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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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thodist Church

한자

監理會

에스페란토

Metodista preĝejo


1. 개요2. 명칭3. 특징
3.1. 조직 특성3.2. 신학적 특성
4. 감리교회의 역사
4.1. 신성회(Holy Club)4.2. 아메리카 식민지 선교4.3. 올더스게이트(Aldersgate) 거리 회심4.4. 야외 설교의 시작4.5. 메도디스트 신도회(Methodist Society)의 조직4.6. 아메리카 메도디스트 교회의 설립4.7. 영국 감리교회의 분립
5. 한국의 감리교
5.1. 역사
5.1.1. 미 감리회 선교 시대(1884~1930)5.1.2. 자치시대(1930~1945) : 자치와 어두운 신사참배의 역사5.1.3. 현대(자립시대, 1945~현재) : 교단의 분열과 재통합, 예수교 대한 감리회의 분립
5.2. 특징5.3. 조직 및 교세
5.3.1. 산하 신학교
5.4. 교육5.5. 신앙고백
5.5.1. 1930년 조선감리교의 교리적 선언5.5.2. 1997년 감리회 신앙고백5.5.3.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신경
5.6. 주요 교회5.7. 주요 교단 목록
6. 일본 감리회7. 나무위키에 등록된 인물
7.1. 목회자, 신학자
7.1.1. 해외7.1.2. 국내
7.2. 평신도
7.2.1. 해외7.2.2. 국내
7.2.2.1. 독립 운동가7.2.2.2. 친일 인사7.2.2.3. 현대 인물
7.3. 감리교인이었던 인물
8. 외부 링크

1. 개요[편집]

감리회(監理會)[1]는 18세기 영국국교회 사제 존 웨슬리(John Wesley)[2]가 이끈 영국의 신앙 부흥 운동이었던 메도디즘(Methodism)이 국교회에서 분리되어 창설된[3] 개신교의 한 교파이다. 현재 전 세계에 7천500만명 이상의 신도가 있다.

당시 경직되었던 국교회 안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고, 영국 사회 전반에 걸쳐 개혁을 일으킨 운동으로 평가받는다. 신학적으로는 성공회 특유의 중도(Via Media)를 이어받되 칼빈주의이중예정론을 배격하고 선행은총을 전제로 한 자유의지와 만인구원론을 주장한다. 교회 체제는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대체로 감독제를 택하는 보편교회 구조를 따르고 있다.

2. 명칭[편집]

감리교회의 영어 명칭인 Methodist Church에서 methodist란, 존 웨슬리옥스퍼드 대학에서 결성한 신성회(Holy Club)의 신앙 양태가 규칙적이었기 때문에 붙은 별명에서 유래했다. 사실은 조롱조에 가까운 별명이었으나 공식 명칭이 된 것이다. 이는 루터교회(The Lutheran Church) 역시 '루터를 추종하는 자들'이란 조롱에서 교단명이 유래한 것과 같은 경우이다.

동양권에서 메도디스트 교회가 '감리교회'가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미국 메도디스트 감독 교회(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를 한자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초창기에는 두 가지 명칭이 혼용되었다. 첫째는 미이미(美以美) 교회로, 이는 Methodist의 me를 美로, Episcopal의 e를 以로, 美는 아메리카가차(假借)였다. 이는 미국 북감리회에서 옮긴 말이었다. 둘째는 감리교(監理敎)로, 미국 남감리회(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에서 Bishop을 監으로, Methodist를 理로, 뜻을 번역한 말이었다. 북감리회, 남감리회가 들어와 선교하던 한국에서는 두 명칭이 혼용되다가, 1930년 두 교회가 합쳐질 때, 명칭을 '감리회'라고 하였다. 요약하자면 '감리회'란 메도디스트 감독 교회의 뜻을 번역한 말이며 넓게는 감독이 치리하는 감리교의 교회 구조를 나타내는 명칭이다.

3. 특징[편집]

3.1. 조직 특성[편집]

장로 중심의 체제에 개교회 자치 성향[4]이 강한 장로회와 달리 감리회는 보편교회[5]와 비슷한 감독제를 채택하고 있다.

기독교 대한 감리회 기준 일정 수 이상의 교회가 모여 지방회를 형성하고, 지방회가 모여 연회를, 연회가 모여 총회를 형성한다. 지방회의 장은 감리사(監理師, The Superintendent), 연회의 장은 감독[6], 총회의 장은 감독회장이다. 감리사와 감독, 감독회장은 선거에 의하여 선출[7]된다. 감리사와 감독의 임기는 2년이며 감리사와 달리 감독은 연임할 수 없다. 감독회장의 임기는 4년이며 감독처럼 연임이 불가능하다.

이전에 기독교 대한 감리회의 감독은 연회의 의장이 되는 권한과 목사를 안수하여 세우는 권한과 더불어 목회자를 파송하는 어마어마한 권한이 있었다. 그러나 막강한 권한을 지닌 감독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선거가 과열되어 급기야 교단까지 분열되는 등 각종 병폐가 나타나자 교회 개혁 차원에서 목회자 파송 권한은 제거되어 있다. 그럼에도 원칙상 감독의 파송으로 목회자가 부임하는 것이므로, 개교회가 개별적으로 목회자를 청빙해도 형식상으로나마 감독의 승인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미국 연합감리교회(United Methodist Church)의 감독에게는 여전히 목회자 파송권이 있다. 그래서 연합감리교회 목사들은 일정 시간을 두고 임지를 자주 옮긴다.

그러나 영국 감리교회에는 감독이 없다. 왜냐하면 본래 존 웨슬리가 감독제를 반대하였기 때문이다.[8][9] 존 웨슬리 사후 영국 감리교회가 국교회와 분리되면서, 존 웨슬리의 리더십은 연회로 옮겨지게 되었다. 영국 감리교회에는 지방회에 해당하는 구역회(The Circuit)가 있는데 구역회의 장은 감리사(A Circuit Superintendent)이다. 구역회가 모여서 지방회(The District)를 형성하고, 지방회의 장은 지방회장(The District Chair)이다. 지방회가 모여 연회(The Conference)를 이루고 이 연회가 미국, 한국 감리교회의 총회와 위상이 같다. 연회의 장은 연회장(The President)이다. 연회에는 연회장과 부연회장(The Vice President)가 있는데, 연회장은 목사가, 부연회장은 평신도가 맡으며, 각각의 임기는 1년이다.

감리교회 조직의 또 하나의 특징은 개교회 안에서도 여러 조직이 있다는 점이다. 개교회의 최하위 조직은 속회(屬會, The Class Meeting)이다. 속회야말로 감리교회가 교회사에 남긴 큰 공헌이라 할 수 있는데, 속회가 소그룹 교육의 원형이기 때문이다. 속회는 보통 10명 정도로 구성되어 있지만, 개교회 재량껏 속회를 조정한다. 속회의 장은 속장(The Class Leader)이며, 속회의 구성원은 속원이라고 부른다. 속장은 권사가 맡는다.[10] 속회는 일주일에 한 번 씩 속원들의 집에서 돌아가며 모이는 것이 원칙이다. 이는 속회의 기원이 각 가정의 어려움을 살피는 데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가귀도(가족 전부가 교회에 다니는)가 된 집안이 아닐 경우 부득이 교회에서 모이는 경우도 있다.

속회는 속원들이 함께 예배를 드리고 서로 신앙 상담과 고민들을 나눈다. 속장은 속원들의 가정 상황을 살피고, 이를 보고서로 작성하여 담임 목사에게 보고한다. 기독교 대한 감리회의 경우 속회의 상위 조직으로 '당회(堂會)'가 있다. 당회는 사실 장로교의 제도가 들어온 것이라 할 수 있는데, 당회는 개교회의 1년 정산 모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당회는 보통 연말인 12월 중에 개최되며, 당회의 장인 당회장은 담임 목사가 맡는 것이 관례이다. 당회에서는 예산의 결산, 인사(人事) 문제 등을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처리한다. 당회원은 입교인[11]이다. 당회와 달리 의결권은 없지만 필요할 때마다 교회의 여러 일을 신속히 처리하기 위한 기구로는 기획위원회라는 것이 있다. 담임 목사와 장로, 소수의 권사 등으로 이루어진다.

당회의 상위 조직은 구역회(Circuit)다. 사실 이 구역회는 영국 감리교에 기원을 두고 있는데 이는 소수의 메도디스트 사제들이 여러 신도회를 순회하며(circuit) 신앙을 지도한 데에서 나온 것이다. 영국 감리교회에는 구역회 본래의 기능이 잘 남아 있지만 한국 감리교회에서 구역회는 사실상 당회와 다르지 않다. 원래 구역회에는 1개 이상의 교회가 있는 것이지만, 한국 감리교회에서는 구역이 곧 개교회가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다만 당회와 다른 점은, 당회의 의장은 담임 목사가 맡지만 구역회의 의장은 감리사가 맡는다는 점이다. 구역회에서는 교회의 1년 예산안을 감리사의 관리에 의해 처리하며, 목회자의 임면 문제도 맡는다.

이와 같은 감리교회의 조직적 특성을 '연관주의(Connexionism)'라고 한다. 개교회가 각개전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끈끈하게 유대 관계를 형성하여 각종 어려움이나 좋은 것을 함께 공유하는 것이 감리교회의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3.2. 신학적 특성[편집]

장 칼뱅의 이중예정론을 주된 교리로 내세우는 장로회와 달리, 감리교는 '선행 은총(The Prevenient Grace)에 의한 선택권의 회복'을 강조한다. 흔히 감리교 신학을 잘 모르는 자들(특히 장로교 보수)이 감리교는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권의 발휘"를 주장한다고 호도하는데 자유의지 운운은 당연히 펠라기우스 이단이고, 감리교 신학에서 말하는 선택권의 발휘는 선행 은총을 전제로 하는 원죄 이전의 선택권의 회복을 말한다. 선행 은총을 전제로 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굉장히 큰 차이가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유명한 펠라기우스 논쟁에서 인간의 전적 타락과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총을 이야기했고, 루터교장로교도 모두 원죄로 말미암은 인간의 전적인 타락을 이야기한다. 즉 구원에 있어서 전적으로 인간은 수동적인 존재인 노예 의지론을 내세운다. 이를 가지고 루터에라스무스가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장로교는 도르트(Dort) 회의에서 정리한 5가지 신조, 일명 튤립(TULIP) 교리[12]의 가장 첫 머리에 오는 것이 '인간의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of Man)'이다. 감리교도 당연히 원죄로 말미암아 인간의 의지가 전적으로 타락했다고 본다. 따라서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고 알 수도 없으며 알려고 할 수도 없다. 이렇게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인간들에게 하나님은 먼저 자기를 알려주셨는데, 이것이 바로 계시이며, 계시는 곧 말씀(logos)이며, 말씀은 곧 하나님이자 인간이 된 예수 그리스도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은 인간의 전적 타락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귀결되지 못한다. 그렇기에 교회는 2천년 동안 자유의지를 말하는 이들은 이단으로 정죄해 왔다. 만약 세간의 인식대로 감리교가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권 발휘를 말한다면 감리교는 이단이다. 하지만 감리교는 선행은총을 전제로 한 원죄 이전의 선택권의 회복을 말한다. 선행은총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타락하여서 자의지로는 자범죄를 피할 능력이 없으나 죄의 폐해와 고통을 느낄 할 수있는 양심과 죄를 피하기 간절히 원하는 사랑의 마음을 남기셨으니 이것이 선행은총이다. 이는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날 때 가죽옷을 지어 입힌 은총이며, 악인이라도 똑같이 해와 비를 주시는 은총이며, 자연의 오묘한 섭리를 통해 창조주의 숨결을 느끼게 하는 은총이다. 비록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이지만 하나님이 베푸시는 선행적인 은총 안에 머물러 있으며, 전적 타락으로 인해 자범죄를 면할 능력은 없어도 선행 은총에 의해 양심에 찔리고 사랑에 어긋나는 자범죄로 인하여 스스로 고통받음을 깨닫는다. 그래서 말씀이 선포될 때 이미 선행 은총으로 죄의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인간은 회개하고 죄의 고통에서 해방될 희망을 품을지 복음을 거부할지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선택할 수 있다. 즉 선행은총은 구원을 주는 은총이 아닌 구원으로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할 뿐이다.

선행은총으로 어느 정도 하나님을 인식하고 복음을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는 하나님에 의해 의롭다고 칭해진다. 이것이 바로 칭의이며 여기서의 칭의는 루터, 칼뱅이 말하는 것과 동일하다. 의롭다고 칭해진 인간은 다시 태어난다. 이것이 중생이다. 다시 태어난 인간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러야 하는데, 이 과정이 성화이며, 이것이 완성된 것이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다. 그러나 완전이라는 것은 상태적인 개념이라기 보다 동적인 개념이다. 인간이 이 세상에서 죄를 완전히 정복하고 죄의 유혹도 받지 않는 그런 초인적인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죄와 싸우려 하며 경건에 힘 쓰는 모습이 바로 완전이 말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곧 선행은총, 칭의, 중생, 성화, 완전 이 다섯 단계를 '구원에 이르는 다섯 가지 문'이라고 흔히 이야기하며, 감리교 교리의 특징으로 일컬어진다.

이러한 신학적 배경에서 감리교는 신앙의 실천을 강조하며, 신앙의 실천도 개인적인 영역만이 아닌 사회적인 영역까지도 확장해서 이야기한다. 그래서 초창기부터 감리교는 빈민 구제, 죄수 교화 활동 등을 활발히 하였고, 이를 더욱 강조하여 분리된 교파가 바로 구세군이다.[13]

이러한 특성에 따라, 개혁교회(장로회)에 비해 조직신학 및 기독교 사상, 성경학 등에서 진보적인 입장도 곧잘 받아들이는 편이다.[14] 하지만 급진적인 변화보다는 전통과의 조화를 강조하는 중도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4. 감리교회의 역사[편집]

4.1. 신성회(Holy Club)[편집]

존 웨슬리는 1729년 11월 옥스퍼드 대학에서 동생 찰스 웨슬리가 몇몇 친구와 결성한 신성회의 리더가 되었다. 신성회는 규칙적으로 모여 고전을 공부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것이 무엇인지 탐구하는 모임이었다. 존 웨슬리는 아버지 사무엘 웨슬리의 교구 목회를 돕다가 옥스포드로 돌아와 이 모임의 리더가 되었고, 신성회는 더욱 활력을 얻었다. 리더가 된 존 웨슬리는 더욱 엄격한 규칙을 제정했다. 일례로 자아성찰을 위한 규칙은 매일 밤 기도, 월, 수, 금은 친구들과 기도, 기도 후에 기도 시의 마음 가짐을 성찰, 정기적으로 중보 기도를 하도록 되어 있었다.

신성회원들은 매주일 성찬을 받았고, 수요일과 금요일에 금식했으며 회원은 각각 공개적으로 다른 회원들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해야 했다. 1730년부터는 개인적인 경건 훈련을 넘어서 사회적 경건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감옥 선교로부터 시작된 신성회의 사회적 경건 훈련은 훗날 감리교회의 주요한 특징이 되었다. 신성회는 1735년 즈음까지 꾸준히 모여 활동하다가, 회원들 대부분이 성직의 길에 들어서서 자기 교회에서 목회를 하거나, 일부는 성직의 길을 포기하면서 자연스레 해체되었다.

4.2. 아메리카 식민지 선교[편집]

1735년 존 웨슬리아메리카 식민지 개척에 열을 올리던 오글도프(J. E. Oglethorpe) 장군의 제안을 받아 동생 찰스와 함께 식민지 사제로 떠났다. 웨슬리 형제는 인디언들이 문명의 때를 타지 않은 순수한 사람들이라 기대하며 쉽게 회심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교도들을 회심시키며 그 과정 중 자신들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고 기대했다. 그러나 존 웨슬리대서양 항해 중 만난 큰 풍랑에서 죽음을 두려워 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반면 큰 풍랑 속에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고 평온을 유지하는 모라비아 교도(독일 경건주의의 일파)들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큰 기대와 달리 웨슬리 형제는 철저히 실패한다. 우선 순수한 사람들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인디언들을 실제로 만나보니 유럽인들 못지않게 잔인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았고, 순순히 기독교인이 되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존 웨슬리는 융통성 없는 목회 방식으로 기존 신자인 식민지인들의 큰 불만을 샀다. 더욱이 소피 홉키(Sophy Hopky)라는 소녀와의 얼룩진 사랑은 결정적으로 존 웨슬리의 식민지 선교를 파탄 내었다. 찰스 웨슬리도 다를 바가 없었다. 찰스 웨슬리도 형 존 웨슬리 못지않게 융통성 없는 목회 방식을 식민지인들에게 강요하여 큰 불만을 샀고, 특히 부인들의 거센 항의를 받았으며, 식민지의 장인 오글도프와도 갈등했다. 결국 찰스 웨슬리가 먼저 아메리카를 떠났고, 소피 홉키와의 장렬한 사랑이 실패한 후 존 웨슬리도 이어서 아메리카를 떠났다. 존 웨슬리는 1738년 초 런던으로 되돌아 왔다.

4.3. 올더스게이트(Aldersgate) 거리 회심[편집]

선교에 실패한 존 웨슬리는 실패 이유를 성찰하면서 모라비아교 목사인 피터 뵐러(Peter Boeler)와 교류했다. 수개월 간 피터 뵐러와 교류하면서 존 웨슬리는 종교개혁의 핵심인 "오직 믿음으로"를 깨닫게 되고, 자신의 가장 큰 실패 원인은 형식만 있고 참 믿음이 없다는 데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던 5월 24일, 존 웨슬리는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올더스게이트 거리에서 열리던 모라비아교 신도회 모임에 참석했다. 거기서 누군가가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는 것을 들었는데, 저녁 8시 45분 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마음 가운데 역사하여 생기는 변화에 대한 설명을 들을 때 존 웨슬리는 자신의 마음이 이상하게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진짜 믿음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것을 확신하였다.

4.4. 야외 설교의 시작[편집]

회심을 경험한 존 웨슬리는 각 교회를 돌며 자신의 경험과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에 대해 설교했다. 그러자 각 교회는 존 웨슬리의 설교를 금지시켰다. 갈 곳 없어진 존 웨슬리 앞에 조지 휫필드가 나타났다. 조지 휫필드는 웨슬리 형제와 함께 신성회 활동을 하다가 아메리카 식민지로 건너가 큰 활약을 하고 돌아온 뒤였다. 조지 휫필드는 존 웨슬리를 야외 설교로 이끌었다. 웨슬리는 야외 설교에 처음 거부감을 가졌지만 이내 적응하였고, 조지 휫필드 못지 않게 큰 부흥을 일으켰다.

4.5. 메도디스트 신도회(Methodist Society)의 조직[편집]

존 웨슬리는 영국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야외 설교를 했고, 부흥이 일어난 후 부흥을 유지하기 위하여 신도회를 조직했다. 신도회 안에는 속회(Class)와 반회(Band) 등 더 작은 모임을 구성하여 효율적인 신앙 훈련이 되게끔 했다. 웨슬리가 국교회의 교구에 상관 없이 종횡무진 활약하자 위기감을 느낀 주교와 사제들은 웨슬리에게 설교 기회를 주지 않으며 더욱 더 경계했다. 특히 브리스톨의 주교 버틀러(Butler)가 자신의 교구를 떠나라고 하자 웨슬리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온 세계를 내 교회로 생각합니다(I look upon the whole world as my parish)." 웨슬리는 각지에서 폭도들의 폭력에도 시달렸다. 반역자라는 조롱과 핍박도 받았다. 웨슬리는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각지로 활동 영역을 넓혔고, 신도회가 사용할 건물도 매입하여 든든하게 활동을 다져나갔다. 처음 하층 계층에 큰 호응을 얻던 메도디즘 운동은 상류층에게도 퍼져 나갔다.

1744년 존 웨슬리는 메도디스트 최초의 연회(The Annual Conference)를 소집했다. 무엇을 가르치고 어떻게 가르칠 것인지에 대한 주제를 놓고 영국 각지로 흩어져 사역하던 메도디스트 사제들과 설교자들이 모여 회의를 한 것이 감리교회의 중요한 전통과 교회 조직이 되었다.

4.6. 아메리카 메도디스트 교회의 설립[편집]

메도디스트 신도회는 급속도로 부흥했고, 국교회와의 마찰도 커져 갔다. 이에 많은 이들이 새로운 교회를 설립할 것을 종용했지만 존 웨슬리는 국교회가 세상에서 제일 좋은 교회이며, 떠나지 않을 것을 거듭 분명히 했다. 하지만 독립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1776년부터 미국독립 전쟁을 벌인다. 전쟁이 벌어지자 아메리카 식민지에 있던 국교회 성직자들은 본국으로 철수했다. 존 웨슬리는 성례를 받지 못하는 미국 내 메도디스트 신자들을 생각했다. 존 웨슬리는 독립해 나간 미 식민지는 영국과 경우가 다르며, 오랜 기간 동안 고찰한 바에 따라 초대 교회에서 감독과 장로의 직능에 사실상 차이가 없었다는 점에 착안했다. 1784년, 웨슬리는 같은 국교회 사제였던 토마스 콕(Thomas Coke)을 '감리사(Superintendent)'로 안수하고, 평신도 설교자였던 프랜시스 애즈베리(Francis Asbury)도 감리사로 세울 것을 명령했다. 독자 안수는 곧 분립이었기에 미국에서 메도디스트 신도회가 국교회와 분리된 것은 기정 사실이 되었다.

토마스 콕은 미국으로 건너가 1784년 11월 3일 뉴욕에 도착했고, 크리스마스 이브에 볼티모어에 모여 이른바 '크리스마스 연회'를 열었다. 콕은 애즈베리에게 3일에 걸쳐 안수를 주어 감리사로 세웠다(첫날은 집사 목사, 곧 부제로, 둘째날은 장로 목사, 곧 사제로, 셋째날은 감리사, 곧 감독으로). 이때 애즈베리는 연회원들의 합의가 없으면 존 웨슬리의 임명을 거부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만장일치로 감리사로 추천 되었다. 연회원들의 합의에 의한 감리사(감독) 임명은 이후 감리교회의 중요한 전통이 되었다. 이듬해 1월 2일까지 열흘간 계속된 이때 연회에서 노예 제도를 반대하는 결의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토마스 콕과 프랜시스 애즈베리는 감리사 대신 '감독(Bishop)'이란 명칭을 썼고, 공식적으로 자신들 교회의 이름을 미 감리교회(The American Methodist Episcopal Church)라고 명명했다. 존 웨슬리는 이에 반발하였으나 효과는 없었다. 미국 감리교인들은 존 웨슬리의 리더십은 영국 내에서만 유효하다고 보았으며, 이때 존 웨슬리는 '온 몸이 무너져 가는 늙은이'로서 죽음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4.7. 영국 감리교회의 분립[편집]

웨슬리는 끝내 국교회를 떠나지 않았고, 국교회 사제로 생을 마감했다.[15] 그러나 1791년 존 웨슬리가 사망한 이후, 영국에서도 메도디스트 신도회는 국교회와 분리될 수밖에 없었다. 1795년 평신도 설교자들의 지위 문제와 성례의 집례 문제는 메도디스트 신도회가 평화 조약(Plan of Pacification)을 통해 영국 국교회와 공식적으로 결별하여 독립 교회가 되면서 해결되었다.

5. 한국의 감리교[편집]

5.1. 역사[편집]

5.1.1. 미 감리회 선교 시대(1884~1930)[편집]

한국 감리교회는 1884년 북감리회의 매클레이(R. S. Maclay) 선교사[16]가 내한하여 의료선교와 교육사업에 대해 고종의 윤허를 받은 것을 시초로 본다.[17]

당시 조선중국일본에 비해 서양 국가들의 관심이 덜했고, 이는 기독교 선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미국 감리교회에서 조선 선교를 결정하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었다. 1882년 조선과 미국은 수호조약을 맺었고, 이듬해 1883년 5월 초대 미국 공사로 푸트(L. H. Foote)가 내한하기에 이른다. 조선 정부는 이에 민영익을 수반으로 한 '보빙사절단'을 미국에 파견하여 고종의 친서를 미국의 아서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보빙사는 1883년 7월 서울을 출발, 9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고 거기서 열차를 타고 시카고를 거쳐 워싱턴으로 향했다. 이때 열차 안에서 볼티모어 러블리레인교회 담임 가우처(J. K. Goucher) 목사가 보빙사 일원을 만났다. 낯선 동양인을 보고 관심이 생긴 가우처는 민영익과 대화를 나눈 후 그해 11월 미감리회 해외선교부에 2천 달러를 보내면서 조선 선교를 촉구했고 해외선교부는 여기에 3천 달러를 보태 5천 달러를 한국 선교 개척비로 책정한 후 조선에 가까운 일본에 있던 매클레이를 조선에 파견하여 선교 가능성을 탐색토록 한 것이다. 마침 매클레이는 이전 중국 선교사로 있었을 때부터 조선 선교에 관심을 갖고 실제로 교단 본부에 선교를 촉구했던 적이 있었다. 매클레이는 1884년 6월 24일 제물포에 도착하여 같은 날 오후 6시 서울에 들어왔다. 그리고 친분이 있던 김옥균의 도움[18]으로 의료선교 및 교육사업에 대한 고종의 윤허를 얻어낼 수 있었다.

이렇게 매클레이의 활약으로 선교의 길이 열렸고, 이에 힘 입어 미감리회와 미국 북장로회가 적극적으로 선교사 파송에 나섰다. 북장로회는 의사 알렌(H. N. Allen)을 먼저 보냈다. 그러던 중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이 터졌고, 중상을 입은 민영익을 알렌이 치료하여 살림으로써 조선 선교에 힘이 실리게 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미감리회는 의사 스크랜튼(W. B. Scranton)과 아펜젤러(H. G. Appenzeller)를 조선 선교사로 임명하였고, 이듬해에는 스크랜튼의 어머니 매리 스크랜튼(Mary F. Scranton, 일명 스크랜튼 대부인)을 추가 시켰다. 세 명의 선교사는 먼저 일본에 도착하여 한 달 정도 머물면서 조선에 대해 공부했다. 그리고 갑신정변의 여파로 정세가 불안한 것을 감안하여 매클레이는 선발대로 아펜젤러 부부를 보내기로 하였고, 아펜젤러는 북장로회가 파송한 언더우드(H. G. Underwood)와 함께 1885년 4월 5일 오후 인천에 도착했다. 이날은 마침 부활절이었다.

하지만 아펜젤러는 서울에 바로 들어가지 못했다. 이는 미국 공사관 측에서 정세 불안을 이유로 여성인 아펜젤러 부인이 서울에 들어가는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아펜젤러는 4월 10일 다시 조선을 떠나 일본으로 갈 수밖에 없었고, 서울은 당시 총각이었던 언더우드가 먼저 가게 되었다. 매클레이는 스크랜튼을 먼저 조선으로 보내기로 하였고, 스크랜튼은 5월 3일 인천에 도착한 후 알렌과 함께 제중원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스크랜튼은 감리회가 독자적으로 선교할 수 있도록 선교 부지를 확보하였고, 이에 아펜젤러 부부는 스크랜튼 대부인과 함께 다시 조선으로 향하여 6월 20일 인천에 도착하였다.

이후 같은 해 스크랜튼은 시병원을, 헨리 아펜젤러배재학당을, 1886년 메리 스크랜튼이 이화학당을 세워 의료선교와 교육선교를 시작했다. 스크랜튼이 세운 시병원은 제중원과 달리 정부의 입김이 미치지 않는 민간 병원이었으며 가난한 민중을 위한 병원이었다. 제중원과 달리 턱이 낮은 시병원에는 조선 민중들이 몰려들었고, 1887년에는 고종이 시병원(施病院)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이에 반해 아펜젤러의 배재학당은 학생 수가 들쑥날쑥했는데 이는 외국인 선교사에 대한 반감 때문으로 보인다. 당장 고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병과 달리 공부는 당장 배우지 않아도 괜찮은 듯 보였기 때문. 아펜젤러는 조선인들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고종에게 청원하여 "배재학당(培材學堂)"이라는 교명을 하사받았다. 그러자 학생들이 몰려들어 1887년에는 건물을 신축해야 했다. 스크랜튼 대부인은 여성 교육 사업을 전개하였는데, 상황은 배재학당 초창기보다 더욱 어려웠다. 2명으로 시작한 여학교는 1887년에 7명이 되었고, 같은 해 고종으로부터 '이화학당(梨花學堂)'이란 이름을 하사 받았고, 이에 힘입어 여성 사업도 활기를 띨 수 있었다. 1887년 10월에는 여성 선교사인 로드와일러(L. C. Rothweiler)와 하워드(M. Howard)가 파송되어 로드와일러는 이화학당에, 하워드는 시병원에서 근무하였다. 하워드는 1888년 여성 전용 병원인 '보구여관(普救女館)'을 세웠는데 이는 한국 최초의 여성 전용병원이었으며, 보구여관이란 이름도 정부에서 하사한 이름이었다.

선교사들은 의료와 교육 사업으로 시작한 간접 선교 방식에서 점점 직접 선교로 방식을 변화시켜 나갔다. 1887년 배재학당 학생 중에서 최초로 세례자와 구도자가 나왔고, 이에 힘입어 아펜젤러는 한옥 한 채를 구입하여 '베델'이라 이름 짓고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1889년에는 정식으로 구역회(Circuit)을 열고 교회를 설립하였으니 이는 정동제일교회의 시초이다. 이로써 미감리회의 정식 직접 선교가 시작되었다.

남감리회는 윤치호의 청원으로 1895년 리드(C. F. Reid) 선교사가 내한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윤치호갑신정변에 가담했다가 정변 실패 후 일본에 망명했을 때 남감리회와 접촉하여 교인이 되어 있었다. 복권 후 윤치호는 1895년 2차 김홍집 내각에 참여하였고, 이와 같은 상황에서 남감리회의 선교를 요청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미 15년 넘는 베테랑 선교사였던 리드는 중국과 조선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에 윤치호는 직접적으로 리드 선교사를 지목하여 조선에 오게 했다. 리드는 감독 헨드릭스(E. R. Hendrix)와 함께 조선에 방문하여 선교 가능성을 탐색했고, 남대문 부근에 선교 부지를 구입한 후 리드를 정식 파송하였다. 이로써 남감리회의 조선 선교도 시작되었다. 1897년에는 콜리어(C. T. Collyer)와 미망인 캠벨(J. P. Campbell)이 2차 선교사로 들어옴으로써 북감리회처럼 남녀 선교 사업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미국에서 남북 감리교회는 노예제를 이유로 갈라졌던 만큼 다소 소원했으나 한국에서 만큼은 서로 협력하였다. 이는 남감리회가 북감리회에 비해 10년 늦게 들어온 만큼 동등하게 경쟁하기엔 여러 모로 어려운 점이 많았기 때문이며, 먼저 들어온 북감리회 선교사들이 남감리회의 선교 개척 시 많은 부분 협력해 주었기 때문이다.

북감리회는 1887년 배재학당을 통해 한국 개신교 최초로 신학 교육을 하였고, 이는 1888년의 영아 소동으로 잠시 주춤했다가 1894년 다시 신학반(후일 신학회로 개칭)으로 재개되었다. 남감리회는 신학교육을 북감리회와 함께 연합하여 실시하기 시작했고, 이 결실이 1907년 협성신학교 개교로 나타났다. 여기서의 협성(協成)은 두 교단이 함께 연합했다는 의미이다. 이 협성신학교가 지금의 감리교신학대학교의 기원이다.

장로회가 1907년 평양에서 대부흥이 일어났던 것보다 먼저 감리회는 1903년 원산에서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 남감리회 선교사 하디(Hardie)의 회개로 시작된 부흥 운동은 삽시간에 주변으로 퍼졌고, 선교사들과 한국인 모두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며 새롭게 사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래서 교회사적으로 1907년 한국 교회 대부흥 운동은 1903년 원산 대부흥 운동이 불을 지핀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한국에 동시기에 들어온 장로회와의 과열 경쟁을 피하기 위해, 감리교회는 장로교회와 선교지 분할 협정을 맺었다. 원칙은 다음과 같았다. 1. 서울, 평양, 부산 같은 큰 도시는 동일 선교지로 삼는다. 2. 선점되어 있는 지역은 선점한 교단에 양보한다. 이를 통해 분할된 감리교 장로교 선교지는 다음과 같았다. 감리교는 경기, 강원, 충청, 황해, 평남, 평북 일부지역, 장로교는 경기, 경북, 경남, 전북, 전남, 제주, 황해, 평남, 평북, 함남, 함북으로. 당시 감리교는 남북 감리회 두 개의 선교부만 들어와 있었고 장로교는 미 남북 장로회, 캐나다 장로회, 호주 장로회 총 네 개의 선교부가 들어와 있어서 처음부터 양 교단은 교세 차이를 보였다. 그래서 장로교가 보다 넓은 지역에 선교지를 할당 받을 수 있었다. 따라서 현재 북한 지역에 우세했던 교단은 감리교가 아니라 장로교였다. 선교지 분할에 의미가 없어진 지금, 감리교가 중부 지역에 강세를 보이고 장로교가 전라도, 경상도를 포함한 남부 지역까지 강세를 보이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존 웨슬리 시절부터 낙오지 지역에 중점적인 선교를 하던 관례대로, 섬이나 해안 지역에 감리교의 교세가 강한 편이다. 현재 감리회는 처음 들어온 인천을 비롯, 서울, 경기도, 충청도(서해안) 쪽이 강세를 보인다. 또 강원도 지역에서도 나름 강세를 보이는 듯. 다만 경상도전라도 쪽은 장로교단이 압도적이라 감리교는 좀 생소하게 받아들이는 듯 하다.

5.1.2. 자치시대(1930~1945) : 자치와 어두운 신사참배의 역사[편집]

남북 감리회는 한국에서 다방면에 걸쳐 협력하였고,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부흥하여 1916년부터 본격적으로 통합 논의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3.1운동 이후에는 독립에 대한 갈망이 높아지면서 교회도 독립 교회를 설립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1923년부터 통합 절차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우선 전도 사업, 교육 사업, 출판 사업 등을 공동으로 추진하고, 예문을 통일, 연회원 입회 규칙, 교회 임원 명칭을 통일하고 선교기념예배당 건축 사업에 합의하였다. 1926년에는 '조선남북감리교회 통합방침연구연합위원회'가 조직되어 합동 5원칙을 정했다. 1928년과 1930년에는 북감리회와 남감리회 총회에서 각각 합동이 승인되었고 1930년 12월 2일 '기독교조선감리회' 창립 총회가 개최됨으로써 한국 감리회는 자치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연회는 중부, 서부, 동부, 만주 네 연회를 두었고[19], 총리사(후일 감독으로 개칭)는 북감리회보다 교세가 약했던 남감리회 출신의 양주삼 목사가 선출되었다. 이때 연회에서는 미국의 여 신학생들이 안수를 받았다. 비록 한국인 여성 목사 안수는 아니었지만, 세계적으로 매우 일찍, 그것도 한국 땅에서 여성 안수가 이루어졌다는 것에도 의의가 있다. 무엇보다 선교국보다 피선교국에서 교단이 합동된 것은 굉장히 큰 의의가 있다.

새로이 출범한 기독교조선감리회는 같은 해 '교리적 선언'을 채택하였는데 당시로서는 굉장히 진보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1920년대부터 미국 기독교계에 근본주의 바람이 불어 한국에도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을 생각하면 고무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이와 별개로 1930년대부터 시작된 일제의 민족말살 정책은 한국 감리교회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1936년 조선 총독부 학무국장은 양주삼 총리사에게 신사참배종교가 아니며 애국의 표현이라는 요지의 통첩을 보내 압박하였고, 양주삼은 이에 굴복하여 1937년 선교사들과 함께 신사참배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듬해인 1938년 9월 3일에는 목회자들에게 신사참배 참석을 종용하는 통보를 보냈다. 같은 해 개최된 3차 총회에서는 아예 총회 일정 가운데 남산의 조선신궁을 참배하는 일정까지 넣어 철저히 일제의 압력에 순응하는 비굴한 모습을 보였다. 3차 총회에서 총리사로 선출된 김종우 목사는 10개월 뒤 병으로 별세하였고, 후임 감독[20]으로 정춘수가 선출되었다. 이때부터 감리회는 본격적인 친일의 길을 걸었다.

정춘수는 3.1운동 33인의 한 명으로 참석했을 만큼 초창기엔 항일 의지를 지닌 인물이었으나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검속되었다가 전향서를 제출하고 석방되면서부터 친일의 길을 걸었다. 1940년부터 정춘수는 일본 감리교회와 합동을 추진했고, 창씨개명에도 앞장섰다. 정춘수는 같은 해 10월 총리원(지금의 감리교 본부) 이사회를 열어 일본 기독교로 '혁신'하라는 '혁신안'을 발표하였다. 이는 미국 선교사들의 영향력을 배제시키고 일본 교회처럼 한국 교회를 개조하려는 방안이었다. 구체적으로 혁신안에는 성경에서 구약을 배제시키고 신약에서도 유대교 영향이 강한 책들을 배제시켰다. 마르키온? 이는 유대인들을 핍박하던 동맹국 나치 독일과 궤를 함께 하기 위한 일제의 압력 때문이었다. 게다가 찬송가를 개편하여 '재림', '평화', '그리스도 왕', '구세주' 같은 주제나 단어가 들어간 찬송을 삭제하거나 개작하여 부르게 했다. 이 안은 일본 감리교회 아베 감독총독도 아베 감독도 아베이 통보한 걸 동어 반복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혁신안이 얼마나 쓰레기였던지, 전임 감독인 양주삼마저도 혁신안에 반대하는 데 앞장섰다. 대표적인 친일 인사로 알려져 있는 윤치호김활란도 이에 반대했다. 반대 의견이 더욱 많았던 관계로 1941년에 열린 임시총회에서 혁신안은 부결되었다. 그러자 정춘수는 다시 특별총회를 열었다. 그리고 반대파들의 입장을 막고 일본 경찰을 깐 채로 혁신안을 통과시켰다. 이로써 '기독교조선감리회'는 해산되었고 '기독교조선감리교단'이 되어 일본 기독교회 산하에 들어간 모양새가 되었다. 1945년 7월 19일에는 결국 모든 교파와 통폐합되어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이 되었다. 이 시기 용어조차도 바뀌었는데 대표적으로 목사라는 호칭을 쓰지 못하고 교사로 불렸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신학교가 온전할 리는 없어서 삐라 사건을 조작하여 1940년 감신을 무기 휴교시켰다. 전쟁이 극에 달하던 시기에는 교정마저 일본 군 시설로 접수되었다.

하지만 모든 감리교인들이 넋 놓고 정춘수의 막장 행각에 동조한 것은 아니었다. 철원읍교회의 강종근 목사와 회양읍교회의 권원호 전도사, 삼척 천곡교회의 최인규 권사, 신석구 목사 등이 신사 참배에 불응하였다가 옥고를 치르고 대부분 옥사 또는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강종근 목사는 1940년 9월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1년 징역형을 받고 투옥되었고, 이때 받은 고문으로 사경을 헤매다 병보석으로 풀려났지만 1942년 사망하였다. 권원호 전도사는 일제에 순응하는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일제에 반대하는 설교를 했고, 일제의 요시찰 대상이 되었다가 신사참배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투옥되어 고문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최인규 권사는 정춘수의 혁신안에 반대하다가 투옥되었으나 형무소에서도 전향과 신사참배궁성요배, 일장기 경례까지 거부하여 심한 고문을 당하다가 1942년 옥사하였다. 신석구 목사만이 유일하게 살아남았으나 북한이 적화될 때에도 끝까지 남았다가 한국전쟁 시에 처형되었다. 정춘수는 해방 후 결국 감리교회와 개신교 신앙을 떠나서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5.1.3. 현대(자립시대, 1945~현재) : 교단의 분열과 재통합, 예수교 대한 감리회의 분립[편집]

해방이 되자 한국 기독교계는 대회를 열어 교회의 앞날에 대해 논의했다. 본래 남북 교회 모두를 아우르는 대회를 개최하였으나 이미 소련의 점령 하에 있던 이북 교회는 참석하지 못해 '남부대회'로 불리게 되었다. 이 대회에서 해방 직전 일제에 의해 교단이 모두 통폐합된 것을 그대로 유지하느냐, 다시 환원하느냐 분분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결국 각 교파는 환원하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감리회는 이때 최초의 분열을 겪게 되는데, 먼저 정춘수의 막장 행적에 반대하다가 면직, 휴직 처분을 당했던 교역자들을 중심으로 재건파가 등장했다. 재건파는 85명이었는데, 이들은 감리교신학교에서 기독교조선감리회 중부/동부 연회를 소집하고 '1939년 이후의 정책은 부인하고 그 이전으로 돌아간다'는 요지의 선언서를 발표하고 1930년의 기독교조선감리회의 법적 상속자임을 천명하였다. 이에 속하지 않은 이들은 감리교 수습대책위원회를 조직하여 '교회 복흥 방침'을 발표하였는데 여기서 복흥파라는 용어가 나왔다. 두 파는 따로 총회를 열어 감독을 선출함으로써 분열하였다. 양 파의 분열은 1949년까지 계속되었다가 이해에 양측이 통합에 합의하여 통합 총회와 통합 연회를 개최하였고, 이때부터 교단명을 '기독교대한감리회'로 개칭하였다.

반면 이북의 감리교회는 수난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신석구 목사와 이윤영 목사를 중심으로 서부 연회가 재건되고 교역자 양성을 위하여 성화신학교도 세웠지만 소련에 의해 주요 인사들이 연행됨으로써 활동이 빠르게 축소되기 시작했다. 결국 1947년 서부 연회 목회자들이 대거 월남함으로써 서부연회는 사실상 소멸되었다.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감리회는 위기에 처했지만 미 감리회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되려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과 실세였던 이기붕이 각각 감리회 장로, 권사였던 점은 더더욱 감리교회 양적 성장의 계기가 되었다. 정권에 힘입어 노른자위인 광화문에 교단 본부 부지를 할당 받았고, 4.19 전까지 계속 정권의 비호를 받았다.

1950년대에 감리회는 다시 분열하였다. 이는 장정을 어기고 감독 재선에 나선 류형기 목사 때문에 벌어졌다. 류형기 목사는 이미 감독을 역임하였고 1953년 임기 만료로 새로 감독을 선출해야 했다. 하지만 류형기 감독은 미 감리회와 친분이 두터웠고 당시 상황은 미국의 지원이 있어야만 재기가 가능했다. 이를 두고 류형기 감독의 재선을 지지하는 성화파와 장정대로 하자는 호헌파가 분열했다. 성화파는 이름에서 볼 수 있듯 이북에서 활동하다 월남한 이들 중심이었고, 호헌파는 충청도 인사들이 중심이었다. 호헌파는 1955년 독자 연회와 총회를 조직하고 신학교도 따로 세웠다. 두 파는 치열하게 갈등하다가 미국 감리교회와 한국 평신도들의 중재로 류형기 감독이 물러난 1958년 이후 합동 절차에 들어갈 수 있었다. 1959년 정동제일교회에서 합동 연회가 개최됨으로써 분열을 이리 봉합되었으나 각 파를 중심으로 한 이른바 서클정치가 감리회 안에 자리 잡았다. 두 파는 교단의 주요 직책을 놓고 끊임없이 경쟁했다. 1966년에는 정동파가 새로 생기면서 삼파전이 되었고, 1966년 총회에서는 세 파에서 모두 자파 인사를 감독으로 선출하려다가 110번이나 과반 미달로 감독이 선출되지 못하는 촌극을 빚기도 했다. 결국 세 파는 합의하여 우선 호헌파 변홍규 목사를 감독으로, 정동파 이병설 목사는 총무국 총무로, 성화파 나사행 목사는 교육국 총무로 선임하면서 사태를 마무리 지었다.

1960년대 교단 분열이 소강 상태를 보이면서 신학 연구가 활발히 일어났다. 유동식 교수와 윤성범 교수를 중심으로 토착화 신학이 감신을 중심으로 활발히 연구되었다. 유동식 교수는 풍류도와 신학의 대화를, 윤성범 교수는 유교와 신학의 대화를 시도하였다.

1970년대에 교단은 양적으로 급성장하는 동시에 또 다시 분열 하였다. 총대 구성을 놓고 세 파의 다툼이 벌어지는 가운데 1970년 11월 총회에서 성화파에서 감독이 나오자 이에 불만을 품은 153개 교회가 따로 경기연회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성화파나 호헌파도 아니었고 그간 교단 정치에서 소외되었던 인사들이었다. 하지만 경기연회는 교단의 승인을 받지 못했고 이에 1975년에는 연합총회라는 독자 총회까지 열었다. 경기연회가 분립된 상태에서 1974년 기존 총회는 감독 자리를 놓고 호헌파와 성화파가 경쟁했다. 이 과정에서 성화파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교단 정화를 선언하고 갱신 총회를 열었다. 이로써 기존 총회와 연합총회, 갱신총회 세 개의 총회가 분열되었다.

이에 충격받은 미 감리회는 분열을 수습하지 않으면 지원을 끊겠다며 압박해 왔고, 중립 교회들을 중심으로 교단 통합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런 노력으로 1978년 교단 분열을 종용케 한 교단 체제를 개혁하고 통합 총회를 열어 분열이 일단락되었다. 이때부터 감독을 연회별 복수로 만들고, 감독의 파송권을 형식화하여 장로교회처럼 개교회가 목회자 선임권을 가지게 했다.

78년 체제는 2004년까지 큰 변화 없이 이어졌다. 그러다가 2004년부터 옛 감독의 권한에 비견될 만한 전임 '감독회장' 제도가 신설되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78년 체제 하에서 기독교대한감리회의 대표인 감독회장은 연회 감독 중 한 명이 맡아 왔으나 늘어나는 행정을 전담할 전임 감독회장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었고, 이것이 2004년 전임 감독회장 신설로 이어진 것이다. 전임 감독회장은 막강한 권한이 있어서 경쟁을 촉발시켰다. 결국 2008년 신경하 감독회장의 임기 만료와 더불어 신임 감독회장을 선출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터졌다. 임마누엘교회의 김국도 목사의 사회법 위반 혐의를 들어 신경하 감독회장은 후보 자격을 뺏었지만, 김국도 파의 힘이 막강하여 이를 저지하려 했고, 결국 서로 고소하여 수년간 감독회장 자리를 놓고 표류했다. 2010년에는 감독회장 자리가 공석이 되기도 했다. 감독회장 후보자들 간의 자격 요건 문제로 생긴 분쟁 때문이었다(참고). 이것을 '감리교 사태'라고 한다. 결국 법원에서는 2010년 12월에 감독회장 대행으로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의 장로를 맡고 있는 변호사를 선임했다(참고). 감리교 내부의 대립이 극심하다보니 법원에서 결국 공석이 된 감독회장을 감리교 목사가 아닌 장로교 장로로 선임하는 지경까지 간 것이다. 2012년에 전임 감독회장이 임시 감독회장을 맡아 이 문제를 수습하고 2013년에 정식 감독회장이 선출이 돼서야 '감리교 사태'가 어느 정도 진정된 듯 하다.

2012년 9월 25일 감리교 총회에서 목회세습 금지법이 통과되었다. 이미 목회세습 문제가 오래된 상황에서 감리교에서 먼저 뒤늦게나마 목회세습을 막아보겠다고 나서 사회적으로도 크게 보도된 상황. 이런 상황에서 김홍도 목사는 다 날 죽이려 든다라고 미국에서 외쳤대나 뭐래나. 역시 불륜 6걸의 수장 답다. 하지만 이런 규정이 생긴 뒤에도 편법[21]을 통해 목회세습을 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여 현재는 아들은 아버지가 담임했던 교회를 10년간 담임할 수 없도록 규정을 보완하였다. 직접적인 세습의 길은 거의 막힌 셈이다.[22]

2016년 1월 14일 제 31차 감리교 임시총회에서는 한국 교단 중 처음으로 목회자 이중직을 허용하였다. 물론 장정개정위원회가 올린 개정안에 따라서 기존 이중 직업을 가진 교역자를 불성실한 교역자로 규정안 기존 법안을 재정자립이 어려운 미자립 교회[23]에서만 허용하였다. 이에 미자립교회 담임자가 이중직을 허락받으려면 , 해당연회 감독으로부터 근무지, 직종, 근무시간등을 서면으로 신청하고 허락받아야 한다. 이전에도 예장통합에서 목회자 이중직을 막거나 정죄하면 안된다고 보고서를 올렸으나 실제적으로 장정에 채택하지 않은 것을 본다면 최초로 이중직을 허용한 것은 그만큼 현실적으로 미자립 교회에 대한 지원이 전과 같지 않고 현실적으로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1960년대의 신학 흐름을 자유주의 신학으로 보고, 50년대의 지리멸렬했던 교단의 분열과 통합, 서클 정치를 보면서 환멸을 느낀 전 해병대 군종감 전덕성 목사가 1961년 교단을 탈퇴하였다. 전덕성 목사와 17인의 동지들을 중심으로 미국 자유감리교회의 지원을 받아 "한국 예수교 자유 감리회"가 1962년 설립되었고 전덕성 목사는 초대 감독으로 취임하였다. 1964년에는 교단명을 "예수교 대한 감리회"로 변경하였다.

5.2. 특징[편집]

감리회는 미국에서는 상당히 진보적이며 이성을 중시하는 교파로 알려져 있는것과 달리, 한국의 감리회는 한국 개신교의 절반 가량을 차지하고 있는 종파인 개혁교회(장로회)의 개혁주의 신앙의 영향을 많이 받아 보수적인 편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교회와 교단에만 국한될 뿐 신학대에서는 반면 원래의 색깔처럼 굉장히 진보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처럼 감리교회 대부분이 보수적이기에 신학생들 또한 보수적인 입장을 가진 신학생들이 여럿 있으며 진보적인 신학교수들의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는 학생들이 꽤 있는 편이다. 합동보수·고신·재건 등 보수적인 장로교단에서는 감리교에서 신학 공부를 했다고 하면, 좋게 말해서 자유주의자, 나쁘게 말해서 이단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24]

이는 굉장히 이상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 감리회의 기본 입장과 장로회의 기본 입장은 상당히 다르며, 교리적 측면으로 보면 오히려 서로를 어느 정도는 이단으로 해석[25][26]할 수도 있는 측면까지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불륜 6걸 문서에 나와있는 김홍도 목사 같은 경우엔 근본주의적이며 반이성적인 발언을 남발하여 리처드 도킨스에게 세계구급으로 까이기도 했을 정도. 또한 인터넷에서 활동하는 몇몇 감리회 계통 인사들 역시도 근본주의적인 신학을 주장하는 사람이 많아서 상당한 차이를 느끼게 한다.

5.3. 조직 및 교세[편집]

대한민국의 감리교 산하 대학교*

대학교 목록 【펼치기 · 접기】

대한민국의 감리교 산하 대학교

기독교 대한 감리회
(기감)

감리교신학대학교

목원대학교

연세대학교**

협성대학교

** : 연세대학교는 기독교 대한 감리회와 대한 예수교 장로회 (통합)이 공동 운영한다.

감리교 계열
초교파
***

배재대학교

배화여자대학교

안산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인덕대학교

*** : 재단이 감리교 계열이지만 어느 교단에도 소속되어있지 않은 대학교이다.


* :감리회 신앙 고백을 따르는 감리교회임에도 불구하고 대학교를 가지고 있지않아 기재되지 못한 교단의 신학교를 보려면 이 링크로 가라.

현재 기독교대한감리회가 대한민국 감리회를 대표하고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의 합동-통합에 이어 3번째로 큰 교단이다. 그리고 예수교대한감리회을 비롯한 감리교를 표방하는 소수의 교단들이 존재한다.# 참고로 JMS 등의 일부 사이비 종교에서 예수교대한감리회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이 이단으로 오해받는 일도 있다[27]. 감리교회를 표방한 소수의 교단들이 존재함에도 한국 감리교는 분열되지 않은 하나의 감리교회로 본다. 왜냐하면 장로회와 달리 총회가 분열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교 대한 감리회의 경우 군목 출신인 한 감리교 목사가 지나치게 타락한 기독교 대한 감리회의 현실과 지나치게 진보적인 신학에 반발하여 독자적인 교단을 만들어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장로교처럼 서로 제명 처리 하고 총회를 따로 열며 자기네가 정통이라고 우기는 경우가 아닌 것이다.

감리회 조직도
기독교대한감리회는 총회 - 연회 - 지방회 - 구역회 - 당회의 수직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총회는 본부라고 할 수 있으며, 연회는 천주교의 교구와 같이 전국을 각 지역별로 나눈 것이다. 지방회와 구역회는 연회를 더 자잘하게 나눈 것이며, 당회는 각각의 교회를 의미한다.

총회와 연회의 대표자는 각각 감독회장, 감독이라고 하며, 지방회와 구역회는 감리사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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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연회는 서울연회(서울 북부), 서울남연회(서울 남부), 중부연회(인천, 경기 서부), 경기연회(경기 남서부), 중앙연회(경기 동부), 동부연회(강원), 충북연회(충북), 충청연회(충남 서부), 남부연회(충남 남부), 삼남연회(영남), 호남선교연회(호남)가 있으며, 미국의 미주특별연회(미국 한인교회)와 서부연회(북한)가 존재한다.

각 연회 관할구역의 경계는 장로교의 노회 관할구역처럼 느슨하지 않고, 가톨릭·성공회 교구의 관할구역 경계처럼 명확히 구분되어 있다.

기독교대한감리회 기준 2016년 현재 교인수는 137만여 명이다.감리회 교세현황

2000년부터 자세한 교세 변화는 기독교 대한감리회 본부선교국(KMCMission) 홈페이지에서 확인 가능하다.

대략적인 지역별 교세를 살펴보면, 수도권강원권, 충청권에 교세가 강하며, 특히 강화군[28]을 포함한 인천광역시, 경기도 한강 이남 지역, 강원도[29], 대전광역시[30], 충청남도에 교회와 교인들이 집중되어 있다.

5.3.1. 산하 신학교[편집]

5.4. 교육[편집]

한국의 감리교 관련 4년제 대학교로는 감리교신학대학교(약칭 감신대), 협성대학교, 목원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연세대학교[31], 그리고 배재대학교가 있다. 신학과정이 있는 학교 중 메인인 감리교신학대학교는 신학적으로 상당히 진보적이나 목원대협성대는 보수적인 편이다(이전 문서에는 이렇게 씌어 있으나 감리교회 테두리 안에서 신학과는 보수. 진보로 쉽게 나눌 수 있지 않다. 오히려 교수의 성향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면 될 것이다.)

이 중 감리교신학대학교, 협성대학교, 목원대학교, 연세대학교에 교역자 양성 기능이 있으며, 배재대학교이화여자대학교신학과가 없다. 물론 미션스쿨이다 보니 채플도 있고 배재대에는 복지신학과가, 이화여대에는 기독교학과가 있지만, 교역자양성기능은 없다.[32] 연세대 신학과의 경우 감신대, 협성대, 목원대에서 감리교 필수 강의들을 수강하면 감리교 목사가 될 수 있다.

감리교계 전문대학으로는 배화여자대학교 등이 있다.

5.5. 신앙고백[편집]

5.5.1. 1930년 조선감리교의 교리적 선언[편집]

1. 우리는 만물의 창조자시요 섭리자시며 모든 선(善)과 미(美)와 애(愛)와 진(眞)의 근원이 되시는 오직 하나이신 하나님을 믿으며
2. 우리는 하나님이 육신으로 나타나사 우리의 스승이 되시고 모범이 되며 대속자가 되시고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3.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시사 우리의 지도와 위안과 힘이 되시는 성신을 믿으며
4. 우리는 사랑기도의 생활을 믿으며 죄를 용서하심과 모든 요구에 넉넉하신 은혜를 믿으며
5. 우리는 구약과 신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신앙과 실행의 충분한 표준이 됨을 믿으며
6. 우리는 살아계신 주 안에서 하나이 된 모든 사람들이 예배와 봉사를 목적하여 단결한 교회를 믿으며
7.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실현된 인류사회가 천국임을 믿으며 하나님 아버지 앞에 모든 사람이 형제됨을 믿으며
8. 우리는 의의 최후 승리와 영생을 믿노라.

아멘

5.5.2. 1997년 감리회 신앙고백[편집]

1. 우리는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며 주관하시는 거룩하고 오직 한 분이신 아버지 하나님을 믿습니다.
2. 우리는 말씀이 육신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부활승천 하심으로 대속자가 되시고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3. 우리는 우리와 함께 계셔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며 완전하게 하시며 위안과 힘이 되시는 성령을 믿습니다.
4. 우리는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구원에 이르는 도리와 신앙생활에 충분한 표준이 됨을 믿습니다.
5.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해 죄사함을 받아 거룩해지며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동참하도록 부름받음을 믿습니다.
6. 우리는 예배와 친교, 교육과 봉사, 전도와 선교를 위해 하나가 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믿습니다.
7. 우리는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함으로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나누고 평화의 세계를 이루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형제됨을 믿습니다.
8.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 우리 몸의 부활영생그리고 의의 최후 승리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믿습니다.

아멘

5.5.3.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신경[편집]

감리회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정의로운 사회구현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온 전통을 가지고 있다. 1930년 제1회 총회에서 사회신경을 채택하고 이를 신앙의 실천적 목표로 삼아, 보다 나은 사회를 이루는 데 이바지하여 왔다. 우리는 오늘의 시대가 안고 있는 새로운 문제들을 앞에 놓고 우리의 사회적 삶의 새로운 실천 원칙을 받아들여야 할 시점에 도달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우리 감리교인은 우리에게 선한 의지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힘입어 우리의 가정, 사회, 국가, 세계 그리고 생태적 환경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선언하는 바이다. 우리는 만물을 선하게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으며,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일에 부르심을 받았다.

1. 하나님의 창조와 생태계의 보존 우리는 하나님의 명하심을 따라 우주 만물을 책임 있게 보존하고 생태계의 위기를 극복해야 하는 사명이 있다.
2. 가정과 성, 인구 정책 우리는 가정과 성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귀한 제도임을 믿는다. 가정을 올바로 보존하며 성의 순결성을 지키는 것은 우리의 사명이다. 그리고 우리는 인구 문제로 인한 세계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책임 있는 인구 정책이 수립되도록 노력한다.
3. 개인의 인권과 민주주의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에게 자유와 인권이 있음을 믿는다. 따라서 정권은 민주적 절차와 국민의 위임으로 수립되어야 하며 국민 앞에 책임을 져야 한다. 우리는 정권 유지를 위해 국민을 억압하고 언론의 자유를 위협하는 어떠한 정치 제도도 배격한다.
4. 자유와 평등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유롭고 평등하기 때문에 성별, 연령, 계급, 지역, 인종 등의 이유로 차별하는 것을 배격하며 모든 사람들이 더불어 사는 사회 건설에 헌신한다.
5. 노동과 분배 정의 우리는 자기실현을 위한 노동의 존엄성과 하나님이 주신 소명으로서의 직업을 귀하게 여긴다. 동시에 우리는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빈부의 격차를 시정하여 분배 정의가 실현되도록 최선을 다한다.
6. 복지 사회 건설 우리는 부를 독점하여 사회의 균형을 깨뜨리는 무간섭 자본주의를 거부하며 동시에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전체주의적 사회주의도 배격한다. 우리는 온 국민이 사랑과 봉사의 정신으로 서로 도우며 사는 복지 사회 건설에 매진한다.
7. 인간화와 도덕성 회복 오늘의 지나친 과학 기술주의가 비인간화를 가져오고 물질 만능주의가 도덕적 타락(성도덕, 퇴폐문화, 마약 등)을 초래한다. 따라서 우리는 올바른 인간 교육, 건전한 생활, 절제 운동(금주, 금연 등)을 통하여 새로운 가치관의 형성과 도덕성 회복을 위해 앞장선다.
8. 생명 공학과 의료 윤리 우리는 근래에 급속히 발전한 생명 공학이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와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할 수도 있다는 사실과, 근대 의학의 발전이 가져오는 장기 이식 등에 대해 교회의 책임 있는 대책과 올바른 의료 윤리의 확립이 시급함을 강조한다.
9.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정의 사회 실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유일한 구주임을 믿는다. 또한 오늘의 현실 속에서 정의로운 사회 건설을 위해서는 타 종교와 공동 노력한다.
10. 평화적 통일 우리는 반만년의 역사를 가진 하나의 민족이 여러 가지 국내외적 문제로 분단되어 온 비극을 뼈아프게 느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민족의 동질성 회복과 화해를 통한 민족, 민주, 자주, 평화의 원칙 아래 조속히 통일되도록 총력을 기울인다.
11. 전쟁 억제와 세계 평화 우리는 재래적 분쟁은 물론, 인류를 파멸로 이끄는 핵무기 생산과 확산을 반대한다. 동시에 세계의 기아 문제, 식량의 무기화, 민족 분규, 패권주의 등의 해결을 위해 모든 나라와 협력함으로 세계 평화에 이바지한다.

5.6. 주요 교회[편집]

  • 기독교대한감리회

    • 정동제일교회 (송기성 목사)[33]

    • 상동교회 (서철 목사)

    • 종교교회 (최이우 목사)[34]

    • 중앙교회 (이형노 목사)[35]

    • 동대문교회 [36]

    • 선한목자교회 (유기성 목사)

    • 광림교회 (김정석 목사)[37]

    • 금란교회 (김정민 목사)[38]

    • 수표교교회 (김용성 목사)[39]

    • 석교교회 (황광민 목사)[40]

    • 만리현교회 (김래현 목사)

    • 청파교회 (김기석 목사)

    • 서강교회 (여우훈 목사)

    • 창천교회 (구자경 목사)[41]

    • 세신교회 (김종구 목사)

    • 남산교회 (이원재 목사)[42]

    • 베다니교회 (곽주환 목사)[43]

    • 대림교회 (임준택 목사)[44]

    • 대신교회 (황문찬 목사)

    • 서대문교회 (이주익 목사)[45]

    • 꽃재교회 (김성복 목사)[46]

    • 아현중앙교회 (이선균 목사)

    • 갈보리교회 (강문호 목사)[47]

    • 만나교회 (김병삼 목사)

    • 수원성교회 (지상천 목사)[48]

    • 수원종로교회 (안희선 목사)

    • 꿈의교회 (김학중 목사)[49]

    • 샘골교회 (진광호 목사)[50]

    • 제암교회 (최용 목사)[51]

    • 부산 제일교회 (정찬석 목사)[52]

    • 인천 내리교회 (김흥규 목사)[53]

    • 인천 대은교회 (박영준 목사) [54]

    • 인천 숭의교회 (이선목 목사)

    • 인천 부평교회 (홍은파 목사)

    • 인천 제일교회 (이규학 감독)

    • 인천 하늘꿈교회 (신용대 목사)

    • 대전 제일교회 (이성호 목사)[55]

    • 대전 한빛교회 (백용현 목사)[56]

    • 대전 하늘문교회 (이기복 목사)

    • 대전 천성교회 (윤백진 목사) [57]

    • 대전 복음천하교회 (곽성영 목사)[58]

    • 대전 보문교회 (김진태 목사)[59]

5.7. 주요 교단 목록[편집]

  • 기독교대한감리회(악칭 기감) : 한국의 감리교회를 대표하는 교단으로 WCC, NCCK에 가입되어 있다. 미국의 감리회는 신학적으로 상당히 진보 성향이나 기독교대한감리회장로회의 영향을 받아 어느 정도 보수화되어 있다. 다만 강경한 보수주의는 아니며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교단보다는 약간 진보적이고 한국기독교장로회보다는 온건한, 평균적으로 복음주의를 어느 정도 수용하는 중도 내지는 온건진보 성향을 보인다. 교인, 목회자 개인들의 성향 스펙트럼은 넓은 편으로, 급진 성향부터 극보수 성향까지 다양한 교인들이 존재한다. 에큐메니컬 운동에도 적극적인 면모를 보이며, 타 개신교 교단과 비교해서 예배전례와 교회력, 성서일과를 상당히 철저히 지키는 교단으로 거의 모든 교회들이 강단 십자가를 부착하고, 제대 위에 초를 켜고 교회력 예전을 상징하는 배너가 항상 걸려있다. 성공회에서 파생된 교단답게 열린 예배보다는 예전적 전통예배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편이며, 대한성공회를 제외한 국내 개신교 교단 중 예장통합과 더불어 예배 반주 악기로 오르간을 사용하는 비율이 가장 높은 교단이다. 지역적으로 인천을 중심으로 수도권[61]강원도, 대전, 세종충청남도 일원[62], 충청북도 북부 지역 및 경상북도 울진군 일원에 교세가 강하며 충북 남부, 호남, 영남제주도 지역은 교세가 약한 편이다.

  • 예수교대한감리회(약칭 예감) : 해병대 군종감을 지낸 전덕성 목사가 1961년 기독교대한감리회를 탈퇴한 후 1962년 미국 자유감리교회와 연합하여 세운 교단. 공식 홈페이지 소개 참조. 한기총 회원 교단으로 신앙적으로도 상당히 보수적인 하드코어 웨슬리 신앙을 추구하며 교회 일치(에큐메니컬) 운동에도 소극적인 입장을 보인다.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문래동에 총회본부를 두고 있으며 기감에 비해서는 교세가 매우 약하고 교단 소속 교회들도 그리 많지 않은 군소 교단이다.[63] 지역적으로는 기감과 비슷하게 수도권에 주로 분포하나 충청권은 교세가 매우 약하며, 영남권에는 아직 진출하여 있지 않다.

6. 일본 감리회[편집]

2차대전 이후 하나의 다른 교파와 하나의 교단으로 통합된 일본기독교단 산하의 감리교와 완전히 독립된 교단을 표방한 일본 자유 감리교단(日本フリーメソジスト教団)이 존재한다.

기독교가 1%도 안되는 일본답게 교회보다는 대학교로 유명한 편이며, 간토에는 시부야에 위치한 아오야마가쿠인대학이 있고 간사이에는 니시노미야에 위치한 간세이가쿠인대학이 있다.[64] 이중에서 간세이가쿠인대학은 현재도 자체적인 신학과를 갖고 있지만, 아오가쿠는 1971년에 신학과를 폐지하고 도쿄신학대학으로 이관시켰다.

과거에는 한국 감리교단과 긴밀한 연관이 있던 편이었고, 현재도 이런 식의 교류가 이루어지는 편이다.

7. 나무위키에 등록된 인물[편집]

7.1. 목회자, 신학자[편집]

7.1.1. 해외[편집]

7.1.2. 국내[편집]

7.2. 평신도[편집]

7.2.1. 해외[편집]

7.2.2. 국내[편집]

7.2.2.1. 독립 운동가[편집]

7.2.2.2. 친일 인사[편집]
7.2.2.3. 현대 인물[편집]

7.3. 감리교인이었던 인물[편집]

원래는 감리교 신자였으나 훗날 개종[66] 또는 무종교인이 된 인물.

8. 외부 링크[편집]

[1] 감독교회, 감독회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2] John이 성경인물 요한영어로 쓴 이름인 관계로 '요한 웨슬리'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존 웨슬리는 영국사람이다보니 영어발음대로 존 웨슬리라 부르는 게 맞긴 하다.[3] 존 웨슬리 본인은 메도디스트 신도회가 국교회에서 분리하는 것에 반대하였으며, 죽을 때까지 영국국교회 신부로 남아 있었다. 이 당시 국교회에서 나가지 않고 잔류한 복음주의 일파를 '저교회(Low Church)파'라고 한다.[4] 하지만 엄밀히 말해 장로교에도 노회, 총회와 같은 교회 연합 기구가 있으므로 완전한 개교회 중심 체제는 아니다. 완전한 개교회 중심 체제를 택하는 것은 침례교, 회중교회/독립교회이다.[5] 보편교회란 넓게는 4대 세계 공의회(니케아 공의회,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에페소스 공의회, 칼케돈 공의회)의 결정을 따르는 모든 교회를 의미하며, 좁게는 감독제 교회를 의미한다. 로마 가톨릭, 동방정교회, 성공회, 루터회가 여기에 해당한다.[6] 보편교회의 주교와 비슷하다. 영어 명칭은 감독과 주교가 둘 다 bishop으로 같다.[7] 그런데 한국 감리교에서는 감독의 임기가 끝난 전임 감독도 '감독'이란 호칭을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잘못이라는 지적도 상당수 있다.[8] 이는 존 웨슬리가 부흥 운동을 하면서 영국 국교회(성공회) 주교들에게 많이 시달린 탓이다. 웨슬리는 감독제의 폐해를 알고 미국 감리교회를 형성하면서 절대 감독 호칭을 쓰지 못하게 하였다. 웨슬리는 토마스 콕(Thomas Coke)에게 안수를 주면서 감독이 아닌 '감리사'로 임명했고, 미국에 가서 프랜시스 애즈베리(Francis Asbury)도 감독이 아닌 '감리사'로 안수하라고 명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콕과 애즈베리는 자신들의 호칭을 슬그머니 '감독'으로 수정하였다. 이에 웨슬리가 친 것은 당연. 하지만 이미 웨슬리는 죽음을 앞두고 있었기에 웨슬리의 의도와 상관 없이 미국 감리교회는 감독제 교회로 자신들의 역사를 이루어 나갔다.[9] 그런데 감리교(監理敎)라는 명칭에 '감독이 치리하는 교회'라는 뜻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영국 메도디스트 교회를 감리교회라 부르기에 애매한 부분이 있다.[10] 본래 소그룹 조직이 없던 장로교는 한국에 들어온 후 속회를 본따 '구역회'를 만들었다. 한국 한정으로 장로교의 교세가 감리교보다 크기 때문에 장로교인 대부분은 감리교가 구역회를 모방하여 속회를 만들었다고 알고 있지만 실상은 정반대이다. 하지만 대부분 헌금 봉투에는 '구역(속)'으로 되어 있는 현실...[11] 영유아 세례를 받은 이는 만 18세 이후 입교를 한 후, 성인 세례자는 세례 후 입교를 한 사람[12] 1. 인간의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of Man), 2. 무조건적인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3.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4. 제한적 속죄(Limited Atonement), 5. 성도의 견인(Perservance of Saints). 이 다섯 가지 항목의 앞머리 글자를 따서 흔히 '튤립'이라고 부르는 것이다.[13] 여담으로 감리회 국제본부와 구세군 국제본부는 모두 런던에 있다.[14] 대표적으로 사회 내 소수자(대표적으로 동성애자)에 대한 포용은 타 교단 측에서 봤을 때 상당히 충공깽한 수준. 그러나 한국의 감리교는 장로교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다른 나라의 감리교에 비해서는 보수적인 편이라 최근에는 목회자가 동성결혼, 동성애를 옹호할 경우 교단에서 퇴출시키겠다는 방침을 세웠다.[15] 단지 국교회의 교리를 충실히 따르면서, 경직된 국교회를 개혁하고자 했다.[16] 당시 일본선교회 관리자, 즉 일본 선교사였다.[17] 1885년 미국 감리교 선교사인 헨리 아펜젤러스크랜튼이 파송된 것을 시작으로 보기도 한다.[18] 당시는 갑신정변이 일어나기 약 반년 전이었다. 매클레이의 부인은 김옥균의 부탁으로 일본에 있던 조선 유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친 인연이 있었다.[19] 만주 연회는 선교 연회였다.[20] 1939년 연합연회 때부터 총리사 호칭을 감독으로 변경[21] 본인과 연결된 다른 목사를 거쳐 아들에게 목회직을 넘기는 방법[22] 이제 남은 방법은 맞바꾸기 뿐이다.[23] 월 1000~1500만원 이하[24] 다만, 교리와는 달리 교회 내의 기본적인 구조는 당연히 감리교의 기본적인 전통을 따르기 때문에 장로교와 다른 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감리교회에서는 여성 목회자 안수에 적극적이며, 여성 장로의 천거 또한 개혁교회(장로교)에서는 볼 수 없는 큰 차이점 중에 하나다.[25] 쉽게 정리하자면, 구원론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사실 구원에 대한 입장차이는 이단 여부를 가르는 중요한 잣대이기도 하다.[26] 물론 큰 틀에서 해석하면 같은 개신교적인 해석으로 통합할 수도 있으며 이는 외국에서 두 교파의 기본적인 입장이기도 하다. 하지만 외국에서는 개신교라고 해서 무조건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한국과 달리 "장로교인", "감리교인"등으로 자신이 속한 교파를 정확히 말하는 것이 보통이다. 참고로 Evangelical(복음주의)라고 말할 경우 보통 장로회이다.[27] 예수교대한감리회의 영문 이니셜은 JMC(Jesus Methodist Church)이므로 JMS와 혼동하지 말자. 자세한 것은 JMS 참고.[28] 대한민국 관내 시군 중 감리회의 교세가 가장 강한 지역이다.[29] 감리회 이외의 교단들 대부분(심지어 장로회 합동, 통합 등의 메이저 교단들마저도!)이 교세가 매우 약할 정도로 감리회에 심하게 편중되어 있다.[30] 감리회 강세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특이하게 장로회, 침례회, 성결교회 등 타 교단의 교세 역시 강한 편이어서 특정 교단에 편중되지 않고 균형을 이루며 공존하고 있다. 국내에서 서울특별시와 더불어 유이(有二)하게 특정 교단 쏠림 현상이 없는 지역.[31] 연세대장로회, 감리회, 성공회 등이 통합으로 이사회가 구성되어 있다. 감리회보다는 장로회의 영향력이 더 큰 편이다.[32] 배재대는 과거에는 신학과였으나, 지금은 사회복지가 메인인 학과로 변했다.[33] 한국 감리교회의 산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교회. 벧엘예배당은 대한민국 실효지배 지역 내에서 가장 오래된 개신교 교회당이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장로로 출석하던 교회이기도 하다.[34] 1900년 창립된 교회로, 배화여자중학교, 배화여자고등학교, 배화여자대학교의 모체가 되는 교회이다. 윤치호가 설립을 주도했고, 양기탁, 남궁억 등이 초창기에 출석했다. 1930년 조선 남/북감리회의 통합을 주도했던 교회. 통합 감리회의 초대 총리사인 양주삼 목사가 담임을 했던 교회다. 그외에 대한민국 개신교 교회학교의 선구자적인 역할을 한 교회이기도 하다.[35] 1890년 헨리 아펜젤러가 창설한, 정동제일교회와 더불어 한국 감리교 역사를 담고 있는 교회. 1983년에 준공한 인사동 하나로빌딩을 예배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바로 옆에는 기독교대한감리회의 사회복지 기관인 태화복지재단 본부가 자리잡고 있다.[36] 1892년 세워진 유서깊은 교회로 원래 흥인지문 바로 앞에 있었다. 서울특별시의 성곽 복원사업 및 광교신도시 이전 사업과 맞물려 예배당이 서울시에 수용, 철거되면서 많은 논란을 빚었고 당시 담임이었던 서기종 목사가 출교당하기까지 했다. 현재는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관에서 임시로 예배를 열고 있으며, 향후 광교신도시 이전을 추진하고 있다.[37] 김선도 목사가 과거에 담임이었으나 아들에게 세습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감리회 교리와 장정에 세습금지 규정이 신설되었다.[38] 위에 적혀있는 김선도 목사의 남동생인 김홍도 목사의 아들이다. 김정석 목사와는 사촌지간. '정'자 돌림인 듯.[39] 감리교에서 몇 안되는 신사참배 거부 목회자 중 한 명이자 북한에 잔류해 김일성 정권에 저항하다가 순교한 신석구 목사가 담임했던 교회다. 본래 수표동 시그니처타워 자리에 있었으나 1984년 서초동 예술의전당 인근으로 이전하였다.[40] 1910년대 건축된 예배당은 현재 서울시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41] 박춘화 목사가 과거에 담임이었다. 연세대학교 맞은편 경의선 고가선로 바로 밑에 위치하고 있다.[42] 해방 직후 평양 남산현교회 신자들이 김일성의 종교 탄압을 피해 남하하여 설립한 교회. 본래 회현동에 있었으나 남산3호터널 공사로 인해 반포동으로 이전하였다.[43] 구 구로중앙교회. 곽전태 목사가 과거에 담임이었으나 아들에게 세습하였다. 다만 만나교회와 더불어 아들이 아버지를 답습하기보다 좀더 발전한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하는 면이 있어서 상대적으로 비판은 덜 받는듯.[44] 담임목사는 영등포지방 감리사와 서울남연회 제12대 감독을 역임하였다. 길 바로 건너 우성아파트 자리는 1970년대 노동운동으로 유명했던 원풍모방이 있던 자리이다.[45] 해방 직후 감리교신학대학교를 본거지로 하여 설립된 교회. 이곳에서 평동교회, 충정로 광염교회 등이 분립하여 나갔다. 2010년 감리교신학대학교 종합관 바로 뒤에 웰치 감독 기념 예배당을 건축하여 현재에 이른다. 감신대와 인접해 있고 바로 연결되는 통로도 존재한다.[46] 구 왕십리감리교회. 1905년 동대문교회에서 분립하였으며, 왕십리 뉴타운 건설과 함께 예배당을 재건축하면서 현재의 이름으로 개명하였다.[47] 강변북로 잠실대교청담대교 중간, 상암동 방향으로 오른쪽에 보이는 큰 예배당이 갈보리교회이다. 본래 이 건물은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교단 소속 교회가 2000년 준공하였으나 공사대금을 지불하지 못해 다락방 소속 교회에 넘어갔던 것을 갈보리교회가 2007년 매입하였다.[48] 화서역 인근에 위치한 교회로 장로회 합동 교단의 수원제일교회, 침례회 교단의 수원중앙교회와 더불어 수원에서 가장 대표적인 대형교회이다. 성균관대역 앞에 있는 장로회 통합 교단의 수원성교회와는 다른 교회이다.[49] 구 새안산레포츠교회. 한국 감리교회 최초로 열린 교회를 표방하며 레포츠 시설을 운영한 교회로 유명하다.[50] 일제강점기 브나로드 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던 곳 중 하나로 계몽운동가 최용신이 활동했던 교회이며 심훈의 소설 상록수의 무대가 되었던 교회이기도 하다. 지금도 교회당 옆에는 최용신의 묘소가 있으며 교회당은 최용신 기념관을 겸하고 있다.[51] 강신범 목사가 과거에 담임이었다. 1919년 3.1 운동 당시 악명높았던 제암리 학살사건의 현장으로 현재의 예배당은 해방 후 일본 내 양심주의자들이 순교에 대한 사죄의 의미로 기금을 출현하여 건축한 것이라고 한다. 서해안고속도로 발안IC 인근에 있으며, 바로 옆에 3.1운동 순국기념관이 있다.[52] 1948년 대전제일교회에서 분립한 교회로 부산 지역 감리교회의 모교회이다.[53] 헨리 아펜젤러 목사가 세운 한반도 최초의 감리교회로 유명하다.[54] 현 감독회장 전명구 목사가 원로목사로 시무중.[55] 1908년 미 감리교 선교사 샤프 부부에 의해 설립된 교회로 대전 지역 감리교회의 모태가 되는 교회이다.[56] 구 서대전중앙교회. 최재현 목사가 과거에 담임이었으며 현재 원로목사이다. 대전 소재 감리교회 중 가장 규모가 크다. 현 예배당을 준공하기 이전에 사용하던 유천동 소재 예배당은 현재 예장통합 소속 교회가 사용하고 있다.[57] 감리교신학대학교배재대학교 이사를 지낸 조성근 목사가 과거에 담임이었으며 현재 원로목사로 시무중.[58] 석교교회라는 이름으로 대전시 중구 석교동에서 시작하여 교세가 커지면서 변동의 옛 충남제일교회 자리로 이전하였다. 곽성영 목사는 현재 남부연회 감독으로 재임중이다. 석교동에 현존하는 석교교회는 이 교회와는 전혀 별개의 교회로 이후에 구 석교교회 자리에 새로 설립된 교회이다.[59] 김용우 목사가 과거에 담임이었다. 현재의 예배당은 현 하늘문교회가 월평동으로 이전하기 전 선화교회 시절인 1983년 건축한 예배당을 인수한 것이다.[60] 신신묵 목사가 과거에 담임이었다. 예감 교단의 모교회격인 교회로 교단 총회가 문래동으로 이전하기 전에는 이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61] 특히 한강 이남 지역. 한강 이북 지역은 장로회의 교세가 오히려 강한 편이다.[62] 과거 전라북도 관할이었던 금산군과 남장로교 선교 구역이었던 서천군, 부여군은 제외. 참고로 금산군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교단, 서천군예장 합동 교단, 부여군한국기독교장로회기독교대한성결교회의 교세가 강한 편이다. 계룡시대전의 영향을 받아서 충남의 다른 지역에 비해 감리회 교세가 상대적으로 약하고 장로회 등 다른 교단의 교회가 많은 편이다.[63] 과거에는 정명석의 신흥종교 교파가 사용한 위장 교단명이며 이재록의 만민중앙교회가 '예수교대한연합성결교회'라는 교단명을 사용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는 글이 있었으나, 정명석이 사용했던 정식 명칭은 '예수교대한감리회(진리)' 혹은 '예수교대한감리회 애천교회'로 이 교단에 소속되었던 교회를 매입한 후 이름을 무단 도용하여 위장한 것이다. 현재 정명석의 신흥종교는 '기독교복음선교회'로 개칭한 지 오래이며, 당연히 예수교대한감리회 자체는 정명석과 관계가 없는 건전한 개신교 교단이다. 다음 백과사전의 예수교대한감리회 항목 참조.[64] 읽는 방법이 꽤 특이한데 한자는 분명 '関西'지만 간이가 아니고 간이로 읽는다. 그리고 로마자 표기는 역사적 표기를 따라서 'Kwansei'다.[65] 남편인 김대중 대통령은 천주교인이었다.[66] 기독교 내에서 종파를 옮기는 것도 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