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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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관
1.1. 교세 통계에 대한 이해
2. 역사
2.1. 프롤로그2.2. 교회의 시작(조선 후기)2.3. 일제강점기2.4. 해방 직후2.5. 군사독재 시절
2.5.1. 가톨릭 교회는 군사 정권에 아부하였는가?
2.6. 민주화 이후2.7. 2000년대 2.8. 교세 현황
3. 신학적 성향
3.1. 신학적 성향 분석에 대한 견해
4. 한국 가톨릭 교회 특유의 문화
4.1. 교적제도4.2. 매일미사4.3. 제사 문화4.4. 개신교 세례 인정 문제
4.4.1. 개신교 세례 인정 문제가 왜 쟁점이 될까?4.4.2. 반론 및 여담4.4.3. 재세례의 인정, 개종인가 보편교회로의 일치인가?
4.5. 기타
5. 사건 사고6. 납세와 재정 관련 정보
6.1. 납세
6.1.1. 한국 천주교회의 소득세 납세 略史
6.2. 재무제표와 수지 내역
7. 교구
7.1. 한국 가톨릭 교회의 교구7.2. 한국 가톨릭 교회 교구 현황
8. 교육 기관
8.1. 초등학교8.2. 중학교8.3. 고등학교8.4. 전문대학8.5. 4년제 대학8.6. 기타

1. 개관[편집]

대한민국의 가톨릭 교회(한국 천주교)는 국내에서는 개신교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눈에 띄는 일이 적지만, 사실 교파 별로 따지면 한국에서 가장 신자가 많은 기독교는 가톨릭이라고 한다. 개신교는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등 수많은 교파로 갈리는 데 비해 가톨릭은 전 세계적으로 단일 종파이기 때문. 이건 한국 내에서도 마찬가지.[1]

신자 수

전체 국민 비율 %

조사 연도

종교 없음

불교

개신교

가톨릭

기타

1985

57.4

19.9

16

4.6

2.1

1995

49.3

23.2

19.7

6.6

1.2

2005

46.9

22.8

18.3

10.9

1

2015

56.1

15.5

19.7

7.9

0.8

[2]
2015년 기준, 가톨릭 신자는 약 389만 여명으로 추산.[3]

출처 : 통계청 (인구주택총조사 1985, 1995, 2005, 2015)


1.1. 교세 통계에 대한 이해[편집]

왜 그런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좋은 의미에서인지, 그 반대인지 한국 천주교 신자 통계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다는 것이 나무위키 문서 내 곳곳에 나타나 있다. 또 잘못 이해된 내용도 있는 만큼 한 번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무엇보다 전제를 할 사항은 가톨릭 교회가 신자 1명당 얼마씩에 신자 수 곱해서 매매할 일도 없거니와, 선거철만 되면 공직 선거 후보자들 불러다가 세력 과시하지도 않으니, 굳이 신자 수를 부풀려 교세가 크다는 것을 남들에게 보여주려 할 유인이 없다는 것이다.

한국천주교 중앙협의회가 발표한 가장 최근 통계는 <한국 천주교회 통계 2016>이며, 이에 따르면 2016년 12월 31일 기준으로 전국 16개 교구가 집계한 신자 수는 574만 2천여 명으로 전년대비 1.5% 증가하였으며, 남한 전체 인구의 10.9%에 해당하는 수치이다.

그런데 문제는 통계의 주석에도 명시되어 있다시피 세례성사 기록과 교적을 근거로 집계된 수치이므로 응답자가 스스로 응답하는 방식으로 조사된 정부(통계청) 발표 ‘인구주택총조사’ 표본 집계와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신자로 집계된 전체가 모두 신앙생활을 지속적으로 한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보조 지표로 주일미사 참례율(19.5%), 판공성사 참여율 (부활 31.7%, 성탄 30.1%) 등을 함께 발표한다.

한편 통계청에서 실시한 2015년 인구-주택 총조사 결과 신자 수는 389만여 명으로 추산되어 이전 조사인 2005년에 비해 급감하였으며, 인구 대비 신자 비율도 2005년 10.9%에서 2015년에는 7.9%로 급락하여 충격(?)을 주었다고 한다.

그럼 여기서 점검해 볼 사항은 가톨릭 교회 통계와 통계청 발표 통계 수치 사이의 괴리 원인이 무엇인가이다. 2015년 통계 발표 이전까지만 해도 신자 통계의 경우 가톨릭 교회에서 발표하는 수치보다 통계청에서 발표하는 신자 수가 더 많아 이례적인 사례였기 때문에 더 관심이 된다. (이의 이유로는 상위 문서인 가톨릭의 6번 항목 가톨릭 신자의 6대 의무에 자세히 서술된 바와 같이 관면혼과 유아세례를 들 수 있으며, 교회에서 발표하는 신자 통계에 냉담자를 제외시킨다는 주장이 터무니 없다는 근거는 아래 자세히 설명된다.)

한 가지 이유로 들 수 있는 것이 통계 집계 방식의 변화를 들 수 있다. 통계청이 5년마다 실시하는 인구-주택총조사는 2010년까지만 해도 전수조사였다. 즉, 통계조사원이 각 가정을 방문하여 해당 가구 구성원이 직접 문항에 응답[4]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2015년 조사에서는 등록센서스 방식이 도입되면서 표본으로 선정된 전국 20%의 가구를 대상으로만 방문조사가 이루어지고 행정 자료 등을 이용한 추계 방식이 도입된 것이다. (이번 조사에서 개신교 신자 수가 급증한 것으로 나타난 것도 이의 영향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신자 수가 많건 적건 줄었을 경우도 문제가 있지만, 사실 한국 천주교회가 맞닥뜨리고 있는 더 큰 골치거리는 앞에서도 나온 20%도 안 되는 주일미사 참례율과 30% 수준인 판공성사 비율이다. 냉담자 (혹은 판공성사는 보지만 주일미사는 거르는 경우) 문제를 개인의 믿음이 약해서 어쩔 수 없는 것이며, 가톨릭 교회는 이에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외면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며, 다만 이는 가톨릭 교회내부에서 고민하고 해결할 문제이니 밖에서 왈가왈부할 문제는 아니다.

정부 통계와 교회 통계 괴리의 원인 분석은 담당자들이 알아서 해결할 일이고, 앞에서도 썼듯이 한국 천주교회에서 신자 수 절대 수치 자체는 그 중요성에서 우선순위가 밀리고, 신자 수가 많으니 좋은 종교라고 자랑질할 일도 없다. 사정이 이러하니 1980년대 이후 천주교 신자가 급증한 것에 위협을 느낄 일도, 최근 신자 수 정체(또는 감소) 현상에 크게 반색할 일도 아니라고 본다.

한편 나무위키 내 여러 문서에서 판공성사를 6회 이상 안 본 신자를 쉬는 교우로 분류하여 신자 통계에서 제외시킨다는 기술들이 꽤 여러 곳에 보이는데, 만약 한국천주교 중앙협의회가 발표한 신자 574만여 명에 냉담자들이 제외되어 있다는 이런 주장에 따라 신자수를 계산해 보면 판공성사 참여율이 30% 수준인 만큼 대략 곱하기 3을 하면 주교회의 수치를 따를 경우 신자수가 1,600만여 명, 통계청 수치를 적용해도 1,200만여 명이라는 결과가 나오는데, 이는 분명히 아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판공성사를 6회 이상 보지 않으면, 교적이 본당에서 교구청으로 이관되고, 판공성사표는 발급되지 않지만, 여전히 신자 통계에는 포함된다. 또 냉담 기간이 아무리 길어도, 고해성사를 통해 신앙생활을 재개할 의사를 보이면 교적은 바로 본당으로 돌아온다. (허위 사실 유포로 냉담자들이 가톨릭교회로 돌아오려는 의지를 꺾으려는 시도라면 중단하자.)

2. 역사[편집]

2.1. 프롤로그[편집]

우리나라에 가톨릭이 전해진 시기에 대해서는 정확한 설명이 어렵다. 다만 임진왜란고니시 유키나가,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등이 조선 땅에 왔었으며, 또한 이 와중에 일부 조선인 포로들이 가톨릭 세례를 받기도 했다.

또한 2016년에는, 교황 요한 22세고려 충숙왕에게 1333년에 보낸것으로 추정되는 편지가 바티칸에서 발견되었으나,# 잘못된 해석이라는 반박이 나왔다. 자세한 사항은 충숙왕 항목 참조.

한국 가톨릭교회의 시작은 후술할 이승훈 베드로가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세례성사를 받은 1784년으로 보고 있다. 지난 1984년 교황으로는 처음 한국을 방문한 요한 바오로 2세의 방한 목적이 한국 천주교 전래 200주년 및 서울대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이었던 만큼 이를 정설로 받아들여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한편, 이보다 5년 정도 앞선 1779년을 기념하려는 움직임도 있는데,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소재 천진암은 남인 계열 유학자 정약용, 이벽, 이승훈 등이 1779년부터 모여 천주교 서적을 읽었던,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로 꼽히는 곳으로, 이곳에 건설되고 있는 천진암 대성당은 이들이 모임을 시작한 지 300주년이 되는 2079년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2.2. 교회의 시작(조선 후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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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천주교는 외국인 선교사에 의해 전파된 것이 아니라 책으로 배우면서 스스로 받아들인 천주교 역사상 거의 유일한 사례이다.[5]


가톨릭이 이처럼 독특하게 조선에 전파된 이유는 실학과 관련이 있다. 성리학에 한계를 느낀 몇몇 실학자들이 서양 학문을 배워오는 과정에서 한국에 전해졌다. 정확히는 17세기 중국 베이징의 천주당을 방문한 사신들에 의하여 '서학(西學)'으로 소개되었고, 18세기 후반에 남인 계열의 실학자들에게 신앙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당시에 들여온 책이 <천주실의>였고, 마테오 리치한문으로 지은 것이 언문(한글)으로 옮겨지며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게 되었다. 초기에는 서학(서양의 학문)으로서 몇몇 학자들의 '연구 대상'이었다. 이 때문에 이 시기에는 천주교가 아닌 천주학이라는 용어를 썼다. 이 연구회(?)를 지금은 명례방 공동체라고 부른다. 역관 김범우 토마스가 자신의 집을 모임 장소로 내주었다. 가톨릭교회에서 이 집터를 매입하여 세운 건물이 다름 아닌 현재의 명동성당이다. 하지만 모여서 서적을 읽고 연구/토론을 거치며 교리를 습득하고 신앙을 가지는 사람이 생겨났다. 정식으로 신부가 파견되기 전까지는 교인들 사이에서 임의로 주교신부를 뽑아 신앙활동을 했다고 한다. 물론 이것은 교회법상 허용되지 않는데[6], 초기 신자들도 이를 나중에야 알게 되어 부랴부랴 베이징 교구에 신부의 파견을 요청하여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입국하게 된다.

최초의 영세자, 즉 우리나라 최초의 가톨릭 신자로[7] 인정받은 이승훈 베드로는 베이징까지 가서 서양인 신부에게 세례성사를 받았다. 이후 조선으로 돌아와 여러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다. 가톨릭 교리상으로는 신자도 세례를 줄 수 있다. 다만 어디까지나 임종이 가까운 환자처럼 급박한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허용되며, 이마저도 완전한 형태를 갖추기 위해서는 영세자의 상태가 호전된 뒤에 반드시 충분한 보충 교리를 받고 사제에게 세례를 받아야만 한다. 세례성사 참조. 즉 당시 조선의 특수한 상황에서 행한 것. 이후 베이징 교구와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최초로 한국에 몰래 들어와 전교를 시작하게 된다. 이 때부터 가톨릭이 한국에 본격적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1831년에는 한국 천주교회가 중국 베이징 교구에서 분리되어 조선교구가 설정되었다.

한국에서는 조선조에 들어온 후 크게 4번, 즉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8], 1866년 병인박해에 걸쳐 모진 박해를 받았다. 물론 크게 피바람이 분 것만 4번이었다는 이야기고, 그 사이에 크고 작은 박해와 처형들도 끊임없이 이어졌다. 특히 1866년의 병인박해가 혹독했는데 이 때만 최소 8,000여 명~최대 20,000여 명이 순교하였을 거라 추정될 정도로 조선의 박해는 매우 가혹한 것이었다. 당시 조선의 법 집행 체계는 해이해진 국가조직 때문에 많이 흐트러져 있어서, 가톨릭 신자라도 주교신부 급이 아닌 이상 평신도는 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뇌물로 사형을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형식적으로라도 배교하겠다는 뜻을 나타내면 목숨을 건질 수 있었고 조정에서도 이를 권고했다.[9]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순교를 택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고 하니 흠좀무.

최초의 순교자는 김범우 토마스로서, 1785년 체포되어 고문의 후유증으로 2년 후 순교하였다. 바로 앞에서 설명한 '명례방'의 장소를 제공한 중인(中人)이었다. 정약용 등은 양반이라서 가벼운 문초 후 방면되었지만, 만만한 중인이라는 이유로 시범케이스로 목숨을 잃었다. 천주교가 본격적으로 전래되기 시작한 것이 18세기 후반이니, 조선 조정의 박해는 상당히 빠른 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801년 이전 박해의 성격은 순전히 종교 박해라고 하기에는 모호한 측면이 있다.

우선 조선왕조 시대에는 현대적인 관점에서 종교라는 개념을 적용하기는 어렵다.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시점에서 종교임을 부정하는 현대의 유교와는 달리, 과거의 유교는 '진정한 종교는 유교뿐'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이것은 '종교'라는 단어 자체가 과거 유교에서 쓰이던 것과는 의미가 달라졌기 때문인데, 성리학자들이 성리학을 종교라고 생각한 적도 없고, 불교 또한 우리가 생각하는 종교로서의 관념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현대에 쓰이는 서양 단어 religion의 역어로서의 종교가 아니며 말 그대로 학문이라는 개념으로만 존재했다는 것인데, 이처럼 종교라는 개념이 없는데 종교의 자유, 국교, 종교탄압 같은 개념을 적용시키기는 불가능하다. 그보다는 남인에 대한 정치적 견제 및 (조정이 해석하기에는) 혹세무민의 사학에 대한 대응이라 봐야할 것이다.

정조실록에 의하면, 적어도 정조 시절에는 불교의 일부 종파라고 조정이 여겼으며, 당시에는 그냥 세상이 어지러우니 생겨난 사학 중 하나로 보았다. 그러나 이후 윤지충 바오로가 신주를 태워 버리는 진산 사건이 일어나고, 대규모의 박해인 신유박해가 터진다. 그 후 황사영 백서 사건이 연이어 터지면서 박해는 더욱 심해진다.[10] 황사영이 백서에 적은 '프랑스 황제가 직접 군대를 보내 조선을 정복해 달라'는 내용이 명백한 간첩행위 및 반역행위이기 때문. 예전에는 적당히 장형이나 귀양으로 끝났을 법한 사안도 얄쨜없이 사형장으로 끌려 가게 되었다. 프랑스에서는 조선을 일컬어 '한 번 가면 돌아올 수 없는 죽음의 땅', 심지어 "순교하러 가는 곳"이라고 부를 정도였으니 그 살벌함을 짐작할 만하다.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중국, 조선 등으로 파견되는 신부주교를 전담하여 관리했는데, 1839년 기해박해 때 처형된 앵베르 범 라우렌시오 주교[11], 모방 나 베드로 신부, 샤스탕 정 야고보 신부 등이 조선 최초의 프랑스인 순교자로서 유명하다. 이중 모방 나 베드로 신부는 김대건 안드레아, 최양업 토마스, 최방제 프란치스코 사베리오를 신학생으로 선발하여 양성, 마카오로 유학보냈다. 최방제는 유학 도중 병사하지만, 김대건최양업은 무사히 살아남아 신부가 되었다.

병인박해 기간 중에 천주교 신자들의 목을 벤 곳이라는 잠두(蠶頭)봉은 그 뒤로 머리를 자르던 산이라 하여 절두산(切頭山)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한국전쟁이 끝나고 1956년 한국 천주교에서 사들여 성지(종교)로 조성하게 되었다. 지하철 2호선을 타고 당산철교를 건너다 보면 철교 북단 동쪽에 바짝 붙어 있는 작은 바위산이 있고, 바위산 정상에 성당이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절두산 순교성지다. 아담하게 조성한 야외공원과 유물을 전시한 박물관도 있기 때문에 신자가 아니더라도 한 번쯤 가서 구경할 만하다.

1886년 프랑스와 수교 이후 프랑스가 적대국이 아니게 되어 천주교가 간첩 및 반역행위가 아니게 되었고, 프랑스 측의 요구로 가톨릭을 선교할 수 있게 됨으로써 선교가 허락되었다. 그러나 정작 제대로 믿는 사람들은 박해 때 싸그리 다 죽었고, 개항 이후에도 여러 차례 교난을 겪으면서 진통을 겪는다.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한국전쟁이 벌어질 때까지 대부분의 시골에서는 양반-상놈 체계가 잘만 유지되었음을 상기하자. 국가에서 탄압 해제를 선언했다고 해도, 깡촌에서는 가톨릭을 믿는다는 이유로 이웃 주민들이 구타, 약탈, 강간, 살인을 저지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이렇게 100년 동안이나 계속된 박해의 후유증은 상상 이상으로 컸다. 또한 프랑스 등 유럽에서의 전교 지원 또한 미미하여 미국을 앞세운 개신교에 세력이 밀리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혹독한 박해를 겪고도 자생하여 교회를 유지[12]시킨 역사는 바티칸 등 세계에서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는다.

탄압당한 신자들은 복자성인의 대열에 들어가기도 하였는데, 특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한국을 방문하면서 여의도광장에서 당시 순교자들 중 103명을 한꺼번에 성인으로 시성한 것도 이러한 평가가 배경에 깔린 것이다. 복자나 성인으로 추대되려면 교황청에 의해 한명 한명 지루할 정도로 철저한 심사를 거쳐 추려 낸다는 점에서 김대건 안드레아, 정하상 바오로와 101위 동료 순교자 103명은 아주 굉장한 숫자다. 또한 한꺼번에 시복/시성된 숫자로서도 가톨릭 역사상 최대이며, 시성식 장소가 성 베드로 대성당이 아니라는 것 가톨릭 역사상 유래가 없는 일이라고 한다. 이는 한국 가톨릭이 가장 자부심을 느끼는 역사다. 그리고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때 조선왕조 치하의 순교자 제1차 시복(124명) (즉,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을 했다.

물론,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1801년 박해의 원인이 된 황사영 백서 사건은 지금도 말이 많다. 이 황사영은 다산 정약용의 큰 형인 정약현의 사위였다. 이 백서 사건 덕에 이루어진 가톨릭 박해로 정약현의 아우인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는 참수형으로 순교하고, 세례는 받았으나 실질적으로 가톨릭 신자가 아닌 정약전, 정약용까지 18년씩이나 유배를 당하게 된다. 어쨌든 이 사건에서 신앙의 자유를 보장받기 위해 외국 군대를 불러들여 자기 나라를 지배하라고 하는 건 누가 봐도 매국노가 할 짓이다. 그것도 군함 수백 척과 정예군 5~6만 명을 보내달라고 했다.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이 고작 2천 명도 안되었음에도 그 난리가 났던 걸 생각해보면, 이 정도 병력이 침략하면 조선은 임진왜란급 전란에 시달렸을 것이다. 물론 당시 프랑스나폴레옹유럽 각지와 멀리 아이티를 비롯한 곳에서 싸움을 벌이느라 조선에 이 많은 병력을 보낼 형편은 못 되었지만, 병인양요 급의 파병은 마음만 먹으면 가능했다.

황사영 백서는 의금부 관리들이 보고서를 올린 뒤 백서를 문서궤에 넣어 보관하기에 앞서 한 부 베껴두어 세상에 전하게 되면서 내용이 「벽위편」이나 「동린록」과 같은 척사관계 기록에 포함될 수 있었다. 그 백서의 사본 가운데 하나는 프랑스인 선교사들의 손에 들어와 1860년대, 다블뤼 안 안토니오 신부[13]가 조선 가톨릭회사에 관한 비망기를 작성할 때에도 주요 자료로 활용되었다. 그리고 프랑스인 신부들이 병인박해와 같이 이 사본의 내용을 들먹이면서 병인양요의 명분이 되었으니 기어코 조선에 전란을 가져오게 했다. 약 1천여 명의 사상자 및 규장각 서고를 비롯한 무수한 문화재를 프랑스가 약탈하게 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된 셈이다. 당시 실권자인 벽파들이 가톨릭 박해에 크나큰 명분으로 삼아도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안동 김씨의 당시 실권자이자 시파인 김조순은 "천주교인에 대한 대규모 처형은 민심을 요란하게 만든다"고 보류했는데, 김귀주를 비롯한 벽파들이 "천주쟁이들이 크나큰 화를 불러올 것"이라고 김조순에게 거듭 간청하다가 이 백서 사건이 드러나면서 제대로 기회를 잡았다. 결국 온건책을 쓰던 김조순도 백서 사건을 전해듣고 충격과 공포에 빠져 결국 강경책을 쓰게 한다. 결국 황사영은 거열형이라는 참혹한 형벌을 받고 죽었다. 나아가 지방 유생들 등 '가톨릭은 양놈 군대의 침략을 권유하는 사교'라는 전국적인 인식이 퍼져 가톨릭 혐오에 이르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

이 때문에 그를 순교자로 기리면서도 천주교회에서는 황사영의 이러한 외세의존적인 태도를 비판한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굿뉴스 홈페이지 가톨릭대사전에는 "한편,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황사영의 ‘대안제시’를 반민족적 행위로 규탄하고 있다. 그러나 근대 민족주의가 성립되지 않았던 상황 아래서 제시되었던 그의 ‘몽상’을 반민족주의로 규정하는 데에는 재고가 요청된다. 그러나 그의 '대안제시'는 마땅히 비판을 받아야 한다. 그는 신앙의 자유라는 좋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무력의 사용, 국가생존권의 부정이라는 좋지 못한 방법을 사용하고자 했기 때문이다"라는 내용이 실려 있다.

그리고 한국 가톨릭 주교회의에서 추진 중인 124위 시복시성에 황사영 알렉시오, 그리고 그를 도왔던 황심 토마스, 김한빈 베드로 등은 결국 최종 시복시성 대상자에서 제외되었다. 이유는 "황사영순교자인 것은 확실하지만 교회 밖, 즉 국가에 해를 끼칠 수도 있는 행위를 했기 때문에 제외했다"고 한다. 그들은 1990년 최초로 시복시성 계획 당시에는 명단에 있었지만, 2000년대 최종 확정 과정에서 제외되었다. 이외에도 배교 행위가 강력하게 의심되는 정약용정약전도 보류되었는데, 말이 보류지 사실상 시복시성할 의사가 없다는 의미다.

다른 수치스런 역사로는 100년 후 벌어진 1901년 신축민란이다. 제주도에서 프랑스인 신부를 주축으로 행패가 워낙 심했기에 제주도민들이 들고 일어나서 제주도 내 가톨릭인 300여 명을 살해할 정도로 그만큼 반감도 장난 아닌 걸 알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이재수 문서 참조. 100년 가까이 묻혀진 이 사건은 1999년 영화 <이재수의 난>으로 잠깐이나마 알려졌다. 당시 이 영화를 "반가톨릭 영화로 봐야 하는가?"라는 등의 논란이 가톨릭 내에서 있었다고. 제작비 40억원으로 만들어 5억원 남짓 벌어들이는데 그친 흥행 실패 말고도 평도 매우 나쁜 작품으로 괜히 묻혀진 게 아니니 찾아서 볼 필요는 없다.

그 외에도 개화기 시절의 외국인 신부라는 특권을 남용하여 조선 관청에 난입하여 죄수를 탈옥시키고 주민들을 폭행하거나 범죄를 저지르고도 신부들이 대놓고 천주교 신자를 옹호하는 등, 구한말의 천주교는 매우 안 좋은 쪽으로 기록을 계속 남겼다. 그러나 2011년 천주교 서울대교구에서 안중근 토마스 의사 등 551명을 추가로 시복시성하겠다고 나섰는데, 여기에 황사영신축민란 때 사망한 교인 중 24명이 포함되어 있어 비판을 받았다.[14] 이에 대한 천주교계 내부에서의 반발까지 거셌는지, 결국 황사영신축민란 때 죽은 교인 중에 누구에 대해서도 시복시성 절차를 진행시키지 않았다.

박해 당시의 경험 때문에 한국 천주교 측에선 개고기에 대해 친숙하다고 한다.[15] 하지만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고, 불교에서 개종한 이들의 상당수는 아예 거부한다고.[16]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 지내면서 개고기를 먹으며 목숨을 이어갔다는 야사가 있다고 한다. 신학교의 식단에 개고기가 올라오기도 하며, 성당이나 천주교 단체에서 여는 음식 바자회에 개고기 음식이 올라오기도 한다.[17]

한편으로는 동학도 교리 때문에 천주교의 이단 중 하나라고 유교 지배층들에게 탄압받는 원인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참고로, 2014년 8월 16일에 조선왕조 치하의 순교자 제1차 시복(124명)을 했고, 시성을 추진하고 있다. 그리고 조선왕조 치하의 순교자 제2차 시복시성(133명), 근현대 신앙의 증인 시복시성(81명), 총 214명의 시복시성을 추진하고 있다. 여기에는 황사영(본인), 황심 신축민란으로 숨진 사람(1명), 한국전쟁 중에 공산주의자들에게 살해된 사람들이 포함돼 있다. 단, 김한빈, 정약용, 정약전, 이재수(본인), 안중근은 없다. 이에 대해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위원장 안명옥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주교는 "현재 기초자료 수집 단계에 불과하며 앞으로 10여 년간에 걸쳐 진행될 사안"이라고 말했다. 특히 신학적 측면에서 유교천주교와의 화해, 더 폭넓은 신앙적 시야가 필요한 연구가 동반돼야 할 것이라고도 말했다.

2.3. 일제강점기[편집]

한국 천주교의 암흑기.[18]

이 시절 대부분의 종교가 그랬듯 진정한 복지부동을 넘어서서 적극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를 보여준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대해서 이는 정치적인 일이니 막지 않는다고 했을 정도. 신사참배 자체가 교황청에 의해 허용된 것은 1936년의 일인데, 교황청이 허용하지 않던 시기에도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신자들의 독립운동을 탄압하고 독립운동을 밀고하는 등, 추악함의 절정을 보여주었다.[19]

외국인 신부들이 개별적으로 조선인을 도와준 사례가 종종 있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외국인(서양인)으로서의 개인적 영향력에 불과했다. 이마저도 민족운동을 하는 성직자들에게 국가의 일에 개입하지 말라며 경고를 주거나 대놓고 징계에 처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아들을 신부로 키우려 했던 안중근 토마스 의사를 교회 차원에서 애써 외면하였던 사실도 었었다. 1972년 안중근 의사 탄생 100주년 기념 미사명동성당에서 성대하게 봉헌되는 등, 안중근 의사에 대한 긍정적 평가 자체는 예전부터 많이 이루어졌지만, 교회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건 1990년대부터의 일이다.

교회 지도자인 주교들이 거의 대부분 서양인들이었던 일제강점기 때는 아예 대놓고 무시하기도 했으며, 해방 이후에도 한동안 애매한 태도를 보여왔다는 걸 생각해 보면 놀라운 일이다. 이것은 그저 교세 확장에만 몰두하던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20] 주교와 외국인 선교사들이 당시 조선 천주교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제사 문제로 박해를 당한 영향도 있겠지만 이는 너무나도 사회에 대한 종교의 영향력을 포기한 처사였다. 이 때문에 일제강점기의 가톨릭을 친일적이라면서 비판하는 학자들도 많이 있다.

가장 욕을 많이 먹은 것은 신민회 105인 사건.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8대 교구장이자 가톨릭의 지도자이던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 주교는, 안중근 일가족과 가깝게 지냈으며 사형 직전의 안중근에게 고해성사를 주었으나, 그 때문에 2개월간 명령 불족종으로 미사 집전을 금지당한 니콜라 빌렘 신부에게 후술할 정보를 알게 되었다. 안중근 토마스 의사의 사촌동생 안명근 야고보로부터 '조선인들이 데라우치 마사다케 총독 암살을 꾀하고 있으며, 그 중심에 안중근의 동생 야고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 이것을 눈길을 헤치고 가서 일본군 아카보 장군에게 밀고하여 이것이 105인 사건의 원인이 되었다.

3.1 운동 또한 일제강점기 초기 조선총독부의 철저한 감시와 탄압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있던 종교계가 주도한 독립운동이라 민족대표 33인이 전원 종교계 인사들이었다. 이 중 천도교개신교가 주류를 이루었고 불교 역시 만해 한용운과 백용성이 참가했지만 천주교는 단 1명도 참여하지 못 했다. 이러한 가장 큰 원인은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10대 교구장이자 최초의 한국인 주교인 노기남 바오로 대주교 이전에는 한국 가톨릭 교회의 대표격인 서울대교구(강점기 당시 경성대목구)장이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이어서 민족 운동보다는 교회의 교세 유지에 더 큰 무게를 두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당시 풍전등화와 같던 교회의 운명을 보존하려는 교황청의 노력과 맥락을 같이 하기는 했지만, 당시 나치공산주의를 강력히 비판하는 회칙을 반포한 교황 비오 11세나, 표면상으로는 중립을 유지했지만 비밀리에 나치의 눈을 피해 유대인들을 구제하려 노력한 교황 비오 12세의 행동과도 크게 대비되는 모습이다. 일제강점기 내내 보여준 이러한 친일행각 때문에 많은 신자들이 개신교로 개종했다는 설도 있고, 이 때의 경험을 반면교사 삼아서 이후 군사독재 시대 민주화 운동에서 천주교가 종교계에서는 가장 앞장서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철저한 정치와 종교의 분리(정교분리)이긴 했다. 이게 교회의 자발에 의한 것이 아닌, 군국주의 국가의 강압에 의해 이루어진 거란 게 문제였지만. 몇몇 교구에는 아예 본당에 일본 헌병이 들어와 사제들에게 "너님들은 군대를 가세요. 주님의 뜻입니다" 따위 소리까지 당당하게 지껄였다고 할 정도였다.

위의 이유 외에도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조선 정부가 탄압을 했던 병인박해 등의 기억이 생생히 남아있던 시기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들 입장에서는 자신에게 탄압을 가했던 나라를 굳이 독립시키자고 적극적으로 노력할 필요가 없었으니… 그래도 간도 지방에서 무장 독립 투쟁을 했던 의민단 등 평신도 차원에서의 독립 운동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2.4. 해방 직후[편집]

해방 이후 북쪽에 소련군이 진주하고 공산주의가 들어옴에 따라 간도의 연길교구[21]함흥교구, 평양교구의 신자, 수도자, 사제들은 모진 고난을 받았고 심지어 만주의 수용소에 끌려가 모진 고통을 겪은 독일인 수도자들도 있다. 이때 함경남도 원산시에 있던 덕원자치수도원은 남쪽으로 내려와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에서 수도원을 다시 재건한다. 성 베네딕토회 왜관 수도원. 공지영 마리아 작가의 소설 《높고 푸른 사다리》의 배경이 된 곳이기도 하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이런 박해가 더욱 극심해져서, 인민군이 점령한 남한 지역에서 성직자[22]와 신자들이 학살되는 사건이 빈번했다(각 교구에서 발간한 교구사를 들여다보면 이런 얘기들이 많이 나온다). 게다가 마을 단위로 이념이 갈라져서 서로 학살이 자행되었던 것처럼, 신자들이 모여 사는 마을(교우촌)은 인민군에 협조하는 마을 주민들에게 박해를 받고 ,국군이 진주해 오자 신자들이 이에 보복을 가하는 사태까지 있었다고 한다.

해방 및 6.25 전쟁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한 개신교계 구호단체가 한국에 구호물자를 배급하면서, 상대적으로 개신교의 교세보다 뒤쳐지게 된다. 물론 상대적이란 것이지, 가톨릭 신자 수도 꾸준하게 늘었다. 이승만과 미국 덕에 한국의 개신교가 세가 급격하게 늘었다는 주장이 있는데, 가톨릭 교회에서도 자체 판단하기론 1907년 개신교 평양 대부흥 이후 교세가 역전된 걸로 자체 판단하고 있다. 가톨릭 인터넷 굿 뉴스

2009년 12월 28일, 1949년부터 1952년까지 북한에서 사목활동을 하다가 북한 공산정권에 의하여 순교덕원자치수도원장 신상원 보나파시오 사우어 아빠스를 비롯한 함흥교구, 덕원자치교구, 연길교구의 순교자 38위에 대한 시복재판이 열렸다.# 이 외에도 평양교구홍용호 프란치스코 주교를 비롯한 평양교구 순교자 81위에 대한 시복시성도 추진되고 있다.#

이 당시 천주교는 현대의 보수 개신교보다 더욱 보수적이고 반공적이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당연한 일인게, 38선 이북에서 사제, 수도자와 신자들이 실시간으로 투옥, 납치, 살해(처형)당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평가에 대한 시대적 배경을 살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일제 시대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불렸던 평양에 거주하던 개신교 목사들 가운데 1950년 한국 전쟁을 전후로 1/3 가량이 공산당에 반대하여 처형되었고, 1/3 가량이 공산당 정권에 협력하여 조그련이라는 단체를 결성하였으며, 나머지 1/3이 남쪽으로 내려 와 서북청년단을 중심으로 한국 개신교 내의 반공운동을 주도하였다.

한편, 가톨릭 교회의 경우 평양교구장 주교를 포함하여 교구 소속 사제단 전원이 한 사람 예외 없이 한국 전쟁을 전후로 모두 처형당했다. 이런 상황을 감안할 때 전쟁 직후 한국 천주교회 내에 반공 심리가 퍼지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한 현상이 아닌가? 또한 1950년 한국 전쟁이라는 시대적 상황이 아니더라도 유물론을 신봉하는 공산주의와 가톨릭 교회가 양립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우리 대한민국은 극동의 민주보루로서 우리 가톨릭천주를 거스르고 신을 부인하는 저 악마의 소산 공산주의에 대한 투쟁을 개시한 지 이미 오래전이다. 이렇게 우리는 벌써 다만 국민의 의무로서만이 아니라 또한 가톨릭의 전우로서 대한민국이 가장 필요로 하는 비행기의 헌납운동에 더욱 힘쓰자. 물론 우리는 국민으로서 또는 직장의 일원으로 그 외 또 여러 부분으로 이 국민운동에 벌써 많은 부담이 있는 줄 안다. 그러나 우리는 반공의 최후전사로 자인하는 가톨릭이다. 우리의 정신을 다시 한 번 표시하자. 우리는 가톨릭 신자이기에 누구보다 더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을.
— 가톨릭시보 1949년 11월 10일자 社告

나는 이같이 부르짖고 싶다. “볼셰비키 공산주의는 내 자신의 적이요, 전 조선 가톨릭 20만 신도의 적이며 이 강산 3천만 동포의 적이며 더한층 전 세계 그리스도교의, 아니 이 우주 창조 후 아담으로부터 조물주이신 천주를 믿는 전 인류의 무덤과 저의 영혼의 적인 것이다. 옛날 네로 황제는 로마를 불살랐지만 공산주의는 전 세계의 침략자며 전 세계에 불을 놓아 멸망으로 이끌고 있는 20세기의 네로이며 지상의 뱀은 아담하와를 속였지만 공산주의자들은 전 인류를 그 감언이설로 속여 유혹하고저 하는 20세기의 뱀인 것이다. 공산주의적 볼세비키는 그리스도교와 그리스도교 문화에 대한 극도로 철저한, 즉 다만 이론적이 아니고 실천적 선전포고를 의미한다. 저들은 어떠한 신학적 비판적 神論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전투적 反神主義를 의미하는 것이다. 암흑의 권력이며 천주를 저주하는 마귀가 천주께 항전하였으니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은 우리 모든 신자뿐만 아니라 천주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일치단결하여 최후의 승리를 천주께 의탁하며 그 보호를 믿고 이 도전에 응전하지 않으면 아니되겠다.

- 윤공희 <가톨릭청년>(1947.11)에 기고한 <볼세비키적 공산주의를 배격함> [23]

2.5. 군사독재 시절[편집]

조정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해 박해를 받았던 구한말과 저항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심지어 친일행위를 벌이기도 했던 일제강점기, 그리고 4.19 혁명 이전까지 극렬 보수반공적인 모습을[24] 보이던 한국 천주교가 변화된 모습을 보인 것은 군사독재 시절로 평가된다. [25]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거치며, 천주교는 과거보다 더 민중 친화적이면서 사제들의 사회 운동 참여도 더 적극적으로 변한다. 정교분리를 강조하게 되면서, 오히려 가톨릭 쪽이 정치 권력의 눈치를 덜 볼 수 있게 되었다. 군사독재정권 시대에 탄압을 받는 민주주의, 인권 탄압을 반대하면서 정부와 큰 대립각을 세우며 이 점이 한국사회에 크게 부각되었던 것이다.

교회와 정부가 정면으로 충돌하기 시작한 것은 1971년, 故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이 전국으로 생방송되던 성탄 자정미사 강론 도중 박정희 정권의 장기집권을 정면으로 비판한 일로 시작된다. 1971년 성탄 미사에서 대놓고 "비상대권을 대통령에게 주는 것이 왜 나라를 위해 유익한 일입니까?" 라며 돌직구를 날렸던 것. 이에 빡친 박정희 대통령이 KBS에 전화를 걸어 방송 중단을 지시했고 성탄미사 생중계는 중단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후 직접 교황청에 연락해서 김수환 추기경의 직위해제를 요구했다. 물론 교황청은 이를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으며 오히려 추기경에게 이 사실을 조용히 알렸다고 한다.

당시 군사정권과의 갈등은 상당히 심각했는데, 대표적으로 유신헌법 체제인 1974년 당시 원주교구장 故 지학순 다니엘 주교가 체포되었던 사건, 1975년 4월9일 대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지 18시간 만에 전격적으로 사형이 집행된 인혁당 사건을 선교회와 외국 언론을 통해 세계에 폭로한 것을 빌미로 메리놀외방전교회 소속 시노트(한국명 진필세) 신부가 강제퇴거당한 사건 등이 있으며, 지금까지 가톨릭 교회 안에서 진보적인 목소리를 내는 정의구현사제단도 이 때부터 결성되어 활동하기 시작했다.

다만 박정희는, 정교분리를 내세워 공개적인 갈등을 빚었지만 가톨릭 자체에 대한 태도는 의외로 호의적이어서 딸 근혜를 서울 성심여자중학교, 성심여자고등학교, 서강대학교에 보냈으며, 종교를 가졌으면 가톨릭 신자가 되었을 것이라는 발언이 훗날 소개된 적까지 있다.[26]

전두환 정권에서는 박정희 정권보다는 직접적 대립은 적었던 것 같지만 오히려 군사정권의 막장성은 이전보다 더 심해진 모습을 보이게 되고 교회는 더 큰 대립각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가 1984년 방한 당시 첫 공식 행사로 광주광역시를 방문하였으며, 미사 집전을 위해 무등경기장으로 가는 경로로 금남로와 전남도청(당시 광주와 전남 지역 신자들은 미사 참례를 위해 대부분 무등경기장에 모여 있었던 만큼 금남로와 광주도청에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를 맞이해준 인파는 천주교와는 관계 없는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 아니면 순간 이동 혹은 수 많은 냉담자들? )을 거치도록 강력히 요구해 관철시켰던 점과 아래의 저 명언이 명동성당에 공권력 투입을 정부관계자들이 무려 추기경에게 협박하던 상황에서 나온 것을 보면 당시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1987년 6·10 민주항쟁이 절정으로 치닫고, 시위 주동 학생들과 노동자들이 피신하고 있던 명동성당으로의 공권력 투입이 임박할 때 김수환 추기경이 남겼던 말은 역사적 명언으로서 부족함이 없다.

성당 안으로 경찰이 들어오면 맨 앞에 내가 있을 것이고, 그 뒤에 신부들, 수녀들이 있을 것이오. 우리를 다 넘어뜨리고 난 후에야 학생들이 있을 것이오.


사회 전체가 군사정권 아래 숨죽이고 있던 시절, 그와 여러 사제들의 용기 있는 언행이 한국의 민주화에 크게 기여했다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앞서 말한 자발적인 신앙 전래, 박해 수난사와 더불어 한국 가톨릭교회가 가장 자부심을 느끼는 역사 중 하나다.[27]

이렇게만 보면 가톨릭이 진보적인 종교라고 오해하기도 하는데, 가톨릭 항목에도 있다시피 가톨릭은 상당히 보수적인 종교다. 타 종교의 관용적인 이미지 같은 것들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교황들과 각나라 주교들의 노력으로 이뤄진 것이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건 박정희 군사독재 시절부터 전두환, 신군부 시절까지 당시 야당의 거두였던 김대중이 가톨릭 신자였으며[28] 장면부터 시작해서 가톨릭 교회는 대체적으로 정치인에게 매우 관대했다.[29] 게다가 김대중만 그런게 아니라 이효상같이 정부 인사들도 가톨릭 신자들이 있었다.

즉, 가톨릭은 정치적으로 양다리를 걸친 상태였고, 여당이든 야당이든 필요에 의해서 서로의 이익을 위해서 뒤를 봐주는 관계였다. 한국인 최초 주교인 노기남 바오로 대주교를 필두로 하는 주교회의는 대체적으로 군사정권과 관계가 완만했으며, 오히려 박정희의 은사이자 대구 가톨릭계의 거물이였던 전 총리 이효상 및 여러 천주교인 정치인들과 끈끈하게 유착하여 서로 뒷문거래를 하는 등 정교유착적인 면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는 위에 언급된 노기남 대주교를 필두로 하는 주교들은 될 수 있으면 일제강점기에 그랬던 것처럼 정부랑 충돌을 피하려고 했고, 오히려 같은 이권을 얻을려고 친정권적인 자세를 취했다.

당시 총리였던 이효상은 대구 가톨릭계의 거물이였고, 막강한 권력을 바탕으로 가톨릭 교회의 뒤를 봐줬으며, 실제로 그는 교황청 대십자기사훈장을 받고, 그의 둘째 아들인 이문희는 신부로 서품된 지 7년만에 주교로 승진했으며 나중에 천주교 대구대교구 교구장으로 착좌한다. 밑에서 언급되는 성지조성과 관련된 부동산 및 여러 이권을 이 당시에 많이 봐줬다고 한다.

괜히 박정희육영수대구대교구 주교좌성당인 계산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딸인 박근혜세례성사를 받고 가톨릭계인 성심여자중학교, 성심여자고등학교, 서강대학교에 다닌 게 아니다. "가톨릭 재단 소속이였던 경향신문은?" 이럴 수도 있으나 경향신문은 가톨릭 신자인 장면 사도 요한을 밀어주다가 이승만에게 찍혀서 정간 먹고 이후에는 1962년 이준구 사장이 서울대교구로부터 신문사를 사실상 인수함으로써 군사정권 때는 천주교랑 별 상관 없는 언론이였다. 천주교 대구대교구제5공화국 출범 시기 국보위에 참여한 이력도 존재한다.

다만 이거와 별개로 뒤로는 전두환 시절에도 밀월관계를 유지했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1980년 언론 통폐합을 할 때 1도 1신문사 원칙을 내세워 가톨릭계 신문사인 매일신문에 당시 영남 구독율 1위인 영남일보를 합병시켜줘서 현재 매일신문이 경북지역의 제 1신문사가 되게 하는데 큰 도움을 준 것. 실제로 매일신문은 해당 항목을 확인해보면 알겠지만, 논조가 굉장히 보수적이다.

2.5.1. 가톨릭 교회는 군사 정권에 아부하였는가?[편집]

사실 관계부터 정리해보자. 이효상은 총리를 비롯해 행정부에 몸 담은 적이 없다. 당의장 서리 등 정당활동만 했다.

이문희 신부가 사제서품 7년 만에 주교 승진이 아니라 서품되었다는 것은 맞는데, 대구대교구는 대교구로, 대교구장 주교가 아니라 보좌주교가 된 것이다. 보좌주교는 대단한 권한이 있는 자리가 아니라, 이름 그대로 교구장 주교로부터 권한을 위임 받아 (대)주교를 보좌하는 자리이다. 부교구장 주교는 교구장이 공석일 경우 특별한 절차 없이 바로 교구장 주교가 되지만, 보좌주교는 그것이 보장된 자리도 아니다. 이문희 주교가 교구장 주교로 대주교가 된 것은 사제서품 후 20년이 지난 후의 일로, 그 당시 상황으로써는 그리 특별한 일도 아니다.

이문희 주교의 아버지 이효상이 박정희 정권에서 고위직을 지냈고 대구에서는 거물일지 모르지만, 바티칸 교황청이 이효상의 아들에게 주교 자리 하나 주고 박정희에게 잘 보여야 할 이유도 없거니와, 동아시아의 한 나라의 정권 실세가 로비한다고 주교 자리를 내줄 만큼 허접한 존재가 아니다.


박정희와 육영수가 천주교 대구대교구 주교좌 계산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린 것과, 박근혜가 가톨릭 계열 미션스쿨에 다녔다는 사실을 들어 주장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하자.

박정희와 육영수가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하고, 성당을 배경으로 한 결혼사진이 있으니 이 상황을 추측해 보자면, 우선 원칙적으로 성당은 예식장이 아니다. 비신자가 돈 싸들고 와서 빌려 달라고 한다고 빌려주는 그런 곳이 아니라, 가톨릭 신자인 남녀가 혼인성사를 하는 곳이다. 신자가 아니었던 두 사람이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린 것은, 아마도 1950년 한국전쟁 통에 변변한 시설이 없던 시절, 그나마 온전히 보존되어 있던 성당을 결혼식장으로 빌려 주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추측을 반박하고 싶다면 그 당시 상황을 아는 사람이 생존해 있을 수도 있으니 대구 현지 조사를 하던가 말던가 #

혹시 가톨릭교회박정희에게 결혼식장을 제공해 환심을 사려고 했다는 주장을 하고 싶은 건가? 당시 박정희는 육군 중령이었다. 그것도 유력한 육군 참모총장 후보인 전도유망한 영관 장교가 아니라, 남로당 연루 의혹으로 예편 조치되었다가 한국전쟁 발발로 인해 전쟁 수행에 필요한 인력 충원 차원에서 현역으로 복귀한, 그저 그런 중령이었다. 한국 천주교회가 그런 중령급 중견 장교에게 결혼식장 빌려주면서 잘 보이려고 할 이유가 없다.(머지 않아 박정희가 11년 후 쿠테타로 대한민국의 실권자가 될 거라는 예지력을 가진 인물이 천주교회에 있어 계산성당을 결혼식장으로 빌려 주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나올 법 하다.)

박근혜가 중학교부터 대학교까지 가톨릭 미션스쿨에 다녔다는 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뭔가 분명히 하자. 입학 자격이 안 되는 부자격자를 입학시켰다면 사법적으로 다룰 일이고, 박정희가 가톨릭 교회에 대해 개인적으로 호의적이었다는 것까지 가톨릭 교회가 책임져야 할 일인지 생각해 볼 문제다.


경향신문은 군사 정권 이후 가톨릭 교회와는 별 상관이 아니라 전혀 상관이 없는 언론인 것은 맞는데, 경향신문이 가톨릭 교회와 인연을 끊은 이후 한 때 1980년대에는 한회그룹 계열사였으며, 진보적인 노력을 하는 데도 불구하고 현재는 일부에서 한경오라는 이름으로 배척받고 있다. 경향신문이 가톨릭 교회 재단일 때는 막장이었다가 교회와 결별 이후 개과천선했다는 주장을 하는 데는 근거가 희박하다.

그 앞부분에서는 도대체 뭔 주장을 하는지 도저히 문맥을 잡는 것조차 어렵다. 김대중이 신자였다는 게 무슨 문제라는 건지, 정권으로부터 핍박 받는 야당 정치인에게 매우 관대한 것이 왜 문제인지, 어떤 사실을 두고 정권과 이익을 나누기 위해 원만한 완만한이 아니겠지 관계를 유지했다는 건지 분명한 서술이 필요하다.

또 자기 주장을 하기 위해 필요한 사례들만 교묘히 짜깁기 하는 놀라운 실력을 보이고 있는데, 나무위키 내에도 존재하는 내용이지만, 1980년 초 전두환이 새해 인사차 방문했을 때 고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이

마치 서부 활극을 보는 것 같다.


고 12-12 군사 쿠데타를 질타[30]한 것 등 자기 주장에 불리한 사실을 배제한 서술이 객관적인 타당성을 가질 수 있을지 의문이다.

  • 정교 유착 ?


가톨릭 교회는 정치단체가 아니다. 더 더군다나 야당도 아니다. 가톨릭 교회가 굳이 사사건건 정부와 충돌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또한 한국 천주교는 전래 초기 4차례의 대규모 박해를 포함하여 100여년 동안 모진 고난을 겪었던 만큼, 권력과 맞선다는 것이 어떤 불행한 결과를 가져오리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회에서 목소리를 내야 할 때 가톨릭 교회는 주저하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흔히 가톨릭 교회가 세상 밖으로 알려진 계기를 고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이 1971년 예수성탄대축일 자정 미사에서 유신 개헌을 추진하던 박정희 정권의 장기집권 의도를 비판한 강론으로 꼽지만, 그보다 앞선 1967년 강화도 삼도직물 사건을 시작으로 노동 운동, 농민 운동, 빈민 운동 등 사회 참여에 나섰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김승훈 베드로 신부가 1987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추도미사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을 발표한 것은 사회와 언론의 주목을 받고 싶은 강렬한 열망 때문이 아니라, 그 당시 이 나라에 사건을 은폐-왜곡-조작하려던 정권의 움직임을 입밖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에 사제단이 나섰던 것이다.

2.6. 민주화 이후[편집]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은 1970~80년대에 시국관련 발언을 자주 해서인지 주변에서 정치를 좋아하는 줄로 안다고 하였다. 정작 본인은 그때마다 "성직자가 언제까지 이런 얘기를 해야 하나"라고 입버릇처럼 중얼거리며 한탄했다고. 김영삼 대통령이 당선될 때 "아~ 이젠 목소리 높여 민주화를 촉구하지 않아도 되고, 정권과 팽팽하게 대립할 필요도 없겠구나"라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고 한다(참고: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 문민정부가 가져다 준 여유).

더군다나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은 시위대 탄압에 항의하여 함께 단식투쟁하던 신부들에게도 "난 예나 지금이나 아무리 명분이 좋다고 하더라도 사목자가 사목현장을 오랫동안 비워두고 무슨 일에 몰두하는 것은 찬성하지 않는다. 사목자의 본분은 자신에게 맡겨진 양떼를 돌보는 것이다. 그 본분에 소홀하면서까지 정신을 빼앗길 만한 일은 사목자에게 없다. 과거 전주교구 신부들이 유신정권에 대한 항의 표시로 무기한 단식농성에 돌입했을 때도 이같은 논리로 농성을 중단시켰다."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하였다.(참고: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 명동성당 경찰병력 투입과 노동운동). [31]

특히 가톨릭개신교가 같은 예수 믿는 기독교인데도 너무 비교되는 모습 때문에 가톨릭보다 개신교가 까이는 경우도 늘었고, 개신교인들도 "진정한 믿음을 찾으련다" 며 자기 교단에 등을 돌리고 가톨릭으로 갈아타는 경우가 많아졌다.[32] 당초 개신교가 중세 가톨릭이 썩었다는 이유로 종교 개혁을 일으킨 것을 감안하면 웃기는 현상이 아닐 수 없다.[33]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과정에서 보여준 소박한 모습, 한반도 평화를 위한 기도 등의 모습으로 좋은 인상을 많이들 받았고, 이때 극단적 반기독교 세력이 인터넷에 교황을 함부로 까는 글을 올렸다 뭇매를 맞기도 했다.

2.7. 2000년대 [편집]

2000년대 이후 유입되는 신규 신자의 수가 우리나라 종교 중 가장 많다. 2위는 불교. 개신교의 몇몇 관습에 실망한 신자들이 가톨릭으로 옮겨가는 요인이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로 보인다. 다만 1995년부터 2005년까지 개신교가 14만 명 감소한 데 비해 가톨릭이 200만 명 이상 증가하였다. 이는 10년 동안 70% 이상 증가한 수치인데, 새로운 종교인을 거의 가톨릭이 흡수한 셈이다. 과거의 경향과는 달리는 무교인이 종교를 갖는 빈도가 점점 줄어드리라 예상되므로 가톨릭의 성장세는 다소 완만해질 것이라는 주장이 있었으나 이를 반박하기라도 한 듯 2009년 12월에는 인구 대비 신자 수가 사상 처음으로 10%를 돌파했다. 사실 반기독교 여론에서 가톨릭은 빠지는 경우가 많아 반감도 없었고[34] 1984년과 198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2차례 방한과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후 가톨릭 열풍이 불기도 했다.

이명박 정부4대강 정비사업에 대해 주교회의 차원에서 반대 태도를 표명하였다. 정치적인 이유가 아닌 '생명보호'라는 교리의 실천을 이유로 들고 있다. 예를 들어 배란주기관찰법피임수단으로 인정/권장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 사업 예정지에서 시국미사를 개최하고 전국의 가톨릭 교회에서 반대 캠페인을 벌이는 등의 활동은 이러한 결정에 따른 것인데, 2010년 12월 8일에는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의 4대강 사업 관련 발언으로 교계 안팎에서 갈등 상황이 빚어진 바가 있다. 정진석 문서 참조.

2012년 5월 10일,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서울대교구장 사임 신청을 교황청이 수락하였다. 후임 서울대교구장으로 염수정 안드레아 서울대교구 총대리 주교가 서임되어 6월 15일에 취임하였고, 6월 25일에 착좌 미사가 거행되었다.[35] 2014년 2월 22일에는 서울대교구 염수정 안드레아 대주교가 추기경으로 공식 임명되었다. 이로써 대한민국에서 3번째 추기경이 탄생하였다.

  • 천주교 주교회의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추진 반대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산하 정의평화위원회(정평위)가 2015년 3월 19일 성명을 통해 정부의 국사교과서의 국정화 추진 정책에 대해 분명한 반대의 뜻을 밝혔다.

정평위는 성명에서 역사학계와 시민사회, 그리고 국민 과반수 이상이 반대한다는 여러 여론조사 결과가 있음에도 이를 무시하며 추진하는 한국사 교과서의 국정화 정책이 “가톨릭 사회교리가 근간으로 제시하는 보조성의 원리 및 민주주의의 원칙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정평위는 또한 국정화로 인해 한국사 교과서 내용에 있어서 특정 정파의 정치적 목적과의 관련성에 대한 우려를 나타내면서 “자율성은 학문 발전의 전제이며, 학문의 발전은 사회 발전의 토대이다. 역사의 서술 역시 학문적 진실을 추구하는 학자들의 양심에 의해 독립적으로 기술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천주교 주교회의 정평위 “국정교과서 반대”

2.8. 교세 현황[편집]

2014년 5월 7일 발표된 '교회 통계 연감 2012'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가톨릭 신자는 약 531만 명에 달했다. 한국 천주교회는 사순, 대림시기 판공성사를 6회 이상 안본 신자는 성당에 안 나오는 신자인 냉담자로 분류하되 일단 통계에 표시한다. 한국의 신자 수는 전 세계에서 47번째, 아시아에서는 5번째로 많은 숫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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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적으로 수도권전라남도에서 신자의 비율이 높고, 반면 경상도 지역에서는 대체로 비율이 낮은 편이다.[36]

수도권에서는 위의 이미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서울특별시 강남3구[37]과천시, 성남시고양시 등 1기 신도시 지역을 비롯한 중산층, 중상류층 밀집 지역[38]에 주로 신자가 많으며, 특히 서해5도강화도 등 부속도서들이 가톨릭 강세인 인천광역시가 가톨릭이 많다. 인천백령도는 중국과 가까워 일찍이 복음화된 곳으로 섬 주민들의 과반수가 현재도 가톨릭 신자이고 대한민국 해병대6여단 군종 신부는 지역 유지일 정도이다. 인천 본토도 사정은 마찬가지라서 가톨릭이 인천가톨릭대학교와 인천성모병원을 갖고 있다. 애초 기독교 자체가 중국과 왕래하기 쉬운 해안지대에 주로 전해졌고 내륙은 전파가 늦었다. 인천의 경우 기독교 초 강세 지역이라서 인천에 정착한 화교들도 가톨릭 또는 개신교를 주로 믿는다. 차이나타운에 아예 중국인교회가 2개나 있을 정도.[39]

서울시의 강남3구와 강동구, 용산구, 양천구 등의 부유층 지역과 고소득층 지역이 가톨릭 비율이 가장 높다. 비호남권 출신이 과반수 이상을 차지하고 지역도 교세가 버금가며, 호남권 비율이 높은 동작구, 노원구, 구로구, 금천구, 은평구, 관악구도 가톨릭 비율이 기독교 종파 가운데 1위이다. (서울 전지역 1위) 인천의 경우도 전방인 옹진군과 강화군를 비롯해 구도심과 연수구 등 부촌 지역에서도 단연 1위, 서울 통근자들이 많은 부평, 계양구도 가톨릭 비율이 많다.

경기권의 경우도 수원시를 비롯해 고양, 용인 등이 가톨릭 비율이 최고다. 강원도 역시 원주시를 비롯한 영서 지방과 최전방 지역에도 교세가 강하다. 또 충남의 내포 지역은 이전부터 가톨릭 비율이 높았다. 대전에서는 구도심의 비율이 높고, 충북에서는 청주시에서 비율이 높다.

경상도는 타 지역에 비해서 불모지인데, 지리적으로 가장 내륙이며 워낙 불교 강세지역이라 압도적으로 불교 신자 수가 많기 때문이다. 불교와 개신교가 양대 종교. 물론 대구광역시, 부산광역시울산광역시 등의 대도시 지역은 가톨릭 신자가 조금이나마 있다.대구, 부산 등의 대도시권에만 초록색이 칠해져있다.

부산에는 영남에서 몇 안되는 가톨릭 사립학교지산고등학교, 성모여자고등학교, 데레사여자고등학교가 있다(학교법인 성모학원). 영남권 출신 가톨릭 신자 유명인으로 오상진(아브라함)과 김태희(베르다)를 꼽을 수 있다.[40]

영남권의 경우 대교구가 있는 대구가 가톨릭 강세 지역이며, 그 외에 구미시, 김천시, 영주시, 칠곡군에도 가톨릭이 꽤 된다. 포항과 경주의 비율도 적지 않다. 부산광역시의 경우 구도심과 인구가 많은 지역, 낙동강 벨트에도 가톨릭이 꽤 되고, 창원, 김해, 양산, 포항, 경주도 가톨릭 비율이 꽤 된다.

호남권의 경우 전북지역은 개신교 초 강세인데 비해 전남지역은 신안을 제외하고 가톨릭이 강세다. 광주광역시만 해도 가톨릭 사립학교법인인 살레시오회(남자수도회)와 살레시오수녀학원(여자수도회)이 있을 정도. 살레시오 수도회와 살레시오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학교가 살레시오초등학교, 살레시오여자중학교, 살레시오여자고등학교(이상 수녀학원), 살레시오중학교, 살레시오고등학교(이상 남자수도회)까지 5군데나 된다. 광주 출신 가톨릭 신자 중 대표적인 인물들이 류화영류효영 자매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가톨릭 신자인 남도 출신이었다.

2016년에 나온 2015년 종교 통계를 보면 다시 100만 명 감소했다. 최근 들어 천주교 신자의 실제 미사 참례율은 그다지 높지 않고 냉담자수는 늘어나고 있다. 통계에 따르면 교적상의 교인은 500만 명인데, 미사 참석률은 더 내려가서 19% 내외이다. 사실상 기성종교가 몰락해 가는 흐름을 천주교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 할 수 있다.

3. 신학적 성향[편집]

전 세계 가톨릭을 통틀어보자면 한국 천주교는 대체적으로(산술평균적으로) 자유주의, 현대주의 성향을 보이는 편이다. 물론 세세히 따지면 신자, 사제 개개인의 스펙트럼은 넓고, 이건 어디까지나 세속적인 관점이 아닌, 가톨릭 내에서 따질 때의 얘기다.

  • 수도권, 대도시 지역을 중심으로 장궤틀이 없어지는 경향이 있다. 전례적 전통주의에 관심 있는 사람이 아닌 이상 한국의 일반적인 천주교 신자들 사이에선 장궤틀이 없어지는 게 무슨 대수냐는 정서가 있다. 장궤가 사장되어 목례로 통합되었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해왔던 사제나 주교에 대한 인사(목례)와 주님에 대한 인사(장궤)가 구분되지 않는다. 그런데 신자석이 좁다는 이유로 장궤를 하지 않는 곳에서도 복사들은 여전히 장궤를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 영성체를 꺼림직하게 여기는 정서가 강하다. 베이사이드와 같은 가톨릭계 이단이 영성체하는 것을 필터링하기 위한 실질적인 이유도 있긴 하다. 하지만 손영성체시에는 악마 숭배자 같은 이단이나 비신자가 성체를 훔쳐가는 것에(예를 들어, 성체를 입에 넣는 척하고 몰래 주머니 속에 넣기) 대한 필터링이 어려워진다.

  • 전통 전례에 대해서는 주교단 차원에서 상당히 소극적인 편이라, 교황 베네딕토 16세 시기에 교구장의 관면 없이도 평사제가 자율적으로 전통 전례 미사 집전이 가능하게 되었으나, 한국 천주교에서는 평사제가 전통 전례 미사를 집전하려면 교구장의 눈치를 많이봐야 하는 분위기가 여전하다. 전통 가톨릭 성향의 일부 교인들은 이에 불만을 표하기도 한다.

  • 미사 통상문의 변할 수 없는 부분에 커스터마이징을 해서 집전하는 사제가 많은 편이다.

  • 미사 통상문의 노래로 해야하는 부분들(자비송, 대영광송, 하느님의 어린양 등)은 성가대가 없다는 이유로[41] 노래로 하지 않고 입당, 봉헌, 영성체, 파견 때만 성가를 부르는 본당이 많다. 또 라틴어 성가를 어렵다는 이유로 잘 부르지 않는 본당이 대다수다.

  • 한국만의 독특한 성당 건축구조로 '유아방'이라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말 그대로 유아들이 미사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격리'해놓은 곳이다. 아기들을 미사 때 격리해놓고는 커서 성당에 안 나온다고 유아기 신앙 교육의 쇠퇴를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한 동성애 문제에 대해 한국의 개신교와 달리 적극적인 저주[42]도, 적극적인 옹호[43]도 하지 않는다.[44] 동성 간 성행위 및 동성결혼단호히 반대하지만, 동성애자 역시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존엄한 인간이고 피조물이므로("길 잃은 어린 양"), 그들을 미워하고 배척해서는 안 되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 가톨릭의 입장(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이런 관계로 평신도 단체들이 성소수자 단체들과 인권존중차원에서 연대하는 정도로 입장을 정리한다.

다만 가톨릭 개종자의 개신교 세례[45] 인정여부에 대해서는 영미권 가톨릭보다도 사실상 더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46][47] 2012년에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에서는 개신교 세례에 대해서도 유효성이 입증되면 그대로 인정해주자고 결의하였지만, 해당 결의는 일선 사목 현장에서는 사실상 사문화된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자면, 재세례 문제가 꺼림직하다면[48] 입교자의 요청대로 보충세례는 줄 수 있지만, 웬만하면 다른 예비자와 같이 정식으로 세례성사를 받을 것을 강력히 권유하는 분위기라든지. 이런 걸 영미권 가톨릭 신자에게 얘기해주면 문화충격을 받는다고 한다

지난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당시 개신교 측의 반응 가운데 그나마 유화적이라는 NCCK쪽 홍보실장 강석훈 목사는 "신학적 또는 교리적으로 반대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를 표현하는 방식은 더 성숙해야 한다. 교황은 가톨릭의 수장이자 한국을 찾은 손님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참조

즉 손님 찾아 왔으니 환영은 하지만, 신학적 또는 교리적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49][50] [51] 나무위키 내에 작성된 문서 가운데에서도 개신교의 가톨릭에 이루어지는 행태들이 서술되고 있으며, 이런 온갖 가톨릭에 대한 부정적인 교육을 받아 온 개신교 신자들의 세례 유효성을 입증하는 것이 쉬운 일인가 생각해 볼 일이다. 이런 상황들을 고려하지 않은 채 영미권보다 보수적이라는 가치판단을 포함한 주장을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설득력을 가질지 의문이다.

또한 교단 차원에서 타 종교와의 공존 및 평화로운 관계를 중시하는 성향을 보이기도 한다. 다만 위에 동성애 문제에 쓴 것처럼, 타 종교인 역시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존엄한 인간이고 피조물이므로 사랑과 친절로서 대하고, 그들의 신앙을 함부로 모욕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구원은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판단하시고 주시는 것이므로, 함부로 타 종교인의 천국행 지옥행 여부를 판단하며 저주하지 않는다는 것이지[52], 타 종교의 신이나 교리까지 옳다고 인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가톨릭예수 그리스도만이 확실하고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교리를 포기한 적이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us).[53]

생태신학이 한국 가톨릭 주류에 알게 모르게 스며든 것으로 보인다. 물론 급진적인 생태신학보다는 온건한 생태신학이긴 하지만. 주교회의 차원의 탈원전 운동이라든지 교구 차원의 우리농산물 운동[54]이 대표적인 예.

3.1. 신학적 성향 분석에 대한 견해[편집]

  • 신학적 성향 규정의 문제점


한국의 천주교회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한 노력 차원에서 신학적 성향을 분석하려는 시도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모르겠지만, 그에 내포된 위험 또한 유의할 필요가 있다.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 발표 자료에 따르면 570만여 명, 정부 통계 대로라면 400만여 명에 달하는 신자들의 성향을 하나의 범주(category) 안에 규정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으며, 과연 타당한 결과를 얻을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인간 개개인을 혈액형에 따라 분류하는 것은 분명 의미가 있는 일이다. 자기에게 맞지 않는 피를 수혈 받았을 경우 생명에까지 지장을 받을 수 있기에 범주를 나누어 어느 하나로 규정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몇 백만 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공유하는 속성은 단 하나, 종교가 같다는 점 외에 어떤 공통점도 찾을 수 없다. 각 개인의 경제 상황이 다르고, 교육 수준이 다르며, 정치적으로도 성향이 다를 수 있고 전제국가가 아닌 이상 다른 것이 정상인 것이다. 또 한 개인의 신학적 성향을 규정할 수 있다 하더라도, 각 사안에 대해서 다른 견해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경제 문제에서는 진보인 사람이 안보 사안에 대해서는 보수적일 수 있고, 그 반대인 경우도 존재할 수 있다.

이렇게 복잡다단한 각 개인의 성향을 산술평균이라는 도구를 이용해 취합하여 ‘한국 천주교는 이런 성향이다’라고 규정하는 것이 정확한 판단이라고 할 수 있는지, 또 그렇게 규정하는 것이 한국 천주교회를 이해하는데 어떤 의미를 갖는지도 생각해 볼 문제이다.

  • 신학적 성향 규정에 사용되는 도구의 문제점


자를 사용한다는 것은 주관적 가치(평가)를 객관화하려는 의미에서 유용할 수 있지만, 이에는 전제 조건이 필요한 데 ‘자가 정확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천주교를 이해하는데, 한국의 개신교’라는 자가 과연 유용한 도구인가 생각해 문제이다.

만약 개신교 특정 교파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갖고 있고, 그 관점에서 가톨릭교회를 이해할 필요가 있어 해당 문서에서 다루는 것까지 문제 삼을 일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는 가톨릭교회에 대한 이해를 위해 마련된 공간이기 때문에 그러한 편향된 관점에서 본 주장이 옳바르다는 보장도 없을 뿐더러 가톨릭교회의 본 모습을 보고자 하는 제 3의 이용자들에게 대단히 무례한 태도가 될 수 있다.

천주교 신자도 대한민국 국민인 만큼 부분집합인 가톨릭교회의 성향도 국민 일반이 갖는 가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야 정상이다. 국민 일반의 가치와 크게 다른 가치를 가져야 할 만큼 특별한 집단이어서는 안 되며, 이럴 경우 대부분 광신도로 발전할 가능성이 크다.

다만 특정 사안에 대해서는 달리 얘기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대표적인 예로 낙태 반대와 사형제 폐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생명 윤리에 관한 것인 만큼 이들 문제에 있어서 가톨릭교회와 신자 개개인이 일반 국민들에 비해 보수적[55]이라고 평가되는 것은 충분히 수용 가능한 견해이다. 또 낙태 반대와 사형제 폐지가 가톨릭교회만의 주장이 아니라 종교를 갖지 않아도 이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있는 만큼, 가톨릭교회가 이러한 사안에 대해 국민 일반의 가치보다 더 강한 주장을 한다고 해서 문제될 것도 없다. 그런데 가톨릭교회가 갖는 가치에 대해 한국의 개신교라는 잣대를 가지고 평가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판단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신중히 생각해 봐야 한다.

간혹 개신교 목사들 가운데 가톨릭교회그리스도교로 인정한다면서 자신이 포용력을 갖는다는데 대단한 자부심을 나타내는 경우를 볼 수 있는데, 인정을 해준다는 데 감사의 표시라도 해야 할지 대략 난감한 상황을 맞게 된다. 가톨릭교회는 누가 인정해줘서 정통 교회가 되고, 인정받지 못하면 이단이 되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인 것이다.

가톨릭교회를 이해하려는 노력의 한 수단으로라도 자신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사찰에 들어가 찬송가를 부르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게 보일 수 있다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 유아방이 한국 천주교회의 신학적 성향을 이해하는데 유용한 도구인가?


만약 일부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 유아방이 '격리만'을 위한 목적이었다면, 제단 방향으로는 유리로 하고 나머지는 벽을 세우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유아방은 의자 없이 좌식 구조로 되어 있어, 신발 벗고 들어가 앉는 방식이다. 이는 갓난쟁이들과 함께 온 (조)부모들이 미사 시간 내내 안거나 업고 있어야 하는 수고로움을 덜고, 아기를 의자에 내려 놓았다가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는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한 '배려'의 목적도 있기 때문인 것이다.

또 대개 만 3~4살이 되어 어린이집에도 다니고 의사소통이 될 정도로 성장하면, 유아방으로부터 '해방'된다. 그리고는 바로 제단에서 제일 가까운 첫 줄을 차지하고는, 유아방에서 보낸 기간보다 휠씬 오랜 시간 동안 신부님의 사랑 떠들 기미가 보일 때마다 쏟아지는 레이저 눈빛 세례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게 된다.

사정이 이러한데,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는커녕 자신의 존재조차 인지하지 못할 나이에 유아방에 내팽겨쳐졌다는 상처가 무의식 속에 남아 있다가 청소년기 신앙생활의 걸림돌이 된다는 희한한 상상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대략 난감하기 그지 없다. 어느 정도 말을 알아듣고 지시에 따를 수 있는 나이의 아이라면 모를까, 아무 때나 울고 빽빽 소리 지르며, 기저귀에 대소변을 누고, 젖을 먹는 아기를 데리고 어떻게 성당에서 미사에 참례하겠는가?? 부모로서도 불편하고, 다른 신자들에게도 민폐이다. 유아방을 부정적으로 취급하며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미사 중에 아기가 악을 쓰며 울어도 참아줄 수 있는지 의문이다. 아기 엄마를 맘충 취급하며 따가운 시선을 던질 가능성이 99%다

한국 천주교회에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자는 것도 아니고, 그 문제들을 은폐하자는 것은 더 더욱 아니다. 한국 천주교회에도 문제가 많으며, 그러한 문제들을 감추기보다 드러낼 때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더 빨리, 확실하게 찾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도 자명하다.

한국 천주교회의 신학적 성향을 파악하기 하는데 있어 장궤 문제와 입영성체 관행 등을 나열한 것이 나름대로 어떤 의미를 갖겠지만, 그리 간단히 판단할 문제는 아닌 것이 현실이라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56] 한국 천주교회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자칫 자의적인 기준에 의해 재단됨으로써 본 모습을 왜곡하고, 가톨릭교회를 알고자 하는 제3자에게 그릇된 정보를 줄 가능성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4. 한국 가톨릭 교회 특유의 문화[편집]

4.1. 교적제도[편집]

한국 가톨릭에만 있는 독특한 제도로, 이사를 갈 경우 호적처럼 '교적'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것을 옮기도록 되어 있다. 물론 권장하는 사항은 아니지만 거리가 애매한 등의 경우 그냥 원래 다니던 성당을 다니기도 한다. 공식적으로는 주소에 따라 다녀야 할 성당이 강제로 정해지기 때문에[57], 원래 소속이 아닌 성당에서 하는 공적 행위는 원칙적으로 불가다. 예를 들어 판공성사를 다른 성당서 보더라도 인정은 하나, 성사표(성사 신고서)는 원 소속 성당(본당)에 내야 한다. 물론 판공성사 신고 등을 제외하면 사정이 생기거나 여행이나 출장 등으로 일시적으로 타지역에 갔을 때 그 지역 성당에서 주일미사나 본당생활을 하는 정도는 당연히 허용한다. 어느 곳에 있는 성당이든 같은 가톨릭 교회의 지체이기 때문이다. 여름휴가철만 되면 주보나 매일미사에 주요 휴가지 근처에 있는 성당 목록이 실릴 정도다.

4.2. 매일미사[편집]

월간 〈매일미사〉(1,000원)란 책에는 기도/독서/복음/영성체송 등 그날 미사의 핵심이 그대로 담겨 있는데, 이 또한 전세계적으로 통일된 로마 미사 경본(Missale Romanum)에서 따온 것이다. 덕분에 가톨릭 신자들은 미사에 참례하러 갈 때 성경을 들고 가는 일이 거의 없다. 해외에서는 신자용 미사 전례서를 따로 발매하기 때문에 매월 1,000원짜리 책을 사는 경우는 거의 없다. 사실 이쪽이 더 적절하다. 교황청미사 지침에 따르면 신자용이든 사제용이든 모든 전례서는 고상하게 제본되어야 한다고 하고 있다. 매일미사처럼 갱지를 쓰면 안 된다는 말이다.

대부분의 본당에서는 매일미사가 사제와 수도자를 막론하고 천주교 신자들의 필수품이라 할 수 있는 책이지만, 정구사함세웅 아우구스티노 신부가 앞서 설명한 이유 때문에 본당에서 매일미사 책을 구입하는 것을 금지하였고, 익숙해진 신자들이 크게 반발한 적이 있다고 한다. 스마트폰이나 태블릿도 무료로 나와서 미사 때 스마트폰을 들여다 보는 사람들도 종종 눈에 띈다. 예배 때마다 각자 성경을 주섬주섬 꺼내서 목사가 부르는 구절을 찾는 개신교 신자들은 이를 신기하게 여기기도 하고, 이걸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다.[58]

실제로 매일미사로만 대신하는 천주교 신자들이 더러 있는 건 사실이다. 마치 어떤 천주교 신자는 집에 성경하나 없는 것처럼 묘사했는데, 미사에 매일미사를 들고가는 이유는, 1. 성경 구절을 일일이 찾을 필요가 없어서 간편하고 2. 성경보다 작고 가볍기 때문이지 성경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다. 대부분의 신자가 세례성사를 받을 때 주변에서 성경, 묵주를 축하의 의미로 주기 때문에, 영세 받은 신자가 성경을 소장하고 있지 않는 경우가 드물다.

교황청에서 2013년을 신앙의 해로 지정했는데, 한국 천주교에서는 성경 매일 읽기는 물론 필사하기도 권장하면서 성경 읽기가 점차 강조되고 있다.

집에 성경 한 권 없이 매일미사로만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사례가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대부분 예비자 교리 교육 중에 성경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예시로

수저 1벌로 집안 식구 모두가 식사하지 않듯
칫솔 하나로 집안 식구 모두가 양치하지 않고 각 개인이 수저 1벌, 칫솔 하나를 쓰듯
각 가정에 1권이 아니라 각 개인이 성경을 가져야 한다.


혹은

성경은 생명의 말씀이다. 따라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경을 자주 읽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고 가르치고 있다.[59][60]

한국 가톨릭 교회에서의 <매일미사>의 사용을 보고 이를 신기하게 여기기도 하고, 이걸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는데, <매일미사>의 사용에 대해서는 한국 천주교 내에서도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가톨릭 교회 내부에서 고민하고 토론할 문제이지, 외부의 누군가로부터 비난 받을 문제는 아니다.

성경에 거룩할 聖을 붙일 수 있는 것은 고상하게 제본되었다거나 값비싼 종이를 사용했기 때문만은 아니라 그 내용에 구원의 길이 있고 생명의 말씀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성경을 아무렇게나 허접하게 만들어도 된다는 지침을 만들 수는 없는 것이다. 좋은 종이에 정성을 들여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만 비싼 종이에 쓰여진 것은 성경 말씀이고, 갱지에 쓰여졌다고 그 내용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성경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필요에 의해 변형은 충분히 가능한 것이고, 일부 개인들의 일탈적인 행태가 아니라 주교회의 결정 사항인 만큼 이를 쟁점으로 부각시켜 논쟁을 할 만큼 중요한 사항은 아니라고 본다. (지금이야 <매일미사>를 갱지로 만들어서 그런 소리가 나오지 성경용지나 사전용지로 만들면 "1달 쓰고 버릴 것에 너무 많은 지출을 하게 만든다"는 지적도 분명히 나온다.)

또 가톨릭 교회의 미사에서 나오는 성경 구절들은 그날 생각나는 대로 정해지는 아니라 전례력에 의해 미리 정해져 있고,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미사 중에 그 날의 독서와 복음 이외 성경 구절에 대한 얘기가 나올 여지가 없으니 굳이 두꺼운 신구약 합본을 들도 다닐 필요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피정이나 사순/대림 특강에 오는 신자들 가운데 성경을 지참하는 숫자가 적어 피정이나 특강 때는 성경을 지참해야 한다고 수시로 얘기하지만, 이 또한 가톨릭 교회 내부에서 독려하고 고민할 할 문제이지, 외부로부터 비난 받을 일은 아니다.

이렇게 배경이 다른 상황을 놓고 자기들 기준에 맞지 않으니 틀린 것이라고 비난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또 워낙 천주교 신자들이 주일 미사 갈 때 성경을 지참하지 않고, 일상 생활 중에 성경 무슨 서 몇 장 몇 절 하는 식의 대화를 하지 않다 보니, 성경을 읽지 않는다는 말도 안 되는 소문이 퍼져 있다. 이 때문에 한국 가톨릭 교회는 신문 방송에 광고만 하지 않았을 뿐이지 2013년 신앙의 해 선포 휠씬 이전부터 성경 읽기와 필사 운동을 해 왔다.

이걸 두고 "가톨릭은 옛날에는 일반 신자들이 성경 읽는 것을 금했다"고 비난하는 이들도 있는데, 머리는 생각을 하라고 있는 거지 장식으로 얹고 다니라고 있는 게 아니다. 모든 사람이 의무교육을 받고 개나 소나 대학까지 진학하고, 제지술ㆍ인쇄술ㆍ출판ㆍ유통 등이 놀라운 수준으로 발전하고, 온라인과 오프라인에 적절한 가격의 책들을 파는 서점이 즐비한 오늘날의 세상은,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꿈 같은 이야기였다.[61]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해 까막눈인 대다수의 일반 신자들이, 어떻게 성경을 사서 읽고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성경 읽기, 공부, 필사 등이 널리 권장되는 것은, 다 발전된 사회상 때문에 가능해진 일이다.

나무위키가 백과사전도 아니고, 편향적인 서술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자기가 본 것,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모두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유물론적 사고나 일부 현상을 전체의 경향이라고 오판하는 일반화의 오류는 지양할 필요가 있다.

4.3. 제사 문화[편집]

위에서 언급했듯 비오 12세 이후로 신주 사용 불가 등의 일부 조건이 붙는다는 전제하에 제사가 허용된 상태이다.

4.4. 개신교 세례 인정 문제[편집]

서구권 가톨릭 교회는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로 웬만한 경우 개신교 출신 개종자의 개신교 세례를 인정해오고 있지만, 2012년 이전에는 한국 천주교는 성공회를 제외한 개신교 세례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2012년 주교회의에서 세례증명서, 세례사진 등의 입증 증거가 있으면 개신교 세례도 인정하기로 결정했지만, 일선 사목 현장에서는 무시되고 있으며, 일선 교구청의 입장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따라서 한국 가톨릭에서는 개신교 세례교인 출신 가톨릭 개종자들은 정식 영세나 정식 영세에 준하는 세례를 받고 가톨릭에 입교하고 있다.

4.4.1. 개신교 세례 인정 문제가 왜 쟁점이 될까?[편집]

서구권 가톨릭 교회를 예시로 들어 한국 천주교가 개신교 세례를 인정하지 않는 것을 이상한 현상으로 이해하면서 이를 쟁점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상당한 오류를 안고 있다.

우선 서구사회에서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의 관계를 한국 현실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느냐의 문제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나무위키 내에도 수 많은 문서 내에 한국 개신교의 가톨릭 교회에 대한 오해(를 빙자한 왜곡)를 담은 내용들이 넘쳐나고, 이를 지적하는 내용들도 많이 있다.

요즘 사람들이 관심이 없어서 그런지 일반 신문에서는 싣지도 않은 내용이지만 한국 개신교 주류인 장로교 쪽에서는 가톨릭을 이단도 아니고 이교로 지정하자는 의견까지 제기되고 있단다.

개신교 장로교단, “가톨릭 이교 지정” 요구

외부에까지 이런 내용들이 나오고 있는데, 개신교 내부적으로 가톨릭 교회에 대한 온갖 잘못된 정보들에 무방비하게 노츨된 개신교 세례자들을 가톨릭 교회가 아무런 절차 없이 당연히 인정해야 한다고 것은 무리가 있다.

또한 한국 개신교에서 이단 문제는 내부적으로 통일된 기준을 갖지 못하여 논란을 일으키는 사안 가운데 하나이다. 누구는 이단이라 하고, 누구는 아니라고 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개신교 내부적으로도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한 사안을 가톨릭 교회에서 아무런 절차 없이 그대로 인정하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것도 문제이다.

서구권 가톨릭 교회는 하는데 한국 가톨릭 교회는 왜 안 하느냐는 식으로 단순한 논리를 적용할 문제가 아니다.

4.4.2. 반론 및 여담[편집]

가톨릭 교회는 역사적으로 이단 집단이 베푼 세례를 인정해온 사례가 있고, 재세례론, 재세례파를 단호히 정죄해온 역사가 있는 것 만큼, 재세례(재영세) 문제는 가볍게 넘어갈 수 없는 문제다. 물로써 삼위일체(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베푼 세례는 신학적으로 그 유효성이 부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집전자가 얼마나 반가톨릭 성향을 갖고있는지와 세례예식에서 도유를 사용했느냐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62] 따라서 이런 문제에 대해 서구권 가톨릭 신자들에게 질문하면 "재세례(정식 영세)는 결코 없다"는 강경한 답변이 되돌아오는 것이다. 세례의 유효성이 입증되면 웬만하면 교리 교육 수료 후 첫 고해성사와 일치예식을 치루고, 상당히 의심스러운 경우에만 조건부 세례[63](보충 세례)를 베푸는 식이어야지, 무작정 정식 영세를 베푸는 것은 문제라는 것이다.

그리고 반가톨릭주의에 젖어들었던 개종자들에 대해서는 6개월 간의 긴 예비자 교리 교육을 통해 반가톨릭적인 의식을 해소하도록 교육하면 충분할 일이다. 별개로 개신교 출신 예비신자들을 위한 호교론 내용이 보강되도록 교육 과정이 개편될 필요는 있겠지만. 그것과 정식 영세를 다시 베푸는 것은 별개의 문제인 것이다. 가톨릭 교회로부터 개신교 세례의 유효성을 인정받는다해서 6개월 짜리 교리교육이 생략되거나 간소화되는 것이 아니다. 개신교 세례의 유효성을 인정받으면 천주교 영세만 생략될 뿐이지 긴 교리교육을 받고 나서 첫 고해성사와 일치예식을 거치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신학적인 문제가 결코 작지 않음에도 한국 가톨릭 교회가 개신교 세례교인 출신 개종자의 정식 영세 문제에 사실상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은 어쩌고보면 한국 내에서 가톨릭 - 개신교 간 반목의 골이 깊다는 씁쓸한 현상을 방증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한국 개신교 내에서 이신칭의 신앙관이 극단적으로 왜곡된 나머지 세례예식에서 물 사용을 생략하거나, 삼위일체의 이름이 아닌 하느님(개신교에서는 하나님)이나 예수님 이름으로만 베푸는 경우가 많아서 한국 천주교가 개신교 세례의 유효성을 심각히 의심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 만일 팩트라면, 그만큼 한국 개신교가 노답으로 변질된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4.4.3. 재세례의 인정, 개종인가 보편교회로의 일치인가?[편집]

과거 역사에서 일부 예외적이고 지엽적인 현상이 있을 수는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를 근거로 20세기 중반 이후 한국 사회에서 지속적이고 보편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개신교 세례의 유효성을 원칙적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

교회법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유효한 개신교 세례 [64]가 일부 있을 수 있다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한국 개신교의 분파가 워낙 갈라져 있어 이를 구별해 내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과제라는 것도 인정해야 할 현실이다. 또 개신교 세례의 유효성을 일일히 검증하는 것이 가톨릭 교회에서 세례를 받는 신자 개인의 신앙생활이나 가톨릭 교회에 어떤 실익이 있는지도 생각해 볼 문제이다.

그리고 대개 1년에 두 차례 이루어지는 세례식이 수십 명 단위로 이루어져 시간이 많이 걸릴 뿐이지 각 개인에 대한 세례 의식 자체는 그리 번거러운 과정은 아니다. 그런데 개신교 출신 예비자들도 다른 예비 신자들과 마찬가지로 예비자 교리 과정을 해야 하고, 그 이름이 조건부 세례이든, 일치 의식으로 든 의식 자체는 인정하면서 이를 세례라고 하는 이름 붙이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하는 것은 결국 개신교 세례를 원칙적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 6개월 간의 긴(?) 예비자 교리 교육


가톨릭 교회의 예비자 교육 과정이 오랜 시간이 걸리고 빡세다는 인식이 있는데, 이는 상대적으로 이해해야 할 문제라고 본다. 흔히 6개월 과정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 6개월이라 해도 1주일에 한 번, 두 시간 정도로 진행되며, 과정이 시작되고 (상황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1주 또는 2주가 지난 뒤에 참여하는 예비자에게 이번 과정은 이미 시작되었으니 다음 과정에 하라고 매몰차게 내쫓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고, 예비자 교리 과정에 대한 공포에 가까운 선입견으로 인해 시작하자마자 딱딱한 교리 수업을 시작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마치 봄에 씨앗 뿌리기 앞서 밭갈이 하듯 앞의 몇 주간은 가볍게 진행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 마지막 몇 주간은 의식 준비를 위한 시간이 되는 만큼 실질적으로 교리 교육에 쓸 수 있는 시간은 상당이 제한적이다.

가톨릭 교회가 2천 년에 걸쳐 축적해 온 방대한 교리를, 그것도 꼭 개신교 경험이 있는 예비자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가톨릭 교회에 대한 오해와 선입견을 가진 예비자들에게 충분히 알리기에 그리 충분한 시간이 아니며, 그 시간이 충분한지 아닌지는 가톨릭 교회가 판단할 문제이다.

  • 개종인가 보편교회로의 일치인가?


(꼭 개신교 경험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지만, 그 경우가 많기 때문에) 개신교에서 천주교로 개종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는데 (그나마 요즘은 사정이 많이 나아져서 기독교에서 천주교로 개종했다고 하는 사람은 많이 줄었다.) 이는 지극히 개신교식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65]

일부라고는 하지만 개신교 입장에서 가톨릭 교회(천주교)는 마리아 우상숭배하는 사이비 집단, 교황 신격화하는 이단 종교라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다. 따라서 개신교에 다녔던 사람들에게 있어 천주교는 개신교와는 다른 종교이고, 천주교로 옮겨가는 것은 개종(즉 종교를 바꾸는 것)이다.[66]

한편 가톨릭 교회는 1963년~1965년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개신교를 갈라진 형제로 인식하고 있다. 즉 유일신 신앙과 삼위일체 교리를 공유하지만 그 방식이 다르다는 것이다. 따라서 천주교와 개신교는 다른 종교가 아니므로 개신교에 다니다가 가톨릭 교회에서 세례를 받는 경우 이를 보편교회로의 일치[67]라고 한다. 따라서 가톨릭 교회 입장에서 개신교에서 천주교로 개종했다는 언급이 그리 유쾌한 표현은 아니며, 개신교 예배당에 다니다가 가톨릭 교회에서 세례를 받는 경우 보편교회로 일치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4.5. 기타[편집]

성경책은 십자고상, 성모상, 묵주 등의 다른 성물과 달리 내구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성경책에 대한 축복식을 꺼려하는 문화가 있다. 교리서, 묵상 도서 등 다른 가톨릭 서적도 마찬가지. 반면에 외국의 가톨릭에서는 성경책에 대해서도 잘만 축복식을 받는 문화다. 이에 대해 한국 천주교의 어떤 신부님은 '말씀으로 이미 축복을 받기 때문에 말씀이 들어있는 성경책에 축복식을 하는 건 모순이다."는 의견을 보이기도 한다.

5. 사건 사고[편집]

5.1. 마리아의 구원방주[편집]

5.2. 대구 희망원 사건[편집]

문서 참조.

6. 납세와 재정 관련 정보[편집]

6.1. 납세[편집]

가톨릭은 대한민국에서 개신교재림교회대한성공회와 더불어 자발적으로 세금을 납부하는 몇 안 되는 종교 중 하나이다.[68] 2006년 회계법인에 의뢰하여 스스로 외부감사를 받은 뒤 그 결과를 언론에 뿌리기도 하였다. 이는 대한민국 종교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신자들이 낸 헌금과 교무금 등도 모두 종교기부금으로 처리하여 소득공제 혜택을 주고 있다. 처음엔 교무금만 하더니 어느새 주일 헌금까지. 각 교구별로 원천징수해서 납부한다는 듯.

다만 신자 입장에서 소득공제를 받기는 껄끄러운 편인데, 절차가 까다로운 게 아니라 믿음의 문제 때문이다. 특히 헌금은 자신이 가진 것의 일부를 하느님께 온전히, 그리고 본인이 원해서 자발적으로 드리는 것인데, 거기에서 세속적인 소득공제 등등을 받자면 그 의미가 퇴색되는 것 같이 느껴지기 쉽기 때문이다. 때문에 알면서도 신청하지 않는 사람도 많은 편이다. 다만 만일 그게 문제가 있는 행위였다면 가톨릭 측에서도 처음부터 허용하지 않았을 테니 판단은 각자 내리도록 하자.

총 16개의 교구중 12개 교구에서 세금을 낸다. 안 내는 4곳 중 2곳은 제주교구군종교구. 제주교구는 사람이 적다보니 헌금이 절대적으로 적어서, 그리고 군종교구는 특성상 수입 자체가 없다보니 제주교구를 제외한 다른 교구들의 지원금으로 운영되기 때문이다. 매년 10월 1일 국군의 날이 끼어 있는 주일의 헌금은 모두 군종교구로 간다. 이때 군종교구에서는 각 성당에서 신자들의 기부금도 받는다. 나머지 2곳은 평양교구함흥교구로, 이들에 대한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한편, 가톨릭의 모든 성직자들과 수도자들도 세금을 납부하고 있으며 4대보험에도 가입되어 있기 때문에, 나이가 들고 은퇴하면 국가에서 국민연금을 수령한다.

6.1.1. 한국 천주교회의 소득세 납세 略史[편집]

  • 소득세 납부 논의 시작 (1983년~) : 가톨릭 교회에서 소득세 납부 필요성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 것은 1983년 전국 교구 관리국장 회의에서 나왔던 “사제들보다 낮은 생활 수준의 사람들도 세금을 내고 있는데 우리도 내야 하지 않겠느냐”는 의견이다.

  • 다만 현실적으로 생활비 지급 과정이 교구마다 달라 여러 문제점이 나타나자 보류되었지만, 세금 납부에 대한 필요성이 내부적으로 계속 제기됐다.

  • 소득세 납부 결정 (1994년~) : 이에 따라 이 사안은 1993년 교구 총대리 회의를 거쳐 주교회의에서 논의할 문제로 떠 올랐으며, 주교회의에서는 1994년 소득세를 납부하기로 결정했다.

  •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는 1994년 3월 신부들의 소득세 납부를 교구별로 준비되는대로 실시키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주교회의는 성직자의 소득세 납부 원칙을 확인했고, 납세 대상•소득의 종류•납세시기는 추후 각 교구의 사정에 따라 결정하도록 위임했다. 이 결정에 따라 전국 1,800여 명 신부 가운데 학교•병원 등에 재직하고 있는 신부를 뺀 1,500여 명의 신부들이 소득세를 내게 됐다.

  • 수도회에 소속되어 있는 수도자들은 소임에 따라 과세 여부가 달라지는데, 사회복지시설이나 병원, 학교, 출판사 등 기관에 파견된 수도자들은 소속 기관의 급여 체계에 따라 근로소득세를 내고 있다. 반면, 본당에 파견된 사도직 수도자들은 소액의 생활비를 본당에서 받고 있지만, 액수가 적어 소득을 신고해도 대부분 면세 대상이다.

  • 소득세 납세 대상 소득 범위 확대 : 한편 1994년 소득세 세액 산정에서 제외되었던 미사예물을 소득으로 인정해 납세 대상으로 하는 가의 여부에 대해 2011년 주교회의는 “미사예물에 대한 소득세 납부 여부는 교구별 판단에 맡긴다”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과세 대상 소득 범위를 확대하려 했다는 점에서 진일보안 결정으로 평가를 받았다.

  • 이에 따라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2014년 1월부터 성무활동비 외에 ‘미사예물’도 소득으로 인정해 납세 대상 소득 범위를 확대했다. 천주교 대구대교구도 성무활동비와 미사예물을 소득으로 신고해 자진 납세하고 있으며, 그 외 교구들 역시, 납세 항목의 기준만 조금씩 다를 뿐 소득에 따른 세금을 내고 있다.


신부 소득세 납부 확정/천주교 주교회의 발표
좀 더 낮은 자세로 살자

6.2. 재무제표와 수지 내역[편집]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교구 살림을 투명하게 신자들에게 알리겠다는 뜻에서 2007년부터 매년 교구청 재무제표를 공개하고 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2016년 6월 공개한 서울대교구 2015년도 재무제표를 보면, 2015년 12월 말 현재 재단법인 천주교 서울대교구 유지재단(교구청)의 자산은 7,066억 원이다. 2014년보다 336억 원 늘어났다. 자산 대부분은 토지와 건물로 5,653억 원 규모이며, 부채는 63억 원으로 2014년보다 25억 늘었다.

서울대교구 산하 각 본당들은 분기별로 자금 수지 내역을 공개하고 있다.

7. 교구[편집]

7.1. 한국 가톨릭 교회의 교구[편집]


주중에 밤 늦은 시간까지 사설 입시학원 학생들을 태우고 다닌던 45인승 대형 버스들이 일요일이 되면 양천 2교구니 월곡 교구니 하는 행선지 표지판을 걸고 다니다 보니 가톨릭 교회의 교구가 자치구 또는 행정동 급으로 알려진 경우가 있다.(사실 이들 버스들은 가톨릭 교우들을 태우기 위한 버스가 아니라 대형 개신교회가 대절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개신교 대형교회에서는 '교구'라는 단어는 가톨릭으로 치면 본당 내 '지역', '구역'에 가까운 개념이다.) 하지만 아래 항목에서 볼 수 있듯이 가톨릭 교회의 교구는 광역자치단체 급이다.

물론 가톨릭 교회의 교계제도가 대한민국의 행정구역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하나의 광역자치단체인 경기도가 수원교구와 의정부교구로 나뉘어져 있으며, 김포시와 부천시 그리고 시흥시 북부는 인천교구에, 포천시와 가평군은 춘천교구에 속한다. 강원도 또한 춘천교구와 원주교구로 나뉘어져 있다. 한편 울산은 광역시이지만, 가톨릭 교회의 교계제도로는 부산교구 소속 대리구이다. 마산시는 인근 창원시•진해시와 통합되었지만, 교계제도로는 독립 교구이다.

이렇게 가톨릭 교회의 교구는 대한민국의 광역자치단체급이며, 따라서 교구의 최고 책임자인 교구장 주교는 행정동장이나 자치구청장급이 아니라, 광역자치단체인 특별시/직할시 시장 또는 도의 지사급이다.

사실 가톨릭 교구의 지리적 규모를 보아 세속의 행정구역에 비유해보면 도(道)보다는 도 폐지 행정구역 개편안에서의 부(府)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7.2. 한국 가톨릭 교회 교구 현황[편집]

☧ 한국의 천주교 교구

서울관구

서울대 · 인천 · 수원 · 의정부 · 춘천 · 원주 · 대전 · 평양 · 함흥

대구관구

대구대 · 부산 · 안동 · 마산 · 청주

광주관구

광주대 · 전주 · 제주

교황청 직속

군종 · 덕원자치수도원

평양교구, 함흥교구, 덕원자치수도원침묵의 교회

파일:GtyldRZ.gif

한국 가톨릭교회에는 17개 교구가 존재하며 교황청 직속의 면속구와 군종교구가 각각 1개씩 존재한다. 17개 교구는 면속구와 군종교구를 제외하면 모두 3개의 관구에 나뉘어 속한다. 관구는 하나 이상의 교구들이 하나의 대교구를 중심으로 뭉쳐 지역교회로서의 연대를 이루는 것으로 중심 대교구의 대주교가 관구장을 겸한다. 예를 들어 서울대교구의 교구장(대주교 또는 추기경)은 동시에 서울관구 관구장 주교를 겸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에 교계제도가 확립된 것은 1962년이다. 그 이전에는 정식 교계제도 설정 이전에 임시적 성격으로 '대목구(Apostolic Vicarate)' 체제가 설정되어 있었으며, 대목구장들은 사실 관할 대목구의 주교가 아니라 명의주교로 주교품을 받은 후 실질적인 대목구 관할 업무를 맡았다.

덕원자치수도원, 평양교구, 함흥교구, 서울대교구 황해감목대리구, 의정부교구 일부(개성본당 및 관할 공소), 춘천교구 일부(평강본당, 포내본당, 이천본당 및 관할 공소)는 북한 치하로 넘어가 침묵의 교회라 하여 현재 실질적으로 관할하지 못하고 있다. 이들 지역은 아래 취소선으로 표시.

여담이지만, 몇몇 교구의 관할구역은 법원 관할지역과 똑같다. 광주관구는 아예 광주고등법원 관할구역이라 할 수 있으며, 수원교구의 성남대리구와 안양대리구는 아예 수원지방법원 성남지원과 안양지원 관할구역과 동일하다. 대전교구도 이 지역 자체가 대전지방법원 관할구역이다. 이 외의 지역은 약간씩 차이가 있다.[69]

  • 옛 조선관구 소속 교구 : 연길교구(1907년 북만주대목구에서 조선대목구 관할로 편입 → 1922년 원산대목구 관할로 편입 → 1928년 연길지목구로 독립 → 1937년 연길대목구로 승격 → 1946년 심양관구로 편입, 현재는 심양관구 길림교구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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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교육 기관[편집]

취소선은 폐교된 학교.

8.1. 초등학교[편집]

8.2. 중학교[편집]

8.3. 고등학교[편집]

8.4. 전문대학[편집]

  • 가톨릭상지대학교 : 비리 사학으로 심심치 않게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는 원주 소재 상지대학교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경북 안동시 소재 전문대학

8.5. 4년제 대학[편집]

8.6. 기타[편집]

  • 양업고등학교(대안학교)

  • 은혜학교(특수학교)

  • 청주성신학교(특수학교)

  • 화(花)요일아침예술학교 : 저소득층 여학생들을 대상으로 미술교육을 하는, 고등학교 과정의 대안학교.

[1] 한국의 장로교 교인 수가 650만 정도이기 때문에 약 500만인 가톨릭이 제일 신자가 많은 교파라고 하는 것이 약간 이해가 안 갈 수도 있으나, 한국에선 장로교라고 다 같은 장로교가 아니라 엄밀히 말해 니 교회 내 교회로 나뉘기 때문에 교파별 신자 수를 구별할 때, 분파까지 고려하는 것이 맞다. 따라서 단일한 종파/교파/분파인 천주교에 비해 300개 이상의 분파로 나뉜 개신교의 교파별 신자 수는 비교 조차 불가능한 것이 사실. 크게만 나눠도 예수교장로회 통합이 250만, 예수교장로회 합동이 250만, 예수교장로회 고신이 50만... 이런 식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개신교 국가라고 생각하는 미국조차 가장 큰 교파는 가톨릭이며(약 67백만. 전 세계에서 4번째로 가톨릭 신자수가 많음), 그 다음으로 남침례교회(약 38백만)이다.[2] 2015 인구주택총조사에서 종교 관련 조사를 표본조사로 하였다.[3] '한국천주교주교회의'의 '2016 한국 천주교회 통계' 공식 발표에 의하면 2016년 12월 31일 기준 한국 천주교 신자는 574만1949명으로 집계됐다. 전체 인구의 10.9%에 해당한다. 기사 [4] 2010년부터는 가구 구성원이 인터넷에 접속하여 조사 항목에 응답하는 온라인 방식 추가[5] 후술할 조선의 천주교 박해 수난사, 대한민국의 민주화 투쟁과 더불어 한국 가톨릭교회에서 가장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점 중 하나가 이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한국의 이런 독특한 천주교 역사에 대해 언급했다.# 오죽 특이했으면 당시 교황이었던 비오 6세는 이 사실을 접하고 감격해서 눈물까지 흘렸다고 한다. 당시 비오 6세는 나폴레옹 전쟁에 휘말려서 프랑스에 끌려가기까지 하는 등 대단히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는데 그에게 이 조선의 소식은 얼마 없는 위안거리였다고.[6] 원칙대로라면 그 자체로 파문에 이르는 큰 문제였으나, 선교사가 파견된 적 없는 신자들이 그것을 알 턱이 없었으므로, 당시 가톨릭 측에서 이를 고려하여 경고 조치를 주는 것에 그쳤다.[7] 사실 임진왜란 시기 조선인 신자에 대한 재인식 등등으로 인해, '최초의 신자'라는 호칭은 흔들리고 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식적인 한국 천주교회의 시작이 이승훈 베드로가 받은 세례성사에서 시작되었음은 부정되지 않는다.[8] 이때 최초의 한국인 신부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순교했다.[9] 예를 들어, 사또가 "네가 천주교를 버리겠다고만 말한다면 살려주겠다"라고 여러번 요청한다는 식으로...[10] 다만 이상하게도 황사영 백서 사건 이전에는 조선 정부가 양반만 잡았다느니 부녀자는 죽이지 않았다느니 하는 오해가 있는데, 이는 근거가 없다. 신유박해 때 순교하여 시복된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 중에는 아이와 여인들도 있다. 또한 백서 사건 이전에는 박해가 가록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병인박해와 비교하면 소규모로 보일 뿐이지 신유박해는 당시로서는 조선 역사상 초유의 대규모 박해였다. 상식적으로 남녀노소 사농공상 가리지 않고 300명을 죽인 사건을 소규모 박해라 부르진 않는다.[11]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2대 교구장.[12] 동북아에서 가장 먼저 가톨릭을 받아들인 일본만 해도 황사영 백서사건과 유사하게 시마바라의 난이 일어났고, 가혹한 박해를 받은 뒤 지금은 겨우 명맥만 유지하는 지경이다. 카쿠레키리시탄 문서 참조.[13]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5대 교구장. 병인박해순교, 1868년 시복,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한 때 시성되었다.[14] 참고로 개신교에서도 조선인들을 죽인 무장 상선인 제너럴 셔먼호에 탑승하여 조선에서 효수된 미국인 로버트 저메인 토머스 목사를 순교했다며 '토마스 교회'를 세우고 찬양하고 있다. 이점에 대해선 개신교 내부에서도 논란이 있다.[15] 그래서일까… 성당 모임에서 복날이 임박하면 "언제 한번 개 파티 하자"(개고기 먹자!!!) 한다고 한다.[16] 이들은 불교 시절의 관념이 남아 있어서 그렇다.[17] 모든 성당이 다 그렇지는 않다.[18] 사실 이 문제는 한국 천주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장로교 소수(현재의 예장고신)와 침례교를 제외한 그리스도교 교단 전체에 해당하는 암흑기이다.[19] 다만 신사참배에 대해서는 좀 옹호할 건덕지가 있는데, 일본 신사참배는 중국식 제사와 세트로 묶여서 교리적으로 토론되던 사항이다. 그리고 20세기에는 종교적 지향점 없이 전통적이거나 국가적 의례 등의 이유로 이런 행위를 하는 것은 우상숭배가 아니라는 관점이 강해지고 있었으며, 그렇기에 신자가 중국식 제사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교황청의 관점도 어느날 갑자기 바뀐게 아니라, 중국과 일본 천주교회의 관점을 교황청이 옳다고 보증을 서준거에 가깝다. 즉 정치가 아니라 순수하게 종교 본연의 입장에서 보다면, 중국식 제사를 허용한다면 일본식 신사참배도 허용하여야 했다.[20]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8대 교구장.[21] 연길교구는 조선인 신자가 많다는 특성상 조선관구에 속해 있었다.[22] 주임신부는 본당을 지키고 신자들과 생사를 함께 하라는 교구의 방침때문에 피해가 더 커졌다.[23] 윤공희 빅토리노 대주교는 전 원주교구지학순 다니엘 주교와 함께 1950년 전쟁 직전 공산당의 학정을 피해 월남하였다. 천주교 신학생으로 공산주의의 박해를 경험한 입장에서 저런 반공 의식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이다.[24] 해방 이후 북한 지역에서 천주교 탄압이 자행되고 있었던 마당에 전쟁까지 터지면서 이런 경향이 극대화된다[25] 한국 천주교가 사회 현실에 눈을 돌려 적극적인 사회 참여에 본격적인 계기가 된 것은 1966년에 일어난 강화 삼도물산 사건이다. 인천교구장 나길모 주교는 담당 교구장 주교로서 당시 가톨릭 노동청년회 총재 주교였던 마산교구장 김수환 스테파노 주교와 함께 앞장서서 사건을 해결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26] 공식적으로는 무종교라 하나, 이 과정에서 세례성사를 받기는 했고(세례명 율리아나), 이외에도 불교 수계를 받은 적은 있다. 개신교 신학대학원에도 다녔고, 이슬람 사원에도 기웃거렸다. 그런데 결국 정말로 믿은 종교는.....[27] 이렇게 쓰고 보면 뭔가 비장한 외침처럼 들리지만, 당시 김수환 추기경은 공권력 투입을 통보하러 온 정부 관계자에게 '주말에는 항상 미사가 있습니다'는 말투였다고 한다(…) [28] 오죽했으면 가톨릭의 별명이 김대중교였겠는가.[29] 교세의 확장에 매우 유리한게 사실이다.[30] 지금 상황에서야 저 말에 별 큰 감흥을 못 얻을 수 있지만, 1980년 당시 저런 말을 입 밖으로 내는 것 자체가...[31] 참고로 이때 노조도 대규모 병크를 터트렸다. 명동성당 안에 쓰레기 방치하는걸 넘어 성탄구유에 오줌을 싸갈기는 짓거리를 하는 바람에 신자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32] 개신교 인구가 급감하는 데는 이렇게 교파 이동으로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경우가 많아서이다. 물론 타 종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경우도 많지만, 가장 돋보이는 경우는 같은 기독교인 개신교에서의 교파 개종. "개신교는 술담배도 금하고 너무 융통성 없어 안 맞는다"며 개종하는 사례가 많다.[33] 현재 개신교계 중 진보적인 성공회루터교 등의 교파를 중심으로 제3종교개혁론이 나올 정도다.[34] 실제로 인터넷에서 허구한 날 동네북으로 까이는 개신교, 은근히 비리가 터져 땡중이니 소리 듣는 불교에 비해 가톨릭은 비리나 말썽이 거의 없어 여론이 우호적인 편이다.[35] 다만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의 추기경직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선종 시까지 계속 유지된다.[36] 물론 비율이 낮아도 대구광역시부산광역시, 울산광역시 등 대도시는 인구 자체가 많기 때문에 절대적인 수는 적지 않아 주교좌가 설치될 정도로 신자가 꽤 많은 편이다. 울산 출신인 오상진, 부산 출신인 김태희도 가톨릭 신자다.[37] 특히 강남구서초구 신자 비율은 약 20%대로, 전국 2, 3위를 다툰다.[38] 이런 경항을 두고 천주교 내 정치적 진보 성향의 일부 신자들은 한국 천주교의 사회적 보수화를 우려하기도 한다.[39] 기독교 신자가 많은 중화권으로는 홍콩, 마카오, 싱가포르가 있다.[40] 많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문재인(디모테오)대통령 또한 가톨릭 신자다. 김태희의 경우는 출신 학교 때문에 부산보단 울산을 떠올리는 분들이 많을 듯. 여담이지만 문재인은 부모님이 함경남도 출신 실향민이고, 김태희, 오상진은 아버지가 전라도 출신이다.[41] 성가대가 있는 본당이라 하더라도 성가대가 편제된 교중미사, 중고등부 미사, 청년 미사만 노래로 하고, 성가대가 편제되지 않은 오후 성인미사, 토요일 저녁미사 등은 입당, 봉헌, 영성체, 파견 때만 성가를 부르는 경우도 있다.[42] 대한예수교장로회, 기독교대한감리회 등 주류 보수파[43] 한국기독교장로회대한성공회의 일부[44] 이에 대해 일부 보수파는 한국 천주교도 한국 개신교처럼 적극적인 반동성애 운동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45] 단, 성공회 세례는 온전히 인정해오고 있음.[46] 참고로 군대 훈련소에서 받은 개신교 진중세례는 일단 인정 안 된다고 보면 된다.[47] 사실 한국 천주교가 이런 식의 태도를 보이는 데는, 한국의 개신교의 주류가 반가톨릭 근본주의파이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다.[48] 성공회나 해외 가톨릭에서는 좀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주제이지만, 한국 천주교 주류는 그 문제에 대해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49] 이 부분은 주어를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가톨릭을 신학적, 교리적으로 반대하는 데 노력하고 있는 세력은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NCCK가 아니라 한기총과 같은 보수 기독교계이다. NCCK 홍보실장은 교황 방문 반대를 외치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NCCK는 세계교회협의회(WCC)에 가입하여 있는데 WCC는 여러 기독교 교파들 간의 우호와 공존을 꾀하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는 단체이다.[50] 물론 가톨릭에 우호적인 개신교단이라고 해도 가톨릭의 교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개신교 중에서 가톨릭에 가장 가깝다는 소리를 듣는 성공회만 해도 가톨릭의 성모무염시태, 몽소승천, 교황무류성 등과 같은 교리는 공식적으로 거부하고 있는 상황이다. 만일 가톨릭 교리를 그대로 수용한다면 그건 가톨릭이지, 개신교가 아니지 않겠는가? 환영은 하지만 신학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이상할 것이 무엇인가? 다름을 인정하고 공존하는 것과 그대로 수용하는 것은결코 같지 않으며 후자는 개신교에겐 무리한 바람이다. 가톨릭이 개신교의 교리를 받아들이라는 것처럼.[51] 가톨릭 교회를 신학적, 교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서 계속 개신교에 남아 있는 것이 논리적으로 타당성한 지 생각해 볼 일이다. 개신교 내에서야 보수적인 교단과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교단이 가톨릭 교회를 신학적 또는 교리적으로 부정하니 반대하니를 놓고 논쟁을 벌이는 게 개신교 내부에서는 의미가 있을 지 모르나, 그 외 사람들 보기에는 별반 차이가 없고, 그 의미도 찾을 수 없다고 보든 것이 타당할 것이다.[52] 남에 대해 함부로 판단 또는 정죄하는 것은 성경에서도 금지하는 것이며, 가톨릭에서는 고해성사의 대상이 되는 죄악에 속한다.[53] 여성 종교인들의 모임인 삼소회(三笑會)의 해외 성지순례 중에, 가톨릭&성공회 수녀들과 불교 비구니들 간에 작은 마찰이 일어난 사례도 있다.[54] 중산층, 부유층이 모여사는 동네에 친환경 농산물 매장이 있듯이 일부 본당에는 그것과 비슷한 우리농산물 매장이 있다.[55] 사실 낙태 반대와 사형제 폐지를 보수적이라고 규정하는 것에 대해서도 논란의 여지는 있다.[56] 믿거나 말거나 이 문단 작성자도 장궤는 당연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가능한 한 천주교 서울대교구 혜화동 성당이나 이문동 성당 미사 참례를 위해 노력은 하지만, 문제 제기 방식에는 동의하기 어렵다.[57] 세속 지자체의 행정동과 비숫하게, 본당별로 관할 사목구역이 정해져있다.[58] 하지만 요즘 개신교 교회에서도 스마트폰으로 성경을 보는 경우가 많다. 물론 성경책을 들고 오는 걸 권장하지만.[59] 만약 신자인데 이 얘기를 처음 듣는다면, 예비자 교리 교육 해당 시간에 딴 생각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다.[60] 이 때문에 부모님이나 대부/대모가 세례성사 받을 때 선물로 주는 경우가 보통이다. 아니면 세례성사를 받으면서 받은 현금이나 성물방 쿠폰으로 성물을 사면서 같이 성경을 사거나.[61] 광복 직후 한국의 문맹 비율은 78%에 달했고, 아직도 연세 지긋하신 할머니들 중에는 한글을 몰라 뒤늦게라도 공부하는 분들이 있다.[62] 한국 보수 개신교의 반가톨릭 성향은 자생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미국 보수 개신교로부터 수입된 것이다. 현재 미국 가톨릭은 남침례교의 세례도 유효한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63] "그대가 받았던 세례가 유효하지 않다면, 나는 아무개 베드로(세례명)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 세례를 베풉니다."[64] 위 사례에서 든 미국 남침례교가 한국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지 의문이 듬.[65] 나무위키의 개종 문서 앞부분에도 간단히 언급되어 있다.[66] 예비자 교리 교육 과정을 거친 후에도 이런 생각을 바꾸지 못하는 경우가 상당히 있다. 물론 가톨릭 교회 내부에서도 이런 잘못을 지적하는 경우 마음의 상처를 받아 냉담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이를 시정하는데 미온적인 경우도 있다.[67]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불필요한 논란을 피하기 위해 이렇게 표현한다.[68] 가톨릭과 재림교회의 납세는 꽤 오래 된 일이다. 대한성공회가 납세하기 시작한 것은 2012년부터로 비교적 최근일이다.[69] 이를 뒷받침해주는 부분이 바로 대교구 설치에서 드러나는데, 서울을 제외한 지방 대교구를 대구와 광주로 설정한 이유가 정부 수립 이후 설치된 지방 고등법원 소재지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참고로 부산은 의외로 늦은 1987년, 대전은 1992년에 설치되었고 수원에 고등법원이 2019년에 설치될 예정이라고 한다. 물론 수원교구가 대교구로 승격되는 건 아니다. 부산과 대전도 아직 그대로인데… ㅠㅜ 이 와중에 광역시 소재지임에도 불구하고 고등법원이 없는 인천과 울산은 의문의 1패! [70] 중·고등학교 과정의 신학교를 소신학교, 대학·대학원 과정의 신학교를 대신학교라 한다. 사제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신학교를 졸업해야 한다. 연세 지긋하신 신부님들 중에는, 중·고등학교까지도 소신학교를 졸업하신 분들이 많다.[71] 이로서 한국 가톨릭에서 소신학교는 사라졌다. 대신 교구마다 예비 신학생 모임을 만들어, 대신학교 입학을 희망하는 남학생들 및 남자 청년들을 관리한다. 2010년대부터 동성고등학교에서는 예비 신학생 학급을 만들어 기숙사 생활을 시키고 기초 신학과 어학을 가르치는 등, 부분적으로 소신학교를 부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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