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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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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나무위키+유도.png   이 문서는 한국사의 고대국가 가야를 다루고 있습니다. 다른 뜻에 대한 내용은 가야(동음이의어)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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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의 6가야

금관가야
(금관국)

대가야
(반파국)

아라가야
(안라국)

소가야
(고자국)

고령가야
(불명)

성산가야
(벽진국)

기타 가야 제국

다라국

초팔국

비지국

탁순국

탁기탄국

문헌(삼국유사)에는 기록이 있으나 고고학적 실체는 불분명한 6가야 국가.

파일:gukjungbak_24.jpg

국립중앙박물관 지도의 가야 세력 범위.

공식 명칭

가야[1], 임나

위치

지금의 경남, 경북, 전남 일대

수도

연맹국별로 존재.

정치 체제

군주제

국성

국가 원수

(한기)[2]

언어

고대 한국어[3][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가야어 항목

종족

한민족[5]

종교

토착신앙 ➡️ 불교

존속 기간

? ~ 562년

금관국

? ~ 532년

안라국

? ~ 561년

반파국

? ~ 562년[6]

성립 이전

변한

멸망 이후

신라

1. 개요2. 명칭3. 제국설과 연맹설의 차이4. 역사와 특징
4.1. 주거4.2. 언어
5. 가야의 주요 구성국
5.1. 초기 구성국
5.1.1. 전기 가야5.1.2. 후기 가야
5.2. 삼국유사의 6가야5.3. 기타 가야 제국
5.3.1. 다라국(多羅國)5.3.2. 초팔국(草八國)5.3.3. 비자벌(比自火)5.3.4. 탁순국(卓淳國)
6. 유물7. 임나일본부설8. 트리비아9.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YTN 사이언스, 가야의 미스테리


삼한의 하나였던 변한에서 기원한 한반도 남부의 여러 국가의 총칭이다. 수백년이란 오랜 기간에 걸쳐 있는 만큼 소국들 간에 흥망성쇠가 계속되었다. <삼국유사>에는 6개의 나라가, <일본서기>에는 10개의 나라가,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24개 나라가 거론된다.

가야 안에서 전기에는 김해시금관국이, 후기에는 고령군반파국이 주도권을 잡고 있었으나[7] 이는 여럿 중 대표적인 세력 정도의 지위였다. 차차 중앙 집권화된 광범위한 고대 영역국가로 발전한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과 달리 멸망할 때까지 도시를 초월한 하나의 통일된 정치 단위를 이룬 적이 없었다. 때문에 이전 명칭인 변한 시절과 실질적으로 구분하기는 어렵다. 때문에 변한 = 가야로 보아도 무방하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따르면, 진한(신라) 지역과는 언어, 법속, 의식주가 모두 똑같고 단 제사 풍속만 다르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고학적으로도 이 두 지역이 뚜렷하게 구분되는 부분은 그다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가야와 나라가 합쳐진 이후 신라 귀족과 같은 진골 골품을 준 것이나 삼국 통일 이후에도 9서당 10정이나 9주 5소경을 나눈 기준 등을 보면 고구려계, 백제계, '가야를 포함한 신라계' 크게 세 집단으로 통일신라인을 나눠 구분하고 있는데, 이를 봐선 낙동강 동안의 원신라인들도 옛 가야계와 토박이 신라계를 특별히 구분하려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고고학적으로 볼 때 김해 금관국을 중심으로 2세기경에 발전하기 시작하여 3세기에 무역으로 많은 부를 누렸지만, 광개토대왕의 남정 때 타격을 받았다. 이후 5세기경에 반파국(대가야)을 중심으로 지금의 호남 동부 일부까지 진출하며 중흥하지만 5세기 후반 이후에는 백제신라를 계속 때려주던 고구려도 내분과 돌궐의 침입으로 쇠약해지고, 혼란기를 수습하고 정신을 차린 두 나라의 사이에 끼고 체급차에 밀려 결국은 하나하나 신라항복 또는 흡수되었다.[8] 6세기 들어 백제 성왕이 가야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노력했던 적도 있었지만 관산성 전투(554년)에서 백제가 신라에 대패하면서 가야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했고, 이를 회복하기 위해 562년 왜와 연합하여 신라를 침공했으나, 오히려 이를 계기로 신라 진흥왕이 가야 전지역을 완전 병합하게 되었다. 사실 가야 세력권의 서부 일부[9]는 백제가 차지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가야에서도 변방 일부라 크게 주목은 받지 못하는 편이다.[10]

진한의 소국들과 마찬가지로 가야의 소국들 역시 신라에 하나하나 병합될 때 신라의 유화 정책에 의해 기존 지위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일례로 김유신의 선조 집안인 금관 가야의 왕족들은 신라에 병합되고 나서도 구형왕에게 김해를 식읍으로 주고 왕족에 버금가는 지위(진골)를 유지할 수 있었다. 신라에 흡수된 뒤에도 우륵, 강수, 김유신 가문, 진경대사 등 여러 가야계 인물들이 신라에서 활약했다.

2. 명칭[편집]

현대에는 대표적인 명칭으로 가야(伽倻)로 알려져 있지만 가야가 존속했던 시대는 아직 한화(漢化)가 거의 되지 않은 시대라 한자 표기가 고정적으로 정착하지 않았고, 때문에 여러 기록에는 고대 한국어 표현을 들리는 대로 다르게 음차한 것으로 추정되는 수많은 비슷한 명칭이 등장한다. 한자만 다른 가야들, 가량, 가라, 가락, 가기, 구야, 하라, 임나(任那) 등 다양하다.

가장 널리 쓰이는 '가야'는 현대에는 '伽倻' 한자표기가 가장 보편적인데, 국어사전에도 이 표기로 올라와있고 가야 명칭이 파생된 가야금, 가야산, 가야동 같은 지명들도 거의 저 한자 표기를 쓰지만 정작 이 한자 표기는 원사료로서의 가치가 없는 조선시대 이후부터 쓰이기 시작한 표기다. 삼국사기는 주로 '加耶'로, 삼국유사는 '伽耶'로 표기했다.[11]

여러 명칭 중 임나라는 명칭은 한국 기록보다 일본 기록에서 훨씬 많이 나오고 그 유명한 임나일본부설 때문에 현대 한국에서 이미지가 나빠졌지만, "임나" 역시 원래 가야의 한 구성국, 더 나아가 가야지역 일대를 지칭하는 단어 중 하나로 추정된다. 한국계 고문헌과 금석문에도 임나라는 단어가 조금씩 나타난다.

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
뒤를 급히 쫓아 임나가라(任那加羅) 종발성(從拔城)에 이르렀다.


광개토왕릉비


王驚喜恨相見之晩問其姓名對曰臣夲任那加良人名字頭王曰見卿頭骨可稱強首先生使製迴謝
왕이 놀라고 기뻐하며 그를 늦게 만난 것을 유감스러워 하였다. 그 성명을 물으니 “신은 본래 임나가량(任那加良) 사람으로 이름은 우두(牛頭)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왕이 “그대의 머리뼈를 보니 강수선생(強首先生)이라고 부를 만하다.”고 하였다.


삼국사기』 열전 강수


大師諱審希俗姓新金氏其先任那王族. 草拔聖枝每苦隣兵投於我國.
대사의 이름은 심희요, 속성은 김씨이니, 그 선조는 임나(任那)의 왕족이다. 풀에서 성스러운 가지를 뽑았으나 이웃 나라의 침략에 괴로워하다가 우리 나라에 투항하였다.


「진경대사탑비문」


일본서기에 임나의 북쪽이 바다로 막혀있다는 기록도 있는데 지금의 경상도 서부 일대 위주였던 가야에 북쪽 바다로 볼 만한 지형은 전혀 없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임나가 대마도에 있으며, 고대 한국의 국가들이 대마도를 점령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六十五年秋七月 任那國遣蘇那曷叱知 令朝貢也 任那者 去筑紫國二千餘里 北阻海以在鷄林之西南
65년 가을 7월 임나국이 소나갈길지를 보내 조공하였다. 임나는 축자국에서 2,000여리 떨어져 있고 북쪽은 바다로 막혀 있으며 계림(신라)의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일본서기》 숭신 천황 65년


현대에는 금관 가야, 대가야, 아라 가야 등으로 알려졌지만 고대에는 그렇지 않았으며, 고려 태조 왕건이 가야 지역 일대 호족들에게 XX 가야라는 명칭을 부여하여 옛 가야 시대 이름인 양 와전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다.

5.가야
가락기 찬에 이르기를
"한줄기 붉은 끈이 드리워지며 / 둥근 달 여섯 개가 떨어졌네. / 다섯은 각기 제 고을로 돌아가 고/ 하나가 이 성에 머물렀네"
라고 했다. 그 하나가 수로왕이 되고 나머지 다섯은 각기 5가야의 임금이 되었으니, 금관국이 이 다섯 가운데 들어가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본조의 사략에는 금관까지 아울러 그 수에 넣고 왕명을 기록했으니 잘못된 것이다.
아라 가야와 고령 가야와 대가야와 성산 가야와 소가야다 .또 본조 사략에는 이렇게 기록되었다.
"태조 천복 5년 경자(940년)에 다섯 가야의 이름을 고쳐 1은 금관, 2는 고령, 3은 비화로, 나머지 둘은 아라와 성산으로 했다.||


즉 당시에는 'XX 가야'가 아닌 'XX', 'XX국'이라는 명칭을 썼다는 것. 그 이름에 대해서는 아직 고정된 한자표기가 통용되지 않았던 시기라 삼국유사, 일본서기, 삼국지 위지 동이전 등의 중국 역사서들에 각각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다르게 등장한다. 그러나 광개토대왕릉비에서도 '임나가라'라고 표기하고 있는 것을 보면 당시에도 XX 가야라는 명칭이 XX국이라는 명칭과 함께 통용되었을 수도 있다.[*

가야라는 말의 어원에 대해서는 한국사 다른 왕조의 이름도 거의 그렇듯이 정설은 없다.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은 본인의 저서 강역고에서 '가나(駕那)'가 기원이고 이는 가야 사람들이 끝이 뾰족한 고깔을 쓰고 다닌 데서 유래한 말이고 이를 중국인들이 삼국지를 쓸 때 변한(弁韓) 또는 변진(弁辰)으로 쓴 것은 그 모습을 형용한 것이라고 했다. 이후 한치윤 등 많은 실학자들이 이 견해를 따랐고 일본의 아유가이도 가야가 갈(冠弁)에 기원을 둔다고 같은 견해를 보였다. 일제강점기의 학자 이마니시 류는 '간나라'를 어원으로 추정했는데 가야 지역에서 간은 '干', '旱', '韓'으로도 표시하는 말로서 '神', '上', '大'의 뜻을 가지므로 간나라는 신의 나라, 또는 큰 나라라는 뜻이라고 했다. 안재홍은 가야 국가들이 낙동강변에 있었으므로 '가람(江)'이라는 말이 기원이라 추정하기도 했고, 최남선겨레라는 말과의 연관성을 주장했다.

3. 제국설과 연맹설의 차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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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맹설에 근거하여 제작된 가야의 지도.

가야 제국이지만, '황제'의 제국(帝國)이 아니라 '여러 나라'라는 의미의 제국(諸國)이다. 가야 에미리트 주로 가야 연맹[12]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위치상으로는 가야산 이남과 낙동강 서쪽으로 현재의 경상남도, 경상북도 남서부 일대가 이에 해당된다. 그런데 고고학적으로 최대 영역은 전라도 동부 일부(대략 소백 산맥까지)까지로 추정된다. 7차 교육 과정의 일부 고교 국사 교과서에도 반영되어 낙동강 서부의 경상도 수준으로 나타난 지도보다 많이 확장되었다. 전라북도 남원시, 전라남도 여수시 등지에서도 고령계 반파국 유물이 나왔는데 이는 후대의 대가야가 백제가 개로왕 피살과 웅진 천도 등 혼란한 틈을 타 차지한 것.

지금까지 가야의 정치 체제로 이병도 교수가 처음 주창한 '연맹 왕국설'이 정설이었다. 여러 작은 나라들이 외부와 공동 대응하는 연합체 정도로 여겨졌다. 하지만 2007년 이후에는 '가야 제국(諸國)설' 쪽으로 정설이 변경되고 있다. 이 학설에 따르면 가야는 여러 소국들이 연맹 형태로 연결된 정치체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고 그냥 이 지역에 속하는 서로 남남인 소국들을 총칭하는 이름일 뿐이라는 것. 장기간의 연맹 체계는 불가능하다는 점과 연맹 관계를 뒷받침할 근거가 부족하다는 점을 이유로 등장한 학설이다. 1990년대 이후 고고학적 발견의 진전으로 서서히 학계의 주도권을 장악해 나가고 있다.

2017년 현재 역사학계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고대 사학계, 고고학계에서 연맹설은 사실상 폐기되었다. 다만 편의상 금관국이 잘 나가는 앞 시기를 전기 가야, 반파국이 잘 나가는 시기를 후기 가야로 구분하는 호칭은 계속해서 남아있다. AD 400년을 전후하여 고구려군의 공격으로 금관국이 쇠퇴하였다고 보는데, 그 이전을 전기 가야, 이후를 후기 가야로 칭한다.

가야가 소국들로 이루어진 가야 제국이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가야가 소국들이고 일본은 킨키에 강력한 중앙 집권 국가가 있다고 주장한다. 일본서기에선 임나(가야)는 일본 관리가 파견되는 번국(속국)으로 나오며 일본서기를 읽으면 매우 가야를 천하게 보고 능욕하듯이 쓴 기사들도 있을 정도이다.

4. 역사와 특징[편집]

  •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변진전에 처음 등장하며, 신라 등의 주변국에서는 이들 나라를 통틀어 가야(加耶) 혹은 가라(加羅)라고 불렀던 듯 하나, 가야는 본래 가락국(駕洛國), 즉 금관국(金官國: 지금의 김해)의 이름이었음이 확인되고 있다. 김해의 가야국이 오랫동안 맹주격인 나라로 있으면서 영향권 전체를 가야라고 부르게 된 것이고, 나중에 고령이 맹주 역할을 가져가면서 가야라는 대표적인 이름마저 가져가고 후기가야 시기 김해에 남은 나라는 금관국 등의 다른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는 것. 참고로 일본어에는 조선이나 한국 등의 한반도 국가를 의미하는 한자인 한(韓)을 から(카라)로 부르는 독법이 있다. 한자의 뜻을 떠나 발음으로만 따진다면, 이를 통해 고대 일본인들이 가야와 한(韓)을 동일시했거나 적어도 연관이 깊은 것으로 간주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 일본에서는 이 지역을 통틀어 미마나(任那, 임나)라 부르기도 했다. 임나일본부설 때문에 임나란 말도 한국에서는 금기시 되는 것 같지만, 임나 자체는 단순한 지역 명으로 추정된다. 관련되어, 임나가 대마도 등이었다는 설도 있다.

  • 천년 전 가야의 주요 세력권이었던 김해 평야는 당시 바다와 많은 섬으로 된 다도해였다고 한다.[13] 배후의 산지에서 나는 철과 바다와 인접한 지역적 특성 탓에 가야인들은 손쉽게 철을 중국 군현부터 일본열도까지 각지로 수출할 수 있었다.

  • 가야의 유적 중에서 대표적인 것으로 제 공정이 이루어졌던 유적이 있다. 이것은 동북아에서 가장 오래된 모든 제철 과정이 포함된 유적이다. 또한 철이 화폐로 사용되고 중국, 일본 등지에서마저 철을 사러 오는 등 현재의 듣보잡 기믹과는 다른 면모를 보여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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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철을 수출했고 철기를 다량으로 만들 수 있었다는 것은 군사력과 경제력이 모두 상당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철을 낙랑군에 팔아 경제력과 군사력을 유지하고 중국으로부터 선진 문물을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중국을 통일한 서진팔왕의 난영가의 난 콤보로 매우 혼란스러워지고 낙랑군과의 관계가 끊어지다시피 하자 고구려미천왕은 낙랑군을 공격하여 313년에 낙랑군과 314년에 대방군을 멸망시키고 자국 영토로 편입했다. 철을 사가던 낙랑군이 멸망하자 가야의 철 수출이 막힘과 더불어 가야가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는 통로도 없어져 결국 이 이후로 계속 쇠락하게 되었다.

  • 풍습으로는 어린 아이가 출생하면 돌로 그 머리를 눌러서 납작하게 만드는 풍습이 있었다.[14] 편두 항목 참조. 또한 와 가까운 지역이기 때문인지 남녀가 문신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삼국지).

  • 고분이 제법 많이 발견된다. 창녕 송현동 고분군에서 발견된 순장된 시녀로 추측되는 여자의 경우엔 152cm에 21인치이다. 키 작은 여성으로 곧이 곧대로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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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담이지만 공식적으로 한국사 최초로 불교를 들인 나라이다.[15] 그래도 공식적인 기록으로만 따져도 가장 늦게 잡아도 고구려, 백제 다음으로 한국사에서 불교를 정식으로 수용한 세 번째 나라다. 질지왕 시절이던 452년에 허황옥의 명복을 빌고자 왕후사라는 절을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때 당시 신라이차돈의 순교가 일어나기 전이다. 그리고 왕후사를 건설했다는 기록이기 때문에 불교를 수용한 건 최소 그 이전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4.1. 주거[편집]

수로왕이 가야를 건국한 이후 5세기까지 기와집이 없었다.[16] 실제 가야의 대부분 거주지는 아래처럼 생긴 초가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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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도 초가집에서 산 만큼 평민들의 주거 역시 그리 발달하지는 않았다. 땅을 파고 들어가 벽 없이 지붕만 덮고 사는 수혈 가옥[17]과 기둥으로 들어올려진 고상 가옥을 같이 만들고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진서(晉書)>의 <동이전(東夷傳) 변진(弁辰)조>에 "여름에는 소거하고 겨울에는 혈처한다(夏則巢居冬則穴處)"라는 글이 있어 소거라는 말이 고상 주거함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짐작되며, 실제로 가야 지방에서는 고상식 창고 건물 모양의 집모양 토기(가형 토기)가 발굴되었다.

4세기 경의 가형 토기

사실 삼국 시대 초기에는 기와라는 것은 새로운 것이었다. 가야에서 기와집이 본격적으로 들어선 것은 가야 말기부터다. 김해, 고령 등에서는 가야 후기의 기와들이 나왔고 특히 고령군에서 가야의 대궁이 발견되면서 동시에 다량의 기와들이 출토되기도 했다.

4.2. 언어[편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가야어 항목

가야 제국(諸國)이 위치했던 낙동강 하류는 본래 변한(弁韓) 12국이 있었던 곳으로, 그 언어에 관한 주된 자료로는 ‘伽倻·加耶’·‘加羅’·‘駕洛’ 등으로 표기된 국명을 비롯한 고유명사들을 들 수 있다. 하지만 기본적인 자료의 부족으로 연구를 하기 힘든게 현실이다.

5. 가야의 주요 구성국[편집]

5.1. 초기 구성국[편집]

변진도 12개국으로 되어 있다. 또 여러 작은 별읍이 있어서 제각기 거수(渠帥)가 있다. (그 중에서) 세력이 큰 사람은 신지라 하고, 그 다음은 험측(險側)이 있고, 다음은 번예(樊濊)가 있고, 그 다음은 살해(殺奚)가 있고, 다음에는 읍차(邑借)가 있다. 이저국·불사국·변진미리미동국·변진접도국·근기국·난미리미동국·변진고자미동국·변진고순시국·염해국·변진반로국·변진악노국·군미국(변군미국)·변진미오사마국·여담국·변진감로국·호로국·주선국(마연국)·변진구사국·변진주조마국·변진안사국(마연국)·변진독로국·사로국·우유국, 이니 '번', '진한'을 합쳐 이십 사개국이다. 이 중에 큰 나라는 4천 ~ 5천호나 되고, 작은 나라는 6백 ~ 7백호가 되어 총 호수가 45만호가 된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변진조

위의 기록에 따르면 변진 지역에는 24개 국가가 있었던 듯 보이나, 개중에 '사로국'(신라) 등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볼때 진한의 국가들까지 한꺼번에 센 듯 하다. 일반적으로 앞에 변진이 붙은 12개 국이 초기의 가야로 추정된다.

파일:attachment/jungigaya.png

5.1.1. 전기 가야[편집]

김해 금관국(금관 가야) 중심이었던 4세기 이전의 가야 연맹.

명칭

현재 지명

알려진 이름

변진미리미동국(弁辰彌離彌東國)

경상남도 밀양시

변진접도국(弁辰接塗國)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읍

변진고자미동국(弁辰古資彌東國

경상남도 고성군 고성면

소가야

변진고순시국(弁辰古淳是國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변진반로국(弁辰半路國)

경상북도 고령군 개진면

변진락노국(弁辰樂奴國)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변진미오야마국(弁辰彌烏邪馬國)

경상남도 창원시

변진감로국(弁辰甘路國)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

변진구야국(弁辰拘邪國)

경상남도 김해시

금관가야

변진주조마국(弁辰走漕馬國)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변진안야국(弁辰安邪國)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아라가야

변진독로국(弁辰瀆盧國)

부산광역시 동래구


파일:attachment/hugigaya.png
해당 지도의 참고자료 - <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 김태식 저서, 푸른 역사, 2002년. 위의 자료도 똑같다.

5.1.2. 후기 가야[편집]

고령 반파국(대가야) 중심이었던 5세기 이후의 가야 연맹. [18]

명칭

현재 지명

알려진 이름

가라국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안라국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아라가야

가이기국

경상남도 의령군 부림면

다라국

경상남도 합천군 쌍책면[19]

졸마국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고차국

경상남도 고성군 고성읍

소가야

자타국

경상남도 진주시

산반하국

경상남도 합천군 초계면

걸손국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임례국

경상남도 의령군 의령읍

탁순국

경상남도 창원시

탁기탄국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 (+ 밀양?)

남가라국

경상남도 김해시

금관 가야

5.2. 삼국유사의 6가야[편집]

삼국유사에 언급된 6가야가 가장 유명하지만, 정작 이 중 고령가야, 성산가야 등은 현재는 가야가 아닌 것으로 보고 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먼 훗날인 후삼국시대 지방 호족들이 반신라 기치를 내걸면서 몇몇 영남 지역의 호족들은 가야의 후손임을 기치로 내걸었는데, 그것이 고려 초에 6가야로 명칭이 굳어진 것을 일연이 삼국유사에 기록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육가야조이고, 가야 시조를 논할 때 6개의 알에서 6명의 알, 6개의 가야라고 하는데 어째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성산 가야까지 7가야이다(...).

그리고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가야의 범위를 특정하고 있는데, 가야산 이남, 낙동강 서쪽으로 한정하고 있어, 당장 육가야조랑 충돌하고 있다. 왜냐하면 가야산 이북에 성산 가야, 고령 가야 그리고 낙동강 동쪽의 비화 가야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 현재는 가락국기에 나오는 가야의 영역 범위는 특정 시점, 즉 6세기 중엽의 가야 영역을 나타낸 것으로 보고 있다. 애초에 삼국유사 자체가 관찬 정사도 아니고, 엄격한 사료 비판을 추구하는 사서가 아님을 유의하자.

현재 알려진 것으로 삼국유사의 6가야 중 금관 가야, 소가야, 비화 가야, 대가야, 아라 가야는 가야 계통의 국가가 맞다. 성주(성산 가야), 상주(고령 가야)에 있던 소국들은 일찍부터 경주에서 시작한 신라의 세력권에 편입되어 가야로 불린 일도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위에서 말했다시피 나말여초 이 지역 호족이 신라에 대항하여 가야를 참칭하면서 삼국유사에는 6가야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이런 이름들은 <삼국유사> 가락국기의 가락국 수로왕 건국 신화에 덧붙여진 6란(六卵) 설화에 덧붙여진 것인데, 그 6가야의 개념은 신라 말 고려 초의 혼란기에 후고구려나 후백제와 같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므로 '무슨 가야' 형태의 국명은, 그들이 소국으로 존재할 당시의 국명이 아니라, 옛날에 가야연맹 중의 하나인 금관국(金官國), 아라국(阿羅國), 고동람국(古冬攬國), 성산국(星山國,) 비화국(非火國)이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신라 말 고려 초의 명칭이다. (http://tour.gimhae.go.kr/08history/09_01.jsp)

5.2.1. 금관국(구야국, 금관가야)[편집]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시에 있었던 국가. 항목 참고.

시조는 김수로왕[20]이다. 4세기 이전에는 명실상부한 변한-가야의 으뜸 국가로, 한때 경주-울산 권역을 중심으로 발전한 사로국(신라)과도 어깨를 나란히 했던 국가. 2세기 ~ 4세기 낙동강 하구의 매매를 통해 부를 축적했고 이를 통해 가야에 지배력을 행사할 만큼 국력이 신장된 것으로 추정된다.[21]

그러나 400년경 광개토대왕의 남정으로 큰 타격을 받아서 멸망까지는 아니지만 국력이 크게 쇠퇴했다. 이후 가야의 주도권은 낙동강 상류 내륙의 반파국으로 넘어가게 된다. 6세기 초에는 금관국 왕이 신라의 수도 경주에 입궐하는 등 신라의 영향권 아래에 있다가 531년경 일본서기에 기록된 '혼인동맹 결렬 사건'으로 인해 대가야의 통제력이 흔들리고, 금관국과 탁순국 등 신라와 인접한 소국은 더이상 신라의 압박을 이기지 못해 532년 마침내 금관국 마지막 왕인 구형왕이 신라에 항복하면서 병합되었다.

2세기 ~ 3세기에는 구야국으로, 4세기 ~ 5세기에는 가라, 임나, 수내라, 소내라[22] 등으로 불린 것으로 추정되며, 삼국사기에서 금관국이라고 하였다. 금관국은 주로 4세기 이후부터 멸망 이전까지 사용된 이름으로 보이며, '가라'가 고령 반파국을 가리키는 명칭이 된 이후 남쪽의 가라라고 해서 '남가라'라고 칭해진 것으로도 보인다. 가야 후기에 반파국이 주도권을 잡은 뒤에도 이진아시 신화나 '가라'(반파국) - '남가라'(금관국) 등의 이름으로 보아 다른 가야계 국가들과 금관국과의 연결 고리는 꾸준히 강조되었다. 이것으로 보아 몰락한 뒤에도 '원래 맹주'로서 한동안 가야 국가들 중에서는 무언가 주변에 어필하는 힘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 왕 구형왕(김구해)은 김유신의 증조 할아버지(김구해 - 김무력 - 김서현 - 김유신)로 금관국 왕족은 '신김씨'로서 신라의 주요 귀족가문으로 정착한다.

5.2.2. 반파국(대가야)[편집]

지금의 경상북도 고령군에 있었던 국가. 항목 참고. 흔히 대가야로 알려진 국가. 삼국지』서 동이전의 '변진반로국'을 이은 국가로 생각되나 확실하지는 않다. 전기 가야 시기에는 여러 소국 중 하나 정도의 위상이었지만 5세기 이후 '가라'라는 대표성있는 이름을 금관국에서 탈취해 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 때문에 금관국은 이 시기에 대한 일본서기 기록 등에서 '남가라'로 나타난다.

그전에도 고령에는 소국이 있었지만 5세기 들어 성장하기 시작하여 5세기 후반에는 백제가 고구려에 털리는 혼란기인 틈을 타서 지금의 전남 동부 산지와 섬진강 일대, 광양만 앞바다까지 진출하고, 가야 일대 대부분 지역의 주도권을 잡은 것으로 보이나,[23] 고구려가 내전과 돌궐과의 싸움으로 전성기가 끝나고 다시 백제가 국세를 회복하여 섬진강 일대로 압박을 가해오고 6세기 후반 백제와 신라의 힘싸움 사이에 줄타기 외교로 버티다가 550년대에는 백제 편을 들다가 관산성 전투에서 신라에게 백제와 함께 세트로 깨지고, 결국 이사부, 사다함이 이끄는 신라군의 공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562년 멸망한다. 이 나라가 신라에 정복되는 서기 562년을 일반적으로 '가야'가 완전히 소멸한 해로 파악한다.[24] 고령에는 신라 정복 이후로도 기존 고령 스타일의 묘제가 규모는 줄지만 계속 남아있어 토착재지세력은 신라에서도 상당기간 귀족으로 유지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5.2.3. 안라국(아라가야)[편집]

安羅國. 현재의 함안군에 위치했으며, 흔히 아라가야(阿那加耶)로도 잘 알려져 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변진안야국(弁辰安邪國)이며, 《호태왕비문》과 《일본서기》에는 안라(安羅)로서 등장한다.(호태왕비의 안라인수병 구절을 안라국으로 파악한다면) 《삼국사기》와 《고려사》에선 《가락국기》를 인용해서 아시량국(阿尸良國)이라 기록했다.

특이하게 명칭 논란이 많은 곳으로, 아라가야, 안야국, 안라국 등이 대립하고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아나가야', 삼국유사 오가야조에는 아라가야, 일본서기에는 안라와 아라가 같이 사용되고 있다. 최근에는 원삼국시대 명칭은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기록 된 변진안라국에서 따와 안라국으로, 삼국시대에는 아라가야로 나눠 그 구분하는 경향도 있다.

반파국이 주도한 것으로 파악하는 후기 가야 때도 가야세계의 서남쪽에서 나름대로 독자적 권역을 유지했고, 안라왜신관을 통해 백제와 신라 사이에서 주권 보존을 위해 줄타기 외교를 시도했던 부분적 기록이 일본서기에서 간접적으로 전하기도 한다. 그러나 531년경에 백제가 안라에 성을 쌓을 정도로 백제 치하의 영향권에 놓이기도 하고, 나중에 관산성 전투로 백제가 깨진 이후 신라가 561년 이 지역에 왜군을 견제하기 위한 성을 쌓는 걸 봐서 그 시기를 전후해서 멸망한 것으로 보인다.

이곳 블로그 참조.

5.2.4. 벽진국(성산가야)[편집]

碧珍國. 지금의 경북 성주군에 위치하였던 국가로 비정되지만 고고학적으로는 가야에 속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김세기 (2014년), 고분 자료로 본 삼국 시대 성주 지역의 정치적 성격) 《삼국사기》에 "본피(本彼)"라 나오나, 여기에는 의문스러운 점이 있다. 특히나 신라 6부 중 하나인 진지부의 이름이 본피부라 6부의 기원을 진한 소국으로 보는 연구자들은 이 지역을 본피부의 기원으로 보고 있다.

5.2.5. 고자국(소가야)[편집]

古資國. 소가야로 알려져 있는 나라. 고사포국, 고자미동국, 고차국 등 여러 표기가 있다.

5.2.6. 고령가야[편집]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시 혹은 경상남도 진주시 일대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가야 연맹의 하나... 지만 6가야 중에서도 가장 실체가 알려지지 않은 나라이다. 고령가야 문서 참조.

5.3. 기타 가야 제국[편집]

5.3.1. 다라국(多羅國)[편집]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에 있던 나라. 합천군 쌍책면 다라리가 다라국의 이름을 이은 것으로 비정된다. 옆의 성산리에 있는 옥전 고분군이 다라국의 수장급 묘지로 생각된다. 초기에는 창녕과 연결되어 있었으나 후기에는 대가야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 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대가야 뿐만 아니라 백제, 신라와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옥전 고분군에서 대가야 토기와 위세품 뿐만 아니라 백제 관모나 신라 마구와 이식 등의 위세품도 출현하고 있어 독자적 세력을 유지하면서 이들과 균형적인 외교를 펼치고, 어느 세력에도 치우치지 않고 독자적 세력을 유지하면서 이권을 챙긴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스위스 같은 포지션... 이러한 현상은 합천 지역이 가야, 신라, 백제 이들 세력의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대가야로서는 합천 지역이 넘어가면 적이 코 앞에 들이 닥치는 것이기 때문에 국가의 흥망을 좌지우지 되기에 우호적 관계를 유지해야 하며 신라의 경우 가야를 넘어 전라도 동남부 지역의 백제 지역으로 진출 할 수 있는 전진 기지로 이용 할 수 있다. 백제는 가야를 정복함과 동시에 신라의 서진을 막을 수 있다. 이곳에는 대규모의 철 생산 유적 또한 존재하고 있어 가야의 경제,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 인 것으로 생각된다.

5.3.2. 초팔국(草八國)[편집]

지금의 합천군 초계면에 있던 나라. 역시 다라국과 비슷한 시기에 대가야의 영향권으로 들어간 것으로 생각된다. 신라 본기에는 원삼국시대에서도 극초기인 파사 이사금 때에 다벌국, 비지국과 함께 정복되었다고 쓰고 있으나, 후대의 일을 가져다 붙인 것으로 보이며 그 기년을 그대로 믿을 수 없다. 한국에서 보기 힘든 분지 지형으로 가히 미나스 티리스를 연상시킨다.

일본서기에는 다라국이 나오고 실제 다라리라는 지명이 지금도 내려와서 현재 고고학계는 이 지역 정치체를 다라국으로 보고 있다.

5.3.3. 비자벌(比自火)[편집]

또는 비지국.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 불사국(不斯國)"이란 이름으로 나타난다. 원삼국시대에는 후에 신라의 영역으로 편입되는 진한 소속이었으며, 신라와 가야 분화기에 가야로 넘어와 비화 가야로 불리다가 6세기 이후에는 완전히 신라로 편입된다. 《삼국사기》에는 비사벌(比斯伐), 《삼국유사》에는 비화(非火)[25], 《일본서기》신공기에는 "비자발(比自鉢/ひしほ/pisipo)이란 이름으로 나타난다.[26]

이를 종합해볼 때, 원래 음가는 순우리말 '빛'과 '벌', 즉 빛벌로 추정된다. 즉 빛의 벌판, 빛의 땅, 빛의 나라과 같은 뜻이라 할 수 있겟다.

지금의 경상남도 창녕군이며, 나라 자체는 듣보잡이긴 한데... 문헌 기록에 별로 드러나지 않았으나 문헌 기록과 다르게 고고학 자료로 본다면 듣보잡 수준은 아니다. 창녕 지역에는 지역군 별로 봉분 직경 20m ~ 30m[27] 최대 40m급[28] 이상의 고총 고분이 산재하고 있다. 창녕 박물관 뒤에 있는 교동 고분군만 가도 그 위세를 짐작 할 수 있다. 게다가 이 정도 급의 고분이 계성 고분군, 송현동 고분군, 영산 고분군 등 구역별로 존재하고 있다. 금동관 관모, 금제 이식, 환두 대도 등의 위세품과 토기류 등도 수백점에서 수천점 이상이 매납되었다. 현재의 고고학적 연구성과로는 신라가 가야를 정복하기 위한 전진 기지로써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창녕 지역에 많은 지원을 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신라 진흥왕이 정복한 뒤 창녕비를 세워 유명하다.

5.3.4. 탁순국(卓淳國)[편집]

<양직공도> 백제국사 전의 '탁국(卓國)'과 <일본서기>의 '탁순국(卓淳國)'이란 이름으로 등장한다. 녹순(㖨淳)이라고도 하는데, 녹과 탁이 통하는 것을 놓고 신공황후 신라 정벌 기사의 녹국과는 무슨 관계가 있느냐, 탁순 = 녹순 - 녹국 - 탁기탄 = 녹기탄의 관계는 어떻게 되느냐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1970년대까지는 '달구벌'의 음차라는 설이 주류를 차지하여 대구설이 득세하였으나, 최근에는 창원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고, 일각에서는 의령설을 제시하기도 한다. 아무튼 일본서기 기록의 정황상 가야지역에서도 신라와 가까운 동쪽에 위치한 소국으로 추정된다.

시조와 왕들은 알려져 있지 않다. 아리사등이 마지막 왕으로 추정되는데, 숭신 천황기의 '도노아아리사등'과의 관계 문제 등으로 인해 '고유 명사가 아니라 일반 관직명이 아니냐'는 논란도 있다. 4세기의 말금한기(末錦旱岐)를 군주로 보기도 하는데, 이는 가야의 군주명으로 '한기'가 쓰인 데서 유래한 것이다. 한편 '말금'을 '마립간' = '매금'과 통하는 것으로 보기도 하는데, 이 경우에는 가야의 군주를 일컫던 '한기'를 포함해 일반 군주 칭호만 두 개 이어지는 괴이한 칭호가 된다.

일본서기 신공기 46년(366년)기사에선 백제가 왜와 교류하기 위해 탁순국이 도와줬으면 한다라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고, 탁순국의 말금한기는 백제 사신에게 왜로 가는 길을 알려주고, 백제 사신의 말을 왜 사신에게 전해주기도 했다. 탁순 사람 과고를 보내어 왜국 사신의 시종을 백제에게 안내하기도 했다는 기사도 있고 심지어 신공기 49년(369)년 기사에서 탁순국이 왜군의 집결지 역할을 했다는 기사도 존재한다.

이런 것들로 보아 일본과 백제 사이에서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었지만, 백제와 신라가 강성해지자 백제와는 여러가지로 안 좋은 관계가 되어버린 것으로 보인다. 안라회의가 일어나게 된 배경을 보게 되면 아리사등이 친신라정책을 펼치던 대가야의 뜻을 거스르고 신라의 스파이들을 모두 내치는 것에서 시작하게 되었는데 이는 후기 가야 연맹에서 나름대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6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창원 반계동 고분군이 탁순국과 '관련' 되어 있다. 탁순의 중심 고분군으로 비정하기에는 유구의 크기나 유물의 부장량이 적다. 반계동 고분군 보다는 규모와 유물 부장면에서 탁월한 창원 가음정동 고분군이 탁순의 중심 고분군으로 설정 되는것이 옳다고 본다. 23호분에서는 고령 양식의 유개대부 장경호, 단추형 꼭지 뚜껑 단각고배 등이 출토되어 대가야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음을 알수 있고 25호분에서 쇠망치, 쇠집계 등의 철기들이 출토되어 금관국과 더불어 철기 생산의 요충지 였음을 알수 있다.

6. 유물[편집]

파일:external/www.newstown.co.kr/c_20041031_15238_21684.jpg
가야의 토기. 장인마다 만드는데 편차가 있었겠지만 사진속 형태의 토기는 대부분의 가야 문화권에서 발견되었고 가야를 통해 토기, 가마기술을 전파받은 일본의 스에키토기 또한 이와 흡사한 모양을 하고있다. 또한 신라토기와도 유사하다.


파일:attachment/gaya_gold.jpg
가야의 금 장식.


7. 임나일본부설[편집]

8. 트리비아[편집]

  • 현재 가야대학교가 금관 가야가 있었던 경상남도 김해시에 있다. 사실 대가야가 있었던 경상북도 고령군에 있는 대학교였는데 김해로 옮긴 것이다. 고령과 김해 둘 다 가야를 대표하는 양대 도시임을 감안하면 적절한 교명. 반면에 부산광역시가야동은 좀 애매한데 부산지역 자체가 전기가야 시절 김해의 영향권에 속하긴 했지만, 가야동 지역과 직접적인 연결점이 있는 건 또 아니다. 여담으로 다른 삼국시대 국가명 타이틀의 대학들은 대부분 원위치(?)에 있지 않다. 고구려대학이라던지 신라대학교 모두 원 위치에서는 떨어져 있다.[29]

  • 문재인 대통령2017년 6월 1일 청와대 수석 보좌관 회의에서 가야사 복원을 강조했다. 대통령이 공식적인 자리에서 특정 국가의 역사를 강조한 것은 보기 드문 사례다. 문재인 대통령은 가야사 복원이 영호남을 잇는 사업이라 했다.[30] 사실 가야사 복원 사업의 경우 참여 정부까지는 활발히 이루어진 편이었으나 보수 정권 들어 지지부진한 상태에 빠졌는데 이번 대통령의 언급으로 다시금 활발해질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기사

  • 가야사 관련해서 흥미로운 대립 구도가 있다. 바로 경북대학교 주보돈 교수와 부산대학교 신경철 명예 교수로 대표되는 가야사 해석 대립이다. 특히 주보돈 교수가 2017년 8월에 자신의 저서 가야사 새로 읽기를 통해 기존의 통설을 뒤엎는 학설을 주장했는데 여기에 따르면 가야사의 시작은 기존의 서기 42년에서 4세기 초 정도로 보고 있으며, 이전의 전기 가야의 중심이었던 구야국(금관국) 체제 때는 대체적으로 변한 사회의 모습을 띄고 있으며, 이후 4세기 초부터 서서히 변한 사회가 변화하면서 가야 연맹이 이루어졌다는 주장이다. 즉 가야의 중심은 줄곧 대가야로 보고 있는 것인데, 이에 대해 부산 대학교 신경철 명예 교수는 기고문을 통해 정면 반박하였다. [기고] 금관 가야는 변한 시대인가? 고령과 김해의 현재 행정구역이 각각 경북, 경남으로 갈리다보니 우연찮게도 지역구도적으로도 나뉜다.

    금관국 문서만 가도 알겠지만 매우 자세한 이야기가 쓰여져 있는데 어느 쪽이 맞다 틀리다를 따지기는 어렵지만 여러모로 가야사 연구가 문헌 자료의 절대 부족으로 인해 순수 사학만으로는 해석이 쉽지 않다. 반면 고고학 자료가 어느 정도 확보된 상황이지만 고고자료들은 문헌과 달리 스스로 설명하지 않고 정황증거로만 드러날 뿐이기 때문에 가야권, 특히 김해 대성동을 위시한 해석이 대학별로 형성된 소위 학파에 따라 나뉘어져 있는 상태이다.
    특히 신경철 교수를 비롯한 부산대 쪽의 금관국의 주도적 성장을 주안점에 두고 보는 입장에서는 주보돈 교수의 해석에 반론이 있을 수 밖에 없다. 꼭 그렇지 않더라도 지산동 73, 75호와 같은 이른 시기 대가야의 고분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같은 시기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 누적된 위계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맹주라는 표현에서 반론이 있을 수 밖에 없다.

9. 관련 문서[편집]

[1] 구야, 가라, 가락 등 당대 별칭도 있음.[2] 한기라는 가야 소국의 왕호가 《일본서기》에 등장함.[3] 마한어, 가야어[4] 영어 위키백과에서는 일본어족에 속할 수도 있다는 가설과 부여어족에 속할 수도 있다는 가설이 있다. 다만 가야와 무역하면서 거주하게 되었던 극소수 일본인들이나 예맥계, 부여계 이민들이 있었다면 이들의 영향으로 문화가 융화되면서 언어에도 영향이 조금 끼쳤을 가능성이 있다. 가야에서 쓰인 언어는 신라어와 같이 고대 한국어에 속했다.[5] 예맥족 등[6] 반로국 도설지왕 대 멸망 직후.[7] 기록에 따라서는 가야권 전체가 아니라 이 금관국이나 반파국만을 지칭할 때 가야(혹은 가라 등 여러 이칭)라고 부르는 경우도 많았다. 애초에 가야라는 명칭 자체가 김해 금관국의 초창기 명칭이었는데 금관국이 대표격 강국으로 군림하면서 의미가 확장된 것이다. 옛 기록에서는 대체로 가야라고 하면 2~4세기에는 김해를, 5~6세기에는 고령을 가야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8] 신라에게 항복한 금관국이나 흡수당한 대가야(반파국) 모두 당시 가야의 중심 세력이었다.[9] 전라도 동부 남원, 여수 등과 하동, 남해 등[10] 현대에 영호남 지역주의를 타파하자는 상징적 문구로 이 가야 서부 영역을 언급하는 경우가 있다.[11] 伽耶는 인도 불교의 성지인 부다가야(बोधगया, 佛陀伽耶) 표기의 영향을 받아 고려시대 승려들이 주로 사용했던 표기로 추정된다. 삼국유사의 저자가 승려 일연이기 때문. 숭유억불정책을 추진하던 조선시대에는 삼국유사를 인용할 때도 이 삼국유사의 불교 냄새 나는 伽耶 한자표기를 다른 한자로 고쳐 쓰기도 했다. 예를 들면 고려사 지리지 5가야조[12] 연맹일 경우 현재의 아랍 연맹과 비슷하다고 보면 될 듯하다.[13] 즉 지금의 부산광역시 강서구에 해당하는 낙동강 삼각주 지역은 대부분 바다에, 지금의 김해 시가지 근처까지 바다가 들어왔고 김해는 남해 바다와 접한 항구도시였다.[14] 진한에도 같은 기록이 있는데, 이 기록에 대해 청나라 건륭제는 <어제삼한정류(御製三韓訂謬)>라는 글을 직접 집필하여 "그 말은 도리에 맞지 않는 것으로 궤변을 늘어놓아 세상을 미혹하게 한 것으로 의심이 된다. 무릇 돌로 머리를 누르면 어른도 감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이 땅에 갓 태어난 아기를 돌로 눌러놓는다는 것은 실로 인정상 마땅치 않은 것이다.", "우리 나라의 옛 풍속에서는 아기가 태어나서 수일이 되면 요람에 두는데 반듯하게 오래 눕혀두면 뇌골이 저절로 평평하게 되어 머리 형태가 편두(扁頭)처럼 되었다."고 하며 만주족의 옛 풍속을 들어 반박했다. 첨언하자면 편두 항목에서 치누크 족이 편두를 하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돌이나 널빤지로 아기의 머리를 누른다기보다는 아이를 반듯하게 눕혀서 고정시키는 형태임을 알 수 있다.[15] 인도 아유타(아요디아) 국에서 함께 온 허황옥의 오빠가 불교를 함께 들였다는 이야기가 있고 관련 이야기도 있다.단, 허황옥의 인도 출신 자체부터 논란이 있고 이후 불교를 부각시키기 위해 각색했다는 주장도 많으니 공식적으로 받기는 힘들다. 그래서 비공식적이라고 적은 거고.... 그냥 야사 중 하나라고 생각하자.[16] MBC드라마 김수로의 화려한 궁궐백성들의 초가집은 고증이 잘못된 것이다. 드라마니 이 글을 참조하며 그러려니 하고 가볍게 무시해주자.[17] 가야 지역 고유의 주거 형태로 보이는 평면 형태가 타원형을 띄는 집[18] 고구려와 신라 연합군의 공격으로 해안 지역에 위치한 금관 가야가 약화됨으로써 내륙에 위치한 대가야가 그 대신 가야 연맹을 주도하게 된 것이 원인.[19] 여기에 합천 박물관이 있다. 홈페이지 : http://mus.hc.go.kr/main/[20] 김해 김씨의 시조[21] 후기 주도권을 잡은 대가야에는 금관국과 대가야의 시조가 본래 형제라는 건국 신화가 있는데 이는 금관국이 가야 일대에 영향력이 컸고, 몰락한 뒤에도 부잣집은 삼 년은 간다는 말처럼 가야권 안에서 상징적인 역사성을 인정받았으며, 동시에 후기에는 사실상 주도권이 대가야에게 넘어갔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22] 순우리말 나라에 해당하는 고대 한국어의 음차로 지금의 '김(金)'해 명칭과의 연관성을 추정하기도 한다.[23]안라국, 고자국, 쇠퇴했지만 명맥은 유지하던 금관국탁순국 등 남동쪽의 일부 나라들에는 고령계 토기가 거의 침투하지 못한 것을 봐서 반파국의 전성기에도 반파국은 내륙 소국들만 확실히 통제했고 먼 지역은 문헌기록상으로 약간의 영향력은 있었지만 거의 따로 놀았던 것으로 보인다.[24] 여러 가야계 소국의 멸망 기사가 하나하나 문헌에 남아있지는 않아서, 대가야가 딱 마지막으로 멸망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동네 대장격인 대가야가 어이없이 무너지면서 거의 비슷한 시기에 대거 항복해 정리되었을 가능성이 높다.[25] 비화가야라고도 불린다[26] 고대 일본어의 ハ행은 h음이 아니라 p음, 순음퇴화 이후에 지금의 음으로 변화했다.[27] 이전 문서에는 10m라고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시대에 직경 10m 정도는 아주 흔하다(...) 물론 창녕군은 영남 지역에서 가장 큰 고총군을 보유하고 있다[28] 낙동강 이동 지역에는 경주와 의성, 창녕 뿐이다. 고총의 크기 = 국력 혹은 정치력으로 완벽히 등치시킬 수 없지만, 최근의 연구성과는 고총과 국력, 묘주의 위계가 어느 정도 상관 관계가 있다는걸 말해주고 있어, 창녕 정치체, 즉 빛벌의 국력이 상당헀음을 알게한다.[29] 그래도 신라대학교는 신라 권역이긴 하다.[30] 백제는 주로 호남과 호서에 신라는 주로 영남에 영토를 가지고 있었는데(적어도 신라가 한강에 진출하기 전까지는) 반면 가야는 그 사이에 있었으니 뭐... 호남 동부 남원, 여수 등은 후기 가야의 전성기에 상당기간 영향력에 들기도 했고 고령 계열 유물이 많이 출토되기도 했다.