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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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申政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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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의 주역들(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1]

정변의 중심지, 우정국의 모습.

1. 개요2. 구성3. 정변 이전의 상황4. 갑신정변5. 정강 14조와 내각 개편6. 삼일천하7. 결과8. 말로
8.1. 갑신정변 참여자들의 밝힌 이유8.2. 진짜 이유?
9. 평가10. 정변 이후11. 미디어

1. 개요[편집]

1884년(갑신년)에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급진개화파가 조선의 근대화를 목표로 일으킨 정변. 그러나 외세 일본을 끌어들였고, 폭력적인 정적 숙청에 비해 허무하게도 삼일천하로 끝나고 말아 한계를 노출했다는 평도 받는다.

2. 구성[편집]

조선 후기에 봉건체제의 틀을 깨트리고 자본주의 및 근대사회로 나아가려는 사상을 가진 급진개화파들(일부 중인출신 지식인 및 양반들)이 조선사회를 변화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뭉치게 되었다. 급진개화파들은 낡은 조선의 정치를 개혁하고 세계 정세에 맞추어 조선을 변화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급진 개화파들은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2], 서재필, 서재창, 이규완, 유혁로, 정난교, 신응희, 박영교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들은 서구사회에 관한 문명서적을 통해서 실학사상의 긍정적 요소와 세계정세의 흐름 및 자본주의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습득함으로써 조선사회의 개혁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평균나이 25도 안 되는 그야말로 엘리트 열혈청년들이었다. 김옥균이 유일하게 30대였으며박영교는?, 서재필은 19세. 이들은 자신들을 개화당으로, 그리고 그 외의 모든 세력을 수구당이라고 불렀다.[3][4][5]

개화파는 개항 후 전개되는 나라 안팎의 정세변화에 관심을 가지면서 동지를 모으는 한편, 개혁운동의 수단으로써 당시 서구의 근대문물에 관심을 표명하던 고종에게 적극 접근하였다. 이의 결과물로 조선정부의 일본수신사 및 조사시찰단에 적극 참여하였다.

3. 정변 이전의 상황[편집]

그러던 중 조선에서 발생한 1882년 임오군란은 왕후 민씨(명성황후) 및 온건개화파 세력[6]과 급진개화파의 관계를 정치적으로 급속히 냉각시켰다.

임오군란의 발발로 청에 간 사신들[7]은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했다. 청나라는 이를 빌미로 조선을 본격적으로 속국화 하기 위해 군대를 진출했지만 임오군란 때 청나라의 도움을 받은 민씨 세력은 청나라에 의지해서 정권유지를 꾀했다. 이로 인해 청나라에 의한 내정간섭이 심해져 묄렌도르프(외교), 위안스카이(군사), 마젠창(재정) 등 고문이 파견되었고[8],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체결로 청나라 상인에 의한 내지무역이 가능해지는 등 청나라의 영향력이 강해졌다.

급진개화파들은 청나라에 의한 간섭 심화에 강한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고, 개화정책의 추진과정에서도 민씨 척족세력, 온건개화파와 연계된 청의 고문 묄렌도르프와 갈등을 겪고 있었다. 특히 개화정책 추진에 드는 비용을 마련하는데 있어 묄렌도르프는 화폐를 많이 찍어내자는 입장에 있었던 반면, 급진개화파는 대원군 때 경복궁 중건을 위해 당백전 발행의 결과 일어났던 인플레이션을 예로 들며 화폐를 찍어내는데 반대하고 대신 일본에서의 차관 도입을 주장하였다. 고종이 일단 양쪽 모두의 손을 들어주며, 김옥균 등을 일본에 보내 차관을 도입해오게 하였으나 일본 내부 사정으로 불발되어 급진개화파의 입지는 급격히 축소되었다. 그리고 급진개화파의 급진적 개혁에 대한 강한 목소리와 마찰의 빈발에 압박을 느끼던 반대파에서는 이들의 입지 축소를 계기로 이들을 축출하기 위해 병권을 갖고 있는 지위에서 쫓아내려고 하였다[9].

한편 이즈음 청이 베트남 문제로 프랑스와 마찰을 빚게 되어 청프전쟁, 서울에 주둔한 3천명의 청군의 대다수가 전선에 투입되었다. 이렇게 청군의 장악력이 느슨해짐을 틈타 김옥균을 위시한 이들 개화파들은 그들의 계획에 동조, 협조한다는 일본 공사와의 밀담을 마친다.

4. 갑신정변[편집]

1884년 12월 4일 저녁 6시, 급진개화파는 우정국 연회가 열릴 즈음 사전에 준비한 폭탄으로 혼란을 일으키려 했다.[10] 하지만 폭탄이 불발되자, 이웃집에 불을 질러 혼란을 일으킨 다음 사전에 포섭한 자객들로[11] 사대당 요인 암살을 시도했지만 정작 민영익[12]만 중상 입히는 수준으로 끝났다. 사실 민영익은 개화파 핵심 멤버들과 절친한 사이였다. 죽동에 있던 민영익의 집은 개화파들이 모이던 곳이기도 했다. 민영익이 사대당으로 기울어지자 위기감을 느낀 급진 개화파가 갑신정변을 일으킨 것이라고 보는 해석도 있다. 결국 미국에 보빙사로 함께 가기까지 했던 홍영식은 사사로운 정을 저버릴 수 없어 부상 당한 민영익을 묄렌도르프와 함께 묄렌도르프의 집으로 옮긴다. 그리고 묄렌도르프는 민영익을 한 미국인 의료 선교사의 집에 데리고 가는데...그 의사가 바로 드라마 제중원에 나오는 호러스 뉴턴 알렌이다. 당시 민영익은 과다 출혈로 사경을 헤메이고 있던 터라 알렌이 없었다면 죽었을 것이다.. 여하간 이후 민영익은 큰 배신감을 느껴 김옥균 등 개화파와 철천지 원수가 된다. 한편 알렌은 이 일로 고종의 눈에 띄어 한미 외교, 선교, 의료 활동에 지대한 공을 세우고, 동시에 고종을 엿먹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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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정변의 전개양상을 표현한 지도. 사실 급진개화파가 짧은 시간 내에 뛰어갔던 길을 측정하거나 실제로 걸어 보면 상당히 멀다. 축지법을 써도 기분 30~40분(…). 자기들 목숨이 걸린 일이니 초인적인 힘이 발휘되었던 듯.

급진개화파들은 바로 창덕궁으로 달려가 고종에게 사대당과 청군이 변을 일으켰다고 거짓으로 보고하고 왕을 경우궁으로 옮긴 후 일본군 200명[13]과 개성 유수였던 박영효가 이끄는 군대와 그들 휘하의 별기군 50명으로 하여금 궁을 호위케 한 다음, 본래 우정국 연회 장소에서 처리하려다 실패한 사대당 요인인 한규직·이조연·윤태준을 죽이고 이어서 입궐하던 왕실 척족 세력인 민영목·민태호·조영하를 죽였다.[14]

5. 정강 14조와 내각 개편[편집]

이튿날인 12월 5일 개화파는 정강 14조와 새 인사를 발표했다.

1. 청에 잡혀 간 흥선대원군을 곧 돌아오게 하며, 종래 청에 대하여 행하던 조공의 허례를 폐지한다.

2.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 평등의 권리를 세워 능력에 따라 관리를 임명한다.[15]
3. 지조법을 개혁하여 관리의 부정을 막고 백성을 보호하며, 국가 재정을 넉넉하게 한다.[16]
4. 내시부를 폐지하고 그 중에 재능 있는 자만을 등용한다.
5. 전후 간사한 관리와 탐관오리 가운데 현저한 자를 처벌한다.
6. 각 도의 환상미를 영구히 받지 않는다.
7. 규장각을 폐지한다.[17]
8. 급히 순사를 두어 도둑을 방지한다.
9. 혜상공국을 혁파한다.[18]
10.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자와 옥에 갇혀 있는 자는 그 정상을 참작하여 적당히 형을 감한다.
11. 4영을 합하여 1영으로 하되, 영 중에서 장정을 선발하여 근위대를 급히 설치한다.
12. 모든 재정은 호조에서 통할한다.[19]
13. 대신과 참찬은 의정부에 모여 정령을 의결하고 반포한다.
14. 정부 6조 외에 불필요한 관청을 폐지하고 대신과 참찬으로 하여금 이것을 심의 처리하도록 한다.


흥선대원군 계열과도 일부 교섭하여 영의정에 이재원·좌의정에 이재선·병조판서에 이재완(李載完) 등의 종친이 임명[20]됨과 동시에 대원군의 장남 이재면을 의정부좌찬성 겸 우참찬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핵심요직은 개화파였다. 우의정에 홍영식·형조판서에 윤웅렬·전후양영사(前後兩營使) 겸 한성판윤에 박영효·이조판서 겸 홍문관제학에 신기선(申箕善)·좌우 양영사 겸 서리외무독판에 서광범·외무아문참의에 윤치호, 승정원도승지에는 박영교 등이 임명되었다. 갑신정변의 전위대로 나서 공을 세운 서재필은 병조참판 겸 정령관으로 임명하여 정부의 군사권과 재정권을 장악하였다. 헌종의 계비 효정왕후의 조카이며 동시에 홍영식의 집안사람인 홍순형도 공조판서로 임명되었다. 그밖에 온건 개화파로 정변에 반대하지 않던 김홍집을 한성부 판윤으로, 김윤식을 예조판서로 임명하였다.

김옥균은 호조 참판이 되어 국가의 재정을 책임졌다. 급진개화파들은 각국에게 신정부의 수립을 통고하는 한편, 신정부를 구성하고 혁신정강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14개 항목을 내세웠다. 그 중의 첫 대목은 청나라와의 종주 관계를 폐지하고 대원군을 귀국시킨다는 대목이었다. 그 외에는 문벌개혁(신분제 철폐), 환곡 폐지, 의정부와 6조, 특히 호조 중심의 재정관할, 규장각 폐지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

6. 삼일천하[편집]

갑신정변은 한국사의 가장 대표적인 삼일천하 사례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미처 공포도 하기 전에 김옥균의 필두로 한 급진개화파가 쿠데타의 주역임을 눈치챈 명성황후가 위안스카이에게 원병을 요청해 주둔 중인 1500명의 청국군이 출동하여 12월 6일 오후부터 (만으로는 2일째) 창덕궁을 공격하는 바람에 궁궐은 삽시간에 전쟁터가 되었고, 수적으로 불리한 급진 개화파 세력은 일본 공사가 사전 약속을 어기고 철수하자 일이 틀렸음을 알고 김옥균·박영효 등은 제물포를 거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21] 이 와중에 일본 공사관이 불에 타 조선 정부는 훗날 배상금 문제로 한성 조약을 체결한다. 더 나아가서는 청의 간섭이 심해졌고 일본과의 알력 다툼이 심해져 훗날 청일전쟁의 불씨가 된다.

7. 결과[편집]

개화 의지는 그렇다 쳐도, 갑신정변은 본질적으로 왕조국가 조선에서 반역이었다. 그리고 개화파가 이를 주도했다는 점에서 이후 조선에서 개화는 곧 반역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사건 후 조선이 의욕적으로 추진하던 개화 드라이브는 대부분 정지되고, 이후 대대적인 개혁은 1894년 갑오개혁에 가서나 그것도 불완전한 형태로 이루어질 수 있었으며, 개화를 이끌어가야 했을 엘리트 청년 관료들이 조선을 떠나야만 했으니, 그야말로 시계를 10년 뒤로 돌린 개화기 최악의 병크였다고 볼 수도 있다. 심지어 윤치호는 당시의 분위기에 대해 "서울에서 개화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자가 없었다"고까지 표현했다. 원래 개화라고 하면 듣는 이들 중에서도 그다지 반발하는 이들이 없었는데, 갑신정변이 터지고 나니까 개화하는 사람은 죄다 외세를 끌어들여서 반역하는 사람들이다라는 말이 돌았다고 한다. 즉, 갑신정변 때문에 개화의 이미지가 개판이 되었다.는 얘기.

참고로 갑신정변에 대한 윤치호 본인의 평가는 굉장히 부정적이다.

아아. 김옥균 무리의 경망스러운 행동은 위로 나라 일을 실패하게 하고 아래로 민심을 흔들리게 했으며, 공적으로는 개화 등의 일을 완전히 탕패(蕩敗)시켰고, 사적으로는 자기네들의 가족을 몽땅 망하게 만들었다. 한 번 생각을 잘못해 모든 일이 실패했으니, 이 얼마나 어리석고 얼마나 도리에 어긋나는 짓이냐!


정작 이 말을 한 윤치호는 친일파라는 점에서 나라가 망하자 강대국에 빌붙어먹는 놈이 정작 나라를 한 번 개화시키려는 사람들을 싸잡아 욕하는,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욕하는 꼴밖에는 안된다.

다만 정변을 통한 전체적 개혁을 꾀한 이들 급진 개화파들 말고도 조선의 전반적 개혁을 추구한 온건 개화파도 통리기무아문을 중심으로 개화를 추진하기는 하였다. 김홍집 등을 필두로 하는 이들은 갑신정변과 갑오개혁 사이 10년 동안에도 전신, 전등 설치, 육영공원(근대적 교육기관), 광혜원(1885년 제중원으로 개칭), 한성주보 발간 등 일련의 근대적 개혁을 추진했다.

이사건은 일본사상사에 커다란 영향을 주는데 당시 도검과 폭약 등의 무기를 조달해서 갑신정변 세력를 지원하며 내란를 선동하던 후쿠자와 유키치는 (청프전쟁 상황에 따라 일본 자유당 민병대로의 프랑스식 추가 지원이 이토 히로부미의 거부에 의해 무산되고 말았어도) 갑신정변의 실패와 그 뒤처리 과정의 조선의 연좌제같은 전근대성에 충격을 받고 본격적으로 흑화, 탈아론 등 본격적인 제국주의적 사상을 펼치기 시작한다.

덧붙여 갑신정변의 실패로 천연두의 퇴치도 늦춰지게 되었는데, 국내에 최초로 종두법을 들여온 지석영의 종두학교는 이때 성난 군중에 의해 불타버렸고, 그는 도피해야만 했다.기사

8. 말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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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식: 고종의 "경들은 날 놔두고 어딜 가는가?"라는 말에 마음이 흔들려 도망치는걸 포기하고 박영교와 함께 고종을 끝까지 호위하였다. 위안스카이와도 안면이 있었고, 벼슬도 꽤 높은 사람이라서 "죽이진 않겠지" 했던 것 같지만 오조유가 이끈 청군이 고종을 데려가려 하자 이를 만류하던 과정에서 조선군에게 살해당했다. 덤으로 아버지 홍순목은 영의정이었음에도 그 일로 자결한다. 자세한 것은 해당항목 참조.

김옥균: 일본으로 망명하여 10여년을 방랑하며 지낸다. 10여년 내내 고종이 보낸 자객을 잘 피해다니다, 상하이에서 결국 자객 홍종우에게 리볼버로 살해당한다. 이후 시신은 보존되어 조선으로 돌아오고, 이후 그의 머리는 효수되고 남은 몸은 능지처참을 당한다.

박영효: 이후 골수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었다. 갑오개혁 중 2차 김홍집 내각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던 일본의 의도로 귀국. 다시 복권되어 정부에서 일하다가 고종을 몰아내려는 반란음모를 꾸미다가 걸려서 다시 일본으로 탈출한다. 이후 고종이 싫어하는 인물 순위권에 꼽히게 된다. 하지만 일본내에서도 영향력을 발휘해서 독립협회에서도 박정양, 윤치호와 더불어 세력이 강했고 '박영효 대통령 음모설'까진 나왔다. 독립협회 주도로 개설된 중추원의 첫 의제였던 대신 추천에서도 한 자리했다[22]. 경술국치 후에는 후작 작위를 받는 등 부유한 친일파로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이때 그의 형 박영교는 청군에 의해 홍영식과 함께 참살된다.

서재필: 동생 서재창을 비롯한 일가와 집안이 전부 몰락하고 가까스로 도망쳤다. 미국에서 생활하다 나중에 독립협회,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미국인 필립 제이슨으로 다시 등장한다. 한인 교포들을 위한 지원도 자주 했다.

서광범: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냉대와 무관심 속에 미국에 호의를 갖게 되어 박영효, 서재필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했다. 미국에서 막노동으로 돈을 벌어 학위와[23] 시민권을 취득하고 연방 하급관료로 일하였다. 갑오개혁으로 잠시 귀국해 김홍집 내각에서 사법개혁을 맡았다. 을미사변 이후 친일파의 입지가 약해지면서 주미공사로 파견되었지만[24] 아관 파천으로 정권이 교체된 후 파직되었다. 미국에서 생을 마감한다.

갑신정변이 일어났을 때에, 청의 군단이 들어와 막아준 관계로 급진 개화파는 실패하고 말았다.
이 일의 이후로 청은 조선의 정부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8.1. 갑신정변 참여자들의 밝힌 이유[편집]

일본 공사였던 다케조에 신이치로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어리석어 원세개에게 당했다.'

요약하면, 내가 주도자인데 원세개에게 속았으니 당연히 실패한 것이다. 즉, 갑신정변의 몸통은 자신이란 이야기다.

박영효의 평가

'(김)옥균은 거짓말을 밥 먹듯 해내는 무능한 자야. 제멋대로 행동하는 방탕아지. 도쿄에서 조선인 일본인 할거 없이 닥치는대로 을 빌려 물쓰듯 하고 말이지. 결국 갑신년에 실패한 것도 그런 엉터리 때문이지. 그를 믿고 설익은 청년들이 성급하게 일을 저질러서 그렇게 된거지. 그렇다고 옥균이가 진짜 리더인가? 나랑 홍영식이 다했지'[25]

'그저 권력을 움켜쥐는 것이지오. 상감을 꽉 잡는 것이지오. 옥균이가 어름어름 하다가 상감을 놓쳐서 고만 실패했지요.'[26]

요약하면 '김옥균 때문에 망했다' 정도로 요약된다.

서재필의 평가

'갑신정변이 실패한 원인은 일본을 너무 믿은 것 등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무엇보다도 앞뒤 재지 않고 반대만 내세운 일반 민중의 무지몰각 때문이었다. 양의 동서를 막론하고 민중의 조직이 없고, 잘 훈련된 후원이 없이 다만 몇몇 사람의 선각자만으로 성취된 개혁은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한 로마 사람에게 처형되었으나 로마 사람이 그를 미워한 것이 아니고 그를 미워하기는 유대 사람이었다. 즉 그의 동포가 그를 알지 못한 탓이다.'

8.2. 진짜 이유?[편집]

갑신정변의 실패 이유를 가장 잘 보여준 인물이 윤치호의 아버지 윤웅렬이다. 원래 윤웅렬은 군대를 동원해서 갑신정변을 지원하려고 했으나, 일이 틀어지는 것 같자 발을 뺐다. 혹시나 성공할 수 있으니까 신고는 하지 않았지만, 윤웅렬은 갑신정변이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보았고, 거기에 자신이 엮이는 것을 대단히 경계했다. 그 윤웅렬의 말을 윤치호 일기에서 옮기면 다음과 같다.

  • 제1. 임금을 위협한 것은 순(順)한 것이 아니고 역(逆)한 것이니, 실패하는 첫째 이유이다.

  • 제2. 외세를 믿고 의지하였으니 반드시 오래가지 못할 것이 실패하는 둘째 이유이다.

  • 제3. 인심이 불복(不服)하여 변(變)이 안으로부터 일어날 것이니, 실패할 셋째 이유이다.

  • 제4. 청군이 곁에 앉아있는데, 처음에는 비록 연유를 알지 못하여 가만히 있으나 한번 그 근본 연유를 알게 되면 반드시 병대(兵隊)를 몰아 들어갈 것이다. 적은 것으로 큰 것을 대적할 수 없는 것이니, 사소한 일본 병이 어찌 많은 청병을 대적할 수 있겠는가? 실패할 넷째 이유이다.

  • 제5, 설상 김옥균, 박영효 여러 사람이 능히 순조롭게 그 뜻을 이룬다 하더라도 이미 여러 민씨와 임금께서 친애(親愛)하는 신하들을 죽이었으니 이는 국왕과 왕비전(王妃殿)의 의향을 위배한 것이다. 군부모(君父母)의 뜻을 거스르고 능히 그 위세(位勢)를 지킬 수 있겠는가? 실패할 다섯 째 이유이다.

  • 제6. 만약, 김옥균, 박영효 여러 사람의 당(黨)이 많아서 조정을 채울 수 있다면 혹은 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두 서너 사람이 위로는 임금의 사랑을 잃고 아래로는 민심을 잃고 있으며 곁에는 청인(淸人)이 있고, 안으로 군부모의 미움을 받고 밖으로 붕당(朋黨)의 도움이 없으니 능히 그 일이 순성(順成)함을 꾀할 수 있겠는가?

일이 반드시 실패할 터인데 도리어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어리석고 한스럽다. 또 우리 부자(父子)를 끌어 들여 같은 무리로 삼으려 하니 두렵다. 그러나 이에 좇으면 역적이 되고 역적이 되면 망하게 되니 가히 진퇴유곡(進退維谷)이라 할 수 있다. 어떻게 해야 좋을 것인가? 삼전(三殿: 임금, 왕비, 세자) 성위(聖位)께서는 바야흐로 위급한 지경에 놓여 있어 혼자 힘으로라도 난을 구하고 싶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나의 본심을 알지 못하고 도리어 나를 김씨(김옥균)의 당(黨)이라고 한다. 그것은 내가 형조판서에 제수된 원인이다. 그런 즉 지금의 형세로는 사람들이 나를 의심하여 해치려고 하니 어찌 두렵고 원통하지 않겠는가? 그러하니 우선 이리로 도망쳐 와서 다시 뒷일을 의논하려는 것이다.[27]


윤치호 역시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28]

물론 국민 가운데 한 사람도 독립당의 사업을 이해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외다. 첫째로 임금님 몸에 손을 대이어 억지로 정사를 변혁하였다는 것. 둘째 일본과 공모하였다는 것으로 크게 오해를 사서 아주 역적으로 몰렸던 것입니다.'


사실 갑신정변이 실패한 이유는 이 부자의 이야기만으로도 대부분 다 나오고 있고, 실제로 현재의 연구도 저것과 별 차이가 없다.

9. 평가[편집]

갑신정변은 청국이라는 또다른 외세를 제대로 의식하지 않은 실패한 정변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기본적으로 메이지 유신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외세를 끌어들인 고전적인 반정에 가깝다. 본문에서는 민중과의 괴리만 들고 있지만, 더 큰 문제는 자체적인 능력이 없어서 전적으로 일본에 의존하였다는 것. 이래서는 장기적으로 일본의 꼭두각시 정부가 될 뿐이다. 일본과 사이가 틀어지면 바로 다시 뒤집어지니까. 한 마디로 쿠데타를 일으켜 정부를 갈아치우면 알아서 해결 될 것이라는 안일함이 밑바닥에 깔려 있었다.

일단 갑신정변은 민중의 지지를 얻기 어려웠다. 기본적으로 조선은 왕조 국가였으며, 유교적 질서가 오랫동안 뿌리내리고 있어서 근왕 이념이 퍼져 있었다. 그리고 당시 민중은 일본을 정말 싫어했다.

그리고 딱 여기서 얻은 교훈 만큼의 발전형을 보여준 것이 후반기의 독립협회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독립협회가 포섭한 민중은 자기들 영향력 범위에 닿는 서울 한정. 더구나 그 '지지'란 것도 근본적으로 '근왕적 이념'에서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조선 조정에 적극적으로 대항할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근대화 개혁을 민중의 단합된 지지를 업고 성공시킨 사례가 없다는 점을 볼 때, 본래 민중의 지지는 고려할 만한 요건은 아니었다. 물론 역사적 평가는 바뀌지만. 쿠데타에서 내전 정도로 그보다 중요한 것은 무력과 무력을 사용할 의지인데, 당시 소규모의 일본 공사관 수비대로서는 중국의 조선 주둔군을 이길 능력이 없었고, 일본 공사는 오쿠보 도시미치가 10년 전 보여준 것처럼 청군에 대항할 의지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이에 대해서 갑신정변을 옹호하는 입장은 3가지가 있다. 하나는 갑신정변의 내용이 일부 갑오개혁에 이어진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보수파를 제거한 공로가 있다는 것이고, 세번째는 어차피 조정이 막장이었으니까 누군가는 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반론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우선 갑오개혁 자체는 조선 관료들 주도로 진행되었지만 그 시작을 일본군의 경복궁 침입으로 시작해 외세의 개입이라는 인상을 심어주었기에 갑오개혁에는 항상 외세에 의한 타율적 개혁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는다. 그 외세가 갑신정변 당시 손잡았던 그 일본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갑신정변과 갑오개혁은 비슷하지 않으면 그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이다. 더구나 그 비슷하다는 부분은 근대국가에 있어서 일반적인 부분으로 갑신정변과 갑오개혁만 비슷한게 아니다.

두번째는 보수파가 누구냐라는 것이다. 갑신정변 당시 급진개화파는 자기들 제외하고 다 죽이려고 했다. 민씨 세력은 외척이니 죽이고, 개화 반대파는 반대파니까 죽이고, 온건개화파는 위의 두 세력을 자기들처럼 열심히 밀어내려고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제거해야 한다고 했다.[29] 상단에 기록된 윤웅렬의 이야기 가운데, '민씨와 임금께서 친애(親愛)하는 신하들을 죽이었으니'라고 했는데, 이 신하들이 바로 온건개화파이다. 이들이 죽인 온건개화파 무리들은 이후 별다른 큰 활약을 하지 못했고 외척이 많다라는 이유로 낮은 평가를 받지만 이들이 죽이지 못한 이들 중에는 김윤식, 어윤중, 이상재, 이시영, 민영익, 박정양[30] 등이 포함된다. 그리고 이들중 상당수는 이후에 갑오개혁과 독립협회에 참여하고 그 이후에도 살아남은 이시영, 이상재, 민영익 등은 반일독립운동에도 참여했다. 앞서 언급된 것처럼 이들의 상당수를 제거하고 자기들도 제거되면서 조정내의 개화파 상당수가 쓸려나갔다. 더구나 죽은 사람만 봐도 윤태준[31], 한규직[32], 이조연[33] 등 영선사 출신으로 새로운 군제개혁에 참여했던 인물들이나 민씨척족중에서 개화에 비교적 적극적이었던 인물들이며 외척의 주요인물이었던 민영목[34], 민태호[35], 민영익, 민응식[36]의 소위 4민 중에서 민영목과 민태호는 죽었고, 민영익은 부상당하면서 이들이 극렬 급진개화파 배제론자가 되게 만들었고, 이외에도 조영하[37] 등도 같이 죽었는데 이들 주요 인물들 중에서 개혁에 근본적으로 방해가 되었을 인물은 없다고 봐야 한다. 애초에 갑신정변의 배경은 우정국 창립 축하연회였고, 여기에 참석하려고 했던 이들이나 수호를 맡았던 이들이 죽은 것이었으니 더더욱 그렇다.

마지막으로 갑신정변이 일어난 것은 조정이 막장이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급진개화파의 입지가 막장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문제가 있다. 갑신정변의 트리거로 꼽히는 3가지로 일본에서 차관을 얻어오지 못한 것, 민영익이 온건개화파로 선회한 것, 박영효가 이끌던 군대가 친군영에 흡수된 것 등을 꼽는데 이것은 모두 개화의 좌절이 아니라 급진개화파의 입지 감소일 뿐이다. 급진개화파는 개화가 진행되지 않는다거나 탐관오리가 있다거나 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봉기한 것이 아니라[38], 친일이 아니라 친청이고[39], 자신들이 아니라 온건개화파 주도로 정국이 운영된다는 것에 불만을 품은 것이다. 이미 영국은 1215년에 대헌장으로 의회를 인정받았으며, 옆나라 일본이 메이지유신이후 급성장한 모습을 보면서 자신감을 가지고 젊은 혈기가 동한 것이 그나마 우호적인 평가일 수 밖에 없다. 급진개화파는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고 자신들 주도의 개혁을 하기 위해서 일본군대를 끌어들인 것이고, 이것은 갑신정변 이후 모든 실권을 급진개화파가 장악한 것으로 드러난다[40]. 사해당파주의를 제창했다고 하지만, 정작 관직분배를 한 것은 온건개화파가 아니라 종친우대라는 명목으로 대원군 계파에게 분배한 것이다. 대원군계가 개화에 도움이 안된다는 것은 모두가 다 알일이다.

만일 자력으로 정변을 일으켰다라면 그래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외세를 최초로 조직적으로 끌어들인 것은 급진 개화파이고, 그 목적이 정권 획득이라면 그 성공가능성과 이후 상황을 모두 고려했어야 했다. 하지만 이후 급진개화파가 보여준 시각은 독립협회 시기까지 미뤄보아도 책상물림들의 망상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고, 그걸 위해서 너무나도 큰 도박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 결과도 최악급으로 나왔다. 미국의 독립전쟁 처럼 일단 일본의 지원받고 나중에 힘을 길러서 일본과의 독립전쟁을 추진했을 계획을 세웠을 수도 있다까지 나가면 관심법의 경지므로 언급할 필요도 없다. 무엇보다 애초에 이런 소리 하던 사람들[41]이 결국 어떻게 되었는가를 보면 고려할 대상이 못된다.

오히려 이들이 싹 제거된 덕분에 일본이 세력확장을 꾀했을 때 기존의 친일파들이 배제되어서 외부의 친일파들을 파견하거나(박영효), 그나마 협상가능한 온건개화파들을 끌어들이는(김홍집, 박정양)[42] 우회적인 방법을 택하게 만드는 결과적인 공로는 있다. 때문에 이후 일본의 침투는 정부와 고종에게 대단한 경계를 받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으니 이것만은 공로라고 하겠다.

북한에서는 1950년대 학계를 중심으로 갑신정변을 봉건체제를 전복하고자 했던 서양의 프랑스 혁명과 같은 부르주아 혁명에 비견된다고 평가했다[43].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견해를 받아들여 갑신정변을 높게 평가하기도 한다.

정변이 성공한다고 해도 그 다음에는 청의 반발이 일어날 것이 확실한데, 애초에 일본군은 제대로 교전하지도 못하고 허무하게 후퇴했을 뿐이다.

이 음모에 한 몫 거든 일본의 관점에서 평가하자면, 갑신정변 자체는 전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갑신정변은 그나마 조선 내부에서 일본에 순수하게 호의를 가지고 문명 개화의 파트너로서 협력하고자 했던 일본 유학파 출신 '친일파'들에게 치명타를 안겨주었고, 조선 왕실에서도 정변을 후원한 일본 정부에 혐오감과 적대감을 가지게 되었다. 일본과 조선이 우호적으로 함께 나갈 수 있는 노선을 자기 스스로 파괴해버린 셈이다. 빠가 까를 만든다

그 결과, 조선에서 일본 세력이 철저하게 축출당하고 청의 영향력은 극적으로 확대되는 결과가 나타났다. 이 상황은 10년 뒤에 청일전쟁까지 이어졌다. 이 사건에 큰 역할을 한 일본 공사 타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郎, 1842~1917)는 결국 이 사건의 책임을 지고 일본 정계를 떠나야 했다. 남의 나라에서 쿠데타를 주도한데다가, 실패해서 국익에 큰 해를 끼쳤으니 외교관으로서는 최악의 실책을 저지른 것이다.

결과적으로 일본의 입장에서는 "어설프게 되도 않은 음모를 꾸미다가 망했다."고 봐야 한다. 태평양 전쟁까지 꾸준히 이어지는 일본 대외정책에서 되도 않은 음모와 실패의 연속의 첫머리를 장식한다고 볼 수 있다.

여담으로 일본 내에서 후쿠자와 유키치 등 민간 친 개화파 인사는 조선 정부의 강력한 처벌에 충격을 받았다고 하는데, 어떤 나라가 대상이건 갑신정변과 같은 쿠데타를 후원해놓고 실패한 다음 그 세력이 무사하길 바라는 것 자체가 나이브하기 짝이 없는 발상이다. 이들이 한 짓은 현대 법률에 비추어보면 외환죄다. 외환죄 항목을 보면 사형으로 도배가 되어 있고, 전근대적 기준으로는 왕에게 반역한 역적이기도 하다.

이에 대한 비교대상으로 임오군란 당시 청군을 끌어들인 영선사 일행을 꼽을 수 있는데, 임오군란은 내부 반란에 대해서 기존 국가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하여 외부 군세를 끌어들여서 해결하려는 목적으로 행해졌다. 이는 '외국과 내통하여 해당정부에 대항한다'는 외환죄의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다. 청국군대를 끌어들인 것이 이후 청국의 영향력 확대를 가져오기는 했으나, 당시 조선왕실을 포함한 세력들은 청국군대를 끌어들인 것이 내부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인정했으며 수긍했다. 이는 걸프전쟁 시기 쿠웨이트와 사우디 아라비아가 이라크 군대 상대한다고 다국적군을 끌어들인 것과 마찬가지 행동이다. 해당 행동의 목적이 국가 내부 문제 해결에 있고, 군세를 끌어들인 이들이 외세를 통해서 뭔가 이득을 보려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44]

반면, 갑신정변의 경우는? 일본군대를 끌어들여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탈취를 기도했다. 이들이 외국군대를 끌어들인 것은 급박한 문제를 당장 해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일본군을 빌려서 정권을 장악하려는데 있었다. 이는 외환유치죄에 해당한다. 자신들이 정권을 잡지 못하면 온건개화파가 정권을 장악해서 개화가 늦어질 수도 있다 같은 것은 외환죄에 대한 범죄 조각사유가 될 수 없다. 이들과 비교될만한 이로 비슷한 시기의 인물이라면 황사영 정도를 꼽을 수 있겠다. 고려왕조의 경우는 삼별초의 난과 관련해 길속기 등에 막부까지 연루된 삼별초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특히나 삼별초와 개화파의 경우는 공통적으로 친일의 성향이 강했다는 점에서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중요한건 사형자체가 아니라 사형 방식의 잔혹함과 정변에 관련이 없는 가족들에게 까지 벌을 내린 전근대성이었다.[45] 일본은 이미 참수형과 거열형등 과거의 잔혹한 사형방식을 폐지한지 오래였다.그리고 스스로 문명국으로 자부하고 있던 상황에서 중세의 야만스러운 사형방식을 그대로 집행한 조선에 충격을 받은건 당연한 것이었다.

10. 정변 이후[편집]

조선의 정변을 진압한 청의 내정 간섭은 더욱 심화되며 일본과는 공사관 신축비와 배상금 지불을 내용으로 한성 조약이 체결되었다.

정변 과정에서 대립하던 일본과 청은 톈진 조약을 체결하여 청•일 양군은 철수하고, 이후 조선에 파병할때는 상대국에 서로 알릴 것 등을 약속하였다. 하지만 이 조약은 이후 청일 전쟁이 일어나는 배경이 되었다.

전제정치 하에서 이들의 행위는 명백히 반역으로 인식되었고, 집안에서 역적이 나올 시 심한 경우에는 그런 사람의 이름을 아예 족보에서 빼어 버리거나 항렬자를 바꾸기도 했다. 갑신정변 주동자들도 예외가 아니어서, 김옥균(안동 김씨)의 均자 항렬은 규(圭)로, 홍영식(남양 홍씨)의 植자 항렬은 표(杓)로, 박영효(반남 박씨)의 泳자 항렬은 승(勝)으로, 서광범(달성 서씨)의 光자 항렬은 병(丙)으로, 서재필(달성 서씨)의 載자 항렬은 정(廷)으로 각각 바뀌게 된다.

11. 미디어[편집]




[1] 한손을 외투에 넣었다고 프리메이슨이 조선에까지 손을 뻗친 증거라고 주장하는 답없는 음모론자들이 있다. 이 포즈는 나폴레옹 포즈라고 해서, 나폴레옹이 지병인 복통 때문에 자주 외투 안에 손을 넣었던 것이 나폴레옹 파의 상징처럼 되어 이후 엘리트 주도의 근대화 개혁을 구상하는 각국의 신흥 지식인 계층이 즐겨 따라하는 포즈가 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젊은 시절의 칼 마르크스도 이 포즈로 사진을 찍은 적이 있다는 것이다. [2] 권세가인 남양 홍씨, 아버지는 영의정 홍순목, 본인은 종 2품 병조참판. 철종의 사위였던 박영효도 칭찬할 만큼의 인품을 소유했다. 신사유람단(조사시찰단)의 일원이기도 하였으며 보빙사의 일원으로 미국에도 건너갔던 인물. 우정국 사건도 사실 이 사람 아니었으면 못했을지도 모른다. 이 사람이 우정국 총판이었으니까...[3] 이와 유사한 표현으로 급진개화파는 독립당, 일본당, 김씨당 등의 표현이 등장하고, 온건개화파는 사대당, 청국당, 혹은 민씨당 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이 역시 상대에 대한 비칭이다. 이중 일부는 일제시대 당파성론 속에서 강화되었고, 이 때문에 급진개화파에 대한 표현이 아주 긍정적으로 나타난다.[4] 근데 모든 온건개화파 무리가 민씨당이라 불린건 아니다. 온건파 거두인 김홍집, 김윤식은 아예 개화당 내각에 넣어주었고 어윤중은 급진파, 친일파들과 가깝게 지냈다. 또한 갑오개혁 때만 봐도 온건개화파와 민씨척족의 대립 역시 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5] 뒤에도 적지만, 갑신정변 주도는 개화당, 반대파는 수구당=민씨일족 이미지가 상당히 있고, 이전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기도 했다. 하지만 이 시기 왕후의 영향력 자체가 의심스러운데다, 온건개화파를 통으로 수구당에 묶어서 민씨세력으로 넣으면 어쩌자고. 결국 이 논리는 일제시대에 아주 잘 써먹었다.[6] 당시 상황은 급진개화파와 온건개화파의 대립 과정이었고 왕후는 온건개화파의 손을 들었다. 급진개화파에서는 반대편을 수구라고 불렀는데, 이런 식의 극단적 표현은 급진개화파 당사자들의 표현을 기록한 것이라면 몰라도 일반적으로는 쓰면 안된다.[7] 영선사로 파견되어 청에 머무르고 있었던 김윤식어윤중이다.[8] 그런데 이 고문들 중에서 묄렌도르프 같은 비청국 출신 고문들은 오히려 조선을 편들었다. 돈만 제대로 주면 누구나 도와주는 것이 당시 고문들이었다. 대한제국 시기의 고문들도 일본에서는 조선 먹으라고 하더니 대한제국에서는 일본 막으라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프로페셔널[9] 이걸 개화에 대한 반발이라고 하는데, 반대쪽도 온건개화파다. 그래서 온건개화파는 빼놓고 명성왕후를 가져와서 수구 세력이라고 하는데 이 대립의 핵심은 청의 양무운동을 기준으로 삼은 온건개화파와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롤모델로 삼은 급진개화파의 방법론 싸움이다. 최익현 수준의 개화반대파는 이미 세력이 없었다.[10] 궐의 고씨 성을 가진 궁녀를 포섭해 폭약을 설치했다고 한다. 이 궁녀는 7척 장신에 왠만한 남자 뺨치게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세서 수호지의 등장인물인 고대수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한다. 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붙잡혀 조리돌림당한 끝에 무참히 살해당했다.[11] 그중에는 일본인도 포함되어 있었다.[12] 보빙사 정사로 미국에 방문하여 프린스 민이라 불리고 대접받았다. 고종의 조카이자 명성황후의 조카이기도 하다. 본래 개화파였지만 임오군란 이후 민씨 척족들이 청에 사대하는 쪽으로 기울었기에 결국 친족들의 대세를 따라 개화파와 대적한다. 그리고 이때 민영익의 친부 민태호는 목숨을 건진 아들과 달리 자객에 의해 살해당했다.[13] 이때 고종이 '日使來衛'라는 쪽지를 써서 일본 공사를 불렀다고 하는데, 이 어필이 위조 아니냐는 연구결과가 있다. 실제로 조선 정부는 사건 당시 고종은 일본 공사를 부르는 것을 거부했다고 발표했다.[14] 이때 김옥균 등이 황급히 창덕궁으로 와서 왕과 왕비를 경우궁으로 옮기는 가운데, 민씨는 뭔가 눈치를 채 "이것이 청군의 소행인가, 아님 일본의 소행인가?"라고 날카롭게 묻자 김옥균은 "청군..."이라고 얼버무렸다.[15] 한마디로 신분제 폐지.[16] 토지제도 개혁이 아닌 조세제도 개혁이다.[17] 규장각세도정치의 기반이 됐기 때문이다.[18] 전근대적인 특정 상인의 특권 폐지.[19] 재정의 일원화.[20] 이를 고종의 근친이라고 이전에 기록되었는데, 대부분의 종친들은 고종과 흥선대원군을 분류하면 흥선대원군파로 분류된다. 흥선대원군이 집권초기부터 종친우대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21] 이때 이들은 일본으로 가는 배에 숨어있었는데 고종의 명으로 그들을 체포하러 온 묄렌도르프가 그 배의 선장에게 반역자가 숨어있으니 체포에 협조해 달라고 했다. 이때 일본 공사 하나부사는 김옥균 등에게 하선을 요구했으나, 선장이 '내 배에 탄 사람은 건드릴 수 없다'는 의지로 없다고 거짓말하고 허공에 총을 한발 쏘면서 그들을 넘기지 않은 채 제물포를 떠났다..는 얘기가 있는데, 이게 사실은 훗날 김옥균을 찬양하는 일제시대 전기에서 나온 이야기.(...) 심지어 공신력 있는(?) 역사만화들에도 버젓히 나오지만 그냥 야사라고 한다. 결정적으로 당시 공사는 하나부사도 아니고 다케조에 신이치로였다. 게다가 일본 선장 한 사람이 권총 들었다고 그 많은 청나라 병사들이 아무 행동을 취하지 못했다는건 그야말로 넌센스다.[22] 그런데 대신 추천 자체가 중추원의 권한이 아니었기 때문에 월권이고, 추천된 인물이 죄다 박영효, 서재필등 고종에게 찍힌 사람들이었다. 결국 중추원 해산->독립협회 강제 해산의 순서를 밟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덤으로 관료추천은 필적 감정까지 해서 누가 누굴 추천했는지 모조리 색출했다고.[23] 조선인 최초의 학사 학위였다.[24] 당시 서광범은 이중국적으로 미국 시민권을 갖고 있었다. 그러니까 미국인이 주미조선대사로 파견된 셈이다.[25] 동경에서 윤치호를 만나서 한 이야기이다.[26] 일제강점기인 동광에서 이광수와 인터뷰한 것을 다시 1934년 동아일보가 인용한 기록이다.[27] 사실 이 단락은 윤웅렬이 자신이 발을 뺀 것을 싹 제외하고 변명하고 있는 대목이므로 실패의 배경만을 언급할 때는 잘 인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얼마나 실패 확률이 높다고 봐서 발을 제대로 빼려고 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에 여기에 수록한다. 그리고 윤웅렬과 이후의 윤치호가 어떻게 처세를 했는지도 잘 보여주고.. 실제로 윤웅렬과 윤치호는 만주로 도망쳤다.[28] 단, 이것은 박영효와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에 친일파로 돌아선 이후의 인터뷰란 것은 고려하자. 오해 이야기는 그것 때문이다.[29] 근데 대부분의 온건개화파는 제거 대상에 없었다. 민영익이나 민씨 척족과 가까웠던 이조연, 윤태준, 한규직, 조영하 등을 제외하면 김홍집, 어윤중 등 온건개화파 거두들은 애초에 제거대상이 아니었고 나중에 통수치는 김윤식조차 죽이지 않고 개화당 내각에 넣어주었다. [30] 근데 민영익을 제외한 나머지는 애당초 제거대상이 아니었다.[31] 기기창 총판을 지냈으며 영선사로 청과 일본올 오갔다. 친군후영사. [32] 무관으로 이전의 어영대장, 이후에는 모든 신식군인의 총사령관이라고 할 수 있는 친군전영의 전영사를 지냈다. 군제개편과정에서 박영효가 이끌던 부대가 이 친군전영에 합병된 것 역시 급진개화파의 불만중 하나였다. 만일 이 당시 합병되지 않았다면 박영효의 이 병력이 정변에 동원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사관학교 생도들이 이 정변에 동원되어서 칼질을 했다.) 한규직은 정변 당시 변장해서 몸을 피했다가도 고종을 만나러가기 위해서 궁으로 가는 도중에 발각되어 참살되었다.[33] 역시 김윤식과 함께 영선사로 청에 방문했던 인물로 친군좌영사. 역시 기기국과 해상공국에 참여하였다.[34] 오경석, 박규수와 함께 흥선대원군 집권기부터 개화의 필요를 강조했던 인물로 조미통상수호조약을 포함한 외교관계에 참여하였으며, 한성순보 발간에도 참여하였다. 사망시에는 해상방어 사령관인 해방총관이었다.[35] 동도서기파 유학자 유신환의 제자이며 민영익의 친부.[36] 갑신정변 당시 유일하게 칼을 맞지 않은 인물답게 개화쪽 역할은 적다. 방곡령 당시 일본에 크게 불만을 드러내었고, 위안스카이를 몰아내고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이는데 노력한 인물.[37] 신정왕후 조씨의 조카이며 조성하와는 6촌관계이다. 곤궁했던 시기의 흥선대원군과도 사이가 나쁘지 않아서 대원군 집권시기에는 조대비와 대원군의 가교역할을 하였다. 고종 친정 시기에는 고종의 친위세력이 되어서 대원군의 실각에 조력했고, 이후 조영, 조미, 조독 통상수호조약 등 외교적으로 활약했다.[38] 민씨 척족에 대한 문제점을 적어두었는데, 정작 민영익이 이탈하기 전까지 급진개화파들은 민영익의 집에 모여서 토론을 했다. 민영익은 민씨척족이 아닌가, 아니면 민영익만 예외인가.[39] 솔직히 이부분이 가장 골 때린데, 온건개화파와 급진개화파는 원래 한 뿌리였다. 그런데 고위 관료와 민씨 세력의 상당수는 영선사로 청에 파견되면서 청과 연줄이 생겨서 청에서 진행하던 양무운동의 영향을 받아서 온건개화파가 되었고, 보다 세력이 작고 젊었던 이들은 수신사나 보빙사가 되어서 일본과 미국에 파견된 결과 일본과 미국에 연줄이 생겼고 당시 일본에서 진행하던 메이지 유신의 영향을 받아서 급진개화파가 되었다. 단적으로 민영익이 급진개화파가 친하게 지낸 이유는 미국에 파견된 보빙사의 정사였기 때문이다. 사상의 차이와 의식의 차이? 그런거 없다.[40] 애초에 절대 다수의 개화파들은 자기들이 배운 것을 그대로 사회에 적용하고, 그 개화를 자신들이 하려고 노력했다. 즉, 개화에 대한 제한적 지식과 외부와의 연줄에 의거해서 자신의 권력욕과 의지를 추구했다. 개화파의 진정한 한계는 여기에 있다. 김홍집 정도가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 몇 안되는 예외이고, 일제시대에 일제에 타협하지 않는 이들이 본격적으로 자신들의 생각을 키우기 시작한다.[41] 여기에는 갑신정변 때 안 죽은 박영효 등이 포함된다.[42] 이 둘은 모두 조사시찰단 파견 경력이 있다.[43] 이런 평가를 하는 이유는 별 것 없다. 마르크스나 스탈린의 일선적 발전과 혁명단계론에 의하면 부르주아 혁명이 있은 다음에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난다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공산주의인 김일성 이전에 부르주아 혁명을 억지로 집어넣는 것이다. 그 부르주아 혁명으로 이미지상으로도 별로 안 좋고, 외세 그것도 일본을 끌어들인 갑신정변을 대입시키는 것이다.[44] 이 주장에도 문제가 있는 것이, 애초에 문제를 크게 만든 것은 고종, 명성황후 및 민씨 외척의 부패다. 이들이 나라를 올바로 다스렸으면 애초에 군인들 및 흥선대원군의 봉기도 없었을 것이다. 이 부분은 상당부분 사실이지만, 여기서 다루는 외환죄의 문제는 아니다.[45] 후쿠자와 유키치의 조선독립당의 처형이란 사설의 내용을 보면 그도 주모자의 처형은 어쩔수 없지만 죄가 없는 그들의 부모, 조부모, 처자식, 나이 어린 손자까지 처형한 것에 대하여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야만행위라 비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