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회

최근 수정 시각:

타국어 표기

영어

Methodist Church

한자

監理會

에스페란토

Metodista preĝejo


1. 개요2. 특징
2.1. 조직 특성2.2. 신학적 특성
3. 한국의 감리교
3.1. 역사
3.1.1. 포교 초창기3.1.2. 현대
3.2. 특징3.3. 조직 및 교세
3.3.1. 산하 신학교
3.4. 교육3.5. 신앙고백
3.5.1. 1930년 조선감리교의 교리적 선언3.5.2. 1997년 감리회 신앙고백3.5.3.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신경
3.6. 비판과 논란거리
3.6.1. 친일행적3.6.2. 정치적인 교단 구조3.6.3. 교단의 분열 여부
3.6.3.1. 논란에 대한 반박3.6.3.2. 반박에 대한 재반박
3.7. 주요 교회
4. 일본 감리교(メスジスト)5. 인물
5.1. 목회자, 신학자
5.1.1. 해외5.1.2. 국내
5.2. 평신도
5.2.1. 해외5.2.2. 국내
5.2.2.1. 독립 운동가5.2.2.2. 친일 인사5.2.2.3. 정치인5.2.2.4. 탤런트5.2.2.5. 가수5.2.2.6. 기타
5.3. 감리교인이었던 인물
6. 외부 링크

1. 개요[편집]

감리회는 성공회 사제 존 웨슬리(John Wesley)[1][2]의 18세기 영국의 신앙 부흥 운동으로 성공회에서 분리되어 창설된[3], 개신교의 한 교파이다. 현재 전 세계에 7천500만명 이상의 신도가 있다.

웨슬리가 교구들을 넘나들며 사목하는 것을 영국 성공회 측에서 문제 삼아서, 웨슬리는 한때 사제로서의 직무 권한을 정지당하기도 했었다.[4] 웨슬리는 성공회에서 탈퇴하기를 원치 않았으나, 그러한 갈등이 계기가 되어 웨슬리를 따르는 세력이 성공회에서 분리되어 감리교를 세웠다.
그러나 끝내 웨슬리는 성공회를 떠나지 않았고, 성공회 사제로 생을 마감했다.[5] 정작 그는 새로운 교단을 만드는 것보다 경건한 신앙 생활의 방법으로 확고한 규칙(Method)을 세우고 실행하는 것에 관심이 많았다. 이 때문에 주변 사람들로부터 '규칙쟁이(Methodist)'라는 별명(그 당시에는 멸칭)을 얻었고, 이는 감리교회(Methodist Church)의 공식 명칭이 되었다.

2. 특징[편집]

2.1. 조직 특성[편집]

장로회가 기본적으로 장로 중심의 정치 체제이며 개교회 자치 성향[6]이 강한 것과 달리 감리회는 보편교회[7]와 비슷한 감독제를 채택하고 있다.

기독교 대한 감리회를 기준으로 하면 일정 기준의 교회가 모여 지방회를 형성하고, 지방회가 모여 연회를, 연회가 모여 총회를 형성한다. 지방회의 장은 감리사(監理師, The Superintendent), 연회의 장은 감독[8], 총회의 장은 감독회장이다. 감리사와 감독, 감독회장은 선거에 의하여 선출[9]된다.

감리사와 감독의 임기는 2년이며 감리사와 달리 감독은 연임할 수 없다. 감독회장의 임기는 4년이며 감독처럼 연임이 불가능하다. 본래 감독은 연회를 이끌며 목사 안수를 주고 주요 의사 결정을 내리며 거기다가 목회자를 파송하는 어마어마한 권한이 있었다. 그러나 감독에게 권력이 집중되어 각종 병폐가 나타나자 현재는 파송 권한은 없어진 상태이다.

그럼에도 원칙상 감독의 파송으로 목회자가 부임하는 것이므로, 개교회가 개별적으로 목회자를 청빙해도 형식상으로나마 감독의 승인이 있어야 한다. 감리교(監理敎)라는 이름 자체가 사실 '감독이 치리하는 교회'라는 뜻으로, 영어로 하면 Episcopal Church이다. 하지만 창시자인 존 웨슬리는 감독제를 반대하였고, 존 웨슬리의 직계인 영국 감리교회에는 감독이 없다[10]

영국 감리교회의 구조는 미국, 한국 감리교회와 약간 다른데, 지방회에 해당하는 구역회(The Circuit)가 있는데 구역회의 장은 감리사(A Circuit Superintendent)이다. 구역회가 모여서 지방회(The District)를 형성하고, 지방회의 장은 지방회장?(The District Chair)이다. 지방회가 모여 연회(The Conference)를 이루고 이 연회가 미국, 한국 감리교회의 총회와 위상이 같다. 연회의 장은 연회장(The President)이다. 연회에는 연회장과 부연회장(The Vice President)가 있는데, 연회장은 목사가, 부연회장은 평신도가 맡으며, 각각의 임기는 1년이다.

개교회 안에서도 여러 조직이 있다. 개교회의 최하위 조직은 속회(屬會, The Class Meeting)이다. 속회야말로 감리교회가 교회사에 남긴 큰 공헌이라 할 수 있는데, 속회가 소그룹 교육의 원형이기 때문이다. 속회는 보통 10명 정도로 구성되어 있지만, 개교회 재량껏 속회를 조정한다. 속회의 장은 속장(The Class Leader)이며, 속회의 구성원은 속원이라고 부른다. 속장은 권사가 맡는다.[11] 속회는 일주일에 한 번 씩 속원들의 집에서 돌아가며 모이는 것이 원칙이다. 이는 속회의 기원이 각 가정의 어려움을 살피는 데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가귀도(가족 전부가 교회에 다니는)가 된 집안이 아닐 경우 부득이 교회에서 모이는 경우도 많다.

속회에서는 예배를 드리며 각 속원들의 가정을 속장이 살피고 서로 신앙 상담을 하거나 고민들을 나눈다. 속회의 상위 조직은 당회이다. 당회는 사실 장로교의 제도가 들어온 것이라 할 수 있는데, 당회는 개교회의 1년 정산 모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당회의 장인 당회장은 담임 목사가 맡는 것이 관례이며, 당회는 예산의 결산, 인사(人事) 문제 등을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처리한다. 당회원은 입교인[12]이다. 당회와 달리 의결권은 없지만 필요할 때마다 교회의 여러 일을 신속히 처리하기 위한 기구로는 기획위원회라는 것이 있다. 담임 목사와 장로, 소수의 권사 등으로 이루어진다.

당회의 상위 조직은 구역회다. 사실 이 구역회는 영국 감리교에 기원을 두고 있는데 사실상 당회와 다르지 않다. 원래 구역회에는 1개 이상의 교회가 있는 것이지만, 한국 감리교회에서는 구역이 곧 개교회이다. 다만 당회와 소관 업무가 다른데, 당회는 담임 목사가 진행할 수 있지만 구역회는 감리사가 진행하며 교회의 1년 예산안을 감리사의 관리에 의해 처리한다.

위와 같은 감리교회의 조직적 특성을 '연관주의(Connexionism)'라고 한다. 개교회가 각개전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끈끈하게 유대 관계를 형성하여 각종 어려움이나 좋은 것을 함께 공유하는 것이 감리교회의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2.2. 신학적 특성[편집]

장 칼뱅의 이중예정론을 주된 교리로 내세우는 장로회와 달리, 감리교는 '선행 은총(The Prevenient Grace)'를 강조한다. 감리교가 장로교와 달리 "자유의지"를 강조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때의 자유의지는 선행 은총을 전제로 하는 자유의지이다. 선행 은총을 전제로 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굉장히 큰 차이가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유명한 펠라기우스 논쟁에서 인간의 전적 타락과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총을 이야기했고, 루터교장로교도 모두 원죄로 말미암은 인간의 전적인 타락을 이야기한다. 즉 구원에 있어서 전적으로 인간은 수동적인 존재인 노예 의지론을 내세운다. 이를 가지고 루터에라스무스가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장로교는 도르트(Dort) 회의에서 정리한 5가지 신조, 일명 튤립(TULIP) 교리[13]의 가장 첫 머리에 오는 것이 '인간의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of Man)'이다. 감리교도 원죄로 말미암아 인간의 의지가 전적으로 타락했다고 본다. 따라서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고 알 수도 없으며 알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이렇게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인간들에게 하나님은 먼저 자기를 알려주셨는데, 이것이 바로 계시이며, 계시는 곧 말씀(logos)이며, 말씀은 곧 하나님이자 인간이 된 예수 그리스도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은 인간의 전적 타락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귀결되지 못한다. 그렇기에 교회는 2천년 동안 자유의지를 말하는 이들은 이단으로 정죄해 왔다. 만약 세간의 인식대로 감리교가 자유의지를 말한다면 감리교는 이단이다. 하지만 감리교는 선행은총을 전제로 한 자유의지를 말한다. 선행은총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타락했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관리 안에 있다는 뜻이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날 때 가죽옷을 지어 입힌 은총이며,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똑같이 해와 비를 주시는 은총이며, 자연의 오묘한 섭리를 통해 창조주의 숨결을 느끼게 하는 은총이다. 비록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선행적인 은총 안에 머물러 있으며, 선행 은총에 의해 어느 정도 조물주를 인식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말씀이 선포될 때 이미 선행 은총으로 어느 정도 절대자를 인식하고 느낄 수 있는 인간은 그 말씀을 받아들일지 거부할지 선택할 수 있다. 즉 선행은총은 구원을 주는 은총이 아닌 구원으로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할 뿐이다.

선행은총으로 어느 정도 하나님을 인식하고 복음을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이 복음을 받아들이면 하나님에 의해 의롭다고 칭해진다. 이것이 바로 칭의이며 여기서의 칭의는 루터, 칼뱅이 말하는 것과 동일하다. 의롭다고 칭해진 인간은 다시 태어난다. 이것이 중생이다. 다시 태어난 인간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러야 하는데, 이 과정이 성화이며, 이것이 완성된 것이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다. 그러나 완전이라는 것은 상태적인 개념이라기 보다 동적인 개념이다. 인간이 이 세상에서 죄를 완전히 정복하고 죄의 유혹도 받지 않는 그런 초인적인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죄와 싸우려 하며 경건에 힘 쓰는 모습이 바로 완전이 말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곧 선행은총, 칭의, 중생, 성화, 완전 이 다섯 단계를 '구원에 이르는 다섯 가지 문'이라고 흔히 이야기하며, 감리교 교리의 특징으로 일컬어진다.

이러한 신학적 배경에서 감리교는 신앙의 실천을 강조하며, 신앙의 실천도 개인적인 영역만이 아닌 사회적인 영역까지도 확장해서 이야기한다. 그래서 초창기부터 감리교는 빈민 구제, 죄수 교화 활동 등을 활발히 하였고, 이를 더욱 강조하여 분리된 교파가 바로 구세군이다.[14]

이러한 특성에 따라, 개혁교회(장로회)에 비해 조직신학 및 기독교 사상, 성경학 등에서 진보적인 입장도 곧잘 받아들이는 편이다.[15] 하지만 급진적인 변화보다는 전통과의 조화를 강조하는 중도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3. 한국의 감리교[편집]

3.1. 역사[편집]

3.1.1. 포교 초창기[편집]

한국감리교회는 1884년 맥클레이 선교사가 내한하여 고종의 윤허를 받아 의료선교와 교육사업을 시작한 것을 그 시초로 본다.[16] 이후 1885년 헨리 아펜젤러배재학당을, 1886년 메리 스크랜튼이 이화학당을, 1898년 조세핀 캠벨이 캐롤라이나 학당[17]을 세웠다.

미국의 감리교단처럼 남감리회, 북감리회로 유지됐던게 1930년 기독교조선감리교회 연회로 통합후 독립하여 자치교회를 설립하면서 본격적으로 한국 감리교회가 정립이 됐다.[18]

개신교 포교 초창기 때 감리회장로회가 과열 경쟁(?)을 벌이자 서울을 중심으로 북쪽은 감리회가, 남쪽은 장로회가 집중하여 포교하기로 합의를 했다고 한다고 과거에 적혀 있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당시 감리교와 장로교의 선교지 분할은 단순히 서울을 중심하여 남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서울 같은 큰 도시는 감리교와 장로교 선교지에 포함되었다. 남북 감리교를 통틀어 감리교는 경기, 강원, 충청, 황해, 평남, 평북 일부지역으로 선교지를 구성하였고, 장로교는 경기, 경북, 경남, 전북, 전남, 제주, 황해, 평남, 평북, 함남, 함북으로 선교지를 구성하였다. 당시 감리교는 남북 감리회 두 개의 선교부만 들어와 있었고 장로교는 미 남북 장로회, 캐나다 장로회, 호주 장로회 총 네 개의 선교부가 들어와 있어서 처음부터 양 교단은 교세 차이를 보였다. 그래서 장로교가 보다 넓은 지역에 선교지를 할당 받을 수 있었다. 따라서 현재 북한 지역에 우세했던 교단은 감리교가 아니라 장로교였다. 선교지 분할에 의미가 없어진 지금, 감리교가 중부 지역에 강세를 보이고 장로교가 전라도, 경상도를 포함한 남부 지역까지 강세를 보이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존 웨슬리 시절부터 낙오지 지역에 중점적인 선교를 하던 관례대로, 섬이나 해안 지역에 감리교의 교세가 강한 편이다. 현재 감리회는 처음 들어온 인천을 비롯, 서울, 경기도, 충청도(서해안) 쪽이 강세를 보인다. 또 강원도 지역에서도 나름 강세를 보이는 듯. 다만 경상도전라도 쪽은 장로교단이 압도적이라 감리교는 좀 생소하게 받아들이는 듯 하다.

개신교 포교 초창기의 감리교장로교의 교세 다툼은 생각보다 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3.1운동을 이끌었던 민족대표 33인도 원래는 천도교 15인, 개신교 15인으로 30인을 구성하려 했으나 감리교와 장로교가 숫자를 놓고 다투다가 각각 8명을 뽑아 16명으로 개신교 대표를 늘리는 대신, 불교 2인도 포함시키면서 현재의 33인으로 구성되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개신교 포교 초창기부터 감리교장로교와 함께 경쟁 및 협력을 해오며 교류를 한 결과, 서로가 서로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대한감리교에 있는 장로라는 직분을 들 수 있다. 교리 상 감리교는 주교제의 형식을 취하는 교파로, 원래대로라면 장로라는 직분이 들어올 자리가 없다. 또한 장로교도 감리교의 요소를 많이 도입했는데, 교회 평신도를 여러 구역으로 나누어 주중에 따로 모여 예배를 드리는 구역예배가 바로 감리교적인 요소이다.
서로가 서로의 장점을 받아들여서 더 좋은 교회가 된다는 점은 이로운 점이라 할 수 있으나, 원래 가지고있는 자기 교파만의 색채가 덜해지는 측면도 부정할 수 없다. 실제로 한국의 목회 필드에서는, 감리교 교회와 장로교 교회의 차이점을 분명히 말하기가 어렵다.[19]

3.1.2. 현대[편집]

2008년 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회장 선출이 파행으로 치달아 2010년에 감독회장 자리가 공석이 되기도 했다. 감독회장 후보자들 간의 자격 요건 문제로 생긴 분쟁이 감리교 전체의 파벌 싸움으로 번져 수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참고). 이것을 '감리교 사태'라고 한다. 결국 법원에서는 2010년 12월에 감독회장 대행으로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의 장로를 맡고 있는 변호사를 선임했다(참고). 감리교 내부의 대립이 극심하다보니 법원에서 결국 공석이 된 감독회장을 감리교 목사가 아닌 장로교 장로로 선임하는 지경까지 간 것. 2012년에 전임 감독회장이 임시 감독회장을 맡아 이 문제를 수습하고 2013년에 정식 감독회장이 선출이 돼서야 '감리교 사태'가 어느 정도 진정된 듯 하다.

2012년 9월 25일 감리교 총회에서 목회세습 금지법이 통과되었다. 이미 목회세습 문제가 오래된 상황에서 감리교에서 먼저 뒤늦게나마 목회세습을 막아보겠다고 나서 사회적으로도 크게 보도된 상황. 이런 상황에서 김홍도 목사는 다 날 죽이려 든다라고 미국에서 외쳤대나 뭐래나. 역시 불륜 6걸의 수장 답다. 하지만 이런 규정이 생긴 뒤에도 편법[20]을 통해 목회세습을 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여 현재는 아들은 아버지가 담임했던 교회를 10년간 담임할 수 없도록 규정을 보완하였다. 직접적인 세습의 길은 거의 막힌 셈이다.[21]

2016년 1월 14일 제 31차 감리교 임시총회에서는 한국 교단 중 처음으로 목회자 이중직을 허용하였다. 물론 장정개정위원회가 올린 개정안에 따라서 기존 이중 직업을 가진 교역자를 불성실한 교역자로 규정안 기존 법안을 재정자립이 어려운 미자립 교회[22]에서만 허용하였다. 이에 미자립교회 담임자가 이중직을 허락받으려면 , 해당연회 감독으로부터 근무지, 직종, 근무시간등을 서면으로 신청하고 허락받아야 한다. 이전에도 예장통합에서 목회자 이중직을 막거나 정죄하면 안된다고 보고서를 올렸으나 실제적으로 장정에 채택하지 않은 것을 본다면 최초로 이중직을 허용한 것은 그만큼 현실적으로 미자립 교회에 대한 지원이 전과 같지 않고 현실적으로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3.2. 특징[편집]

감리회는 미국에서는 상당히 진보적이며 이성을 중시하는 교파로 알려져 있는것과 달리, 한국의 감리회는 한국 개신교의 절반 가량을 차지하고 있는 종파인 개혁교회(장로회)의 개혁주의 신앙의 영향을 많이 받아 보수적인 편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교회와 교단에만 국한될 뿐 신학대에서는 반면 원래의 색깔처럼 굉장히 진보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처럼 감리교회 대부분이 보수적이기에 신학생들 또한 보수적인 입장을 가진 신학생들이 여럿 있으며 진보적인 신학교수들의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는 학생들이 꽤 있는 편이다. 합동보수·고신·재건 등 보수적인 장로교단에서는 감리교에서 신학 공부를 했다고 하면, 좋게 말해서 자유주의자, 나쁘게 말해서 이단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23]

이는 굉장히 이상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 감리회의 기본 입장과 장로회의 기본 입장은 상당히 다르며, 교리적 측면으로 보면 오히려 서로를 어느 정도는 이단으로 해석[24][25]할 수도 있는 측면까지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불륜 6걸 문서에 나와있는 김홍도 목사 같은 경우엔 근본주의적이며 반이성적인 발언을 남발하여 리처드 도킨스에게 세계구급으로 까이기도 했을 정도. 또한 인터넷에서 활동하는 몇몇 감리회 계통 인사들 역시도 근본주의적인 신학을 주장하는 사람이 많아서 상당한 차이를 느끼게 한다.

3.3. 조직 및 교세[편집]

현재 기독교대한감리회가 대한민국 감리회를 대표하고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의 합동-통합-백석에 이어 4번째로 큰 교단이다. 그리고 예수교대한감리회을 비롯한 감리교를 표방하는 소수의 교단들이 존재한다.# 참고로 JMS 등의 일부 사이비 종교에서 예수교대한감리회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이 이단으로 오해받는 일도 있다[26]. 감리교회를 표방한 소수의 교단들이 존재함에도 한국 감리교는 분열되지 않은 하나의 감리교회로 본다. 왜냐하면 장로회와 달리 총회가 분열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교 대한 감리회의 경우 군목 출신인 한 감리교 목사가 지나치게 타락한 기독교 대한 감리회의 현실과 지나치게 진보적인 신학에 반발하여 독자적인 교단을 만들어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장로교처럼 서로 제명 처리 하고 총회를 따로 열며 자기네가 정통이라고 우기는 경우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총회는 따로 연다. 그리고 예수교 대한감리회의 홈페이지의 소개글을 보면 글쎄... 날서 있던데 판단은 자유다.

감리회 조직도
기독교대한감리회는 총회 - 연회 - 지방회 - 구역회 - 당회의 수직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총회는 본부라고 할 수 있으며, 연회는 천주교의 교구와 같이 전국을 각 지역별로 나눈 것이다. 지방회와 구역회는 연회를 더 자잘하게 나눈 것이며, 당회는 각각의 교회를 의미한다.

총회와 연회의 대표자는 각각 감독회장, 감독이라고 하며, 지방회와 구역회는 감리사라고 한다.

파일:external/s3-ap-northeast-2.amazonaws.com/ac-map.png
국내 연회는 서울연회(서울 북부), 서울남연회(서울 남부), 중부연회(인천, 경기 서부), 경기연회(경기 남서부), 중앙연회(경기 동부), 동부연회(강원), 충북연회(충북), 충청연회(충남 서부), 남부연회(충남 남부), 삼남연회(영남), 호남선교연회(호남)가 있으며, 미국의 미주특별연회(미국 한인교회)와 서부연회(북한)가 존재한다.

각 연회 관할구역의 경계는 장로교의 노회 관할구역처럼 느슨하지 않고, 가톨릭·성공회 교구의 관할구역 경계처럼 명확히 구분되어 있다.

기독교대한감리회 기준 2016년 현재 교인수는 137만여 명이다.감리회 교세현황

2000년부터 자세한 교세 변화는 기독교 대한감리회 본부선교국(KMCMission) 홈페이지에서 확인 가능하다.

3.3.1. 산하 신학교[편집]

3.4. 교육[편집]

한국의 감리교 관련 4년제 대학교로는 감리교신학대학교(약칭 감신대), 협성대학교, 목원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연세대학교[27], 그리고 배재대학교가 있다. 신학과정이 있는 학교 중 메인인 감리교신학대학교는 신학적으로 상당히 진보적이나 목원대협성대는 보수적인 편이다.

이 중 감리교신학대학교, 협성대학교, 목원대학교, 연세대학교에 교역자 양성 기능이 있으며, 배재대학교이화여자대학교신학과가 없다. 물론 미션스쿨이다 보니 채플도 있고 배재대에는 복지신학과가, 이화여대에는 기독교학과가 있지만, 교역자양성기능은 없다.[28] 연세대 신학과의 경우 감신대, 협성대, 목원대에서 감리교 필수 강의들을 수강하면 감리교 목사가 될 수 있다.

감리교계 전문대학으로는 배화여자대학교 등이 있다.

3.5. 신앙고백[편집]

3.5.1. 1930년 조선감리교의 교리적 선언[편집]

1. 우리는 만물의 창조자시요 섭리자시며 모든 선(善)과 미(美)와 애(愛)와 진(眞)의 근원이 되시는 오직 하나이신 하나님을 믿으며
2. 우리는 하나님이 육신으로 나타나사 우리의 스승이 되시고 모범이 되며 대속자가 되시고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3.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시사 우리의 지도와 위안과 힘이 되시는 성신을 믿으며
4. 우리는 사랑기도의 생활을 믿으며 죄를 용서하심과 모든 요구에 넉넉하신 은혜를 믿으며
5. 우리는 구약과 신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신앙과 실행의 충분한 표준이 됨을 믿으며
6. 우리는 살아계신 주 안에서 하나이 된 모든 사람들이 예배와 봉사를 목적하여 단결한 교회를 믿으며
7.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실현된 인류사회가 천국임을 믿으며 하나님 아버지 앞에 모든 사람이 형제됨을 믿으며
8. 우리는 의의 최후 승리와 영생을 믿노라.

아멘

3.5.2. 1997년 감리회 신앙고백[편집]

1. 우리는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며 주관하시는 거룩하고 오직 한 분이신 아버지 하나님을 믿습니다.
2. 우리는 말씀이 육신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부활승천 하심으로 대속자가 되시고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3. 우리는 우리와 함께 계셔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며 완전하게 하시며 위안과 힘이 되시는 성령을 믿습니다.
4. 우리는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구원에 이르는 도리와 신앙생활에 충분한 표준이 됨을 믿습니다.
5.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해 죄사함을 받아 거룩해지며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동참하도록 부름받음을 믿습니다.
6. 우리는 예배와 친교, 교육과 봉사, 전도와 선교를 위해 하나가 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믿습니다.
7. 우리는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함으로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나누고 평화의 세계를 이루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형제됨을 믿습니다.
8.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 우리 몸의 부활영생그리고 의의 최후 승리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믿습니다.

아멘

3.5.3.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신경[편집]

감리회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정의로운 사회구현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온 전통을 가지고 있다. 1930년 제1회 총회에서 사회신경을 채택하고 이를 신앙의 실천적 목표로 삼아, 보다 나은 사회를 이루는 데 이바지하여 왔다. 우리는 오늘의 시대가 안고 있는 새로운 문제들을 앞에 놓고 우리의 사회적 삶의 새로운 실천 원칙을 받아들여야 할 시점에 도달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우리 감리교인은 우리에게 선한 의지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힘입어 우리의 가정, 사회, 국가, 세계 그리고 생태적 환경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선언하는 바이다. 우리는 만물을 선하게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으며,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일에 부르심을 받았다.

1. 하나님의 창조와 생태계의 보존 우리는 하나님의 명하심을 따라 우주 만물을 책임 있게 보존하고 생태계의 위기를 극복해야 하는 사명이 있다.
2. 가정과 성, 인구 정책 우리는 가정과 성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귀한 제도임을 믿는다. 가정을 올바로 보존하며 성의 순결성을 지키는 것은 우리의 사명이다. 그리고 우리는 인구 문제로 인한 세계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책임 있는 인구 정책이 수립되도록 노력한다.
3. 개인의 인권과 민주주의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에게 자유와 인권이 있음을 믿는다. 따라서 정권은 민주적 절차와 국민의 위임으로 수립되어야 하며 국민 앞에 책임을 져야 한다. 우리는 정권 유지를 위해 국민을 억압하고 언론의 자유를 위협하는 어떠한 정치 제도도 배격한다.
4. 자유와 평등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유롭고 평등하기 때문에 성별, 연령, 계급, 지역, 인종 등의 이유로 차별하는 것을 배격하며 모든 사람들이 더불어 사는 사회 건설에 헌신한다.
5. 노동과 분배 정의 우리는 자기실현을 위한 노동의 존엄성과 하나님이 주신 소명으로서의 직업을 귀하게 여긴다. 동시에 우리는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빈부의 격차를 시정하여 분배 정의가 실현되도록 최선을 다한다.
6. 복지 사회 건설 우리는 부를 독점하여 사회의 균형을 깨뜨리는 무간섭 자본주의를 거부하며 동시에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전체주의적 사회주의도 배격한다. 우리는 온 국민이 사랑과 봉사의 정신으로 서로 도우며 사는 복지 사회 건설에 매진한다.
7. 인간화와 도덕성 회복 오늘의 지나친 과학 기술주의가 비인간화를 가져오고 물질 만능주의가 도덕적 타락(성도덕, 퇴폐문화, 마약 등)을 초래한다. 따라서 우리는 올바른 인간 교육, 건전한 생활, 절제 운동(금주, 금연 등)을 통하여 새로운 가치관의 형성과 도덕성 회복을 위해 앞장선다.
8. 생명 공학과 의료 윤리 우리는 근래에 급속히 발전한 생명 공학이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와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할 수도 있다는 사실과, 근대 의학의 발전이 가져오는 장기 이식 등에 대해 교회의 책임 있는 대책과 올바른 의료 윤리의 확립이 시급함을 강조한다.
9.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정의 사회 실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유일한 구주임을 믿는다. 또한 오늘의 현실 속에서 정의로운 사회 건설을 위해서는 타 종교와 공동 노력한다.
10. 평화적 통일 우리는 반만년의 역사를 가진 하나의 민족이 여러 가지 국내외적 문제로 분단되어 온 비극을 뼈아프게 느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민족의 동질성 회복과 화해를 통한 민족, 민주, 자주, 평화의 원칙 아래 조속히 통일되도록 총력을 기울인다.
11. 전쟁 억제와 세계 평화 우리는 재래적 분쟁은 물론, 인류를 파멸로 이끄는 핵무기 생산과 확산을 반대한다. 동시에 세계의 기아 문제, 식량의 무기화, 민족 분규, 패권주의 등의 해결을 위해 모든 나라와 협력함으로 세계 평화에 이바지한다.

3.6. 비판과 논란거리[편집]

3.6.1. 친일행적[편집]

유감스럽게도 한국에 들어온 그리스도교 교파들 중 구교와 신교를 통틀어 가톨릭과 함께 가장 친일행적이 뚜렷한 교단이다. 구한 말에서 광복 이전까지 들어온 개신교 교단들의 신학교들 중 협성신학교[29]의 경우 설립 이후 총독부와 험한 꼴 보면서 해체되지 않은 신학교일 정도이다.[30] 즉 일제 조선총독부에게 크게 밉보이지 않았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신학교의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 친일을 택한 감독의 의도와 달리 일제강점기 말에 이르면 협성신학교도 폐교 크리를 밟았다고는 하는데 사실 일본 감리회에 완전 흡수된 후속조치였다. 일본어 신학 수업은 아오야마가쿠인이나 간세이가쿠인대학에서 받으면 되니까 말이다.

한술 더 떠서 일제 말기 내선일체 정책의 일환으로 일제가 강요한 신사참배는 물론이고, 일본 내부 교단과 조선 교단의 합병에도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이에는 당시 기독교조선감리회 감독으로서 독립운동가에서 친일파로 변절한 정춘수의 책임이 가장 크지만, 남북감리회를 통합하고 초대 총리사가 된 양주삼 목사 역시 이러한 비판에서는 자유롭지 못하다. 이에 대해 근대사를 다룬 책들 외에도 감리회 내 교회사의 최고 권위자인 이덕주 목사의 저서인 '이덕주 교수가 쉽게 쓴 한국 교회 이야기'(서울: 신앙과 지성사, 2009)[31]에서도 친일 역사를 확인할 수 있다. 처참하게도 저항한 목회자로 단 한 사람의 행적만 소개될 정도.[32] 개인 자격으로 일제에 저항한 목회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교단 차원에서 일제의 정책에 자발적으로 순응한 것은 분명한 과오이다.

친일행적 자체보다도 더 문제가 되는 것은 교단 스스로 그러한 과거를 반성하고 변화하려는 노력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신대 교수를 역임한 최덕성 박사의 저서 '한국교회 친일파 전통'(지식산업사, 2009)에서는 해방 이후 한신대학교감리교신학대학교가 신사참배는 국가의식이었다며 책임을 회피하려 했다는 점을 지적, 비판하고 있다. 그나마 한국기독교장로회는 2007년 총회 차원에서 신사참배 정당화 행적을 회개하고 매년 3.1절 기념주일을 ‘신사참배 회개주일’로 지키는 등의 반성을 보이고 있지만, 감리회는 교단은 커녕 소속 목회자 개인 자격으로도 뚜렷한 반성과 참회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다. 2005년 광복 50주년 기념으로 교단측에서 자료집 《하나님에게만 희망을 두고 살아라》을 펴내 감리회 내 친일 부역자 명단 12명을 선정하여 수록한 바 있지만, 친일인사 선정의 근거가 미약하고 교단 차원의 친일에 대한 반성은 빠져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3.6.2. 정치적인 교단 구조[편집]

감독을 목사와 장로들의 선거로 선출한다. 역시 『이덕주 교수가 쉽게 쓴 한국 교회 이야기』에서도 비관적인 어조로 잘 서술되어 있다. 책에 서술된 모습 외에도 사실상 선출된 감독직은 종신직으로 여겨지며, 신학교 간 파벌싸움과 정치계를 닮은 모습들이 자주 연출된다고.

목회자의 권한이 강력하다.[33] 평신도의 직분인 장로는 종신직이 아니다.[34] 이에 반해 목사는 전도사 시절 수련목 시험을 거쳐 수련목이 되고, 한 번 더 시험을 거쳐 목사가 되면 사실상 종신직이다. 위에 언급된 감독직을 선출하는 선거에서도 담임목사의 표를 따라가는 구조가 일반적이다.

사실, 존 웨슬리는 성공회 사제였고, 감리회가 되는 그가 임명한 사역자들은 16-17세기의 성공회 내부 사정과 잇닿아 있다. 영국 종교개혁 당시, 가톨릭식 전례와 성직 구조를 개혁하려는 청교도들에 동의하는 주교[혹은 감독]들이 그들을 강사로 임명하고는 했던 것이다. 따라서 감리사는 웨슬리의 강사격인 사역자들 중 그들을 감찰하는 선출 받은 사람인데 미국에서 감독을 자처하는 인물들이 나오면서 감리회의 구조가 성공회-개혁교회의 중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3.6.3. 교단의 분열 여부[편집]

장로교를 분열의 상징으로 보면서 "우리는 하나"라고 생각하는 감리교 신자들이 상당히 많다. 그러나 스스로를 "예수교 대한감리회"로 부르는 이들도 있다. 자유주의 신학 수용 문제로 갈라섰는데 감리교는 "기독교 대한감리회"만이 감리교라 자처하면서 "예수교 대한감리회"의 존재를 언급도 않는다. 이는 "기독교 장로회"와 "예수교 장로회 교단들"이 형식적이지만 하나의 한국장로회총연합으로는 함께하는 것과도 비교되는 분열이다. 예수교 대한감리회의 경우 미국의 자유감리교회 선교사와 합류한 목회자들이 기원이다. 자유감리교회는 세계감리교협의회(WMC)의 회원이다. 예수교 대한감리회도 회원인지는 추가 바람

심지어 신학생들 조차도 상당수가 이러한 사실을 잘 모른다. 나무위키에서 "예수교 대한감리회"가 감리교 문서에서 언급된게 신기할 정도. 『이덕주 교수가 쉽게 쓴 한국 교회 이야기』에서는 "예수교 대한감리회"와의 분열이 언급되지 않는다.

3.6.3.1. 논란에 대한 반박[편집]

분열의 정의는 총회의 분열이다. 그리고 서로를 제명하고 이단 취급하는 것도 잇따라야 한다. 그러나 예수교 대한 감리회가 있다고 해서 한국 감리교회가 분열된 것은 결코 아니다. 예수교 대한 감리회는 총회가 분열되어 떨어져 나간 교단이 아닌, 기독교 대한 감리회에 소속되어 있던 한 목사가 자체적으로 교단을 만든 것이다. 그렇다고 기독교 대한 감리회에서 예수교 대한 감리회를 이단으로 취급하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감리교신학대학교에는 예수교 대한 감리회 목사들도 심화된 공부를 위해 종종 입학한다. 그렇다고 분열된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감독 선거를 둘러싸고 5~70년대 성화파-호헌파 분열 등과 같은 몸살을 감리교도 앓았다. 그럼에도 장로교와 달리 감리교는 분열을 종식시키고 다시 통합하는 데 성공했다.[35] 무엇보다 세계적으로도 WMC라는 하나의 감리교 국제 기구[36]가 있으며, 감독(bishop)직 및 선교사회 차원에서의 세계적인 일치가 강력하기에, 세계 어디서나 겉은 감리교인으로서의 동질감을 느끼는 부분이 있다. 이는 한국안에서만 200여개로 갈라짐으로, 해외에서 정확하게 자신과 일치하는 소속 교단을 찾을 수 없는 장로교 등과 비교가 된다.

이런 것을 가지고 분열이라고 하면 분열되지 않은 교파는 없다고 볼 수 있다. 개신교 중에서 가장 중앙집권적인 교파인 성공회도 캔터베리 대주교와 온전한 일치를 이루지 못한 분파들이 존재한다. 동성애 주교 착좌에 대한 이견으로 미국 성공회가 성공회연합(Anglican Communion) 관구장 회의에서 3년간 자격정지를 받은 것도 큰 이슈가 되었다.[37] 기독교 중에서 가장 중앙집권적인 교파인 가톨릭 역시 교황과 일치를 이루지 못한 전통주의 분파복고 가톨릭교회가 존재한다.

3.6.3.2. 반박에 대한 재반박[편집]

물론 장로교에서 성서비평학을 도입한 신학자와 찬동한 목회자가 총회 제적 이후 만든 교단이 한국기독교장로회이다. 그런데 통합측과는 동시출강하는 교수도 있는데? 이단 취급이 분열의 증표라면 일단 탈퇴한 목사에 찬동한 목사들은 논외로 하고아니 그냥 총회에서 깜빡하고 명단기재 안한 분들이라 하자 영국 성공회감리교의 일치는 새로운 제 3교파인가? 애초에 존 웨슬리가 교구 주교의 안수나 신학교의 학위 없이 개인적으로 안수한 사역자들이 감리교의 뿌리가 아닌가? 게다가 성공회 고교회파의 이단 취급은 덤 되시겠는데 성공회는 다시 등장한 아리우스파만을 단죄했다. 그러면 감리교는 성공회 전체의 단죄가 없었는데 왜 독자교단 행세인가? 최근의 영국에서의 일치는 정상화인 건가?

그리고 장로교단을 상대로 근거 없는 우월주의로 반박글이 작성되는데, 애초에 개혁교회는 감독제를 기피한다. 물론 해외에서의 일치도 말도 안되는 소리이고 일치가 아닌 교류와 연합에 가깝다. 칼뱅부터가 현지에 맞는 교회 구조를 주장했다. 다만 이단성이 있는 교회는 교류에서 제외하거나, 당회 혹은 감독제라면 제적하는 식. 무엇보다 감리회를 비판적으로 본다 해서 상대를 은연 중에 장로교 신자로 보고 표적 삼아 비교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자.

3.7. 주요 교회[편집]

  • 기독교대한감리회

    • 정동제일교회 (송기성 목사)

    • 상동교회 (서철 목사)

    • 종교교회 (최이우 목사)[38]

    • 선한목자교회 (유기성 목사)

    • 광림교회 (김정석 목사 : 김선도 목사의 아들이다.)

    • 금란교회 (김정민 목사 : 위에 적혀있는 김선도 목사의 남동생인 김홍도 목사의 아들이다. 김정석 목사와는 사촌지간. '정'자 돌림인 듯.)

    • 수표교교회 (김용성 목사)[39]

    • 인천 내리교회 (김흥규 목사)

    • 인천 대은교회 (박영준 목사) [40]

    • 인천 숭의교회 (이선목 목사)

    • 분당 만나교회 (김병삼 목사)

    • 안산 꿈의교회 (김학중 목사)[41]

    • 대전 한빛교회 (백용현 목사)[42]

    • 대전 하늘문교회 (이기복 목사)

  • 예수교대한감리회 : 해병대 군종감을 지낸 전덕성 목사가 1961년 기독교대한감리회에서 갈라져 나온 후 1962년 미국 자유감리교회와 연합하여 세운 교회. 공식 홈페이지 소개 참조. 한기총 회원 교단이며 기독교대한감리회에 비해서는 교세가 매우 약하고 신앙적으로도 상당히 보수적이다. 과거에는 정명석의 신흥종교 교파가 사용한 위장 교단명이며 이재록의 만민중앙교회가 '예수교대한연합성결교회'라는 교단명을 사용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는 글이 있었으나, 정명석이 사용했던 정식 명칭은 '예수교대한감리회(진리)' 혹은 '예수교대한감리회 애천교회'로 이 교단에 소속되었던 교회를 인수한 후 이름을 무단 도용하여 위장한 것이다. 현재 정명석의 신흥종교는 '기독교복음선교회'로 개칭한 지 오래이며, 당연히 예수교대한감리회 자체는 정명석과 관계가 없는 건전한 개신교 교단이다. 다음 백과사전의 예수교대한감리회 항목 참조.

4. 일본 감리교(メスジスト)[편집]

2차대전 이후 하나의 다른 교파와 하나의 교단으로 통합된 일본기독교단 산하의 감리교와 완전히 독립된 교단을 표방한 일본 자유 감리교단(日本フリーメソジスト教団)이 존재한다.

기독교가 1%도 안되는 일본답게 교회보다는 대학교로 유명한 편이며, 간토에는 시부야에 위치한 아오야마가쿠인대학이 있고 간사이에는 니시노미야에 위치한 간세이가쿠인대학이 있다.[43] 이중에서 간세이가쿠인대학은 현재도 자체적인 신학과를 갖고 있지만, 아오가쿠는 1971년에 신학과를 폐지하고 도쿄신학대학으로 이관시켰다.

한국의 감리교 비판 항목에 상술했듯, 과거에는 한국 감리교단과 긴밀한 연관이 있던 편이고, 현재도 이런 식의 교류가 이루어지는 편이다.

5. 인물[편집]

5.1. 목회자, 신학자[편집]

5.1.1. 해외[편집]

5.1.2. 국내[편집]

5.2. 평신도[편집]

5.2.1. 해외[편집]

5.2.2. 국내[편집]

5.2.2.1. 독립 운동가[편집]

5.2.2.2. 친일 인사[편집]

5.2.2.3. 정치인[편집]

5.2.2.4. 탤런트[편집]

5.2.2.5. 가수[편집]

5.2.2.6. 기타[편집]

5.3. 감리교인이었던 인물[편집]

원래는 감리교 신자였으나 훗날 개종[45] 또는 무종교인이 된 인물.

6. 외부 링크[편집]

기독교대한감리회 홈페이지

[1] John요한영어 명칭인 관계로 '요한 웨슬리'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존 웨슬리는 영국사람이다보니 존 웨슬리로 부르는 게 맞긴 하다.[2] 참고로 존 웨슬리 본인은 감리회 등의 분리에는 반대하였으며 끝까지 성공회 신부로 남아 있었다. 종교적 문제에선 깔 양반은 물론 아니지만... 어린이 교육 문제에선 깔게 많은 양반이다. 영국 요리 참고.[3] 이때 성공회에서 나가지 않고 잔류한 성공회 내 복음주의 일파를 '저교회파'라고 한다.[4] 성공회의 이러한 견제에 "전 세계가 나의 교구다."(The World is My Parish.)라며 돌직구를 날린 일화는 유명하다.[5] 단지 성공회의 교리를 충실히 따르면서, 경직된 성공회를 개혁하고자 했다.[6] 하지만 엄밀히 말해 장로교에도 노회, 총회와 같은 교회 연합 기구가 있으므로 완전한 개교회 중심 체제는 아니다. 완전한 개교회 중심 체제를 택하는 것은 침례교, 회중교회/독립교회이다.[7] 로마 가톨릭, 동방정교회, 성공회[8] 보편교회의 주교와 비슷하다. 영어 명칭은 감독과 주교가 둘 다 bishop으로 같다.[9] 그런데 한국 감리교에서는 감독의 임기가 끝난 전임 감독도 '감독'이란 호칭을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잘못이라는 지적도 상당수 있다.[10] 이는 존 웨슬리가 부흥 운동을 하면서 영국 국교회(성공회) 주교들에게 많이 시달린 탓이다. 웨슬리는 감독제의 폐해를 알고 미국 감리교회를 형성하면서 절대 감독 호칭을 쓰지 못하게 하였다. 웨슬리는 토마스 콕(Thomas Coke)에게 안수를 주면서 감독이 아닌 '감리사'로 임명했고, 미국에 가서 프랜시스 애즈베리(Francis Asbury)도 감독이 아닌 '감리사'로 안수하라고 명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콕과 애즈베리는 자신들의 호칭을 슬그머니 '감독'으로 수정하였다. 이에 웨슬리가 친 것은 당연. 하지만 이미 웨슬리는 죽음을 앞두고 있었기에 웨슬리의 의도와 상관 없이 미국 감리교회는 감독제 교회로 자신들의 역사를 이루어 나갔다.[11] 본래 소그룹 조직이 없던 장로교는 한국에 들어온 후 속회를 본따 '구역회'를 만들었다. 한국 한정으로 장로교의 교세가 감리교보다 크기 때문에 장로교인 대부분은 감리교가 구역회를 모방하여 속회를 만들었다고 알고 있지만 실상은 정반대이다. 하지만 대부분 헌금 봉투에는 '구역(속)'으로 되어 있는 현실...[12] 영유아 세례를 받은 이는 만 18세 이후 입교를 한 후, 성인 세례자는 세례 후 입교를 한 사람[13] 1. 인간의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of Man), 2. 무조건적인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3.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4. 제한적 속죄(Limited Atonement), 5. 성도의 견인(Perservance of Saints). 이 다섯 가지 항목의 앞머리 글자를 따서 흔히 '튤립'이라고 부르는 것이다.[14] 여담으로 감리회 국제본부와 구세군 국제본부는 모두 런던에 있다.[15] 대표적으로 사회 내 소수자(대표적으로 동성애자)에 대한 포용은 타 교단 측에서 봤을 때 상당히 충공깽한 수준. 그러나 한국의 감리교는 장로교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다른 나라의 감리교에 비해서는 보수적인 편이라 최근에는 목회자가 동성결혼, 동성애를 옹호할 경우 교단에서 퇴출시키겠다는 방침을 세웠다.[16] 1885년 미국 감리교 선교사인 헨리 아펜젤러가 파송된 것을 시작으로 보기도 한다.[17] 현 배화유치원, 배화여자중학교, 배화여자고등학교, 배화여자대학교의 전신. 1910년 '배화(培花)'로 교명을 바꾸었다. 이 이름은 캐롤라이나 학당의 교사였던 윤치호가 지은 것인데, '꽃(花)을 기른다(培)'는 의미이다.[18] 여담으로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의 감리교단도 통합이 되었다고 할 정도로 미국보다 앞서서 감리교단을 통합했다.[19] 특히 교회일치운동에 대한 견해도 일치하는 예장 통합과 대한감리교는 서로의 차이를 신학대학교 강의실이나 가야 확인할 수 있을 정도라고 말한다.[20] 본인과 연결된 다른 목사를 거쳐 아들에게 목회직을 넘기는 방법[21] 이제 남은 방법은 맞바꾸기 뿐이다.[22] 월 1000~1500만원 이하[23] 다만, 교리와는 달리 교회 내의 기본적인 구조는 당연히 감리교의 기본적인 전통을 따르기 때문에 장로교와 다른 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감리교회에서는 여성 목회자 안수에 적극적이며, 여성 장로의 천거 또한 개혁교회(장로교)에서는 볼 수 없는 큰 차이점 중에 하나다.[24] 쉽게 정리하자면, 구원론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사실 구원에 대한 입장차이는 이단 여부를 가르는 중요한 잣대이기도 하다.[25] 물론 큰 틀에서 해석하면 같은 개신교적인 해석으로 통합할 수도 있으며 이는 외국에서 두 교파의 기본적인 입장이기도 하다. 하지만 외국에서는 개신교라고 해서 무조건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한국과 달리 "장로교인", "감리교인"등으로 자신이 속한 교파를 정확히 말하는 것이 보통이다. 참고로 Evangelical(복음주의)라고 말할 경우 보통 장로회이다.[26] 예수교대한감리회의 영문 이니셜은 JMC(Jesus Methodist Church)이므로 JMS와 혼동하지 말자. 자세한 것은 JMS 참고.[27] 연세대장로회, 감리회, 성공회 등이 통합으로 이사회가 구성되어 있다. 감리회보다는 장로회의 영향력이 더 큰 편이다.[28] 배재대는 과거에는 신학과였으나, 지금은 사회복지가 메인인 학과로 변했다.[29] 지금의 감리교신학대학교를 말한다. 현존하는 협성대학교는 1977년 감리회 내의 군소 신학교들을 통폐합하여 새로 만든 것이다.[30] 침례교와 장로교의 다수 목사들이 끌려갔고 침례교는 교단 폐쇄, 장로교는 유일한 신학교였던 평양신학교가 폐교되었다. 성결교의 경우 일본 현지에서부터 6명의 순교자를 내며 조선의 교단에게도 저항을 독려하다가 한일 양쪽에서 교단이 해체되었다. 성결교는 국내에서는 침례교와 유이하게 교단 자체가 없어졌다. [31] 사학도가 아니더라도 역사에 관심있는 사람이 읽는다면 이 책이 뺄 것은 빼고 서술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완전히 그림자를 말살하지는 않았고, 감리회측에서 나온 책으로서는 비교적 양심적인 서술을 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32] 일제 말기 내선일체 정책의 일환인 신사참배에 저항하여 침례회성결교회는 교단이 해체되었고, 장로회는 평양에 있던 장로회 신학교를 잃었다. 장로회는 일제에 협조한 목사들 위주로 새로 신학교를 열었는데 그것이 조선신학교(현 한신대학교)이다. 이에 반하여 끝까지 저항한 장로회 목사들이 형성한 교단이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교단과 그 산하의 고려신학교(현 고신대학교)이다. 광복 이후 전래된 루터교회 등 이러한 역사적 과오에서 자유로운 교단들도 있다.[33] 중앙집권 정도를 따라 기독교 교파들을 스펙트럼으로 놓자면, 가톨릭-정교회-성공회-감리회-루터회-장로회-침례회/기타 회중교회-독립교회 순이 된다.[34] 그러나 장로가 꼭 종신직이여야 한다는 발상은 한국 교회에서 문화적 이유 때문에 현지화된 것으로, 타 국가의 개혁교회에서는 장로와 목사 둘 다 임기제인 경우도 많다.[35] 여담으로 WCC를 둘러싼 한국 장로교의 대분열로 대한예수장로회가 예장합동과 예장통합으로 두 토막 났는데, 예장합동에서 수 많은 군소교단들이 분열되는 가운데 예장통합은 소수의 개교회나 목사가 교단에서 이탈한 적은 있어도 교단 자체가 쪼개나간 적이 없었다.[36] 성공회의 세계 성공회 연합체와 유사하다.[37] 흥미롭게도 미국 성공회는 영국 캔터베리 대주교와 온전한 일치를 이루고 있지만, 미국 성공회 탈퇴파가 만든 북미 성공회는 캔터베리와 온전한 일치를 이루었다고 하기에는 애매한 위치에 있다.[38] 1930년 조선 남/북감리회의 통합을 주도했던 교회. 통합 감리회의 초대 총리사인 양주삼 목사가 담임을 했던 교회다.[39] 북한에 잔류해 있다가 순교한 신석구 목사가 담임했던 교회다. 1984년 서초동 현위치로 이전하기 전에는 수표동 시그니처타워 자리에 있었다.[40] 현 감독회장 전명구목사가 원로목사로 시무중.[41] 구 새안산레포츠교회. 한국 감리교회 최초로 열린 교회를 표방하며 레포츠 시설을 운영한 교회로 유명하다.[42] 구 서대전중앙교회. 대전 소재 감리교회 중 가장 규모가 크다. 현 예배당을 준공하기 이전에 사용하던 유천동 소재 예배당은 현재 예장통합 소속 교회가 사용하고 있다.[43] 읽는 방법이 꽤 특이한데 한자는 분명 '関西'지만 간이가 아니고 간이로 읽는다. 그리고 로마자 표기는 역사적 표기를 따라서 'Kwansei'다.[44] 남편인 김대중 대통령은 천주교인이었다.[45] 기독교 내에서 종파를 옮기는 것도 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