주~부산 구간은 35번 국도 등을 대체 도로로 이용할 수 있다.
이 고속도로의 개통으로, 대한민국에 고속버스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19]
1.1. 개통 시기[편집]
경부고속도로 개통 당시 영상.[20]
2. 구간[편집]
자세한 내용은 경부고속도로/구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이런 S자 모양의 선형이 탄생한 이유는 경부선 철도와 남동임해공업지구 때문으로, 후에 경부선과 경부고속도로의 수송량을 보완하기 위해 경부고속철도와 중부고속도로, 중부내륙고속도로, 대구부산고속도로[21], 당진영덕고속도로, 용인서울고속도로 등의 다양한 철도노선과 고속도로가 지어지게 된다. 근데 이래도 모자라서(...) 중앙선 철도를 준고속철도로 개량하고 이와 연계되는 동해선 철도를 복선전철화 중이며 중부내륙고속도로와 유사 구간을 거치는 중부내륙선 철도가 현재 건설 중이다. 또한 제2경부고속도로라고도 불리는 서울세종고속도로가 현재 공사 중에 있다.
3. 고속도로 인근 정보[편집]
수도권 구간은 고속도로 연선을 따라 포도송이처럼 신도시와 택지지구들이 줄줄이 들어서 있다. 분당신도시를 시작으로 판교신도시, 수지, 죽전, 구성, 기흥, 광교신도시, 영통, 동탄신도시, 세교신도시 등으로 끝없이 이어지며 거대한 신도시 벨트를 형성하고 있다. 그 뒤로도 천안시 60만 명, 청주시 85만 명, 대전광역시 150만 명, 대구광역시 248만 명, 울산광역시 116만 명 등 대도시들이 계속 이어져 있다.[22] 청주시와 청원군이 통합하고 세종특별자치시가 출범하기 전에는 충청북도 청원군이었다. 반대로 부산에서 서울방향으로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광역시란 점에서 제외한다면 경북 칠곡군이 서울방향에서 최초로 나타나는 군이다. 즉, 서울 대전 전 구간이 군이 아닌 시이며 경부고속도로상의 군은 옥천군 영동군 칠곡군 울주군 단 넷이다.
사실 개통 당시에는 대부분이 군이었다. 1990년대까지만해도 경부고속도로 하행방면에서 가장 먼저 나타난 군은 경기도 용인군이었고, 상행방면에서는 경상남도 양산군이었다. 용인과 양산의 시 승격은 20년도 되지 않았다. 구미시, 경산시, 경주시 등의 중형 도시와 지방 소도시(옥천군, 영동군, 칠곡군, 김천시, 영천시 등), 경부선과 연계되어 있는 포항시를 포함하면 얼추 경부고속도로 연선에 사는 사람은 서울·부산을 제외해도 1,300~1,400만 명이다.
경부고속도로라는 편리한 교통망이라는 이점 때문에 정부의 신도시 정책 및 지자체ㆍ민간 건설사들의 택지지구 개발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것. 당장 경부고속도로 연선의 수원시, 성남시, 용인시의 인구가 각각 100만 명을 넘어서고 있으며, 강남구, 서초구, 화성시(동탄, 병점권), 오산시, 평택시 안성시까지 포함하면 도합 500만여 명에 육박하는 인구가 경부고속도로 연선에 집중되어 있다. 이 때문에 수도권 구간은 출퇴근 시간대만 되면 전쟁이 벌어진다. 다른 노선은 명절이나 주말 등 특수할 때에만 밀리는데, 안성 이북은 정말 대책이 없다.
중앙정부(한국토지주택공사) 주도의 신도시보다는 민간건설사들의 무분별한 난개발 및 체계적인 개발계획 수립 없이 마구잡이로 이들 건설사들에게 건설허가를 내준 지자체(용인시 등)의 탁상행정이 이 경부고속도로 혼잡에 더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정부에서 1990년대에 분당신도시 등 1기 신도시를 조성할 당시에는 나름대로 개념있게 교통정책을 세워 분당-내곡간, 분당-수서간 고속화도로를 개통시켰고, 경부고속도로 4차로→8차로 확장도 같은 시기에 이루어졌다.
문제는 민간건설사에서 토지를 매입하여 교통대책은 나몰라라하고 만든 용인시 북서부(수지구, 기흥구) 등 기타 지역의 아파트 개발 지역들. 교통대책은 물론 심지어 학교도 안 지으려고 갖은 꼼수를 부려 아파트만 건설했고, 지자체 역시 이런 무분별한 개발 행위에 대해 체계적인 계획수립 없이 건설 허가를 남발했으며, 결국 중앙정부가 그 뒷감당을 해야 한 것이다. 역시 용인시의 난개발의 위엄.
여담으로 서울을 벗어나서 충청남도 천안시가 나올 때까지, 기초자치단체들이 변화무쌍하게 등장한다. 서울특별시 - 성남시 - 용인시 - 화성시 - 오산시 - 평택시 - 용인시[23] - 평택시 - 안성시 - 평택시 - 안성시 - 평택시 - 안성시 - 평택시 - 안성시 - 천안시. 그 이후에는 천안시 - 안성시 - 천안시가 또 있다. 평택이랑 안성이 싸우지 않은게 다행이다. [24]
4. 건설 비화 및 역사적 의의[편집]
1950년대 중반 도로기술 공무원들이 미국의 도로 및 도로공사를 연수 시찰하면서 미국의 고속도로를 처음 접하고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나, 국내 자동차 보급률이 안습한 상황에다가 천문학적인 예산 등으로 고속도로 건설은 꿈도 꾸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한편 1950년대 후반부터 국토종합개발계획의 필요성이 정부 내에서 논의되기 시작하여 1960년에 이르면 국토건설본부가 설립되고, 장면내각에 의해 실업률 저하 등을 목적으로 하는 국토개발사업이 실시되었다.[25] 이에 국토계획기본구상(1963년 7월), 국토건설종합계획법(1963년 10월 14일) 등을 통해 국토종합개발을 위한 제도적 기틀을 마련하는 한편 국토개발사업을 계속 이어나갔다. 그러나, 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동안 과거 일본제국처럼 철도 중심의 개발을 하는 바람에 사회 전반에서 도로, 고속도로에 대한 요구가 나오게 된다. 교통은 한 국가의 경제 대동맥이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2차경제개발계획에서 철도예산이 도로예산의 3.5배로 책정되는 등 정책 방향의 개선은 이루어지지 않았다.[26] 그러나 도로의 향후 수요 증가량, 전망이 여객, 물류 두 부분면에서 철도를 압도한다는 전망들이 속출하면서[27] 정부도 전향적으로 이러한 요구와 전망을 수용했다. 이에 1967년, 국토계획기본구상이 수정 보완되어 대국토건설계획서(안)이 나왔고, 경인 6차선 도로(경인고속도로) 계획 등이 최초로 정부 문서에 명문화되기에 이르게 되었다.
한편 박정희 대통령은 1964년 12월 서독 방문 중 독일의 속도 무제한 고속도로 아우토반를 목격한 후 본격적으로 고속도로를 건설하기로 마음 먹었다고 한다. 이후 1967년 12월 15일에 '국가기간 고속도로 건설 계획 조사단'이을 발족시켰다. 의욕적으로 정부에서 이걸 짓겠다고는 했는데, 문제는 재원 조달에 앞서서 도대체 얼마가 필요한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나마 공신력이 있어보이는 곳들에 예산안을 내놓게 했는데, 한몫 챙기고 싶었던 건설부가 650억원(후에 450억으로 재조정), 현대건설이 380억원(혹은 280억원), 육군 공병감실 490억원, 경제기획원 기권, 서울특별시 180억원(?!)[28]으로, 최종안은 아무래도 해외 고속도로 공사 경험도 있는 현대건설 안에 가까운 330억원으로 결정되었다. 실제 비용은 이보다 100억원 더 들은 430억원이었다.#
이렇듯 고속도로 건설 자체가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초유의 거대한 사업이었기 때문에 각계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고 야당의 비판이 쏟아졌다. 당시 야당은 지역 편중론 등을 들면서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반대했다.[29][30][31] 설상가상으로 1967 - 1968년에는 남부 지방에 극심한 가뭄이 들어, 1968년 당시 야당에서는 경부고속도로 건설비를 가뭄 대책비로 전용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 때의 가뭄은 한해지구(旱害地區)가 선포되고 영호남 통틀어 장기결석 학생이 20만명, 전국적으로 이재민 돕기 운동이 벌어질 정도의 국가적 재난이었다.[32] 참고로 당시의 한해, 즉 가뭄은 영호남을 아울러 발생한 것이었고 야당의 한해대책비 편성 요구도 당연히 영호남을 아우른 것이었다. 이처럼 많은 비판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정부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추진하였다.
어쨌거나 많은 반대와 우려를 무릅쓰고 경부고속도로는 건설되었다. 과거 정권의 치적 중에서도 유독 자주 거론되는 편인데, 이는 그 시기의 개발 정책을 대표하는 기념비적 구조물로서 단순한 고속도로 이상의 의미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경부고속도로는 비록 최초로 건설된 고속도로는 아니지만 먼저 완공된 고속도로는 인천과 서울을 연결하는 정도였던 데 반해, 국토를 종으로 꿰뚫는 한국의 대동맥이며 고속버스의 탄생과 함께 전국을 반나절 생활권으로 만들어 한반도라는 공간을 심리적으로 축소시켜 준 고속도로다. 그래서인지 강준만은 <한국 현대사 산책> 1970년대 편에서 전태일과 함께 경부고속도로를 '1970년대를 상징하는 두 가지 중 하나'라고 표현하기도 하였다. 전태일이 70년대 산업화의 '암(暗)'이라면 경부고속도로는 '명(明)'을 상징하는 것이다.
고속도로 개통 후에도 크고 작은 비판은 계속되었는데, (자동차가 부유층의 전유물이었던 시절이고[33] 물자도 별로 없었으니[34]) 경제에 즉시적인 보탬이 되지는 않았다는 주장이 있다. 수송량이 유의미한 수준으로 올라선 건 70년대 후반이고, 80년대 초중반이 돼서야 경부선을 실질적으로 대체하였다는 것이다. 또 기술 부족과 타이트한 공사 일정 때문에 날림 공사가 많아 도로를 고치는 데만 짓는 만큼에 육박하는 비용이 들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후술되어 있지만 경부고속도로는 아스팔트 포장으로 건설되었기 때문에 보수 비용이 많이 들어갔다. 이런 비용 문제 때문에 80년대 중반부터는 콘크리트 포장으로 고속도로를 건설하고 있는데, 소음, 승차감, 사고위험, 타이어 손상 등의 문제 때문에 콘크리트 고속도로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많다.
경부고속도로에 대한 비판적인 주장이 있지만, 사회간접자본 투자 사업은 그때 그때 필요한 순간 뚝딱 해결하거나 손쉽게 고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기획을 하는 것이 우선시되는 경우가 많으며, 경부고속도로 건설 또한 1960년대 당시의 대한민국의 사업 수행 능력치를 넘어서는 감은 있더라도 초고속 성장을 염두해 두고 국가의 미래를 위한 개발로서 정확한 방향을 잡은 것에는 큰 점수를 줘야 했었다.[35][36] 수송량 같은 경우는 절대적인 수치로는 당연히 적었고 별다른 변화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국민 평균 소득 수준에 비해 자동차 보유세 및 유류세를 엄청나게 매겨서 일반인의 자가용 보유 자체가 불가능한 시절이었기 때문에 1970년대 경부고속도로 영상이나 사진들을 보면 고속도로에 거의 트럭 아니면 고속버스들 위주로 다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애초에 경부고속도로 건설 목적 또한 소수의 자가용 운전자들의 통행 편의가 아닌[37] 버스와 트럭들이 빠른 시간내에 목적지에 도달하여[38] 국가의 인적 및 물적 교류의 첨병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도로를 유지·보수하는 비용이 건설 비용을 육박하기에 손해라는 지적들 또한, 시공에 있어서 완벽을 기하지 못해 추후 사회적 손실이 발생한 점은 아쉽긴 하지만, 당시 기술력과 자본이 부족한 상황에서 일일이 따져가며 시공에 완벽을 기하려다가는 티스푼 공사 취급 받으며 일정이 차일피일 미뤄지다 베이퍼웨어가 되어 이도저도 아닌 흉물로 남아 더 큰 사회적 손실이 되기 쉬운 상황이었던데다가, 경부고속도로 개통으로 인한 물적 교류 증대와 수출 산업 육성 등으로 엄청난 외화를 벌어들이며 국가 경제가 급속도로 발전하는데 지대한 파급효과를 일으킨 것까지 생각해 볼 때 추후 발생하는 유지 및 보수 비용은 무조건적인 손실이라기 보다는 고속 성장을 위한 불가피한 기회비용으로 보는 편이 적당했다. 이보다 거리가 짧은 멕시코 95D번 고속도로의 쿠에르나바카 ~ 아카풀코 데 후아레스 구간의 공사기간이 39년이나 걸렸고[39], 지금도 부활절, 크리스마스 연휴 때 말고는 텅텅 비어있다시피하며, 아직도 자동차 및 장거리 이동은 부유층들의 전유물이라는 것과 게레로주 일대가 멕시코에서 가난한 주 중 하나인데다 지역 관리들이 부패하고 정보 확산이 쉽지 않으며 마약 카르텔에 장악되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쉬울 것이다.
경부고속도로의 공사 중 희생된 사람들은 공식 집계 77명, 비공식적으론 수백 명이다. 건국 이래 최대 건설 사업이었던 만큼 희생자도 많았을 수 밖에 없었으며,[40] 이들의 노고가 없었다면 지금의 경부고속도로도 없었을 것이다.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한 위령탑이 충북 옥천군 금강휴게소 부근에 있다. 그 이유는 충북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에서 옥천군 청성면 묘금리까지 이어지는 대전공구 70㎞ 구간이 난공사 구간이었고 특히 가장 악명 높았던 공사구간인 당재터널(現 옥천터널)도 이 근방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영동터널은 아직도 옛 토목 기술을 느낄 수 있고, 내부에 요철이 있다. 하지만 이 구간도 확장으로 인해 폐쇄되었으나, 최근 한 마을 진입로와 국도 진입로와 서로 연결하여 일부만 통행이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당재터널(옥천터널)
옥천군 금강휴게소 동남쪽 28㎞ 지점에 있는 당재터널 공사 지역은 토사로 된 퇴적층이었다. 발파 작업을 하면 토사가 쏟아져 내리기 일쑤였다. 처음 20m가량 파고들어갔을 때는 낙반사고로 3명이 숨지고 1명이 중상을 입었다. 인근 주민들이 신령이 깃들었다고 믿고 있던 느티나무를 벤 군 책임자가 사고를 당하자 많은 작업자들이 일당의 몇 배를 더 주겠다는 시공사측의 제안에도 불구하고 공사를 내팽개치고 도망치기도 했을 정도로 마의 공사 구간이었다. 결국 시공사인 현대건설이 흑자를 포기하고 공기를 맞추기 위해 빨리 굳는 조강시멘트를 공사 현장에 전격적으로 투입하여 공사 속도를 올려서[41] 경부고속도로 개통 예정일 이틀 전에 겨우 완공했다.[42]
당시에는 그렇게 어렵게 뚫었던 당재터널은 중간에 옥천터널로 이름이 바뀌며 30년 넘게 경부고속도로의 현역 구간으로 활약하였다. 아치형의 터널 형태로 경부고속도로를 한번이라도 타본 사람에게는 가장 인상적으로 기억에 남는 구간 중 하나다. 2002년 선형 개량 구간이 개통되면서 옥천터널 구간은 고속도로 구간에서 해제되었다. 현재 옥천터널의 하행선 구간은 지방도인 금강로의 터널 구간으로 활용 중이고, 터널 끝구간에 아치형의 구조물이 함께하는 상행선 구간은 김치제조업체에서 옥천군으로부터 임대받아 사시사철 습도와 온도 변화가 크지 않고 안정적인 터널의 특성을 이용하여 김치 숙성 저장고로 사용 중이고 최근에 상행선 구간에서 영화 '터널'[43]을 촬영 하기도 했다.
5. 개통 이후[편집]
경부고속도로가 처음 개통했을 당시에는 "서울에서 아침을 먹고 부산에서 점심을 즐길 수 있다!"는 말이 생겼다.
사실, 이미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기 이전 1969년에 이미 철도 경부선이 있었고 서울 - 부산은 최속 4시간 45분 거리로 단축되긴 했었다. 단지, 경부선이 제일 빠른 수단이고 기차편이 몇 편 없었을 뿐이다. 실제로, 이 말이 현실화가 된 것은 2010년부터 경부고속철도 경부고속본선이 전면개통이 된 이후부터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서 KTX가 만들어진 이후부터는 더욱 빨라지게 되면서 아침을 늦게 먹는 현대인의 감각으로도 8시 쯤에 아침을 먹고 9시 쯤에 서울역으로 가서 기차를 타고 12시 쯤에 부산으로 도착해서 점심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개통 이후 유지 보수에 많은 비용이 들어서 고속도로 건설을 반대했던 야당 측으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 경부고속도로가 유지 보수 비용이 많이 드는 이유는 아스팔트로 건설했기 때문이다. 아스팔트 고속도로는 콘크리트 고속도로에 비해 승차감이 좋고, 소음이 적으며, 타이어의 마모와 손상을 현저히 줄여주고, 운전자에게 눈부심을 주지 않아 안전운행에 도움이 되고, 운전 시 피로감과 사고 위험을 덜어주는 등 많은 장점이 있지만, 유지보수 비용이 많이 든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사계절의 연교차가 큰 기후에서 아스팔트는 겨울에는 결빙 및 염화칼슘으로 파손되기 쉽고 여름에는 녹아내리기 쉬워 유지 보수 비용에 엄청난 비용이 들어간다. 90년말까지 경부고속도로 보수비는 약 1천5백27억원으로 건설비의 4배 가까운 비용이 들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경부고속도로를 비롯하여, 경인고속도로, 호남고속도로, 영동고속도로 등 초장기에 건설된 고속도로들은 모두 아스팔트 포장으로 건설되었다.
그러나 유지 보수 비용 문제 때문에 80년대 중반 88올림픽 고속도로 이후 건설된 모든 고속도로는 콘크리트 포장으로 건설되었다. 그러나 콘크리트 포장 고속도로는 소음, 승차감, 타이어 마모, 눈부심, 사고 위험 등 여러가지 문제점이 있기 때문에 비용이 더 들더라도 아스팔트로 고속도로를 지어야 한다는 주장도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건설 당시에는 서울특별시 한남대교 남단이 기점이고 부산광역시가 종점이었으나, 2001년 8월 전국 고속도로 체계를 정비하면서[44] 공식적으로는 부산광역시(구서 나들목)가 기점이 되었으며, 2002년부터는 종점이 한남대교 남단에서 양재 나들목으로 바뀌고 양재 나들목 북쪽(양재~한남) 구간을 경부고속도로에서 제외시켜 서울특별시의 고속화도로인 경부간선도로로 지정되어 관리하고 있다.[45] 사실 서울시 구간이 단축되어 양재 나들목으로 종점이 변경된 것은 판교IC를 출퇴근 경로로 이용하는 성남시 분당구 주민들이 통행 요금 징수가 부당하다며 형평성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하며 통행료 폐지 운동을 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의 판교 나들목 통행료 징수 논란 문서를 참조 바람.
경부고속도로가 처음 건설되었을 당시만 해도 자가용은 부유층의 전유물이었지만, 이후 국민소득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80년대 중반에는 각 가정에서 자가용을 보유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경부고속도로 교통량도 폭증했다. 특히, 명절 때는 엄청난 교통체증을 유발했는데 1980년대말 ~ 1990년대 초 명절 때에는 서울 - 부산의 소요 시간이 10시간 이상, 심할 때는 20시간이 훨씬 넘는 경우도 자주 있었다.
서울에서 호남으로 귀향하는 귀성객들도 대전까지는 경부고속도로를 타다가 회덕분기점에서부터 호남고속도로를 탔기 때문에 서울-대전 구간의 정체는 특히 극심했다. 특히 설 명절의 경우 눈이 내려 교통체증이 더욱 심해지는 경우가 많았다. 거대한 주차장이 된 경부고속도로에 갇혀 요즘만큼 성능이 좋지는 않은 라디에이터 열기로 몸을 녹이면서 밤을 지새웠던 경험을 했던 사람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대체 도로는 고사하고 왕복 4차로[46]였는데, 자동차 숫자는 대책없이 늘어났던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까지는 서울-부산이 22시간에 달해 거의 하루를 꼬박 고속도로에서 보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며, 경부고속도로 서울-대전 구간이 확장된 1990년대 중후반에도 17시간이라는 만만치 않은 크고 아름다운 소요시간을 자랑했었다. 그나마 4차로여서 이 모양이었지 1994년까지도 여전히 전 구간 왕복 2차로였던 영동고속도로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경부고속도로의 극심한 체증을 완화하기 위해 중부고속도로를 시작으로 대체 고속도로들이 건설되었고, 경부고속도로도 지속적으로 확장되어 현재 극심한 체증은 많이 줄어들었다. 1987년 12월 서울-대전 구간의 대체 고속도로로 중부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서울-천안 간 경부고속도로의 체증이 다소 완화되었다. 그러나 경부고속도로와 중부고속도로가 합쳐지는 남이분기점에서 극심한 정체가 발생했다. 2000년대 들어서 중부내륙고속도로와 논산천안고속도로가 뚫리면서 교통량 분산이 많이 되었다. 오늘날에는 경부고속도로를 꼭 이용하지 않더라도 영남 내륙지방으로 갈 때 이용하는 중부내륙고속도로+당진영덕고속도로<청주-상주 구간>, 호남 서해안 지방으로 갈 때 이용하는 서해안고속도로, 충남 내륙지방으로 갈 때 이용하는 논산천안고속도로+당진대전고속도로 등의 강력한 대체루트들이 포진해 있다.
그래도 경부고속도로는 특히 명절때는 정체구간이 서울-대전일 만큼 제일 길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다른 고속도로를 타는 것을 추천한다.
경부고속도로에는 특이하게 콘크리트 노면에 중앙분리대가 없는 구간이 네 구간이 있었다. 하나는 죽전휴게소~신갈분기점 구간, 그리고 다른 하나는 성환활주로 구간, 3번째는 김천 분기점 서측에 위치한 김천 활주로 구간, 마지막 하나는 저 남쪽에 있는 통도사 나들목-언양 나들목 사이 구간이다. 이 4곳은 비상시 활주로로 쓰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곳이다.[47] 이들 비상활주로가 생기게 된 이유는 유사시 군사용으로도 사용할 목적도 있었겠지만, 건설 당시 항공관제가 지금에 비해 발달이 미미한 상황에서 혹시 모를 불시착에 대비한 측면이 더 강하다고 볼 수 있다.[48] 모든 비상활주로 끝에는 항공기 계류장이 있고. 현재 이들 비상활주로는 모두 해제된 상황. 물론 일부 비상 활주로의 계류장은 현재 헬기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게다가 성환활주로 구간은 북천안 나들목을 만들면서 사실상 완전히 기능을 상실했다. 하지만 아직도 교통안내에는 꾸준히 거론되고 있다.
5.1. 사족 : 만약에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지 않았다면?[편집]
사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우선순위 문제는 한때 논란거리다. 이는 주로 1967년 IDA(국제개발협회)에서 종단노선보다 서울~강릉간/포항~광주간 동서축 고속도로의 건설이 시급하다고 진단한 데 기인한다. 이러한 것이 가능한 것이 경부축은 당시에도 복선철도와 전국에서 양호한 인프라를 가졌기에 나온 주장이였다. 특히 제 3·4공화국에 비판적인 이들은 이를 근거로 경부고속도로가 아닌 동서축 고속도로 건설이 앞섰다면 현재와 같은 극심한 영호남 불균형이나 수도권 집중현상 없이 한국 경제가 균형있게 발전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강릉은 부산 못지 않은 대도시로 성장했을 것이고, 동서축상에 있는 광주와 대구, 목포와 포항이 서로 대등한 위상을 점하고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실제로 국회 속기록에 의하면 김대중 당시 국회의원은 인천~서울~강릉 간 고속도로와 남해고속도로의 경우 현재의 단절된 모습이 아닌 포항~부산~창원~순천~목포를 한번에 잇는 식으로 동해안과 서해안 관통 노선을 포함하여 중부, 영남, 호남, 영동, 동해, 남부, 경인에 7개 고속도로를 권역별로 짓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한편, 위 주장을 반박하는 측에서는 서울-강릉 고속도로는 대한민국의 지형적 위치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판단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대한민국은 극도의 동고서저의 지형으로 이루어져 있어 강릉권역을 개발하려면 좁고 긴 구역으로 인해 도로의 비효율성은 극대화된다. 실제로 강릉의 동-서간 평야 폭은 20여 키로를 넘지 못한다. 또한 물류의 유통을 위해 태백산맥을 넘어 가야 하기 때문에 수송에도 적합하지 않다.[49] 더불어 산악지역의 고속도로 건설은 장기화 될 뿐더러 치솟는 비용을 감당하기 힘들다. 현재는 태백산맥을 넘을때 대관령을 관통하는 터널을 이용하지만 이전에는 진부령 고개를 넘었다는 것을 상기하자. 리얼 이니셜D [50] 즉, 당시 수준으로는 개발 경제성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에 개발 우선순위에 뒤쳐진다. 또한 영동고속도로의 타 구간 확장비용=대관령 구간 건설비용이라고 하니...
영호남간의 경제격차에 대해서도 역사가 지난 현재에서야 비난을 받는 것이지 농업/경공업 중심의 국가경제상 상대적으로 호남은 부촌이었다는 주장도 있다.[51] 당시 영남은 뚜렷한 인프라 설비가 갖춰지지 않은 상태였으며 이후 포항제철소, 울산 자동차/화학 공단, 창원 산업지구 등이 갖추어 지면서 격차가 역전된 것이 었다는 주장이다.
일부에서는 한술 더 떠서 후진국의 무능한 경제 관료들이 서방의 권위있는 개발 기관의 말을 듣지 않아 오늘날의 참상을 만들었다는 식의 주장을 펴기도 한다. 하지만 선진 공여국이 계획 입안-후진 수원국이 실행이라는 ODA(공적개발원조)의 기존 방식은 20세기 말 엄청난 실패를 겪고 21세기 들어서는 공여국의 인적기반 양성 프로그램-수원국 주도의 개발계획 작성-공여국의 계획 지원이라는 패턴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고 여기에 개발도상국끼리 협력을 한다는 내용의 남남협력과 3개 이상의 국가[52]/단체가 협력하는 삼각협력, 민간의 참여를 강조하는 PPP라는 방법이 쓰이고 있다. 이런 면에서 IDA라는 권위있는 기관에 맞서서, 어설프긴 했지만 주도적으로 개발 전략을 설정하고 밀어붙인 후진국 한국 정부의 과거 경험과 이를 밀어붙이기 개발독재 방식이 이른바 한국형 모델로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53][54] 무엇보다 경인권의 거대한 인구와 산업 소요를 빼고 아무것도 없는 강릉[55], 아예 서울과 연결되지 않는 영호남 직통 고속도로를 제일 먼저 건설하자는 말은 어불성설일 뿐이다.
동시대에 지어진 영동고속도로나 80년대에 지어진 88올림픽고속도로 시절의 광주대구고속도로의 퀄리티를 보자. 그나마 회랑지대를 적극 활용한 경부고속도로조차 수백명의 희생자를 내면서 간신히 개통하고 그나마 날림공사의 보수에 막대한 예산을 쏟아붓고 있는데 그것이 백두대간을 관통해야 하는 영동고속도로나 광주대구고속도로라면 어땠을까? 겨울마다 헬게이트가 열리는 대관령 아흔아홉구비가 한국 경제의 제1간선인데 한국경제가 균형있게 발전할 수 있었을 지는 회의적이다. 혹은 국력을 기울여 험난한 백두대간에 교량과 터널을 건설하며 재원을 소진한 상황에서 새롭게 종축 간선을 부설할 여력이 남아있었을 지도 고려해야 한다.
오늘날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내는 과정에서 수도권으로 집중되는 서울 공화국 현상은 오늘날 여러가지로 비판받고 있지만, 내수 시장이 열악한 한국 환경에서 천만이 넘는 거대한 소비 시장이 형성되지 않았다면 한국 공업이 오늘날과 같이 성장할 수 있었을지도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56] 당시의 수출의 상당수는 부산을 통해 미국이나 일본과 같은 태평양 국가들을 상대로 수출하는 구조였으니 대한민국의 많은 인재와 자본이 모여 있는 서울과 수출의 최전선격인 항구도시 부산을 연결하는 도로를 꼭 필요하다. 하지만 서울과 강원도를 이런 경부고속도로보다도 빨리 건설을 해야 하는 경제적 이익이 있을까? 만일 그게 먼저 개통되었다면 몇몇 부유층 스키어들의 전유물이라고 비판받았을 확률 100%다.[57] 그리고 애초에,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되기 전에 이미 서울경기 인구는 증가일로에 들어서 있었는데, 이것은 6.25 이후 계속된 현상이다.
물론 위의 두 주장은 가정이기 때문에 판단은 개인의 몫이다. 또한 당시 당선된 대통령의 집중하는 개발 지역도 큰 영향을 미치는 등 여러가지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등 경부고속도로 하나만 가지고 판단하기는 어려운 측면 역시 존재한다.
한편 철도 경부선이 개량되었다면 우리나라는 일본처럼 철도 강국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나라가 철도강국이 되지 못한 이유는 우리나라가 고속도로 위주로 개발되었기 때문이며, 영동고속도로 이후로 본격 고속도로 시대를 연 반면, 철도는 수려선의 폐선 이후로 점점 쇠퇴하기 시작한다. 이는 어느 정도 이유가 있는게, 이미 철도보다 도로건설 및 물류이동에서의 자동차의 이용이 보편화된 이후에 대한민국이 공업국이 되었기 때문이다. 일본 및 유럽 선진국의 경우 19세기에 산업화를 이루었는데 그 시절에는 자동차라는 것은 거의 없어 물류수송은 철도가 주가 될수밖에 없었고 그런 시대에 많은 철도망을 이미 건설했기 때문에 철도망 위주로 발전한 것이다.[58][59][60]
6. 선형개량 및 확장[편집]
우여곡절 끝에 개통되었지만 현재까지도 선형개량, 도로환경 개선 등 공사가 끊이지 않는 대표적인 고속도로이다. 때문에 개통당시 428km였던 총 연장이 선형개량 및 확장공사, 그리고 노선 개편으로 인한 서울특별시 한남대교-양재 구간이 해제됨으로 인해 11.6km가 단축되어 2017년 5월 기준 경부고속도로의 총 연장은 415.4km이다.[61]
왕복 4차로 구간 : 충북 옥천 - 충북 영동 청성 졸음쉼터, 경북 영천 - 울산 언양분기점[62]
왕복 6차로 구간 : 충남 천안 천안분기점 - 충북 청주 남이분기점, 대전 회덕분기점 - 충북 옥천, 충북 영동 청성 졸음쉼터 - 경북 김천 김천분기점, 경북 경산 - 영천, 울산 언양분기점 - 부산
왕복 8차로 구간 :
서울 한남 - 양재,[2002년] 서울 톨게이트 - 충남 천안 천안분기점, 충북 청주 청주분기점 - 대전 회덕분기점, 경북 김천 김천분기점 - 경북 경산왕복 10차로 구간 : 서울 양재 - 성남 판교, 충북 청주 남이분기점 - 충북 청주 청주분기점
왕복 12차로 구간 : 성남 판교 - 서울 톨게이트
특히 대전-김천 구간은 완전히 새로 갈아엎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초기의 선형에서 상당히 벗어나 새롭게 직선화되었다.[64] 초기의 선형이 개량되어야 했던 이유는 이 구간이 소백산맥을 통과하는 산악 지형 구간인데 당시의 높지 않은 토목 기술 수준과 열악한 재정 상태 때문에 커브길이 난무했기 때문이다. 1960년대 당시에는 국내 건설 회사들의 고속도로 건설 기술 및 경험이 거의 전무했던 상황[65]인 데다 건설 자금도 부족했고 단기간에 완성을 시켜야 했기에 지금의 고속도로처럼 산을 깎아내고 장대터널이나 교량을 마구 뚫어댈 수 없었기에 고속도로임에도 커브 반경이 겨우 300~400m 수준인 국도급의 급커브 구간이 상당히 많았다.
그래서 선형 개량 구간이 개통되기까지 근 30년 동안 경부고속도로 대전-김천 옛 구간은 사고 다발 구간이어서 제한속도를 80km/h 이하로 제한[66]하는 구간들이 대부분이었을 정도로 마의 구간이었다.[67] 이로 인해 서울 ↔ 부산 등 원래 추풍령을 다니던 일부 고속버스 노선들은 통영대전고속도로가 개통되자마자 추풍령 구간을 버리고 중부내륙고속도로 개통 전까지 남해고속도로 - 통영대전 구간을 이용하기도 했다. 특히 2000년 7월에 발생한 경부고속도로 추풍령 휴게소 부근 커브 내리막길 구간에서 발생한 수학여행 버스 추돌 화재 참사의 가장 큰 원인이 바로 당시 기존 초기 선형 구간의 위험천만한 커브길 때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대전-김천 구간에 대한 직선화 공사가 매우 시급하다는 사실을 공론화 시키는데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되어 직선화 공사진척에 속도를 올리게 되었다. 현재는 추풍령 고갯길을 포함한 대전-김천간 나머지 구간 모두 직선화가 완료되었다.[68] 그나마 추풍령(고도200m)이여서 당시기술로 넘을 수 있었다고 한다
한편, 2017년 기준으로 경부고속도로 개통이 50여년을 바라보는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군데군데 미확장 구간이 남아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구간들은 옛 70년대의 선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는 공사중인 구간도 있고, 그렇지 않은 구간도 있다.
2015년 9월 마지막으로 영동IC ~ 청성 졸음쉼터 (7.1km)간 6차로 선형개량 및 확장공사를 마친 이후 현재 경부고속도로에서 확장공사를 하고 있는 구간은 언양~영천구간 1곳이다.[69] 이 곳은 2018년 하반기를 목표로 열심히 공사중에 있으며, 확장이 완료되면 왕복 4차로에서 왕복 6차로로 넓어진다.소개영상
그리고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최후의 4차선 옥천IC ~ 청성 졸음쉼터 (15.8km)구간은 2016년 12월 30일자로 공사발주가 이루어졌으며, 2017년 4월 14일부로 착공하였다. 건설사는 성지건설로 정해졌으며 전 구간 6차로로 확장한다고 한다.
총 15.8km 중[70] 옥천휴게소 전후 3.4km구간을 먼저 우선적으로 손 볼 모양인 듯 하다. 완공은 2021년 하반기로 예정되어 있다. 명절이 되면 왕복 6차로에서 왕복 4차로로 줄어들면서 병목현상 때문에 엄청 막힌다.
그 외에도 동탄신도시구간 직선화 및 지하화와 더불어 동서고속도로 개통에 대비한 천안JCT~남이JCT간 왕복 6차로에서 왕복 8차로로 확장계획이 있는 등 미래에도 굵직굵직한 확장계획이 많이 남아있는 고속도로이다.
7. 도로 통행 정책[편집]
[71]
1994년 9월 17일부터 양재 나들목에서 신탄진 나들목까지의 하행선 구간에 대한민국내 최초로 중앙버스전용차로가 지정되어 운영되기 시작하였고, 청원 나들목에서 양재나들목까지의 상행선 구간도 지정되어 운영된다. 1년 후에는 서울고속버스터미널과 서울남부터미널에서 시종착 하는 고속버스와 시외버스들의 통행 편의를 위해 시종점과 구간을 한남대교 남단 - 신탄진 나들목으로 연장하였다. 2008년 여름부터 수도권 구간의 대중교통 소통을 위해 한남 나들목 - 오산 나들목의 하행선 구간과, 오산 나들목 - 한남 나들목간의 상행선 구간에 평일(월-금) 오전 7시부터 오후 9시까지 평일 버스전용차로 운영도 실시한다. 덕분에 광역버스와 고속버스 등의 소요시간이 대폭 감소하였다. 그리고 중앙버스전용차로 때문에 고속도로에서 버스가 1차로로 주행한다는 인식이 박혀버려 버스들이 다른 고속도로나 중앙버스전용차로가 해제된 이후에도 1차로에서 계속 주행하는 지정차로 위반이 굉장히 심해졌다.
2010년 8월 30일부터 천안나들목~양재나들목(총 76km) 구간의 제한최고속도가 시속 100km/h에서 110km/h로 상향되었다. 최저속도는 50km/h로 이전과 변함이 없다. 그리고 안전하고 원활한 소통을 위해 지정차로제 준수가 다시 한 번 요구되었다.
1차로 | 추월차로 |
2차로 | 승용차와 소형 승합차의 주행차로 겸 3차로 주행차량의 추월차로 |
3차로 | 1.5톤 이하 화물차 및 대형 승합차의 주행차로 겸 4차로 주행차량의 추월차로 |
4차로 | 1.5톤 초과 화물차 및 건설기계, 특수차량의 주행차로 |
이런 지정차로제는 경부고속도로에서만 시행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고속도로에서 시행되고 있는데, 1999년에 규제 개혁 및 화물차/승합차 차별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정치적인 이유로 지정차로제를 폐지했다가 1년만에 다시 시행하는 바람에 홍보가 덜 되어서 거의 단속하지 않았던 것 뿐이다. 자세한 내용은 고속도로 문서의 지정차로제 문단에 나와있다. 그러나 양재-수원(신갈) 구간은 주변에 건설된 각종 신도시 때문에 평일 주말 가릴 것 없이 지체와 서행이 반복되는 상습정체구간이고 무개념 운전자들이 상위차로에서 저속으로 주행하거나 고속버스/광역버스들이 지정차로를 위반해서 상위차로에서 주행하는 바람에[72] 통행량에 비해서 정체가 심해 차가 적어지는 늦은 밤이나 새벽이나 되어야 110km/h를 낼 수 있어 실효성이 적다는 의견도 있다. 실제로 출퇴근 시간에 이 구간을 주행해보면 2, 3차로 같은 상위차로에서 80km/h로 주행하는 운전자들 덕분에 최하위차로인 갓길차로에서나 겨우 100km/h 가깝게 속도를 낼 수 있다. 이런 사람들 중 일부는 차라리 양재-천안보다 천안-부산을 110km/h으로 상향하는 것이 나았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주요 대체 도로인 논산천안고속도로, 당진영덕고속도로, 중부내륙고속도로, 대구부산고속도로와 속도가 연동되기 때문이다. 영동 - 옥천, 언양 - 영천 구간 등 남은 구간의 개량작업이 모두 끝나면 110km/h로 증속 가능성이 크다.
2010년대 들어 서울TG - 안성 휴게소 등 일부 구간에서는 갓길을 상시 주행하게 하고 있어 실제로 왕복 2차로씩 늘어나는 효과가 있다.
8. 판교 나들목 통행료 징수 논란[편집]
과거 1970년 개통 당시에는 서울 톨게이트가 양재 나들목 부근에 위치[73]했기 때문에 당시의 판교 나들목은 폐쇄형 톨게이트로 문제없이 기능했으나, 통행량 증가로 인해 확장이 불가피하게 되어 1987년 10월 서울 톨게이트를 기존 위치에서 남쪽에 있는 성남시의 궁내동 부지로 확장 이전하게 되어 오늘날의 모습에 이르게 된다. 이에 따라 판교 나들목은 요금 징수 시작 지점인 서울 톨게이트의 이전 구간에 속하게 되면서 반포, 서초, 양재 나들목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개방형으로 바뀌어 통행료 징수도 폐지되었다.
하지만 1990년대에 분당신도시가 건설되고 서울과 연결되는 간선도로의 부족으로 판교 나들목을 이용하는 서울 출퇴근 차량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되자, 한국도로공사가 1992년부터 판교 나들목의 서울방면 진출입로를 다시 폐쇄형으로 전환하고 통행료 징수를 시작하게 된다.[74] 통행료가 징수되기 시작하면서 분당 주민들은 불만을 가지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서울 톨게이트 이북에 위치한 양재, 서초 나들목의 사례와 비교[75]가 되기 시작하여 판교 나들목의 서울방면 요금징수의 형평성 문제가 공론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내용인즉, 같은 서울 톨게이트 이북에 위치한 나들목인데 왜 판교 나들목만 불공평하게 요금 징수를 하냐는 것이다. 당시 통행료 징수 재개에 대해서 도로공사 측에서 해명하는 바에 따르면 1987년부터 1992년까지 통행료가 면제된 이유가 경부고속도로 확장공사 때문에 잠정 폐쇄한 것이었다는데, 실제 경부고속도로가 확장공사에 들어간 시기는 1989년부터였으며 통행료 징수 재개 시점도 하필이면 분당신도시가 자리잡기 시작한 때와 일치하여서 변명으로밖에 안 보이기도 한다.
분당 주민들의 항의로 인해 한국도로공사는 분당과 연결되는 고속화도로가 개통되는 시기까지 한시적으로 출퇴근 시간대에 한해 통행료 면제를 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이를 1995년부터 1998년까지 시행하기도 했다. 그리고 1999년부터 서울과 분당을 연결하는 고속화도로들이 개통되면서 다시 통행료 1100원을 징수하기 시작했고, 이에 분당 주민들은 한국도로공사를 상대로 준법 시위[76]를 넘어서서 통행료 납부 거부 및 행정심판·소송까지 불사하는 등 이 문제는 상당히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2002년 11월 한국도로공사가 서울시 구간을 경부고속도로 구간에서 아예 제외시켜 버리는 신의 한수를 발휘함으로써 판교 요금소의 통행료 징수 논란에서 점차 자유로워지기 시작했으며,[77] 분당 주민들은 이후에도 통행료 폐지 행정소송을 불사하지만, 결국 2006년 수원지방법원에서 양재 나들목을 종점으로 하는 기준에서는 문제가 없다는 판결이 항소심까지 가서도 관철되면서 통행료 부당 징수 논란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